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필하모닉 관현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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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런던 필하모닉 관현악단(LPO)은 1932년 토마스 비첨에 의해 창단된 영국의 오케스트라이다. 창단 초기에는 퀸즈 홀에서 데뷔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로열 필하모닉 협회, 로열 코럴 소사이어티 등과 협연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퀸즈 홀이 파괴되었지만, 활동을 지속했으며, 1947년 런던 필하모닉 합창단을 창단했다. 에두아르트 반 베이눔, 에이드리언 볼트,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클라우스 텐슈테트, 블라디미르 유롭스키 등이 상임 지휘자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에드워드 가드너가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로열 페스티벌 홀을 주요 공연장으로 사용하며, 영화 음악 및 대중음악 녹음에도 참여하고 자체 레이블을 통해 음반을 발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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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필하모닉 관현악단 - [음악 그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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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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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관현악단 |
약칭 | LPO |
설립일 | 1932년 |
위치 | 영국, 런던 |
콘서트 홀 | 로열 페스티벌 홀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관련 활동 | 런던 필하모니 합창단 |
지휘자 및 주요 인물 | |
음악 감독 | 에드워드 가드너 |
수석 객원 지휘자 | 카리나 카넬라키스 |
명예 지휘자 |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
상주 작곡가 | 타니아 레온 |
창립자 | 토머스 비첨 |
2. 역사
영국의 지휘자 토머스 비첨은 1932년 자신의 재산을 투자하여 런던 필하모닉 관현악단을 창단하고, 같은 해 10월 7일 런던 퀸즈 홀에서 창단 기념 공연을 열었다. 비첨은 창단 초기 영국 각지의 뛰어난 연주자들을 영입하며 악단 육성에 힘썼으나, 1939년 악단 운영권을 포기하면서 악단은 단원들이 직접 운영하는 자주 운영 체제로 전환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운영난과 독일 공군의 런던 폭격으로 인한 악기와 악보 소실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공연 활동과 기부금 모금 등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에두아르드 반 베이눔, 에이드리언 볼트, 윌리엄 스타인버그, 존 프리처드 등이 차례로 상임 지휘자를 맡으며 악단을 재정비하고 녹음 활동을 본격화했다. 특히 1967년부터 1979년까지 베르나르트 하이팅크가 상임 지휘자로 재임하며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등 새로운 레퍼토리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많은 녹음을 남겼다.
1970년대부터는 재즈나 팝 아티스트와의 협연도 시작했다. 1983년 상임 지휘자로 취임한 클라우스 텐슈테트는 건강 문제에도 불구하고 말러 교향곡 전집 녹음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텐슈테트 사임 후에는 젊은 지휘자 프란츠 벨저뫼스트가 뒤를 이었으며, 2000년대에는 쿠르트 마주어와 블라디미르 유롭스키가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며 악단을 이끌었다.
2. 1. 창단과 초기 (1932년 ~ 1945년)
1920년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는 런던의 주요 오케스트라였으나, 당시 런던의 여러 오케스트라들은 유럽 대륙이나 미국의 최고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다.[1] 1927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런던 공연은 이러한 격차를 명확히 보여주었다.[3][4] 이후 빌럼 멩겔베르크의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뉴욕 필하모닉-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해외 유수 악단들의 공연이 이어지면서 런던에도 상설 고정 악단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5]
