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로렌은 프랑스 북동부에 위치한 역사적 지역으로,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로타르 1세의 왕국으로 시작되어 신성 로마 제국의 로렌 공국으로 발전했다. 프랑스, 독일,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국경을 접하며, 뫼르트-에-모젤, 뫼즈, 모젤, 보주 4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다. 로렌은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특히 모젤 지역에서는 독일어 사용 인구가 존재하며, 독특한 로렌어와 로렌 프랑코니아어 방언을 사용한다. 경제적으로는 철강 산업의 쇠퇴와 함께 물류 및 서비스 부문이 성장했으며, 키슈 로렌, 미라벨 자두 등 지역 특산물과 코트 드 툴 와인이 유명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자유 프랑스의 상징인 로렌 십자가가 사용되었고, 낭시, 메스 등의 도시가 주요 도시이며, 에밀 뒤르켐, 레몽 푸앵카레 등 다양한 분야의 저명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로렌 - [지명]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로렌 |
현지 이름 (로렌어) | Louréne |
현지 이름 (로렌 프랑코니아어) | Lottringe |
![]() | |
![]() | |
행정 구역 | |
국가 | 프랑스 |
행정 구역 유형 | 레지옹 |
행정 구역 이름 | 그랑테스트 |
현 소재지 유형 | 현 |
현 소재지 | 메스 |
하위 행정 구역 유형 | 데파르트망 |
하위 행정 구역 수 | 4 |
하위 행정 구역 목록 | 뫼르트에모젤주 (54) 뫼즈주 (55) 모젤주 (57) 보주주 (88) |
NUTS 지역 | FR4 |
ISO 코드 | FR-M |
통계 | |
면적 | 23547 km2 |
인구 (2012년 1월 1일) | 2,349,816명 |
인구 통계 명칭 | 로렌 사람 |
GDP (2022년) | 658억 2800만 유로 |
1인당 GDP (2022년) | 28,300 유로 |
역사 | |
관련 역사 정보 | 메디오마트리키 & 레우키 갈리아 벨기카 로타링기아 로렌 공국 바르 공국 세 개의 주교령 로렌과 바로아 독일 제국 로렌 현 나치 독일 로렌 점령지 로렌 지역 그랑테스트 |
문화 | |
문화 관련 정보 | 문장 기 상징 사람 언어 로렌 로렌 프랑코니아어 저지 알레만 인구 통계 로렌 박물관 |
종교 | |
종교 정보 | 로마 가톨릭교: 메스 교구 (교황 직속) 낭시 교구 생디에 교구 베르됭 교구 개신교: 알자스-로렌 개신교 연합 모젤 루터교: 알자스-로렌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개신교 교회 모젤 칼뱅주의: 알자스-로렌 개혁 교회 모젤 프랑스 연합 개신교 교회 (로렌 나머지 지역) 유대교 종교 집회: 메스 모젤 낭시 (로렌 나머지 지역) |
법률 | |
법률 정보 | 알자스-모젤 지역법 알자스-모젤 협약 (1801) |
2. 역사
카롤링거 왕조 로타르 1세의 왕국으로 탄생한 로렌은 동프랑크 왕국과 서프랑크 왕국 사이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로렌 공국이 되었으나, 프랑스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 앙리 2세의 메스, 툴, 베르됭 합병으로 프랑스의 영향력이 커졌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의 결정으로 폴란드의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게 양도되었고, 1766년 그의 사후 프랑스에 귀속되었다.[4][5][6]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결과, 로렌 일부가 독일 제국에 병합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으로 프랑스에 반환되었다. 독일 제국은 프랑스어와 문화를 억압하고 독일어를 강요했으나, 1918-1919년 독일 혁명으로 프랑스군을 환영했다.[7][8][9][10][11]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에 합병되기도 했으나, 종전 후 프랑스 영토로 남았다. 로렌 십자는 자유 프랑스의 상징이었다.
1856년 퐁타무송 제철 공장이 완성되었고, 1900년 전후 미네트 광과 브리에 광상이 개발되었다. 프랑스와 벨기에 기업 외에 독일과 룩셈부르크 자본도 유입되었다. 1915년 루이 마랭이 철강 트러스트인 'Groupe Lorrain'을 설립했다.[17]
2. 1. 고대와 중세
로마인에게 정복된 후, 이 지역은 트리어와 메스가 도시로 발전하였다. 로렌이라는 명칭은 843년 베르됭 조약에 의해 이 지방이 로타링기아(로타르 2세의 영토)에 속하게 된 데서 유래한다.[17]로타링기아 분열 후, 귀속을 둘러싸고 항쟁이 일어나 10세기에 고(상)로렌과 저(하)로렌의 남북 2공국으로 분할되었고, 후자가 결국 브라반트 공에 귀속되면서 전자가 11세기 이후에는 단순히 로렌이라고 불리게 되었다.[17]
13세기 전반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세력 하에 있었지만, 13세기 후반부터 프랑스 왕의 세력이 침투하여, 30년 전쟁 당시에는 사실상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었다. 그 후에도 17세기 말까지 프랑스의 지배 하에 있었고, 로렌 공의 지위는 명목상에 불과했지만, 1697년 레이스베이크 조약으로 다시 신성 로마 제국에 귀속되어, 1736년까지 로트링겐 공국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 국가가 되었다.[17]
로트링겐(로렌) 공 프란츠 3세 슈테판(프랑수아 3세 에티엔, 후의 신성 로마 황제프란츠 1세)은 합스부르크 가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1723년에 15세에 약혼했지만, 루이 15세는 결혼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전 폴란드 왕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게 공국을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이 조건이 승인되어 1736년 2월에 혼인이 이루어졌다. 루이 15세는 스타니스와프에게 로렌을 여생을 보낼 장소로 제공했다. 또한, 대가로 프란츠에게는 토스카나 대공국이 주어졌다. 1766년, 스타니스와프의 사망 후 공국은 최종적으로 프랑스에 병합되었고, 1776년 낭시에 고등 법원이 설치되었다.[17]
2. 2. 근세
카롤링거 왕조의 로타르 1세의 왕국으로 탄생한 로렌은 신성로마제국의 로렌 공국이 되었다. 로렌 공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중요한 일부였으나, 프랑스의 문화적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후 프랑스가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늘려 앙리 2세의 메스, 툴, 베르됭 합병으로 시작되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의 결정으로 로렌은 일시적으로 폴란드의 쫓겨난 왕 Stanislas Leszczyński의 영지가 되었고, 그의 죽음과 함께 1766년 프랑스에 양도되었다.
