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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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정중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효종과 현종 시기에 활약했다. 그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649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사간원정언, 홍문관 부수찬, 암행어사 등을 거치며 직언을 잘하는 인물로 평가받았다. 예송 논쟁과 갑인예송 등 당쟁에 휘말려 유배를 겪었으며, 좌의정을 역임했으나 기사환국으로 다시 유배되어 사망했다. 그의 후손들은 흥선대원군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민광훈과 이씨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선조 때의 우의정 민기이고 할머니는 연안 이씨로 이광정의 딸이다. 할머니 연안 이씨를 통해 남인 청남파 홍우원, 남인 탁남파 허적 등과도 인척간이 되었다. 허적은 할머니 연안 이씨의 친정어머니 양천허씨의 친정 조카였고, 홍우원은 할머니 연안 이씨의 여동생의 남편으로 그에게 대이모부가 된다. 그러나 예송 논쟁을 계기로 이들과의 사이는 다소 벌어지게 되었다. 예송 논쟁 외에도 일부 남인이 희빈 장씨를 적극적으로 미는 것을 계기로 남인과는 원수나 다름없게 되었다.
2. 생애
친형은 학자 민시중이고 동생은 후일 인현왕후의 아버지가 되는 국구 민유중이었다. 명성황후와 순명효황후는 각각 민유중의 5대손, 6대손이 된다. 아버지 민광훈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동생 민유중과 함께 송준길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서인에 속했다.
1649년(인조 27) 4월 4일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으로 벼슬을 시작해 중직 대부(中直大夫) 행 세자시강원 사서 겸 춘추관 기사관(行世子侍講院司書兼春秋館記事官)으로 승진하여 인조실록 편찬시 실록청 도청 낭청(都廳郞廳)을 겸하여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예조좌랑,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었다. 1651년 6월 부사과(副司果)로 재직 중 상소를 올려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할 것과 인재를 헤아리는 것으로 책임을 맡기는 것, 억울한 자를 살펴 가릴 것을 상소하였다. 그의 상소로 정태제(鄭泰齊)가 석방에서 풀려나고, 조익 등이 사면되었다. 같은 해 홍문록(弘文錄)에 들었다.
이후 직언(直言)을 잘 한다고 인정받아 1651년(효종 2) 7월 사간원정언이 되고 바로 부조리를 일으킨 고관들을 논핵하였다. 그 해에 홍문관부수찬과 수찬을 거쳐 그해 12월 비변사 문사 낭청이 되었다. 이후 김자점의 옥사를 다스린 공로로 1652년 가자되었고[2], 부수찬이 되었다가 1652년 2월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왔다. 이후 사간원사간, 홍문관수찬·교리·응교, 사헌부집의를 지냈다. 이후 전라도 암행어사에 임명되고 이후 충청도, 경상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왔다. 1652년(효종 3년) 봄 부교리로 있을 때 상소하여 인재를 발굴하여 등용할 것을 적극 건의한다.
현재 윤휴 · 윤선거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유학(儒學)으로 당대의 촉망을 받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특명으로 백의(白衣)를 소견하시기를 고사(古事)처럼 하시어 제각기 갖고 있는 생각을 진달하게 하여 그들의 재주가 쓸만하면 채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돌려보내는 것이 가합니다. 윤휴와 윤선거는 모두 세신(世臣)인데, 만약 그들의 인품을 논한다면 윤휴는 재주와 식견이 탁월하고 윤선거는 국량이 견고하고 확실합니다.|현재 윤휴 · 윤선거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유학(儒學)으로 당대의 촉망을 받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특명으로 백의(白衣)를 소견하시기를 고사(古事)처럼 하시어 제각기 갖고 있는 생각을 진달하게 하여
그들의 재주가 쓸만하면 채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돌려보내는 것이 가합니다.
윤휴와 윤선거는 모두 세신(世臣)인데, 만약 그들의 인품을 논한다면
윤휴는 재주와 식견이 탁월하고 윤선거는 국량이 견고하고 확실합니다.중국어
그의 주청으로 윤휴, 윤선거 등의 학자들이 당색을 초월하여 조정에 등용되었다. 또, 송시열과 송준길이 조정에 뜻을 두지 않고 관작을 사퇴하려 했을 때도 여러번 만류하거나 그들을 불러들이게 한다. 남인 온건파 영수 허적은 외외종숙이었던 탓에 야당인 남인에 속한 윤휴, 허목 등을 적극 추천하여 정계입문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송 논쟁으로 스승인 송시열과 송준길이 남인의 인신공격성 힐난을 받자, 그 길로 남인과 영구히 절연하고 남인을 정계에서 제거하는데 앞장 선다.
