웨일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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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웨일스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하여 로마 시대, 중세 시대를 거쳐 근현대까지 이어진다. 선사 시대에는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가 거주했으며, 신석기 시대에는 농경 사회가 시작되어 거석 기념물이 건설되었다. 로마 시대에는 로마 제국에 정복되었고, 중세 시대에는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었다가 노르만족의 침략을 받았다. 1282년 잉글랜드에 정복된 이후 웨일스는 잉글랜드와 통합되었고, 1999년에는 웨일스 국민 의회가 설립되어 자치 정부가 수립되었다. 20세기에는 웨일스어의 지위가 향상되었고, 경제 구조의 변화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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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사 시대
웨일스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류 유해는 북웨일스의 엘위 강 계곡에 있는 본트뉴이드 구석기 유적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턱뼈로, 약 23만 년 전 구석기 시대에 해당한다.[1] 이후 사우스 펨브로크셔와 고어 반도 등 웨일스 여러 지역에서 구석기 시대 인류 유골이 발견되었다.[1] 영국은 간빙기 동안 오랫동안 인류가 방문했으며, 이는 약 30만 년 전 민델 빙하기의 간빙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최후 빙기인 약 2만 6천 년 전에서 2만 년 전 사이에는 웨일스 대부분이 빙상으로 덮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일스에는 적어도 2만 9천 년 전부터 현생 인류가 거주해 왔다.
켈트 브리튼의 청동기 시대 말기 또는 초기 철기 시대인 기원전 800년경, 오늘날의 웨일스 지역은 여러 켈트족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주요 부족들은 다음과 같다.
로마 제국의 지배가 끝난 후, 웨일스는 여러 개의 독립적인 켈트족 왕국으로 나뉘어 독자적인 역사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외부 세력, 특히 동쪽의 앵글로색슨족과 끊임없이 맞서며 웨일스 고유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간 중요한 과정이었다. 이후 노르만 정복의 영향력이 웨일스까지 미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파빌랜드의 붉은 여인은 1823년 사우스 웨일스 스완지 근처 고어 반도의 파빌랜드 석회암 동굴에서 발견된 인골로, 적철광으로 붉게 염색되어 있었다. 이름과 달리 이 유골은 상위 구석기 시대 말기인 약 3만 3천 년 전에 살았던 젊은 남성의 것이다. 발견 당시 파빌랜드 동굴은 빙상 바로 남쪽에 위치했으며, 당시 해수면은 지금보다 낮아 동굴은 내륙에 있었다. 이 유골은 서유럽에서 알려진 가장 오래된 의례적 매장으로 여겨지며, 상아와 조개 껍질로 만든 장신구, 매머드 두개골과 함께 발견되었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약 1만 2천 년 전에서 1만 년 전 사이부터 웨일스에 지속적인 인류 거주가 시작되었다. 이는 중석기 시대의 수렵 채집인들이 중앙 유럽에서 영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당시 해수면은 현재보다 훨씬 낮았다. 웨일스는 약 1만 250년 전에 빙하가 사라졌고,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울창한 숲으로 뒤덮였다. 빙하기 이후 해수면 상승으로 웨일스와 아일랜드가 분리되어 아일랜드 해가 형성되었고, 약 8천 년 전 무렵에는 영국 반도가 섬이 되었다. 기원전 8000년경 웨일스는 오늘날과 거의 같은 해안선을 갖추게 되었고, 소수의 중석기 시대 수렵 채집인들이 동굴이나 나무로 지은 집에서 살았다.
최초의 농경 사회는 기원전 4000년경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는 많은 거석 기념물 무덤이 건설되었는데, 특히 돌멘(크롬레흐)라 불리는 형태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는 앵글시 섬의 브린 켈리 두와 바클로디아드 어 가우레스, 펨브로크셔의 펜트르 이반, 글래모건 계곡의 팅킨스우드 매장실 등이 있다. 신석기 시대 초기(약 6천 년 전) 브리스톨 해협의 해수면은 오늘날보다 약 약 10.06m 낮았다.[1] 역사가 존 데이비스는 칸트레르 과엘로드의 침몰 이야기나, 웨일스와 아일랜드 사이의 바다가 더 좁고 얕았다는 ''마비노기온''의 이야기가 이 시기에 대한 오래된 민간 기억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2]
신석기 시대의 정착민들은 토착민들과 융화되면서 점차 수렵과 채집 위주의 유목 생활에서 벗어나 정착 농경 생활로 전환했다(약 6천 년 전 – 신석기 혁명 참조).[2][3] 이들은 숲을 개간하여 목초지를 만들고 땅을 경작했으며, 도자기 제작이나 직물 생산과 같은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켰다. 또한 약 5천 8백 년 전에서 5천 5백 년 전 사이에 펜트르 이반, 브린 켈리 두, 파크 콤 롱 케언과 같은 돌멘(크롬레흐)를 건설했다.
3. 고대
부족 이름 주요 거주 지역 오르도비스족 중부 웨일스에서 북서부 웨일스 데케앙글리족 북동부 웨일스, 북부 웨일스 실루레스족 남동부 웨일스, 중부 웨일스 데메타에족 남서부 웨일스
기원전 50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에는 동유럽에서 영국으로 켈트족의 두 번째 이주 물결이 있었다. 이들은 기존의 언덕 요새 안이나 근처에 돌로 만든 원형 가옥 정착지를 건설했으며, 이러한 형태의 주거는 로마 지배 이후까지 사용되었다. 로마 점령 기간 동안에는 린 반도(북서부 웨일스)에 아일랜드와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강가니족이라는 또 다른 켈트 브리튼 부족이 확인되기도 했다.
