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빈 토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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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앨빈 토플러는 1928년 뉴욕에서 태어나 2016년에 사망한 미국의 저술가이자 미래학자이다. 그는 《퓨처 쇼크》, 《제3의 물결》, 《권력이동》 등의 저서를 통해 사회 변화와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제시하며,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토플러는 산업 사회 이후 정보화 사회로의 전환을 '제3의 물결'로 정의하고, 기술 혁신과 사회 변화의 관계를 분석했다. 그는 또한 한국 정부의 의뢰를 받아 '21세기 한국 비전'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들은 중국, 싱가포르 등 여러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테크노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도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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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빈 토플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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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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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명 | Alvin Eugene Toffler |
출생일 | 1928년 10월 4일 |
출생지 | 미국 뉴욕주 뉴욕 시티 |
사망일 | 2016년 6월 27일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안장지 | 피어스 브라더스 웨스트우드 빌리지 메모리얼 파크 앤드 모트리, 웨스트우드, 로스앤젤레스 |
국적 | 미국 |
민족 | 유대인 |
거주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배우자 | Heidi Farrell (1950년 4월 29일 결혼) |
자녀 | 1명 |
웹사이트 | 앨빈 & 하이디 토플러 웹사이트 |
직업 및 학력 | |
직업 | 미래학자 저술가 저널리스트 교육자 |
학력 | 뉴욕 대학교 (BA) |
학위 | 여러 명예 박사 학위 |
소속 | 국제 전략 연구소 |
주요 저서 | |
주요 작품 | 미래의 충격 제3의 물결 권력이동 |
수상 | |
수상 | 맥킨지 재단 도서상 }} |
2. 초기 생애
앨빈 토플러는 1928년 10월 4일 뉴욕에서 태어나[5] 브루클린에서 자랐다.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자 출신으로, 모피상인 아버지 샘 토플러와 어머니 로즈 알바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6] 7살 때, 가족과 함께 살았던 삼촌 부부의 영향으로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토플러는 "그들은 대공황 시대의 문학적 지식인이었고, 항상 흥미로운 아이디어에 대해 이야기했다."라고 회고했다.[6]
앨빈 토플러는 코넬대학 객원교수,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의 일원, 러셀 세이지 재단의 객원 학자로 지냈다.[6] 맥킨지 재단의 경영학 저서 활동 공로상을 받았고, 여러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6] 미국 정부 일반회계감사 자문위원회 위원, 과학 발전을 위한 미국인 협회 회원, 전략 연구 국제 연구소 회원이었다.[6] 2006년에는 브라운 대학의 독립 상을 받았다.[6]
1950년 뉴욕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으로 졸업했지만, 학점보다는 정치 활동에 더 열중했다.[6] 대학교에서 미래의 아내 아델레이드 엘리자베스 파렐(애칭 "하이디")을 만났는데, 그녀는 언어학 석사 과정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급진적인 학생이었던 두 사람은 대학원 진학 대신 1950년 4월 29일 결혼하여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로 이주했다.[6]
3. 경력
IBM에 고용되어 컴퓨터의 사회적, 조직적 영향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논문을 작성했으며, 그 결과 초기 컴퓨터 "구루" 및 인공 지능 연구자 및 지지자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제록스는 그에게 연구 실험실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초청했고, AT&T는 그에게 전략적 조언을 구했다. AT&T 작업은 통신 연구로 이어졌고, 이 연구는 정부가 AT&T를 해체하도록 강요하기 10년 이상 전에 회사의 최고 경영진에게 회사를 분할하라고 조언했다.[11]