또한 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문하에 만수재(晩守齋) 이민기(李敏琦) 등의 문하생을 배출했다.
그해 4월 4일에는 승지에 임명된 윤선도의 행실을 문제삼아 논핵하였고[3], 4월 16일 홍문관교리가 되어, 바로 곽지명(郭志明) 등을 인재로 천거하였다. 5월 21일에는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을 효종에게 직접 상주하여 논란이 되었다.[4]
1652년 여름의 흉년을 계기로 그는 효종에게 상소를 올려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원통함을 풀어주기를 상소하고, 청나라를 피해서 조선으로 망명한 명나라 한인(漢人)을 청나라에서 송환해줄 것을 요구하자, 효종에게 절대 중국인을 호로(胡虜)에게 보내면 안된다고 강력 반대하였다. 그해 8월 부수찬이 되었다가 9월 왕명으로 충청도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대동법이 편리한지를 탐문, 조사하고 오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5] 이후 부교리를 거쳐 경연시독관으로 있을 때 참찬관 민응형(閔應亨) 등과 함께 소현세자의 자녀들의 생활 문제를 공론화하고 군기가 엄하지 못하여 군정(軍政)이 무너진 것을 논하였다.
민회빈 강씨가 억울하게 죽은 것과 그 자녀는 어린데 모두 섬으로 귀양갔다가 풍토병으로 죽은 것을 당대의 사대부, 식자들이 상당수 억울하게 생각했으나 김홍욱이 물고된 것을 계기로 김집, 송준길 이외에는 아무도 말하지 못하였는데 민정중이 다시 민회빈 강씨는 억울하다며 이를 공론화시키자, 효종은 그를 처벌하려 했지만 차마 처벌하지 못하고 당대의 신하와 사대부들이 다 놀랐다. 결국 효종이 그를 인견(引見)하여 강씨의 옥사(獄事)를 취소시킬수 없음을 간곡하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그는 민회빈 강씨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생각을 꺾지 않고 이후 현종때 가서 다시 민회빈 강씨의 사면 복권을 상주하였다.
1653년(효종 4년) 1월 교리가 되었다가 다시 부교리로 임명되었고, 자신의 죄에 비해 과중한 형벌을 받은 관원들의 처벌을 개정해줄 것을 청하였다. 그해 4월 충청도암행어사로 나가 군정(軍政)이 문란한 지역의 지방 수령 6명을 보고하여 파면시켰다. 1655년(효종 6년) 10월 10일 자신이 상소를 하던 중의 말실수를 사죄하고 부교리직에서 사직을 청하였으나 오히려 효종은 이를 반려하고, 그해 11월 교리로 임명되었다. 1655년 12월 22일 노비추쇄도감(推刷都監)의 건의로 서필원과 민정중을 황해도 암행어사로, 권대운, 박세성을 평안도 암행어사로 정하였으나 효종이 평안도와 황해도를 바꾸라 하여 평안도암행어사로 다녀왔다.[6]
1656년(효종 7년) 1월 16일 홍문관교리가 되고, 임명된 직후에 올바른 인재를 등용할 것, 폭넓은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에 참여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1월 26일에는 인재를 등용하고 올바른 간언을 받아들일 것을 왕에게 상주하였고, 그의 상소로 효종은 1월 28일부터 재야의 인사들 중 발탁할 만한 인사들을 천거해서 올리도록 재상들에게 논의하게 하였다. 이때 그도 참여하여 윤휴 등을 천거하였다. 이어 신독재 김집을 포상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후 여러 번 홍문관교리에 재임명되었다. 1657년 2월 부수찬이 되어 왕에게 신하들의 상소를 받아들일 것을 상소하였다. 그해 4월 11일 부수찬이 되었다가 8월 26일 부교리, 9월 5일 부응교가 되었다. 이때 충청도관찰사 서필원이 전팽령·곽시·정개청 등의 서원을 헐자 이를 비판하였으나 조정에 공론화되어 효종이 이를 묻자 전필원의 행실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으나, 무엇이 문제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1658년(효종 9년) 1월 부수찬이 되었다가 2월 사간원사간이 된 뒤 그해 5월 사헌부집의로 보직교체되고, 동 5월 28일 외직으로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다. 1659년 부사직을 거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 효종이 승하하자 바로 고례(古禮)에 따라 백관(百官)이 상복(喪服)을 갖추기를 청하였으나 의논이 행해지지 않았다. 