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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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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해고》는 조선 정조 때 실학자 류득공이 발해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편찬한 책이다. 이 책은 서문과 함께 군고, 신고, 지리고, 직관고, 의장고, 물산고, 국어고, 국서고, 속국고 등 9개의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발해의 왕, 신하, 지리, 관직, 의복, 물산, 언어, 대외 관계, 그리고 발해를 계승한 정안국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류득공은 《발해고》를 통해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고 남북국 시대를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1권본과 4권본이 있으며, 4권본에서는 내용이 보강되고 오류가 수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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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고
문헌 정보
제목발해고
저자류득공
분야역사서
주제발해
원제渤海考

2. 구성

《발해고》는 서문, 군고(君考), 신고(臣考), 지리고(地理考), 직관고(職官考), 의장고(儀章考), 물산고(物産考), 국어고(國語考), 국서고(國書考), 속국고(屬國考) 등 9개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4][5] 각 부문은 발해의 정치, 사회, 문화, 지리 등 다양한 측면을 다루고 있다.


  • 군고(君考): 발해의 왕들에 대한 기록으로, 걸걸중상과 대조영부터 마지막 왕까지 주요 업적을 담고 있다.
  • 신고(臣考): 대문예발해의 주요 신하들의 업적을 기록했다.
  • 지리고(地理考):신당서》, 《요사》, 《청일통지》 등을 참고하여 발해의 지리를 고찰했다. 5경 15부 62주의 지방 제도와 위치 비정에 대한 내용이 있다.
  • 직관고(職官考): 발해의 문관 및 무관 직제를 설명했다.
  • 의장고(儀章考): 발해의 의식과 복장에 대한 내용으로, 품계에 따른 관복 색깔과 휴대품 등을 다루었다. 4권본에서는 직관고에 통합되었다.
  • 물산고(物産考): 발해에서 생산되는 토끼, 다시마, 된장, 사슴, 말, 명주, 철, 벼 등 다양한 물품에 대해 설명했다. 4권본에서는 삭제되었다.
  • 국어고(國語考): 발해에서 사용된 왕, 왕족, 관직 등에 대한 칭호를 다루었다. 4권본에서는 삭제되었다.
  • 국서고(國書考): 발해일본에 보낸 국서를 통해 발해고구려부여를 계승한 국가임을 강조한 내용을 담았다. 4권본에서는 예문고라고 하였다.
  • 속국고(屬國考): 발해를 계승한 정안국에 대해 설명했다. 4권본에서는 정안국고(定安國考)라고 하였다.

2. 1. 서문

발해 왕계도, 성해응의 서문, 박제가의 서문, 류득공의 서문이 실려 있다.[5] 박제가는 친구인 류득공이 저술한 《발해고》에 대해서 자신이 예전에 검토했던 바와 부합한다고 하면서 이 책을 크게 칭찬하였다.[6]

류득공은 《발해고》 서문에서 이 책을 짓게 된 동기를 직접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류득공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이 망하고 그것을 계승한 고려가 《삼국사[8]를 편찬한 것은 옳은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남쪽의 신라만 계승한 것이 아니라 북쪽의 발해도 계승하였으므로 마땅히 남북국사를 지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하였다. 발해고려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거란족의 요나라에게 망했기 때문에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못한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였다. 왜냐하면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이 격파되어 고려로 도망해 온 사람들이 세자 이하 10여 만 명이나 되므로 반드시 사관이 있었거나 역사서라도 있었을 것이며, 만약 없었더라면 세자에게 물어보아서라도 역대 발해왕의 사적을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장건장은 당나라 사람이었으면서도 《발해국기(渤海國記)》를 지었는데, 고려 사람이 10여 만 명이나 되는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이고서도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던 것은 매우 통탄할 일이라고 하였다. 이에 류득공이 규장각 검서로 일하면서 궁중 도서를 많이 읽었으므로, 발해 역사를 편찬하여 9고(考)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를 세가(世家), 전(傳), 지(志)로 삼지 않고 고(考)라 부른 것은 아직 역사서로 완성하지 못하여 정식 역사서로 감히 자처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9]

2. 2. 군고(君考)

발해 역대 왕의 주요 치적을 기록했다.

