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조선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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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윤식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일제강점기에는 자작 작위를 받은 조선귀족이다. 1874년 증광시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 영선사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에 기여했다.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여 흥선대원군 납치에 관여했으며, 갑신정변에서는 사대당에 가담했다. 갑오개혁 때는 외부 대신을 지냈으나, 아관파천 이후 을미사변 방관 혐의로 유배되었다. 이후 친일 행적을 보였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반대했으나,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역임했다. 3·1 운동 참여 혐의로 작위를 박탈당하고, 192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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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의 학자 - 김경중 (1863년)
김경중은 조선 말기 관료로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여 진산 군수 등을 지냈으나 한일 병합 후 낙향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조선사》를 저술하고 흉년에 곡식을 내어 백성을 구제하기도 했으며, 김성수를 후원한 교육인이자 기업인이다. - 대한제국의 학자 - 주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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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는 조선 말 동학의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종교인, 독립운동가로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며 인내천 사상을 강조했다. - 대한제국의 작가 -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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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영은 조선 말기 문신이자 대한제국 관료, 일제 강점기 조선귀족으로, 한일 병합 조약에 적극 가담하고 순종의 일본 천황 알현을 강요했으며 고종 독살 의혹을 받았고,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다. - 조선자작 - 조민희 (조선귀족)
조민희는 조선 말 관료로 대한제국 시기 요직을 거쳐 한일 병합에 기여한 공으로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나, 도박으로 파산하여 작위가 정지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 김윤식 (조선귀족)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김윤식 |
| 한자 표기 | 金允植 |
| 휘 (이름) | 김윤식 |
| 휘 언문 (한글) | 김윤식 |
| 휘 발음 | 김윤식 |
| 자 (이름) | 순경 (洵卿, sun-gyeong) |
| 호 (이름) | 운양 (雲養, un-yang) |
| 본관 | 청풍 김씨 |
![]() | |
| 생애 | |
| 출생 | 도광 15년 (1835년 10월 3일) (양력 10월 29일) 조선 경기도 광주부 |
| 사망 | 대정 11년 (1922년 1월 22일) (일제 강점기 경성부) |
| 묘 | 미상 |
| 매장지 | 미상 |
| 신상 정보 | |
| 국적 | 조선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
| 직업 | 문신 학자 시인 서예가 정치가 문장가 |
| 종교 | 유교(성리학) → 대종교 |
| 가족 관계 | |
| 아버지 | 김익태 |
| 어머니 | 전주 이씨 부인 |
| 배우자 | 윤씨 부인 |
| 친척 | 김기건 (증조부) 김용선 (할아버지) 이인성 (외조부) 윤로 (장인) 김익정 (작은아버지) |
| 학력 및 관력 | |
| 수학 | 한학 수학 (1874년 증광시 병과 급제) |
| 활동 기간 | 1874년 ~ 1922년 |
| 주요 관직 | 외부대신 |
| 소속 | 前 경학원 대제학 |
| 작품 활동 | |
| 장르 | 한시 서예 |
| 수상 | |
| 훈장 | 대훈위 이화대수장 |
2. 생애
김윤식은 조선 말기부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활동한 관료이자 지식인이다.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김육의 9세손이며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9세 때 부모를 모두 여의고 숙부 밑에서 성장했다. 젊은 시절 박규수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개화사상을 접했다.[8]
1874년 증광시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여러 관직을 거쳤다.[13][14][15] 1881년에는 영선사로 임명되어 청나라 톈진에 파견되었다. 그는 근대식 무기 기술을 배우기 위해 파견된 유학생들을 인솔하는 한편, 미국과의 수교를 위한 외교 교섭을 벌여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에 기여했다.[16][8][14]
국내 정치에서는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나라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고 직접 안내하여 진압에 관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이 청으로 압송되었다.[8] 갑신정변 당시에는 사대당에 속하여 청나라의 위안스카이 군대를 동원해 개화파를 제거하는 데 가담했다. 이후 갑오개혁 시기에는 김홍집 내각에서 외부 대신을 지냈으며, 1896년에는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에 참여하고 독립신문의 필진으로도 활동했다.[14]
그러나 1895년 을미사변과 1896년 아관파천 이후, 을미사변을 방관하고 김홍집 내각을 비호했다는 이유로 위정척사 세력의 공격을 받아 제주도로 종신 유배되었다.[14] 1907년 고령자 사면 및 일진회의 요청 등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왔다.[14]
1908년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을 지냈고, 1910년 국권 피탈 당시 조약 체결에 대해 '불가불가(不可不可)'라는 모호한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병합 이후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1] 1910년 10월부터 1912년 8월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1916년에는 경학원 대제학을 역임하는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18]
말년인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용직과 함께 한국 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인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를 작성하여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였다. 이 일로 인해 체포되어 자작 작위를 박탈당하고[1][2]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85세의 고령임을 감안하여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18] 1920년 병을 얻어 투병하다 1921년 1월 21일 봉익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18] 한편, 그는 대종교의 교주 나철을 지원하고 스스로 교도가 되기도 했다.
