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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채기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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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정채기(1962년)는 대한민국의 남성학 연구자, 교육학자, 사회운동가이다. 1962년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나 목포대학교를 졸업하고 건국대학교에서 교육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남성에게 강요되는 성 역할에 대한 비판과 함께, 남성 해방을 위한 남성학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고 남성주의 운동을 펼쳤다. 한국남성학연구회 회장, 딸사랑 아버지 모임 공동대표 등을 역임하며, 하얀 리본 캠페인 등 아버지와 남성 인권 보호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교육자로서 강원관광대학교 교수, 건국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며, 저술 활동과 방송 출연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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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채기 (1962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정채기
정채기
이름정채기
원어 이름鄭菜基
출생일1962년
출생지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양군 진상면 금이리 외금마을
사망일2013년 (51세)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대한민국
종교기독교(장로교)
필명블랙홀, 블랙홀준
배우자서동미
부모정용순(아버지), 최달막(어머니)
자녀아들 2명
친척남동생 2, 여동생 1
웹사이트정채기 블로그:블랙홀
경력
주요 활동교육학자, 심리학자, 보육학자, 남성학자, 시민사회운동가, 인권운동가, 남성 운동가, 대학 교수, 평론가, 저술가
활동 기간1983년 ~ 2013년
주요 소속前 한국남성학회 회장
前 미국남성학회(AMSA) 정회원
前 딸사랑아버지모임 공동대표
한국남성협의회 자문교수위원
명지대학교 대학원 교수
경기대학교 교수
건국대학교 교수
학력
학력 정보건국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석사
건국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박사

2. 생애

1962년 전라남도 광양군(현 광양시) 진상면에서 태어나 진상초등학교진상중학교를 졸업하고 순천고등학교(30회)로 진학하였다. 고등학교 재학 중 여수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3] 어릴 적부터 작은 키와 약한 체구, 눈물 많고 감성적인 성향 때문에 남성성에 대한 고민을 하였다.[1]

1982년 순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대학교를 다니다가 건국대학교 교육학과로 진학하면서 서울특별시로 올라왔다. 1993년 건국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시간강사로 재직 중 서동미와 결혼하였다.

1990년대 초, 미국프랑스 등에서 남성학이 연구되고 있음을 알고 관련 자료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1993년 일본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대학을 방문하여 연구 실태를 조사하고 자료를 수집했다.[5] 1994년 건국대학교 강사 시절 한국에 ‘남성학’을 처음 소개하고,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들이 가진 문제를 풀어주는 남성학은 왜 없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해외 자료를 번역, 논문을 발표했다.[8]

1995년 5월 한국남성연구회 출범에 참여하여 “남성연구회는 이 사회에서 남성이기 때문에 보는 피해와, 남성 중심 사회의 각종 편견과 고정 관념에서 나오는 부산물에 주목한다”라고 밝혔다.[10] 1997년 1월 21일 '아버지의 전화' 출범식에 참석,[11] 1998년 남성학연구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재선되었다.

1999년 11월 16일 한국성폭력상담소 주최 '10대의 성산업 유입과 남성 성문화' 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하여 문화적 측면에 대해 발제했다.[23] 11월 27일 한국남성협의회 조직에 참여하며 "우리 사회에도 남성운동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밝혔다.[24] 한국남성운동협의회 공동대표에 선출되었으나 의견 차이로 사퇴했다.[25]

1999년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했다. 명함으로 서로 비교하고 위축되며, 여성적인 것을 거부하는 것이 남성을 소외시킨다고 보았다.[18] 권위주의 타파를 주장했으며, 이혼은 자녀 문제와 사회적 폐해를 야기한다고 지적했다.[19]

1999년 10월부터 2001년 10월까지 군 가산점 폐지 여론에 반대하였다. 2001년 10월 군 가산점은 헌법재판소에 위헌소송이 제기되어 12월 위헌 판결을 받고 폐지되었다. 이후 군 가산점 부활 운동에 참여했다.

2002년 6월 22일 서울 안국동 철학카페 느티나무에서 ‘딸사랑 아버지모임’이 발족되자,[37] 창립 회원으로 참여하고 공동대표로 추대되었다. 2004년부터 호주제 폐지 여론에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2005년 강원관광대학교 영유아보육과, 교육학과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2006년 ‘제10회 일본 남성 페스티벌’에 참석하여 ‘왜 남자들은 겨울연가를 재미있게 보지 못 하는가’, ‘남성고민 핫라인 10년’, ‘남자들의 대화법’ 등을 참관했다.[51] 2011년 강원관광대학교 평생교육원장이 되었다.

2009년 4월 13일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식품안전청장 윤여표가 눈물을 흘린 것에 대해[57] 남자의 눈물도 ‘진정성’으로 평가해달라고 말했다.[57]

2011년 3월 경상북도 안동시 경안신학대학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하였다. 2011년 11월 4일 강원관광대학교 평생교육원장이 되었다.[61]

2. 1. 생애 초반

1962년 전라남도 광양군(현 광양시) 진상면에서 태어났다. 진상초등학교진상중학교를 졸업하고 순천고등학교(30회)로 진학하였다. 고등학교 재학 중 여수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2. 1. 1. 출생과 초기 활동

1962년 전라남도 광양군 진상면 금이리 외금마을에서 정용순과 최달막의 3남 1녀 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광양군 진상면 진상초등학교진상중학교를 졸업하고 순천고등학교(30회)로 진학하였다. 고등학교 재학 중 여수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3] 그는 2명의 남동생과 1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그는 남자다움 등에 대한 강박관념과 장남 등에 대한 압박 등을 부당하게 여겼다. 또한, 그는 남동생의 뒷바라지로 희생해야 했던 여동생의 사연을 접하고, 여성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점 등 가부장제의 문제점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가부장적이었던 부친은 마음 속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다 한다. 학교 입학·졸업식에 한 번도 참석치 않았고 함께 찍은 사진도 없다. 유년시절 아버지 사랑의 부재를 절감하면서 자신은 절대 가부장적인 분위기를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4]

2. 1. 2. 학창 시절

광양군 진상면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작은 키와 약한 체구 탓에 친구들에 치이며 아웃사이더로 밀려났다. 눈물 많고 감성적인 성향도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강한 남성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1]'고 한다. 그는 후일 자신이 남성학과 남성 인권 운동에 투신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서 아웃사이더였던 청소년기에 대해서도 밝혔다. 고등학교로 진학할 무렵 광양에서 여수로 이사하였고, 1979년 순천에 있는 순천고등학교로 진학했다.

1982년 순천고등학교(30회)를 졸업하고 목포대학교를 다녔다. 그 후 다시 건국대학교 교육학과로 진학하면서 서울특별시로 올라왔다.

2. 2. 남성학 연구

정채기는 교육학 전공이었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 남성성에 대한 의문을 품고 남성학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작은 키와 약한 체구, 감성적인 성향 때문에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남성상에 부합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1] 결혼 후 가장의 역할에 대한 부담감과 남성성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면서, '여성학은 있는데 왜 남성학은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1]

1990년대 초, 그는 미국프랑스 등에서 남성학이 연구되고 있음을 알고 관련 자료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1993년에는 일본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대학을 방문하여 남성학 연구 실태를 조사하고 자료를 수집했다.[5] 이후 일본미국의 남성학회 및 남성운동 단체에 참여하고, 미국 남성학회 정회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1997년에는 <남성학 입문> 번역서를 출간하며 "남성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6]

2. 2. 1. 남성학 연구 배경

그는 본래 교육학이 전공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환경으로 남성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고, 남성학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작은 키와 약한 체구 탓에 친구들에 치이며 아웃사이더로 밀려났다. 눈물 많고 감성적인 성향도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강한 남성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1993년 결혼을 앞두고는 콤플렉스가 절정에 달했다. 앞날을 기약 못하는 시간강사 생활, 유년시절부터 겪어온 남성성에 대한 반감과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남편, 가장 역할에 대한 현실적인 결핍 등이 맞물리며 남자는 도대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밀려왔다.[1]'고 회고한다.

그는 여성학은 있는데 왜 남성의 문제에 관심 갖는 남성학은 없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일본 남성학회, 미국 남성학회와 일본, 미국의 남성운동 단체들을 연구, 관련 자료를 찾아봤다. 1993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그는 남성학 강좌가 설치된 일본의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 현 오카야마 시 오카야마대학 등을 찾아다니며 남성학 연구 실태 등을 알아보고 자료를 모으기도 했다.[5] 1997년 출간된 <남성학 입문>의 역자 머리말에서 정채기는 “여성운동이 성과를 이루는 과정에서 남성들의 문제가 야기돼 1990년대에 ‘남성 문제시대’가 도래했다”며 “남성문제의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6]

그는 '주변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비슷하다 못해 다 똑같은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며,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학은 왜 없나'란 의문을 갖고 남성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해외의 남성학 사례들을 모으고 이론적인 근거들을 찾기 시작했다.[1] 1990년대 초 미국, 프랑스 등지에 남성학이 있음을 접하고 관련 자료들을 찾아 분석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일본미국의 남성학회와 남성운동 관련 모임에 참석하였고, 미국 남성학회의 정회원으로도 선임되었다.

1994년 당시 건국대학교 사범대학 강사였다.[7] 건국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 강사와 교직과 강사로 활동하던 중 1994년 한국에 ‘남성학’을 최초로 소개하였다. 그는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들이 가진 문제를 풀어주는 남성학은 왜 없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해외에서 남성학 관련 자료들을 모아 국내에 번역하고 논문을 발표하며 소개했다.[8]

1994년 10월 그는 한겨레에 남자답다는 고정관념을 깨자는 견해를 발표했다. "결혼을 앞두고 왜 꼭 내가 처자식을 먹여살려야 하나 라는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던 그는 결국 이 문제가 다른 남자들도 똑같이 겪고 있는 갈등이라는 것을 안 뒤부터 남성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한다.[9] 그는 "남자는 강하고 용감해야 하며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는 등의 고정관념은 남성우월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남성 스스로가 파놓은 함정"이라며 "남자들도 '남성답다'는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자유를 누려야 된다"고 주장했다.[9]

1995년 5월 한국남성연구회의 출범에 참여하였다. 정채기는 “남성연구회는 이 사회에서 남성이기 때문에 보는 피해와, 남성 중심 사회의 각종 편견과 고정 관념에서 나오는 부산물에 주목한다”라고 취지를 밝혔다.[10] 그는 "남성학은 지금까지 개인과 집단 차원에서 남성에게 지워졌던 남성다움의 굴레를 벗겨 남성으로 하여금 참된 자아를 찾도록 연구 교육하는 학문"이라 한다.[10]

2. 2. 2. 남성학, 남성운동 소개

정채기는 교육학 전공이었지만 개인적인 환경으로 남성성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면서 남성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작은 키와 약한 체구, 눈물 많고 감성적인 성향이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강한 남성상과 맞지 않아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1] 결혼 후 남편과 가장의 역할에 대한 부담감과 남성성에 대한 반감이 겹쳐 남성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1] 그는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학은 없는 것에 의문을 품고 1993년 일본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대학에서 남성학 연구 실태를 알아보고 자료를 수집했다.[5] 1997년에는 "남성문제의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6]

1990년대 초 미국, 프랑스 등지에 남성학이 있음을 알고 관련 자료를 분석, 일본미국의 남성학회와 남성운동 모임에 참석하고 미국 남성학회 정회원으로 선임되었다. 1994년 건국대학교 강사 시절 한국에 ‘남성학’을 처음 소개하고,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들이 가진 문제를 풀어주는 남성학은 왜 없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해외 남성학 자료를 번역, 논문을 발표했다.[8] ‘딸사랑 아버지모임’ 공동대표로 남성운동을 주도하며 초대~3대 공동대표를 맡았다. 언론, 강연 등을 통해 남성들도 권리를 찾고 좋은 아버지가 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여성학남성학을 통합적으로 접근하는 '젠더리즘'을 주장하며, 남성 문제가 해결되면 여성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8] '젠더연구 교육과정화에 대한 연구' 논문에서 여성학과 남성학을 함께 교육하는 '젠더연구' 전공 개설 필요성과 교육과정을 제시하며, 여성학에 대한 남성들의 거부감 해소, 남성들의 역차별 방지, 여성학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이유로 들었다.[8]

1994년 10월 한겨레에 남자다움의 고정관념을 깨자는 견해를 발표, "남자는 강하고 용감해야 하며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는 등의 고정관념은 남성우월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남성 스스로가 파놓은 함정"이라며 "남자들도 '남성답다'는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자유를 누려야 된다"고 주장했다.[9]

1995년 5월 한국남성연구회 출범에 참여, “남성연구회는 이 사회에서 남성이기 때문에 보는 피해와, 남성 중심 사회의 각종 편견과 고정 관념에서 나오는 부산물에 주목한다”라고 밝혔다.[10] 1997년 1월 21일 '아버지의 전화' 출범식에 참석,[11] 1998년 남성학연구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재선되었다.

1993년부터 강연과 칼럼을 통해 남성주의 운동을 소개하고 남자들도 스스로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일본남성 운동 저작들을 번역 소개하고 '남자도 사람이다' 등을 펴내며 남성학을 알렸다.[12] 그는 페미니즘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남성의 올바른 남성다움과 바람직한 남성상을 찾는 것이 남성학의 목표라고 말했다. 1995년 미국 남성학회(AMSA) 회원, 1997년 일본 Men's Lib 연구회 특별위원에 위촉되었다. 1997년부터 일본 남성 페스티벌에 9번 참석했다.[1]

1997년 5월 1일 아버지의 날 아버지모임 전국연합에서 주최한 제1회 전국 아버지 대회에서 <아버지헌장 및 실천운동>을 발표,[15] 남성에게도 육아 휴직을 허용할 것을 주장했지만 비판을 받았다. 그는 편부 가정의 존재를 들며 남성도 자녀를 키울 수 있다고 반박했다.

2. 2. 3. 남성운동 보급 활동

그는 본래 교육학이 전공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환경으로 남성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고, 남성학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작은 키와 약한 체구 탓에 친구들에 치이며 아웃사이더로 밀려났다. 눈물 많고 감성적인 성향도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강한 남성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1]'고 회상한다. 1993년 결혼을 앞두고는 콤플렉스가 절정에 달했는데, "앞날을 기약 못하는 시간강사 생활, 유년시절부터 겪어온 남성성에 대한 반감과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남편, 가장 역할에 대한 현실적인 결핍 등이 맞물리며 남자는 도대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밀려왔다.[1]"고 한다. 그는 여성학은 있는데 왜 남성의 문제에 관심 갖는 남성학은 없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일본 남성학회, 미국 남성학회와 일본, 미국의 남성운동 단체들을 연구, 관련 자료를 찾아봤다.

1993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그는 남성학 강좌가 설치된 일본의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 현 오카야마 시 오카야마대학 등을 찾아다니며 남성학 연구 실태 등을 알아보고 자료를 모으기도 했다.[5] 1997년 출간된 <남성학 입문>의 역자 머리말에서 정채기 교수는 “여성운동이 성과를 이루는 과정에서 남성들의 문제가 야기돼 1990년대에 ‘남성 문제시대’가 도래했다”며 “남성문제의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6]

그에 의하면 '주변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비슷하다 못해 다 똑같은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다.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학은 왜 없나'란 의문을 갖고 남성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해외의 남성학 사례들을 모으고 이론적인 근거들을 찾기 시작했다.[1] 1990년대 초 미국, 프랑스 등지에 남성학이 있음을 접하고 관련 자료들을 찾아 분석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일본미국의 남성학회와 남성운동 관련 모임에 참석하였고, 미국 남성학회의 정회원으로도 선임되었다.

1993년부터 그는 강연과 칼럼 등을 통해 남성주의 운동을 소개하고, 남자들도 스스로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정채기는 '남성학 입문'과 '남성학이란 무엇인가' 등 미국일본남성 운동 저작들을 번역소개하고 '남자도 사람이다'(집현전간) 등을 펴내며 강연회 등을 통해 국내에 남성학을 뿌리내리게 했다.[12] 1990년대 초 한국 사회에 여성은 일방적 피해자라는 견해와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등장하였다. 그도 가부장제를 비판하였지만 남성이 모두 가해자라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는 반대하였다.

그는“페미니즘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가운데, 남성의 올바른 남성다움과 바람직한 남성상을 찾으려는 것이 남성학의 목표”라고 말했다. 남성우월주의를 회복하려는 마초이즘(machoism)이 아니라 페미니즘의 파트너로서의 남성운동, 즉 매스큘리즘(masculism)이라는 것이다.[13] 정 교수는 “남성이 여성에게 자행해 온 잘못된 폭력은 인정한다”면서도 “여성학은 결코 절대선(善)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이 공격하는 한국 '가부장제'의 실체가 모호할뿐더러, 남성이 차별 받고 있는 사회적 현실에 대해서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3]

1995년 미국 남성학회(AMSA) 회원에 위촉되었다. 경향신문과의 한 인터뷰에서 정 교수는 일본의 경우 초창기 남성 개인에 대한 성찰이 주제로 다뤄지다가 올해는 남자의 네트워크 부분으로 옮겨가면서 남성들의 문제를 개인적 고민을 넘어 사회 전반적인 문제로 풀어가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설명했다.[1] 4월 12일 오전 10시 채널 23번의 심리탐구 <판도라의 상자>에 심리상담학 박사 박애선 등과 패널로 출연, 남녀의 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성차별 문제를 담론하였다.[14]

1997년 일본 Men's Lib 연구회의 특별위원에 위촉되었다. 1997년 여름 그는 제2회 일본 남성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참석하였다. 페스티벌에 처음 초청받은 1997년 2회 축제부터 9번을 줄곧 참석하였다.[1] 2005년 일본에서 열린 ‘제10회 일본 남성 페스티벌’에 참여했던 그는 일본에서도 역시 남성학이 아직 소외된 영역이지만 꾸준히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는 상황이 부러웠다고 했다.[1]

1997년 5월 1일 아버지의 날을 맞이하여 아버지모임 전국연합(공동대표 장경문.김덕근)에서 서울 은평구 불광동 한국여성개발원 대강당에서 제1회 전국 아버지 대회를 열었다.[15] 이때 정채기는 연사로 참석하여 <아버지헌장 및 실천운동>에 대해 발표하였다.[15] 그는 남성운동을 소개하면서, 아버지에게도 자녀 양육에 참여할 기회를 줄 것을 역설하고, 남성에게도 육아 휴직을 허용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남성이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겠느냐는 반론과 함께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는 편부 가정의 존재도 설명하고 남성도 자녀를 키울 수 있다고 반박했다.

