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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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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악바르는 무굴 제국의 제3대 황제로서, 1542년 서인도 신드 지방에서 태어났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바이람 한의 도움으로 제국의 기반을 다진 후, 출신에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고 라지푸트 왕족과의 결혼 동맹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인도 북부 대부분을 병합하고, 지즈야 폐지, 만사브다리 제도 도입 등 무굴 제국의 제도 확립에 힘썼다. 또한, 아그라 성과 파테푸르 시크리 등 웅장한 건축물을 건설하고, 문화와 예술을 장려하여 무굴 제국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종교적으로는 다양한 종교에 관심을 가지고 딘-이 이라히라는 종교를 창시하여 종교 간 화합을 추구했다. 말년에는 데칸 지방으로 영토를 확장하려 했으나, 아들 셀림과의 불화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1605년 사망 후 아들 자한기르가 황위에 올랐다.

2. 생애

무굴 제국의 제2대 황제 후마윤의 아들로, 아버지가 파슈툰인 장군 셰르 샤 수리에게 패배하여 유랑하던 시기에 태어났다. 아버지 후마윤이 사파비 왕조의 도움으로 1555년 인도를 되찾았으나 이듬해 사고로 사망하자, 악바르는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초기에는 아버지의 충신 바이람 칸의 도움으로 수르 왕조 등 적대 세력을 물리치고 제국의 기반을 다졌다.[18][253][254][255][256][14][20][27][28][260][261][262][263]

성인이 된 악바르는 바이람 칸 등 기존 세력을 정리하고 직접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출신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으며, 특히 라지푸트 왕후들과의 혼인 동맹 등을 통해 힌두 세력을 포용하여 제국의 군사력을 강화했다. 이를 바탕으로 북인도 대부분을 통일하는 넓은 영토를 확보했다.[47][265][266][43][268][48][49][46][269][102][103]

광대한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악바르는 제도 정비에 힘썼다. 이슬람 율법에 따른 비무슬림 인두세(지즈야)를 폐지하는 등 세금 제도를 개혁하고, 군인과 관료에게 병력 유지 의무를 부과하고 그에 따른 지위를 부여하는 만사브다리 제도를 도입하여 행정 및 군사 체계를 확립했다. 이러한 개혁에 대한 반발도 있었으나, 악바르는 이를 진압하고 제국의 안정을 이루었다.[34]

악바르는 대규모 건설 사업을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델리의 후마윤 묘지, 아그라의 성채를 보수하여 '악바르의 도시'라는 뜻의 악바라바드로 명명했으며, 새로운 수도 파테푸르 시크리를 건설하기도 했다. 라호르 역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중요한 도시였다.

종교적으로 악바르는 이슬람교도였지만, 제국 내 다수의 힌두교도를 비롯해 기독교 등 여러 종교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특히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아 모든 종교를 존중하는 자신만의 종교관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측근 아브르하즈르가 기록한 연대기 아크바르나마에 디네 이라히(신의 종교)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문화적으로는 글을 읽지 못했지만 예술과 학문을 깊이 사랑하고 후원했으며, 산스크리트 문학 작품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하는 사업 등을 지원했다.

치세 말기에는 데칸 지역으로 진출하여 아흐마드나가르 왕조 등과 싸워 영토를 남쪽으로 확장했다.[296] 그러나 후계자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유일하게 남은 아들 살림(자한기르)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 실의에 빠진 말년을 보냈다.[303][304] 1605년 아그라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아그라 근교 시칸드라의 악바르 묘에 안치되었다.[28][235][306][307]

2. 1. 출생과 유년 시절

소년 시절의 악바르


무굴 제국의 제2대 황제 후마윤의 아들로, 아버지 후마윤이 파슈툰인 장군 셰르 샤 수리에게 차우사(1539년)와 칸나우지(1540년)에서 연이어 패배하여 북인도의 제위를 빼앗기고 서쪽으로 망명하던 시기에 태어났다.[18] 후마윤은 오늘날의 신드 지방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동생 힌달 미르자의 페르시아인 스승이었던 셰이크 알리 악바르 자미의 14세 딸 하미다 바누 베굼을 만나 결혼했다. 악바르는 1542년 10월 15일[253][254][255][256] (라자브 5일, 949년 AH)[14] 현지 힌두 군주 라나 프라사드가 피난처를 제공한 라자푸트의 우메르코트 요새(오늘날 파키스탄 신드 주 우메르코트)에서 태어났다.[20] 그의 출생 이름은 외조부의 이름에서 따온 바드르앗딘 무함마드 악바르였으나,[257] 일부 기록에서는 자랄 앗딘 무함마드 악바르라고도 하며, 원래 이름과 생일을 나중에 변경했다는 주장도 있다.[19]

악바르와 그의 아버지 후마윤


아버지 후마윤의 긴 망명 생활 동안 악바르의 유년 시절은 불안정했다. 후마윤은 제국 재건을 위해 동생들인 캄란 미르자, 아스카리 미르자, 힌달 미르자와 싸워야 했고, 결국 이란사파비 왕조에 망명했다.[258] 1543년 11월, 후마윤이 사파비 왕조로 떠나면서 어린 악바르는 칸다하르를 통치하던 삼촌 아스카리에게 인질로 보내졌고,[255] 1544년 겨울에는 카불을 통치하던 또 다른 삼촌 캄란 미르자에게로 옮겨졌다.[255] 이 시기 악바르는 주로 삼촌들과 캄란 미르자의 아내를 비롯한 이모들의 손에서 자랐다. 그는 사냥, 달리기, 싸움 등 활동적인 기술은 익혔지만, 글을 읽고 쓰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대신 저녁 시간에는 다른 사람이 책을 읽어주는 것을 들었다.[21][22]

어린 시절 코끼리를 타는 악바르


악바르는 아버지와 삼촌들의 권력 다툼 속에서 여러 차례 인질 신세를 겪었다. 1545년 11월, 후마윤이 아스카리를 물리치고 카불에 입성하면서 악바르는 아버지와 잠시 재회했지만,[255] 이듬해 후마윤이 다시 카불에서 쫓겨나자 악바르는 또다시 캄란의 인질이 되었다.[255] 후마윤이 카불을 포위 공격하던 중, 캄란은 어린 악바르를 성벽 위에 세워 포격을 막으려 하기도 했으나, 포병 지휘관의 기지로 무사할 수 있었다.[255][259] 1547년 4월, 캄란이 카불에서 도망치면서 악바르는 다시 아버지 후마윤과 함께하게 되었고,[255] 그해 11월 처음으로 가정교사의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255] 하지만 1550년 상반기에 캄란이 다시 카불을 점령하면서 악바르는 세 번째로 인질이 되었다가,[255] 같은 해 후반 후마윤이 카불을 최종적으로 탈환하면서 아버지 곁으로 돌아왔다.[255]

