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M.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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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워드 M. 케네디는 1932년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난 미국의 정치인으로, 1962년부터 2009년 사망할 때까지 매사추세츠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 의원으로 재직했다.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육군에서 복무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그의 형 존 F. 케네디와 로버트 F. 케네디의 암살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상원 의원으로서 사회 보장, 건강 관리, 이민 개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입법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8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실패했으며, 2008년 버락 오바마를 지지했다. 2008년 뇌종양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하다가 200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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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M. 케네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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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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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에드워드 무어 케네디 |
로마자 표기 | Edward Moore Kennedy |
애칭 | 테드 |
출생일 | 1932년 2월 22일 |
출생지 |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
사망일 | 2009년 8월 25일 |
사망지 | 미국 매사추세츠주 하이야니스포트 |
안장지 | 알링턴 국립묘지 |
국적 | 미국 |
키 | 188cm |
공식 웹사이트 | 테드 케네디 공식 웹사이트 |
학력 | |
대학교 | 하버드 대학교 (문학사) |
대학원 | 버지니아 대학교 (법학사) |
경력 | |
직업 | 정치인, 변호사 |
소속 정당 | 미국 민주당 |
군 복무 | 미국 육군 일병 |
복무 기간 | 1951년–1953년 |
소속 부대 |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부 |
가족 관계 | |
부모 | 조지프 P. 케네디와 로즈 케네디 |
형제 자매 | 케네디 가문 |
배우자 | 조앤 베넷 케네디 (1958년 결혼, 1982년 이혼) 빅토리아 레지 케네디 (1992년 결혼) |
자녀 | 카라 케네디 에드워드 M. 케네디 주니어 패트릭 J. 케네디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민주당 |
상원 의원 (매사추세츠) | 임기 시작: 1962년 11월 7일 임기 종료: 2009년 8월 25일 |
이전 상원 의원 | 벤저민 A. 스미스 2세 |
다음 상원 의원 | 폴 G. 커크 |
원내총무 (상원 다수당 원내 간사) | 임기 시작: 1969년 1월 3일 임기 종료: 1971년 1월 3일 |
지도자 | 마이크 맨스필드 |
상원 법사 위원회 위원장 | 임기 시작: 1979년 1월 3일 임기 종료: 1981년 1월 3일 |
상원 노동인적자원위원회 위원장 | 임기 시작: 1987년 1월 3일 임기 종료: 1995년 1월 3일 |
상원 보건교육노동연금위원회 위원장 | 임기 시작: 2001년 1월 3일 임기 종료: 2001년 1월 20일 임기 시작: 2001년 6월 6일 임기 종료: 2003년 1월 3일 임기 시작: 2007년 1월 4일 임기 종료: 2009년 8월 25일 |
2. 어린 시절과 교육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도체스터 구역의 세인트마거릿 병원에서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와 로즈 피츠제럴드의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1] 그는 보스턴의 저명한 아일랜드계 미국인 가문 출신으로,[1] 결혼 후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242] 형제자매로는 조지프 주니어, 존, 로즈마리, 캐슬린, 유니스, 패트리샤, 로버트, 진이 있었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 탄생 200주년에 태어난 테드의 대부는 형 존이 맡았으나, 부모는 아기 이름을 조지 워싱턴 케네디로 짓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고 아버지의 조수 이름을 따서 지었다.[2]
1951년 5월, 케네디는 하버드 대학교 2학년 말에 스페인어 시험에서 다른 학생이 대신 시험을 치르게 한 사실이 적발되어 퇴학당했다. 그해 6월 케네디는 미국 육군에 입대하여 4년 복무를 선택했지만, 아버지의 중재로 복무 기간이 2년으로 단축되었다.[242]
케네디는 1959년 매사추세츠주 법정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1960년 그의 형 존은 미국의 대통령 후보로 나설 것을 발표했고, 테드는 서부 주들에서 그의 선거 운동을 관리하였다. 위스콘신주에서 그가 보낸 7주는 그의 형이 첫 경쟁 예비 선거에서 이기는 데 도움을 주었고, 와이오밍주에서 보낸 비슷한 시간은 1960년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주의 대표들로부터 만장일치 투표를 얻어 그의 형을 정상에 올려놓는 데 기여했다.[1]
케네디는 1962년 11월 7일 연방 상원 의원으로 선서했다.[223] 그는 상원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남부 출신 선배 의원들을 존경하며 언론 노출을 피하고 위원회 활동과 지역 문제에 집중했다.[40] 그는 형 존의 세련됨과 로버트의 강렬함은 부족했지만, 둘보다 더 친근했다는 평가를 받았다.[40]
어린 시절 테드는 뉴욕주 브롱크스빌, 매사추세츠주 하이야니스포트, 플로리다주 팜비치, 영국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궁전 등 가족의 이사로 인해 자주 거처를 옮겼다.[3] 정규 교육은 런던 켄싱턴의 깁스 학교에서 시작되었으며,[4] 11세까지 10개의 학교를 다닌 탓에 학업에 지장을 받았다. 그는 복사였고, 바티칸에서 교황 비오 12세에게 첫 영성체를 받았다. 페센든 학교에서 6, 7학년을 보내며 평범한 학생으로 지냈고,[1] 크랜웰 예비 학교에서 8학년을 보냈다. 부모는 막내인 그를 아꼈지만, 형들과 비교하며 부족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1]
8세에서 16세 사이에 테드는 누나 로즈메리의 뇌엽 절제술 실패, 제2차 세계 대전 중 조지프 주니어의 전사, 캐슬린의 항공 사고 사망으로 정신적 외상을 겪었다.[1] 보스턴 시장과 미국 하원 의원을 지낸 외할아버지 존 F. 피츠제럴드는 그에게 초기 정치적, 개인적 영향을 주었다.[1] 밀턴 아카데미에서 4년간 고등학교 생활을 하며 B, C 학점을 받았고, 1950년 졸업생 56명 중 36등으로 졸업했다.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하며 마지막 2년간 대학 대표팀에서 뛰었고, 교장은 그의 플레이를 "두려움이 없다"고 묘사하며 "뉴욕행 급행 열차라도 막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테니스 팀, 연극, 토론, 합창 클럽에서도 활동했다.
