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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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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일문화재단은 3·1 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60년에 설립되었다. 이 재단은 매년 학술, 예술, 기술, 사회봉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개인 또는 단체에 3·1 문화상을 시상한다. 초창기에는 학술상, 기술상, 문화예술상, 근로 건설상을 시상했으며, 현재는 학술, 예술, 기술·공학 분야의 수상자를 선정한다. 역대 수상자로는 이혜구, 윤석중, 김동리, 김기창, 천경자, 이어령 등이 있으며, 삼일문화대상과 같은 유사 시상식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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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문화재단 - [회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형태재단법인
창립1966년 8월
이름3·1문화재단
원어SAMIL FOUNDATION
인물김기영(이사장)
장소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 77, 유남빌딩 5층 (옥인동)

2. 제정 배경 및 역사

3·1 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3·1 문화상이 제정되었다.[1] 초기에는 학술상, 기술상, 문화예술상, 근로 건설상을 시상하였다.[1]

초기의 본상[1]


  • 학술상: 인문과학, 자연과학에서 업적을 기리는 부문
  • 기술상: 산업 전 부분 건설 도상에서 획기적인 발명신안 등 창의성 발휘한 자
  • 문화예술상: 문화, 예술에서 업적을 남긴 자
  • 근로 건설상: 육체 노동자·직접 근로로서 농경에 종사하는 농민·국민학교 이하의 교직에 종사하는 교원 중에서 직책에 충실하고 뛰어난 창의적 발휘해 타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인리향당에 봉사한 자


학술상은 제7회 시상까지 인문과학상과 자연과학상으로 나누어 수여하다가, 이후 학술상으로 통합되었다. 1995년부터 다시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분야로 분리되었다. 학술상과 예술상 외에 기술상과 근로상도 시상한다.

2. 1. 제정 배경

3·1 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3·1 문화상이 제정되었다.[1] 초기에는 학술상, 기술상, 문화예술상, 근로 건설상을 시상하였다.[1] 학술상은 제7회 시상까지 인문과학상과 자연과학상으로 나누어 수여하다가, 이후 학술상으로 통합되었으며, 1995년부터 다시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분야로 분리되었다.[1]

2. 2. 역사

초기의 본상[1]

  • 학술상: 인문과학, 자연과학에서 업적을 기리는 부문
  • 기술상: 산업 전 부분 건설 도상에서 획기적인 발명신안 등 창의성 발휘한 자
  • 문화예술상: 문화, 예술에서 업적을 남긴 자
  • 근로 건설상: 육체 노동자·직접 근로로서 농경에 종사하는 농민·국민학교 이하의 교직에 종사하는 교원 중에서 직책에 충실하고 뛰어난 창의적 발휘해 타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인리향당에 봉사한 자


학술상은 제7회 시상까지 인문과학상과 자연과학상으로 나누어 수여하다가, 이후 학술상으로 통합되었다. 1995년부터 다시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분야로 분리되었다. 학술상과 예술상 외에 기술상과 근로상도 시상한다.

2. 2. 1. 초기 (1960-1970년대)

초기에는 본상으로 다음 상들을 시상하였다.[1]

  • 학술상: 인문과학, 자연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수여하였다.
  • 기술상: 산업 전반에 걸쳐 건설 과정에서 획기적인 발명이나 새로운 고안 등 창의성을 발휘한 사람에게 수여하였다.
  • 문화예술상: 문화,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수여하였다.
  • 근로건설상: 육체 노동자, 직접 농경에 종사하는 농민,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이하의 교직에 종사하는 교원 중 직책에 충실하고 뛰어난 창의성을 발휘하여 타의 모범이 되고 지역사회에 봉사한 사람에게 수여하였다.


학술상은 제7회 시상까지 인문과학상과 자연과학상으로 나누어 시상하다가 이후 학술상으로 통합되었다. 1995년부터 다시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분야로 분리되었다. 학술상과 예술상 외에 기술상과 근로상도 시상하였다.

2. 2. 2. 발전 (1980-1990년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3·1 문화상은 변화와 발전을 겪었다. 초기에는 학술상(인문과학, 자연과학), 기술상, 문화예술상, 근로건설상 부문으로 시상했다.[1] 학술상은 제7회 시상까지 인문과학상과 자연과학상으로 나누어 시상하다가 이후 학술상으로 통합되었으며, 1995년부터 다시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분야로 분리되었다.[1] 기술상은 산업 전반의 건설 과정에서 획기적인 발명이나 창의성을 발휘한 사람에게 수여되었고, 문화예술상은 문화, 예술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수여되었다.[1] 근로건설상은 육체 노동자, 농민, 국민학교 이하 교원 중 직책에 충실하고 창의적인 활동으로 타의 모범이 되어 인리향당에 봉사한 사람에게 수여되었다.[1]

2. 2. 3. 현재 (2000년대 이후)

학술상은 제7회 시상까지 인문과학상과 자연과학상으로 나누어 수여하다가, 이후 학술상으로 통합되었다. 1995년부터 다시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분야로 분리되었다. 학술상과 예술상 외에 기술상과 근로상도 시상한다.[1]

3. 심사 및 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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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수심사위원장부위원장심사위원
창립김병로, 김법린, 김윤경, 김동일, 김동성, 김팔봉, 백낙진, 박동길, 박종화, 안동혁, 이원혁, 이원처, 이인기, 이상은, 이병도, 이희승, 이종우, 정구충, 조백현, 최규남[2]
1기이병도안동혁인문과학부장: 이희승, 자연과학부장: 윤일선, 기술부장: 윤일중, 예술부장: 김팔봉, 근로건설부장: 이관구[3]
2기이희승김두헌



창립 심사위원 김병로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인물로, 이승만 정권에 맞서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려 노력한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하다. 이병도는 대표적인 친일 역사학자로, 식민사관을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희승은 국어학자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에 기여했다.

3. 1. 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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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수심사위원장부위원장심사위원
창립김병로, 김법린, 김윤경, 김동일, 김동성, 김팔봉, 백낙진, 박동길, 박종화, 안동혁, 이원혁, 이원처, 이인기, 이상은, 이병도, 이희승, 이종우, 정구충, 조백현, 최규남[2]
1기이병도안동혁인문과학부장: 이희승, 자연과학부장: 윤일선, 기술부장: 윤일중, 예술부장: 김팔봉, 근로건설부장: 이관구[3]
2기이희승김두헌



```

창립 심사위원 김병로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인물로, 이승만 정권에 맞서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려 노력한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하다. 이병도는 대표적인 친일 역사학자로, 식민사관을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희승은 국어학자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에 기여했다.

3. 1. 1. 역대 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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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수심사위원장부위원장심사위원
창립김병로, 김법린, 김윤경, 김동일, 김동성, 김팔봉, 백낙진, 박동길, 박종화, 안동혁, 이원혁, 이원처, 이인기, 이상은, 이병도, 이희승, 이종우, 정구충, 조백현, 최규남[2]
1기이병도안동혁인문과학부장: 이희승, 자연과학부장: 윤일선, 기술부장: 윤일중, 예술부장: 김팔봉, 근로건설부장: 이관구[3]
2기이희승김두헌



```

창립 심사위원 김병로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인물로, 이승만 정권에 맞서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려 노력한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하다. 이병도는 대표적인 친일 역사학자로, 식민사관을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희승은 국어학자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에 기여했다.