1551년, 악바르는 9세의 나이로 가즈니 총독에 처음 임명되었다.[255] 같은 해 11월, 후마윤에게 충성했던 막내 삼촌 힌달 미르자가 캄란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자,[23] 후마윤은 악바르를 힌달의 딸이자 그의 사촌인 루카이야 술탄 베굼과 약혼시키고 힌달의 군대와 재산을 물려주었다.[24][25] 악바르와 루카이야는 이후 펀자브잘란다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26]

1555년, 셰르 샤 수리의 아들 이슬람 샤 수리 사후 수르 왕조의 혼란을 틈타 후마윤은 사파비 왕조 타흐마스프 1세의 지원을 받아 델리를 재정복했다.[27] 그해 6월 악바르는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수르 왕조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충신 바이람 칸이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 11월에는 펀자브 총독으로 임명되었다.[255] 그러나 델리 재정복 몇 달 후인 1556년 초, 후마윤은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바이람 칸은 후마윤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악바르의 순조로운 제위 계승을 준비했다.[28]

2. 2. 즉위와 초기 통치

무굴 제국의 제2대 황제 후마윤1555년 인도를 재정복했지만, 이듬해인 1556년 1월 도서관 계단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253] 이에 따라 그의 아들 악바르는 1556년 2월 14일, 델리에서 불과 13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했다.[253]

즉위 초기, 어린 악바르의 통치는 매우 불안정했다. 아버지 후마윤이 남긴 중신 바이람 한이 섭정으로서 그를 보좌했지만,[253] 셰르 샤가 세운 수르 왕조 등 여러 적대 세력이 델리 근교에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수르 왕조의 힌두 장군이었던 헤무(Hemchandra Vikramaditya)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260][261] 그는 본래 채소 장수 출신이었으나 능력으로 수르 왕조 군대의 총사령관이자 재상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었다.[260]

후마윤이 사망하자 헴무는 혼란을 틈타 반란을 일으켜 델리아그라를 점령했다.[260][261] 1556년 10월, 악바르와 바이람 한이 펀자브 지방에서 수르 왕조의 잔당을 소탕하던 중 델리 함락 소식이 전해졌다.[261] 당시 무굴 제국군은 약 2만 명에 불과했으나 헴무의 군대는 10만 명이 넘어[261], 많은 장교들이 공포에 질려 카불로 후퇴하여 군대를 재정비하자고 주장했다.[261] 그러나 악바르와 바이람 한은 즉시 반격해야 한다고 결정했고, 바이람 한은 델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타르디 베그를 처형하며 군대의 기강을 바로잡았다.[261]

같은 해 11월 5일, 악바르가 이끄는 무굴 제국군은 델리 북쪽 교외의 파니파트 평원에서 헴무의 대군과 맞붙었다(제2차 파니파트 전투).[262][263] 이곳은 1526년 악바르의 할아버지인 바부르로디 왕조를 격파하고 무굴 제국을 건국했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했다.[262][263]

전투 초반, 수적으로 압도적인 헴무의 군대가 무굴 군을 포위하며 승리가 눈앞에 보였다.[262][263] 그러나 전투 중 코끼리 위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헴무가 우연히 날아온 화살에 눈을 맞아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서 전세는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지휘관을 잃은 헴무의 군대는 큰 혼란에 빠져 결국 궤멸되었다.[262][263]

헴무는 생포되어 악바르 앞에 끌려왔다. 바이람 한은 악바르에게 이교도를 직접 처단하여 가지(Ghazi, 이슬람의 전사) 칭호를 얻으라고 권유했지만, 악바르는 이미 저항할 힘을 잃은 적을 직접 죽이는 것을 거부했다.[262] 대신 바이람 한이 헴무를 처형했고, 악바르는 그의 칼에 손을 얹는 것으로 의례를 마쳤다.[262] 제2차 파니파트 전투의 승리로 악바르는 델리를 되찾았고, 아버지 후마윤이 재건했던 무굴 제국의 기반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2. 3. 권력 장악과 제국 확장

악바르 통치하의 무굴 제국 (노란색) - 군사 원정 종료 후


악바르가 13세의 나이로 즉위했을 당시, 무굴 제국의 기반은 아직 불안정했다. 아버지 후마윤사파비 왕조의 도움으로 델리아그라를 되찾았지만,[39] 악바르 즉위 직후 수르 왕조 세력이 다시 이 지역들을 점령했다. 카불의 무굴 거점 역시 바다흐샨의 통치자 미르자 술레이만의 침략 위협에 놓여 군사적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웠다.[39]

섭정 바이람 칸은 힌두 군대를 이끌고 델리와 아그라를 장악한 헤무를 격퇴하기 위해 군대를 재정비했다.[42] 1556년 11월 5일, 파니파트 제2차 전투에서 바이람 칸이 이끄는 무굴군은 헤무의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델리와 아그라를 탈환했다.[43] 이후 악바르는 펀자브 지역에서 활동하던 또 다른 수르 왕조의 경쟁자 시칸다르 샤 수리를 격파하고 라호르물탄을 장악했으며, 1558년에는 라자스탄으로 향하는 길목인 아즈메르와 괄리오르 요새를 점령하며 제국의 기반을 다졌다.[44] 악바르는 티무르 왕조의 유산을 인도에서 재건하고 영구적인 통치를 확립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39][44][45]

악바르가 무굴 제국의 수장들과 귀족들과 함께 매사냥(팔콘리)을 하는 모습. 그의 섭정 바이람 칸도 함께 있다.


