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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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날란다는 '연꽃이 피어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고대 인도의 불교 교육 중심지였다. 굽타 왕조 시대에 승원이 세워져 7세기까지 번성했으며, 최대 1만 명의 학생과 1,500명의 교원이 머물렀다. 티베트, 중국, 한국 등지에서 온 학자들이 유학했으며, 불교의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193년 튀르크-이슬람 군대의 침략으로 파괴되었으나, 현재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대 날란다 대학교가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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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인도의 대학교 - 탁실라
탁실라는 기원전 1000년경 남아시아 간다라 지역에서 시작된 고대 도시이자 유적지로, 힌두교와 불교의 중심지이자 교육의 중심지로 번성하여 고대 세계의 대학 중 하나로 여겨졌으나, 5세기 에프탈족의 침입으로 파괴되어 쇠퇴한 후 고고학 유적지로 남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날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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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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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날라, 날라카, 날라카그라마 |
유형 | 마하비하라, 수도원 |
위치 | 날란다, 비하르 주, 인도 |
지역 | 마가다 |
면적 | 12 헥타르 |
건설 시작 | 기원후 427년 |
폐쇄 | 기원후 1400년경 |
건축가 | 쿠마라굽타 1세 왕 |
사건 | 무함마드 바흐티야르 킬지에 의해 기원후 1200년경 공격 및 약탈당했을 가능성이 있음. |
발굴 | 1915–1937, 1974–1982 |
고고학자 | 데이비드 B. 스푸너, 히라난다 샤스트리, 팔라크 샤, J. A. 페이지, M. 쿠라이시, G. C. 찬드라, N. 나짐, 아말라난다 고쉬 |
상태 | 폐허 |
소유주 | 인도 정부 |
관리 | 인도 고고학 조사소 |
공개 여부 | 예 |
웹사이트 | 인도 고고학 조사소 (ASI) |
인도 고고학 조사소 번호 | N-BR-43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공식 명칭 | 날란다, 비하르 주 날란다의 날란다 마하비하라 유적지 |
ID | 1502 |
등재 연도 | 2016년 |
기준 | 문화: (iv), (vi) |
면적 | 23 헥타르 |
완충 지역 | 57.88 헥타르 |
설명 | |
위치 | 날란다는 파트나에서 남동쪽으로 약 90km 떨어진 인도 비하르 주에 위치함. |
중요성 | 날란다 마하비하라는 고대 마가다 (현재의 비하르 주)에 위치한 유명한 마하비하라, 즉 대규모 불교 수도원이었음. 기원후 427년부터 약 1197년까지 750년 동안 학습 중심지였음. |
역사 | 날란다는 5세기부터 13세기까지 번성한 고대 인도의 학습 중심지였음. "날란다"라는 이름은 "멈추지 않는 선물"을 의미함. |
교육 | 날란다는 조직적인 제도 교육의 시작을 알림. 날란다는 티베트 불교의 사르마 전통에 영향을 미쳤음. |
과목 | 날란다에서 가르친 과목에는 불교, 철학, 의학, 등이 있었음. 학생들은 문법, 의학, 논리를 공부했음. |
영향 | 날란다는 동아시아 불교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현장과 의정과 같은 학자들이 이곳에서 공부했음. |
참고 | |
관련 정보 | 날란다 마하비하라는 불교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임. 2016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음. 날란다 대학은 800년 만에 수업을 재개했음. |
2. 명칭
'날란다'는 '연꽃이 피어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불교에서 연꽃(날란)은 지혜를 상징하기에 "지혜를 주는 곳, 지혜를 받는 곳"으로 해석된다(날란=연꽃, 다=주다).[8] 당나라 승려 현장은 저서 《대당서역기》에서 날란다를 '시무염'(施無厭)이라는 의미로 풀이했는데, 이는 "아낌없이 베푸는 곳, 끊임없이 주는 곳"으로 해석된다(나='없다'는 부정의 의미, 아란=충분함, 다=주다).[8]
석가모니 부처가 이곳을 방문하여 '파바리카'라는 망고나무 아래에서 설법을 행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불교를 배우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굽타 왕조 시대에는 쿠마라굽타 1세에 의해 승원(僧院)이 세워졌다고 여겨지며, 티베트 기록에는 인도의 승려 용수(나가르주나)가 이곳에서 강의를 하였다고 한다.
현지 전승에 따르면 Nālandāsa (힌디어/마가히어: नालन्दा)라는 이름은 ''나가''(인도 종교의 뱀 신)의 이름 ''날란다''에서 유래했다. 현장은 "na-alam-da"에서 유래한 "끊임없는 자선"이라는 다른 의미를 제시했지만, 이 분할은 이를 의미하지 않는다. 유적 발굴을 이끌었던 고고학자 히라난드 사스트리는 이 이름이 지역의 nālassa(연꽃 줄기)가 풍부한 데서 유래했으며, 날란다가 "연꽃 줄기의 제공자"를 나타낸다고 보았다.
타라나타의 17세기 작품 등 일부 티베트 자료에서는 날란다를 ''날렌드라''로 언급하며, 이는 티베트 문학에서 발견되는 Nala, Nalaka, Nalakagrama와 동의어일 가능성이 높다.
마하비하라(Mahavihara)는 "위대한 정사, 대승원"을 의미한다.
