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사회제도
1. 개요
조선의 사회 제도는 신분 제도, 유교적 가치관, 가족 제도, 여성의 삶, 사회 변동, 납세 및 병역 제도 등 다양한 측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분 제도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구분되어 사회 각 분야에 영향을 미쳤으며, 유교적 가치관은 사회 전반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족 제도는 가부장제를 근간으로 하여 혼인을 통해 가족을 이루었으며, 여성은 사회적 제약 속에서도 교육과 문화를 향유했다. 조선 후기에는 사회 모순 심화로 인해 신분 질서가 동요하고 다양한 사회 변혁 운동이 일어났으며, 납세와 병역 제도는 국가 운영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서구의 시각은 조선 사회를 다양한 측면에서 기록했지만, 서구 중심적인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
조선의 사회 제도 -
도첩제
도첩제는 국가가 승려의 출가와 득도를 관리하기 위해 발급한 증명서 제도로, 중국, 한국, 일본에서 각기 다른 양상으로 운영되었으며, 승려의 수를 제한하거나 재정 수입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
사회 계급 -
시민
시민은 법적인 권리와 의무를 지니는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며, 고대 그리스 폴리스에서 유래하여 국민 국가의 구성원, 참정권과의 관계, 세계 시민주의 등의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
사회 계급 -
부르주아지
부르주아지는 중세 도시의 상공업자에서 유래하여 자본을 축적한 자본가 계급을 의미하며, 봉건 사회 붕괴와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으나,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노동자 계급과 대립하며 문화적 헤게모니와 과시적 소비로 비판받고, 역사와 예술에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된다.
2. 신분 제도
조선 사회는 엄격한 신분 제도를 기반으로 운영되었다. 이론적으로는 양반, 상민, 천민의 세 계급으로 구분되었으나, 실제로는 양반과 상민 사이에 중인이라는 중간 계층이 존재하여 네 개의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신분 구조는 고려 시대부터 이어져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약 5세기 동안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는 특징을 가진다.
각 신분 계층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양반]]: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아우르는 지배 계층으로, 유학을 공부하여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조세, 군역 등의 의무에서 면제되는 등 각종 특권을 누렸으며, 토지와 녹봉을 받아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양반 수가 증가하면서 한정된 관직을 둘러싼 사화나 당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문관을 우대하고 무관을 낮게 보는 풍조와 서얼을 차별하는 제도가 존재했다.
* [[중인]]: 양반 아래, 상민 위에 위치한 중간 계층으로, 주로 외국어, 의학, 법률 등 전문 기술직을 세습하였다. 양반의 서얼도 중인에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법적으로 고위 관직 진출이 제한되었다(한품서용). 일부는 이서(吏胥)·역리(驛吏)·군교(軍校) 등 말단 행정 실무를 담당하며 직접 평민들을 지배하는 실권을 쥐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 [[상민]]: 인구의 대다수(약 80%)를 차지하는 평민 계층으로, 주로 농업에 종사했다. 이들은 조세, 공물(貢賦), 군역 등 국가에 대한 각종 의무를 부담했으며, 지방관이나 향리들의 수탈 대상이 되기도 하여 생활이 어려웠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 공동체를 형성하거나 상호 부조를 위한 계를 조직하여 서로 도왔으며, 조선 후기 홍경래의 난, 철종 때의 민란, 동학 농민 운동 등 민란의 주요 참여 계층이 되었다.
* [[천민]]: 사회 최하층 계급으로, 대부분이 노비였다. 노비는 일종의 재산으로 간주되어 매매와 상속의 대상이 되었으며, 국가 소유의 공노비(公賤)와 개인 소유의 사노비(私賤)로 나뉘었다. 이 외에도 창기, 무당, 광대, 백정 등 특정 직업군이 천민으로 분류되어 심한 차별을 받았다. 특히 백정은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특수 부락에 격리되어 살았다.
조선 사회의 신분 제도는 세습을 원칙으로 하는 폐쇄적인 성격을 가졌으나, 임진왜란과 같은 사회 변동을 겪으며 일부 변화가 나타나기도 했다. 전공(戰功)을 세우거나 납속(納贖, 곡식 등을 바치고 신분 상승)을 통해 평민이나 천민이 명목상의 관직(당상관, 당하관)을 얻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는 대부분 군역 면제 정도의 혜택에 그쳤고 그마저도 당사자 한 명에게만 적용되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엄격한 신분 체제는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법적으로 철폐되면서 점차 해체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조선의 신분 제도를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비교하기도 한다. 역사학자 백지원(Baek Ji-won)은 두 제도가 비교 가능하다고 보았고, 마이클 세스(Michael Seth)는 종교적 의미를 제외하면 원칙적으로 비교 가능하나 실제 계급 분리는 인도만큼 엄격하지 않았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브루스 커밍스는 진정한 카스트 제도는 아니지만 카스트적 요소가 존재했던 시스템으로 평가했다.
2.1. 양반
양반은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아울러 부르는 말로, 조선 시대의 지배 계층이었다. 이들은 농(農)·공(工)·상(商)과 같은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유학 공부에 전념하여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양반은 신분적 제한 없이 고위 관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으며, 관료가 되면 국가로부터 토지와 녹봉(祿俸)을 받아 지주 계급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공을 세운 공신(功臣)이나 고위 관료들은 여러 명목으로 넓은 토지를 지급받았고, 이를 세습하고 사유화하면서 대지주가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강력한 권문세가(權門勢家)를 이루는 양반 가문도 등장했다. 같은 양반 내에서도 문관은 무관보다 우위에 있었는데, 일반적인 주요 관직은 물론 군사 관련 요직까지도 문관이 책임자로 임명되고 무관이 그 아래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양반의 서얼(庶孼) 자손에게는 문과 응시 자격을 주지 않았지만, 무과에는 천민만 아니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도록 하여 적자와 서자의 차별을 공고히 하고, 글을 숭상하고 무예를 낮추어 보는(문존무비, 文尊武卑) 사회적 풍조를 만들었다.
