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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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류큐국은 1429년 쇼하시왕의 삼산 통일로 건국된 왕국이다. 14세기부터 오키나와 일대에 츄잔, 호쿠잔, 난잔으로 나뉘어 산산 시대를 겪었다. 류큐는 명나라의 조공국으로서 중계 무역으로 번성했으며,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등과 교류했다. 1609년 사쓰마 번의 침공으로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청나라와 이중 조공 관계를 유지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했다. 1879년 류큐 처분으로 일본에 병합되어 오키나와현이 되었다. 류큐는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언어, 종교,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특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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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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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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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상징 | "왕실 인장:" "[[File:Seal of the Ryukyu Kingdom.svg|85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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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이시나구의 노래 |
명칭 | |
현지 이름 | }} |
기타 언어 표기 | "중국어: , " "한문: ()" |
역사적 영어 이름 | Lew Chew Lewchew Luchu Loochoo |
역사적 프랑스 이름 | Liou-tchou |
역사적 네덜란드 이름 | Lioe-kioe |
국가 | |
존속 기간 | 1429년 – 1879년 |
수도 | 슈리 |
공용어 | 류큐어 (토착어) 한문 고전 일본어 |
종교 | 류큐 신앙 (국교) 신토 불교 유교 도교 |
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역대 국왕 | 쇼하시 (1429–1439) 쇼신 (1477–1526) 쇼네이 (1587–1620) 쇼타이 (1848–1879) |
국왕 칭호 | 국왕 )}} |
섭정 | 쇼 쇼켄 (1666–1673) 사이온 (1751–1752) |
섭정 칭호 | Sessei )}} 국사 )}} |
입법부 | 슈리 내각 (), 산시칸 () |
역사 | |
주요 사건 | 통일 (1429년) 사쓰마 침공 (1609년 4월 5일) 류큐 번 설치 (1872년) 일본에 합병 (1879년 3월 27일) |
이전 국가 | 호쿠잔 츄잔 난잔 |
이후 국가 | 일본 제국 사쓰마 번 류큐 번 |
속국 관계 | 명나라의 조공국 (1429–1644) 남명의 조공국 (1644–1646) 청나라의 조공국 (1646–1875) 사쓰마 번의 봉신국 (1609–1872) 일본 제국의 봉신국 (1872–1879) |
경제 | |
통화 | 류큐, 중국, 일본 문 동전 |
현재 | |
현재 국가 | 일본 |
인구 | |
데모님 | 류큐인 |
2. 역사
14세기부터 오키나와 일대에는 왕권이 약해지고 각지에 왕을 자처하는 안지(지방호족)들이 생기면서 츄잔(中山), 호쿠잔(北山), 난잔(南山)의 삼산 시대가 시작되었다.[1] 이 세 나라는 츄잔의 쇼하시왕에 의해 통일되어 류큐국이 세워졌다.[1] 고려시대 삼별초가 1273년(원종 14년)에 제주도에서 몽골군에 패한 후 고려가 류큐국을 건국했다는 설도 있다.[1]
1429년, 제2대 쇼하시왕(尚巴志王일본어)의 '''삼산통일'''(三山統一)로 류큐국이 건국되었다. 쇼하시왕은 삼산통일을 통해 류큐국을 만들었지만, 지방의 안지는 여전히 강하였고 중앙집권적인 왕이 등장하지는 못하였다. 쇼하시왕의 죽음 이후 왕권은 미약하고 내란이 끊이지 않는 등, 류큐국은 불안한 치세를 이어갔다.
쇼토쿠 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쇼타이큐 왕의 중신이었던 카나마루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는 쇼엔 왕을 자칭하며 제2쇼씨 왕조를 열었다.[94] 제2쇼씨 왕조 시기에 류큐는 일본, 조선,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여러 왕조들과도 무역을 하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명나라가 활발하게 무역을 재개하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세력이 커지면서 류큐의 세력은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1609년 일본 전국시대가 끝나고 지역정권인 사쓰마번이 류큐 침공을 해왔고, 슈리성이 함락되었다. 오키나와섬 북동부의 류큐 열도를 빼앗기고 일본의 조공국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류큐는 청과 일본에 이중 조공을 하면서 다시 중계무역으로 번성했다.[94] 류큐국은 "중국은 우리의 아버지이고 일본은 우리의 어머니이다."라는 식으로 외교 노선을 설정하여, 중국과 일본 양쪽에 모두 조공을 바치면서 독립을 유지했다.[94]
18세기 말부터 류큐국의 경제가 악화되어 혼란스러워졌으며, 19세기 중엽 서양 세력이 청과 일본에 개항 압력을 가하면서 류큐는 중계 무역 거점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다.