바이람 칸의 아들인 젊은 압둘 라힘 칸-이-카나가 악바르에게 인사하는 모습


악바르는 성인이 되면서 직접 통치권을 행사하고자 했다. 1560년, 그는 유모 마함 아나가 등 측근들의 지지를 받아 섭정 바이람 칸을 해임하고 메카 순례를 명했다.[47][265][266] 바이람 칸은 이에 불복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43][268] 펀자브에서 악바르 군대에 패배하고 항복했다.[48] 악바르는 그를 용서하고 순례를 계속하도록 허락했지만, 바이람 칸은 메카로 가는 도중 개인적인 원한을 품은 아프간인에게 암살당했다.[49][46][268][269] 악바르는 바이람 칸의 아내 살리마 술탄 베굼과 아들 압둘 라힘 칸-이-카나를 거두어들였다.[268]

바이람 칸 제거 후, 악바르는 유모 마함 아나가의 아들이자 의붓형제인 아드함 칸의 세력도 견제해야 했다. 1560년, 아드함 칸은 말와 정복 작전을 지휘했으나, 점령 과정에서 잔혹한 학살을 저지르고 전리품을 독차지하려 했다.[46] 악바르는 직접 말와로 가서 아드함 칸의 지휘권을 박탈했다. 이후 아드함 칸은 1561년 악바르와 다시 충돌했고, 황제는 그를 아그라 궁궐 난간에서 두 번 던져 처형했다.[46] 아드함 칸 사후, 악바르는 특정 귀족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전문 장관직에 권한을 분산시켰다.[46]

우즈베크 귀족의 반란에서의 코끼리 충돌 (자운푸르)


악바르는 제국 내 여러 세력의 도전을 극복해야 했다. 1564년부터 우즈베크 출신 귀족들이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악바르는 이를 모두 진압하고 주동자들을 처형하며 중앙 집권을 강화했다.[50][278][281] 또한 아그라 인근의 미르자 가문(악바르의 사촌들)의 반란도 진압했다.[50] 1566년에는 카불의 통치자이자 동생인 미르자 무함마드 하킴이 제위를 노리고 펀자브로 진군했으나, 악바르의 군세에 밀려 물러났다.[50]

1564년, 악바르는 곤드와나 지방 정복에 나섰다. 이 지역은 야생 코끼리 자원으로 중요했다.[51] 카라의 총독 아사프 칸이 원정을 이끌어 곤드족의 여왕 라니 두르가바티와 라자 비르 나라얀을 격파하고 막대한 부와 코끼리를 노획했다.[50][52] 그러나 아사프 칸 역시 전리품을 숨기려다 발각되었고, 도주 끝에 항복하여 용서받았다.[52]

라지푸트(Rajput) 왕들과 회견하는 악바르(Akbar)


악바르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 북인도의 강력한 토착 세력인 라지푸트와의 관계 구축에 힘썼다.[276] 그는 출신에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라지푸트 왕족과의 혼인 동맹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562년, 암베르 왕국의 라자 바르말의 딸 마리아무즈자마니와 결혼한 것을 시작으로,[102] 여러 라지푸트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악바르는 라지푸트 왕족들을 무슬림 귀족들과 동등하게 대우하고 궁정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으며, 그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했다.[102] 이러한 정책을 통해 라지푸트 세력은 무굴 제국의 충실한 동맹이자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103] 암베르 왕국의 바그완트 다스와 만 싱 등 많은 라지푸트 귀족들이 제국 내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다.[102]

치토르가르를 공격하는 악바르


하지만 모든 라지푸트 왕국이 악바르에게 복속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라지푸트 중 가장 높은 혈통을 자부하던 메와르 왕국시소디아 왕조는 끝까지 저항했다.[282] 1567년, 악바르는 대군을 이끌고 메와르의 수도 치토르가르 요새를 포위 공격했다(치토르가르 포위전).[282][276] 격렬한 전투 끝에 1568년 2월 요새는 함락되었지만,[283] 메와르의 라나 우다이 싱 2세는 이미 우다이푸르로 피신하여 저항을 계속했다.[283] 1569년에는 분디 왕국의 란탐보르 요새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악바르는 분디의 라자 수르잔 하다와 직접 협상하여 결혼 동맹 없이 동맹 관계를 맺었다.[102] 메와르 왕국은 우다이 싱 2세의 아들 마하라나 프라탑이 계승하여 악바르 통치 기간 내내 저항을 이어갔고, 양측의 강화는 악바르 사후인 1614년에야 이루어졌다.[283]

악바르는 말와 지역을 완전히 확보하기 위해 1562년 다시 군대를 파견했다.[273] 이전 통치자 바즈 바하두르가 잠시 권력을 되찾았으나, 결국 1570년 악바르에게 귀순하여 말와는 무굴 제국의 주로 편입되었다.[46]

수라트(Surat)에 도착한 악바르


라자스탄과 말와를 정복한 악바르는 다음 목표로 구자라트를 삼았다. 구자라트는 아라비아 해에 면해 있어 해외 무역과 메카 순례의 중요한 거점이었다.[283] 당시 구자라트 술탄 왕조는 내부 혼란을 겪고 있었고, 유력 귀족 이티마드 칸이 악바르에게 개입을 요청했다.[284] 1572년 악바르는 구자라트로 출병하여 수도 아마다바드에 무혈 입성하고,[283][284] 항구 도시 캄바트와 수라트를 차례로 점령했다.[284][285] 이때 포르투갈 세력과 처음 접촉하기도 했다.[284] 1573년 구자라트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악바르는 신속하게 재원정하여 반란을 진압하고,[285] 라자 토다르 말에게 행정 정비를 맡겼다.[286] 구자라트 정복으로 무굴 제국은 서쪽 해안을 확보하고 막대한 무역 이익을 얻게 되었다.[289] 악바르 정부는 상업을 장려하고 교역로 안전 확보에 힘썼으며, 카이베르 고개 도로 개선, 아톡 요새 건설 등으로 중앙아시아와의 육로 무역 활성화에도 노력했다.[96][97]

구자라트 정복 후 악바르는 동쪽의 벵골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285] 당시 벵골은 아프간계 카라라니 왕조의 다우드 칸 카라라니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악바르에게 복종하지 않고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했다.[285] 1574년 악바르는 직접 원정에 나서 파트나를 점령하고,[285][286][290] 무누임 칸과 토다르 말에게 후속 작전을 맡겼다. 1576년 라지마할 전투에서 다우드 칸을 최종적으로 격파하고 벵골을 제국에 병합했다.[285] 이후 1592년에는 만 싱이 오리사 지역까지 정복하여 동부 국경을 안정시켰다.[285]

악바르의 통치 중 가장 큰 위기는 1580년대 초반에 찾아왔다. 카불을 통치하던 동생 미르자 하킴이 제위를 노리고 제국 동부의 불만 세력과 연계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285][292] 벵골과 비하르 지역에서 대규모 반란이 발생했고, 미르자 하킴은 펀자브를 침공했다.[285][293] 악바르는 토다르 말을 동부로 파견하여 반란 진압을 맡기는 한편, 1581년 직접 대군을 이끌고 카불 원정에 나섰다.[285] 악바르는 카불을 점령하고 미르자 하킴을 몰아냈으며, 여동생 바흐투니사 베굼을 카불 총독으로 임명했다.[285] 동부의 반란도 악바르의 카불 점령 소식이 전해지면서 진압되었다.[285]

1585년 미르자 하킴이 사망하자, 악바르는 카불을 제국의 직할령으로 편입하고 수도를 라호르로 옮겨 북서부 국경 방어에 집중했다.[295] 당시 중앙아시아에서는 우즈베크의 압둘라 칸 2세가 세력을 확장하며 무굴 제국을 위협하고 있었다.[295] 악바르는 압둘라 칸과 협정을 맺는 한편, 아프간 부족들, 특히 유수프자이족을 제압하여 카이베르 고개를 통한 교역로를 확보했다.[295][296] 또한 1586년 카슈미르를 정복하고, 1591년에는 신드 지역까지 병합하여 북서부 국경을 안정시켰다.[296] 1598년 압둘라 칸 2세가 사망하여 우즈베크의 위협이 줄어들자 악바르는 수도를 다시 아그라로 옮겼다.