아버지와 형들처럼 테드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봄 학기에 운동선수 중심의 윈throp 하우스에 배정되어 풋볼팀 신입생 팀에서 공격 및 수비 엔드로 뛰었고, 큰 체구와 두려움 없는 스타일이 특징이었다.[1] 1학년 첫 학기에 동급생들과 과학 기말고사에서 부정행위를 계획했다. 1951년 5월, 2학년 2학기 말에 스페인어 시험에서 대리시험을 치르게 했으나 발각되어 퇴학당했다.[5][6] 하버드 대학교의 징계 규정에 따라 1~2년 후 재입학을 신청할 수 있었다.[7]
1951년 6월, 미국 육군에 입대하여 아버지의 중재로 복무 기간을 2년으로 단축했다. 뉴저지주 포트 딕스에서 미국 육군 기초 훈련을 마친 후, 메릴랜드주 포트 홀라비드에서 육군 정보 훈련을 요청했으나 몇 주 후 중단되었다. 조지아주 캠프 고든에서 헌병 훈련을 받고, 1952년 6월 프랑스 파리의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부 의장대로 배치되었다.[1] 아버지의 정치적 연줄 덕분에 한국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1]
1953년 여름, 하버드에 재입학하여 학업 습관을 개선했다.[1] 형 존은 미국 상원 의원이었고, 가족은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테드는 1954년 올 클럽 파이널 클럽에 가입했고,[8] 헤이스티 푸딩 클럽과 파이 에타 동아리에도 선출되었다. 2학년 때 운동 관련 보호 관찰을 받았고, 3학년 때 크림슨 풋볼 팀의 세컨드 스트링 투웨이 엔드로 복귀했다. 그린베이 패커스의 헤드 코치 리스 블랙번이 프로 풋볼 선수로 뛸 의향을 물었으나,[9] 법학전문대학원 진학과 "또 다른 접촉 스포츠인 정치" 참여를 이유로 거절했다.[10] 1955년 시니어 시즌에 하버드 풋볼 팀 엔드로 출전, 블로킹과 태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11월 19일 예일 볼에서 열린 하버드-예일 경기에서 하버드의 유일한 터치다운 패스를 잡았고,[11] 팀은 3-4-1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12] 처음 3년간 평범한 성적을 받았으나, 4학년 때 B 평균으로 향상되어 학급 상위 절반에 간신히 들었다. 1956년, 24세에 역사학과 정치학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낮은 성적 때문에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하지 못하고,[7] 형 바비를 따라 1956년 버지니아 대학교 로스쿨에 입학했다.[1] 과거 부정행위 이력 때문에 버지니아 대학교의 명예규율 위반으로 교수진과 동문 사이에 논쟁이 있었고, 전임 교수 투표를 통해 입학이 허가되었다. 헤이그 국제법 학술원 하계 과정도 수료했다. 버지니아 로스쿨에서 "4배 더 열심히, 4배 더 오래" 공부해야 했고, 주로 C 학점을 받았으나 윌리엄 마이너 라일 모의 재판 대회에서 우승했다.[1][13] 학생 법정의 우두머리로 선출되어 가족의 연줄을 통해 저명한 연사들을 캠퍼스에 초청했다. 난폭 운전과 무면허 운전으로 기소되기도 했다.[1] 형 존의 1958년 상원 재선 캠페인 매니저로 임명되어 평범한 유권자들과의 소통 능력으로 기록적인 승리에 기여했다. 1959년 로스쿨을 졸업했다.
3. 군 복무
뉴저지주 포트 딕스에서 기본 훈련을 받은 후, 육군 정보부 훈련을 위해 메릴랜드주 포트 홀라버드로 배속을 요청했지만 몇 주 후 아무런 설명 없이 취소되었다. 이후 조지아주 캠프 고든에서 헌병 훈련을 받았다. 1952년 6월, 케네디는 프랑스 파리에 있는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부 본부 의장대로 배치되었다. 아버지의 정치적 인맥 덕분에 그는 한국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242]
4. 초기 경력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존은 매사추세츠주 연방 상원 의원직에서 물러났으나, 테드는 1962년 2월 22일, 그의 30세 생일까지는 그 자리를 채울 자격이 없었다. 테드는 처음에 서부에 머물며 당장 출마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고 싶어했다. 테드의 형들은 그가 즉시 출마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테드는 결국 형들과 같은 성과를 내기 위해 그 자리를 원했고, 아버지도 그들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존은 매사추세츠 주지사 포스터 퍼콜로에게 1960년 12월, 자신이 예상치 못하게 남긴 임기를 채우기 위해 케네디 가문의 친구 벤 스미스를 임시 상원의원으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테드를 위해 의석을 확보하는 역할을 했다.[1]
1962년 11월 특별 선거에서 케네디는 또 다른 유명한 매사추세츠주 정치 가문의 일원인 공화당의 조지 C. 로지를 꺾고 55%의 득표율을 기록했다.[1]
5. 상원 경력
1963년 11월 22일, 형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후, 케네디는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역할 확대를 지지하며 "길고 지속적인 투쟁"이 될 것이라고 인정했다.[40] 그는 난민 문제에 대한 청문회를 열어 미국 정부의 정책 부재를 지적하고, 징병제의 불공정한 측면을 개혁하려 노력했다.[40] 1968년 1월 베트남 방문 이후, 미국의 진전 부족에 실망한 케네디는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태도 변화를 공개적으로 제안했다.[40]
1968년 대선에서 케네디는 형 로버트의 출마를 도왔으나, 로버트가 암살된 후 큰 충격을 받았다.[25] 이후 그는 13명의 조카들을 위한 대리 부친 역할을 했다.[37]
1968년 대선에서 공화당 리처드 닉슨이 승리한 후, 케네디는 1972년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 경쟁에서 유력 주자로 여겨졌다.[39] 1969년 1월, 케네디는 상원 원내 총무가 되어 해당 직책을 얻은 최연소자가 되었다.[40]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당시 김대중 구명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그의 미국 망명 기간 동안 도움을 주었다.
5. 1. 형들의 암살
1963년 11월 22일, 형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을 때, 케네디는 상원 의장으로 재직 중이었다.[25] 보좌관이 급히 달려와 형의 암살 소식을 전했고, 이후 그의 형 로버트가 대통령이 사망했음을 알렸다.[25] 그는 누나 유니스와 함께 2년 전 뇌졸중을 겪은 아버지에게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매사추세츠주 하이애니스포트로 즉시 향했다.[25]
1968년 6월 5일, 형 로버트가 캘리포니아주 예비선거에서 승리했을 때 케네디는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다. 그날 밤 자정 이후, 로버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저격을 당했고, 다음 날 사망했다.[25] 케네디는 가족 중 로버트와 가장 가까웠기에 형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25]
형들의 죽음 이후, 케네디는 13명의 조카들의 대리 부친 역할을 했다.[37]
5. 2. 채퍼퀴딕 사건
1969년 7월 18일 밤, 케네디는 형 로버트의 대통령 선거 운동에 참여했던 젊은 여성 그룹인 보일러 룸 걸스를 위해 채퍼퀴딕 섬에서 파티를 열었다.[39] 케네디는 여성 중 한 명인 28세의 메리 조 코페크네와 함께 파티를 떠났다.
