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주의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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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국수주의는 메이지 시대부터 시작되어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극단화되었고, 전후에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메이지 시대에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방어 의식에서 시작되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조약 개정 및 서구화 정책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다. 다이쇼 시대와 쇼와 시대를 거치며 전체주의적, 제국주의적으로 변질되었고, 1888년 시가 시게타카 등의 '국수 보존 취지' 발표를 계기로 '국수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막부 말기의 존왕양이론을 기원으로 하는 국수주의는 우익 운동의 원리가 되었고, 만주 사변과 중일 전쟁을 거치며 사상적 정치 운동으로 발전하여 태평양 전쟁기에는 초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전후에는 일본국 헌법 제9조에 따라 군사력 행사를 포기하고 미국과의 동맹을 통해 안보를 유지하며,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나, 1990년대 이후에는 역사 수정주의와 우경화가 나타나 주변국과의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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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주의 (일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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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 | |
정의 | |
개념 | 일본의 민족주의. |
특징 | 일본 문화, 민족, 정체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사상. |
역사적 맥락 | |
메이지 유신 | 근대 국가 형성 과정에서 국가주의 강화. |
제2차 세계 대전 | 군국주의와 결합하여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남. |
전후 | 우익 단체 및 일부 정치인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유지 및 주장됨. |
사상적 기반 | |
국가신토 | 일본 신토를 국가 이념으로 활용. |
천황숭배 |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 통합 강조. |
일본 고유 문화 강조 | 일본 전통 및 정신 문화의 우수성 강조. |
주요 특징 | |
배타적 민족주의 | 외국인 및 외부 문화에 대한 배척 성향. |
역사 수정주의 | 과거 제국주의 행적에 대한 미화 또는 부인. |
군사력 강화 주장 | 일본의 군사적 역할 확대 및 재무장 지지. |
관련된 개념 | |
일본주의 (日本主義, Nihon shugi) | 일본 고유의 가치와 문화를 옹호하는 사상. |
국수주의 (国粋主義, Kokusui shugi) | 자국의 문화와 전통을 숭상하고 외래 문화를 배척하는 사상. |
국가주의 (国家主義, Kokka shugi) | 국가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사상. |
현대 일본 내셔널리즘 | |
우익 단체 | 거리 시위, 출판물 발간 등을 통해 활동. |
정치적 영향력 | 일부 정치인들이 내셔널리즘적 주장을 지지하거나 활용. |
사회적 논쟁 | 역사 문제, 영토 분쟁 등과 관련하여 논쟁 발생. |
비판적 시각 | |
과거사 문제 | 과거 제국주의 행적에 대한 반성 부족 지적. |
외국인 혐오 | 외국인에 대한 차별 및 배척 문제 제기. |
평화헌법 개정 논란 | 군사력 강화 주장에 대한 우려. |
같이 보기 | |
관련 항목 | 일본 우익 혐한 신사 참배 일본의 재무장 논쟁 |
참고 문헌 | |
도서 | 『耻知らずの国家』 (무치즈라즈노 콧카, 부끄러움을 모르는 국가) 『ナショナリズムの復権』 (나쇼나리즈무노 훗켄, 내셔널리즘의 복권) |
외부 링크 | |
관련 사이트 | 아마존 재팬 - 내셔널리즘 관련 상품 검색 결과 |
2. 메이지 시대 (1868-1912)
메이지 시대의 국수주의는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했다. 고메이 천황과 매튜 C. 페리 제독 간의 가나가와 조약 체결은 일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에도 막부 시대에는 막부 내각이 천황의 최고 기관인 오세이(王政)를 추진하면서, 일부 다이묘들이 일본 민족주의 개념을 전파했다. 사카모토 료마는 신정부강령팔책을 통해 쇄국 정책을 비판하고 변혁을 추구했으며, 이는 에도 막부 붕괴와 메이지 유신의 주요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 오세이 기관은 일본 고유의 정치, 사회, 철학, 문화를 포함하는 국수주의로 변모했지만, 일본 내에서는 이를 개화된 민족주의라고 불렀다. 일본과 서양의 군사력 및 경제력 차이는 메이지 지도부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쿄헤이(共兵)를 통해 군사력 강화와 서양과의 전략 산업을 통한 경제력 강화를 추구했다.