1996년 톰 존슨과 함께 자문 회사인 토플러 어소시에이츠를 공동 설립했다. 이 회사는 미국, 대한민국, 멕시코, 브라질, 싱가포르, 호주 등 여러 국가의 기업, NGO 및 정부와 협력했다. 이 시기에 토플러는 전 세계를 돌며 강연하고 여러 학교에서 가르쳤으며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같은 세계 지도자들과 주요 임원 및 군 관계자들을 만났다.[22]
3. 1. 작가로서의 경력
앨빈 토플러와 하이디 토플러 부부는 글을 쓸 소재를 찾기 위해 5년 동안 블루칼라 노동자로서 조립 라인에서 일하며 산업 대량 생산을 연구했다.[6] 앨빈은 자신의 경험을, 글을 쓸 소재를 찾기 위해 바다를 항해했던 잭 런던이나,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 포도를 수확했던 존 스타인벡과 같은 다른 작가들과 비교했다.[7] 하이디는 알루미늄 주조 공장의 노조 노동조합 간부가 되었고, 앨빈은 기계공이자 용접공이 되었다.[6][8] 저녁에는 앨빈이 시와 소설을 썼지만, 둘 다 능숙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6]
앨빈 토플러는 이러한 노동 경험을 바탕으로 노조가 지원하는 신문사에 자리를 잡았고, 1957년에는 워싱턴 지국으로 전근하여 펜실베이니아의 일간지에서 의회와 백악관을 취재하는 백악관 출입 기자로 3년간 근무했다.[6][9]
1959년, 잡지 ''포춘''이 앨빈에게 노동 칼럼니스트가 되어 달라고 초청하면서 뉴욕으로 돌아왔고, 이후에는 비즈니스와 경영에 대한 글을 쓰도록 했다.[6] 1962년 ''포춘'' 잡지를 떠난 후,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며 학술 저널과 잡지에 장문의 기사를 썼다.[6] 1964년 러시아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 에인 랜드를 인터뷰한 ''플레이보이 인터뷰''는 잡지 최고의 인터뷰로 꼽혔다.[6] 랜드와의 인터뷰는 잡지가 여성 지식인에게 그러한 플랫폼을 제공한 첫 번째 사례였다.[10]
토플러는 IBM에 고용되어 컴퓨터의 사회적, 조직적 영향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논문을 작성했으며, 그 결과 초기 컴퓨터 "구루" 및 인공 지능 연구자 및 지지자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제록스는 그에게 연구 실험실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초청했고, AT&T는 그에게 전략적 조언을 구했다. AT&T 작업은 통신 연구로 이어졌고, 이 연구는 정부가 AT&T를 해체하도록 강요하기 10년 이상 전에 회사의 최고 경영진에게 회사를 분할하라고 조언했다.[11]
1960년대 중반, 토플러 부부는 1970년에 출판될 ''미래 쇼크''에 대한 5년간의 연구를 시작했다.[6][8]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600만 부 이상, 토플러 부부의 웹사이트에 따르면 1,500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6][21] 토플러는 변화가 너무 빨리 일어나 사회적 혼란과 정상적인 의사 결정 과정의 붕괴를 초래하는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 "미래 쇼크"라는 용어를 만들었다.[12] 이 책은 절판된 적이 없으며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6]
그는 1980년 ''제3의 물결''에서 이 주제를 이어갔다. 그는 제1의 물결과 제2의 물결을 농업 혁명과 산업 혁명으로 묘사했지만, 그가 만든 "제3의 물결"이라는 문구는 현재의 정보, 컴퓨터 기반 혁명을 나타낸다. 그는 인터넷과 이메일, 인터랙티브 미디어, 케이블 TV, 복제, 기타 디지털 발전을 예측했다.[13] 그는 디지털 시대의 부작용 중 하나가 "정보 과부하"였으며, 이 또한 그가 만든 용어라고 주장했다.[14] 1990년에는 아내 하이디의 도움을 받아 ''권력이동''을 썼다.[6]
1996년, 미국 경영 컨설턴트 톰 존슨과 함께 토플러 부부가 썼던 많은 아이디어를 실행하기 위해 설계된 자문 회사인 토플러 어소시에이츠를 공동 설립했다. 이 회사는 미국, 대한민국, 멕시코, 브라질, 싱가포르, 호주 등 여러 국가의 기업, NGO 및 정부와 협력했다. 경력의 이 시기에 토플러는 전 세계를 돌며 강연하고 여러 학교에서 가르쳤으며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같은 세계 지도자들과 주요 임원 및 군 관계자들을 만났다.[22]
3. 2. 학자 및 컨설턴트로서의 경력
앨빈 토플러는 코넬대학 객원교수,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의 일원, 러셀 세이지 재단의 객원 학자로 지냈다.[6] 맥킨지 재단의 경영학 저서 활동 공로상을 받았고, 여러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6] 미국 정부 일반회계감사 자문위원회 위원, 과학 발전을 위한 미국인 협회 회원, 전략 연구 국제 연구소 회원이었다.[6] 2006년에는 브라운 대학의 독립 상을 받았다.[6]
토플러 부부는 글을 쓸 소재를 찾기 위해 5년 동안 블루칼라 노동자로서 조립 라인에서 일하며 산업 대량 생산을 연구했다.[6] 앨빈 토플러는 자신의 경험을 잭 런던, 존 스타인벡과 같은 작가들과 비교했다.[7] 하이디는 알루미늄 주조 공장의 노조 노동조합 간부가 되었고, 앨빈은 기계공이자 용접공이 되었다.[6][8]
앨빈 토플러는 노동 경험을 바탕으로 노조 지원 신문사에 자리를 잡았고, 1957년 워싱턴 지국으로 전근하여 백악관 출입 기자로 3년간 근무했다.[6][9] 1959년 포춘지의 노동 칼럼니스트가 되었고, 이후 비즈니스와 경영에 대한 글을 썼다.[6] 1962년 포춘 잡지를 떠난 후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했다.[6] 1964년 플레이보이 인터뷰는 잡지 최고의 인터뷰로 꼽혔다.[6]