1994년부터 1997년까지는 경기대학교에서 여성학 강사로 출강하기도 했다. 그는 “남성 대다수는 급변하는 현실 앞에서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남녀간 권력 관계의 변화를 수용하느냐 마느냐는 별개 문제이다.[16]”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남성에게도 여성성과 섬세함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1996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21세기에는 신축성 있고 가역성 있는 새로운 남성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존 남성성에서 벗어나, 이상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신화 속의 헤르마프로디토스(양성 神)처럼 양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10] 그러나 남자다움, 남성성을 비판하자 역으로 여자같은 남자, 중성화를 옹호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정채기는 21세기의 새로운 남성성을 한국의 남성들에게 부여하기 위해, 이미 구미의 남성학에서 깊이 다루고 있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연구하고 해결해 나가겠다고 밝혔다.[10] 그에 의하면 "△성차별주의에 편승했던 기득권을 포기하고 이를 고발하고 시정해 나간다 △가부장 제도로 인한 부담과 피해를 규명한다 △페미니즘 안의 위계와 편향을 분석하고 비판한다."고 비전을 제시했다.[10] 그는 사람 개개인간의 차이점을 무시하고 남자다움,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것을 강요하는 것이야 말로 심각한 폭력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페미니즘 내에서 여성 해방론이 대두되었듯이 남성들도 편견과 굴레와 억압, 권위주의와 위계 서열에서 해방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남성은 무조건 강자라는 편견을 가진 학계와 일반인들로부터 외면당하였다. 1994년 5월 건국대학교에서 남성학 특강을 했으며, 건국대 남성학 특강을 시작으로, 대학 강의시간 외에 각 대학교, 시민단체, 지역 문화단체의 남성학 순회 특강을 다녔다.

2. 2. 4. 새로운 남성론 제창

그는 교육학이 전공이었지만, 개인적인 환경으로 남성성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작은 키와 약한 체구 탓에 친구들에게 치이며 아웃사이더로 밀려났다. 눈물 많고 감성적인 성향도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강한 남성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1993년 결혼을 앞두고는 콤플렉스가 절정에 달했다. 앞날을 기약 못하는 시간강사 생활, 유년 시절부터 겪어온 남성성에 대한 반감과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남편, 가장 역할에 대한 현실적인 결핍 등이 맞물리며 남자는 도대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밀려왔다.[1]'고 회고한다. 그는 여성학은 있는데 왜 남성의 문제에 관심 갖는 남성학은 없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일본 남성학회, 미국 남성학회와 일본, 미국의 남성운동 단체들을 연구, 관련 자료를 찾아봤다.

1993년 여름 방학, 그는 남성학 강좌가 설치된 일본의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 현 오카야마 시 오카야마대학 등을 찾아다니며 남성학 연구 실태 등을 알아보고 자료를 모았다.[5] 1997년 출간된 <남성학 입문>의 역자 머리말에서 정채기 교수는 “여성운동이 성과를 이루는 과정에서 남성들의 문제가 야기돼 1990년대에 ‘남성 문제 시대’가 도래했다”며 “남성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6]

그는 '주변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비슷하다 못해 다 똑같은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다.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학은 왜 없나'란 의문을 갖고 남성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해외의 남성학 사례들을 모으고 이론적인 근거들을 찾기 시작했다.[1] 1990년대 초 미국, 프랑스 등지에 남성학이 있음을 접하고 관련 자료들을 분석하였다. 이후 그는 일본미국의 남성학회와 남성운동 관련 모임에 참석하였고, 미국 남성학회의 정회원으로도 선임되었다.

건국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시간강사, 교직과 강사로 재직 중이던 1993년 서동미와 결혼하였다. 첫 아들이 태어나자 그는 아들이 7살 될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육아일기를 썼다.[4] 둘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에도 그는 직접 1년간 육아 일기를 썼다.

1995년 5월 한국남성연구회를 조직했고, 1997년 5월 남성학연구회를 결성했다. 그는 '스스로를 옥죄던 '장남 장손 가장'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교육학자로서 여성운동이라는 흐름 속에서 남성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남성의 삶은 무엇인지 연구하고자 했다.'고 밝히면서, 남성 운동에 투신하게 된 배경으로 "몇 년 전 “오빠가 하숙하며 편하게 학교 다니는 동안 나는 남동생 둘을 맡아 밥하고 살림하며 공부했다. 부모님과 오빠가 당연하다는 듯 나에게 그 일을 맡긴 게 사무친다”는 여동생의 말을 듣고 느꼈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17]'"고 밝혔다. 정 회장은 "사람들은 처음 만나면 곧 '아이가 있습니까, 아들입니까 딸입니까'하고 묻는다.[17]"고 하였다.

그는 '그런 질문이 싫어서 얼버무리면 이상한 눈길로 보며 '딸인 모양이죠'라고 한다. 우리 의식 깊은 곳의 철학이 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17] 이후 그는 아들들에게 “너는 남자니까 이렇게 해야 돼”란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한다.[17] “내 아들도 평생 다른 사람의 딸들과 어울려 살 거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아름답지 못한 관계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아버지들이 아들을 잘 키워야 한다. 엄마, 이모, 여자 친구, 부인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는 게 정말 중요하다.” 부인이나 딸이 외출해 하루 종일 굶었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남성들의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그는 `내가 잠시만 없어도 집안이 엉망이 된다'며 스스로를 얽매는 여성들의 생각도 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17] 그는 강연과 인터뷰 등을 통해 아들, 딸 가리고 구별하는 것은 편견임을 역설하였고, 남아 선호 사상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2. 2. 5. 한국남성학연구회 결성

1995년 5월 한국남성연구회를 조직했고, 1997년 5월 남성학연구회를 결성했다.[17] 그는 스스로를 옥죄던 '장남, 장손, 가장'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교육학자로서 여성운동이라는 흐름 속에서 남성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남성의 삶은 무엇인지 연구하고자 남성 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는 "몇 년 전 “오빠가 하숙하며 편하게 학교 다니는 동안 나는 남동생 둘을 맡아 밥하고 살림하며 공부했다. 부모님과 오빠가 당연하다는 듯 나에게 그 일을 맡긴 게 사무친다”는 여동생의 말을 듣고 느꼈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17]'"고 밝혔다.

정채기는 "사람들은 처음 만나면 곧 '아이가 있습니까, 아들입니까 딸입니까'하고 묻는다[17]"고 하였다. 그는 '그런 질문이 싫어서 얼버무리면 이상한 눈길로 보며 '딸인 모양이죠'라고 한다. 우리 의식 깊은 곳의 철학이 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17] 이후 그는 아들들에게 “너는 남자니까 이렇게 해야 돼”란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한다.[17] “내 아들도 평생 다른 사람의 딸들과 어울려 살 거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아름답지 못한 관계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아버지들이 아들을 잘 키워야 한다. 엄마, 이모, 여자 친구, 부인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는 게 정말 중요하다.” 부인이나 딸이 외출해 하루 종일 굶었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남성들의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그는 '내가 잠시만 없어도 집안이 엉망이 된다'며 스스로를 얽매는 여성들의 생각도 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17] 그는 강연과 인터뷰 등을 통해 아들, 딸 가리고 구별하는 것은 편견임을 역설하였고, 남아 선호 사상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2. 3. 남성주의 운동과 남성 인권 운동

정채기는 교육학 전공이었으나, 개인적인 경험으로 남성성에 대한 의문을 품고 남성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여성학은 있지만 남성학은 없다는 점에 의문을 품고, 일본미국의 남성학회 및 남성운동 단체들을 연구하며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1] 1993년에는 일본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대학을 방문하여 남성학 연구 실태를 조사했다.[5] 1997년에는 <남성학 입문>을 통해 "남성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6]

1990년대 초, 그는 미국, 프랑스 등에서 남성학을 접하고 관련 자료를 분석했으며, 일본미국의 남성학회 및 남성운동 모임에 참석하고 미국 남성학회 정회원이 되었다.

1999년, 그는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하며, 명함으로 인한 비교와 위축, 여성적인 것에 대한 거부가 남성을 소외시킨다고 비판했다.[18] 또한, 헛된 권위주의와 헛기침 문화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채기는 이혼을 자녀 문제와 사회적 폐해를 야기하는 잘못된 것으로 보았다.[19] 반면, 성재기이혼을 당연한 권리로 옹호하며, 결혼과 가정의 이름으로 남성을 구속하는 것을 비판했다. 정채기는 "최소한으로 못한 결혼은 있어도 최대한으로 잘한 이혼은 없다"고 주장한 반면,[19] 성재기는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할 수 있고, 이혼도 밥 먹듯, 물 마시듯 쉬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2. 3. 1. 남성 해방론

그는 교육학이 전공이었지만, 개인적인 환경으로 남성성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면서 남성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작은 키와 약한 체구로 인해 사회가 요구하는 강한 남성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고민을 했으며, 결혼을 앞두고 남편과 가장의 역할에 대한 부담감으로 남성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1] 그는 여성학은 존재하지만 남성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남성학은 없다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고, 일본미국의 남성학회 및 남성운동 단체들을 연구하며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다.

1993년 여름 방학, 그는 남성학 강좌가 개설된 일본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 현 오카야마 시 오카야마대학 등을 방문하여 남성학 연구 실태를 파악하고 자료를 수집했다.[5] 1997년 출간된 <남성학 입문>에서 그는 "여성운동이 성과를 이루는 과정에서 남성들의 문제가 야기돼 1990년대에 '남성 문제 시대'가 도래했다"며 "남성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6]

그는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남성들이 공통적인 문제에 시달리고 있음을 확인하고,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학은 왜 없나'라는 의문을 품고 남성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자 했다. 1990년대 초 미국, 프랑스 등에서 남성학의 존재를 확인하고 관련 자료를 분석했으며, 일본미국의 남성학회 및 남성운동 모임에 참석하고 미국 남성학회의 정회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1999년 그는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명함을 통해 서로 비교하고 위축되는 문화를 비판하며, 여성적인 것을 거부하는 남성들의 태도가 사회와 가정에서 남성 스스로를 도태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성운동은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이나 수필집 살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18]

그는 헛된 권위주의와 헛기침 문화를 타파하고, 남성들 스스로 권위의 벽을 허물어야 남자들 역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채기는 이혼을 자녀 문제와 사회적 폐해를 야기하는 잘못된 것으로 보았다.[19] 반면 성재기이혼을 당연한 권리로 옹호하며, 결혼과 가정의 이름으로 남성을 구속하는 것을 비판했다. 정채기는 "최소한으로 못한 결혼은 있어도 최대한으로 잘한 이혼은 없다"고 주장한 반면,[19] 성재기는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할 수 있고, 이혼도 밥 먹듯, 물 마시듯 쉬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성학이란 한마디로 진정한 남성다움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정의했다.[12] '진정한 남성다움'은 '잘못된 남성다움'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며, 페미니즘이 비판해 온 가부장적 남성다움에 대한 비판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12] 1998년 인터뷰에서 그는 "남성학에도 분파가 많아 반페미니즘부터 친페미니즘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지만 최근에는 여성학남성학이 통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며 "성학(genderstudies)이라는 학문이 등장한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밝혔다.[12] 그는 남성 인권 운동 외에도 좋은 아버지 되기, 친구 같은 아버지, 다정한 아버지, 권위주의 버리기 등을 주제로 연구와 강연을 진행했다.

1998년 한국 아버지 재단 연구분과 위원장을 맡았으며, 같은 해 9월 일본 도쿄 아다치구에서 열린 일본 남성 페스티발에 참석하여 'IMF 체제하 한국의 남성: 부권 실상과 허상'을 발표했다.[20] 그는 변화하는 시대에 대해 "남성의 소외 현상은 한국 사회만의 특이한 현상이 아니며, 현대 사회에서 구성원들의 역할이 전체적으로 변하는 물결의 일환"이라며 "가장을 비롯한 가족들이 고립된 벽에 갇히지 말고 서로의 고민과 불만, 집안일까지 적극적으로 털어놓고 나누어야 한다"고 조언했다.[21]

1999년 11월 16일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주최한 '10대의 성산업 유입과 남성 성문화' 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하여 문화적 측면에 대해 발제했다.[23]

2. 3. 2. 남성주의 운동

그는 본래 교육학이 전공이었으나 개인적인 환경으로 남성성에 대한 의문을 품고 남성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학은 없는 것에 의문을 제기, 일본미국의 남성학회, 남성운동 단체들을 연구했다.[1] 1993년 일본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대학을 방문하여 남성학 연구 실태를 조사하고 자료를 수집했다.[5] 1997년 <남성학 입문>에서 "남성문제의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6]

1990년대 초 미국, 프랑스 등지에 남성학이 있음을 알고 관련 자료를 분석, 일본미국의 남성학회와 남성운동 모임에 참석, 미국 남성학회 정회원이 되었다.

1999년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했다. 명함으로 서로 비교하고 위축되며, 여성적인 것을 거부하는 것이 남성을 소외시킨다고 보았다.[18] 그는 권위주의 타파를 주장했다.

정채기는 이혼은 잘못된 것이며 자녀 문제와 사회적 폐해를 야기한다고 지적했다.[19] 성재기이혼은 당연한 권리이며, 남자들도 가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반박했다. 정채기는 "최소한으로 못한 결혼은 있어도 최대한으로 잘한 이혼은 없다.[19]"고 했다. 성재기는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할 수 있고, 이혼도 쉬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성학이란 진정한 남성다움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했다.[12] 1998년 인터뷰에서 "여성학남성학이 통합되는 경향"이라고 밝혔다.[12] 그는 남성 인권 운동 외에도 좋은 아버지 되기, 권위주의 버리기 등을 주제로 연구, 강연했다.

1998년 한국 아버지 재단 연구분과 위원장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일본 남성 페스티발에서 'IMF체 제하 한국의 남성: 부권 실상과 허상'을 발표했다.[20] 그는“가족들이 고립된 벽에 갇히지 말고 서로의 고민과 불만, 집안일까지 적극적으로 털어놓고 나누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21]

1999년 11월 16일 한국성폭력상담소 주최 토론회에 패널로 참석, 문화적 측면에 대해 발제하였다.[22][23] 11월 27일 한국남성협의회 조직에 참여, "미약하지만 우리 사회에도 남성운동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밝혔다.[24] 한국남성운동협의회 공동대표에 선출되었으나 의견 차이로 사퇴했다.[25]

한국남성협의회 공동회장으로 내정되었다가 사퇴한 정채기는 가부장제로 인한 여성의 억압을 인정하지만 남성 역시 억압을 받으며, 남성운동과 페미니즘은 상호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2]

2. 3. 3. 한국남성협의회 창립에 참여

1999년 11월 발족된 한국남성운동협의회는 여성운동의 지나친 활성화가 오히려 남성을 역차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26] 한국남성운동협의회는 2000년 1월 남녀공동 징병제 헌법소원을 제청하면서 “진정한 남녀평등을 원한다면 여성도 군대에 가야 한다”는 논리를 펴는 등 반(反) 페미니즘적 성향이 짙은 남성운동을 펴고 있다.[26] 정채기는“이러한 논리에 적극 동의할 수는 없지만 남성 역시 자본주의나 가부장제와 같은 사회 구조 안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하였다.[26]

그는 남성은 가부장제의 수혜자라는 주장에 대해, 현재의 남성들은 가부장제의 수혜자가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라고 반박하였다. 그는 “진정한 남녀평등 사회를 만들려면 남성에게만 그 책임을 물을 것이 아니라 남성 지배문화를 가능케 한 사회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26]

2. 3. 4. 남녀 공동 징병제 여론

1999년 11월 발족된 한국남성운동협의회(회장 이경수)는 여성운동의 지나친 활성화가 남성을 역차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했다.[26] 한국남성운동협의회는 2000년 1월 남녀공동 징병제 헌법소원을 제청하면서 "진정한 남녀평등을 원한다면 여성도 군대에 가야 한다"는 논리를 펴는 등 반(反) 페미니즘적 성향이 짙은 남성운동을 폈다.[26] 정채기는 "이러한 논리에 적극 동의할 수는 없지만 남성 역시 자본주의나 가부장제와 같은 사회 구조 안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하였다.[26]

1999년 10월부터 2001년 10월까지 대한민국의 일부 여성계를 중심으로 군 가산점 폐지 여론이 등장하자 그는 한지환, 김재경, 이경수, 성재기 등과 함께 군 가산점 폐지를 반대하였다.