진국공(震國公) 걸걸중상(속말말갈인)은 성이 대씨(大氏)이고, 발해를 건국한 고왕 대조영의 아버지이다. 대조영은 고구려의 장수였는데, 아버지 진국공이 사망하고 걸사비우이해고에게 죽자 천문령에서 고구려말갈 군사를 이끌고 이해고를 크게 격파하였다. 대조영은 걸사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여 읍루족이 살았던 동모산을 거점으로 말갈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성력 원년(698년)에 진국(震國)을 건국하고 왕위에 올랐다. 당나라 현종 2년(713년) 대조영을 발해군왕에 책봉하고 그 땅을 홀한주로 삼으면서 국호를 발해(渤海)로 하였다.

무왕 대무예는 대조영의 아들로서 연호를 인안이라 하였는데, 개원 20년(732년)에 대장 장문휴(張文休)를 시켜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10]를 공격하여 등주자사 위준을 죽이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문왕 대흠무는 대무예의 아들로서 당나라에서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이 일어나자 이들을 소탕하는데 협조하였다. 이 공로로 보응 원년(762년)에 발해국왕에 책봉되었다.[11]

문왕 이후 폐왕, 성왕, 강왕, 정왕, 희왕, 간왕, 선왕, 이진, 건황, 현석, 인선으로 왕위가 이어졌다.[12] 대인선(大諲譔) 왕 때 거란족의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신책 4년(925년) 발해를 공격하였고, 천현 원년(926년) 발해의 부여성이 함락되었고 뒤이어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이 함락되었다. 요 태조 야율아보기는 발해국을 동란국(東丹國)으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인 홀한성을 천복성으로 바꾸었으며, 태자인 야율배를 인황왕으로 삼아 동란국을 통치하도록 하였다.

2. 3. 신고(臣考)

대문예(大門藝)는 무왕의 동생으로,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공격하라는 왕명을 어기고 당나라로 도망갔다. 무왕이 자객을 보내 죽이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5] 대야발은 고왕의 동생이다.[5] 장문휴는 무왕 때의 대장이다.[5] 이진몽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일왕 앞에서 활쏘기를 보여주고 발해 음악을 연주하였다.[5] 양승경문왕 때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일왕으로부터 정3위의 벼슬을 받았다.[5] 일만복은 문왕 때 325명을 데리고 배 17척에 나누어 타고 일본에 사신으로 갔는데, 일왕은 일만복이 가져온 발해의 국서에서 발해를 하늘의 자손이라고 한 점, 그리고 일본에 대해 고구려 때는 형과 동생의 나라라고 부르다가 발해 때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라고 부른 점을 들어 예법에 어긋난다고 지적하였다.[5] 사도몽은 문왕 때 187명을 이끌고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일왕의 즉위를 축하하려고 하였으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 겨우 46명만 살아남았다.[5] 여정림강왕 때 68명을 이끌고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표류하여 오랑캐의 땅인 지리파촌에 도착하여 오랑캐의 습격을 당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5] 고다불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월중국에 머무르면서 학생들에게 발해어를 가르쳤다.[5] 왕문구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일왕 앞에서 격구 경기를 해 보였다.[5] 고모한은 고송이라고도 하는데,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이 함락되자 고려로 피신하였다가 나중에 요나라로 돌아와 중대성 좌성을 지냈다.[5] 대광현(大光顯)은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의 세자로서 고려 태조 17년(934년) 7월에 무리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로 도망하였다. 태조는 발해의 세자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성명을 하사하고 왕실 호적에 붙여주었으며 그에 딸린 관리들에게 작위를 주고 병사들에게는 밭과 집을 하사하였다.[5] 대광현의 아들은 대도수인데 고려 현종 때 대장이 되었다. 그 후손 대금취(大金就)는 고려 고종 때 대장이 되어 몽고를 정벌하는데 공을 세워 영순군에 봉해졌는데 마침내 영순 태씨의 시조가 되었다.[5] 박승은 고려 태조 21년(938년)에 발해의 유민 3천여 호를 이끌고 고려로 도망을 왔다.