IBM에 고용되어 컴퓨터의 사회적, 조직적 영향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고, 제록스와 AT&T에서 일했다.[11] AT&T 작업은 통신 연구로 이어졌고, 정부가 AT&T를 해체하기 10년 이상 전에 회사를 분할하라고 조언했다.[11]
1960년대 중반, 토플러 부부는 미래 쇼크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6][8] 1996년 톰 존슨과 함께 자문 회사인 토플러 어소시에이츠를 공동 설립했다.[22] 이 회사는 미국, 대한민국, 멕시코, 브라질, 싱가포르, 호주 등 여러 국가의 기업, NGO 및 정부와 협력했다.[22]
3. 3. 한국과의 인연
2001년 6월 7일 토플러는 한국 정부의 의뢰를 받아 "21세기 한국비전"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한국이 선택의 기로에 서 있으며, 스스로 선택하지 않으면 선택을 강요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한국이 세계 경제에서 저임금 기반의 종속국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경쟁력을 갖춘 선도국이 될 것인지 빠르게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플러는 한국이 경제 위기를 겪은 이유가 1970~80년대 산업화 시대의 경제 발전 모델과는 다른, 새로운 가치 창출 방식이 등장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전 모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진단하며, 혁신적인 '지식기반 경제' 구축을 제안했다. 특히 일본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고, 혁신을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대우를 제공하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생명공학과 정보통신이라는 두 가지 강력한 동력을 융합하여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굴뚝 경제 시대의 교육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즉, 지난 세기의 제2 물결식 산업 체제에 맞춰진 학교 교육 시스템을 보다 유연하고 지식 기반 경제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하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제안했다.
4. 사상
토플러는 사회가 단순히 인지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감정적이고 애정 어린 사람들의 재능 또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그저 데이터와 컴퓨터만으로는 이 사회를 유지할 수는 없다"라고 설명한다.[16]
그는 저서 《제3의 물결》에서 "물결"이라는 비유를 통해 사회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각 물결은 이전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밀어내고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낸다. 그는 1980년에 출판한 이 책에서 인류 역사의 큰 기술 혁신을 이 물결들로 설명했다.[20]
토플러는 1960년대 이후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의 영향과 사회적 변화를 이해하려 노력해 왔다고 말했다. 그의 저작은 과학, 경제, 사회 질서의 한계를 넘어 의미를 지닌다. 테크노 음악의 명명자 후안 아킨스는 토플러의 "테크노 레벨"(Techno-rebels)이라는 신조어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이 창조를 도운 음악 장르에 "테크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46][47]
토플러의 업적과 사상은 미래학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 즉 미래 예측의 어려움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신보수파 논객 뉴트 깅리치는 토플러를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토플러는 현대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요소로 우주 공간 개발을 통한 부의 생산을 꼽았다. 그는 부가 현재 어디에서든 생성될 수 있으며(세계화), 동시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사이버 스페이스), 우주 공간에도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GPS가 휴대폰부터 ATM 사용까지 모든 데이터 흐름을 정확한 시간으로 동기화하는 핵심 기술이라고 보았다. 이를 통해 정확한 추적이 가능해져 Just In Time (JIT) 생산 방식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GPS는 항공 교통 관제의 중심이 되며, 기상 위성을 통한 일기 예보 정확도 향상은 농업 생산성 증대에 기여한다.
