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르통 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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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이르통 세나는 브라질 출신의 포뮬러 원(F1) 드라이버로, 1988년, 1990년, 1991년 세 차례 월드 챔피언을 차지했다. 총 41번의 우승과 65번의 폴 포지션 기록을 세웠으며, 공격적인 주행 스타일과 뛰어난 빗길 주행 능력으로 "비의 세나"라는 별칭을 얻었다. 1994년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 사고로 사망했으나, 그의 업적과 인간적인 면모는 F1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드라이버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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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는 에드손 아란치스 두 나시멘토라는 본명으로 브라질에서 태어나, 산토스 FC와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며 FIFA 월드컵 3회 우승과 1,000골 이상 기록을 세운 "축구 황제"로 불린 전설적인 축구 선수이다. - 브라질의 자선가 - 아니타 (가수)
아니타는 7세에 노래를 시작하여 댄스 강사로도 활동했으며, 유튜브 데뷔 후 워너 뮤직 브라질과 계약을 맺고, MTV EMA 월드와이드 액트 라틴 아메리카 상을 수상했으며, 2020년 세계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2022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에서 수상하고, 그래미상 신인 아티스트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으며, 배우로도 데뷔하여 2024년 여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을 발매했다.
아이르통 세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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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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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아일톤 세나 다 실바 |
출생일 | 1960년 3월 21일 |
출생지 | 상파울루, 브라질 |
사망일 | 1994년 5월 1일 |
사망지 | 볼로냐, 에밀리아-로마냐, 이탈리아 |
사망 원인 | 1994년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의 부상 |
배우자 | 릴리안 데 바스콘셀로스 소우자 (1981년 결혼, 1982년 이혼) |
파트너 | 슈샤 (1988–1990) 아드리아네 갈리스테우 (1993–1994) |
친척 | 비비아니 세나 (여동생) 브루노 세나 (조카) |
포뮬러 원 경력 | |
국적 | 브라질 |
활동 연도 | – |
팀 | 톨먼, 로터스, 맥라렌, 윌리엄스 |
엔진 | 하트, 르노, 혼다, 포드 |
참가 횟수 | 162회 (161회 출발) |
챔피언십 우승 | 3회 (, , ) |
우승 횟수 | 41회 |
포디움 등반 횟수 | 80회 |
획득 점수 | 610점 (614점) |
폴 포지션 획득 횟수 | 65회 |
가장 빠른 랩 기록 횟수 | 19회 |
첫 레이스 | 1984년 브라질 그랑프리 |
첫 우승 | 1985년 포르투갈 그랑프리 |
마지막 우승 | 1993년 오스트레일리아 그랑프리 |
마지막 레이스 | 1994년 산마리노 그랑프리 |
2. F1 이전
세나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운동 신경을 보였으며, 체조 등 다양한 스포츠에 능숙했다. 4살 때부터 자동차와 모터스포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7살 때는 가족 소유의 농장에서 지프를 운전하며 클러치 없이 기어 변속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267] 이후 상파울루 이지에노폴리스 지역의 콜레지우 리우 브랑쿠를 졸업하고 경영학을 전공하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3개월 만에 중퇴했다.[268]
2. 1. 출생과 유년기

아일톤 세나는 1960년 3월 21일 현지 시각으로 2시 35분에 상파울루의 산타나에 있는 프로-마트레 산부인과 병원에서 태어났다.[6] 부유한 브라질 가정의 둘째 아이였던 그는 토지 소유주이자 공장주인 밀턴 기라도 다 실바와 그의 아내 네이디 조아나 세나 다 실바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누나인 비비아네와 남동생 레오나르도가 있었다.[7][8] 세나는 이탈리아계와 스페인계 혈통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9]
세나가 생애 처음 4년 동안 보낸 집은 그의 외할아버지인 조앙 세나의 소유였다. 세나는 체육에서도 뛰어났고 4살 때부터 자동차와 모터 레이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운동 협응력이 부족하여 세 살 때 계단을 오르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뇌파 검사에서는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세나의 부모는 그를 ''베코''라고 불렀다.[10] 일곱 살 때, 세나는 처음으로 가족 농장에서 지프 운전을 배우고 클러치를 사용하지 않고 기어를 변속하는 방법도 배웠다.[11]
세나는 상파울루의 이지에노폴리스 지역에 있는 콜레지오 리우 브랑코에 다녔고, 1977년 졸업했다. 그는 나중에 경영학을 전문으로 하는 대학에 입학했지만, 3개월 만에 중퇴했다.[12][13]
2. 2. 카트 레이스

세나의 첫 카트는 자동차 공장을 운영하던 그의 아버지가 소형 1마력 잔디 깎는 기계 엔진을 사용하여 제작했다.[14][15] 세나는 인터라구스에서 레이싱을 시작했고 13세에 첫 카트 레이싱 대회에 출전했다.[16] 그는 자신보다 몇 살 많은 드라이버들과 맞서 폴 포지션에서 데뷔 레이스를 시작했고, 상대와 충돌하여 리타이어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레이스를 선두에서 달렸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카트 경력 전반에 걸쳐 그를 지원했으며, 루시오 파스칼 가스콘이 그의 매니저가 되었다.[17]
세나는 1977년 남미 카트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그는 1978년부터 1982년까지 다섯 번 카트 월드 챔피언십에 출전하여 1979년과 1980년에 준우승을 차지했다.[18] 1978년부터 1980년까지 그는 DAP에서 테리 풀러턴의 팀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다. 그들의 치열한 라이벌 관계는 1~2위로 끝나는 주요 대회에서 여러 번 볼 수 있었다. 세나는 나중에 그 당시 돈과 정치가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레이싱"이었기 때문에 풀러턴이 자신이 가장 만족스럽게 경쟁했던 라이벌이라고 말했다.[19]
2. 3. 주니어 포뮬러
1983년 시즌, 세나는 웨스트 서리 레이싱 소속으로 영국 F3 챔피언십에 참가하여 시즌 전반부를 연승으로 이끌며 챔피언십 선두를 독주했다. 하지만 후반부에는 에디 조던 레이싱 소속의 마틴 브랜들이 세나와의 격차를 좁히며 치열한 타이틀 경쟁을 벌였지만, 최종적으로 세나가 근소한 차이로 챔피언에 올랐다.[280] 20번의 레이스 중 12번 우승하며 당시 최다승 기록을 세웠다.같은 해, 처음으로 F3 규격으로 개최된 마카오 GP에 세오도르 소속으로 참가하여 두 번의 레이스에서 모두 우승했다. 세나가 마카오 GP 예선에서 기록한 기록은 1990년 미카 해키넨과 미하엘 슈마허가 갱신하기 전까지 7년 동안 코스 레코드로 유지되었다.
세나가 영국 F3 챔피언과 마카오 GP 우승을 차지했을 때 사용한 머신은 모두 토요타 2T-G 엔진을 탑재하고 있었다.[281]
이 무렵부터 세나는 부계 성인 '다 실바' 대신 모계 성인 '세나'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3. F1
세나는 1984년 토르만 팀 소속으로 F1에 데뷔했다. 데뷔 전 윌리엄스, 맥라렌, 브라밤 등 여러 팀에서 테스트를 받았으며, 특히 윌리엄스 테스트에서는 당시 챔피언 케케 로즈버그보다 빠른 기록을 세웠다.[28] 그러나 윌리엄스와 맥라렌은 자리가 없었고, 브라밤은 주요 후원사의 반대로 입단이 무산되었다.[28],[29] 결국 세나는 토르만과 계약하여 F1 경력을 시작하게 되었다.[30]
토르만에서의 첫 시즌, 세나는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폭우 속에 2위를 차지하며 주목받았다.[289] 이후 영국과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도 3위를 기록하며 총 3번의 포디엄에 올랐다. 그러나 머신 문제와 경험 부족으로 8번 리타이어했고, 시즌 중 로터스로의 이적을 발표했지만 계약 문제로 1경기 출전 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290]
1985년, 로터스-르노로 이적한 세나는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첫 폴 포지션과 첫 우승을 동시에 달성했다.[34] 벨기에 그랑프리에서도 우승했지만, 잦은 차량 문제와 경험 부족으로 드라이버 순위 4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1986년에는 로터스의 넘버원 드라이버로 스페인, 디트로이트 그랑프리에서 우승했으나, 시즌 후반 머신 트러블로 어려움을 겪었다.
1987년, 혼다 엔진을 장착한 로터스 99T로 시즌을 맞이했지만, 액티브 서스펜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293] 모나코와 디트로이트 그랑프리에서 2연승을 거두었지만, 윌리엄스-혼다 팀에 비해 경쟁력이 부족해 시즌 최종 랭킹 3위에 머물렀다.[295]
1988년, 맥라렌으로 이적한 세나는 알랭 프로스트와 팀 동료가 되었다. 맥라렌 MP4/4로 16번의 레이스 중 15번을 우승하는 압도적인 기록을 세웠고, 8승을 거두며 첫 월드 챔피언십 타이틀을 획득했다.[46] 1989년에는 프로스트와의 경쟁이 심화되었고, 1990년에는 페라리로 이적한 프로스트와 다시 한번 챔피언 경쟁을 펼쳐 6승을 거두며 챔피언십 선두를 유지했다.
1991년, 세나는 7번의 우승으로 최연소 3회 월드 챔피언이 되었다. 1992년에는 맥라렌의 경쟁력 약화로 모나코, 헝가리, 이탈리아에서 우승하며 종합 4위를 기록했다. 1993년에는 맥라렌에 잔류, 레이스별 계약을 맺고 브라질과 도닝턴에서 우승하며 선전했지만, 윌리엄스의 우세와 기계 고장으로 챔피언십 2위에 머물렀다.
1994년, 프로스트의 은퇴로 윌리엄스 팀에 합류했다.[86] 그러나 전자 보조 장치 사용 금지 규정 변화와 윌리엄스 FW16의 성능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브라질과 태평양 그랑프리에서 연달아 리타이어했고,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 사고로 사망했다.
3. 1. 데뷔 전 협상
1983년, 세나는 윌리엄스, 맥라렌, 브라밤, 토르만 등 포뮬러 원 팀들의 테스트에 참가했다.[28] 로터스의 피터 워, 맥라렌의 론 데니스, 브라밤의 버니 에클스톤은 1984년 테스트와 장기 계약을 제안하며 세나를 영입하려 했다.[28] 도닝턴 파크 서킷(3.149km)에서 진행된 윌리엄스 테스트에서 세나는 40바퀴를 주행하며 윌리엄스의 당시 세계 챔피언 케케 로즈버그 등 다른 드라이버들보다 빠른 기록을 세웠다.[28] 그러나 윌리엄스와 맥라렌 모두 해당 시즌에 공석이 없었다.[28]윌리엄스 팀의 수장 프랭크 윌리엄스와 맥라렌의 론 데니스는 세나가 (로즈버그 같은 정규 드라이버를 제외하고) 다른 누구보다 먼저 그들의 차량을 운전하는 것을 고집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피터 워는 로터스에서 나이젤 만셀을 세나로 대체하고 싶어했지만, 영국에 본사를 둔 후원사 임페리얼 토바코(존 플레이어 & 선즈)는 영국 드라이버를 원했다. 세나는 그 시즌에 반드시, 그리고 자신의 조건대로 레이스를 뛰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1983년 11월 폴 리카르 서킷에서 브라밤 테스트가 진행되었다. 세나는 브라밤 팀에 깊은 인상을 주었고, 두 번째 시트와 연결되었다. 하지만 팀의 주요 후원사인 이탈리아 유제품 회사 파르말라트는 이탈리아 드라이버를 원했다.[29] 결국 브라밤의 두 번째 차량은 테오 파비와 코라도 파비 형제가 공유하게 되었고, 넬슨 피케는 에클스톤을 설득하여 친구 로베르토 모레노를 테스트 드라이버로 영입했다.[29] 결과적으로 세나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피렐리 타이어를 사용하는 비교적 신생 팀인 토르만에 합류하게 되었다.[30]
F1 진출을 위해 세나는 맥라렌, 윌리엄스, 브라밤[282] 머신 테스트에 초청되어[283] 협상을 벌였다. 처음에는 브라밤 입단이 유력했으나, 당시 브라밤의 에이스이자 전년도 챔피언인 넬슨 피케가 반대하여 무산되었다는 설이 있다.[284] 브라밤의 보스였던 버니 에클스톤에 따르면, 1983년 오프 시즌 테스트에서 몇몇 젊은 선수들을 테스트했고,[285] 가장 빨랐던 세나를 에클스톤도 강력하게 원했다. 그러나 메인 스폰서인 "파르말라트"가 팀의 두 선수 모두 브라질인이 되는 것에 난색을 표하며, 한 명은 유럽 드라이버여야 한다는 요구를 했기 때문에,[286] 에클스톤은 이탈리아인 테오 파비를 피케의 서포트 역할로 결정했다. 세나의 브라밤 입단은 무산되었다. 그 후 여러 팀과 협상을 거쳐, 데렉 워릭의 이적으로 선수를 잃은 토르만과 계약을 체결하여 F1 데뷔가 결정되었다.
3. 2. 토르만 시대
세나는 1984년 토르만 팀 소속으로 F1에 데뷔했다. 첫 경주인 브라질 그랑프리에서는 전년도 모델인 TG183으로 출전, 터보 문제로 리타이어(기권)했다.[287][288] 그러나 두 번째 경주인 남아프리카 그랑프리에서 6위를 차지하며 첫 입상을 기록했다.하지만 전년도 머신은 데릭 워릭과 브루노 자코멜리에 맞춰 제작되었기 때문에 스티어링이 무거워 체력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287][288] 네 번째 경주인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는 타이어 제조사 계약 문제로 예선 탈락을 경험하기도 했다.
다섯 번째 경주부터는 새로운 머신인 TG184가 투입되었고, 여섯 번째 경주인 모나코 그랑프리에서는 폭우 속에 예선 13위에서 2위까지 올라서는 놀라운 경기를 펼쳤다. 이 경기를 통해 세나는 자신과 토르만 팀에 첫 포디엄(시상대)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첫 패스트랩 기록도 세웠다.[289]
이후 열 번째 경주인 영국 그랑프리와 마지막 경주인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도 3위를 차지하며 총 3번의 포디엄을 기록했다. 티렐 팀의 "물탱크 사건"으로 기록이 삭제되면서, 세 번째 경주인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6위로 순위가 상승하여 총 15경기 중 5경기에서 입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머신 문제와 F1 경험 부족으로 안정적인 결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시가지 코스를 중심으로 빠른 속도를 보여주었다. 리타이어는 8회였지만, 종합 순위에서는 로터스의 나이젤 만셀과 함께 9위를 기록했다.
시즌 중 세나는 다음 해부터 로터스로 이적한다는 발표를 했다. 그러나 토르만과의 3년 계약이 남아있어 이중 계약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로터스와 세나가 토르만에 위약금을 지불하고, 세나에게 1경기 출전 금지 처분을 내리는 조건으로 이적이 성사되었다. 이로 인해 세나는 열네 번째 경주인 이탈리아 그랑프리에 출전하지 못했다.
