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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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사헌은 조선 시대 사헌부의 수장으로, 조선 초기부터 순종 시대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역임했다. 태조, 정종, 태종, 세종 시대에는 고려 왕조 잔재 청산과 통치 체제 안정, 왕권 강화 및 견제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중기에는 격동의 정치 상황 속에서 사헌부의 기능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연산군 시대에는 왕의 폭정에 맞서 사헌부의 독립성을 지키려 했다. 중종 시대에는 조광조가 대사헌으로 개혁을 추진했으나 기묘사화로 희생되었다. 이후 명종, 선조 시대를 거쳐 광해군, 인조 시대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대사헌을 역임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당쟁 심화로 정치적 영향력 행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기준은 '''7월 28일'''을 기준으로 한다.
정창손은 1451년 5월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한확은 1452년 4월 대사헌에 올랐다. 최항은 1455년 2월과 7월, 두 차례 대사헌을 역임했다. 이들은 격동의 시기에 대사헌을 역임하며 정치적 격변에 대응해야 했다.
2. 조선 초기 (태조 ~ 세종)
1392년 7월 28일 남재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393년에는 2월 11일 안경공, 9월 13일 이근이 임명되었다. 1394년에는 9월 8일 이서, 10월 10일 박경이, 1396년에는 신효창과 12월 22일 민여익이 대사헌이 되었다. 1397년 1월 28일에는 이직, 1398년 5월 21일 성석용, 9월 5일 조박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들은 고려 왕조의 잔재를 청산하고, 조선의 통치 체제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1399년 5월 16일 전백영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400년 3월 15일에는 권근이, 8월 4일에는 최이가 대사헌에 올랐다. 1400년 9월 8일에는 정구가 대사헌이 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1일 파직당하고 김약채가 대사헌이 되었다. 이들은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사헌부의 기능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태종 대에는 여러 인물이 대사헌에 임명되어 왕권 강화에 기여하거나 왕의 측근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401년 1월에는 이지가, 같은 달 김약채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김약채는 같은 해 2월 파면되었고, 이후 유관이 대사헌에 올랐으나 7월에 파직되었다. 1401년 7월에는 이원이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9월에 밤에 법을 어기고 통행한 죄로 파직되었다. 그 뒤를 이어 이지가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1402년 2월 사직하였으나 다시 직사에 나오도록 명을 받았다.
이후에도 여러 인물들이 대사헌에 임명되고 파면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1403년에는 이첨, 이문화, 최유경이 차례로 대사헌을 맡았다. 최유경은 1404년 피혐을 어긴 죄로 파면되었고, 김희선이 그 뒤를 이었으나 탄핵을 당하기도 했다. 1405년에는 이내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사직했고, 김첨, 박신, 허응 등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1406년에는 박석명, 한상경, 이원, 민무질이, 1407년에는 성석인, 권진, 김희선, 윤향, 안원, 이직이 대사헌을 맡았다.
1408년에는 남재, 박은을 거쳐 맹사성이 대사헌이 되었으나 귀양을 가기도 했다. 1409년에는 유양, 이문화가 대사헌을 맡았는데, 이문화는 해면되기도 했다. 1410년에는 김한로와 황희가, 1411년에는 박은, 박경, 유정현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1412년에는 정역, 1413년에는 안성, 윤향이 대사헌을 맡았다. 1414년에는 안등, 유관, 이은이, 1415년에는 이발, 이원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1416년에는 김여지가, 1417년에는 박습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세종 시대에는 여러 인물들이 대사헌 직을 역임했다. 1423년과 1433년에는 하연이, 1425년에는 황희가, 1431년과 1432년에는 신개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들은 세종 시대의 문치주의를 뒷받침하며 학문과 정책 발전에 기여했다.
2. 1. 태조
1392년 7월 28일 남재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393년에는 2월 11일 안경공, 9월 13일 이근이 임명되었다. 1394년에는 9월 8일 이서, 10월 10일 박경이, 1396년에는 신효창과 12월 22일 민여익이 대사헌이 되었다. 1397년 1월 28일에는 이직, 1398년 5월 21일 성석용, 9월 5일 조박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들은 고려 왕조의 잔재를 청산하고, 조선의 통치 체제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2. 2. 정종
1399년 5월 16일 전백영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400년 3월 15일에는 권근이, 8월 4일에는 최이가 대사헌에 올랐다. 1400년 9월 8일에는 정구가 대사헌이 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1일 파직당하고 김약채가 대사헌이 되었다. 이들은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사헌부의 기능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2. 3. 태종
태종 대에는 여러 인물이 대사헌에 임명되어 왕권 강화에 기여하거나 왕의 측근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401년 1월에는 이지가, 같은 달 김약채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김약채는 같은 해 2월 파면되었고, 이후 유관이 대사헌에 올랐으나 7월에 파직되었다. 1401년 7월에는 이원이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9월에 밤에 법을 어기고 통행한 죄로 파직되었다. 그 뒤를 이어 이지가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1402년 2월 사직하였으나 다시 직사에 나오도록 명을 받았다.