3. 역사
날란다 대학의 승려들은 불교가 인도를 넘어 티베트와 중국 등 동쪽으로 전파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645년 유식파의 지라바드라(한역명 계현戒賢)가 당나라에서 온 승려 현장삼장에게 유식을 전했고, 현장은 657부에 이르는 경전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761년에는 중관파의 찬타라굿타(한역명 숙호寂護)가 티베트 불교를 일으켰고, 774년에는 닝마파의 개조(開祖) 파드마삼바바(한역명 연화생蓮華生)가 밀교(密教)를 티베트 불교에 도입했다. 쌈예 사 종론(792년 - 794년)에서는 인도 불교의 카말라실라와 중국 불교의 마하연이 종교 논쟁을 벌여 티베트 불교의 방향성을 결정지었다.
1193년 쿠트브 알 딘 아이바크 휘하의 장군 악티바르 알 딘 무함마드 박티바르 칼지가 이끄는 튀르크 - 이슬람 군대의 침략으로 날란다 대학이 파괴되었다. 인도 불교의 쇠퇴는 이미 굽타 시대부터 시작되고 있었지만, 이슬람 세력에 의한 날란다 파괴는 인도 불교의 멸망을 더욱 확실하게 만들었다.
1957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저우언라이 총리가 인도 수상 자와할랄 네루에게 제안하여 날란다 대학에 현장의 사리가 분골(分骨)되었다.[117]
3. 1. 초기 역사 (기원전 1200년 ~ 기원후 300년)
날란다 인근 유아파르디(Juafardih) 유적지(약 3km)에서 흑색 토기 등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120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는 마하비라와 부처가 태어나기 수세기 전부터 마가다의 날란다 주변에 사람이 살았음을 보여준다.[31]
초기 불교 경전에 따르면 부처는 라지기르(마가다의 수도) 근처 날란다라는 마을을 방문하여 '파바리카'라는 망고 과수원에서 설법을 했다고 한다. 그의 제자 샤리푸트라가 이 지역에서 태어나 열반에 들었다.[32] 불교 경전 '니카야삼그라하'에는 아소카 대왕이 날란다에 '비하라'(수도원)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고고학적 발굴에서는 아소카 시대 또는 그 후 600년 동안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31]
자이나교 경전 '수트라크리탕가'에는 날란다가 수도 라자가르하의 "교외"이며, 마하비라가 14번의 '바르샤스'(우기 동안 승려들이 수행하는 것)를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자이나교 경전은 날란다에 대한 추가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며, 마하비라 사후 거의 천 년 동안 기록되지 않아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31]
3. 2. 설립과 발전 (5세기 ~ 7세기)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 부처가 이곳을 방문하여 '파바리카'(Pavarika)라 불리는 망고나무 아래에서 설법을 행하였다고 한다.
이후 불교를 배우는 중요한 장소가 되어 최대 1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곳에 머물렀다. 굽타 왕조(427년 성립) 시대에 쿠마라굽타 1세에 의해 승원(僧院)이 세워졌다고 여겨지며, 티베트 기록에 따르면 인도의 승려인 용수(나가르주나)가 이곳에서 강의를 하였다고 한다.
날란다의 연대별 역사는 5세기에 시작된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봉인에는 샤크라디티야(ISO|Śakrādityasa, 재위 c. 415–455 CE)라는 군주가 날란다의 설립자로 확인되며, 이곳에 상가라마(수도원)를 설립한 공을 그에게 돌리고 있다. 이는 중국 순례자 현장의 여행기에 의해 뒷받침된다. 형식화된 베다 학습의 전통은 날란다, 타크실라, 비크라마실라와 같은 "대규모 교육 센터의 형성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다."[34][35]
인도 전통과 텍스트에서 왕들은 많은 칭호와 이름으로 불렸다. 안드레아 핑크니와 하트무트 샤르페와 같은 학자들은 샤크라디티야가 쿠마라굽타 1세와 동일하다고 결론 내린다. 그는 굽타의 힌두 왕조의 왕들 중 한 명이었다. 더욱이, 날란다에서 발견된 화폐 증거는 쿠마라굽타 1세가 날란다 수도원-대학교의 설립자 후원자였음을 뒷받침한다.
그의 후계자들인 부다굽타, 타타가타굽타, 발라디티야, 바즈라는 이후에 추가 수도원과 사원을 건설하여 이 기관을 확장하고 넓혔다. 따라서 날란다는 굽타 왕조 하에서 5세기와 6세기에 걸쳐 번성했다. 날란다에 대한 이러한 굽타 시대의 기여는 굽타 양식과 굽타 시대의 문자로 된 수많은 불교 및 힌두교 봉인, 예술 작품, 도상 및 비문에 의해 뒷받침된다. 이 기간 동안, 굽타 왕들이 날란다의 유일한 후원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광범위하고 종교적으로 다양한 지원자 커뮤니티를 반영한다. 샤르페는 "많은 기증자들이 불교도가 아니었고, 그들의 봉인에 있는 문장은 락슈미, 가네샤, 시발린가, 두르가를 보여주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고 언급한다.
굽타 왕조가 쇠퇴한 후, 날란다 마하비하라의 가장 주목할 만한 후원자는 하르샤(일부 불교 기록에서는 쉴라디티야로 알려짐)였다. 그는 카나우지(칸야쿠브자)를 수도로 둔 7세기 황제였다. 현장의 기록에 따르면 하르샤는 바이샤 카스트 출신의 3대 힌두교 왕으로, 웅장한 불교 비하라와 함께 부처, 수리야, 시바를 위한 세 개의 사원을 지었는데, 모두 같은 크기였다.[39] 그는 (c. 637 CE) "오랜 왕조의 계승"이 날란다를 건설하여 "전체가 정말 경이로울 정도"라고 말한다.