1967년형 올즈모빌 델몬트 88을 운전하던 그는 당시 가드레일이 없던 다이크 다리를 건너려 했다. 케네디는 통제력을 잃고 조수(Poucha Pond)의 물길로 추락했다. 케네디는 뒤집힌 차량에서 탈출했고, 그가 설명한 바에 따르면 코페크네를 구출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일곱, 여덟 번이나 수면 아래로 잠수했다. 결국 그는 해안으로 헤엄쳐 나왔고, 코페크네는 차량 안에 갇힌 채 현장을 떠났다. 케네디는 다음 날 아침까지 사고를 당국에 보고하지 않았고, 그 무렵에는 코페크네의 시신이 이미 발견되었다.[39] 케네디의 사촌 조 가간은 그와 케네디의 친구 폴 마크햄이 파티에 참석하여 현장에 도착했으며, 당시 케네디에게 보고할 것을 촉구했다고 나중에 말했다.[43]
사건 발생 일주일 후, 케네디는 사고 현장을 떠난 혐의를 인정했으며 집행유예 2개월을 선고받았다.[39] 그날 밤, 그는 전국 방송을 통해 "사고를 즉시 경찰에 보고하지 않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지만, 음주 운전을 부인하고 그와 코페크네 사이의 부도덕한 행위도 부인했다.[39] 케네디는 매사추세츠 유권자들에게 사임할지 아니면 직을 유지할지 물었고, 그에게 호의적인 답변을 받은 후 7월 30일 상원에 남아 다음 해에 재선을 위해 출마할 것이라고 발표했다.[44]
1970년 1월, 코페크네의 사망에 대한 심리가 매사추세츠주 에거타운에서 열렸다.[39] 케네디의 변호사들의 요청에 따라 매사추세츠 주 대법원은 심리를 비공개로 진행하라고 명령했다.[39][45] 재판장인 제임스 A. 보일 판사는 케네디가 그날 밤에 한 이야기의 일부 측면이 사실이 아니며, 부주의한 운전이 코페크네의 죽음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지었다. 대배심은 1970년 4월 이틀간 조사를 실시했지만 기소하지 않았고, 이후 보일은 심리 보고서를 공개했다.[39] 케네디는 그 결론이 "정당하지 않다"고 간주했다.[39] 사건에 대한 의문은 이후 수년간 많은 기사와 책을 낳았다.
5. 3. 1980년 대통령 선거 운동
케네디는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인 지미 카터에 맞서 민주당 후보 지명을 받기 위해 이례적인 반란 선거 운동을 시작했다. 1978년 한여름 여론 조사에서 민주당원들은 카터보다 케네디를 5 대 3으로 더 선호했다. 1979년 여름, 케네디가 출마 여부를 고심하는 동안 카터는 28%의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케네디가 출마한다면, 내가 그를 꺾을 것이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81][82] 카터는 케네디가 자신의 정책을 끊임없이 비판하는 것이 대통령 출마를 계획하고 있다는 강력한 지표라고 주장했다. 노동조합과 일부 민주당 관계자들은 카터의 낮은 인기가 1980년 의회 선거에서 큰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하며 케네디에게 출마를 촉구했다. 1979년 8월, 케네디는 출마를 결심했고 당시 여론 조사에서 카터에 2 대 1로 앞섰다. 카터의 지지율은 19%까지 떨어졌다. 케네디는 1979년 11월 7일 보스턴의 패뉴일 홀에서 공식 출마를 선언했다.[82] 그러나 며칠 전 CBS 뉴스의 로저 머드와의 인터뷰에서 "왜 대통령이 되고 싶으십니까?"라는 질문에 횡설수설 대답하여 부정적인 언론 보도를 받았다.[82][83] 11월 4일에 시작된 이란 인질 사태와 12월 27일에 시작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유권자들이 대통령을 지지하도록 유도했고, 카터는 백악관에 머무르는 로즈 가든 전략을 추구하며 케네디의 선거 운동을 헤드라인에서 벗어나게 했다.[82]
케네디의 선거 운동 본부는 조직력이 부족했고, 케네디는 처음에는 효과적인 선거 운동가가 아니었다. 케네디가 정말 대통령이 되기를 원했는지에 대한 증거는 거의 없었다.[82] 머드에게 한 앞뒤가 맞지 않는 답변은 월터 먼데일이 상원에서 케네디를 잘 알고 있었는데, 그가 "단어를 사용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연결되지 않았다"면서 주제를 피하는 방식이라고 묘사한 것의 한 예였다.[84] 머드 인터뷰에 참여했던 라이프의 크리스 휘플은 케네디의 답변이 "의식적이든 아니든, 정치적 자멸 행위였는지... 선거 운동은 끝났다. 그의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했다.[85] 채퍼쿼딕 사건은 본부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고, 여러 신문 칼럼니스트와 사설에서 케네디의 답변을 비판했다. 1980년 1월 예비 선거 시즌을 시작한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카터는 케네디를 59~31%로 완파했다.[82] 케네디의 모금액은 즉시 감소했고 선거 운동 규모를 축소해야 했지만, 그는 "이제 누가 누구를 꺾을지 보자"라고 말했다.[86]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네디는 뉴잉글랜드에서 세 번의 경선에서 졌다.[82] 케네디는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우리는 사회 진보의 꿈이 그들의 전제가 실패한 사람들에 의해 산산조각 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출마하는 이유에 대해 더 일관된 메시지를 형성했다. 그러나 채퍼쿼딕에 대한 우려와 개인적 성격 문제로 인해 케네디는 카터에게 환멸을 느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87] 세인트 패트릭의 날 퍼레이드에서 케네디는 암살 위협 때문에 방탄 조끼를 입어야 했고, 야유꾼들은 "메리 조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외쳤다. 1980년 3월 18일 일리노이주에서 열린 주요 예비 선거에서 케네디는 가톨릭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카터는 169명의 대의원 중 155명을 획득했다.[82]
뉴욕 예비 선거에서 또 다른 패배가 예상되면서 케네디는 선거 레이스에서 물러날 준비를 했다.[82] 그러나 서안 지구의 이스라엘 정착촌에 반대하는 유엔에서의 미국 투표에 대한 유대인 유권자들의 불만으로 인해 케네디는 1980년 3월 25일 투표에서 59~41%로 승리했다.[82] 카터는 채퍼쿼딕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케네디의 인격을 공격하는 광고 캠페인으로 대응했지만, 케네디는 4월 22일 펜실베이니아 예비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82] 카터는 5월에 치러진 12번의 예비 선거 중 11번을 이겼고, 6월 3일 슈퍼 화요일 예비 선거에서 케네디는 8번의 경선 중 캘리포니아, 뉴저지 및 세 개의 소규모 주에서 승리했다. 전체적으로 케네디는 10번의 대통령 예비 선거에서 승리했고, 카터는 24번을 이겼다.[88]
카터가 지명을 확정할 수 있는 충분한 대의원을 확보했지만, 케네디는 8월 뉴욕에서 열린 1980년 민주당 전당 대회까지 선거 운동을 이어가면서 예비 선거 결과에 구속된 대의원들을 해방하고 전당 대회를 개방하는 규칙을 통과시키기를 희망했다.[82] 이 움직임은 전당대회 첫날 밤에 실패했고, 케네디는 물러났다.[82] 8월 12일 둘째 날 밤, 케네디는 그의 경력에서 가장 유명한 연설인 그 꿈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를 했다.[89]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알프레드 테니슨 경을 언급하고 인용하여 미국 자유주의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맺었다.