한편, 세나는 이 해 6월 15일 WEC 4라운드 뉘르부르크링 1000km 레이스에 요스트 레이싱 소속으로 참가하여 그룹 C카 및 내구 레이스를 경험하기도 했다(예선 9위/결승 8위).[290]
3. 3. 로터스 시대

세나는 로터스-르노에서의 첫 해인 1985년, 엘리오 데 안젤리스와 팀을 이루었다. 시즌 두 번째 경주인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F1 경력 최초의 폴 포지션을 차지하고,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첫 승리를 거두었다.[34] 이는 세나의 첫 그랜드 슬램이기도 했다.[35] 이후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에서 2위,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세나는 예선에서 7번의 폴 포지션을 기록하며 빠른 스피드를 보였으나, 차량 신뢰성 문제와 경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르노 엔진[37]은 이상의 출력을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1986년, 세나는 로터스의 명실상부한 넘버원 드라이버로 활약하며, 스페인 그랑프리에서 넬슨 피케를 0.014초 차이로 따돌리고 우승, 디트로이트 그랑프리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시즌 후반에는 머신 트러블로 어려움을 겪으며 챔피언십 경쟁에서 멀어졌다.
1987년, 세나는 혼다 엔진을 장착한 로터스 99T로 시즌을 맞이했지만, 액티브 서스펜션[293]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모나코 그랑프리와 디트로이트 그랑프리에서 2연승을 거두었지만, 윌리엄스-혼다 팀에 비해 경쟁력이 부족했다.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선두를 달리다 코스 아웃으로 2위에 그치며 챔피언십 경쟁에서 멀어졌다. 시즌 최종 랭킹은 3위였다.[295]
3. 3. 1. 1985년
1985년 세나는 엘리오 데 안젤리스와 함께 로터스-르노 팀에서 F1 경력을 이어갔다. 시즌 두 번째 경주인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F1 첫 폴 포지션을 차지했고, 비가 쏟아지는 악천후 속에서 미켈레 알보레토를 1분 이상 앞지르며 첫 우승을 달성했다.[34] 이는 세나의 첫 그랜드 슬램이기도 했다.[35]하지만 모나코 그랑프리 예선에서 다른 선수들의 주행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알보레토와 니키 라우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36]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에서 2위를 차지하며 다시 포디엄에 올랐고, 네덜란드와 이탈리아를 거쳐 스파-프랑코르샹 서킷에서 열린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시즌 두 번째 우승을 추가했다.[35]
시즌 동안 세나와 데 안젤리스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결국 데 안젤리스는 팀을 떠났다.[35] 세나는 7번의 폴 포지션을 기록하며 예선에서 가장 빠른 드라이버로 자리매김했지만, 잦은 차량 문제와 경험 부족으로 인한 실수로 인해 드라이버 순위 4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르노 엔진[37]은 강력한 출력을 냈다.
3. 3. 2. 1986년
1986년은 세나가 로터스에서 두 번째 시즌을 맞이한 해였다. 명실상부한 로터스의 넘버원 드라이버로 자리 잡은 세나는 시즌 초반 8경기 중 6경기에서 포인트를 획득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특히 제2전 스페인 그랑프리와 제7전 디트로이트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스페인 그랑프리에서는 넬슨 피케를 0.014초 차이로 따돌리며 짜릿한 승리를 거머쥐었고, 이는 드라이 컨디션에서의 첫 우승이었다.경기 | 결과 | 비고 |
---|---|---|
제2전 스페인 그랑프리 | 우승 | 넬슨 피케와 0.014초 차이, 드라이 컨디션 첫 우승 |
제7전 디트로이트 그랑프리 | 우승 |
하지만 시즌 후반에는 머신 트러블이 잦아 리타이어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챔피언십 경쟁에서 멀어졌다. 제12전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에서는 엔진 문제로, 제13전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는 클러치 문제로 이른 시기에 리타이어했다. 제14전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는 마지막 랩에서 연료 부족으로 4위에 그치며, 드라이버즈 챔피언십 가능성이 사라졌다. 최종 드라이버즈 랭킹은 4위였다.
예선에서는 전년도보다 더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 시즌 16경기 중 8번의 폴 포지션을 획득했지만, 우승은 2회에 그쳤다. 또한, 윌리엄스 FW11과의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혼다 엔진 획득을 원하게 되었다.[37]
한편, 세나는 팀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팀 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로터스의 팀 매니저였던 피터 워는 데릭 워릭을 영입하려 했으나, 세나는 "팀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1대 체제로 해야 한다"며 반대했다.[292] 이는 영국 팀인 로터스에 같은 국적의 워릭이 합류하면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결국 워릭 대신 조니 덤프리스가 로터스에 합류했다.
3. 3. 3. 1987년
세나의 요청으로 피터 워가 혼다 엔진 획득에 성공했고, 팀 메이트로는 혼다와 인연이 깊은 F1 루키 나카지마 사토루가 합류했다. 그러나 로터스 99T에 도입된 개발 단계의 액티브 서스펜션[293]에 결함이 많아 시즌 내내 여러 가지 트러블에 시달렸다. 그동안 많이 획득했던 폴 포지션도 이 해에는 제2전 산마리노 그랑프리 한 번에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지에서 열린 제4전 모나코 그랑프리와 제5전 디트로이트 그랑프리에서는 타이어 마모가 적다는 액티브 서스펜션의 장점을 살려 타이어 교체 없이 완주하여 2연승을 거두었다. 이후 섀시와 윙에 개량이 이루어졌지만 전투력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또한 디트로이트에서의 우승은 팀 로터스의 마지막 F1 우승이 되었다.제7전 영국 그랑프리에서는 3위를 차지하며, 4위에 들어온 나카지마 사토루와 함께 혼다 엔진 팀 1~4위 독점의 한 축을 담당했지만, 세나는 1~2위를 차지한 윌리엄스-혼다에게 한 바퀴 뒤처졌다.[294] 로터스와 같은 엔진을 장착한 윌리엄스 FW11B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제11전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는 레이스 종반까지 선두를 달리며 오랜만에 우승의 기회가 왔지만, 남은 8랩의 마지막 코너에서 코스 아웃되어 넬슨 피케에게 선두를 내주고 2위로 마쳤다. 이 시점에서 5경기를 남겨두고 챔피언 가능성이 사라졌다.
윌리엄스와 혼다가 지배한 시즌이었지만, 16경기 중 11경기 입상과 우승 경기 외에도 착실하게 결과를 남겨 랭킹은 3위로 상승했다.[295] 또한 F1이 처음으로 스즈카 서킷에서 개최된 제15전 일본 그랑프리에서는 예선 7위에서 2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혼다에게 모국에서의 F1 포디엄을 선사했다.
이 시즌 루키 나카지마 사토루가 7점을 획득한 반면 세나는 2승으로 57점을 획득하여 팀 동료와 큰 차이를 보였지만, 이탈리아 그랑프리 개최 기간인 9월 4일에 맥라렌과 혼다가 공동 기자 회견을 열어 세나도 참석한 가운데, 1988년 시즌부터 혼다가 맥라렌과 엔진 공급 파트너가 되고, 세나가 맥라렌으로 이적하여 알랭 프로스트와 팀을 이룬다는 것이 발표되었다.[296][297] 세나는 F1 월드 챔피언이라는 염원을 이루기 위해 3년 동안 몸담았던 로터스를 떠나게 되었다.
3. 4. 맥라렌 시대
1987년 로터스에서 혼다와의 관계, 그리고 당시 2년 연속 월드 챔피언이었던 알랭 프로스트의 동의를 얻어, 세나는 1988년 맥라렌 팀에 합류했다.[46] 이로써 세나와 프로스트 간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었고, 이후 5년 동안 두 사람은 여러 극적인 레이스 사건들을 겪게 된다. 경험 많은 두 드라이버는 개인적인 라이벌 관계에도 불구하고, 페라리, 윌리엄스, 베네통, 로터스 등 주요 경쟁자들을 앞서기 위해 서로 협력해야 했다.1988년, 두 선수는 맥라렌 MP4/4 경주차로 16번의 레이스 중 15번을 우승하는 압도적인 기록을 세웠다. 세나는 8승을 거두며 프로스트(7승)를 제치고 첫 번째 포뮬러 원 월드 챔피언십 타이틀을 획득했다. 프로스트가 시즌 동안 더 많은 점수를 얻었지만, 상위 11개 결과만 계산하는 규정으로 인해 세나가 3점 차로 앞섰다.
1989년은 맥라렌에서의 두 번째 시즌으로, 프로스트와의 경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1990년에는 페라리로 이적한 프로스트와 다시 한번 챔피언 경쟁을 펼쳤다. 세나는 6승을 거두며 챔피언십 선두를 유지했다.
1991년, 세나는 7번의 우승과 함께 최연소 3회 월드 챔피언이 되었다. 페라리의 부진으로 프로스트는 경쟁에서 멀어졌지만, 윌리엄스의 나이젤 만셀이 새로운 경쟁자로 떠올랐다.
1992년, 세나는 맥라렌의 경쟁력 약화에 실망했다. FW14B는 액티브 서스펜션과 강력한 르노 엔진으로 다른 차들보다 훨씬 빨랐다. 맥라렌의 새 차는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세나는 모나코, 헝가리, 이탈리아에서 우승하며 종합 4위를 기록했다.
1993년, 맥라렌은 여전히 경쟁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세나는 윌리엄스로 이적하려 했으나 프로스트의 계약 조건 때문에 실패했다. 결국 세나는 맥라렌에 잔류, 레이스별 계약을 맺고 시즌을 치렀다. 시즌 초반, 세나는 브라질과 도닝턴에서 우승하며 선전했지만, 이후 윌리엄스의 우세와 기계 고장으로 챔피언십 2위에 머물렀다.
3. 4. 1. 1988년

세나와 알랭 프로스트 사이의 치열한 경쟁은 이 시즌부터 시작되어 이후 5년 동안 여러 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 해 주목할 만한 사건 중 하나는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발생했다. 세나는 프로스트보다 1.4초 앞선 폴 포지션을 차지했고, 레이스 대부분을 선두로 달렸지만 67랩에서 크래시를 일으켰다.[47] 자신의 실수에 낙담한 세나는 아파트로 돌아가 팀과 연락을 끊었다.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는 프로스트가 세나보다 빠른 출발을 했지만, 세나는 첫 코너에서 앞서 나갔다. 프로스트는 추월을 시도했고, 세나는 이를 막으려다 프로스트를 피트 월 쪽으로 밀어붙였다. 이 행동으로 세나는 FIA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결국, 세나와 프로스트는 맥라렌 MP4/4로 16개 레이스 중 15개에서 우승했다. 세나는 8승, 프로스트는 7승을 기록했지만, 상위 11개 기록만 계산하는 규정 때문에 세나가 3점 차로 첫 월드 챔피언십 타이틀을 차지했다. 세나는 이 시즌에 8승과 13번의 폴 포지션으로 신기록을 세웠다.
3. 4. 2. 1989년
1988년 맥라렌에 합류한 세나는 알랭 프로스트와 치열하게 경쟁하며, 이후 5년간 여러 극적인 레이스 사건들을 만들어냈다.[46] 1989년은 프로스트와의 관계가 더욱 악화된 해였다.1988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세나는 프로스트를 저지하려다 위험한 주행으로 FIA로부터 경고를 받았다.[46]
1989년 일본 그랑프리에서는 챔피언십 타이틀을 다투던 중, 세나와 프로스트가 충돌했다. 세나는 폴 포지션에서 출발했지만, 첫 코너에서 프로스트와 충돌해 함께 리타이어했다. 이 사고로 프로스트가 챔피언이 되었고, 세나는 실격 처리되었다. 세나는 이 사건에 대해 FIA가 프로스트에게 유리하게 판정했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이듬해 일본 그랑프리에서 세나가 프로스트에게 고의로 충돌하는 보복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3. 4. 3. 1990년
1990년, 세나는 6승, 2위 2회, 3위 3회의 뛰어난 성적으로 챔피언십 선두를 달렸다. 페라리로 이적한 알랭 프로스트를 맞이하여, 오스트리아 출신의 친구이자 새로운 팀 동료인 게르하르트 베르거를 맞이하게 되었다. 세나는 피닉스의 넓은 도심 서킷에서 열린 개막전에서 장 알레지의 타이렐과 선두 경쟁 끝에 승리했고, 독일에서는 베네통의 알레산드로 난니니와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쳤다. 모나코를 포함해 총 6번의 레이스에서 승리했다.시즌 막바지에 페라리의 프로스트는 스페인에서 팀 동료 나이젤 맨셀과 함께 스쿠데리아에 1-2위를 안겨주는 등 5승을 거두며 강력한 도전을 했다. 세나는 라디에이터 손상으로 레이스를 중단했고, 남은 두 경기를 앞두고 세나와 프로스트의 점수 차는 9점으로 줄어들었다.[54]
일본에서 열린 챔피언십의 마지막 두 번째 경주에서 세나는 프로스트를 제치고 폴 포지션을 차지했다. 예선 전, 세나는 주최측에 폴 포지션을 트랙의 깨끗한 쪽(왼쪽)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했지만, FIA 회장 장 마리 발레스트르는 요청을 거절했고, 세나는 더티 사이드인 오른쪽에서 출발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프로스트는 왼쪽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되었다. 포뮬러 원 저널리스트 모리스 해밀턴에 따르면, FIA는 오른쪽 피트 출구의 노란 선을 넘어 첫 번째 코너에서 더 좋은 위치를 선점하는 행위는 부적절하다고 경고했고, 이는 세나를 더욱 격분시켰다. 레이스 시작과 함께 프로스트가 세나를 앞질렀고, 세나는 곧바로 첫 번째 코너에서 프로스트를 추월하려 했다. 프로스트가 코너로 진입하는 순간, 세나는 계속 가속 페달을 밟았고, 시속 270km로 두 차량이 충돌하여 트랙을 이탈, 자갈밭을 지나 타이어 배리어에 충돌했다. 이 사고로 세나는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55] 세나는 자신이 원했던 방식은 아니었지만, 그래야만 했던 방식이었다고 말했다.[56]
2년 연속 챔피언십을 결정짓는 충돌 사건 이후, 프로스트는 세나의 행동을 "역겹다"고 비판하며 이 사건 이후 경주를 그만둘까 진지하게 고려했다고 말했다.[57] 유로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프로스트는 스즈카에서 혼다 엔진 원격 측정 데이터를 확인했고, 그 데이터는 세나가 프로스트와 충돌했을 때 4단 기어 코너에서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고 밝혔다. 세나는 이 코너에서 4단 기어로 변속하기 위해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지도 않았고, 이는 세나가 고의로 프로스트를 밀어냈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한다.[46][58] 재키 스튜어트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세나를 인터뷰하면서 지난 몇 년 동안 세나가 연루된 여러 논란이 많은 충돌들을 언급하며, 세나가 지난 4년 동안 다른 차량과 운전자와 접촉한 횟수가 그 이전의 모든 챔피언들을 합친 것보다 많다고 말했다. 세나는 불쾌감을 가장하며, 3회 연속 세계 챔피언인 스튜어트 같은 사람이 운전자들이 경주 중에 받는 압력을 알면서도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질문하며 유명한 말을 남겼다. "레이싱 드라이버란 다른 사람들과 레이스를 하는 것이고, 더 이상 존재하는 틈을 노리지 않는다면, 더 이상 레이싱 드라이버가 아닙니다." [59][60][61]

3. 4. 4. 1991년
년에 세나는 7번의 우승을 거두고 127번의 레이스에서 60번의 폴 포지션 기록을 세우며 최연소 3회 월드 챔피언이 되었다. 페라리의 성적 부진으로 인해 프로스트는 더 이상 강력한 경쟁자가 아니었다.[64]시즌 전 테스트에서 세나는 새로운 혼다 V12 엔진의 경쟁력에 대해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하며, 이 엔진이 전년도 V10 엔진만큼 강력하지 않다고 말했다.[64]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나는 피닉스, 브라질, 이몰라, 모나코에서 열린 첫 네 번의 레이스에서 우승하며 라이벌들이 그의 속도와 안정성에 맞서기 어려워했다. 그러나 시즌 중반에는 에이드리언 뉴이가 설계한 윌리엄스-르노를 타고 맨셀(세나가 40점을 얻을 당시 6점만 얻었다)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1991년은 세나에게 어려운 시즌이었다. 멕시코 그랑프리를 앞두고 세나는 상파울루 근처에서 제트스키 사고를 당해 머리 뒤쪽에 봉합 수술을 받았다. 그랑프리 예선에서 그는 180도 경사 코너인 페랄타다 코너(멕시코 시티 서킷에서 가장 빠른 코너)를 평소보다 빠르게 통과하려다 트랙을 이탈하여 타이어 배리어에 충돌한 후 전복되었다.[65]
영국 그랑프리에서 세나의 차는 마지막 랩에서 멈춰 섰지만, 그는 서킷에 남겨지지 않았다. 우승자인 맨셀이 시상식 랩에서 차를 세우고 브라질 선수가 윌리엄스의 사이드 포드에 타고 피트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후 세나는 독일의 매우 빠른 호켄하임 서킷에서 테스트 도중 큰 사고를 당했다. 타이어 파열로 차가 공중 15피트 높이로 솟구쳐 올랐다가 트랙에 떨어져 여러 번 뒤집혔다. 차는 파괴되었고 세나는 인근 만하임 병원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곧 독일 그랑프리에 출전했지만, 그 대회에서 결승선을 불과 몇 바퀴 앞두고 연료가 떨어졌다.