사원과 수도원을 지원하는 고대 인도 전통에 따라, 날란다에서 발견된 비문은 왕들이 그들의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마을을 기증하는 등 선물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하르샤는 직접 100개의 마을을 기증하고 이들 마을의 각 200가구가 쌀, 버터, 우유와 같은 필수적인 일일 물품을 기관의 승려들에게 공급하도록 지시했다. 이것은 날란다에서 1,500명 이상의 교수진과 10,000명의 학생 승려를 지원했다. 그러나 이 숫자는 과장되었을 수 있다. 이들은 몇십 년 후에 날란다를 방문한 또 다른 중국 순례자인 의정(義淨)이 제시한 훨씬 더 적은 숫자(3000명 이상)와 일치하지 않는다. 애셔에 따르면, 발굴된 날란다 부지는 크고 지금까지 발견된 비하라의 수는 인상적이지만, 10,000명 이상의 학생 승려를 지원할 수 없다. 알려진 방의 총 개수와 작은 크기는 승려의 수가 현장의 주장보다 훨씬 적거나 날란다 부지가 수많은 발굴이 지금까지 발견한 것과 현장의 묘사보다 훨씬 더 컸어야 함을 의미한다.
3. 3. 한국과 티베트 순례자 (7세기 ~ 9세기)
현장 법사가 귀국한 후 30년 동안, 한국을 포함한 중국에서 온 11명 이상의 여행자가 날란다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0] 20세기 중반 이후, 한국 순례자들의 여정이 드러났는데, 겸익과 같은 승려들은 6세기 중반에 인도의 사찰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인도 문서를 가지고 와서 번역하여 72권의 번역된 문서를 만들었다. 7세기 중반, 신라 승려 현조가 날란다를 포함한 여러 인도 사찰에 머물렀으며, 3년 동안 날란다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영기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는 제자인 혜륜과 현각을 날란다로 유학 보냈는데, 현각은 날란다에서 사망했다. 혜륜은 프라즈나바르만이라는 인도식 이름을 사용했다. 한국 기록에 따르면, 승려들은 9세기까지 험난한 여정에도 불구하고 인도를 방문했으며, 날란다가 가장 존경받는 곳이었다.[41][42]
7세기 이후 톤미 삼보타와 같은 티베트 승려들이 날란다에서 산스크리트어, 문법 등을 공부했다. 삼보타는 산스크리트어와 그 문법의 원리를 티베트어와 그 문자에 적용하여 개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티베트 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삼보타가 날란다에서 처음 돌아온 후였다. 티베트 승려들은 한국인 및 다른 사람들보다 네팔, 시킴, 동인도에 더 가까워 여행 경로가 더 간단했다. 티베트인들은 팔라 시대와 14세기까지 마가다를 방문하여 날란다 등에서 아이디어 교류에 참여했다. 그러나 8세기 이후, 밀교 만다라와 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금강승 불교가 점차 교류를 지배했다.
3. 4. 팔라 왕조 시대 (8세기 ~ 12세기)
팔라 왕조는 8세기 중반에 인도 동부 지역에 자리를 잡고 12세기 마지막 분기까지 통치했으며, 불교 왕조였다. 팔라 왕조 하에서, 현장과 같은 동아시아 순례자들에게 영감을 준 날란다의 전통적인 대승 불교는 탄트라를 받아들인 금강승 불교로 대체되었다. 금강승은 에로스와 신을 포함하는 불교의 밀교 형태였다.[43] 날란다는 팔라 왕조의 지원을 계속 받았지만, 자갓달라, 오단타푸라, 소마푸라, 비크라마실라와 같은 금강승 만다라 사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수도원을 건설하는 데 열정적이었다. 오단타푸라는 왕조의 시조인 고팔라가 건립했으며, 날란다에서 6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43] 이러한 경쟁 수도원들은 날란다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아마도 날란다에서 많은 학식 있는 승려들을 끌어들였을 것이다.
날란다 유적지에서 발굴된 비문, 문헌 증거, 봉인, 파괴된 예술 작품들은 날란다가 팔라 왕조 하에서 활동하고 번성했음을 보여준다. 다르마팔라와 데바팔라 왕은 적극적인 후원자였다. 데바팔라에 대한 언급이 담긴 9세기의 금속 조각상 여러 점과 두 개의 주목할 만한 비문이 발견되었다. 첫 번째는 날란다에서 발굴된 구리판 비문으로, 샤일렌드라 왕인 발라푸트라데바가 '수바르나드비파'(현대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에 기증한 내용을 상세히 담고 있다. 이 스리비자야 왕은 "날란다의 다양한 훌륭함에 매료되어" 그곳에 수도원을 짓고 데바팔라에게 그 유지를 위해 5개 마을의 세수를 기증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고스라완 비문은 데바팔라 시대의 또 다른 비문으로, 젊은 시절에 모든 베다를 공부하고 나중에 날란다의 수장으로 선출된 비크슈인 비라데바를 받아들이고 후원했다는 내용이다.
9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발행된 비문들은 수도원 유지, 승려 관리, 야자 잎 필사본 복사(인도의 열대 기후를 고려할 때 보존에 필수적임)에 대한 날란다에 대한 기증과 지원을 증명한다. 한 비문은 날란다 도서관의 필사본이 화재로 파괴되었고, 이를 복원하기 위한 지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또 다른 10세기 비문은 소트란티카 학파의 바드라차리를 인용하여 날란다에서 다양한 불교 학파의 활동을 증명하고 있다.[44] 11세기 날란다의 또 다른 비문은 "회전식 책장"의 기증을 언급하고 있다.[45]
팔라 왕조가 날란다를 계속해서 후원하는 동안, 날란다의 명성과 영향력은 팔라 왕조를 도왔다. 동남아시아의 스리비자야 왕국은 날란다와 팔라 왕조와 직접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9세기에서 12세기까지 수마트라, 자바, 남부 태국 및 스리비자야 왕국과 활발하게 교역했던 지역의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영향은 인도네시아의 샤일렌드라 왕조로 확대되었다. 이 시기의 인도네시아 청동상과 제물용 태블릿은 사람들의 창의성을 보여주는 한편, 그 도상학적 주제는 날란다와 인근 지역에서 발견된 것과 중복된다. 팔라 왕조 통치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 미얀마 및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온 승려들이 날란다로 왔다.