3. 2. 시상 부문

3·1 문화상의 시상 부문은 다음과 같다.

### 학술 부문

1960년 이혜구 서울대 음악대학 교수가 국악에 관한 연구로 장려상을 수상했다.[1] 1962년에는 이숭녕 서울대 문리대 교수가 국문학논고 외의 업적으로 본상을 수상했다.[2] 1963년에는 유홍렬 서울대 문리대 교수와 김형규 서울대 사범대 교수가 각각 한국천주교회사, 국어사 연구로 장려상을 수상했다.[3] 1965년에는 김원용 서울대 문리대 교수가 울릉도의 고고학적 연구로 본상을 수상했다.[4] 1966년 김동욱 연세대 문리대 교수가 춘향전 연구로 장려상을 수상했다.[5]

1967년 유창균 대구대학 국문학 부교수가 동국정음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6] 1968년에는 권이혁 서울대 의대 교수가 도시인구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7] 1969년 백운하 서울대 농대 교수가 한국의 진딧물류에 관한 연구로, 1970년 국립박물관이 한국 지석묘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8][9] 1972년 남광우 중앙대 교수가 "조선", "이조", "한자음의 연구"로, 1973년 권영대 서울대 문리대 교수가 광증폭장치의 전계발광에 관한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10][11]

1976년 김병철 중앙대 교수가 한국근대번역문학사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12] 1978년 정문기 문공부 문화재위원회 부위원장이 한국어도보 연구로, 1979년 이영균 서울대 의대 교수가 심장질환의 외과적요법에 관한 연구로, 1980년 정병욱 서울대 인문대 교수가 [한국고전시가론] 및 [한국고전의 재인식]으로 학술상을 수상했다.[13][14][15] 1981년 이승원 원자력산업회의 이사가 전동차주전동기 개발 연구 외 업적으로, 1982년 송희성 서울대 자연과학대 교수가 입자물리학 연구로, 1983년 신용하 서울대 사회과학대 교수가 한국근대사회사상사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16][17][18]

1984년 조규철 가톨릭의대 교수가 신장약리학 연구로, 1985년 이기문 서울대 인문대 교수가 국어음운사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19][20] 1986년 윤탁구 원자력병원장이 홍삼의 암 예방효과에 관한 연구로, 1987년 이광린 서강대 사학과 교수가 한국개화사의 제문제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21][22] 1988년 심상철 한국과학기술원 교수가 유기화합물의 광화확 반응에 대한 연구로, 1989년 최상수 한국민속학연구소장이 한국민속학연구전서 전12권으로 학술상을 수상했다.[23][24]

1990년 조성호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가 자기공명방법에 의한 결정고체의 연구로, 1991년 조성식 고려대 명예교수가 영문법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25][26] 1992년 이재영 한국과학기술원 교수가 재료의 열적, 물리적 특성에 관한 연구로, 1993년 조기준 고려대 명예교수가 한국자본주의 발전사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 1994년 이충희 한국표준과학연구소 연구위원이 온도측정표준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 1996년 안병희 서울대 교수가 국어사 연구로, 1997년 김용직 서울대 교수가 현국현대시사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

1998년 유동식 전 연세대 교수가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연구로, 1999년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가 한국경제의 불평등 분석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 2000년 이기동 동국대 사학과 교수가 신라사회사 연구로,[5] 2001년 김영모 중앙대 교수가 한국 중산층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6] 2003년 유봉학 한신대 교수가 조선후기 학계와 지식인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7] 2004년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가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로,[8] 2006년 김광순 경북대 명예교수가 한국고전문학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9]

2007년 유성준 한국외대 중국어과 교수가 당시연구 및 한중시 비교연구로,[9] 2008년 박우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경제학의 기본원리 분석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9] 2009년 고영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민족어의 수호와 발전에 기여하여 학술상을 수상했다.[10] 2010년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일제식민주의로 왜곡된 민족사 바로잡기에 기여하여 학술상을 수상했다.[11] 2012년 최종고 서울대 법대 교수가 세계화시대의 한국과 동아시아법철학의 성립에 기여하여 학술상을 수상했다.[13]

2013년 이한구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객관주의 역사학의 정당화를 통해 현대 역사철학의 새로운 장을 열어 학술상을 수상했다.[14] 2014년 남풍현 단국대 명예교수가 구결, 이두, 향찰, 자료를 발굴 해독하여 학술상을 수상했다.[15] 2015년 오병남 서울대 명예교수가 한국 미학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여 학술상을 수상했다.[16] 2016년 김화경 영남대 명예교수가 일본 사료를 통한 독도의 영유권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 이는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연구로 평가된다.[17]

2017년 김인준 서울대 명예교수가 경제위기에 관한 거시경제적 실증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18] 2018년 이승재 서울대 교수가 고대 국어 연구의 선도적 업적으로 학술상을 수상했다.[19] 2020년 박희병 서울대학교 교수가 통합인문학으로써 한국학 연구의 선도적 업적으로 학술상을 수상했다.[21] 2021년 이성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중국 고대국가의 통치와 문명을 창의적으로 해석하여 학술상을 수상했다.[22] 2022년 심경호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소학을 바탕으로 한 심도깊은 한문학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23] 2024년 곽충구 서강대학교 교수가 아시아 전역 이주 한인의 한국어를 집대성한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25]

### 예술 부문

1960년 도상봉이 예술원 회원으로서 명륜당 추경으로 본상을 수상했다.[1] 1961년에는 윤석중이 새싹회 대표로서 [엄마손] 등을 창작하여 본상을 받았다.[2] 1962년에는 염상섭이 예술원 종신회원으로서 얼룩진 시대풍경 외 작품으로 본상을 수상했다.[3] 1963년 이상범이 홍익대 명예교수로서 산은촌가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4] 1964년에는 김경승이 이화여대 미대 강사로서 사월학생혁명 기념탑 제작으로 본상을 수상했다.[5] 1965년 김은호가 수도여자사범대학 명예교수로서 군선도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6] 1966년에는 황순원이 경희대 문리대 교수로서 너와 나만의 시간 외 작품으로 본상을 수상했다.[7]