막부 말기부터 대두된 존왕양이론은 메이지 유신 이후 대일본 제국 정부의 조약 개정 교섭과 서구화 정책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다.[27] 정부는 서양 문화를 적극 도입하여 근대화를 추진하는 서구화주의 정책을 펼쳤다.[28][31]
1888년 시가 시게타카와 미야케 세츠레이 등이 정교사에서 발행한 잡지 『일본인』에 정부의 서구화 정책에 반발하는 시가의 논문 "국수 보존 취지"가 발표되면서 "국수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28][31] 시가는 이 논문에서 일본 본래의 장점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8][31]
시가의 말처럼, 메이지 시대 중기의 국수주의는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의 문명을 주체적으로 발달시키기 위해 서양 문명을 부분적으로 채택하는 특성을 지녔다.[27] 그러나 배외주의가 확산되고, 다카야마 초규나 기무라 타카타로 등이 제창한 일본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전통과 국체 옹호의 입장에서 우익의 행동 원리가 되었고, 사회주의 대중 운동에 대항하며, 만주 사변부터 중일 전쟁에 걸쳐 확대되어 정치 운동으로 발전했다.[31]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황국사관과 같은 초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27] 국수주의는 만세일계의 천황을 받드는 일본 국가 체제의 영속성을 주장하는 국체론이라는 점에서 일관성을 유지한다.[28]
2. 1. 초기: 국수주의의 태동
도쿠가와 막부 말기, 매튜 C. 페리 제독의 내항과 가나가와 조약 체결 이후 외국 세력의 침략에 대한 위협이 커지면서 국수주의 이념이 발전했다. 일부 유력한 다이묘들은 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후코'(復古)를, 다른 이들은 천황의 절대 권위를 의미하는 '오세이'(王政)를 주창했다. 이들은 존왕양이 사상으로 융합되었으며, 이는 곧 메이지 유신의 주요 원동력이 되었다.[27]1889년 메이지 헌법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시민의 최고 의무로 규정했다. 이 헌법은 서구의 정치적 관행과 전통적인 일본 정치 사상을 혼합하여 담고 있었다.
2. 2. 경제 성장과 국수주의
일본과 서구 열강 간의 경제력 및 군사력 격차는 초기 메이지 지도부에게 큰 우려를 안겨주었다. 부국강병(富國強兵,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함)이라는 표어는 전략 산업 강화를 위한 정부 지원을 제공하는 메이지 시대의 국수주의 정책을 상징했다. 일본은 강력한 경제 기반을 통해서만 서구식의 강력하고 현대적인 군대를 건설할 수 있었고,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통해서만 불평등 조약과 같은 가나가와 조약의 개정을 강요할 수 있었다. 정부 정책은 또한 나중에 ''재벌''로 알려진 산업 자본주의 제국의 기반을 마련했다.[1]2. 3. 무사도(武士道)와 정신 교육
19세기 일본의 군사 민족주의는 ''무사도(武士道, "무사의 길")''로 알려졌다. 이는 사무라이의 올바른 길에 대한 일관된 신념과 교리, 즉 '무가 사상'(武家思想, ''부케 시소'')을 의미한다. 야마모토 츠네토모가 1710년부터 1716년 사이에 편집한 11권의 ''하가쿠레''에서 이 글자 조합이 사용되었으나, 메이지 시대 이전의 일본 문헌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2]전쟁과 전사에 관한 가문 지침서에 의해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이 사상은 바쿠후 설립과 함께 어느 정도 공식적인 지원을 받았다. 바쿠후는 새로운 쇼군 정부의 기초를 형성하는 군사 계층에 맞게 조정된 주희의 신유학에서 이념적 정통성을 추구했다.[2] 야마가 소코는 일본의 군사적 정신을 이론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봉건 제도 폐지 후, 일본의 새로운 군사 제도는 유럽식으로 형성되었으며 서구 강사들이 참여했고, 코드 자체는 해외에서 채택된 표준 모델을 기반으로 했다.[3]
''군인칙유''(1890)는 일본을 "신들이 보호하는 신성한 국가"로 제시했다. 전통적인 무사 가치관은 사라지지 않았고, 일본이 다이쇼 중반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 반복적인 위기의 주기로 접어들면서, 일본 제국 육군에서 더 정치화된 장교들 사이에서 오래된 사무라이 이상이 중요성을 띠기 시작했다. 아라키 사다오는 육군 인력의 이념적 기반으로서 ''정신 교육''(精神教育, 세이신 쿄이쿠) 교리를 채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문부과학성 장관으로서 그는 사무라이 코드를 국가 교육 시스템에 통합하는 것을 지지했다.
