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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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은 이념, 정책, 경제적 요인 등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파시즘과 나치즘, 군국주의, 반공주의, 민족주의, 팽창주의, 인종차별주의 등 다양한 이념이 대두되었고, 베르사유 조약의 문제점, 세계 대공황의 영향, 자원과 시장 경쟁, 국제 연맹의 무능력함 등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주요 사건으로는 만주 사변, 중일 전쟁,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스페인 내전,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뮌헨 협정,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해체, 독소 불가침 조약,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일본의 진주만 공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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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은 제2차 세계 대전의 격화 시기로, 독일의 서유럽 침공, 영국 본토 항공전, 소련의 발트 3국 점령 등 주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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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념, 정책, 철학
2. 1. 파시즘
파시즘은 중앙 정부가 강력한 독재로 사회, 경제를 통제하고 억압하며, 과격한 민족주의를 동반하는 정치 체제이다. 베니토 무솔리니의 저서 "파시즘의 교리"에서는 "파시즘은 일반적으로 영구적인 평화의 가능성이나 유용성을 믿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으며[93], 파시스트들은 전쟁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다.이탈리아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 악화와 정세 불안 속에서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국가 파시스트당이 로마 진군을 통해 권력을 획득했다. 무솔리니는 1935년 에티오피아 침략을 감행했고,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는 1937년 국제 연맹 및 국제 노동 기구를 탈퇴했다.[79]
독일에서는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에 취임하고, 이듬해 총통에 취임하여 독재 권력을 장악했다. 히틀러는 재군비 선언(1935년), 라인란트 진주(1936년) 등으로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군사력을 강화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은 일독 방공 협정을 체결하고, 이후 일독이 삼국 군사 동맹으로 발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미회수 이탈리아 회복을 목표로 연합국 측에 참전했으나, 달마티아 전부를 획득하지 못해 "명예 없는 승리"라는 불만이 팽배했다. 가브리엘레 다눈치오의 피우메 점령 사건 등이 일어나는 등 사회 불안이 가중되었다. 무솔리니는 로마 진군으로 정권을 탈취하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협력 아래 통치를 강화했다.
당초 이탈리아와 독일의 관계는 좋지 않았으나, 영국의 유화 정책과 프랑스의 대독 강경 정책으로 인한 혼란, 제2차 에티오피아 전쟁으로 인한 이탈리아의 국제 연맹 탈퇴 등이 양국을 접근하게 만들었다. 1936년 10월 양국 간 합의가 이루어졌고, 무솔리니는 "베를린-로마 축" 성립을 주장했다. 이후 강철 조약 체결(1939년 5월 22일) 등으로 양국 관계는 강화되었으나, 이탈리아는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1939년 9월 1일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무솔리니는 추축 관계를 더욱 강화했다.
2. 2. 나치즘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즘은 국가사회주의 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40][41] 나치즘은 파시즘과 유사하지만,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를 핵심 요소로 삼았다.[22][23] 히틀러는 아리아인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레벤스라움(생활권) 확보를 명분으로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했다.[22]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은 선거를 통해 제1당의 지위를 획득하고 히틀러 내각이 성립되었다.[40][41] 같은 해 2월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 세력을 축출하고, 3월에는 전권 위임법을 제정하여 바이마르 헌법을 정지시켰다.[40][41]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 사후, 히틀러는 국가 원수(총통)가 되어 권력을 장악하고 나치스에 의한 획일적인 전체주의 국가 건설을 추진했다.[40][41]
경제적으로는 군비 증강과 공공 사업을 통해 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를 회복시켰지만, 이는 히틀러에게는 군 재건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41] 히틀러는 동방 생존권을 주장하며, 1937년 호스바흐 메모를 통해 유럽 내 영토 확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1933년 독일은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43] 1935년에는 베르사유 조약의 군사 조항을 파기하고 재군비를 선언했다.[43] 1936년에는 라인란트 지방에 군대를 주둔시키고,[43] 이탈리아 및 일본과 관계를 강화하여 추축국 형성의 기반을 마련했다.[43]
히틀러는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워 주변 국가 내 독일 민족 거주 지역의 병합을 추진했다. 1938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지방을 요구했다.[43] 뮌헨 회담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요구를 수용했지만,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 전체를 점령했다.[43] 1939년에는 폴란드 회랑 회복을 위해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43]

2. 3. 군국주의
일본 제국은 만주와 중화민국에 대한 팽창주의적 열망을 품고 있었다.[24]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와 중국 본토를 침략했다.[26][27] 관동군은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 침략을 촉발하고 이를 일본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으로 변모시켰다.[19]1930년대 대공황은 일본 경제를 파탄시켰고, 이는 군대의 급진적인 세력에게 아시아 전체를 정복하는 방향으로 활동하도록 강요할 기회를 제공했다.[19] 일본의 목표는 동아시아 대부분에 대한 경제적 지배였으며, 이는 종종 "아시아는 아시아인을 위한 것"이라는 범아시아주의적 용어로 표현되었다.[24] "아시아는 아시아인을 위한 것!"과 같은 구호를 내걸고 대동아 공영권의 가면 아래 일본은 중국에서 서구 열강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일본의 지배로 대체하려 했다.[26][27]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워싱턴 회의가 개최되어 영일 동맹이 해소되고, 산둥 반환 조약에 의해 중국 대륙에서의 유망 권익을 잃은 일본은 열강과 점차 멀어져 고립되기 시작했다.[87] 쇼와 공황 하에서 지방·농촌부의 피폐가 진행되었고, "헌정의 정도"의 원칙 하에 정당 간의 대립에 몰두하고, 정치 부패가 만연한 국내의 정당 정치는 이러한 내외의 여러 문제에 충분한 대처를 할 수 없어, 국민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었다.
5·15 사건, 2·26 사건이 일어나, 정당 내각은 종언을 맞이하고, 군부의 지배가 확립되었다.[90]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90]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도쿄 올림픽의 개최권을 반납하는 등, 군부의 요구로부터 국민 총동원으로 임전 체제를 굳혀 갔다.