이러한 배경에서 영국 방송 공사(BBC)의 존 레이스 경과 부유한 지휘자 토마스 비첨 경은 새로운 상설 오케스트라 창단을 논의했으나, 오케스트라 운영 방식에 대한 견해 차이로 결렬되었다.[6] BBC는 독자적으로 1930년 에이드리언 볼트 지휘 아래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7]
BBC 교향악단 창단에서 제외된 비첨은 1931년, 젊은 지휘자 말콤 사전트와 그의 후원자인 코톨드 가문의 재정 지원 약속을 바탕으로 새로운 오케스트라 창단을 추진했다.[8] 처음에는 LSO를 개편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1932년 독자적인 악단을 새로 만들기로 결정했다.[9] 당시 경제 대공황으로 연주자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던 상황[11]과 비첨 자신의 명성[12] 덕분에, BBC 교향악단 창설 이후에도 실력 있는 연주자들을 영입할 수 있었다.[10][5] 비첨은 새뮤얼 코톨드, 로버트 메이어, 프레데릭 알프레드 데를랑게 남작 등 재계 인사들의 후원을 확보하고[13] 컬럼비아와 녹음 계약, 로열 필하모닉 협회, 코톨드-사전트 콘서트 등 여러 연주 계약을 체결했다.[14]
비첨은 자신이 제안했던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라는 명칭을 새 악단에 사용했으며,[15] 106명의 단원을 모집했다. 여기에는 젊은 연주자, 지방 악단 출신, 그리고 LSO의 주요 단원 17명도 포함되었다.[16] 초기 주요 단원으로는 악장 폴 비어드와 데이비드 매컬럼, 그리고 레옹 고상스, 레지날드 켈 등이 있었다.[17]

12번의 리허설 끝에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LPO)는 1932년 10월 7일, 퀸스 홀에서 비첨의 지휘로 데뷔 연주회를 가졌다. 첫 곡인 베를리오즈의 '로마의 사육제 서곡' 연주 후 청중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20] ''선데이 타임스''는 "런던의 콘서트 홀에서 이처럼 전율적인 연주는 수년 동안 들어본 적이 없다"고 평했으며,[21]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는 "마침내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경쟁하는 독립적인 오케스트라가 생겼다"고 칭찬했다.[22]
LPO는 창단 첫 시즌부터 코톨드-사전트 시리즈, 로열 필하모닉 협회 연주회, 지방 순회공연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13] 1932년 11월에는 16세의 예후디 메뉴인이 바흐, 모차르트, 그리고 작곡가 엘가가 직접 지휘한 엘가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했다.[24] 이후 8년간 LPO는 퀸스 홀에서 약 100회 공연하고, 코벤트 가든의 오페라 시즌에 참여했으며, 300개 이상의 음반을 녹음했다.[25] 비첨 외에도 브루노 발터, 조지 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 저명한 객원 지휘자들이 LPO를 지휘했다.[28] 런던 외 영국 주요 도시 순회공연도 활발히 진행했으며, 1933년 첫 투어 후 ''맨체스터 가디언''은 "전 프로그램에서 이처럼 고귀한 스타일과 훌륭한 연주를 결합한 오케스트라 연주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평가했다.[30]
1936년 비첨은 LPO와 함께 독일 순회공연을 가졌는데, 나치 찬가 연주를 거부했지만 정부의 압력으로 유대인 작곡가인 멘델스존의 교향곡 연주를 취소하는 등 논란이 있었다.[31][32]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주요 후원자들이 지원을 철회했고, 비첨은 악단 운영권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존속의 위기에 처한 LPO 단원들은 협의 끝에 자치 운영 단체로 전환하기로 결정하고, 말콤 사전트의 도움을 받아 활동을 이어갔다. 전쟁 중 운영난은 심각해졌고, 독일 공군의 런던 폭격으로 악기와 악보 일부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해체 위기 속에서도 LPO는 런던과 영국 각지를 돌며 공연을 계속하고, 애호가들의 기부금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2. 2. 전후 재정비와 성장 (1945년 ~ 1979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런던 필하모닉 관현악단(LPO)은 연합국과 추축국 등 출신 국가를 가리지 않고 발터, 푸르트벵글러, 빅토르 데 사바타, 세르지우 첼리비다케 등 유명 지휘자들을 적극적으로 초빙하여 많은 연주회를 소화했다.[41] 이러한 유명 지휘자 초빙은 예외적인 경우였으며, 일반적으로는 덜 유명한 지휘자들과 함께 역대 가장 많은 연주회를 열었다. 1949년부터 1950년까지는 248회의 콘서트를 열었는데, 이는 런던 교향악단(103회),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32회),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32회)와 비교되는 많은 횟수였다.[42]1947년, 네덜란드 출신의 에두아르드 반 베이눔이 제2대 상임 지휘자로 초빙되었다.[43] 당시 외국인에 대한 취업 허가 제한으로 인해 그는 1년에 6개월만 LPO와 함께 활동할 수 있었고, 그의 부재 시에는 객원 지휘자들이 지휘봉을 잡았다.[43] 같은 해, LPO의 합창단인 런던 필하모닉 합창단이 창단되었다.[43] 그러나 베이눔은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이 악화되어 활동에 제약을 받았고, 결국 1950년에 사임했다.[44]