결국 송시열, 송준길 등은 고례에서 서자의 상복은 1년을 입는다는 조항과 사례를 찾아내 이대로 할 것을 논하였는데, 남인인 허목과 윤휴는 왕위를 계승했는데 어떻게 차남이나 중자로 보느냐며 반박했고, 윤선도 등은 송시열 등이 소현세자를 정통으로 보는 것은 아니냐는 탄핵상소를 올리면서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1659년 새로 즉위한 현종에게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병조참의에 제수되었다. 그는 상소를 올려 인조 때 역적으로 논죄되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을 상소하였다. 이후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을 청하는 상소가 계속 올라와 숙종 때에 가서 복권되게 된다. 이로부터 현종으로부터 충성심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곧 아버지 민광훈이 죽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아버지 민광훈의 상을 치르고 3년상을 마쳐 상복을 벗은 뒤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으며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가 되어 성균관의 중수와 복원을 청하였다. 그 뒤 성균관대사성이 되어 다시 성균관 중건을 청하여 허락받아 비천당(丕闡堂), 일량재(一兩齋), 벽입재(闢入齋) 건물을 다시 개보수, 중건하였다. 이어 바로 왕명으로 경기도에 파견되어 경기도 지방의 전토(田土)를 조사하여 개량(改量)하고 돌아왔다.
이후 이조참의가 되어 비변사(備邊司)와 승문원(承文院)의 제조(提調)를 겸하고 바로 이조참판으로 승진했다가 얼마 뒤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충주(忠州)로 돌아갔다.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 그는 변방의 군사 요충지를 직접 살피고 성곽과 기계를 보수하였으며, 부세와 요역을 균일하게 맞추었다. 함경도관찰사로 재직 중에는 그곳의 학문을 장려하여 학풍과 문풍을 크게 일으켰다.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제수되고 사헌부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70년(현종 11) 이조·호조·공조의 판서를 거쳐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귀국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후 병조판서, 예조판서,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우부빈객, 좌부빈객, 동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 지경연사 등을 지냈다.
1674년 4월 9일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4월 25일 동지경연을 겸하였다. 1675년에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고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자의대비가 현종의 상복을 입는 것을 놓고 갑인예송이 발생, 숙종이 남인의 손을 들어주고 남인이 집권하면서 송시열은 유배되고, 그도 사직하고 물러났다. 이후 복직되어서 판중추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679년(숙종 5) 전라남도 장흥으로 귀양갔다. 1년 뒤, 허견의 옥사가 확대되면서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 그는 귀양에서 풀려나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승진하여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좌의정 등을 지냈다.
1680년(숙종 6년) 보사원종공신 1등(保社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때 허새의 옥사를 두고 서인에서 김석주, 김익훈 등이 남인에 사람을 심어 역모가 되게끔 유도한 것이 확인되면서, 정치공작에 대한 비난 여론이 서인에서 나오면서 김석주, 김익훈(金益勳) 처벌 여론이 나타나자 그는 김익훈, 김석주의 처벌을 반대하는 편에 섰고, 김익훈은 밀지(密旨)를 받고 반역을 고한 자이므로 사직(社稷)을 보위한 공이 있으니 딴 일을 끌어대어 죄줄 수 없다며 변호하는 한편 송시열이 윤선거를 죽은 뒤 조롱한 것은 지적하지 않고, 오히려 윤증(尹拯)이 송시열을 배척한 것만 지적하였다. 이 일로 서인의 일부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자 그는 노론의 편에 섰다.