한편, 양반 신분이 세습되면서 그 수가 점차 늘어나자, 한정된 관직을 둘러싼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 과정에서 이해관계와 이념에 따라 파벌이 형성되었고, 이는 사화(士禍)나 당쟁(黨爭)과 같은 극심한 정치적 대립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조선 사회의 신분 구조는 때때로 카스트 제도와 비교되기도 한다. 역사학자 백지원(Baek Ji-won)은 한국의 제도를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비교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이클 세스(Michael Seth)는 종교적 의미를 제외하면 원칙적으로 비교 가능하지만, 실제 계급 간 구분이나 분리가 인도만큼 철저하지는 않았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의 구조를 진정한 의미의 카스트 제도로 보기는 어렵지만, 특정 카스트적 요소가 존재했던 시스템으로 평가했다.
이론적으로 조선의 사회 계급은 양반, 상민(또는 양민), 천민의 세 계층으로 나뉘었지만, 실제로는 양반과 상민 사이에 중인(中人)이라는 중간 계급이 존재하여 네 개의 계층으로 운영되었다. 조선 사회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왕조 말기까지 지배 계급인 양반층이 큰 변동 없이 유지되었고, 이러한 사회 시스템 구조 역시 약 5세기 동안 지속되었다는 특징을 가진다.
양반은 세습되는 엘리트 귀족 계층으로, 대부분의 재산, 노비, 토지를 소유했다. 이들은 고려의 귀족이나 일본의 무사 계급과 달리 직접적인 군사 활동보다는 학문과 관직을 중시했기 때문에 '문신'을 뜻하는 사대부로 불리기도 했다. 양반 남성들은 정부 고위직을 얻기 위해 과거 시험에 응시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려 노력했다. 이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고, 육체노동이나 군역의 의무에서도 면제되었다. 대신 서예, 시, 중국 고전, 유교 의례 등에 능통해야 했다. 이론상으로는 평민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으나, 실제로는 1600년대 이후 응시자의 가계 배경을 엄격히 조사하여 아버지 쪽으로 3대, 어머니 쪽으로 1대까지 양반 신분임을 증명해야만 했다.
양반들은 도시나 마을에서 평민들과 분리된 구역에 거주했으며,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유교 서원이나 기생집 등에서 보냈다. 양반 가문은 주로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고, 이들 지역 출신들이 중앙 정부의 고위직을 많이 차지했다. 반면, 나라의 북부나 동부 지역, 제주도 등지에는 양반이 드물었으며, 주로 정치적으로 몰락하여 유배된 양반들이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양반은 전체 인구의 약 10%를 차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관직뿐만 아니라 무관직 역시 양반 남성들이 차지했다. 특히 지방에 거주하는 양반들에게 무관직은 관직에 진출하는 주요 경로 중 하나였다. 이들은 무관 양성 기관인 무학(武學)에서 시험을 준비했다. 조선 중기 이후 무반은 문반과는 다른 별도의 관직 체계에 속하게 되었다.
2.2. 중인
중인(中人)은 양반(兩班) 귀족 아래, 상민(常民)보다는 위에 위치한 중간 계층으로, 작지만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주로 외국어, 의학, 천문학, 법률학 등 특수한 기술을 학습하고 이를 세습하는 '기술 전문가'였다. 통역관, 서기, 천문학자, 회계사, 의사, 법률가, 음악가 등이 이에 해당했으며, 지방의 하급 관료들도 중인 계층에 속했다. 그들은 지방 관료제를 감독했기에 무시할 수 없었다.
중인들은 법적으로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이 제한되어(한품서용(限品敍用)) 대부분 낮은 관직에 머물렀다. 조선 중기 이후 이러한 차별을 철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중인 중 일부는 말단 행정이나 경찰 사무를 담당하는 이서(吏胥), 역리(驛吏), 군교(軍校) 등으로 활동하며 실제로 평민들을 지배하는 실권을 쥐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들 중 일부는 부유해졌으며, 때로는 농민을 착취하여 부를 쌓기도 했다.
중인 계층에는 양반의 서얼(庶孽, 첩의 자식)도 포함되었다. 특히 평민이나 노비 출신 첩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은 중인 계층 내에서도 '서얼'이라 불리며 더 낮은 대우를 받았다. 양반 가문의 서얼이라 할지라도 양반으로 인정받지 못해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상속받거나 과거 시험에 응시하는 데 제약을 받았다. 서얼의 존재는 평민과 귀족 간의 명확한 구분을 흐리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선조 임금 시기에는 늘어나는 서얼들을 관리하기 위해 이들이 관료가 되는 것을 허용했지만, 여전히 재상이나 고위 관직에는 오를 수 없었다. 출세 길이 막힌 것에 불만을 품은 서얼들은 때때로 무리를 지어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적의 주동자가 되어 사회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서얼들이 차별 철폐를 위해 노력하면서 사회적 이동성이 증가했고, 윤웅렬이나 이윤용과 같이 일부 서얼 출신 인물들이 고위 관직인 의정부찬정 이나 총리대신 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19세기에는 외국어에 능통한 중인들이 서양 문화를 조선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2.3. 상민
상민은 농업, 공업,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일컫지만,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조선 사회 인구의 약 80%를 차지하는 평민 계층이었으며, 자유 신분이었다. 이들은 국가에 대해 조세, 공부(貢賦), 군역, 부역 등 다양한 의무를 졌다. 일부 농민은 자신의 토지를 소유했지만, 많은 농민은 양반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는 소작인이었다. 상인 역시 상민에 속했지만, 양반 사회에서는 천시받는 경향이 있었다.