한편 남녀 공동 병역 운동이 추진되자 정채기는 "이러한 논리에 적극 동의할 수는 없지만 남성 역시 자본주의나 가부장제와 같은 사회 구조안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하였다.[26] 그는 남성은 가부장제의 수혜자라는 주장에 대해, 현재의 남성들은 가부장제의 수혜자가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라고 반박하였다. 그는 "진정한 남녀평등 사회를 만들려면 남성에게만 그 책임을 물을 것이 아니라 남성 지배문화를 가능케 한 사회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26] 그러나 2001년 10월 군 가산점은 헌법재판소에 위헌소송이 걸리고 그해 12월 위헌 판결을 받고 최종 폐지되었다.

이후 그는 성재기 등과 군 가산점 부활 운동에 참여했다. 군 가산점 폐지 이후 그는 중앙일보2005년 남녀 공동 징병제를 주장했다.[27] 그는 "남녀 공동 징집을 논의할 시기가 됐다고 본다"고 밝혔다.[27]

2. 3. 5. 교육, 사회 활동

그는 본래 교육학이 전공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환경 등으로 남성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고, 남성학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되었다.[1] 1993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그는 남성학 강좌가 설치된 일본의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 현 오카야마 시 오카야마대학 등을 찾아다니며 남성학 연구 실태 등을 알아보고 자료를 모으기도 했다.[5] 1990년대 초 미국, 프랑스 등지에 남성학이 있음을 접하고 관련 자료들을 찾아 분석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일본미국의 남성학회와 남성운동 관련 모임에 참석하였고, 미국 남성학회의 정회원으로도 선임되었다.

건국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시간강사, 교직과 강사로 재직 중이던 1993년 서동미와 결혼하였다. 1999년 그는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명함 등을 주고 받는 것을 통해 서로 비교하고 위축된다는 점과, 여성적인 것이라고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바로 남성들 스스로 사회와 가정에서 도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봤다.[18] 한편 그는 교수로도 계속 재직, 건국대학교 대학원과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강사, 보육교사교육원 교수 등을 역임했다.

그는 헛된 권위주의와 헛기침 문화부터 타파하고 헛된 권위의 벽을 남자들 스스로 허물어야 남자들 역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정채기는 이혼은 잘못된 것이며 자녀들 문제, 사회적 폐해와 손실이라고 지적했다.[19] 그에 대해 성재기이혼은 당연한 권리라고 응수했다. 정채기는 "애초 남녀가 교제할 때 그렇게 ‘영원’의 이름으로 죽고 못 살 것 같이 하였던 언약과 행위들은 무엇이며, 수많은 하객들을 증인으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리라 맹세해 놓고, 그렇게 철천지원수 같이 갈라서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럴 바에는 당초 공개적인 맹세와 약속을 하지나 말든지, 아무리 남녀 간의 사랑의 화학반응식 유효기간이 3년 전후, 아니 이제는 그보다 더 짧다는 긍정이나 부정도 곤란한 보고가 있기로서니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당사자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 와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녀들은 무슨 봉변인가! 그리고 사회적인 폐해와 손실 등은 또 얼마인가?[19]"라고 하였다. 성재기는 무조건 가정을 지키고, 가족,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만 안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반박했다. 반드시 가정을 지켜야 될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정채기는 아름답게 영원할 것이라 여겼던 부부가족 관계의 파괴에, 어떠한 미사여구나 변명을 전제하지 않는 가운데 “최소한으로 못한 결혼은 있어도 최대한으로 잘한 이혼은 없다.[19]"고 하였다. 성재기는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할 수 있고, 이혼도 밥먹듯, 물 마시듯 쉬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0년 초부터 그는 여성운동가들의 남성 가해자론에 반박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가부장제에 대해서도 비판을 계속하였다. 2002년 2월 23일 남성운동가들과 '한국남성운동협의회'를 조직하고 공동대표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33] 그는 남성들이 군 복무로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며,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다. 군 가산점 외에도 군 복무로 인한 시간적 손해에 대한 보상을 해줄 것과 병사들의 월급을 현실화할 것, 영내 생활 개선 등을 요구하였다.

군 가산점에 대한 여성계의 위헌론, 위법론 주장에 맞서 군 가산점은 남자가 군 복무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피해를 보상하는 방안이라며 맞섰다. 그러나 2002년 2월 23일 군필 남성의 가산점 제도에 대해 위헌 판결이 났다. 이에 그는 "헌재의 이번 결정은 한국 사회에서 남성들이 군 복무로 인해 보는 사회적 피해를 도외시한 결정"[34]이라며 반발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한지환, 성재기, 김재경 등과 함께 군 가산점을 반대하는 여성계와 논쟁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성부, 여성계와의 전면전, 투쟁을 선언한 성재기 등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2. 3. 6. 군 가산점 부활론

정채기는 군 가산점 부활론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원문 소스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남성학 연구자로서 남성의 권익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2. 3. 7. 남성 인권 보호 운동

그는 본래 교육학이 전공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환경으로 남성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고, 남성학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작은 키와 약한 체구, 눈물 많고 감성적인 성향 탓에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강한 남성상에는 어울리지 않아 아웃사이더로 밀려났다고 한다.[1] 1993년 결혼을 앞두고는 콤플렉스가 절정에 달했는데, 시간강사 생활, 남성성에 대한 반감과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남편, 가장 역할에 대한 현실적인 결핍 등이 맞물리며 남자는 도대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밀려왔다고 한다.[1] 그는 여성학은 있는데 왜 남성의 문제에 관심 갖는 남성학은 없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일본 남성학회, 미국 남성학회와 일본, 미국의 남성운동 단체들을 연구, 관련 자료를 찾아봤다.

1993년 여름 방학, 그는 남성학 강좌가 설치된 일본의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 현 오카야마 시 오카야마대학 등을 찾아다니며 남성학 연구 실태 등을 알아보고 자료를 모으기도 했다.[5] 1997년 출간된 <남성학 입문>의 역자 머리말에서 정채기 교수는 “여성운동이 성과를 이루는 과정에서 남성들의 문제가 야기돼 1990년대에 ‘남성 문제시대’가 도래했다”며 “남성문제의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6]

그에 의하면 주변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비슷하다 못해 다 똑같은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학은 왜 없나'란 의문을 갖고 남성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해외의 남성학 사례들을 모으고 이론적인 근거들을 찾기 시작했다.[1] 1990년대 초 미국, 프랑스 등지에 남성학이 있음을 접하고 관련 자료들을 찾아 분석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일본미국의 남성학회와 남성운동 관련 모임에 참석하였고, 미국 남성학회의 정회원으로도 선임되었다.

1999년 그는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명함 등을 주고받는 것을 통해 서로 비교하고 위축된다는 점과, 여성적인 것이라고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바로 남성들 스스로 사회와 가정에서 도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봤다. 그는 “남성운동은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이나 수필집 살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명함에 새겨진 직업을 비교하며 위축되고, 여성이나 읽는 수필집은 남성의 권위를 해친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의 문화 때문에 남성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것이다.[18]

그는 헛된 권위주의와 헛기침 문화부터 타파하고 헛된 권위의 벽을 남자들 스스로 허물어야 남자들 역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정채기는 이혼은 잘못된 것이며 자녀들 문제, 사회적 폐해와 손실이라고 지적했다.[19] 그에 대해 성재기이혼은 당연한 권리라고 응수했다. 성재기는 결혼, 가정의 이름으로 남자들을 구속하고 속박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이혼은 밥 먹듯, 떡 먹듯이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채기는 "애초 남녀가 교제할 때 그렇게 ‘영원’의 이름으로 죽고 못 살 것 같이 하였던 언약과 행위들은 무엇이며, 수많은 하객들을 증인으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리라 맹세해 놓고, 그렇게 철천지원수같이 갈라서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럴 바에는 당초 공개적인 맹세와 약속을 하지나 말든지, 아무리 남녀 간의 사랑의 화학반응식 유효기간이 3년 전후, 아니 이제는 그보다 더 짧다는 긍정이나 부정도 곤란한 보고가 있기로서니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당사자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 와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녀들은 무슨 봉변인가! 그리고 사회적인 폐해와 손실 등은 또 얼마인가?[19]"라고 하였다. 성재기는 무조건 가정을 지키고, 가족,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만 안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반박했다. 반드시 가정을 지켜야 될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성재기는 남자들도 가정, 가족에서 벗어나고, 의무와 책임감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인간, 자유인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정채기는 아름답게 영원할 것이라 여겼던 부부가족 관계의 파괴에, 어떠한 미사여구나 변명을 전제하지 않는 가운데 “최소한으로 못한 결혼은 있어도 최대한으로 잘한 이혼은 없다.[19]"고 하였다. 성재기는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할 수 있고, 이혼도 밥 먹듯, 물 마시듯 쉬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재기에 의하면 모든 남자가 아버지가 될 의무는 없다며,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남자, 한 사람의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남성학이란 한마디로 진정한 남성다움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정리했다.[12] '진정한 남성다움'은 '잘못된 남성다움'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이 비판해 온 가부장적 남성다움에 대한 비판과 맥을 같이하는 면도 있다.[12] 1998년의 인터뷰에서 그는 "남성학에도 분파가 많아 반페미니즘부터 친페미니즘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지만 최근에는 여성학남성학이 통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며 "성학(genderstudies)이라는 학문이 등장한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밝혔다.[12] 그는 남성 인권 운동 외에도 좋은 아버지 되기 운동, 친구 같은 아버지, 다정한 아버지, 권위주의 버리기 등의 주제로 연구, 강연을 하기도 했다.

1998년 한국 아버지 재단 연구분과 위원장이 되었다. 1998년 9월 일본 도쿄 아다치구 아다치구 여성종합센터에서 열린 일본 남성 페스티벌에 참석, 이때 그는 'IMF체 제하 한국의 남성: 부권 실상과 허상'을 발표하였다.[20] 그는 변화하는 시대에 대해 “남성의 소외 현상은 한국 사회만의 특이한 현상이 아니며, 현대 사회에서 구성원들의 역할이 전체적으로 변하는 물결의 일환”이라며 “가장을 비롯한 가족들이 고립된 벽에 갇히지 말고 서로의 고민과 불만, 집안일까지 적극적으로 털어놓고 나누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21]

1999년 11월 16일 오후 2시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서울 세종문화회관 소회의장에서 주최한 「10대의 성산업 유입과 남성 성문화」 토론회에 패널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다.[22] 이때 정채기 한국남성학연구회 회장이 문화적 측면에 대해 발제하였다.[23]

2. 4. 아버지 운동

그는 본래 교육학이 전공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환경으로 남성성에 대해 의문을 품고, 남성학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는 작은 키와 약한 체구, 눈물 많고 감성적인 성향이 사회가 요구하는 강한 남성상과 맞지 않아 콤플렉스를 느꼈다고 회고한다.[1] 1993년 결혼을 앞두고 시간강사 생활, 남성성에 대한 반감, 가장 역할에 대한 부담감 등으로 남성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느꼈다.[1] 그는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학은 없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일본미국의 남성학회 및 남성운동 단체들을 연구하며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다.

1993년 여름, 남성학 강좌가 설치된 일본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대학을 방문하여 남성학 연구 실태를 알아보고 자료를 수집했다.[5] 1997년 <남성학 입문>에서 "1990년대에 '남성 문제 시대'가 도래했다"며 남성 문제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했다.[6]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남성들이 비슷한 문제에 시달리고 있음을 확인하고, 남성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해야겠다고 생각했다.[1] 1990년대미국, 프랑스 등지의 남성학을 접하고 자료를 분석했으며, 일본미국의 남성학회 및 남성운동 모임에 참석하고 미국 남성학회 정회원으로도 선임되었다.

건국대학교 시간강사로 재직 중이던 1993년 서동미와 결혼, 두 아들의 육아일기를 썼다.[4]

1999년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하며, 명함을 통해 서로 비교하고 위축된다는 점과 여성적인 것을 거부하는 것이 남성들을 사회와 가정에서 도태시킨다고 보았다. 그는 "남성운동은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이나 수필집 살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18] 헛된 권위주의와 헛기침 문화를 타파하고 권위의 벽을 남자들 스스로 허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혼에 대해서는 자녀 문제와 사회적 폐해를 들어 잘못된 것이라 지적했다.[19] 성재기이혼은 당연한 권리이며, 결혼, 가정의 이름으로 남자들을 구속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반박했다. 정채기는 "수많은 하객들을 증인으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리라 맹세해 놓고, 그렇게 철천지원수 같이 갈라서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며, 이혼으로 인한 자녀들의 고통과 사회적 손실을 지적했다.[19] 성재기가정을 지켜야 할 의무는 없으며, 남자들도 의무와 책임감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채기는 “최소한으로 못한 결혼은 있어도 최대한으로 잘한 이혼은 없다.[19]"고 하였다. 성재기이혼도 밥먹듯 쉬워야 하며, 모든 남자가 아버지가 될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2. 4. 1. 딸사랑 아버지 모임 참여

2002년 6월 22일 서울 안국동 철학카페 느티나무에서 ‘딸사랑 아버지모임’이 발족했다.[37] 모임에는 아들만 둔 정채기(한국남성학연구회장)가 회원으로 참여했다.[37] 정채기는 딸사랑 아버지 모임의 창립 회원으로 참여하였고 곧 공동대표로 추대되었다. 이때 그는 딸을 당당하게 키우는 법 4가지를 비전으로 제시하기도 했다.[39]

2002년 7월 1일 한국여성단체연합은 ‘딸사랑ㆍ아들사랑문화한마당’을 열었다.[40] 그는 딸사랑아버지모임의 공동대표 자격으로 7월 1일 호주제 폐지 집회에 참여하여, 남녀 평등한 사회를 위해서는 호주제와 남아 선호 사상을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4년부터 호주제 폐지 여론이 나타나자 정채기는 호주제 폐지에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정채기 교수는 1990년대에 증가한 중년남성의 과로사나 가정 내에서의 아버지 부재현상을 지적했다. 가정 내에서 아버지의 권위 실추에 대한 대책으로 아버지의 역할 회복을 위해 아버지 운동단체가 탄생했다는 것이다.[8] 2001년부터 그는 아버지도 육아휴직을 내고 자녀의 양육에 참여하도록 사회가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버지가 자녀와 함께 할 수 있도록 정부, 사회, 일터에서 남성 직장인을 배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아버지 육아참여론은 2010년 이후에 가서야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 육아참여론은 남성이 가족의 주 생계를 책임져야 된다는 견해가 압도적이라 비판받았다. 그러나 일부 공공기관 종사자, 학자, 공무원 등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남성도 육아휴직을 사용함으로써 소극적이나마 서서히 호응하게 되었다.

2003년 8월 19일에는 정송 등과 함께 유아영재창의성지도 자격검정평가를 주관하였다.

정 교수는 아들을 키우는 동안 “사내애가 돼가지고 왜 그러니”라고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했다.[41] 그는 남자들도 마음껏 울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2004년 8월 8일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저 자신도 어머니와 오랜만에 전화할 때면 가슴이 짠한 게 눈물이 나는 걸요. 제가 잘 울듯이, 제 아들이 울 때도 맘껏 울게 내버려 둡니다. ‘내 아이는 마초로 키울 수 없다’라는 저작에서 카이저 교수는 경고하고 있어요. 아들에게 ‘사내대장부는 우는 게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이 그를 마초가 되게 하는 단초라고요. 그런데 사내애가 계집애처럼 질질 짜선 안 된다는 식의 잘못된 남성다움에 대한 강요는 21세기에도 뿌리 깊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노인들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네 젊은 부모들도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우리 아들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게 문제죠.[41]'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남자가 눈물 흘리면 안 된다는 발상이 바로 마초주의적 가치관을 자녀에게 주입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정 교수는 아들에게도 “남자도 가슴이 여릴 수 있고, 가정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동시에 “백마 탄 왕자 역을 자임하지 말라”고 강조하였다.[41] 그에 의하면 여성을 보호하고 돌봐줘야 한다는 생각이 또 다른 여성차별을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41]

2. 4. 2. 남성의 눈물론

그는 교육학이 전공이었지만, 개인적인 환경으로 남성성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는 작은 키와 약한 체구, 눈물 많고 감성적인 성향이 사회가 요구하는 강한 남성상과 맞지 않아 콤플렉스를 느꼈다.[1] 1993년 결혼을 앞두고 시간강사 생활, 남성성에 대한 반감, 가장 역할에 대한 부담감 등으로 남성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느꼈다.[1] 그는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학은 없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일본미국의 남성학회 및 남성운동 단체들을 연구하며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다.[1][5]

1993년 여름 방학, 그는 남성학 강좌가 있는 일본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대학을 방문하여 남성학 연구 실태를 알아보고 자료를 수집했다.[5] 1997년 출간된 <남성학 입문>에서 그는 "여성운동의 성과 과정에서 남성들의 문제가 야기돼 1990년대에 '남성 문제 시대'가 도래했다"며 남성 문제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했다.[6] 그는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남성들이 비슷한 문제에 시달리고 있음을 확인하고, 남성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해야겠다고 생각했다.[1] 1990년대미국, 프랑스 등지의 남성학을 접하고 관련 자료를 분석했으며, 일본미국의 남성학회 및 남성운동 모임에 참석하고 미국 남성학회 정회원으로도 선임되었다.