스페인 그랑프리에서 세나와 맨셀은 메인 스트레이트에서 시속 320km가 넘는 속도로 불과 몇 센티미터 차이로 나란히 달렸고, 결국 영국인이 우승했다.
시즌 초반 세나의 꾸준한 활약, 차의 경쟁력, 윌리엄스의 신뢰성 부족으로 인해 초반 우위를 점했지만, 세나는 혼다에 엔진 개발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너무 늦기 전에 MP4/6에 대한 추가 개선을 요구했다. 헝가리에서 도입된 개조와 벨기에에서 도입된 가변형 인테이크 트럼펫을 포함한 이러한 개조는 시즌 후반부에 맹렬한 추격을 가능하게 했고, 그는 세 번의 레이스에서 우승하여 챔피언십을 확보했다. 챔피언십은 일본에서 결정되었는데, 맨셀(우승이 필요했다)이 첫 번째 코너에서 3위로 달리다가 트랙을 이탈하여 윌리엄스 차량을 자갈밭에 처박았다. 세나는 2위를 차지했고, 시즌 내내 자신의 활약을 지원해 준 동료 베르거에게 마지막 코너에서 우승을 양보했다.[66]
세나는 1992시즌 윌리엄스 팀으로 이적할 계획이었지만, 혼다의 사장인 카와모토 노부히코가 개인적으로 맥라렌-혼다에 남아달라고 요청했고, 세나는 충성심 때문에 그렇게 했다. 프로스트의 추천 외에도 혼다는 세나를 맥라렌으로 데려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67]
3. 4. 5. 1992년
1992년, 세나는 맥라렌이 FW14B에 대항할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다.[69] FW14B는 액티브 서스펜션과 강력한 르노 V10 엔진 덕분에 다른 차들보다 훨씬 빠르고 효율적이었다.[69] 맥라렌의 새 차 MP4/7A는 새 모델 운행 지연, 액티브 서스펜션 부족, 신뢰성 문제, 예측 불가능한 핸들링, 혼다 V12 엔진의 성능 부족 등 여러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69]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나는 모나코, 헝가리, 이탈리아에서 우승했다. 세나는 윌리엄스의 나이젤 만셀과 리카르도 파트레제, 그리고 베네통의 미하엘 슈마허에 이어 챔피언십에서 종합 4위를 기록했다.[69]
세나는 시즌 동안 드라이버의 안전에 대해 우려했다. 멕시코 그랑프리 연습 중 충돌 사고를 당했고, 벨기에 그랑프리 예선 중에는 에릭 코마의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하여 그를 도왔다.
미하엘 슈마허와 세나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슈마허는 세나를 비난했고, 프랑스 그랑프리에서는 슈마허와 충돌하여 세나가 은퇴했다. 독일 그랑프리 테스트 세션에서는 세나가 슈마허의 옷깃을 잡고 비난하는 사건도 있었다.[69]
세나는 1992년 말까지 어떤 팀과도 계약을 맺지 않아 다음 시즌에 대한 계획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페라리가 계약을 제안했지만 세나는 거절했다.[70] 그는 맥라렌 차량이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느꼈다.[71]
세나는 엠머슨 피티팔디의 지원으로 인디카 테스트 세션을 가졌다. 1992년 12월, 세나는 파이어버드 인터내셔널 레이스웨이에서 1992년 펜스케 PC-21 CART 인디카 차량을 테스트했다.[72]
3. 4. 6. 1993년
1993년, 맥라렌 팀은 경쟁력이 약화되었다. 윌리엄스의 강력한 르노 V10 엔진 확보에 실패했고, 대신 포드 V8 엔진을 사용해야 했는데, 이는 베네통의 엔진보다 성능이 떨어졌다.[75] 맥라렌은 액티브 서스펜션 시스템 등으로 성능 열세를 만회하려 했지만, 이 시스템은 때때로 문제를 일으켰다.[76]세나는 윌리엄스 이적을 시도하며 연봉을 포기할 의향까지 보였으나, 알랭 프로스트의 계약 조건 때문에 실패했다. 프로스트는 계약을 통해 1993년에 세나를 팀 동료로 거부할 수 있었고, 여전히 세나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77] 이에 분노한 세나는 1992 포르투갈 그랑프리 기자회견에서 프로스트를 비겁자라고 비난했다.[77]
윌리엄스 이적이 무산되자, 세나는 맥라렌에 잔류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열리는 첫 번째 레이스에만 참가하여 맥라렌의 경쟁력을 평가한 후, 레이스별 계약을 맺고 1993년 시즌 전체를 뛰게 되었다.[78]

시즌 초반, 세나는 예상을 깨고 챔피언십 선두를 달렸다.[79] 브라질과 도닝턴에서 우승을 차지했는데, 특히 도닝턴에서의 우승은 그의 최고의 승리 중 하나로 꼽힌다.[80] 그는 첫 랩에서 5위에서 1위로 올라섰고, 다른 드라이버들을 한 바퀴 이상 앞섰다.[80] 또한 스페인에서 2위를 차지하고, 모나코에서 6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그레이엄 힐의 기록을 경신했다.[81]
그러나 시즌이 진행되면서 윌리엄스-르노 차량의 우월성이 드러났고, 세나는 여러 차례 기계 고장을 겪었다. 결국 세나는 챔피언십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76]
일본에서는 에디 어바인과의 충돌 사건이 있었다. 어바인은 세나를 두 번이나 추월하려 했고, 경기 후 분노한 세나는 어바인에게 폭언과 폭행을 가했다.[82] 이 사건으로 세나는 2경기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으나, 이후 철회되었다.[83]

시즌 마지막 경기인 호주에서 세나는 그의 F1 경력 마지막 우승을 차지했다. 이 우승은 곧 은퇴할 예정이었던 프로스트와의 화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여겨진다.[85]
3. 5. 윌리엄스 시대
1994년, 프로스트가 은퇴하면서 세나는 윌리엄스 팀에 합류했고, 2000만달러의 연봉을 받았다.[86][87] 세나는 2번 차량, 팀 동료 데이먼 힐은 0번 차량을 배정받았다. 로스만 인터내셔널이 윌리엄스의 주요 후원사가 되면서, 세나는 흰색과 남색 리버리의 첫 번째 드라이버 중 한 명이 되었다.하지만 1994 시즌은 액티브 서스펜션, ABS, 트랙션 컨트롤 등 전자식 보조 장치 사용이 금지되는 등 규정이 크게 바뀌었다. 시즌 초부터 베네통 팀의 부정행위 의혹이 제기되었다.
새로운 윌리엄스 FW16은 이전 모델보다 성능이 좋지 않았다. 세나는 차량 핸들링에 불만을 표하며 전자 장치 부족과 차량 특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91] 또한 "많은 사고가 발생하는 시즌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92]
브라질과 태평양 그랑프리에서 연달아 폴 포지션을 차지했지만, 두 경기 모두 리타이어하며 최악의 시즌 시작을 맞았다. 미하엘 슈마허가 드라이버 챔피언십에서 세나보다 20점 앞섰다.[93]
이후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 세나는 사고로 사망했다.
3. 5. 1. 1994년
1994년 이탈리아 이몰라에서 열린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 선두로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심하게 들이받는 사고로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요절하였다. 그의 장례는 1994년 5월 4일에 브라질 국장으로 치러졌다.[371]
1994년, 프로스트의 은퇴 후 세나는 마침내 윌리엄스 팀에 합류할 수 있었고,[86] 2000만달러의 연봉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87] 1994 시즌은 액티브 서스펜션, ABS, 트랙션 컨트롤, 런치 컨트롤과 같은 전자식 "운전자 보조 장치"의 사용이 금지되는 등 규정이 대대적으로 바뀐 해였다.
시즌 초부터 베네통 팀을 둘러싼 부정행위 의혹이 세나를 괴롭혔다. 세나는 태평양 그랑프리에서 첫 랩에 리타이어한 후 피트 지역으로 돌아가는 대신, 첫 번째 코너 근처에 서서 다른 차량들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을 지켜보며 금지된 트랙션 컨트롤 시스템이 사용되는지 확인하려 했다.[88] 그는 레이스 후 윌리엄스 피트로 돌아와 베네통 머신이 불법이라고 의심했다.[89] 세나 사망 20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당시 팀 동료였던 데이먼 힐은 세나가 베네통에게 유리한 "특별한 조정"으로 "엔진에서 특이한 소음이 난다고 결론지었다"고 밝혔다.[90]
시즌 전 테스트에서 새로운 윌리엄스 FW16 머신은 이전 모델인 FW15C와 FW14B의 우월성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1994년 규정 변경으로 액티브 서스펜션, 트랙션 컨트롤, ABS가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세나는 미하엘 슈마허의 베네통 B194와 경쟁했으나, 자신의 차량 핸들링에 불만을 표하며 "나는 이 차를 운전하고, 한계까지 몰고 가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 중 일부는 전자 장치 부족 때문이다. 또한, 이 차는 아직 완전히 자신감을 갖지 못한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91] 그는 또한 "많은 사고가 발생하는 시즌이 될 것이며, 정말 심각한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라고 덧붙였다.[92]
시즌 첫 번째 레이스인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세나는 폴 포지션을 차지했다. 초반에 선두를 달렸지만, 슈마허의 베네통이 바짝 뒤쫓았다. 슈마허는 피트에서 세나를 추월하여 레이스 선두를 차지했고, 세나는 우승을 위해 무리하게 밀어붙이다 56랩 준상 코너에서 스핀하여 리타이어했다.[86]
두 번째 레이스인 태평양 그랑프리에서 세나는 다시 한번 폴 포지션을 차지했으나, 첫 코너에서 미카 해키넨에게 충돌당했다. 이후 니콜라 라리니가 운전하는 페라리가 윌리엄스를 들이받으면서 세나는 레이스에서 완전히 리타이어했다. 데이먼 힐 또한 변속기 문제로 리타이어했고, 슈마허는 다시 우승을 차지했다.[88] 세나는 두 번이나 폴 포지션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첫 두 레이스에서 득점에 실패하며 최악의 포뮬러 원 시즌 시작을 맞았다. 슈마허는 드라이버 챔피언십에서 세나보다 20점 앞서 있었다.[93]
시즌 종료 후 열린 FIA 공식 회의에서 슈마허는 자신의 첫 번째 타이틀을 세나에게 헌정했다.[94] 세나 사망 20주년을 맞아 페라리 회장인 루카 코르데로 디 몬테제몰로는 1994년 4월 27일 볼로냐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세나와 페라리 합류에 대한 논의를 나눴다고 밝혔다.[95]
4. 사고사
1994년 이탈리아 이몰라에서 열린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 선두로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심하게 들이받는 사고로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1994년 5월 4일에 브라질 국장으로 치러졌다.[371]
1994년 산마리노 그랑프리는 1994년 4월 28일부터 5월 1일까지 이탈리아 이몰라에 위치한 엔초와 디노 페라리 자동차 경주장(Autodromo Enzo e Dino Ferrari)에서 개최되었다. 시즌 초반 두 경주에서 결승선을 통과하지 못한 세나는 이 경주가 자신의 시즌을 시작하는 중요한 경기라고 선언하며, 타이틀 획득을 위한 각오를 다졌다.[96]
토요일 예선 중 오스트리아 출신 신예 롤란트 라첸버거(Roland Ratzenberger)가 빌뇌브 코너(Villeneuve corner)에서 시속 310km/h로 콘크리트 방호벽에 충돌하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세나는 일요일 아침, 전 동료이자 라이벌인 알랭 프로스트(Alain Prost)와 만나 포뮬러 원의 안전 개선을 목표로 하는 그랑프리 드라이버 협회(Grand Prix Drivers' Association) 재건에 대해 논의했다.
그랑프리 시작 시 세나는 미하엘 슈마허(Michael Schumacher)를 제치고 선두를 유지했지만, JJ 레토(JJ Lehto)의 차량 시동 문제와 페드로 라미(Pedro Lamy)의 차량과 충돌하는 사고로 인해 경기가 중단되었다. 오펠 벡트라(Opel Vectra) 세이프티 카가 여러 랩 동안 배치되었고, 세나는 세이프티 카 운전자 맥스 안젤렐리(Max Angelelli)[99]에게 속도를 높이라고 신호를 보냈다.[100] 6랩에서 경주가 재개되었고, 세나는 빠른 속도를 내며 슈마허와 경쟁했다.
7랩에서 세나는 탐부렐로 코너를 돌던 중 시속 약 307km/h에서 레이싱 라인을 이탈하여 시속 약 233km/h로 콘크리트 방호벽에 충돌했다. 텔레메트리 기록에 따르면 약 2초 동안 브레이크가 작동했다. 사고 직후 레드 플래그가 표시되었다.
사고 후 2분 이내에 의료팀이 세나를 레이싱카에서 꺼내 응급 처치를 했다. 세나는 심장 박동이 약하고 측두동맥(Superficial temporal artery) 파열로 심각한 출혈을 보였다. 기관절개술(tracheotomy)을 시행 후 세나를 볼로냐 마조레 병원으로 즉시 이송했다.
중앙 유럽 표준시(CEST) 오후 6시 40분(GMT 오후 4시 40분)에 병원 응급실장은 세나가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이탈리아 법에 따른 공식 사망 시각은 뇌 기능이 정지한 CEST 오후 2시 17분(GMT 오후 12시 17분)이라고 말했다.[98] 오른쪽 앞바퀴와 현가장치(suspension (vehicle))가 조종석으로 되돌아와 세나의 헬멧 오른쪽을 강타하여 머리가 헤드레스트에 부딪혔다. 바퀴에 부착된 업라이트(upright) 조각이 헬멧을 부분적으로 관통하여 이마에 큰 상처를 냈다. 또한 업라이트 어셈블리의 조각이 오른쪽 눈 위쪽 헬멧 바이저를 관통했다. 세나는 치명적인 후두개골 골절(basilar skull fracture), 외상성 뇌 손상(traumatic brain injury) 및 측두동맥(Superficial temporal artery) 파열을 입었다.