1872년, 메이지 천황은 류큐국을 일방적으로 류큐 번으로 선언했다.[21] 메이지 정부는 1879년 3월 27일 류큐 왕국을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하여 폐지할 때까지 외교적 이유로 청나라와의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했다.[23]
일본은 1879년 3월 27일에 경찰과 군인 등 약 600명을 동원해 무력적 위압 상태에서 '류큐 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한다'는 식의 폐번치현 명령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8일 후인 4월 4일에 일본 영토로 편입시켜 오키나와현을 설치하였다.[94] 류큐국의 쇼타이왕은 일본 메이지 정부에 의해 강제로 도쿄에 이주당해 후작에 봉해지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류큐국이 조선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97] 조선은 1416년(태종 16년), 류큐국에 이예를 '유구국통신관'이라는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1430년대에는 류큐와 조선 사이의 뱃길에 왜구가 자주 나타나고, 조선에 와서 류큐국 국사(國使)라고 사칭하는 일본 상인이 있었다는 위사(僞使)문제가 생겨 그 뒤로는 중국을 통한 간접 교류로 바뀌게 된다.[98]
임진왜란에 앞서, 일본은 조선에 명나라를 칠 수 있도록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반면, 명은 조선이 일본과 협력하여 명을 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조선은 이를 해명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는데, 이때 류큐국 사신이 일본의 침략 준비에 대해 같은 내용을 알려 오해가 풀리게 되었다. 명은 이에 조선, 류큐국, 섬라(暹羅: 지금의 타이)와 함께 일본을 정벌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이 먼저 조선을 침략하였다.[99]
대한제국 고종은 수신사 김홍집을 접견할 때 류큐국이 일본에 편입되었음을 알게 되었다.[100]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이승만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은 류큐국에 대해서 "그들도 자주독립의 의지를 확고히 하고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2. 1. 건국 이전
14세기부터 오키나와 일대에는 왕권이 약해지고 각지에 왕을 자처하는 안지(지방호족)들이 생기면서 츄잔(中山), 호쿠잔(北山), 난잔(南山)의 삼산 시대가 시작되었다.[1] 세 나라는 츄잔의 쇼하시왕에 의해 통일되어 류큐국이 세워졌다.[1]고려시대 삼별초가 1273년(원종 14년)에 제주도에서 몽골군에 패한 후 고려가 류큐국을 건국했다는 설도 있다.[1]
이 시기에 많은 중국인들이 정부를 섬기거나 사업을 하기 위해 류큐로 이주했다.[1] 류큐 국왕의 요청에 따라, 명나라는 홍무제 통치 기간인 1392년에 푸젠성에서 36개의 중국 가문을 파견하여 왕국에서 해양 거래를 관리하게 했다.[1] 이들 중국 이민자들의 후손은 류큐 관료가 되거나, 류큐인들의 기술과 외교 관계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1]
1406년 1월 30일, 영락제는 류큐인들이 명나라 황궁에서 시중을 들일 환관이 되도록 자신의 아이들을 거세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1] 영락제는 거세된 소년들이 무죄이며 거세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그들을 류큐로 돌려보냈으며, 왕국에 다시 환관을 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1]
2. 2. 제1쇼씨 왕조 (第一尚氏王統)
1429년, 제2대 쇼하시왕(尚巴志王일본어)의 '''삼산통일'''(三山統一)로 류큐국이 건국되었다.14세기부터 오키나와섬 일대에는 왕권이 약해지고 각지에 왕을 자처하는 안지(지방호족)들이 생기면서 츄잔(中山), 호쿠잔(北山), 난잔(南山)의 산잔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세 나라는 츄잔의 쇼하시왕에 의해 통일되어 류큐국이 되었다.
쇼하시왕은 삼산통일을 통해 류큐국을 만들었지만, 지방의 안지는 여전히 강하였고 중앙집권적인 왕이 등장하지는 못하였다. 쇼하시왕의 죽음 이후 왕권은 미약하고 내란이 끊이지 않는 등, 류큐국은 불안한 치세를 이어갔다.
14세기에 오키나와섬에 흩어져 있던 작은 영토들은 호쿠잔(北山), 추잔(中山), 난잔(南山)의 세 개의 주요 공국으로 통일되었다. 이는 산잔 시대(三山)라고 알려졌다. 호쿠잔은 섬 북쪽 절반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면적과 군사력 면에서 가장 컸지만, 경제적으로는 셋 중에서 가장 취약했다. 난잔은 섬의 남쪽 부분을 구성했다. 추잔은 섬의 중앙에 위치했으며 경제적으로 가장 강했다. 슈리에 위치한 추잔의 정치적 수도는 주요 항구인 나하와 전통적인 중국 교육의 중심지인 구메무라와 인접해 있었다.
이 세 개의 공국 (주요 족장들이 이끄는 부족 연맹)은 전투를 벌였고, 추잔이 승리했다. 추잔의 지도자들은 명나라에 의해 난잔과 호쿠잔의 왕으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고, 이는 그들의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추잔의 통치자는 그의 왕위를 쇼 하시 왕에게 넘겨주었다. 하시 왕은 1416년에 호쿠잔을 정복하고 1429년에 난잔을 정복하여 오키나와 섬을 처음으로 통일하고, 제1 쇼 왕조를 창건했다. 하시는 1421년 명나라 황제로부터 "쇼" (c=尚|p=Shàng|links=no중국어)라는 성을 하사받아 쇼 하시 (c=尚巴志|p=Shàng Bāzhì|links=no중국어)로 알려지게 되었다.[1]
쇼 하시는 중국의 계층적 궁정 제도를 채택하고 슈리성과 마을을 자신의 수도로 건설했으며, 나하 항구를 건설했다.
2. 3. 제2쇼씨 왕조 (第二尚氏王統)
쇼토쿠 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쇼타이큐 왕의 중신이었던 카나마루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는 쇼엔 왕을 자칭하며 제2쇼씨 왕조를 열었다.[94] 제2쇼씨 왕조 시기에 류큐는 일본, 조선,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여러 왕조들과도 무역을 하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명나라가 활발하게 무역을 재개하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세력이 커지면서 류큐의 세력은 급격하게 쇠퇴하였다.류큐 왕국은 약 200년 동안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번성했다.[12] 왕국의 해상 활동은 1372년 츄잔이 시작한 명나라와의 조공 관계를 지속하는 것에 기반을 두었다.[13] 중국은 류큐의 해상 무역 활동에 선박을 제공했으며,[13] 소수의 류큐인들이 베이징의 국자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또한 츄잔 왕의 권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왕국이 명나라 항구에서 공식적으로 무역할 수 있도록 하였다. 류큐의 선박은 중국, 대월 (베트남), 일본, 자바, 조선, 루손, 말라카, 파타니, 팔렘방, 샴, 수마트라 등 다양한 지역의 항구에서 무역을 진행했다.[13]
일본 제품인 은, 칼, 부채, 옻칠 제품, 병풍과 중국 제품인 약초, 주조된 동전, 유약을 바른 도자기, 비단, 직물 등은 왕국 내에서 동남아시아의 소목, 코뿔소 뿔, 주석, 설탕, 철, 용연향, 인도 상아, 아라비아 유향과 교환되었다. 류큐 왕국이 편찬한 외교 문서 공식 기록인 ''역대보안''에는 1424년부터 1630년대까지 류큐 선박으로 왕국과 동남아시아 간에 총 150번의 항해가 기록되었으며, 그 중 61번은 샴으로, 10번은 말라카로, 10번은 파타니로, 8번은 자바로 향했다.