로마 제국의 웨일스 정복은 서기 48년에 시작되어 30년 만인 서기 78년에 완료되었으며, 로마의 지배는 383년까지 300년 이상 지속되었다. 로마의 침략에 맞선 가장 유명한 저항은 카투벨라우니족(오늘날의 에식스) 출신의 카라타쿠스가 이끌었다. 그는 로마군에게 패배한 후, 웨일스로 피신하여 실루레스족(오늘날의 몬머스셔)과 오르도비스족(북부 웨일스)과 함께 로마에 대항하는 전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결국 패배했고, 카라타쿠스는 로마에 넘겨졌다. 로마로 압송된 카라타쿠스는 황제 앞에서 연설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고, 사면받아 로마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로마의 웨일스 통치는 기본적으로 군사 점령의 성격을 띠었다. 다만, 사우스웨일스의 가워 반도 동쪽 남부 해안 지역은 예외적으로 로마화의 영향을 받았다. 로마인들은 웨일스에 카에르웬트와 카마던이라는 두 개의 주요 도시를 건설했는데, 모두 사우스웨일스에 위치했으며 로마의 키비타테스가 되었다. 웨일스 남서부의 데메타에족은 로마와의 충돌 없이 빠르게 평화를 맺은 것으로 보이며, 이들의 영토에는 요새나 도로가 거의 건설되지 않았다. 데메타에족은 로마 통치 하에서도 부족 이름과 영토를 유지한 유일한 웨일스 부족이었다.
웨일스는 금, 구리, 납 등 풍부한 광물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로마인들은 공학 기술을 이용하여 이를 대량으로 채굴했다. 아연과 은 같은 다른 금속들도 소량 추출되었다. 그러나 광산은 경제성이 떨어지면 버려졌고, 로마의 주요 경제 개발은 브리튼 남동부에 집중되어 웨일스에는 이렇다 할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이는 웨일스가 산업 발전에 필요한 자원의 조합을 갖추지 못했고, 숲이 우거지고 산이 많은 지형이 개발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로마 통치 기간 동안 라틴어가 공식 언어가 되었지만, 웨일스 사람들은 계속해서 고유 언어인 브리튼어를 사용했다. 로마화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상류층은 점차 스스로를 로마인으로 여기게 되었다. 특히 서기 212년 안토니누스 칙령으로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이 부여된 이후 이러한 경향이 강해졌다.[5]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 박해를 중단하면서 기독교가 웨일스 사회에 확산되기 시작했고, 이는 로마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5]
6세기 역사가 길다스를 비롯한 초기 기록들은 383년을 웨일스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언급한다.[6] 이 해에 로마 장군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황제가 되기 위해 브리튼에서 군대를 철수시켰고, 이후 골 지역에서 브리튼을 통치하며 현지 지도자들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이후 웨일스에서는 '막센 웰레디'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중심으로 한 여러 전설이 만들어졌다. 중세 웨일스의 여러 왕조는 자신들이 막센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로마 시대의 정통성을 계승하려 했다. 초기 웨일스 족보들은 막시무스를 여러 왕조의 시조이자 웨일스 민족의 아버지로 여기기도 했다.[6] 그는 브리튼을 떠난 지 약 500년 후인 9세기에 세워진 엘리세그 기둥에도 웨일스 왕의 조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웨일스의 15개 부족 목록에도 등장한다. 후대의 족보, 중세 시(예: ''마비노기온''), 연대기(''브리튼인의 역사'', ''캄브리아 연대기'') 등은 신화와 전설을 통해 막센 웰레디 외에도 성 헬레나, 콘스탄티누스 대제, 코엘 헨 등 로마 및 로마 이후 시대 인물들에게 웨일스 역사 속 역할을 부여했다.
4. 중세
중세 웨일스 역사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로마 제국 철수 이후부터 1066년 노르만 정복 이전까지의 초기(383년–1066년)로, 그위네드, 포위스, 데헤이바르스 등 여러 왕국들이 경쟁하고 협력하며 웨일스의 기틀을 다진 시기이다. 둘째는 전성기(1066년–1283년)로, 노르만족의 침입에 맞서 르웰린 압 여워스(르웰린 대왕)와 르웰린 압 그리피드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들이 등장하여 웨일스의 통합과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시기이다. 특히 르웰린 압 그리피드는 공식적으로 웨일스 공 칭호를 인정받기도 했다. 마지막 후기(1283년–1542년)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 의한 정복 이후 웨일스가 점차 잉글랜드의 정치 체제에 편입되는 과정이다. 오와인 글린두르의 대규모 봉기처럼 독립을 위한 저항이 있었으나, 결국 튜더 왕조 시대에 웨일스 법령을 통해 잉글랜드와의 완전한 법적 통합이 이루어졌다.
이 중세 시대는 웨일스가 독립적인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고 결국 잉글랜드에 통합되는 격동의 시기였으며, 오늘날 웨일스의 문화와 정체성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4. 1. 초기 (383년–1066년)
로마 제국 멸망 이후 400년은 웨일스 역사에서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시기이다.[5] 410년 로마 군대가 브리튼에서 철수하면서 다양한 브리튼 국가들은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 로마 군단의 철수 이후에도 로마의 영향력이 지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그위네드에서 발견된 비문으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위네드의 시민(''cives'')이자 치안 판사(''magistratus'')인 마글로스의 사촌인 칸티오릭스를 기념하고 있다.
서기 500년경, 웨일스가 될 땅은 앵글로색슨족의 지배에서 벗어나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었다.[5] 그위네드 왕국, 포위스 왕국, 디페드 왕국, 케레디기온 왕국, 글리위싱, 이스트라드 티위, 웬트 왕국이 독립적인 웨일스 계승 국가로 등장했다.[5] 디페드에서는 상당한 아일랜드의 식민화가 이루어졌으며, 이곳에는 많은 오검 문자 비석이 존재한다. 웨일스는 로마 시대에 기독교화되었으며, 성자 시대 (약 500–700년)는 성 다윗, 일투드, 성 테일로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전국에 수도원 정착지가 건설되면서 특징지어졌다.
브리튼에서 로마의 지배 종식 (서기 410년) 이후, 브리튼 동부와 남동부 저지대는 앵글로색슨족으로 알려진 다양한 게르만족에게 점령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앵글로색슨족의 문화적 지배가 브리튼인들이 불리한 입장에 놓이는 사회적 조건 때문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는 초기 앵글로색슨족의 브리튼 이주가 500년에서 550년 사이에 주춤했음을 보여주며, 이는 넨니우스가 아서 왕의 업적으로 돌린 바돈 언덕 전투에서의 켈트족 브리튼인의 승리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7] 웨일스의 켈트계 주민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앵글로색슨 민족에게 정복되지는 않았다. 영국의 아서 왕 전설은 앵글로색슨에 저항한 브리튼족 왕의 이야기로 여겨진다.
