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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튀르 드 고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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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튀르 드 고비노는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작가로, 프랑스 혁명에 반감을 품고 기사도와 중세를 숭배했다. 그는 동양주의에 매료되어 동양 관련 저술을 했으며, 알렉시스 드 토크빌과 교류하며 외무부에서 일했다. 고비노는 '인종 불평등에 관한 시론'에서 인종 간의 차이와 혼혈의 퇴화를 주장하며 인종주의적 이론을 펼쳤다. 그는 외교관으로 스위스, 독일, 페르시아, 그리스, 브라질에서 근무했으며, 각 지역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그의 사상은 여러 국가에 영향을 미쳤지만, 인종주의적 주장은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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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튀르 드 고비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서 조제프 드 고비노의 초상화, 1860년대 경
아서 조제프 드 고비노의 초상화, 1860년대 경
본명조제프 아르튀르 드 고비노
출생1816년 7월 14일
출생지빌다브레, 오드센, 프랑스
사망1882년 10월 13일
사망지토리노, 이탈리아
직업소설가, 외교관, 여행 작가
배우자클레망스 가브리엘 모네로
자녀크리스틴 드 고비노
디안 드 귈덩크론

2. 초기 생애와 저술

고비노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생일이 7월 14일이라는 사실에 대해 "정반대의 것이 어떻게 함께 올 수 있는지 증명한다"고 썼다.[19] 그는 기사도기사의 황금기였던 중세를 동경하는 낭만적인 사람이었다.[14] 그의 가족은 부르봉 왕가를 지지했으며, 7월 혁명 이후 고비노는 정통왕위주의자로서 가톨릭 프랑스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13]

젊은 시절 고비노는 중동에 매료되어 동양주의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는 앙투안 갈랑의 동양주의 이야기를 좋아했으며, 스위스에서 공부할 때는 모스크첨탑만을 꿈꾸며 메카로 순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랍, 터키, 페르시아 이야기를 번역본으로 읽으며 프랑스에서 "''un orientaliste de pacotille''"("쓰레기 동양학자")라고 불렸다.

1835년 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입학 시험에 떨어진 후, 고비노는 작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갔다. 그는 루이 필리프에 대한 "무한한" 증오심을 가진 정통왕위주의자 삼촌과 함께 살았으며,[15] 자신을 포함한 엘리트주의적 정통왕위주의 지식인 모임인 ''레 스첼티''("선택된 자")를 설립했다.[16] 이후 반동주의 잡지에 연재 소설을 쓰며 생계를 유지했고,[20] 알렉시 드 토크빌과 친분을 맺고 그의 도움을 받았다.

2. 1. 초기 저술 활동

오드센 주 빌다브레 출신으로, 생일인 7월 14일은 혁명 기념일이다. 7월 왕정 말기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반동주의 잡지에 연재 소설을 쓰며 생계를 유지했다. 1841년 4월 15일, 두 세계 평론(Revue des deux Mondes)에 기고한 논문이 게재되면서 처음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20] 이 논문은 그리스 정치가 이오아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 백작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두 세계 평론''은 파리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저널 중 하나였으며, 이 잡지에 게재됨으로써 조르주 상드, 테오필 고티에, 필라레트 찰스, 알퐁스 드 라마르틴, 에드가 키네,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 등 당대 저명한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20] 이 무렵 알렉시 드 토크빌과 우정을 맺고, 방대한 양의 서신을 주고받았다.

2. 2. 국제 정치에 대한 견해

고비노는 국제 정치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영국을 증오와 탐욕으로 움직이는 국가로 묘사하며, 대영 제국의 확장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4] 특히 루이 필리프 왕이 친영 외교 정책을 펼쳐 대영 제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이 되도록 허용함으로써 프랑스를 "굴욕"시켰다고 비난했다.[5] 그러나 아일랜드의 열악한 경제 상황을 보며 "영국을 혁명의 심연으로 밀어넣고 있는 것은 아일랜드"라고 주장하며 만족감을 드러내기도 했다.[6]

러시아 제국의 성장하는 힘과 공격성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했다. 그는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영국군의 카불 철수를 러시아가 아시아에서 지배적인 세력이 될 징조로 보았다.[7] 그는 러시아를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간주하고, 러시아의 승리가 유럽에 대한 아시아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다.[8]

독일 국가들에 대해서는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센 왕국을 융커가 지배하는 보수적인 사회로 칭찬했지만, 관세 동맹으로 인한 경제 성장으로 프로이센 중산층의 힘이 커지는 것을 우려했다.[9] 오스트리아 제국에 대해서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독일인, 헝가리인, 이탈리아인, 슬라브족 등 다양한 민족을 통치하는 다민족 사회는 쇠퇴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반면 "순수한 독일인"인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할 운명이라고 믿었다.[10]

이탈리아에 대해서도 비관적이었다. 그는 "콘도티에리가 사라진 후 부, 기개, 예술, 자유도 사라졌고, 비옥한 땅과 하늘만 남았다"고 썼다.[11] 스페인에 대해서는 절대 군주제가 없으면 영원한 혁명 상태에 빠질 것이라고 예측했다.[12]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서는 독립 전쟁 이후 "농업, 무역, 재정의 파괴"를 언급하며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다.[13]

미국에 대해서는 "유일한 위대함은 부의 위대함"이며, 노블레스 오블리제와 같은 귀족 정신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이 탐욕과 물질주의가 유일한 가치로 여겨지는 폭력적인 사회라고 주장했다.[14]

2. 3. 결혼

1846년, 고비노는 클레망스 가브리엘 모네로와 결혼했다.[22] 마르티니크 출신인 그녀는 친구였던 피에르 드 세르에게 임신한 상태였기 때문에 서둘러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사생아를 낳고 싶어하지 않았다. 고비노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내와 두 딸에게 흑인 조상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는데, 이는 카리브해의 프랑스 노예 소유주들이 노예 첩을 두는 것이 흔했기 때문이다. 고비노는 백인에게 해로운 혼혈을 초래한다며 노예제에 반대했는데, 이는 어머니나 아내가 아프리카계 조상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개인적인 불안감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Departmental Museum of the Oise
아르 셰페르가 그린 고비노의 아내 클레망스 초상화 (1850)