베이눔의 후임으로는 에이드리언 볼트 경이 임명되어 악단의 본격적인 재정비가 시작되었다.[44] 볼트 지휘 아래 LPO는 데카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상업 녹음 활동을 활발히 시작했다. 초기 녹음에는 엘가의 ''팔스타프'', 말러의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메조소프라노 블랑쉬 템봄 협연), 베토벤의 교향곡 1번 등이 포함되었고, 이 녹음들은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45][46] 1951년 1월에는 12일 동안 12번의 콘서트를 여는 강행군으로 독일 순회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47][48]

1952년, LPO는 데카 레코드와 5년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판매 수익의 10%를 받는 오케스트라에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다. 볼트는 자신의 녹음 수수료를 항상 오케스트라 기금에 기부했다.[50] 같은 해, LPO는 상임 이사였던 토마스 러셀의 해임 문제로 위기를 겪었다. 공공연한 영국 공산당의 당원이었던 러셀의 정치적 성향이 냉전 시대 분위기 속에서 오케스트라에 해가 될 수 있다는 일부 구성원들의 주장이 제기되어 결국 해임되었다.[45] 볼트는 처음 러셀을 옹호했으나 점차 입장을 바꿔 그를 보호하지 않았다. 마이클 케네디는 볼트가 러셀이 자리를 지킬 경우 오케스트라가 재정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51] 다른 해석으로는 볼트가 러셀을 해임시키면 LPO가 새로 개관한 로열 페스티벌 홀의 상주 오케스트라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52]
1956년, LPO는 영국 오케스트라로서는 처음으로 소련 순회공연을 가졌다. 볼트, 아나톨 피스툴라리, 조지 허스트가 지휘했고, 바이올리니스트 알프레도 캄폴리와 피아니스트 모라 림파니가 독주자로 참여했다.[54] 투어 이후 볼트는 수석 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이후에도 LPO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1965년에는 회장으로 임명되었다.[55]
볼트 이후에는 윌리엄 스타인버그가 1958년 상임 지휘자로 부임했다. 그는 뛰어난 오케스트라 조련사로 평가받으며 LPO의 연주력을 이전 수준으로 회복시키는 데 기여했으나,[56] 건강상의 이유로 두 시즌 만인 1960년에 사임했다.[59]

1962년에는 존 프리처드가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었다.[56] 프리처드는 글라인드본 페스티벌 오페라의 음악 감독이기도 했는데, 그의 영향력 덕분에 1964년부터 LPO는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대신하여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의 상주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이는 단원들에게 여름 비수기에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받게 되었다.[61] 또한 프리처드 시대인 1963년에는 창단 이후 유지되었던 남성 단원 위주의 관행을 깨고 첫 여성 바이올리니스트가 채용되는 등 변화가 있었다.[60]

1967년, 네덜란드 출신의 베르나르트 하이팅크가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여 1979년까지 12년간 재임하며 LPO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이 직책을 맡은 지휘자가 되었다.[64] 하이팅크는 브루크너, 말러의 교향곡뿐만 아니라,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특히 10번)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 작곡가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다루어 주목받았다.[65] 그는 필립스 레이블에서 주로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와 녹음 작업을 했지만, LPO와도 베토벤 교향곡 전집 및 피아노 협주곡 전집(알프레드 브렌델 협연), 리스트 교향시 전집, 멘델스존 교향곡 전집 등을 녹음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집은 데카에서 콘세르트헤보우와 나누어 녹음했다. 영국 작곡가인 본 윌리엄스의 교향곡 전집(EMI)과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필립스) 등도 LPO와 함께 녹음했다. 하이팅크의 지휘 아래 LPO는 부드럽고 품위 있는 음색을 갖추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이팅크 재임 기간 동안 LPO는 미국, 서유럽, 소련 순회공연을 이어갔으며, 1972년에는 서방 오케스트라로서는 드물게 중국을 방문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68] 1973년에는 런던의 4개 자치 오케스트라를 2개로 합병하려는 논의가 있었고, LPO와 당시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뉴 필하모니아(구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합병이 거론되었으나 단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69] 1975년에는 런던 교향악단과 공동으로 사우스워크의 사용하지 않는 교회를 개조하여 리허설 및 녹음 스튜디오인 헨리 우드 홀을 개관했다.[70]