웨일스 내에서는 북서부의 그위네드 왕국과 동부의 포위스 왕국이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다. 그위네드는 6세기와 7세기에 마엘군 그위네드 (서기 547년 사망)와 카드왈론 압 카드판 (서기 634/5년 사망)과 같은 통치자 아래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카드왈론은 머시아의 펜다와 동맹하여 군대를 노섬브리아 왕국까지 이끌고 한동안 그 지역을 통제하기도 했다. 카드왈론 사후, 그의 계승자 카다파엘 카도메드 압 킨페드 역시 펜다와 동맹하여 노섬브리아에 맞섰으나, 이후 그위네드를 포함한 웨일스 왕국들은 점차 확장하는 머시아 세력에 대한 방어에 주력하게 되었다.
616년 체스터 전투에서 포위스와 다른 브리튼 왕국의 군대는 에설프리드 휘하의 노섬브리아에게 패배했으며, 포위스의 셀리프 압 키난 왕이 전사했다. 이 전투는 웨일스와 현재 남부 스코틀랜드 및 잉글랜드 북부의 브리튼어 사용 지역이었던 헨 오글레드 ("옛 북부") 왕국들(레게드,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 엘메트, 고도딘) 사이의 육상 연결을 완전히 끊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여겨진다. 8세기부터 웨일스는 브리튼에 남은 세 켈트족 브리튼인 지역 중 가장 큰 지역이 되었으며, 나머지 두 곳은 헨 오글레드와 콘월이었다.
6세기와 7세기 초 현재의 웨스트 미들랜즈 지역 상당 부분을 머시아에게 빼앗긴 후, 7세기 후반에 세력을 회복한 포위스는 머시아의 추가적인 진격을 저지했다. 머시아의 에설발드는 새로 획득한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왓의 제방을 건설했다. 존 데이비스에 따르면, 이는 포위스의 엘리세드 압 그윌로그 왕의 동의 하에 건설되었을 수 있으며, 이 경계는 세번 강 계곡에서 디 강 어귀까지 북쪽으로 뻗어 오스웨스트리를 포위스 영토로 인정했을 가능성이 있다.[8] 그러나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제방의 건설 시기가 이보다 300년 앞설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로마 시대 이후 로크세터의 통치자들이 건설했다는 다른 이론도 존재한다.[9] 이후 머시아의 오파 왕은 더 큰 규모의 토목 공사인 오파의 제방 (Clawdd Offa|클라우드 오파cym)을 건설했다. 데이비스는 시릴 폭스의 연구를 인용하며, 제방 건설 계획 시 포위스와 웬트 왕들과의 협의가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트렐리스탄 근처 롱 마운틴에서는 제방이 동쪽으로 휘어져 비옥한 경사면을 웨일스 측에 남겨두었고, 리와본 근처에서는 카델 압 브로흐웰이 페니가덴 요새를 계속 소유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웬트의 경우, 오파는 제방을 "협곡의 동쪽 능선에 건설하여 와이 강과 그 통행이 웬트 왕국에 속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했다고 분석했다.[8] 그러나 제방의 길이와 목적에 대한 폭스의 해석은 최근 연구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
잉글랜드 정착지로 인해 상실된 브리튼 남부와 동부 지역은 웨일스어로 Lloegyr|흘로이그르wlm (현대 웨일스어 Lloegr|흘로이그르cym)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원래 머시아 왕국을 지칭하다가 점차 잉글랜드 전체를 가리키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을 지배한 게르만 부족들은 "색슨족"을 의미하는 Saeson|사이손cym으로 불렸다. 반면, 앵글로색슨족은 로마-브리튼인을 '로마화된 이방인' 또는 '낯선 사람'을 의미하는 라고 불렀다.[10] 웨일스인들은 중세 시대까지 스스로를 Brythoniaid|브리소니아이드cym (브리튼인)이라고 불렀으나, 점차 Cymry|컴리cym (동포)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Cymru|컴리cym (웨일스)와 y Cymry|어 컴리cym (웨일스인)의 사용에 대한 최초의 기록 증거는 서기 633년경 카드왈론 압 카드판을 기리는 찬양시에서 발견된다.[11] 서기 930–942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Armes Prydein|아르메스 프리데인cym에서는 Cymry|컴리cym와 Cymro|컴로cym라는 단어가 15번 사용되었다. 그러나 앵글로색슨족의 정착 이후, 사람들은 점차 Brythoniad|브리소니아이드cym 대신 Cymry|컴리cym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12]
800년 이후, 일련의 왕실 결혼을 통해 로드리 마워 (재위 844–877)는 그위네드와 포위스를 상속받았다. 그의 아들들은 그위네드의 아베르프라우 가문, 데헤이바르스의 디네부르 가문, 포위스의 마스라발 가문 등 세 왕조의 기초를 마련했다. 로드리의 손자인 하웰 다 (재위 900–950)는 930년에 모계와 부계로부터 상속받은 디페드와 세이설루그를 통합하여 데헤이바르스를 건국했고, 그위네드와 포위스에서 아베르프라우 왕조를 몰아냈으며, 940년대에 웨일스 법을 성문화했다. 10세기와 11세기에는 바이킹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4. 2. 전성기 (1066년–1283년)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4년 만에 잉글랜드는 노르만족에게 완전히 정복되었다.[13] 윌리엄 1세는 웨일스 국경 지대에 강력한 전사들에게 변경백령을 설치하고 이들에게 영토 확장을 허용했으며, 이 경계는 동쪽(잉글랜드)에만 고정되었다. 1070년대부터 이들 변경백들은 와이 강 서쪽, 웨일스 남부와 동부를 침략하여 토지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이 국경 지역은 Marchia Walliela로 알려졌으며, 이곳의 변경백들은 영국법과 웨일스법 모두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 변경백령의 범위는 변경백과 웨일스 군주의 세력 변화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1066년 잉글랜드의 노르만 정복 당시 웨일스의 주요 통치자는 귀네드와 포위스의 왕 블레딘 압 긴빈이었다. 노르만족은 초기에 남부에서 성공을 거두어, 윌리엄 피츠오스번은 1070년 이전에 구엔트를 점령했다. 1074년까지 슈루즈베리 백작 군대는 데헤이바르스를 황폐화시켰다.