1999년 그는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했다. 명함을 통해 서로 비교하고 위축된다는 점과, 여성적인 것을 거부하는 것이 남성들을 사회와 가정에서 도태시킨다고 보았다. 그는 "남성운동은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이나 수필집 살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18] 그는 헛된 권위주의와 헛기침 문화를 타파하고 권위의 벽을 남자들 스스로 허물어야 남자들 역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자들도 마음껏 울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4년 8월 8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내 아이는 마초로 키울 수 없다’라는 저작에서 카이저 교수는 경고하고 있어요. 아들에게 ‘사내대장부는 우는 게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이 그를 마초가 되게 하는 단초라고요. 그런데 사내애가 계집애처럼 질질 짜선 안 된다는 식의 잘못된 남성다움에 대한 강요는 21세기에도 뿌리깊게 나타나고 있습니다.[41]'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남자가 눈물을 흘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마초주의적 가치관을 자녀에게 주입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2. 4. 3. 하얀 리본 운동 주최

2002년 6월 22일 서울 안국동 철학카페 느티나무에서 ‘딸사랑 아버지모임’이 발족했다.[37] 모임에는 아들만 둔 정채기(한국남성학연구회장), 정수복(사회운동연구소장)이 회원으로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이들의 회원 가입은 딸이 없어도 남녀평등 실현 의지를 갖고 있으면 회원 자격이 있다는 회원들의 양해로 이뤄졌다.[37] 정채기는 "발족 배경 및 취지 설명[38]"을 발표했고, 딸사랑 아버지 모임의 창립 회원으로 참여하여 곧 공동대표로 추대되었다. 이때 그는 딸을 당당하게 키우는 법 4가지를 비전으로 제시했다.[39]

2002년 7월 1일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야외무대에서 ‘딸사랑 아버지모임’(회장 정채기, 김병후) 회원들의 자녀 등을 초청해 ‘딸사랑ㆍ아들사랑 문화 한마당’을 열었다.[40] 그는 딸사랑 아버지모임의 공동대표 자격으로 호주제 폐지 집회에 참여했다. 그는 남녀 평등한 사회를 위해서는 호주제와 남아 선호 사상을 척결해야 한다고 보았다. 2004년부터 호주제 폐지 여론이 나타나자 정채기, 한지환 등은 호주제 폐지에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성재기는 형식적이고 허울뿐인 아버지, 남편으로서의 지위조차 없애려 한다고 반발하였다.

정채기 교수는 1990년대에 증가한 중년 남성의 과로사나 가정 내 아버지 부재 현상을 아버지 운동 단체 설립의 원인으로 꼽았다. 그는 가정 내에서 아버지의 권위 실추에 대한 대책으로 아버지의 역할 회복을 위해 이러한 단체들이 탄생했다고 보았다.[8] 2001년부터 그는 아버지도 육아휴직을 내고 자녀 양육에 참여하도록 사회가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버지가 자녀와 함께 할 수 있도록 정부, 사회, 일터에서 남성 직장인을 배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아버지 육아 참여론은 2010년 이후에 가서야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 육아 참여론은 남성이 가족의 주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견해가 압도적이라 비판받았다. 그러나 일부 공공기관 종사자, 학자, 공무원 등은 2000년대 초반부터 남성도 육아휴직을 사용함으로써 소극적이나마 서서히 호응했다.

2003년 8월 19일에는 정송 등과 함께 유아영재창의성지도 자격검정평가를 주관하였다.

2. 5. 방송 토론 활동

1999년 정채기는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명함 등을 주고 받는 것을 통해 서로 비교하고 위축된다는 점과, 여성적인 것이라고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바로 남성들 스스로 사회와 가정에서 도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았다.[18]

그는 “남성운동은 명함 안주고 안받기 운동이나 수필집 살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명함에 새겨진 직업을 비교하며 위축되고, 여성이나 읽는 수필집은 남성의 권위를 해친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의 문화 때문에 남성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것이다.[18] 한편 그는 건국대학교 대학원과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강사, 보육교사교육원 교수 등을 역임하며 교수로도 계속 재직했다.

그는 헛된 권위주의와 헛기침 문화부터 타파하고 헛된 권위의 벽을 남자들 스스로 허물어야 남자들 역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정채기는 이혼은 잘못된 것이며 자녀들 문제, 사회적 폐해와 손실이라고 지적했다.[19] 그에 대해 성재기이혼은 당연한 권리라고 응수했다. 성재기는 결혼, 가정의 이름으로 남자들을 구속하고 속박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이혼은 밥 먹듯, 떡 먹듯이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채기는 "애초 남녀가 교제할 때 그렇게 ‘영원’의 이름으로 죽고 못 살 것 같이 하였던 언약과 행위들은 무엇이며, 수많은 하객들을 증인으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리라 맹세해 놓고, 그렇게 철천지원수 같이 갈라서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럴 바에는 당초 공개적인 맹세와 약속을 하지나 말든지, 아무리 남녀 간의 사랑의 화학반응식 유효기간이 3년 전후, 아니 이제는 그보다 더 짧다는 긍정이나 부정도 곤란한 보고가 있기로서니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당사자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 와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녀들은 무슨 봉변인가! 그리고 사회적인 폐해와 손실 등은 또 얼마인가?[19]"라고 하였다. 성재기는 무조건 가정을 지키고, 가족,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만 안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반박했다. 반드시 가정을 지켜야 될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성재기는 남자들도 가정, 가족에서 벗어나고, 의무와 책임감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인간, 자유인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정채기는 아름답게 영원할 것이라 여겼던 부부가족 관계의 파괴에, 어떠한 미사여구나 변명을 전제하지 않는 가운데 “최소한으로 못한 결혼은 있어도 최대한으로 잘한 이혼은 없다.[19]"고 하였다. 성재기는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할 수 있고, 이혼도 밥 먹듯, 물 마시듯 쉬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재기에 의하면 모든 남자가 아버지가 될 의무는 없다며,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남자, 한 사람의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지적했다.

2000년 초부터 그는 여성운동가들의 남성 가해자론에 반박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가부장제에 대해서도 비판을 계속하였다. 2002년 2월 23일 남성운동가들과 '한국남성운동협의회'를 조직하고 공동대표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33] 그는 남성들이 군 복무로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며,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다. 군 가산점 외에도 군 복무로 인한 시간적 손해에 대한 보상을 해줄 것과 병사들의 월급을 현실화할 것, 영내 생활 개선 등을 요구하였다.

군 가산점에 대한 여성계의 위헌론, 위법론 주장에 맞서 군 가산점은 남자가 군 복무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피해를 보상하는 방안이라며 맞섰다. 그러나 2002년 2월 23일 군필 남성의 가산점 제도에 대해 위헌 판결이 났다. 이에 그는 "헌재의 이번 결정은 한국 사회에서 남성들이 군 복무로 인해 보는 사회적 피해를 도외시한 결정"[34]이라며 반발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한지환, 성재기, 김재경 등과 함께 군 가산점을 반대하는 여성계와 논쟁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성부, 여성계와의 전면전, 투쟁을 선언한 성재기 등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2. 6. 교육 활동

그는 어려서부터 작은 키와 약한 체구, 눈물 많고 감성적인 성향 때문에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강한 남성상에 어울리지 않아 아웃사이더로 밀려났다고 한다. 1993년 결혼을 앞두고는 시간강사 생활, 남성성에 대한 반감, 가장 역할에 대한 부담감 등으로 남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느꼈다고 회고한다.[1] 그는 여성학은 있는데 왜 남성학은 없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고, 일본과 미국의 남성학회 및 남성운동 단체들을 연구하며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다.

1997년 출간된 <남성학 입문>의 역자 머리말에서 그는 "여성운동의 성과로 남성들의 문제가 야기되어 1990년대에 '남성 문제 시대'가 도래했다"며 "남성 문제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6] 그는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남성들이 비슷한 문제에 시달리고 있음을 확인하고,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학은 왜 없나'라는 의문을 품고 해외 사례를 모으며 이론적 근거를 찾기 시작했다.[1]

첫 아들이 태어나자 7살까지, 둘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에도 1년간 육아일기를 썼다.[4]

2000년 이후 직장과 가정 모두 잘해야 한다는 수퍼 아빠 콤플렉스가 유행하자, 그는 "능력과 여건이 안 되는 아빠들이 개인적 자괴감을 넘어 지나치게 표현하면 사회적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52] 2008년 1월 26일 성재기의 남성연대 창립을 축하하면서도, 그의 노선에는 다소 과격하다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2005년 장경근과 함께 아버지가 나서면 딸의 인생이 바뀐다를 집필했다. 이 책은 '딸사랑 아버지 모임' 공동대표였던 두 저자가 좋은 아빠가 되는 방법을 제시한다.[50]

2007년 2월 3일 하남시청 미관광장에서 열린 하남 광역화장장 유치반대 제3차 집회에 참석,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2007년 2월 6일 문학진 의원 등이 주관한 '하남발전, 신도시 유치를 위한 대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하였다.[53][54] 9월 13일 하남시의원 주민투표소환위원회 위원 대리 자격으로 소환토론 연설회에 참석했다.[55]

2. 6. 1. 교육, 방송 활동

그는 본래 교육학이 전공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환경 등으로 남성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고, 남성학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되었다.[1] 1993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남성학 강좌가 설치된 일본의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 현 오카야마 시 오카야마대학 등을 찾아다니며 남성학 연구 실태 등을 알아보고 자료를 모으기도 했다.[5] 1990년대 초 미국, 프랑스 등지에 남성학이 있음을 접하고 관련 자료들을 찾아 분석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일본미국의 남성학회와 남성운동 관련 모임에 참석하였고, 미국 남성학회의 정회원으로도 선임되었다.

1993년 건국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시간강사, 교직과 강사로 재직 중 서동미와 결혼하였다. 1999년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하였다. 한편 그는 교수로도 계속 재직, 건국대학교 대학원과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강사, 보육교사교육원 교수 등을 역임했다.

2005년 강원관광대학교 영유아보육과 교수, 이후 동 대학의 교육학과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2005년 9월 23일 '강원관광대학 교수회'에 참여하였다.[49] 2011년 강원관광대학교 평생교육원장이 되었다. 2006년에는 ‘제10회 일본 남성 페스티벌’에 참석, ‘왜 남자들은 겨울연가를 재미있게 보지 못 하는가’, ‘남성고민 핫라인 10년’, ‘남자들의 대화법’ 등을 참관하고 돌아오기도 했다.[51] 또한 강원관광대학의 조리학과, 레저학과, 관광정보처리과의 교육학 교수로도 강의하였다.

2006년 3월 10일 KBS제1라디오 열린토론에 '성폭력과 사회인식'을 주제로 토론할 때 한국외국어대 법학과의 이호중 교수, 변호사 이유정 등과 함께 패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2009년부터는 신문 교차로의 하남, 광주, 여주, 이천 지역의 지방지 동부교차로의 필진의 한 사람으로 칼럼을 기고하였다.

2. 6. 2. 사회단체 활동

그는 교육학이 전공이었지만, 개인적인 환경으로 남성성에 대한 의문을 품고 남성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93년 일본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대학을 방문하여 남성학 연구 자료를 모았다.[5] 1990년대 초 미국, 프랑스 등지에 남성학이 있음을 알고 관련 자료를 분석, 일본미국의 남성학회와 남성운동 모임에 참석했고, 미국 남성학회 정회원이 되었다.

1999년에는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명함을 통해 서로 비교하고 위축된다고 보았으며, 여성적인 것을 거부하는 것이 남성을 소외시킨다고 주장했다.[18] 헛된 권위주의와 헛기침 문화를 타파하고 권위의 벽을 허물어야 남자들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역설했다.

2000년 초부터 여성운동가들의 남성 가해자론에 반박하고 가부장제도 비판했다. 2002년 2월 23일 한국남성운동협의회를 조직하고 공동대표로 선출되었다.[33] 군 가산점에 대한 여성계의 위헌 주장에 맞서 군 복무로 인한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4] 한지환, 성재기, 김재경 등과 함께 군 가산점을 반대하는 여성계와 논쟁했다. 그러나 여성부, 여성계와의 전면전을 선언한 성재기 등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2006년 ‘제10회 일본 남성 페스티벌’에 참석, ‘왜 남자들은 겨울연가를 재미있게 보지 못 하는갗, ‘남성고민 핫라인 10년’, ‘남자들의 대화법’ 등을 참관했다.[51] 2007년 한, 일 남성학자 3명과 '미국과 유럽, 일본과 한국의 남성학과 남성 운동, 아버지 운동을 조명하고 남성주의(Masculism)의 관점에서 페미니즘을 본 보고서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냈다.[56]

2009년 4월 13일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식품안전청장 윤여표가 눈물을 흘린 것에 대해[57] 남자의 눈물도 ‘진정성’으로 평가해달라고 말했다.[57]

2. 7. 생애 후반

그는 본래 교육학이 전공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환경 등으로 남성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고, 남성학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작은 키와 약한 체구 탓에 친구들에 치이며 아웃사이더로 밀려났다. 눈물 많고 감성적인 성향도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강한 남성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93년 결혼을 앞두고는 콤플렉스가 절정에 달했다. 앞날을 기약 못하는 시간강사 생활, 유년시절부터 겪어온 남성성에 대한 반감과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남편, 가장 역할에 대한 현실적인 결핍 등이 맞물리며 남자는 도대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밀려왔다.[1]'고 회고한다. 그는 여성학은 있는데 왜 남성의 문제에 관심갖는 남성학은 없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일본 남성학회, 미국 남성학회와 일본, 미국의 남성운동 단체들을 연구, 관련 자료를 찾아봤다.

1993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그는 남성학 강좌가 설치된 일본의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 현 오카야마 시 오카야마대학 등을 찾아다니며 남성학 연구 실태 등을 알아보고 자료를 모으기도 했다.[5] 1997년 출간된 <남성학 입문>의 역자 머리말에서 정채기 교수는 “여성운동이 성과를 이루는 과정에서 남성들의 문제가 야기돼 1990년대에 ‘남성 문제시대’가 도래했다”며 “남성문제의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6]

그에 의하면 '주변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비슷하다 못해 다 똑같은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다.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학은 왜 없나'란 의문을 갖고 남성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해외의 남성학 사례들을 모으고 이론적인 근거들을 찾기 시작했다.[1] 1990년대 초 미국, 프랑스 등지에 남성학이 있음을 접하고 관련 자료들을 찾아 분석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일본미국의 남성학회와 남성운동 관련 모임에 참석하였고, 미국 남성학회의 정회원으로도 선임되었다.

건국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시간강사, 교직과 강사로 재직 중이던 1993년 서동미와 결혼하였다. 첫 아들이 태어나자 그는 아들이 7살 될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육아일기를 썼다.[4] 둘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에도 그는 직접 1년간 육아 일기를 썼다.

1999년 그는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명함 등을 주고 받는 것을 통해 서로 비교하고 위축된다는 점과, 여성적인 것이라고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바로 남성들 스스로 사회와 가정에서 도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봤다.

그는 “남성운동은 명함 안주고 안받기 운동이나 수필집 살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명함에 새겨진 직업을 비교하며 위축되고, 여성이나 읽는 수필집은 남성의 권위를 해친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의 문화때문에 남성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것이다.[18] 한편 그는 교수로도 계속 재직, 건국대학교 대학원과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강사, 보육교사교육원 교수 등을 역임했다.

그는 헛된 권위주의와 헛기침 문화부터 타파하고 헛된 권위의 벽을 남자들 스스로 허물어야 남자들 역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정채기는 이혼은 잘못된 것이며 자녀들 문제, 사회적 폐해와 손실이라고 지적했다.[19] 그에 대해 성재기이혼은 당연한 권리라고 응수했다. 성재기는 결혼, 가정의 이름으로 남자들을 구속하고 속박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이혼은 밥먹듯, 떡먹듯이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채기는 "애초 남녀가 교제할 때 그렇게 ‘영원’의 이름으로 죽고 못 살 것 같이 하였던 언약과 행위들은 무엇이며, 수많은 하객들을 증인으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리라 맹세해 놓고, 그렇게 철 천지 원수 같이 갈라서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럴 바에는 당초 공개적인 맹세와 약속을 하지나 말든지, 아무리 남녀간의 사랑의 화학반응식 유효기간이 3년 전후, 아니 이제는 그보다 더 짧다는 긍정이나 부정도 곤란한 보고가 있기로서니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당사자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 와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녀들은 무슨 봉변인가! 그리고 사회적인 폐해와 손실 등은 또 얼마인가?[19]"라고 하였다. 성재기는 무조건 가정을 지키고, 가족,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만 안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반박했다. 반드시 가정을 지켜야 될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성재기는 남자들도 가정, 가족에서 벗어나고, 의무와 책임감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인간, 자유인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정채기는 아름답게 영원할 것이라 여겼던 부부가족 관계의 파괴에, 어떠한 미사여구나 변명을 전제하지 않는 가운데 “최소한으로 못한 결혼은 있어도 최대한으로 잘한 이혼은 없다.[19]"고 하였다. 성재기는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할 수 있고, 이혼도 밥먹듯, 물 마시듯 쉬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재기에 의하면 모든 남자가 아버지가 될 의무는 없다며,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남자, 한 사람의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지적했다.