4. 1. 물결 이론
토플러는 저서 《제3의 물결》에서 "물결"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세 가지 유형의 사회를 설명한다.[20] 각 물결은 이전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대체하며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낸다.- 제1의 물결은 농업 혁명에 의해 수렵 채집 사회가 농경 사회로 대체되는 혁명적인 사회 변화이다.[45]
- 제2의 물결은 산업 혁명 시대의 사회로, 핵가족, 공장 같은 교육 시스템, 기업을 주요 요소로 가진다. 토플러는 "제2의 물결 사회는 고도로 산업화되어 있으며 대량 생산, 대량 유통, 대량 소비, 대량 교육, 매스 미디어, 대중 오락, 대량 살상 무기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표준화, 중앙 집중화, 집중화, 그리고 동기화를 통해 엮어지게 되며 관료제라 불리는 조직에 의해 운영된다."라고 설명한다.[16]
- 제3의 물결은 탈산업 사회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제2의 물결 사회에서 제3의 물결 사회로의 변혁이 시작되었으며, 정보화 사회와 같은 이름으로 설명된다. 이 사회에서는 탈 대량화, 다양화, 지식 기반 생산과 변화의 가속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변화는 탈선형화되어 있으며 거꾸로도, 앞으로도 그리고 옆으로도 발전이 가능하다."라고 주장한다.
탈산업 사회에서는 다양한 라이프스타일(Lifestyle,Subcults)이 존재하며 유동적 조직(Adhocracies)들이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다. 정보는 대부분의 물질적 자원을 대신할 수 있으며, 유연하게 관계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주요한 자원이 된다. 대량생산은 싸고, 개인화된 소규모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생산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생산자와 소비자의 간격은 조합 시스템에 의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합쳐진 "프로슈머"(Prosumers)는 스스로 자신의 니즈를 충족시키려고 한다.
토플러는 1998년 오스트레일리아 방송 공사와의 인터뷰에서 "사회는 노인을 돌보고 동정심과 정직함을 아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사회는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사회는 단지 인지적인 것뿐만 아니라 감정적이고 애정적인 모든 종류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데이터와 컴퓨터만으로는 사회를 운영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16]
4. 2. 미래 쇼크
토플러는 경력 초기에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방문객들이 겪는 새롭고 다양한 문화적 충격에 주목했다.[18] 그는 일부 방문객들이 낯선 환경에 "혼란스럽고 당황"하는 것을 문화 충격으로 묘사했다.[18] 그는 이 문제를 통해 미래에는 문화적으로 "새로운 환경이 당신에게 오고 ... 그리고 빠르게 다가오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18] 그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이러한 급작스러운 문화적 변화가 "미래 쇼크"와 유사한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고 보았고, 이는 그가 동명의 책에서 다룬 내용이다.[18]토플러는 ''미래 쇼크''에서 교육의 미래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으며, 이는 자주 인용되었다. 그러나 종종 잘못 인용되는 말은 심리학자 허버트 게르주이의 "내일의 문맹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라는 말이다.[17] 토플러는 또한 ''미래 쇼크''에서 "21세기의 문맹은 읽고 쓸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배운 것을 잊고 다시 배울 수 없는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4. 3. 권력 이동
토플러는 저서 《제3의 물결》에서 "물결"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세 가지 유형의 사회를 설명한다.[20] 각 물결은 이전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대체하며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낸다.- 제1의 물결은 농업 혁명으로 인한 사회 변화이다. 수렵 채집 사회가 농경 사회로 대체되었다.[45]
- 제2의 물결은 산업 혁명 시대의 사회이다. 핵가족, 공장 같은 교육 시스템, 기업이 주요 요소이다. 토플러는 "제2의 물결 사회는 고도로 산업화되어 있으며 대량 생산, 대량 유통, 대량 소비, 대량 교육, 대중문화와 대량 살상 무기들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표준화, 중앙화, 집중화 그리고 동기화를 통해 엮어지게 되며 우리들이 관료제라 부르는 조직에 의해 운영된다."라고 설명한다.[16]
- 제3의 물결은 후기 산업화 사회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제2의 물결 사회에서 제3의 물결 사회로의 변혁이 시작되었다. 이 사회는 탈 대량화, 다양화, 지식기반 생산과 변화의 가속이 특징이다. 토플러는 "변화는 탈선형화되어 있으며 거꾸로도, 앞으로도 그리고 옆으로도 발전이 가능하다."라고 주장한다.