중국은 조공 국가와 공식적인 허가를 받은 국가로 중국과의 무역을 제한하는 정책인 ''해금''(海禁)을 시행했고, 명나라 조정은 류큐에 대한 특혜를 제공하여 왕국은 약 150년 동안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왕국의 상업적 번영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왜구의 위협 증가 등의 요인으로 인해 중국의 특혜가 점차 사라졌으며, 왕국은 또한 포르투갈 상인들과의 해상 경쟁 심화로 어려움을 겪었다.
2. 4. 일본의 류큐 침공과 이중 속국 시대
1609년 일본 전국시대가 끝나고 지역정권인 사쓰마번이 류큐 침공을 해왔고, 슈리성이 함락되었다. 오키나와섬 북동부의 류큐 열도를 빼앗기고 일본의 조공국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류큐는 청과 일본에 이중 조공을 하면서 다시 중계무역으로 번성했다.[94] 류큐국은 "중국은 우리의 아버지이고 일본은 우리의 어머니이다."라는 식으로 외교 노선을 설정하여, 중국과 일본 양쪽에 모두 조공을 바치면서 독립을 유지했다.[94]1590년경,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류큐 왕국에 자신의 조선 정복 전쟁 지원을 요청했지만, 류큐 왕국은 명나라의 조공국이었기 때문에 거부했다. 히데요시의 몰락 이후 등장한 도쿠가와 막부는 사쓰마 번의 다이묘인 시마즈씨에게 류큐 정복을 위한 원정군 파견을 승인했다. 류큐 침공은 1609년에 일어났지만, 사쓰마는 류큐 왕국이 일본과 중국에 "이중 종속" 상태에 놓이도록 허용했다. 류큐는 도쿠가와 막부와 중국 조정 모두에 조공 관계를 유지했다.[14]
쇼 네이 국왕은 가고시마를 거쳐 에도 (오늘날의 도쿄)로 끌려갔다. 청나라가 일본에 대한 군사적 행동을 할 이유를 주지 않기 위해 국왕은 2년 후 풀려났고, 류큐 왕국은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회복했다.[14] 그러나 사쓰마 번은 류큐 왕국의 일부 영토, 특히 아마미오시마 섬을 점령하여 사쓰마 번에 편입시켰고, 현재까지 오키나와현이 아닌 가고시마현에 속해 있다.
1655년, 류큐와 청나라 사이의 조공 관계는 막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14] 명나라가 일본과의 무역을 금지했기 때문에, 사쓰마 번은 도쿠가와 막부의 허락을 받아 류큐 왕국의 무역 관계를 이용하여 중국과의 무역 관계를 유지했다. 에도에 파견된 류큐 사절단은 도쿠가와 쇼군을 위한 것이었다.
류큐 국왕은 1609년 시마즈의 류큐 침공 이후 사쓰마 ''다이묘''의 가신이었다. 사쓰마 씨족은 1628년 슈리에 ''자이반카야''(在番仮屋) 또는 ''우후카이야''(大仮屋)로 알려진 정부 사무소 지부를 설립하여 1872년까지 250년 동안 류큐 지배의 기지가 되었다.[17] 그러나 왕국은 어떤 ''번'' (영지)의 일부로 간주되지 않았다. 1879년 공식적인 섬 병합과 왕국 폐지까지 류큐는 실제로 에도 일본의 ''de jure'' 일부로 간주되지 않았다. 일본은 중국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이 류큐가 일본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사쓰마와 막부는 류큐를 가능한 한 독특하고 외국적인 국가로 보이게 했다. 일본인은 막부의 허가 없이는 류큐를 방문할 수 없었고, 류큐인은 일본식 이름, 옷 또는 관습을 채택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사쓰마의 ''다이묘''인 시마즈 가문은 류큐의 국왕, 관리 및 기타 사람들을 에도에 데려오고 행진시키는 쇼를 벌임으로써 큰 명성을 얻었다.
청나라의 황실 관리 이홍장은 율리시스 S. 그랜트와의 회담에서 류큐가 수백 년 동안 중국에 조공을 바치며 섬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고, 중국은 우호적이고 유익한 관계에서 그들을 위해 특정 무역 권리를 보류했다고 진술했다.[20] 일본은 1874년의 조공 사절단이 중국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인식된 후 1875년 조공 관계를 종료하라고 명령했다.
2. 5. 근대 류큐와 류큐 처분
18세기 말부터 류큐국의 경제가 악화되어 혼란스러워졌으며, 19세기 중엽 서양 세력이 청과 일본에 개항 압력을 가하면서 류큐는 중계 무역 거점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다.1872년, 메이지 천황은 류큐국을 일방적으로 류큐 번으로 선언했다.[21] 메이지 정부는 1879년 3월 27일 류큐 왕국을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하여 폐지할 때까지 외교적 이유로 청나라와의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했다.[23] 사쓰마 번에 통합되었던 아마미오시마 열도는 가고시마현의 일부가 되었다.
