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유키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가라유키상은 일본의 근대화와 제국주의 팽창 과정에서 발생한, 해외로 매춘을 간 일본 여성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메이지 시대에 가라유키상의 수가 증가했으며, 이들은 초기에는 외화 획득에 기여하는 애국자로 여겨졌으나, 일본의 국력이 성장하면서 수치스러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가라유키상들은 동남아시아, 중국, 만주 등지로 파견되었으며, 정보 수집 및 첩보 활동에도 동원되었다. 일본 정부는 초기에 이들의 활동을 묵인하고 장려했으나, 1920년 매춘금지령 이후에는 차별과 천대를 받았다. 1972년 야마자키 도모코의 저서 '산다칸 8번 창관'을 통해 사회에 알려졌으며, 오늘날 일본에서 성매매에 종사하는 외국인 여성들을 '자파유키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여성사 - 병오
병오는 육십간지 중 43번째로, 천간과 지지 모두 화의 기운을 가지며, 서력 연도를 60으로 나눈 나머지가 46인 해이고, 일본에서는 병오년생 여성에 대한 미신으로 출산율이 급감하는 현상이 있었으며, 육십간지 중 43번째 날이기도 하다. - 일본의 여성사 - 현모양처
현모양처는 훌륭한 어머니이자 어진 아내를 의미하는 단어로, 중국과 일본에서 유래되었으며, 시대와 문화에 따라 여성의 역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담고 있다. - 강제 성매매 - 강간
- 강제 성매매 - 위안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에 의해 성적 노예로 강제 동원된 여성들을 일컫는 '위안부'는 일본군 공식 문서에도 사용된 용어이나, 국제적으로는 "일본군 성노예"로 불리며, 한국과 중국 출신 여성들이 주로 피해를 입었고, 성병 감소 및 군 기강 유지 목적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성적 학대와 비인간적인 대우가 자행되었으며, 한일 관계의 주요 쟁점으로 남아 국제적인 비판을 받고 있다. - 일본의 성매매 - 유곽
유곽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치안 및 풍기 통제를 위해 구획된 지역 내에 유녀를 모아둔 장소로, 에도 시대에는 요시와라, 신마치, 시마바라 등이 3대 유곽으로 번성했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에도 다양한 형태로 존속하다 현대에 이르러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나 유사한 형태의 업소들이 남아있다. - 일본의 성매매 - 판판
판판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서 연합군 병사를 상대로 매춘을 하던 여성을 지칭하는 속어로, 다양한 어원설과 사회적 인식, 문화적 영향, 그리고 인권 침해 사례를 낳았다.
| 가라유키상 | |
|---|---|
| 가라유키상 | |
| 다른 이름 | 당행(唐行) |
| 정의 |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 초기에 해외로 건너가 매춘 등의 일에 종사한 일본인 여성 |
| 역사적 배경 | |
| 시대적 배경 |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의 빈곤과 사회 문제 |
| 주요 목적지 | 동남아시아, 중국, 시베리아, 미국 등 |
| 사회적 문제 | |
| 인신매매 | 브로커를 통한 인신매매와 유사한 형태로 이루어짐 |
| 열악한 노동 환경 | 매춘, 가혹한 노동, 질병 등의 위험에 노출 |
| 사회적 낙인 | 귀국 후 사회적 편견과 차별 |
| 관련 인물 및 작품 | |
| 관련 인물 | 야마자키 도미에, 미야자키 가루키 |
| 관련 작품 | 아시아 유랑 여인 - 가라유키상 (다큐멘터리 영화), 가라유키상 (와카야마 시즈코의 소설) |
| 현대적 재조명 | |
| 사회적 인식 변화 | 역사적 맥락에서의 이해와 재평가 시도 |
| 연구 및 기록 | 관련 연구 활발, 다큐멘터리, 소설, 영화 등을 통해 기록됨 |
| 추가 정보 | |
| 관련 용어 | 종군위안부, 해외 매춘, 일본인 이민 |
| 참고 자료 | 관련 서적, 논문, 다큐멘터리 등 |
2. 역사적 배경
'''가라유키상'''(唐行きさん일본어)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주로 가난한 농어촌 가정 출신이나 부라쿠민 계층의 일본 여성들이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시베리아, 만주, 인도, 호주,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등지로 건너가 매춘에 종사했던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1][2] 원래 '가라'(唐)는 중국을 의미했지만,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서는 '해외'라는 뜻으로 확장되어 사용되었다.[1] 당시 이러한 일본 여성들의 해외 인신매매는 '황색 노예 무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들을 모집하고 해외로 보내는 과정은 알선업자의 등장 섹션에서 자세히 다룬다.)
메이지 시대 말기에 해외로 나가는 가라유키상의 수가 급증했으며, 한때는 이들을 '딸자군(娘子軍, 조시군)'이라 부르며 그들이 벌어들인 수입이 일본 자본 축적과 해외 진출의 발판이 되었다고 선전하기도 했다.[3]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여성이 타지에서 성병, 무관심, 절망 속에서 고통받다 젊은 나이에 사망하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가라유키상의 주요 활동 지역은 다음과 같다.
| 지역 | 주요 도시 및 상세 |
|---|---|
| 동아시아 | 중국 (상하이 등), 대한민국, 홍콩, 시베리아, 만주 (블라디보스토크, 이르쿠츠크 등) |
| 동남아시아 | 필리핀,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수마트라), 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
| 남아시아 | 인도 (카라치, 봄베이)[5][6] |
| 오세아니아 | 호주 (특히 서부 및 북부), 하와이 |
| 아메리카 |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등) |
| 아프리카 | 잔지바르 |
이들은 주로 서구 식민지에 주둔하던 군인이나 현지 남성들을 상대로 영업했으며, 특히 서양 군인들과 중국인 남성들의 수요가 많았다.