1967년 김동리가 서라벌예술대학 교수로서 창작 까치소리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8] 1968년에는 김인승이 이화여대 미대 학장으로서 제4회 개인전을 열어 본상을 수상했다.[9] 1969년 박영선이 서라벌예술대 교수로서 하일의 연작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10] 1970년에는 박두진이 우석대 부교수로서 청록집 기타 작품으로 본상을 수상했다.[11] 1971년 김기창이 수도여자사범대 미술학과 교수로서 군마 및 부엉이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12] 1972년 조연현이 동국대 교수로서 한국현대문학사 저술로 본상을 받았다.[13] 1973년에는 안수길이 소설가로서 "통로, 부교" 작품으로 본상을 수상했다.[14]

1974년 김동진이 경희대 음대 교수로서 가곡집 [내마음]으로 본상을 받았다.[15] 1975년에는 천경자가 화가로서 "꽃무리, 이탈리아 기행"으로 본상을 수상했다.[16] 1976년 백철이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으로서 진리와 현실로 본상을 받았다.[17] 1977년 백성희가 국립극단 단원으로서 "헨리입센작", "페르귄트" 외 6편 출연으로 본상을 받았다.[18] 1978년에는 이준이 이화여대 미술대학장으로서 작품 [하늘-B] 외로 본상을 수상했다.[19] 1979년 권순형이 서울대 미대 교수로서 [황금 유화기]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20]

1980년 모윤숙이 한국펜클럽 회장으로서 영운 모윤숙전집 중 [황룡사구층탑] 및 [논개]로 본상을 받았다.[21] 1981년에는 김성태가 서울대 명예교수로서 축전교정곡 [빛나라 내조국] 중 1. 영원한 보금자리, 2. 오늘도 탑을 쌓고, 3. 우렁찬 나팔소리로 본상을 수상했다.[22] 1982년 김달성이 단국대 사범대 교수로서 교성곡 [남해찬가]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23] 1983년에는 최정희가 '삼천리'지 사원으로서 창작 [화투기] 외로 본상을 수상했다.[24] 1984년 박화성이 예술원 원로회원으로서 단편 [미로]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25]

1985년 유경채가 서울대 미대 교수로서 [날] 시리즈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26] 1986년에는 김원이 홍익대 미대 명예교수로서 [설봉] 외 작품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1987년이주홍이 부산수산대학 명예교수로서 중편소설 [깃발이 가는 곳을 향하여]로 본상을 받았다. 1988년 정한숙이 고려대 교수로서 단편 [안개거리]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 1989년에는 한무숙이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서 창작집 [생인손] 외로 본상을 수상했다.

1990년 조병화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으로서 조병화 시 문학전집(10권)으로 본상을 받았다. 1991년에는 최덕휴가 경희대 명예교수로서 [향원정의 설경] 외 작품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1992년 김남조가 숙명여대 교수로서 [목숨] 등 20여권의 시집 외 수필 다수로 본상을 받았다. 1993년 김순애가 예술원 회원으로서 오페라 [직녀직녀여], [관현악을 위한 비곡]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 1994년에는 권옥연이 예술원 회원으로서 [달맞이 꽃] 외 작품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1995년 김동원이 예술원 회원으로서 전통민족연극 발전에 공헌하여 본상을 받았다. 1996년에는 박연희가 예술원 회원으로서 장편소설 [왕도] 외 작품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1997년 강신재가 예술원 회원으로서 역사소설 [광해의 날들]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 1998년 박민종이 예술원 회원으로서 바이올린 연주 및 작곡 활동으로 본상을 받았다. 1999년에는 유현목이 예술원 회원으로서 한국영화미학의 선구적 개척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2000년 박노수가 예술원 회원으로서 [수하 백마] 작품의 세계로 본상을 받았다. 2001년에는 홍윤숙이 예술원 회원으로서 "[조선의 꽃], [마지막 공부]" 외 작품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2002년 안형일이 서울대 명예교수로서 한국 오페라 활성화 운동의 선구적 역할로 본상을 받았다. 2003년 전숙희가 예술원 회원으로서 한국 문학의 활성화에 선구적 역할로 본상을 받았다. 2004년에는 박석환이 화가로서 아름다운 서울 작품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2005년 차범석이 예술원 회원으로서 희곡 창작과 민족연극예술의 선구적 역할로 본상을 받았다. 2006년 장혜원이 이화여대 명예교수로서 피아노연주 및 음반활동으로 본상을 받았다. 2007년에는 이어령중앙일보 상임고문으로서 문화 창달의 선두주자로 본상을 수상했다. 2008년 유희영이 이화여대 명예교수로서 "생면추상작품", "작품 95-1, 작품 2000-R"로 본상을 받았다. 2009년 이영자가 한국여성작곡가회 명예회장으로서 작곡 및 연주 활동으로 본상을 받았다.

2010년 이인영이 서울대 명예교수로서 오페라와 성악교육의 선구적 역할로 본상을 받았다. 2011년에는 조수호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서 한국서예교육의 선도자 국제화 선봉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2012년 이호철이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서 한국분단문학의 큰 산으로 본상을 받았다. 2013년 민경갑이 단국대 예대 석좌교수로서 오늘도 자연에 길을 묻는다로 본상을 받았다. 2014년에는 원정수가 인하대 건축공학과 명예교수로서 건축문화발전에 기여하여 본상을 수상했다.

2015년 나인용이 연세대 명예교수로서 전통음악에 뿌리 둔 현대음악을 작곡하여 본상을 받았다. 2016년 박만규가 한국뮤지컬협회 고문으로서 한국 뮤지컬의 개척과 국제화로 본상을 받았다. 2017년에는 김백봉이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서 한국무용의 고유한 예술적 가치 및 교육체계 정립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2019년 박수길이 한양대학교 명예교수로서 한국 오페라 위상 제고에 헌신한 대표적 바리톤으로 본상을 받았다.

2020년 박정자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서 연극배우로서 한국 연극의 발전에 헌신하여 본상을 받았다. 2021년에는 윤후명이 소설가로서 집요한 절대 자아의 추구와 독보적인 개인주체의 발견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2022년 구본창이 사진작가로서 사진을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개척한 작가 겸 전시기획자로 본상을 받았다. 2023년 김대진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으로서 한국 클래식 음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연주가·예술행정가·교육자로 본상을 받았다. 2024년에는 김영재가 국악인으로서 전통음악의 올바른 전승·발전과 교육에 헌신하여 본상을 수상했다.