> 나에게는, 몇 시간 전에, 이 선거 운동이 끝났습니다. 우리의 관심사였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일은 계속되고, 대의는 지속되며, 희망은 여전히 살아 있고, 꿈은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90]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청중들은 30분 동안 열광적인 박수와 시위로 반응했다.[82] 마지막 밤, 케네디는 카터의 수락 연설 이후 늦게 도착했고, 카터의 손을 잡았지만, 당의 단결을 보여주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카터의 팔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케네디 지지자들의 도움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카터는 11월에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배했다.
5. 4. 입법 활동과 업적
1968년 말, 케네디는 자동차 노동자 연합 회장 월터 로이터의 초청으로 전국 보건 보험 위원회에 가입했다. 1970년 로이터가 사망하고 상원 노동 공리 위원회와 보건 소위원회 의장 랠프 야보러가 예비 선거에서 패하면서 케네디는 전국 보건 보험 문제에 대한 리더십 역할을 맡게 되었다. 케네디는 1970년 8월 비용 분담 없이 급여세와 일반 연방 세입으로 지불되는 단일 지불자 보편적 전국 보건 보험을 위한 초당적 법안을 발의했다.[82] 보건 문제는 케네디가 평생 옹호할 주요 의제 중 하나였다.
1971년 2월, 닉슨 대통령은 고용주가 보험료의 25%를 지불하면 고용인이 개인 보건 보험을 제공하도록 의무화하는 보건 보험 개혁안과, 빈곤층 자녀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국민 의료 보장 제도 연방화, 보건 유지 조직 지원을 제안했다. 1971년 전국 보건 보험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지만, 이 법안은 하원 세입 위원회 의장 윌버 밀스와 상원 재정 위원회 의장 러셀 B. 롱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케네디는 1973년 제한적인 보건 유지 조직 법령 통과를 후원하고 도왔다.
1974년 4월, 케네디와 밀스는 닉슨의 계획과 유사하지만 급여세를 통한 고용인과 고용주의 필수 참가를 포함하는 거의 보편적인 전국 보건 보험 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두 계획 모두 실질적인 비용 분담 때문에 노동, 소비자, 노인 조직으로부터 비판받았다. 1974년 8월 닉슨 사임과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보건 보험 개혁 요구 이후, 밀스는 닉슨의 계획에 기반하지 않고 개인 보건 보험 회사를 통한 고용인과 고용주의 필수 참가를 포함하는 타협안을 시도했으나, 위원회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포기했다.
1976년 카터 대통령 당선 이후 케네디는 다시 한번 전국 보건 보험을 위해 노력했다. 1978년 7월, 케네디는 카터 대통령이 단계적 시행 외에 보상을 위한 고정된 일정과 함께 하나의 법안을 집행하지 않으려 하자 결별했다. 케네디는 1978년 12월 민주당 중간 집회에서 전국 보건 보험에 대한 연설에서 "어쩌다 당은 바람을 거슬러 항해해야 한다"며 보건을 "소수의 값비싼 특권이 아닌 모두를 위한 기본 권리"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9년 5월, 케네디는 새로운 초당파 보편적 전국 보건 보험 법안을 제안했다. 이 법안은 고용주 의무를 통한 소득 기반 보험료로 비용 분담 없이 연방 규제를 받는 개인 보건 보험 계획을 선택하고, 개인 보험 회사에 보험료를 정부가 지불하는 방식으로 국민 의료 보장 제도를 대체하며, 처방약 보장을 추가하고 노인 의료 보험을 개선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카터 대통령은 1979년 6월 고용인이 유아와 임신한 여성을 위한 보장을 추가한 치명적인 개인 보건 보험을 제공하도록 의무화하는 제한적인 보건 보험 개혁안을 제안했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의 계획은 의회에서 영향력을 얻지 못하고 합의에 실패했다.
클린턴 보건 계획 실패 이후, 케네디는 이전 전략과 달리 증분적 접근 방식을 택했다. 그는 1996년 공화당 상원 의원 낸시 카세바움과 협력하여 보험 이동성과 기록 기밀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설정한 보건 보험 이동성 책임 법을 만들고 통과시켰다. 같은 해, 케네디의 정신 보건 형평법은 보험 회사가 정신 건강 보험금을 다른 보험금과 동등하게 처리하도록 강제했다. 1997년, 케네디는 국민 의료 보장 제도가 시작된 1960년대 이후 가장 큰 납세자 기금 보건 보험 보장 확장에 담배세 인상을 사용하는 주 아동 보건 보험 프로그램의 주요 제안자였다. 상원 의원 오린 해치와 힐러리 클린턴도 이 프로그램 통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0년 선거에서 공화당이 대통령직과 상원을 장악하면서 케네디는 처음으로 소수당이 되었다. 케네디는 노동 및 공공 복지 위원회의 서열 위원이 되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나중에 그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 중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케네디는 레이건의 정책에 반대하고, 투표권법을 보존 및 개선하며, 에이즈 치료 자금 지원, 타이틀 IX에 따른 여성 스포츠에 대한 동등한 자금 지원을 위해 공화당 상원 의원들과 협력했다.[82] 그는 장시간 일하고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중요한 주제에 대해 논의하는 공개 포럼을 고안했다.[82]
케네디는 레이건 행정부의 외교 정책, 특히 엘살바도르 내전에 대한 미국의 개입과 니카라과 콘트라에 대한 지원에 반대했다. 그는 B-1 폭격기, MX 미사일, 전략 방위 구상 등 레이건이 지지하는 무기 체계에 반대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케네디는 핵 동결을 위한 상원의 선두 옹호자였으며 소련에 대한 레이건의 대결 정책을 비판했다.[93][94][95]
1983년 KGB 메모는 케네디가 소련과 비밀 소통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96][97][98] KGB 의장 빅토르 체브리코프가 유리 안드로포프에게 보낸 메모에 따르면, 케네디는 안드로포프에게 핵 군축 문제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미국 텔레비전 출연을 준비하겠다고 제안했다.[100][98] 그러나 안드로포프는 케네디의 제안에 감명을 받지 않았고, 이 메모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101]
케네디는 1985년 남아프리카를 방문하여 아파르트헤이트 정부와 AZAPO 시위대에 맞서 데스몬드 투투 주교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위니 만델라를 방문했다.[82] 그는 1986년 포괄적 반 아파르트헤이트법 통과와 레이건의 거부권 무효화를 이끌었다. 케네디는 1986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와의 군비 통제 협상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고, 아나톨리 샤란스키를 포함한 소련 유대인 거부자 석방에 기여했다.[82]
1986년 의회 선거 이후 민주당이 상원을 다시 장악하면서 케네디는 노동 및 공공 복지 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그는 오린 해치 상원 의원과 긴밀히 협력하여 많은 건강 관련 법안을 추진했다.