그는 윤휴와 윤선도 등에 대해서는 냉정했지만 남인 권대운, 김덕원 등 일부에 대해서는 잘못이 없다고 보는 입장이었다. 1685년부터는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판사(判事)직에 있었다. 이때 윤증과 박세채는 남인과 화해하려면 남인을 먼저 용서하고 한직에는 등용하자고 그에게 권고하였으나 스승인 송시열이나 서인의 영수 김수항 등이 반대하므로 입장을 명확히 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득세하자 벽동(碧潼)에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형을 받았다. 그는 평소에 풍비(風痺)로 고생했는데, 풍증을 앓는 상태에서 유배되었다. 1692년 6월 25일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득세하자 신원(身元)되었으며, 관직도 회복되었다.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시신은 경기도 양주군으로 옮겨 장례를 치렀다가 뒤에 여주로 이장되었다. 현종의 묘정(廟庭)과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충주 누암서원(樓巖書院), 장흥 원도리 연곡서원(淵谷書院), 함흥 운전서원(雲田書院), 벽동 구봉서원(九峯書院), 정평 망덕서원(望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1]
그의 4대손 선공감가감역 민경혁의 딸이 인평대군의 후손 이채중에게 시집갔는데, 이채중은 다시 은신군의 사후 양자가 되면서 남연군에 책봉되고 왕위계승권에 오르게 되었다. 따라서 민정중은 흥선대원군의 외6대조가 된다.[1]
2. 1. 생애 초반
민광훈과 부인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선조 때의 우의정 민기이고 할머니는 연안 이씨로 이광정의 딸이다. 할머니 연안 이씨를 통해 남인의 청남파 홍우원, 남인 탁남파 허적 등과도 인척간이 되었다. 허적은 할머니 연안 이씨의 친정어머니 양천허씨의 친정 조카였고, 홍우원은 할머니 연안 이씨의 여동생의 남편으로 그에게 대이모부가 된다. 그러나 예송 논쟁을 계기로 이들과의 사이는 다소 벌어지게 되었다. 예송 논쟁 외에도 일부 남인이 희빈 장씨를 적극적으로 미는 것을 계기로 남인과는 원수나 다름없게 되었다.
친형은 학자 민시중이고 동생은 후일 인현왕후의 아버지가 되는 국구 민유중이었다. 명성황후와 순명효황후는 각각 민유중의 5대손, 6대손이 된다. 아버지 민광훈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동생 민유중과 함께 송준길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서인에 속했다.
2. 2. 관료생활 초반
1649년(인조 27) 4월 4일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으로 벼슬을 시작해 중직 대부(中直大夫) 행 세자시강원 사서 겸 춘추관 기사관(行世子侍講院司書兼春秋館記事官)으로 승진하여 인조실록 편찬시 실록청 도청 낭청(都廳郞廳)을 겸하여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예조좌랑,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었다. 1651년 6월 부사과(副司果)로 재직 중 상소를 올려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할 것과 인재를 헤아리는 것으로 책임을 맡기는 것, 억울한 자를 살펴 가릴 것을 상소하였다. 그의 상소로 정태제(鄭泰齊)가 석방에서 풀려나고, 조익 등이 사면되었다. 같은 해 홍문록(弘文錄)에 들었다.
이후 직언(直言)을 잘 한다고 인정받아 1651년(효종 2) 7월 사간원정언이 되고 바로 부조리를 일으킨 고관들을 논핵하였다. 그 해에 홍문관부수찬과 수찬을 거쳐 그해 12월 비변사 문사 낭청이 되었다. 이후 김자점의 옥사를 다스린 공로로 1652년 가자되었고[2], 부수찬이 되었다가 1652년 2월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왔다. 이후 사간원사간, 홍문관수찬·교리·응교, 사헌부집의를 지냈다. 이후 전라도 암행어사에 임명되고 이후 충청도, 경상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왔다. 1652년(효종 3년) 봄 부교리로 있을 때 상소하여 인재를 발굴하여 등용할 것을 적극 건의한다.
현재 윤휴 · 윤선거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유학(儒學)으로 당대의 촉망을 받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특명으로 백의(白衣)를 소견하시기를 고사(古事)처럼 하시어 제각기 갖고 있는 생각을 진달하게 하여 그들의 재주가 쓸만하면 채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돌려보내는 것이 가합니다. 윤휴와 윤선거는 모두 세신(世臣)인데, 만약 그들의 인품을 논한다면 윤휴는 재주와 식견이 탁월하고 윤선거는 국량이 견고하고 확실합니다.|현재 윤휴 · 윤선거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유학(儒學)으로 당대의 촉망을 받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특명으로 백의(白衣)를 소견하시기를 고사(古事)처럼 하시어 제각기 갖고 있는 생각을 진달하게 하여
그들의 재주가 쓸만하면 채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돌려보내는 것이 가합니다.