### 기술 부문

1960년 최경열(대한토목학회장, 학술원 회원)이 토목관계, 이종근(중앙공업연구소 요업과장)이 요업부문 연구, 지철근(서울공대 조교수)이 전기공업, 박춘명(박춘명 건축연구소 소장)이 건축문화발전 공로로 각각 기술상 장려상을 수상했다.[1]

1961년 송계범(국립공업연구소 응용물리실 근무)이 보류식 한글, 텔레타이프 발명으로 기술상 본상을 수상했다.[2]

1962년 이범순(국립공업연구소 기감)이 화학기술분야의 제연구발명 및 기술지도, 김만종(무연탄고열공업주식회사 부사장)이 무연탄의 와사화 연소법 개발로 각각 기술상 장려상을 수상했다.[3]

1963년 김유선(강원탄광소장)이 수직항의 설계 등의 공로로 기술상 본상을 수상했다.[4]

1964년 현신규(농촌진흥청장)가 임목육종 연구로 기술상 본상을 수상했다.[5]

1965년 최형섭(원자력원 원자력연구소 소장)이 한국산 중사로 지르코늄 제련 연구로 기술상 장려상을 수상했다.[6]

1968년 김로수((주)한국기계공업 부사장)가 기중기 설계 제작으로 기술상을 수상했다.[9]

1969년 김재근(서울대 공대 교수)이 고속정 설계 등의 공로로 기술상을 수상했다.[10]

1971년 (주)한국유리공업 기술팀이 판유리 제조기술의 개혁 공로로 기술상을 수상했다.[12]

1972년 박달조(콜로라도대 교수)가 불소화학공업 개척으로 기술상을 수상했다.[13]

1974년 안병성(한국과학기술연구소)이 탁자전자계산기의 개발로 기술상을 수상했다.[15]

1975년 박현우((주)한국주철관공업 전무이사)가 닥타일주철관 개발생산으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16]

1977년 정만영(한국과학기술연구소 제2연구담당 부소장)이 V.V.C. 다이오드의 이용개발 연구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18]

1979년 김춘수(한국과학기술연구소 식품, 생물공학 연구부장)가 누에 인공사료 개발연구 등의 공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20]

1980년 채영복(한국과학기술연구소 응용화학연구부장)이 농약국산화를 위한 연구 및 산업화 공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21]

1981년 (주)동양시멘트공업 남기동 기술팀이 시멘트공장에서의 소성연료대체를 위한 기술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22]

1982년 민계식((주)대우조선공업 기술담당 이사)이 선형개발 및 추진성능 연구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23]

1983년 장성도(한국과학기술원 요업재료연구실장)가 요업재료에 관한 연구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24]

1984년 이재숙((주)코오롱종합전기 전무이사)이 송전철탑제작기술개발로 국산화 및 수출 촉진에 기여하여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25]

1985년 안수한(서울대 공대 교수)이 한강하류부 수리모형실험 등의 공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26]

1986년 이세중((주)대우조선공업 전무이사)이 해수처리 해상공장건설 기술개발 및 해상구조물 프로젝트 해외시장 개척으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1987년 양재규((주)삼성전자 생산기술연구소 소장)가 생산기술력제고 및 원가절감을 위한 설비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1988년 장낙용((주)현대자동차 울산공장 공장장)이 자동차공장 자동화 및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여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1989년 이주형((주)삼성전자 정보통신부문 종합연구소 소장)이 고부가가치의 전전자식 대용량교환기 및 각종 통신기기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1990년 장세창((주)이천전기공업 사장)이 초대형 고속 고압전동기의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1991년 박성규((주)대우통신 사장)가 고부가가치의 개인용 컴퓨터 및 각종 통신기기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1992년 유건희(금성사 금성생산기술연구소장)가 유연생산 시스템에 대응한 범용조립 CELL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1993년 최주(한국과학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가 신내열합금의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1994년 이충구((주)현대자동차 기술개발담당 부사장)가 자동차 산업의 핵심기술 독자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1995년 이승규((주)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제조본부장)가 세계 최초 반도체 8Inch wafer 양산라인 및 16M DRAM 양산 공정기술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1996년 박건유(한국과학기술연구소 환경CFC연구원장)가 불화탄소 제조공정개발과 기본설계 기술 향상에 기여하여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1998년 정영태((주)대한유화공업 기술연구소장)가 HDPE 고밀도 폴리에틸렌용 고활성 촉매 및 중합공정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1999년 김정엽(한국과학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이 용해성합성금속과 발광고분자의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2000년 김호기(한국과학기술원 교수)가 전자세라믹스 부품의 개발 및 국산화 공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2001년 박항구((주)현대전자산업 부사장)가 세계 최초 CDMA 이동통신 시스템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2002년 이덕출(인하대 교수)이 기상성장법을 이용한 고분자박막과 반도체 제조공정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2003년 손욱(삼성종합기술원장)이 제4세대 연구혁신을 통한 세계 최초의 4컬러 원천기술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2005년 김영하(한국과학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가 생체의료용 고분자기술 연구 및 첨단 의료제품의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2007년 안규홍(한국과학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이 하폐수 초고도 처리용 Nano-Bio 분리막 공정 및 KIKEA 공정의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2008년 권익현((주)효성기술원 상용화연구소 연구소장)이 PEN(Poly Ethlene Naphthalate)의 원료인 NDA 제조공정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2009년 박중현(서울대 명예교수)이 급속여과의 공기발생에 관한 연구 등의 공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2010년 신동식((주)한국해사기술 회장)이 해양특수선 개발 및 상용화 공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2011년 김문한(서울대 명예교수)이 건설기술의 개발과 건설산업 발전의 선구자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2012년 이창건(한국원자력문화진흥원 원장)이 원자력기술자립 추진과 전력산업기술기준 제정 책임 공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2013년 구민세(인하대 명예교수)가 경제적이며 장지간화 된 거더 교량 건설기술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2015년 이동호(경북대 명예교수)가 폴리올레핀 중합 촉매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2017년 서승우(서울대 교수)가 자율주행자동차를 위한 3차원 고정밀지도 제작기술 등 핵심기술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2018년 성영철(포항공대 교수·(주)제넥신 회장)이 Bio의약품 연구 개발 및 기술 수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2019년 서진호(서울대학교 교수)가 식품 소재의 친환경적 생산이 가능한 미생물 공장화 기술 개발하여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2020년 조동우(포항공대 교수)가 조직 특이적 바이오 잉크 최초 개발 및 실용 기술 구현으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2021년 안종현(연세대 교수)이 이차원 나노소재 개발 및 플렉서블 웨어러블 전자소자 적용 기술 구현으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2022년 이경무(서울대 교수)가 인공지능 연구를 선도하는 세계적 석학으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2023년 송재복(고려대 교수)가 세계적 수준의 로봇 기술 개발

3. 2. 1. 학술 부문

1960년 이혜구 서울대 음악대학 교수가 국악에 관한 연구로 장려상을 수상했다.[1] 1962년에는 이숭녕 서울대 문리대 교수가 국문학논고 외의 업적으로 본상을 수상했다.[2] 1963년에는 유홍렬 서울대 문리대 교수와 김형규 서울대 사범대 교수가 각각 한국천주교회사, 국어사 연구로 장려상을 수상했다.[3] 1965년에는 김원용 서울대 문리대 교수가 울릉도의 고고학적 연구로 본상을 수상했다.[4] 1966년 김동욱 연세대 문리대 교수가 춘향전 연구로 장려상을 수상했다.[5]