840년, 샤를마뉴의 아들 경건왕 루이가 사망했다. 베르됭 조약(843년)에 따라 카롤링거 제국은 루이의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고 로타르 1세에게 중 프랑크 왕국이 넘어갔다. 로타르 1세가 사망하자 중 프랑크 왕국은 855년 프뤼엠 조약에 의해 세 부분으로 나뉘었고, 북쪽 1/3은 로타링기아로 불리며 로타르 2세에게 넘어갔다. 로타링기아는 동 프랑크 왕국과 서 프랑크 왕국 사이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통치자들은 870년부터 공작으로 정체성을 규정하여 공작령이 생존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동부 또는 서부 카롤링거 왕국과 동맹을 맺을 수 있게 되었다.
870년, 로렌은 자치 공작령으로 남아 있으면서 동 프랑크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962년, 신성 로마 황제 오토 1세가 제국을 부활시키자, 로렌은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자치 로렌 공작령으로 지정되었다. 이 지위는 1766년까지 유지되었으며, 이후에는 프랑스 왕국에 합병되었다.
로렌의 공작 프랑수아 스테판은 신성 로마 제국의 왕위를 프란츠 1세로 계승했고, 그의 형제 로렌의 카를 알렉산더 공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이 되었다. 그는 정치적 이유로, 자신이 재임할 때 사망한 첫 번째 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대공녀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은 상속자들을 숨기기로 결정했다.
지도력의 공백, 프랑스 혁명 등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로렌은 결국 현대 프랑스 공화국의 영구적인 일부가 되었다.
계몽된 지도력과 프랑스 문화와 독일 문화의 교차로에서 로타링기아는 12세기와 13세기 동안 엄청난 경제적, 예술적, 문화적 번영을 누렸다. 이 번영은 14세기에 혹독한 겨울, 흉작, 그리고 흑사병으로 인해 종식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30년 전쟁까지 로타링기아에 번영이 다시 찾아왔다.
1766년 프랑스는 로렌을 상속받았다. 1871년, 독일 제국은 로렌의 일부(로렌 현)를 되찾았다. 이 현은 새로운 독일 제국의 알자스-로렌 제국 영토의 일부를 형성했다.
로마인에 의한 정복 이후, 이 지역은 트리어와 메스가 도시로 발전했다. 로렌의 명칭은 베르됭 조약(843년)에 의해 이 지방이 로타린기아(로타르 2세의 영토)에 속하게 된 데서 유래한다.
로타린기아 분열 후, 10세기에 고(상)로렌과 저(하)로렌의 남북 2공국으로 분할되었고, 후자가 결국 브라반트 공에 귀속되면서 전자가 11세기 이후에는 단순히 로렌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3세기 전반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세력 하에 있었지만, 13세기 후반부터 프랑스 왕의 세력이 침투하여, 30년 전쟁 당시에는 사실상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었다. 그 후에도 17세기 말까지 프랑스의 지배 하에 있었고, 로렌 공의 지위는 명목상에 불과했지만, 레이스베이크 조약(1697년)으로 다시 신성 로마 제국에 귀속이 돌아가, 1736년까지 로트링겐 공국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 국가가 되었다.
로트링겐(로렌) 공 프란츠 3세 슈테판(프랑수아 3세 에티엔, 후의 신성 로마 황제프란츠 1세)은 합스부르크 가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1723년에 약혼했지만, 루이 15세는 결혼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전 폴란드 왕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게 공국을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이 조건이 승인되어, 1736년 2월에 혼인이 이루어졌다. 루이 15세는 스타니스와프에게 로렌을 여생을 보낼 장소로 제공했다. 또한, 대가로 프란츠에게는 토스카나 대공국이 주어졌다. 1766년, 스타니스와프의 사망 후 공국은 최종적으로 프랑스에 병합되었고, 1776년 낭시에 고등 법원이 설치되었다.
1856년에 퐁타무송의 제철 공장이 완성되었다.
2. 3. 근대
로렌은 카롤링거 왕조의 로타르 1세의 왕국으로 탄생했으며, 중프랑크 왕국의 중심지였다. 로타르 왕국이 사라진 뒤 로렌은 분할되었다가, 신성로마제국의 로렌 공국이 되었다. 로렌 공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중요한 일부였으나 프랑스의 문화적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이후 프랑스가 이 지역에 대한 영향을 늘려왔는데, 앙리 2세의 메스, 툴, 베르됭 합병으로 시작되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의 결정으로 로렌은 일시적으로 폴란드의 쫓겨난 왕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의 영지가 되었고, 그의 죽음과 함께 1766년 프랑스에 양도되었다.