2. 1. 초기 생애 (1835년 ~ 1874년)
김윤식은 1835년 음력 10월 3일, 경기도 광주부 한강변 두호(斗湖)에서 아버지 김익태와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증이조판서이자 좌찬성을 지냈으며, 김윤식은 김육의 9세손이다. 그러나 9세 때 부모를 모두 여의고 양근군 귀여내에 살던 숙부 김익정(청풍부원군)에게 의탁하여 자랐다. 숙모는 박지원의 손녀였다.[8]1850년 16세 무렵에는 유신환과 박규수의 문하에 들어가 남정철, 한장석, 민태호, 민규호 등과 함께 공부했다. 특히 스승 박규수로부터 개화 사상을 배우게 된다.[8]
1865년(31세) 5월 20일 진사시에서 3등으로 생원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건릉 참봉에 임명되었다.[9] 1868년 3월 14일에는 고종이 건릉에 제사를 지내러 왔을 때 능사(陵司)를 맡아 6품으로 승진했다. 이후 1872년 10월 와서별제,[10] 11월 사헌부 감찰을 거쳐[11] 이듬해인 1873년 5월에는 경모궁 영(令)이 되었다.[12]
1874년 5월, 40세의 나이로 1874년 증광시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당시 시험관이었던 박규수가 김윤식의 필적을 알아보고 발탁했다고 황현은 기록했다.[13]
2. 2. 관료 생활과 개화 활동 (1874년 ~ 1896년)
1874년 5월, 40세의 나이로 1874년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13] 당시 시험관이었던 스승 박규수가 그의 필적을 알아보고 발탁했다는 기록이 있다.[13] 급제 후 6월에는 홍문관 부수찬, 9월에는 문신겸선전관, 12월에는 병조정랑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875년에는 중학교수와 홍문관 부교리를 지냈으며, 이후 황해도암행어사, 문학, 시강원 겸 사서, 부응교, 부교리, 승지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1880년에는 순천부 부사직에 올랐다.[14][15]1881년, 46세 때 영선사로 임명되었다. 이는 본래 임명되었던 조용호가 병으로 사망하자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당시 조선 정부는 근대식 무기 제조 및 사용법을 배우기 위해 청나라 톈진에서 진행 중이던 양무운동 현장에 유학생을 파견했는데, 김윤식은 이들을 인솔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미국과의 수교를 위한 교섭 역할도 부여받았다. 유학생들을 톈진으로 보낸 후, 김윤식은 11월 17일 북경 보정부에 도착하여 11월 28일부터 어윤중과 함께 이홍장을 만나 미국과의 관계 수립(연미사, 聯美事)을 논의했다. 귀국 전까지 총 7차례의 회담을 통해 이듬해 5월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16][8][14]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톈진에 머물고 있던 김윤식과 어윤중은 청나라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다. 그는 향도관이 되어 오장경과 마경충이 이끄는 청군을 조선으로 인도하여 군란 진압에 관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압송되었다.[8]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유학생들을 철수시키고 귀국하여 이조참판, 강화부유수, 공조판서, 병조판서 겸 외무아문독판 등을 지냈다.[17] 특히 강화부유수로 재직할 당시에는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의 도움을 받아 약 500명 규모의 신식 군대인 진무영을 창설하기도 했다.[14] 갑신정변 당시에는 사대당에 속하여 위안스카이의 군대를 끌어들여 개화파 세력을 제거하는 데 가담했다.