케네디는 1987년 로버트 보크 대법관 지명에 반대하는 투쟁을 주도했다. 그는 보크의 원리주의 사법 철학을 비판하며 "로버트 보크의 미국" 연설을 통해 반대 여론을 형성했다. 보크 지명은 결국 부결되었고, 이 사건은 워싱턴의 정치 지형을 바꾸었다.[106][111]
케네디는 1990년 미국 장애인법 통과를 주도했으며, 이를 그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성공 중 하나로 여겼다.[105] 그는 라이언 화이트 케어법 통과에도 기여했다. 1989년 케네디는 베를린 장벽 붕괴를 직접 목격하고 존 F. 케네디 광장에서 연설했다.
1991년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 지명 청문회에서 케네디는 애니타 힐의 성희롱 혐의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로 비판받았다.[102] 전기 작가 아담 클라이머는 케네디의 침묵을 그의 상원 경력 최악의 순간으로 평가했다.
케네디는 1994년 밋 롬니와의 치열한 상원 선거에서 승리했다. 전국적으로 공화당 혁명이 일어났지만, 케네디는 58% 대 41%로 재선에 성공했다.
케네디는 상원 의원으로 재직하는 동안 300개 이상의 법안을 법률로 제정했다. 그는 경제적, 사회적 정의를 강조하며 정부 개입을 옹호하는 진보주의자였지만, 공화당과 협력하여 타협점을 찾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케네디는 1965년 이민 및 국적법, 1971년 국민 암 법, 1985년 COBRA 건강 보험 조항, 1986년 포괄적 반 아파르트헤이트 법, 1990년 미국 장애인 법, 라이언 화이트 에이즈 케어 법, 1991년 시민권 법, 정신 건강 형평성 법, S-CHIP 아동 건강 프로그램, 낙오 아동 방지법, 에드워드 M. 케네디 서브 아메리카 법 등을 제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5. 5. 외교 정책
1974년 4월, 케네디는 소련을 방문하여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지도자와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유로운 이주와 완전한 핵실험 금지를 주장했으며,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에서 연설했다. 또한, 소련의 반체제 인사들을 만나 유명한 첼로 연주자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의 출국 비자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102] 케네디의 난민·탈주민 소위원회는 베트남 전쟁, 특히 1975년 사이공 함락과 관련된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여했다.
1977년 12월 말, 케네디는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덩샤오핑과 회담을 가졌고, 그 결과 다수의 중국인들이 본토를 떠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102] 1978년에는 다시 소련을 방문하여 브레즈네프와 반체제 인사들을 만났다. 같은 해, 케네디는 핵 군축 문제에 대한 관심의 일환으로 일본 히로시마를 방문하여 히로시마 대학교에서 관련 연설을 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당선 이후, 케네디는 레이건 행정부의 외교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엘살바도르 내전에 대한 미국의 개입과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에 대한 지원을 비판했으며, 록웰 B-1 랜서, LGM-118 피스키퍼, 전략 방위 구상과 같은 레이건 대통령이 지지한 무기 시스템에 반대했다. 또한, 케네디는 핵 동결을 위한 상원의 주요 지지자였으며, 소련에 대한 레이건 대통령의 강경 정책을 비판했다.
1983년 KGB 문건에 따르면, 케네디는 소련과 비밀 소통 채널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1983년 5월 14일, KGB 의장 빅토르 체브리코프는 유리 안드로포프 서기장에게 보낸 메모에서, 케네디의 친구이자 전 대학 친구인 존 V. 튜니 상원의원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케네디의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메모에 따르면, 케네디는 "핵전쟁의 위협을 제거"하고 "미국-소련 관계를 개선"하며 "세계 안보를 확립"하는 데 관심을 표명했다. 체브리코프는 케네디가 "미국-소련 관계의 현 상황에 매우 우려하고 있다"고 언급하며, 레이건 대통령이 "전쟁과 평화, 미국-소련 관계 문제에 있어 유일한 실질적인 위협"이라고 믿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케네디는 1984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 문제들이 중요한 쟁점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케네디는 안드로포프에게 미국의 텔레비전에 출연할 수 있도록 모스크바를 방문할 것을 제안하면서, "핵 군축 문제에 대한 설명을 통해 소련 관리들이 미국에서 더 잘 준비되고 설득력 있게 보이도록" 돕고자 했다.
체브리코프는 또한 "케네디가 198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의향이 있으며, 민주당이 공화당에 맞서 싸움을 이끌기 위해 국제 협력에 대한 순수한 개인의 정치적 야망에 물든 제안을 하는 것은 그에게 은밀한 비밀"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튜니와 케네디는 이 메모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1985년 1월, 케네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하여 데즈먼드 투투 주교의 소웨토 자택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정부와 아자니아 인민기구(AZAPO) 모두를 무시하고, 투옥된 흑인 지도자 넬슨 만델라의 부인 위니 만델라를 방문했다. 귀국 후, 케네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한 경제 제재를 주도했으며, 로얼 와이커 상원의원과 협력하여 1986년 포괄적 반아파르트헤이트 법안을 상원에서 통과시켰다. 케네디는 레이건 대통령과 정치적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레이건 행정부의 지지 하에 소련을 방문하여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무기 통제 협상을 중개했다. 이 협상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케네디는 아나톨리 샤란스키를 포함한 여러 유대인 반체제 인사들의 석방을 돕는 데 기여했다.
5. 6. 로버트 보크 대법관 지명 반대
1987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로버트 보크를 미국 대법원 판사로 지명하자, 케네디는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다. 케네디는 보크가 민권법을 후퇴시킬 것을 우려했다. 그는 보크의 판결 기록을 철저히 조사했고, 지명 한 시간 만에 상원 연설을 통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105]
케네디는 "로버트 보크의 미국은 여성이 뒷골목 낙태를 강요받고, 흑인들이 인종차별 식당에 앉아야 하며, 경찰이 한밤중에 시민의 집 문을 부술 수 있고, 아이들이 진화론을 배울 수 없고, 작가와 예술가가 검열당하며, 수백만 시민이 법원에 접근할 수 없는 세상"이라고 비판했다.[105]
이 연설은 보크 지지자들을 분노하게 했고, 일부 민주당원들도 비판적이었다. 보크는 연설 내용이 정확하지 않다고 반박했다.[105] 보크는 법무차관 시절, 민권 소송에서 75%를 지지하는 등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105]
하지만 레이건 행정부는 케네디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보크 지명에 대한 민주당 내 지지가 약화되었다. 케네디는 상원 법사위원회 청문회에서 민권, 사생활, 여성의 권리 등 여러 문제에 대해 보크를 강하게 압박했다. 결국 보크의 대법관 지명은 부결되었다.[105]
보크 지명 반대 투쟁은 이후 대법관 지명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후보자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논쟁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5. 7.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 지명 청문회
클래런스 토머스는 미국 역사상 가장 논쟁의 여지가 있는 미국 대법원 후보 지명자 중 한 명이었다. 1991년 9월 토머스 청문회가 시작되었을 때, 케네디는 로 대 웨이드 사건에 관한 의견을 표현하는 데 주저하는 토머스를 압박하였으나 후보 지명은 성공할 것으로 보였다. 이어진 달에 아니타 힐이 토머스에 성희롱 혐의를 제기했을 때 후보 지명 싸움은 공개 담론을 지배하였다. 케네디는 자신의 과거 평판과 윌리엄 케네디 스미스의 강간 사건에서 비롯된 논란으로 인해 제약을 받았다. 그는 토머스-힐 청문회의 3번째 날까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발언했을 때도 너무 적고 늦었다는 이유로 토머스 지지자들에게 비판받았다.