2. 4. 국가신토(國家神道)와 천황 숭배
메이지 유신 이후, 다양한 일본 철학자들은 민족 신앙을 부활시키고 정화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들은 주로 중국 철학에서 차용한 외래 사상을 제거하고자 했다. 이러한 "복고 신토 운동"은 18세기에 모토오리 노리나가에 의해 시작되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와 이후 히라타 아쓰타네는 태양 여신 아마테라스의 우월성을 가르치는 ''고지키'' 등의 고전 신토 텍스트를 기반으로 연구를 진행했다.[4]이러한 연구는 일본 천황이 아마테라스의 직계 후손이라는 주장을 통해 국가신도의 기반을 형성했다. 이에 따라 천황은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고, 천황의 모든 선언은 종교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새로운 제국 정부는 국가 신도가 기독교를 포함한 서구의 외래 사상에 대한 균형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4]
1890년에는 교육에 관한 칙어가 발표되었고, 학생들은 "국가에 용감하게 헌신"하고 황실을 보호하겠다는 맹세를 의례적으로 암송해야 했다. 천황 숭배는 신성한 숭배를 위한 황실 초상화를 배포하여 더욱 확산되었다. 이러한 모든 관행은 신사에서 애국적인 중앙 집중식 준수를 통해 국가적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한다.[4]
3. 제국주의 시대 (1905-1945)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는 국민주의의 극단적인 형태인 국수주의가 나타났다. 메이지 시대 일본의 민족주의는 유럽 및 서양 세력의 침략에 대한 방어를 목적으로 국가 단합과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이후 일본 고유의 민족주의는 "투쟁과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 지녀야 할 위대한 힘"으로 규정되었으며, 다이쇼 시대와 쇼와 시대를 거치며 전체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성격으로 변질되었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1905년 스스로를 대일본제국이라 칭하며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했다. 타이완, 만주 등 여러 지역을 식민지로 삼고, 여러 왕조들을 수중에 넣었다. 이러한 영토 확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본은 19세기 말, 사무라이 정신을 바탕으로 "모든 백성은 천황의 전사"라는 애국주의를 만들어냈다. 이는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풍토를 조성했다.
1882년에는 일본 최초의 국수주의 정당 중 하나인 제정당이 조직되었다.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은 홋카이도, 류큐 왕국, 포르모사, 랴오둥 반도, 가라후토, 조선, 남양 군도 위임통치 섬들을 획득하며 식민 제국을 건설했다.
야스쿠니 신사는 이 시기부터 국수주의적 감정의 중심지로 변모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국가의 후원을 받았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일본을 위해 목숨을 잃은 일본인과 비일본인, 식민지 및 점령지의 민간인과 행정 요원 등이 안치되었다.
1926년부터 1928년 사이에는 중앙 정부가 "치안 유지국"을 조직하여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했고, 일본 육군은 ''헌병''을 조직했다. 치안 유지법을 통해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가 제한되었다.