1967년 유창균 대구대학 국문학 부교수가 동국정음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6] 1968년에는 권이혁 서울대 의대 교수가 도시인구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7] 1969년 백운하 서울대 농대 교수가 한국의 진딧물류에 관한 연구로, 1970년 국립박물관이 한국 지석묘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8][9] 1972년 남광우 중앙대 교수가 "조선", "이조", "한자음의 연구"로, 1973년 권영대 서울대 문리대 교수가 광증폭장치의 전계발광에 관한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10][11]

1976년 김병철 중앙대 교수가 한국근대번역문학사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12] 1978년 정문기 문공부 문화재위원회 부위원장이 한국어도보 연구로, 1979년 이영균 서울대 의대 교수가 심장질환의 외과적요법에 관한 연구로, 1980년 정병욱 서울대 인문대 교수가 [한국고전시가론] 및 [한국고전의 재인식]으로 학술상을 수상했다.[13][14][15] 1981년 이승원 원자력산업회의 이사가 전동차주전동기 개발 연구 외 업적으로, 1982년 송희성 서울대 자연과학대 교수가 입자물리학 연구로, 1983년 신용하 서울대 사회과학대 교수가 한국근대사회사상사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16][17][18]

1984년 조규철 가톨릭의대 교수가 신장약리학 연구로, 1985년 이기문 서울대 인문대 교수가 국어음운사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19][20] 1986년 윤탁구 원자력병원장이 홍삼의 암 예방효과에 관한 연구로, 1987년 이광린 서강대 사학과 교수가 한국개화사의 제문제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21][22] 1988년 심상철 한국과학기술원 교수가 유기화합물의 광화확 반응에 대한 연구로, 1989년 최상수 한국민속학연구소장이 한국민속학연구전서 전12권으로 학술상을 수상했다.[23][24]

1990년 조성호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가 자기공명방법에 의한 결정고체의 연구로, 1991년 조성식 고려대 명예교수가 영문법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25][26] 1992년 이재영 한국과학기술원 교수가 재료의 열적, 물리적 특성에 관한 연구로, 1993년 조기준 고려대 명예교수가 한국자본주의 발전사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 1994년 이충희 한국표준과학연구소 연구위원이 온도측정표준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 1996년 안병희 서울대 교수가 국어사 연구로, 1997년 김용직 서울대 교수가 현국현대시사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

1998년 유동식 전 연세대 교수가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연구로, 1999년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가 한국경제의 불평등 분석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 2000년 이기동 동국대 사학과 교수가 신라사회사 연구로,[5] 2001년 김영모 중앙대 교수가 한국 중산층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6] 2003년 유봉학 한신대 교수가 조선후기 학계와 지식인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7] 2004년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가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로,[8] 2006년 김광순 경북대 명예교수가 한국고전문학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9]

2007년 유성준 한국외대 중국어과 교수가 당시연구 및 한중시 비교연구로,[9] 2008년 박우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경제학의 기본원리 분석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9] 2009년 고영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민족어의 수호와 발전에 기여하여 학술상을 수상했다.[10] 2010년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일제식민주의로 왜곡된 민족사 바로잡기에 기여하여 학술상을 수상했다.[11] 2012년 최종고 서울대 법대 교수가 세계화시대의 한국과 동아시아법철학의 성립에 기여하여 학술상을 수상했다.[13]

2013년 이한구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객관주의 역사학의 정당화를 통해 현대 역사철학의 새로운 장을 열어 학술상을 수상했다.[14] 2014년 남풍현 단국대 명예교수가 구결, 이두, 향찰, 자료를 발굴 해독하여 학술상을 수상했다.[15] 2015년 오병남 서울대 명예교수가 한국 미학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여 학술상을 수상했다.[16] 2016년 김화경 영남대 명예교수가 일본 사료를 통한 독도의 영유권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 이는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연구로 평가된다.[17]

2017년 김인준 서울대 명예교수가 경제위기에 관한 거시경제적 실증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18] 2018년 이승재 서울대 교수가 고대 국어 연구의 선도적 업적으로 학술상을 수상했다.[19] 2020년 박희병 서울대학교 교수가 통합인문학으로써 한국학 연구의 선도적 업적으로 학술상을 수상했다.[21] 2021년 이성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중국 고대국가의 통치와 문명을 창의적으로 해석하여 학술상을 수상했다.[22] 2022년 심경호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소학을 바탕으로 한 심도깊은 한문학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23] 2024년 곽충구 서강대학교 교수가 아시아 전역 이주 한인의 한국어를 집대성한 연구로 학술상을 수상했다.[25]

3. 2. 2. 예술 부문

1960년 도상봉이 예술원 회원으로서 명륜당 추경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1961년에는 윤석중이 새싹회 대표로서 [엄마손] 등을 창작하여 본상을 받았다. 1962년에는 염상섭이 예술원 종신회원으로서 얼룩진 시대풍경 외 작품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1963년 이상범이 홍익대 명예교수로서 산은촌가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 1964년에는 김경승이 이화여대 미대 강사로서 사월학생혁명 기념탑 제작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1965년 김은호가 수도여자사범대학 명예교수로서 군선도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 1966년에는 황순원이 경희대 문리대 교수로서 너와 나만의 시간 외 작품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1967년 김동리가 서라벌예술대학 교수로서 창작 까치소리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 1968년에는 김인승이 이화여대 미대 학장으로서 제4회 개인전을 열어 본상을 수상했다. 1969년 박영선이 서라벌예술대 교수로서 하일의 연작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 1970년에는 박두진이 우석대 부교수로서 청록집 기타 작품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1971년 김기창이 수도여자사범대 미술학과 교수로서 군마 및 부엉이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 1972년 조연현이 동국대 교수로서 한국현대문학사 저술로 본상을 받았다. 1973년에는 안수길이 소설가로서 "통로, 부교" 작품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1974년 김동진이 경희대 음대 교수로서 가곡집 [내마음]으로 본상을 받았다. 1975년에는 천경자가 화가로서 "꽃무리, 이탈리아 기행"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1976년 백철이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으로서 진리와 현실로 본상을 받았다. 1977년 백성희가 국립극단 단원으로서 "헨리입센작", "페르귄트" 외 6편 출연으로 본상을 받았다. 1978년에는 이준이 이화여대 미술대학장으로서 작품 [하늘-B] 외로 본상을 수상했다. 1979년 권순형이 서울대 미대 교수로서 [황금 유화기]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

1980년 모윤숙이 한국펜클럽 회장으로서 영운 모윤숙전집 중 [황룡사구층탑] 및 [논개]로 본상을 받았다. 1981년에는 김성태가 서울대 명예교수로서 축전교정곡 [빛나라 내조국] 중 1. 영원한 보금자리, 2. 오늘도 탑을 쌓고, 3. 우렁찬 나팔소리로 본상을 수상했다. 1982년 김달성이 단국대 사범대 교수로서 교성곡 [남해찬가]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 1983년에는 최정희가 '삼천리'지 사원으로서 창작 [화투기] 외로 본상을 수상했다. 1984년 박화성이 예술원 원로회원으로서 단편 [미로]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

1985년 유경채가 서울대 미대 교수로서 [날] 시리즈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 1986년에는 김원이 홍익대 미대 명예교수로서 [설봉] 외 작품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1987년이주홍이 부산수산대학 명예교수로서 중편소설 [깃발이 가는 곳을 향하여]로 본상을 받았다. 1988년 정한숙이 고려대 교수로서 단편 [안개거리]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 1989년에는 한무숙이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서 창작집 [생인손] 외로 본상을 수상했다.