윤휴와 윤선거는 모두 세신(世臣)인데, 만약 그들의 인품을 논한다면
윤휴는 재주와 식견이 탁월하고 윤선거는 국량이 견고하고 확실합니다.중국어
그의 주청으로 윤휴, 윤선거 등의 학자들이 당색을 초월하여 조정에 등용되었다. 또, 송시열과 송준길이 조정에 뜻을 두지 않고 관작을 사퇴하려 했을 때도 여러번 만류하거나 그들을 불러들이게 한다. 남인 온건파 영수 허적은 외외종숙이었던 탓에 야당인 남인에 속한 윤휴, 허목 등을 적극 추천하여 정계입문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송 논쟁으로 스승인 송시열과 송준길이 남인의 인신공격성 힐난을 받자, 그 길로 남인과 영구히 절연하고 남인을 정계에서 제거하는데 앞장 선다.
또한 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문하에 만수재(晩守齋) 이민기(李敏琦) 등의 문하생을 배출했다.
그해 4월 4일에는 승지에 임명된 윤선도의 행실을 문제삼아 논핵하였고[3], 4월 16일 홍문관교리가 되어, 바로 곽지명(郭志明) 등을 인재로 천거하였다. 5월 21일에는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을 효종에게 직접 상주하여 논란이 되었다.[4]
1652년 여름의 흉년을 계기로 그는 효종에게 상소를 올려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원통함을 풀어주기를 상소하고, 청나라를 피해서 조선으로 망명한 명나라 한인(漢人)을 청나라에서 송환해줄 것을 요구하자, 효종에게 절대 중국인을 호로(胡虜)에게 보내면 안된다고 강력 반대하였다. 그해 8월 부수찬이 되었다가 9월 왕명으로 충청도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대동법이 편리한지를 탐문, 조사하고 오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5] 이후 부교리를 거쳐 경연시독관으로 있을 때 참찬관 민응형(閔應亨) 등과 함께 소현세자의 자녀들의 생활 문제를 공론화하고 군기가 엄하지 못하여 군정(軍政)이 무너진 것을 논하였다.
민회빈 강씨가 억울하게 죽은 것과 그 자녀는 어린데 모두 섬으로 귀양갔다가 풍토병으로 죽은 것을 당대의 사대부, 식자들이 상당수 억울하게 생각했으나 김홍욱이 물고된 것을 계기로 김집, 송준길 이외에는 아무도 말하지 못하였는데 민정중이 다시 민회빈 강씨는 억울하다며 이를 공론화시키자, 효종은 그를 처벌하려 했지만 차마 처벌하지 못하고 당대의 신하와 사대부들이 다 놀랐다. 결국 효종이 그를 인견(引見)하여 강씨의 옥사(獄事)를 취소시킬수 없음을 간곡하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그는 민회빈 강씨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생각을 꺾지 않고 이후 현종때 가서 다시 민회빈 강씨의 사면 복권을 상주하였다.