1925년부터 1935년까지 日本_(新聞)|니혼 (신문)일본어은 국수주의 이데올로기를 홍보하며, 미노베 타츠키치의 "천황 기관설"을 공격하고 천황의 신성한 권리를 옹호했다.[5][6]
3. 1. 제국주의 교육
메이지 시대의 주요 교육은 전통적인 국가의 정치, 사회, 문화 및 가치를 가르치는 것이었으며, 일본 특유의 국교와 도덕심의 위대함을 강조하였다.[3] 이 교육은 개인의 자치 능력을 개발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고, 항상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였다.[3]일본 제국 정부는 학생들에게 교련 교육을 시켰는데, 여성의 경우는 응급 치료술, 남성의 경우는 전투 훈련을 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하였다.[4] 1890년의 교육칙어는 인간 관계의 계층적 본질에서 전통적인 유교 가치의 회귀를 장려했으며, 국가는 개인보다 우월하고, 천황은 국가보다 우월했다.[6] 쇼와 시대 동안, 교육 시스템은 군국주의 국가를 지원하고 미래의 군인을 양성하는 데 사용되었다.[6]
정부는 모든 학생 수준에 대해 공식 교과서를 발행했으며, 문화 활동, 세미나 등으로 이를 강화했다.[7] 학교에서 ''국체노혼기''와 같은 텍스트를 강조하는 것은 고대부터 "일본의 독특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7] 이러한 문화 과정은 외세 침략에 대비한 군사 및 생존 훈련으로 보완되었다.[7]
3. 2. 국수주의의 심화 (1926-1945)
1920년대 말부터 일본 국수주의는 더욱 심화되었다. 일본은 천황제에 반대하고 노동 운동, 농민 운동을 주도하는 일본 공산당을 박해하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성립하여 모든 좌익 활동을 금지시켰다. 일본 제국 정부는 민중을 억압하는 식의 정치를 했다.[7]1936년에 개정된 일본제국헌법에서는 극우, 파시즘, 군국주의 조항을 찾아볼 수 있다. 제4조 칙령에 따라 국가 원수는 천황이며, 해군을 통솔한다고 명시되었다. 다당제가 허용되었던 일본 제국은 이 헌법으로 인해 대정익찬회라는 제국주의 일당제가 성립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식민지 내 다른 민족에게도 교화 정책을 펼쳐야 했다. 대한민국에서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민족말살정책 또는 민족병합주의적인 회유 정책을 예로 들 수 있다.[7]
3. 3. 정치적 국수주의 운동
1882년, 일본 최초의 국수주의 정당 중 하나인 제정당이 조직되었다. 러일 전쟁을 시작으로, 일본은 "대일본 제국"("다이 니폰 테이코쿠")이라는 칭호를 채택하여 홋카이도(1869), 류큐(1879), 포르모사(1895), 랴오둥 반도 및 가라후토(1905), 조선(1905–10) 그리고 남양 군도 위임통치 섬들(1918–19)을 획득하며 식민 제국을 건설했다.[5]중국 및 러시아와의 전쟁은 근대적이었으며 애국심의 국수주의적 표현을 요구했다. 이 시기부터 야스쿠니 신사(1869년 창건)는 국수주의적 감정의 중심지로 바뀌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국가의 후원을 받았다. 야스쿠니는 일본을 위해 목숨을 잃은 일본인과 비일본인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으며, 1869년부터 1945년까지 국내외 모든 전쟁 사망자(1945년 이후의 분쟁 사망자는 없음)뿐만 아니라 식민지 및 점령지의 민간인(여성과 학생) 및 행정 요원도 포함한다.[5]
1920년대에는 우익 민족주의 신념이 지배적인 세력이 되었고, 비밀 결사들이 초민족주의와 일본 중심의 급진적인 사상을 받아들였다. 1926년에서 1928년 사이에 중앙 정부는 "치안 유지국"(반체제 경찰 부서)을 조직하여 사회주의 형태의 정부를 제안한 모든 지방 소련 후원 공산주의자를 기소했다. 일본 육군은 ''헌병''(군사 경찰)을 조직했다. 반체제는 정치적 및 언론 탄압을 사용하여 통제되었으며, 치안 유지법은 경찰이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5]
1925년부터 1935년까지 日本_(新聞)|니혼 (신문)일본어은 국수주의 이데올로기를 홍보하고 일본 정치 지형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 비교적 작은 전체 발행 부수에도 불구하고, 우익 정치인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했으며 미노베 타츠키치의 "천황 기관설"을 격렬하게 공격하며 천황의 신성한 권리 개념을 옹호했다.[5][6]
일본 해군은 고대 가치와 천황의 신성함을 옹호하는 면에서 일반적으로 더 전통적이었고, 일본 육군은 강한 지도력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더 진취적이었다. 이는 쿠데타와 직접 행동의 사용으로 입증된다. 해군은 전형적으로 정치적 방법을 선호했다. 육군은 궁극적으로 초국수주의자, 반공주의자, 반자본주의자, 반의회주의자, 그리고 민족주의-군국주의 이념의 수단이었다.[5]