1970년대에는 에리히 라인스도르프,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오이겐 요훔, 리카르도 샤이, 클라우스 텐슈테트, 솔티 등이 객원 지휘자로 LPO를 지휘했다. 1971년부터 수석 객원 지휘자를 맡았던 솔티는 하이팅크가 1979년 사임을 발표하자 그의 후임 상임 지휘자로 내정되었다.[71]
2. 3. 텐슈테트와 벨저뫼스트 시대 (1979년 ~ 1999년)
하이팅크의 후임으로는 헝가리 출신의 지휘자이자 시카고 교향악단 음악 감독이었던 게오르크 솔티가 1979년 임명되었다. 솔티는 1938년 안탈 도라티의 소개로 코벤트 가든 왕립 가극장에서 런던 필하모닉 관현악단을 처음 지휘한 이후 여러 차례 객원 지휘를 맡아왔다.[71] 솔티는 주로 계약된 데카 레이블에서 녹음을 진행했으며, 엘가의 교향곡 전집, 홀스트의 모음곡 '혹성', 리스트의 교향시 '전주곡',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등을 녹음했다. 솔티는 1979년부터 1983년까지 4년간 재임했으며, 연주 여행 중 솔티만 일등석으로 이동하는 등 악단원들과의 관계가 항상 원만했던 것은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1983년에는 동독 출신으로 서독으로 망명했던 클라우스 텐슈테트가 수석 지휘자로 초빙되었다. 텐슈테트는 1977년 런던 필하모닉과 말러의 교향곡 1번을 녹음하며 인연을 맺었고, 이 녹음은 카라얀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텐슈테트는 악단에 말러 음악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고, EMI 레이블에서 '대지의 노래'를 포함한 말러 교향곡 전집과 관현악 반주 가곡 등을 녹음하여 큰 호평을 받았다. 이 말러 전집은 텐슈테트의 깊이 있는 해석과 런던 필의 연주력이 결합된 결과물로 평가받으며, 특히 일본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외에도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 6번 '전원', 브람스의 교향곡 1번, 바그너 관현악 모음곡,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등 다양한 작품을 녹음하며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1985년 미국 연주 여행 중 후두암 진단을 받았고, 건강 악화로 인해 1987년 수석 지휘자직에서 물러났다. 악단은 그의 공로를 기려 '계관 지휘자(eng)' 칭호를 수여했다. 텐슈테트는 투병 중에도 컨디션이 허락할 때 런던 필을 객원 지휘했으며, 1988년 일본 공연에서는 우려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말러와 바그너 연주를 선보였다. 그의 런던 필 마지막 지휘는 1993년 말러 교향곡 7번 '밤의 노래'였으며, 199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 런던 필의 지휘대에 서지 못했다.
텐슈테트의 사임 이후, 1990년 당시 29세였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젊은 지휘자 프란츠 벨저뫼스트가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벨저뫼스트는 EMI 레이블에서 멘델스존의 교향곡 3번 '스코틀랜드'와 4번 '이탈리아',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음악 '불새', 브루크너의 교향곡 5번, 말러의 교향곡 4번, 그리고 빈 왈츠 모음곡 등을 녹음했다. 그러나 악단과의 관계는 순탄치 않아 리더(악장)를 비롯한 단원들이 퇴단하는 등 갈등이 있었고, 결국 1996년 취리히 오페라극장 음악 감독직에 전념하기 위해 사임했다. 벨저뫼스트가 사임한 후 약 4년간 공석이었던 상임 지휘자 자리는 객원 지휘자들이 메웠다.
2. 4. 21세기 (2000년 ~ 현재)
2000년, 오랫동안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악장을 역임했던 독일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가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여 2007년까지 직책을 유지했다.이 시기 악단은 자체 제작 레이블 "LPO"를 설립하여, 비첨 시대부터 유롭스키 시대까지의 연주 실황 음원을 CD로 제작하여 판매하기 시작했다.
마주어의 후임으로는 수석 객원 지휘자였던 블라디미르 유롭스키가 악단 창립 75주년인 2007-2008 시즌부터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여 2021년까지 악단을 이끌었다.
2021년-2022년 시즌부터는 에드워드 가드너가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여 활동 중이다.
런던 필하모닉 관현악단은 역대 수석 지휘자 전원이 서게르만 4개국(영국,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국적을 보유하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독자적인 품격 있고 중후한 사운드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3. 부속 단체
1947년에 악단 부속 합창단인 런던 필하모닉 합창단(London Philharmonic Choireng)이 창단되어 활동하고 있다.