3. 5. 파괴와 쇠퇴 (12세기 ~ 13세기)
1193년, 쿠트브 알 딘 아이바크 휘하의 장군 악티바르 알 딘 무함마드 박티바르 칼지가 이끄는 튀르크 - 이슬람 군대의 침략으로 날란다 대학이 파괴되었다.[47] 인도 불교는 이미 굽타 왕조 시대부터 쇠퇴하고 있었지만, 이슬람 세력에 의한 날란다 파괴는 인도 불교의 멸망을 확실하게 만들었다.[47]
전통적으로 이 파괴는 방화로 여겨지며, 약 1200년경 이 지역을 약탈한 무함마드 바흐티야르 할지의 군대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추정된다.[47] 민하즈 앗 시라즈의 ''타바카트-이 나시리''에는 날란다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진 수도원인 오단타푸라 (비하르 샤리프)의 파괴를 묘사하는 구절이 인용되어 이를 뒷받침한다.[48][47]
티베트 기록은 12세기 말과 13세기 날란다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두 번째 출처이다. 티베트 역사 기록에 따르면 날란다와 비크라마실라 수도원 같은 인근 수도원에서 "살아남은 승려들이 학살을 피해 티베트로 도망쳤다"라고 한다.[49]
1936년에 발견된 티베트 승려 순례자 다르마스와민의 전기는 1226년부터 네팔에 머물렀으며, 1234년경 비하르를 방문하여 날란다에서 우기를 보낸 기록이 있어 유용하다. 그는 날란다와 인도의 마가다 지역의 다른 불교 수도원들이 약탈당한 수십 년 후의 상황을 묘사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날란다 파괴는 사고나 오해가 아니라 보드가야를 포함한 불교 수도원과 기념물의 광범위한 파괴의 일부였다. 마가다의 방대한 필사본 도서관은 대부분 사라졌다. 다르마스와민의 기록에 따르면 투르슈카-카를루크(투르크)의 정복은 약 1193년부터 1205년까지 이어졌으며, "투르슈카 병사들이 수도원을 무너뜨리고 그 돌을 갠지스 강에 던졌다"라는 체계적인 파괴가 있었다.[49]
다르마스와민의 전기 10장에는 1235년경의 날란다가 묘사되어 있다. 다르마스와민은 그곳이 "대부분 손상되고 버려진" 것을 발견했다. 일부는 다시 모여 날란다에서 학문 활동을 재개했지만, 규모는 훨씬 작았고, 자야데바라는 부유한 브라만 평신도의 기부로 이루어졌다.[49] 승려들은 보드가야의 피티파티스로 알려진 지역 왕조의 후원을 받았는데, 그 왕인 부다세나가 그 왕조에 속했다.
라훌라 슈리바드라의 지도 아래 6개월 동안 그곳에 머무는 동안 다르마스와민은 날란다의 전설적인 도서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는 아마도 투르코-아프간의 초기 공격에서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또한 "벽돌로 지어진 80개의 작은 비하라와 많은 손상되지 않은 건물"이 있었지만 "그것들을 돌볼 사람이 전혀 없었다"라고 언급했다.[49]
다르마스와민은 또한 인근 오단타푸라 (현재 비하르 샤리프)에 주둔해 군사 본부로 사용되던 무슬림 병사들의 황폐한 마하비하라에 대한 공격에 대한 목격자 증언을 제공한다. 티베트인과 그의 90세가 넘은 스승만이 뒤에 남아 숨어 있었고, 나머지 승려들은 도망쳤다.