일본은 1879년 3월 27일에 경찰과 군인 등 약 600명을 동원해 무력적 위압 상태에서 '류큐 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한다'는 식의 폐번치현 명령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8일 후인 4월 4일에 일본 영토로 편입시켜 오키나와현을 설치하였다.[94] 류큐국의 쇼타이왕은 일본 메이지 정부에 의해 강제로 도쿄에 이주당해 후작에 봉해지게 된다. 이 사건으로 청나라와 일본 제국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류큐의 마지막 국왕은 도쿄로 강제 이주되었으며, 쇼 타이 후작으로 화족 작위를 받았다.[24] 많은 왕당파 지지자들이 중국으로 도망갔다.[26]
2. 6. 대한민국과 류큐 열도
조선왕조실록에는 류큐국이 조선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97] 조선은 1416년(태종 16년), 류큐국에 이예를 '유구국통신관'이라는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이예는 왜구에게 잡혀 류큐에 팔려간 조선인 44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1430년대에는 류큐와 조선 사이의 뱃길에 왜구가 자주 나타나고, 조선에 와서 류큐국 국사(國使)라고 사칭하는 일본 상인이 있었다는 위사(僞使)문제가 생겨 그 뒤로는 중국을 통한 간접 교류로 바뀌게 된다.[98]류큐국 사람들이 제주도나 경상도에 표류하였다는 기록이 여럿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인도적으로 대우하여 돌려보내졌다. 반대로 제주도 주민이 류큐국 영역까지 간 일도 있었다. 1477년(성종 8년) 귤을 진상하려던 사람들의 배가 풍랑을 만나 류큐국의 요니구시 섬에 도착했다. 류큐 왕국은 표류민들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어 1479년에 염포(현재의 울산 방어진)로 도착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에 앞서, 일본은 조선에 명나라를 칠 수 있도록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반면, 명은 조선이 일본과 협력하여 명을 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조선은 이를 해명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는데, 이때 류큐국 사신이 일본의 침략 준비에 대해 같은 내용을 알려 오해가 풀리게 되었다. 명은 이에 조선, 류큐국, 섬라(暹羅: 지금의 타이)와 함께 일본을 정벌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이 먼저 조선을 침략하였다.[99]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과 그 길목에 있는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류큐에 협조할 것을 명령했으나, 류큐는 명나라의 책봉국이었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였으며, 역으로 명에게 일본을 칠 것을 제안하였다.
대한제국 고종은 수신사 김홍집을 접견할 때 류큐국이 일본에 편입되었음을 알게 되었다.[100]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이승만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은 류큐국에 대해서 "그들도 자주독립의 의지를 확고히 하고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3. 정치 및 행정
류큐국의 중앙 정치 기구는 수리왕부라고 불렸으며, 가장 중요한 정책 결정 기관은 평정소(評定所)였다. 평정소의 수장은 섭정이라고 불렸고, 실무를 담당하는 3명의 실력자를 삼사관이라고 불렀다.[95]
4. 대외 관계
류큐국은 일본, 조선,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여러 왕조와도 무역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명나라가 무역을 재개하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세력이 커지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1609년 일본 사쓰마번의 류큐 침공으로 오키나와섬 북동부의 류큐 열도를 빼앗기고 일본의 조공국이 되었으나, 이후 청나라와 일본에 이중 조공을 하면서 중계 무역으로 다시 번성했다.[94]
류큐국은 "중국은 우리의 아버지이고 일본은 우리의 어머니이다."라는 외교 노선을 설정하여 중국과 일본 양쪽에 모두 조공을 바치면서 독립을 유지했다.[94] 그러나 18세기 말부터 경제가 악화되었고, 19세기 중엽 서양 세력이 청나라와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면서 중계 무역 거점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1879년 3월 27일 일본은 경찰과 군인 약 600명을 동원해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한다'는 폐번치현 명령을 전달하고, 4월 4일 일본 영토로 편입시켜 오키나와현을 설치하였다.[94] 류큐국의 쇼타이왕은 일본 메이지 정부에 의해 도쿄로 강제 이주당해 후작에 봉해졌다. 이 사건으로 청나라와 일본 제국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4. 1. 명나라
14세기에 오키나와섬에 흩어져 있던 작은 영토들은 호쿠잔(北山), 추잔(中山), 난잔(南山)의 세 공국으로 통일되었다. 이 시기를 삼산 시대라고 한다. 1429년, 쇼 하시 왕이 세 공국을 통일하고 제1 쇼 왕조를 세우면서 류큐 왕국이 성립되었다.[12]류큐 왕국은 명나라와 조공 관계를 맺고,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다. 1372년 추잔이 명나라와 조공 관계를 시작한 이래, 난잔과 호쿠잔도 각각 1380년과 1383년에 조공 관계를 맺었다.[12] 명나라는 류큐의 해상 무역 활동에 선박을 제공하고,[13] 소수의 류큐인들이 베이징의 국자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추잔 왕의 권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왕국이 명나라 항구에서 공식적으로 무역할 수 있도록 했다.
1392년에는 명나라 홍무제가 푸젠성 출신의 36개 가문을 류큐에 파견하여 해상 거래를 관리하게 했다. 이들은 류큐의 기술과 외교 관계 발전에 기여했다.
류큐 왕국은 명나라와의 조공 관계를 통해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번성했다.[12] 류큐의 선박은 중국, 대월 (베트남), 일본, 자바, 한국, 루손, 말라카, 파타니, 팔렘방, 샴, 수마트라 등지의 항구에서 무역을 했다.[13] 일본의 은, 칼, 부채, 옻칠 제품, 병풍과 중국의 약초, 주조된 동전, 유약을 바른 도자기, 비단, 직물 등은 동남아시아의 소목, 코뿔소 뿔, 주석, 설탕, 철, 용연향, 인도 상아, 아라비아 유향과 교환되었다. 류큐 왕국이 편찬한 외교 문서 공식 기록인 ''역대보안''에는 1424년부터 1630년대까지 류큐 선박으로 왕국과 동남아시아 간에 총 150번의 항해가 기록되었으며, 그 중 61번은 샴으로, 10번은 말라카로, 10번은 파타니로, 8번은 자바로 향했다.