치세 말기인 1593년부터 악바르는 남쪽의 데칸 술탄국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아흐마드나가르 술탄국을 공격하여 1595년 베라르를 할양받았고, 1600년에는 수도 아흐마드나가르 요새를 함락시켰다. 또한 칸데시 술탄국의 아시르가르 요새를 1601년 점령하고, 아흐마드나가르, 베라르, 칸데시를 합쳐 데칸 수바(주)를 신설했다. 악바르는 사망할 때(1605년)까지 동쪽의 벵골 만에서 서쪽의 칸다하르바다흐샨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76]

악바르의 군사적 성공은 만사브다리 제도 도입을 통한 군사 및 행정 조직 개편,[34] 그리고 대포, 요새, 코끼리 활용의 혁신에 힘입은 바가 컸다.[33] 그는 또한 오스만 제국 및 유럽 세력과의 교류를 통해 선진 화승총 기술을 도입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35][36] 이러한 군사적 우위는 무굴 제국이 인도 아대륙에서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8][33]

2. 4. 말년

말년의 악바르


악바르 묘


악바르는 치세 말기에 데칸 지방으로 진출하여 영토 확장에 나섰다. 1591년부터 1600년까지 데칸 술탄 왕조(비자푸르 왕국, 골콘다 왕국, 아흐마드나가르 왕국, 비달 왕국, 베라르 왕국)와 전투를 벌여 제국의 판도를 남쪽으로 크게 넓혔다.[296] 이 시기 악바르는 데칸의 무슬림 왕국들과 대립하던 남인도의 비자야나가라 왕국과 교류하기도 했으며, 벤카타 2세와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받았고, 1600년에는 악바르의 사절이 비자야나가라 왕국의 수도 찬드라기리에서 벤카타 2세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악바르의 말년은 순탄치 않았다. 세 아들 살림, 무라드, 다니얄 중 무라드와 다니얄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장남 살림만이 남게 되었다.[303] 하지만 살림은 청년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고 아편에 빠지는 등 문제를 일으켜 악바르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303][304] 이로 인해 악바르는 후계자 문제로 실의에 빠진 말년을 보냈다.

1600년, 살림은 결국 아버지 악바르에게 반기를 들고 봉기했다. 악바르가 화해를 위해 보낸 충신 아불 파즐을 살림이 살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303][305] 이에 악바르는 1604년 살림의 근거지인 알라하바드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군했으나, 악바르의 어머니 하미다가 위독해지자 군대를 물렸다. 결국 살림이 사과하면서 부자간의 화해가 이루어졌다.[306][305]

1605년 10월 3일, 악바르는 이질(적리)에 걸려 병석에 누웠고,[28]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같은 해 10월 27일 아그라에서 사망했다.[235][306] 악바르 사후, 아들 살림이 제4대 황제 자한기르로 즉위했다.[306] 악바르의 유해는 아그라 근교의 시칸드라로 옮겨져 매장되었으며, 그곳에 악바르 묘가 세워졌다.[235][307]

3. 통치 정책

악바르


마함 안가 세력 제거 후 제국의 실권을 장악한 악바르는 황제 중심의 통치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정책들을 추진했다.[270] 그는 재상에게 집중되었던 권한을 분산시키고,[270]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재들을 등용하여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며 제국 확장에 나섰다.[276]

광대한 영토와 다양한 종교 및 민족 집단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악바르는 무굴 제국의 제도 확립에 힘썼다. 대표적으로 비무슬림에게 부과되던 지즈야(인두세)를 폐지하여 제국 통합을 도모했다.[297]

또한, 군인과 관료에게 병력 유지 의무를 부과하고 계급(만사브)을 부여하는 만수브다리 제도를 도입하여 안정적인 군사력 확보와 관료 조직 정비를 꾀했다.[298] 세금 제도에서는 수르 왕조의 제도를 계승·발전시킨 자브트 제도를 시행하여 토지 생산력에 기반한 현금 납세 방식을 도입했다. 이는 상품 유통과 생산력 증대에 기여했다.[298]

1579년부터 이러한 개혁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으나, 이를 진압하면서 무굴 제국의 지배는 더욱 안정되었다.

악바르는 통치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298]

「군주가 지녀야 할 가장 고귀한 자질은,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다」

3. 1. 중앙 집권 강화

1560년 바이람 칸이 실각한 후,[266][267][268] 악바르는 섭정 체제를 끝내고 제국의 실권을 직접 장악했다.[270] 이는 황제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악바르는 기존의 중앙 정부 시스템을 개편하여 황제의 권한을 강화했다. 델리 술탄 왕조 시대부터 이어져 온 재상직(와지르, wazir)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주요 행정 기능을 4개의 부서로 나누어 권력을 분산시켰다.[77][270]

  • 재무 부서: 재정과 토지(자기르, 이남) 관리를 담당하며 와지르가 이끌었다.[77]
  • 군사 부서: 군대 관련 업무를 총괄하며 미르 바크시(mir bakshi)가 책임졌다. 미르 바크시는 정보 수집, 군사 임명 및 승진 추천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77]
  • 황실 부서: 황실 가족(후궁 포함) 관리 및 궁정 운영을 담당하며 미르 사만(mir saman)이 이끌었다.[77]
  • 사법 부서: 최고 카지(qazi)가 이끄는 독립된 조직으로, 종교 관련 문제도 담당했다.[77]


이러한 개편을 통해 재상에게 집중되었던 권한을 약화시키고 황제가 각 부서를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270] 악바르는 이 과정을 통해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으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재들을 등용하여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했다.[276]