군대는 정치 부패와 관련하여 정치적으로 "청렴하다"고 여겨졌으며, 국가의 안보를 '회복'하는 책임을 떠맡았다. 군대는 여러 가지 이유(군대 지원 부족, 국가 안보 위협, 지도력의 약점)로 인해 기존 민주 정당과 정규 정부를 비판했다. 또한 그 구성에 의해 중산층과 하층 계급에 대한 경제 공황의 영향과 공산주의 위협을 밀접하게 인식했다.[5]
두 군 모두 외곽 지방을 관리하고 군사적 준비를 하면서 권력을 얻었다.[5]
3. 4. 정치적 이념
기타 잇키는 군사 쿠데타를 통해 천황 중심의 국가 개조를 주장했다. 그의 저서 『일본 개조 대강』은 금서였지만 1930년대 초 일부 군부에서 읽혔다. 기타의 계획은 헌법을 중단하고 의회를 해산한 후, 천황과 그의 군사적 지지자들이 국민과 지도자를 통합하기 위해 "집단주의적 직접 자원주의"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귀족 제도를 폐지하고 황실에 대한 긴축 정책을 통해 노동 계급과의 화합을 추구했다. 해외에서는 일본이 아시아를 서구의 영향에서 해방시킬 것을 주장했다.[27]아마우 독트린("아시아의 먼로 독트린")은 일본이 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진다고 선언했다. 히로타 고키 외무대신은 "반공주의, 친일본적, 친만주국"의 "특별 구역"과 화북 지방이 일본 국가 존재의 "근본적인 부분"이라고 선언하며, 소련과 중국을 상대로 "국가적 사명"으로 "성전"을 선포했다.
1940년 고노에 후미마로는 ''신체제''(新體制)를 선포하여 일본을 "국가 방위의 선진국"으로 만들고, 중앙 집권적인 "합의 국가"를 조직하기 위한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를 창설했다. 이와 관련하여 정부는 ''토나리그미''(隣組, 주민회)를 만들었다.
3. 5. 지정학적 전략
일본의 이론가들은 핼포드 매킨더의 저서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에 나타난 지정학적 이론을 참고했다.[1] 그는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의 '세계 섬'이 왜 지배적인지, 그리고 그 핵심이 중앙아시아의 '중앙 대륙'인지 논의했다. 이 지역은 사막과 산맥으로 바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으며, 서쪽 측면과 유럽의 첨단 기술에만 취약하다고 보았다.[1]매킨더는 "동유럽을 지배하는 자는 심장부를 지배하고, 심장부를 지배하는 자는 세계 섬을 지배하며, 세계 섬을 지배하는 자는 세계를 지배한다."라고 주장했다.[1] 이러한 지정학적 아이디어는 1928년 만주에 파견되어 첩보 활동을 한 이시와라 간지 중령의 이론과 일치했다.[1]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일본은 1931년 만주 침략을 시작으로 1941년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팽창 정책을 추진했다.[1] 이는 대동아공영권 계획으로 구체화되었다.[1]
4. 전후 시대 (1945-)
1945년 일본 제국의 패망 이후, 일본은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점령 하에 민주화 개혁을 겪었다. GHQ는 1946년 일본 제국 헌법을 개정하여 일본국 헌법을 제정하였으며, 이 헌법의 일본국 헌법 제9조는 전쟁과 군사력 보유를 금지하고 있다.[8] 이로 인해 일본은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고, 냉전 시기 소련과의 전략적 위치 때문에 미국은 일본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는 일본이 미국의 "불침 항공모함"이 되었다고 표현했다.[9]
1960년대 이후 일본의 경제 성장은 전쟁 전 군국주의 민족주의의 매력을 약화시켰으나,[13] 1990년대 이후 아시아의 네 마리 용과 중국과의 지역 경쟁 심화, 경제적 불안으로 인해 보수 수정주의 민족주의가 부상했다.[10]
일본 우익 세력은 역사 교과서를 수정주의적 관점에서 제작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부정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위안부 문제와 난징 대학살을 부인하는 것은 과거 식민지 국가에 대한 평화주의자들의 소극적인 자세에 대한 불만이면서, 동시에 세계화에 따른 경제적 불안에 대한 반발이었다.[15]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아베 신조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국제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20] 아베 정부는 적극적 평화주의를 내세워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고,[21] 군사력 확장을 추진했다.[22] 이는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과 중국의 부상에 대한 안보 우려, 그리고 미국의 대중국, 대북한 억지 동맹 구축 목표와도 일치하는 것이었다.[10]
