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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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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통론은 한 시대에 하나의 왕조만이 정통성을 가진다는 관점으로,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는 공자의 정명사상과 추연의 음양오행 사상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소동파는 혼란스러운 천하를 통일하여 평화롭게 하는 것에 정통성을 부여했다. 중국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정통론 논쟁이 시작되어 위, 촉, 오 중 누가 한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했는지를 두고 다투었으며, 시대에 따라 위정통론과 촉한정통론이 대립했다. 한국에서는 삼국 시대의 정통 왕조를 두고 신라정통론, 고구려정통론, 삼국무통론 등이 논의되었으며, 현대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과 과거사 문제 등이 정통성 논쟁으로 이어진다. 일본에서는 남북조 시대에 남조정통론, 북조정통론, 양통대립론, 양통병립론 등 다양한 견해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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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론
정통론
개요정통론(正統論)은 역사적 정통성을 이념으로 하는 사상이다.
정의역사적 정통성을 이념으로 하는 사상
역사
동아시아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왕조 교체기에 이전 왕조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새로운 왕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통론이 대두되었다.
주요 내용춘추전국시대: 공자춘추를 통해 주나라를 회복하고 오패의 패도정치를 비판하며 정통론을 제시했다.
위진남북조시대: 위나라, 촉한, 오나라 중 누가 한나라의 정통을 계승했는지 논쟁이 벌어졌다.
송나라: 성리학자들이 북벌론을 주장하며 금나라를 오랑캐로 규정하고 중화사상을 강조했다.
원나라: 요나라, 금나라, 송나라 3국의 정통성을 모두 인정하는 '삼통론'을 채택하여 중국 본토를 지배하는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려 했다.
명나라: 주자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아 중화민족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청나라: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중화사상을 수용하여 중국의 정통 왕조임을 주장했다.
영향정통론은 동아시아 각국의 왕조 교체와 정치적 정당성 확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중화사상소중화사상의 형성에 기여했다.

2. 연원

공자의 정명사상과 추연의 음양오행사상은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정통론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춘추》에서 공자는 ‘대일통(大日統)’이라는 말로써, 한 시대에 두 개 이상의 왕조가 존재하더라도 천하에는 하나의 정통만이 있다고 보아 수직적 정통관의 기원이 되었다. 음양오행사상은 전후 왕조 교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수평적 정통론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소동파는 저서 《후정통론(後正統論)》에서 “正이란 천하의 부정을 바로잡는 것이며, 統이란 분열되어 있는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라고 하여, 혼란하고 분열된 천하를 다시 통일하여 평화롭게 하는 것에 정통을 부여하였다.

2. 1. 유교 사상

공자의 정명사상과 추연의 음양오행사상은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정통론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춘추》에서 공자는 ‘대일통(大日統)’이라는 말로써, 한 시대에 두 개 이상의 왕조가 존재하더라도 천하에는 하나의 정통만이 있다고 보아 수직적 정통관의 기원이 되었다. 음양오행사상은 전후 왕조 교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수평적 정통론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소동파는 저서 《후정통론(後正統論)》에서 “正이란 천하의 부정을 바로잡는 것이며, 統이란 분열되어 있는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라고 하여, 혼란하고 분열된 천하를 다시 통일하여 평화롭게 하는 것에 정통을 부여하였다.

2. 2. 음양오행 사상

공자의 정명사상과 추연의 음양오행사상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춘추》에서 공자는 ‘대일통(大日統)’이라는 말로써, 한 시대에 두 개 이상의 왕조가 같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직 천하에는 하나의 정통만이 있다고 보아 수직적 정통관의 기원이 되었다. 한편 음양오행사상은 전후의 왕조 교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수평적 정통론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소동파는 그의 저서 《후정통론(後正統論)》에서, “正이란 천하의 부정을 바로잡는 것이며, 統이란 분열되어 있는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라고 하여 어지럽고 분열되어 있는 천하를 다시 하나로 합쳐 천하를 평화로이 하는 것에 정통을 부여하였다.

2. 3. 소동파의 정통론

소동파는 그의 저서 《후정통론(後正統論)》에서, “正이란 천하의 부정을 바로잡는 것이며, 統이란 분열되어 있는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라고 하여 어지럽고 분열되어 있는 천하를 다시 하나로 합쳐 천하를 평화로이 하는 것에 정통을 부여하였다.