의료진이 세나의 차량을 조사했을 때 접힌 오스트리아 국기(Austrian flag)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세나가 경주 후 라첸버거를 기리기 위해 게양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103]
5. 사후
1994년 이탈리아 이몰라에서 열린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 아일톤 세나는 선두로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는 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371]
세나의 사망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오른쪽 앞바퀴와 서스펜션이 조종석으로 돌아와 세나의 헬멧 오른쪽을 강타하여 머리가 헤드레스트에 부딪혔다. 바퀴에 부착된 업라이트 조각이 헬멧을 부분적으로 관통하여 이마에 큰 상처를 냈고, 또 다른 조각은 오른쪽 눈 위쪽 헬멧 바이저를 관통했다. 세나는 치명적인 두개골 골절, 외상성 뇌 손상, 그리고 측두동맥 파열을 입었다. 이 세 가지 부상 중 어느 하나라도 그를 사망에 이르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102]
사고 후 2분 이내에 의료팀이 도착하여 세나를 레이싱카에서 꺼냈다. 초기 치료는 차 옆에서 이루어졌으며, 세나는 심장 박동이 약하고 측두동맥이 파열되어 심각한 출혈을 하고 있었다. 세나는 이미 약 4.5리터의 혈액(혈액량의 90%)을 잃은 상태였다. 시드 워킨스는 현장에서 기관절개술을 시행하고 세나를 볼로냐 마조레 병원으로 즉시 공중 수송했다. 워킨스는 나중에 세나의 동공이 확장된 것을 보자마자 뇌간이 활동하지 않고 생존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19]
중앙 유럽 표준시(CEST) 오후 6시 40분(GMT 오후 4시 40분)에 병원 응급실장 마리아 테레사 피안드리가 세나가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101] 이탈리아 법에 따른 공식 사망 시각은 벽에 충돌하고 뇌 기능이 정지한 CEST 오후 2시 17분(GMT 오후 12시 17분)이었다.[98]
이탈리아 법률에 따르면 사망 사고가 발생하면 형사상 책임 여부를 조사해야 하며, 사고 현장을 확보하고 사망에 이르게 된 경위를 즉시 중단해야 한다. 따라서 세나의 사망 사건은 이탈리아에서 형사 소송 대상이 되었으며, 윌리엄스 팀의 주요 멤버들이 과실치사 혐의로 조사 및 기소되었다. 1997년 원심 재판에서는 검찰이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120] 이 소송은 2007년 4월 13일 이탈리아 대법원이 내린 제15050호 판결문으로 종결되었는데, 판결문에는 "사고는 스티어링 컬럼 고장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이 고장은 잘못된 설계 및 부실한 제작으로 인해 발생했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패트릭 헤드에게 있으며, 감독을 소홀히 한 책임이 있습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헤드는 이탈리아의 과실치사 공소시효가 7년 6개월이고 최종 판결이 사고 발생 13년 후에 내려졌기 때문에 체포되지 않았다.[121]
FISA 회장 맥스 모슬리는 롤란트 라첸버거의 장례식에 참석했다.[108] 10년 후 기자 회견에서 모슬리는 "나는 그의 장례식에 갔다. 모든 사람이 세나의 장례식에 갔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가 그의 장례식에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109]
다음 모나코 그랑프리 경주를 위해 FIA는 세나와 라첸버거를 기리기 위해 처음 두 그리드 자리를 비워두고 브라질과 오스트리아 국기 색으로 칠하기로 결정했다.[110]
5. 1. 브라질 국내 반응
세나의 죽음은 많은 브라질 국민들에게 국민적인 비극으로 여겨졌고, 브라질 정부는 사흘간의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98] 1994년 5월 4일, 세나의 시신은 브라질로 돌아왔다. 이탈리아 공군이 관을 운송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세나 가족은 브라질 항공기를 원했다. 항공사 규정을 어기고, 존중의 의미로 세나의 관은 국영 항공사 바리그(VARIG)의 맥도넬 더글러스 MD-11 여객기 승객실에 실려 그의 동생 레오나르도와 친구들의 호위를 받으며 고국으로 돌아왔다. 항공기는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며 상파울루-구아룰류스 국제공항에 도착했고, 파울루 말루프(Paulo Maluf) 상파울루 시장과 루이스 안토니오 플뢰리 필류(Luiz Antônio Fleury Filho) 주지사가 맞이했다. 군경찰학교 사관 8명이 경비를 섰고, 소방차가 시내로 32.2km를 이동하며 관을 운반했다. 17대의 경찰 오토바이가 선두에 섰고, 2,500명의 경찰이 길을 따라 배치되어 군중을 통제했다. 세나의 시신은 이비라푸에라 공원의 입법 의회 건물에 안치되었고,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조문했다.세나의 장례식은 1994년 5월 5일 상파울루에서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50만 명이 넘는 조문객이 참석하여 도시 역사상 가장 큰 장례 행렬이 되었다.[104] 안치 후, 제2포병여단이 21발의 예포를 쏘았다. 장례 행렬이 모룸비 묘지로 향하는 동안 7대의 브라질 공군 제트기가 다이아몬드 대형으로 비행했다. 세나의 묘비에는 "Nada pode me separar do amor de Deus"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으며, 이는 "아무것도 나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는 로마서 8:38–39의 구절이다.[105]
세나의 국장에는 켄 티렐(Ken Tyrrell), 피터 콜린스, 론 데니스(Ron Dennis), 프랭크 윌리엄스와 같은 유명 모터 레이싱 인사들과 재키 스튜어트(Jackie Stewart)와 같은 드라이버 매니저가 참석했다. 운구자에는 게르하르트 베르거(Gerhard Berger), 미셸 알보레토(Michele Alboreto), 알랭 프로스트(Alain Prost), 티에리 부트센(Thierry Boutsen), 데이먼 힐(Damon Hill), 루벤스 바리켈로(Rubens Barrichello), 로베르토 모레노(Roberto Moreno), 데렉 워릭(Derek Warwick), 마우리시오 구겔민(Maurício Gugelmin), 한스-요아힘 슈투크(Hans-Joachim Stuck), 조니 허버트(Johnny Herbert), 페드로 라미(Pedro Lamy), 마우리치오 산드로 살라(Maurizio Sandro Sala), 라울 보젤(Raul Boesel), 엠손 피티팔디(Emerson Fittipaldi), 윌슨 피티팔디(Wilson Fittipaldi), 크리스티앙 피티팔디(Christian Fittipaldi) 등의 드라이버들이 포함되었다. 맥라렌 팀 코디네이터였던 시드 와킨스(Sid Watkins)와 조 라미레스(Jo Ramírez)는 슬픔에 잠겨 참석하지 못했다.
세나의 가족은 포뮬러 원 매니지먼트 회장 버니 에클스톤의 참석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고 후 경주가 중단되지 않았고, 에클스톤이 세나의 형 레오나르도에게 세나가 트랙에서 사망했다고 실수로 말했던 것에 불쾌감을 느꼈다.[106][107] 에클스톤은 일반 관중으로 장례 행렬을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했다.[106]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에클스톤은 아르통 세나 연구소(Instituto Ayrton Senna)에 지원을 제공하는 등 세나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에클스톤은 가끔 세나가 자신이 본 최고의 드라이버라고 말했다.[107]
1994년 7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은 세나에게 월드컵 우승을 헌정했고,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를 물리친 후 경기장에서 "Senna... Aceleramos juntos, o tetra é nosso!" (세나... 우리는 함께 속도를 냅니다, 네 번째 타이틀은 우리 것입니다!pt)라고 적힌 현수막을 함께 들었다.[116][117] 세나는 세 달 전 파리에서 호나우두[118]를 포함한 팀의 여러 멤버들과 레오나르두 아라우주를 만나 "올해는 우리 해다"라고 말했다.[119]
혼다의 도쿄 본사에는 혼다가 더 이상 포뮬러 원에 참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조화가 도착하여 대형 전시장 로비를 가득 채웠다.[113] 세나는 회사 설립자 혼다 소이치로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고 일본에서 거의 신화적인 지위에 올랐다.[114][115]
5. 2. 일본 국내 반응
아이르통 세나는 혼다 소이치로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으며, 일본에서 거의 신화적인 지위에 올랐다.[114][115] 혼다의 도쿄 본사에는 포뮬러 원에 더 이상 참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조화가 도착하여 대형 전시장 로비를 가득 채웠다.[113]6. 회자되는 레이스
아이르톤 세나는 F1 역사에 남을 명승부들을 펼쳤으며, 때로는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높은 평가를 받는 레이스'''
세나는 다음과 같은 레이스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 1984년 모나코 GP: F1 데뷔 6경기 만에 폭우 속에서 놀라운 추격전을 펼치며 첫 포디엄에 올랐다.
- 1985년 포르투갈 GP: 데뷔 16경기 만에 첫 폴 포지션과 첫 우승을 차지하며 "비의 세나"라는 별명을 얻었다.
- 1986년 스페인 GP: 나이젤 만셀과의 치열한 접전 끝에 0.014초 차이로 우승했다.
- 1988년 일본 GP: 스타트 실수에도 불구하고 빗속에서 알랭 프로스트를 추월하고 우승하며 첫 월드 챔피언에 등극했다.
- 1990년 미국 GP: 장 알레지와의 명승부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 1991년 브라질 GP: 기어 박스 문제에도 불구하고 모국에서 첫 우승을 달성했다.
- 1991년 헝가리 GP: 혼다 소이치로 사망 직후 열린 경기에서 폴 투 윈을 달성하고 승리를 바쳤다.
- 1992년 모나코 GP: 성능 열세에도 불구하고 나이젤 만셀을 막아내며 모나코 GP 4연패를 달성했다.
- 1992년 독일 GP: 마지막 랩까지 치열한 방어전을 펼쳐 2위를 지켜냈다.
- 1993년 브라질 GP: 레인 타이어 전략으로 모국에서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 1993년 유럽 GP: 오프닝 랩에서 4대를 추월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 1993년 모나코 GP: 모나코 GP 5연패, 통산 6승을 달성하며 "모나코 마이스터" 그레이엄 힐의 기록을 경신했다.
- 1993년 일본 GP: 알랭 프로스트와의 마지막 대결에서 승리했다.
- 1993년 오스트레일리아 GP: 알랭 프로스트와의 마지막 F1 경기에서 폴 투 윈으로 우승했다.
'''논란을 낳았던 레이스'''
세나는 다음과 같은 레이스에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 1988년 모나코 GP: 압도적인 예선 기록을 세웠지만, 결승에서 실수로 리타이어했다.[324][325]
- 1989년 일본 GP: 알랭 프로스트와 추돌 후 실격 처분을 받았다.[326][327]
- 1990년 헝가리 GP: 알레산드로 나니니를 리타이어시켰다.
- 1990년 일본 GP: 알랭 프로스트와 고의적인 충돌을 일으켰다.[328]
- 1991년 독일 GP: 알랭 프로스트와 접촉하며 위험한 주행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 1992년 브라질 GP: 미하엘 슈마허를 상대로 과도한 방어를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6. 1. 높은 평가를 받는 레이스
다음은 아이르톤 세나가 F1에서 보여준 뛰어난 레이스들이다.; 1984년 모나코 GP
예선 13위로 시작했지만, 폭우 속에서 놀라운 속도로 순위를 끌어올렸다. 니키 라우다를 추월하고 선두 알랭 프로스트를 맹추격했으나, 폭우로 인해 31랩에서 경기가 중단되었다. 비록 우승은 놓쳤지만, F1 데뷔 6경기 만에 첫 포디엄을 기록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317]
; 1985년 포르투갈 GP
예선에서 첫 폴 포지션을 차지하고, 결승에서도 폭우를 뚫고 독주하며 데뷔 16경기 만에 첫 우승을 달성했다. 2위와 1분 이상의 차이를 벌리고, 3위 이하는 모두 한 바퀴 뒤처지게 만드는 압도적인 승리였다. 이 경기를 통해 "비의 세나"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318]
; 1986년 스페인 GP
예선에서 폴 포지션을 획득하고 경기 초반 선두를 유지했으나, 나이젤 만셀에게 추격을 허용했다. 막판 타이어 문제로 잠시 선두를 내줬지만, 다시 되찾고 마지막 랩에서 만셀의 추격을 뿌리치며 0.014초 차이로 우승했다.
; 1988년 일본 GP
첫 챔피언 타이틀이 걸린 경기에서 폴 포지션을 획득했지만, 스타트 실수로 14위까지 밀려났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빗속에서 놀라운 추격전을 펼쳐, 결국 선두 알랭 프로스트를 추월하고 우승하며 첫 월드 챔피언에 등극했다.[299]
; 1990년 미국 GP
예선에서 전기 계통 문제로 5위로 밀려났지만, 결승에서 신예 장 알레지와 명승부를 펼쳤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접전 끝에 결국 알레시를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하며 "역사에 남을 명승부"를 연출했다.[300][301]
; 1991년 브라질 GP
모국에서 첫 우승을 노리며 예선 폴 포지션을 차지했다. 경기 초반 나이젤 만셀과 선두 경쟁을 벌였으나, 만셀이 타이어 교체와 기어 박스 문제로 탈락하면서 선두로 올라섰다. 하지만 세나 역시 기어 박스 문제에 시달렸고, 마지막에는 6단 기어만으로 주행해야 하는 극한 상황에 놓였다. 결국, 한계 상황에서 빗속을 뚫고 감격적인 모국 첫 우승을 달성했다.[319]
; 1991년 헝가리 GP
혼다 소이치로 사망 직후 열린 경기에서, 조의를 표하며 출전하여 폴 투 윈을 달성했다. 세나는 이 승리를 혼다 소이치로에게 바쳤다.
; 1992년 모나코 GP
윌리엄스 팀의 압도적인 성능에 밀려 고전하던 중, 예선 3위에서 출발했다. 선두 나이젤 만셀이 타이어 문제로 피트인한 사이 선두로 올라섰고, 새 타이어로 맹추격하는 만셀을 끝까지 막아내며 모나코 GP 4연패를 달성했다.
; 1992년 독일 GP
모나코 GP와 유사하게, 타이어 교체 없이 경기를 운영하며 나이젤 만셀과 리카르도 파트레제의 추격을 막아냈다. 마지막 랩까지 치열한 방어전을 펼쳐 2위를 지켜냈다.
; 1993년 브라질 GP
예선에서 알랭 프로스트에게 큰 차이로 뒤졌지만, 결승에서 비가 내리자 재빠르게 레인 타이어로 교체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다른 드라이버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선두로 올라섰고, 결국 모국에서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 1993년 유럽 GP
예선 4위에서 출발했지만, 비가 내리는 오프닝 랩에서 4대를 추월하며 단숨에 선두로 올라섰다. 이후 압도적인 페이스로 독주하며 시즌 2승을 거두었다. 이 경기는 세나의 "최고의 레이스" 중 하나로 꼽힌다.[321]
; 1993년 모나코 GP
알랭 프로스트의 페널티와 미하엘 슈마허의 리타이어로 선두를 차지한 후, 그대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모나코 GP 5연패, 통산 6승을 달성했다. 이로써 세나는 "모나코 마이스터" 그레이엄 힐의 기록을 경신했다.[322]
; 1993년 일본 GP
알랭 프로스트와의 마지막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 집중했고, 예선 2위에서 좋은 스타트로 프로스트를 제치고 선두를 차지했다. 이 승리는 세나의 마지막 스즈카 서킷 승리가 되었다.
; 1993년 오스트레일리아 GP
알랭 프로스트와의 마지막 F1 경기에서 폴 포지션을 차지하고, 결승에서도 선두를 유지하며 우승했다. 이 승리는 세나의 마지막 F1 우승이자, 2년 만의 폴 투 윈이었다.