일본 경찰청은 1996년에 일본에 1,000개 이상의 극우 단체(''우익 단체'')가 있으며, 총 10만 명의 회원이 있다고 추산했다. ''우익 단체''는 확성기를 장착한 눈에 잘 띄는 일본의 선전 차량과 단체의 이름과 선전 구호가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애국가나 전시 시대의 노래를 재생한다.[32] 이러한 단체와 관련된 활동가들은 화염병과 시한 폭탄을 사용하여 온건파 정치인과 공인을 위협하기도 했다.[23] 공공연한 수정주의 단체인 일본회의는 "일본 최대의 우익 단체"로 여겨진다.[24][25]
4. 1. 평화 헌법과 미일 관계
1945년 일본 제국의 패망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1946년 일본 제국 헌법을 개정하여 일본국 헌법을 제정하였다. 일본국 헌법 제9조는 전쟁과 군사력 보유를 금지하고 있다.[8]'''일본국 헌법 제9조'''|니혼코쿠 켄포 다이큐조일본어
> "정의와 질서에 기초한 국제 평화를 성실히 염원하는 일본 국민은 영원히 국가의 주권적 권리로서의 전쟁과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의 무력의 위협 또는 행사를 포기한다. 앞선 조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및 기타 전쟁 잠재력은 결코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 조항으로 인해 일본은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다. 냉전 시기, 소련과의 전략적 위치 때문에 미국은 일본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는 일본이 미국의 "불침 항공모함"이 되었다고 표현했다.[9]
4. 2. 경제 성장과 민족주의의 변화
1960년대 이후 일본의 경제 성장은 전쟁 전 군국주의 민족주의의 매력을 약화시켰다.[1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은 식민지 없이도 번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 일본은 자유주의 국제주의를 육성하기 위한 원칙을 채택했다.[14]1990년대 이후 아시아의 네 마리 용과 중국과의 지역 경쟁 심화, 경제적 불안으로 인해 보수 수정주의 민족주의가 부상했다.[10] 많은 학자들은 1990년대 이후 자유주의 국제주의가 보수 수정주의 민족주의로 바뀌기 시작했다고 보았다.[10]
4. 3. 역사 수정주의와 우경화
일본 우익 세력은 역사 교과서를 수정주의적 관점에서 제작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부정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위안부 문제와 난징 대학살을 부인하는 것은 과거 식민지 국가에 대한 평화주의자들의 소극적인 자세에 대한 불만이면서, 동시에 세계화에 따른 경제적 불안에 대한 반발이었다.[15]고이즈미 준이치로와 아베 신조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국제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20] 아베 정부는 적극적 평화주의를 내세워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고,[21] 군사력 확장을 추진했다.[22] 이는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과 중국의 부상에 대한 안보 우려, 그리고 미국의 대중국, 대북한 억지 동맹 구축 목표와도 일치하는 것이었다.[10]
4. 4. 우익 단체(우요쿠 단타이)
일본 경찰청은 1996년에 일본에 1,000개 이상의 극우 단체가 있으며, 총 10만 명의 회원이 있다고 추산했다. 이러한 단체는 일본에서 ''우익 단체''로 알려져 있다. 이들 단체 간에는 정치적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반좌익, 중국, 북한, 대한민국 및 때로는 미국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역할에 대한 정당화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우익 단체''는 확성기를 장착한 눈에 잘 띄는 일본의 선전 차량과 단체의 이름과 선전 구호가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차량들은 애국가나 전시 시대의 노래를 재생한다.[32]이러한 단체와 관련된 활동가들은 화염병과 시한 폭탄을 사용하여 히토시 타나카 전 외무 차관과 후지 제록스 회장 고바야시 요타로를 포함한 온건파 정치인과 공인을 위협했다. 한 극우 단체의 전 멤버는 자유민주당 정치인 가토 고이치의 집에 방화했다. 가토 고이치와 코바야시 요타로는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었다.[23]