3. 외교 경력과 인종 이론

고비노는 1848년 혁명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귀족 유럽의 종말을 우려했다. 그는 1848년 서사시 《만프레디네》에서 평민이 열등한 품종에서 파생되어 혁명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인종 이론을 처음으로 표현했다. 그는 프랑스 귀족은 게르만족인 프랑크족의 후손이고, 평민은 인종적으로 열등한 켈트족과 지중해인의 후손이라고 말했다. 이는 앙리 드 불랭빌리에 백작이 처음 주장한 이론으로, 제2 신분(귀족)은 "프랑크" 혈통이고 제3 신분(평민)은 "골" 혈통이라는 것이었다. 고비노는 프랑스 혁명이 귀족을 몰락시켜 프랑스 위대함의 인종적 기반을 파괴했으며, 이는 결국 유럽 문명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산업 혁명이 프랑스 혁명이 시작한 파괴를 완성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산업화와 도시화는 유럽에 재앙이라고 생각했다.

고비노는 다른 낭만적 보수주의자들처럼 중세 시대를 엄격한 사회 질서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농업 사회로 이상화했다. 그는 현대 파리를 "거대한 오물통"이라고 혐오했으며, 이곳을 혼혈의 산물인 범죄자, 가난한 자들로 가득 찬 곳으로 여겼다. 그는 민주주의를 어리석은 군중이 지배하는 "군중 통치"라고 비판했다.

원작 ''인류의 불평등에 관한 에세이'' 표지 사진
''인류의 불평등에 관한 에세이'' 원본 표지


1855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인종 불평등에 관한 시론''에서 고비노는 모든 인류가 아담하와라는 공통 조상을 가졌다는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유색 인종이 아담계 족보의 첫 번째 편집에서 종의 일부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며, 인종 간의 생식 능력 차이를 근거로 인류가 별개의 종으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9]

고비노는 인종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하며, 재능 있는 흑인이나 아시아인 개인의 존재가 흑인과 아시아 인종 전체의 열등함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람을 비교하지 말고 집단을 비교하자"라고 말했다.[10] 그는 인종이 운명이라고 주장하며, 휴론 인디언이 유럽인과 같은 지능을 가졌다면 왜 인쇄술이나 증기 동력을 발명하지 않았는지 수사적으로 질문했다.

고비노는 유럽 문명이 그리스에서 로마, 게르만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고대 인도유럽어족 문화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리아인"이라는 용어를 "게르만족"만을 위해 사용하고, 아리아인을 ''la race germanique''(la race germanique|게르만 인종프랑스어)라고 묘사했다.[14] 그는 아리아인, 즉 게르만인이 긍정적인 모든 것의 원천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15]

3. 1. 스위스와 독일에서의 시간

1849년 11월부터 1854년 1월까지 고비노는 베른 주재 프랑스 공사관의 일등 서기관으로 근무했다.[1] 스위스에 머무는 동안 고비노는 ''인종 불평등에 관한 시고''의 대부분을 썼다.[1]

1851년 가을, 그는 임시 전권 대사로 하노버에 주재하며, 하노버 궁정에서 "진정한 귀족의 흔적"을 보았다고 말했다.[2] 고비노는 특히 "철학자-왕"으로 여겼으며, ''인종 불평등에 관한 시고''를 헌정한 시각 장애인 게오르크 5세를 좋아했다.[2] 그는 하노버 남성들의 "뛰어난 품성"을 칭찬했고, 하노버 사회가 평민들이 항상 귀족에게 복종하는 "계층에 대한 본능적 선호"를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는데, 그는 이를 인종적 근거로 설명했다.[3]

1852년에 고비노는 아시아 학회(Société Asiatique)에 가입했으며, 율리우스 폰 몰과 같은 여러 동양학자들과 매우 친해졌다.[4]

1854년 1월, 고비노는 프랑크푸르트 자유시에 있는 프랑스 공사관의 일등 서기관으로 파견되었다.[5] 프랑크푸르트에 있던 독일 연방의 연방 회의 — "연방 의회"로도 알려짐 — 에 대해 고비노는 "의회는 독일 관료주의의 사무실이며, 진정한 정치 기구와는 거리가 멀다."라고 썼다.[5][6] 고비노는 비스마르크 부인에게 접근하려 했던, 의회의 프로이센 대표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 공작을 혐오했다.[7] 반대로 오스트리아 대표인 안톤 폰 프로케시-오스텐 장군은 고비노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되었다.[5] 그는 민주주의를 혐오하고 스스로를 역사가이자 동양학자로 여긴 반동적인 오스트리아 군인이자 외교관이었으며, 이러한 모든 이유로 고비노는 그와 유대감을 형성했다.[8] 고비노는 이 기간 동안 옛 자유주의적 친구 토크빌에게 편지를 덜 쓰고, 새로운 보수주의적 친구 프로케시-오스텐에게 더 자주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8]

3. 2. 고비노의 인종 이론

고비노는 1853년부터 1855년까지 출간된 그의 저서 《인종 불평등에 관한 시론(Essai sur l'inégalité des races humaines)》에서 인종이 운명이라고 주장했다.[10] 그는 인종이야말로 문명의 기원이라고 보았다. 흑인, 백인, 황인의 세 인종 간의 차이는 자연이 설정한 장벽이며, 혼혈은 이러한 장벽을 무너뜨려 문명을 퇴화시키고 혼란을 야기한다고 생각했다.[21]

고비노는 유럽 문명이 그리스에서 로마, 게르만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고대 인도유럽어족 문화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리아인"이라는 용어를 "게르만족"만을 위해 사용하고, 아리아인을 ''la race germanique''(게르만 인종)라고 묘사했다.[14] 그는 아리아인, 즉 게르만인이 긍정적인 모든 것의 원천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15]

그는 중동, 중앙아시아, 인도 아대륙, 북미, 남프랑스를 혼혈 지역으로 규정했다. 고비노의 정의에 따르면, 스페인과 대부분의 프랑스인, 대부분의 독일인, 남부 및 서부의 이란인, 스위스인, 오스트리아인, 북부의 이탈리아인, 그리고 대부분의 영국인혼혈로 인해 퇴화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또한, 북부 인도인의 대부분은 황인종에 속한다고도 말했다.