2008년 5월 21일 당시 성재기는 매맞는 남편에 대한 무료 전화상담을 시작하면서, 남성이 연애와 결혼에 집착하고, 가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남성은 영원히 여성의 노예로 종속될 것이라 역설하였다. 성재기는 여성과 어린이, 노인의 노예로 살 것인가,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한 사람의 인간, 우주로 거듭날 것인가를 남자들이 스스로 선택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성재기의 남성 해방론에 대해 정채기 등은 급진적이라며 비판하였다.

2009년 4월 13일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식품안전청장 윤여표가 눈물을 흘렸다.[57] 이때 시중에서는 왜 남자가 눈물을 흘리느냐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남자도 눈물 흘릴수 있어야 한다며, 남자가 우는 것을 잘못이라 비판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4월 13일 국회보건복지위 전체회의에 불려나간 윤 청장은 '석면탈크' 파동에 따른 의원들의 질타에 결국 눈물줄기를 보이고 말았다. 감정을 추스리지 못한 그는 “저도 괴롭다. 나무라시지만 말고 좀 도와달라. 작년에 식품으로 곤욕을 치렀는데 이번에 의약품 때문에 너무 힘들다”며 울먹거렸다.[57] 한국남성학연구회 정채기 회장(강원관광대 교수)은 남자의 눈물도 ‘진정성’으로 평가해달라고 말했다. 남성의 눈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수용자의 감정과 일치되는지 여부로 봐야한다는 것이다.[57]

2009년부터는 신문 교차로의 하남, 광주, 여주, 이천 지역의 지방지 동부교차로의 필진의 한 사람으로 칼럼을 기고하였다.

2009년에는 하남문인협회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2009년 11월 5일 '제9회 하남문학 위례백일장 공모전'에 출전, 운문부문 우수상을 받았다.[58] 11월 20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가을향기 머무는 하남문협 시화전이 하남시청 앞 미관광장에서 개최됐다.[59] 여기에서 정채기는 운문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운문부문 우수상을 수상한 정채기(남․창우동)씨는 시화를 감상한 뒤 “이렇게 훌륭한 시화전이 열려서 문학에 목마른 시민들의 갈증을 채워줘 너무 기쁘다. 앞으로 이런 행사가 자주 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59]

2010년 1월 한국지역사회교육·문화연구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 그해 3월 1일 한국지역사회교육·문화연구소가 출범하자 이사 겸 자문교수에 위촉되었다. 2010년 10월 5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강원도지역 홍보인단 57인의 한 사람에 임명되었다.[60] 2011년 1월 28일 여수진남체육관 평생학습과에서 한국지역사회 교육·문화연구소 주최 '제1차 정기총회 및 자녀교육 특강'에 연사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2월 20일 2011 오렌지폭스 콘서트를 참관하였다. 2012년 그는 하남시 신도시 유치 운동과 화장터 반대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2011년 3월에는 경상북도 안동시 경안신학대학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하였다. 2011년 11월 4일 강원관광대학 평생교육원장이 되었다.[61] 2011년 3월 26일에는 부부행복연구원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 2007년 이후 하남시의 지역 시민 모임에도 참여하여 활동했다.

2012년 하남시 교육발전연구소에 강사로 출강하였다.

3. 사상과 신념

정채기는 교육학 전공이었으나, 개인적인 환경으로 남성성에 대한 의문을 품고 남성학을 연구했다.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학은 없는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 1993년 여름 일본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대학 등에서 남성학 연구 자료를 수집했다.[5] 1990년대 초 미국, 프랑스 등지의 남성학 자료를 분석, 일본미국의 남성학회와 모임에 참석하고 미국 남성학회 정회원이 되었다.

1997년 <남성학 입문>에서 "남성 문제 시대'의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6]

헛된 권위주의와 헛기침 문화를 타파하고, 남자들 스스로 권위의 벽을 허물어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혼에 대해 성재기와 대립했다. 정채기는 이혼을 사회적 폐해로 보았으나,[19] 성재기는 이혼의 자유를 주장했다. 정채기는 결혼 맹세를 지키지 않는 것과 자녀 문제를 지적했고,[19] 성재기는 가정,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정채기는 "최소한으로 못한 결혼은 있어도 최대한으로 잘한 이혼은 없다"고 했고,[19] 성재기는 이혼의 자유와 아버지이기 이전의 인간됨을 강조했다.

3. 1. 마초주의 비판

그는 본래 교육학이 전공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환경으로 남성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면서 남성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작은 키와 약한 체구 탓에 친구들에 치이며 아웃사이더로 밀려났다. 눈물 많고 감성적인 성향도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강한 남성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1993년 결혼을 앞두고는 콤플렉스가 절정에 달했다.[1]'고 회상한다. 그는 여성학은 있는데 왜 남성의 문제에 관심 갖는 남성학은 없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일본 남성학회, 미국 남성학회와 일본, 미국의 남성운동 단체들을 연구, 관련 자료를 찾아봤다. 1993년 여름 방학에는 남성학 강좌가 설치된 일본의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 현 오카야마 시 오카야마대학 등을 찾아다니며 남성학 연구 실태 등을 알아보고 자료를 모으기도 했다.[5]

1990년대 초 미국, 프랑스 등지에 남성학이 있음을 접하고 관련 자료들을 찾아 분석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일본미국의 남성학회와 남성운동 관련 모임에 참석하였고, 미국 남성학회의 정회원으로도 선임되었다. 1997년 출간된 <남성학 입문>의 역자 머리말에서 정채기 교수는 “여성운동이 성과를 이루는 과정에서 남성들의 문제가 야기돼 1990년대에 ‘남성 문제 시대’가 도래했다”며 “남성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6]

1999년 그는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명함 등을 주고 받는 것을 통해 서로 비교하고 위축된다는 점과, 여성적인 것이라고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바로 남성들 스스로 사회와 가정에서 도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봤다. 그는 “남성운동은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이나 수필집 살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명함에 새겨진 직업을 비교하며 위축되고, 여성이나 읽는 수필집은 남성의 권위를 해친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의 문화 때문에 남성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것이다.[18] 그는 헛된 권위주의와 헛기침 문화부터 타파하고 헛된 권위의 벽을 남자들 스스로 허물어야 남자들 역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정채기는 이혼은 잘못된 것이며 자녀들 문제, 사회적 폐해와 손실이라고 지적했다.[19] 그에 대해 성재기이혼은 당연한 권리라고 응수했다. 성재기는 결혼, 가정의 이름으로 남자들을 구속하고 속박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이혼은 밥 먹듯, 떡 먹듯이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채기는 "애초 남녀가 교제할 때 그렇게 ‘영원’의 이름으로 죽고 못 살 것 같이 하였던 언약과 행위들은 무엇이며, 수많은 하객들을 증인으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리라 맹세해 놓고, 그렇게 철천지원수같이 갈라서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 당사자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 와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녀들은 무슨 봉변인가! 그리고 사회적인 폐해와 손실 등은 또 얼마인가?[19]"라고 하였다. 성재기는 무조건 가정을 지키고, 가족,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만 안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반박했다. 반드시 가정을 지켜야 될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성재기는 남자들도 가정, 가족에서 벗어나고, 의무와 책임감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인간, 자유인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정채기는 아름답게 영원할 것이라 여겼던 부부가족 관계의 파괴에, 어떠한 미사여구나 변명을 전제하지 않는 가운데 “최소한으로 못한 결혼은 있어도 최대한으로 잘한 이혼은 없다.[19]"고 하였다. 성재기는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할 수 있고, 이혼도 밥 먹듯, 물 마시듯 쉬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재기에 의하면 모든 남자가 아버지가 될 의무는 없다며,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남자, 한 사람의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지적했다.

3. 2. 교단 여성화에 대한 비판

정채기는 이혼은 잘못된 것이며 자녀 문제, 사회적 폐해와 손실 등을 야기한다고 지적했다.[19] 그는 "애초 남녀가 교제할 때 그렇게 ‘영원’의 이름으로 죽고 못 살 것 같이 하였던 언약과 행위들은 무엇이며, 수많은 하객들을 증인으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리라 맹세해 놓고, 그렇게 철천지원수 같이 갈라서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럴 바에는 당초 공개적인 맹세와 약속을 하지나 말든지, 아무리 남녀간의 사랑의 화학반응식 유효기간이 3년 전후, 아니 이제는 그보다 더 짧다는 긍정이나 부정도 곤란한 보고가 있기로서니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당사자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 와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녀들은 무슨 봉변인가! 그리고 사회적인 폐해와 손실 등은 또 얼마인가?[19]"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성재기이혼은 당연한 권리라고 응수했다. 성재기는 결혼, 가정의 이름으로 남자들을 구속하고 속박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이혼은 밥 먹듯, 떡 먹듯이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채기는 아름답게 영원할 것이라 여겼던 부부가족 관계의 파괴에 대해 “최소한으로 못한 결혼은 있어도 최대한으로 잘한 이혼은 없다.[19]"고 하였다.

반면 성재기는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할 수 있고, 이혼도 밥 먹듯, 물 마시듯 쉬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재기에 의하면 모든 남자가 아버지가 될 의무는 없으며,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남자, 한 사람의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지적했다.

3. 3. 페미니즘 무비판에 대한 비판

정채기는 이혼은 잘못된 것이며 자녀 문제와 사회적 폐해, 손실을 야기한다고 지적했다.[19] 그는 "애초 남녀가 교제할 때 그렇게 ‘영원’의 이름으로 죽고 못 살 것 같이 하였던 언약과 행위들은 무엇이며, 수많은 하객들을 증인으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리라 맹세해 놓고, 그렇게 철천지원수 같이 갈라서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 당사자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 와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녀들은 무슨 봉변인가! 그리고 사회적인 폐해와 손실 등은 또 얼마인가?[19]"라고 비판했다. 또한 "최소한으로 못한 결혼은 있어도 최대한으로 잘한 이혼은 없다.[19]"고 주장했다.

반면 성재기이혼은 당연한 권리라고 응수했다. 성재기는 결혼, 가정의 이름으로 남자들을 구속하는 것은 잘못이며, 이혼은 밥 먹듯, 떡 먹듯이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반드시 가정을 지켜야 할 의무는 없으며, 남자들도 가정, 가족에서 벗어나 의무와 책임감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인간, 자유인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모든 남자가 아버지가 될 의무는 없으며,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3. 4. 여성의 가정 부양론

그는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학은 왜 없나'라는 의문을 갖고 남성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1] 1990년대 초 미국, 프랑스 등지에 남성학이 있음을 접하고 관련 자료들을 찾아 분석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일본미국의 남성학회와 남성운동 관련 모임에 참석하였고, 미국 남성학회의 정회원으로도 선임되었다. 1993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그는 남성학 강좌가 설치된 일본의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 현 오카야마 시 오카야마대학 등을 찾아다니며 남성학 연구 실태 등을 알아보고 자료를 모으기도 했다.[5] 1997년 출간된 《남성학 입문》의 역자 머리말에서 정채기 교수는 “여성운동이 성과를 이루는 과정에서 남성들의 문제가 야기돼 1990년대에 ‘남성 문제시대’가 도래했다”며 “남성문제의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6]

1999년 그는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명함 등을 주고받는 것을 통해 서로 비교하고 위축된다는 점과, 여성적인 것이라고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바로 남성들 스스로 사회와 가정에서 도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봤다. 그는 “남성운동은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이나 수필집 살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명함에 새겨진 직업을 비교하며 위축되고, 여성이나 읽는 수필집은 남성의 권위를 해친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의 문화 때문에 남성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것이다.[18]

그는 헛된 권위주의와 헛기침 문화부터 타파하고 헛된 권위의 벽을 남자들 스스로 허물어야 남자들 역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정채기는 이혼은 잘못된 것이며 자녀들 문제, 사회적 폐해와 손실이라고 지적했다.[19] 그에 대해 성재기이혼은 당연한 권리라고 응수했다. 성재기는 결혼, 가정의 이름으로 남자들을 구속하고 속박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이혼은 밥 먹듯, 떡 먹듯이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채기는 "애초 남녀가 교제할 때 그렇게 ‘영원’의 이름으로 죽고 못 살 것 같이 하였던 언약과 행위들은 무엇이며, 수많은 하객들을 증인으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리라 맹세해 놓고, 그렇게 철천지원수같이 갈라서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럴 바에는 당초 공개적인 맹세와 약속을 하지나 말든지, 아무리 남녀 간의 사랑의 화학반응식 유효기간이 3년 전후, 아니 이제는 그보다 더 짧다는 긍정이나 부정도 곤란한 보고가 있기로서니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당사자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 와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녀들은 무슨 봉변인가! 그리고 사회적인 폐해와 손실 등은 또 얼마인가?[19]"라고 하였다. 성재기는 무조건 가정을 지키고, 가족,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만 안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반박했다. 반드시 가정을 지켜야 될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성재기는 남자들도 가정, 가족에서 벗어나고, 의무와 책임감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인간, 자유인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정채기는 아름답게 영원할 것이라 여겼던 부부가족 관계의 파괴에, 어떠한 미사여구나 변명을 전제하지 않는 가운데 “최소한으로 못한 결혼은 있어도 최대한으로 잘한 이혼은 없다.[19]"고 하였다. 성재기는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할 수 있고, 이혼도 밥 먹듯, 물 마시듯 쉬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재기에 의하면 모든 남자가 아버지가 될 의무는 없다며,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남자, 한 사람의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지적했다.

3. 5. 아버지의 권리론

그는 여성학은 있는데 왜 남성의 문제에 관심 갖는 남성학은 없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일본 남성학회, 미국 남성학회와 일본, 미국의 남성운동 단체들을 연구, 관련 자료를 찾아봤다.[1] 1990년대 초 미국, 프랑스 등지에 남성학이 있음을 접하고 관련 자료들을 찾아 분석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일본미국의 남성학회와 남성운동 관련 모임에 참석하였고, 미국 남성학회의 정회원으로도 선임되었다.

1999년 그는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명함 등을 주고 받는 것을 통해 서로 비교하고 위축된다는 점과, 여성적인 것이라고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바로 남성들 스스로 사회와 가정에서 도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봤다. 그는 “남성운동은 명함 안주고 안받기 운동이나 수필집 살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18]

그는 헛된 권위주의와 헛기침 문화부터 타파하고 헛된 권위의 벽을 남자들 스스로 허물어야 남자들 역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정채기는 이혼은 잘못된 것이며 자녀들 문제, 사회적 폐해와 손실이라고 지적했다.[19] 그에 대해 성재기이혼은 당연한 권리라고 응수했다. 성재기는 결혼, 가정의 이름으로 남자들을 구속하고 속박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이혼은 밥 먹듯, 떡 먹듯이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채기는 "애초 남녀가 교제할 때 그렇게 ‘영원’의 이름으로 죽고 못 살 것 같이 하였던 언약과 행위들은 무엇이며, 수많은 하객들을 증인으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리라 맹세해 놓고, 그렇게 철천지원수같이 갈라서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 당사자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 와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녀들은 무슨 봉변인가! 그리고 사회적인 폐해와 손실 등은 또 얼마인가?[19]"라고 하였다. 성재기는 무조건 가정을 지키고, 가족,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만 안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반박했다. 반드시 가정을 지켜야 될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성재기는 남자들도 가정, 가족에서 벗어나고, 의무와 책임감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인간, 자유인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정채기는 아름답게 영원할 것이라 여겼던 부부가족 관계의 파괴에 대해 “최소한으로 못한 결혼은 있어도 최대한으로 잘한 이혼은 없다.[19]"고 하였다. 성재기는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할 수 있고, 이혼도 밥 먹듯, 물 마시듯 쉬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재기에 의하면 모든 남자가 아버지가 될 의무는 없다며,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남자, 한 사람의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지적했다.

2001년 5월 19일 여성사회교육원 주최 워크숍에서 그는“남성은 힘들고 여성은 아프다고 외치는 요즘 시대에 남성과 여성이 따로 또 같이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고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남성 강좌의 의의”라고 밝혔다. 그는 또 세계 남성학자들의 주장을 종합, 21세기를 살아갈 남성의 행동강령으로 "1. 친절한 마음 갖기 ... 2. 남자만의 교제 = 동성인 남성들과의 교제를 통해 자신이 남성이란 정체감을 재확인한다. ... 3. 여성의 성장을 기뻐할 것 = 아내나 직장 동료 여성들의 성장과 발전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것이 진정한 남성의 덕목이다. 4. 무리하지 말 것 = 힘들고 도움이 필요할 때는 도움받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정직하게 자기를 개방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을 제시했다. 그는 종래의 남성성, 가부장 역할, 남성다움에 구애받아 과도한 의무와 스트레스를 짊어지는 것은 수명만 단축시킬 뿐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점은 성재기 등도 동의하였으나, 이혼에 대한 관점에서 대립하게 된다.

2004년부터 호주제 폐지 여론이 나타나자 정채기, 한지환 등은 호주제 폐지에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성재기는 형식적이고 허울뿐인 아버지, 남편으로서의 지위조차 없애려 한다고 반발하였다.