갑오개혁으로 수립된 김홍집 내각에서는 외부 대신을 맡아 개혁에 참여했다. 1896년에는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에 참여했으며, 독립신문의 필진으로도 활동했다.[14] 그러나 1895년 을미사변과 1896년 아관파천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김홍집 내각이 실각하자, 김윤식 역시 을미사변을 방관하고 김홍집 일파를 비호했다는 위정척사 세력의 비판에 직면했다. 결국 그는 1896년에 제주목으로 종신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14]
2. 3. 유배와 친일 행적 (1896년 ~ 1910년)
1896년 김홍집 내각에서 갑오개혁에 참여하였으나,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김홍집 내각이 몰락하자, 김윤식은 을미사변을 방관하고 김홍집 일파를 도왔다는 이유로 위정척사 세력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결국 그는 제주목으로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았다.[14] 1898년 12월에는 최익현이 고종에게 유길준, 서재필과 함께 김윤식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유배 중이던 1901년에는 신축민란으로 제주도의 상황이 불안정해지자 지도(智島)로 이배되었다. 이후 1907년, 70세 이상 노인에 대한 특별 사면 조치 및 친일 단체인 일진회의 요청에 따라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왔다.[14]
서울로 돌아온 김윤식은 1908년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을 맡았다. 1910년 국권 피탈 당시에는 조약 체결에 대해 '불가불가(不可不可)'라는 표현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1일부터 1912년 8월 9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으며,[18] 1910년 10월 16일에는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18][1]
2. 4. 한일 병합 이후 (1910년 ~ 1922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당시 김윤식은 불가불가(不可不可)라는 표현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병합 이후인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1]그는 1910년 10월 1일부터 1912년 8월 9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으며, 1916년에는 박제순의 뒤를 이어 경학원 대제학을 역임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김윤식은 이용직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인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를 작성하여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같은 해 7월 17일 자작 작위를 포함한 모든 작위를 박탈당했으며,[1] 7월 31일에는 정4위 서위(敍位)를 반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 또한 이 일로 체포되어 2개월간 투옥되었고,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당시 85세의 고령임을 감안하여 형 집행은 정지되고 석방되었다.[18]
1920년 11월 2일 병환이 발생하였고, 이후 투병하다가 1921년 1월 2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봉익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18]
한편, 그는 대종교의 교주 나철을 지원하였으며 스스로 교도가 되기도 하였다.
3. 사후 평가
김윤식 사망 후 그의 사회장 문제를 둘러싸고 민족운동 진영이 분열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으나, 이것이 그가 의도했던 바는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를 지냈고 한때 조선귀족 신분이었으나, 이용직과 함께 3·1 운동에 동조하여 작위를 박탈당했다. 이러한 이유로 각종 친일파 목록에서는 제외되었다.
3. 1. 초상

1915년 이후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조선 엔 지폐에 새겨진 수노인이 김윤식이라는 가설이 있다. 이는 한일 병합에 대한 공적으로 인해 그의 초상이 사용된 것이라는 추정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가설에는 몇 가지 반론이 존재한다. 첫째, 김윤식이 1919년 3·1 운동을 지지하여 자작의 직위를 박탈당한 이후에도 해당 초상이 지폐에 계속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생존 인물을 지폐 도안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19] 물론 예외적으로 메이지 시대에 진구 황후 도안의 모델로 생존 여성을 사용하거나, 대한제국 시기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초상을 담은 제일은행권이 공식 유통된 사례는 있다.
수노인 초상의 실제 모델에 대해서는 고대 일본의 무장이자 대신이었던 타케우치노 스쿠네라는 설도 제기된다. 해당 지폐는 일제강점기가 끝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한동안 통용되었다.
4. 가족 관계
- 9세조: 김육
- 증조부 : 김기건(金基建)
- * 할아버지 : 김용선(金用善)
- ** 아버지 : 김익태(金益泰)
- ** 어머니 : 전주 이씨, 이인성(李寅成)의 딸
부인 : 정경부인 파평윤씨, 윤로(尹栳)의 딸, 윤봉오의 후손
- ** 숙부(양아버지) : 김익정(金益鼎)
- ** 숙모(양어머니) : 박지원의 손녀
5. 저서
- 《운양집》 雲養集중국어
- 《천진담초》 天津談草중국어
- 《속음청사》 續陰晴史중국어
- 《음청사》 陰晴史중국어
- 《병합사》 倂合史중국어
참조
[1]
간행물
官報 第2090号
1919-07-23
[2]
간행물
官報 1919年8月1日 八頁
https://dl.ndl.go.jp[...]
[3]
문서
續陰晴史(속음청사)
http://db.history.go[...]
1887-10-03
[4]
문서
續陰晴史(속음청사)
http://db.history.go[...]
1895-10-03
[5]
웹사이트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기
https://astro.kasi.r[...]
[6]
뉴스
雲養老人 金允植 씨는 팔십여세의 로령으로 鳳翼洞 자택에서 한가로히 일월을 보내더니 달포이래 쇠증으로 병석에 누어 작이십일일 정오에 고요히 세상을 떠낫는대 향년이 팔십칠세이라.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22-01-22
[7]
뉴스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22-01-23
[8]
웹인용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
2022-05-26
[9]
문서
승정원일기 2697책 (탈초본 127책) 고종 2년 12월 22일 계축 28/33 기사
[10]
문서
고종 9년 임신(1872) 10월 4일(을묘)
1872-10-04
[11]
문서
고종 9년 임신(1872) 11월 1일(임오)
1872-11-01
[12]
문서
고종 10년 계유(1873) 5월 24일
1873-05-24
[13]
서적
매천야록
[14]
웹인용
김윤식(金允植)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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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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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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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선사(領選使)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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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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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嗚呼金允植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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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2-01-22
[19]
웹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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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ontents.hist[...]
2022-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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