1289년경에 태어난 불교 승려 드야나바드라는 여덟 살 때부터 날란다에 다닌 기록이 있어 13세기 말까지 대학이 계속 운영되었음을 시사한다.[53]
18세기 작품인 《파그 삼 존 장(Pag sam jon zang)》과 16/17세기 타라나타(Taranatha)의 기록 같은 티베트 문헌에는 허구적인 티베트 전설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징갈라라자(Cingalaraja) 왕이 "모든 힌두교도와 투르스크(Turuskas)인 [무슬림]"을 델리까지 그의 통제하에 데려와 그의 왕비의 영향으로 힌두교에서 불교로 개종하고 사찰을 재건했다는 이야기 등이 포함된다.[54]
이슬람 정복 이후, 날란다와 비하르 및 벵골 평원의 다른 수도원과 불교 문화가 파괴되고 쇠퇴했음에도 불구하고, "날란다"라는 브랜드의 기억은 티베트에서 가장 존경받는 것으로 남았다. 날란다의 마지막 법주인 카슈미르 출신 샤캬시리 바드라[57]는 1204년 티베트 번역가 ''트로푸 로차와''(''Khro-phu Lo-tsa-ba Byams-pa dpal'')의 초청으로 티베트로 도망쳤다. 생존한 날란다의 서적 중 일부는 도망치는 승려들에 의해 티베트로 가져가졌다.[58][59]
3. 6. 현대의 재건 (20세기 이후)
1957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저우언라이 총리가 인도 수상 자와할랄 네루에게 제안하여 날란다 대학에 현장의 사리가 분골되었다.[117]
날란다가 쇠퇴한 후, 현지 주민들이 이 지역의 불교 및 힌두교 이미지와 유적에 주목하게 되면서 프랜시스 부캐넌-해밀턴이 1811~1812년에 현장을 조사할 때까지 거의 잊혀졌다. 그러나 그는 흙과 잔해의 언덕을 유명한 날란다와 연관시키지 못했다. 이 연관성은 1847년 메이저 마크햄 키토에 의해 확립되었다. 알렉산더 커닝햄과 새로 설립된 인도 고고학 조사국은 1861~1862년에 공식 조사를 실시했다. ASI에 의한 유적의 체계적인 발굴은 1915년에 시작되어 1937년에 종료되었다.[6]
1915년부터 1919년까지 스푸너가 처음 4차례 발굴을 이끌었고, 1920년과 1921년에는 샤스트리가 다음 2차례 발굴을 이끌었다. 1928년까지 페이지가 다음 7번의 고고학 발굴 시즌을 이끌었는데, 이러한 노력은 단순한 발굴, 관찰, 발견물 목록 작성에 그치지 않고 발굴된 바닥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한 배수 시설과 같은 현장의 보존, 복원 및 변경을 포함했다.[66] 1928년 이후, 쿠라이시가 두 시즌의 발굴을 이끌었고, 찬드라가 다음 4시즌을 이끌었다. 마지막 시즌은 고쉬가 이끌었지만, 재정적인 이유와 예산 삭감으로 인해 1937년에 발굴이 축약되었다. 찬드라와 최종 ASI 팀 리더들은 "수도원의 긴 열이 현대 바르가온 마을까지 더 뻗어 있다"고 언급했으며 "전체 수도원 시설의 규모는 향후 발굴을 통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66]
독립 이후, 1974년과 1982년 사이에 두 번째 발굴 및 복원이 이루어졌다.[6] 1951년, 고대 학문의 정신을 계승하여 팔리어와 불교를 연구하는 현대적인 중심지인 나바 날란다 마하비하라(New Nalanda Mahavihara)가 인도의 초대 대통령 라젠드라 프라사드의 제안에 따라 날란다 유적 근처에 비하르 주 정부에 의해 설립되었다.[67] 이 대학은 2006년에 대학교로 인정되었다.[68]
2014년 9월 1일, 인근 라지기르에서 15명의 학생과 함께 현대 날란다 대학교의 첫 학년이 시작되었다.[69] 날란다 대학교 (날란다 국제 대학교라고도 함)는 인도 비하르의 역사적인 도시 라지기르에 위치한 국제적이고 연구 중심적인 대학교이다. 이 대학은 5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운영되었던 유명한 고대 날란다 대학교를 본떠 국회 법에 의해 설립되었다. 날란다 대학교를 부활시키려는 아이디어는 중국, 싱가포르, 일본, 말레이시아, 베트남을 포함한 대부분 아시아 국가와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가 대표하는 동아시아 정상회의에서 2007년에 지지되었으며, 따라서 이 대학교는 인도 정부의 주요 프로젝트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대학교는 국회에 의해 "국가 중요 기관"으로 지정되었으며, 2014년 9월 1일에 첫 번째 학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라지기르에 임시 시설로 설립되었으며, 160ha에 달하는 현대식 캠퍼스가 2020년까지 완공될 예정이다. 이 캠퍼스는 완공되면 인도에서 가장 크고 아시아에서 가장 큰 캠퍼스 중 하나가 될 것이다.[70]
4. 교육 체계 및 커리큘럼
날란다에서 가르치는 과목은 모든 학문 분야를 망라했으며, 한국, 일본, 중국, 티베트, 인도네시아, 페르시아, 터키에서 온 학생과 학자들을 끌어들였다.[71][72] 날란다의 모든 학생들은 대승과 18개의 불교 소승 종파의 경전을 공부했다. 그들의 커리큘럼에는 베다, 논리학, 산스크리트어 문법, 의학, 상키아와 같은 다른 과목들도 포함되었다.[75]
현장(쉬이-리)의 전기에서 날란다의 모든 학생들은 대승 불교와 더불어 불교의 18개 부파 전통의 저서를 공부했다고 언급한다. 이 외에도 베다, ''헤투비디야''(논리학), ''샤브다비디야''(문법과 어원학), ''치키트사비디야''(의학), 마법에 관한 저작(아타르바베다), 그리고 상키아와 같은 다른 과목들도 연구했다.[34] 프레이저에 따르면 베다 연구에는 베다 경전과 의례가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어학, 법학, 천문학 및 추론과 같은 학문을 포함하는 베다의 지체 또는 과학과 관련된 다양한 이론 분야도 포함되었다.
현장은 실라바드라와 다른 사람 밑에서 날란다에서 이 과목 중 일부를 공부했다. 신학과 철학 외에도 잦은 토론과 논쟁으로 인해 논리학에 대한 능력이 요구되었다. 마하비하라의 학생은 다른 학파에 맞서 불교 체계를 방어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모든 다양한 사상 학파와 관련된 논리학 체계에 정통해야 했다. 날란다에서 가르쳤던 것으로 여겨지는 다른 과목으로는 법학, 천문학, 도시 계획 등이 있다.