명나라는 조공 국가와 공식적인 허가를 받은 국가로 중국과의 무역을 제한하는 정책인 ''해금''(海禁)을 시행했지만, 류큐에 대한 특혜를 제공하여 왕국은 약 150년 동안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13]
4. 2. 청나라
1655년, 류큐국과 청나라 사이의 조공 관계는 막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이는 청나라가 일본에 대한 군사적 행동을 할 이유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 때문이었다.[14]명나라가 일본과의 무역을 금지했기 때문에, 사쓰마 번은 막부의 허락을 받아 류큐 왕국의 무역 관계를 이용하여 중국과의 무역 관계를 유지했다. 일본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단절했기 때문에, 이러한 무역 관계는 1860년대에 막부를 전복하는 데 도움을 줄 사쓰마 번과 막부 모두에게 중요했다.[19][16] 에도에 파견된 류큐 사절단은 도쿠가와 쇼군을 위한 것이었다.
1609년 시마즈의 류큐 침공 이후 류큐 국왕은 사쓰마 다이묘의 가신이었으며, 사쓰마는 1628년 슈리에 '자이반카야'(在番仮屋) 또는 '우후카이야'(大仮屋)라는 정부 사무소를 설립하여 1872년까지 250년 동안 류큐 지배의 기지가 되었다.[17] 사쓰마 번의 주민은 대략 보호령의 유럽 상주 공사와 비교할 수 있다.[18] 그러나 왕국은 어떤 번(영지)의 일부로 간주되지 않았다. 1879년 공식적인 섬 병합과 왕국 폐지까지 류큐는 실제로 에도 일본의 ''de jure'' 일부로 간주되지 않았다. 비록 기술적으로 사쓰마의 통제를 받았지만, 류큐는 사쓰마 ''다이묘''와 중국과의 무역에서 막부의 이익에 가장 잘 봉사하기 위해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받았다.[19]
류큐는 중국의 조공국이었고, 일본은 중국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이 류큐가 일본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사쓰마와 막부는 류큐를 눈에 띄게 점령하거나 그곳의 정책과 법률을 통제하지 않는 측면에서 대부분 소극적일 의무가 있었다. 이 상황은 류큐 왕실 정부, 사쓰마 ''다이묘'', 그리고 막부 등 관련된 세 당사자 모두에게 류큐를 가능한 한 독특하고 외국적인 국가로 보이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일본인은 막부의 허가 없이는 류큐를 방문할 수 없었고, 류큐인은 일본식 이름, 옷 또는 관습을 채택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들은 심지어 에도 여행 중에도 일본어 지식을 발설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사쓰마의 ''다이묘''인 시마즈 가문은 류큐의 국왕, 관리 및 기타 사람들을 에도에 데려오고 행진시키는 쇼를 벌임으로써 큰 명성을 얻었다. 국왕과 전체 왕국을 가신으로 둔 유일한 ''번''으로서, 사쓰마는 류큐의 이국성에서 상당한 이익을 얻어 그것이 완전히 별개의 왕국임을 강화했다.
청나라의 황실 관리 이홍장은 율리시스 S. 그랜트와의 회담에서 류큐가 수백 년 동안 중국에 조공을 바치며 섬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고, 중국은 우호적이고 유익한 관계에서 그들을 위해 특정 무역 권리를 보류했다고 진술했다.[20] 일본은 1874년의 조공 사절단이 중국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인식된 후 1875년 조공 관계를 종료하라고 명령했다.
4. 3. 일본 (사쓰마번, 에도 막부)
1609년 사쓰마번은 류큐 침공을 감행하여 슈리성을 함락시키고 오키나와섬 북동부의 류큐 열도를 빼앗았다. 류큐는 일본의 조공국이 되었지만, 이후에도 청나라와 일본에 이중 조공을 바치며 중계 무역으로 번성했다.[94] 류큐 국왕은 사쓰마 다이묘의 가신이 되었고, 사쓰마는 1628년 슈리에 ''자이반카야''(在番仮屋)라는 정부 사무소를 설치하여 1872년까지 250년 동안 류큐 지배의 기지로 삼았다.[17]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정복 전쟁 지원을 류큐 왕국에 요청했으나, 명나라의 조공국이었던 류큐는 이를 거절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사쓰마 번에게 류큐 정복을 위한 원정군 파견을 승인했고, 1609년 류큐 침공이 일어났다. 사쓰마는 류큐 왕국이 일본과 중국에 "이중 종속" 상태를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류큐는 도쿠가와 막부와 중국 조정 모두에 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쇼 네이 국왕은 가고시마를 거쳐 에도 (오늘날의 도쿄)로 끌려갔으나, 2년 후 풀려나 류큐 왕국은 어느 정도 자율성을 회복했다.[14] 그러나 사쓰마 번은 아마미오시마 섬을 점령하여 사쓰마 번에 편입시켰고, 이 지역은 현재까지 가고시마현에 속해 있다.
1655년, 류큐와 청나라 사이의 조공 관계는 막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14] 명나라가 일본과의 무역을 금지했기 때문에, 사쓰마 번은 류큐 왕국의 무역 관계를 이용하여 중국과의 무역 관계를 유지했다. 에도에 파견된 류큐 사절단은 도쿠가와 쇼군을 위한 것이었다.
류큐는 중국의 조공국이었고, 일본은 중국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이 류큐가 일본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일본인은 막부의 허가 없이는 류큐를 방문할 수 없었고, 류큐인은 일본식 이름, 옷 또는 관습을 채택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사쓰마의 ''다이묘''인 시마즈 가문은 류큐의 국왕, 관리 및 기타 사람들을 에도에 데려오고 행진시키는 쇼를 벌임으로써 큰 명성을 얻었다.
