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은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으로,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 남부와 동부에 주로 거주하며, 이 지역은 신러시아의 일부였다. 200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인구의 약 17.2%를 차지했으며, 특히 크림반도와 도네츠크, 루한스크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러시아어는 이들의 주요 언어이며, 문화적으로도 러시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계 인구는 감소 추세에 있으며, 2014년 유로마이단 사태 이후 친러시아 성향의 정치 운동이 나타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슬라브족 - 루신인
카르파티아 산맥에 거주하는 동슬라브계 민족인 루신인은 역사적으로 루테니아인, 카르파토-러시아인 등으로 불렸으며, 현재는 키예프 루스에서 유래한 "루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우크라이나 자카르파티아주를 포함한 카르파티아 루테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지에 거주하며, 우크라이나인과의 관계 및 루신어의 언어적 지위 등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 슬라브족 - 벨라루스인
벨라루스에 주로 거주하는 동슬라브계 민족인 벨라루스인은 역사적으로 백러시아인 등으로 불렸으며,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 인접 국가와 미국, 캐나다 등지에 거주하고, 벨라루스어와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키예프 대공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등을 거치며 형성된 역사를 가지고, 슬라브 문화의 영향을 받은 문화를 가지고 있다. -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 안드리 보로닌
안드리 보로닌은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던 은퇴한 우크라이나 축구 선수로,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리버풀 FC 등에서 뛰었으며 우크라이나 국가대표팀으로 74경기에 출전했다. -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 엘리 메치니코프
엘리 메치니코프는 식세포 작용 발견으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고 프로바이오틱스 개념을 제시하며 노화 연구에 기여한 러시아의 동물학자, 면역학자, 미생물학자이다. - 우크라이나의 민족 - 우즈베크인
우즈베크인은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민족으로, 기원전 2천년기부터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이고 러시아 제국과 소련을 거쳐 1991년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을 수립했으며, 농업, 목축, 수공업, 상업에 종사하며 튀르크어족의 우즈베크어를 사용하고 수니파 이슬람교를 믿는다. - 우크라이나의 민족 - 타지크인
타지크인은 중앙아시아에 주로 거주하며 페르시아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이란계 민족으로, 타지키스탄의 주된 민족이며 아프가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도 거주하고, 역사적으로 소그드인과 박트리아인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 |
---|---|
개요 | |
주요 거주 지역 | 돈바스 크림반도 |
인구 통계 | |
총 인구 (2001년 우크라이나 인구 조사) | 8,334,100명 (우크라이나 인구의 17.3%) |
도네츠크 주 (2001년) | 1,844,399명 |
크림반도 (2001년, 세바스토폴 제외) | 1,180,441명 |
루한스크 주 (2001년) | 991,825명 |
하르키우 주 (2001년) | 742,025명 |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주 (2001년) | 627,531명 |
오데사 주 (2001년) | 508,537명 |
자포리자 주 (2001년) | 476,748명 |
키이우 (2001년) | 337,323명 |
세바스토폴 (2001년) | 269,953명 |
기타 우크라이나 지역 (2001년) | 1,355,359명 |
언어 | |
주요 언어 | 러시아어 (95.9%, 2001년) 우크라이나어 (54.8%, 2001년) |
민족적 관계 | |
관련 민족 | 슬라브족 동슬라브족 서슬라브족 남슬라브족 |
2. 지리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은 우크라이나 전역에 거주하지만, 역사적으로 신러시아 지역이었던 동부와 남부 지역에 주로 분포하며 인구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1] 서부와 중부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소수를 형성하며, 특히 도시와 산업 중심지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1]
2. 1. 지역별 분포
역사적으로 러시아인들은 주로 우크라이나 남동부와 동부에 거주해왔으며, 이 지역들은 과거 신러시아를 구성했던 곳이다.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의 비율은 우크라이나 남부와 동부로 갈수록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2001년 우크라이나 인구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은 우크라이나 전역에 거주한다. 이들은 동부와 남부에서 전체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중부에서는 상당한 소수 민족을 이루고, 서부에서는 더 작은 소수를 형성한다.[1]
러시아계 인구 비율이 높은 주요 지역은 다음과 같다 (2001년 기준).
러시아계 비율 (%) | 비고 | |
---|
세바스토폴 | (특별행정구) | 71.7 | 최대 민족 | |
크림 자치 공화국 | (자치 공화국) | 58.5 | 최대 민족 | |
크라스노돈 | 루한스크주 | 63.3 | 최대 민족 | |
스타니차-루한스카 구 | 루한스크주 | 61.1 | 최대 민족 | |
스베르들로프스크 | 루한스크주 | 58.7 | 최대 민족 | |
테르니우카 |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 | 52.9 | 최대 민족 | |
푸티우 구 | 수미주 | 51.6 | 최대 민족 | |
크라스노돈 구 | 루한스크주 | 51.7 | 최대 민족 | |
마키이우카 | 도네츠크주 | 50.8 | 최대 민족 | |
카디이우카 | 루한스크주 | 50.1 | 최대 민족 | |
도네츠크 | 도네츠크주 | 48.2 | 최대 민족 | |
이즈마일 | 오데사주 | 43.7 | 최대 민족 | |
[1][2][5]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의 역사는 수세기에 걸쳐 진행된 인구 이동, 정치적 변화, 문화적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초기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절부터 소수의 러시아인이 우크라이나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러시아 차르국의 영토 확장과 함께 그 수가 점차 증가했다. 특히 17세기 흐멜니츠키 봉기 이후 슬로보다 우크라이나 지역으로의 이주가 활발해졌고, 18세기 러시아 제국이 노보로시야 지역을 확보하면서 대규모 정착과 산업화가 이루어져 러시아인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제국의 러시아화 정책은 러시아 정체성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
우크라이나 서부와 중부에는 도시와 산업 중심지에 러시아인의 비율이 더 높고, 압도적으로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농촌 지역에는 훨씬 더 적은 비율을 보인다.[1] 러시아인들이 도시에 집중되어 있고,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키이우 (2001년 기준 러시아인이 인구의 13.1%를 차지한다)[1]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중부와 남동부의 가장 큰 도시 대부분은 2003년 기준으로도 여전히 상당 부분 러시아어 사용 지역으로 남아있다.[30]
우크라이나에는 러시아인의 두 가지 주목할 만한 하위 민족 집단이 있다: 푸티우 주변의 고르윤스와 빌코베 주변의 리포반스 (구교도 집단).
3. 역사
소련 시기에는 러시아 내전의 혼란 속에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초기 우크라이나화 정책이 시행되기도 했으나 곧 스탈린 시대의 강력한 러시아화 정책과 홀로도모르와 같은 비극을 겪으며 민족 구성에 큰 변화가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산업 재건과 크림반도 이관 등으로 러시아계 인구는 더욱 증가했다.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러시아계 주민들은 새로운 국가의 시민으로서 정체성 문제에 직면했다. 러시아어 사용 문제, 지역적 정체성 차이 등은 정치적 쟁점이 되었으며, 특히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병합과 돈바스 전쟁 개입으로 이어지는 등 심각한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 속에서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의 정체성과 지위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3. 1. 초기 역사 (16세기 말 ~ 18세기)
중세 우크라이나(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활동한 초기 러시아인 중 한 명으로 이반 표도로프가 있다. 그는 오스트로흐 성경을 출판했으며 스스로를 러시아인이라고 칭했다.
1599년,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는 동부 우크라이나 최초의 도시이자 요새인 차레보리소프를 오스콜 강 유역에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타타르족의 습격으로부터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러시아는 벨고로드 방어선(1635–1658)을 건설했고,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이 방어선 남쪽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기 시작했다.
17세기 후반,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이끈 코사크 봉기 이후 북부, 중부,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에 더 많은 러시아어 사용 인구가 나타났다. 이 봉기는 우크라이나 정착민들이 슬로보다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대규모로 이주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 지역은 인구 밀도가 낮았던 변경 지역에서 러시아 차르국의 주요 인구 밀집 지역 중 하나로 변모했다. 페레야슬라프 조약 이후, 현대 우크라이나의 북부 및 동부 지역을 포함한 우크라이나 코사크 영토는 러시아 차르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이로 인해 중앙 우크라이나에 러시아 정착민들이 처음으로 의미 있는 규모로 유입되었으나, 당시 약 120만 명의 비러시아계 인구에 비해 그 수는 수천 명의 군인 주둔 수준으로 여전히 작았다.[3]
18세기 말, 러시아 제국은 러시아-투르크 전쟁을 통해 이전 크림 칸국으로부터 넓은 스텝 지역을 획득했다. 노보로시야(주로 크림 반도, 타우리다 및 오데사 주변)로 알려진 이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식민화가 시작되었으며, 러시아 본토에서 온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을 중심으로 다양한 민족 집단이 이주했다.[4] 이 시기 도네츠 분지에서 석탄이 발견되면서 대규모 산업화가 시작되었고, 이는 러시아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 온 노동자들의 유입을 촉진했다.
남부 및 동부 우크라이나의 주요 도시 대부분이 이 시기에 건설되거나 크게 발전했다. 대표적인 도시로는 알렉산드로프스크(현재 자포리자; 1770), 예카테리노슬라프(현재 드니프로; 1776), 헤르손 및 마리우폴(1778), 세바스토폴(1783), 심페로폴 및 노보알렉산드로프카(멜리토폴; 1784), 니콜라예프(미콜라이우; 1789), 오데사(1794), 루간스크(루한스크; 1795년 루한스크 공장 설립) 등이 있다.
이주민 중에서는 우크라이나인(42.0%)과 러시아인(31.8%)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노보로시야의 인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혼합되었고, 러시아화가 국가 정책으로 추진되면서 러시아 정체성이 혼혈 가족과 지역 사회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은 공식적으로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벨라루스인을 각각 소러시아인, 대러시아인, 백러시아인으로 간주했는데, 이는 키예프 루스의 후예인 단일한 러시아 민족에 속한다는 제정 러시아의 공식적인 이론에 따른 것이었다.
3. 2. 러시아 제국 시기 (18세기 말 ~ 20세기 초)
18세기 말, 러시아 제국은 러시아-튀르크 전쟁 이후 이전 크림 칸국의 영토였던 광활하고 인구가 희박한 스텝 지역을 차지했다. 이 지역은 노보로시야(새로운 러시아)로 명명되었으며, 주로 크림 반도, 타우리다, 오데사 주변 지역을 포함했다. 제국 정부는 이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식민화를 시작했다.[4] 다양한 민족 집단이 이곳으로 이주했으며, 러시아 본토에서 온 우크라이나인(42.0%)과 러시아인(31.8%)이 이주민의 상당수를 차지했다.
동시에 도네츠 분지에서 석탄이 발견되면서 대규모 산업화가 시작되었고, 이는 러시아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 온 노동자들의 유입을 더욱 촉진했다. 이 시기에 남부 및 동부 우크라이나의 주요 도시 대부분이 건설되거나 크게 발전했다. 주요 도시들은 다음과 같다:
노보로시야의 인구는 점차 여러 민족이 혼합되는 양상을 보였으나, 러시아화가 국가 정책으로 추진되면서 혼혈 가족과 지역 사회에서는 러시아 정체성이 지배적이 되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공식적으로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벨라루스인을 각각 소 러시아인, 대 러시아인, 백 러시아인으로 간주했으며, 이들이 모두 키예프 루스에서 기원한 단일한 러시아 민족에 속한다는 이론을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20세기 초, 러시아인은 우크라이나 내 여러 주요 도시에서 가장 큰 민족 집단을 형성했다. 당시 러시아인이 다수를 차지했던 주요 도시는 다음과 같다.[5]
도시 | 러시아인 비율 (%) |
---|---|
키이우 | 54.2 |
하르키우 | 63.1 |
오데사 | 49.09 |
미콜라이우 | 66.33 |
마리우폴 | 63.22 |
루한스크 | 68.16 |
베르댠스크 | 66.05 |
헤르손 | 47.21 |
멜리토폴 | 42.8 |
예카테리노슬라프 | 41.78 |
옐리자베트그라드 | 34.64 |
파블로그라드 | 34.36 |
심페로폴 | 45.64 |
페오도시아 | 46.84 |
얄타 | 66.17 |
케르치 | 57.8 |
세바스토폴 | 63.46 |
추후이우 | 86 |
3. 3. 러시아 내전과 소비에트 연방 시기 (1917년 ~ 1991년)
제1차 세계 대전 중 강력한 민족 운동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정부로부터 어느 정도 자치권을 얻어냈으나, 10월 혁명은 새로운 러시아 공화국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내전 (1918–1922) 동안 공산주의 적군과 반볼셰비키 백군 (자원군)의 두 주요 러시아 전쟁 세력 간의 격전지가 되었다.10월 혁명은 광범위한 노동 계급 사이에서도 반향을 일으켰으며,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에 여러 소비에트 공화국을 형성했다. 여기에는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타우리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오데사 소비에트 공화국, 도네츠크-크리보이 로크 공화국 등이 포함되었다.