상민들은 국가의 의무를 부담하는 동시에 지방 관리나 향리들의 착취 대상이 되기도 하여 생활이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상민들은 서로 돕고 단결하여 살길을 모색했는데, 이는 농촌 공동체의 형성이나 상호 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여러 계의 조직으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관리들의 수탈이 심해지자 이에 대한 저항으로 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홍경래의 난, 철종 때의 민란, 그리고 동학 농민 운동 등이 있으며, 이들 봉기의 주체는 대부분 농민이었다.
2.4. 천민
천민(賤民)은 조선 사회의 최하층 계급으로, 크게 자유민과 비자유민인 노비(奴婢)로 나눌 수 있었다.
노비는 천민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양반이나 중인이 소유한 일종의 재산으로 간주되어 매매나 상속의 대상이 되었다. 심한 경우 인간 이하의 동물 취급을 받기도 했다. 노비는 소유주에 따라 국가에 소속된 공노비(公奴婢, 공천)와 개인에게 소속된 사노비(私奴婢, 사천)로 나뉘었다. 또한 거주 형태에 따라 주인과 함께 사는 솔거노비(率居奴婢)와 주인과 떨어져 독립된 가구를 이루고 사는 외거노비(外居奴婢)로 구분되었다. 외거노비는 일반 농민처럼 토지를 경작하고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으며, 정해진 양의 신공(身貢)을 주인에게 바쳤다. 이 때문에 일부 한국 역사학자들은 외거노비를 농노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논쟁하기도 한다. 조선 시대 노비의 수는 변동이 있었으나, 한때 전체 인구의 30%에 달하기도 했다. 노비는 원칙적으로 성씨를 가질 수 없었으나, 노비가 되기 전에 이미 성씨를 가지고 있던 경우는 예외였다. 이론상 노비와 평민 간의 결혼은 금지되었지만, 실제로는 종종 이루어졌다.
노비 외에도 다양한 직업군이 자유민 신분의 천민으로 분류되었다. 창기(娼妓, 기생), 무당, 광대, 백정(白丁), 주막 운영자, 연예인, 무덤지기, 나무껍질 벗기는 사람, 바구니 제작자, 무당, 뱃사공 등이 이에 해당했다. 불교의 몰락과 함께 승려 역시 천인 대우를 받기도 했다. 특히 도축업자(정육점, 가죽 취급자 등)와 같이 불교적 관점에서 살생과 관련된 직업은 천시되었다. 이러한 천민 신분은 세습되었으며, 그 자녀들은 사회적 신분 상승이 거의 불가능했다.
천민 중에서도 백정은 가장 극심한 차별을 받았다. 이들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일반인과 격리된 특수 부락에 모여 살았고, 도축이나 유기(柳器, 버드나무 제품) 제작 등의 특정 직업을 세습하며 생활했다.
엄격했던 신분 제도는 임진왜란 이후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평민이나 천민 중에서도 전공(戰功)을 세우거나 납속(納贖, 곡식 등을 바치고 신분 상승)을 통해 명목상의 관직(당상관, 당하관)을 얻는 경우가 생겨났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군역 면제 정도의 혜택에 그쳤고, 그마저도 당사자 한 명에게만 적용되는 한계가 있었다. 조선 말기로 가면서 노비의 수는 점차 감소했으며, 1800년에는 공노비 제도가 폐지되었다. 이후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을 통해 신분 제도가 법적으로 철폐되면서 천민 신분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3. 사회 구조와 가치관
조선 사회는 신유학 이념을 바탕으로 한 계층 사회였다. 중국에서 유래한 신유학은 조선에 수용되어 국가 통치와 백성들의 삶 전반에 깊숙이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의 실정에 맞게 변형되어 고유한 형태로 발전했다. 이러한 유교적 가치관은 사회 구성원 간의 위계질서(신분, 나이)를 강조하고, 가족 공동체의 중요성을 부각하며 사회적 안정과 조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사회 운영의 근간에는 삼강오륜과 같은 유교 윤리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이는 개인의 행동 규범이자 사회 질서의 기본 원칙으로 작용했다. 또한, 조상에 대한 제사와 같은 의례가 중시되었고, 학문 수양 역시 강조되었다. 한편으로는 백성들이 왕에게 직접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상언이나 격쟁과 같은 소통 제도도 마련되어 있었다.
가족과 씨족은 조선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단위였다. 개인은 본관을 중심으로 한 씨족 공동체에 소속되었으며, 족보를 통해 혈연관계를 기록하고 관리했다. 혼인과 상속 등 가족 생활 전반에 걸쳐 유교적 규범이 엄격하게 적용되었으며, 특히 장자 중심의 가계 계승 원칙이 확립되었다.
3.1. 유교적 가치관
신유학은 조선 시대 사회를 지배한 핵심 이념이었다. 중국에서 시작된 이 사상은 조선에 수용되어 국가 운영과 백성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통합되었으며, 조선의 실정에 맞게 토착화되어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하였다. 정부는 신유학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보급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조선 사회의 기본 구조는 유교 윤리인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에 바탕을 두었다.
| 구분 | 덕목 | 설명 |
|---|---|---|
| 삼강 | 충(忠) | 임금에 대한 충성 |
| 효(孝) | 부모에 대한 효도 | |
| 열(熱) | 남녀 간의 구별 (부부유별과 연결) | |
| 오륜 | 의(義) | 군주와 신하(백성) 간의 의로움과 정의 |
| 친(親) | 부모와 자식 간의 친밀함 | |
| 별(別) | 부부 간의 분별 (역할 구분) | |
| 서(序) | 어른과 아이(연장자와 연소자) 간의 질서 | |
| 신(信) | 친구 간의 믿음 |
이러한 강령들은 조선 사회가 신분 계층과 나이에 따른 위계질서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준다. 또한 가족 공동체의 가치를 강조하고 사회적 질서와 조화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녀 간의 역할을 엄격히 구분하고 여성을 남성보다 낮은 지위에 두는 것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유교 사회에서는 의례를 중시하여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평생에 걸친 학문 수양 또한 강조되었다. 신유학자들은 근면함, 순수함, 예의 바름, 그리고 부적절한 행동을 스스로 자제하는 것을 이상적인 인간의 자질로 보았다. 감정을 격하게 드러내는 것은 점잖지 못한 행동으로 여겨졌기에, 정숙하고 절제된 태도가 미덕으로 간주되었다.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명확히 알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러한 유교적 가치관은 오늘날 한국어의 존칭 사용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대화 상대의 나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다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조선 시대에는 왕과 일반 백성 간의 직접적인 소통 창구도 마련되어 있었다. 서면으로 의견을 제출하는 상언(上言) 제도와 구두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격쟁(擊錚) 제도가 그것이다. 특히 격쟁은 백성들이 궁궐 앞이나 임금의 행차 시에 꽹과리나 북을 쳐서 이목을 집중시킨 뒤 직접 자신의 사정을 아뢰거나 탄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이를 통해 글을 모르는 백성들도 최고 통치자인 임금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일성록에는 격쟁과 관련된 기록이 1,300건 이상 남아 있다.