또한 악바르는 군대와 관료 조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사브다리 제도를 도입했다.[34][82][298] 이 제도는 모든 군인과 관료(만사브다르, mansabdar)에게 '만사브'라는 계급을 부여하고, 각 계급에 따라 유지해야 할 기병 수를 정하는 방식이었다.[82][298] 만사브다르는 33개의 등급으로 나뉘었으며, 높은 계급은 주로 왕족에게 주어졌다.[85] 제국의 상비군은 소규모였고, 군대의 대부분은 만사브다르가 제공하는 병력으로 구성되었다.[85] 만사브다르는 능력과 황제의 신임에 따라 승진했으며,[86] 높은 수준의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말의 품종(아라비아 말)과 상태를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등 엄격한 관리가 이루어졌다.[87] 만사브다리 제도는 관료 조직을 계층화하고 안정적인 군사력을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298]

실권 장악 후 악바르는 북인도의 유력 세력인 라지푸트와의 관계 개선에도 힘썼다. 이는 우즈베크인페르시아인 중심의 기존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인도 내 토착 세력을 포섭하여 제국의 지배 기반을 안정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276] 악바르는 라지푸트 왕족 여성들과의 정략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고, 라지푸트 귀족들을 무굴 제국의 관료 체제에 적극적으로 편입시켰다.[276] 1580년경에는 귀족 중 라지푸트 출신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276] 라지푸트 왕국들은 무굴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행정 및 세금 징수를 제국에 위임하는 대신, 제국으로부터 지위와 봉록을 보장받았다.[276] 이러한 정책은 제국의 영토 확장과 중앙 집권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2. 세제 개혁

악바르는 광대한 영토와 다양한 종교의 백성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제도 정비에 힘썼다. 특히 샤리아(이슬람법)에 따라 비무슬림에게 부과되던 지즈야(인두세)를 폐지하는 등 조세 제도를 개혁하여 제국의 통합을 꾀했다.[297]

세제 개혁의 핵심은 수르 왕조의 셰르 샤 수리가 도입했던 제도를 계승하고 발전시킨 zabti|자브티ben 제도(또는 dahsala|다흐살라ben 제도)였다.[78][298] 초기에는 마을을 기본 단위로 삼아 경작지를 측량하고, 작물의 종류와 생산성에 따라 궁정에서 정한 가격을 기준으로 고정된 세율을 적용했다. 그러나 이 방식은 궁정의 물가가 지방보다 높은 경우가 많아 농민들에게 부담을 주었으며, 지역 관리들이 평가를 담당하는 분권화된 연간 평가 시스템은 부패를 유발하기도 했다.[79]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1580년, 악바르는 새로운 dahsala|다흐살라ben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이전 10년간의 평균 생산량을 기준으로 그 3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을 현금으로 납부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80] 이 개혁안은 셰르 샤 수리 치하에서도 세무 관리를 맡았던 라자 토다르 말이 1582년에서 1583년 사이에 제출한 상세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마련되었다.[81][82] 이후 제도는 더욱 개선되어 지역별 물가를 고려하고, 생산성이 비슷한 지역들을 하나의 평가 구역으로 묶어 관리했다. 또한 홍수나 가뭄 같은 자연재해로 농작물 수확에 실패했을 경우 세금을 감면해주는 조치도 마련되었다.[80] 일부 지역에서는 기존의 지역별 평가 방식이 계속 사용되기도 했으며, 휴경지나 아직 경작되지 않은 토지에 대해서는 낮은 세율을 적용했다.[83] zabti|자브티ben 제도는 토지를 생산 능력에 따라 4등급으로 나누고, 평균 생산량의 3분의 1에서 5분의 1가량을 세금으로 납부하게 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298] 세금을 현금으로 납부하도록 함으로써 농민들은 생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아야 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상품 유통을 활성화하고 화폐 경제의 발달을 촉진했으며, 나아가 농업 생산력 증대에도 기여했다.[298]

악바르는 농업 자체의 발전과 경작지 확대를 장려하는 정책도 펼쳤다. 자민다르(지주)들에게는 필요시 농민들에게 대출을 해주고 농기구를 지원하며, 최대한 많은 토지를 경작하고 품질 좋은 종자를 사용하도록 독려할 의무가 주어졌다. 그 대가로 자민다르들은 생산량의 일부를 거둘 수 있는 세습적인 권리를 인정받았다. 농민들 역시 토지세를 납부하는 한 해당 토지를 경작할 수 있는 세습적인 권리를 보장받았다.[83] 한편, 세무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막고 효율적인 징수를 위해 급여의 일부(4분의 1)를 담당 지역의 세금 목표 달성 여부와 연동시키는 제도를 시행하기도 했다.[84]

3. 3. 종교 정책

무굴 제국 황제 악바르(Akbar)의 두아(Dua) 기도 모습


악바르(Akbar)는 어머니와 가족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수니파 하나피 무슬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142] 그의 초기 생활은 자유로운 정서가 장려되고 종교적 편협함이 배척되는 분위기 속에서 보냈다.[143] 15세기부터 여러 지역 통치자들은 종교적 관용 정책을 채택하여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종교적 화합을 조성하려 노력했다.[144] 이러한 정서는 구루 나낙, 카비르, 차이타냐 마하프라부[143] 와 같은 인기 있는 성자들의 가르침과 인간애와 관대한 견해를 주장한 페르시아 시인 하피즈의 시구들에 의해 장려되었다.[145] 티무르 시대부터 후마윤 시대까지 이어진 티무르 제국의 종교적 관용 정신은 악바르의 종교적 관용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146] 악바르의 어린 시절 스승들 중에는 이란계 시아파 두 명을 포함하여 종파적 편견을 넘어선 사람들이 많았고, 이는 악바르의 후일 종교적 관용 경향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146]

즉위 초기에 악바르는 정통파 이슬람에서 이단으로 간주되는 무슬림 종파들을 탄압하는 태도를 취했다.[148] 1567년, 셰이크 압둘 나비의 조언에 따라 악바르는 델리에 묻힌 미르 무르타자 샤리피 시라지(시아파)의 시신을 발굴하도록 명령했다. 그 이유는 그의 묘가 아미르 쿠스라우의 묘와 너무 가까이 있어 "이단자"가 수니파 성인의 묘 근처에 묻힐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시아파에 대한 제한적인 태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157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149] 그는 1573년 구자라트 원정 중 마드하비즘을 진압했는데, 이 과정에서 마드하비 지도자 반다기 미얀 셰이크 무스타파가 체포되어 사슬에 묶인 채 법정에 끌려와 논쟁을 벌였고 18개월 후 석방되었다.[149] 악바르는 많은 고위 무슬림 성직자들의 횡령 행위에 분노했다고 전해진다.[150]