이후에도 여러 인물들이 대사헌에 임명되고 파면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1403년에는 이첨, 이문화, 최유경이 차례로 대사헌을 맡았다. 최유경은 1404년 피혐을 어긴 죄로 파면되었고, 김희선이 그 뒤를 이었으나 탄핵을 당하기도 했다. 1405년에는 이내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사직했고, 김첨, 박신, 허응 등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1406년에는 박석명, 한상경, 이원, 민무질이, 1407년에는 성석인, 권진, 김희선, 윤향, 안원, 이직이 대사헌을 맡았다.
1408년에는 남재, 박은을 거쳐 맹사성이 대사헌이 되었으나 귀양을 가기도 했다. 1409년에는 유양, 이문화가 대사헌을 맡았는데, 이문화는 해면되기도 했다. 1410년에는 김한로와 황희가, 1411년에는 박은, 박경, 유정현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1412년에는 정역, 1413년에는 안성, 윤향이 대사헌을 맡았다. 1414년에는 안등, 유관, 이은이, 1415년에는 이발, 이원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1416년에는 김여지가, 1417년에는 박습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2. 4. 세종
세종 시대에는 여러 인물들이 대사헌 직을 역임했다. 1423년과 1433년에는 하연이, 1425년에는 황희가, 1431년과 1432년에는 신개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들은 세종 시대의 문치주의를 뒷받침하며 학문과 정책 발전에 기여했다.
3. 조선 중기 (문종 ~ 선조)
예종 대에는 1469년 3월 12일 허종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5월 29일에는 오백창, 10월 18일에는 이극돈, 11월 12일에는 윤필상이 대사헌이 되었다.
성종 대에는 1471년 6월 30일 한치형을 시작으로, 김지경, 노사신, 서거정 등 여러 인물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이들은 성종 시대의 안정된 정치 환경 속에서 사헌부의 기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1472년 4월 4일에는 신승선이,같은해 6월 22일에는 권감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474년 1월 23일에는 이예가 가정대부로서, 4월 28일에는 이서장이 가선대부로서 대사헌이 되었다. 1475년에는 윤계겸이 자헌대부로서, 1477년에는 김영유가 가선대부로서, 현석규, 이숭원, 양성지, 이계손이 자헌대부로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478년에는 유지가 가정대부로서, 김유와 이극기가 가선대부로서 대사헌이 되었다. 1479년에는 어세겸과 박숙진이 가정대부로서, 김양경이 정헌대부로서 대사헌을 역임했다. 1480년에는 정괄이 가선대부로서, 1481년에는 조간, 이봉, 이극돈, 김승경이 가선대부로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482년에는 채수가 가선대부로서, 어세겸이 자헌대부로서, 이철견이 숭정대부로서 대사헌이 되었다. 1483년에는 손순효가 숭정대부로서, 이덕량이 자헌대부로서, 노공필이 가정대부로서 대사헌을 역임했다. 1484년에는 이극균이 자헌대부로서, 유순이 가선대부로서 대사헌이 되었다.
1485년부터 1494년까지 이세좌, 이경동, 박건, 김승경, 성건, 권건, 박안성, 성준, 홍귀달, 조익정, 권정, 유순, 박숭질, 이계동, 신종호, 이유인, 김여석, 김제신, 성현, 허침, 정경조, 이집, 황사효, 김극검, 이의 등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연산군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인물들이 대사헌에 임명되어 왕의 폭정에 맞서 싸웠다. 한치형은 1495년 8월 9일에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권경희는 같은 해 8월 25일에, 이집은 12월 11일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들은 사헌부의 독립성을 지키려 노력했다. 1496년에는 윤민, 김심, 김제신, 구치곤이, 1497년에는 홍헌과 이집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1498년에는 권경우, 신준, 강귀손, 김영정이, 1499년에는 김심과 안침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500년대에 들어서도 여러 인물들이 대사헌을 거쳐갔다. 1500년에는 양희지, 한사문, 이인형, 최응현, 성현이, 1501년에는 한사문이, 1502년에는 김영정과 최한원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1503년에는 최한원이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1504년에는 홍자아와 성세명이 대사헌을 맡았다. 이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대략 120.962일이었다.