3.2. 가족 제도와 혼인
한국의 가족 제도는 각 개인을 씨족의 시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본관을 가진 씨족 체계를 기반으로 한다. 씨족은 시조가 자리 잡은 도시나 마을에 따라 구분되며, 같은 성을 공유할 수 있다. 이러한 씨족 구조는 조선 건국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유교 사상이 확산되면서 그 규칙이 더욱 엄격해지고 국가 법으로 명문화되었다.
씨족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는 부계 혈통을 따르며, '족'(族), '파'(派), 또는 '문중'(門中)으로 불린다. 씨족 구성원의 출생, 혼인, 사망 등 중요한 사항은 족보(族譜)에 기록되었으며, 이러한 기록 방식은 15세기에 체계화되었다. 반역죄와 같은 중죄를 지은 사람은 씨족과 혈통에서 제외되었고, 외부인이 혈통에 합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국 남성의 이름은 공통 조상에 따라 부여되어, 낯선 사람도 서로의 관계 여부와 방식을 즉시 확인할 수 있었다.
가족 생활의 규범은 15세기에 편찬된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해 규정되었다. 이 법전은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인 제사를 상세히 규정하여, 조상이 혈통에서 중요한 존재임을 강조했다. 제사는 고인의 장남이 주관하며, 다른 가족 구성원들은 서열에 따라 그 뒤에 참여했다. 제사에는 엄격한 규칙과 정해진 순서가 있었고, 제물로 올리는 음식의 종류와 배치 방식까지 명확히 정의되어 있었다. 이러한 의례는 조선 시대를 거치며 보편화되고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혼인 역시 엄격한 규칙을 따랐다. 고려 시대에는 같은 씨족 내에서도 혼인이 가능했지만, 조선 시대에는 족외혼 원칙이 매우 강조되어, 같은 성씨와 본관을 가진 동성동본 간의 혼인은 법으로 금지되었다. 제임스 매디슨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 마이클 세스(Michael Seth)는 이러한 변화가 중국의 관리 등용 제도인 과거 제도의 영향과 유교적 가치관이 일상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으면서 자신의 혈통을 증명하는 것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혼인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이루어졌다. 1471년 법령에 따르면 최소 혼인 연령은 남자 15세, 여자 14세였다. 실제로는 남자는 보통 30세 이전에, 여자는 20세 미만에 혼인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평민은 양반 계층보다 더 일찍 혼인하는 경향이 있었다. 부부간의 나이 차이가 상당히 큰 경우도 흔했다. 혼례 절차는 주자의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기본으로 했지만, 한국의 전통 관습에 따라 일부 변형되었다. 예를 들어, 유교 예법상 혼례는 신랑 집에서 치르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한국에서는 신부 집에서 의식의 일부를 치른 뒤 신랑 집으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절충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신혼부부가 신부 집에서 몇 년간 거주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유교적 관습이 강화되면서 점차 신부가 시집으로 바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부모 부양이나 농사 등의 이유로 부부가 살 곳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린 소녀를 미리 며느리로 삼는 조혼(早婚) 또는 '민며느리' 풍습도 존재했다. 6~7세 정도의 어린 소녀가 시집에 가서 정식 혼례를 올리기 전까지 일종의 하녀처럼 지내는 경우도 있었다. 이 관습은 널리 퍼지지는 않았고, 주로 혼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가난한 집안에서 행해졌다. 이 때문에 신랑과 신부의 나이 차이가 30살 이상 나는 극단적인 경우도 발생했다. 19세기 후반 유럽 여행가들은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성인 남성의 복장과 머리 모양을 한 소년들을 보았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혼 풍습은 1894년 갑오개혁 때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며, 혼인 가능 연령도 남자 20세, 여자 16세로 상향 조정되었다.
가족 내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장남, 즉 장자(長子)였다. 이러한 인식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신유교 사상이 강화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아들이 없는 것은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하는 심각한 문제로 여겨졌기 때문에, 아들을 낳지 못하면 같은 혈족 내에서 양자를 들여야 했다. 재산 상속에서도 장남이 대부분의 재산과 토지를 물려받았고, 다른 아들들은 일부만 상속받았으며, 딸에게는 상속권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남성은 공식적인 아내 외에 여러 명의 첩을 둘 수 있었다.
4. 여성의 삶
조선 시대, 특히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후기로 접어들면서 여성의 사회적 권리와 자유는 이전 시대에 비해 점차 축소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성리학 이념이 사회 전반에 더욱 깊숙이 영향을 미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때로는 성리학의 본고장인 중국보다 더 엄격한 규범이 적용되기도 했다. 1650년대 이후 두드러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는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여성들은 점차 사회 활동과 경제적 권리에서 제약을 받게 되었으며, 가정 내에서의 역할 또한 성리학적 규범에 따라 규정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 후기 여성의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4.1. 여성의 역할과 제약
여성은 특히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에 권리와 자유가 감소했다. 여성의 삶은 성리학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성리학이 발생한 중국보다 훨씬 엄격한 방식으로 적용되었다. 1650년대부터 시작된 이러한 사회적 이념의 변화는 여성의 지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조선 초기에는 여성이 가구주가 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점차 사라졌고, 상속권 또한 점차 잃어갔다. 여성은 남편이 사망한 후에도 정절을 지킬 것이 강요되었으며, 이로 인해 과부는 조선 후기에는 재혼이 허용되지 않았다. 남성은 본처 외에 첩을 둘 수 있었으나, 첩의 지위는 본처보다 낮은 경우가 많았다.