2. 4. 지리고(地理考)

류득공은 《신당서》, 《요사》, 《청일통지》를 인용하여 발해의 지리에 대해 서술했다. 4권본에서는 내용이 대폭 증가하였다. 《신당서》에 기록된 발해의 5경 15부 62주를 인용하였는데, 5경은 상경 용천부, 중경 현덕부, 동경 용원부, 남경 남해부, 서경 압록부이고, 15부는 다음과 같다.

15부용천부, 현덕부, 용원부, 남해부, 압록부, 장령부, 부여부, 막힐부, 정리부, 안변부, 솔빈부, 동평부, 철리부, 회원부, 안원부



류득공은 《발해고》 1권본에서 발해 5경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추측하였다.



그러나 《발해고》 4권본에서는 상경영고탑, 중경은 길림, 동경은 경성, 남경은 함흥, 서경은 강계 동북 200리의 압록강 건너편으로 다르게 비정하였다.[13]

류득공은 《요사》에 기록된 발해의 지리도 인용하였으나, 《요사》의 오류를 바로잡지 못하고 그대로 인용하는 오류를 범했다. 《청일통지》에 기록된 발해의 지리에 대해서도 인용하여, 용천부, 현덕부, 용원부, 남해부, 부여부, 심주, 개주, 부주, 삼로군, 홀한하, 상경성, 평양, 곽주, 모주성에 대해 서술하였다.

2. 5. 직관고(職官考)

유득공의 《발해고》 〈직관고〉에서는 발해의 주요 관직을 문관 직제와 무관 직제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문관 직제로는 선조성, 중대성, 정당성과 충부, 인부, 의부, 작부, 창부, 선부, 지부, 예부, 신부, 융부, 계부, 수부, 중정대, 전중시, 종속시, 문적원, 태상시, 사빈시, 대농시, 사장시, 사선시, 주자감, 항백국을 서술하였다. 무관 직제로는 좌맹분위, 우맹분위, 좌웅위, 우웅위, 좌비위, 우비위, 남좌위, 남우위, 북좌위, 북우위에 대하여 간략히 서술하였다.[5]

2. 6. 의장고(儀章考)

발해의 의식 및 복장에 대해 고찰한 내용이다. 품계에 따른 관복 색깔과 휴대품 등을 설명하였다.[14] 3질 이상은 자줏빛 관복을 입고 상아홀과 금어대를 휴대하였다. 5질 이상은 주홍빛 관복을 입고 상아홀과 은어대를 휴대하였다. 6질과 7질은 옅은 주홍색 관복을 입고 나무홀을 휴대하였다. 8질은 녹색 관복을 입고 나무홀을 휴대하였다.

2. 7. 물산고(物産考)

발해에서 생산되는 물건에 대한 고찰이다. 토끼, 다시마, 된장, 사슴, 돼지, 말, 베, 면, 명주, 철, 벼, 붕어, 오얏, 배, 은에 대한 설명이 있다.[5] 4권본에서는 삭제되었다.

구체적으로는 태백산의 토끼, 남해부의 다시마, 책성부의 된장, 부여부의 사슴, 막힐부의 돼지, 솔빈부의 말, 현주의 베, 옥주의 면, 용주의 명주, 위성의 철, 노성의 벼, 미타호의 붕어, 환도의 오얏, 악유의 배, 부주의 은을 다루었다.[5]

2. 8. 국어고(國語考)

발해에서는 왕을 가독부, 성왕, 기하라 불렀고, 왕의 명령을 교(敎)라 하였다.[5] 왕의 아버지는 노왕, 어머니는 태비, 처는 귀비라 하였고, 맏아들은 부왕(副王), 나머지 아들을 왕자라 하였다.[5] 관품은 질(秩)이라 하였다.[5] 이 내용은 4권본에서는 삭제되었다.