신성로마제국 붕괴부터 1870년까지 로렌은 프랑스에 문화적으로 동화되었다.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로렌의 일부 지역이 독일 제국에 복속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배하면서 다시 프랑스령이 되었다.
로렌은 오랜 역사 동안 국경이 자주 바뀌었다. 로렌의 위치는 네 국가의 교차로로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840년, 경건왕 루이가 사망했다. 베르됭 조약 (843년)에 따라 카롤링거 제국은 루이의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중 프랑크 왕국은 로타르 1세에게 넘어갔다. 로타르 1세가 사망하자 중 프랑크 왕국은 855년 프뤼엠 조약에 의해 세 부분으로 나뉘었고, 북쪽 1/3은 로타링기아로 불리며 로타르 2세에게 넘어갔다. 로타링기아는 동 프랑크 왕국과 서 프랑크 왕국 사이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통치자들은 870년부터 공작으로 정체성을 규정하여 공작령이 생존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명목상 동부 또는 서부 카롤링거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870년, 로렌은 자치 공작령으로 남아 있으면서 동 프랑크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962년, 신성 로마 황제 오토 1세가 제국을 부활시키자, 로렌은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자치 로렌 공작령으로 지정되었다. 이 지위는 1766년까지 유지되었으며, 이후에는 프랑스 왕국에 합병되었다.
1766년 프랑스는 로렌을 상속받았다. 1871년, 독일 제국은 로렌의 일부(로렌 현)를 되찾았다. 이 현은 독일 제국의 알자스-로렌 제국 영토의 일부를 형성했다. 프랑스 제3 공화국 시대에 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복수주의 운동이 발전했다.
제국 독일 행정부는 프랑스어와 문화를 억제하고 독일어를 행정 언어로 사용하도록 했다.[4] 독일어를 독일어 사용 지역으로 지정한 지역의 학교에서 독일어 사용을 의무화했으며, 프랑스어는 샤토살랭과 주변 구와 같이 프랑스어로 간주되는 시의 초등 및 중등 학교와 지방 행정부에서만 사용이 허용되었다.[5][6]
1877년 이후, 주립 대학, 대학교 및 교사 양성학교를 포함한 고등 교육은 전적으로 독일어로 진행되었다.[7] 독일어의 우세와 제한적인 프랑스어 사용은 1911년 알자스-로렌 헌법에 의해 보장되었다.[8] 로렌의 독일어 어원인 많은 지명은 독일어 표준으로 조정되었지만, 진정한 프랑스어 지명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1940년에서 1944년 사이의 나치 점령 기간 동안 독일 정부는 프랑스어 이름을 대체하기 위해 독일어 번역을 강요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국경 전투 동안 프랑스 제1군은 로렌을 침공하여 잠시 뮐루즈를 점령했다. 그러나 독일 제6군이 반격하여 사르부르 전투와 모랑주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퇴각시켰다. 1918-1919년 독일 혁명에 참여하여 독일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으며, 며칠 후 프랑스군을 이 지역으로 환영했다.[10][11]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알자스-로렌 주에 속했던 로렌 영토의 일부를 포함하여 심각한 영토 손실을 겪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한 가우 베스트마르크의 일부로 사실상 합병된 경우를 제외하고, 그 지역은 이후 프랑스의 일부로 남아 있다. 그 전쟁 동안 로렌 십자는 자유 프랑스의 상징이었다.
로렌 행정 구역은 18세기 로렌 공국보다 더 넓으며, 로렌 공국은 1737년과 1766년 사이에 점차 프랑스 주권 아래로 들어갔다. 현대의 로렌 지역은 레지옹과 역사적으로 로렌 공국과는 별개였던 지역을 포함한다. 이들은 다음과 같다.
- 바로아
- 세 주교령: 메스, 베르됭, 툴 주변의 비연속적인 영토로, 16세기에 신성 로마 제국에서 분리되어 프랑스 주권 아래로 들어갔다.
- 프랑스 혁명 당시에도 여전히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던 몇 개의 작은 공국들.
프랑스 혁명 동안 바로아, 세 주교령 및 로렌 공국의 주요 영토에서 4개의 도가 만들어졌다.
- 뫼즈
- 뫼르트
- 모젤
- 보주
1870년 이후 ''모젤''과 ''뫼르트''의 일부는 독일령이 되었다. 나머지 부분에서 프랑스는 뫼르트-에-모젤이라는 새로운 도를 형성했다. 1918년과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는 다시 ''모젤''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다.
로마인에 의한 정복 이후, 이 지역은 트리어와 메스가 도시로 발전했다. 로렌의 명칭은 베르됭 조약(843년)에 의해 이 지방이 로타린기아(로타르 2세의 영토)에 속하게 된 데서 유래한다.
로타린기아 분열 후, 10세기에 고(상)로렌과 저(하)로렌의 남북 2공국으로 분할되었고, 후자가 결국 브라반트 공에 귀속되면서 전자가 11세기 이후에는 단순히 로렌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3세기 전반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세력 하에 있었지만, 13세기 후반부터 프랑스 왕의 세력이 침투하여, 30년 전쟁 당시에는 사실상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었다. 레이스베이크 조약(1697년)으로 다시 신성 로마 제국에 귀속이 돌아가, 1736년까지 로트링겐 공국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 국가가 되었다.