양반 계층의 여성은 사회적으로 엄격하게 분리되었다. 낮 시간에는 집 밖으로 나설 수 없었으며, 외출이 필요할 경우에는 가마를 이용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엄격한 규범과 분리는 생업에 종사해야 했던 평민이나 노비 여성들에게는 완전히 적용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농가에서조차 남녀의 공간을 분리했으며, 부유한 가정에서는 남성을 위한 공간인 '사랑채'와 여성을 위한 공간인 '안채' 또는 '안방'을 명확히 구분하여 생활했다.
교육 기회에서도 여성은 소외되었다. 공립 교육기관은 남성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성은 글을 배우지 못해 문맹 상태에 머물렀다. 한글이 창제되어 보급된 이후에도 여성의 문자 해독 능력 향상은 더뎠으며,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도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여성은 전체의 4%에 불과했다. 여성은 당시 지배적인 문자였던 한자를 배울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또한,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인 제사에 참여할 권리도 박탈되었는데, 이는 조상 숭배 의례를 중시했던 중국의 본래 관습과도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조선 시대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극히 제한적이어서, 궁녀, 무당, 의녀(醫女), 기생 등 네 가지 정도에 불과했다.
4.2. 여성의 교육과 문화
여성은 특히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에 권리와 자유가 크게 줄어들었다. 여성의 삶은 성리학 이념에 따라 엄격하게 규제되었는데, 이는 성리학이 발생한 중국보다 훨씬 경직된 방식이었다. 1650년대부터 시작된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여성의 지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 초기에는 여성이 가구주가 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점차 사라졌고, 상속권 또한 점차 잃게 되었다. 여성은 남편이 사망한 후에도 정절을 지켜야 했으며, 이로 인해 조선 후기에는 과부의 재혼이 금지되었다. 남성은 본처 외에 첩을 둘 수 있었으나, 첩은 본처보다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
양반 계층의 여성은 사회적으로 더욱 격리되었다. 낮 시간에는 집 밖으로 나설 수 없었으며, 외출 시에는 '가마'(가마한국어)를 이용해야 했다. 이러한 엄격한 규범은 생업에 종사해야 했던 평민이나 노비 여성에게는 완전히 적용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농가에서조차 남녀의 생활 공간을 분리했으며, 부유한 가정에서는 남성을 위한 공간인 '사랑채'(사랑채한국어)와 여성을 위한 공간인 '안채'(안채한국어) 또는 '안방'(안방한국어)을 명확히 구분했다.
교육 기회 또한 극히 제한적이었다. 공립 교육기관에서는 남성만을 교육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성은 문맹 상태에 머물렀다. 한글이 창제되어 보급된 이후에도 여성의 문자 해독 능력은 크게 나아지지 않아, 19세기 후반까지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여성은 전체의 4%에 불과했다. 여성들은 공식 문자였던 한자를 배우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 의식 참여에서도 배제되었다. 이는 조상 숭배를 중시했던 중국의 본래 관습과도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조선 시대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궁녀, 무당, 의녀, 기생의 네 가지 정도로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5. 사회 변동과 신분제 동요
조선 후기의 산업 발달은 전통적인 신분 계급 구조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와 신분제가 동요하게 되었다. 양인과 노비의 엄격한 차별과 세습성을 특징으로 하는 양천제가 무너지고, 양반(사족)과 상민(평민과 노비)이 대칭되는 새로운 계급 구조, 이른바 반상(班常)의 구별이 나타났다. 양천제가 법에 따라 규제되는 신분제였다면, 반상 구조는 사회 관행으로 형성된 것이어서 구속력이 약하고 신분 간의 상하 이동이 비교적 활발하였다. 따라서 반상 구조는 신분 사회에서 근대적 계급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형태라 할 수 있다.
신분제의 동요는 무엇보다도 지주제의 발전에 따라 그 단서가 열렸다. 16세기 이후로는 병작제가 보편화되면서 양인 중에서 지주의 위치에 있던 부류가 양반(사족)으로 상승하고, 작인의 처지에 있던 부류는 양인이건 노비이건 상한(常漢)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16세기 말의 임진왜란과 17세기 전반의 호란을 거치면서 양천제는 더욱 급속하게 무너졌다. 국가는 재정 확보와 군역 자원 충원을 위해 납속이나 군공을 통해 노비를 양인으로 방면하거나 노비종모법 시행, 공노비 해방(1801년) 등의 단계적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1894년 갑오경장 때 노비 세습제가 폐지되면서 한국사에서 노비제는 종말을 고했다.
한편, 신분제가 붕괴되면서 그에 대신하여 나타난 반상(班常) 구조는 양반의 계급적 구성을 매우 복잡하게 만들었다. 조선 후기의 양반은 초기와 달리 문무 관직자라는 뚜렷한 법제적 기준보다는 학문과 벼슬 유무, 가문 등을 기준으로 삼는 사회적 관행에 따라 규정되었다. 이들은 족보를 만들고 향안(鄕案) 등을 통해 향약 등 향촌 자치기구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다. 국가는 과거 응시 자격이나 군역 면제 등에서 호적을 통해 신분을 확인하고 제한을 두었으나, 상민 중에서는 납속 외에도 호적이나 족보를 위조하는(환부역조, 모칭유학 등)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양반 행세를 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 결과 조선 후기에는 양반 인구가 급증하여 19세기에는 전체 주민의 과반수가 호적상 양반으로 기록될 정도였다. 이는 계급 상승이 활발해졌음을 보여주지만, 실제 청요직 등 정치 권력 핵심에 접근하는 데에는 가문이나 출신 지역에 따른 차별이 여전히 존재하여 신분 상승의 한계를 드러냈다. 이처럼 엄격했던 신분 체제는 1894년(고종 31)의 갑오경장 이후 신분 계급의 타파가 제도화됨으로써 점차적으로 소멸되어 갔다.