청나라의 황실 관리 이홍장은 율리시스 S. 그랜트와의 회담에서 류큐가 수백 년 동안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고 진술했다.[20] 일본은 1874년의 조공 사절단이 중국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인식된 후 1875년 조공 관계를 종료하라고 명령했다.
4. 4. 조선
고려와 류큐국의 공식적인 교류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 1389년 류큐국은 왜구에게 붙잡힌 고려인을 보호하여 고려로 돌려보냈으며,[97] 조선왕조실록에는 류큐국이 조선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은 1416년(태종 16년)에 이예를 '유구국통신관'이라는 사신으로 류큐국에 파견하였다. 이예는 왜구에게 잡혀 류큐에 팔려간 조선인 44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1430년대에는 류큐와 조선 사이의 뱃길에 왜구가 자주 나타나고, 조선에 와서 류큐국 국사(國使)라고 사칭하는 일본 상인이 있었다는 위사(僞使) 문제가 생겨 그 뒤로는 중국을 통한 간접 교류로 바뀌게 되었다.[98]제주도나 경상도에 류큐국 사람들이 표류하였다는 기록이 여럿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인도적인 대우를 받고 류큐국으로 돌아갔다. 반대로 제주도 주민이 류큐국 영역까지 간 일도 있었다. 1477년(성종 8년) 귤을 진상하려던 사람들의 배가 풍랑을 만나 류큐국의 요니구시 섬에 도착했다. 류큐 왕국은 표류민들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어 이들은 1479년에 염포(현재의 울산 방어진)로 도착할 수 있었다.
4. 5. 동남아시아 국가
류큐 왕국은 약 200년 동안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번성했다.[12] 류큐 왕국의 해상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372년 츄잔이 시작한 명나라와의 조공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었다.[13] 이 조공 관계는 류큐를 이은 세 개의 오키나와 왕국에 의해 유지되었다. 중국은 류큐의 해상 무역 활동에 선박을 제공했으며,[13] 소수의 류큐인들이 베이징의 국자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츄잔 왕의 권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왕국이 명나라 항구에서 공식적으로 무역할 수 있도록 했다. 류큐의 선박은 종종 중국이 제공했으며, 중국, 대월 (베트남), 일본, 자바, 한국, 루손, 말라카, 파타니, 팔렘방, 샴, 수마트라를 포함한 이 지역의 항구에서 무역을 했다.[13]류큐 왕국은 일본 제품인 은, 칼, 부채, 옻칠 제품, 병풍과 중국 제품인 약초, 주조된 동전, 유약을 바른 도자기, 비단, 직물 등을 동남아시아의 소목, 코뿔소 뿔, 주석, 설탕, 철, 용연향, 인도 상아, 아라비아 유향과 교환했다. 류큐 왕국이 편찬한 외교 문서 공식 기록인 ''역대보안''에는 1424년부터 1630년대까지 류큐 선박으로 왕국과 동남아시아 간에 총 150번의 항해가 기록되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5. 문화
류큐국의 문화는 조선, 중국, 동남아시아,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류큐국의 '테'는 일본에 전파되어 가라테 원형의 일부가 되었다.
5. 1. 언어와 문학
쇼세이왕부터 쇼호왕 통치 기간(1531년~1623년)에 류큐 최고의 가요집(歌謡集) 《오모로소오시》(おもろそうし)가 편찬되었다.5. 2. 종교
류큐에는 고유의 종교가 있었다. 슈리에는 키코에 대군어전, 슈리전내, 마카베전내, 기보전내가 있었다.류큐국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쇼호왕 치세인 1622년으로, 야에야마에 서양 선박이 도항하여 오키나와인들에게 기독교를 믿으라고 선교하였다. 일본에선 기독교를 사회 질서를 혼란하게 하는 종교로 간주하여[96] 1612년에 기독교 금령을 내렸고, 사쓰마번의 침공 이후(1609년) 일본의 조공국이었던 류큐 왕국은 기독교의 선교 활동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자와섬이나 루손섬에 왕래하던 서양 선박이 가끔 류큐 제도에 기항하여 선교 활동을 하기도 했다.(→기리시단 참조)
류큐국은 조선에서 준 불전(佛典)을 못(圓鑑池|엔칸치일본어) 안에 섬을 만들어 거기 세운 건물(辯財天堂|변재천당일본어)에 보관했다.
6. 경제
류큐 왕국은 약 200년 동안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번성했다.[12] 1372년 츄잔이 명나라와 조공 관계를 시작하면서, 류큐는 해상 무역 활동에 필요한 선박을 중국으로부터 제공받았다.[13] 또한, 류큐인들은 베이징의 국자감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츄잔 왕의 권위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명나라 항구에서 무역이 가능했다. 류큐의 선박은 중국, 대월 (베트남), 일본, 자바, 한국, 루손, 말라카, 파타니, 팔렘방, 샴, 수마트라 등 다양한 지역의 항구에서 무역을 진행했다.[13]
일본의 은, 칼, 부채, 옻칠 제품, 병풍과 중국의 약초, 주조된 동전, 유약을 바른 도자기, 비단, 직물 등은 류큐 왕국 내에서 동남아시아의 소목, 코뿔소 뿔, 주석, 설탕, 철, 용연향, 인도 상아, 아라비아 유향과 교환되었다. 류큐 왕국의 공식 외교 문서 기록인 ''역대보안''에 따르면, 1424년부터 1630년대까지 류큐 선박은 동남아시아와 총 150번의 항해를 했으며, 그 중 61번은 샴, 10번은 말라카, 10번은 파타니, 8번은 자바로 향했다.