가라유키상은 메이지 시대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7]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는 1860년대 이후 일본인 매춘부와 상인들이 일본인 사회의 다수를 차지했으며, 겐요샤나 흑룡회 같은 일본 국수주의 단체들은 이들을 '아마존 군대'라 칭송하며 정보원으로 활용하기도 했다.[8] 청불 전쟁 이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도 일본인 매춘 시장이 형성되어 1908년경에는 인도차이나 내 일본인 인구의 다수를 차지할 정도였다.[9] 호주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비백인 남성 노동자들이 백인 여성 대신 일본 여성과 성관계를 갖는 것을 용인하며 이들의 이주를 묵인하기도 했다. 이는 인종차별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일본 여성들이 특정 역할을 수행하도록 강요받았음을 보여준다.[11][12]
초기 일본 정부는 가라유키상이 벌어들이는 외화가 자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하에 이들의 해외 진출을 사실상 묵인하거나 방조했으며, 이는 알선업자의 등장 과정에서 더 자세히 나타난다.[10][63] 1919년 중국에서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이 일어나자 가라유키상의 송금 수입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일본이 열강으로 부상하고 국제적 위신을 중시하게 되면서 가라유키상은 점차 '국가의 수치'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걸쳐 일본 해외 공관들은 자국의 이미지를 위해 일본인 매춘 업소를 단속하고 폐쇄하려 노력했지만, 완전히 근절하지는 못했다.[60][61] 이후 많은 가라유키상이 일본으로 귀국했으나, 일부는 현지에 남아 삶을 이어갔다.
태평양 전쟁 이후 가라유키상의 존재는 오랫동안 일본 사회에서 외면받아 왔으나, 1972년 야마자키 도모코가 《제8번 산다칸 매춘굴》을 출판하면서 이들의 비극적인 삶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이후 관련 연구와 영화 제작 등이 이어졌다. (예: 영화 《가라유키상》(1975), 《산다칸 8번 창관》(1974)[27] 등)
2. 1. 개방적인 문화 형성
유교의 강한 영향을 받아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을 보이는 한국과 달리, 일본의 성문화는 비교적 솔직하고 개방적이며 관대한 편으로 평가된다.[74] 일본인에게 성은 단순히 숨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도덕적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으며 생명력과 신성함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75] 고대 일본에서는 성문화가 비교적 자유로웠고, 남녀가 동등한 위치에서 솔직하게 사랑을 고백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이 나타났다. 이러한 개방적인 문화는 일본 특유의 기후와 생활 환경, 빈번했던 전쟁, 일본의 불교,[76] 신도(神道) 등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으로 분석된다.[74]일본은 섬나라 특유의 습하고 더운 기후 때문에 신체를 많이 가리지 않는 경향이 있었고, 타인 앞에서 몸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노천에서 혼욕을 즐기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발달하기도 했다. 도시 지역에서는 대규모 건설 및 토목 공사로 인해 남성 노동력이 집중되면서 성비 불균형이 발생했고, 이는 매춘이 성행하는 배경이 되었다.[84] 반대로 남성 노동력이 도시로 대거 이동한 농촌에서는 미혼 여성이나 과부가 증가했는데, 이로 인해 젊은 남성들이 밤에 이웃집 여성을 찾아가 동침하는 것이 용인되는 요바이(夜這い)라는 독특한 풍습이 생겨나기도 했다.[77][78] 전쟁이 잦았던 막부 시대에는 남성 인구가 크게 줄어들면서 인구 유지, 노동력 확보, 종족 번식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은 여성들이 성에 대해 보다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만들었으며, 사회 전반적으로 성에 대해 관대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79][80]
2. 2. 집창과 공창
1585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성매매업소를 특정 지역에 모아 관리하는 집창제(集娼制)의 일종인 유곽 제도를 만들었다.[81] 이는 사창(私娼)에 의한 성매매가 일반 주거지역으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오사카의 게이세이초(傾城町)를 유곽 지대로 공인한 것이 그 시초이다.[82]본격적인 공창제(公娼制)는 1617년 에도 막부가 에도(현재의 도쿄)에 흩어져 있던 성매매업소를 당시 닌교정(人形町) 지역에 모아 관리하면서 시작되었다.[83][84][85] 도쿄의 공창 지역은 ‘요시와라’라고 불렸으며,[86] 이러한 공창은 18세기경 오사카, 교토 등 일본 전국 25개소로 늘어나며 활성화되었다.
2. 3. 알선업자의 등장
에도 막부가 붕괴되고 들어선 메이지 정부는 1872년 11월 인신매매금지령을 발표했다.[87] 이는 유괴된 농촌 빈민 출신의 어린 소녀들을 통한 매춘 성행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공창 제도를 폐지하고 예창기(게이샤와 창부) 해방령도 함께 내렸다. 그러나 이로 인해 갑작스럽게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 많은 게이샤와 매춘부들은 생계를 위해 홍콩, 싱가포르, 필리핀, 베트남 등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이들이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외화 수입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자[88],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농촌의 가난한 소녀들을 모집하여 해외로 보내는 중개 알선업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주로 가난한 농가나 어가의 딸, 또는 천민 계층인 ''부라쿠민'' 출신 여성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알선업자들은 가난한 농촌 지역을 돌며 적당한 나이의 여성을 물색했고, 그 부모에게는 '공무'를 위해 해외에 나가는 것이라고 속이며 돈을 지불했다. 이렇게 확보한 여성들을 국내외 매춘업자에게 넘겨 큰 이익을 챙겼으며, 일부는 직접 해외에 매춘 업소를 차리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이나 중국 항구에서 자국민에게 여권을 요구하지 않았고, 가라유키상이 송금하는 돈이 일본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이러한 인신매매를 사실상 방관하거나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10]
3. 원정 성매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 일본의 가난한 여성들이 매춘부, 고급 창부, 게이샤 등으로 일하기 위해 아시아-태평양 지역 등 해외로 보내지거나 인신매매된 사례를 가라유키상(唐行きさん)이라고 부른다.[1][2] 이는 당시 '황색 노예 무역'으로 불리던 아시아 전역의 일본인 성매매 네트워크의 일부였다.
가라유키상이 된 여성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어촌 가정의 딸이거나 사회적 차별을 받던 부라쿠민 출신이었다. 알선업자들은 이들 가정을 찾아가 딸을 해외 공무에 보낸다고 속이고 돈을 준 뒤, 여성들을 매춘 업자에게 넘겨 이익을 챙겼다. 일부는 직접 해외에 사창가를 운영하기도 했다.