3. 중국의 정통론

3. 1. 삼국정통론

중국에서의 정통론에 대한 논의는 삼국 시대로부터 본격적으로 출발하였다. 진시황제가 통일한 천하를 한나라가 이어받았으나, 후한 말기에 , , 로 분열되었다. 위나라는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세워졌고, 중원 지방을 포함한 중국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위나라의 영역은 후한 13주 가운데 9주에 달해 국력에서 촉한이나 동오를 압도하였다. 익주에 자리잡은 촉한유비가 혈통상의 정통성을 앞세워 한나라의 재건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촉한은 흥한(興漢)을 기치로 내걸고 정식 국호는 한(漢)으로 삼았으며, 헌제에게 시호를 올리는 등 한나라와의 연속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위나라촉나라 중 누가 한나라로부터 정통을 이어받았느냐는 삼국정통론의 논쟁을 낳게 된다.

한 왕조(위나라)는 선양이라는 적법한 형식을 거쳤고, 인적·물적 자원에서 우위에 있었기에 정통 승계가 자신에게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다른 왕조(촉나라)는 한나라와 위나라의 선양은 강제에 의한 것이므로 적법하지 않으며, 명분과 당위의 차원에서 한나라를 명분적·정신적으로 계승한 것은 자신의 왕조라고 주장한다. 이렇듯 삼국정통론의 논쟁에는 명분과 실리, 당위와 존재, 이상과 현실, 정의와 실력 등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첨예하게 견해가 나뉘었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아 위나라 황제들에게만 제(帝)를 붙이고, 기(紀)도 위나라 군주에게만 썼으며, 연호도 한나라와 위나라의 연호를 그대로 썼다.

동진습착치는 《한진춘추》에서 촉한정통론을 펼쳤다. 촉한을 정통으로 삼고 위나라를 찬탈로 규정함으로써 환온의 반역을 저지하려 했던 것이다.

북송 시대에는 다시 위정통론이 힘을 얻게 된다. 구양수위나라가 정통을 이어받은 왕조라고 주장했고 소동파도 이에 힘을 보탰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학식이 천박하여 정윤(정통 비정통)의 구분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는 여러 왕조가 있던 시기에도 기년의 연호로 시간을 나타내야 했기에 위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

사마광은 촉한정통론에 대해서도, 소열제의 한이 광무제진의 원제와 비교하여 한나라의 유통을 잇게 할 수 없다고 평했다.

남송명나라 시대에는 촉한정통론이 압도하게 된다. 주희(주자)는 《자치통감 통감강목》에서 촉한정통론을 주장한다. 성리학을 주창한 주희는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 사조는 촉한정통론을 보다 강화시켰다. 《자치통감》을 요약한 강기의 《통감절요》도 촉한의 연호를 따랐다. 이러한 흐름은 명대 말까지 이어졌고,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도 탄생한다. 주자의 정통론 사상은 성리학을 국가 철학으로 삼았던 조선에도 전해져 득세하게 된다.

청나라에 들어서는 정통론 자체의 문제에서 벗어난 논의들이 주를 이룬다. 왕부지는 《독통감론》에서 습착지와 주자를 비판하였다. 장학성은 《문사통의》에서 진수사마광 모두 각자 자신이 처한 시대 상황에 따라 사서를 기록한 것이라고 말했다.

3. 1. 1. 위정통론

중국에서의 정통론에 대한 논의는 삼국 시대로부터 본격적으로 출발하였다. 진시황제가 통일한 천하를 한나라가 이어받았으나, 후한 말기에 , , 로 분열되었다. 위나라는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세워졌고, 중원 지방을 포함한 중국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위나라의 영역은 후한 13주 가운데 9주에 달해 국력에서 촉한이나 동오를 압도하였다. 익주에 자리잡은 촉한유비가 혈통상의 정통성을 앞세워 한나라의 재건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촉한은 흥한(興漢)을 기치로 내걸고 정식 국호는 한(漢)으로 삼았으며, 헌제에게 시호를 올리는 등 한나라와의 연속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위나라촉나라 중 누가 한나라로부터 정통을 이어받았느냐는 삼국정통론의 논쟁을 낳게 된다.

한 왕조(위나라)는 선양이라는 적법한 형식을 거쳤고, 인적·물적 자원에서 우위에 있었기에 정통 승계가 자신에게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다른 왕조(촉나라)는 한나라와 위나라의 선양은 강제에 의한 것이므로 적법하지 않으며, 명분과 당위의 차원에서 한나라를 명분적·정신적으로 계승한 것은 자신의 왕조라고 주장한다. 이렇듯 삼국정통론의 논쟁에는 명분과 실리, 당위와 존재, 이상과 현실, 정의와 실력 등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첨예하게 견해가 나뉘었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아 위나라 황제들에게만 제(帝)를 붙이고, 기(紀)도 위나라 군주에게만 썼으며, 연호도 한나라와 위나라의 연호를 그대로 썼다.