중국은 ''해금''(海禁) 정책을 통해 조공 국가와 공식 허가를 받은 국가로 무역을 제한했지만, 명나라 조정은 류큐에 특혜를 제공하여 약 150년 동안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왜구의 위협 증가와 중국의 특혜 감소, 포르투갈 상인과의 경쟁 심화로 인해 왕국의 상업적 번영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7. 주요 사건
- 1187년 – 슌텐이 우라소에 성을 근거지로 오키나와 국왕이 되었다.
- 1272년 – 몽골 제국의 사신이 오키나와에서 국왕 에이소에 의해 추방되었다.
- 1276년 – 몽골군이 다시 폭력적으로 섬에서 몰아내졌다.
- 1372년 – 산잔 시대에 세 개의 왕국으로 분열된 오키나와에 최초의 명나라 사신이 방문하여, 중국 제국과의 공식적인 조공 관계가 시작되었다.[16]
- 1389년 – 류큐의 사신이 고려를 방문하여 두 왕국 간의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
- 1392년 – 류큐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였다.
- 1416년 – 쇼 하시가 이끄는 추잔이 호쿠잔의 수도인 나키진 성을 점령하였다.[28]
- 1429년 – 추잔이 난잔의 수도인 난잔 성을 점령하여 오키나와 섬을 통일하였다. 쇼 하시는 수도를 슈리 성 (현재의 나하)으로 옮겼다.[1]
- 1458년 – 아마와리의 왕국에 대한 반란.
- 1466년 – 키카이 섬이 류큐에 의해 침략당했다.
- 1470년 – 쇼 엔 (카네마루)이 제2 쇼 왕조를 설립하였다.[28]
- 1477년 – "추잔의 번영기"로 불리는 쇼 신이 즉위하였다.[28] 왕국의 황금기였다.
- 1500년 – 사키시마 제도가 류큐에 합병되었다.
- 1609년 (5월 4일) – 규슈 남부의 사쓰마 번의 ''다이묘'' (영주)가 왕국을 침략하여, 국왕 쇼 네이가 체포되었다.[28]
- 1611년 – 평화 조약에 따라 사쓰마는 아마미 제도와 토카라 제도 (사쓰난 제도)를 합병하고, 류큐의 왕들은 사쓰마 번의 다이묘의 봉신이 되었다.
- 1623년 – ''오모로 소시''가 완성되었다.
- 1650년 – ''추잔 세이칸''이 완성되었다.
- 1724년 – ''추잔 세이후''가 완성되었다.
- 1745년 – ''큐요''가 완성되었다.
- 1846년 – 루추 해군 선교회에서 활동하는 헝가리 출신 개신교 선교사인 베르나르 장 베텔하임 박사(1870년 사망)가 류큐 왕국에 도착하였다.[28] 그는 나미노우에 고코쿠지 사찰에 섬 최초의 외국인 병원을 설립하였다.
- 1852년 – 미국 해군의 매튜 C. 페리 제독이 왕국을 방문하여 나하에 석탄 보급소를 설치하였다.[28]
- 1854년 – 페리가 오키나와를 다시 방문하여 류큐 정부와 루추 협약을 체결하였다.[29] 베텔하임은 페리와 함께 떠났다.
- 1866년 – 청 제국의 마지막 공식 사절단이 왕국을 방문하였다.
- 1872년 – 메이지 천황이 일방적으로 쇼 타이 국왕을 "류큐 번의 번주"로 선언하였다.
- 1874년 – 중국에 파견된 마지막 조공 사신이 나하에서 출발하였다. / 빌헬름 1세는 미야코 섬에 "우호 기념비"를 세웠다. / 일본은 류큐를 대신하여 타이완을 침략하였다.
- 1879년 – 일본은 류큐 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의 설립을 선언하여 공식적으로 섬을 합병하였다.[28] 쇼 타이 왕은 퇴위를 강요당했지만 메이지 귀족 제도 내에서 후작의 작위를 받았다.[24]
8. 류큐 국왕 목록
이름 | 한자 | 재위 기간 | 계통 혹은 왕조 | 비고 |
---|---|---|---|---|
순텐 | 舜天 shuntin|슌텐ryu | 1187년~1237년 | 순텐 왕조 | |
슌반준키 | 舜馬順熈 shunbajunchi|슌바준키ryu | 1238년~1248년 | 순텐 왕조 | |
기혼 | 義本 gifun|기혼ryu | 1249년~1259년 | 순텐 왕조 | |
에이소 | 英祖 eeso|에이소ryu | 1260년~1299년 | 에이소 왕조 | |
타이세이 | 大成 teeshii|타이세이ryu | 1300년~1308년 | 에이소 왕조 | |
에이지 | 英慈 eeji|에이지ryu | 1309년~1313년 | 에이소 왕조 | |
타마구스쿠 | 玉城 tamagushiku|타마구스쿠ryu | 1314년~1336년 | 에이소 왕조 | |
세이이 | 西威 see-i|세이이ryu | 1337년~1354년 | 에이소 왕조 | |
삿토 | 察度 sattu|삿토ryu | 1355년~1397년 | 삿토 왕조 | |
분네이 | 武寧 bunii|분네이ryu | 1398년~1406년 | 삿토 왕조 | |
쇼 시쇼 | 尚思紹 shoo shisoo|쇼 시쇼ryu | 1407년~1421년 | 제1 쇼 왕조 | |
쇼 하시 | 尚巴志 shoo hashii|쇼 하시ryu | 1422년~1439년 | 제1 쇼 왕조 | 1422년~1429년은 츄잔 국왕, 1429년~1439년은 류큐 국왕 |
쇼 츄 | 尚忠 shoo chuu|쇼 츄ryu | 1440년~1442년 | 제1 쇼 왕조 | |
쇼 시타츠 | 尚思達 shoo shitaa|쇼 시타츠ryu | 1443년~1449년 | 제1 쇼 왕조 | |
쇼 킨푸쿠 | 尚金福 shoo chinfuku|쇼 킨푸쿠ryu | 1450년~1453년 | 제1 쇼 왕조 | |
쇼 타이큐 | 尚泰久 shoo teechuu|쇼 타이큐ryu | 1454년~1460년 | 제1 쇼 왕조 | |
쇼 토쿠 | 尚徳 shoo tuku|쇼 토쿠ryu | 1461년~1469년 | 제1 쇼 왕조 | |
쇼 엔 | 尚圓 shoo in|쇼 엔ryu | 1470년~1476년 | 제2 쇼 왕조 | 별칭: 우치마 가네마루 |
쇼 센이 | 尚宣威 shoo shin-i|쇼 센이ryu | 1477년 | 제2 쇼 왕조 | |
쇼 신 | 尚真 shoo shin|쇼 신ryu | 1477년~1526년 | 제2 쇼 왕조 | |
쇼 세이 | 尚清 shoo shii|쇼 세이ryu | 1527년~1555년 | 제2 쇼 왕조 | |
쇼 겐 | 尚元 shoo gwan|쇼 겐ryu | 1556년~1572년 | 제2 쇼 왕조 | |
쇼 에이 | 尚永 shoo ii|쇼 에이ryu | 1573년~1586년 | 제2 쇼 왕조 | |
쇼 네이 | 尚寧 shoo nii|쇼 네이ryu | 1587년~1620년 | 제2 쇼 왕조 | 사쓰마 번 침략 시기 통치; 사쓰마 번의 첫 번째 가신 |
쇼 호 | 尚豊 shoo fuu|쇼 호ryu | 1621년~1640년 | 제2 쇼 왕조 | |
쇼 켄 | 尚賢 shoo chin|쇼 켄ryu | 1641년~1647년 | 제2 쇼 왕조 | |
쇼 시츠 | 尚質 shoo shichi|쇼 시츠ryu | 1648년~1668년 | 제2 쇼 왕조 | |
쇼 테이 | 尚貞 shoo tii|쇼 테이ryu | 1669년~1709년 | 제2 쇼 왕조 | |
쇼 에키 | 尚益 shoo ichi|쇼 에키ryu | 1710년~1712년 | 제2 쇼 왕조 | |
쇼 케이 | 尚敬 shoo chii|쇼 케이ryu | 1713년~1751년 | 제2 쇼 왕조 | |
쇼 보쿠 | 尚穆 shoo buku|쇼 보쿠ryu | 1752년~1795년 | 제2 쇼 왕조 | |
쇼 온 | 尚温 shoo un|쇼 온ryu | 1796년~1802년 | 제2 쇼 왕조 | |
쇼 세이 | 尚成 shoo shii|쇼 세이ryu | 1803년 | 제2 쇼 왕조 | |
쇼 코 | 尚灝 shoo koo|쇼 코ryu | 1804년~1828년 | 제2 쇼 왕조 | |
쇼 이쿠 | 尚育 shoo iku|쇼 이쿠ryu | 1829년~1847년 | 제2 쇼 왕조 | |
쇼 타이 | 尚泰 shoo tee|쇼 타이ryu | 1848년~1879년 3월 11일 | 제2 쇼 왕조 | 마지막 류큐 국왕 (1884년~1901년 일본 후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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マジャパヒト王国과의 交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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琉球倭寇及長崎朱印船航道貫至尖閣福建南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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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古級の日本全図、室町初期作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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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藤正齋全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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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縄の嶽(浮縄御嶽・オキナワノ嶽) {{!