가라유키상의 주요 목적지는 중국(특히 상하이), 대한민국, 홍콩, 필리핀, 인도네시아(특히 보르네오와 수마트라), 태국 등 아시아 지역과 미국 서부(샌프란시스코) 등이었다. 이들은 주로 서구 열강의 식민지나 군대가 주둔하는 지역으로 보내져 서양 군인이나 현지 남성들을 상대했다. 때로는 시베리아, 만주, 하와이, 북아메리카(캘리포니아), 아프리카(잔지바르) 등 더 먼 곳까지 보내지기도 했으며, 인도의 카라치나 봄베이에도 일본인 매춘부가 존재했다.[5][6]
메이지 시대 말기에는 가라유키상의 수가 급증하여 이들을 '딸자군'(娘子軍, 여군)이라 부르며 미화하기도 했으나,[3] 실제로는 많은 여성들이 타지에서 성병, 학대, 외로움 등으로 고통받다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초기 일본 정부는 조선과 중국 항구에서 자국민에게 여권을 요구하지 않았고, 가라유키상이 벌어들인 외화 송금이 일본 경제에 기여한다고 판단하여 이들의 해외 진출을 사실상 방조했다.[63] 그러나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으로 부상하면서 국제적 위신을 중시하게 되자, 가라유키상은 점차 '국가의 수치'로 여겨지게 되었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걸쳐 일본 해외 공관들은 일본인 매춘 업소를 단속하고 폐쇄하려 노력했으나[4][60][61], 완전한 근절에는 이르지 못했다. 많은 가라유키상이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일부는 현지에 남았다. 메이지 일본의 제국주의 확장 과정에서 일본인 매춘부들이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학술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7][62]
3. 1. 인신매매와 유괴
일본 전역, 특히 가난한 농어촌 지역을 돌며 젊은 여성을 물색하는 알선업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ぜげん|제겐일본어[89][90][91] 또는 ピンプ|핀푸일본어[92] 등으로 불렸으며, 해외에서 좋은 일자리를 구해주겠다고 어린 소녀들을 유인하여 부모에게 돈을 주고 데려왔다.[93] 이렇게 모집된 소녀들은 포주에게 넘겨졌고, 알선업자들은 중개 수수료를 챙겼다. 일부 알선업자는 이렇게 번 돈으로 직접 해외에서 사창가를 운영하기도 했다. 일자리 알선을 미끼로 한 취업 사기와 인신매매, 해외 인력 송출이 수익성이 좋자, 전문적으로 소녀들을 유괴하는 조직까지 생겨나 유괴, 납치, 인신매매가 성행했다.그러나 딸이 유괴당한 부모들은 법에 호소하기보다 침묵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려운 살림에 식구가 줄어든다는 현실적인 이유와 함께, 팔려나간 딸들이 집으로 보내오는 돈이 가계에 큰 보탬이 되었기 때문이다.[94] 심지어 딸이 보낸 돈으로 집이나 토지를 사는 농가도 있었고, 이 때문에 어린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는 빨리 커서 가라유키상이 되어 돈을 벌고 집과 땅을 사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95] 가라유키상이 있는 가정을 부러워하는 집도 있었다.[96]
유괴는 주로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농촌 빈민 가정의 14~16세 여성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으며, 부잣집 딸이나 학생 신분의 여성은 의도적으로 피했기 때문에 큰 사회 문제로 비화되지 않았다. 유괴된 당사자나 그 가족들은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도 무지하여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94] 또한, 부모가 직접 어린 딸을 팔아넘기는 경우도 있었다.[97] 일본에는 예로부터 마비키(間引き)라 하여, 먹고 살기 힘든 집안에서 주로 2~3세의 여자아이를 살해하여 강이나 바다에 버리는 관습이 있었는데,[98] 이러한 배경 속에서 딸을 직접 매매하는 일에 대한 죄의식이 비교적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인신매매 과정은 매우 열악했다. 여성들은 배의 일부 공간에 숨겨져 운반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질식사하거나 굶어 죽을 뻔한 경우도 있었다. 규슈의 농업에 부적합한 화산성 산지 지역에서는 부모가 딸을 나가사키현이나 구마모토현의 포주에게 파는 경우가 많았는데, 조사에 따르면 약 5분의 4는 본인 의사에 반해 강제로 매매되었고, 5분의 1만이 자신의 의사로 팔려갔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인신매매를 사실상 방조했다. 조선과 중국의 항구에서는 일본 국민에게 여권을 요구하지 않아 해외 이동이 쉬웠고, 정부는 가라유키상이 벌어들인 외화 송금이 일본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63] 1889년 일본 관리 사토의 보고에 따르면, 나가사키의 타카다 토쿠지라는 인신매매업자가 홍콩을 경유하여 5명의 여성을 매매했는데, 1명은 말레이시아인 이발사에게 50GBP, 2명은 중국인에게 40GBP에 팔고, 1명은 첩으로 삼고, 나머지 1명은 창부로 일하게 했다고 한다. 사토는 이 여성들이 "조국의 수치에 해당하는 부끄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기록했다.[64]
3. 2. 원정매춘
알선업자에게 속아 배에 오른 여성들은 외국에 도착한 후에야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부모가 받은 선금과 브로커 수수료, 교통비 등이 모두 빚으로 남아 성매매를 거부할 수 없는 처지였다.[73] 돈의 굴레에 묶여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많았다.가라유키상들이 보내진 주요 목적지는 중국(특히 상하이), 홍콩, 필리핀, 인도네시아(특히 보르네오와 수마트라), 타이, 대한민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차이나, 인도(카라치, 봄베이) 등 아시아 각지였다.[73][2] 이들 지역은 주로 유럽 열강의 식민지였으며, 유럽이나 미국 군대가 주둔하여 성매매 수요가 많은 곳이었다. 더 멀리는 시베리아, 만주, 하와이, 북아메리카(캘리포니아), 아프리카(탄자니아 잔지바르), 오스트레일리아까지 퍼져나갔다.[73][5][6]
가라유키상들은 주로 항구 도시에 정착했는데, 이는 항구에 외국인과 뱃사람들이 많이 모여 외국 여성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덜했고, 상거래가 활발하여 현금 유통이 원활했기 때문이다.[99] 이러한 항만 도시들은 일본식 사창가의 존재로 인해 경제적인 이익을 얻기도 했다.