ABCD 포위망에 의한 경제 제재를 받아, 군부에는 북진론과 남진론이 존재했으나, 노몬한 사건에서 고전하여 북진론은 열세가 되었다.[90]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으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미국 내 모든 일본 자산을 동결하도록 만들었고, 일본은 중국에서 철수하거나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유전을 점령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28]


2. 4. 반공주의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으면서,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과 같이 다른 국가에서도 공산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중앙 및 서부 유럽, 미국 등에서는 적색 공포가 확산되었고, 자국 내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들은 러시아 서부에 완충 국가들을 세워 러시아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으려 했다.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즘은 국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봉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으며, 슬라브 제국의 민족주의를 경계했다. 독일에서는 1919년 뮌헨의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이 자유군단에 의해 분쇄되었다. 이 자유군단은 나치 돌격대(SA)의 구성원이 되었고, 1933년까지 10년 동안 공산주의 민병대와 거리 전투를 벌였다. 이러한 폭력적인 상황은 독일에서 반공주의 여론을 강화시켰고, 철권통치자가 독일을 안정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확산시켰다.
2. 5. 민족주의
민족주의는 사람들의 영토와 문화가 민족으로 묶여 있다는 믿음이다. 이미 독일에서는 대중 지지를 위해 지도자들이 민족주의를 이용했고 그 결과 급진적 민족주의가 성행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제국을 복원하겠다는 믿음을 가졌다. 일본에서는 수 세기 전부터 천황에 대한 의무와 명예를 지어야 한다는 민족주의가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각국은 자국의 이익과 영토 확장을 위해 민족주의를 이용했다.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는 민족주의를 극단적으로 이용하여 팽창주의 정책을 정당화했다.2. 6. 팽창주의 (제국주의)
팽창주의는 국가의 영토나 경제적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이념으로, 대개 군사적 침략을 동반한다.[17]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프랑스, 소비에트 연방 등 유럽 열강들은 제국주의를 통해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후발 자본주의 국가였던 독일과 이탈리아는 다른 열강들에 비해 식민지가 부족했다.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지중해 장악을 목표로 1939년 알바니아를 침공하고, 그리스를 침공했다. 1935년에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기도 했다. 국제 연맹과 전 연합국은 전쟁 피로와 경제 침체로 인해 이러한 팽창주의적 행동을 제지하지 못했다.[19] 이탈리아의 팽창 욕구는 제1차 세계 대전 승전국임에도 런던 조약에서 약속받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트렌티노알토아디제주를 제외한 오스만 제국의 알바니아와 소아시아를 받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 무솔리니는 새로운 로마 제국 건설을 추구했으며,[20]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토적 팽창주의 개념인 ''스파치오 비탈레''(''생존 공간'')는 나치 독일의 ''레벤스라움'' 개념 및 미국의 "명백한 운명" 개념과 유사했다.[20]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모든 식민지를 상실하고 본토마저 축소되었다. 폴란드 회랑으로 본토가 분리되고, 알자스로렌 지방과 라인란트, 루르 지방의 관할권을 프랑스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메멜 지역은 리투아니아에게, 라인란트 일부는 벨기에에게, 북슐레스비히 지역은 덴마크에게 할양되었다. 이러한 영토 손실은 보복주의(revanchism)와 민족통일주의를 확산시켰다. 나치 정권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독일 제국의 국경 복원을 목표로 확장 정책을 시작하여 라인란트 재점령과 폴란드 회랑 점령을 추진했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합병을 금지했지만, 쇼비니스트들은 1871년 독일 제국 영토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옛 영토 회복을 주장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카프 폭동 이후, 군국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은 나치당에 흡수되었고, 이는 인종 이론과 결합하여 미회수 영토 정서를 부추겼다.[21]
소비에트 연방은 제1차 세계 대전과 적백 내전 동안 폴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등에게 상실한 러시아 제국 영토 회복을 원했고, 러일 전쟁에서 일본에게 잃은 영토에도 관심을 가졌다. 헝가리는 대헝가리주의를 통해 잃어버린 영토 회복을 추구했다. 루마니아 왕국은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2차 빈 국경 협정, 크라이오바 조약으로 영토를 잃고 대루마니아는 독일과 가까워졌다. 불가리아 왕국은 제2차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그리스,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에게 영토를 할양했다. 핀란드는 겨울 전쟁으로 소련에게 영토를 할양했다가 계속 전쟁으로 일시 회복했다.
일본 제국은 만주와 중화민국에 대한 팽창주의적 열망을 품었다.[24] 육군과 해군이 내각 구성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내각 법과 하급 장교들의 불복종(''게코쿠조'')은 군부의 힘을 강화시켰다. 대공황은 군부 급진 세력에게 아시아 정복의 기회를 제공했다. 1931년 관동군은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 침략을 감행하고 만주국을 세웠다.[80]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워 중국에서 서구 열강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다.[26][27] 난징 대학살 등으로 미국과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으로 미국은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석유 수출을 중단했다. ABCD 포위망으로 인해 일본은 중국 철수 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유전 점령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결국 후자를 택했다.[28]
1929년 뉴욕 월가에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은 자본주의 국가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식민지를 가진 영국과 프랑스는 블록 경제를 구축했고, 식민지가 없거나 적었던 국가들은 새로운 식민지 확보를 위해 인접 국가로 진출했다. 일본의 만주국 설립,[80] 이탈리아 왕국의 에티오피아 침략, 독일의 오스트리아 무혈 점령(병합) 등이 그 예이다. 경제 침체로 인한 정정 불안은 파시즘 사상 침투와 군부 대두를 야기했고, 인종 차별적 지향이 두드러졌다.