흥미롭게도 고비노는 유대인을 우월 인종의 일부분인 지적 민족으로 간주하고, 산업과 문명의 추진자로 보았다.[21] 그는 유대인을 '고결', '지적' 등으로 칭찬했으며, 역사학자 레옹 폴리아코프(Léon Poliakov)는 고비노를 『가장 반유대주의적이지 않은』 인물로 평가했다.[21]

그러나 고비노의 사상은 히틀러나치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치는 고비노의 이론을 차용하면서 그의 저작을 상당 부분 수정해야 했는데, 이는 친유대적인 니체의 저작을 이용했을 때와 유사하다.

3. 3. 『인종 불평등에 관한 시론』에 대한 반응

''인종 불평등에 관한 시론(Essai sur l'inégalité des races humaines)''은 프랑스 비평가들로부터 대부분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9] 고비노는 이를 자신의 인종 이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여겼다. 그는 "종교나 정치에서 아무것도 존중하지 않는 프랑스인들은 과학 문제에 있어서는 항상 세계 최고의 겁쟁이였다"라고 썼다.[10]

독일계 미국 역사학자 조지 모세는 고비노가 프랑스 중산층과 노동계급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과 혐오를 아시아인과 흑인에게 투사했다고 주장했다.[11]

모세의 주장을 요약하면서 데이비스는 "'에세이'에 나오는 자기중심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오리엔탈은 실제로는 돈에 눈이 먼 프랑스 중산층에 대한 반 자본주의적 초상화였으며", 고비노가 '에세이'에서 묘사한 "관능적이고 지능이 낮으며 폭력적인 흑인"은 프랑스 빈곤층에 대한 귀족적인 캐리커처였다고 주장했다.[12] 인종 불평등에 관한 시론(Essai sur l'inégalité des races humaines)에서 고비노는 프랑스 농민에 대해 여러 일화에서 프랑스 농부들이 거칠고 무례하며 배울 능력이 없고, 실제로 가장 기본적인 수준 이상의 사고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는 이 일화들이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비평가 미셸 라이트는 "농민은 땅에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분명히 땅의 일부는 아니다"라고 썼다.[13] 라이트는 고비노가 프랑스 농민에 대해 묘사한 모습과 흑인에 대한 그의 견해 사이에 매우 뚜렷한 유사성이 있음을 지적했다.[14]

3. 4. 페르시아에서의 시간

1855년, 고비노는 테헤란 주재 프랑스 공사관의 초대 서기관으로 부임했으며, 이듬해 특명 전권 공사로 승진했다.[9]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역사는 ''인종 불평등에 관한 시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고비노는 두 곳 모두 직접 보고 싶어했다.[10] 그의 임무는 페르시아가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냉소적으로 "만약 페르시아인들이 서방 열강과 연합한다면, 그들은 아침에 러시아에 맞서 진군할 것이고, 정오에는 그들에게 패배하여 저녁에는 그들의 동맹이 될 것이다"라고 적었다.[10] 고비노는 외교적 임무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고, 고대 설형 문자 텍스트를 연구하고 페르시아어를 배우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는 페르시아인들과 어느 정도 대화할 수 있는 "주방 페르시아어"를 구사하게 되었지만, 유창하게 구사하지는 못했다.[9] 페르시아인에 대한 애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비노는 그들이 자신의 인종적 편견이 없고 흑인을 동등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페르시아 사회가 너무 "민주적"이라고 비판했다.

고비노는 페르시아를 머지않아 서구에 정복될 운명에 처한 미래 없는 땅으로 보았다. 그에게 이것은 서구의 비극이었다. 그는 서구인들이 아름다운 페르시아 여성에게 너무 쉽게 유혹당하여 더 많은 혼혈을 일으켜 서구를 더욱 "타락"시킬 것이라고 믿었다.[9] 그러나 그는 고대 페르시아에 집착하여 아케메네스 제국에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아리아 문명을 보았고, 지금은 슬프게도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그의 남은 생애 동안 그를 사로잡았다.[9] 고비노는 아케메네스 시대의 유적을 방문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의 정신은 근본적으로 과거 지향적이어서 암울한 현재와 더 암울한 미래로 보이는 것보다 과거의 영광을 숙고하는 것을 선호했다.[9]

그의 페르시아에서의 경험은 ''오늘날 페르시아의 사회 상태에 대한 회고록''(1858)과 ''아시아에서의 3년''(1859) 두 권의 책에 영감을 주었다.[9]

고비노는 현대 페르시아에 대해 칭찬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프로케슈-오스텐에게 보낸 편지에서 현대 페르시아인들은 "무슨 종인지 알 수 없는 혼합 종"이므로 "페르시아 인종"은 없다고 썼다. 그는 훌륭한 아리아 문명의 전형으로서 고대 페르시아를 사랑했으며, 이란이 페르시아어로 "아리아인의 땅"을 의미한다는 점에 주목했다.[10] 고비노는 페르시아에 대한 그의 글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덜 유럽 중심적이었으며, 유럽 문명의 기원이 페르시아에서 유래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서구 학자들이 페르시아에 대한 서구의 "엄청난" 부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집단적 허영심"을 비판했다.[10]

3. 5. 조시아 C. 노트와 헨리 호체

1856년, 미국의 "인종 과학자" 조시아 C. 노트와 헨리 호체는 백인 우월주의자이자 노예 제도의 옹호자로서, 고비노의 흑인 혐오적 저술을 노예 제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했다.[9] 이들은 『인종 불평등에 관한 시론』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원본의 내용을 축소하고 왜곡했다.[9]

노트와 호체는 고비노의 『시론』에서 "흑인은 가장 비천하고 최하위에 머문다. 그의 이마에 새겨진 동물적 특성은 그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그의 운명을 나타낸다"와 같은 내용에 크게 공감했다.[9] 그러나 고비노가 미국 백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 구절들은 『인종의 도덕적, 지적 다양성』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영어판에서 삭제되었다.[9]