1990년 조병화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으로서 조병화 시 문학전집(10권)으로 본상을 받았다. 1991년에는 최덕휴가 경희대 명예교수로서 [향원정의 설경] 외 작품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1992년 김남조가 숙명여대 교수로서 [목숨] 등 20여권의 시집 외 수필 다수로 본상을 받았다. 1993년 김순애가 예술원 회원으로서 오페라 [직녀직녀여], [관현악을 위한 비곡]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 1994년에는 권옥연이 예술원 회원으로서 [달맞이 꽃] 외 작품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1995년 김동원이 예술원 회원으로서 전통민족연극 발전에 공헌하여 본상을 받았다. 1996년에는 박연희가 예술원 회원으로서 장편소설 [왕도] 외 작품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1997년 강신재가 예술원 회원으로서 역사소설 [광해의 날들] 외 작품으로 본상을 받았다. 1998년 박민종이 예술원 회원으로서 바이올린 연주 및 작곡 활동으로 본상을 받았다. 1999년에는 유현목이 예술원 회원으로서 한국영화미학의 선구적 개척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2000년 박노수가 예술원 회원으로서 [수하 백마] 작품의 세계로 본상을 받았다.[5] 2001년에는 홍윤숙이 예술원 회원으로서 "[조선의 꽃], [마지막 공부]" 외 작품으로 본상을 수상했다. 2002년 안형일이 서울대 명예교수로서 한국 오페라 활성화 운동의 선구적 역할로 본상을 받았다.[6] 2003년 전숙희가 예술원 회원으로서 한국 문학의 활성화에 선구적 역할로 본상을 받았다. 2004년에는 박석환이 화가로서 아름다운 서울 작품으로 본상을 수상했다.[7]

2005년 차범석이 예술원 회원으로서 희곡 창작과 민족연극예술의 선구적 역할로 본상을 받았다.[8] 2006년 장혜원이 이화여대 명예교수로서 피아노연주 및 음반활동으로 본상을 받았다. 2007년에는 이어령중앙일보 상임고문으로서 문화 창달의 선두주자로 본상을 수상했다. 2008년 유희영이 이화여대 명예교수로서 "생면추상작품", "작품 95-1, 작품 2000-R"로 본상을 받았다.[9] 2009년 이영자가 한국여성작곡가회 명예회장으로서 작곡 및 연주 활동으로 본상을 받았다.[10]

2010년 이인영이 서울대 명예교수로서 오페라와 성악교육의 선구적 역할로 본상을 받았다.[11] 2011년에는 조수호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서 한국서예교육의 선도자 국제화 선봉으로 본상을 수상했다.[12] 2012년 이호철이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서 한국분단문학의 큰 산으로 본상을 받았다.[13] 2013년 민경갑이 단국대 예대 석좌교수로서 오늘도 자연에 길을 묻는다로 본상을 받았다.[14] 2014년에는 원정수가 인하대 건축공학과 명예교수로서 건축문화발전에 기여하여 본상을 수상했다.[15]

2015년 나인용이 연세대 명예교수로서 전통음악에 뿌리 둔 현대음악을 작곡하여 본상을 받았다.[16] 2016년 박만규가 한국뮤지컬협회 고문으로서 한국 뮤지컬의 개척과 국제화로 본상을 받았다.[17] 2017년에는 김백봉이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서 한국무용의 고유한 예술적 가치 및 교육체계 정립으로 본상을 수상했다.[18] 2019년 박수길이 한양대학교 명예교수로서 한국 오페라 위상 제고에 헌신한 대표적 바리톤으로 본상을 받았다.[20]

2020년 박정자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서 연극배우로서 한국 연극의 발전에 헌신하여 본상을 받았다.[21] 2021년에는 윤후명이 소설가로서 집요한 절대 자아의 추구와 독보적인 개인주체의 발견으로 본상을 수상했다.[22] 2022년 구본창이 사진작가로서 사진을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개척한 작가 겸 전시기획자로 본상을 받았다.[23] 2023년 김대진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으로서 한국 클래식 음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연주가·예술행정가·교육자로 본상을 받았다.[24] 2024년에는 김영재가 국악인으로서 전통음악의 올바른 전승·발전과 교육에 헌신하여 본상을 수상했다.[25]

3. 2. 3. 기술 부문

1960년 최경열(대한토목학회장, 학술원 회원)이 토목관계, 이종근(중앙공업연구소 요업과장)이 요업부문 연구, 지철근(서울공대 조교수)이 전기공업, 박춘명(박춘명 건축연구소 소장)이 건축문화발전 공로로 각각 기술상 장려상을 수상했다.[5]

1961년 송계범(국립공업연구소 응용물리실 근무)이 보류식 한글, 텔레타이프 발명으로 기술상 본상을 수상했다.[5]

1962년 이범순(국립공업연구소 기감)이 화학기술분야의 제연구발명 및 기술지도, 김만종(무연탄고열공업주식회사 부사장)이 무연탄의 와사화 연소법 개발로 각각 기술상 장려상을 수상했다.[5]

1963년 김유선(강원탄광소장)이 수직항의 설계 등의 공로로 기술상 본상을 수상했다.[5]

1964년 현신규(농촌진흥청장)가 임목육종 연구로 기술상 본상을 수상했다.[5]

1965년 최형섭(원자력원 원자력연구소 소장)이 한국산 중사로 지르코늄 제련 연구로 기술상 장려상을 수상했다.[5]

1968년 김로수((주)한국기계공업 부사장)가 기중기 설계 제작으로 기술상을 수상했다.[5]

1969년 김재근(서울대 공대 교수)이 고속정 설계 등의 공로로 기술상을 수상했다.[5]

1971년 (주)한국유리공업 기술팀이 판유리 제조기술의 개혁 공로로 기술상을 수상했다.[5]

1972년 박달조(콜로라도대 교수)가 불소화학공업 개척으로 기술상을 수상했다.[5]

1974년 안병성(한국과학기술연구소)이 탁자전자계산기의 개발로 기술상을 수상했다.[5]