4. 주요 활동
런던 필하모닉 관현악단(LPO)은 로열 페스티벌 홀을 주요 공연장으로 삼아 정기 연주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1964년부터는 글라인드본 페스티벌 오페라의 상주 관현악단으로 활동하며 오페라 반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61] 1947년에는 악단 부속 합창단인 런던 필하모닉 합창단이 창단되어 다양한 공연에서 협연하고 있다.[43]
LPO는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런던 교향악단처럼 영화 음악 녹음에도 참여하고 있으며,[115] 다양한 장르의 대중음악가들과도 협업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또한, LPO는 세계 각국으로 순회 공연을 다니며 국제적인 명성을 쌓아왔으며,[54][68] 전 세계의 다양한 음악 전통을 소개하고 결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Roots Classical Fusions" 시리즈[88]와 같은 교육 및 지역 사회 봉사 프로그램도 운영하며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4. 1. 공연
12번의 리허설 후, 런던 필하모닉 관현악단(LPO)은 1932년 10월 7일, 토마스 비첨 경의 지휘로 퀸스 홀에서 데뷔했다.[19] 첫 곡인 베를리오즈의 ''로마의 사육제 서곡'' 이후, 관객들은 열광하여 일부는 의자에 올라가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20] ''선데이 타임스''에서 어니스트 뉴먼은 "런던의 콘서트 홀에서 이처럼 전율적인 연주는 수년 동안 들어본 적이 없다"고 썼으며,[21] ''더 타임스''의 H. C. 콜스는 LPO가 "바라던 만큼 훌륭한 악기"라고 평했고, 네빌 카더스는 ''맨체스터 가디언''에서 "뉴욕과 비엔나 사이의 세 도시를 제외하고, 이보다 더 호화롭고 대담한 오케스트라 연주는 들어볼 수 없을 것"이라고 썼다.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의 월터 J. 터너는 오케스트라의 "젊음의 패기와 기교"를 칭찬했다.[22]
LPO는 첫 시즌에 코톨드-사전트 시리즈 18회, 로열 필하모닉 소사이어티 콘서트 10회, "국제 유명 투어" 15회, 홀트 에이전시를 위한 일요일 오후 콘서트 16회, 로버트 메이어의 어린이 콘서트, 로열 코랄 소사이어티 공연 등 다양한 무대에 섰다.[13] 첫 시즌의 솔리스트로는 가수 에바 터너, 피아니스트 해리엇 코언, 클리포드 커즌 등이 있었다.[23] 1932년 11월에는 16세의 예후디 메뉴인이 바이올린 협주곡 프로그램을 연주했는데, 바흐와 모차르트의 곡은 비첨 경이, 에드워드 엘가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작곡가 본인이 직접 지휘했다.[24]
이후 8년간 LPO는 퀸스 홀에서 로열 필하모닉 소사이어티를 위해 거의 100회 가까이 공연했으며, 코벤트 가든에서 비첨 경의 오페라 시즌 연주를 맡았고, 300개 이상의 레코드판을 제작했다.[25][117] 일요일 콘서트는 대부분 비첨 경이 지휘했지만,[27] 코톨드-사전트 시리즈에서는 사전트 외에도 브루노 발터, 조지 셀, 프리츠 부슈,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 많은 객원 지휘자들이 LPO를 지휘했다.[28]
런던 공연 외에도 지방 도시 순회 공연을 정기적으로 가졌다. 1933년 3월과 4월의 첫 투어는 브리스톨에서 시작하여 맨체스터에서 끝났으며,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의 13개 도시를 순회했다.[29] 마지막 콘서트 후, ''맨체스터 가디언''의 평론가는 LPO의 연주가 겉치레가 아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풍부하고 빛나는 음색을 지녔으며, 맨체스터에서 들어본 오케스트라 연주 중 가장 고귀한 스타일과 훌륭한 연주를 결합했다고 평가했다.[30] 비첨 경은 1936년 오케스트라와 함께 논란이 된 독일 투어를 진행했다.[31] 투어 중 오케스트라는 콘서트 전 나치 찬가 연주를 거부했지만, 히틀러 정부의 압력으로 나치의 반유대주의 때문에 금기시된 멘델스존의 ''이탈리아'' 교향곡 연주는 취소해야 했다.[32]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LPO는 수도 런던에서 연주 활동을 이어갔으며, 사전트와 리하르트 타우버 등 다른 지휘자들의 지휘 아래 영국 전역을 순회하며 이전에는 오케스트라 콘서트가 거의 열리지 않았던 지역까지 찾아가 공연했다.[36] 1941년 5월, 퀸스 홀이 독일군의 폭격으로 파괴되면서 많은 단원들의 악기가 소실되었다. BBC의 호소 방송 이후 대중들의 악기 기증이 이어져 오케스트라는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37]