6. 2. 논란을 낳았던 레이스
1988년 모나코 GP 예선에서 세나는 2위 알랭 프로스트에게 1.427초 차이를 내며 폴 포지션을 획득했다. 세나는 이 예선에 대해 "의식적인 이해를 크게 넘어섰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에 갑자기 무서워져서 천천히 피트로 돌아가 더 이상 달리지 않았다"고 말했다.[324] 결승에서도 선두를 달리던 중 67랩에 터널 앞 포르티에 코너에서 가드레일에 충돌하여 리타이어했다. 남은 랩 수가 적었고, 추월당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의 실수였다.[325]1989년 일본 GP에서 세나는 47랩째 시케인 진입에서 알랭 프로스트와 추돌했다.[326] 레이스에 복귀하여 1위로 체커를 받았으나, 시케인 지름길 등의 이유로 실격 처분을 받았다.[327] 세나는 "한 발짝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단지 오른쪽으로 향했을 뿐,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막혀 버렸다. 별 의미 없는 레이스였을지도 모른다. 이 일은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327]
1990년 헝가리 GP에서 세나는 64랩째 시케인에서 나니니를 날려 버리고 리타이어시켰다. 레이스 후 나니니는 "오늘 일은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1990년 일본 GP에서 세나는 스타트 직후 1코너에서 알랭 프로스트와 접촉하여 양쪽 모두 리타이어했다.[328] 세나는 다음 해 이 추돌이 고의적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레이서끼리의 싸움에는 위험이 따른다. 약간의 틈도 놓치지 않고 도전해야 레이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이기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그것이 승리에 대한 동기다"라고 말했다.[328]
1991년 독일 GP에서 세나는 알랭 프로스트와 4위 다툼을 벌이던 중 38랩째 제2 시케인에서 접촉했다. 알랭 프로스트는 세나의 행위를 위험하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1992년 브라질 GP에서 세나는 미하엘 슈마허가 여러 번 추월을 시도하자 가감속을 반복하며 막았다. 미하엘 슈마허는 "챔피언이 취할 행동이 아니다"라고 비판했고, 세나는 "이미 엔진에 트러블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7. 드라이빙 스타일 및 기술
세나는 카트 시절 특별한 요소 없이 흰색 헬멧을 사용했다. 그는 만족스러운 디자인을 찾기 위해 흰색, 노란색, 녹색 등 다양한 디자인을 시도했다.[237] 1979년, 시드 모스카가 디자인한 노란색 바탕에 상단 바이저 주변에는 녹색 줄무늬, 하단 바이저 주변에는 옅은 금속성 파란색 줄무늬가 있는(두 줄무늬는 서로 다른 색으로 구분) 헬멧을 처음 선보였다. 모스카는 엠erson 피티팔디와 넬슨 피케의 헬멧도 디자인했다.
모스카에 따르면 파란색과 녹색 줄무늬는 움직임과 공격성을, 전체적인 노란색은 젊음을 상징한다.[16] 이 세 가지 색상은 브라질 국기와도 일치한다. 스폰서십을 제외하면 헬멧 디자인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세나는 가끔 파란색 줄무늬를 검은색으로 바꾸기도 했다. 노란색 색조는 여러 번 바뀌었는데, 보통은 진한 선명한 노란색이었지만 1985년과 1986년 일부 레이스에서는 형광 네온 노란색을 사용했다. 1994년에는 윌리엄스 머신의 파란색과 흰색에 맞춰 더 밝고 옅은 노란색을 사용했다.
세나는 경력 동안 여러 헬멧 브랜드를 사용했다. 1977년부터 1989년까지는 Bell사 제품을(1977년부터 1982년까지는 Star, 1983년부터 1989년까지는 XFM-1), 1990년부터 1991년까지는 혼다 자체 브랜드인 Rheos를, 1992년부터 1993년까지는 쇼에이(Shoei)의 X-4를 사용했고, 1994년에는 다시 Bell사의 M3 케블라(Kevlar)를 사용했다.[238] 세나가 치명적인 사고를 당했을 때 착용한 헬멧은 2002년 Bell사에 반환되어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각되었다.[239]
세나의 조카 브루노 세나는 포뮬러 원 경력 동안 삼촌의 헬멧 디자인(녹색과 파란색 줄무늬가 있는 노란색 헬멧)을 수정하여 사용했다. 줄무늬는 직선이 아닌 S자 모양이었고, 턱 아래에는 녹색 줄무늬, 상단 근처에는 파란색 둥근 직사각형이 있었다. 브루노는 세나의 마지막 월드 챔피언십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11 시즌 마지막 3경기에서 수정된 헬멧 디자인을 선보였다.[240]
1995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루벤스 바리첼로는 세나의 헬멧 디자인 일부를 자신의 헬멧 디자인에 통합했다.[241] 루이스 해밀턴도 여러 차례 세나를 기리는 헬멧을 착용했다.
모터 레이싱 외에도, 브라질 사이클 선수 무릴루 피셔는 2015 지로 디탈리아 11구간에서 이몰라 서킷에서 끝나는 경주에서 세나의 헬멧 색상(노란색에 녹색과 파란색 줄무늬)을 기반으로 한 헬멧을 착용했다.[242] 이몰라에서 열린 2020 에밀리아-로마냐 그랑프리에서 피에르 가슬리는 세나의 색상과 "Senna Sempre"(세나 포에버) 배지를 단 특별한 헬멧을 착용했다.[243]
결승 레이스에서 세나는 폴 포지션에서 선두를 유지하고 레이스 초반에 2위 이하와 큰 차이를 벌린 후, 그 차이를 유지하며 승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스타일은 폴 포지션에서 출발하는 드라이버에게 효과적인 전략으로, 초반에 경쟁자들의 사기를 꺾어 레이스 후반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세나 이전에 최다 폴 포지션 기록을 보유했던 짐 클락도 이와 같은 스타일이었다). 세나가 선수로 활동하던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는 재급유가 금지되어 있었고, 가장 빠른 랩 타임(페이스트랩)은 머신이 가벼워지는 레이스 종반에 기록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앞서 언급한 전략으로 인해, 세나의 페이스트랩 획득 횟수는 19회(2019 시즌 종료 시점, 역대 15위)로, 승리 횟수 41회(역대 5위), 폴 포지션 횟수 65회(역대 3위)에 비해 적은 편이다.
세나는 스트리트(시가지) 코스와 비가 오는 레이스에서 강점을 보였다. F1에서 거둔 총 41번의 우승 중 18번을 스트리트 코스에서 기록했으며,[335] 모나코에서는 5연승을 포함하여 6번(1987, 1989~1993년) 우승했고, 스파(2/3가 공도)에서는 4연승을 포함하여 5번(1985, 1988~1991년) 우승했으며, 디트로이트에서는 3연승(1986~1988년)을 기록했다. 특히 1991년 시즌에는 스트리트 코스에서 개최된 4번의 그랑프리(피닉스, 모나코, 스파, 애들레이드)를 모두 제패했다.
퍼머넌트 코스에서도 먼지가 많고 미끄러워 드라이버의 기술이 요구되는 악조건에서 강점을 보였다. 헝가로링에서는 3번의 우승(1988, 1990, 1991년)과 4번의 2위를 기록했다. F1에서 유일하게 예선 탈락을 경험하고 마지막 레이스를 치른 이몰라에서도 3번의 우승(1988, 1989, 1991년)과 8번의 폴 포지션을 기록하며 강세를 보였다.
반면, 몬차, 에스트릴, 고향 브라질 그랑프리가 열린 자카레파과, 인터라구스 등에서는 약점으로 여겨졌다. 알랭 프로스트의 모국인 프랑스 그랑프리에서는 10년 동안[337] 결국 1번의 우승도 거두지 못했다.
세나의 속도와 기술은 높이 평가받았지만, 위험한 주행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3회 월드 챔피언 재키 스튜어트는 세나의 주행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인터뷰에서 직접 비판했다.[339] 이에 대해 세나는 "F1 드라이버는 우승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으며, 레이싱 드라이버라면 약간의 틈이라도 파고들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3회 월드 챔피언인 잭 브래बम은 1990년 일본 GP 1코너에서 세나와 알랭 프로스트의 접촉에 대해, 과거에는 선두 그룹에서 그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며, 머신의 안전성 향상으로 인해 드라이버의 도덕성이 저하되었다고 한탄했다.[339] 마틴 브룬들은 "세나는 길을 양보하거나 리타이어하거나 둘 중 하나를 강요해 온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7. 1. 예선
세나는 예선에서 놀라운 속도를 보여주었다. 1988년과 1989년, 2년 연속으로 16경기 중 13번이나 PP을 차지했는데, 이는 당시 한 해 최다 획득 기록(9회)을 크게 넘어선 것이다. 1988년 제14전 스페인 그랑프리부터 1989년 제5전 미국 그랑프리까지 8경기 연속 PP 획득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통산 PP 65회는 2006년 미하엘 슈마허가 경신하기 전까지 최다 기록이었으며(2021년 10월 현재 루이스 해밀턴의 PP 101회가 최다 기록), 획득률은 40.1%로 역대 4위이다. 이는 레이스 연간 개최 수와 개인 참전 수가 증가하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 드라이버 중 단연 돋보이는 기록으로, PP 최다 기록 보유자 루이스 해밀턴(35.7%)과 세나의 PP 최다 기록을 경신한 슈마허(25.3%)를 크게 앞선다.세나는 예선 마지막 순간에 최고 속도 랩을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지막 순간에 폴 포지션을 가져가는 모습에 메카닉 등 피트 크루는 세나가 "주머니 속의 0.1초를 꺼냈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2020년, 아마존 웹 서비스가 후원하는 포뮬러 원은 AWS 머신 러닝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드라이버들의 예선 성적을 비교했다. 그 결과, 알고리즘은 세나를 역대 최고의 예선 드라이버로 선정했다.[169]
7. 2. 세나 발
세나의 기술 중 하나로 잘 알려진 것은 코너에서 가속 페달(액셀)을 작게 반복해서 움직이는 주행 방법이다. 일본에서는 '세나 발'이라고 불리는 이 기술은 코너 진입 시 안정성을 높이는 동시에, 코너 탈출 시 빠른 엔진 회전수 상승을 가져왔다. 이 작고 독특한 회전수 조절은 원래 터보 엔진의 터빈 회전을 높게 유지하여 터보랙 발생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세나 발은 카트 시절부터 고안된 기술이며, F1에서 터보 엔진, 자연 흡기(NA) 엔진에 관계없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터보랙 억제설에는 이견이 존재한다. 세나는 "세나 발"을 터보 엔진에 국한하지 않고, 코너 시작부터 최대한 빨리 가속하기 위한 기술로 완성시켰다.[331]세나 이전에 케케 로즈베르그가 "케케 발"이라는 비슷한 기술을 사용했지만, 로즈베르그의 것은 단순히 액셀을 "작게 반복해서 움직이는" 것이었다. 반면 세나의 것은 1초에 6회나 되는 액셀 조작으로, 움직임이라기보다는 경련에 가까운 빈도였다는 것이 텔레메트리 데이터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로즈베르그 등의 "케케 발"과는 전혀 다른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331] 혼다 엔지니어가 엔진 동력 계통에 전자식 스로틀 제어[332]를 도입했을 때, 신호의 노이즈를 제거하기 위한 필터를 설치했다. 그러나 세나 발에 의한 액셀 조작이 노이즈로 인식될 정도로 미세하고 빨랐기 때문에, 세나의 액셀 조작 자체가 무시되는 "세나에게만 발생하는 문제"가 발생했고, 혼다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세나 발의 이론적, 실천적 근거를 찾기 위해 일본 국내 F3000급(당시) 프로 드라이버들이 검증한 적이 있지만, 결론은 "모른다"였다. 나카야 아키히코는 "상식을 초월한 영역의 기술일 것"이라고 언급하며, 한계점 추출, 하중 컨트롤, 트랙션 컨트롤 등 일반적인 이론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팀 동료였던 프로스트, 베르거도 세나 발을 시도했지만, 재현할 수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333]
이 기술로 인해 연비는 다소 나빠지지만, 이후 직선 주로에서의 속도에서 큰 차이가 발생한다. 1988년, 팀 동료 프로스트는 텔레메트리 데이터에서 항상 세나보다 100~300회전 정도 낮은 회전수를 기록했고, "혼다는 세나에게 더 좋은 엔진을 제공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고토 오사무에 따르면, 혼다의 조사 결과 프로스트는 세나보다 빠른 타이밍에 기어를 올리기 때문에 고회전 영역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었다.[334] 1989년 제12전 이탈리아 그랑프리 몬차 서킷 예선에서 세나는 고속 레즈모 코너에서 프로스트보다 1000회전 높은 영역에서 혼다 V10 엔진을 사용했다고 한다.
후에 Racing On에서 세나 사망 10주년 기획에서 "차는 언더스티어 성향으로 설정을 해 두고, 세나 발로 세밀하게 오버스티어를 유발하여 상쇄시킴으로써, 뉴트럴에 가까운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고 해설했다.
일본 색소폰 연주자 혼다 마사토는 세나를 추모하기 위해 1994년에 제작(발표는 1998년)한 음악 "Condolence"에서 세나 발을 연상시키는 프레이즈를 넣었다.
7. 3. 비
"레인 마스터" 또는 "비의 세나"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세나는 비가 오는 웻 컨디션에서의 레이스를 매우 잘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잘했던 것은 아니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카트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웻 레이스에서 다른 드라이버들에게 여러 곳에서 간단히 추월당해 억울했고, 그 때문에 단련했다고 한다.[331] 세나는 이 경험 이후 서킷에 가서 코스에 물을 뿌려 물에 잠기게 하고, 웻 컨디션에서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이러한 노력 덕분에, 세나는 웻 컨디션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1985년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폭우 속에 치러진 결승전에서 시작부터 끝까지 선두를 달리며, 2위 미케레 알보레토에게 1분 이상의 차이를 벌리고, 3위 이하는 모두 한 바퀴 뒤처지는 독주로 F1 첫 우승을 거머쥐었다.[318] 1993년 유럽 GP에서도 폭우 속에서 오프닝 랩에 4대를 추월하며 선두에 서는 놀라운 주행을 선보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나는 비 오는 레이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는 마찬가지로 웻 레이스를 잘해 "비의 나카지마"라고 불린 나카지마 사토루도 마찬가지였다.
7. 4. 서킷별
세나는 비와 더불어 스트리트(시가지) 코스에서 강점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F1에서 거둔 총 41번의 우승 중 18번을 스트리트 코스에서 기록했다.[335] 세나가 주행한 6개의 스트리트 코스[336] 중, 데뷔 연도에만 개최되었던 달라스에서는 우승하지 못했지만, 다른 5개 코스에서는 모두 2번 이상 우승했다. 모나코에서는 5연승을 포함하여 6번(1987, 1989~1993년) 우승했고, 스파(2/3가 공도)에서는 4연승을 포함하여 5번(1985, 1988~1991년) 우승했으며, 디트로이트에서는 3연승(1986~1988년)을 기록했다. 특히 1991년 시즌에는 스트리트 코스에서 개최된 4번의 그랑프리(피닉스, 모나코, 스파, 애들레이드)를 모두 제패했다.
퍼머넌트 코스에서도 먼지가 많고 미끄러워 드라이버의 기술이 요구되는 악조건에서 강점을 보였다. 헝가로링에서는 3번의 우승(1988, 1990, 1991년)과 4번의 2위를 기록했다. F1에서 유일하게 예선 탈락을 경험하고 마지막 레이스를 치른 이몰라에서도 3번의 우승(1988, 1989, 1991년)과 8번의 폴 포지션을 기록하며 커리어 전체를 통틀어 강세를 보였고, 특히 폴 포지션 획득 횟수는 세나 개인 최다 기록이다.