3. 6. 아버지의 육아 참여론

그는 교육학을 전공했지만,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남성성에 대한 의문을 품고 남성학을 연구하게 되었다.[1] 1993년 결혼을 앞두고 남성의 역할과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던 중, 여성학은 존재하지만 남성학은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1] 그는 일본미국의 남성학 연구 사례와 남성운동 단체들을 연구하며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5][1] 1997년에는 "남성문제의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6]

1993년 서동미와 결혼 후, 두 아들의 육아에 적극 참여하며 육아일기를 썼다.[4] 1999년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하며, 남성들이 직업으로 서로를 비교하며 위축되는 문화를 비판했다.[18] 또한 헛된 권위주의를 타파해야 남성들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01년부터 그는 아버지도 육아휴직을 내고 자녀 양육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7] 아버지가 자녀와 함께 할 수 있도록 정부, 사회, 일터에서 남성 직장인을 배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아버지 육아참여론은 2010년 이후에 가서야 인정받게 되었다. 남성이 가족의 주 생계를 책임져야 된다는 견해가 압도적이라 비판받았으나, 일부 공공기관 종사자, 학자, 공무원 등은 2000년대 초반부터 남성도 육아휴직을 사용함으로써 소극적이나마 서서히 호응했다.

2002년 6월 22일 서울 안국동 철학카페 느티나무에서 발족한 ‘딸사랑 아버지 모임’의 공동대표를 맡아, 딸을 당당하게 키우는 법 4가지를 제시했다.[37][39] 그는 호주제 폐지 집회에 참여하여 남녀 평등한 사회를 위해서는 호주제와 남아 선호 사상을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0] 2004년부터 호주제 폐지 여론이 나타나자 정채기, 한지환 등은 호주제 폐지에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성재기는 형식적이고 허울뿐인 아버지, 남편으로서의 지위조차 없애려 한다고 반발하였다.

그는 아들을 키우면서 “사내애가 돼가지고 왜 그러니”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41] 남자들도 마음껏 울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사내대장부는 우는 게 아니야'라는 식의 잘못된 남성다움에 대한 강요가 마초를 만든다고 지적했다.[41]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 역시 또 다른 여성차별을 반복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41]

2004년 6월 20일 매일경제 등과의 인터뷰에서 "아빠들은 큰 것을 선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지만 의외로 수다떨기, 여행가기, 영화보기 등 일상의 소소한 일이 가족들에게는 즐거움을 준다"며 아빠들의 보육참여를 강조했다.[39] 그는 딸에게 운동을 통해 경쟁과 승부욕을 가르치고, '예쁘다' 대신 '멋지다'와 같은 양성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성적 매력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39]

3. 7. 부성애론

정채기는 교육학 전공이었으나, 개인적인 환경으로 남성성에 대한 의문을 품고 남성학을 연구했다. 그는 작은 키와 감성적인 성향 때문에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상에 맞지 않아 힘들었다고 한다.[1] 1993년 결혼을 앞두고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로 남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느꼈다.[1] 그는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학은 없는 것에 의문을 제기, 일본, 미국의 남성학회와 단체들을 연구했다.[1] 1993년 여름, 일본 교토대학교, 오카야마대학 등에서 남성학 연구 자료를 수집했다.[5] 1997년 <남성학 입문>에서 "남성 문제 시대'의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6]

1990년대 초, 미국, 프랑스 등에서 남성학 자료를 분석, 일본미국의 남성학회, 모임에 참석하고, 미국 남성학회 정회원이 되었다. 1993년 서동미와 결혼, 두 아들의 육아일기를 썼다.[4]

1999년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 명함으로 인한 비교와 위축, 여성적인 것을 거부하는 남성 문화를 비판했다.[18] 건국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강사 등을 역임하며, 헛된 권위주의 타파를 주장했다.

이혼에 대해 성재기와 대립했다. 정채기는 이혼을 사회적 폐해로 보았으나,[19] 성재기는 이혼의 자유를 주장했다. 정채기는 결혼 맹세를 지키지 않는 것과 자녀 문제를 지적했고,[19] 성재기는 가정,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정채기는 "최소한으로 못한 결혼은 있어도 최대한으로 잘한 이혼은 없다"고 했고,[19] 성재기는 이혼의 자유와 아버지이기 이전의 인간됨을 강조했다.

2002년 6월 22일 ‘딸사랑 아버지모임’ 발족에 참여, "발족 배경 및 취지 설명"[38]을 발표하고 공동대표로 추대, 딸을 당당하게 키우는 법을 제시했다.[39] 2002년 7월 1일 한국여성단체연합의 ‘딸사랑ㆍ아들사랑문화한마당’에 참여, 호주제 폐지 집회에서 남녀 평등 사회를 위해 호주제와 남아 선호 사상 척결을 주장했다. 2004년 호주제 폐지 여론에 긍정적이었으나, 성재기는 아버지 지위 박탈이라며 반발했다.

90년대 중년남성 과로사, 아버지 부재현상을 아버지 운동단체 설립 원인으로 보았다.[8] 2001년부터 아버지의 육아휴직과 사회적 배려를 주장, 2010년 이후에야 인정받았다. 그의 육아참여론은 비판받았으나, 2000년대 초부터 일부에서 호응했다.

2003년 8월 19일 정송과 유아영재창의성지도 자격검정평가를 주관했다. 남성학을 실천하며 “남자도 가슴이 여릴 수 있고, 가정일을 잘 할 수 있다”고 말하고, “백마 탄 왕자 역을 자임하지 말라”고 강조했다.[41] 가부장제를 부담스러운 체제로 보았다.

여성 사회참여 증가에 따른 가정 내 아버지 역할 변화를 주장했다.[76] “현대 남성은 친구 같은 아빠 역할을 해야 한다”며 새로운 아빠상을 제시했다.[76] 자상한 아빠가 자녀에게 긍정적 영향을 준다고 보았다.[77] 1994년부터 남성주의 운동을 소개, 아이 인격 형성에 아버지 몫이 존재함을 역설했다.

친구같은 아버지론을 주장하며, 자녀와 대화하기 위해 아버지도 자녀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72] 아버지의 육아 참여, 스킨십, 유대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육아는 엄마 몫’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아버지의 적극적 참여를 강조했다.[78]

장경근과 `웃어라 아버지'를 공동 집필, “웃으며 살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76] 남성 육아 휴직 허용을 역설했다. 가시고기를 부성애의 근거로 들며,[79] 자녀와의 스킨십, 자상한 아버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부성애 발휘를 권리로 보았다.[79]

3. 7. 1. 기러기 아빠 옹호론

2005년 4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정채기는 기러기 아빠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러기 아빠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식들을 해외에 유학 보내는 것은 "내 자식이 변화에 적응 못하고 뒤처지는 것이 싫어서[80]"라고 하였다.

그는 "우리 세대는 컴퓨터에 약하고 외국어에 약해요. 그러다 보니 직장에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요. 40代 남성들이 부인들의 극성 때문이긴 하지만 아이들의 조기 유학에 선뜻 동의하고 나서는 건 자신이 당한 괴로움과 스트레스를 자식에게만큼은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입니다. 저부터도 내 자식이 영어 실력 때문에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떨어지는 건 싫거든요.[80]"라고 하였다.

3. 8. 가부장제 비판

그는 본래 교육학이 전공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환경으로 남성성에 대해 의문을 품고, 남성학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작은 키와 약한 체구 탓에 친구들에 치이며 아웃사이더로 밀려났고, 눈물 많고 감성적인 성향은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강한 남성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고 한다.[1] 1993년 결혼을 앞두고는 콤플렉스가 절정에 달했다. 앞날을 기약 못하는 시간강사 생활, 유년 시절부터 겪어온 남성성에 대한 반감과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남편, 가장 역할에 대한 현실적인 결핍 등이 맞물리며 남자는 도대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밀려왔다고 한다.[1] 그는 여성학은 있는데 왜 남성의 문제에 관심 갖는 남성학은 없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일본 남성학회, 미국 남성학회와 일본, 미국의 남성운동 단체들을 연구, 관련 자료를 찾아봤다.

1993년 여름 방학, 그는 남성학 강좌가 설치된 일본의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 현 오카야마 시 오카야마대학 등을 찾아다니며 남성학 연구 실태 등을 알아보고 자료를 모았다.[5] 1997년 출간된 <남성학 입문>에서 “여성운동이 성과를 이루는 과정에서 남성들의 문제가 야기돼 1990년대에 ‘남성 문제 시대’가 도래했다”며 “남성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6]

그는 주변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비슷하다 못해 다 똑같은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학은 왜 없나'란 의문을 갖고 남성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해외의 남성학 사례들을 모으고 이론적인 근거들을 찾기 시작했다.[1] 1990년대 초 미국, 프랑스 등지에 남성학이 있음을 접하고 관련 자료들을 분석했다. 이후 그는 일본미국의 남성학회와 남성운동 관련 모임에 참석, 미국 남성학회의 정회원으로도 선임되었다.

1999년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명함 등을 주고받는 것을 통해 서로 비교하고 위축된다는 점과, 여성적인 것이라고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바로 남성들 스스로 사회와 가정에서 도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봤다. 그는 “남성운동은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이나 수필집 살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명함에 새겨진 직업을 비교하며 위축되고, 여성이나 읽는 수필집은 남성의 권위를 해친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의 문화 때문에 남성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것이다.[18] 한편 그는 교수로도 계속 재직, 건국대학교 대학원과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강사, 보육교사교육원 교수 등을 역임했다.

그는 헛된 권위주의와 헛기침 문화부터 타파하고 헛된 권위의 벽을 남자들 스스로 허물어야 남자들 역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정채기는 이혼은 잘못된 것이며 자녀들 문제, 사회적 폐해와 손실이라고 지적했다.[19] 성재기이혼은 당연한 권리라고 응수했다. 성재기는 결혼, 가정의 이름으로 남자들을 구속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이혼은 밥 먹듯, 떡 먹듯이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채기는 "애초 남녀가 교제할 때 그렇게 ‘영원’의 이름으로 죽고 못 살 것 같이 하였던 언약과 행위들은 무엇이며, 수많은 하객들을 증인으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리라 맹세해 놓고, 그렇게 철천지원수같이 갈라서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럴 바에는 당초 공개적인 맹세와 약속을 하지나 말든지, 아무리 남녀 간의 사랑의 화학반응식 유효기간이 3년 전후, 아니 이제는 그보다 더 짧다는 긍정이나 부정도 곤란한 보고가 있기로서니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당사자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 와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녀들은 무슨 봉변인가! 그리고 사회적인 폐해와 손실 등은 또 얼마인가?[19]"라고 하였다. 성재기는 무조건 가정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반박했다. 반드시 가정을 지켜야 될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성재기는 남자들도 가정, 가족에서 벗어나고, 의무와 책임감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인간, 자유인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정채기는 부부가족 관계가 영원할 것이라 여겼지만 파괴되는 현실에, “최소한으로 못한 결혼은 있어도 최대한으로 잘한 이혼은 없다.[19]"고 하였다. 성재기는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할 수 있고, 이혼도 밥 먹듯, 물 마시듯 쉬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재기에 의하면 모든 남자가 아버지가 될 의무는 없다며,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남자, 한 사람의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지적했다.

2002년 6월 22일 서울 안국동 철학카페 느티나무에서 ‘딸사랑 아버지모임’이 발족했다.[37] 아들만 둔 정채기(한국남성학연구회장), 정수복(사회운동연구소장)이 회원으로 참여했다.[37] 그는 "발족 배경 및 취지 설명[38]"을 발표했다. 정채기는 딸사랑 아버지 모임의 창립 회원으로 참여, 곧 공동대표로 추대되었다. 이때 그는 딸을 당당하게 키우는 법 4가지를 비전으로 제시했다.[39]

2002년 7월 1일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은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야외무대에서 ‘딸사랑 아버지모임’ 회원들의 자녀 등을 초청해 ‘딸사랑ㆍ아들사랑 문화 한마당’을 열었다.[40] 그는 딸사랑 아버지 모임의 공동대표 자격으로 7월 1일 호주제 폐지 집회에 참여하였다. 그는 남녀 평등한 사회를 위해서는 호주제와 남아 선호 사상을 척결해야 한다고 보았다. 2004년부터 호주제 폐지 여론이 나타나자 정채기, 한지환 등은 호주제 폐지에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성재기는 형식적이고 허울뿐인 아버지, 남편으로서의 지위조차 없애려 한다고 반발하였다.

정채기 교수는 아버지 운동 단체의 설립 원인으로 1990년대에 증가한 중년 남성의 과로사나 가정 내 아버지 부재 현상을 꼽는다. 가정 내에서 아버지의 권위 실추에 대한 대책으로 아버지의 역할 회복을 위해 탄생했다는 것이다.[8] 2001년부터 그는 아버지도 육아휴직을 내고 자녀 양육에 참여하도록 사회가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버지가 자녀와 함께 할 수 있도록 정부, 사회, 일터에서 남성 직장인을 배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아버지 육아 참여론은 2010년 이후에 가서야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 육아 참여론은 남성이 가족의 주 생계를 책임져야 된다는 견해가 압도적이라 비판받았다. 그러나 일부 공공기관 종사자, 학자, 공무원 등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남성도 육아휴직을 사용함으로써 소극적이나마 서서히 호응하게 되었다.

2003년 8월 19일 정송 등과 함께 유아 영재 창의성 지도 자격검정평가를 주관하였다.

그가 남성주의 운동을 시작하게 된 배경에는 남자다움 등 성 역할 강요에 대한 저항감 때문이었다. 정 교수는 어려서부터 작은 키와 약한 체구 탓에 친구들에 치이며 아웃사이더로 밀려났다. 눈물 많고 감성적인 성향은 당시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강한 남성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51] 그는 남자는 이래야 한다 등 어떤 역할을 강요하는 것이 부당하다 여기고, 남자들도 여자처럼 드라마도 보고, 가정 일도 하는 등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게 되었다.

한때 남자다움, 성 역할 강요 등은 그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 1993년 결혼을 앞두고는 콤플렉스가 절정에 달했다.[51] 앞날을 기약 못하는 시간강사 생활, 유년 시절부터 겪어온 남성성에 대한 반감과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남편, 가장 역할에 대한 현실적인 결핍 등이 맞물리며 남자는 도대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밀려왔다.[51] 그는 주변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비슷하다 못해 똑같은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51] 그는 ‘(한국에)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학은 왜 없나?’란 의문을 갖고 남성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해외의 남성학 사례들을 모으고 이론적인 근거들을 찾기 시작했다.[51] 이후 그는 남성에 대해 연구함과 동시에 남성 권익 보호 운동에 나섰다.

2006년 11월 정채기 한국남성학연구회 회장은 고려대학교 학보와의 대담에서 “여성계가 이를 단순히 마초들의 집단 행위로 본다면 남성들 역시 여성 집단을 삐딱하게 바라보게 될 것이고, 악순환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며 “사실 양성 평등이 되려면 남녀가 치열하게 싸울 부분이 있지만, 이제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생각과 느낌을 나누고 성찰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밝혔다.[67]

3. 8. 1. 가부장제, 가부장제 신화에 대한 비판

정채기는 교육학을 전공했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 남성성에 대한 의문을 품고 남성학 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작은 키와 감성적인 성격 때문에 사회가 요구하는 강한 남성상에 부합하지 못했고, 결혼을 앞두고 남편과 가장의 역할에 대한 부담감으로 깊은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1] 그는 여성학은 있지만 남성의 문제를 다루는 남성학은 없다는 점에 주목하여, 1993년부터 일본미국의 남성학 연구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했다.[5][6]

1994년 한국에 '남성학'을 처음 소개하며, 여성학남성학을 통합하는 '젠더리즘'을 주장했다.[8] 그는 남성학이 남성 문제뿐만 아니라 여성 문제 해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인간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8] 그는 한겨레 기고문에서 "남자는 강하고 용감해야 하며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는 고정관념은 남성우월주의 유지를 위해 남성 스스로 만든 함정"이라며, '남성다움'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9]

1995년 한국남성연구회 창립에 참여한 정채기는 남성학이 "남성에게 지워졌던 남성다움의 굴레를 벗고 참된 자아를 찾도록 연구, 교육하는 학문"이라고 밝혔다.[10] 1997년부터 일본 Men's Lib 연구회 특별위원으로 활동하며, 일본 남성 페스티벌에도 여러 차례 참석했다.[1]

그는 페미니즘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페미니즘이 간과하는 남성의 문제를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부장제가 남성에게 '남성다움'의 신화를 강요하며, 남성 역시 가부장제의 희생자라고 지적했다.[12] 그는 가부장제가 여성을 남성의 '성적 도구'로, 남성을 여성의 '돈 지갑'으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하며, 진정한 남성다움의 회복을 통해 남녀 모두 행복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82]

정채기는 1999년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하며, 직업으로 위축되는 남성 문화를 비판했다.[18] 2002년 딸사랑 아버지 모임을 발족하고 호주제 폐지 운동에 참여하는 등, 남성주의 운동을 통해 가부장제와 남아선호사상 타파에 앞장섰다.