베르사유 조약과 국제 연맹은 팽창주의와 군국주의를 억제하려 했지만, 오히려 전간기에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재등장하는 것을 부추겼다.[18] 1930년대 초, 독일, 일본, 이탈리아에서 군국주의적이고 공격적인 국가 이데올로기가 우세했다.[18] 이는 군사 기술 발전, 파괴적인 선전, 영토 확장으로 이어졌고,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과 제2차 중일 전쟁 발발의 요인으로 작용했다.[19]
2. 7. 인종차별주의
20세기 초, 민족주의의 부상과 함께 인종은 정치적 충성의 중심 요소가 되었다.[22]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와 같은 정체성 정치가 나타났고, 사회 진화론은 "게르만 대 슬라브" 투쟁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22] 이러한 사상은 나치 독일의 인종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치는 독일인, 즉 "아리아인"이 우월 인종이며, 러시아인과 폴란드인을 포함한 슬라브족은 열등하다고 믿었다.[23] 히틀러는 이러한 생각들을 묶어 나치는 독일의 "아리아 민족"을 슬라브 민족보다 우월하고 지배자 민족이라 생각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히틀러는 비-아리아 민족에 대한 차별을 허용했다.3. 상호 관계 및 경제
3. 1. 베르사유 조약의 문제점
베르사유 조약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에 가혹한 배상금[99][102]을 부과하고 영토를 축소시켜[7] 독일 국민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이는 나치즘과 같은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발흥하는 계기가 되었다.[7][[File:https://cdn.onul.works/wiki/source/194ea36f278_55e6c33c.svg|thumb|upright=1.2|베르사유 조약 이후의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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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승전국들은 독일을 다시는 지배적인 국가가 될 수 없도록 만들고자 했다.[7] 전쟁에 관한 유죄조항으로 인해 장기적인 평화를 보장하기보다 단순한 전쟁 "책임"을 묻는다는 비난이 나왔다.[7] 가혹한 배상금[99][102]과 영토 축소[7], 바이마르 공화국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미국, 영국, 프랑스로부터 막대한 외채를 빌리게 했고, 결국 채무불이행으로 이어졌다.[7]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14개조를 제시했지만, 연합군은 동의하지 않았다.[7] 많은 독일인들은 독일 11월 혁명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11월의 범죄자"들이 휴전 조약을 맺었다고 생각했다.[7]
1918년 정전 협정에 따라 연합군은 라인란트를 점령했고,[7]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로카르노 조약 비준으로 1930년 철수했다.[7] 독일의 식민지는 점령되었고, 독일제국 해군은 연합군에 넘겨졌다.[7] 나치 정부는 등 뒤의 칼 찌르기 이야기를 제기했다.[7]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프랑스의 안보를 확보하려 했다.[2] 배상금, 석탄 지급, 비무장 라인란트는 1919-1920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우선시되었다.[2]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시작한 유일한 책임자로 간주되었고, 전쟁 책임 조항은 프랑스의 복수였다.[3]
프랑스는 독일로부터 배상금과 석탄을 요구했고,[8][5] 라인란트의 비무장화를 고집했다.[6] 과도한 배상금[9], 석탄 지불, 비무장 라인란트 원칙은 독일인들에게 모욕적이었다.[6]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을 달래기에 충분히 관대하지도, 독일이 다시 대륙의 지배 세력이 되는 것을 막을 만큼 가혹하지도 않았다.[7] 독일 국민들은 이 조약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전쟁 책임"을 부과하고 처벌하는 것으로 간주했다.[7]
바이마르 공화국은 초인플레이션을 유발하며 수조 마르크를 발행했다.[8] 독일은 2010년 10월 3일, 제1차 세계 대전 마지막 배상금을 지불했다.[9] 독일은 소극적 저항 운동으로 인해 석탄 지불을 연체했고,[10] 프랑스는 루르를 점령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뮌헨 폭동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국민적 영웅으로 인정받았다.[11]
독일 해군은 항구에서 보내다가 연합국에 넘겨졌고, 침몰했다.[7] 돌치토스게겐데("배후에서 칼을 꽂았다"는 신화)는 나치에게 선전 도구를 제공했다.[7]
비무장 라인란트와 군사력 감축은 독일인들을 격분시켰다.[6] 프랑스는 라인란트가 중립 지대가 되기를 원했지만, 이는 독일의 분노를 악화시켰다.[6]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 참모 본부를 해체했고, 해군 함선, 항공기, 유독 가스, 탱크 및 중포의 소유를 불법화했다.[6]
이러한 조건들은 전쟁의 승자들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7] 일본 또한 베르사유 조약 협상 과정에서 받은 대우에 대해 서유럽에 분노를 표출했다.[13]
3. 2. 대공황의 영향
1929년 검은 목요일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은 전 세계적인 경제 침체를 가져왔다.[78] 미국은 25%, 독일은 33%의 실업률을 기록하는 등[96] 각국은 높은 실업률과 빈곤, 시민 동요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은 아돌프 히틀러, 베니토 무솔리니와 같은 전체주의 지도자들의 등장을 야기했다.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영토 일부를 상실하고 거액의 전쟁 배상금을 부과받았다.[78] 1922년 프랑스가 배상금 지급을 요구하며 루르 점령을 강행하자 독일에서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사회 불안이 커졌다.[78]
대공황은 미국에 이어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영향을 미쳤다.[78] 심각한 실업률은 나치당의 성장에 영향을 주었고, 이는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미국은 뉴딜 정책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는 블록 경제 체제를 통해 대공황을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독일과 이탈리아는 이러한 해결책을 사용할 수 없었고, 국민들의 절망감과 피해 의식이 커지면서 파시즘과 나치즘 운동이 성장할 기반이 마련되었다.[78]
3. 3. 자원과 시장 경쟁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자원과 시장 확보를 위해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했다.[80] 특히 일본은 철, 석탄 등 몇몇 자원을 제외하고는 만성적인 천연자원 부족에 시달렸다.[107] 20세기 초,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대한민국과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동아시아로 확장했다.아시아의 천연 자원은 저렴한 가격으로 식민지 사업의 원료로 판매되었지만, 대영 제국의 인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 서구 열강의 폐쇄적인 경제 시스템은 일본 산업을 거부했다.[107] 일본 외교관 시게이루 마모루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시작이 국제적 폐쇄 경제 때문이며, 경제적 질식의 유일한 탈출구로 보인다고 언급했다.[107]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항공기, 전차 등 신병기 개발과 군함 연료의 변화로 석유 자원 확보가 중요해졌다. 영국, 미국, 네덜란드 등은 석유 자원을 외교 수단으로 활용했지만,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석유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107] 특히 일본은 ABCD 포위망으로 인해 석유확보가 개전 시기를 결정하는 데 큰 요인이 되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시장은 중국이었고, 일본은 미국과 다른 유럽 열강이 차지한 시장을 점령하고자 했다.[108] 1937년 일본은 만주를 침공하고, 대동아 공영권 사상과 "아시아는 아시아인의 것!"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중국에서 서방 열강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다.[24][26][27]
중국과의 충돌은 난징 대학살 등으로 미국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으로 미국은 일본의 석유 수출을 중단하고 자산을 동결했으며, 네덜란드와 영국도 이에 동참했다.[28] 석유 보유량이 부족했던 일본은 중국 철수 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유전 점령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28]
3. 4. 국제 연맹의 문제점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 연맹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14] 국제 연맹은 군축 협상을 포함, 집단 안보를 통해 평화를 유지하고 외교 협상을 통해 국제 분쟁을 완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14] 빈 회의(1815년) 체제와 달리, 개방적이고 법치주의적인 회의에서 개별 분쟁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다.[14] 그러나 미국은 가입하지 않았고, 자체 군이 없어 가입국의 군사에 의존해야 했다.[14] 경제적 제재로 유지되었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연맹이 무력으로 개입했으나, 가입국들은 종종 개입을 꺼려했다.[14] 결국 1930년대 추축국의 침략을 막지 못했는데, 만장일치 결정에 의존하고 자체적인 무력이 부재했으며, 주요 구성원들이 자국의 이익을 우선했기 때문이다.[15][16]4. 주요 사건들
1906년 일본은 만주에 국책 회사인 남만주철도를 설립하여 만주에서의 권익을 빠르게 굳혔다.[91]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1932년에는 청나라의 아이신 교로 푸이를 섭정으로 하는 괴뢰 국가 만주국을 건국했다.[91]
중화민국은 국제 연맹에 제소했고, 국제 연맹은 리턴 조사단을 파견했다. 조사단은 일본의 만주에서의 특수 권익은 인정했지만, 만주 사변은 정당 방위에 해당하지 않으며, 만주를 중화민국에 반환하도록 권고했다.