5.1. 신분 상승 운동
조선 사회의 엄격한 신분 질서는 임진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16세기 이후 병작제가 보편화되면서 경제력을 축적한 일부 양인이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키는 경우가 나타났고, 반대로 몰락한 양반이나 노비 등은 상한(常漢)으로 취급받는 등 신분 변동의 조짐이 보였다.
전란의 혼란 속에서 노비들은 스스로 도망쳐 신분적 속박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국가는 전쟁으로 인한 군역 자원 부족과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노비 해방에 나서기 시작했다. 군공(軍功)을 세우거나 납속(곡식을 바침)을 통해 국가 재정에 기여한 노비들을 양인으로 풀어주었으며, 이들을 속오군에 편제하여 군역을 부담시키기도 했다. 또한 노비 수를 제도적으로 줄이기 위해 어머니가 노비일 경우에만 자식도 노비가 되도록 하는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시행했다. 이 제도는 1669년(현종 10년)에 처음 논의되어 여러 차례 시행과 폐지를 반복하다 1731년(영조 7년)에 최종적으로 정착되었다. 당시 양인과 노비 사이의 결혼이 빈번했기 때문에 노비종모법 시행으로 양인 신분을 얻는 노비가 적지 않았다. 국가에 소속된 공노비 역시 도망자가 속출하자, 1801년(순조 1년)에는 일부를 제외한 66,000여 명의 내사노비(궁궐 소속 노비)를 평민으로 해방시켰다. 남아있던 공노비와 사노비의 세습제는 1894년 갑오경장 때 이르러 완전히 폐지되면서 한국사에서 노비제는 종말을 고했다.
상민 계층에서도 신분 상승을 위한 노력이 활발했다. 경제력을 쌓은 상민들은 납속과 같은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신분을 상승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보다 일반적인 방법은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군역을 피하거나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 국가가 관리하는 호적을 조작하여 자신의 신분이나 조상의 신분을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조상의 신분을 위조하는 것을 ‘환부역조(換父易祖)’라 했고, 자신의 직업을 양반 자제들이 주로 기재하던 ‘유학(幼學)’으로 속여 기재하는 ‘모칭유학(冒稱幼學)’도 성행했다. 이러한 편법을 통해 족보를 위조하여 양반 행세를 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이러한 신분 상승 노력의 결과, 조선 후기에는 양반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여 19세기에는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호적상 양반으로 기록될 정도였다. 이는 조선 사회의 계급 상승 욕구가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그러나 양반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동등한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 합격하더라도 실제 관직 임용에서는 가문이나 출신 지역에 따른 차별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청요직이라 불리는 중요한 관직은 주로 한양의 유력 가문 출신 양반(경화사족)이 독점했으며, 서북 지역 출신이나 중인 등은 상대적으로 낮은 관직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무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신분 상승을 통해 양반이 되더라도 정치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하는 데에는 여전히 많은 제약이 따랐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조선 후기의 신분 상승 운동은 기존의 엄격한 신분 질서를 무너뜨리는 중요한 동력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차별과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5.2. 사회 변혁 운동
상민은 농(農)·공(工)·상업(商)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지만, 그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이들은 국가에 조세, 공부(貢賦), 군역 등 각종 의무를 부담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지방관이나 향리 등의 착취 대상이 되어 일반적으로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고된 생활 속에서 상민들은 서로 단결하여 살 길을 찾으려 했고, 이는 농촌 공동체 형성이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여러 계(契)의 조직으로 이어졌다.
한편, 조선 후기로 갈수록 관리들의 수탈이 더욱 심해지자 이에 대한 저항으로 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홍경래(洪景來)의 난, 철종 때의 민란, 그리고 동학혁명(東學革命) 등이 대표적인 예이며, 이러한 저항 운동의 주체는 대부분 농민들이었다.
6. 납세 및 병역 제도
조선 시대 국가 운영의 근간은 조세(租稅)와 공부(貢賦)로 이루어진 납세 제도와, 양인 남성에게 국방의 의무를 지운 [[양인개병제]] 기반의 병역 제도였다. 이 두 제도는 조선 왕조의 재정을 확보하고 국방력을 유지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6.1. 납세 제도
조세(租稅)와 공부(貢賦)는 조선시대 납세 제도의 두 축이었다. 초기에는 토지에 부과되는 조세보다 노동력과 가호(戶)를 기준으로 하는 공부의 부담이 더 컸으나, 중기 이후 공부 역시 토지를 기준으로 부과하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조세 부담이 가장 무거워졌다.
조선 초기의 조세 제도는 고려 공민왕 때의 규정을 따랐다. 수전(水田) 1결(結)에는 조미(租米) 30말(斗), 한전(旱田) 1결에는 잡곡 30말을 경작자가 부담하는 방식이었다. 공전(公田)의 조세는 관청에서 징수했고, 사전(私田)의 조세는 수조권자인 전주(田主)가 거두었다. 또한, 전주는 경작자에게서 받은 조(租) 중에서 1결당 2말씩 국가에 세(稅)로 납부해야 했는데, 이는 이전까지 사전에 부과되지 않던 세금을 거두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조선 조세 제도의 특징 중 하나이다. 다만, 능침전(陵寢田), 창고전(倉庫田), 궁사전(宮司田), 공해전(公廨田), 공신전(功臣田) 등은 세 납부가 면제되었다. 이러한 조세 규정은 고려 태조가 제시했던 10분의 1 수조율(守租率)에 기반하여 이전 시대의 과중한 부담을 줄이고자 한 것이었다.