3. 8. 2. 성역할에 대한 비판

그는 어려서부터 작은 키와 약한 체구, 눈물 많고 감성적인 성향 때문에 당시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강한 남성성에 어울리지 않아 소외감을 느꼈다.[51] 1993년 결혼을 앞두고는 남성성에 대한 반감, 가장 역할에 대한 부담감 등으로 심한 콤플렉스를 겪으며, 남성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되었다.[1] 그는 주변 남성들도 비슷한 문제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학은 왜 없나'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남성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자 했다.[1]

그는 남성에게 특정 성 역할을 강요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여겼다. 그는 남자다움, 남성성 등을 강조하는 것이 남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라고 규정했다.[86] 그는 남자들도 여자처럼 드라마를 보고, 가정일을 하는 등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1]

1990년대 초, 그는 미국, 프랑스 등지에 남성학이 있음을 알고 관련 자료를 분석했다.[1] 이후 일본과 미국의 남성학회 및 남성운동 모임에 참석하고, 미국 남성학회 정회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1] 그는 남성학을 통해 진정한 남성다움을 회복하고, 가부장적 남성다움에 대한 비판을 제기했다.[12]

1998년의 인터뷰에서 그는 "남성학에도 분파가 많아 반페미니즘부터 친페미니즘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지만 최근에는 여성학과 남성학이 통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며"성학(gerderstudies)이라는 학문이 등장한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밝혔다.[12] 그는 여성성, 남성성의 구분은 사회적인 것일 뿐이며, 남녀의 차이는 교육과 사회적 관습에 의해 강화된다고 보았다.[88]

그는 남성학을 '남성에 의한, 남성에 대한 자기 성찰'로 정의하며, 남성 스스로 지배적이고 권위적인 지위에서 벗어나 자신을 냉정하게 성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9] 이를 통해 수동적인 여성상,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남성상과 같은 잘못된 통념을 깨고, 새롭고 바람직한 남녀상을 구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69]

2006년 11월, 그는 고려대학교 학보와의 대담에서 양성평등을 위해서는 남녀가 인간적인 관점에서 생각과 느낌을 나누고 성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67]

3. 8. 3. 남자다움에 대한 비판

그는 교육학이 전공이었으나 개인적인 환경으로 남성성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1] 어려서부터 작은 키와 약한 체구, 눈물 많고 감성적인 성향은 당시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강한 남성상과 맞지 않았다.[51] 1993년 결혼을 앞두고는 콤플렉스가 절정에 달했다.[1] 그는 남자는 어떤 존재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느꼈다.[1] 그는 여성학은 있는데 왜 남성학은 없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1] 1990년대 초 미국, 프랑스 등지에 남성학이 있음을 접하고 관련 자료를 분석했다.[1]

1993년 일본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 현 오카야마 시 오카야마대학 등을 방문하여 남성학 연구 실태를 알아보고 자료를 모았다.[5] 1997년 출간된 <남성학 입문>에서 “남성문제의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6] 1999년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했다.[18] 그는 명함에 새겨진 직업을 비교하며 위축된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의 문화때문에 남성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고 보았다.[18]

그는 헛된 권위주의와 헛기침 문화부터 타파하고 헛된 권위의 벽을 남자들 스스로 허물어야 남자들 역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남자는 강하고 용감해야 하며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는 등의 고정관념은 남성우월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남성 스스로가 파놓은 함정"이라며 "남자들도 '남성답다'는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5]

2006년 11월 고려대학교 학보와의 대담에서 “사실 양성 평등이 되려면 남녀가 치열하게 싸울 부분이 있지만, 이제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생각과 느낌을 나누고 성찰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밝혔다.[67] 남성학의 등장과 확산은 여성학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여성학이 여성 해방 운동에서부터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남성학도 남성 해방이라는 ‘인간 해방’의 대의 아래 등장했다. 남성학여성학에 맞서면서 남성을 옹호하는 것이 아닌, 여성문제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인간 전체의 문제를 해결해 가려는 것이다.[68]

정채기는 “남성학은 남녀평등, 공동육아, 가사분담 등 상당부분 페미니즘과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면서도, 인간을 억압하는 요소 가운데 페미니즘이 간과하는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학문”이라고 말했다.[28] 그는 남성에게도 여성성이 필요하다고 봤다. 2004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양성성을 모두 가진 아이로 키우는 것이 남녀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밝혔다.[89] 2008년 2월 1일의 언론 인터뷰에서 “남자들은 항상 남자다워야 하고, 여성은 순종적이어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며 “각자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혼란도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하였다.[91] 그는 남자다움을 강요하는 것을 남성들에 대한 폭력으로 보았으며, 남성에게 강요되는 남성성, 성 역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21세기에는 신축성 있고 가역성 있는 새로운 남성성이 필요하다고 했다.[92]

3. 8. 4. 남성 약자론

그는 본래 교육학이 전공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환경 등으로 남성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고, 남성학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작은 키와 약한 체구 탓에 친구들에 치이며 아웃사이더로 밀려났다. 눈물 많고 감성적인 성향도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강한 남성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1993년 결혼을 앞두고는 콤플렉스가 절정에 달했다. 앞날을 기약 못하는 시간강사 생활, 유년 시절부터 겪어온 남성성에 대한 반감과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남편, 가장 역할에 대한 현실적인 결핍 등이 맞물리며 남자는 도대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밀려왔다.[1]'고 회고한다.

그는 여성학은 있는데 왜 남성의 문제에 관심 갖는 남성학은 없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일본 남성학회, 미국 남성학회와 일본, 미국의 남성운동 단체들을 연구, 관련 자료를 찾아봤다. 1993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그는 남성학 강좌가 설치된 일본의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 현 오카야마 시 오카야마대학 등을 찾아다니며 남성학 연구 실태 등을 알아보고 자료를 모으기도 했다.[5] 1997년 출간된 《남성학 입문》의 역자 머리말에서 정채기 교수는 “여성운동이 성과를 이루는 과정에서 남성들의 문제가 야기돼 1990년대에 ‘남성 문제 시대’가 도래했다”며 “남성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6]

그에 의하면 '주변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비슷하다 못해 다 똑같은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다.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학은 왜 없나'란 의문을 갖고 남성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해외의 남성학 사례들을 모으고 이론적인 근거들을 찾기 시작했다.[1] 1990년대 초 미국, 프랑스 등지에 남성학이 있음을 접하고 관련 자료들을 찾아 분석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일본미국의 남성학회와 남성운동 관련 모임에 참석하였고, 미국 남성학회의 정회원으로도 선임되었다.

1999년 그는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명함 등을 주고받는 것을 통해 서로 비교하고 위축된다는 점과, 여성적인 것이라고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바로 남성들 스스로 사회와 가정에서 도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봤다. 그는 “남성운동은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이나 수필집 살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명함에 새겨진 직업을 비교하며 위축되고, 여성이나 읽는 수필집은 남성의 권위를 해친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의 문화 때문에 남성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것이다.[18]

그는 헛된 권위주의와 헛기침 문화부터 타파하고 헛된 권위의 벽을 남자들 스스로 허물어야 남자들 역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남성학이란 한마디로 진정한 남성다움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정리했다.[12] '진정한 남성다움'은 '잘못된 남성다움'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이 비판해온 가부장적 남성다움에 대한 비판과 맥을 같이하는 면도 있다.[12] 1998년의 인터뷰에서 그는 "남성학에도 분파가 많아 반페미니즘부터 친페미니즘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지만 최근에는 여성학남성학이 통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며 "성학(genderstudies)이라는 학문이 등장한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밝혔다.[12] 그는 남성 인권 운동 외에도 좋은 아버지 되기 운동, 친구 같은 아버지, 다정한 아버지, 권위주의 버리기 등의 주제로 연구, 강연을 하기도 했다.

1998년 한국 아버지 재단 연구분과 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변화하는 시대에 대해 “남성의 소외 현상은 한국 사회만의 특이한 현상이 아니며, 현대 사회에서 구성원들의 역할이 전체적으로 변하는 물결의 일환”이라며 “가장을 비롯한 가족들이 고립된 벽에 갇히지 말고 서로의 고민과 불만, 집안일까지 적극적으로 털어놓고 나누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21]

정채기는 이혼은 잘못된 것이며 자녀들 문제, 사회적 폐해와 손실이라고 지적했다.[19] 그에 대해 성재기이혼은 당연한 권리라고 응수했다. 성재기는 결혼, 가정의 이름으로 남자들을 구속하고 속박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이혼은 밥 먹듯, 떡 먹듯이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채기는 "애초 남녀가 교제할 때 그렇게 ‘영원’의 이름으로 죽고 못 살 것 같이 하였던 언약과 행위들은 무엇이며, 수많은 하객들을 증인으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리라 맹세해 놓고, 그렇게 철천지원수같이 갈라서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럴 바에는 당초 공개적인 맹세와 약속을 하지나 말든지, 아무리 남녀 간의 사랑의 화학반응식 유효기간이 3년 전후, 아니 이제는 그보다 더 짧다는 긍정이나 부정도 곤란한 보고가 있기로서니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당사자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 와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녀들은 무슨 봉변인가! 그리고 사회적인 폐해와 손실 등은 또 얼마인가?[19]"라고 하였다. 성재기는 무조건 가정을 지키고, 가족,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만 안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반박했다. 반드시 가정을 지켜야 될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성재기는 남자들도 가정, 가족에서 벗어나고, 의무와 책임감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인간, 자유인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정채기는 아름답게 영원할 것이라 여겼던 부부가족 관계의 파괴에, 어떠한 미사여구나 변명을 전제하지 않는 가운데 “최소한으로 못한 결혼은 있어도 최대한으로 잘한 이혼은 없다.[19]"고 하였다. 성재기는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할 수 있고, 이혼도 밥 먹듯, 물 마시듯 쉬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재기에 의하면 모든 남자가 아버지가 될 의무는 없다며,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남자, 한 사람의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지적했다.

2004년부터 호주제 폐지 여론이 나타나자 정채기, 한지환 등은 호주제 폐지에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성재기는 형식적이고 허울뿐인 아버지, 남편으로서의 지위조차 없애려 한다고 반발하였다.

그는 남성이야말로 약자라고 보았다. 약자의 처지에 몰렸지만 아픔을 호소할 수 없는 남성이야말로 진정한 약자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남자다움이라는 전통적인 통념에 갇혀 마음속 응어리를 혼자 삭이는 남자들의 폐쇄적인 행위가 우울증으로 이어지고 온갖 치명적인 질병과 자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90] '자살 시도는 여자들이 더 많이 하지만 실제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는 남자가 여자에 비해 4배나 높아 성인 남자의 사망원인 중 세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내에서도 2006년 실시한 역학조사에 따르면 우울증에 걸린 환자가 자살을 시도할 확률은 10~15%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90]'고 한다.

그는 취업시장에서도 여성이 약자가 아니다, 남자가 약자가 될 수 있다고 봤다. '상징적·상대적 관점에서 볼 때 남성이 부실해졌다고 할 수 있다. 또 질적인 면에서도 전통적인 남성상이 더 이상 경쟁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봤다. 또한 '지금이 곡괭이질하는 농경 시대도 아니고 공장에서 망치질하는 산업 시대도 아닌데 힘쓰는 게 별 소용이 있겠는가. 똑똑한 머리로 컴퓨터 자판만 두드리면 못하는 게 없는 세상이다. 오히려 섬세하고 집중력을 기르도록 교육을 받은 여성이 훨씬 유리하다.[74]'고 지적했다.

그는 또 '대학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의 답안지를 보면 차이가 난다. 여학생 답안지에는 형광펜에 색깔 있는 볼펜까지 다 동원된다. 글씨도 보기 좋다. 답안지 끝에 ‘교수님 강의 잘 받았습니다’까지 써놓는다. 남학생 답안지에는 이런 게 없다. 여학생의 지적 수준이나 논리력도 별 차이가 나지 않을뿐더러 눈에 보기에도 좋으니 점수가 잘 나가는 것이다. 고시에까지 확장시키기는 무리가 있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여성이 훨씬 더 경쟁력이 있다.[74]'고 봤다.

또, 남자들에게 부과된 의무가 과중한 점도 문제점으로 제기했다. '''남자의 짝짓기 능력은 다른 남자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 외에도 가족들을 위해 자원을 축적해야 하는 힘까지 포함한다.'''[90] 이런 일은 당연히 혈족을 지키는 데는 유리하지만 질병에 대한 민감성과 각종 상처에 더욱 약해지는 몸은 물론 더 나아가 죽음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지적이다.[90]

호주제가 폐지되고 새로 임용된 판사의 64%가 여성인 2007년 당시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더 이상 마이너리티가 아닌 페미니즘을 본격적으로 비판[13]했다. 그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진 시점에서 더 이상 여성은 일방적 약자로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3. 8. 5. 여성의 공격성론

그는 여성의 공격성이 과거 1950년대 이전까지 한국의 여성들이 차별대우받던 것을 원인으로 지적했다.[71] 그는 여성의 공격성 증가를 "가족 구성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 요즘은 외동딸만 있는 집, 딸만 둘 있는 ‘딸딸이’ 집도 많다. 그런데 30~40대 엄마들은 딸에게 ‘절대 남자에게 지지 말라’고 어릴 때부터 교육을 시킨다.[71]"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젊은 엄마일수록 이런 성향은 강하다. 엄마들이 여성으로서 피해를 받아왔던 자신을 투영시키는 면도 있다. 강한 딸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얻는다. 또 자녀 수가 1~2명으로 줄어들면서 부모들은 경제적으로 아들 딸을 차별할 이유가 없어졌다. 딸에게도 전력을 다해 교육을 시킨다. 양적·질적인 면에서 여성의 경쟁력이 생긴다.[71]"고 봤다.

그는 여성도 충분히 공격적이라고 봤다. 그는 '요즘 여성은 예전에 비해 훨씬 공격성이 강해졌다. 여성이라고 해서 참고 인내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는 이미 지났다.[74]'고 봤다. 왜 여성의 공격성이 강해졌는가 하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가족 구성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 요즘은 외동딸만 있는 집, 딸만 둘 있는 ‘딸딸이’ 집도 많다. 그런데 30~40대 엄마들은 딸에게 ‘절대 남자에게 지지 말라’고 어릴 때부터 교육을 시킨다. 젊은 엄마일수록 이런 성향은 강하다. 엄마들이 여성으로서 피해를 받아왔던 자신을 투영시키는 면도 있다. 강한 딸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얻는다. 또 자녀 수가 1~2명으로 줄어들면서 부모들은 경제적으로 아들, 딸을 차별할 이유가 없어졌다. 딸에게도 전력을 다해 교육을 시킨다. 양적·질적인 면에서 여성의 경쟁력이 생긴다.[74]'고 봤다.

3. 8. 6. 여성들의 수다와 남성 스트레스론

그는 “남성운동은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이나 수필집 살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명함에 새겨진 직업을 비교하며 위축되고, 여성이나 읽는 수필집은 남성의 권위를 해친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의 문화 때문에 남성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것이다.[18]

그는 헛된 권위주의와 헛기침 문화부터 타파하고, 헛된 권위의 벽을 남자들 스스로 허물어야 남자들 역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여자들은 수다와 험담으로 스트레스를 풀지만 남자들은 그럴 방법, 수단이 없다며 남자들이 술, 담배, 알코올 중독, 담배 중독, 마약 중독이 되는 일이 많은 것은 남자들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여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슬픔에 대해 마음을 쉽게 터놓고 말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수다를 떨며 얘기한다. 하지만 남자들은 금기사항에 가까울 정도로 속마음을 얘기하지 않는다.[90] 설령 누군가를 만나 마음속 비밀을 털어놓더라도 기껏 들을 수 있는 충고는 '참으세요!'라는 말뿐이다. '인내하고 또 인내하라! 그래야 남자답다!' 남자의 응어리진 마음은 우울증으로 이어진다.[90]"고 지적했다. 정채기에 의하면 여자들은 만나면 수다를 떨고, 남의 험담을 하면서 마음대로 스트레스를 풀지만, 남자들은 그럴 수 없다, 남자들은 진중해야 한다, 남자들은 입이 무거워야 된다는 일종의 고정관념과 편견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도 풀 방법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수다야말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인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그는 "남자들은 지역과 체제를 초월해서 여자들보다 두 배 정도 더 많이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90]"며 "우울증은 많은 질병을 일으키는 암적인 존재다. 심장병, 고혈압, 뇌졸중, 각종 감염 등 질환을 앓고 있는 남자 대부분은 상당한 우울 증세를 보인다.[90]"고 언급했다. 남자는 강해야 된다는 선입견 때문에 쉽게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성 우울증 만큼이나 남성 우울증도 많으며, 남자들이 평균 수명이 여자들보다 짧은 점을 감안한다면 남성 우울증 등의 문제도 간과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우울증은 남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각종 합병증으로 나타난다. 따지고 보면 과 심장병도 스트레스성 우울증이 원인이다.[90]"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다행히도 1990년대 이후 PC 통신이 보급되고, 1990년대 후반 이후 인터넷이 보급되고, 각종 게임이 개발되면서 남자들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 수단이 늘어났다고 봤다. 따라서 게임과 인터넷 등을 통해 남성들이 스트레스를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지만, 스트레스를 완화시킬 방안이 늘어난 것 하나는 긍정적인 현상이라 볼 수 있다고 전망했다.

3. 8. 7. 장남 역할 포기론

그는 3남 1녀 중 장남이지만 형제들에게 “장남 역할을 할 자신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며 장남 포기 선언을 했다.[1] 그는 추석에도 아내가 만삭이라 전라남도 광양시의 집에 가는 대신 바로 찻길 하나 건너에 있는 처가에서 추석을 보냈다.[1] 이를 두고 ‘남자라서’, ‘여자라서’라는 관념을 초월한 자유로운 가족이라는 시각도 있다.[1]

그는 장남은 믿음직하고 듬직하다는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은 근거 없는 편견이라며 장남, 맏이이기 이전에 다른 형제들과 똑같은 아들이고 자녀라고 주장했다. 그는 장남, 맏이라는 이유로 큰아들, 형제 중 맏이에게 가족의 일을 모두 떠넘기려는 것도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

3. 9. 가족과의 대화론

그는 교육학이 전공이었지만 개인적인 환경으로 남성성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어, 남성학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그는 여성학은 있는데 남성의 문제에 관심 갖는 남성학은 없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고, 일본 남성학회, 미국 남성학회와 일본, 미국의 남성운동 단체들을 연구, 관련 자료를 찾아봤다.[1] 1993년 여름 방학, 그는 남성학 강좌가 설치된 일본의 교토대학교와 오카야마 현 오카야마 시 오카야마대학 등을 찾아다니며 남성학 연구 실태 등을 알아보고 자료를 모으기도 했다.[5] 1990년대 초 미국, 프랑스 등지에 남성학이 있음을 접하고 관련 자료들을 찾아 분석, 이후 그는 일본미국의 남성학회와 남성운동 관련 모임에 참석하였고, 미국 남성학회의 정회원으로도 선임되었다.