동진습착치는 《한진춘추》에서 촉한정통론을 펼쳤다. 촉한을 정통으로 삼고 위나라를 찬탈로 규정함으로써 환온의 반역을 저지하려 했던 것이다.

북송 시대에는 다시 위정통론이 힘을 얻게 된다. 구양수위나라가 정통을 이어받은 왕조라고 주장했고 소동파도 이에 힘을 보탰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학식이 천박하여 정윤(정통 비정통)의 구분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는 여러 왕조가 있던 시기에도 기년의 연호로 시간을 나타내야 했기에 위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

사마광은 촉한정통론에 대해서도, 소열제의 한이 광무제진의 원제와 비교하여 한나라의 유통을 잇게 할 수 없다고 평했다.

남송명나라 시대에는 촉한정통론이 압도하게 된다. 주희(주자)는 《자치통감 통감강목》에서 촉한정통론을 주장한다. 성리학을 주창한 주희는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 사조는 촉한정통론을 보다 강화시켰다. 《자치통감》을 요약한 강기의 《통감절요》도 촉한의 연호를 따랐다. 이러한 흐름은 명대 말까지 이어졌고,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도 탄생한다. 주자의 정통론 사상은 성리학을 국가 철학으로 삼았던 조선에도 전해져 득세하게 된다.

청나라에 들어서는 정통론 자체의 문제에서 벗어난 논의들이 주를 이룬다. 왕부지는 《독통감론》에서 습착지와 주자를 비판하였다. 장학성은 《문사통의》에서 진수사마광 모두 각자 자신이 처한 시대 상황에 따라 사서를 기록한 것이라고 말했다.

3. 1. 2. 촉한정통론

진수가 《삼국지》를 편찬하면서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은 것에 대해, 동진습착치는 《한진춘추》에서 촉한정통론을 주장했다. 습착치가 촉한정통론을 펼친 것은 동진의 제위를 넘보던 환온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한 광무제부터 서진 민제까지의 역사를 다룬 《한진춘추》에서 촉한을 정통으로 삼고 위나라의 선양을 찬탈로 규정함으로써 환온의 반역을 저지하려 했다.

북송 시대에는 구양수와 소식 등이 위정통론을 주장하였으나,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정통론에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연호는 위나라의 것을 사용했지만, “학식이 천박하여 정윤(정통 비정통)의 구분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는 후대의 정통론이 한쪽으로 치우친 논의이며 공정한 통론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송·제·양·진·후량·후당·후진·후한·후주의 연호를 사용해 각 나라들의 사실을 기록했을 뿐, 정통과 비정통을 구분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또한 소열제의 한나라가 광무제진의 원제처럼 한나라의 유통을 잇는다고 보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남송주희는 《자치통감강목》에서 촉한정통론을 주장했다. 성리학을 통해 정통론을 철학적 담론으로 이끌었으며,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 사조는 촉한정통론을 강화시켰다. 《자치통감》을 요약한 《통감절요》도 촉한의 연호를 따랐다. 이러한 흐름은 명대 말까지 이어져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에서도 성리학의 영향으로 촉한정통론이 득세하였다.

청나라에서는 정통론 자체에서 벗어난 논의가 주를 이루었다. 왕부지는 《독통감론》에서 습착지와 주자를 비판했고, 장학성은 《문사통의》에서 진수와 사마광이 각자 시대 상황에 따라 사서를 기록했다고 주장했다.

3. 1. 3. 중립적 입장

북송사마광은 정통론 논쟁에 대해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자치통감》에서 여러 왕조가 있던 시기에도 기년의 연호로 시간을 나타내야 했기에 위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학식이 천박하여 정윤(정통 비정통)의 구분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치통감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또한 그는 촉한정통론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3. 1. 4. 청대의 비판적 논의

청나라에 들어서는 조위(위나라)정통론과 촉한정통론의 분쟁보다는 정통론 자체의 문제에서 벗어난 논의들이 좀 더 주를 이룬다. 명말까지 우세하였던 촉한정통론을 비판하면서 정통론의 기저에는 각 사가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이 깔려있다고 분석한다. 왕부지는 《독통감론》에서 “촉한이 정통이라고 하지만 정통은 진으로 넘어갔으며 진은 위를 찬탈하였는데 어찌하여 한의 황통이 계승되어 건국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이미 없어진 도를 이어지도록 계속 쓸데없이 말하니 무엇 때문인가.”라면서 습착치주희를 비판하였다. 장학성은 《문사통의》에서 “(사람들이) 《삼국지》와 《자치통감》을 계속 비난하고 있는데, 진수서진의 사람이고, 사마광북송의 사람이니 조위(위나라)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군주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라고 하여 진수와 사마광 모두 각자 자신이 처한 시대 상황에 따라 사서를 기록한 것이라고 말했다.