후기산업사회에서는 다양한 라이프스타일(Lifestyle,Subcults)이 존재하며, 유동적 조직(애드호크라시)들이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다. 정보는 대부분의 물질적 자원을 대신하며, 노동자들에게 중요한 자원이 된다. 대량생산은 소규모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개인화된 생산으로 변화하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간격은 좁혀진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결합된 "프로슈머"(Prosumers)는 스스로 자신의 니즈를 충족시키려 한다.
토플러는 1998년 오스트레일리아 방송 공사와의 인터뷰에서 "사회는 노인을 돌보고 동정심과 정직함을 아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사회는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사회는 단지 인지적인 것뿐만 아니라 감정적이고 애정적인 모든 종류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데이터와 컴퓨터만으로는 사회를 운영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16]
4. 4. 비판적 시각
앨빈 토플러의 저작과 사상은 문화 절대주의와 백인 우월주의에 기반한 서구 중심적 사고라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제3의 물결》에서 서구의 정보사회를 발전된 사회로, 비서구 사회를 덜 발전된 사회로 묘사한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비판가들은 토플러가 모든 국가의 최종 발전 단계를 정보사회로 규정하면서, 농업이나 제조업의 역할과 가치를 간과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국제적 분업 체계 속에서 형평성을 잃은 사고방식이며, 농업이나 제조업으로 성공한 사회를 진보된 사회로 볼 수 없는지, 무엇이 더 발전된 것인지 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토플러를 비롯한 서구 사회학자들의 자문화 중심주의적 학문이 비서구 사회 학생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주입되어 문화 사대주의를 조장할 수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러한 학문적 가치는 인정하되, 비판적 인식을 통해 수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토플러의 예측 중 "사무실의 페이퍼리스화"와 "인간 복제"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도 비판점으로 언급된다.[15][16][17][18][19][20][21][22][29][30][31][32][6][44][45][46][47]
5. 저서
- 《퓨처 쇼크》 (1970년)[1]
- 《에코스파즘》 (1975년)[2]
- 《제3의 물결》 (1980년)[3]
- 《권력이동》 (1990년)[4]
- 《전쟁과 반전쟁》 (1995년)[5]
- 《부의 미래》 (2006년)[6]
- 《불황을 넘어서》 (2009년)[7]
- 《문화 소비자》 (1964)[8]
- 《도시에 있는 학교》 (1968) (편집)[9]
- 《미래 쇼크》 (1970)[10]
- 《미래학자들》 (1972) (편집)[11]
- 《내일을 위한 학습》 (1974) (편집)[12]
- 《생태 경련 보고서》 (1975)[13]
- 《제3의 물결》 (1980)[14]
- 《미리 보기 및 전제》 (1983)[15]
- 《적응하는 기업》 (1985)[16]
- 《권력이동: 21세기 초 지식, 부, 폭력》 (1990)[17]
- 《전쟁과 반전쟁》 (1993)[18]
- 《새로운 문명 창조》 (1995)[19]
- 《혁명적 부》 (2006)[20]
6. 수상
- 맥킨지 재단 도서상 (경영 문학 기여)[3]
- 예술문화훈장 오피시에[3]
- 미국 과학 진흥 협회 펠로우[3]
- 국제 전략 연구소 펠로우[3]
- 브라운 대학교 독립상 (2006년)[33]
7. 평가 및 영향
앨빈 토플러는 사회가 단순히 데이터와 컴퓨터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으며, 노인을 공경하고 정직하며 인정 많은 사람들과 감성적이고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44] 그는 저서 《제3의 물결》에서 사회 유형을 세 가지 "물결"로 설명했다.
# '''제1의 물결'''은 농업 혁명으로 인한 사회 변화이다.
# '''제2의 물결'''은 산업 혁명 시기의 사회로, 핵가족, 공장식 교육 시스템, 기업 등이 주요 특징이다.
# '''제3의 물결'''은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후기 산업화 사회, 즉 정보화 사회이다. 탈 대량화, 다양화, 지식 기반 생산, 변화 가속화 등이 특징이며, 다양한 라이프스타일(Lifestyle,Subcults)과 유동적 조직(Adhocracies)이 나타난다. 정보가 주요 자원이 되고, "프로슈머"(Prosumers)라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결합된 개념이 등장한다.