1933년 2월 국제 연맹 특별 총회에서 리턴 보고서가 채택되었으나, 일본 전권 마쓰오카 요스케는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표명하며 퇴장했다. 이후 일본은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 1936년 독일-일본 방공 협정을 체결하는 등 영국, 미국과 대결하는 자세를 분명히 했다.
중일전쟁은 1937년 일본이 만주국에서 중국을 침공하며 시작되었다.[87] 일본은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잔혹한 학살을 자행했는데, 일본 제국 육군이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면서 벌인 난징 대학살은 일본의 전쟁 범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87]
1931년, 일본은 군벌 시대의 중국의 약점을 이용하여 만주 사변을 조작하여 만주국을 건립하였고,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 전쟁이 촉발되었다.[87] 상하이, 난징, 광저우 등 많은 도시를 폭격하며 침략이 시작되었고, 1937년 9월 22일과 23일에 시작된 이 폭격은 광범위한 항의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국제 연맹 극동 자문 위원회의 결의안으로 이어졌다.[87]
제1차 대전 (일독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산둥반도의 구 독일 권익을 획득했지만, 파리 강화 회의에서는 문호 개방 정책을 주장하는 미국과 대립했다. 또한 시베리아 출병에서의 일본의 적극적인 군사 행동에 불신감을 가진 열강과의 중국 대륙에서의 이권 대립, 영일 동맹을 원하지 않는 미국의 의도 등으로 워싱턴 회의가 개최되어 영일 동맹이 해소되었다.[87] 산둥 반환 조약에 의해 중국 대륙에서의 유망 권익을 잃은 일본은 열강과 점차 멀어져 고립되기 시작했다.[87]
일본 국내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영국, 미국과의 협조 외교를 지향하고 있었지만, 쇼와 공황 등으로 경제는 불황에 빠졌다. 정치 부패가 만연한 국내의 정당 정치는 이러한 내외의 여러 문제에 충분한 대처를 할 수 없어, 국민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었다.
1931년 관동군의 독단에 의한 류탸오호 사건을 계기로 만주 사변이 발발, 1933년에는 국제 연맹 및 국제 노동 기구를 탈퇴했다. 1934년에는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것 또한 탈퇴를 통고했다.[89] 1936년에는 런던 해군 군축 조약으로부터의 탈퇴를 통고했다. 5·15 사건, 2·26 사건이 일어나, 정당 내각은 종언을 맞이하고, 군부의 지배가 확립되었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1938년 7월 15일의 각의 결정에 의해 1940년에 도쿄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도쿄 올림픽의 개최권을 반납하는 등, 군부의 요구로부터 국민 총동원으로 임전 체제를 굳혀 갔다.
1937년에 시작된 중일 전쟁에서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가 이끄는 중화민국은, 중국 공산당과 함께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인 국공 합작 (제2차 국공 합작)을 1937년에 구축한다. 쑹메이링은 미국과 급속히 가까워졌고, 미국 육군 항공대의 클레어 리 셰놀트 대위는 "미국 의용군" (플라잉 타이거즈)을 설립하여 일본에 대항했다.
중일 전쟁 발발과 함께 일본과의 항전을 주장하는 장제스에 대해, 일본의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고노에 성명을 발표하여 스스로 평화의 길을 닫았다. 일본은 왕징웨이를 옹립하여 난징 국민 정부를 1940년에 설립하고, 일본과의 협력 체제를 구축했다.
이탈리아 제국을 확장하고자 했던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1934년 말 아비시니아 위기(Abyssinia Crisis)를 구실로 삼아 1935년 10월 3일 에티오피아 제국(당시 아비시니아)를 침공했다.[45] 이탈리아는 공식적인 전쟁 선포 없이 침공을 감행했다. 국제 연맹은 이탈리아를 침략자로 규정했지만, 수에즈 운하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로 향하는 수송선에 개방되어 있는 등 실질적인 제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45]
1935년 말, 무솔리니는 황 머스타드의 사용을 승인했고, 1936년 3월 31일 마이체우 전투(Battle of Maychew)에서 이탈리아군이 승리했다. 에티오피아의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5월 2일 망명길에 올랐고, 수도 아디스아바바는 5월 5일 함락되었다. 이탈리아는 5월 7일 에티오피아를 합병하고 에리트레아, 소말릴란드와 함께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수립했다.[45]
1936년 6월 30일, 하일레 셀라시에는 국제 연맹 연설에서 이탈리아를 비판하며 "오늘은 우리였다. 내일은 너희들일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국제 연맹의 비난으로 인해 무솔리니는 국제 연맹을 탈퇴했다.[45]
스페인 내전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파시스트 세력과 공화파 세력 간의 싸움이었다.[46] 독일과 이탈리아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프랑코 정권을 지원했고, 소련은 스페인 제2공화국을 지원했다.[46] 양 측은 이 전쟁을 통해 향상된 무기와 전술을 검증했다. 게르니카 폭격 사건은 전 유럽에서 민간인에 대한 폭격의 예시로 언급되었다.[46]
국제 연맹은 이 전쟁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주요 강대국들은 중립을 유지하면서 스페인으로의 무기 수송을 중단하려 했지만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46] 국민파는 결국 1939년에 공화파를 격파했다.[46]
스페인은 추축국 가입을 협상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중립을 유지하며 양측과 사업을 했다. 또한 자원 부대를 보내 독일군을 도와 소련에 대항하게 했다. 스페인 내전은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주곡으로 여겨졌으며, 1941년 이후 반파시스트 대결로 변모하면서 어느 정도 사실이 되었지만, 1939년에 시작된 전쟁과는 전혀 닮지 않았고 전쟁 발발에 주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47][48]
1938년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무력으로 병합했다. 역사적으로 범게르만주의 사상은 독일 민족을 대 독일 제국 개념으로 통합하려 했으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과 독일계 오스트리아에서 새로운 헌법을 통한 합병 시도로 이어졌다.[50]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은 이를 금지했다.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강령은 "민족 자결주의에 기초하여 모든 독일인의 대독일 통일을 요구한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아돌프 히틀러는 저서 나의 투쟁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하나의 나라로 만드는 것을 목표한다고 밝혔다.