}} 那覇市観光資源データベー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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ルーツ解明 沖縄に注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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ルーツ解明 沖縄に注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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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沖縄人DNAの遺伝系統「日本本土に近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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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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沖縄の人々、ルーツは「日本由来」 南方系説を否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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ゲノム多様性データから明らかになった先史琉球列島人の移動における取材につい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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やはりアイヌ人と琉球人の方が本土人よりも遺伝的に近かった - 東大な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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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イヌ民族と沖縄の人、遺伝的な特徴に共通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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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古島先史の人々「北側の沖縄諸島から」「南から」説を覆す 人骨DNA分析で100%縄文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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トランスユーラシア言語は農耕と共に新石器時代に拡散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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トメ・ピレス『東方諸国記』を読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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ゴーレス再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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琉球王国の形成・三山統一とその前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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榕樹書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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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驚愕の古琉球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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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城王子 (왕세자)의 薩摩藩에 대한 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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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琉球王国評定所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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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琉球國王尚泰ヲ藩王トナシ華族ニ陞列スルノ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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琉球藩ヲ廃シ沖縄県ヲ被置ノ件
https://www.archives[...]
国立公文書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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真境名安興『沖縄一千年史』記載の「職制創設年表」の一覧(318、319頁)には「表十五人」の職制は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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沖縄県立図書館 貴重資料デジタル書庫>ホーム> お知らせ> 国指定重要文化財『間切図』公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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略縁起|護国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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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王寺跡(テンノウジアト) : 那覇市歴史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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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界寺跡(テンカイジアト) : 那覇市歴史博物館
http://www.rekish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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琉球と袋中上人展 - エイサーの起源をたど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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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本願寺沖縄別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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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説 琉球処分」による検索結果 - 紀伊國屋書店ウェブストア|オンライン書店|本、雑誌の通販、電子書籍スト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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集英社文庫 琉球建国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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画像・写真 カリスマ琉球王・尚巴志のドラマ放送 ナレーションは国仲涼子(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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琉球歴史ドラマ 尚円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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沖縄セルラーpresents 琉球歴史ドラマ「阿麻和利」(全3話)|RBC 琉球放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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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プチララ】琉球のユウナ 第1話 | 響ワタル | 無料漫画(マンガ)ならコミックシーモア
https://www.cmoa.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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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Anthem of the Ryukyu Kingdom 琉球王国国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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琉球国金石文献述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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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회과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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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국의 ‘兩屬‘문제’와 페리의 상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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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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