1975년 박현우((주)한국주철관공업 전무이사)가 닥타일주철관 개발생산으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1977년 정만영(한국과학기술연구소 제2연구담당 부소장)이 V.V.C. 다이오드의 이용개발 연구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1979년 김춘수(한국과학기술연구소 식품, 생물공학 연구부장)가 누에 인공사료 개발연구 등의 공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1980년 채영복(한국과학기술연구소 응용화학연구부장)이 농약국산화를 위한 연구 및 산업화 공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1981년 (주)동양시멘트공업 남기동 기술팀이 시멘트공장에서의 소성연료대체를 위한 기술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1982년 민계식((주)대우조선공업 기술담당 이사)이 선형개발 및 추진성능 연구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1983년 장성도(한국과학기술원 요업재료연구실장)가 요업재료에 관한 연구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1984년 이재숙((주)코오롱종합전기 전무이사)이 송전철탑제작기술개발로 국산화 및 수출 촉진에 기여하여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1985년 안수한(서울대 공대 교수)이 한강하류부 수리모형실험 등의 공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1986년 이세중((주)대우조선공업 전무이사)이 해수처리 해상공장건설 기술개발 및 해상구조물 프로젝트 해외시장 개척으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1987년 양재규((주)삼성전자 생산기술연구소 소장)가 생산기술력제고 및 원가절감을 위한 설비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1988년 장낙용((주)현대자동차 울산공장 공장장)이 자동차공장 자동화 및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여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1989년 이주형((주)삼성전자 정보통신부문 종합연구소 소장)이 고부가가치의 전전자식 대용량교환기 및 각종 통신기기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1990년 장세창((주)이천전기공업 사장)이 초대형 고속 고압전동기의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1991년 박성규((주)대우통신 사장)가 고부가가치의 개인용 컴퓨터 및 각종 통신기기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1992년 유건희(금성사 금성생산기술연구소장)가 유연생산 시스템에 대응한 범용조립 CELL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1993년 최주(한국과학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가 신내열합금의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1994년 이충구((주)현대자동차 기술개발담당 부사장)가 자동차 산업의 핵심기술 독자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1995년 이승규((주)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제조본부장)가 세계 최초 반도체 8Inch wafer 양산라인 및 16M DRAM 양산 공정기술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1996년 박건유(한국과학기술연구소 환경CFC연구원장)가 불화탄소 제조공정개발과 기본설계 기술 향상에 기여하여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1998년 정영태((주)대한유화공업 기술연구소장)가 HDPE 고밀도 폴리에틸렌용 고활성 촉매 및 중합공정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1999년 김정엽(한국과학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이 용해성합성금속과 발광고분자의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2000년 김호기(한국과학기술원 교수)가 전자세라믹스 부품의 개발 및 국산화 공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

2001년 박항구((주)현대전자산업 부사장)가 세계 최초 CDMA 이동통신 시스템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6]

2002년 이덕출(인하대 교수)이 기상성장법을 이용한 고분자박막과 반도체 제조공정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6]

2003년 손욱(삼성종합기술원장)이 제4세대 연구혁신을 통한 세계 최초의 4컬러 원천기술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7]

2005년 김영하(한국과학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가 생체의료용 고분자기술 연구 및 첨단 의료제품의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8]

2007년 안규홍(한국과학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이 하폐수 초고도 처리용 Nano-Bio 분리막 공정 및 KIKEA 공정의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5]

2008년 권익현((주)효성기술원 상용화연구소 연구소장)이 PEN(Poly Ethlene Naphthalate)의 원료인 NDA 제조공정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9]

2009년 박중현(서울대 명예교수)이 급속여과의 공기발생에 관한 연구 등의 공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10]

2010년 신동식((주)한국해사기술 회장)이 해양특수선 개발 및 상용화 공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11]

2011년 김문한(서울대 명예교수)이 건설기술의 개발과 건설산업 발전의 선구자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12]

2012년 이창건(한국원자력문화진흥원 원장)이 원자력기술자립 추진과 전력산업기술기준 제정 책임 공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13]

2013년 구민세(인하대 명예교수)가 경제적이며 장지간화 된 거더 교량 건설기술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14]

2015년 이동호(경북대 명예교수)가 폴리올레핀 중합 촉매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16]

2017년 서승우(서울대 교수)가 자율주행자동차를 위한 3차원 고정밀지도 제작기술 등 핵심기술 개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18]

2018년 성영철(포항공대 교수·(주)제넥신 회장)이 Bio의약품 연구 개발 및 기술 수출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19]

2019년 서진호(서울대학교 교수)가 식품 소재의 친환경적 생산이 가능한 미생물 공장화 기술 개발하여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20]

2020년 조동우(포항공대 교수)가 조직 특이적 바이오 잉크 최초 개발 및 실용 기술 구현으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21]

2021년 안종현(연세대 교수)이 이차원 나노소재 개발 및 플렉서블 웨어러블 전자소자 적용 기술 구현으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22]

2022년 이경무(서울대 교수)가 인공지능 연구를 선도하는 세계적 석학으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23]

2023년 송재복(고려대 교수)가 세계적 수준의 로봇 기술 개발 및 기술 이전을 통한 국내 로봇 산업 발전에 기여하여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24]

2024년 안성훈(서울대 교수)가 적정 스마트 기술을 이용한 효율적인 공학 문제 해결로 기술·공학상을 수상했다.[25]

3. 2. 4. 사회봉사 및 기타 부문

1960년 제1회 시상에서는 김창권(독농, 영농계몽), 김용태(근로∙교원, 고도교육), 김금도(농촌領蒙, 문맹퇴치 외), 김영호(근로∙광부, 광산근로)가 근로상을 수상했다.[1] 1961년 제2회 시상에서는 오정화(근로∙교원, 교육공로), 박문(독농, 문맹퇴치 외), 곽춘만(근로∙등대수, 등대수), 박춘세(근로∙우편집배원, 우편배달)가 근로상을 수상했다.[2] 1962년에는 이선신(사회봉공∙대한적십자사, 사회사업)이 사회봉사상을, 이영복(근로∙대전보선사무소 조치원 재근보선원, 철로보수 외), 정기준(근로∙교통부 총무과 수위장, 수위근속 46년), 강기수(근로∙당인리 화력발전소 기기보수원, 발전소기기의 정상적 유지), 장돈식(독농, 농장건설 외), 이순애(생활개선∙에덴보육원 이사장, 생활개선)가 근로상을 수상했다.[3]

1963년에는 김창기(농촌지도·기곡리 농협협동조합장, 농촌지도), 김필애(사회봉공∙대한적십자사, 사회봉사), 백근식(근로∙철도기관사, 기관사근속 23년), 송석도(독농, 농촌지도)가 수상했다.[4] 1964년에는 이재송(대한해운공사, 항해사), 안인애(사회봉사, 양로원건립 외), 천두호(부산부두화력발전소, 전력공급), 김병렬(농촌지도, 황무지 개간 외), 조태호(경성방직주식회사, 공장시설 개선 외), 남상돈(독농∙농촌지도, 다수확재배 외)이 수상했다.[5] 1965년에는 김이만(임업시험장 수목계 고문, 수목표본 작성), 김복만(대전 기관차사무소, 기관차수리 외), 최종진(인천공작창, 객화차생산 증대), 임순도(사회봉사, 고아 등 수용보호 사업)가 수상했다.[6]