1075년 블레딘 압 긴빈의 죽음은 내전을 유발했고, 노르만족은 이를 이용해 북웨일스로 진출했다. 1081년, 마이니드 카른 전투에서 승리하여 귀네드 왕위를 막 차지한 그루피드 압 키난은 체스터 백작과 슈루즈베리 백작에게 속아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그 결과 귀네드의 상당 부분이 노르만족에게 넘어갔다. 남부에서는 윌리엄 1세가 다이페드로 진군하여 세인트데이비즈와 카디프에 성과 조폐국을 세웠다. 리스 압 테우두르는 1093년 브레크녹셔에서 사망했고, 그의 왕국은 노르만 영주들에게 분할 점령되었다. 이로써 웨일스에 대한 노르만 정복은 거의 완료된 듯 보였다.
그러나 1094년 웨일스 전역에서 노르만 통치에 대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 점차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루피드 압 키난은 결국 풀려나 귀네드에 강력한 왕국을 재건했다. 그의 아들 오와인 귀네드는 데헤이바르스의 그루피드 압 리스와 동맹을 맺고 1136년 크리그 마우르 전투에서 노르만족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케레디기온을 병합했다. 오와인 귀네드는 다음 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귀네드 왕위에 올랐고 1170년 사망할 때까지 통치했다. 그는 잉글랜드에서 스티븐 왕과 마틸다 황후가 왕위를 놓고 다투는 내전(무정부 시대)을 이용하여 귀네드의 국경을 이전보다 더 동쪽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
포위스 역시 이 시기에 마도그 압 마레디드라는 강력한 통치자를 두었지만, 그의 죽음(1160년)과 곧 이은 후계자 러웰린 압 마도그의 죽음 이후 포위스는 두 부분으로 분열되었고 이후 다시 통합되지 못했다. 남부의 데헤이바르스에서는 그루피드 압 리스가 1137년에 사망했지만, 그의 네 아들들은 모두 차례로 데헤이바르스를 통치하면서 결국 노르만족으로부터 할아버지의 왕국 대부분을 되찾을 수 있었다. 네 아들 중 막내인 리스 압 그리피드(통칭 '로드 리스')는 1155년부터 1197년까지 통치했다. 1171년 리스는 헨리 2세 국왕을 만나 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에 따라 리스는 조공을 지불해야 했지만 그의 모든 정복이 확인되었고 나중에 남웨일스의 치안 판사로 임명되었다. 리스는 1176년 크리스마스에 카디건의 궁정에서 시와 노래의 축제를 열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최초의 기록된 에이스테드보드로 여겨진다. 오와인 귀네드의 죽음으로 귀네드가 그의 아들들 사이에 분열되면서, 리스는 데헤이바르스를 한동안 웨일스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놓이게 했다.
오와인 귀네드의 손자인 르웰린 압 여워스(르웰린 대왕)는 웨일스의 위대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 그는 1200년까지 귀네드의 단독 통치자였으며 1240년 사망할 때까지 사실상 웨일스의 상당 부분을 통치했다. 르웰린은 북부 해안의 메나이 해협을 내려다보는 아베르귄그레긴에 '수도'를 두었다. 1200년에 그는 귀네드의 왕이 되었고 존 왕과 평화 조약을 맺고, 그의 사생아 딸 웨일스의 조안과 결혼했다. 1208년, 존 왕이 남부 변경백령 영주에 대한 르웰린의 공격을 반대하면서 관계는 악화되었고, 존은 1211년에 귀네드의 일부를 침공하여 르웰린의 장남을 인질로 잡고 북동부 웨일스의 영토를 항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르웰린은 1215년 존에게 마그나 카르타 서명을 강요한 잉글랜드 반란 귀족에 합류했다. 이 문서에는 특정 웨일스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잉글랜드인이 부당하게 빼앗아간 토지와 자유를 웨일스인에게 반환하고, 르웰린의 아들 그리피드 압 르웰린을 포함한 웨일스 인질들을 즉시 석방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르웰린은 이를 계기로 이듬해 웨일스 전역에 대한 지배력을 얻었다.
1216년 존 왕이 사망한 후, 르웰린 압 여워스와 새로운 왕 헨리 3세는 1218년 우스터 조약에 동의하여 르웰린의 웨일스 내 권리를 그의 사망까지 확인하고, 그를 웨일스의 군주(Prince)로 인정했다. 르웰린 압 여워스는 1216년 아베르디피에서 열린 회의에서 다른 웨일스 영주들의 충성 서약을 받았고, 사실상 최초의 웨일스 공이 되었다.[15] 그의 아들 다비드 압 르웰린이 그 뒤를 이어 귀네드의 통치자가 되었지만, 헨리 3세 왕은 그가 아버지의 지위를 웨일스의 다른 지역에서 상속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1241년과 1244년에 전쟁이 발발했고, 다비드가 1246년 초 후계자 없이 갑자기 사망했을 때 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르웰린 대왕의 다른 아들인 그리피드는 1244년 런던 탑에서 탈출하려다 살해되었다. 그리피드는 네 아들을 남겼고, 이들 중 세 아들 사이의 내분 기간 끝에 르웰린 압 그리피드(통칭 '르웰린 에인 리우 올라프'; '우리의 마지막 지도자 르웰린')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르웰린 압 그리피드는 1258년부터 웨일스 공(Prince of Wales)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1267년 몽고메리 조약을 통해 헨리 3세로부터 공식적으로 ''웨일스 공'' 칭호를 인정받았다.[16] 이 조약은 르웰린이 웨일스의 많은 부분을 직간접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르웰린의 아내 엘리너 드 몽포르의 투옥을 포함한 일련의 분쟁은 1276년 11월 에드워드 1세 왕의 전쟁 선포와 첫 번째 침공으로 이어졌다.[17] 자신의 상황이 불리함을 깨달은 르웰린은 전투 없이 항복했다. 에드워드는 1277년 아베르코위 조약을 통해 르웰린의 권위를 크게 제한하고 잉글랜드에 대한 봉토 서약을 요구했다.[17]
1282년 종려주일에 르웰린의 형제 다비드 압 그리피드가 하워든 성을 공격하면서 다시 전쟁이 발발했다. 1282년 12월 11일, 르웰린 압 그리피드는 빌스웰스 근처 킬메리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고, 그의 군대도 패배했다. 그의 형제 다비드 압 그리피드는 저항을 계속했으나, 1283년 6월에 체포되어 셔스버리에서 교수형, 내장 적출, 사지 절단형으로 처형되었다. 르웰린과 다비드의 죽음 이후,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의 독립을 종식시키고 1284년 루들란 법령을 도입했다. 이 법령은 웨일스 공국을 잉글랜드 왕국에 병합하는 헌법적 변경이었으며, 에드워드의 웨일스 정복을 완료했다.