러시아 SFSR 정부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지원했으며, 이는 다양한 시기에 크림 반도와 서부 우크라이나를 제외한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의 대부분을 통제했다. 처음에는 우크라이나 볼셰비키 사이에 차이점이 있었으나,[8] 블라디미르 레닌과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압력에 따라 결국 하나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SSR)이 선포되었다.
우크라이나 SSR은 1922년 소련이 결성될 때까지 사실상 별도의 국가였으며, 1991년 소련 붕괴 때까지 존속했다. 레닌은 우크라이나의 민족 문제를 무시하면 혁명에 대한 지지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소련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국경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1918년에 주장했던 범위까지 설정되었다. 이 새로운 국경에는 노보로시야 (단명했던 도네츠크-크리보이 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포함) 및 상당수의 러시아계 민족이 거주하는 기타 인접 지방이 완전히 포함되었다.
1923년 이오시프 스탈린은 당의 민족 프로그램을 이행하는 데 있어 "지배 민족 쇼비니즘", 민족의 "경제적, 문화적 불평등", "민족주의의 잔재" 등을 장애물로 지적했다.[9] 우크라이나의 경우, 이러한 고려는 우크라이나화 정책으로 이어졌다. 이는 대 러시아적 태도를 약화시키고 우크라이나 인구 사이에서 인기를 얻어 공화국의 지배력을 인정받으려는 목적을 가졌다.[10] 우크라이나어는 대부분의 직업에서 의무적으로 사용되었고, 모든 학교에서 교육이 의무화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소련 지도부 내에서 우크라이나화 정책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1933년 스탈린은 지역 민족주의가 소련의 단결에 대한 주요 위협이라고 선언했다.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화 기간 동안 도입된 많은 변화가 되돌려졌고, 러시아어 학교, 도서관, 신문이 복원되거나 수가 증가했다. 영토적으로도 변화가 있어 우크라이나 SSR은 일부 영토를 RSFSR에 양도해야 했다. 수천 명의 우크라이나계 민족이 소련 극동으로 추방되었고, 홀로도모르로 인해 다수의 우크라이나인이 거주하는 마을이 사라졌으며, 남은 우크라이나인들은 차별을 받았다.[11][12] 이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 SSR의 부모는 자녀를 러시아어를 주요 교육 언어로 사용하는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 영토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요 격전지 중 하나였으며, 러시아인을 포함한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 파괴된 기반 시설을 재건하기 위해 인적, 자본적 자원이 필요했다. 이는 1931–1932년의 홀로도모르와 1947년의 세 번째 기근으로 인한 인구 감소와 맞물려 영토의 인구를 크게 줄였다. 산업화, 통합, 그리고 새로 획득한 서부 우크라이나 영토의 소비에트화를 위해 유입된 새로운 이주민의 상당 부분은 주로 산업 중심지 및 군사 주둔지 주변에 정착한 러시아인이었다.[13] 이는 러시아어 사용 인구의 비율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전쟁 말기에는 독일과의 협력 혐의로 크림 타타르인 전체 인구(최대 25만 명)가 크림 반도의 고향에서 중앙 아시아로 추방되었다.[14][15] 크림반도는 새로운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정착민의 물결로 재정착되었고, 이로 인해 크림 반도 인구에서 러시아인의 비율이 크게 증가했으며(1937년 47.7%에서 1993년 61.6%로), 우크라이나인의 비율도 두 배로 증가했다(1937년 12.8%에서 1993년 23.6%로).[16]
우크라이나어는 모든 러시아 학교에서 필수 과목으로 남아 있었지만, 많은 정부 기관에서는 러시아어 사용이 선호되어 러시아화를 더욱 촉진했다. 1979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 중 단 3분의 1만이 우크라이나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54년, 소련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는 크림 주 이전에 관한 법령을 발표하여 크림 주를 러시아 SFSR에서 우크라이나 SSR로 이관했다. 이 조치로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계 인구가 거의 백만 명 증가했다. 많은 러시아 정치인들은 이 이전을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17] 이 이전의 정당성 문제는 수년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관계, 특히 크림 반도의 국내 정치에서 민감한 문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97년 러시아 연방과 우크라이나 간의 조약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국경을 인정하고 크림 반도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수용했다.[18]
3. 4. 독립 이후 (1991년 ~ 현재)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는 독립 국가가 되었다. 이 독립은 러시아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포함한 모든 우크라이나 SSR 지역의 국민 투표를 통해 지지받았다.[20] 우크라이나 국립 과학 아카데미의 연구에 따르면 1991년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계 주민의 75%가 더 이상 자신을 러시아 민족으로 여기지 않았다.[21] 1991년 12월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 투표에서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계 주민의 55%가 독립에 찬성표를 던졌다.[22]
독립 이후 크림 타타르족의 귀환은 토지 소유권 및 고용 권리에 대한 여러 차례의 격렬한 충돌을 야기했다.[23]
1994년에는 도네츠크주와 루한스크주에서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으며, 약 90%가 러시아어가 우크라이나어와 함께 공용어 지위를 얻고 러시아어가 지역 수준에서 공식 언어가 되는 것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 국민 투표는 키이우 중앙 정부에 의해 무효화되었다.[24][25]
러시아어를 주요 언어로 사용하는 학교의 감소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1989년에는 러시아어를 주 교육 언어로 사용하는 학교가 4,633개였지만, 2001년에는 이 숫자가 2,001개로 줄어들어 전국 학교의 11.8%를 차지했다.[26] 이 러시아어 학교 중 상당수는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수업이 모두 있는 학교로 전환되었다. 2007년에는 공립학교 학생의 20%가 러시아어 수업을 받았다.[27]
리브네주와 같은 일부 지역에는 러시아어만 사용하는 학교가 남아 있지 않고, 러시아어-우크라이나어 혼용 학교에서 러시아어 수업만 제공된다.[28] 2007년 5월 기준으로 키이우에는 러시아어를 주 교육 언어로 사용하는 학교가 7개만 남아 있으며, 17개의 혼용 언어 학교에서 총 8,000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며,[29] 나머지 학생들은 우크라이나어를 유일한 교육 언어로 사용하는 학교에 다니고 있다. 후자의 학생 중 45,700명(전체의 18%)이 주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 수도에서 러시아어를 별도의 과목으로 공부하고 있으며,[29][30][31] 우크라이나 인구의 약 70%가 전국적으로 러시아어를 우크라이나어와 함께 중등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72]

리비우 러시아 문화 센터는 여러 차례 공격과 파괴 행위를 겪었다. 1992년 1월 22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극우 단체인 UNA-UNSO가 리비우주 의회 의원의 지휘를 받아 급습했다.[19] UNA-UNSO 회원들은 건물을 수색하고, 일부 문서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건물 밖으로 밀어냈다.[19] 그들은 우크라이나의 모든 것이 우크라이나인에게 속하므로 러시아인과 유대인은 그곳에 거주하거나 재산을 소유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19] 2001년 교황 리비우 방문 당시 건물이 파괴되었고,[32] 2003년(5번),[33][34] 2004년(오렌지 혁명 동안[35]), 2005년,[36][37] 2006년에도 파괴되었다.[38]

유로마이단 혁명[39] 이후, 러시아계 주민이 많은 동부 및 남부 지역은 반마이단 시위와 러시아가 지원하는 분리주의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크림 의회 점거 이후 러시아 비표지 병력에 의해 점령된 크림 자치 공화국 최고 회의는 2014년 크림 공화국 국민 투표를 발표하고 러시아에 크림반도에 군사력을 파견하여 지역 주민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이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으로 이어졌다. 도네츠크, 오데사, 하르키우와 같은 다른 주요 러시아어 사용 도시에서도 주요 반마이단 시위가 발생했다. 도네츠크주의 선출된 지역 의회가 친러시아 시위대의 요구에 따르기를 거부하자, 분리주의자들은 선출되지 않은 분리주의 인사들로 구성된 자체 의회를 만들고 지역의 미래를 결정하는 국민 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40]
3월 3일, "뚜렷한 러시아 억양"을 가진 러시아 국적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관광객"이라고 칭하며 지역 행정 건물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러시아 국기를 흔들며 "러시아!"와 "베르쿠트는 영웅이다!"를 외쳤다. 경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고, 군중에게 빠르게 압도당했다.[41][42][43] 루한스크의 지역 의회는 쫓겨난 친러시아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지역당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러시아어에 제2 공용어 지위를 부여하고, ″베르쿠트 전사들의 박해″를 중단하고, 마이단 자위 부대를 해산하고, 스보보다 및 UNA-UNSO와 같은 많은 극우 정치 단체를 금지할 것을 요구하기로 투표했다. 당국이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주 의회는 ″러시아 연방의 형제 국가에 도움을 요청할 권리″를 보류했다.[44]
2014년 친러시아 분쟁 in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의 친러시아 시위는 러시아의 특수 작전군과 정규군의 지원을 받는 무장 분리주의 반란으로 확대되었다.[45][46][47][48][49]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 정부는 2014년 4월에 반군에 대한 군사적 반격을 시작했다(돈바스 전쟁). 이 전쟁 동안 루한스크와 도네츠크와 같은 주요 도시[50]는 심한 포격을 받았다.[51][52] 유엔에 따르면 2014년 초부터 도네츠크주와 루한스크주에서 73만 명의 난민이 러시아로 피난했다.[53] 2014년부터 2022년까지 약 14,200명(민간인 3,404명 포함)이 전쟁으로 인해 사망했다.
우크라이나 베르호브나 라다 의장 루슬란 스테판추크는 우크라이나에는 "러시아계 소수 민족"이 없으며 "이 사람들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존중보다는 공격성을 보인다면, 그들의 권리는 그에 따라 억압되어야 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54]
한편, 명예 혁명 이후 러시아 정부의 반대파 탄압 강화로 인해, 정치적 박해를 피해 우크라이나로 이주하는 러시아인들도 생겨났다. 주목할 만한 예로는 크림반도 병합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러시아 국회의원 일리야 포노마료프, 언론인 마테이 가나폴스키, 아르카디 바브첸코, 예브게니 키셀료프, 알렉산드르 네브조로프 등이 있다. 유엔 난민 기구(UNHCR) 통계에 따르면, 2014년 약 140명의 러시아인이 우크라이나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으며, 2015년 상반기에는 50명이 추가로 신청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복잡한 이민 정책으로 인해 실제로 난민 지위를 얻는 러시아인의 수는 제한적이다.
4. 인구
러시아인은 우크라이나 전역에 걸쳐 거주하고 있으나, 주로 동부와 남부 지역에 집중되어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중부 지역에서는 중요한 소수 민족 그룹을 형성하며, 서부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그 비율이 낮다.[1]
특히 크림반도에서는 러시아인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세바스토폴 71.7%, 크림 자치 공화국 58.5% - 2001년 기준).[1] 서부와 중부 지역의 경우, 러시아계 인구는 주로 도시와 산업 중심지에 집중되어 있으며, 우크라이나어 사용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농촌 지역에서는 그 비율이 현저히 낮다.[1] 역사적인 배경과 도시 집중 현상으로 인해, 키이우(2001년 기준 러시아인 13.1%[1])를 포함한 중부 및 남동부의 주요 대도시들은 상당 부분 러시아어 사용 지역으로 남아있다.[30]
우크라이나 내에는 푸티우 지역의 고르윤스와 빌코베 인근의 리포반스(구교도 집단)와 같은 주목할 만한 러시아인 하위 민족 집단도 존재한다.