2. 3. 관료 생활
1653년(효종 4년) 1월 교리가 되었다가 다시 부교리로 임명되었고, 자신의 죄에 비해 과중한 형벌을 받은 관원들의 처벌을 개정해줄 것을 청하였다. 그해 4월 충청도암행어사로 나가 군정(軍政)이 문란한 지역의 지방 수령 6명을 보고하여 파면시켰다. 1655년(효종 6년) 10월 10일 자신이 상소를 하던 중의 말실수를 사죄하고 부교리직에서 사직을 청하였으나 오히려 효종은 이를 반려하고, 그해 11월 교리로 임명되었다. 1655년 12월 22일 노비추쇄도감(推刷都監)의 건의로 서필원과 민정중을 황해도 암행어사로, 권대운, 박세성을 평안도 암행어사로 정하였으나 효종이 평안도와 황해도를 바꾸라 하여 평안도암행어사로 다녀왔다.[6]
1656년(효종 7년) 1월 16일 홍문관교리가 되고, 임명된 직후에 올바른 인재를 등용할 것, 폭넓은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에 참여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1월 26일에는 인재를 등용하고 올바른 간언을 받아들일 것을 왕에게 상주하였고, 그의 상소로 효종은 1월 28일부터 재야의 인사들 중 발탁할 만한 인사들을 천거해서 올리도록 재상들에게 논의하게 하였다. 이때 그도 참여하여 윤휴 등을 천거하였다. 이어 신독재 김집을 포상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후 여러 번 홍문관교리에 재임명되었다. 1657년 2월 부수찬이 되어 왕에게 신하들의 상소를 받아들일 것을 상소하였다. 그해 4월 11일 부수찬이 되었다가 8월 26일 부교리, 9월 5일 부응교가 되었다. 이때 충청도관찰사 서필원이 전팽령·곽시·정개청 등의 서원을 헐자 이를 비판하였으나 조정에 공론화되어 효종이 이를 묻자 전필원의 행실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으나, 무엇이 문제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1658년(효종 9년) 1월 부수찬이 되었다가 2월 사간원사간이 된 뒤 그해 5월 사헌부집의로 보직교체되고, 동 5월 28일 외직으로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다. 1659년 부사직을 거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 효종이 승하하자 바로 고례(古禮)에 따라 백관(百官)이 상복(喪服)을 갖추기를 청하였으나 의논이 행해지지 않았다. 결국 송시열, 송준길 등은 고례에서 서자의 상복은 1년을 입는다는 조항과 사례를 찾아내 이대로 할 것을 논하였는데, 남인인 허목과 윤휴는 왕위를 계승했는데 어떻게 차남이나 중자로 보느냐며 반박했고, 윤선도 등은 송시열 등이 소현세자를 정통으로 보는 것은 아니냐는 탄핵상소를 올리면서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1659년 새로 즉위한 현종에게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병조참의에 제수되었다. 그는 상소를 올려 인조 때 역적으로 논죄되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을 상소하였다. 이후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을 청하는 상소가 계속 올라와 숙종 때에 가서 복권되게 된다. 이로부터 현종으로부터 충성심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곧 아버지 민광훈이 죽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아버지 민광훈의 상을 치르고 3년상을 마쳐 상복을 벗은 뒤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으며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가 되어 성균관의 중수와 복원을 청하였다. 그 뒤 성균관대사성이 되어 다시 성균관 중건을 청하여 허락받아 비천당(丕闡堂), 일량재(一兩齋), 벽입재(闢入齋) 건물을 다시 개보수, 중건하였다. 이어 바로 왕명으로 경기도에 파견되어 경기도 지방의 전토(田土)를 조사하여 개량(改量)하고 돌아왔다.
이후 이조참의가 되어 비변사(備邊司)와 승문원(承文院)의 제조(提調)를 겸하고 바로 이조참판으로 승진했다가 얼마 뒤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충주(忠州)로 돌아갔다.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 그는 변방의 군사 요충지를 직접 살피고 성곽과 기계를 보수하였으며, 부세와 요역을 균일하게 맞추었다. 함경도관찰사로 재직 중에는 그곳의 학문을 장려하여 학풍과 문풍을 크게 일으켰다.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제수되고 사헌부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70년(현종 11) 이조·호조·공조의 판서를 거쳐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귀국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후 병조판서, 예조판서,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우부빈객, 좌부빈객, 동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 지경연사 등을 지냈다.
1674년 4월 9일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4월 25일 동지경연을 겸하였다. 1675년에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고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자의대비가 현종의 상복을 입는 것을 놓고 갑인예송이 발생, 숙종이 남인의 손을 들어주고 남인이 집권하면서 송시열은 유배되고, 그도 사직하고 물러났다. 이후 복직되어서 판중추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679년(숙종 5) 전라남도 장흥(長興)으로 귀양갔다. 1년 뒤, 허견의 옥사가 확대되면서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 그는 귀양에서 풀려나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승진하여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좌의정 등을 지냈다.