노트와 호체는 흑인의 본질적인 열등함에 관한 부분만 남기고, 흑인이 지능은 낮지만 특정한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등의 내용은 제거했다.[9] 또한, 이들은 국가와 인종이 동일하며 미국인이 되는 것은 백인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흑인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은 미국에서 광범위한 갈등을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9]

3. 6. 뉴펀들랜드에서의 시간

1859년, 뉴펀들랜드의 프랑스 연안에 대한 프랑스 어업권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프랑스 위원회가 파견되었다. 고비노는 뉴펀들랜드로 파견된 두 명의 프랑스 위원 중 한 명이었으며, 이 경험을 1861년 저서 《테르뇌브 여행》(Voyage à Terre-Neuve)에 기록했다.[9] 1858년, 외무부 장관 알렉상드르 콜론나-발레프스키 백작은 고비노를 베이징의 프랑스 공관으로 보내려 했다. 그러나 고비노는 "문명화된 유럽인"으로서 중국과 같은 아시아 국가에 가고 싶지 않다고 반대했다. 발레프스키는 고비노를 뉴펀들랜드로 보냈고, 뉴펀들랜드 임무를 거부하면 퀘 데르세이에서 해고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비노는 뉴펀들랜드를 싫어했으며, 1859년 7월 26일 파리의 친구에게 "이곳은 끔찍한 나라입니다. 매우 춥고, 거의 끊임없이 안개가 끼며, 거대한 부빙 조각들 사이를 항해합니다."라고 썼다. 세인트존스는 대부분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거주하는 도시였으며, 고비노는 파리로 보내는 보고서에 거의 모든 반 아일랜드식 고정관념을 사용했다. 그는 세인트존스의 아일랜드인들이 극도로 가난하고, 규율이 없으며, 음흉하고, 시끄럽고, 부정직하고, 목소리가 크고, 폭력적이며, 대개 술에 취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방문한 몇몇 외딴 어촌 정착지를 유토피아적인 관점에서 묘사하며, 소수의 강인하고 억센 사람들이 매우 험한 환경에서도 어떻게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지에 대한 사례로 칭찬했다. 고비노는 뉴펀들랜드 어부들을 칭찬하며, 사회에서 스스로를 격리한 사람들이 자신의 인종 순수성을 가장 잘 보존한다는 자신의 관점을 반영했다. 그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경멸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만난 뉴펀들랜드 어부들을 "세상에서 본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고비노는 이러한 외딴 해안 정착지에는 범죄가 없기 때문에 경찰이 없다는 것을 관찰했다.

4. 장관 경력

알렉시스 드 토크빌과 친구가 되어 방대한 서신을 주고받았던[4][5][6][7] 고비노는 훗날 프랑스 제2 공화국 시대에 외무부 장관으로 재직하게 된 토크빌에 의해 퀘 도르세(프랑스 외무부)에서 일하게 되었다.[8]

1849년 토크빌이 외무 장관이 되자 고비노는 그의 비서실장이 되었다. 1849년 11월부터 1854년 1월까지 고비노는 베른 주재 프랑스 공사관의 일등 서기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스위스에 머무는 동안 ''인종 불평등에 관한 시고'' 대부분을 집필했다.

1851년 가을, 고비노는 임시 전권 대사로 하노버에 주재하며, 하노버 궁정에서 "진정한 귀족의 흔적"을 보았다고 평가했다. 그는 ''인종 불평등에 관한 시고''를 헌정한 시각 장애인 게오르크 5세를 "철학자-왕"으로 칭송했다. 그는 하노버 남성들의 "뛰어난 품성"을 칭찬했고, 하노버 사회가 평민들이 항상 귀족에게 복종하는 "계층에 대한 본능적 선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는데, 이를 인종적 근거로 설명했다.

1854년 1월, 고비노는 프랑크푸르트 자유시 주재 프랑스 공사관의 일등 서기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던 독일 연방의 연방 회의(별칭 "연방 의회")에 대해 "의회는 독일 관료주의의 사무실이며, 진정한 정치 기구와는 거리가 멀다"라고 썼다. 고비노는 비스마르크 부인에게 접근하려 했던 프로이센 대표 오토 폰 비스마르크 공작을 혐오했다. 반면 오스트리아 대표 안톤 폰 프로케시-오스텐 장군은 고비노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민주주의를 혐오하고 스스로를 역사가이자 동양학자로 여긴 반동적인 오스트리아 군인이자 외교관이었으며, 고비노는 이러한 점 때문에 그와 유대감을 형성했다. 고비노는 이 시기에 자유주의적 친구였던 토크빌에게 보내는 편지는 줄이고, 보수주의적 친구였던 프로케시-오스텐에게 더 자주 편지를 썼다.

4. 1. 페르시아 공사

1861년, 고비노는 다시 테헤란 주재 프랑스 공사로 부임했으며,[16] 고대 페르시아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다.[17] 그는 이슬람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으며, 시아파 이슬람을 아리아인 페르시아인들이 셈족 아랍인에 대항한 "반란"의 일부로 간주했다.[18] 그는 시아파 이슬람과 페르시아 민족주의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보았다.[19]

4. 2. 고비노의 페르시아 연구에 대한 비판

고비노는 고대 페르시아 연구를 하면서 학자들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1] 그는 고대 페르시아에 관한 두 권의 책, 『쐐기 문자 텍스트 강독』(1858)과 『쐐기 문자 연구』(1864)를 출판했다.[1] 고비노의 고대 페르시아 쐐기 문자 번역 방식의 주요 문제점 중 하나는 언어 변화를 이해하지 못했고, 고대 페르시아어가 현대 페르시아어와 다르다는 것을 몰랐다는 점이다.[1] 그의 책들은 그가 번역하려던 텍스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적대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1]

고비노가 자신의 비평가들에게 반박하기 위해 『아시아 저널』에 기고한 논문은 편집자들이 그의 논문이 "터무니없는" 주장과 비평가들에 대한 "독설"로 가득 차 있어서 "게재할 수 없다"고 정중하게 말해야 했기 때문에 출판되지 않았다.[1] 고비노는 테헤란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자주 여행하여 현재 이라크 북부의 모술 근처에 있는 두르-샤루킨 유적을 방문했다.[1] 코르사바드 유적은 기원전 717년 사르곤 2세에 의해 건설된 아시리아 유적이지만, 고비노는 그 유적이 실제로는 페르시아 유적이며 약 200년 후에 다리우스 1세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주장했다.[1]

Painted portrait of Paul Émile Botta looking at the artist.
프랑스 고고학자 폴 에밀 보타는 고비노의 페르시아 연구를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겼다.