1570년대 초부터 악바르는 범신론적 수피 신비주의의 영향을 점점 더 받게 되면서, 전통적인 정통 이슬람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이슬람 개념으로 그의 관점이 바뀌었다.[149] 그 결과, 그의 통치 후반기에는 시아파에 대한 관용 정책을 채택하고 시아파-수니파 갈등을 금지했으며, 제국은 내부 종파 갈등 문제에 대해 중립을 유지했다.[151] 악바르는 서로 다른 무슬림 집단(수니파, 시아파, 이스마일파, 수피즘), 조로아스터교도(파르시), 힌두교도(샤이바교바이슈나바교), 시크교도, 자이나교도, 유대교도, 예수회 그리고 유물론자들 사이의 종교 토론을 후원했다. 그는 또한 수피즘을 지지했으며, "베단타의 지혜는 수피즘의 지혜이다"라고 선언했다.[147]

악바르가 파테푸르 시크리에 있는 이바다트 카나에서 다양한 종교의 종교 회합을 주재하는 모습.


악바르는 종교 및 철학적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처음에는 정통 무슬림이었지만, 당시 국가에서 전파되던 수피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는 정통성에서 벗어나 아불 파즐, 파이지, 비르발을 포함한 자유로운 종교 철학을 가진 여러 사람들을 자신의 궁정에 임명했다. 1575년, 그는 파테푸르 시크리에 이바다트 카나("예배의 집")라는 건물을 짓고, 지적 업적을 인정받은 신학자, 신비주의자, 그리고 엄선된 신하들을 초청하여 영성에 관한 문제를 논의했다.[143] 이 논의는 처음에는 무슬림으로 제한되었지만, 상당히 격렬해져 참가자들이 서로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퍼붓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에 실망한 악바르는 이바다트 카나를 모든 종교인과 무신론자들에게 개방하여 논의의 범위를 넓혔고, 심지어 코란의 타당성과 신의 본질과 같은 영역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이는 정통 신학자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그들은 악바르가 이슬람을 버리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려 했다.[153] 악바르가 다양한 종교 대표자들 간의 접점을 만들려는 노력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각 종교 대표자들은 다른 종교를 비난하며 자신들의 종교의 우월성을 주장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바다트 카나의 논쟁은 더욱 격렬해졌고, 종교 간의 이해를 증진시키려는 목적과는 반대로 종교 간의 적대감만 더욱 심화시켜, 1582년 악바르에 의해 논쟁이 중단되었다.[157]

1580년, 악바르 제국의 동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악바르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많은 ''파트와''가 카지들에 의해 발표되었다. 악바르는 반란을 진압하고 카지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카지들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악바르는 1579년 모든 주요 ''울레마''들이 서명한 ''마자르'' 또는 선언을 발표했다.[153][154] ''마자르''는 악바르가 시대의 ''칼리파''이며, ''무즈타히드''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음을 주장했다. 무즈타히드들 사이에 의견이 다를 경우, 악바르는 어떤 의견이든 선택할 수 있었고 ''나스''에 위배되지 않는 법령을 발표할 수도 있었다.[155] 당시 전국 여러 지역에서 이슬람 종파 갈등이 만연했던 것을 감안할 때, ''마자르''는 제국의 종교적 상황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153] 또한 오스만 ''칼리프''의 종교적, 정치적 영향력을 그의 신민들로부터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어 그들의 충성심을 확보했다.[156]

악바르는 다양한 종교 신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에는 몇 가지 좋은 관행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는 이러한 관행들을 딘-이 이라히로 알려진 새로운 종교 운동으로 통합하려고 했다.[158][159] 딘-이 이라히의 미덕에는 관용, 용서, 절제, 신중, 지혜, 친절, 경건 등이 포함되었다.[160] 독신 생활이 존중되었고, 순결이 강조되었으며, 동물의 도살은 억제되었고, 신성한 경전이나 사제 계급은 없었다.[161] 악바르 궁정의 유력한 귀족인 아지즈 코카는 1594년 메카에서 악바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악바르가 장려하는 제자 관계는 종교 문제에 관한 악바르의 우월성을 보여주려는 그의 욕망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162] 딘-이 이라히를 기념하기 위해 악바르는 1583년 프라야그의 이름을 알라하바드(ilahabad로 발음)로 변경했다.[163][164]

악바르의 은화 사각 루피, 라호르 조폐국, 일라히의 아반 달에 주조됨


일부 현대 학자들은 악바르가 새로운 종교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오스카르 R. 고메즈가 탄트라 티베트 불교에서 유래한 초월적 관점이라고 부른 것을 도입했으며, 악바르는 "딘-이 이라히"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165] 학자들은 또한 딘-이 이라히가 새로운 종교라는 이론은 후대 영국 역사가들에 의한 아불 파즐 저작의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발생한 오해라고 주장한다.[167] 딘-이 이라히의 본질을 이룬 "술-에-쿨" 정책은 악바르가 단순히 종교적 목적으로 채택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제국 행정 정책의 일환으로 채택되었다는 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것은 또한 악바르의 종교 관용 정책의 기초를 형성했다.[168] 1605년 악바르가 사망했을 당시 그의 무슬림 신민들 사이에는 불만의 징후가 없었고, 아브둘 하크와 같은 신학자들조차 긴밀한 유대 관계가 유지되었다고 인정했다.[169]

악바르는 이슬람으로 개종하도록 강요받았던 힌두교도들이 사형을 면하고 힌두교로 다시 개종할 수 있도록 명령했다.[170] 악바르는 힌두교도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그들은 그와 그의 찬사를 읊는 종교적 찬송가를 불렀다.[171] 악바르는 여러 힌두교 관습을 실천했다. 그는 디왈리를 기념했고, 브라만 사제들이 그의 손목에 보석으로 장식된 실을 묶어 축복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의 선례를 따라 많은 귀족들이 ''라키''(보호 부적)를 착용하기 시작했다.[172] 그는 소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고 특정 날에는 모든 고기의 판매를 금지했다.[172] 그의 아들 자한기르와 손자 샤 자한은 소 도살 금지, 일주일 중 특정 요일에 채식 요리만 먹는 것, 갠지스 강물만 마시는 것과 같은 악바르의 많은 관용 정책을 유지했다.[173] 악바르가 갠지스 강에서 약 321.87km 떨어진 펀자브에 있을 때, 물은 큰 항아리에 밀봉되어 그에게 운반되었다. 그는 갠지스 강물을 "불멸의 물"이라고 불렀다.[173]