중종반정 이후 이계맹, 김감, 김응기 등이 대사헌에 임명되어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하고 개혁 정치를 추진하는 데 기여했다. 1518년 11월 21일 조광조가 대사헌에 임명되어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기묘사화로 희생되었다.
중종 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1545년 8월 24일 허자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545년 11월 18일에는 김광준(추성 정난 위사 공신 가선 대부)이 대사헌이 되었다. 1546년 1월 17일 윤원형이 대사헌이 되었으나, 곧 체직되었다. 1546년 2월 15일 김광준이 다시 대사헌이 되었고, 1546년 3월 8일에는 권철, 1546년 4월 26일에는 홍섬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이미 (1546년 11월 2일, 12월 30일), 나세찬 (1546년 11월 20일), 유진동 (1547년 3월 30일), 안현 (1547년 5월 19일), 송겸 (1547년 10월 12일), 구수담 (1548년 1월 29일), 정응두 (1548년 6월 28일), 유진동 (1548년 10월 14일), 송세형 (1548년 10월 23일), 조언수 (1548년 12월 2일), 송세형 (1549년 2월 25일), 조광운 (1549년 3월 26일), 구수담 (1549년 4월 3일), 진복창 (1549년 5월 24일), 이명규 (1549년 10월 17일), 이준경 (1549년 11월 12일), 구수담 (1549년 11월 24일), 윤옥 (1550년 2월 13일), 조사수 (1550년 3월 18일), 이준경 (1550년 5월 11일), 송세형 (1550년 5월 15일), 권찬 (1550년 10월 20일), 송세형 (1551년 8월 28일), 이명규 (1551년 9월 29일), 권찬 (1551년 11월 2일), 원계검 (1552년 3월 4일), 신영 (1552년 3월 21일), 원계검 (1552년 5월 25일), 심통원 (1552년 9월 4일), 이명 (1552년 9월 18일), 이준경 (1552년 10월 16일), 김주 (1553년 2월 5일), 윤춘년 (1553년 7월 25일, 1554년 8월 2일, 1556년 5월 18일), 정유 (1555년 2월 29일), 정대년 (1555년 7월 9일), 송기수 (1555년 윤11월 16일, 1559년 11월 28일, 1561년 2월 30일, 1563년 10월 11일), 홍담 (1556년 2월 17일, 1556년 10월 21일, 1559년 11월 25일), 오겸 (1557년 3월 9일, 1560년 9월 24일), 유강 (1557년 11월 1일, 1561년 2월 22일), 정유길 (1558년 1월 5일, 10월 26일), 민기 (1558년 5월 29일, 1564년 2월 17일), 성세장 (1558년 7월 27일, 1559년 5월 17일, 1560년 3월 20일, 6월 11일), 윤인서 (1558년 9월 16일), 김개 (1559년 2월 18일), 이몽량 (1559년 6월 10일, 1560년 11월 20일), 오상 (1559년 8월 19일, 10월 4일, 1560년 5월 12일, 1563년 5월 21일, 1564년 7월 22일, 10월 18일), 박영준 (1559년 8월 26일, 1562년 3월 6일), 박충원 (1560년 8월 19일, 1564년 9월 6일), 김홍윤 (1561년 4월 25일), 이문형 (1561년 5월 27일), 기대항 (1561년 6월 12일, 1563년 2월 14일, 8월 19일), 이언충 (1562년 6월 6일), 이우민 (1562년 7월 14일), 이중경 (1562년 8월 6일), 이감 (1563년 6월 25일), 심수경 (1563년 10월 7일), 이탁 (1563년 11월 12일, 1564년 10월 6일), 유홍 (1564년 1월 22일), 이량 (1565년 1월 3일) 등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선조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인물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568년 박응남과 김귀영을 시작으로, 강사상(1569년, 1571년), 박계현(1570년, 1576년), 백인걸(1571년), 김덕룡(1571년), 이후백(1571년, 1572년, 1574년) 등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1573년에는 박근원, 이양원, 유희춘 등 여러 인물이 번갈아 가며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심의겸은 1573년과 1574년에 대사헌을 역임했다. 1570년대 후반에는 이준민, 이양원, 정지연, 이식 등이 대사헌을 맡았다.