1997년 출간된 <남성학 입문>의 역자 머리말에서 정채기 교수는 “여성운동이 성과를 이루는 과정에서 남성들의 문제가 야기돼 1990년대에 ‘남성 문제시대’가 도래했다”며 “남성문제의 해결을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6] 그는 “남성운동은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이나 수필집 살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18] 1999년 그는 명함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명함 등을 주고 받는 것을 통해 서로 비교하고 위축된다는 점과, 여성적인 것이라고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바로 남성들 스스로 사회와 가정에서 도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봤다. 한편 그는 헛된 권위주의와 헛기침 문화부터 타파하고 헛된 권위의 벽을 남자들 스스로 허물어야 남자들 역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정채기는 이혼은 잘못된 것이며 자녀들 문제, 사회적 폐해와 손실이라고 지적했다.[19] 성재기는 결혼, 가정의 이름으로 남자들을 구속하고 속박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이혼은 밥 먹듯, 떡 먹듯이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채기는 "애초 남녀가 교제할 때 그렇게 ‘영원’의 이름으로 죽고 못 살 것 같이 하였던 언약과 행위들은 무엇이며, 수많은 하객들을 증인으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리라 맹세해 놓고, 그렇게 철천지원수 같이 갈라서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럴 바에는 당초 공개적인 맹세와 약속을 하지나 말든지, 아무리 남녀 간의 사랑의 화학반응식 유효기간이 3년 전후, 아니 이제는 그보다 더 짧다는 긍정이나 부정도 곤란한 보고가 있기로서니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당사자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 와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녀들은 무슨 봉변인가! 그리고 사회적인 폐해와 손실 등은 또 얼마인가?[19]"라고 하였다. 성재기는 무조건 가정을 지키고, 가족,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만 안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반박했다. 반드시 가정을 지켜야 될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성재기는 남자들도 가정, 가족에서 벗어나고, 의무와 책임감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인간, 자유인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정채기는 아름답게 영원할 것이라 여겼던 부부가족 관계의 파괴에, 어떠한 미사여구나 변명을 전제하지 않는 가운데 “최소한으로 못한 결혼은 있어도 최대한으로 잘한 이혼은 없다.[19]"고 하였다. 성재기는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할 수 있고, 이혼도 밥 먹듯, 물 마시듯 쉬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재기에 의하면 모든 남자가 아버지가 될 의무는 없다며,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남자, 한 사람의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남성학이란 한마디로 진정한 남성다움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정리했다.[12] 1998년의 인터뷰에서 그는 "남성학에도 분파가 많아 반페미니즘부터 친페미니즘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지만 최근에는 여성학남성학이 통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며 "성학(genderstudies)이라는 학문이 등장한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밝혔다.[12] 그는 변화하는 시대에 대해 “남성의 소외 현상은 한국 사회만의 특이한 현상이 아니며, 현대 사회에서 구성원들의 역할이 전체적으로 변하는 물결의 일환”이라며 “가장을 비롯한 가족들이 고립된 벽에 갇히지 말고 서로의 고민과 불만, 집안일까지 적극적으로 털어놓고 나누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21]

그는 남성의 아버지로서의 고충과 함께 그 대안으로 사소한 일상을 가족과 함께하는 연습을 들었다. “큰 평수의 아파트, 최신 컴퓨터, 해외유학 등 남자들은 아내와 자식에게 무조건 크고 굵직한 것을 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 책임과 부담감을 느낀다”면서 “부담 없이 수다 떨기, 영화 보기 등 사소한 일상을 함께 하는 훈련이 필요하며 그 시작은 대화”라고 강조한다.[93] 대화는 부부, 또 부모와 자식을 이어주는 다리이기 때문이다.[93] 그는 가족들과 일상을 같이하기와 대화를 아버지로서의 고충을 해결하는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3. 10. 모성애 허구론

그는 2004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남자를 연구하고 관련된 운동을 전개하면서, 나는 모성애를 믿지 않게 됐다'고 밝혔다.[79] 그는 자녀를 학대하거나 고아원에 버리는 여성들의 존재를 보면서 모성애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는 모성애는 절대적이거나 순도 100%의 의무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79] 모성애는 문화적,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지 여성의 본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만약 모성애가 지고지순한 것이라면, 자기 자식들을 버리고 학대하는 어머니들이 있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여성문제 전문가들 역시 “모성애는 다만 신화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79]

3. 11. 성매매론 비판

정채기는 성매매를 여성 비하의 결정적인 부분이라 생각했으며, 성 구매자인 남성들이 먼저 결자해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2002년 1월 28일 한겨레와 딸사랑아버지모임 회원들과의 인터뷰에서 남성 스스로 성매매에 대한 결단을 촉구했다.[94] 그는 대한민국에서는 여성계의 노력은 있지만 남성들의 노력이 전무한 상태이며,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각오를 하고라도 개개인이 결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94]

3. 12. 성매매 특별법 비판

그는 성매매를 반대하고 남성들이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지 말고 함께 볼 것을 주문하였다. 한편 성매매 특별법이 남성들을 배려하지 않았다는 점, 남성들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였어야 했는데 정서적인 접근에 실패하여 오히려 반발이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1995년의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미 유럽미국에선 여성학 대신 젠더학이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이번 일본 방문 기간에도 도쿄에서 젠더스터디학회가 열렸는데 남녀 한 명씩이 공동대표로 발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성매매특별법만 해도 파트너십이 발휘될 수 있도록 남자들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여야 하는데 정서적인 접근에 실패해 되레 반발이 나타나고 있는 거죠. 남녀가 상생의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1]"라고 하였다.

그는 남성학, 여성학이 아니라 서로를 파트너로 보는 젠더학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1]

4. 약력

5. 저서

정채기는 교육학을 전공했지만,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남성성에 대한 의문을 품고 남성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1997년에는 《남성학 입문》을 번역하여 출간하면서, 여성운동의 성과로 인해 남성 문제가 야기되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남성학과 남성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6] 그는 1990년대 초부터 미국, 프랑스, 일본 등지의 남성학 관련 자료를 찾아 분석하고, 미국 남성학회 정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1]

그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단독 저서


5. 1. 공저


  • 《아버지 리더십》(신원문화사, 2010), 장경근 외 공저
  •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학과 남성운동》(원미사, 2007), 사사키 마사노리, 이재택 외 공저
  • 《웃어라 아버지》(신원문화사, 2012), 장경근 공저
  • 《유아영재 교육개론》 (도서출판 청송, 2004), 정송, 임혜숙 공저
  • 《아버지가 나서면 딸의 인생이 바뀐다》 (황금부엉이, 2005)
  • 《평생교육의 이론과 실제》 (교육과학사, 1996), 김충기 공저
  • 《매력 내조기》 (베스트셀러, 1996), 김경숙 외 공저
  • 《젠더학》(일본 세계사상사, 2000), 공저
  • 《유아영재교육개론 I》 (한국유아영재교육연구소, 2004), 정송, 임혜숙 공저
  • 《실기 교육방법의 이해》 (동문사, 2006), 지용근 공저

5. 2. 논문


  • 〈인생목적수준과 학업성취도와의 상관관계 연구〉 (석사학위 논문)
  • 〈자아개념, 자아정체성 및 내외통제성이 진로결정에 미치는 영향〉 (박사학위 논문)
  • 〈아버지헌장에 대한 고찰 및 아버지운동의 종합적 연구〉
  • 〈양성평등교육의 이해〉
  • 〈교양과목 프로그램 개발의 필요성에 대한 연구〉
  • 〈청소년을 위한 의사소통 게임〉
  • 〈놀이의 연구〉
  • 〈아버지 문제와 그 해결 방안〉(1997)
  • 〈젠더론 연구: 남성학에 대한 기초 연구〉 (일본 젠더학회)
  • 〈성격유형에 따른 자아존중감의 차이 연구〉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3)
  • 〈자아개념, 자아정체감 및 내, 외 통제성이 진로결정에 미치는 영향〉(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1991), 미간행 박사학위 논문

5. 3. 역서


  • 진로결정척도 (Assessment of Career Decisio Making: ACDM) (하렌 저, 1991)
  • 남성다움의 행방
  • 남성학이란 무엇인가 (C. W. Franklin D 저, 삼선, 1996)
  • 남성학 입문 (이토 카미오 저, 교육과학사, 1997)
  • (만화로 독파하는) 타락론 백치 (사카구치 안고 지음, 신원문화사, 2010), 조경미 공역

5. 4. 기고문

그는 genderstudies영어라는 학문이 등장한 것도 그러한 맥락이라고 밝혔다.[12] 그는 남성 인권 운동 외에도 좋은 아버지 되기 운동, 친구같은 아버지, 다정한 아버지, 권위주의 버리기 등의 주제로 연구, 강연을 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다음이 있다.

  • 〈하남시 여성들의 '위대한 혁명과 희망'을 본다!〉 - 교차로저널 칼럼 (2010년 7월 15일)
  •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몇 가지 방법〉 - 교차로저널
  • 《남성학과 남성운동》
  • 교육심리학》 (2003년)
  • 이상심리학》 (2003년)
  • 《남자로 산다는 것》 (1998년)
  • 《아버지의 리더십》 (2010년)
  • 《페미니즘의 남성학과 남성운동》 (2007년)
  • 《평생교육의 이론과 실제》 (1996년)
  • 《남성학과 남성운동》 (2000년, 공저)
  • 《남성운동의 이론과 실제》
  • 《아버지의 학교》

6. 학력

7. 수상 경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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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여자도 군대가라" 한국남성협의회 등장 http://www.womennews[...] 여성신문 1999-12-10
[3] 뉴스 정채기 교수, 여수 브랜드 ‘함꾸내’ 제안 눈길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2010-09-27
[4] 뉴스 "[정채기 회장] 집안일 아빠 먼저 두아들 양성평등 저절로" http://www.veritas-a[...] 베리타스뉴스 2008-01-09
[5] 뉴스 남성학 강사 정채기씨 '남자답다'는 고정관념 깹시다 한겨레신문 1994-10-18
[6] 웹사이트 가부장제 극복 위해 '젠더학'에 주목해야 http://www.kukey.com[...]
[7] 뉴스 건국대 여학생회 24일'남성학'토론회 한겨레 1994-05-10
[8] 웹사이트 여성학을 비판하는 시선들 http://www.womennews[...] 여성신문 2007-07-20
[9] 뉴스 남성학 강사 정채기씨 '남자답다'는 고정관념 깹시다 한겨레 1994-10-18
[10] 웹사이트 "[문화현실] 고개 숙인 남자, 설땅이 없다" http://www.sisapress[...] 시사저널 1996-06-13
[11] 뉴스 "[모임]「아버지의 전화」 출범식"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12] 뉴스 "[학술] \"진정한 남자란 무엇인가\" `남성학' 본격 등장"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998-02-16
[13] 뉴스 "남자들은 모른다고? 여자들이 모르는 것도 많아!" 조선일보 2007-07-17
[14] 뉴스 "심리탐구<판도라의 상자>(채널 23 오전 10시)" 한겨레 1995-04-12
[15] 웹사이트 제1회 전국 아버지 대회 https://news.naver.c[...]
[16] 웹사이트 사회 중심을 뒤흔드는 ‘절반의 힘’ http://www.sisapress[...] 시사저널 2000-03-23
[17] 웹사이트 ‘딸사랑’ 운동 동참한 아버지들 http://legacy.www.ha[...] 한겨레신문 2001-06-26
[18] 웹인용 “여성에게 빼앗긴 권리 되찾겠다” http://www.root.or.k[...] 2013-12-26
[19] 웹사이트 이혼에 대한 단상 http://www.gycitizen[...]
[20] 웹사이트 "[일본 남성페스티벌] \"남자도 해방되고 싶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998-09-08
[21] 뉴스 "[울고 싶은 남자들<1>가정의 외딴섬, 家長]"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5-08-29
[22] 뉴스 "「10대의 性산업유입과 남성性문화」토론회"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1999-10-30
[23] 웹사이트 십대들은 방황한다 http://www.womennews[...] 여성신문 1999-11-26
[24] 웹사이트 "[남성들의 반란]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http://weekly1.chosu[...] 조선일보 1999-11-24
[25] 문서 김재경이 공동대표를 맡았다.
[26] 뉴스 "[책] 정유성교수 '따로와 끼리~' 독립적 남성학 제시"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1-05-14
[27] 뉴스 “힘뺏겼다”-“힘더빼야” 男權운동 두 목소리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5-03-17
[28] 웹사이트 여성과 동등해지고 싶다 http://legacy.h21.ha[...] 한겨레21 1998-10-01
[29] 웹사이트 "[TV모니터링] SBS-TV \"갑론을박 동서남북\"" http://www.womennews[...] 여성신문 1999-02-05
[30] 뉴스 "[모락모락] '아버지 학교' 신청 받아요"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1-07-26
[31] 웹사이트 백지연·최병모씨 호주제폐지 홍보대사 임명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1-07-01
[32] 뉴스 "[모락모락] '아버지 학교' 신청 받아요"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1-07-26
[33] 웹사이트 남자들 역차별, 할말은 하자…'남성협' 창립 권익 되찾기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2-02-23
[34] 웹사이트 '군복무 가산점 위헌' 파장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2-02-23
[35] 웹사이트 이혼 권하는 사회, 남자들이 사는 법 http://www.sisapress[...] 시사저널 2001-09-03
[36] 뉴스 女心 잡는 서비스 ‘맨’… ‘금남의 벽’ 무너져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2009-05-11
[37] 뉴스 ‘딸사랑 아버지모임’ 결성… “남아선호 조장 호주제 없애야”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2001-06-23
[38] 웹인용 '딸사랑아버지모임' 발족기자회견 자료 http://blog.woman21.[...] 2013-11-02
[39] 뉴스 내 딸 당당하게 키웁시다 https://news.naver.c[...] 매일경제 2004-06-20
[40] 뉴스 "[호주제폐지 홍보대사] 백지연, 최병모씨"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02-07-01
[41] 뉴스 "[가정] \"아들에게 남녀 상생의 법칙 가르치자\"" https://news.naver.c[...] 세계일보 2004-08-08
[42] 뉴스 '힘자랑' 여성한테 하지마라 https://news.naver.c[...] 한겨레
[43] 뉴스 '아버지 이름으로' 여성 학대 막겠다 http://article.joins[...]
[44] 뉴스 "[가정] 여성폭력 \"좌시하지 않겠다\"" https://news.naver.c[...] 세계일보 2003-11-18
[45] 뉴스 여성운동 “이제 우리가 뛰겠습니다”…딸키우는 심정으로 아빠들이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2001-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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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서적 아버지 문제와 그 해결 방안:제1회 전국 아버지대회 기념 세미나 아버지모임전국연합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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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뉴스 정채기 교수 “아빠와의 스킨십이 사회성·성적 향상”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10-12-07
[79] 뉴스 이 시대 아빠들에게 보내는 편지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4-05-26
[80] 간행물 과밀·사상 최고의 경쟁을 뚫고 지나온「베이비 붐 세대」가 마주한 것은 早期퇴직과 노후불안이다 http://monthly.chosu[...] 월간조선 2005-04
[81] 뉴스 요즘 좋은 아빠는 숨차다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02-08-02
[82] 뉴스 아버지! 세상은 당신을 변하라고 한다 https://news.naver.c[...] 주간경향 2005-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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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뉴스 "[문화칼럼/정채기] 남성이 테러 당하고 있다"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0-12-11
[87] 뉴스 인기폭발 '삼순이' 아내감으론 몇점? https://news.naver.c[...] 헤럴드경제 2005-07-14
[88] 뉴스 “남성이 약해진 것 아니라, 여성이 강해진 것” 주간조선 2005-02-01
[89] 뉴스 "[KIDS] 우리아이 어떻게 키워갈까"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2004-08-09
[90] 뉴스 아버지들의 장수(長壽)를 기원하며.. http://www.kocus.com[...] 교차로저널 2012-05-01
[91] 뉴스 "[세계속의 한국] 알파걸… 골드미스… 애완남… 전통적 性역할 해체" https://news.naver.c[...] 세계일보 2008-02-01
[92] 뉴스 "[문화현실] 고개 숙인 남자, 설땅이 없다" https://www.sisajour[...] 시사저널 1996-06-13
[93] 뉴스 "[신년특집/新가족] 21세기형 가장 이렇게 바뀐다" http://news.naver.co[...] 경향신문 2002-12-31
[94] 뉴스 “딸의 아버지로 부끄럽지 않기위해” http://legacy.www.ha[...] 한겨레신문 2002-01-28
[95] 간행물 중년의 벽, 좌절과 도약의 갈림길 https://shindonga.do[...] 신동아 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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