4. 1. 인구 변화 추이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계 인구는 역사적으로 변동을 겪어왔다. 초기에는 동화와 이주를 통해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기근, 전쟁, 혁명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변화를 겪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은 우크라이나 영토에 큰 피해를 주었으며, 러시아인을 포함한 전체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 전쟁으로 파괴된 기반 시설을 재건하고, 1931–1932년의 홀로도모르와 1947년 기근으로 인한 인구 손실을 메우기 위해 외부로부터의 인구 유입이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산업화, 통합, 그리고 새로 편입된 서부 우크라이나 영토의 소비에트화를 위해 많은 러시아인이 이주해 왔으며, 이들은 주로 산업 중심지와 군사 주둔지 주변에 정착했다.[13] 이는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어 사용 인구의 비율을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전쟁 말기에는 나치 독일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크림 타타르인 전체 인구(약 25만 명)가 크림 반도에서 중앙 아시아로 강제 추방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14][15] 비워진 크림 반도에는 새로운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정착민들이 이주했으며, 이로 인해 크림 반도 내 러시아인 비율은 1937년 47.7%에서 1993년 61.6%로 크게 증가했고, 우크라이나인 비율 역시 1937년 12.8%에서 1993년 23.6%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16]
소련 시대에는 우크라이나어가 모든 러시아 학교에서 필수 과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정부 기관에서는 러시아어 사용을 선호하여 러시아화 정책이 진행되었다. 1979년 인구 조사 결과, 러시아인 중 우크라이나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비율은 3분의 1에 불과했다.
1954년에는 소련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가 크림 주 이전 법령을 통해 크림 주를 러시아 SFSR에서 우크라이나 SSR로 이관했다. 이 조치로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계 인구는 약 백만 명 증가했다. 많은 러시아 정치인들은 이 이관 조치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으며,[17] 이관의 정당성 문제는 이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관계, 특히 크림 반도 내부 정치에서 민감한 사안으로 남았다. 그러나 1997년 러시아 연방과 우크라이나 간의 조약을 통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국경을 인정하고 크림 반도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수용했다.[18]
우크라이나의 인구 조사 결과에 따른 러시아계 인구 변화 추이는 다음과 같다.
조사 연도 | 총인구 (우크라이나) | 러시아인 | % |
---|---|---|---|
1926 | 29,018,187 | 2,677,166 | 9.2% |
1939 | 30,946,218 | 4,175,299 | 13.4% |
1959 | 41,869,046 | 7,090,813 | 16.9% |
1970 | 47,126,517 | 9,126,331 | 19.3% |
1979 | 49,609,333 | 10,471,602 | 21.1% |
1989 | 51,452,034 | 11,355,582 | 22.1% |
2001 | 48,457,000 | 8,334,100 | 17.2% |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러시아계 인구는 모든 지역에서 수적으로나 비율적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1991년부터 2001년까지 10년 동안 약 300만 명의 러시아인이 감소했는데, 이는 당시 우크라이나 내 전체 러시아인의 4분의 1 이상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이로 인해 전체 인구 대비 러시아인 비율은 22% 이상에서 17%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2001년 이후에도 러시아계 인구는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감소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 경제적 요인: 많은 러시아인이 소련 시대 도시 중심지에 거주했기 때문에, 1990년대 경제 위기의 타격을 상대적으로 더 크게 받았다.
- 이주: 일부 러시아인은 경제적 이유나 다른 이유로 우크라이나를 떠나 러시아나 서방 국가로 이주했다.
- 정체성 변화: 소련 시대에 러시아인으로 분류되었던 사람들 중 일부가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실시된 인구 조사에서 자신을 우크라이나인으로 응답하는 경우가 생겨났다.[85]
- 인구학적 요인: 우크라이나 전체 인구에 영향을 미치는 낮은 출생률과 높은 사망률 역시 러시아계 인구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86]
4. 2. 2001년 인구 조사
2001년 우크라이나 인구 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총인구 48,457,000명 중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은 8,334,100명으로 전체 인구의 17.2%를 차지했다. 이는 1989년 조사의 22.1%에 비해 감소한 수치이다.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은 세바스토폴 (71.6%)과 크림 자치 공화국 (58.3%)에서 가장 큰 민족 집단을 이루고 있다.[1] 크림반도 외에도 도네츠크주의 도네츠크 (48.2%)와 마키이우카 (50.8%),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의 테르니우카 (52.9%), 루한스크주의 크라스노돈 (63.3%), 스베르들로프스크 (58.7%), 카디이우카 (50.1%), 크라스노돈스키 군 (51.7%), 스타니치노루한스키 군 (61.1%), 오데사주의 이즈마일 (43.7%), 수미주의 푸티울스키 군 (51.6%) 등 여러 도시와 지역에서 가장 큰 민족 집단을 형성한다.[2][5]
러시아계는 우크라이나 전역에 걸쳐 분포하며, 동부와 남부 지역에서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중부 지역에서는 중요한 소수 민족 그룹을 형성하며, 서부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그 비율이 낮다.[1] 우크라이나 서부와 중부 지역에서는 주로 도시와 산업 중심지에 러시아계 인구가 집중되어 있으며, 농촌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아 러시아계 비율이 훨씬 낮다.[1] 역사적인 이유와 도시 집중 현상으로 인해, 키이우 (러시아인 비율 13.1%[1])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중부 및 남동부의 주요 대도시들은 여전히 상당 부분 러시아어 사용 지역으로 남아있다.[30]
우크라이나에는 주목할 만한 러시아인의 하위 민족 집단 두 그룹이 존재한다: 푸티우 주변의 고르윤스와 빌코베 주변의 리포반스 (구교도 집단)이다.
2001년 인구 조사 결과,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인의 95.9%가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간주했으며, 3.9%는 우크라이나어를 모국어로 꼽았다.[87]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의 대다수(59.6%[88])는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전체 도시 인구의 22.4%, 농촌 인구의 6.9%를 구성한다.[88]
성별 분포를 보면 러시아인의 55.1%가 여성이며 44.9%가 남성이다.[88]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인의 평균 연령은 41.9세이다.[88] 성비 및 연령 구조의 불균형은 서부 및 중부 지역에서 더 두드러지며, 이 지역의 러시아인들은 주로 주(oblast) 중심지와 같은 산업 중심지에 집중되어 있다.[88]
다음은 2001년 인구 조사에 따른 우크라이나의 주(오블라스트)별 러시아인 인구 및 비율이다.
주(오블라스트) | 2001년 인구 | 2001년 백분율 |
---|---|---|
도네츠크주 | 1,844,400 | 38.2% |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 | 627,500 | 17.6% |
키이우 | 337,300 | 13.1% |
하르키우주 | 742,000 | 25.6% |
리비우주 | 92,600 | 3.6% |
오데사주 | 508,500 | 20.7% |
루한스크주 | 991,800 | 39.0% |
크림 자치 공화국 | 1,180,400 | 58.3% |
자포리자주 | 476,800 | 24.7% |
키이우주 | 109,300 | 6.0% |
빈니차주 | 67,500 | 3.8% |
폴타바주 | 117,100 | 7.2% |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 | 24,900 | 1.8% |
흐멜니츠키주 | 50,700 | 3.6% |
체르카시주 | 75,600 | 5.4% |
지토미르주 | 68,900 | 5.0% |
자카르파티아주 | 31,000 | 2.5% |
미콜라이우주 | 177,500 | 14.1% |
리우네주 | 30,100 | 2.6% |
수미주 | 121,700 | 9.4% |
체르니히우주 | 62,200 | 5.0% |
헤르손주 | 165,200 | 14.1% |
테르노필주 | 14,200 | 1.2% |
볼린주 | 25,100 | 2.4% |
키로보흐라드주 | 83,900 | 7.5% |
체르니우치주 | 37,900 | 4.1% |
세바스토폴 | 270,000 | 71.6% |
5. 문화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의 문화는 러시아어 사용, 동방 정교회 중심의 종교 생활, 그리고 러시아어로 창작 활동을 하는 문학가들의 존재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언어의 경우, 러시아어는 우크라이나 내에서 중요한 소수 언어이며, 특히 돈바스와 크림반도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키예프에서는 두 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반면,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에서는 제1언어로 널리 쓰인다. 종교적으로는 대다수가 우크라이나 정교회에 속한 동방 정교회 신자이며, 구교도나 개신교 등 소수 종교 집단도 존재한다. 문학 분야에서도 미하일 불가코프와 같은 역사적 인물뿐만 아니라 현대 작가들이 러시아어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5. 1. 언어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어는 가장 중요한 소수 언어이다. 돈바스와 크림반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이며, 키이우에서는 두 번째로 많이 사용되지만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에서는 제1언어로 널리 사용된다. 역사적인 이유로 키이우(러시아인이 인구의 13.1%[1])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중부와 남동부의 주요 도시 대부분은 2003년 기준으로 여전히 상당 부분 러시아어 사용 지역으로 남아있다.[30]소련 시대에는 러시아화 정책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산업 재건을 위한 러시아인 이주 등으로 러시아어 사용 인구 비율이 증가했다.[13] 1954년 소련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의 크림 주 이전 결정으로 러시아 SFSR에서 우크라이나 SSR로 이관되면서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계 인구가 약 백만 명 증가했으며, 이는 러시아어 사용자 증가에도 영향을 미쳤다.[17]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어는 모든 러시아 학교에서 필수 과목이었지만, 많은 정부 기관에서는 러시아어 사용이 선호되어 러시아화가 촉진되었다. 1979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 중 3분의 1만이 우크라이나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1994년 도네츠크주와 루한스크주에서는 러시아어를 우크라이나어와 함께 공용어 지위를 부여하고 지역 공식 언어로 지정하는 것에 대한 국민 투표가 실시되어 약 90%의 지지를 얻었으나, 키이우 중앙 정부에 의해 무효화되었다.[24][25]
독립 이후 러시아어를 주요 교육 언어로 사용하는 학교 수는 감소했다. 1989년 4,633개였던 러시아어 학교는 2001년 2,001개(전체 학교의 11.8%)로 줄었다.[26] 상당수 학교는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수업을 모두 제공하는 혼합형 학교로 전환되었다. 2007년 기준으로 공립학교 학생의 20%가 러시아어 수업을 받았다.[27] 리브네주와 같은 일부 지역에는 러시아어 전용 학교가 없으며,[28] 키이우에서는 2007년 기준 7개의 러시아어 학교와 17개의 혼합 언어 학교가 운영되었다.[29]
리비우 러시아 문화 센터는 여러 차례 공격과 파괴 행위를 겪었으며, 이는 때때로 언어 및 민족 갈등과 연관되었다.[19][32][33][34][35][36][37][38]
2012년 지역 언어법이 통과되어 특정 지역에서 소수 언어의 공식 사용을 허용했으나, 2014년 유로마이단 이후 우크라이나 의회는 이 법을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75] 이는 러시아어 사용 인구가 많은 남부와 동부 지역에서 큰 반발을 일으켰다.[76][77] 올렉산드르 투르치노프 대통령 대행은 폐지안 서명을 거부했으며,[78] 2018년 우크라이나 헌법 재판소는 2012년 법률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79]
2017년 9월 페트로 포로셴코 대통령이 서명한 새로운 교육법은 우크라이나어를 주요 교육 언어로 규정했으며, 이는 러시아와 헝가리 등 주변국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80][81] 2018년 9월 리비우주에서는 러시아어 문화 상품의 공공 사용 금지 조치가 도입되기도 했다.[83]
2006년 리서치 & 브랜딩 그룹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9%는 러시아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지 않아 러시아어 사용자의 권리가 침해된다고 생각했으며, 38%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70][71] 우크라이나 국립 과학 아카데미 사회학 연구소의 연례 조사에서는 인구의 43.9%~52.0%가 러시아어의 공용어 지정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72] 그러나 국제 설문조사에서 러시아어의 법적 지위는 중요한 정치 문제 순위에서 26위를 차지했다.[73] 2007년 사회학 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0.5%만이 언어 차별을 경험했다고 답했다.[55]
2001년 우크라이나 인구 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 민족의 95.9%가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간주했으며, 3.9%는 우크라이나어를 모국어로 꼽았다.[87] 러시아어는 여전히 일부 지역, 기업, 언론 매체 등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74]
최근 베르호브나 라다 의장 루슬란 스테판추크는 우크라이나에 "러시아계 소수 민족"이 없으며, 존중 대신 공격성을 보인다면 권리가 억압될 수 있다고 발언했다.[54]
5. 2. 종교
대다수의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은 동방 정교회 기독교 신자이며, 주로 우크라이나 정교회에 속해 있다. 이 교회는 1990년 10월 27일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교회 자치를 받은 우크라이나의 전 엑사르키아이다.[90]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중에는 구교도를 믿는 소수 집단도 있는데, 특히 리포반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 외에도 개신교 신자, 토착 영적 기독교인, 가톨릭 신자들이 있다. 또한,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5. 3. 문학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러시아어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마리나 댜첸코와 세르게이 댜첸코, 베라 캄샤 등이 있으며, 이들은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으나 이후 러시아로 이주했다. 마리나와 세르게이 댜첸코 부부는 나중에 미국 캘리포니아로 다시 이주했다.그 외 주요 작가들은 다음과 같다.