악바르는 정기적으로 자이나교 학자들과 논의를 나누었고 그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 그가 처음으로 자이나교 의식을 접한 것은 6개월간의 단식 후 챔파(Champa)라는 자이나교 슈라바카의 행렬을 보았을 때였다. 그녀의 힘과 헌신에 감명받은 그는 그녀의 구루인 히라비자야(Hiravijaya)를 파테푸르 시크리로 초청했다. 히라비자야는 초청을 받아들여 구자라트에서 무굴 제국의 수도로 여행했다.[174] 아크바르는 그의 학문적인 접근 방식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여러 종교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여러 차례의 종교 간 대화를 가졌다.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자이나교도들의 주장은 그가 채식주의자가 되도록 설득했다.[175] 아크바르는 또한 동물 도살 금지와 같이 자이나교의 이익에 유리한 많은 칙령을 발표했다.[176] 1584년, 1592년, 1598년에 아크바르는 파르유샨(Paryushan)과 마하비르 잔마 칼야나크(Mahavir Janma Kalyanak) 기간 동안 동물 도살을 금지하는 "아마리 고사나(Amari Ghosana)"를 선포했다. 그는 팔리타나(Palitana)와 같은 자이나교 순례지에서 지지아세(Jazia tax)를 폐지했다.[178] 수리(Suri)의 제자인 산티찬드라(Santichandra)는 황제에게 보내졌고, 황제는 그의 제자 바누찬드라(Bhanuchandra)와 시드히찬드라(Siddhichandra)를 법정에 남겨두었다. 아크바르는 히라비자야 수리의 후계자인 비자야세나 수리(Vijayasena Suri)를 그의 궁정으로 초청했고 그는 1593년과 1595년 사이에 그를 방문했다. 아크바르의 종교적 관용은 그의 아들 자한기르(Jahangir)에 의해 계승되지 않았고, 자한기르는 나중에 바누찬드라를 위협했다.[179]

4. 문화와 건축

악바르는 건설 사업을 활발하게 벌인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재위 초기에 완성된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델리에 있는 아버지 후마윤의 묘소인 후마윤 묘가 있다.[301] 제국의 궁궐은 북인도의 주요 도시였던 아그라에 있었는데, 악바르는 15세기 로디 왕조가 건설한 옛 성채를 1565년에 붉은 사암으로 재건축하여 아그라 성을 만들었다. 이 도시에는 '악바르의 도시'라는 의미의 악바라바드(Akbarabad)라는 이름이 붙여졌다.[301]

파테푸르 시크리의 디와니-암(Diwan-i-Am, 공적인 접견실)


파테푸르 시크리의 디완-이-카스(Diwan-i-Khas, 사적인 접견실)


또한 악바르는 1569년, 자신이 귀의했던 치슈티 교단의 수피 성자 살림 치슈티의 영향과 칫토르, 란탐보르에서의 승리를 기념하여 아그라 서쪽 약 약 37.01km 지점에 새로운 수도 파테푸르 시크리("승리의 도시") 건설을 시작했다.[54][301] 이 도시는 1573년 구자라트 정복 이후 '파테푸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1574년부터 1584년까지 약 10년간 무굴 제국의 수도 역할을 했다.[54][301] 하지만 파테푸르 시크리는 물 공급 시설이 부족하여 결국 버려졌고, 수도는 1585년 라호르로 옮겨졌다.[88][301] 역사가들은 수도 이전의 이유로 불충분한 물 공급 외에도 악바르의 제국 북서부 원정, 혹은 단순히 황제의 관심이 식었기 때문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88] 1598년까지 수도였던 라호르의 성채 역시 악바르 시대에 기초가 다져진 것이다.[301] 1599년 악바르는 수도를 다시 아그라로 옮겼고,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통치했다.[89][90]

성자 하리다스, 악바르, 탄센


악바르는 문화와 예술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유랑 생활 중에 태어나 중앙아시아 출신 무인들 사이에서 자라면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해 글을 읽고 쓰지 못했지만, 젊은 시절 사파비 왕조의 궁정에서 그림을 배운 경험 등으로 예술을 깊이 사랑하고 학문을 장려했다.[302] 아불 파즐과 같은 뛰어난 학자와 문인들을 가까이 두었으며, 산스크리트어로 된 고전 문학 작품들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지원했다.[302] 또한 파테푸르 시크리에는 여성을 위한 도서관을 설립했고,[91] 제국 전역에 무슬림과 힌두교도 모두를 위한 학교 설립을 명령하기도 했다.[92]

예술 분야에서는 특히 회화를 장려하여 무굴 회화는 악바르 시대에 황금기를 맞이했다.[300] 음악 또한 장려하여 힌두스타니 음악의 거장 미얀 탄센을 궁정 음악가로 초빙했다. 탄센의 음악은 후대 인도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300] 악바르는 제본 기술 또한 고급 예술의 한 형태로 발전하도록 장려했다.[92][93]

5. 외교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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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바르가 즉위한 1556년 당시, 포르투갈인들은 이미 인도 아대륙 서해안에 여러 요새와 상관을 설립하여 해당 지역의 항해와 해상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다른 무역 단체들은 포르투갈의 조건에 종속되었으며, 구자라트의 바하두르 샤를 포함한 통치자들과 상인들은 이에 불만을 가졌다.[109] 1572년 무굴 제국이 구자라트를 병합하면서 처음으로 해안에 접근하게 되었고, 악바르는 인도양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포르투갈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악바르는 포르투갈로부터 페르시아 만 지역 항해 허가인 ''카르타즈''를 얻었다.[111] 1572년 수라트 공방전에서 무굴 군대와 포르투갈 군대가 처음 만났을 때, 포르투갈은 무굴의 군사력을 인지하고 외교를 선택했다. 포르투갈 총독은 악바르의 요청에 따라 사절을 보내 친선 관계를 수립했다.[112]

악바르는 외교 제안을 수락했지만, 포르투갈은 인도양에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 무굴 제국의 선박이 메카메디나하지 순례를 떠나기 위해 포르투갈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 악바르는 우려를 표명했다.[113] 1573년, 악바르는 구자라트의 무굴 행정 관리들에게 다만 지역의 포르투갈 영토를 자극하지 말라는 ''피르만''을 발표했고, 그 대가로 포르투갈은 악바르 가족의 하지 순례를 위한 통행증을 발급했다.[114] 그러나 악바르는 포르투갈로부터 소형 를 구매하는 데 실패하여 구자라트 해안에 무굴 해군을 건설하려는 계획에 차질을 빚었다.[115]