해외로 나가는 가라유키상의 수는 해마다 증가했다. 싱가포르의 경우만 해도 전체 일본인 체류자 수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수천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던 가라유키상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94] 일각에서는 1920년 성매매가 금지되기 전까지 약 50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산한다.[73]
이 여성들은 대부분 나가사키나 구마모토 등 가난한 농어촌 지역 출신이었다. '제겐'이라 불린 알선업자들은 가난한 집을 돌며 부모에게 돈을 주고 딸들을 해외 공무를 위해 보낸다고 속여 데려갔다. 이 과정에서 5분의 4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팔려갔고, 5분의 1만이 자의로 나섰다고 한다. 여성들을 실어 나른 배의 환경은 끔찍했으며, 일부는 배의 좁은 공간에 숨겨져 질식하거나 굶주림에 시달리기도 했다. 살아남은 여성들은 홍콩,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 등지에서 매춘 교육을 받은 후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한 다른 지역으로 보내졌다. 1890년부터 1894년까지 싱가포르는 무라오카 이헤이지에 의해 인신매매된 일본 여성 3,222명을 받아들였으며, 이들은 싱가포르나 더 먼 곳으로 팔려가기 전 몇 달간 홍콩에 억류되기도 했다. 일본 관리 사토의 보고에 따르면, 1889년 나가사키 출신 다카다 토쿠지로가 홍콩을 경유하여 여성 5명을 인신매매했는데, "한 명을 말레이시아인 이발사에게 50GBP에 팔고, 두 명을 각각 40GBP에 중국인에게 팔았으며, 한 명은 첩으로 삼고, 다섯 번째는 매춘부로 일하게 했다"고 한다. 사토는 이 여성들이 "조국의 수치에 해당하는 부끄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64]
초기 일본 정부는 가라유키상이 벌어들인 외화가 일본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이들의 해외 진출을 사실상 묵인하거나 방조했다. 특히 조선과 중국의 항구에서는 일본인에게 여권을 요구하지 않아 여성들이 쉽게 해외로 나갈 수 있었다.[63] 1919년 중국에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가라유키상으로부터의 외화 수입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싱가포르에서는 1870년대부터 가라유키상이 정착하기 시작하여 1895년에는 현지 일본인 450~600명 중 거의 전부가 매춘부, 포주, 첩 등 관련 종사자였다.[19][20] 러일 전쟁 무렵에는 그 수가 700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주로 미들 로드 주변(Malay Street)에 밀집해 있었다. 이곳에서 벌어들인 돈은 싱가포르 내 일본 상점, 병원 등의 운영 자금으로 흘러 들어가 초기 일본 경제 기반을 다지는 데 이용되었다.[24]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1887년부터 가라유키상이 나타나 퀸즐랜드, 북부, 서부 등 변경 지역 매춘 산업의 주요 부분을 차지했다. 당시 백인 우월주의가 팽배했던 호주 사회는 비백인 노동자들(중국인, 말레이인, 카나카족 등)이 백인 여성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인 매춘부들의 존재를 용인했다. 이들이 비백인 남성들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백인 여성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다.[11][12] 1896년에는 호주 전역에 약 200명의 일본인 매춘부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부 가라유키상은 현지에서 중국인, 일본인 남성과 결혼하거나 말레이시아인, 필리핀인, 유럽인 파트너를 만나기도 했다.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는 1860년대 이후 일본인 매춘부와 상인들이 일본인 사회의 다수를 이루었다. 겐요샤나 흑룡회 같은 일본 국수주의 단체들은 이들을 '아마존 군대'라 칭하며 미화하고 회원으로 등록시키기도 했으며, 블라디보스토크나 이르쿠츠크 주변에서는 정보 수집과 같은 특수 임무에 동원되기도 했다.[8][65]
인도차이나에서는 청불 전쟁 이후 프랑스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시장이 형성되었고, 1908년경에는 매춘부가 현지 일본인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였다.[9][66] 필리핀에서는 미국 점령기에 일본과의 경제 관계가 확대되면서 상인, 정원사 등과 함께 가라유키상들이 대규모로 이주했으며, 민다나오의 다바오에는 당시 2만 명이 넘는 일본인이 거주했다. 보르네오의 산다칸과 쿠우닷츠 등지에서는 다양한 인종의 남성들이 일본인 매춘부를 이용했으며, 산다칸의 경우 매춘 업소 대부분을 일본인이 경영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서도 1872년부터 1940년경까지 다수의 가라유키상이 활동했다.
메이지 시대 말기에는 이들의 해외 진출이 '딸자군(娘子軍, 여군)'으로 미화되기도 했으나,[3] 국제적으로 인신매매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일본의 국력이 신장하면서 점차 '국가의 수치'로 여겨지게 되었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걸쳐 해외의 일본 당국자들은 일본인 매춘 업소를 폐지하고 국가의 위신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4][60][61] 많은 가라유키상이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일부는 현지에 남아 생활을 이어갔다.
3. 3. 노동환경
가라유키상들은 일본군이 직접 관리하는 공창이나 민간 집창촌 등에서 일했다.[73] 공창의 경우, 일본 헌병이 매독 등 성병 검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며 관리하기도 했다.[73]보르네오 섬에서 활동했던 가라유키상 기타가와 사키의 기록이나 『산다칸 8번 창관』의 묘사에 따르면, 가라유키상은 일반적으로 화대의 50%를 받았고, 그중 절반(전체의 25%)은 포주에게 진 빚을 갚는 데 사용해야 했다. 나머지 수입으로 기모노나 의상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감당해야 했으므로,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빚을 갚아나가기 위해서는 한 달에 최소 20명 이상의 손님을 받아야 했다. 필리핀에서는 위생 검사 비용까지 창부에게 부담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노동 강도는 매우 높아서, 항구에 배가 들어올 때는 손님이 넘쳐 하룻밤에 30명의 손님을 받는 일도 흔했으며, 심한 경우 49명의 손님을 받았다는 증언도 남아있다. 손님 한 명당 시간은 3분에서 5분 정도로 짧았고, 시간이 길어지면 추가 요금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고된 노동 환경 속에서 많은 가라유키상들이 절망감을 느꼈으며, "한 달에 한 번은 죽고 싶었다"고 토로하면서도 쉴 수 없었다고 한다.