1930년대 수상이었던 엥겔베르트 돌푸스는 나치를 경멸하며 호국단과 협력, 사회민주당과 나치를 탄압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와 동맹을 맺어 독일의 남하를 막으려 했다. 1934년 2월 내란을 통해 사회민주당을 금지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본뜬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 1935년 오스트리아 나치는 쿠데타를 일으켜 돌푸스를 암살했으나 정권 탈취에는 실패했다.[51][52]
돌푸스의 후계자인 쿠르트 슈슈니크는 히틀러의 압력으로 나치 출신 각료를 입각시키고 호국단을 배제했다. 1938년 슈슈니크가 국가 독립 존속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를 실시하려 하자,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양해를 얻어 군대를 오스트리아에 침공, 빈을 점령하고 슈슈니크를 체포했다. 히틀러는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수상으로 임명하고 병합 조약을 맺었다 (안슐루스).
1935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간의 스트레사 전선은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보장했지만, 로마-베를린 추축 형성 후 무솔리니는 오스트리아 독립 유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저항했지만 외부 지원 없이 히틀러의 요구에 굴복했다. 전투는 없었고, 대부분의 오스트리아인들은 합병을 지지하여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외부 강대국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이탈리아는 나치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51][52]
1938년 9월 30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뮌헨 협정을 통해 나치 독일의 주데텐란트 합병을 승인했다.[53] 이는 아돌프 히틀러를 달래기 위한 유화 정책의 일환이었으며, 히틀러는 이 협정을 통해 유럽에서 더 이상의 영토적 주장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53] 그러나 뮌헨 협정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의사를 무시한 결정이었다.[54] 체코슬로바키아는 회담에 참여하지 못했고, 프랑스와 영국의 압력으로 협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54]
주데텐란트는 독일과의 국경을 따라 위치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로, 300만 명이 넘는 독일계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다.[51] 이 지역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에 귀속되었으나, 이는 민족 자결 원칙을 무시하고 프랑스가 독일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51] 히틀러는 주데텐란트의 독일계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 지역의 즉각적인 합병을 요구했다.[53]
뮌헨 협정은 유화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지만, 독일의 팽창주의를 막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55] 70년 이상 학자, 정치인, 외교관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55] 역사가들의 평가는 히틀러의 독일을 너무 강하게 만들었다는 비난에서부터 독일과의 대결 연기가 국가의 최선이었다는 판단까지 다양하다.[55] 윈스턴 처칠은 자신의 저서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은 막을 수 있었으며, 유화책이 아닌 더 이른 시기에 히틀러를 꺾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82]
1939년 3월, 독일은 뮌헨 협정을 파기하고 프라하를 점령했다. 슬로바키아는 독립을 선언했지만, 독일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다.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는 해체되었고, 영국과 프랑스의 유화 정책은 종말을 맞이했다.
히틀러는 독일계 주민이 다수 거주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지방을 주목했다. 1918년 에두아르트 베네시가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을 선언하자, 현지 독일인들은 독일계 보헤미아 주 성립을 선언했지만 체코 군단의 침공으로 실패했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프랑스의 요구로 독일계 보헤미아 주는 체코슬로바키아 영토가 되었고, 히틀러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보헤미아, 모라비아, 슬로바키아, 카르파토루테니아 지역을 통치하는 신생 국가 체코슬로바키아가 등장했다. 그러나 주데텐 지역의 독일인 문제, 폴란드와의 테신 분쟁, 헝가리와의 슬로바키아 및 카르파토루테니아 영유권 분쟁으로 주변국과 갈등을 겪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유고슬라비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과 소협상을 결성하고 프랑스와 연계하여 대응하려 했다.
나치 정권이 등장하면서 주데텐 문제가 심화되어 뮌헨 회담이 개최되었고, 주데텐 지방은 독일에 할양되었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내 민족 운동이 격화되면서 독일에 의한 보헤미아·모라비아 병합, 슬로바키아의 독립, 헝가리·폴란드로의 영토 편입이 이루어졌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은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독일 외무 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서명한 조약이다. 명목상 이 조약은 독일과 소련 사이의 불가침 조약이었으나, 비밀 의정서에는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루마니아 등 독립 국가들을 양국 간의 세력권으로 분할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해당 지역의 "영토 및 정치적 재편"을 명시적으로 가정한 것이었다.
1939년 당시 독일과 소련은 서로 전쟁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소련은 1920년 폴란드에 영토를 빼앗긴 적이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군사 강국인 독일과의 대립을 피하면서 폴란드, 발트 3국, 핀란드 등을 얻기 위해 독일과 조약을 맺었다. 이후 언급된 국가들은 소련, 독일 또는 양국에 의해 침략, 점령당하거나 영토 일부를 할양해야 했다. 핀란드와 루마니아는 독립을 유지했지만, 영토 일부를 할양해야 했다.