1580년대에는 이산해, 정탁, 이식, 이우직, 구봉령 등이 대사헌으로 활동했다. 특히 이이는 1581년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유성룡은 1582년에 대사헌을 역임했다. 정철은 1584년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는 김찬, 정곤수, 이덕형 등이 대사헌을 역임했고, 전쟁 중인 1593년에는 성혼이 대사헌에 임명되기도 했다. 김응남은 1592년과 1593년에 대사헌을 역임하며 전란 속에서 사헌부의 역할을 수행했다. 1590년대 후반에는 홍진, 김찬, 이기, 이헌국, 정창연 등이 대사헌으로 활동했다.
1600년대 초에는 정창연, 오억령, 기자헌, 박동량 등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정인홍은 1602년에 두 차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박홍로는 1603년부터 1607년까지 여러 차례 대사헌을 맡았다. 박승종은 1605년, 1606년, 1608년에 대사헌을 역임했다.
3. 1. 문종, 단종, 세조
정창손은 1451년 5월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한확은 1452년 4월 대사헌에 올랐다. 최항은 1455년 2월과 7월, 두 차례 대사헌을 역임했다. 이들은 격동의 시기에 대사헌을 역임하며 정치적 격변에 대응해야 했다.
3. 2. 예종, 성종
예종 대에는 1469년 3월 12일 허종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5월 29일에는 오백창, 10월 18일에는 이극돈, 11월 12일에는 윤필상이 대사헌이 되었다.
성종 대에는 1471년 6월 30일 한치형을 시작으로, 김지경, 노사신, 서거정 등 여러 인물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이들은 성종 시대의 안정된 정치 환경 속에서 사헌부의 기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1472년 4월 4일에는 신승선이,같은해 6월 22일에는 권감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474년 1월 23일에는 이예가 가정대부로서, 4월 28일에는 이서장이 가선대부로서 대사헌이 되었다. 1475년에는 윤계겸이 자헌대부로서, 1477년에는 김영유가 가선대부로서, 현석규, 이숭원, 양성지, 이계손이 자헌대부로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478년에는 유지가 가정대부로서, 김유와 이극기가 가선대부로서 대사헌이 되었다. 1479년에는 어세겸과 박숙진이 가정대부로서, 김양경이 정헌대부로서 대사헌을 역임했다. 1480년에는 정괄이 가선대부로서, 1481년에는 조간, 이봉, 이극돈, 김승경이 가선대부로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482년에는 채수가 가선대부로서, 어세겸이 자헌대부로서, 이철견이 숭정대부로서 대사헌이 되었다. 1483년에는 손순효가 숭정대부로서, 이덕량이 자헌대부로서, 노공필이 가정대부로서 대사헌을 역임했다. 1484년에는 이극균이 자헌대부로서, 유순이 가선대부로서 대사헌이 되었다.
1485년부터 1494년까지 이세좌, 이경동, 박건, 김승경, 성건, 권건, 박안성, 성준, 홍귀달, 조익정, 권정, 유순, 박숭질, 이계동, 신종호, 이유인, 김여석, 김제신, 성현, 허침, 정경조, 이집, 황사효, 김극검, 이의 등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3. 3. 연산군
연산군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인물들이 대사헌에 임명되어 왕의 폭정에 맞서 싸웠다. 한치형은 1495년 8월 9일에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권경희는 같은 해 8월 25일에, 이집은 12월 11일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들은 사헌부의 독립성을 지키려 노력했다. 1496년에는 윤민, 김심, 김제신, 구치곤이, 1497년에는 홍헌과 이집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1498년에는 권경우, 신준, 강귀손, 김영정이, 1499년에는 김심과 안침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500년대에 들어서도 여러 인물들이 대사헌을 거쳐갔다. 1500년에는 양희지, 한사문, 이인형, 최응현, 성현이, 1501년에는 한사문이, 1502년에는 김영정과 최한원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1503년에는 최한원이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1504년에는 홍자아와 성세명이 대사헌을 맡았다. 이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대략 120.962일이었다.
3. 4. 중종
중종반정 이후 이계맹, 김감, 김응기 등이 대사헌에 임명되어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하고 개혁 정치를 추진하는 데 기여했다. 1518년 11월 21일 조광조가 대사헌에 임명되어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기묘사화로 희생되었다.