티베트 전통은 날란다에서 가르쳤던 "네 개의 교의학(
# 설일체유부 비바시카
# 설일체유부 경량부
# 중관파, 나가르주나의 대승 불교 철학
# 유식학, 무착과 세친의 대승 불교 철학
7세기 경, 현장은 날란다의 교사 수가 약 1510명이라고 기록했다. 이 중 약 1000명은 20개의 경과 샤스트라를 설명할 수 있었고, 500명은 30개의 경을 설명할 수 있었으며, 단 10명의 교사만이 50개의 경을 설명할 수 있었다. 현장은 50개 이상의 경을 설명할 수 있었던 소수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 시점에서, 오직 압바트 실라바드라만이 날란다에서 모든 주요 경과 샤스트라를 연구했다.
5. 도서관
의정(Yijing)이 날란다에서 10년 동안 머물면서 가지고 돌아간 방대한 양의 텍스트에서 알 수 있듯이 마하비하라(Mahavihara)는 잘 갖춰진 도서관을 갖추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전통적인 티베트 자료에 따르면 날란다에는 "달마간자"(Dharmaganja, '경건 시장')라고 불리는 거대한 도서관이 있었는데, 이 도서관은 "라트나가라"(Ratnasagara, '보석의 바다'), "라트노다디"(Ratnodadhi, '보석의 바다'), "라트나라자카"(Ratnaranjaka, '보석 장식')라는 3개의 대형 다층 건물로 구성되었다. 라트노다디는 9층 높이였으며, ''반야바라밀 경'' 및 ''구야사마자''를 포함한 가장 신성한 필사본들을 소장하고 있었다.[74]
날란다 도서관에 정확히 얼마나 많은 장서가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수십만 권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날란다의 불교 학자가 사망하면 그의 필사본은 도서관 컬렉션에 추가되었다.[74] 도서관은 종교적인 필사본뿐만 아니라 문법, 논리학, 문학, 점성술, 천문학, 의학과 같은 주제에 대한 텍스트도 소장하고 있었다. 날란다 도서관은 산스크리트어 언어학자 파니니(Pāṇini)가 개발한 텍스트 분류 체계를 기반으로 한 분류 체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불교 텍스트는 삼장의 세 가지 주요 부서, 즉 비나야, 수트라, 아비담마를 기반으로 세 가지 분류로 나뉘었을 가능성이 높다.
피난하는 승려들은 날란다의 필사본 중 일부를 가지고 갔다. 그 중 몇몇은 보존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은 소장품에 보관되어 있다.
-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다라니삼그라하(Dharanisamgraha)에서 가져온 페이지, 약 1075년.
- 아시아 소사이어티[95] 이 아슈타사하스리카 프라즈나파라미타(Ashtasahasrika Prajnaparamita) 필사본은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로 인도 유명한 날란다 사원에서 제작된 이 필사본의 역사, 그리고 최초의 티베트 불교 경전을 편찬한 부톤(Buton)에 의해 티베트에서 사용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 얄룽 박물관, 체탕(Tsetang) (''온 케 루 라카앙 사원(On ke ru Lha khang monastery)''에서)[96] 아스타사하스리카 프라즈나파라미타 산스크리트어 야자 잎 필사본, 139개의 잎과 그림이 그려진 나무 덮개. 발문(colophon)에 따르면 이 필사본은 11세기 말, 수라팔라 왕 치세 2년에 위대한 판디타 스리 아소카(Sri Asoka)의 어머니에 의해 기증되었다.


6. 행정
중국 승려 의정은 날란다의 토론 및 행정 관련 문제는 회의에 참석한 모든 이들과 상주하는 승려들의 합의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고 기록했다.[1]
의정은 승려들이 안건을 처리해야 할 경우 회의를 열어 논의했으며, '비하라팔라(Vihārapāla)'라는 임원이 상주 승려들에게 안건을 알렸다고 한다. 단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안건은 통과되지 못했으며, 의견 차이가 있을 경우 설득을 위해 이유를 제시했고 강압은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모든 상주 승려들의 동의 없이 어떤 행위를 한 승려는 수도원을 떠나야 했다.[2]
현장 또한 날란다의 수도원 생활은 엄격한 규율에 의해 통제되었으며, 700년 동안 단 한 명도 규율을 어긴 적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왕은 날란다에 존경과 숭배를 표하며 100개 도시의 수입을 종교인들의 유지를 위해 할당했다고 한다.[3]
7. 유적
날란다 고고학 유적지는 바르가온(날란다) 마을 북서쪽에 넓게 펼쳐져 있으며, 역사적인 인공 호수인 기디, 파나쇼카르, 인드라푸스카라니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인드라푸스카라니 호수의 남쪽 둑에는 나바 날란다 마하비하라가, 남서쪽 둑에는 날란다 개방 대학교가 있다.
날란다는 1811~1812년에 프랜시스 부캐넌-해밀턴이 현장을 조사할 때까지 거의 잊혀졌지만, 그는 흙과 잔해의 언덕을 날란다와 연관시키지 못했다. 1847년 메이저 마크햄 키토에 의해 이 연관성이 확립되었고, 알렉산더 커닝햄과 인도 고고학 조사국은 1861~1862년에 공식 조사를 실시했다. 1915년부터 1937년까지, 그리고 1974년과 1982년 사이에 유적의 체계적인 발굴 및 복원이 이루어졌다.[6]
1951년, 고대 학문의 정신을 계승하여 팔리어와 불교를 연구하는 현대적인 중심지인 나바 날란다 마하비하라(''New Nalanda Mahavihara'')가 비하르 주 정부에 의해 설립되었다.[67] 이 대학은 2006년에 대학교로 인정되었다.[68] 2014년 9월 1일, 현대 날란다 대학교의 첫 학년이 시작되었다.[69]
발굴된 유적은 현재 490m 또는 약 12헥타르 면적을 차지하지만, 중세 시대의 날란다 마하비하라(Nalanda Mahavihara)는 훨씬 더 넓은 지역을 차지했다. 날란다에서 가르치는 과목은 모든 학문 분야를 망라했으며, 한국, 일본, 중국, 티베트, 인도네시아, 페르시아, 터키에서 온 학생과 학자들을 끌어들였다.[71][72]
발굴 결과 11개의 수도원(비하라라고도 함)과 6개의 주요 벽돌 사원이 정돈된 형태로 드러났다. 서쪽에 사원, 동쪽에 수도원이 있는 약 30.48m 너비의 통로가 남북으로 뻗어 있다.[6] 대부분의 구조물은 여러 시대에 걸쳐 건설되었으며, 오래된 유적 위에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다. 많은 건물은 적어도 한 번 이상의 화재 피해를 입은 흔적도 보여준다.