2. 9. 국서고(國書考)

발해일본에 보낸 국서에 대해 고찰했다. 4권본에서는 예문고라고 하였다. 《속일본기》, 《일본일사》 등에 실린 국서를 인용하여 발해가 고구려부여를 계승한 국가임을 강조한 내용을 담았다.[5]

발해의 왕이 일본 일왕에게 보내는 국서 총 6편이 실려 있는데, 《속일본기》, 《일본일사》, 《일본후기》, 《유취국사》 등에 실린 국서를 인용한 것이다. 발해 무왕이 일본국 성무왕에게 보내는 국서, 발해 문왕이 일본국 성무왕에게 보내는 국서, 발해 강왕이 일본국 환무왕에게 보내는 국서 4편이 실려 있다. 무왕 대무예가 보낸 국서에는 "무예는 욕되게 여러 나라를 주관하고 외람되게 여러 번국을 아우르게 되어, 고구려의 옛 터전을 수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여, 발해고구려부여를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하였다.[5]

2. 10. 속국고(屬國考)

발해를 계승한 정안국에 대한 고찰이다. 4권본에서는 정안국고(定安國考)라고 하였다. 정안국은 본래 마한[15] 종족으로, 발해거란에 격파되자 그 서쪽 변방을 지키게 되었다. 정안국오현명은 본래 고구려 땅에 살던 발해 유민으로서, 거란이 영토를 침략하여 성채를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으나, 그의 할아버지가 절개를 지켜 항복하지 않고 백성들과 함께 난을 피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힘을 길렀다고 한다. 오현명송나라 태종 6년(981년)에 여진 사신을 통하여 표문을 올리고, 근래에 부여부가 거란에서 등을 돌리고 정안국에 귀순하였으니 곧 거란이 쳐들어올 것이라면서, 송나라정안국이 힘을 합쳐 거란을 토벌하자고 제안하였다.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정안국 사람 골수(骨須)가 고려로 망명하였다고 한다.

3. 인용 서적

류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하며 참고한 역사서는 다음과 같다.[16]

구당서》, 《신당서》, 《오대사》, 《송사》, 《요사》, 《자치통감》, 《삼국사[8], 《고려사》, 《동국통감》, 《속일본기》, 《일본일사》, 《일본후기》, 《유취국사》, 《통전》, 《통지》, 《문헌통고》, 《문헌비고》, 《대명일통지》, 《청일통지》, 《성경통지》, 《만성통보》, 《영순태씨족보》, 《여지승람》, 《전당시》.

4. 1권본과 4권본 비교

류득공은 조선 정조 8년(1784년)에 《발해고》 1권본을 완성한 후, 내용을 대폭 보강하고 오류를 수정하여 4권본을 완성했다. 4권본은 《영재서종(泠齋書種)》에 함께 수록되어 있으며, 1권본에 비해 구성과 내용이 약 35% 정도 증가했다.[4]

류득공은 1권본에서 9고(考)였던 구성을 4권본에서 5고(考)로 통폐합하고, 지리고(地理考)를 대폭 정비했다. 특히 발해 강역에 대해 1권본에서는 《요사》 기록에 따라 요동 중심으로 비정했으나, 4권본에서는 조선 북부 지방과 길림 및 아무르강(흑룡강) 일대로 비정하여 현대 역사학계의 의견과 거의 일치한다.[17]

1권본에서는 발해 멸망 시기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으나, 4권본에서는 발해 멸망과 그 이후 시기를 명확히 구분했다. 신고(臣考) 뒷부분에 흥료국 관련 인물들을 추가하여 발해 멸망 이후 활동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었다. 정안국에 대해서도 1권본에서는 발해 속국으로 잘못 보아 속국고(屬國考)에 넣었으나, 4권본에서는 오류를 인식하고 제목을 정안국고(定安國考)로 수정했다.

이처럼 《발해고》 4권본은 1권본에 비해 많은 자료가 추가되고 오류가 수정되어, 류득공의 발해에 대한 인식이 더 정확하고 풍부해졌음을 알 수 있다.