산다칸과 같은 지역에서는 보르네오 원주민, 말레이시아인,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 프랑스인, 미국인, 영국인 등 다양한 인종의 남성들이 일본인 창부를 이용했다.[73] 산다칸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사창가가 9곳이나 있었으며, 이는 지역 사창가의 대부분을 차지했다.[73]
대부분의 가라유키상은 일본 내 가난한 농촌이나 어촌 출신으로, 인신매매 업자나 포주에게 속거나 사실상 팔려서 해외로 보내졌다. 막대한 빚 때문에 성노예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접객을 거부하거나 스스로 노동 조건을 선택할 자유가 거의 없었다. 간혹 빚을 모두 갚고 자유로워진 사례도 있지만, 이는 매우 운이 좋은 극소수의 경우로 여겨진다. 따라서 가라유키상을 '자유로운 의지로 직업을 선택한 여성'으로 보는 관점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3. 4. 일본정부의 대응
메이지 정부는 가라유키상의 존재와 이들이 겪는 인신매매, 해외 성매매의 실상을 알면서도 이를 사실상 묵인했다. 해외 영사관이나 경찰에 어린 소녀들의 유괴와 인신매매에 대한 신고가 접수되어도, 일본 당국은 유괴범 검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100]이러한 묵인의 배경에는 경제적인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가라유키상들이 해외에서 벌어들여 일본으로 송금하는 외화는 메이지 유신 이후 혼란스럽고 침체된 일본 경제를 살리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101] 당시 일본은 갑작스러운 개항과 에도 막부 붕괴, 급진적인 개혁 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물가 폭등과 대량 실업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또한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한 막대한 자금도 필요했다.[101] 일본 정부는 조선과 중국 항구에서 자국민에게 여권을 요구하지 않아 가라유키상들이 쉽게 해외로 나갈 수 있도록 방치했으며[63], 이들의 송금이 일본 경제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63][10] 사실상 해외 진출을 방조했다. 심지어 1919년 중국에서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이 일어나자, 가라유키상으로부터의 외화 수입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지기도 했다.[10]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이유도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사회 혼란으로 인해 강간, 절도 등 범죄가 증가하고 많은 범죄자와 부랑자들이 생겨났다. 이들 중 일부가 해외에서 가라유키상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해외로 빠져나갔고, 이는 잠재적인 국내 사회 불안 요소를 해소하는 효과를 가져왔다.[102]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암암리에 알선업자들의 활동을 부추기고 장려하기까지 했다.[103]
그러나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으로 성장하고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국제적으로 인신매매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고, 일본 내에서도 가라유키상의 존재가 '국가의 수치'로 여겨지게 되었다.[60][61] 이에 따라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걸쳐 해외 주재 일본 관리들은 자국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일본인 매춘 업소를 폐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60][61][4] 하지만 이러한 조치가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며, 많은 가라유키상이 일본으로 귀국했지만 일부는 현지에 남기도 했다.[4]
3. 5. 가라유키들의 활약
가라유키상들이 진출한 항구 도시에서는 이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인 촌이 형성되기도 했다.[102] 시간이 지나면서 성매매에 종사하던 가라유키상 사회에도 변화가 생겨, 현지인의 하녀가 되거나 부잣집의 애첩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스스로 포주가 되거나, 가라유키상 출신들이 다른 가라유키상들을 대상으로 음식점이나 잡화점을 열기도 했다. 현지에 완전히 정착한 이들은 현지 경제 상황과 생활 정보를 일본인 무역상들에게 제공하였고, 통역과 무역 중개 역할을 맡아 일본과의 무역 활성화에 기여하기도 했다.[104][105]일제가 본격적으로 동남아시아 침략 전쟁에 나서면서, 1902년 일본 본토 여성들이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자 가라유키상들도 입회비를 내며 참여했다. 1904년 러일 전쟁을 앞두고 '헌납운동'이 벌어지자, 가라유키상들은 매춘으로 번 돈을 모아 당시 거액인 5천달러를 일본 정부에 헌납했다.[106] 또한, 여러 나라의 항구를 연결하는 정보망을 만들어 러시아 발틱함대의 이동 정보를 일본군에게 신속하게 전달하기도 했다.[107][108] 이러한 첩보 활동은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109] 가라유키상 중 일부는 자원하여 일본군을 위한 종군위안부 역할을 하기도 했다.[110]
러시아 극동 지역, 특히 바이칼 호 동쪽에서는 1860년대 이후 일본인 매춘부와 상인들이 해당 지역 일본인 사회의 다수를 차지했다. 겐요샤(玄洋社)나 흑룡회(黒龍会)와 같은 일본의 국수주의 단체들은 러시아 극동과 만주에 있는 일본인 매춘부들을 "아마존 군"이라 부르며 미화하고 회원으로 등록하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나 이르쿠츠크 주변에서는 일본인 매춘부들이 정보 수집과 같은 특정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8][65]
3. 6. 조선인 여성들도 인신매매
1918년 일제가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하자 조선인 여성까지 가라유키상으로 동원되어 시베리아, 아무르주, 사할린주 등지로 보내졌다.[1] 이들 중 상당수는 군사 교육을 받고 밀정 활동에도 동참하였는데, 이는 당시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활동했던 조선인 여성 밀정 배정자와 유사한 역할이었다.[1] 대표적인 가라유키상 밀정 조직자로는 일제 해군 고위층의 지원을 받았던 일본인 거부 시마다 모토타로가 있다.[1]동아일보 1924년 9월 2일자 보도에 따르면, 남용석과 같은 인신매매 상인들에 의해 북화태(북 사할린섬)로 팔려간 조선인 여성이 최근에만 4명에 달했으며, 이미 그곳에는 30여 명의 조선인 여성이 팔려가 있었다고 한다.[1] 신문은 일본인 가라유키상 상인뿐만 아니라 조선인 인신매매상에 의해 조선인 여성들이 '악마의 밥'이 되고 있다고 비판적으로 보도했다.[1]
이들 조선인 여성이 팔려간 북화태의 아항은 오늘날 사할린섬 북부에 위치한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를 가리킨다.[1] 이곳은 일본군이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시베리아 침략 시기에 무력으로 점령했던 지역으로, 석탄 생산과 어업 기지로 알려져 있었다.[1] 당시 사할린섬 북부의 오하는 지표면에서 석유를 채취할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였다.[1]
3. 7. 일본내 여론
가라유키상의 해외 진출 초기, 일본 내 여론은 이들을 '딸자군'이라 부르며 애국자로 치켜세웠다. 서양 열강을 따라잡기 위한 외화벌이에 기여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73]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가라유키상의 해외 송출은 메이지 시대 말기에 절정을 이루었다.그러나 일본 제국의 국력이 성장하면서 가라유키상에 대한 시각은 점차 부정적으로 변하여 "국가의 수치"로 여기는 비난 여론이 높아졌다. 일본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이들의 존재가 부끄럽게 여겨진 것이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걸쳐 해외 주재 일본 관리들은 일본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해외 일본인 매춘 업소 폐지를 시도했으며,[60][61] 1920년에는 매춘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해외 일본인 사창가들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가라유키상 대부분은 일본으로 귀국했지만, 사회적으로 끔찍한 차별과 천대에 시달렸다. 이를 견디지 못하고 '시마키 요시'를 비롯한 일부는 자살을 선택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가라유키상의 존재는 전전 일본의 어두운 단면이자 치부로 여겨져 그 실상이 오랫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1972년 야마자키 도모코가 『제8번 산다칸 매춘굴』이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일본 사회에 가라유키상의 실태가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후 관련 연구와 보도가 이어졌다.