전기작가 애덤 클라이머는 토머스 청문회 동안 케네디의 침묵을 그의 상원 경력에서 최악의 순간으로 평가하였다. 작가 애나 퀜들런은 "케네디는 자신이 해야 했기 때문에 우리를 실망시켰으며, 그는 그의 인생의 사실들에 의하여 총구를 앓았다."고 말했다. 상원 전체 투표가 있기 하루 전, 케네디는 토머스에 대해 열렬한 연설을 하며 힐에 대한 대우는 "부끄러운 것"이었으며, 토머스 판사에게 의심의 이익을 주는 것은 토머스가 대법원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그러고 나서 후보 지명에 반대 투표하였다. 토머스는 52 대 48의 투표로 인준되어, 성공적인 후보 지명을 위한 가장 근소한 차이 중 하나를 기록했다.
5. 8. 버락 오바마 지지
2004년 대선에서 케네디는 자신의 선거 자원 봉사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존 케리 상원 의원을 지원했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케리가 계속 출마를 희망한다면 전면적으로 지지할 의사를 보였지만, 케리는 2008년 1월 10일에 버락 오바마 상원 의원 지지를 표명했다. 케네디는 200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격화되는 동안 중립을 지키다가, 1월 28일에 오바마 후보 지지를 표명했다.[248]
케네디는 "새로운 세대의 리더십이 다시 필요한 때"라고 말하며 오바마의 영감 능력을 자신의 형제들의 능력과 비교했다.[138] 이에 오바마는 당선될 경우 보편적 의료 보장을 행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는 약속을 케네디에게 받았다.[137] 케네디의 지지는 민주당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지지 중 하나로 여겨졌으며,[140] 노조, 히스패닉,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 사이에서 오바마의 득표율을 높일 가능성을 높였다.[139]
2008년 5월 17일, 케네디는 발작을 일으켜 보스턴 시내 병원에 긴급 입원하여 악성 뇌종양으로 진단받았지만, 종양 적출 수술에 성공했다. 같은 해 8월 200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하여 오바마 후보 지지를 호소했다.
2009년 1월 20일,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지만, 그 와중에 발작을 일으켜 병원으로 옮겨졌다. 의사로부터 과로라는 진단을 받았고, 그 다음 날에는 회복하여 퇴원했다.
6. 질병과 사망
2008년 5월 17일, 케네디는 케네디 구내에서 코드곶으로 이동하던 중 발작을 일으켰고, 헬리콥터를 통해 보스턴의 매사추세츠 일반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177] 며칠 후, 의사들은 케네디가 암성 뇌종양의 일종인 악성 뇌교종을 앓고 있다고 발표했다.[177] 이러한 암울한 진단은 양당의 많은 상원의원들과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충격과 기도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177]
병을 얻은 후, 2008년 7월 9일 케네디는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나타나 상원을 놀라게 했다. 그는 의사들을 위한 국민 의료 보장 제도를 보존하는 법안에 반대하는 공화당의 의사 방해를 깨는 데 필요한 추가 투표를 제공했다.[177] 또한, 케네디는 신장결석으로 고생하기도 했다.[177]
2009년 1월 20일, 케네디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으나, 오찬 도중 발작을 일으켰다.[177] 그는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휠체어와 앰뷸런스를 통해 워싱턴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의사들은 이 사건을 "단순한 피로" 탓으로 돌렸다.[177] 케네디는 다음 날 퇴원하여 워싱턴 D. C.에 있는 자택으로 돌아갔다.[177]
케네디는 2009년 8월 25일, 매사추세츠주 하이야니스포트에 있는 자택에서 뇌종양으로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78] 그의 가족은 성명을 통해 "지난 1년 동안 그를 보살펴주고 지지해준 모든 분들, 그리고 정의를 향한 그의 헌신적인 행보에서 수년 동안 함께 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표했다.[178] 케네디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는 그의 형들 옆에 안장되었다.[177]
케네디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매사추세츠주 연방 상원의원 자리를 채우기 위해 2010년 1월 19일 특별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공화당의 스콧 브라운이 승리하여 1953년부터 이어져 온 민주당의 지배를 끝냈다.[177]
7. 유산과 평가
케네디는 뇌종양 진단을 받은 지 15개월 후인 2009년 8월 25일, 77세의 나이로 매사추세츠주 하이야니스포트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케네디의 가족은 성명을 통해 "그를 돌보고 이 마지막 세월에 성원을 준 모든 이들, 그리고 정의를 향한 진보를 위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행진에 너무 많은 세월 동안 그와 함께 서있던 모든 이들"에게 감사했다. 케네디가 사망했을 때 그는 상원에서 웨스트버지니아주의 로버트 버드에 이어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의원이었고, 버드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스트롬 서먼드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장기간 재직한 상원의원이었다. 그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자신의 형들과 나란히 안장되었다.