4. 3. 후기 (1283년–1542년)
1282년 그위네드 왕국의 마지막 독립 통치자 사웰린 압 그리피드가 에드워드 1세에게 패배하면서 웨일스는 잉글랜드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1284년 러들란 법령이 제정되어 웨일스 통치의 헌법적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 법령은 웨일스를 잉글랜드 왕관에 "병합되고 통합된" 영토로 규정했지만, 잉글랜드와는 분리되어 동일한 군주 아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국왕은 두 지역을 직접 통치했으며, 웨일스 북부는 체스터 재판관과 북웨일스 재판관에게, 웨일스 서부 남쪽은 남웨일스 재판관에게 행정 업무가 위임되었다. 몽고메리와 벌스cy의 기존 왕실 영주권은 유지되었다. 웨일스는 사실상 잉글랜드의 일부가 되었으나,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유지했다. 잉글랜드 국왕들은 때때로 왕위 계승자가 주재하는 웨일스 평의회를 임명했으며, 이 평의회는 주로 당시 웨일스 변경지방의 분쟁 지역이었던 러들로에 위치했다. 한편, 웨일스 문학, 특히 시는 하위 귀족들의 후원 아래 계속 번성했으며, 14세기 중반의 다피드 압 그윌림은 웨일스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보마리스, 카나번 성|카나번cy, 하를레흐, 콘위 성|콘위cy 등 여러 인상적인 석조 성을 건설했다.[18] 또한 1301년 자신의 아들(훗날 에드워드 2세, 1284년 카나번cy 출생[19])에게 웨일스 공 칭호를 부여하며 정복을 마무리 지었다. 이 칭호는 북서부 웨일스, 즉 웨일스 공국으로부터 수입을 제공했다.[20]
잉글랜드 지배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다. 마도그 압 르웰린은 1294년–1295년 반란 중 자신을 웨일스 공이라 칭했으며,[21] 1316년–1318년에는 르웰린 브렌이 반란을 일으켰다. 1370년대에는 그위네드 왕가의 마지막 남계 후손인 오와인 로고치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두 차례 침공을 계획했으나, 1378년 잉글랜드 정부에 의해 암살되었다.
가장 큰 규모의 봉기는 1400년 웨일스 귀족 오와인 글린두르cy가 잉글랜드의 헨리 4세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이었다. 글린두르는 잉글랜드군에게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고 수년간 웨일스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다. 1404년, 그는 프랑스, 스페인(카스티야), 스코틀랜드 사절단 앞에서 웨일스 공으로 즉위했으며, 마친레트cy에서 최초의 웨일스 의회(seneddcy)를 개최하고 두 개의 대학 설립을 계획하는 등 독립적인 국가 운영을 시도했다.[22] 그러나 반란은 1412년경 결국 진압되었고, 글린두르는 은신하여 1413년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23] 그의 반란은 웨일스 민족 정체성을 크게 고취시켰으며, 그는 웨일스 전역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글린두르 반란에 대한 대응으로 잉글랜드 의회는 1402년 웨일스에 대한 형벌법을 통과시켜 웨일스인의 무기 소지, 공직 임명, 요새화된 도시 거주를 금지하고, 웨일스 여성과 결혼한 잉글랜드인에게도 같은 제한을 적용하는 등 웨일스인들을 2등 시민으로 취급했다. 이 차별적인 법은 반란 진압 후에도 유지되다가 점차 완화되었지만, 1624년까지 법전에 남아 있었다.
장미 전쟁(1455년–1485년) 동안 웨일스는 전쟁의 주요 무대가 되었으며, 양측 모두 웨일스 군대를 활용했다. 주요 인물로는 요크파의 윌리엄 허버트와 랭커스터파의 재스퍼 튜더가 있었다. 랭커스터파의 헨리 6세와 요크파의 에드워드 4세는 각각 아들을 위해 웨일스 변경지방 평의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1485년, 웨일스 혈통( 리스 압 그루피드 등의 후손)을 가진 랭커스터파의 헨리 튜더가 웨일스에서 상륙하여 많은 지지를 얻었다. 그는 보즈워스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리처드 3세를 격파하고 잉글랜드의 헨리 7세로 즉위하여 튜더 왕조를 열었다. 이로써 웨일스계 혈통이 잉글랜드 왕가에 들어서게 되었고, 잉글랜드와 웨일스는 하나의 왕가 아래 통합되었다. 헨리 7세는 즉위 후 아들 아더 공을 위해 웨일스 변경지방 평의회를 다시 설립했다.
헨리 7세의 아들 헨리 8세 통치 기간 중 웨일스 법령 1535 및 1542가 제정되어 웨일스 고유법이 폐지되고 잉글랜드 법으로 대체되었다. 이 법들은 웨일스를 법적으로 잉글랜드와 완전히 통합시켰으며, 웨일스 법 체계 폐지, 웨일스어의 공식 사용 금지, 웨일스-잉글랜드 경계 정의, 웨일스의 잉글랜드 의회 의원 선출 등을 규정했다. 또한 웨일스인과 잉글랜드인 사이의 법적 차별을 철폐하여 형벌법을 사실상 무력화했다(공식 폐지는 1624년). 잉글랜드와 웨일스라는 단일 법적 관할 구역이 형성되었고, 변경지방 영주권은 폐지되었다. "웨일스 공국"이라는 명칭은 웨일스 전체를 가리키는 의례적인 용어로 남게 되었다.[24]
5. 근세
1536년 웨일스의 인구는 약 278,000명이었으며, 1620년경에는 약 360,000명으로 증가했다. 이는 주로 동물 농업 중심의 농촌 경제 구조 때문이었다. 웨일스법 통과 이후 경제의 다양성이 증가하고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경제적 안정성이 향상되었다.