1579년 9월, 고아예수회 신부들이 악바르의 궁정에 초청되었다.[116] 악바르는 신약 성서 번역을 지시하고 예수회 신부들에게 복음 전파의 자유를 허용했다.[117] 그의 아들 술탄 무라드 미르자는 안토니오 드 몬세라트에게 교육을 받기도 했다.[118][119] 궁정 토론 중 예수회 신부들이 이슬람과 무함마드를 비판하자 이맘들과 율마들이 격분하여 항의했으나, 악바르는 그 발언을 기록하도록 했다. 이 사건은 1581년 뮬라 무함마드 야즈디와 벵골의 수석 카디 무이즈 울 멀크가 주도한 반란의 한 원인이 되었으며, 반란군은 악바르를 폐위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악바르는 궁정에 손님을 초대하는 데 더욱 신중해졌다.[120] 일부 기록에 따르면 악바르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포르투갈과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130][131]

세이디 알리 레이스(악바르의 동맹국)의 갤리선을 공격하는 포르투갈의 매복


악바르가 어렸던 1555년, 오스만 제국의 제독 세이디 알리 레이스가 후마윤 황제를 방문한 바 있다. 악바르 통치 초기인 1569년에는 오스만 제독 쿠르토울루 흐즈르 레이스가 방문했다. 이들은 인도양 원정 중 포르투갈 제국의 확장을 견제하고자 했다. 악바르는 재위 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술탄 슐레이만 1세에게 여섯 통의 문서를 보냈다.[121][122]

1576년, 악바르는 콰자 술탄 나크쉬반디가 이끄는 하지 순례단을 파견하여 메카와 메디나의 빈민들에게 60만 루피와 1만 2천 벌의 칼라트(명예의 옷)를 전달했다.[123] 같은 해 10월에는 이모 굴바단 베굼과 배우자 살리마를 포함한 사절단을 수라트에서 오스만 선박을 이용해 파견했다.[124] 1577년부터 1580년까지 메카와 메디나 당국에 선물을 전달하는 네 차례의 대상이 더 파견되었다.[125] 악바르는 가난한 무슬림들의 순례를 지원하고 히자즈에 카디리야 수피 수도원 건립 자금을 지원하며[126] 이 지역에서 무굴 제국의 영향력을 키우려 했다. 이는 현지 샤리프들이 오스만 제국의 지원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데 영향을 미쳤다.[126] 이 시기 무굴-오스만 무역도 활발했으며, 무굴 상인들은 바스라를 통해 알레포까지 교역했다.[127] 무굴 황실 수행원은 히자즈에 약 4년간 머물렀으나 1582년 오스만 당국에 의해 인도로 돌려보내졌고, 이후 악바르는 히자즈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하지 대상 파견을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128][129]

갠지스 강을 내려다보는 아크바리 모스크


사파비 제국과 무굴 제국은 악바르 통치 이전부터 외교 관계를 맺어왔다. 사파비의 타흐마스프 1세셰르 샤 수리에게 패배한 후마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파비 왕조는 시아파를 따랐고, 무굴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수니파였다.[132] 두 제국 간의 주요 분쟁 지역은 전략적 요충지인 힌두쿠시 지역의 칸다하르였다.[133][134] 악바르 즉위 당시 바이람 칸이 통치하던 칸다하르는 1558년 사파비의 후사인 미르자에게 점령되었다.[133] 1586년 발루치 족장들을 복속시킨 악바르는 1595년 칸다하르 탈환을 준비하며 아프가니스탄 내 발루치스탄 지역 정복을 명령했다.[70][71] 미르 마숨이 이끄는 무굴 군대는 시비 요새를 공격하여 현지 족장들을 격파하고 무굴의 지배를 인정하게 했다. 이로써 마크란 해안을 포함한 발루치스탄 지역이 무굴 제국에 편입되었다.[71] 칸다하르는 1595년 4월 18일 저항 없이 무굴 제국에 함락되었고, 통치자 무자파르 후세인은 악바르의 궁정에 합류했다.[135] 이후 바이람 칸은 사파비 궁정에 사절을 보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고, 악바르 통치 초기 20년간 양국 관계는 우호적이었다.[136] 그러나 1576년 타흐마스프 1세 사망 후 사파비 제국의 내전으로 외교 관계가 10년 이상 중단되었다가, 샤 압바스가 즉위한 1587년에 복원되었다.[137] 이후 악바르 통치 말기까지 외교 관계가 유지되었으며, 칸다하르는 수십 년간 무굴 제국의 영토로 남았다.[138][139]

1600년, 영국 상인 밀든홀(Mildenhall)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편지를 악바르에게 전달하려 했는데, 이 편지에는 포르투갈과 동등한 조건으로 무굴 영토 내 무역 자유를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140] 또한 프랑스 탐험가 피에르 말에르브도 악바르의 궁정을 방문했다.[141]

6. 평가 및 유산

악바르는 아버지 후마윤 시대에 위협받던 무굴 제국의 권위를 인도 안팎에 확고히 다졌으며,[236] 군사적, 외교적으로 우위를 점했다.[237] 그는 통치 기간 동안 문화 통합을 중시하는 세속적이고 자유로운 정부를 지향했으며, 사티 의식을 금지하고 과부의 재혼을 합법화하며 결혼 가능 연령을 높이는 등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악바르와 그의 측근 중 한 명인 비르발에 얽힌 민담은 인도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악바르와 그의 힌두교도 아내 마리아무즈자마니의 이야기도 유명하며, 그녀는 악바르의 세속주의와 관용 정책에 영향을 준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206] ''타임''은 악바르가 인도의 여러 지역을 무굴 제국으로 통합하고, 현대 인도 공화국의 가치인 다원주의와 관용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세계 25대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238]

그러나 악바르의 유산은 파키스탄에서 다소 부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역사학자 무바라크 알리에 따르면, 파키스탄의 학교 교과서에서는 악바르가 거의 언급되지 않거나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239] 이는 이슬람을 강조했던 황제 아우랑제브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과 대조적이다. 파키스탄의 일부 역사가들은 악바르의 종교적 관용 정책이 결과적으로 이슬람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고 비판한다. 역사가 이쉬티아크 후세인 쿠레시는 악바르의 정책 때문에 이슬람이 국가 내 주도적 위치를 회복하기 어려워졌다고 주장했다.[239] 또한 악바르의 라즈푸트 정책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무바라크 알리는 악바르가 무슬림과 힌두교도를 통합하려 함으로써 무슬림의 고유한 정체성을 위태롭게 했으며, 이는 훗날 파키스탄 건국의 바탕이 된 두 국가 이론과 배치되기 때문에 파키스탄에서 악바르가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원인이라고 분석했다.[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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