반면, 몬차, 에스트릴, 고향 브라질 그랑프리가 열린 자카레파과, 인터라구스 등에서는 약점으로 여겨졌다. 몬차에서는 최종적으로 2번 우승했지만, 1987년부터 1989년까지 3년 연속 우승을 놓쳤고, 1990년 첫 승리까지 6년이 걸렸다. 첫 폴 포지션을 획득했던 에스트릴에서는 단 1번의 우승에 그쳤다. 자카레파과에서는 6년 동안 우승하지 못했고, 포디엄 기록조차 1986년 2위가 유일했다. 인터라구스에서도 5년 동안 2번 우승했지만, 1990년 나카지마 사토루와의 접촉, 1994년 미하엘 슈마허 추격 중 단독 스핀 등의 사고가 발생했다.
또한, 라이벌 알랭 프로스트의 모국인 프랑스 그랑프리에서는 10년 동안[337] 결국 1번의 우승도 거두지 못했다(최고 순위는 1988년 2위). 프로스트는 고향 그랑프리와 세나의 모국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모두 높은 승률을 기록했으며,[338] 이 점에서는 대조적인 결과를 남겼다.
7. 5. 위험한 주행
세나의 속도와 기술은 높이 평가받았지만, 위험한 주행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3회 월드 챔피언이자 평소 양식을 중시했던 재키 스튜어트는 세나의 주행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인터뷰에서 직접 비판했다.[339] 이에 대해 세나는 "F1 드라이버는 2위나 3위가 되기 위해 레이스를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우승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으며, 레이싱 드라이버라면 약간의 틈이라도 파고들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만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3회 월드 챔피언인 잭 브래बम은 1990년 일본 GP 1코너에서 세나와 알랭 프로스트의 접촉에 대해, 과거에는 선두 그룹에서 그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며, 머신의 안전성 향상으로 인해 드라이버의 도덕성이 저하되었다고 한탄했다.[339] 마틴 브룬들은 "세나는 길을 양보하거나 리타이어하거나 둘 중 하나를 강요해 온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8. 인간 관계
세나는 브라질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2006년 일본 니혼TV 조사에서는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 22위에 오르기도 했다.[126][180][181]
세나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알려졌지만, 에리오 데 안젤리스, 게르하르트 베르거, 데이먼 힐, 티에리 뷔첸, 페드로 라미, 마우리시오 구겔민, 루벤스 바리켈로 등 많은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340][341] 특히 루벤스 바리켈로가 1994년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 사고를 당했을 때, 가족보다 먼저 병원을 찾아 의식을 찾을 때까지 곁을 지켰을 정도로 각별했다.
로터스 시절 팀 동료였던 나카지마 사토루는 세나가 레이스 전략, 머신 세팅, 정치적인 부분까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회상하며 그의 진지한 면모를 언급했다. 1990년대에는 젊은 드라이버들에게 조언을 하거나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1993년 일본GP에서는 에디 어바인에게 주먹을 휘두른 사건도 있었지만, 주변의 제지로 마무리되었고 6개월 집행유예와 2경기 출전 정지 처분을 받았다.[342]
장-마리 발레스트르 FIA 회장과는 1989년 일본 그랑프리 실격 판정, 1990년 폴 포지션 문제 등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는 F1계의 유럽 중심적인 분위기에 맞서는 세나의 모습을 보여주며, 특히 유럽 외 지역에서 팬을 확보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8. 1. 라이벌 관계의 예
; 넬슨 피케 (Nelson Piquet): 세 차례 F1 월드 챔피언을 차지한 넬슨 피케(Nelson Piquet)와 세나는 같은 브라질 출신 선후배 사이였지만,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아 세나가 사망할 때까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340] 피케는 언론을 통해 세나를 "상파울루 택시 운전사", "여자에게 관심 없는 라디오 조종기 광" 등으로 비난했고,[340] 1988년에는 인터뷰에서 세나가 동성애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37] 그러나 1992년 피케가 인디 500 예선에서 큰 부상을 입었을 때 세나는 문병 전보를 보냈고, 피케는 "읽고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340] 피케는 세나 사망 당시 애도 메시지에서 "당분간은 나타나지 않을 존재"라며 세나를 높이 평가했다.[340]
; 나이젤 맨셀 (Nigel Mansell)
: 나이젤 맨셀(Nigel Mansell)과는 1987년 벨기에 GP에서 충돌 후 난투극을 벌이는 등[340] 여러 차례 다툼이 있었지만, 원한을 남기지는 않았다.[341] 1991년 세나가 챔피언이 되었을 때 맨셀은 피트에서 세나를 축하했고,[341] 1992년 맨셀이 첫 타이틀을 획득했을 때 세나가 피트에서 축하했다.[341] 1992년 모나코 GP에서는 서로를 칭찬하는 등 좋은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다.[341] 세나 사후 일본 TV 프로그램에서 맨셀은 "서로 굉장한 녀석이라고 인정했다"고 말했다.[341] 시드 와트킨스(Sid Watkins)도 맨셀과 세나가 우호적인 관계였다고 언급했다.[341]
; 알랭 프로스트 (Alain Prost)
: 알랭 프로스트(Alain Prost)와는 1988년 포르투갈 GP에서 위험한 배틀,[324] 1989년 일본 GP, 1990년 일본 GP에서 충돌하는 등[326][328] 악연이 있었다. 하지만 1992년 프로스트가 F1에서 휴식할 때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 연락했고,[341] 이마미야 준과 카와이 카즈토는 "카메라가 없을 때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고 기록했다.[341] 프로스트는 "문제가 있었지만, 언론 때문에 적대 관계로 인식되었다"고 말했다.[341] 1989년에도 팀을 위해 프로페셔널한 관계를 유지했다.[341] 1994년 산마리노 GP 중 세나는 프로스트에게 "네가 없어서 외로워"라고 무선으로 전했고, 이틀 후 사고로 사망했다.[341] 프로스트는 세나 팬클럽 프랑스 지부 명예 회장을 맡았다.[341]
: 후지TV 추모 이벤트 인터뷰에서 프로스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미하엘 슈마허 (Michael Schumacher)
: 미하엘 슈마허(Michael Schumacher)는 데뷔 초 세나와 여러 차례 트러블을 일으켰다. 1992년 브라질 GP에서 세나의 블로킹에 대해 슈마허는 "챔피언이 할 행동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프랑스 GP에서는 슈마허가 추돌하자 세나가 크게 화를 냈다. 독일 호켄하임링 테스트에서 싸움 직전까지 갔고, 1993년 남아프리카 GP에서는 세나가 슈마허를 방해해 스핀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1994년에는 서로를 인정하고 안전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 1994년 산마리노 GP에서 세나의 사고를 목격한 슈마허는 슬픔에 잠겼다. 2000년 이탈리아 GP에서 세나와 같은 41승을 거두자 기자회견에서 "이 승리는 나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는 거야. 미안해…"라며 울음을 터뜨렸다.[343] 다시 질문을 받자 "그런 거 말 안 해도 알잖아"라고 답했다.[344]
8. 2. 혼다와의 관계
혼다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세나는 혼다의 스포츠카(프렐류드와 NSX) 홍보 활동을 했다. 그는 NSX 수석 엔지니어인 우에하라 시게루와 함께 스즈카에서 5번의 테스트 세션을 통해 NSX 테스트와 미세 조정에 참여했다.[146] 혼다는 세나의 피드백을 인정하며, 세나가 우에하라에게 차체 강성을 높일 것을 권장했다고 설명했다.[147] 그 대가로 혼다는 세나에게 맞춤 제작된 검정색 NSX를 선물했다. 그는 또한 혼다 포르투갈과 세나의 친구인 안토니오 카를로스 데 알메이다 브라가가 소유한 다른 두 대의 NSX 차량을 운전했다.[148]
1987년, 혼다가 로터스에 엔진을 공급하면서 세나와 혼다의 돈독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이는 1988년 세나가 맥라렌으로 이적한 후에도 계속되어, 1992년까지 6년간 혼다 엔진을 사용하게 된다. 혼다 소이치로를 만났을 때 "너를 위해 최고의 엔진을 만들어 주겠다"는 말을 듣고 "혼다 씨는 일본의 아버지"라며 감격했다고 한다.
1987년까지 혼다 F1 총감독이었던 사쿠라이 요시토시와는, 사쿠라이가 혼다를 퇴사한 후에도 세나가 여러 가지를 상담할 정도로 깊은 친구 관계였다.
개막전 브라질 GP에서 엔진에 이상을 느껴 리타이어했지만, 실제로는 엔진이 고장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혼다 엔지니어가 엔진을 분해해 본 결과, 부품이 파손되어 엔진 블로우 직전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혼다 엔지니어들의 세나에 대한 평가와 신뢰가 높아졌다.
1988년 스즈카 레이스 후, 세나는 알랭 프로스트와 함께 혼다로부터 식사 초대를 받았고, "우리 차로 이겨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세나는 예상치 못한 감사 인사에 감격하여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345]
레이스 외에도 혼다와 관계를 유지하며, 1989년 혼다의 플래그십 스포츠카 NSX 개발 테스트에 참여했다. 이는 세나가 평생 동안 유일하게 참여한 양산 승용차였다. 차량 테스트에서 세나가 차체 강성 부족을 지적하자, 혼다가 강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착한 바는 '세나 바'라고도 불린다. 또한, "세나의 휴일"이라는 광고 카피로 혼다 VT250 스파다(2륜)의 지면 광고에 출연했다. 이후 혼다 프렐류드(4세대) CM에도 출연했다.[346] 광고 카피는 "'''Just move it'''"였다.
맥라렌 담당 엔지니어였던 키우치 타케오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나는 아직 젊으니까, 몇 년이라도 기다릴 수 있으니, 다시 한번 혼다 차를 타겠다"며 F1 무대에서의 재회를 약속했다.
2013년, 혼다는 1989년 일본 GP에서 세나가 기록한 퀄리파잉 최고 속도 랩을 최신 기술로 재현하는 "Ayrton Senna 1989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엔진 소리와 주행 라인을 3DCG로 재현한 웹 콘텐츠 "3D-View" 등을 공개했다.[347][348]
2013년 7월, 혼다는 "사운드 오브 혼다 – 에어턴 세나 1989"라는 제목의 시청각 오마주를 발표했다. 세나의 혼다 엔진 장착 맥라렌 MP4/5의 원격 측정 및 사운드를 사용하여, 혼다는 스피커와 조명을 스즈카 서킷에 설치하여 1989년 일본 그랑프리에서 세나가 기록적인 랩을 기록한 것을 재현했다. 조명은 세나의 실제 경로를 따라가며 세나의 실제 랩타임과 동기화되었다.[190]
;'''혼다 엔진 통산 성적'''
1987년에는 로터스, 1988년부터 1992년까지는 맥라렌에서 총 6년간 혼다 엔진 탑재 차량을 운전했다.
항목 | 기록 | 비고 |
---|---|---|
드라이버 챔피언십 | 3회 | 1988년, 1990년, 1991년 (모두 맥라렌-혼다 시대) |
우승 | 32회 | 총 41회 중 78% |
폴 포지션(PP) | 46회 | 총 65회 중 70% |
패스티스트 랩(FL) | 14회 | 총 19회 중 74% |
총 포인트 | 435점 | 총 614점 중 71% |
드라이버 챔피언십, 우승, PP, FL, 총 포인트 모두 혼다 엔진의 드라이버별 통산 기록 중 최다 기록이다.
9. F1 주요 기록
기록 | 내용 |
---|---|
월드 챔피언 3회 (당시 역대 2위) | 1988년, 1990년, 1991년. 1993년 알랭 프로스트가 4번째 타이틀을 획득하며 단독 2위, 사망 당시 역대 3위. |
우승 41회 (당시 역대 2위) | 1991년 제2전 브라질GP에서 재키 스튜어트의 27승 갱신. |
폴 포지션 65회 (사망 당시 역대 1위) | 1989년 제5전 미국GP에서 짐 클라크의 33회 갱신. 2006년 제4전 산마리노GP에서 미하엘 슈마허가 갱신. |
연간 폴 포지션 13회 (당시 역대 1위) | 1988년, 1989년에 연속 기록. 1973년 로니 피터슨, 1974년, 1975년 니키 라우다, 1984년 넬슨 피케의 9회 갱신. 1992년 나이젤 맨셀 갱신. |
연간 폴 투 윈 7회 (당시 역대 1위) | 1988년, 1991년에 기록. 이전 기록 5회 갱신. 1992년 나이젤 맨셀 갱신. |
연속 폴 포지션 8회 (역대 1위) | 1988년 제14전 스페인GP - 1989년 제5전 미국GP 기록. |
연속 프런트 로우 획득 24회 (역대 1위) | 1988년 제9전 독일GP - 1989년 제16전 오스트레일리아GP 기록. |
동일 GP 연속 PP 7회 (역대 1위) | 산마리노GP에서 1985년 - 1991년 기록. |
동일 GP 연속 우승 5회 (역대 1위) | 모나코GP에서 1989년 - 1993년 기록. |
개막부터 연속 우승 4회 (당시 역대 1위) | 1991년 기록. 이전 기록 2승 갱신. 1992년 나이젤 맨셀 갱신. |
개막부터 연속 PP 6회 (당시 역대 1위) | 1988년 기록. 1977년 제임스 헌트의 3회 갱신. 1993년 알랭 프로스트 갱신. |
모나코GP 6승 (역대 1위) | 1993년 갱신. 1987년, 1989년 - 1993년 기록, 1969년 그레이엄 힐의 5승 갱신. |
10. 에피소드
(IAS)는 세나의 브랜드를 다양한 상업 및 자선 사업에 라이선스를 부여하고 있다.
- 두카티는 두카티 916 슈퍼바이크(1996~1998)와 1199 파니갈레 S 세나(2013) 세나 특별 에디션 3종을 생산했다.[223]
- MV 아구스타는 F4 750 세나(2002)와 F4 세나 1000(2006) 두 종류의 한정판 모터사이클을 출시했다. 수익금은 모두 IAS에 기부되었다.[153]
- 2010년대 맥라렌-혼다 재결합 기간 동안 혼다와 맥라렌은 세나의 전설을 기리는 광고 캠페인을 진행했다.[224][225]
- 2014년 IAS는 기념 베스파를 제작하여 자선 경매에 부쳤다. 세나의 헬멧 색상으로 특별 제작되었으며, 디자인은 피아지오가 F1 폴 포지션 차지자에게 제공하는 후원 선물을 연상시킨다.[226]
- 2017년 맥라렌 오토모티브는 789마력의 슈퍼카인 맥라렌 세나를 출시했다.[227]
- 2017년 미국 회사인 로슬랜드 캐피털은 세나를 기념하는 기념 주화 시리즈를 제작했다.[228]
- 2018년 나이키와 코린치앙스 축구단은 세나의 첫 월드 챔피언십을 기념하는 특별 세나 유니폼을 공개하며, '#LuteAtéSerEterno(영원히 싸워라)'라는 태그라인을 사용했다.[229]
개인 정보, 가족 및 연인, 신앙심, 자선 활동
- 오른손잡이, 혈액형은 Rh+B형.[349]
- 취미는 무선 조종 비행기와 헬리콥터 조종, 커피를 싫어함.[349]
- 휴식 시간에는 제트스키를 즐겼으며, 1991년 사고로 부상.[349]
- 가족: 아버지 밀턴, 어머니 네이지, 누나 비비아네, 남동생 레오나르도, 조카 브루노 세나.[350]
- 슈샤(본명: 마리아 다 그라사 메네겔)와 교제.[351]
- 독실한 가톨릭 신자, 성경 휴대, 신의 존재 언급.[352]
- 1988년 일본 GP 우승 후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신을 보았다" 발언.[352]
- 익명으로 자선 활동, 수백만 달러 기부.[324][353]
사업, 협상술, 투표 결과, 일본 미디어 관련
- F1 수입 외 회사 설립, 캐릭터 상품 "세니냐 (Senninha)" 판매, 수익 일부 기부.