3. 2. 기타 정통론 사례

사마천의 《사기》는 〈본기〉의 편제를 통해서 독자적인 정통론을 펼쳤다. 초한 전쟁 당시 항우도 정통으로 보아 본기로 서술하였으며, 여후의 집권기도 실제 재위한 황제인 혜제 및 두 소제가 아닌 〈여태후본기〉로 기록하였다. 공자를 존숭하는 의미에서 인물의 기록인 〈열전〉이 아니라 제후의 기록인 〈세가〉로 기록한 것도 특징이다.

4. 한국의 정통론

한국 역사의 정통에 대한 논의는 조선시대 무렵에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성리학적 명분론(名分論)에 입각하여 한국 역사의 정통을 결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으며 많은 학자들이 이에 참여하였다. 이에 따라 일반적으로 합의된 정통 왕조는 다음과 같다.

기자조선 ---- 신라 - 고려 - 조선

이러한 정통 논쟁에서 중요한 쟁점으로 대두되었던 것은 여러 국가가 병존하였던 삼국시대 및 후삼국시대, 혈통에 의심을 받았던 고려 우왕창왕, 역사로 인정하기에 사료가 부족하고 신화적 요소가 강했던 단군조선, 삼한 등이었다. 특히 삼국시대의 정통 왕조를 놓고 많은 주장이 나타났으며, 조선시대에는 신라정통론과 삼국무통론이 주요하게 논의되었고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최근에 이르기까지는 신라정통론과 고구려정통론이 주로 대립하고 있다.

4. 1. 삼한정통론

이익(李瀷)은 단군(檀君)이 나라의 시조이며 기자조선이 이를 계승했고 이것이 다시 마한(馬韓)으로 이어졌으므로 마한이 우리나라의 정통이라고 파악했다. 안정복(安鼎福)은 이익의 사상을 이어받아 《동사강목(東史綱目)》, 《열조통기》등을 통해 전통적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한국의 독자적 정통론으로서 삼한정통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일반적으로 조선 중후기의 역사서는 삼한 가운데 마한을 정통으로 삼아 역사를 서술하였다. 마한의 초대 왕으로 일컬어지는 준왕(準王)에서 시작하여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이 마한을 정복하는 7년까지의 역사를 마한의 기년으로 보았으며 마한 9대 왕의 연표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4. 2. 삼국정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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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 1. 신라정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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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 2. 고구려정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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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 3. 삼국무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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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 현대 한국의 정통성 논쟁

4. 3. 1.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건국절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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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 2. 친일파 및 과거사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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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본의 정통론

5. 1. 남북조 정윤론

일본의 일본 남북조시대에 남북조 간의 정통과 비정통에 관한 논의이다. 남조정통론(南朝正統論), 북조정통론(北朝正統論), 양통대립론(兩統對立論), 양통병립론(兩統竝立論)의 견해가 나뉘어있다.

5. 1. 1. 남조정통론

일본의 일본 남북조시대에 남북조 간의 정통과 비정통에 관한 논의이다. 남조정통론, 북조정통론, 양통대립론, 양통병립론의 견해가 나뉘어있다.

5. 1. 2. 북조정통론

일본의 남북조 정윤론은 일본의 남북조시대에 남북조 간의 정통과 비정통에 관한 논의이다. 남조정통론(南朝正統論), 북조정통론(北朝正統論), 양통대립론(兩統對立論), 양통병립론(兩統竝立論)의 견해가 나뉘어있다.

5. 1. 3. 양통대립론

일본의 남북조시대에는 남북조 간의 정통과 비정통에 관한 논의인 남북조 정윤론이 있었다. 남조정통론(南朝正統論), 북조정통론(北朝正統論), 양통대립론(兩統對立論), 양통병립론(兩統竝立論) 등으로 견해가 나뉘었다.

5. 1. 4. 양통병립론

일본의 남북조시대에 남북조 간의 정통과 비정통에 관한 논의인 남북조 정윤론에는 양통병립론(兩統竝立論)의 견해가 있다.

6. 기타 정통론

6. 1. 북아메리카의 정통론

6. 2. 교황의 정통론

6. 3. 북유럽의 정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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