전후 초기에는 발터, 푸르트벵글러, 빅토르 데 사바타, 세르지우 첼리비다케와 같은 유명 지휘자들이 객원으로 LPO를 지휘했다.[41] 1949-50 시즌에는 248회의 콘서트를 열었는데, 이는 당시 다른 런던 오케스트라들에 비해 월등히 많은 횟수였다.[42] 1947년에는 에두아르트 판 베이넘이 새로운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으나, 외국인 취업 허가 제한으로 인해 1년에 6개월만 활동할 수 있었다.[43]
1950년 에이드리언 볼트 경이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다.[44] 볼트와 함께 LPO는 1951년 1월 독일 투어를 진행하여 12일 동안 12번의 콘서트를 열었다.[47] 이 투어에서는 베토벤의 7번, 하이든의 ''런던'' 104번, 브람스의 1번, 슈만의 4번, 슈베르트의 ''그레이트 C 장조'' 교향곡 등을 연주했다.[48] 1951–52 시즌에는 랄프 본 윌리엄스, 벤자민 브리튼, 윌리엄 월튼 등이 객원 지휘자로 참여했다.[49] 주요 공연장으로 로열 페스티벌 홀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오케스트라는 이곳의 상주 악단 지위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52] 1953년에는 창립 21주년을 기념하여 페스티벌 홀과 앨버트 홀에서 파울 클레츠키, 장 마르티농, 한스 슈미트-이세르슈테트, 게오르그 솔티, 발터 쥐스킨트, 본 윌리엄스 등 객원 지휘자들과 함께 기념 콘서트 시리즈를 열었다.[53] 1956년에는 영국 오케스트라 최초로 소련 순회 공연을 가졌으며, 볼트, 아나톨 피스툴라리, 조지 허스트가 지휘하고 알프레도 캄폴리와 모라 림파니가 독주자로 참여했다.[54]
1962년에는 인도, 호주, 극동 지역 순회 공연을 가졌으며, 사전트 경과 존 프릿차드가 지휘했다. 프릿차드는 1962년 LPO의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다.[56] 프릿차드는 글라인드본 페스티벌 오페라의 음악 감독이기도 했으며, 그의 영향으로 LPO는 1964년부터 글라인드본의 상주 오케스트라가 되어 여름 시즌 동안 안정적인 활동 기반을 마련했다.[61] 1960년대에는 대니 케이, 듀크 엘링턴, 토니 베넷과 같은 클래식 외 분야의 유명 인사들이 참여하는 기금 마련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56]
1967년 베르나르트 하이팅크가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어 12년간 재임하며 LPO 역사상 가장 긴 임기를 기록했다. 그의 지휘 아래 LPO는 페스티벌 홀 공연에서 90%의 객석 점유율을 기록하는 등 큰 인기를 얻었다.[64] 하이팅크 재임 기간 동안 브루크너와 말러의 교향곡,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특히 10번 교향곡이 자주 연주되었다.[65]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와 함께한 베토벤 교향곡 및 피아노 협주곡 전곡 연주회는 페스티벌 홀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66] 1970년대에는 미국, 서유럽, 소련 순회 공연을 이어갔으며, 1972년에는 서방 오케스트라로서는 이례적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68] 1975년에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공동으로 사우스워크의 사용하지 않는 교회를 개조하여 리허설 및 녹음 스튜디오인 헨리 우드 홀을 개관했다.[70]
1970년대 객원 지휘자로는 에리히 라인스도르프,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오이겐 요훔, 리카르도 샤이, 클라우스 텐슈테트 등이 있었으며, 1979년 하이팅크의 뒤를 이어 게오르그 솔티 경이 수석 지휘자로 취임했다.[71]

뵐저-모스트 사임 후 4년간 수석 지휘자 공석 기간 동안, LPO는 전 세계 음악 전통을 결합하는 "Roots Classical Fusions" 시리즈를 시작하는 등 교육 및 지역 사회 프로그램을 확장했다.[88] 2000년부터 2007년까지는 쿠르트 마주어가 수석 지휘자를 맡아 독일 교향곡 레퍼토리 연주에 강점을 보였다.[89] 2000년에는 길버트 레빈의 지휘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하며 크라쿠프의 유럽 문화 수도 선정을 기념하는 갈라 콘서트 시리즈에 참여했다.[90][91] 이 공연은 PBS 등을 통해 국제적으로 방송되어 LPO의 미국 텔레비전 데뷔 무대가 되었다.[92]
2007년 9월,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가 제11대 수석 지휘자로 취임했다.[94] 유로프스키는 글라인드본 음악 감독(2001–2013)도 겸임하며 브리튼, 모차르트, 푸치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베르디, 바그너 등의 오페라를 지휘했다. 유로프스키 재임 기간 동안 야닉 네제-세갱[95]과 안드레스 오로스코-에스트라다가 수석 객원 지휘자를 역임했다. 유로프스키는 2020-2021 시즌을 끝으로 임기를 마치고 명예 지휘자 칭호를 받았다.