프랑스 고고학자 폴 에밀 보타는 『쐐기 문자 연구』에 대한 혹평을 『아시아 저널』에 게재했다. 그는 두르-샤루킨의 쐐기 문자가 아카드어이며, 고비노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고, 그가 이 서평을 쓴 유일한 이유는 그 책을 읽는 데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썼다.[1] 고비노가 자신의 주장을 끈질기게 밀어붙이자, 프랑스의 저명한 동양학자인 율리우스 폰 모흘은 고비노의 이론이 (주로 수비학 및 기타 신비적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과학적 엄밀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논쟁에 개입해야 했고,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호의적인 말은 고비노의 논문의 "예술성"에 감탄한다는 것이었다.[1]

4. 3. 그리스 공사

1864년, 고비노는 그리스 주재 프랑스 공사가 되었다.[16] 그는 테헤란과 함께 좋아했던 유일한 도시인 아테네에서 에르네스트 르낭과 함께 그리스 시골을 여행하며 유적을 찾고, 시를 쓰고 조각을 배우는 데 시간을 보냈다.[17] 고비노는 아테네에서 조에와 마리카 드라구미스 자매를 유혹하여 정부로 삼았으며, 조에와는 평생 서신 교환을 했다.[18]

1832년, 형식적으로는 독립국이었지만 그리스는 영국-프랑스-러시아의 공동 보호령이 되었다. 따라서 아테네 주재 영국, 프랑스, 러시아 공사들은 그리스 내각의 결정을 무효화할 수 있는 이론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고비노는 프랑스가 이 권한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반복적으로 반대하며, 그리스를 "유럽의 무능함과 주제넘음의 슬프고 살아있는 증거"라고 썼다. 그는 영국이 그리스에 웨스트민스터식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시도를 "야만적인 땅의 완전한 쇠퇴"를 초래한다고 비난했고, 프랑스가 그리스인들에게 "가장 부적절한 볼테르주의"를 소개하는 데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19] 그러나 말년에 그리스 경제가 급성장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고비노는 "그리스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에 깊은 인상을 받아 현대 시대의 이점을 무심코 인정하게 되었다."[21] 그 후, 그는 현대 국가를 건설하는 현대 그리스 사회에 대한 동정심을 보였다.[21]

"동방 문제"에 대해 고비노는 초기에 그리스의 팽창주의를 지지했으며, 요안니스 콜레티스와 그의 ''메갈리 이데아''를 지지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리스의 잃어버린 영토 회복 열망에 대한 프랑스의 지원에 반대하며,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을 대체할 수 없으며, 만약 오스만 제국이 더 큰 그리스로 대체된다면 러시아만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썼다. 그는 부활한 "그리스 제국"이 러시아 제국주의를 저지할 수 있다고 더 이상 믿지 않았다. 그는 당시 오스만 제국이 그렇게 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믿었다. 고비노는 파리에 "그리스인들은 오리엔트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고, 아르메니아인도 슬라브족도 어떤 기독교 인구도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온다면 — 심지어 그들 중 가장 동양적인 러시아인조차도 — 이 무정부적인 상황의 해로운 영향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나에게는 [...] 동방 문제는 없으며, 만약 내가 위대한 정부가 될 영광을 누린다면, 나는 더 이상 이 지역의 발전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조언했다. 1866년 봄, 그리스도교도 그리스인들은 크레타 섬에서 오스만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다. 세 명의 사절이 아테네에 도착하여 고비노에게 프랑스의 봉기를 지지해달라고 요청하며, 프랑스가 정의와 "소국"의 권리의 챔피언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가 멕시코 전쟁에 대규모로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비노는 나폴레옹 3세를 대변하여 크레타인들에게 프랑스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기대하지 말라고 알렸다. 오스만 제국에 맞서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문제였다. 그는 이 봉기를 "30년 동안 본 거짓말, 악의, 뻔뻔함의 가장 완벽한 기념비"라고 불렀다. 그는 오스만 지배하에 살고 있는 동포들을 해방하려는 그리스의 열망에 공감하지 않았다. 친구 안톤 폰 프로케쉬-오스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하나의 잡종이 다른 잡종에 맞서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노년에는 원래의 입장으로 돌아가 그리스의 잃어버린 영토 회복 사상을 지지했다.

그는 현대 그리스인에 대한 견해가 역설적이고 모호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다소 모호하고 혼란스럽게 진술했으며, 일반적인 정보에만 근거했다. 그는 그리스 민족이 "그리스의 영광"을 책임지는 "아리아인의 혈통"을 혼혈로 인해 일반적으로 많이 잃었다고 썼다. 그러나 그는 현대 그리스인에게 고대 그리스인의 핵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 민족이 모든 외국 침략자들을 "흡수"했다고 믿었다. 그 결과, 그리스인들이 접촉한 사람들의 가장 좋은 특성을 통합했기 때문에 강력한 합금이 형성되었다. 그는 그리스인들이 "국가"라는 칭호를 얻기에 필요한 모든 자질을 보여주었다고 결론지었다. 실제로 고비노는 현대 그리스인들을 존경했으며, 그들을 발칸 민족의 "교육자"로 여겼다.

1868년, 고비노는 그리스가 없었다면 자신이 한 많은 일들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썼다("그리스가 없었다면, 나는 내가 한 많은 일들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가 크게 기여했다").