케네디의 사망으로 생긴 매사추세츠주 연방 상원의 공석을 채우기 위해 2010년 1월 19일 특별 선거가 열렸다. 이 선거에서 공화당 스콧 브라운이 의석을 차지하여 1953년 이후 민주당의 지배를 끝냈다. 브라운의 승리는 2009년 중반 이후 민주당원들이 보유한 상원에서 60개의 과반수 투표를 끝냈고, 보건 개혁 입법의 종말을 의미하는 듯했다. 그러나 민주당원들은 집회하고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낸시 펠로시는 최종 투표가 있기 전에 그의 일생을 믿었다. 케네디의 미망인 비키는 자신과 오바마 대통령이 청색의 "테드스트롱" 팔찌를 낀 오바마케어의 서명식에 참석하였다. 패트릭 케네디 의원은 대통령을 위한 선물로 1970년 부친이 소개한 전국 보건 보험 법안의 복사본을 가져왔다. 그러고 나서 패트릭 케네디는 부친의 무덤에 "아빠, 미완성 업무는 끝났어요."라고 말한 쪽지를 놓았다. 재선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패트릭의 초기 결정은 2011년 1월 케네디 가문이 연방 선택 과제를 64년간 보유한 기간이 끝났음을 의미했지만, 테드의 증조카 조지프 P. 케네디 3세가 하원의원이 되면서 2013년 1월에 다시 시작되었다. 케네디의 전 상원 의석은 엘리자베스 워런에게 브라운이 2012년 패배하면서 민주당이 다시 차지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케네디의 사망을 "탁월한 지도자의 서거"로 평가했고,[179] 자신과 영부인 미셸 오바마는 "마음이 찢어졌다"고 말했다.[180] 조 바이든 부통령은 "오늘 우리는 정말 훌륭한 사람을 잃었다"고 말했으며,[181] 케네디가 "수천만 명의 미국인의 환경을 변화시켰다"고 언급했다.[182]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이자 1994년 상원 선거에서 케네디의 상대였던 밋 롬니는 케네디를 "적이라도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칭했고,[183] 낸시 레이건 전 영부인은 "몹시 슬프다"고 말했다. 그녀는 "우리의 정치적 견해 차이를 고려할 때, 사람들은 로니(로널드 레이건)와 내가 케네디 가족과 얼마나 가까웠는지에 종종 놀라곤 한다. ... 그가 그리울 것이다."라고 말했다.[184][185] 상원 임시 의장인 로버트 버드 상원의원은 케네디의 죽음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며 "내 마음과 영혼은 상원에서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사랑하는 친구를 잃은 슬픔으로 운다"고 말했다.[186] 버드는 전년도 케네디의 암 진단이 공개되었을 때 상원 본회의장에서 참을 수 없이 울었다.[187]
정치권 밖에서도 추모가 이어졌다. 보스턴 레드삭스 경기 전, 펜웨이 파크의 깃발이 조기로 게양되었고 선수들이 베이스라인에 서 있는 동안 "Taps"가 연주되었으며,[188] 뉴욕 양키스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경기에 앞서 묵념 시간을 가졌다.[189]
케네디의 장례 행렬은 하이애니스 포트의 케네디 가에서 보스턴 존 F. 케네디 도서관까지 약 112.65km 이동했으며, 그곳에서 그의 시신이 안치되었다.[190] 5만 명 이상의 대중이 조문하기 위해 방문했다.[191] 8월 29일 토요일, 장례 행렬은 도서관에서 보스턴의 영원한 도움의 성모 바실리카 성당으로 이동하여 장례 미사를 거행했다.[192] 장례식에는 오바마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 지미 카터,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아버지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을 대신하여 참석, 부친은 불참 결정),[193] 바이든 부통령, 세 명의 전직 부통령, 상원의원 58명, 전직 상원의원 21명, 다수의 하원의원, 그리고 여러 외국 귀빈들이 참석했다.[194] 오바마 대통령이 추도사를 했다.[195]
장례식에는 정치계 외부에서 보스턴, 워싱턴, 그리고 미국 전역에서 언론인 밥 우드워드, 톰 브로커, 웬 이필, 가수 토니 베넷과 플라시도 도밍고, 첼리스트 요요 마, 배우 잭 니콜슨, 로렌 바콜, 브라이언 스토크스 미첼, 하버드 대학교 총장 드류 길핀 파우스트, 매사추세츠 대학교 총장 잭 M. 윌슨을 포함한 보스턴 지역 대학교 총장과 학장, 그리고 전 보스턴 셀틱스 농구 선수 빌 러셀을 비롯한 스포츠계 인사, 그리고 레드삭스의 최고 경영진이 참석했다.[195][196]
케네디의 유해는 워싱턴 D.C.로 옮겨져 암살된 형제들의 묘지 근처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195] 전 추기경이자 워싱턴 D.C. 대주교인 테오도르 매카릭이 그의 장례식을 주관했으며, 바이든, 케네디의 미망인 비키, 그리고 다른 케네디 가문 구성원들이 참석했다.[197] 케네디의 묘비는 형 로버트의 묘비와 동일하게 흰 참나무 십자가와 그의 이름과 출생 및 사망 연도가 새겨진 흰 대리석 발치 표지였다.[198]
케네디는 2009년 8월 사망 당시 상원 내에서 두 번째로 오래 재직한 의원(임시 의장 로버트 버드 웨스트버지니아 출신 다음)이었으며, 버드와 스트롬 서먼드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오래 재직한 상원의원이었다. 그해 말, 대니얼 이노우에 하와이 출신에게 추월당했다.[223] 따라서 케네디는 2021년 10월까지 상원 의원으로만 재직한 최장 기간의 민주당 의원이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당시 그는 동료 민주당원 패트릭 리히 버몬트 출신에게 추월당했다.
케네디는 재임 기간 동안 당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 되었고, 때로는 "민주당의 아이콘"[224]으로 불렸으며 "상원의 사자"라고 불리기도 했다.[31][225][226][227] 케네디와 그의 상원 보좌관들은 약 2,500건의 법안을 작성했으며, 이 중 300건 이상이 법으로 제정되었다.[105] 케네디는 1973년 이후 법으로 제정된 550건의 법안을 공동 발의했다.[105] 케네디는 공화당 상원의원 및 행정부와의 효과적인 관계를 통해 유명했으며, 때로는 다른 민주당원들을 짜증나게 하기도 했다.[233] 101대 미국 국회 기간 중 조지 H.W. 부시 대통령 하에서 상원 민주당 정책 입안자들이 제안한 성공적인 안건의 최소 절반이 케네디의 노동 및 인적 자원 위원회에서 나왔다. 2000년대 동안,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서명된 거의 모든 초당적 법안에는 케네디가 상당한 정도로 참여했다.[31] 2000년대 후반 공화당 상원의원들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케네디는 초당성에서 민주당원 중 1위를 차지했다.[227] 케네디는 "완벽은 선의 적이다"라는 원칙을 강력하게 믿었고, 나중에 개선할 목표로 불완전하거나 미완성된 것으로 간주되는 법안 통과에 동의하곤 했다.[31] 2006년 4월, 케네디는 ''타임''에 의해 "미국 최고의 상원 의원 1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잡지는 그가 "사실상 모든 남녀노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엄청난 양의 법률 기록을 축적"했고 "1990년대 후반에 자유주의의 아이콘이 너무나 많은 초당적 거래를 하여 공화당 지도자들이 당 동료들에게 그와 함께 법안을 공동 발의하지 말라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고 언급했다.[228] 2008년 5월,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될 존 매케인은 "[케네디]는 전설적인 입법자이며 그에 대한 존경심이 가장 높다. 우리가 함께 일했을 때 그는 훌륭하고 공정하며 관대한 파트너였다"고 말했다.[31] 공화당 캘리포니아 주지사이자 케네디 친척인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테디 삼촌"을 "자유주의의 아이콘, 불우한 사람들을 위한 전사, 의료 개혁의 열렬한 옹호자, 국내외 사회 정의의 챔피언"이자 "가족의 버팀목"이라고 묘사했다.[227] 케네디가 사망했을 때, 사회학자이자 ''The Nation'' 이사회 멤버인 노먼 번바움은 케네디가 미국 진보주의의 "목소리"이자 "양심"으로 여겨지게 되었다고 썼다.[229]
그의 초당적 입법 관행에도 불구하고, 케네디는 수년 동안 미국 자유주의의 양극화된 상징이었다.[228][230][231][232] 공화당 및 보수 단체들은 오랫동안 케네디를 힐러리 클린턴과 마찬가지로 기금 모금 편지에서 언급할 신뢰할 수 있는 "구렁텅이"로 간주했으며, 뉴트 깅리치를 언급하는 민주당 및 자유주의자들의 호소와 유사했다.[234][235] 노스캐롤라이나 상원의원 제시 헬름스가 하비 간트를 상대로 한 1990년 재선 캠페인에서 사용된 인종적 동기 부여 "손" 공격 광고는 간트가 "테드 케네디의 인종 할당 법"을 지지한다고 비난했다.[236]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 정치학 교수 게리 제이콥슨의 2006년 당파 양극화 연구에 따르면 주별 상원의원 직무 수행 평가 설문 조사에서 케네디는 매사추세츠의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의 57% 차이로 모든 상원의원 중 가장 큰 당파적 차이를 보였다.[237] AP 통신은 "아마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케네디는 찬미자들에게 자유주의 거인으로, 비난자들에게 좌익 캐리커처로 자신의 이미지를 흔들려고 시도하지 않았다"고 썼다.[232]