이 조약으로 독일은 폴란드 침공의 부담을 덜었고, 소련은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소련은 9월 17일 독일에 가담하여 폴란드를 침공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 침공을 개시했다.[65]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의 부당한 조항 해소를 최종 목표로, 단치히를 포함한 폴란드 회랑을 요구했다.[124] 당시 단치히는 인구의 약 95%가 독일인이었고, 현지 독일인들은 민족 자결의 원칙에 따라 독일 귀속을 요구했다.[123]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와의 동맹을 준수할 것이라 경고하고 독일에게 철수 또는 전쟁 선포의 최후 통첩을 하였으나, 독일은 이를 거부했다.[66] 결국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65][66]
히틀러의 진짜 목표는 레반스라움(Lebensraum)을 이루기 위해 폴란드를 공격할 구실로 이 분쟁을 이용하고, 서구 연합군과 폴란드를 분리하여 체코 분쟁과 같은 상황을 막고자 했다.[125][126][127][128][129] 1934년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으로 잠시 잦아들었던 긴장은 1939년 봄에 다시 시작되었다.[124] 1939년 8월 비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통해 독일과 동맹을 맺은 소련은 발트 3국과 폴란드 일부를 장악했고, 9월 17일 폴란드 동부를 침공하기 시작했다.[64]
1919년부터 1939년까지 폴란드는 소련과 나치 독일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정책을 추구했으며, 양측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62] 1939년 초, 독일은 폴란드에 반코민테른 조약에 가입하여 독일의 위성 국가가 될 것을 요구했지만, 폴란드는 독립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거부했다.[63]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국토를 되찾은 폴란드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지도 아래 새로운 국가 건설을 추진하고 있었다. 독일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완충 지대 중 하나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지만, 발트해로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독일을 분할하는 입장이 되었다. 또한, 국내에 많은 독일인을 안게 되었다. 이는 독일에게 영토 획득의 구실을 제공했다.
1939년 8월 25일, 영국 및 프랑스와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으나, 같은 해 독일과 소련 사이에 체결된 독소 불가침 조약의 부속 비밀 의정서의 합의에 따라, 폴란드의 분할이 합의되어 있었다.
일본 제국 해군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여 미국 태평양 함대를 파괴했다.[72] 일본은 미국의 함선 건조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단기적인 병력 투입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공격 직후 웨이크 섬 전투가 발발했다. 진주만 공격은 미국과 일본 간의 즉각적인 전쟁 발발을 초래했다.[132]
미국 정부와 대중은 중화민국을 지지하며 일본을 비난했고, 국민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미국은 1937년 일본의 중국 침공을 국제법 위반으로 간주하고 국민정부에 외교, 경제,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69] 1940년 9월,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여 중국의 물자 수입을 차단했다.[68] 미국은 플라잉 타이거즈를 조직하여 일본에 저항했다.[70]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의 위협이 약화되자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했다. 미국은 1941년 8월 18일 미국과 일본 간의 모든 무역에 대한 전면적인 금수 조치를 시행하고 일본군에게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은 석유의 80%를 미국에 의존했기에 이는 심각한 위협이었다.[71]
결국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을 공격하고,[72] 필리핀 연방, 영국령 말라야, 싱가포르, 홍콩을 공격했다. 다음 날, 일본은 미국과 영국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했다.[73] 캐나다는 12월 7일 저녁에,[74] 영국은 12월 8일 아침에 일본에 선전포고했다.[75] 미국은 12월 8일 오후에 일본에 선전포고했다.[76]
4일 후, 1941년 12월 11일,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 포고하면서 미국은 유럽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선전포고 결정은 미국의 고립주의적 정서를 종식시켰다.[77]
4. 1. 만주사변 (1931)
1906년 일본은 만주에 국책 회사인 남만주철도를 설립하여 만주에서의 권익을 빠르게 굳혔다.[91]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1932년에는 청나라의 아이신 교로 푸이를 섭정으로 하는 괴뢰 국가 만주국을 건국했다.[91]중화민국은 국제 연맹에 제소했고, 국제 연맹은 리턴 조사단을 파견했다. 조사단은 일본의 만주에서의 특수 권익은 인정했지만, 만주 사변은 정당 방위에 해당하지 않으며, 만주를 중화민국에 반환하도록 권고했다.
1933년 2월 국제 연맹 특별 총회에서 리턴 보고서가 채택되었으나, 일본 전권 마쓰오카 요스케는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표명하며 퇴장했다. 이후 일본은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 1936년 독일-일본 방공 협정을 체결하는 등 영국, 미국과 대결하는 자세를 분명히 했다.
4. 2. 중일전쟁 (1937-1945)
중일전쟁은 1937년 일본이 만주국에서 중국을 침공하며 시작되었다.[87] 일본은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잔혹한 학살을 자행했는데, 일본 제국 육군이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면서 벌인 난징 대학살은 일본의 전쟁 범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87]
1931년, 일본은 군벌 시대의 중국의 약점을 이용하여 만주 사변을 조작하여 만주국을 건립하였고,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 전쟁이 촉발되었다.[87] 상하이, 난징, 광저우 등 많은 도시를 폭격하며 침략이 시작되었고, 1937년 9월 22일과 23일에 시작된 이 폭격은 광범위한 항의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국제 연맹 극동 자문 위원회의 결의안으로 이어졌다.[87]
제1차 대전 (일독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산둥반도의 구 독일 권익을 획득했지만, 파리 강화 회의에서는 문호 개방 정책을 주장하는 미국과 대립했다. 또한 시베리아 출병에서의 일본의 적극적인 군사 행동에 불신감을 가진 열강과의 중국 대륙에서의 이권 대립, 영일 동맹을 원하지 않는 미국의 의도 등으로 워싱턴 회의가 개최되어 영일 동맹이 해소되었다.[87] 산둥 반환 조약에 의해 중국 대륙에서의 유망 권익을 잃은 일본은 열강과 점차 멀어져 고립되기 시작했다.[87]
일본 국내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영국, 미국과의 협조 외교를 지향하고 있었지만, 쇼와 공황 등으로 경제는 불황에 빠졌다. 정치 부패가 만연한 국내의 정당 정치는 이러한 내외의 여러 문제에 충분한 대처를 할 수 없어, 국민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었다.
1931년 관동군의 독단에 의한 류탸오호 사건을 계기로 만주 사변이 발발, 1933년에는 국제 연맹 및 국제 노동 기구를 탈퇴했다. 1934년에는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것 또한 탈퇴를 통고했다.[89] 1936년에는 런던 해군 군축 조약으로부터의 탈퇴를 통고했다. 5·15 사건, 2·26 사건이 일어나, 정당 내각은 종언을 맞이하고, 군부의 지배가 확립되었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1938년 7월 15일의 각의 결정에 의해 1940년에 도쿄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도쿄 올림픽의 개최권을 반납하는 등, 군부의 요구로부터 국민 총동원으로 임전 체제를 굳혀 갔다.