4. 4. 크레타 봉기로 인한 프랑스 소환

1866년 크레타 봉기 때, 프랑스는 멕시코 전쟁에 대규모로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비노는 나폴레옹 3세를 대변하여 크레타인들에게 프랑스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기대하지 말라고 알렸다.[1] 그는 이 봉기를 "30년 동안 본 거짓말, 악의, 뻔뻔함의 가장 완벽한 기념비"라고 불렀다.[2] 그는 오스만 지배하에 살고 있는 동포들을 해방하려는 그리스의 열망에 공감하지 않았으며, 친구 안톤 폰 프로케쉬-오스텐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의 잡종이 다른 잡종에 맞서고 있다"고 언급했다.[3]

크레타 봉기 동안, 자유주의적 대의에 대한 열정으로 유명한 젊은 프랑스 학자 귀스타브 플로랑스는 크레타 봉기에 참여하여 그리스 정부가 봉기를 지지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아테네로 갔다.[4] 고비노는 프랑스와 그리스 정부 모두 크레타 봉기를 지원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을 불쾌하게 만들 의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파리에서 온 외교 문서를 경솔하게 플로랑스에게 보여주었고, 플로랑스는 이를 언론에 유출했다.[5] 고비노는 나폴레옹 3세로부터 플로랑스를 침묵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6] 1868년 5월 28일, 플로랑스가 그리스의 국왕 요르요스 1세와의 회의를 향하던 중, 고비노는 그를 가로막아 대사관 경비대에 체포하게 하고 쇠사슬에 묶어 마르세유로 향하는 첫 번째 프랑스 선박에 태웠다.[7] '플로랑스 사건'은 프랑스에서 '세기의 사건'이 되었고, 소설가 빅토르 위고는 1868년 7월 19일 '르 트리뷰'에 기고한 의견에서 그리스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동료 프랑스인을 배신한 고비노를 비난했다.[8] 아테네 주재 장관을 비난하는 프랑스 여론이 널리 퍼지자, 고비노는 불명예스럽게 파리로 소환되었다.[9]

4. 5. 브라질 공사

1869년, 고비노는 프랑스브라질 주재 공사로 임명되었다.[16] 당시 프랑스와 브라질은 대사급 외교 관계가 없었고, 공사들이 이끄는 공사관만 존재했다. 고비노는 외무성에서 자신을 충분히 훌륭하지 않은 자리라고 여긴 브라질로 보낸 것에 불만을 품었다.[17] 그는 흥청거리는 리우 카니발 기간 동안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했는데, 이는 그를 혐오하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그는 브라질을 문화적으로 뒤떨어지고 비위생적인 질병의 장소로 여기며 혐오했다. 그는 브라질 인구를 정기적으로 줄이는 황열병의 희생자가 될까 봐 두려워했다.[17]

대부분의 브라질인이 포르투갈, 아프리카, 인디언의 혼혈이었기 때문에, 고비노는 자신이 혐오했던 브라질 사람들을 인종 혼합의 위험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는 존재로 보았다.[17] 그는 파리로 편지를 보내 "브라질인들은 피와 정신이 완전히 혼합되어 부패했고, 끔찍하게 추하다... 백인, 인디언, 흑인 간의 결혼 패턴이 매우 광범위하여 색상의 미묘함이 무한하여 하류층뿐만 아니라 상류층에서도 퇴화가 발생하기 때문에 브라질인 중 순수한 혈통을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다"라고 썼다.[17] 그는 브라질인들이 "근면하지도, 활동적이지도, 비옥하지도 않다"라고 언급했다.[17] 이러한 모든 것을 바탕으로 고비노는 "유전적 퇴화"를 이유로 모든 인간의 생명이 앞으로 200년 안에 브라질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17]

고비노는 브라질에서 인기가 없었다. 그가 파리에 보낸 편지들은 국적에 관계없이 브라질의 모든 사람(페드루 2세 황제를 제외하고)에 대한 그의 완전한 경멸을 보여주었으며, 그의 가장 심한 말들은 브라질인들에게 쏟아졌다.[17] 그는 브라질에 대해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은 끔찍할 정도로 추하고, 원숭이 같다"라고 썼다.[18] 리우에서의 그의 유일한 친구는 페드루 2세 황제였는데, 그는 페드루 2세를 현명하고 훌륭한 지도자로 칭찬하며, 페드루가 아리아인임을 증명하는 증거로 그의 푸른 눈과 금발을 언급했다.[18] 브라간사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은 고비노에게 그에게 아프리카나 인디언 혈통이 없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고비노는 "황제를 제외하고, 이 도둑들로 가득 찬 사막에서 그의 우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라고 썼다.[19]

브라질 사람들에 대한 고비노의 경멸적인 태도는 그가 브라질 엘리트와 갈등을 겪으며 많은 시간을 보내게 했다. 1870년, 그는 자신의 국가가 비하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브라질 상원의원의 사위와 피비린내 나는 거리 싸움에 휘말렸다.[19] 싸움의 결과로, 페드루 2세는 파리에 그의 친구를 소환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그를 "외교관"으로 선언하겠다고 말했다.[19] 이러한 굴욕이 프랑스 공사에게 일어나는 것을 감수하기보다는, 외무성은 즉시 고비노를 소환했다.[19]

4. 6. 프랑스로의 귀환

1870년 5월 고비노는 브라질에서 프랑스로 돌아왔다.[1] 그는 1859년 알렉시스 드 토크빌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랑스 국민에 관해서는, 나는 진정으로 절대 권력을 선호합니다"라고 썼으며, 나폴레옹 3세가 독재자로 통치하는 한 그를 지지했다.[2] 고비노는 종종 프랑스가 너무 부패하여 주요 전쟁을 치르게 되면 프랑스인들이 패배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1870년 7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프랑스가 몇 주 안에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다.[3] 독일이 승리한 후, 고비노는 자신의 조국의 패배를 자신의 인종 이론에 대한 증거로 사용했다.[4] 그는 전쟁 기간 동안 우아즈주의 작은 도시 트리(Trie)의 ''maire''(시장)로 지냈다.[5] 프로이센군이 트리를 점령한 후 고비노는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우아즈주에 부과된 배상금을 줄일 수 있었다.[6]