- 팀과의 협상에서 강인한 면모, 맥라렌에서 나시오날 은행(NACIONAL) 로고 노출 허용.[354]
- 1990년 론 데니스와 계약 협상, 1년 계약 + 1년 옵션, 약 22억엔 보수.
- 1993년 포드 웍스 엔진 획득 호소, 론 데니스를 악어 연못에 밀어 넣고 계약금 인상.[354]
- F1 Racing지 선정 역사상 최고 속도 드라이버, 역대 최고 드라이버 톱 100 1위.[355]
- 오토스포츠지 선정 F1 최고 드라이버.[355]
- 후지 TV F1 중계 미야케 마사하루 아나운서 담당, 간사이 TV 바바 테츠시 아나운서와 상성.[356][357][358][359][360][361][362][363][364]
- 1991년 주간 소년 점프 만화 연재, 1992년 후지 TV 출연, 이시바시 타카아키와 카트 대결, 헬멧 선물.[365]
- 1993년 안토니오 이노키 만남.[366]
- 플레이스테이션 3 그란 투리스모 6 파트너십, F1 폴 포지션 지쿠 대담.
전기 영화 및 기타
- 2010년 일본 GP 다큐멘터리 영화 『아일톤 세나: 꿈을 넘어서』 공개.[367]
- 세나, 이몰라 서킷에서 "여기서 올해 누군가 죽을 것이다" 발언 영상 존재.[368]
- 보트 레이서 나카지마 세나 이름 유래.[369]
- SC 코린치앙스 파우리스타 팬.
10. 1. 개인 정보

아일톤 세나는 1960년 3월 21일 브라질 상파울루의 산타나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이탈리아계와 스페인계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9] 어릴 적 운동 협응력이 부족했지만, 뇌파 검사에서는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10] 7살 때 가족 농장에서 지프 운전을 배우며 자동차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11]
세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성경을 자주 읽었다.[126][127] 그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비밀리에 수백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128] 사망 직전에는 브라질 어린이들을 위한 단체(이후 아일톤 세나 연구소)의 기틀을 마련했다.[129]
세나는 오른손잡이였으며, 혈액형은 Rh+B형이었다.[349] 취미는 무선 조종 비행기와 헬리콥터 조종이었고, 커피를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349] 휴식 시간에는 제트스키를 즐겼는데, 1991년에는 제트스키 사고로 부상을 입기도 했다.[349]
세나는 SC 코린치앙스 파울리스타의 팬이었다.
; 가족・연인
세나는 아버지 밀턴, 어머니 네이지, 누나 비비아네, 남동생 레오나르도와 함께 살았다. 누나 비비아니의 아들인 '''브루노 세나'''는 2010년 F1에 데뷔한 레이서이다.
세나는 브라질의 유명 연예인 슈샤와 교제하기도 했다.
10. 2. 가족 및 연인
세나는 1960년 3월 21일 상파울루의 산타나 지역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브라질 가정에서 자랐으며, 아버지 밀턴 기라도 다 실바는 토지 소유주이자 공장주였고, 어머니는 네이디 조아나 세나 다 실바였다.[6][7] 세나는 이탈리아계와 스페인계 혈통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9] 누나 비비아네와 남동생 레오나르도가 있었다.[7][8]세나는 1981년 어린 시절 친구인 릴리안 드 바스콘셀로스 수자와 결혼했지만, 1982년 이혼했다.[131] 바스콘셀로스는 "나는 그의 두 번째 열정이었다. 그의 첫 번째 열정은 레이싱이었다"라고 말했다.[131]
세나의 조카 브루노는 포뮬러 원 드라이버로 2010년부터 2012년까지 활동했다. 세나는 1993년에 "제가 빠르다고 생각하신다면, 조카 브루노를 보실 때까지 기다려 보세요"라고 말하며 브루노의 재능을 칭찬했다.[133] 브루노는 포뮬러 E에 참가하면서 과거 세나의 라이벌이었던 프로스트와 피케의 아들(니콜라 프로스트, 넬슨 피케 주니어)과 경쟁하기도 했다.[350]
1985년부터 1988년까지 세나는 아드리아네 야민과 교제하며 약혼하기도 했다.[136] 이후 브라질 가수이자 텔레비전 스타인 슈샤와 1988년 말부터 1990년까지 교제했다.[136] 슈샤는 세나와 교제하기 전 축구 선수 펠레와 교제했었고, 세나와 교제한 후 슈샤를 둘러싸고 세나와 펠레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는 소문이 있었다.[351] 세나는 사망 당시 브라질 모델 아드리아네 갈리스테우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142]
10. 3. 신앙심
세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성경을 가지고 다니며 인터뷰 등에서 여러 번 신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했다.[352] 1988년 일본 GP에서 첫 챔피언을 획득했을 때, 레이스 후 회견에서 "스푼 커브를 달리고 있을 때,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신을 보았다. 빛에 싸여 하늘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라고 말했다.[352]10. 4. 자선 활동
세나는 비밀리에 수백만 달러를 기부하여 가난한 아이들을 도왔다.[128][324][353] 사망 직전, 그는 브라질 어린이들을 위한 단체의 기틀을 마련했는데, 이는 이후 아일톤 세나 연구소(IAS)가 되었다. IAS는 12년 동안 학교, 정부, 비정부기구, 민간 부문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사회 프로그램 및 활동에 거의 8억달러를 투자하여 저소득층 아동 및 청소년에게 개인, 시민, 미래의 전문가로서 잠재력을 충분히 개발하는 데 필요한 기술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29] 이 재단은 버니 에클스톤, 알랭 프로스트, 게르하르트 베르거가 공식적으로 자문을 맡고 있다.10. 5. 협상술
팀과의 협상에서 세나는 강인한 면모를 보였다. 맥라렌은 드라이버의 개인 스폰서 PR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세나는 예외적으로 나시오날 은행(NACIONAL)의 모자와 로고 노출을 허용하게 했다. 계약금이 합의되지 않았을 때는 론 데니스 회장과 동전 던지기로 결정한 적도 있었다.[354]1983년 오프 시즌에 세나와 함께 F1 테스트를 받았던 마틴 브룬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나는 당시부터 F3 보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노련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톨먼과 최초의 F1 계약을 맺을 때 위약금만 해결되면 언제든지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조항을 넣어, 더 강력한 머신을 탈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그 시점에서 세나는 이미 정신적으로 어른이었다."[354]
1990년 여름, 론 데니스와의 계약 연장 협상에서도 연봉이나 계약 기간 등 조건 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세나는 윌리엄스와 페라리로부터 계약 제의가 오고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데니스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 결과, 데니스가 3년 계약을 희망했던 것을 세나가 주장하는 1년 계약에 1년 옵션을 추가하는 계약으로 만들었고, 보수액도 세나가 희망한 약 22억엔을 데니스가 모두 받아들였다. 데니스는 "그(세나)는 이 그랑프리계 최고의 협상가다"라고 말했다.
1993년, 세나는 포드의 웍스 엔진 획득을 호소했고, 산마리노 GP에서는 금요일 프리 프랙티스 시작 직전까지 서킷에 들어가지 않으며 팀에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한편, 베르거와 함께 악어가 사는 연못에 론 데니스를 밀어 넣고 "계약금을 올린다고 약속하면 도와주겠다"라는 협상을 한 적도 있었다. 이 경우에는 론 데니스가 계약금 인상을 약속하고 두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다.
10. 6. 투표 결과
영국의 F1 Racing지(2007년 2월호)는 역사상 최고 속도의 F1 드라이버로 아이르통 세나를 선정했다. 이 조사는 FIA의 맥스 모슬리 회장, 당시 페라리 팀 대표 장 토드, 전 챔피언 케케 로즈베르그, 전 팀 오너 에디 조던 등 F1계를 대표하는 전문가 28명에게 투표를 의뢰하여 진행되었으며, 세나는 미하엘 슈마허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3위는 짐 클라크였다.[355]F1 Racing지(2008년 6월호)는 "역대 최고 드라이버 톱 100 랭킹"에서 세나를 1위로 선정했다. 이 순위는 F1 Racing지의 리더 패널 회원 수천 명의 투표로 결정되었으며, 2위는 미하엘 슈마허, 3위는 후안 마누엘 판지오였다.
영국 오토스포츠지는 F1 드라이버 경험자 217명의 투표를 통해 "F1에서 가장 위대한 드라이버"로 세나를 선정했다. 2위는 미하엘 슈마허, 3위는 후안 마누엘 판지오였다. 현역 드라이버 중에서는 페라리의 페르난도 알론소가 9위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2009년 12월).[355]
10. 7. 일본 미디어 관련
후지 TV의 F1 중계에서는 세나의 인상적인 레이스가 자주 언급되었는데, 미야케 마사하루 아나운서가 실황을 담당했던 경우가 많았다.[356] 명레이스로 자주 언급되는 GP나[357] 중요한 승리[358]의 비율이 높았고, 우승 레이스 외에도 리카르도 파트레제의 맹공을 막고 2위를 지킨 1992년 독일 GP, 마지막이 된 1994년 산마리노 GP 등이 미야케 아나운서의 실황이었다.반면, 세나와 상성이 좋지 않다고 언급되는 아나운서는 당시 간사이 TV 아나운서 바바 테츠시였다. 세나가 종반까지 선두를 달리다 승리를 놓치거나,[359] 큰 원한을 남기는 상황을 만들거나,[360] 시즌 첫 리타이어를 기록하는 등,[361] 단순한 "우승 실패" 이상의 사건을 동반한 레이스가 많았다. 혼다 진영도 바바 아나운서와의 상성에 관한 에피소드를 알고 있었고, 1990년 스페인 GP에서는 바바 아나운서의 사진[362]을 본 혼다 직원이 "장난이 지나치다!"라고 화낸 적도 있었다.[363] 1993년 스페인 GP에서는 바바 아나운서가 실황, 후루타테 이치로가 해설을 담당했는데, 후루타테 아나운서가 "'''바바 씨가 아나운서를 맡았을 때 세나가 이긴 확률은 무려 18%입니다. 22전 중 4승[364]입니다'''"라고 말하자, 바바 아나운서 자신도 "그 이야기에는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지만…"이라고 당황하는 장면도 있었다(결과는 알랭 프로스트가 우승하고 세나는 2위였다).
1991년에는 주간 소년 점프(슈에이샤)가 맥라렌의 스폰서였기 때문에, 35호부터 51호까지 세나를 주인공으로 그 해의 시리즈를 그린 『F의 섬광-아일톤 세나의 도전!!-』(원작: 니시무라 코우스케 그림: 나가사와 카츠야스・오니쿠보 히로히사)가 연재되었다.
1992년 10월 20일, 일본 GP 직전 후지 TV의 의뢰로 "웃어도 좋아!", "타임 3", "FNN 슈퍼 타임"에 출연했다. "웃어도 좋아!" 녹화 후, 후지 TV로 향하는 세나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해 신주쿠 알타 앞이 한때 소란스러워졌다. 이시바시 타카아키는 휴일에 "웃어도 좋아!"를 보고 우연히 세나의 프로그램 출연을 알게 되어 후지 TV 관계자를 통해 "만나고 싶다"고 협상한 결과 허락을 받았다. 당시 "톤네루즈의 생으로 느긋하게 보내주세요!!" 내 "생다라 CART GP"에서 "아일톤 타카"라고 불렀던 이시바시는 프로그램에서 사용했던 헬멧을 가지고 세나와 만나 의기투합했다. 이시바시는 예전부터 세나의 생다라 CART GP 참가를 바랐지만, 모나코 GP 관전을 위해 현지로 향하는 공항에서 만난 굿이어 간부의 중재가 효과를 발휘하여 1993년 12월에 실현되었다. 코너 레귤러 사다오카 마사지와 함께 소원하던 카트 대결을 즐겼다. 세나는 코스를 역주행하거나 이시바시를 따라 "셰" 포즈를 취하는 등 내내 편안한 모습을 보였다. 레이스 후, 이시바시로부터 "스즈카에서 우승했을 때의 헬멧" 선물을 부탁받고 이를 흔쾌히 승낙했다. 세나는 일본 친구인 이시바시와의 교류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고, 여러 번 이시바시를 걱정했다. 앞서 언급한 헬멧은 세나의 죽음으로부터 약 1년 후, 재단으로부터 혼다 직원을 통해 이시바시에게 전달되었지만, 한 번도 쓰지 않고 집에서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365]
10. 8. 기타
세나는 사망 당시 4억 달러로 추산되는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브라질 각지와 모나코, 포르투갈 등지에 여러 부동산을 소유했다.[128][144] 개인 제트기와 헬리콥터를 소유하여 브라질 내 이동에 사용했다.[145]혼다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혼다 스포츠카를 홍보했으며, 특히 혼다 NSX 개발에 참여하여 테스트와 미세 조정에 기여했다.[146] 혼다는 세나의 피드백을 인정하며, 세나가 차체 강성을 높일 것을 권장했다고 설명했다.[147] 그 대가로 혼다는 세나에게 맞춤 제작된 검정색 NSX를 선물했다.[148]
1993년에는 브라질에서 아우디 자동차 수입, 판매 및 마케팅 계약을 체결했다.[149] 1999년에는 세나 임포트와 아우디의 합작 투자로 아우디 세나(Audi Senna)가 설립되었다.[150] 세나는 개인 차량으로 은색 아우디 100 S4 아방트(Audi 100 S4 Avant)를 소유했다.[151][152] 또한 사망 직전에는 두카티 916 모터사이클을 홍보했다.[153]
1990년대 초, 세나는 자신의 성을 딴 이중 S 로고를 사용하는 상품 브랜드를 개발했다. 이 로고는 경주 서킷의 S자형 시케인(chicane)을 나타낸다. 세나 브랜드는 의류, 시계, 자전거(카라로(Carraro)), 오토바이, 보트에 사용되었다. 위블로, 태그호이어, 유니버설 제네바는 세나를 기리는 한정판 시계를 제작했다.[154][155][156]
세나는 여러 비디오 게임과 멀티미디어 작품을 홍보했다. 세가의 "에어턴 세나의 슈퍼 모나코 GP II"에는 세나의 조언이 포함되었고, 세나의 개인 농장 서킷이 트랙 중 하나로 등장한다.[157] 세가 새턴용 멀티미디어 디스크 "에어턴 세나 개인 대담: 미래를 위한 메시지"에도 인터뷰를 제공했다. 세나는 사망 후에도 비디오 게임에 등장하며, 2013년 "그란 투리스모 6"는 세나 중심의 확장팩을 출시했고,[158] 2019년 "F1 2019"는 세나-프로스트 라이벌 관계에 초점을 맞춘 DLC를 출시했다.[159]
(Instituto Ayrton Senna, IAS)는 세나의 브랜드를 다양한 상업 및 자선 사업에 라이선스를 부여한다.