5. 평가

류득공의 《발해고》는 발해를 한국사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자주적인 역사관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 발해사를 한국사의 체계에 포함해야 한다는 류득공의 주장은 《발해고》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류득공은 발해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분명히 하고, 신라발해남북국 시대로 칭하여, 오늘날 역사학계에서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근거를 제시하였다. 또한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아 여진·거란에 대한 영토적 권리 주장을 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2]

류득공의 남북국시대론은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사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19] 반면 중국 학자 쑨위량(孫玉良, 손옥량)은 류득공이 남북국시대론을 만들어 발해사를 한국사로 편입시켰다고 비판하며, 발해고구려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간주했다.[2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학자들은 발해를 민족사에 포함시키고, 후기 신라와 발해가 공존했던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설정한다.[21]

6. 한국어 번역서


  • 송기호宋基호|쑹지하오중국어[22] 옮김, 《발해고》, 홍익출판사, 2021년 2월 1일.[23]
  • 김종복金鍾福|진중푸중국어[24] 옮김, 《정본 발해고》, 책과 함께, 2018년 3월 30일

참조

[1] 문서 유득공(柳得恭)은 '유득공'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柳를 '류'로 통일시켜 표기했다.
[2] 논문 류득공과 『발해고』 홍익출판사 2000-01-10
[3] 논문 『발해고』에 나타난 류득공의 역사지리인식 한국사학사학회 2002-09
[4] 논문 류득공과 『발해고』 홍익출판사 2000-01-10
[5] 서적 발해고 홍익출판사 2000-01-10
[6] 논문 박제가의 서문 홍익출판사 2000-01-10
[7] 문서 부여씨는 백제의 왕족을 말한다.
[8] 문서 삼국사란 고려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를 말한다. 현전하는 삼국사기의 표지에는 '삼국사(三國史)'라고 적혀 있다.
[9] 서적 발해고 홍익출판사 2000-01-10
[10] 문서 등주(登州)는 지금의 중국 산동성에 있는 봉래, 용구 등의 동쪽 지역을 가리킨다.
[11] 문서 당나라는 서기 762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명목적이기는 하지만 발해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였다.
[12] 문서 왕 대현석(大玄錫)과 왕 대인선(大諲譔) 사이에 적어도 왕 대위해(大瑋瑎) 한 명이 더 있었다. 그러나 류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할 당시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1940년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만주의 역사학자인 진위푸(金毓黻, 김육불)에 의해 왕 대위해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13] 문서 오늘날 발해의 상경 영고탑은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남쪽의 발해진으로 보고 있고, 중경 길림은 중국 길림성 화룡현 서고성이고, 동경은 중국 길림성 훈춘시 팔련성이고, 남경은 논쟁 중으로 대표적으로 함경남도 북청군 청해토성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
[14] 문서 질(秩)이란 발해에서 신하들의 등급을 표시하는 말이다. 발해에서는 정1품, 정2품 등의 품(品)이라는 용어를 질(秩)이라고도 하였다.
[15] 문서 여기서 마한(馬韓)은 고구려를 일컫는 말로서, 정안국이 고구려 종족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마한은 백제에 흡수된 것으로 보지만, 최치원은 마한이 고구려이고, 변한이 백제이며, 진한이 신라라고 하였다.
[16] 서적 발해고 홍익출판사 2000-01-10
[17] 논문 『발해고』에 나타난 류득공의 역사지리인식 한국사학사학회 2002-09
[18] 논문 『발해고』에 나타난 류득공의 역사지리인식 한국사학사학회 2002-09
[19] 논문 사서로서 『발해고』에 대한 고찰 2004
[20] 논문 柳得恭與渤海考 1986
[21] 논문 실학자 류득공의 발해 역사관 력사편집부 편, 평양과학백과사전 종합출판사 1991
[22] 문서 송기호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서 발해사 전공이다.
[23] 문서 2000년과 2020년에 발간된 책의 개정판이다.
[24] 문서 김종복은 현 안동대학교 사학과 부교수로, 발해사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 및 사학사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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