공공연한 수정주의 단체인 일본회의는 "일본 최대의 우익 단체"로 여겨진다.[24][25]
4. 5. 전후 일본의 민족주의 논쟁
1945년 일본 제국의 패망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일본국 헌법 제정을 통해 일본의 군사력을 제한했다. 헌법 제9조는 전쟁과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하고, 전력(戰力)을 보유하지 않으며, 교전권을 부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8] 이로 인해 일본은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다.냉전 시기,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은 '불침항모론'을 주장하며 미일 동맹을 강화했다.[9] 그러나 일본 내에서는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에 대한 반발과, 헌법 제9조를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었다.[11]
1960년대 이후 일본의 경제 성장은 군국주의 민족주의의 매력을 약화시켰지만, 1990년대 이후 경제 불안과 지역 경쟁 심화는 보수 민족주의의 부상을 초래했다.[10] 특히, 역사 교과서 문제에서 일본의 전쟁 범죄를 축소하거나 부정하는 역사 수정주의적 움직임은 위안부 문제, 난징 대학살 등과 함께 주변국과의 갈등을 야기했다.[15]
2000년대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아베 신조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았으며,[20] 아베 정권은 '적극적 평화주의'를 내세워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하고 재무장을 추진했다.[21][22] 이는 북한의 핵 위협과 중국의 부상에 대한 안보 우려, 그리고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맞물린 결과였다.[10]
이러한 일본의 우경화와 역사 수정주의는 한국, 중국 등 주변국과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은 일본의 역사 왜곡과 군사력 강화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5. 결론
일본의 국수주의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국민주의의 극단적인 형태이다. 이는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더욱 강화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며 이어져 오고 있다.[27]
일본의 국수주의는 막부 말기의 존왕양이론을 기원으로 하며, 메이지 유신 이후 대일본 제국 정부의 서구화주의 정책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다.[27] 1888년 시가 시게타카와 미야케 세츠레이 등이 정교사에서 출판한 잡지 '일본인'에 게재된 시가의 논문 "국수 보존 취지"를 계기로 '국수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28][31] 시가는 이 논문에서 일본 고유의 장점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8][31]
메이지 시대 중기의 국수주의는 서양 문명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일본의 문명을 주체적으로 발전시키려는 특징을 보였다.[27] 그러나 배외주의가 확산되고 일본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전통과 국체 옹호의 입장에서 우익의 행동 원리로 사회주의 대중 운동에 대항했다.[29][31] 만주 사변과 중일 전쟁을 거치며 급격히 확대되어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황국사관과 같은 초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다.[27]
이러한 일본의 국수주의는 만세일계의 천황을 받드는 일본 국가 체제의 영속성을 주장하는 국체론이라는 점에서 일관성을 유지한다.[28] 하지만, 과거사 문제, 영토 문제, 역사 인식 문제 등을 통해 한국, 중국 등 주변국과의 갈등을 일으키며 동아시아 평화와 안정에 지속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특히, 일본의 국수주의는 일제강점기와 같은 민감한 역사적 문제에 있어서 한국의 입장과 첨예하게 대립하며, 이는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는 주요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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