- 표도르 베레진: 러시아어 SF 작가로 활동했으며,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의 국방 차관을 지냈다.
- 미하일 불가코프
- 예브게니 페트로프
- 블라디슬라프 아돌포비치 루사노프: 러시아어 SF 작가이며,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 작가 연합 회장을 맡았다.
6. 정치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은 우크라이나 정치 지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특히 우크라이나 동부 및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에서 그 영향력이 두드러진다. 이들의 정치적 성향, 투표 행태, 그리고 러시아와의 관계 설정 문제는 우크라이나 국내 정치의 주요 쟁점 중 하나로 작용해 왔다.
역사적으로 일부 러시아계 주민들은 러시아와의 문화적, 정치적 유대를 중시하며 친러시아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특정 정당이나 정치 운동의 지지 기반이 되었으며, 선거 결과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지역당과 같은 정당은 러시아어 사용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 전쟁 등 일련의 사건들은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의 정치적 상황과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계 주민의 권리 문제와 차별 논란 등이 불거지기도 했으며, 이는 우크라이나 사회 내 갈등 요인이 되기도 했다.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의 정치적 입장은 단일하지 않으며,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통합을 지지하는 목소리 또한 상당수 존재한다.
6. 1. 친러시아 정치 운동
2014년 이전 우크라이나에는 친러시아 정책을 옹호하는 정당과 운동들이 존재했으며, 일부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에 반대하고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기도 했다.[110][111][117] 그 수는 많지 않았지만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정치적 논쟁을 일으켰다.[112][113]이러한 조직들의 활동은 역사적인 노보로시야(Новороссия, '새로운 러시아') 지역, 특히 크림 반도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크림 반도는 러시아인이 가장 큰 민족 집단을 이루는 지역이며, 우크라이나 남부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계 인구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러시아어 사용 지역으로서 러시아와 강한 역사적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1]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이 지역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친러시아 정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며, 급진적인 친러시아 운동이 발생하기 쉬운 환경을 제공했다.
대표적인 친러시아 단체로는 청년 조직인 프리리브(Proryv, 돌파)와 유라시아 청년 연합(ESM) 등이 있다.[115] 이들 단체는 우크라이나의 해체와 옛 러시아 제국의 국경 내에서 러시아를 복원하는 것을 공공연히 목표로 삼았으며,[117] 러시아와 정치적으로 연계된 사업가들로부터 정기적인 격려와 금전적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118] 이들 단체의 법적 지위는 논란이 있었고, 프리리브의 지도자인 러시아 시민은 우크라이나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ESM의 모스크바 기반 지도자인 알렉산드르 두긴과 그의 동료 파벨 자리풀린 역시 우크라이나 입국이 금지되었다가 해제되기를 반복했다.[116]

이들 단체는 친러시아 활동뿐만 아니라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다.[119] 예를 들어, 프리리브는 2006년 크림 반나토 시위에 참여하여 "우크라이나의 미래는 러시아와의 연합에 있다", "NATO는 적"과 같은 구호를 내걸었다.[120] ESM은 매년 러시아 행진을 조직했는데, 2006년 11월 수도 키이우에서는 약 40명이 참가했으나 경찰과 충돌하여 일부 참가자가 체포되었다.[123] 같은 해 오데사에서는 150~200명,[123] 심페로폴에서는 500명이 참가하여[123] 비교적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참가자들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정교회의 통합,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민족적 단결을 요구하며 반서방, 친러시아 구호와 종교적 상징물을 들고 행진했다.[124][125]
일부 관찰자들은 러시아 정부와 러시아 정교회가 특히 크림 반도에서 이들 단체와 정당의 활동을 지원한다고 지적한다.[121] 이들 단체의 출판물과 시위 활동은 "우크라이나-러시아의 역사적 통일", "나토의 범죄" 등을 주장하며 강력한 친러시아 및 반나토 메시지를 담고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에서 이러한 급진적 러시아 단체가 부상한 배경에는 모스크바 크렘린이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이 러시아로 확산될 가능성을 우려하여 이에 대응하려 한 측면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122]
때때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과 친러시아 조직 간의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114]
6. 2. 선거
러시아계 유권자의 정서를 충족시키기 위해 선거 강령을 만든 정당들은 매우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2014년 우크라이나 총선 이전 여러 차례의 우크라이나 선거에서[92] 러시아와의 더 긴밀한 관계를 요구하는 정당들은 러시아어 사용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더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지역당, 우크라이나 공산당 및 우크라이나 진보 사회당과 같은 정당들은 특히 크림반도, 우크라이나 남부 및 동남부 지역에서 인기가 높았다. 2002년 총선에서 동부 및 남부 우크라이나를 기반으로 한 주류 지역당은 32.14%로 1위를 차지했으며, 이는 전국적으로 의식 있는 두 주요 경쟁자, 율리아 티모셴코 블록(22.29%) 및 우리 우크라이나 블록(13.95%)보다 앞섰다. 또한 친러시아 성향의 우크라이나 공산당은 3.66%를, 급진적인 친러시아 성향의 나탈리야 비트렌코 블록은 2.93%를 얻어 3% 장벽을 넘는 소수 정당에 가장 근접했다.[93][94]
2007년 총선에서 지역당은 34.37%(13만 표 감소)로 1위를 차지했고, 율리아 티모셴코 블록은 31.71%(150만 표 획득)로 2위, 우리 우크라이나–국민자위 블록은 14.15%(23만 8천 표 감소)로 3위, 우크라이나 공산당은 5.39%(32만 7천 표 획득)로 4위를 차지했으며, 나탈리야 비트렌코 블록은 1.32%로 떨어졌다.[93][94] 율리아 티모셴코 블록은 우크라이나 서부,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주 (주)에서 대부분의 유권자를 유치했지만, 최근 몇 년 동안 크림반도 (류드밀라 데니소바[95]) 및 루한스크주 (나탈리아 코롤레브스카[96])와 같은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주에서 여러 정치인을 영입했다. 2012년 총선에서 지역당은 다시 30%를 득표하여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고, 바트키우슈나(율리아 티모셴코 블록의 후계자)는 25.54%로 2위를 차지했다.[97][98] 우크라이나 공산당은 이번 선거에서 득표율을 13.18%로 끌어올렸다.[98]
2014년 총선에서 지역당의 후계 정당인 야권 블록은 친러시아 성향이 아닌 페트로 포로셴코 블록에 의해 남부 지역에서 압도되었다.[91] 선거에서 야권 블록은 9.43%를 득표하여 4위를 기록했다.[99] 야권 블록은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었지만, 이전 지역당의 거점이었던 남부 우크라이나에서도 2위를 기록했다(페트로 포로셴코 블록에 뒤쳐짐).[100] 우크라이나 공산당은 득표율 3.87%로 5% 선거 장벽을 넘지 못해 선거에서 제외되었다.[101][102] 돈바스 전쟁과 러시아의 크림반도 일방 합병으로 인해 크림반도와 돈바스의 상당 부분에서 선거가 치러지지 않았으며, 이 지역은 이전 지역당과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거점이었다.[103][104][105][106][107][108][109][97]
6. 3.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어는 모든 러시아 학교에서 필수 과목이었지만, 많은 정부 기관에서는 러시아어 사용이 선호되어 러시아화가 촉진되었다. 1954년, 소련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는 크림 주 이전 법령을 통해 크림반도를 러시아 SFSR에서 우크라이나 SSR로 이관했다. 이 조치로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계 인구가 약 백만 명 증가했으며, 많은 러시아 정치인들은 이를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결정으로 간주했다.[17] 이 이전의 정당성 문제는 수년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관계 및 크림반도 내 정치에서 민감한 사안으로 남았다. 그러나 1997년 러시아 연방과 우크라이나 간의 조약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국경을 인정하고 크림반도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수용했다.[18]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는 독립 국가가 되었으며, 이는 러시아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포함한 모든 우크라이나 SSR 지역의 국민 투표를 통해 지지받았다.[20] 우크라이나 국립 과학 아카데미 연구에 따르면 1991년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계 주민 75%는 더 이상 자신을 러시아 민족으로 여기지 않았으며,[21] 1991년 12월 독립 국민 투표에서 러시아계 주민의 55%가 독립에 찬성했다.[22]
독립 이후, 크림 타타르족의 귀환은 토지 소유권 및 고용 권리를 둘러싼 갈등을 야기했다.[23] 1994년 도네츠크주와 루한스크주에서는 러시아어에 우크라이나어와 동등한 공용어 지위를 부여하고 지역 공식 언어로 지정하는 것에 대해 약 90%가 찬성하는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으나, 키이우 정부는 이를 무효화했다.[24][25] 러시아어를 주요 교육 언어로 사용하는 학교 수가 감소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1989년 4,633개였던 러시아어 학교는 2001년 2,001개(전국 학교의 11.8%)로 줄어들었으며,[26] 상당수는 러시아어-우크라이나어 병행 학교로 전환되었다. 2007년 기준 공립학교 학생의 20%가 러시아어 수업을 받았다.[27] 리비우 러시아 문화 센터는 여러 차례 공격과 파괴 행위를 겪었으며, 특히 1992년에는 UNA-UNSO가 급습하기도 했다.[19]
유로마이단 사건[39] 이후, 러시아계 주민이 많은 지역에서는 반마이단 시위와 러시아가 지원하는 분리주의 활동이 벌어졌다. 러시아 비표지 병력이 크림 자치 공화국 최고 회의를 점거한 후, 의회는 2014년 크림 공화국 국민 투표를 발표하고 러시아에 군사력 파견을 요청했으며, 이는 러시아 연방의 크림 합병으로 이어졌다. 도네츠크, 오데사, 하르키우 등 주요 러시아어 사용 도시에서도 대규모 반마이단 시위가 발생했다. 도네츠크주에서는 분리주의자들이 자체 의회를 구성하고 국민 투표 실시를 결의했다.[40] 3월 3일, 러시아 국적자를 포함한 친러시아 시위대가 도네츠크 주 청사를 점거하고 러시아 국기를 게양했다.[41][42][43] 루한스크 지역 의회는 러시아어의 제2 공용어 지정 등을 요구하며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할 권리를 유보한다고 밝혔다.[44]
도네츠크주와 루한스크주의 친러시아 시위는 러시아 특수 작전군과 러시아군의 지원을 받는 무장 분리주의 반란으로 확대되었다.[45][46][47][48][49] 이에 우크라이나 정부는 2014년 4월 군사적 반격을 시작했다(돈바스 전쟁). 이 과정에서 루한스크와 도네츠크 같은 주요 도시들이 심한 포격을 받았다.[50][51][52] 유엔에 따르면 2014년 초부터 도네츠크주와 루한스크주에서 73만 명의 난민이 러시아로 피난했다.[53] 2014년부터 2022년까지 약 14,200명(민간인 3,404명 포함)이 전쟁으로 사망했다.