남쪽에 있는 사원 3은 가장 인상적인 구조물이었다. 사원 12, 13, 14는 수도원을 마주보고 있으며 동쪽을 향하고 있다. 1A와 1B로 지정된 사원을 제외하고, 모든 수도원은 서쪽을 향하고 있으며 배수구는 동쪽으로 비워지고 계단은 건물의 남서쪽 모서리에 위치해 있다. 사원 2는 동쪽에 있었다.
날란다의 모든 수도원은 배치와 전반적인 외관이 매우 유사하다. 중앙의 사각형 안뜰이 있고, 안뜰은 다시 수도사들을 위한 외부 열의 방으로 둘러싸인 베란다로 둘러싸여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비하라 건축 디자인이다. 입구와 안뜰로 이어지는 중앙 방은 신사 방이다. 1A와 1B로 지정된 사원을 제외하고, 모든 수도원은 서쪽을 향하고 있으며 배수구는 동쪽으로 비워지고 계단은 건물의 남서쪽 모서리에 위치해 있다.
'''수도원 1'''은 최대 9개의 건설 단계를 보여준다. 그 하부 수도원은 9세기에 데바팔라 통치 기간에 스리비자야 왕인 발라푸트라데바가 후원한 것으로 여겨진다. 건물은 원래 최소 2층 높이였으며, 앉아 있는 부처의 거대한 조각상을 포함하고 있었다.
'''사원 3''' (사리푸타 스투파라고도 함)은 꼭대기까지 이어지는 여러 개의 계단이 있는 날란다 구조물 중 가장 상징적이다. 최종 구조물은 적어도 일곱 번의 연속적인 건설 축적의 결과였다. 4개의 모서리 탑이 있으며 그 중 3개가 노출되었다. 탑과 계단 옆면은 부처와 보살, 자타카 이야기의 장면 등 다양한 스투코 조각을 묘사한 굽타 시대 예술의 정교한 패널로 장식되어 있다. 사원은 수많은 불탑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중 일부는 신성한 불교 경전의 구절이 새겨진 벽돌로 지어졌다. 사원 3의 꼭대기에는 신사 방이 있으며, 현재는 거대한 부처 조각상이 한때 놓여 있었을 받침대만 남아 있다. 윈 마웅에 따르면, 이 스투파는 굽타 건축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다시 쿠샨 시대의 영향을 받았다.[90]
'''사원 2'''에는 211개의 조각된 종교적, 세속적 패널이 있다. 여기에는 시바, 파르바티, 카르티케야, 가잘락슈미등이 포함된다. 인도 건축 및 예술 학자인 수잔 헌팅턴과 바스카라 미스라는 사원 2를 힌두 사원으로 묘사한다.[92] 사원 13의 부지에는 4개의 챔버가 있는 벽돌로 만든 제련로가 있다. 타버린 금속과 슬래그의 발견은 금속 물체를 주조하는 데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사원 13 북쪽에는 '''사원 14'''의 유적이 있다. 부처의 거대한 이미지가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이미지의 받침대에는 날란다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벽화의 조각들이 있다.
사원 2의 동쪽에는 최근 발굴된 사라 모래 언덕에 있는 '''사라이 사원'''의 유적이 있다. 많은 스투파와 신사를 갖춘 이 다층 불교 사원은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소의 유적은 부처 조각상이 약 약 24.38m 높이였음을 시사한다.
수많은 조각품과 여러 벽화, 동판, 예술품, 비문, 인장, 동전, 플레이트, 도자기, 돌, 청동, 스투코, 테라코타 작품이 날란다 유적에서 발굴되었다. 발견된 불교 조각품에는 다양한 자세의 부처, 아발로키테스와라, 잠바라, 만주스리등이 포함된다. 비슈누, 시바-파르바티, 가네샤의 힌두 조각품도 유적에서 발견되었다.[6]
'''검은 부처 사원''' (지역 주민들은 Telia Bhairav라고 부름)은 사원 14 근처에 있으며, bhumisparha mudra 자세의 고대 거대한 검은 부처 이미지가 있다.
발굴 과정에서 여러 비문들이 발견되었으며, 현재 날란다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여기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 야쇼바르만(Yashovarman)의 재상 아들이 발라디티야(Baladitya) 왕이 세운 사원에 기증했다. 서기 8세기, 수도원 1에서 발견된 현무암 판.[97]
- 무르나바르만(Murnavarman)은 약 24.38m 불상의 청동상을 제작했다. 서기 7세기, 사라(Sarai) 언덕에서 발견된 현무암 판.[98]
- 비풀슈리미트라(Vipulshrimitra) 승려가 수도원을 지었다. 현무암 판, 12세기 후반, 수도원 7의 최상층에서 발견.[99]
- 샤일렌드라 왕조 수바르나드비파(Suvarnadvipa)의 왕 발라푸트라데바(Balaputradeva)의 기증. 서기 860년, 1921년 히라난다 샤스트리(Hirananda Shastri)가 날란다의 수도원 1의 앞방에서 발견한 동판.