1968년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된 후 테드는 케네디 가문의 가장 저명한 생존 구성원이었으며 조셉 P. 케네디와 로즈 피츠제럴드 케네디의 마지막 생존 아들이었다. 존 F. 케네디는 1957년에 "조가 죽었기 때문에 내가 정치에 입문했고, 내일 무슨 일이 생기면 동생 바비가 내 상원 자리를 위해 출마할 것이다. 그리고 바비가 죽으면 테디가 그를 대신할 것이다"라고 말했다.[238] 그러나 테드는 1980년 대선 출마 실패로 인해 많은 부분이 사라지면서, 몰락한 두 형제와 같은 방식으로 "카멜롯" 신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233] 채퍼퀴딕에서 메리 조 코페크네의 죽음에 대한 그의 과실과 이후에 잘 기록된 개인적인 문제들은 케네디라는 이름과 관련된 그의 이미지를 더욱 손상시켰으며,[1] 대통령이 될 가능성을 상당히 훼손시켰다.[242] AP 통신은 "형제들과 달리 에드워드 M. 케네디는 대중 앞에서 늙어갔고, 그의 승리, 패배 및 인간적 모순은 수십 년 동안 대중의 시선 속에서 펼쳐졌다"고 썼다.[233] 하지만 케네디의 입법적 업적은 여전했고, ''보스턴 글로브''는 "21세기 초까지 젊은 동생의 업적은 많은 대통령들의 업적과 맞먹을 정도가 될 것"이라고 썼다.[1] 그의 죽음은 "카멜롯 시대"가 진정으로 끝났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240][241] 케네디의 ''뉴욕 타임스'' 부고는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상원과 삶에서 라블레식 인물이었으며, 하얀 머리, 붉고 과장된 얼굴, 우렁찬 보스턴 억양, 강력하지만 고통스러운 걸음걸이로 즉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유명인이었고, 때로는 자기 패러디였으며, 다정한 친구였고, 냉혹한 적이었으며, 큰 신념과 큰 결함을 가진 사람이었고, 멜랑콜리한 인물로 끈기 있게 노력하고, 깊이 마시고, 크게 노래했다. 그는 케네디였다.[242]
8. 수상 및 영예
케네디 상원 의원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상과 영예를 받았다. 여기에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수여한 명예 대영 제국 훈장, 멕시코의 아즈텍 독수리 훈장, 대통령 자유 훈장, 하버드 대학교를 포함한 다수의 학회들로부터 받은 명예 학위들이 포함된다.[190]
케네디의 훈장에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수여한 명예 기사 작위, 멕시코의 아즈텍 독수리 훈장,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칠레의 공로 훈장, 그리고 하버드 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받은 명예 학위가 포함된다.
9. 저서
- 《유익한 가지》 (조지프 P. 케네디에 관한 수집된 평론) (1965년 비공개 출간)
- 에드워드 M. 케네디, 《10년의 세월을 위한 결정들: 1970년대를 위한 정책과 프로그램들》 (1968년)
- 에드워드 M. 케네디, 《위독한 상태에서: 미국의 보건에서 위기》 (1972년)
- 《우리의 하루와 우리의 세대: 에드워드 M. 케네디의 말》 (1979년)
- 에드워드 M. 케네디, 《꼼짝마라!: 당신은 핵무기 전쟁을 막을 수 있다》 (1982년)
- 에드워드 M. 케네디, 《미국 다시 궤도에》 (2006년)
- 에드워드 M. 케네디, 《나의 상원과 나: 워싱턴 D. C.의 시선》 (2006년)
- 에드워드 M. 케네디, '''진실한 나침반''' (2009년) - 케네디가 투병 기간 동안 작업한 회고록으로, 그의 사망 3주 후에 출간되었다.[199] 이 책은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1위를 차지했고,[200] 2009년 12월 중순까지 약 40만 부가 판매되었다.[201]
10.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62년 재선거 | 상원의원 (매사추세츠 제1부) | 87대 | 민주당 | 55.44% | 1,162,611표 | 1위 | |
1964년 선거 | 상원의원 (매사추세츠 제1부) | 89대 | 민주당 | 74.26% | 1,716,907표 | 1위 | |
1970년 선거 | 상원의원 (매사추세츠 제1부) | 92대 | 민주당 | 62.14% | 1,202,856표 | 1위 | |
1976년 선거 | 상원의원 (매사추세츠 제1부) | 95대 | 민주당 | 69.31% | 1,726,657표 | 1위 | |
1982년 선거 | 상원의원 (매사추세츠 제1부) | 98대 | 민주당 | 60.81% | 1,247,084표 | 1위 | |
1988년 선거 | 상원의원 (매사추세츠 제1부) | 101대 | 민주당 | 64.97% | 1,693,344표 | 1위 | |
1994년 선거 | 상원의원 (매사추세츠 제1부) | 104대 | 민주당 | 58.08% | 1,266,011표 | 1위 | |
2000년 선거 | 상원의원 (매사추세츠 제1부) | 107대 | 민주당 | 72.61% | 1,887,479표 | 1위 | |
2006년 선거 | 상원의원 (매사추세츠 제1부) | 110대 | 민주당 | 69.30% | 1,500,738표 | 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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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ator's Wife Is His First Mate, Adviser and Careg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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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nnedy Announces Plans to Wed Washington Law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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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nnedy's Wife Is Giving Him a Political Advantage in a Difficult Cont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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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nnedy and Romney Look to Round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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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tch Joins Kennedy to Back a Health Pro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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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ary: A Two-Party System in Name O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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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iraculous Revival Brings Elation but No Rest for G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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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d Kennedy Leads the Liber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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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年大統領選挙におけるマリオ・クオモの演説: 政治家の信仰と職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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ケネディ下院議員、今年11月の中間選挙で不出馬を宣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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