베르호브나 라다 의장 루슬란 스테판추크는 우크라이나에는 "러시아계 소수 민족"이 없으며, "이들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존중 대신 공격성을 보인다면, 그들의 권리는 그에 따라 억압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54]
2007년 사회학 연구소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0.5%만이 언어 차별을 경험했다고 답했으며,[55] 2008년 10월 여론 조사에서는 우크라이나 응답자의 87%(매우 긍정적 42.8%, 긍정적 44.9%)가 러시아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56] 1995년부터 2005년까지 매년 실시된 사회학 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민족 기반 차별 경험 비율은 지속적으로 낮았으며,[57] 보가더스 사회적 거리 척도 조사에서도 러시아인은 우크라이나인 다음으로 가장 사회적 거리가 가까운 집단으로 나타났다.[59] 당시 정치적으로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벨라루스 연합에 가입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여론(약 50% 초과)이 부정적인 여론(약 30% 미만)보다 높았다.[60]
그러나 2014년 명예 혁명 이후 러시아 정부의 반대파 탄압 강화로 많은 러시아 자유주의자들이 정치적 박해를 피해 우크라이나로 이주했다. 크림반도 병합에 반대한 일리야 포노마료프 의원, 언론인 마테이 가나폴스키, 아르카디 바브첸코, 예브게니 키셀료프, 알렉산드르 네브조로프 등이 대표적이다. 유엔 난민 기구(UNHCR)에 따르면 2014년 약 140명의 러시아인이 우크라이나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고, 2015년 상반기에 50명이 추가되었다. 다만 우크라이나의 이민 정책은 복잡하여 난민 지위를 얻는 데 제한이 있다. 2017년 4월 여론 조사에서는 우크라이나인의 57%가 러시아에 대해 매우 차갑거나 차가운 태도를 보였고, 따뜻하거나 매우 따뜻한 태도는 17%에 불과했다.[58]
2014년 당시 우크라이나에는 친러시아 정책을 옹호하고 일부는 우크라이나 독립에 반대하며 러시아 제국 부활을 주장하는 정당과 운동들이 존재했다.[110][111][117] 이들의 활동은 역사적 노보로시야 지역, 특히 크림 반도에서 두드러졌으며,[1] 이는 해당 지역의 러시아계 인구 비율 및 러시아와의 강한 역사적 유대감과 관련 있다. 때때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과 친러시아 조직 간의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114]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인 2022년 3월, 마리우폴 포위전 중 세르히 오를로프 부시장은 "러시아 폭격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절반이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이라고 말했다.[84] 침공 직후 실시된 여론 조사(크림반도 및 분리주의 통제 돈바스 지역 제외)에서 우크라이나 거주 러시아계 주민의 82%는 우크라이나의 어느 지역도 러시아의 정당한 영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126] 또한 우크라이나인(러시아계 88% 포함)의 65%는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러시아계 주민과 우크라이나인을 분열시키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우리를 통합한다"는 데 동의했다.[126]
6. 4.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차별 논란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는 독립 국가가 되었다. 이 독립은 러시아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포함한 모든 우크라이나 SSR 지역의 국민 투표를 통해 지지받았다.[20] 우크라이나 국립 과학 아카데미의 연구에 따르면 1991년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계 주민의 75%가 더 이상 자신을 러시아 민족으로 여기지 않았으며,[21] 1991년 12월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 투표에서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계 주민의 55%가 독립에 찬성표를 던졌다.[22]크림 타타르족의 귀환은 토지 소유권 및 고용 권리에 대한 여러 차례의 격렬한 충돌을 야기했다.[23]
1994년에는 도네츠크주와 루한스크주에서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으며, 약 90%가 러시아어가 우크라이나어와 함께 공용어 지위를 얻고 러시아어가 지역 수준에서 공식 언어가 되는 것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 국민 투표는 키이우 정부에 의해 무효화되었다.[24][25]
러시아어를 주요 언어로 사용하는 학교의 감소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1989년에는 러시아어를 주 교육 언어로 사용하는 학교가 4,633개였지만, 2001년에는 이 숫자가 2,001개로 줄어들어 전국 학교의 11.8%를 차지했다.[26] 이 러시아어 학교 중 상당수는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수업이 모두 있는 학교로 전환되었다. 2007년에는 공립학교 학생의 20%가 러시아어 수업을 받았다.[27] 리브네주와 같은 일부 지역에는 러시아어만 사용하는 학교가 남아 있지 않고, 러시아어-우크라이나어 혼용 학교에서 러시아어 수업만 제공된다.[28] 2007년 5월 기준으로 키이우에는 러시아어를 주 교육 언어로 사용하는 학교가 7개만 남아 있으며, 17개의 혼용 언어 학교에서 총 8,000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29] 나머지 학생들은 우크라이나어를 유일한 교육 언어로 사용하는 학교에 다니고 있다. 후자의 학생 중 45,700명(전체의 18%)이 주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 수도에서 러시아어를 별도의 과목으로 공부하고 있으며,[29][30][31] 우크라이나 인구의 약 70%가 전국적으로 러시아어를 우크라이나어와 함께 중등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72]
리비우 러시아 문화 센터는 여러 차례 공격과 파괴 행위를 겪었다. 1992년 1월 22일, UNA-UNSO가 리비우주 의회 의원의 지휘를 받아 급습했다.[19] UNA-UNSO 회원들은 건물을 수색하고, 일부 문서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건물 밖으로 밀어냈다.[19] 그들은 우크라이나의 모든 것이 우크라이나인에게 속하므로 러시아인과 유대인은 그곳에 거주하거나 재산을 소유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19] 2001년 교황 리비우 방문 당시 건물이 파괴되었고,[32] 2003년(5번),[33][34] 2004년(오렌지 혁명 동안[35]), 2005년,[36][37] 2006년에도 파괴되었다.[38]
유로마이단 시위[39] 이후, 러시아계 주민이 많은 지역은 반마이단 시위와 러시아가 지원하는 분리주의 활동의 무대가 되었다. 크림 의회 점거 이후 러시아 비표지 병력에 의해 점령된 크림 자치 공화국 최고 회의는 2014년 크림 공화국 국민 투표를 발표하고 러시아에 군사력을 크림반도에 파견하여 유로마이단 시위대로부터 지역 주민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이는 러시아의 크림 합병의 시작을 알렸다. 도네츠크, 오데사, 하르키우와 같은 다른 주요 러시아어 사용 도시에서 주요 반마이단 시위가 발생했다. 도네츠크주의 선출된 지역 의회가 친러시아 시위대의 요구에 따르기를 거부하자, 분리주의자들은 선출되지 않은 분리주의 개인으로 구성된 자체 의회를 만들기로 결정했으며, 첫 회의에서 지역의 미래를 결정하는 국민 투표를 실시하기로 투표했다.[40]
3월 3일, "뚜렷한 러시아 억양"을 가진 러시아 국적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관광객"이라고 칭하며 지역 행정 건물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러시아 국기를 흔들며 "러시아!"와 "베르쿠트는 영웅이다!"를 외쳤다. 경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고, 군중에게 빠르게 압도당했다.[41][42][43] 루한스크의 지역 의회는 쫓겨난 친러시아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지역당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러시아어에 제2 공용어 지위를 부여하고, ″베르쿠트 전사들의 박해″를 중단하고, 마이단 자위 부대를 해산하고, 스보보다 및 UNA-UNSO와 같은 많은 극우 정치 단체를 금지할 것을 요구하기로 투표했다. 당국이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주 의회는 ″러시아 연방의 형제 국가에 도움을 요청할 권리″를 보류했다.[44]
2014년 친러시아 분쟁 in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의 친러시아 시위는 러시아의 특수 작전군과 정규군의 지원을 받는 무장 분리주의 반란으로 확대되었다.[45][46][47][48][49]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 정부는 2014년 4월에 반군에 대한 군사적 반격을 시작했다. 이 전쟁 동안 루한스크와 도네츠크와 같은 주요 도시[50]는 심한 포격을 받았다.[51][52] 유엔에 따르면 2014년 초부터 도네츠크주와 루한스크주에서 73만 명의 난민이 러시아로 피난했다.[53] 2014년부터 2022년까지 약 14,200명(민간인 3,404명 포함)이 전쟁으로 인해 사망했다.
베르호브나 라다 의장 루슬란 스테판추크는 우크라이나에는 "러시아계 소수 민족"이 없으며 "이 사람들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존중보다는 공격성을 보인다면, 그들의 권리는 그에 따라 억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54]
차별 논란에도 불구하고, 일부 조사 결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2007년 사회학 연구소의 전국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0.5%만이 언어 차별을 받는 집단에 속한다고 답했다.[55] 또한 2008년 10월에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우크라이나 응답자의 87%가 러시아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매우 긍정적 42.8%, 긍정적 44.9%)를 보였다.[56] 1995년부터 2005년까지 매년 실시된 사회학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러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민족 기반 차별 사례를 경험한 응답자의 비율은 일관되게 낮았으며(대부분 한 자릿수), 우크라이나인과 유대인을 포함한 다른 어떤 민족을 대상으로 한 사건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차이가 없었다.[57] 2007년 우크라이나와 유럽 비교 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거주자의 0.1%만이 국적에 의해 차별받는 집단에 속한다고 생각한다.[55] 그러나 2017년 4월, Rating Group Ukraine이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우크라이나인 응답자의 57%는 러시아에 대해 매우 차갑거나 차가운 태도를 보였으며, 매우 따뜻하거나 따뜻한 태도를 보인 응답자는 17%에 불과했다.[58]
일부 조사에서는 러시아인이 우크라이나에서 사회적으로 소외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다양한 친밀도의 사회적 접촉에 우크라이나 거주자가 참여하려는 의지를 나타내는 지표(보가더스 사회적 거리 척도)는 매년 실시되는 사회학 조사를 기반으로 계산되었으며, 러시아인은 평균적으로 우크라이나인 자신을 제외하고는 우크라이나 내에서 가장 사회적으로 거리가 좁다는 것을 일관되게 보여주었다.[59] 동일한 조사에서 실제로 우크라이나 국민은 해외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인보다 러시아인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데 약간 더 편안함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59] 이러한 사회적 태도는 1997년부터 2005년까지 매년 실시된 조사에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연합에 가입하는 아이디어에 대한 태도가 부정적(약 30% 미만)보다 긍정적(약 50% 초과)이라는 것을 일관되게 나타내면서 정치적인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60]
명예 혁명 이후 러시아 정부는 반대파 탄압을 대폭 강화했고, 그 결과 러시아 자유주의 야권에 대한 정치적 동기 부여 사건이 발생했다. 그 결과, 많은 유명 러시아인들이 러시아에서의 정치적 기소를 피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이주했다. 주목할 만한 예로는 크림반도 병합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국회의원 일리야 포노마료프, 언론인 마테이 가나폴스키, 아르카디 바브첸코, 예브게니 키셀료프, 알렉산드르 네브조로프 등이 있다. 유엔 난민 기구(UNHCR)가 제시한 통계에 따르면, 2014년 약 140명의 러시아인이 우크라이나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 2015년 상반기에는 이 숫자가 50명 더 증가했다. 동시에 우크라이나의 이민 정책은 복잡하며 난민 지위를 성공적으로 신청할 수 있는 러시아인의 수를 제한한다.
극우 민족주의 정당 "스보보다"[62]는 급진적인 반러시아 정서를 불러일으켰고[63], 서부 우크라이나 테르노필 지역 의회에서 볼 수 있듯이 지방 의회에서 다수 지지를 얻을 정도로 선거에서 지지를 받았다.[64][65] 2004년 "스보보다" 당 대표 올레흐 탸흐니보크는 자신의 당에 우크라이나를 지배하는 "모스크바-유대인 마피아"에 맞서 싸울 것을 촉구했다.[66] "스보보다" 당원들은 2014년 우크라이나 정부에서 고위직을 역임했다.[67] 그러나 이 당은 2014년 10월 말 2014년 우크라이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우크라이나 의회[68]에서 얻었던 37석 중 30석(2012년 2012년 우크라이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처음 얻은 의석)을 잃었고[68], 우크라이나 정부로 복귀하지 못했다.[69]
7. 주요 인물
- 보리슬라프 브론두코프 - 배우 (폴란드계와 러시아계 혼혈)
- 유리 세르게예비치 라브로프 - 과학자
- 니콜라이 올랄린 - 배우
- 안드레이 콰소프 - 과학자
- 예브게니 추이코프 - 과학자
- 빅토르 팔모프 - 과학자
- 바딤 노빈스키 (Vadim Novinskyeng)[127] - 억만장자 사업가, 정치인 (아르메니아계 혈통)
- 올레크 안토노프 (Oleg Antonoveng) - 소련의 항공기 설계자이자 화가, 안토노프 (Antonov ASTC)의 창립자.