- 두카티는 두카티 916 슈퍼바이크(1996~1998)와 1199 파니갈레 S 세나(2013) 세나 특별 에디션 3종을 생산했다.[223]
- MV 아구스타는 F4 750 세나(2002)와 F4 세나 1000(2006) 두 종류의 한정판 모터사이클을 출시했다. 수익금은 모두 IAS에 기부되었다.[153]
- 2010년대 맥라렌-혼다 재결합 기간 동안 혼다와 맥라렌은 세나의 전설을 기리는 광고 캠페인을 진행했다.[224][225]
- 2014년 IAS는 기념 베스파를 제작하여 자선 경매에 부쳤다.[226]
- 2017년 맥라렌 오토모티브는 789마력의 슈퍼카인 맥라렌 세나를 출시했다.[227]
- 2017년 미국 회사인 로슬랜드 캐피털은 세나를 기념하는 기념 주화 시리즈를 제작했다.[228]
- 2018년 나이키와 코린치앙스 축구단은 세나의 첫 월드 챔피언십을 기념하는 특별 세나 유니폼을 공개했다.[229]
연도 | 참가팀 | 엔진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최종 순위 | 획득 점수 |
---|---|---|---|---|---|---|---|---|---|---|---|---|---|---|---|---|---|---|---|---|---|---|---|---|
1983 | 웨스트 서리 레이싱 | 토요타 | SIL | THR | 'SIL' | 'DON' | THR | 'SIL' | 'THR' | 'BRH' | 'SIL' | SIL | CAD | SNE | 'SIL' | 'DON' | OUL | SIL | OUL | THR | SIL | 'THR' | 1위 | 132 |
개인 정보
- 오른손잡이였다.
- 혈액형은 Rh+B형이다.[349]
- 취미는 무선 조종 비행기와 헬리콥터 조종이었다.
- 커피를 싫어했다.
- 휴식 시간에는 제트스키를 즐겼으며, 1991년에는 사고로 부상을 입기도 했다.
가족・연인
- 부모는 아버지 밀턴, 어머니 네이지, 형제는 누나 비비아니, 남동생 레오나르도였다. "세나"는 외가의 성이다.
- 누나 비비아니 세나 라니는 아일톤 세나 재단 대표를 맡고 있으며, 조카 '''브루노 세나'''는 레이서로 활동했다.
- 브루노 세나는 포뮬러 E에서 과거 라이벌 프로스트와 피케의 아들(니콜라 프로스트, 넬슨 피케 주니어)과 경쟁하기도 했다.[350]
- 슈샤(본명: 마리아 다 그라사 메네겔)와 교제한 적이 있으며, 슈샤는 세나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351]
신앙심
-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성경을 휴대하고 신의 존재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 1988년 일본 GP에서 첫 챔피언을 획득했을 때, "스푼 커브를 달리고 있을 때,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신을 보았다"라고 말했다.[352]
자선 활동
사업
- F1 드라이버로서의 수입 외에도 회사를 설립하여 사업을 전개했다.
- 캐릭터 상품 "세니냐 (Senninha)" 판매 수익 일부는 기부했다.
협상술
- 팀과의 협상에서 강인한 면모를 보였다. 맥라렌에서 나시오날 은행(NACIONAL)의 모자와 로고 노출을 허용하게 했다.
- 1983년 마틴 브룬들은 세나가 계약을 맺을 때 위약금만 해결되면 언제든지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조항을 넣었다고 증언했다.[354]
- 1990년 론 데니스와의 계약 연장 협상에서 세나는 1년 계약 플러스 1년 옵션 계약과 약 22억 엔의 보수를 얻어냈다.
- 1993년에는 포드의 웍스 엔진 획득을 호소하며 팀에 압력을 가했다.
- 론 데니스를 악어가 사는 연못에 밀어 넣고 계약금 인상을 약속받은 적도 있었다.
투표 결과
- 영국의 F1 Racing지는 전문가 투표를 통해 세나를 역사상 최고 속도의 F1 드라이버로 선정했다.
- 영국의 F1 Racing지는 "역대 최고 드라이버 톱 100 랭킹"에서 세나를 1위로 선정했다.
- 영국 오토스포츠는 F1 드라이버 경험자 투표로 세나를 "F1에서 가장 위대한 드라이버"로 선정했다.
일본 미디어 관련
- 후지 TV의 F1 중계에서 세나의 인상적인 레이스는 미야케 마사하루 아나운서가 실황을 담당한 경우가 많았다.
- 간사이 TV 아나운서 바바 테츠시는 세나와 상성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991년 주간 소년 점프에서 세나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 『F의 섬광-아일톤 세나의 도전!!-』이 연재되었다.
- 1992년 일본 GP 직전 후지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이시바시 타카아키는 세나와 만나 의기투합하여 카트 대결을 펼쳤고, 세나에게 헬멧 선물을 받았다.[365]
- 1993년 안토니오 이노키와 만난 적이 있다.[366]
- 플레이스테이션 3용 게임 『그란 투리스모 6』에서 아일톤 세나 재단과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 F1 폴 포지션에서 지쿠와 대담을 나눴다.
전기 영화
- 2010년 일본 GP에 맞춰 다큐멘터리 영화 『아일톤 세나: 꿈을 넘어서』가 공개되었다.[367]
- 이 영화 프로듀서에 따르면, 세나가 죽기 약 1개월 전 이몰라 서킷에서 "여기서 올해 누군가 죽을 것이다"라고 말한 영상이 있다고 한다.[368]
기타
11. 레이스 전적
아일톤 세나는 1977년 남미 카트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후, 1978년부터 1982년까지 카트 월드 챔피언십에 출전하여 1979년과 1980년에 준우승을 차지했다.[18] 1981년 영국으로 이주하여 오픈휠 레이싱 경력을 시작, 포뮬러 포드 1600으로 영국 포뮬러 포드 챔피언십과 타운젠드 토레센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21] 1982년에는 영국 포뮬러 포드 2000 챔피언십과 유럽 포뮬러 포드 2000 챔피언십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25]
1983년에는 웨스트 서리 레이싱 소속으로 영국 포뮬러 쓰리 인터내셔널 시리즈에 참가하여 시즌 초반을 지배하며 최종 라운드에서 우승,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테디 힙이 소유한 세오도어 레이싱 팀으로 1983 마카오 그랑프리에서 우승했다.[26]
F1에서의 세나의 상세한 레이스 전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소속팀 | 섀시 | 엔진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WDC | 포인트 |
---|---|---|---|---|---|---|---|---|---|---|---|---|---|---|---|---|---|---|---|---|---|
1984년 | 토르만 | TG183B | 하트 415T 1.5리터 직렬 4기통 터보 | BRA Ret | RSA 6 | BEL 6 | SMR DNQ | 9위 | 13 | ||||||||||||
TG184 | FRA Ret | MON 2‡ | CAN 7 | DET Ret | DAL Ret | GBR 3 | GER Ret | AUT Ret | NED Ret | ITA | EUR Ret | POR 3 | |||||||||
1985년 | 로터스 | 97T | 르노 EF15 1.5리터 V6 터보 | BRA Ret | POR 1 | SMR 7† | MON Ret | CAN 16 | DET Ret | FRA Ret | GBR 10† | GER Ret | AUT 2 | NED 3 | ITA 3 | BEL 1 | EUR 2 | RSA Ret | AUS Ret | 4위 | 38 |
1986년 | 98T | 르노 EF15B 1.5리터 V6 터보 | BRA 2 | ESP 1 | SMR Ret | MON 3 | BEL 2 | CAN 5 | DET 1 | FRA Ret | GBR Ret | GER 2 | HUN 2 | AUT Ret | ITA Ret | POR 4† | MEX 3 | AUS Ret | 4위 | 55 | |
1987년 | 99T | 혼다 RA166E 1.5리터 V6 터보 | BRA Ret | SMR 2 | BEL Ret | MON 1 | DET 1 | FRA 4 | GBR 3 | GER 3 | HUN 2 | AUT 5 | ITA 2 | POR 7 | ESP 5 | MEX Ret | JPN 2 | AUS DSQ | 3위 | 57 | |
1988년 | 맥라렌 | MP4/4 | 혼다 RA168E 1.5리터 V6 터보 | BRA DSQ | SMR 1 | MON Ret | MEX 2 | CAN 1 | DET 1 | FRA 2 | GBR 1 | GER 1 | HUN 1 | BEL 1 | ITA 10† | POR 6 | ESP 4 | JPN 1 | AUS 2 | 1위 | 90 (94) |
1989년 | MP4/5 | 혼다 RA109E 3.5리터 V10 | BRA 11 | SMR 1 | MON 1 | MEX 1 | USA Ret | CAN 7† | FRA Ret | GBR Ret | GER 1 | HUN 2 | BEL 1 | ITA Ret | POR Ret | ESP 1 | JPN DSQ | AUS Ret | 2위 | 60 | |
1990년 | MP4/5B | 혼다 RA100E 3.5리터 V10 | USA 1 | BRA 3 | SMR Ret | MON 1 | CAN 1 | MEX 20† | FRA 3 | GBR 3 | GER 1 | HUN 2 | BEL 1 | ITA 1 | POR 2 | ESP Ret | JPN Ret | AUS Ret | 1위 | 78 | |
1991년 | MP4/6 | 혼다 RA121E 3.5리터 V12 | USA 1 | BRA 1 | SMR 1 | MON 1 | CAN Ret | MEX 3 | FRA 3 | GBR 4† | GER 7† | HUN 1 | BEL 1 | ITA 2 | POR 2 | ESP 5 | JPN 2 | AUS 1‡ | 1위 | 96 | |
1992년 | MP4/6B | 혼다 RA122E 3.5리터 V12 | RSA 3 | MEX Ret | 4위 | 50 | |||||||||||||||
MP4/7A | 혼다 RA122E/B 3.5리터 V12 | BRA Ret | ESP 9† | SMR 3 | MON 1 | CAN Ret | FRA Ret | GBR Ret | GER 2 | HUN 1 | BEL 5 | ITA 1 | POR 3 | JPN Ret | AUS Ret | ||||||
1993년 | MP4/8 | 포드 HBE7 3.5리터 V8 | RSA 2 | BRA 1 | EUR 1 | SMR Ret | ESP 2 | MON 1 | CAN 18† | FRA 4 | GBR 5 | 2위 | 73 | ||||||||
포드 HBA8 3.5리터 V8 | GER 4 | HUN Ret | BEL 4 | ITA Ret | POR Ret | JPN 1 | AUS 1 | ||||||||||||||
1994년 | 윌리엄스 | FW16 | 르노 RS6 3.5리터 V10 | BRA Ret | PAC Ret | SMR Ret | MON | ESP | CAN | FRA | GBR | GER | HUN | BEL | ITA | POR | EUR | JPN | AUS | NC | 0 |
- ‡ : 반 포인트. 레이스 주행 횟수가 75% 미만으로 종료되어 득점이 절반이 됨.
- † : 리타이어했지만 90% 이상의 거리를 주행했으므로 규정에 따라 완주 처리됨.
세나는 1984년 뉴먼 요스트 레이싱 팀 소속으로 1984년 세계 스포츠카 선수권 대회에 참가, 포르셰 956 차량으로 뉘르부르크링에서 8위를 기록했다.[1]
11. 1. F1 이전 전적
시즌 | 시리즈 | 팀 | 레이스 | 우승 | 폴 포지션 | 퍼스트 랩 | 포디엄 | 포인트 | 순위 |
---|---|---|---|---|---|---|---|---|---|
1981 | RAC 포뮬러 포드 1600 | 반 다이멘 | 6 | 4 | 0 | 5 | 5 | 1위 | |
타운센드-토레스 포뮬러 포드 1600 | 13 | 8 | 3 | 5 | 13 | 210 | 1위 | ||
P&O 페리스 영국 포뮬러 포드 1600 | 1 | 0 | 0 | 0 | 0 | 0 | NC | ||
1982 | 영국 포뮬러 포드 2000 | 러션 그린 | 17 | 15 | 7 | 16 | 17 | 378 | 1위 |
유럽 포뮬러 포드 2000 | 8 | 6 | 6 | 7 | 6 | 138 | 1위 | ||
포뮬러 포드 2000 영국 유명인 레이스 | 1 | 1 | 0 | 1 | 1 | 1위 | |||
말보로 영국 포뮬러 쓰리 | 웨스트 서리 레이싱 | 1 | 1 | 1 | 1 | 1 | NC | ||
1983 | 말보로 영국 포뮬러 쓰리 | 웨스트 서리 레이싱 | 18 | 13 | 14 | 12 | 15 | 132 | 1위 |
FIA 유럽 포뮬러 쓰리 | 1 | 0 | 0 | 0 | 0 | 0 | NC | ||
마카오 그랑프리 | 웨스트 서리 레이싱 w/ 시어도어 레이싱 | 1 | 1 | 1 | 0 | 1 | N/A | 1위 |
'''굵은 글씨'''는 폴 포지션, ''기울임꼴''은 랩 최고 기록.
연도 | 참가팀 | 엔진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최종 순위 | 획득 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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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웨스트 서리 레이싱 | 토요타 | SIL | THR | 'SIL' | 'DON' | THR | 'SIL' | 'THR' | 'BRH' | 'SIL' | SIL | CAD | SNE | 'SIL' | 'DON' | OUL | SIL | OUL | THR | SIL | 'THR' | 1위 | 132 |
세나는 1977년 남미 카트 챔피언십에서 우승했고, 1978년부터 1982년까지 카트 월드 챔피언십에 출전하여 1979년과 1980년에 준우승을 차지했다.[18] 1978년부터 1980년까지 그는 DAP에서 테리 풀러턴의 팀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다. 세나는 나중에 풀러턴이 자신이 가장 만족스럽게 경쟁했던 라이벌이라고 말했다.[19]
1981년, 세나는 영국의 노리치(Norwich) 교외인 이튼(Eaton)으로 이주하여[20] 오픈휠 레이싱 경력을 시작, 포뮬러 포드(Formula Ford) 1600으로 경력을 시작하여 그 해 반 다이멘(Van Diemen)으로 영국 포뮬러 포드 챔피언십(British Formula Ford Championship)과 타운젠드 토레센(Townsend Thoresen)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21]
1982년, 세나는 영국과 유럽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25]
1983 영국 포뮬러 쓰리 시즌(1983 British Formula Three season)인 1983년, 세나는 웨스트 서리 레이싱(West Surrey Racing)에서 영국 포뮬러 쓰리 인터내셔널 시리즈(British Formula 3 International Series)에 참가했다. 그는 시즌 전반부를 지배했지만, 에디 조던 레이싱(Eddie Jordan Racing)의 마틴 브런들(Martin Brundle)이 챔피언십 후반부에 격차를 좁혔다. 세나는 최종 라운드에서 우승하며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해 11월, 세나는 테디 힙(Teddy Yip)(사업가)이 소유한 세오도어 레이싱 팀(Theodore Racing Team)으로 1983 마카오 그랑프리(1983 Macau Grand Prix)에서도 승리했다.[26]
11. 2. 영국 포뮬러 포드 2000
Ayrton Senna영어는 1982년에 루센 그린 레이싱 팀 소속으로 영국 포뮬러 포드 2000 챔피언십에 참가했다. 그는 총 18번의 레이스에 출전하여 15번 우승, 2번의 2위, 그리고 한 번의 리타이어(Ret)를 기록했다. 특히 브랜즈 해치에서 5번, 실버스톤에서 3번, 올턴 파크에서 3번, 말로리 파크와 스네터턴에서 각각 2번, 도닝턴 파크와 캐슬 콤브, 쓰랙스턴에서 각각 1번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378점을 획득하여 챔피언십 1위를 차지했다.[370]다음은 1982년 영국 포뮬러 포드 2000 챔피언십 경기 결과이다.
- '''굵은 글씨'''는 폴 포지션을, ''기울임꼴''은 패스트랩을 나타낸다.
11. 3. 영국 포뮬러 3 챔피언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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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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