헨리 8세가 로마 교황과 결별한 후, 웨일스는 대체로 잉글랜드를 따라 성공회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이에 반대하며 웨일스어로 된 초기 서적들을 제작하기도 했다. 1567년, 리처드 데이비스 주교, 윌리엄 세일즈베리, 토마스 휴엣은 신약성경과 '''공동기도서'''(Y Llyfr Gweddi Gyffredincy)를 처음으로 웨일스어로 번역했다. 이후 1588년, 윌리엄 모건은 성경 전체를 완역한 웨일스어 성경을 출판했다. 이는 웨일스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서적 중 하나로 평가되며, 웨일스어의 지위와 웨일스 문학의 범위를 크게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번역 작업은 웨일스어가 전례 언어이자 예배의 언어로 사용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잉글랜드의 압력 속에서도 웨일스어가 일상 언어 및 문학 언어로 지속될 수 있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데이비스 주교와 반체제 개신교 성직자 존 펜리는 웨일스에 칼뱅주의 신학을 도입했다. 칼뱅주의는 청교도 시대를 거쳐 찰스 2세 치하 왕정복고 이후 웨일스 감리교 운동 내에서 발전했지만, 19세기 중반까지 칼뱅의 저작이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다.
17세기 초 세 왕국 전쟁 시기, 웨일스는 압도적으로 왕당파인 기사당을 지지했다. 존 존스 마에시가르네드나 청교도 작가 모건 르위드와 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웨일스는 찰스 1세 국왕 군대의 중요한 병력 공급원이었다. 웨일스 본토에서 큰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으나, 제2차 잉글랜드 내전은 1648년 초 펨브로크셔에서 급여를 받지 못한 의회파 군대가 왕당파로 돌아서면서 시작되었다. 토마스 호튼 대령은 5월 세인트 패건스 전투에서 왕당파 반군을 격파했으며, 반군 지도자들은 두 달간의 펨브로크 포위전 끝에 7월 11일 크롬웰에게 항복했다.
이 시기 웨일스의 교육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대부분의 주민이 웨일스어만 사용했음에도 교육은 영어로만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1731년, 그리피스 존스는 카마던셔에서 이동식 학교를 시작했다. 이 학교는 한 지역에서 약 3개월간 머물며 웨일스어로 교육한 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존스가 사망한 1761년까지 웨일스 전역에서 약 25만 명이 이 학교를 통해 읽는 법을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18세기에는 다니엘 롤랜드, 하웰 해리스, 윌리엄 윌리엄스 팬티셀린 등이 이끈 웨일스 감리교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웨일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종교적, 사회적 운동 중 하나로 평가된다. 웨일스 잉글랜드 교회 내에서 시작되었으나, 칼뱅주의 신학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잉글랜드의 감리교 부흥과는 차이가 있었다. 19세기 초, 웨일스 감리교 신자들은 성공회에서 분리하여 독자적인 교파인 웨일스 장로교회를 설립했다. 이 과정에서 침례교, 회중교회 등 다른 비국교도 교파들도 함께 성장하여 19세기 중반 웨일스는 비국교도가 우세한 지역이 되었다. 비국교도 교회들은 주로 웨일스어를 사용했으며, 웨일스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된 주일학교는 학교 교육에서 소외되었던 웨일스어 읽기 및 쓰기 교육을 제공하며 언어 보존에 크게 기여했다.
웨일스 산업 혁명 이전 웨일스에는 제분, 모직물 제조와 같은 농업 관련 산업과 소규모 광업, 채석업 등이 흩어져 있었다.[25] 농업이 여전히 부의 주요 원천이었으나,[25] 산업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스완지 지역에서는 구리 제련업이 발달했다. 풍부한 석탄 매장량과 항구를 통해 콘월 및 앵글시의 파리스 산 구리 광산과 연결되면서, 스완지는 19세기 세계적인 비철금속 제련 중심지로 성장했다.[25] 철 제련 역시 웨일스 북부와 남부 모두에서 확장되었다.[26] 북부에서는 존 윌킨슨의 버샴 제철소가, 남부에서는 머서 티드필의 도울라이스, 키파르타, 플리머스, 페니다렌 등이 주요 중심지가 되었다.[26] 1820년대 남부 웨일스는 영국 전체 선철 생산량의 40%를 차지할 정도였다.[26]
18세기 후반에는 북부 웨일스를 중심으로 석판 채석이 급성장했다. 1770년 리처드 펜난트가 개장한 펜린 채석장은 19세기 후반 15,000명을 고용하며[27] 디노윅 채석장과 함께 웨일스 석판 무역을 주도했다. 석판 채석은 "가장 웨일스적인 산업"으로 불리기도 했지만,[28] 웨일스를 대표하는 산업은 석탄 채굴이었다. 초기에는 지역 금속 산업에 연료를 공급하기 위해 채굴되었으나, 운하와 철도 개통으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사우스 웨일스 탄전 개발로 카디프, 스완지, 페나스, 배리 등은 세계적인 석탄 수출항으로 성장했다. 1913년 웨일스의 석탄 생산량은 연간 약 6000만ton에 달하며 정점을 찍었다. 18세기 말 시작된 산업 혁명은 특히 철광석, 석회석, 석탄이 풍부했던 남동부 웨일스 지역에 철강소와 탄광 설립을 촉진했으며, 머서 티드필의 키파르타 제철소와 도울라이스 제철소 등이 대표적이다.