- 표트르 고를로프 (Pyotr Gorloveng) -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의 많은 광산을 탐사한 지질학자이자 엔지니어. 호를리우카 (Horlivka)시 설립자.
- 바실리 카라진 (Vasiliy Karazineng) - 러시아 제국의 지식인, 발명가, 과학 출판인. 하르키우 대학교 설립자 (세르비아계).
- 세르게이 알렉세예비치 레베데프 (Sergei Alekseyevich Lebedeveng) - 전기 공학 및 컴퓨터 과학 분야의 과학자, 최초의 소련 컴퓨터 설계자.
-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모로조프 (Alexander Alexandrovich Morozoveng) - 엔지니어, 탱크 설계자.
- 아나톨리 댜틀로프 (Anatoly Dyatloveng) -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부수석 엔지니어였던 소련 엔지니어.
- 레오니드 톱투노프 (Leonid Toptunoveng) -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참사 당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원자로 4호기의 수석 원자로 제어 엔지니어였던 소련 전기 기술자.
- 알렉산드르 아키모프 (Aleksandr Akimoveng) -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참사 당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원자로 4호기에서 근무한 교대조의 감독관이었던 소련 엔지니어.
- 니콜라이 포민 (Nikolai Fomineng) - 1981년부터 1986년 체르노빌 핵 참사까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수석 엔지니어.
- 빅토르 브류하노프 (Viktor Bryukhanoveng) - 1970년부터 1986년까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건설 관리자이자 발전소 소장.
- 표도르 베레진 - 러시아어 SF 작가,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 국방 차관.
- 미하일 불가코프 - 작가.
- 예브게니 페트로프 - 작가.
- 블라디슬라프 아돌포비치 루사노프 - 러시아어 SF 작가,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 작가 연합 회장.
- 블라디슬라프 루사노프 - 작가.

- 올렉산데르 그레코프 -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군대의 사령관, 초르트키우 공세 설계자.
- 이반 코네프 - 소련 군 사령관, 제2차 세계 대전 동부 전선에서 붉은 군대 지휘.
-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 소련의 군사 사령관이자 정치인 (우크라이나계와 러시아계 혼혈).
- 바실리 자이체프 (저격수) -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소련 저격수.
- 이호르 라핀 - 이반 보훈의 이름을 딴 제1독립 특수부대 여단의 특수부대 대대 사령관.
- 미하일로 볼로츠키흐 - 군인, 대장(민방위 서비스).
- 에두아르드 모스칼리우 - 우크라이나 육군 소장.
- 올렉산드르 시르스키 - 소련 및 우크라이나 군 사령관.
- 비타스 - 가수.
- 레프 푸이쉬노프 - 피아니스트.
-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 작곡가.
- 바딤 프루자노프 - 키보디스트.
- 한나 세도코바 - 가수.
- 다샤 아스타피예바 - 모델, 가수, 배우.
- 아르템 피보바로프 - 뉴 웨이브 가수, 작곡가.
- 이반 도른 - 가수.
- 미콜라 아자로프 - 전 우크라이나 총리 겸 재무 장관 (러시아계 어머니와 에스토니아계 아버지 혼혈).[128][129][130][131]
- 라이사 보가티로바 - 정치인, 전 우크라이나 국가안보국방위원회 서기, 전 우크라이나 의회 부의원, 전 우크라이나 부총리 겸 보건부 장관.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 1964년부터 1982년까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서기장.
- 류드밀라 데니소바 - 전 우크라이나 노동사회정책부 장관.
- 드미트로 라줌코프 - 전 최고 라다 의장 (2019-2021).
- 올렉산드르 투르치노프 - 정치인, 각본가, 침례교 목사, 경제학자.
- 올레그 차료프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지역당 소속, 2014년 제명).
- 올렉산드르 수호프 -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2019-).
- 이반 헤라시모프 - 전 최고 라다 최고령 의원, 우크라이나 공산당 당원.
- 니키타 흐루쇼프 -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53-1964), 소련 각료 회의 의장 (1958-1964).
- 파블로 클림킨 - 전 우크라이나 외무부 장관 (2014-2019).
- 드미트로 루닌 - 사업가, 정치인, 전 폴타바주 주지사 대행 (2021-2023).
- 예브헨 쿠쉬나료프 - 전 하르키우 시장, 하르키우주 주지사, 우크라이나 대통령 비서실장, 최고 라다 부대표, 지역당 주요 이데올로기.
- 올렉산드르 노비코프 - 법 집행관, 전 부패 방지 국가 기관 (NACP) 수장 (2020-2024), 전 검사.
-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 정치인.
- 볼로디미르 푸자코프 - 정치인.
- 표도르 세르게예프 -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수장.
- 미하일 아르테미예비치 무라비요프 - 오데사 소비에트 공화국 군 사령관.
- 인노켄티 코제브니코프 -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인민 우편 및 전신 위원회.
- 안드레이 즈다노프 - 정치인.
- 볼로디미르 호르불린 - 전 국가 안보 및 국방 위원회 서기 (1994–1999, 2006).
- 안드레이 이바노프 (볼셰비키) - 볼셰비키 혁명가, 전우크라이나 중앙 집행위원회 간부회 위원 겸 서기.
- 올레 샤포발로프 - 전 하르키우주 의회 의장 (2005-2006), 지역당 당원.
- 헨나디 발라쇼프 - 5.10 정당 대표.
- 볼로디미르 페트로프 - 2019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후보.
- 발레리 바라노프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2007–2012).
- 이호르 마르코프 - 로디나당 창립자 겸 의장, 전 우크라이나 의회 부대표 (지역당 소속).
- 세르히 르보치킨 - 전 우크라이나 의회 의원.
- 율리야 르보치키나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2007-2022).
- 세르히 테료힌 - 전 우크라이나 경제부 장관 (2005), 바트키우시치나 당원.
- 뱌체슬라프 오베치킨 - 오데사주 주정부 제1차 부지사.
- 안드리 클류예프 -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 행정실 제2차 실장.
- 세르히 소볼레프 - 최고 라다 (의회) 의원, 바트키우시나 분파 대표 대행.
- 예브헤니 무라예프 - 현재 금지된 정당 나시의 대표.
- 블라디미르 말체프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지역당 당원.
- 볼로디미르 말리셰프 - 우크라이나 민병대 대장,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2006-2014), 법학 박사, 우크라이나 공훈 변호사.
- 이호르 예레메예프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무소속, "인민의 의지" 의장).
- 세르히 클류예프 - 사업가, 전 우크라이나 의회 의원.
- 이반 페도로프 - 정치인, 자포리자주 주지사 (2024-).
- 빅토르 티호노프 (정치인) - 전 벨라루스 주재 대사 (2011-2012).
- 마리야 이오노바 - 페트로 포로셴코 블록 소속 정치인.
- 스피리돈 킬린카로프 - 친러시아 정치인,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우크라이나 공산당 소속, 2006-2014).
- 올렉산드르 모치코프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 이호르 프라솔로프 - 전 우크라이나 경제 개발 및 통상부 장관 (2012-2014).
- 글리프 프리그노프 - 전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 의회 의장.
- 볼로디미르 폴로차니노프 - 전 인민 부대표.
- 올렉산드르 포노마료프 (정치인) -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2012-).
- 이호르 라이닌 - 전 하르키우주 주지사.
- 올렉시 다닐로프 - 전 우크라이나 국가 안보 및 국방 위원회 서기 (2019-2024).
- 볼로디미르 그리니요프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1990-1994).
- 안톤 폴리야코프 - 전 최고 라다 의원 (인민의 종 당원, 2019-2021).
- 올레 디민 - 전 우크라이나의 중화인민공화국 대사 (2013-2019).
- 안드리 코제미아킨 - 정치인, 전 보안국 요원.
- 크세니야 랴피나 - "우크라이나를 위하여!" 당 부의장.
- 비탈리 슈빈 - 전 에너지 및 환경 보호부 장관 (2020).
- 세르히 쿠니친 - 페트로 포로셴코 블록 소속 무소속 정치인, 우크라이나 의회 의원.
- 니나 유자니나 -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2014-).
- 세르히 카플린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사회민주당 대표.
- 이호르 테레호프 - 하르키우 시장 (2021-).
- 올렉시 아자로프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최고 라다 재무 및 은행 위원회 제1부의장.
- 세르히 키발로프 - 정치인, 법학자, 200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중앙 선거 관리 위원회 위원장.
- 이리나 베네딕토바 - 전 우크라이나 검찰총장 (2020-2022).
- 이리나 수슬로바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2014-2019).
- 올렉산드르 예프레모프 - 전 국회의원 및 정치인.
- 보리스 필라토프 - 현 드니프로 시장.
- 올렉산드르 볼코프 (정치인)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 올레 타타로프 -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부실장.
- 올레 타라소프 -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 막심 스테파노프 - 전 보건부 장관 (2020-2021).
- 세르히 샤호프 -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2016-).
- 안드리 스미르노프 -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부실장 (2019-2024).
- 올레 네므치노프 - 내각 사무처 제20대 서기.
- 안드리 빅토로비치 시모노프 - 피르야틴 시장 (2020-).
- 안드리 고르디에프 - 정치인,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 바딤 메리코프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전 미콜라이우주 주지사 (2014-2016).
- 파블로 레베데프 - 전 우크라이나 국방부 장관 (2012-2014).
- 헨나디 바실리에프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 유리 샤포발로프 -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 코스티안틴 모로조프 - 초대 우크라이나 국방부 장관 (1991-1993).
- 발레리 슈마로프 - 제3대 우크라이나 국방부 장관 (1994-1996).
- 이고르 알렉세예프 (정치인) - 전 최고 라다 의원 (2002-2014).
- 드미트로 살라마틴 - 전 우크라이나 국방부 장관 (2012).
- 파블로 쿠즈니에초프 - 전 최고 라다 의원 (1998-2002).
- 올렉산드르 쿠브라코프 - 전 우크라이나 인프라부 장관 (2021-2024).
- 비탈리 다닐로프 - 전 우크라이나 의회 의원(최고 라다).
- 비탈리 추구니코프 - 전 리브네주 주지사 (2014–2016).
- 헤오르히 크류치코프 - 전 최고 라다 의원 (우크라이나 공산당 당원, 1998-2006).
- 미하일 체체토프 - 전 지역당 의회 분파 제1부대표.
- 안드리 홀로도프 - 사업가, 정치인,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 올렉시 코스튜세프 - 전 오데사 시장.
- 스비틀라나 샤탈로바 - 정치인, 오데사주 부지사.
- 뱌체슬라프 보구슬라예프 - 엔지니어, 사업가, 정치인, 전 지역당 당원,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2006-2019).
- 겐나디 트루하노프 - 오데사 시장.
- 파블로 프로로프 - 우크라이나 의회 의원 (인민의 종 소속).
- 유리 즈비트니에프 - 200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후보.
- 비톨드 포킨 - 초대 우크라이나 총리 (1991-1992).
- 올렉산드르 프로쿠딘 - 전 우크라이나 국가 경찰 부서장 (2022-2023).
- 세르히 아르부조프 - 전 은행가, 정치인, 전 우크라이나 총리 대행 (2014).
- 알렉산더 루츠코이 - 러시아 정치인, 전 러시아 부통령 (1991-1993).
- 블라디슬라프 부카리에프 - 정치인, 정보 장교, 전 우크라이나 대외 정보국장 (2019).
- 세르히 부닌 - 정치인,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 안드레이 쿠르브스키 - 러시아 차르 이반 뇌제의 정치적 반대자.
- 바실리 아베린 - 볼셰비키 혁명가, 체카 주요 구성원.
- 바실리 만체프 - 우크라이나 체카 의장.
- 알렉산드르 우스펜스키 - 우크라이나 SSR 내무 인민 위원.
- 이반 세로프 - 우크라이나 SSR 내무 인민 위원.