로트링겐(로렌) 공 프란츠 3세 슈테판(프랑수아 3세 에티엔, 후의 신성 로마 황제프란츠 1세)은 합스부르크 가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1723년에 약혼했지만, 루이 15세는 결혼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전 폴란드 왕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게 공국을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1736년 2월에 혼인이 이루어졌다. 루이 15세는 스타니스와프에게 로렌을 여생을 보낼 장소로 제공했다. 또한, 대가로 프란츠에게는 토스카나 대공국이 주어졌다. 1766년, 스타니스와프의 사망 후 공국은 최종적으로 프랑스에 병합되었고, 1776년 낭시에 고등 법원이 설치되었다.
1856년에 퐁타무송의 제철 공장이 완성되었다. 1870년부터 1871년의 보불 전쟁의 결과, 로렌의 일부가 독일 제국에 병합되었지만, 1919년의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 프랑스에 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1900년 전후에, 미네트 광과 지하수가 풍부한 브리에 광상이 개발될 수 있게 되었다. 병행하여, 로렌을 개발하는 프랑스 기업이나 벨기에 기업에는 티센 등의 독일 자본과 룩셈부르크 자본이 유입되었다. 1915년, 정치인 루이 마랭(프랑스어판)(영어판)이 200가족의 반델과 언론인 모리스 바레스의 지원을 받아 ''Groupe Lorrain'' 이라는 철강 트러스트를 설립했다.[17]
2. 4. 현대
카롤링거 왕조의 로타르 1세의 왕국으로 탄생한 로렌은 신성로마제국의 로렌 공국이 되었다가 1766년 프랑스에 양도되었다.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로렌의 일부 지역이 독일 제국에 복속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배하면서 다시 프랑스령이 되었다.1766년 프랑스는 로렌을 상속받았다. 1871년, 독일 제국은 로렌의 일부(로렌 현)를 되찾아 알자스-로렌 제국 영토의 일부를 형성했다. 프랑스 제3 공화국 시대에 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복수주의 운동이 발전했다.
제국 독일 행정부는 프랑스어와 문화를 억제하고 독일어를 행정 언어로 사용하도록 했다.[4] 독일어를 독일어 사용 지역으로 지정한 지역의 학교에서 독일어 사용을 의무화했으며, 프랑스어는 샤토살랭과 주변 구와 같이 프랑스어로 간주되는 시의 초등 및 중등 학교와 지방 행정부에서만 사용이 허용되었다.[5][6]
1877년 이후, 고등 교육은 전적으로 독일어로 진행되었다.[7] 독일어의 우세와 제한적인 프랑스어의 부분적인 사용은 1911년 알자스-로렌 헌법에 의해 보장되었다.[8] 로렌의 독일어 어원인 많은 지명은 독일어 표준으로 조정되었지만[9], 1940년에서 1944년 사이의 나치 점령 기간 동안 독일 정부는 프랑스어 이름을 대체하기 위해 독일어 번역을 강요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프랑스 제1군은 로렌을 침공하여 잠시 뮐루즈를 점령했으나, 독일 제6군이 반격하여 프랑스군을 퇴각시켰다. 로렌은 계엄령 상태로 남아 서부 전선과 가까웠으며,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난민 위기에 시달렸다. 1918-1919년 독일 혁명에 참여하여 독일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으며, 며칠 후 프랑스군을 이 지역으로 환영했다.[10][11]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알자스-로렌 주에 속했던 로렌 영토의 일부를 포함하여 심각한 영토 손실을 겪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한 가우 베스트마르크의 일부로 사실상 합병된 경우를 제외하고, 그 지역은 이후 프랑스의 일부로 남아 있다. 그 전쟁 동안 로렌 십자는 자유 프랑스의 상징이었다.
프랑스 혁명 동안 바로아, 세 주교령 및 로렌 공국의 주요 영토에서 4개의 도가 만들어졌다.
- 뫼즈
- 뫼르트
- 모젤
- 보주
1870년 이후 ''모젤''과 ''뫼르트''의 일부는 독일령이 되었다. 나머지 부분에서 프랑스는 뫼르트-에-모젤이라는 새로운 도를 형성했다. 1918년과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는 다시 ''모젤''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다.
프랑스가 20세기 중반에 행정 구역을 만들었을 때, ''뫼르트-에-모젤'', ''뫼즈'', ''모젤'' 및 ''보주''를 로렌이라는 단일 레지옹으로 묶기로 결정했다.
1856년에 퐁타무송의 제철 공장이 완성되었다. 1870년부터 1871년의 보불 전쟁의 결과, 로렌의 일부가 독일 제국에 병합되었지만, 1919년의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 프랑스에 귀속되었다.
1900년 전후, 미네트 광과 지하수가 풍부한 브리에 광상이 개발되었다. 로렌을 개발하는 프랑스 기업이나 벨기에 기업에는 티센 등의 독일 자본과 룩셈부르크 자본이 유입되었다. 1915년, 정치인 루이 마랭(프랑스어판)(영어판)이 200가족의 반델과 언론인 모리스 바레스의 지원을 받아 ''Groupe Lorrain'' 이라는 철강 트러스트를 설립했다.[17]
3. 지리
로렌은 오랜 역사 동안 국경이 자주 바뀌었으며, 네 국가의 교차로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과 정치적, 결혼 동맹을 통해 로렌은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4] 로렌의 통치자들은 유럽 왕족 가문과 혼인하고 왕을 배출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좌에 오르기도 했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카롤링거 제국이 분할되면서, 로타르 1세는 중 프랑크 왕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855년 프뤼엠 조약으로 중 프랑크 왕국이 다시 분할되면서, 로타르 2세는 로타링기아를 차지했다. 로타링기아는 동 프랑크 왕국과 서 프랑크 왕국 사이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통치자들은 공작으로 정체성을 규정하여 공작령이 생존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동부 또는 서부 카롤링거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962년 신성 로마 황제 오토 1세가 제국을 부활시키자, 로렌은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자치 로렌 공작령으로 지정되었다. 이 지위는 1766년까지 유지되었으며, 이후 프랑스 왕국에 합병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여러 전쟁으로 인해 로렌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여러 차례 지배가 바뀌었다. 1871년 독일 제국은 로렌의 일부(로렌 현)를 알자스-로렌 제국 영토의 일부로 되찾았다. 프랑스는 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복수주의 운동을 벌였다.