조세 징수 방식으로는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이 시행되었다. 이는 농사 작황을 10등급(分)으로 나누어, 피해(損) 1등급당 조세(租) 1등급을 감면하고, 피해가 8등급 이상이면 조세 전액을 면제하는 제도였다. 공전의 풍흉 조사는 관청에서, 사전은 전주가 담당했다. 그러나 실제 운영 과정에서 조사를 맡은 관리나 전주들의 부정행위와 착취가 심각했다. 특히 사전의 경우, 전주가 실제보다 더 가혹하게 풍흉 등급을 매겨 경작자들을 괴롭히는 일이 잦아, 한때는 관청에서 직접 조사를 시행하기도 했다.
답험손실법의 폐단이 드러나자 세종은 새로운 세법인 공법(貢法) 마련에 나섰다. 1430년(세종 12년), 세종은 답험손실법을 폐지하고 토지 등급(상·중·하 3등전)이나 풍흉에 관계없이 1결당 10말을 징수하는 안을 제시하며 각계각층의 의견을 물었으나,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이후 1436년(세종 18년) 공법상정소(貢法上程所)를 설치하여 새로운 안을 마련하고 일부 지역에 시범 실시했지만 여전히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결국 1443년(세종 25년)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연구 끝에 새로운 세제를 확립했다. 이듬해 제정된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과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은 토지의 비옥도를 6등급으로 나누고, 그 해의 풍흉을 9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적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기존 답험손실법과 공법안을 절충한 형태였다. 이는 조선 세법의 기본 틀이 되었다. 1448년(세종 30년) 토지 측량인 양전(量田)이 시작되었고, 양전이 끝난 후 이 새로운 세법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모든 토지에 신법이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항상 경작할 수 있는 토지인 정전(丁田)에는 새로운 세법이 적용되었지만, 휴경이 필요한 토지인 속전(續田)과 재해를 입은 재상전(災傷田)은 기존의 답험손실법에 따라 세금을 부과했다. 정확한 과세를 위해서는 토지 상황을 파악하는 양전이 필수적이었기에, 세종 때 20년마다 양전을 실시하는 양전법(量田法)이 제정되어 《경국대전》에도 실렸으나, 실제 시행 과정에서는 각종 농간과 부정행위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임진왜란 이후 혼란해진 토지 대장(田籍)을 정리하기 위해 1603년(선조 36년) 양전이 다시 시작되어 이듬해 경기, 강원, 황해도 지역에서 완료되었다. 충청, 전라, 경상도 지역은 정묘호란 등을 겪으며 토지 제도가 더욱 무너진 뒤인 1634년(인조 12년)에야 양전이 실시되었다. 전쟁 이후 부족해진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연분법(年分法)을 폐지하고 고정된 세율을 적용하는 정률법(定率法)을 시행하려 했으나, 백성들의 피해가 크다는 점을 고려하여 다시 답험손실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시기 공부(貢賦) 제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면서 세금 제도는 더욱 복잡해졌다.
공부(貢賦)는 조선 건국 초기에 공부상정도감(貢賦詳定都監)을 설치하여 각 지방의 특산물을 조사하고 등급을 매겨 공물 목록인 공안(貢案)을 작성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연산군 시기에는 왕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충당하기 위해 공부 부담이 크게 늘어났고, 이때 늘어난 공안은 이후에도 폐지되지 않고 지속되었다. 또한 공안 자체가 현실과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 해당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품을 공물로 바쳐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백성들은 물품을 사서라도 납부해야 했으며, 생산되는 물품이라도 중앙 관청의 수요 시기와 맞지 않거나 운송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방납(防納)이라는 공부청부제(貢賦請負制)가 성행하게 되었다. 방납업자들의 중간 착취는 극심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선조 초기에 공물을 쌀(米穀)로 대신 납부하게 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시행되지 못했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토지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 국가 수입이 급감하자, 이를 보충하기 위한 방안으로 대동법(大同法)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조세와 공부 외에도 조선 초기부터 백성들에게는 다양한 역(役)이 부과되었다. 농민에게는 군역(軍役), 승려에게는 승역(僧役), 천인(賤人)에게는 천역(賤役) 등이 있었으며, 양반들은 원칙적으로 이러한 역의 의무에서 면제되었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 공명첩이 대량으로 발급되면서 신분 질서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6.2. 병역 제도
조선 건국 초기에는 국방력 강화에 큰 관심을 기울여 군대를 늘리고 정예화하는 데 힘썼다. 건국 직후에는 귀족과 관료들이 사적으로 거느리던 사병을 폐지하고 국가의 공병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에 주력하여 태종 때 마무리되었다.
기존 군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모든 양인에게 군역 의무를 부과하는 [[양인개병제]]를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양인 남자는 직접 군인이 되거나(정군), 군인이 복무하는 동안 필요한 경비(식량, 의복 등)를 부담하는 보인(봉족)이 되어야 했다. 토지 3~4결 이상을 소유한 자립 농민에게는 보인이 지원되지 않았으나, 영세 농민 출신 군인에게는 보인이 지급되었다. 보인은 군인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매년 무명 1필을 국가에 납부했다. 정부는 군역 담당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호적 조사 사업을 강화하고 양인 인구를 늘리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 결과, 태조 6년(1397년)에 37만 명이었던 군역 담당자는 세종 12년(1430년)경에는 70만 명, 세조 때에는 80만에서 100만 명까지 증가했다. 이 중 실제 군인은 약 30만 명, 보인은 약 60만 명 정도였다.
현직 관료와 학생은 군역이 면제되었다. 왕의 친척인 종실과 외척, 공신이나 고위 관료의 자제들은 국왕 호위 및 경비를 담당하는 고급 특수 부대에 소속되어 좋은 대우를 받았다.