4. 후쿠자와 유키치의 발언
후쿠자와 유키치는 메이지 유신 전후 시기에 활동한 계몽사상가이자 교육개혁가로,[112] 일본 1만엔 지폐에 그의 초상화가 등장할 정도로 일본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다.[113] 그는 저서 《학문의 권장》에서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교육 개혁을 외쳤고,[114] 남녀 차별 없는 동등한 교육 기회 제공, 부부간 평등, 여성 참정권 부여 등을 주장하며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기여한 면도 있다.[115]
그러나 이러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여성관은 당시로서는 진보적이었으나, 빈민 출신의 '가라유키상'에 대한 그의 발언을 보면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여성 인권 문제에 대해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16] 그는 가라유키상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세상 사람들은 돈벌이로 여자들을 해외에 보내는 것을 보고 유감과 함께, 비천한 추태에 나라의 체면을 더럽히는 행위를 금지시켜야 한다고 논하고 있지만, 인간 사회에 창부는 어디든지 있는 것, 또한 식민지(각 나라 현지)에는 필요하므로 그들을 굳이 비난한다 해도, 이주의 장려와 함께 그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필요할 수 밖에 없다."[117]
이러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가라유키상 예찬론'은 당시 사회에 영향을 미쳤고, 1901년에는 남양식민지론자인 후쿠모토 니난(福本日南) 등이 주축이 되어 '동방협회'를 만들고 외무성에 이민과를 설치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117]
5. 용어
'''가라유키상'''|唐行きさん일본어은 문자 그대로 "중국으로 간 여성"을 의미했으나,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해외로 간 여성"을 포괄하는 의미로 확장된 용어이다.[1] 이 용어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매춘부, 고급 창부, 게이샤 등으로 일하기 위해 아시아-태평양 지역 등 해외로 보내지거나 인신매매된 일본 여성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2] 이 시기 일본 여성들은 당시 '황색 노예 무역'이라 불리던 아시아 전역의 인신매매 네트워크를 통해 해외로 보내지기도 했다.
5. 1. 어원
唐行きさん|가라유키상일본어은 문자 그대로 "중국으로 간 여성"을 의미했으나,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해외로 간 여성"을 포괄하는 의미로 확장되었다.[1]'가라유키'라는 말 자체는 에도 시대 무렵, 나가사키의 당인옥 근처 시마바라 부근에서 생겨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51] 당시 쇄국 정책 하에서 유일한 대외 창구였던 나가사키의 마루야마 유곽 유녀들은 특별히 데지마나 당인옥 출입이 허용되었다. 이 중 당인옥으로 가는 유녀들은 "당인행(唐人行)"이라 불리며 중국인을 상대했고, 이는 일본인 남성을 상대하는 "일본행(日本行)" 유녀와 구분되었다.[49] 오랫동안 중국인만을 상대해 온 '당인행' 유녀들이 일본인의 해외 도항이 가능해지자 해외로 진출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는 해석도 있다.[50]
모리사키 카즈에에 따르면, 메이지 시대의 규슈 지방에서는 해외로 돈을 벌러 나간 사람들을 성별이나 직업에 관계없이 '가라유키'라고 불렀다. 여기에는 시베리아 철도 건설 노동자나 하와이 이민자 등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다이쇼 시대 무렵부터는 주로 동남아시아 등지로 간 매춘 여성을 가리키는 말로 그 의미가 좁혀졌다.[57]
'가라유키상'이라는 용어는 쇼와 10년대(1930년대 후반)에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평론가 오야 소이치의 르포 등에서 소개되기도 했으나[57],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이 용어가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72년 야마자키 도모코가 출판한 논픽션 『산다칸 8번 창관』(サンダカン八番娼館|산다칸 하치반 쇼칸일본어)이었다.[59] 이 책은 큰 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영화로도 제작되면서 '가라유키상'의 실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켰다.
5. 2. 관련 용어
- '''당인행'''(唐人行): 에도 시대 나가사키의 마루야마 유곽에서는 데지마나 당인옥 출입이 제한되었지만, 유녀는 예외적으로 허용되었다. 데지마로 가는 유녀는 "홍모행", 당인옥으로 가는 유녀는 "당인행"이라고 불렸다. 특히 중국인을 상대하는 유녀를 "당인행"이라 칭하며 일본인 남성을 상대하는 "일본행" 유녀와 명확히 구분했다[49]。 이 "당인행"이라는 말이 "가라유키상"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51]。 에도 시대 무렵 나가사키 당인옥 근처에서 "가라유키"라는 말이 생겨났다고도 한다[51]。
- '''가라유키'''(唐行き): 모리사키 카즈에에 따르면, 메이지 시대 규슈 지방에서는 해외로 돈을 벌러 나간 사람(남녀 불문)을 "가라유키"라고 불렀다고 한다. 여기에는 시베리아 철도 건설 노동자나 하와이 이민 등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다이쇼 시대 무렵부터는 주로 동남아시아 등 해외로 나가 매춘에 종사한 여성을 특정하여 부르는 말로 의미가 좁혀졌다.