독일 제국은 프랑스어와 문화를 억제하고 독일어를 행정 언어로 사용하도록 했다.[5][6] 1911년 알자스-로렌 헌법은 독일어의 우세와 제한적인 프랑스어 사용을 보장했다.[7][8] 나치 독일 점령 기간(1940-1944) 동안에는 프랑스어 지명이 독일어로 강제 번역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로렌은 서부 전선과 가까워 난민 위기에 시달렸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은 로렌 영토를 포함한 알자스-로렌 지역을 프랑스에 반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가우 베스트마르크의 일부로 사실상 합병되었던 시기를 제외하고, 로렌은 계속 프랑스의 영토로 남아 있다.
현대 로렌 행정 구역은 18세기 로렌 공국보다 넓으며, 바로아, 세 주교령(메스, 베르됭, 툴) 등 역사적으로 로렌 공국과는 별개였던 지역을 포함한다.
로렌은 벨기에(왈로니아), 룩셈부르크, 독일(자르 및 라인란트팔츠)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유일한 프랑스 지역이다. 또한 프랑슈콩테, 샹파뉴아르덴, 알자스와도 경계를 접하고 있다.
로렌의 대부분은 파리 분지의 일부로, 고원 지형을 가지고 있다. 동쪽은 보주 산맥으로 더 험준하다. 모젤 강, 뫼르트 강, 뫼즈 강 등 많은 강들이 로렌을 통과하며, 대부분 라인 강 유역에 속한다. 로렌은 해양성 기후에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다.
4. 문화
로렌은 오랜 역사 동안 국경이 자주 바뀌었으며, 네 국가의 교차로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는 정치적, 결혼 동맹을 통해 로렌이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로렌의 통치자들은 유럽 왕족 가문과 혼인하고 왕을 배출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좌에 오르기도 했다.
샤를마뉴의 아들 경건왕 루이가 사망한 후, 베르됭 조약(843년)에 따라 카롤링거 제국은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로타르 1세는 중 프랑크 왕국을 차지했고, 프뤼엠 조약(855년)에 따라 그의 왕국은 다시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북쪽 1/3은 로타링기아로 불리며 로타르 2세에게 넘어갔다. 로타링기아는 동 프랑크 왕국과 서 프랑크 왕국 사이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통치자들은 870년부터 공작으로 정체성을 규정하여 공작령이 생존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동부 또는 서부 카롤링거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로렌은 870년 동 프랑크 왕국과 동맹을 맺고 자치 공작령으로 남았다. 962년 신성 로마 황제 오토 1세가 제국을 부활시키자, 로렌은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자치 로렌 공작령으로 지정되었다. 이 지위는 1766년까지 유지되었으며, 이후 프랑스 왕국에 합병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민족주의 전쟁으로 인해 로렌은 프랑스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고, 여러 차례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21세기에는 로렌 분리주의자들이 존재하지만, 이들은 문화적 정체성 보존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12세기와 13세기 호엔슈타우펜 황제 시대에 로렌은 경제적, 예술적, 문화적 번영을 누렸으나, 14세기에는 혹독한 겨울, 흉작, 흑사병으로 인해 쇠퇴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30년 전쟁까지 번영이 다시 찾아왔다.
1871년 독일 제국은 로렌의 일부(로렌 현)를 알자스-로렌 제국 영토의 일부로 되찾았다. 프랑스 제3 공화국 시대에는 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복수주의 운동이 발전했다.
제국 독일 행정부는 프랑스어와 문화를 억제하고 독일어를 행정 언어로 사용하도록 했다.[4] 독일어는 독일어 사용 지역으로 지정된 지역의 학교에서 의무화되었으며, 프랑스어는 샤토살랭과 주변 구와 같이 프랑스어로 간주되는 시의 초등 및 중등 학교와 지방 행정부에서만 사용이 허용되었다.[5][6] 1877년 이후 고등 교육은 전적으로 독일어로 진행되었다.[7] 독일어의 우세와 제한적인 프랑스어 사용은 1911년 알자스-로렌 헌법에 의해 보장되었다.[8]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프랑스 제1군은 로렌을 침공했지만, 독일 제6군의 반격으로 사르부르 전투와 모랑주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퇴각했다. 로렌은 계엄령 상태로 서부 전선과 가까웠으며, 전쟁 기간 동안 난민 위기에 시달렸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로렌 영토의 일부를 포함하여 심각한 영토 손실을 겪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한 가우 베스트마르크의 일부로 사실상 합병된 경우를 제외하고, 그 지역은 이후 프랑스의 일부로 남아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로렌 십자는 샤를 드골 휘하의 자유 프랑스군 (프랑스어: ''Forces Françaises Libres'', 또는 FFL)의 공식 상징으로 채택되었다. 조르주 티에리 다르장리외는 자유 프랑스의 상징으로 로렌 십자를 채택할 것을 제안했다.[10]
1940년 7월 3일의 일반 명령 제2호에서, 자유 프랑스 해군 및 공군 사령관이었던 에밀 뮈슬리에 부제독은 로렌 십자가 새겨진 빨간색 프랑스 국기와 로렌 십자가 특징인 코케이드를 묘사하는 선수기(bow flag)를 만들었다.[11]
샤를 드골은 그의 고향인 콜롬베이레되제글리즈에 44.3m 높이의 거대한 로렌 십자가 세워져 기념되고 있다.