중종 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대사헌을 역임했다.3. 5. 명종
1545년 8월 24일 허자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545년 11월 18일에는 김광준(추성 정난 위사 공신 가선 대부)이 대사헌이 되었다. 1546년 1월 17일 윤원형이 대사헌이 되었으나, 곧 체직되었다. 1546년 2월 15일 김광준이 다시 대사헌이 되었고, 1546년 3월 8일에는 권철, 1546년 4월 26일에는 홍섬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이미 (1546년 11월 2일, 12월 30일), 나세찬 (1546년 11월 20일), 유진동 (1547년 3월 30일), 안현 (1547년 5월 19일), 송겸 (1547년 10월 12일), 구수담 (1548년 1월 29일), 정응두 (1548년 6월 28일), 유진동 (1548년 10월 14일), 송세형 (1548년 10월 23일), 조언수 (1548년 12월 2일), 송세형 (1549년 2월 25일), 조광운 (1549년 3월 26일), 구수담 (1549년 4월 3일), 진복창 (1549년 5월 24일), 이명규 (1549년 10월 17일), 이준경 (1549년 11월 12일), 구수담 (1549년 11월 24일), 윤옥 (1550년 2월 13일), 조사수 (1550년 3월 18일), 이준경 (1550년 5월 11일), 송세형 (1550년 5월 15일), 권찬 (1550년 10월 20일), 송세형 (1551년 8월 28일), 이명규 (1551년 9월 29일), 권찬 (1551년 11월 2일), 원계검 (1552년 3월 4일), 신영 (1552년 3월 21일), 원계검 (1552년 5월 25일), 심통원 (1552년 9월 4일), 이명 (1552년 9월 18일), 이준경 (1552년 10월 16일), 김주 (1553년 2월 5일), 윤춘년 (1553년 7월 25일, 1554년 8월 2일, 1556년 5월 18일), 정유 (1555년 2월 29일), 정대년 (1555년 7월 9일), 송기수 (1555년 윤11월 16일, 1559년 11월 28일, 1561년 2월 30일, 1563년 10월 11일), 홍담 (1556년 2월 17일, 1556년 10월 21일, 1559년 11월 25일), 오겸 (1557년 3월 9일, 1560년 9월 24일), 유강 (1557년 11월 1일, 1561년 2월 22일), 정유길 (1558년 1월 5일, 10월 26일), 민기 (1558년 5월 29일, 1564년 2월 17일), 성세장 (1558년 7월 27일, 1559년 5월 17일, 1560년 3월 20일, 6월 11일), 윤인서 (1558년 9월 16일), 김개 (1559년 2월 18일), 이몽량 (1559년 6월 10일, 1560년 11월 20일), 오상 (1559년 8월 19일, 10월 4일, 1560년 5월 12일, 1563년 5월 21일, 1564년 7월 22일, 10월 18일), 박영준 (1559년 8월 26일, 1562년 3월 6일), 박충원 (1560년 8월 19일, 1564년 9월 6일), 김홍윤 (1561년 4월 25일), 이문형 (1561년 5월 27일), 기대항 (1561년 6월 12일, 1563년 2월 14일, 8월 19일), 이언충 (1562년 6월 6일), 이우민 (1562년 7월 14일), 이중경 (1562년 8월 6일), 이감 (1563년 6월 25일), 심수경 (1563년 10월 7일), 이탁 (1563년 11월 12일, 1564년 10월 6일), 유홍 (1564년 1월 22일), 이량 (1565년 1월 3일) 등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3. 6. 선조
선조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인물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568년 박응남과 김귀영을 시작으로, 강사상(1569년, 1571년), 박계현(1570년, 1576년), 백인걸(1571년), 김덕룡(1571년), 이후백(1571년, 1572년, 1574년) 등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1573년에는 박근원, 이양원, 유희춘 등 여러 인물이 번갈아 가며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심의겸은 1573년과 1574년에 대사헌을 역임했다. 1570년대 후반에는 이준민, 이양원, 정지연, 이식 등이 대사헌을 맡았다.
1580년대에는 이산해, 정탁, 이식, 이우직, 구봉령 등이 대사헌으로 활동했다. 특히 이이는 1581년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유성룡은 1582년에 대사헌을 역임했다. 정철은 1584년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는 김찬, 정곤수, 이덕형 등이 대사헌을 역임했고, 전쟁 중인 1593년에는 성혼이 대사헌에 임명되기도 했다. 김응남은 1592년과 1593년에 대사헌을 역임하며 전란 속에서 사헌부의 역할을 수행했다. 1590년대 후반에는 홍진, 김찬, 이기, 이헌국, 정창연 등이 대사헌으로 활동했다.