하지만 엘빈 토플러의 물결 시리즈는 문화 절대주의와 백인 우월주의에 기반한 서구 중심적 시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비서구 사회를 덜 발전된 사회로 묘사하고, 모든 국가의 최종 발전 단계를 정보 사회로 단정 짓는 것은 국제적 분업 체계와 형평성을 고려하지 않은 편협한 사고라는 지적이다. 또한, 서구 사회학자들의 자문화 중심주의적 학문이 비서구 사회에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문화 사대주의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도 비판받는다.
2001년 6월 7일, 토플러는 한국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 "21세기 한국 비전"에서 한국이 경쟁력 있는 선도국이 되기 위해 '지식 기반 경제'로의 혁신을 제안했다. 일본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생명공학과 정보통신을 융합 발전시키며, 굴뚝 경제 시대의 교육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플러는 자오쯔양, 리콴유, 김대중 등 아시아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1980년대와 1990년대 아시아 신흥 시장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21]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토플러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빌 게이츠와 함께 자국에 큰 영향을 미친 서방 인물로 꼽았고,[14] 『제3의 물결』은 중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21]
미국 하원 의장 뉴트 깅리치는 토플러의 아이디어를 칭찬하며 의원들에게 그의 저서를 읽도록 권고했고,[21] AOL 창립자 스티브 케이시는 『제3의 물결』을 자신의 사고에 큰 영향을 준 요인으로 언급했다.[14] 1980년 테드 터너는 토플러의 예측에 영감을 받아 CNN을 창립했다.[24][25] 1995년 전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새로운 문명을 향하여"라는 주제로 세계 거버넌스 컨퍼런스를 개최했는데, 여기에는 토플러 부부와 조지 H. W. 부시, 마거릿 대처 등 세계적인 인물들이 참석했다.[26]
멕시코의 억만장자 카를로스 슬림과 글로벌 마케터 J.D. 파워도 토플러의 저서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21][27]
테크노 음악의 선구자 후안 앳킨스는 『제3의 물결』 속 "테크노 반역자"라는 구절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이 창조한 음악 스타일을 "테크노"라고 명명했다.[28]
로테르담의 나이트클럽 토플러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The Exponents의 노래 "Victoria"에는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서 연속극을 보고, 코스모폴리탄과 앨빈 토플러를 읽는다."라는 가사가 나온다.
액센츄어는 2002년 토플러를 빌 게이츠, 피터 드러커와 함께 비즈니스 리더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29] 파이낸셜 타임스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래학자"로 묘사했다.[30] 2006년 인민일보는 그를 현대 중국을 형성한 50인의 외국인 중 한 명으로 꼽았다. 자오쯔양은 토플러의 영향을 크게 받아 1980년대 초에 ''제3의 물결''에 대한 회의를 소집했고, 1985년 이 책은 중국에서 두 번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6]
작가 마크 새틴은 토플러를 급진 중도주의 정치 사상에 영향을 미친 초기 인물로 묘사한다.[32]
뉴트 깅리치는 1970년대에 토플러 부부와 가까워졌으며, ''제3의 물결''이 자신의 사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우리 시대의 위대한 원저(元著) 중 하나"라고 말했다.[6] 그는 "디지털 혁명", "커뮤니케이션 혁명", "조직 혁명", "기술적 특이점"과 같은 "정보화 사회"의 실현 및 예측에 관한 업적으로 특히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기술과 그 영향, 이후에는 사회 변화와 상호 작용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갔다. 냉전 이후에는 21세기의 군사 기술, 무기 및 기술 증식, 자본주의의 증대하는 힘에 대한 제언에 집중했다.
1960년대부터 토플러는 저서 『미래의 충격』으로 결실을 맺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41].
1996년에는 컨설팅 회사 Toffler Associates를 설립하여 기업, NGO, 미국, 대한민국, 멕시코 등 여러 국가의 정부에 컨설팅을 제공했다.[41]
토플러는 21세기의 문맹은 읽고 쓸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배운 것을 잊고 다시 배울 수 없는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라고 언급했다.
8. 같이 보기
- 존 브루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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