4. 1. 언어
로렌의 대부분은 프랑스 정체성이 뚜렷하지만, 오늘날 모젤로 알려진 지역의 북동부 지역은 예외인데, 이곳은 역사적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있었다.1871년, 비스마르크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의 결정적인 승리 이후 오늘날 로렌의 약 3분의 1을 새로운 독일 제국 연방에 병합했다. 이 분쟁 지역은 프랑스인과 독일인 모두로 분류하기 어려운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로망스어와 독일어 방언이 모두 사용되기 때문이다. 많은 국경 지역과 마찬가지로 로렌은 표준 프랑스어 또는 독일어와 상호 이해가 불가능한 민족과 방언의 혼합 지역이었다 (모젤의 언어 경계 참조).
전통적으로 로렌에는 두 개의 고유 언어가 있다. 첫 번째는 로렌 남동부에서 사용되는 쇠퇴하는 소수 로망스어인 로렌어이다. 두 번째는 로렌 북부와 서부에서 독립적으로 살아남은 세 개의 프랑코니아어 방언 집단인 로렌 프랑코니아어의 독일어 방언이다. 이들은 프랑코니아어에서는 ''Plàtt'', 프랑스어에서는 ''francique'' 또는 ''platt (lorrain)''으로 통칭된다 (로망스어인 로렌어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 현재 주로 시골 지역에 고립되어 있지만, 이 방언들은 지역에 따라 점차적으로 차이를 보이지만 상호 이해가 가능하다. 로렌 프랑코니아어는 남쪽의 인접한 알자스어와는 다르지만, 이 둘은 종종 혼동된다. 이들 중 어느 것도 사용되는 곳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갖지 못하지만, 알자스어가 훨씬 더 널리 사용된다.
기술적으로, 로렌 프랑코니아어는 역사적으로 룩셈부르크어, 모젤 프랑코니아어, 라인 프랑코니아어의 세 가지 방언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각각은 독일 인접 라인란트에서 사용되는 동일한 방언과 동일하다.
프랑스 언어의 대부분 (예: 바스크어, 브르타뉴어, 서플랑드르어, 카탈루냐어, 프로방스어, 그리고 인접한 로렌 방언과 유사한 알자스어)과 마찬가지로 로렌어와 로렌 프랑코니아어는 프랑스어 사용으로 대체되었다. 1세기 이상 동안, 중앙 정부의 민족주의 정책은 공립 학교에서 프랑스어만 사용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현재 로렌 프랑코니아어의 언어적 생명력이 여전히 비교적 높기 때문에 이를 부활시키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의 노력에는 프랑코니아어 사용 지역의 이중 언어 표지판 사용과, 더 이상 조상의 언어를 구사할 수 없는 부모를 둔 어린이를 위한 프랑코니아어 수업이 포함된다.
4. 2. 종교
로렌은 로마 가톨릭 전통을 강하게 간직하고 있다. 거의 모든 마을에 오래된 성당이 있으며, 전담 사제가 없는 경우도 많다. 전통적으로 성당 종은 삼종기도 시간을 알리고, 시간을 알리는 역할도 한다. 부활절 전 성주간에는 종을 울리지 않고, 대신 마을 아이들이 래칫을 연주하며 C'est l'Angélus!|세 랑젤뤼스!프랑스어 (한국어로 '삼종기도 시간이다!')라고 외친다. 부활절 후에는 아이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봉사에 대한 작은 선물을 받는다.[10][11]신터클라스는 로렌에서 "생 니콜라"로 불리며 기념된다. 매년 15만 명 이상이 낭시 거리에서 신터클라스를 축하하며, 이 지역 전체에서 많은 사람이 모인다.
4. 3. 건축
보주산맥의 흩어진 정착지를 빼면, 전통 농가는 연결된 집들이 선형 마을을 이루는 형태를 보인다. 이 집들은 도로에서 꽤 멀리 떨어져 지어졌다. 집과 도로 사이는 l'usoir|우소아프랑스어라고 불렀다. 1970년대까지 우소아는 농기구, 장작, 퇴비 등을 보관하는 곳으로 쓰였다. 오늘날 이곳은 보통 정원이나 주차장으로 사용된다.가구는 30년 전쟁 이후 "로렌 스타일"이라는 특징적인 정체성을 발전시켰다.[1]
4. 4. 음식
로렌 지역에서 감자의 사용은 16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수입된 감자는 '포테 로렌'과 같이 이 지역의 다양한 전통 요리에 사용되었다. 브뢰 마을의 이름을 딴 브뢰 감자는 이 지역의 완벽한 재배 조건으로 인해 품질이 뛰어난 것으로 여겨진다.훈제 베이컨 또한 로렌 지역 요리의 전통적인 재료이며, 키슈 로렌을 포함한 이 지역의 다양한 전통 요리에 사용된다. 로렌의 미라벨 자두는 파이 및 기타 디저트뿐만 아니라 알코올 음료에도 사용되는 로렌의 대표적인 과일이다.