1600년대 초에는 정창연, 오억령, 기자헌, 박동량 등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정인홍은 1602년에 두 차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박홍로는 1603년부터 1607년까지 여러 차례 대사헌을 맡았다. 박승종은 1605년, 1606년, 1608년에 대사헌을 역임했다.
4. 조선 후기 (광해군 ~ 순종)
광해군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인물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정인홍, 이상의, 이수광 등은 광해군의 실정과 인목왕후 폐비 및 영창대군 살해에 대한 비판을 주도하며, 사헌부의 본래 역할을 회복하려 노력했다.
1608년에는 최천건, 김신원, 정엽, 정광적, 이시언, 정구, 신식, 정사호, 윤국형, 신흠, 홍이상이, 1609년에는 정엽, 정사호, 조정, 홍이상, 정사효, 이시언, 윤국형, 최관, 김상용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1610년에는 송순, 김늑, 강첨, 한준겸, 이상의, 이수광, 정엽, 김상용, 유희분, 조정, 1611년에는 정사호, 이상의, 이시언, 이수광, 오억령, 조정, 유희분이 대사헌을 맡았다.
1612년에는 이이첨, 조정, 이수광, 최유원, 박진원이, 1613년에는 최유원, 송순, 박진원, 이수광, 유인길, 유효전, 박건이 대사헌으로 임명되었다.
1614년에는 박건, 송순, 이성, 유경종이, 1615년에는 송순, 이영, 박건, 유인길이, 1616년에는 송순, 박건, 남근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1617년에는 송순, 유간, 유경종, 이영이, 1618년에는 유간, 남근, 유경종이, 1619년에는 남근, 임취정이 대사헌을 맡았다.
1620년에는 한찬남이, 1621년에는 남근, 윤인이, 1622년에는 남근이 대사헌으로 임명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1623년 3월 16일 오윤겸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 16일에는 서성이, 윤10월 12일에는 정광적이 대사헌이 되었다. 1624년 2월 12일 서성이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3월 7일에는 정엽이, 5월 16일에는 정경세가 대사헌이 되었다. 같은 해 5월 26일 정광적이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6월 11일에는 정엽이, 8월 3일에는 장유가, 9월 12일에는 박동선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대의 대사헌들은 당쟁의 심화 속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685년 김유가 대사헌에 증직되었다.
4. 1. 광해군
광해군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인물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정인홍, 이상의, 이수광 등은 광해군의 실정과 인목왕후 폐비 및 영창대군 살해에 대한 비판을 주도하며, 사헌부의 본래 역할을 회복하려 노력했다.1608년에는 최천건, 김신원, 정엽, 정광적, 이시언, 정구, 신식, 정사호, 윤국형, 신흠, 홍이상이, 1609년에는 정엽, 정사호, 조정, 홍이상, 정사효, 이시언, 윤국형, 최관, 김상용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1610년에는 송순, 김늑, 강첨, 한준겸, 이상의, 이수광, 정엽, 김상용, 유희분, 조정, 1611년에는 정사호, 이상의, 이시언, 이수광, 오억령, 조정, 유희분이 대사헌을 맡았다.
1612년에는 이이첨, 조정, 이수광, 최유원, 박진원이, 1613년에는 최유원, 송순, 박진원, 이수광, 유인길, 유효전, 박건이 대사헌으로 임명되었다.
1614년에는 박건, 송순, 이성, 유경종이, 1615년에는 송순, 이영, 박건, 유인길이, 1616년에는 송순, 박건, 남근이 대사헌을 역임했다.
1617년에는 송순, 유간, 유경종, 이영이, 1618년에는 유간, 남근, 유경종이, 1619년에는 남근, 임취정이 대사헌을 맡았다.
1620년에는 한찬남이, 1621년에는 남근, 윤인이, 1622년에는 남근이 대사헌으로 임명되었다.
4. 2. 인조
인조반정 이후 1623년 3월 16일 오윤겸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 16일에는 서성이, 윤10월 12일에는 정광적이 대사헌이 되었다. 1624년 2월 12일 서성이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3월 7일에는 정엽이, 5월 16일에는 정경세가 대사헌이 되었다. 같은 해 5월 26일 정광적이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6월 11일에는 정엽이, 8월 3일에는 장유가, 9월 12일에는 박동선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4. 3.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대의 대사헌들은 당쟁의 심화 속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685년 김유(金洧)가 대사헌에 증직되었다.5.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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