현재 날란다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으며, 유적이 남아있다. 바라가온(Baragaon) 마을이 인접해 있다.
날란다 박물관에는 발굴된 사본,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8. 유산
유네스코는 2016년에 날란다 마하비하라를 세계 유산으로 지정했다. 날란다 고고 유적은 다음의 세계 유산 등록 기준을 충족한다.
9. 관련 인물
날란다와 관련된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석가모니: 불교의 창시자로, 날란다를 방문하여 '파바리카'라는 망고나무 아래에서 설법을 했다고 전해진다.
- 사리불: 석가모니의 제자로, 날란다에서 태어나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 나가르주나: 인도의 승려로, 티베트 기록에 따르면 날란다에서 강의를 했다고 한다.
- 쿠마라굽타 1세: 굽타 왕조 시대의 왕으로, 날란다에 승원(僧院)을 세웠다고 여겨진다.
- 실라바드라: 유식파의 승려로, 645년 당나라에서 온 승려 현장에게 유식을 가르쳤다.
- 현장: 당나라의 승려로, 645년 날란다의 실라바드라(계현)에게서 유식학을 배우고 657부에 이르는 경전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갔다.[117]
- 샨타라크시타: 중관파 승려로, 761년 티베트 불교를 일으켰다.
- 파드마삼바바: 닝마파의 개조(開祖)로, 774년 밀교(密教)를 티베트 불교에 도입했다.
- 카말라실라: 인도 불교 승려로, 삼예 사원의 종론(792년 - 794년)에서 중국 불교의 마하연과 종교 논쟁을 벌여 티베트 불교의 방향성을 결정지었다.
- 무함마드 바흐티야르 할지: 쿠트부딘 아이바크 휘하의 장군으로, 1193년 이끄는 튀르크 - 이슬람 군대의 침략으로 날란다 대학을 파괴했다.
- 저우언라이: 중화인민공화국 총리로, 1957년 인도 수상 자와할랄 네루에게 제안하여 날란다 대학에 현장의 사리를 분골(分骨)했다.[117]
- 아리아데바: 나가르주나의 제자이자 대승 불교 옹호자
- 아상가: 대승 불교 승려이자 유가행파의 옹호자
- 아티샤: 금강승 불교 학자
- 찬드라키르티: 대승 불교 승려이자 나가르주나의 제자
- 찬드라고민: 대승 불교 재가 학자
- 달마키르티: 대승 불교 승려이자 논리학자
- 달마팔라: 유가행파의 대승 불교 승려
- 디그나가: 불교 논리학의 창시자
- 카말라실라: 대승 불교 승려이자 전 날란다 주지
- 나로파: 불교 마하싯다
- 샨티데바: 보디차리아바타라의 작가
- 실라바드라: 대승 불교 승려이자 현장의 스승
- 바수반두: 아상가의 형제
- 의정: 중국 불교 여행가
10. 기타
석가모니는 이곳을 방문하여 '파바리카'라 불리는 망고나무 아래에서 설법을 행하였다고 한다. 이후 날란다는 불교를 배우는 중요한 장소가 되어 최대 1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머물렀다. 티베트 기록에 따르면 인도의 승려 용수(나가르주나)가 이곳에서 강의를 하였다고 한다.
날란다 대학의 승려들은 불교가 인도를 넘어 티베트와 중국으로 전파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645년 유식파의 지라바드라(한역명 계현)가 당나라에서 온 승려 현장에게 유식을 전했고, 현장은 657부에 이르는 경전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761년에는 중관파의 찬타라굿타(한역명 숙호)가 티베트 불교를 일으켰고, 774년에는 닝마파의 개조 파드마삼바바(한역명 연화생)가 밀교를 티베트 불교에 도입했다. 쌈예 사 종론(792년 - 794년)에서는 인도 불교의 까말라쉴라와 중국 불교의 마하연이 종교 논쟁을 벌여 티베트 불교의 방향성을 결정지었다.
1193년 쿠트브 알 딘 아이바크 휘하의 장군 악티바르 알 딘 무함마드 박티바르 칼지가 이끄는 튀르크 - 이슬람 군대의 침략으로 날란다 대학은 파괴되었다.
날란다는 인도와 해외 방문객들을 끌어들이는 인기 있는 관광지이며, 불교 관광 코스의 중요한 기착지이기도 하다.[100][70]
10. 1. 날란다 고고학 박물관
인도 고고학 조사국은 방문객의 편의를 위해 유적지 근처에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1917년에 개관한 이 박물관은 날란다와 인근 라지기르에서 발굴된 고대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총 13,463점의 유물 중 349점이 4개의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101] 발굴된 사본과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10. 2. 현장 기념관

현장 기념관은 인도와 중국의 합작 사업으로, 유명한 불교 승려이자 여행가인 현장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기념관에는 중국 승려의 두개골 뼈로 구성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102]
1957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저우언라이 총리가 인도 수상 자와할랄 네루에게 제안하여 날란다 대학에 현장의 사리가 분골(分骨)되었다.[117]
10. 3. 날란다 멀티미디어 박물관
발굴 현장 옆에는 사립으로 운영되는 날란다 멀티미디어 박물관이 있다.[103] 이 박물관은 3D 애니메이션 및 기타 멀티미디어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날란다의 역사를 보여준다.[103]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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