이 지역의 전통 요리는 다음과 같다.
- 키슈 로렌
- 파테 로렌(돼지고기와 송아지 고기를 다져서 화이트 와인으로 맛을 내고 페이스트리 안에 구운 요리)
- 포테 로렌(훈제 고기와 소시지, 양배추, 감자 및 기타 뿌리 채소로 만든 스튜)
- 안두이유(트라이프 소시지)
로렌의 전통 치즈에는 카레 드 레스트, 브루에르, 뮌스터-제롬, 투레 드 로비에가 있다.
이 지역의 디저트에는 마들렌, 마카롱, 럼 바바, 플롱비에르 아이스크림, 다양한 파이 레시피(''브림벨'' 블루베리, ''미라벨'' 자두, 루바브, 퀘르크...)가 있다. 크리스마스토렌 또한 크리스마스 시즌 동안 로렌 지역에서 인기가 있다.[13]
이 지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와인은 코트 드 툴(Côtes de Toul)이다. 모젤 계곡, 세유 계곡, 메츠 계곡, 시에르크 계곡에 포도원이 있다. 역사적으로 로렌은 많은 양조장이 있던 곳이다. 1897년 6월 20일에 설립된 샹피뉴 양조장은 마지막으로 남은 대규모 양조장이다. 2016년에는 크로넨부르크 다음으로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양조장이었다.[14]
4. 5. 로렌 십자
로렌 십자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로렌 십자는 샤를 드골 휘하의 자유 프랑스군 (프랑스어: ''Forces Françaises Libres'', 또는 FFL)의 공식 상징으로 채택되었다. 조르주 티에리 다르장리외는 자유 프랑스의 상징으로 로렌 십자를 채택할 것을 제안했다.[10]
1940년 7월 3일의 일반 명령 제2호에서, 자유 프랑스 해군 및 공군 사령관이었던 에밀 뮈슬리에 부제독은 로렌 십자가 새겨진 빨간색 프랑스 국기와 로렌 십자가 특징인 코케이드를 묘사하는 선수기(bow flag)를 만들었다.[11]
샤를 드골은 그의 고향인 콜롬베이레되제글리즈에 44.3m 높이의 거대한 로렌 십자가 세워져 기념되고 있다.
5. 경제
로렌은 2000년 기준 440억 유로의 경제 규모로 프랑스 GDP의 3.4%를 차지한다. 인구 순위는 11위이지만, GDP 순위는 프랑스 22개 레지옹 중 8위로, 알자스 및 일 드 프랑스(파리)와 함께 1인당 GDP가 높은 경제 생산 지역에 속한다. 물류 및 서비스 부문이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강력한 성장을 보였다. 전통 산업(섬유, 광업, 야금)은 구조 조정과 일부 일자리의 해외 이전에 따라 쇠퇴했다. 그 결과, 이 지역은 실업률 증가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실업률은 여전히 전국 평균보다 낮다. 1997년 로렌의 마지막 철광석 광산이 폐쇄되었는데, 이 광산은 한때 5천만 톤 이상의 철을 생산했다.[16]
6. 행정 구역
로렌 행정 구역은 18세기 로렌 공국보다 더 넓으며, 로렌 공국은 1737년과 1766년 사이에 점차 프랑스 주권 아래로 들어갔다. 현대의 로렌 지역은 레지옹과 역사적으로 로렌 공국과는 별개였던 지역을 포함한다. 이들은 다음과 같다.
- 바로아
- 세 주교령: 메스, 베르됭, 툴 주변의 비연속적인 영토로, 16세기에 신성 로마 제국에서 분리되어 프랑스 주권 아래로 들어갔다.
- 프랑스 혁명 당시에도 여전히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던 몇 개의 작은 공국들.
바로아의 경우는 가장 복잡하다. 바로아의 서부(뫼즈강 서쪽)는 '바로아 무방'으로 알려졌으며, 14세기 초에 나머지 바로아에서 분리되어 프랑스 주권에 편입되었다. 바로아의 가장 큰 부분(뫼즈강 동쪽)은 바 공국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다. 15세기에 바 공작 앙주의 르네와 이사벨라 로렌 공작의 딸의 결혼으로 로렌 공국과 통합되었다. 따라서 바 공국과 로렌 공국은 같은 공작 아래 개인 연합으로 통합되었지만, 1766년 프랑스 왕국에 병합되기 전까지 공식적으로는 별개의 국가였다.
프랑스 혁명 동안 바로아, 세 주교령 및 로렌 공국의 주요 영토에서 4개의 도가 만들어졌다.
- 뫼즈
- 뫼르트
- 모젤
- 보주
1870년 이후 ''모젤''과 ''뫼르트''의 일부는 독일령이 되었다. 나머지 부분에서 프랑스는 뫼르트-에-모젤이라는 새로운 도를 형성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는 다시 ''모젤''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다.