- '''조시군'''(娘子軍): 메이지 시대 말기에 해외로 나간 소녀들을 애정을 담아 부르던 별칭으로, '여군(女軍)'이라는 의미를 가진다[3]。
참조
[1]
서적
The making of prostitutes: The Karayuki-san
[2]
뉴스
日本性宽容:"南洋姐"输出数十万
http://news.takungpa[...]
2013-07-10
[3]
학술지
Karayuki-san(Japanese Prostitutes)in Thailand: 1885‒1920
https://www.jstage.j[...]
[4]
학술지
Comfort Women in Indonesia: A Consideration of the Prewar Socio-Legal Context in Indonesia and Japan.
http://dspace.wul.wa[...]
[5]
서적
Advisory Commission for the Protection and Welfare of Children and Young People: Traffic in women and children committee. Minutes …
https://books.google[...]
The Committee
2014-05-17
[6]
서적
Commission of Enquiry Into Traffic in Women and Children in the East: Report to the Council
https://books.google[...]
League of Nations
2014-05-17
[7]
학술지
A Forgotten 'Hero': Kawahara Misako and Japan's Informal Imperialism in Mongolia during the Meiji Period
http://intersections[...]
2015-07-21
[8]
서적
White Terror: Cossack Warlords of the Trans-Siberian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4-05-17
[9]
웹사이트
[Photos] The Japanese Prostitutes Of Colonial Vietnam
http://saigoneer.com[...]
2015-07-15
[10]
서적
Journal of the Malaysian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Volume 62, Issue 2
https://books.google[...]
The Branch
2014-05-17
[11]
서적
Somatechnics: Queering the Technologisation of Bodies
https://books.google[...]
Ashgate Publishing, Ltd.
2014-05-17
[12]
서적
Gender and Empire
https://books.google[...]
Palgrave Macmillan
2014-05-17
[13]
서적
Myths and Memories: (Re)viewing Colonial Western Australia through Travellers' Imaginings, 1850–1914
https://books.google[...]
Cambridge Scholars Publishing
2014-05-17
[14]
서적
Migration, Diaspora and Identity: Cross-National Experiences
https://books.google[...]
Springer Science & Business Media
2014-05-17
[15]
서적
Historical Studies, Volume 17
https://books.google[...]
2014-05-17
[16]
학술지
Multi-ethnic Enclaves around Middle Road: An Examination of Early Urban Settlement in Singapore
2006-07
[17]
웹사이트
Singapore's Japanese prostitute era paved over
http://search.japant[...]
2007-05-28
[18]
뉴스
Tragic fate for the unwanted daughters
https://www.asiaone.[...]
2014-04-07
[19]
문서
[20]
문서
[21]
문서
[22]
문서
[23]
문서
[24]
문서
[25]
서적
The Attractive Empire
[26]
서적
The Attractive Empire
[27]
학술지
「山打根的八番娼館」之讀後心得
https://web.archive.[...]
國立暨南國際大學東南亞研究所碩士 本院亞太研究計畫九十一年度碩士論文獎助得獎人
2015-07-21
[28]
서적
The memoir of Keiko Karayuki-san in Siam
Numfon Publishing
[29]
사진
Une Horizontale à Saïgon (Prostitution une Horizontale à Saigon Indochine prostituée cochinchine Vietnam)
http://www.delcampe.[...]
Collection Phénix Mottet et co, éditeurs à Saigon
[30]
사진
SAIGON. – Un Groupe d'Horizontales Japonaises (Carte postale Saigon Vietnam, Un groupe d'Horizontales japonaises, Geishas)
http://www.akpool.fr[...]
[31]
사진
VIET-NAM – Saigon : A Japanese prostitute
https://web.archive.[...]
[32]
사진
154. Cochinchine – Saïgon – Gorupe de juenes Japonaises (CPA VIET NAM COCHINCHINE SAIGON 1912 JEUNES JAPONAISES)
https://web.archive.[...]
2015-07-25
[33]
사진
149. Cochinchine – Saïgon – Trois Juenes Mousmées (CPA Viet Nam COCHINCHINE SAIGON Trois Jeunes Mousmées animé !!! ETAT Trace visible !!! VOIR SCANS et Descriptions)
https://web.archive.[...]
2015-07-25
[34]
사진
235. Cochinchine – Saïgon – Jeune Maman Japonaise et son Enfant (Rare CPA Viet Nam COCHINCHINE SAIGON Jeune Maman Japonaise et son Enfant animé VOIR SCANS et Descriptions)
https://web.archive.[...]
2015-07-25
[35]
사진
231. Cochinchine – Saïgon – Types de Japonaises (CPA Viet Nam COCHINCHINE SAIGON Type de Japonaises animé VOIR SCANS et Descriptions)
https://web.archive.[...]
2015-07-25
[36]
AV 미디어
146. Cochinchine – Saïgon JAponaise demi-mondaine (VIETNAM INDOCHINE VIETNAM COCHINCHINE SAIGON JAPONAISE DEMI MONDAINE PROSTITUTION EROTISME GEISHA)
http://www.delcampe.[...]
2015-07-25
[37]
AV 미디어
Japanese Woman (A Japanese Karayuki-san (Prostitute) in Singapore)
https://seap.einaudi[...]
[38]
AV 미디어
Japanese Girls
http://kinkonkid.blo[...]
[39]
웹사이트
Karayuki-san
https://www.pinteres[...]
[40]
서적
A beachcomber in the Orient
https://books.google[...]
Dodd, Mead and company
2014-05-17
[41]
서적
Journal of studies of Japanese aggression against China, Issues 5–8
https://books.google[...]
日本侵華研究學會
2014-05-17
[42]
서적
Giving a Voice to the Voiceless: The Significance of Yamazaki Tomoko's Use of Oral History in "Sandakan Hachiban Shōka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Sheffield, School of East Asian Studies
2014-05-17
[43]
서적
Sandakan Bordell Nr. 8: Ein verdrängtes Kapitel japanischer Frauengeschichte
https://books.google[...]
Iudicium Verlag
2014-05-17
[44]
서적
Nihon no yōchien: yōji kyōiku no rekishi
https://books.google[...]
Rironsha
2014-05-17
[45]
서적
Sex, Power, and Slavery
https://books.google[...]
Ohio University Press
2014-05-17
[46]
서적
Ameyuki San no uta
https://books.google[...]