이후 고비노는 프랑스의 패배가 인종적 퇴폐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책 ''Ce qui est arrivé à la France en 1870''("1870년에 프랑스에 일어난 일")를 썼지만, 출판사는 아무도 출판을 선택하지 않았다.[7] 그는 프랑스 부르주아는 "갈로-로마 노예의 후손"이며, 이것이 그들이 융커가 지휘하는 군대에 맞설 수 없는 이유라고 주장했다.[8] 고비노는 파리를 재건하려는 나폴레옹 3세를 공격하며 "우주의 수도라고 호화롭게 묘사되는 이 도시는 실제로 모든 유럽의 나태함, 탐욕, 술잔치를 위한 거대한 대상 숙소일 뿐이다."라고 썼다.[9]

4. 7. 스웨덴 공사

1872년 5월, 고비노는 프랑스 스웨덴 공사로 임명되었다. 스톡홀름에 도착한 후, 그는 누이 캐롤라인에게 "이곳은 북쪽의 순수한 인종, 즉 지배자의 인종"이라고 썼고, 스웨덴인들을 "게르만 인종의 가장 순수한 분파"라고 불렀다.[14] 프랑스와 달리 고비노는 스웨덴의 사회 갈등이 없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드라고미스에게 "계급 간의 증오가 없다. 귀족은 중산층과 일반 대중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고 썼다. 고비노는 스칸디나비아의 외딴 지역에 위치한 스웨덴 때문에 아리안 혈통이 프랑스보다 더 잘 보존되었다고 주장했다. 1872년 오스카 2세의 스웨덴 왕위 즉위에 대해 그는 "이 나라는 독특하다… 경비병을 두 배로 늘리거나 병사에게 경계령을 내리지 않고 한 왕이 죽고 다른 왕이 즉위하는 것을 막 보았다"고 말했다. 스웨덴 사회의 본질적인 보수성 또한 고비노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페드루 2세에게 "보수적인 감정은 국가 정신에서 가장 강력한 감정 중 하나이며, 이 사람들은 과거를 조금씩, 극도로 조심스럽게 포기한다."라고 썼다.[15]

스웨덴은 고비노에게 아리안 지배 민족에 대한 그의 믿음과 상류층만이 아리안이라는 그의 주장을 조화시키는 문제였다. 그는 결국 스웨덴인들을 타락한 아리안으로 비난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오스카 왕이 스웨덴 민주주의의 존재를 허용하고 전제 군주로 통치하려고 시도하지 않은 사실을 베르나도트 왕가가 모두 나약하고 비겁한 왕이라는 증거로 사용했다. 1875년까지 고비노는 "스웨덴은 나를 혐오스럽게 한다"라고 썼고 "스웨덴의 속됨과 경멸성"에 대해 혐오감을 나타냈다.[15]

1874년, 고비노는 동성애자 독일 외교관 오일렌부르크의 필리프 공작을 스톡홀름에서 만나 매우 가까워졌다. 오일렌부르크는 나중에 그와 고비노가 스웨덴에서 보낸 시간을 "신의 옛 세계가 사람들의 관습과 습관,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서 살아있는 북유럽 하늘" 아래에서 어떻게 보냈는지 회상했다. 고비노는 나중에 전 세계에서 단 두 명만이 그의 인종차별 철학을 제대로 이해했는데, 그들은 리하르트 바그너와 오일렌부르크였다고 썼다.[15]

고비노는 오일렌부르크에게 아리안 지배 민족에 대한 그의 이론을 홍보하도록 장려하면서 "이런 식으로 당신은 많은 사람들이 사물을 더 빨리 이해하도록 도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오일렌부르크는 "그들은 너무 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고비노에게 보낸 모든 편지를 파기해야 했다고 불평했다. 스웨덴에 있는 동안 고비노는 바이킹에 사로잡혀 노르드인의 후손임을 증명하려 했다. 스톡홀름에서의 그의 시간은 문학적인 관점에서 매우 생산적인 시기였다. 그는 스웨덴 공사로 재직하면서 《플레이아데스》(Les Pléiades), 《아시아의 새로운 이야기》(Les Nouvelles Asiatiques), 《르네상스》(La Renaissance), 《오타르 야를, 노르망디의 브레 지역 정복자이자 노르웨이 해적과 그의 후손들의 역사》(Histoire de Ottar Jarl, pirate norvégien conquérant du pays de Bray en Normandie et de sa descendance)의 대부분과 서사시 《아마디스》(Amadis)의 첫 번째 부분을 완성했다. 《아마디스》는 1887년에 사후 출판된 12,000절의 서사시로, 주인공들이 죽인 중국인들의 피에 익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15]

1879년, 고비노는 자신의 의사 가족 역사인 《오타르 야를의 역사》를 통해 나머지 프랑스인들보다 자신의 인종적 우월성을 증명하려 했다. "나는 오딘의 후손이다"라는 구절로 시작하여 바이킹 오타르 야를로부터의 그의 추정된 혈통을 추적한다. 고비노 가문이 15세기 후반 보르도에서 처음 등장했고, 실존 인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오타르 야를이 10세기에 살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고비노는 그의 가계도를 만들기 위해 많은 것을 창작해야 했다. 그에게 《에세이》(Essai), 《페르시아의 역사》(Histoire des Perses), 《오타르 야를의 역사》는 삼부작을 구성했으며, 프랑스 평론가 장 콜미에는 이를 "인류의 모험에 대한 시적 비전"이라고 불렀다. 이는 《에세이》에서 모든 인종의 보편적 역사, 《페르시아의 역사》에서 아리안 분파의 역사, 《오타르 야를의 역사》에서 자신의 가족 역사까지 망라한다.[15]

스웨덴에 있는 동안 고비노는 표면적으로는 가톨릭교회에 충실했지만, 사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그의 믿음을 버렸다. 그는 바이킹의 이교도 종교에 매우 관심이 있었고, 이는 그에게 더 진정한 아리안으로 보였다. 그에게 가톨릭교를 유지하는 것은 그의 반동적 정치와 자유주의 거부의 상징이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그는 명목상 가톨릭교를 계속 지켰다. 고비노는 친구 바스테로 백작에게 가톨릭 매장을 원했는데, 이는 그가 가톨릭교를 믿어서가 아니라 고비노 가문이 항상 가톨릭 의식으로 매장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15]

5. 유산과 영향

고비노의 사상은 루마니아, 오스만 제국, 독일, 브라질 등 여러 국가에서 그의 생전과 사후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모세 헤스의 최초의 현대적 시온주의 발전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19] 그의 사상은 반근대주의, 반보편주의, 반중앙집권, 반민주주의, 반독일 제2제국이었다.