프랑스가 20세기 중반에 행정 구역을 만들었을 때, ''뫼르트-에-모젤'', ''뫼즈'', ''모젤'' 및 ''보주''를 로렌이라는 단일 레지옹으로 묶기로 결정했다. 현재도 특히 모젤 주 등에는 독일인을 포함한 독일계 주민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7. 주요 도시
도시명 | 주(州) |
---|---|
에피날 | 보주 주 |
포르바크 | 모젤 주 |
뤼네빌 | 뫼르트-에-모젤 주 |
메스 | 모젤 주 |
몽티니레메스 | 모젤 주 |
낭시 | 뫼르트-에-모젤 주 |
생디에데보주 | 보주 주 |
사르그민 | 모젤 주 |
방되브르레낭시 | 뫼르트-에-모젤 주 |
티옹빌 | 모젤 주 |
현재도 특히 모젤 주 등에는 독일인을 포함한 독일계 주민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8. 저명한 인물
- 자크 칼로 (1592–1635)
- 클로드 로랭 (1600–1682)
- 에밀 에르크만 (1822–1899)
- 알렉상드르 샤트리앙 (1826–1890)
- 폴 베를렌 (1844–1896)
- 에밀 쥘 갈레 (1846–1904)
- 쥘 바스티앙-르파주 (1848–1884)
- 외젠 발랭 (1856–1922)
- 에밀 뒤르켐 (1858–1917)
- 빅토르 프루베 (1858–1943)
- 루이 마조렐 (1859–1926)
- 뤼시앙 바이센부르거 (1860–1929)
- 에밀 프리앙 (1863–1932)
- Paul Charbonnier|폴 샤르보니에프랑스어 (1865–1953)
- 앙리 베르제 (1870–1937)
- 자크 그뤼베르 (1870–1936)
- 에밀 앙드레 (1871–1933)
- 장마리 스트로브 (1933–)
- 베르나르-마리 콜테스 (1948–1989)
- 필립 클로델 (1962–)
- 조르주 드 라 투르 (1593–1652)
- Albert Bergeret|알베르 베르제레프랑스어 (1859–1932)
- 오귀스트 돔 (1853–1909) 및 Antonin Daum|앙토냉 돔프랑스어 (1864–1930)
- 고드프루아 드 부용 (1060–1100)
- 조르주 무통 (1770–1838)
- 장바티스트 에블레 (1758–1812)
- 니콜라 우디노 (1767–1848)
- 조제프 레오폴드 시지스베르트 위고 (1774–1828)
- 루이 위베르 리오테 (1854–1934)
- 샤를 망쟁 (1866–1925)
- 플로랑 슈미트 (1870–1958)
- 대리 코울 (1925–2006)
- 샤를렐리 쿠튀르 (1956–)
- 톰 노벰브르 (1959–)
- 파트리샤 카스 (1966–)
- 피에르 루이 로에데레 (1754–1835)
- 쥘 페리 (1832–1893)
- 레몽 푸앵카레 (1860–1934)
- 모리스 바레스 (1862–1923)
- 알베르 르브룅 (1871–1950)
- 로베르 쉬망 (1886–1963)
- 자크 랑 (1939–)
- 크리스티앙 퐁슬레 (1928–) (프랑스 정치인, 상원 의장 1998–2008)
- 오렐리 필리페티 (1973–)
- 브루노 다게스하임-다그스부르크 (1002–1054)
- 앙리 그레고르 (1750–1831)
- 잔 다르크 (1412–1431)
- 브누아 드 마이에 (1656–1738)
- 샤를 메시에 (1730–1817)
- 장 프랑수아 필라트르 드 로지에 (1757–1785)
- 장 빅토르 퐁슬레 (1788–1867)
- 샤를 에르미트 (1822–1901)
- 에드몽 라게르 (1834–1886)
- 앙리 푸앵카레 (1854–1912)
- 마리 마르뱅 (1875–1963)
- 루이 카미유 마이야르 (1878–1936)
- 위베르 퀴리앙 (1924–2005)
- 미셸 플라티니 (1955–)
- 파트리크 바티스톤 (1957–)
- 모건 파라 (1988–)
- 앙투안 드 빌|앙투안 드 빌 (대위)프랑스어 (1450–1523)
- 레이몽 슈바르츠 (1894–1973)
- 아타나스-에밀 형제 (1880–1952)
- 니콜라 쇼팽 (1771–1844)
- 피에르 가소트 (1895–1982)
참조
[1]
웹사이트
EU regions by GDP, Eurostat
https://ec.europa.eu[...]
2023-09-18
[2]
문서
Lorraine
[3]
법률
relative à la délimitation des régions, aux élections régionales et départementales et modifiant le calendrier électoral
http://www.legifranc[...]
2015-01-16
[4]
법률
Gesetz, betreffend die amtliche Geschäftssprache
Gesetzblatt für Elsaß-Lothringen
1872-03-31
[5]
법률
Gesetz, betreffend das Unterrichtswesen
Gesetzblatt für Elsaß-Lothringen
1873-02-12
[6]
문서
The 'Law concerning the official transaction language'
[7]
서적
Bismarck: Der Reichskanzler
Beck
[8]
법률
Gesetz über die Verfassung Elsaß-Lothringens
http://www.verfassun[...]
2013-04-24
[9]
문서
Such as replacing French pronunciation spellings of the local dialects to standard High German orthography
[10]
서적
The First World War
http://archive.org/d[...]
Pearson Longman
[11]
웹사이트
Alsace-Lorraine
https://encyclopedia[...]
2022-07-03
[12]
논문
The rise of macropredatory pliosaurids near the Early-Middle Jurassic transition
2023-10-16
[13]
웹사이트
Stollen et brioche de Noël : Mamie fait de la résistance
https://www.republic[...]
[14]
웹사이트
Champigneulles brasse très fort
https://www.estrepub[...]
2021-05-27
[15]
웹사이트
Marche de Noel Fêtes: Saint Nicolas
http://www.lorrainea[...]
[16]
간행물
Iron Ore in 1997
http://minerals.usgs[...]
United States Geological Survey, Dept. of Interior
[17]
서적
Place, Culture, and Identity: Essays in Historical Geography in Honour of Alan R.H. Baker
Presses Université Laval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