2019년 7월, LPO는 에드워드 가드너를 2021-2022 시즌부터 5년 임기의 차기 수석 지휘자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96] 2020년 4월에는 카리나 카넬라키스를 2020년 9월부터 새로운 수석 객원 지휘자로 임명했으며, 이는 LPO 역사상 최초의 여성 수석 객원 지휘자이다.[97][98] 2024년 2월, 카넬라키스의 계약이 3년 연장되었고,[99] 2024년 9월에는 가드너의 계약이 2년 연장되었다.[100]
4. 2. 음반
창단 초기에는 주로 협주곡 녹음에 집중하여 야샤 하이페츠,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아르투르 슈나벨, 알프레드 코르토, 프리츠 크라이슬러 등 당대의 유명 솔리스트들과 협연 음반을 남겼다.[105] 초기 녹음은 주로 EMI의 자회사인 컬럼비아 레이블을 통해 독점적으로 이루어졌다. 오케스트라의 첫 번째 녹음은 공식 데뷔 콘서트 이전인 1932년 9월, 말콤 사전트의 지휘와 로열 코럴 소사이어티의 협연으로 킹스웨이 홀에서 진행된 헨델의 ''메시아''와 하이든의 ''창조'' 합창곡이었다.[101] 애비 로드에서의 첫 녹음은 같은 해 10월 헨리 우드 경의 지휘로 이루어졌다.[102] 창단자 토마스 비첨 경은 1933년 1월 헨델의 음악을 편곡한 발레 모음곡 ''디자인의 기원''을 시작으로,[103] 1945년까지 LPO와 총 99개의 78 rpm 음반 세트를 녹음했다.[104] 이 시기 엘가,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존 바비롤리, 세르게이 쿠세비츠키 등 다른 저명한 지휘자들도 LPO와 함께 녹음 작업을 진행했다.[105]에이드리언 볼트 경이 수석 지휘자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관현악 작품 녹음이 활발해졌다. 볼트 지휘 아래 엘가의 ''팔스타프'', 말러의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블랑쉬 템봄 협연), 베토벤의 교향곡 1번 등을 시작으로 상업 녹음을 진행했다.[45] 1946년부터는 데카와도 녹음을 시작했으며,[106] 1952년에는 데카와 5년 계약을 체결했다.[50] 데카 레이블로는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지휘의 스트라빈스키 ''페트루슈카''를 시작으로,[106] 에두아르트 판 베이넘, 사전트, 빅토르 데 사바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샤를 뮌슈, 클레멘스 크라우스, 한스 크나퍼츠부슈, 에리히 클라이버, 게오르크 솔티 등 여러 지휘자와 작업했다.[106] LPO 최초의 스테레오 녹음은 1956년 데카에서 볼트의 지휘로 녹음된 본 윌리엄스의 교향곡 8번이었다.[107] 볼트는 이후 EMI에서도 LPO와 다수의 스테레오 녹음을 남겼다.[55]
상임 지휘자 외에 객원 지휘자들의 녹음도 활발했는데, 오이겐 요훔은 하이든의 '런던 교향곡집'(93-104번)을 도이체 그라모폰에 남기기도 했다. 전후 LPO는 특정 레이블에 얽매이지 않고 데카 외에도 필립스, CBS, RCA, 챈도스 등 다양한 레이블과 작업했다.[108] 때로는 계약 관계 때문에 "필하모닉 프롬나드 오케스트라"라는 다른 이름으로 녹음에 참여하기도 했다.[109]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영국 작곡가들의 작품을 주로 다루는 독립 레이블 리리타와 긴밀하게 협력했으며, 이 시기 리리타 녹음의 상당수는 볼트 경이 지휘했다.[106][110]
오페라 녹음에도 많이 참여하여, 글라인드본 실황이나 스튜디오 녹음으로 초기 오페라(카발리의 ''L'Ormindo'', 헨델의 ''테오도라'')부터 모차르트의 ''코지 판 투테'', 비제의 ''카르멘'',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등의 핵심 레퍼토리, 그리고 본 윌리엄스의 ''순례자의 여정'', 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 군의 레이디 맥베스'', 외트뵈시의 ''사랑과 다른 악마들'' 등을 포함한 20세기 작품 초연 녹음까지 폭넓은 음반을 남겼다.[111]
20세기 후반 클래식 음반 시장의 변화에 따라 스튜디오 녹음이 줄어들자, LPO는 2005년 자체 음반 레이블을 설립했다. 이 레이블을 통해 주로 실황 연주를 음반으로 발매하고 있으며, 비첨부터 유로프스키에 이르는 역대 수석 지휘자들의 연주가 포함되어 있다 (스타인버그 제외).[113] 자체 레이블의 베스트셀러 음반으로는 텐슈테트 지휘의 말러 교향곡 8번, 유로프스키 지휘의 라흐마니노프 및 차이콥스키 작품 등이 있다.[114]
런던 교향악단처럼 영화 음악 녹음에도 참여하고 있다. 특히 일본 작곡가 스기야마 고이치가 지휘한 게임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의 교향 모음곡 녹음이 잘 알려져 있다. 클래식 외 장르와의 협업도 진행하여 핑크 플로이드, 레드 제플린의 트리뷰트 앨범이나 딤무 보거 같은 메탈 밴드의 음반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국 음악가들과의 작업으로는 구라모토 유키의 앨범 'Refinement', 유희열의 솔로 프로젝트 토이 3집, 양방언의 음반 녹음 등이 있다.