고비노의 주저는 『인종 불평등론』(Essai sur l'inégalité des races humaines, 1853년 - 1855년)이다.

고비노에 따르면, 인종문명의 기원이다. 흑인, 백인, 황인 간의 다양한 차이는 자연이 설정한 장벽이며,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적 보편주의나 식민지 제국주의에 의한 혼혈로 인해 장벽이 무너지면 문명이 퇴화, 붕괴하여 혼란에 빠진다고 보았다. 이는 일종의 퇴화론이다.

그러나 흑인, 백인, 황인의 차이와 각각의 고유한 특성에 대해 논했을 뿐, 백인이 우월한 인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탈리아인이나 그리스인의 예술적 재능은 흑인종에 기인한다고 보았다.[21] 인류학의 여명기에 인종에 따른 우열이 당연하게 논의되었고, 미슐레나 생시몽 등 좌익조차 흑인종을 열등 인종으로 취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당대에 고비노는 오히려 인종 차별을 거의 하지 않은 편이었다.[21]

그는 중동, 중앙아시아, 인도 아대륙, 북미, 남프랑스를 혼혈 지역으로 규정했다. 고비노에 따르면, 스페인과 대부분의 프랑스인, 대부분의 독일인, 남부 및 서부 이란인, 스위스인, 오스트리아인, 북부 이탈리아인, 그리고 대부분의 영국인혼혈로 인해 퇴화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북부 인도인의 대부분은 황인종에 속한다고도 말했다.

고비노는 유대인을 우월 인종의 일부분인 지적 민족으로 간주했고, 오히려 산업과 문명의 추진자로 보았다. 아리아인이나 독일인에 대한 비난은 찾아볼 수 있어도, 유대인에 대한 비난은 없으며, 오히려 유대인을 '고결', '지적' 등으로 칭찬하고 있다.[21] 유대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역사학자 레옹 폴리아코프는 저서 『아리아 신화』에서 고비노를 "가장 반유대주의적'''이지 않은'''" 인물로 평가했다.[21]

이상의 내용에도 불구하고, 고비노가 고대 인도유럽 문화('아리아 문화'라고도 불리지만, 고비노는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를 예로 들면서 '백색 인종', 특히 백색 인종 부흥의 담당자로서 충분한 힘을 가진 독일인의 우월성을 주장했다는 풍설이 있으며, 이는 나치즘과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고비노의 사상은 아돌프 히틀러나치즘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고비노 자신은 반유대적이지 않았다. 나치는 고비노의 이론을 차용할 때 그의 저작 상당 부분을 수정해야 했으며, 이는 친유대적인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작을 나치가 이용했을 때와 유사하다.


  • 바하이교도들 사이에서 고비노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바브교의 융성사를 유일하게 완전하게 기록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카샨의 하지 미르자 잔이 작성한 이 기록은 1852년페르시아 관헌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원고는 현재 파리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 고비노는 여러 장편 소설을 썼다. 대표작은 1874년의 "Les Pléiades"이다. 희곡 "La Renaissance"(1877년)는 당시 높이 평가받았다. 두 책 모두 그의 반동적이고 귀족적인 정치 사상과 민주주의적인 대중 문화에 대한 혐오가 나타나 있다.
  • 고비노는 자신을 북유럽바이킹이탈리아의 콘도티에리의 후예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외가 쪽으로 1/4 크레올 혈통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두 아이를 둔 아내 또한 크레올이었다.[22]

참조

[1] 서적 The Mismeasure of Man https://archive.org/[...] W. W. Norton & Company 1996
[2] 웹사이트 Arthur de Gobineau French Diplomat, Writer, and Ethnologist https://www.britanni[...] 2016-09-02
[3] 웹사이트 Gobineau, Joseph Arthur de http://www.iranicaon[...]
[4] 간행물 The Study of Man. A Debate on Race: The Tocqueville-Gobineau Correspondence Commentary 1958
[5] 서적 The European Revolution and Correspondence with Gobineau Doubleday Anchor Books 1959
[6] 간행물 Tocqueville & Gobineau Encounter 1986
[7] 간행물 Tocqueville and Gobineau on the Nature of Modern Politics The Review of Politics 2005
[8] 간행물 Joseph-Arthur de Gobineau (14 July 1816-13 October 1882) http://go.galegroup.[...] The Gale Group
[9] 서적 The Moral and Intellectual Diversity of Races J. B. Lippincott & Co 1856
[10] 논문 Is Racism a Western Idea? https://www.jstor.or[...] 1995-Autumn
[11] 서적 In Search of the Indo-Europeans: Language, Culture and Myth Thames & Hudson 1991
[12] 서적 Honorary Aryans: National-Racial Identity and Protected Jews in the Independent State of Croatia Palgrave Macmillan 2013-07-04
[13] 서적 The Modern Origins of the Early Middle Ages Oxford University Press 2013-09
[14] 문서 The Cambridge Companion to Tacitus 2009
[15] 문서 Comparative literature Modern Language Association of America 1967
[16] 서적 The Fear of Chinese Power: an International History Bloomsbury Academic 2024
[17] 서적 Arthur de Gobineau: An Intellectual Portrait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isconsin 1970
[18] 웹사이트 Arthur de Gobineau French diplomat, writer, and ethnologist https://www.britanni[...] 2020-09-15
[19] 논문 Moses Hess https://www.jstor.or[...] 1945
[20] 문서 Dictionary of Literay Biography
[21] 문서 福田2002年、71-85頁。
[22] 문서 Dictionary of Literary B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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