1966년에는 복태봉(농촌지도, 대산면 운교리 농업협동조합장, 농촌재건 외), 김정주(독농, 다각영농방법 외), 김영서(간척, (사)한국정착사업개발흥업회 회장, 대간척지조성 외), 공민길(한국전력주식회사, 전력난 해소)이 수상했다.[7] 1968년에는 김귀근(금일동국민학교 장도분교, 장도개발)이 사회봉사상을 받았다.[9] 1969년에는 박영래(부산 재활촌 회장, 재활촌 건립)가 사회봉사상을 받았다.[10] 1970년에는 김성근(양주군 노숙자보호소장, 노숙자 및 부랑아 보호 선도)이 사회봉사상을 받았다.[11]

1971년에는 배처자(김제여자중고등학교 교장, 선유도 개발)가 사회봉사상을 받았다.[12] 1972년에는 장재진(농산물종합냉동냉장제빙소 창설, 영농방법개선), 김기호(농업, 아주문화관 총무부장, 모범산림의 조성)가 수상했다.[13] 1973년에는 최성덕(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 서울시 이사, 사회봉사)이 사회봉사상을 받았다.[14] 1974년에는 민동기(농업, (사)전국농업기술자협회 이사, 마을양곡 은행창설), 김대호(농업, 새마을 지도자, 새농촌 건설)가 수상했다.[15] 1975년에는 유윤걸(부안경찰서 위도 지서장, 지역사회 개발)이 사회봉사상을 받았다.[16]

1977년에는 홍종식(인천소년연구소 교감, 행형에 보이스카우트를 창설운영하여 교도), 이병린(인천제철 압연부 제3소형공장 직장, 작업개선 및 공장새마을운동)이 수상했다.[18] 1978년에는 정장섭(전국농업기술자협회 전무이사, 농민 계몽운동)이 수상했다.[19] 1979년에는 가산협동마을(가산협동마을 건설)이 사회봉사상을 받았다.[20] 1980년에는 박도현(한협가금육종농장 대표, 종계육종개발)이 수상했다.[21]

1981년에는 정계훈(학교법인 계훈학원 이사장, 교육을 통한 사회봉사)이 사회봉사상을 받았다.[22] 1982년에는 홍윤화(한국전력공사, 전력손실방지 및 수용가봉사)가 수상했다.[23] 1983년에는 최정호(한글활자서체연구소 개설(동아출판사 내), 한글활자원도 제작)가 수상했다.[24] 1984년에는 신석균(한국발명학회 회장, 줄기찬 노력에 의한 다수 실용적 발명)이 특별상을 받았다.[25] 1985년에는 변재락((주)현대중공업 기원, 조선기계가공치공구 개발 및 건조 공정개선)이 수상했다.[26]

1986년에는 유원상((주)동원탄좌개발 사북광업소 사음갱장, 탄광개발기술의 정예화)이 수상했다. 1987년에는 김영수((주)대우전자 구미전자공장 품질관리부 검사과 조장, 독창적인 각종 치구개발)가 수상했다. 1988년에는 양기호((주)한국중공업 주조부 반장, 발전소 및 제철소용 핵심 주강품 소재생산)가 수상했다. 1989년에는 故김우현(사회복지법인 명휘원 이사장)이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1990년에는 김윤동(사회복지법인 안동재활원 원장, 장애자의 재활 및 복지사업)이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1991년에는 이경재(신부 聖라자로마을 원장, 노약, 불구나환자 수용 및 구나사업)가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1992년에는 이태영(한국가정법률 상담소장, 법률구조사업)이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1993년에는 김오곤(대한노인회 충청북도 연합회장, 청소년 선도 및 지역사회발전)이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4. 역대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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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 주요 수상자

삼일문화재단은 매년 학술, 예술, 기술, 사회봉사 등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인물들을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5. 3·1 정신과 사회적 의미

5. 1. 3·1 정신 계승

5. 2. 사회적 영향

5. 3. 미래 과제

6. 유사 시상식

삼일가족(회장 홍상복)과 포항MBC가 공동 주최하는 삼일문화대상이 있다.[26]

참조

[1] 뉴스 1959.6.19 동아일보 동아일보 1959-06-19
[2] 뉴스 1959.12.2 동아일보 동아일보 1959-12-02
[3] 뉴스 1961.10.19 동아일보 동아일보 1961-10-19
[4] 뉴스 1975.2.1.매일경제 매일경제 1975-02-01
[5] 뉴스 제41회 3.1문화상 수상자 발표 https://news.naver.c[...]
[6] 뉴스 제43회 3.1 문화상 수상자 발표 https://news.naver.c[...]
[7] 뉴스 유봉학 윤기현 교수·박석환 화백 ‘3·1문화상’학술·예술부문 수상 https://news.naver.c[...]
[8] 뉴스 최재석씨 등 3·1문화상 https://news.naver.c[...]
[9] 뉴스 동아일보, 삼일문화상 특별상 수상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10] 뉴스 고영근.변수일 교수 등 3.1 문화상 수상 https://news.naver.c[...]
[11] 뉴스 3·1 문화상 이태진·이명철 교수 등 수상 http://news.mk.co.kr[...]
[12] 뉴스 3·1문화상’ 김두철·조수호·김문한씨 선정 http://www.munhwa.co[...]
[13] 뉴스 3·1 문화상에 소설가 이호철씨 등 선정 https://news.naver.c[...]
[14] 뉴스 한구·이기화 교수 등 3·1문화상 수상 https://news.naver.c[...]
[15] 뉴스 삼일문화상 학술·예술부문 수상자 선정 https://news.naver.c[...]
[16] 뉴스 3·1문화상에 오병남·박규택·나인용·이동호 교수 https://news.naver.c[...]
[17] 뉴스 3·1문화상에 서진근·김화경·박만규 https://news.naver.c[...]
[18] 뉴스 3·1문화상에 김인준·김대수·김백봉·서승우 교수 https://news.naver.c[...]
[19] 웹인용 제59회 3·1문화상 수상자 발표 http://news.hankyung[...] 2018-02-06
[20] 뉴스 제60회 3·1문화상 수상자 발표 http://news.kmib.co.[...]
[21] 뉴스 3·1문화상에 박희병·김정한·박정자·조동우 https://news.naver.c[...]
[22] 뉴스 3·1문화상에 이성규·이효철·윤후명·안종현 https://www.yna.co.k[...]
[23] 뉴스 3·1문화상에 심경호·김광수·구본창·이경무 https://www.yna.co.k[...]
[24] 뉴스 조승우·김대진·송재복 제64회 3·1문화상 https://www.chosun.c[...]
[25] 뉴스 3·1문화상에 곽충구·김유수·김영재·안성훈 https://www.yna.co.k[...]
[26] 뉴스 http://www.kbmaei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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