1680년(숙종 6년) 보사원종공신 1등(保社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때 허새의 옥사를 두고 서인에서 김석주, 김익훈 등이 남인에 사람을 심어 역모가 되게끔 유도한 것이 확인되면서, 정치공작에 대한 비난 여론이 서인에서 나오면서 김석주, 김익훈(金益勳) 처벌 여론이 나타나자 그는 김익훈, 김석주의 처벌을 반대하는 편에 섰고, 김익훈은 밀지(密旨)를 받고 반역을 고한 자이므로 사직(社稷)을 보위한 공이 있으니 딴 일을 끌어대어 죄줄 수 없다며 변호하는 한편 송시열이 윤선거를 죽은 뒤 조롱한 것은 지적하지 않고, 오히려 윤증(尹拯)이 송시열을 배척한 것만 지적하였다. 이 일로 서인의 일부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자 그는 노론의 편에 섰다.
그는 윤휴와 윤선도 등에 대해서는 냉정했지만 남인 권대운, 김덕원 등 일부에 대해서는 잘못이 없다고 보는 입장이었다. 1685년부터는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판사(判事)직에 있었다. 이때 윤증과 박세채는 남인과 화해하려면 남인을 먼저 용서하고 한직에는 등용하자고 그에게 권고하였으나 스승인 송시열이나 서인의 영수 김수항 등이 반대하므로 입장을 명확히 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득세하자 벽동(碧潼)에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형을 받았다. 그는 평소에 풍비(風痺)로 고생했는데, 풍증을 앓는 상태에서 유배되었다.
2. 4. 거듭된 유배와 사망
1674년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동지경연을 겸하였다. 1675년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고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자의대비가 현종의 상복을 입는 기간을 놓고 갑인예송이 벌어졌다. 숙종이 남인의 손을 들어주고 남인이 집권하면서 송시열은 유배되고, 민정중도 사직하고 물러났다. 이후 복직되어 판중추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679년 전라남도 장흥으로 유배되었다. 1년 뒤, 허견의 옥사가 확대되면서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귀양에서 풀려나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승진하여 의정부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다.
1680년 보사원종공신 1등(保社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때 서인에서 김석주, 김익훈 등이 남인에게 사람을 심어 역모가 되게끔 유도한 것이 확인되면서, 정치공작에 대한 비난 여론이 나왔다. 김석주, 김익훈 처벌 여론이 서인에서 나오자, 민정중은 김익훈과 김석주의 처벌을 반대하는 편에 섰다. 김익훈은 밀지(密旨)를 받고 반역을 고한 자이므로 사직(社稷)을 보위한 공이 있으니 딴 일을 끌어대어 죄줄 수 없다며 변호하였다. 한편 송시열이 윤선거를 죽은 뒤 조롱한 것은 지적하지 않고, 오히려 윤증이 송시열을 배척한 것만 지적하였다. 이 일로 서인의 일부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자 그는 노론의 편에 섰다.
민정중은 윤휴와 윤선도 등에 대해서는 냉정했지만, 남인 권대운, 김덕원 등 일부에 대해서는 잘못이 없다고 보았다. 1685년부터는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판사(判事)직에 있었다. 이때 윤증과 박세채는 남인과 화해하려면 남인을 먼저 용서하고 한직에나마 등용하자고 권고하였으나, 스승인 송시열이나 서인의 영수 김수항 등이 반대하여 입장을 명확히 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득세하자 벽동(碧潼)에 유배되어 위리안치형을 받았다. 그는 평소에 풍비(風痺)로 고생했는데, 풍증을 앓는 상태에서 유배되었다. 1692년 6월 25일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득세하자 신원(身元)되었으며, 관직도 회복되었다.