1937년에 시작된 중일 전쟁에서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가 이끄는 중화민국은, 중국 공산당과 함께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인 국공 합작 (제2차 국공 합작)을 1937년에 구축한다. 쑹메이링은 미국과 급속히 가까워졌고, 미국 육군 항공대의 클레어 리 셰놀트 대위는 "미국 의용군" (플라잉 타이거즈)을 설립하여 일본에 대항했다.
중일 전쟁 발발과 함께 일본과의 항전을 주장하는 장제스에 대해, 일본의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고노에 성명을 발표하여 스스로 평화의 길을 닫았다. 일본은 왕징웨이를 옹립하여 난징 국민 정부를 1940년에 설립하고, 일본과의 협력 체제를 구축했다.
4. 3.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1935-1936)
이탈리아 제국을 확장하고자 했던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1934년 말 아비시니아 위기(Abyssinia Crisis)를 구실로 삼아 1935년 10월 3일 에티오피아 제국(당시 아비시니아)를 침공했다.[45] 이탈리아는 공식적인 전쟁 선포 없이 침공을 감행했다. 국제 연맹은 이탈리아를 침략자로 규정했지만, 수에즈 운하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로 향하는 수송선에 개방되어 있는 등 실질적인 제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45]
1935년 말, 무솔리니는 황 머스타드의 사용을 승인했고, 1936년 3월 31일 마이체우 전투(Battle of Maychew)에서 이탈리아군이 승리했다. 에티오피아의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5월 2일 망명길에 올랐고, 수도 아디스아바바는 5월 5일 함락되었다. 이탈리아는 5월 7일 에티오피아를 합병하고 에리트레아, 소말릴란드와 함께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수립했다.[45]
1936년 6월 30일, 하일레 셀라시에는 국제 연맹 연설에서 이탈리아를 비판하며 "오늘은 우리였다. 내일은 너희들일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국제 연맹의 비난으로 인해 무솔리니는 국제 연맹을 탈퇴했다.[45]
4. 4. 스페인 내전 (1936-1939)
스페인 내전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파시스트 세력과 공화파 세력 간의 싸움이었다.[46] 독일과 이탈리아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프랑코 정권을 지원했고, 소련은 스페인 제2공화국을 지원했다.[46] 양 측은 이 전쟁을 통해 향상된 무기와 전술을 검증했다. 게르니카 폭격 사건은 전 유럽에서 민간인에 대한 폭격의 예시로 언급되었다.[46]국제 연맹은 이 전쟁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주요 강대국들은 중립을 유지하면서 스페인으로의 무기 수송을 중단하려 했지만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46] 국민파는 결국 1939년에 공화파를 격파했다.[46]
스페인은 추축국 가입을 협상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중립을 유지하며 양측과 사업을 했다. 또한 자원 부대를 보내 독일군을 도와 소련에 대항하게 했다. 스페인 내전은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주곡으로 여겨졌으며, 1941년 이후 반파시스트 대결로 변모하면서 어느 정도 사실이 되었지만, 1939년에 시작된 전쟁과는 전혀 닮지 않았고 전쟁 발발에 주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47][48]
4. 5.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1938)
1938년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무력으로 병합했다. 역사적으로 범게르만주의 사상은 독일 민족을 대 독일 제국 개념으로 통합하려 했으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과 독일계 오스트리아에서 새로운 헌법을 통한 합병 시도로 이어졌다.[50]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은 이를 금지했다.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강령은 "민족 자결주의에 기초하여 모든 독일인의 대독일 통일을 요구한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아돌프 히틀러는 저서 나의 투쟁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하나의 나라로 만드는 것을 목표한다고 밝혔다.
1930년대 수상이었던 엥겔베르트 돌푸스는 나치를 경멸하며 호국단과 협력, 사회민주당과 나치를 탄압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와 동맹을 맺어 독일의 남하를 막으려 했다. 1934년 2월 내란을 통해 사회민주당을 금지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본뜬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 1935년 오스트리아 나치는 쿠데타를 일으켜 돌푸스를 암살했으나 정권 탈취에는 실패했다.[51][52]
돌푸스의 후계자인 쿠르트 슈슈니크는 히틀러의 압력으로 나치 출신 각료를 입각시키고 호국단을 배제했다. 1938년 슈슈니크가 국가 독립 존속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를 실시하려 하자,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양해를 얻어 군대를 오스트리아에 침공, 빈을 점령하고 슈슈니크를 체포했다. 히틀러는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수상으로 임명하고 병합 조약을 맺었다 (안슐루스).
1935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간의 스트레사 전선은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보장했지만, 로마-베를린 추축 형성 후 무솔리니는 오스트리아 독립 유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저항했지만 외부 지원 없이 히틀러의 요구에 굴복했다. 전투는 없었고, 대부분의 오스트리아인들은 합병을 지지하여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외부 강대국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이탈리아는 나치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51][52]
4. 6. 뮌헨 협정 (1938)
1938년 9월 30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뮌헨 협정을 통해 나치 독일의 주데텐란트 합병을 승인했다.[53] 이는 아돌프 히틀러를 달래기 위한 유화 정책의 일환이었으며, 히틀러는 이 협정을 통해 유럽에서 더 이상의 영토적 주장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53] 그러나 뮌헨 협정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의사를 무시한 결정이었다.[54] 체코슬로바키아는 회담에 참여하지 못했고, 프랑스와 영국의 압력으로 협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54]
주데텐란트는 독일과의 국경을 따라 위치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로, 300만 명이 넘는 독일계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다.[51] 이 지역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에 귀속되었으나, 이는 민족 자결 원칙을 무시하고 프랑스가 독일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51] 히틀러는 주데텐란트의 독일계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 지역의 즉각적인 합병을 요구했다.[53]
뮌헨 협정은 유화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지만, 독일의 팽창주의를 막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55] 70년 이상 학자, 정치인, 외교관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55] 역사가들의 평가는 히틀러의 독일을 너무 강하게 만들었다는 비난에서부터 독일과의 대결 연기가 국가의 최선이었다는 판단까지 다양하다.[55] 윈스턴 처칠은 자신의 저서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은 막을 수 있었으며, 유화책이 아닌 더 이른 시기에 히틀러를 꺾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82]
4. 7.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해체 (1939)
1939년 3월, 독일은 뮌헨 협정을 파기하고 프라하를 점령했다. 슬로바키아는 독립을 선언했지만, 독일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다.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는 해체되었고, 영국과 프랑스의 유화 정책은 종말을 맞이했다.히틀러는 독일계 주민이 다수 거주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지방을 주목했다. 1918년 에두아르트 베네시가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을 선언하자, 현지 독일인들은 독일계 보헤미아 주 성립을 선언했지만 체코 군단의 침공으로 실패했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프랑스의 요구로 독일계 보헤미아 주는 체코슬로바키아 영토가 되었고, 히틀러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보헤미아, 모라비아, 슬로바키아, 카르파토루테니아 지역을 통치하는 신생 국가 체코슬로바키아가 등장했다. 그러나 주데텐 지역의 독일인 문제, 폴란드와의 테신 분쟁, 헝가리와의 슬로바키아 및 카르파토루테니아 영유권 분쟁으로 주변국과 갈등을 겪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유고슬라비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과 소협상을 결성하고 프랑스와 연계하여 대응하려 했다.