6. 근현대
20세기 초 웨일스는 석탄 산업의 호황을 누렸으나, 제1차 세계 대전과 이후 경제 침체를 겪으며 큰 사회적 변화를 맞이했다. 이 시기 노동당이 자유당을 대체하여 웨일스의 주요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웨일스 민족주의 정당인 플라이드 컴리가 창당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웨일스는 경제 회복과 함께 복지 시스템의 혜택을 보았지만, 전통적인 석탄 및 철강 산업은 점차 쇠퇴하고 서비스 산업 중심으로 경제 구조가 재편되었다. 웨일스어의 지위를 보호하고 증진하려는 노력이 강화되었고, 웨일스 자치에 대한 요구도 높아졌다. 1979년 자치 관련 국민투표는 부결되었으나, 민족주의 운동은 꾸준히 이어졌다.
1997년 국민투표에서 근소한 차이로 자치안이 통과되면서 1999년 웨일스 국민 의회(현재의 세네드)가 설립되었다. 이후 웨일스는 점진적으로 더 많은 자치권을 확보했으며, 2011년 웨일스어 (웨일스) 법안을 통해 웨일스어는 웨일스 내에서 공식 언어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웨일스가 영국 내에서 독자적인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을 강화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6. 1. 20세기 초 (1900년–1945년)

20세기 초반 10년 동안 남웨일스는 석탄 산업의 호황을 누렸으며, 이 기간 동안 인구 증가율은 20%를 넘어섰다. 하지만 이러한 인구 통계적 변화는 언어 사용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론다 계곡에서 웨일스어 사용자의 비율은 1901년 64%에서 10년 후인 1911년에는 55%로 감소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남웨일스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1904–1905 웨일스 부흥 운동은 20세기 웨일스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기독교 부흥 운동이었다. 이 운동 기간 동안 최소 10만 명이 기독교 신자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 운동에도 불구하고 웨일스 내 기독교의 점진적인 쇠퇴를 막지는 못했으며, 단지 그 속도를 잠시 늦추는 데 그쳤다.
역사학자 케네스 O. 모건은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의 웨일스를 "비교적 평온하고, 자신감 있으며, 성공적인 국가"로 평가했다. 석탄 생산량은 계속 증가하여 론다 계곡에서는 1913년에 960만 톤의 석탄을 채굴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은 웨일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총 272,924명의 웨일스인이 전쟁에 동원되었는데, 이는 당시 남성 인구의 21.5%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이 중 약 35,000명이 목숨을 잃었으며,[29] 특히 솜 전투 중 마메츠 우드에서의 전투와 파스샹달 전투에서 웨일스 사단은 큰 손실을 입었다.[30] 전쟁의 참상과 경제적 여파는 웨일스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심각한 사회적 어려움을 초래했다.

20세기 초반, 웨일스의 정치 지형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오랫동안 웨일스 정치를 주도했던 자유당의 영향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1906년 총선거 이후 웨일스 지역구에서 자유당 소속이 아닌 의원은 머서 티드필의 키어 하디 (노동당) 단 한 명뿐이었으나, 산업 분쟁과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남부 탄광 지역을 중심으로 자유당에 대한 지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1916년,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영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웨일스 출신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이끈 보수당 주도의 연립 정부가 1919년 광부 파업에 미흡하게 대처하면서 남웨일스에서 자유당의 지지 기반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웨일스의 산업 노동자들은 노동당 지지로 돌아섰다. 1908년 영국 광부 연합이 노동당에 가입한 이후, 광부들의 지지를 받은 노동당 후보들이 의회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1922년 선거에서는 웨일스 지역구 의석의 절반을 노동당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21세기까지 이어지는 웨일스 정치에서 노동당 우위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변화였다.
한편, 1925년에는 웨일스의 자치 또는 독립을 목표로 하는 민족주의 정당인 플라이드 컴리가 결성되었다. 플라이드 컴리는 웨일스 고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영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하고자 했으나, 초기에는 성장이 더디었고 의회 선거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20세기 초반의 경제 성장 이후, 웨일스의 주요 산업이었던 석탄 및 철강 산업은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장기간의 침체를 겪었다. 이로 인해 광범위한 실업과 빈곤 문제가 발생했으며, 수 세기 만에 처음으로 웨일스의 인구가 감소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인한 군수품 생산 요구가 증가하면서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많은 웨일스 남성과 여성들이 군인으로 참전하여 모든 주요 전선에서 싸웠으며, 약 15,000명이 전사했다. 웨일스 본토 역시 전쟁의 피해를 입었는데, 독일 공군은 스완지, 카디프, 펨브로크 독 등의 항구 도시를 집중적으로 폭격하여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전쟁 중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3년부터는 18세가 된 웨일스 징집병의 10%를 탄광으로 보내 일하게 했는데, 이들은 베빈 보이즈로 불렸다. 양차 세계 대전 동안 웨일스 내 평화주의 운동은 비교적 미미했는데, 특히 제2차 세계 대전은 파시즘에 맞선 전쟁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6. 2. 20세기 후반 (1945년–199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새로운 사회 복지 시스템 덕분에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사회 빈곤층의 생활 수준도 향상되었다. 