2. 5. 사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시신은 경기도 양주군으로 옮겨 장례를 치렀다가 뒤에 여주로 이장되었다. 현종의 묘정(廟庭)과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충주 누암서원(樓巖書院), 장흥 원도리 연곡서원(淵谷書院), 함흥 운전서원(雲田書院), 벽동 구봉서원(九峯書院), 정평 망덕서원(望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1]
그의 4대손 선공감가감역 민경혁의 딸이 인평대군의 후손 이채중에게 시집갔는데, 이채중은 다시 은신군의 사후 양자가 되면서 남연군에 책봉되고 왕위계승권에 오르게 되었다. 따라서 민정중은 흥선대원군의 외6대조가 된다.[1]
3. 저서 및 글씨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할아버지 | 민기(閔機) | |
할머니 | 남양 홍씨 | 홍익현(洪翼賢)의 딸 |
아버지 | 민광훈(閔光勳) | |
어머니 | 연안 이씨 | 이광정의 딸, 허잠의 외손녀, 허적의 고종누이 |
형 | 민시중(閔蓍重) | 민영휘의 7대조 |
형수 | 풍산 홍씨 | 홍탁의 딸, 정명공주의 시질녀 |
동생 | 민유중(閔維重) | 인현왕후의 부친, 명성황후 민씨의 6대조, 고종의 외7대조 |
전처 | 평산 신씨 | 신승(申昇, 신익성과 정숙옹주의 아들)의 딸 |
계실 | 남양 홍씨 | 홍처윤(洪處尹, 홍명원의 아들, 홍처후[7]) |
아들 | 민진장(閔鎭長)[8] | |
며느리 | 남이성(南二星)의 딸 | |
손자 | 민재수(閔在洙) | 민영찬의 5대조부 |
손자 | 민계수(閔啓洙) | |
손자 | 민덕수(閔德洙) | |
손자 | 민학수(閔學洙) | |
손자 | 민안수(閔安洙) | 흥선대원군의 외고조부 |
딸 | 여흥 민씨 | 이인식(李寅烒)에게 출가 |
계실 | 전주 이씨 | 전평군 이경정(李慶禎)의 딸[9] |
첩실 | 전주 이씨 | 이숙의 서녀[10], ? ~ 1680년 |
서녀 | 여흥 민씨 | 1663년 8월 11일 ~ 1680년 9월 17일 |
사위 | 이훤(李煊) |
5. 기타
민정중은 첩 이숙의 딸 전주이씨에게서 얻은 서녀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직접 묘비문을 짓기도 했다.[11] 묘비문은 민정중의 문집 《노봉문집》 제9권 묘표(墓表)편에 '이훤 아내의 묘표(李煊妻墓表)'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묘비문에는 서녀의 출생(1663년), 성장 과정, 혼인, 사망(1680년), 장례(1681년) 등에 대한 기록과, 서녀와 그 소생, 그리고 서녀의 동기간 6명 모두 요절한 것에 대한 슬픔이 나타나 있다. 특히, '적고(嫡姑)의 상을 당해 또 슬픔과 공경을 모두 극진히 하는 것에 감탄하였다.', '이씨 집안 선산의 왼쪽 오좌(午坐 정북향)의 언덕에 옮겨 장사 지냈으니, 바로 흥원(興原)의 강북쪽 영취산(靈鷲山) 아래 행재동(行齋洞)이다. 큰오라비인 진장(鎭長)이 가서 그 일을 맡았다.'라는 구절을 통해 서출임을 언급하면서도, '민정중의 딸(議政府左議政鼎重之女也)', '이 아비', '그 아비'라 칭하며 부정을 드러냈다.
天下同禮|천하동례중국어를 주장한 송시열의 문인이었던 민정중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자신의 서녀에게도 스스로를 아버지라 칭하고, '이 아비', '그 아비', '자신의 딸'이라 칭하였다.
참조
[1]
정보
외할머니의 조카로 어머니의 외종형제이다.
[2]
실록
김자점 역옥을 다스릴 때 국청에 참여한 자들에게 상을 내리다
효종실록
1652-02-02
[3]
실록
민정중·김시진이 이상진과 윤선도의 일을 아뢰는 상소를 올리다
효종실록
1652-04-04
[4]
실록
역강의 옥에 관해 신하들에게 이르다
효종실록
1652-05-21
[5]
실록
홍처대·민정중 등을 명소하여 호서 지방의 대동법의 편의 여부를 탐문케 하다
효종실록
1652-09-16
[6]
실록
추쇄도감이 서필원·민정중·홍주삼 등을 어사로 삼을 것을 청하다
효종실록
1655-12-22
[7]
정보
한성우의 장인
[8]
정보
계실 남양홍씨의 소생이다.
[9]
웹사이트
영조 20년에 건립된 민정중 신도비에는 누락되어 있어 이혼의 가능성도 있다. 이씨의 존재는 이경정의 사위로 기록된 전주 이씨 왕실 족보 중 장평부정파(長平副正派)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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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정보
동생 민유중의 맏사위 이만창(인현왕후의 형부)의 서누이이다.
[11]
웹사이트
庶女閔鼎重妾驪興人左相諡文忠父監司贈領相光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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