나치 정권이 등장하면서 주데텐 문제가 심화되어 뮌헨 회담이 개최되었고, 주데텐 지방은 독일에 할양되었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내 민족 운동이 격화되면서 독일에 의한 보헤미아·모라비아 병합, 슬로바키아의 독립, 헝가리·폴란드로의 영토 편입이 이루어졌다.
4. 8. 독소 불가침 조약 (1939)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은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독일 외무 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서명한 조약이다. 명목상 이 조약은 독일과 소련 사이의 불가침 조약이었으나, 비밀 의정서에는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루마니아 등 독립 국가들을 양국 간의 세력권으로 분할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해당 지역의 "영토 및 정치적 재편"을 명시적으로 가정한 것이었다.1939년 당시 독일과 소련은 서로 전쟁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소련은 1920년 폴란드에 영토를 빼앗긴 적이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군사 강국인 독일과의 대립을 피하면서 폴란드, 발트 3국, 핀란드 등을 얻기 위해 독일과 조약을 맺었다. 이후 언급된 국가들은 소련, 독일 또는 양국에 의해 침략, 점령당하거나 영토 일부를 할양해야 했다. 핀란드와 루마니아는 독립을 유지했지만, 영토 일부를 할양해야 했다.
이 조약으로 독일은 폴란드 침공의 부담을 덜었고, 소련은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소련은 9월 17일 독일에 가담하여 폴란드를 침공했다.
4. 9. 독일의 폴란드 침공 (1939)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 침공을 개시했다.[65]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의 부당한 조항 해소를 최종 목표로, 단치히를 포함한 폴란드 회랑을 요구했다.[124] 당시 단치히는 인구의 약 95%가 독일인이었고, 현지 독일인들은 민족 자결의 원칙에 따라 독일 귀속을 요구했다.[123]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와의 동맹을 준수할 것이라 경고하고 독일에게 철수 또는 전쟁 선포의 최후 통첩을 하였으나, 독일은 이를 거부했다.[66] 결국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65][66]
히틀러의 진짜 목표는 레반스라움(Lebensraum)을 이루기 위해 폴란드를 공격할 구실로 이 분쟁을 이용하고, 서구 연합군과 폴란드를 분리하여 체코 분쟁과 같은 상황을 막고자 했다.[125][126][127][128][129] 1934년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으로 잠시 잦아들었던 긴장은 1939년 봄에 다시 시작되었다.[124] 1939년 8월 비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통해 독일과 동맹을 맺은 소련은 발트 3국과 폴란드 일부를 장악했고, 9월 17일 폴란드 동부를 침공하기 시작했다.[64]
1919년부터 1939년까지 폴란드는 소련과 나치 독일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정책을 추구했으며, 양측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62] 1939년 초, 독일은 폴란드에 반코민테른 조약에 가입하여 독일의 위성 국가가 될 것을 요구했지만, 폴란드는 독립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거부했다.[63]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국토를 되찾은 폴란드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지도 아래 새로운 국가 건설을 추진하고 있었다. 독일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완충 지대 중 하나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지만, 발트해로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독일을 분할하는 입장이 되었다. 또한, 국내에 많은 독일인을 안게 되었다. 이는 독일에게 영토 획득의 구실을 제공했다.
1939년 8월 25일, 영국 및 프랑스와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으나, 같은 해 독일과 소련 사이에 체결된 독소 불가침 조약의 부속 비밀 의정서의 합의에 따라, 폴란드의 분할이 합의되어 있었다.
4. 10. 일본의 진주만 공격 (1941)
일본 제국 해군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여 미국 태평양 함대를 파괴했다.[72] 일본은 미국의 함선 건조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단기적인 병력 투입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공격 직후 웨이크 섬 전투가 발발했다. 진주만 공격은 미국과 일본 간의 즉각적인 전쟁 발발을 초래했다.[132]미국 정부와 대중은 중화민국을 지지하며 일본을 비난했고, 국민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미국은 1937년 일본의 중국 침공을 국제법 위반으로 간주하고 국민정부에 외교, 경제,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69] 1940년 9월,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여 중국의 물자 수입을 차단했다.[68] 미국은 플라잉 타이거즈를 조직하여 일본에 저항했다.[70]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의 위협이 약화되자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했다. 미국은 1941년 8월 18일 미국과 일본 간의 모든 무역에 대한 전면적인 금수 조치를 시행하고 일본군에게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은 석유의 80%를 미국에 의존했기에 이는 심각한 위협이었다.[71]
결국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을 공격하고,[72] 필리핀 연방, 영국령 말라야, 싱가포르, 홍콩을 공격했다. 다음 날, 일본은 미국과 영국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했다.[73] 캐나다는 12월 7일 저녁에,[74] 영국은 12월 8일 아침에 일본에 선전포고했다.[75] 미국은 12월 8일 오후에 일본에 선전포고했다.[76]
4일 후, 1941년 12월 11일,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 포고하면서 미국은 유럽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선전포고 결정은 미국의 고립주의적 정서를 종식시켰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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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K diplomat sought deal with Nazis
http://fr.jpost.com/[...]
Jerusalem Post
2008-09-02
[132]
서적
Fateful Choices: Ten Decisions That Changed the World, 1940-1941
http://books.google.[...]
Allen 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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