- 알렉세이 브로브킨 - 우크라이나 SSR 내무부 장관.
- 유리 스미르노프 (장관) - 전 우크라이나 내무부 장관 (2001–2003).
- 올렉산드르 슐긴 - 외교관, 우크라이나 외무부 설립 기여 (1917-1918).
- 게오르기 아파나시에프 - 우크라이나 국가 외무부 장관 (1918).
- 알렉산드르 하리토노프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 미하일 파피예프 - 전 노동사회정책부 장관 (2002-2005, 2006-2007).
- 이반 랴코프 (정치인) - 전 최고 라다 의원 (1990-1994).
- 미콜라 포포프 - 전 최고 라다 의원 (1990-1994).
- 세르히 예프레모프 - 우크라이나 중앙 위원회 부위원장 (1917).
- 이리나 아키모바 - 정치인,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 행정실 제1부실장.
- 한나 안토니에바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 볼로디미르 아리에프 - 우크라이나 의회 의원 (2007-), PACE 부회장 (2015, 2018).
- 스타니슬라프 아르제비틴 - 우크라이나 은행 협회 회장, 최고 라다 인민 부대표.
- 알렉세이 바부린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우크라이나 공산당 당원).
- 아나톨리 브레즈빈 - 전 키예프 시의회 의원 (1998–2014).
- 니나 카르파초바 - 전 최고 라다 인권 위원 (1998-2012).
- 보리스 콜레스니코프 - 정치인, 우크라이나는 우리 집 대표.
- 비탈리 코노노프 - 환경 운동가,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우크라이나 녹색당 소속, 1998-2002).
- 파블로 부르라코프 - 전 우크라이나 자유당 의원 (1995-2005).
- 유리 카르마진 - 정치인, 판사,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 레오니드 클리모프 - 최고 라다 의원 (지역당 당원), 국가 안보 및 국방 위원회 위원.
- 세르히 라린 - 정치인, 여러 정당 소속으로 국회의원 역임.
- 미하일 포지바노프 - 정치인, 전 경제부 차관 (2008-2010).
- 안드리 포르트노프 - 전 국회의원 (2006-2010).
- 빅토르 토폴로프 - 전 우크라이나 석탄 산업부 장관 (2005-2006).
- 유리 체르트코프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2006-2014).
- 올렉산드르 트레티아코프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 막심 폴리야코프 - 정치인, 경제학자, 전 우만 시의회 부시장.
- 아르투르 게라시모프 - 전 페트로 포로셴코 블록 의회 분파 대표 (2017-2019).
- 올가 벨코바 - 전 우크라이나 의회 의원 (2012-2020).
- 올하 체르바코바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 예호르 소볼레프 - 정치인, 전 최고 라다 의원 (자조당 소속).
- 테티아나 오스트리코바 - 전 우크라이나 의회 의원 (사모포미치 연합).
- 안나 로마노바 - 전 우크라이나 의회 의원 (사모포미치 연합), 전 체르니히우 부시장.
- 올렉시 랴브친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2014-2019), 전 에너지 및 환경 보호부 차관 (2019-2020).
- 이호르 즈다노프 - 전 청소년 체육부 장관.
- 테티아나 리치코바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2016-2019).
- 올레 크리신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 막심 예피모프 - 전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2014-2023).
- 볼로디미르 아레쇼노프 -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우크라이나 교육 공로자.
- 아나스타시야 라디나 - 최고 라다 의원 (인민의 종 소속, 2019-).
- 예호르 체르니에프 -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인민의 종 소속).
- 마리나 바르디나 -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 율리야 오브친니코바 -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인민의 종 소속).
- 데니스 마슬로프 - 판사, 변호사, 정치인, 최고 라다 법률 정책 위원회 의장 (2022-).
- 올레 볼로신 - 정치 평론가, 정치인, 전 정부 관리.
- 테티아나 플라치코바 - 전 인민 부대표 (2019년 선출).
- 코스티안틴 본다레프 - 최고 라다의 인민 부대표.
- 올렉산드라 우스티노바 - 공공 운동가,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홀로스 소속, 2019-).
- 세르히 라크마닌 - 저널리스트, 정치인,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홀로스 소속, 2019-).
- 안드리 샤라스킨 - 정치인,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홀로스 소속, 2020-).
- 이리나 보르조바 -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 뱌체슬라프 루블료프 - 정치인,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인민의 종 소속, 2019-).
- 안드리 악쇼노프 - 우크라이나 국회 의원.
- 올렉산드르 코발로프 - 정치인,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2019-).
- 세르히 쿠즈미니흐 - 정치인,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2019-).
- 마리나 니키티나 - 정치인,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인민의 종 소속, 2019-).
- 올렉시 쿠즈니에초프 - 정치인, 사업가, 최고 라다 의원.
- 올렉산드르 루카셰프 - 정치인,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2019-).
- 이호르 코피틴 -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인민의 종 소속, 2019-).
- 아르템 초르노모로프 -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인민의 종 소속, 2019-).
- 막심 디르딘 -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인민의 종 소속, 2019-).
- 올레 콜리에프 -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인민의 종 소속, 2019-).
- 올렉시 레오노프 -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인민의 종 소속, 2019-).
- 세르히 콜레보신 - 우크라이나 인민 부대표 (인민의 종 소속, 2
참조
[1]
웹사이트
Results / General results of the census / National composition of population
http://www.ukrcensus[...]
2007-05-20
[2]
뉴스
Why Eastern Ukraine is an integral part of Ukraine
https://www.washingt[...]
[3]
웹사이트
Encyclopedia of Ukraine, Slobidska Ukraine
https://www.encyclop[...]
2007-12-14
[4]
서적
The settlement of Novorossiya (Yekaterinoslav and Taurida guberniyas) in 18th–19th centuries
http://www.libr.dp.u[...]
Nauka
2007-11-15
[5]
서적
Етнополітична географія України
Літопис, видавництво ЛНУ імені Івана Франка
[6]
웹사이트
1897 Census on Demoscope.ru
http://demoscope.ru/[...]
2007-05-20
[7]
웹사이트
Імперія та ми
https://day.kyiv.ua/[...]
2023-07-29
[8]
간행물
"Donetsk-Krivoy Rog Republic – illusions and practicals of nihilism"
http://www.zn.ua/300[...]
2004-12-04
[9]
문서
"National Factors in Party and State Affairs – Theses for the Twelfth Congress of the Russian Communist Party (Bolsheviks), Approved by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Party"
http://www.marx2mao.[...]
[10]
문서
Ukrainization in the UkSSR (1923–1931)
[11]
서적
Stalin's Genocides (Human Rights and Crimes against Humanity)
http://www.oxonianr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2]
뉴스
As Stalin Starved Ukrainians, Kids Ate Each Other: Lewis Lapham
https://www.bloomber[...]
2023-06-02
[13]
서적
Росіяни західних областей України (1944–1996 р.р.) (Етносоціологічне дослідження)
Центр Європи
[14]
서적
"The Stalinist Penal System: A Statistical History of Soviet Repression and Terror, 1930–1953"
http://www.euronet.n[...]
McFarland
[15]
서적
"Ethnic Cleansing in the USSR, 1937–1949"
http://www.euronet.n[...]
Greenwood
[16]
문서
Directory of resources on minority human rights and related problems of the transition period in Eastern and Central Europe. Demographic Balance and Migration Processes in Crimea
http://www.minelres.[...]
2007-06-03
[17]
간행물
Our Security Predicament
1992
[18]
서적
Ukraine: A History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
서적
Очерки истории русского национально-культурного движения в Галиции (1988–1993 годы)
"Клуб «Реалисты»"
[20]
서적
Nationalist Mobilization and the Collapse of the Soviet State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1]
서적
Ukraine:State and Nation Building
https://books.google[...]
Routledge
[22]
서적
The Return: Russia's Journey from Gorbachev to Medvedev
https://books.google[...]
Free Press
[23]
웹사이트
Tatars push to regain their historic lands in Crimea
http://www.todayszam[...]
2007-03-31
[24]
웹사이트
Донбасс: забытый референдум-1994
http://thekievtimes.[...]
2014-05-12
[25]
웹사이트
Киев уже 20 лет обманывает Донбасс: Донецкая и Луганская области еще в 1994 году проголосовали за федерализацию, русский язык и евразийскую интеграцию
http://www.nakanune.[...]
[26]
웹사이트
The use of Russian language in education in CIS and the Baltics
http://mova-historia[...]
2007-12-12
[27]
웹사이트
Как соблюдается в Украине языковая Хартия?
http://www.from-ua.c[...]
2014-10-23
[28]
간행물
"Двуязычие в Украине?"
http://www.nbuv.gov.[...]
[29]
뉴스
Шестая часть киевских школьников изучает русский язык
http://www.korrespon[...]
2007-05-29
[30]
뉴스
What language is spoken in Ukraine?
http://www.wumag.kie[...]
Welcome to Ukraine
2003-02
[31]
간행물
Kyiv: the city, its residents, problems of today, wishes for tomorrow.
2006-04-29
[32]
웹사이트
ГАНЕБНА ВИТІВКА
http://galaxy.com.ua[...]
[33]
웹사이트
На Украине разгромили помещение Российского культурного центра
http://www.regnum.ru[...]
2014-10-23
[34]
웹사이트
Русский культурный центр во Львове расписали нехорошими словами
http://www.rdu.org.u[...]
[35]
웹사이트
Російський культурний центр став помаранчевий
http://portal.lviv.u[...]
2014-10-23
[36]
웹사이트
Чия рука тягнеться по камінь?
http://bezcenzury.co[...]
2008-06-25
[37]
웹사이트
Вчинено черговий акт вандалізму на Російський культурний центр у Львові
http://zik.com.ua/in[...]
2008-01-07
[38]
웹사이트
Опоганивши Російський культурний центр, Львів демонструє свою "європейськість"
http://www.leopolis.[...]
2019-04-13
[39]
뉴스
Donetsk view: Ukraine 'other half' resents Kiev protests
https://www.bbc.com/[...]
2013-12-03
[40]
웹사이트
Донецкий облсовет проголосовал за референдум
http://gazeta.ua/ru/[...]
Gazeta.ua
2014-03-03
[41]
웹사이트
Protests in eastern Ukraine aimed at bringing in Russian troops, warns PM
https://www.reuters.[...]
2024-04-07
[42]
웹사이트
From Russia, 'Tourists' Stir the Protests
https://www.nytimes.[...]
2014-03-04
[43]
웹사이트
В Донецке несколько сотен радикалов с криками "Россия" штурмуют ОГА
http://gazeta.ua/ru/[...]
Gazeta.ua
2014-03-03
[44]
웹사이트
Облсовет Луганская угрожает разоружить Майдан руками "братской" России
http://gazeta.ua/ru/[...]
Gazeta.ua
2014-03-02
[45]
웹사이트
For now, a tense quiet in Ukraine's east
http://america.aljaz[...]
2022-04-24
[46]
뉴스
Ukraine's 'little green men' carefully mask their identity
https://www.ft.com/c[...]
2014-04-16
[47]
뉴스
Ukraine crisis: Timeline
https://www.bbc.com/[...]
2014-11-13
[48]
뉴스
Armed pro-Russian insurgents in Luhansk say they are ready for police raid
http://www.kyivpost.[...]
2014-04-12
[49]
뉴스
Kiev government to deploy troops in Ukraine's east
https://news.yahoo.c[...]
2014-04-13
[50]
서적
'The Decline of Regionalism in Putin''s Russia: Boundary Issues'
https://books.google[...]
2001
[51]
뉴스
In Shell-Torn Luhansk, Food and Water Is Scarce: 'Welcome to Hell!'
http://www.newsweek.[...]
Newsweek
2014-08-15
[52]
뉴스
East Ukraine city of Luhansk dying under siege, residents say
http://www.denverpos[...]
The Denver Post
2014-08-05
[53]
뉴스
About 730,000 have left Ukraine for Russia due to conflict - UNHCR
http://in.reuters.co[...]
Reuters
2014-08-05
[54]
뉴스
Жодних російських нацменшин в Україні немає і не може бути – Стефанчук
https://tsn.ua/ukray[...]
ТСН
2023-11-20
[55]
서적
Ukraine and Europe: Outcomes of International Comparative Sociological Survey
http://www.i-soc.com[...]