플라이드 킴루가 일부 성공을 거두고 웨일스 자치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정치적 민족주의에 대한 지지가 강해졌다. 전후 시기에는 개인 소득도 증가했다. 예를 들어 1962년 남성 육체노동자의 평균 주급은 315실링 8펜스로, 영국 평균인 312실링 10펜스보다 높았다. 한 연구에 따르면 "웨일스보다 남성 육체노동자 임금이 더 높은 곳은 잉글랜드 중부와 남부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일스의 주요 산업이었던 석탄 산업은 1945년 이후 꾸준히 쇠퇴했다. 1990년대 초에는 웨일스에 가동 중인 탄광이 단 하나뿐이었다. 철강 위기로 인해 철강 산업 역시 크게 위축되었고, 웨일스 경제는 다른 선진국들처럼 점차 서비스 산업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라는 용어는 영국법이 적용되는 지역을 나타내는 데 널리 사용되었으며, 1955년에는 카디프가 웨일스의 수도로 공식 선포되었다. 정부 업무에 웨일스어 사용이 보장되지 않으면 언어가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 속에서 1962년 웨일스어 협회(Cymdeithas yr Iaith Gymraeg)가 결성되었다. 1965년, 리버풀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저수지를 건설하기 위해 트리웨린 계곡이 물에 잠기면서 민족주의 감정은 더욱 고조되었다. 웨일스 출신 국회의원 36명 중 35명이 법안에 반대했지만(1명 기권), 영국 의회는 1957년 법안을 통과시켰고 결국 카펠 셀린 마을은 수몰되었다. 이 사건은 영국 의회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잉글랜드 의원들 앞에서 웨일스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주었다. 자유 웨일스 군(Free Wales Army) 및 ''Mudiad Amddiffyn Cymru''와 같은 분리주의 단체들이 결성되어 1963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36] 1969년 찰스 웨일스 공의 서임식을 앞두고 이들 단체는 여러 차례 기반 시설에 대한 폭탄 공격을 감행했다. 1966년 보궐 선거에서는 그윈포 에반스가 카마던 선거구에서 당선되어 플라이드 킴루 소속 첫 국회의원이 되었다.[37]
1960년대 말까지 정부 지원금을 통해 기업들을 웨일스의 낙후된 지역으로 유치하려는 정책은 산업 경제를 다변화하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38] 1934년에 시작된 이 정책은 산업 단지 건설과 교통망 개선, 특히 남부 웨일스를 런던과 직접 연결하는 M4 고속도로 건설로 더욱 강화되었다.[38] 이 시기 웨일스에 안정적인 경제 성장의 기반이 마련된 것으로 보였으나, 1980년대 초 경기 침체로 지난 40년간 구축된 제조업 기반의 상당 부분이 붕괴되면서 이는 다소 낙관적인 전망이었음이 드러났다.[39]
한편, 공식적으로 웨일스어를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높아지면서 1967년 웨일스어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을 통해 웨일스어는 처음으로 영국의 법률 및 행정 분야에서 합법적인 언어로 공식 인정받게 되었다. 웨일스어를 구사할 수 있는 웨일스 인구 비율은 1901년 50% 미만에서 1911년 43.5%로 감소했으며, 1981년에는 18.9%까지 떨어졌다가 이후 약간 증가했다.
1967년 웨일스어법은 1746년 웨일스 및 베릭 법의 일부를 폐지하여 '웨일스'가 더 이상 잉글랜드의 법적 정의에 포함되지 않게 되었다. 이는 웨일스를 잉글랜드 왕국의 일부로 규정했던 1535년과 1542년 웨일스 법 이후 처음으로 웨일스를 법적으로 (영국 내에서) 별개의 실체로 정의한 것이었다. 1967년 웨일스어법은 또한 일부 법적 절차를 포함하여 웨일스어 사용이 허용되는 범위를 확대했다.
1979년 1979년 웨일스 자치 국민투표에서 웨일스는 80%의 다수로 웨일스 자치에 반대표를 던졌다. 1997년, 같은 문제에 대한 1997년 웨일스 자치 국민투표에서는 매우 근소한 다수(50.3%)가 찬성했다. 웨일스 국민 의회(Cynulliad Cenedlaethol Cymru)는 1999년 1998년 웨일스 정부법에 따라 설립되었으며, 웨일스의 중앙 정부 예산의 지출 및 관리를 결정할 권한을 갖게 되었지만, 영국 의회는 그 권한에 대한 제한을 설정할 권리를 보유했다.
6. 3. 현대 (1999년–현재)

1979년 1979년 웨일스 자치 국민투표에서는 웨일스 유권자 다수가 자치에 반대했으나, 1997년에 실시된 1997년 웨일스 자치 국민투표에서는 근소한 차이(50.3%)로 웨일스 자치에 찬성하는 결과가 나왔다. 이 결과에 따라 1998년 웨일스 정부법이 제정되었고, 1999년 웨일스 국민 의회(Cynulliad Cenedlaethol Cymru)가 설립되었다. 웨일스 국민 의회는 웨일스의 중앙 정부 예산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하고 관리할 권한을 가졌지만, 영국 의회는 여전히 의회의 권한에 제한을 둘 수 있었다.
이후 웨일스의 자치권은 점진적으로 확대되었다. 영국 의회는 2006년 웨일스 정부법을 통해 웨일스 국민 의회를 개혁하고, 의회가 더 많은 권한을 가질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이 법은 의회에서 선출되고 의회에 책임을 지는 별도의 행정부를 두는 정부 시스템을 만들었다. 2011년에는 웨일스 국민 의회의 입법 권한 확대를 묻는 국민투표가 성공적으로 가결되었다. 이로써 의회는 자치 권한이 위임된 모든 분야에서 영국 의회의 동의 없이 독자적으로 법률(의회법)을 제정할 수 있게 되었다.
2020년 5월, 세네드 및 선거(웨일스)법 2020에 따라 웨일스 국민 의회는 공식 명칭을 변경했다. 웨일스어로는 Senedd Cymru|세네드 컴리cy, 영어로는 웨일스 의회(Welsh Parliament)로 바뀌었으며, 일반적으로는 영어와 웨일스어 모두 '세네드'(Senedd)로 통칭된다. 이는 의회가 확대된 입법 권한을 더 잘 반영하기 위한 조치로 평가받는다.
한편, 웨일스의 고유 언어인 웨일스어(Cymraeg|컴라엑cy)의 지위 향상을 위한 노력도 계속되었다. 2011년 웨일스어 (웨일스) 법안은 기존의 1993년 웨일스어법을 현대화하고, 웨일스어를 웨일스 내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가진 언어로 처음 명시했다. 이는 웨일스어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 법안은 또한 기존의 웨일스어 위원회(Welsh Language Board)를 대체하는 웨일스어 위원 직책을 신설했다. 1960년대부터 많은 도로 표지판이 영어와 웨일스어 이중 언어로 교체되었으며, 다양한 공공 및 민간 기관에서 이중 언어 사용을 채택하고 있다. 2011년 법 제정 이후 웨일스어는 영국 내에서 법적으로 유일한 공식 언어(''de jure'') 지위를 갖게 되었다.
7. 같이 보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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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웨일스는 스스로를 컴리(Cymru)라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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