일반 평민은 정병, 유방군(留防軍), 또는 수군에 편입되었다. 복무 기간은 정병이 1년에 2개월, 유방군이 3개월, 수군이 2개월이었으며, 복무 기간에 따라 산계(散階)를 받았다. 이 외에 갑사, 별시위, 내금위 등 직업 군인도 있었다. 이들은 무예가 뛰어난 사람들이 시험을 통해 선발되었으며, 정식 무반에 속하여 품계와 녹봉을 받았다. 중앙에서는 왕궁과 서울 수비를 담당하고, 지방에서는 하급 지휘관으로 활동했다.
조선 초기의 군대 최고 통솔 기관은 오위도총부였다. 오위도총부 산하에는 다섯 개의 군단(오위)이 있어 중앙군을 구성했으며, 지휘 책임은 문반 관료가 맡았다. 군인의 훈련과 시험 등을 관장하는 훈련원, 무관의 최고 기관인 중추부도 있었다.
지방 육군은 세조 이후 [[진관체제]]로 편성되었다. 각 도마다 한두 개의 병영을 설치하여 병마절도사가 해당 구역의 군사 지휘권을 가졌고, 병영 아래에는 몇 개의 거진(巨鎭)을 두어 거진의 수령이 주변 군현의 군대를 통솔했다. 이를 통해 전국적인 지역 단위 방어 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요충지의 읍에는 읍성을 쌓아 지방 방어 체계를 강화했는데, 특히 해안가 요새지에 읍성을 많이 건설하여 이전 시대의 산성 중심 방어에서 읍성 시대로 전환하며 국방력을 강화했다. 중앙군과 지방군의 유기적인 통합을 위해 지방군의 일부를 교대로 서울에 올라와 복무하게 하는 [[번상|번상병]] 제도도 운영되었다.
수군 역시 육군과 유사한 체제로 편성되었다. 해안의 각 도에 몇 개의 수영을 설치하고 수군절도사를 파견하여 관할 구역의 수군을 통솔하게 했다. 수영 아래에는 포진(浦鎭)과 포(浦)를 두고, 각각 첨절제사와 만호를 파견하여 수군을 지휘했다.
조선 초기에는 정규군 외에 [[잡색군]]이라는 예비군 조직도 있었다. 잡색군에는 서리, 잡학인, 신량역천, 노비 등이 속했으며, 평시에는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다가 일정 기간 군사 훈련을 받으며 유사시에 대비했다.
교통과 통신 체계도 이전보다 강화되었다. 군사적 위급 상황을 알리는 봉수제가 정비되었고, 물자 수송과 정보 전달을 위한 역마참 제도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국방 및 중앙 집권적 행정 운영을 용이하게 했다.
조선 초기에는 '취각령(吹角令)'이라 하여 비상시 서울의 관료들을 궁궐 앞으로 소집하는 훈련을 했으며, 무장한 갑사와 돌팔매 전문가인 척석군(擲石軍)이 광화문 앞에서 모의 전투를 벌이는 군사 훈련도 시행했다. 이 훈련은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여 중단되었으나, 이후 민간의 돌싸움 놀이로 이어졌다.
15세기에 강력했던 국방 체제는 16세기 이후 점차 해이해졌고, 16세기 후반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는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할 정도로 국방력이 약화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7. 조선 사회에 대한 서구의 시각
1880년대 초, 고종과 명성황후의 주도로 시작된 서구화 정책은 조선 사회를 서양에 개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조선을 방문한 서구의 외교관, 선교사, 사업가, 여행가 등 다양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관찰을 바탕으로 조선의 사회, 문화, 풍습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들의 기록은 당시 조선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대부분 서구인의 시각, 특히 제국주의 시대 서구 우월주의적 관점이나 특정 성별 및 계층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다는 한계점을 지닌다. 예를 들어, 아놀드 헨리 세비지 랜도어와 같은 일부 기록은 당시 유럽 중산층 남성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어, 조선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서구인들의 기록을 통해 조선 사회를 이해할 때는 이러한 맥락과 한계점을 고려하여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7.1. 서구인의 기록
1880년대 초부터 고종과 그의 명성황후는 서구화 과정을 시작하여, 조선 사회를 서구 거주민과 여행자들에게 개방했다. 이 시기 조선을 방문하고 기록을 남긴 서구인들은 다음과 같다.
* 이사벨라 버드: 영국의 의사이자 선교사, 여행 작가이다. 그녀는 1894년 1월부터 1897년 3월 사이에 한국을 네 번 방문했다. 그녀는 자신의 여행기에 공식 기록과 문서를 통해 가능한 한 정확하고 검증된 내용을 담고자 노력했다고 밝혔다. 그녀의 주된 관심사는 당시 한국 사람들과 그들의 관습, 기대 등이었다.
* 샤를 카라(Charles Carat): 1892년 한국 여행기를 기록했으며, 사진을 바탕으로 한 상세한 스케치를 많이 남겼다. 이 스케치들은 그가 만난 사람들의 일상, 직업, 주거 생활을 보여준다. 이 기록은 프랑스어로 작성되었다.
* 루이스 조던 밀른: 1895년에 저술한 《Quaint Korea영어》(기이한 한국)에서 여성의 실제적인 지위와 권리 적용에 대해 상세히 다루었다.
* 아놀드 헨리 세비지 랜도어: 빅토리아 시대의 인기 있는 여행 작가이자 예술가였다. 그는 한국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관찰한 내용을 기록했다. 특히 여성의 삶에 대한 그의 관찰은 당시 중산층 유럽 남성의 시각에서 쓰여졌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 퍼시벌 로웰: 미국의 사업가이자 저명한 천문학자이다. 한국을 포함한 극동 지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했으며, 1883년 조선의 미국 방문을 돕기도 했다. 그는 한국의 관습에 대한 저서를 남겼다.
* 릴리아스 언더우드(Lilias Underwood, 1851–1921): 한국에 파견된 미국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아내이다. 15년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관찰한 삶과 관습에 대한 인상을 1904년에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