Institute of Sociology of NAS of Ukraine
[56]
뉴스
Russia, Ukraine relationship going sour, say polls
http://www.kyivpost.[...]
Kyiv Post
2008-10-02
[57]
문서
See Panina, p. 48
[58]
뉴스
Brookings
https://www.brooking[...]
Brookings Institution
2017-10-18
[59]
문서
Panina, pp. 49–57
[60]
문서
Panina, p. 29
[61]
웹사이트
Russian Refugees in Ukraine: The Broken Hopes
https://www.huffpost[...]
2016-02-17
[62]
뉴스
Svoboda Fuels Ukraine’s Growing Anti-Semitism
http://www.algemeine[...]
Algemeiner Journal
2013-05-24
[63]
웹사이트
UKRAINIAN APPEALS TO ANTI-SEMITISM IN ELECTION WIN
https://www.icare.to[...]
2010-04-11
[64]
뉴스
Вибори: тотальне домінування Партії регіонів
http://www.bbc.co.uk[...]
BBC Ukrainian
2010-11-06
[65]
뉴스
Генеральна репетиція президентських виборів: на Тернопільщині стався прогнозований тріумф націоналістів і крах Тимошенко
http://www.umoloda.k[...]
Ukrayina Moloda
2009-03-17
[66]
뉴스
The Ukrainian Nationalism at the Heart of ‘Euromaidan’
http://www.thenation[...]
The Nation
2014-01-21
[67]
뉴스
Ukraine's revolution and the far right
https://www.bbc.com/[...]
BBC News
2014-03-07
[68]
뉴스
Ukraine election:President Yanukovych party claims win
https://www.bbc.co.u[...]
BBC News
2012-10-29
[69]
뉴스
Five political forces sign coalition agreement
http://en.interfax.c[...]
Interfax-Ukraine
2014-11-21
[70]
뉴스
Большинство украинцев говорят на русском языке
http://www.podrobnos[...]
Podrobnosti
2006-12-04
[71]
뉴스
Украинцы лучше владеют русским языком, чем украинским: соцопрос
http://www.regnum.ru[...]
REGNUM
2006-12-04
[72]
서적
Ukrainian Society 1994–2005: Sociological Monitoring
http://dif.org.ua/mo[...]
Sophia
2005
[73]
웹사이트
Ще не вмерла Україна ... круглий стіл.
http://www.nbb.com.u[...]
[74]
웹사이트
TOLERANCE REDUCES NEED FOR RUSSIAN LANGUAGE LAW IN UKRAINE
http://www.jamestown[...]
2007-07-05
[75]
뉴스
Western nations scramble to contain fallout from Ukraine crisis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14-02-24
[76]
웹사이트
На Украине протестуют против начатой новыми властями борьбы с русским языком
http://www.newsru.co[...]
2014-02-26
[77]
뉴스
Is it too late for Kiev to woo Russian-speaking Ukraine?
http://www.csmonitor[...]
The Christian Science Monitor
2014-02-28
[78]
웹사이트
Ukraine's parliament-appointed acting president says language law to stay effective
http://en.itar-tass.[...]
ITAR-TASS
2014-03-01
[79]
뉴스
Constitutional Court declares unconstitutional language law of Kivalov-Kolesnichenko
https://www.ukrinfor[...]
Ukrinform
2018-02-28
[80]
뉴스
Ukraine defends education reform as Hungary promises 'pain'
https://www.irishtim[...]
The Irish Times
2017-09-27
[81]
뉴스
Ukrainian Language Bill Facing Barrage Of Criticism From Minorities, Foreign Capitals
https://www.rferl.or[...]
Radio Free Europe/Radio Liberty
2017-09-24
[82]
뉴스
Hungary-Ukraine relations hit new low over troop deployment
https://www.neweurop[...]
New Europe
2018-03-26
[83]
뉴스
Lviv region bans movies, books, songs in Russian until end of Russian occupation
https://www.unian.in[...]
Unian
2018-09-19
[84]
뉴스
'Pure genocide': civilian targets in Mariupol 'annihilated' by Russian attacks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22-03-09
[85]
뉴스
2001 Census results reveal information on nationalities and language in Ukraine
http://www.ukrweekly[...]
The Ukrainian Weekly
2003
[86]
웹사이트
Рождаемость в Украине самая низкая в Европе
http://demoscope.ru/[...]
Demoscope.ru
2007-04-16
[87]
서적
Етнополітична географія України
Літопис, видавництво ЛНУ імені Івана Франка
2006
[88]
서적
Етнополітична географія України
Літопис, видавництво ЛНУ імені Івана Франка
2006
[89]
웹사이트
Всеукраїнський перепис населення 2001 - English version - Results - General results of the census - National composition of population
http://2001.ukrcensu[...]
2014-10-23
[90]
웹사이트
Определение Архиерейского Собора Русской Православной Церкви 25 – 27 октября 1990 года об Украинской Православной Церкви
http://www.orthodox.[...]
[91]
뉴스
Revival" "our land": Who picks up the legacy of "regionals
http://www.bbc.com/u[...]
BBC Ukrainian
2015-09-16
[92]
웹사이트
Ukraine’s Parliamentary Election: What Happened? What’s Next?
http://www.brookings[...]
Brookings Institution
2014-10-27
[93]
웹사이트
Central Election Commission of Ukraine
http://www.cvk.gov.u[...]
[94]
뉴스
Yanukovych Loses 300,000 While Tymoshenko Receives Additional 1.5 Million
http://www2.pravda.c[...]
Ukrainska Pravda
2007-10-09
[95]
뉴스
Новый состав Кабмина принят единогласно
http://news.mediapor[...]
news.mediaport.ua
[96]
뉴스
Народна депутатка з Луганська від БЮТу раніше підтримувала Віктора Януковича
http://www.gpu.ua/in[...]
Gazeta.ua
2007-03-23
[97]
웹사이트
After the parliamentary elections in Ukraine: a tough victory for the Party of Regions
http://www.osw.waw.p[...]
Centre for Eastern Studies
2012-11-07
[98]
뉴스
With all party lists ballots counted, Regions Party gets 30%, Batkivschyna 25.54%, UDAR 13.96%, Communists 13.18%, Svoboda 10.44%
http://www.kyivpost.[...]
Kyiv Post
2012-11-08
[99]
뉴스
Poroshenko Bloc to have greatest number of seats in parliament
http://www.ukrinform[...]
Ukrinform
2014-11-08
[100]
뉴스
Kharkiv, Luhansk, Zaporizhia regions prefer Opposition Bloc
http://en.interfax.c[...]
Interfax-Ukraine
2014-10-27
[101]
뉴스
Ukrainian Communist leader Symonenko not planning to leave country
http://en.interfax.c[...]
Interfax-Ukraine
2014-10-29
[102]
뉴스
General official results of Rada election
http://en.interfax.c[...]
Interfax-Ukraine
2014-11-11
[103]
뉴스
Ukraine crisis: President calls snap vote amid fighting
https://www.bbc.com/[...]
BBC News
2014-08-25
[104]
뉴스
Ukraine elections: Runners and risks
https://www.bbc.com/[...]
BBC News
2014-05-22
[105]
간행물
A strong vote for reform: Ukraine after the parliamentary elections
http://www.osw.waw.p[...]
OSW—Centre for Eastern Studies
2014-10-29
[106]
웹사이트
CEC substitutes Tymoshenko, Lutsenko in voting papers
https://web.archive.[...]
2012-08-30
[107]
서적
Communist and Post-Communist Parties in Europe
https://books.google[...]
"[[Vandenhoeck & Ruprecht]]"
[108]
웹사이트
Ukraine right-wing politics: is the genie out of the bottle?
http://www.opendemoc[...]
2011-01-03
[109]
간행물
Eight Reasons Why Ukraine’s Party of Regions Will Win the 2012 Elections
http://www.jamestown[...]
"[[The Jamestown Foundation]]"
2012-10-17
[109]
웹사이트
UKRAINE: Yushchenko needs Tymoshenko as ally again
http://www.taraskuzi[...]
"[[Oxford Analytica]]"
2007-10-05
[110]
웹사이트
Leftist, pro-Russian extremists defy Yushchenko over history
http://www.jamestown[...]
2014-10-23
[111]
웹사이트
СБУ собирается ликвидировать пророссийские радикальные организации в Крыму через суд.
http://www.citynews.[...]
2014-10-23
[112]
뉴스
Foreign Ministry to apply drastic measures in case Russian "Eurasian Union of Youth" responsible for vandalism on Hoverla mountain
http://www.nrcu.gov.[...]
The National Radio Company of Ukraine
[113]
뉴스
MP Candidate Herman (Party Of Regions): Vandalism Act At Hoverla Beneficial To Tymoshenko Bloc
http://www.ukranews.[...]
Ukrainian News Agency
[114]
뉴스
Violence rocks Sevastopol a day after Christmas
http://www.kyivpost.[...]
"[[Kyiv Post]]"
2009-12-28
[115]
뉴스
Without provocateurs and Russophobes Crimea seeking solutions to Ukrainian-Russian problems
http://www.day.kiev.[...]
"[[Den (newspaper)|Den]]"
2007-08-13
[116]
뉴스
SBU singled out people responsible for Hoveral attack
http://novynar.com.u[...]
"[[Novynar]]"
2007-10-20
[117]
뉴스
Радикальные русские маргиналы хотят разделить Украину по Сталину
http://www.pravda.co[...]
"[[Ukrayinska Pravda]]"
2006-07-18
[118]
뉴스
Фашистский друг Витренко
http://www.pravda.co[...]
"[[Ukrainska Pravda]]"
2006-09-26
[119]
뉴스
При штурмі СБУ в Києві арештовано 10 активістів ЄСМ
http://www.rbc.ua/uk[...]
2007 РБК-Україна
2006-06-14
[120]
뉴스
Крым негостеприимно встретил НАТО: американцам всю ночь пришлось искать ночлег
http://www.newsru.co[...]
"[[NEWSru.com]]"
2006-06-02
[121]
뉴스
Once more into the valley of death?
https://web.archive.[...]
The Sunday Times
2004-10-24
[122]
뉴스
New Ukrainian [[Oprichnina]], or what is in common "[[PORA]]", neoeuro-Asians, Ivan the Terrible and Yulia Tymoshenko
http://www.zn.ua/100[...]
"[[Zerkalo Nedeli]]"
2005-03-12
[122]
뉴스
New Ukrainian [[Oprichnina]], or what is in common "[[PORA]]", neoeuro-Asians, Ivan the Terrible and Yulia Tymoshenko
http://www.dt.ua/100[...]
"[[Zerkalo Nedeli]]"
2005-03-12
[123]
뉴스
"Вместе с бабой – семь человек"::Киевская милиция пообщалась с участниками "Русского марша"
http://www.kommersan[...]
"[[Kommersant]]-Ukraine"
2006-11-06
[124]
웹사이트
"Російський марш" в Одесі серед інших піднімав тему єдності УПЦ із Московським Патріархатом
http://www.risu.org.[...]
[125]
뉴스
Около 200 человек проводят "Русский марш" в Одессе
http://www.podrobnos[...]
"[[Podrobnosti]]"
2006-11-04
[126]
뉴스
Ukrainians want to stay and fight, but don't see Russian people as the enemy. A remarkable poll from Kyiv
https://www.european[...]
2022-03-14
[127]
뉴스
Novinsky wins by-election to Rada in Sevastopol, according to CEC
http://www.interfax.[...]
"[[Interfax-Ukraine]]"
2013-07-08
[128]
뉴스
Познер. Гость в студии – Николай Азаров
http://www.1tv.ru/vi[...]
1 канал
2012-06-29
[129]
뉴스
Azarov, as it turns out, is half Estonian
http://tsn.ua/ukrayi[...]
2012-01-23
[130]
뉴스
Mykola Azarov became prime minister
http://gazeta.ua/pos[...]
2010-08-31
[131]
뉴스
Mykola Azarov: Yanukovych's Right-Hand Man
http://www.rferl.org[...]
2010-03-12
[132]
웹사이트
Oleg Blokhin: FK Moskva should be among the three prize-winners
http://www.terrikon.[...]
2008-05-2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