4. 3. 영화 음악 및 대중음악
런던 교향악단(LSO)과 마찬가지로 영화 음악 녹음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LSO가 200편 이상의 영화 음악을 녹음한 것에 비하면 수는 적지만[115], 1936년 ''신들은 사랑하는 자''를 시작으로 꾸준히 활동해왔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10편의 영화 음악을 녹음했으며, 1970년대까지는 1962년작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제외하고는 참여가 상대적으로 적었다.[115] 이후 참여한 주요 영화 음악으로는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1972),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1973), 디즈니의 ''트론''(1982), ''플라이''(1986), ''데드 링거스''(1988), ''아버지의 이름으로''(1993), ''필라델피아'', 하워드 쇼어가 작곡한 ''반지의 제왕'' 3부작(2001–2003)과 ''호빗'' 3부작(2012–2014)의 사운드트랙 등이 있다.[115]게임 음악 분야에서도 활동했는데, 특히 일본에서는 작곡가 스기야마 고이치의 지휘 아래 유명 게임 시리즈인 '드래곤 퀘스트'의 교향 모음곡 녹음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제노사가 시리즈의 사운드트랙 녹음에도 참여했다.
클래식 외 다양한 장르의 음악 작업에도 관여했다. 핑크 플로이드나 레드 제플린의 트리뷰트 앨범, 블랙 메탈 밴드 딤무 보거의 음반에 게스트로 참여했으며, 한국 음악가인 구라모토 유키의 앨범 'Refinement', 유희열의 솔로 프로젝트 토이 3집, 양방언의 음반 작업에도 기용되었다. 재즈 피아니스트 칙 코리아의 'Corea.Concerto', 핀란드의 심포닉 메탈 밴드 나이트위시의 앨범 'Once'와 'Dark Passion Play', 일본의 록 스타 YOSHIKI의 앨범 'Eternal Melody'와 록 음악을 클래식으로 편곡한 '요시키 클래시컬'(2013) 녹음에도 참여했다.[116] 이 외에도 ''하와이안 파라다이스''(1959), 뮤지컬 ''에비타'' 음반(1976), ''브로드웨이 골드''(1978),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민속 음악''(1984), ''아카데미상 주제가''(1984), ''일본 경음악''(1993), ''핑크 플로이드의 교향곡''(1994), ''더 후의 교향곡''(1995) 등 다양한 비고전 음악 녹음을 남겼다.[117]
2011년에는 런던 올림픽과 패럴림픽에 참가하는 205개 국가 및 지역의 국가를 녹음하여 선수촌 입촌식과 시상식에서 사용되도록 했다.[118] 또한 1996년에는 미국 필라델피아 지역 방송국 WPVI-TV의 뉴스 테마곡 "Move Closer to Your World" 버전을 잠시 연주하기도 했다.[119][120]
4. 4. 기타
런던 필하모닉 관현악단은 다른 런던 소재 관현악단들처럼 영화 음악이나 대중 음악 연주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영화 음악 분야에서는 『반지의 제왕』 3부작, 아라비아의 로렌스, 필라델피아 등의 사운드트랙 녹음에 참여했다. 게임 음악 분야에서는 스기야마 코이치가 작곡한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의 교향 모음곡과 제노사가 시리즈 등의 음악을 연주했다. 대중 음악계와의 협업으로는 칙 코리아의 'Corea.Concerto', 나이트위시의 음반 『Once』와 『Dark Passion Play』, YOSHIKI의 앨범 『Eternal Melody』 등이 있다.
또한, 2011년에는 다음 해에 열릴 런던 올림픽과 패럴림픽을 위해 참가 예정인 205개 국가 및 지역의 국가를 연주하여 녹음했다. 이 녹음된 국가들은 대회 기간 중 선수단의 선수촌 입촌식과 메달 시상식 등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5. 역대 상임 지휘자
- 토머스 비첨 (1932-1939)
- 에두아르드 반 베이눔 (1947-1950)
- 에이드리언 볼트 (1950-1957)
- 윌리엄 스타인버그 (1958-1960)
- 존 프리처드 (1962-1966)
-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1967-1979)
- 조지 숄티 (1979-1983)
- 클라우스 텐슈테트 (1983-1990)
- 프란츠 벨저뫼스트 (1990-1996)
- 쿠르트 마주어 (2000-2007)
- 블라디미르 유롭스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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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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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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