Bungei Shunjû
2014-05-17
[47]
서적
『娯楽業者の群 : 社会研究』
実業之日本社
[48]
서적
『日本売春史』
[49]
서적
『「からゆき」という歴史事象創出の背景--「性的自立性」の多様性』
[50]
서적
『海を越えた艶ごと一日中文化交流秘史』
新説社
[51]
서적
『新訂丸山遊女と唐紅毛人』
長崎文献社
[52]
서적
『天草島原の乱とその前後』
熊本県上天草市、上天草市史編纂委員会編
[53]
서적
『年表日本歴史 4 安土桃山・江戸前期』
筑摩書房
[54]
문서
天草郡記録
[55]
문서
万治元戌年より延享三年迄の人高覚
[56]
서적
『ポンぺ日本滞在見聞記』
雄松堂
[57]
서적
『日本の裏街道を行く』『日本新おんな系図』
文芸春秋新社, 中央公論社
[58]
웹사이트
「からゆき」という歴史事象創出の背景 : 「性的自立性」の多様性
https://hermes-ir.li[...]
[59]
문서
「慰安婦」・公娼の境界と帝国の企み
[60]
논문
Spell of the Rebel, Monumental Apprehensions:Japanese Discourses in Pieter Erberveld
http://cip.cornell.e[...]
2004-04
[61]
논문
Comfort Women in Indonesia: A Consideration of the Prewar Socio-legal context in Indonesia and Japan
https://hdl.handle.n[...]
[62]
논문
A Forgotten 'Hero': Kawahara Misako and Japan's Informal Imperialism in Mongolia during the Meiji Period
http://intersections[...]
2015-07-21
[63]
서적
Journal of the Malaysian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Volume 62, Issue 2
https://books.google[...]
The Branch
2014-05-17
[64]
서적
Historical Studies, Volume 17
https://books.google[...]
2014-05-17
[65]
서적
White Terror: Cossack Warlords of the Trans-Siberian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4-05-17
[66]
웹사이트
[Photos] The Japanese Prostitutes Of Colonial Vietnam
http://saigoneer.com[...]
2015-07-15
[67]
서적
Somatechnics: Queering the Technologisation of Bodies
https://books.google[...]
Ashgate Publishing, Ltd.
2014-05-17
[68]
뉴스
タイでもぐりあんま
朝日新聞
1972-08-02
[69]
사전
からゆきさん [唐行きさん]
네이버 일본어 사전
[70]
웹사이트
가라유키상(Karayuki-San, the Making of a Prostitute)
https://www.mycelebs[...]
마이셀럽스
[71]
서적
일본여자를 말한다
창해
1998
[72]
서적
일본인과 에로스
고려원
1995
[73]
뉴스
메이지 정부, 원정 성매매 일본여성 50만명 관리했다.
https://www.yna.co.k[...]
연합뉴스
2017-05-30
[74]
백과사전
한일 양국인의 성의식의 격차
네이버 지식백과
2011-09-05
[75]
백과사전
성문화
네이버 지식백과
2005-03-02
[76]
백과사전
일본의 종교와 문학 속의 성의식
https://terms.naver.[...]
네이버 지식백과
2011-09-05
[77]
백과사전
성문화
네이버 지식백과
2005-03-02
[78]
잡지
일본인의 ‘끝없는’ 색탐(色貪)의 기원
http://jmagazine.joi[...]
월간중앙
2018-11
[79]
백과사전
성문화
네이버 지식백과
2005-03-02
[80]
뉴스
불과 60년전까지 일본에서는 성폭행이 밤문화였다.
https://www.insight.[...]
인사이트
2017-12-27
[81]
백과사전
유곽 [遊廓]
네이버 지식백과
[82]
백과사전
현대 일본인의 성의식
네이버 지식백과
2011-09-05
[83]
백과사전
요시와라 [Yoshiwara, 吉原(길원)]
두산백과
[84]
백과사전
요시와라와 우키요에
https://terms.naver.[...]
네이버 지식백과
[85]
서적
일본인과 에로스
고려원
1995
[86]
서적
일본인과 에로스
고려원
1995
[87]
서적
일본여자를 말한다
창해
1998
[88]
서적
일본여자를 말한다
창해
1998
[89]
사전
ぜげん (女衒)
네이버 일본어 사전
[90]
서적
일본여자를 말한다
창해
1998
[91]
서적
일본인과 에로스
고려원
1995
[92]
사전
ピンプ
네이버 일본어 사전
[93]
뉴스
메이지 정부, 원정 성매매 일본여성 50만명 관리했다.
연합뉴스
2017-05-30
[94]
서적
일본여자를 말한다
창해
1998
[95]
서적
동남아시아를 더렵혔던 일본인 창부
[96]
서적
일본여자를 말한다
창해
1998
[97]
서적
일본인과 에로스
고려원
1995
[98]
서적
일본인과 에로스
고려원
1995
[99]
서적
일본여자를 말한다
창해
1998
[100]
서적
일본여자를 말한다
창해
1998
[101]
뉴스
메이지 정부, 원정 성매매 일본여성 50만명 관리했다.
연합뉴스
2017-05-30
[102]
서적
일본여자를 말한다
창해
1998
[103]
백과사전
성문화
네이버 지식백과
2005-03-02
[104]
서적
일본여자를 말한다
창해
1998
[105]
백과사전
성문화
네이버 지식백과
2005-03-02
[106]
서적
일본여자를 말한다
창해
[107]
서적
일본여자를 말한다
창해
[108]
서적
White Terror: Cossack Warlords of the Trans-Siberian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4-05-17
[109]
웹사이트
성문화 (새로운 일본의 이해, 2005. 3. 2., 공의식)
https://terms.naver.[...]
[110]
서적
일본여자를 말한다
창해
[111]
서적
일본인과 에로스
고려원
[112]
웹사이트
후쿠자와 유키치 [Fukuzawa Yukichi, 福沢諭吉(복택유길)]
https://terms.naver.[...]
[113]
서적
지폐, 꿈꾸는 자들의 초상
황소자리
[114]
웹사이트
후쿠자와 유키치 [福沢諭吉] - 일본 근대화의 전형(典型)을 제시하다
https://terms.naver.[...]
[115]
웹사이트
후쿠자와 유키치 [Fukuzawa Yukichi, 福沢諭吉(복택유길)]
[116]
서적
일본인과 에로스
고려원
[117]
서적
일본여자를 말한다
창해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