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 박티베단타 스와미 프라부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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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 C. 박티베단타 스와미 프라부파다는 1896년 인도 콜카타에서 태어난 가우디야 바이슈나바교 신자였다. 그는 1922년 영적 스승인 바크티시단타 사라스바티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으며, 1959년 출가하여 박티베단타 스와미라는 이름을 얻었다. 1965년 미국으로 건너가 국제 크리슈나 의식 협회(ISKCON)를 설립하고, 하레 크리슈나 만트라를 전파했다. 그는 '바가바드 기타 있는 그대로'를 비롯한 여러 저서를 저술하여 서구 사회에 박티 요가와 가우디야 바이슈나바교의 가르침을 알렸다. 그의 가르침은 비판과 논란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ISKCON 운동은 그의 유산을 이어가며 인도 사회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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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 박티베단타 스와미 프라부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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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존칭 | 그의 신성한 은총 |
종교 | 힌두교 |
종파 | 가우디야 바이슈나바 |
출생 이름 | 아바이 차란 데 |
출생일 | 1896년 9월 1일 |
출생지 | 영국령 인도, 벵골 관구, 콜카타 |
사망일 | 1977년 11월 14일 |
사망지 | 인도, 브린다반 |
안식처 | 스릴라 프라부파다의 사마디 만디르, ISKCON 브린다반 |
국적 | 인도 |
아버지 | 구르 모한 데 |
어머니 | 라자니 데 |
업적 | |
주요 업적 | 하레 크리슈나 운동 창시 |
학력 | |
모교 | 스코틀랜드 교회 대학, 콜카타 대학교 |
종교적 정보 | |
입문 | 딕샤: 1933년 (박티시단타 사라스바티에 의해) 산냐사: 1959년 (박티 프라즈나 케샤바에 의해) |
스승 | 박티시단타 사라스바티 타쿠르 |
계통 | 차이타니아 마하프라부로부터 |
주요 저서 | |
저서 | Śrīmad-Bhāgavatam(번역 및 주석) Caitanya-caritāmṛta(번역 및 주석) Bhagavad-Gītā As It Is(번역 및 주석) Kṛṣṇa, the Supreme Personality of Godhead Teachings of Lord Caitanya The Nectar of Devotion Īśopaniṣad(번역 및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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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도에서의 초기 생애와 교육 (1896-1922)
아바에 차란 데는 1896년 9월 1일, 인도 콜카타(캘커타)에서 잔마슈타미 (크리슈나 탄생 기념일) 다음 날 태어났다.[1] 그의 부모 고우르 모한 데와 라자니 데는 그를 "로터스 발(발)을 크리슈나에게 의지하여 두려움이 없는 자"라는 뜻의 아바에 차란이라고 지었다.[2] 아바이의 아버지는 점성가를 초대했는데, 그는 아바이가 70세에 바다를 건너[3] 유명한 종교 교사가 되고, 전 세계에 108개의 힌두 사원을 열 것이라고 예언했다.
1965년, A. C. 박티베단타 스와미 프라부파다는 69세의 나이로 인도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선박 회사 주인의 도움으로 미국행 배를 무료로 탈 수 있었다.[1] 뉴욕에 도착한 그는 펜실베이니아주에서 강연을 하다가,[2] 뉴욕 시로 돌아와 로어 이스트 사이드의 작은 가게를 사원으로 개조했다.[3] 그곳에서 ''바가바드 기타''와 바이슈나바교 경전 수업을 진행하고, ''하레 크리슈나 만트라''를 함께 부르는 키르탄을 열었다.
아바이는 수바르나-바닉 상인 커뮤니티에 속한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부모는 가우디야 바이슈나바교도 또는 차이타냐 마하프라부의 추종자였다. 고우르 모한은 중간 소득의 상인이었고, 자신의 섬유 및 의류 상점을 운영했다. 그는 수세기 동안 금과 소금을 거래해 온 부유하고 귀족적인 멀릭 상인 가문과 친척 관계였다.
데의 집 맞은편에는 1세기 반 동안 멀릭 가문이 지원해 온 라다-크리슈나 사원이 있었다. 어린 아바이는 매일 부모나 하인들과 함께 사원 예배에 참석했다.
여섯 살 때 아바이는 오디샤 푸리 시에서 매년 열리는 거대한 ''바이슈나바'' 축제인 "전차 축제" (라타-야트라)의 모형을 조직했다. 아바이는 아버지에게 푸리에서 자간나트 (크리슈나를 "우주의 주님"으로 칭함)의 형상이 행진하는 거대한 전차의 축소판을 구하도록 설득했다.
아바이의 어머니는 그가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런던에 가기를 원했지만, 아버지는 아바이가 서구 사회에 의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그 생각을 거절했다. 1916년 아바이는 알렉산더 더프가 설립한 캘커타의 명문 학교인 스코틀랜드 교회 칼리지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1918년, 대학에 재학 중이던 아바이는 아버지의 주선으로 귀족 가문 출신인 라다라니 다타와 결혼했다. 그들은 결혼 생활 동안 다섯 자녀를 두었다. 대학 졸업 후 아바이는 제약 분야에서 경력을 시작했고, 나중에는 알라하바드에 자신의 제약 회사를 열었다.
아바이는 영국 통치 하에 있을 때 성장했고, 당시 많은 젊은이들처럼 마하트마 간디의 불복종 운동에 매료되었다. 1920년, 아바이는 영어, 철학, 경제학을 전공하여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최종 시험에 합격했지만, 영국 통치에 대한 반대의 표시로 졸업식에 참석하여 졸업장을 받는 것을 거부했다.
3. 가우디야 바이슈나바교와의 만남과 영적 가르침 (1922-1965)
1922년, 아바이는 대학 재학 중 친구 나렌드라나트 멀릭의 권유로 바크티시단타 사라스바티(1874–1937)를 만났다. 그는 가우디야 마트의 창시자이자 바이슈나바 학자 겸 스승으로, 차이타냐 마하프라부의 가르침을 전파하고자 했다. 'math'는 수도원 또는 선교 센터를 의미한다. 바크티시단타는 아버지 바크티비노다 타쿠르(1838–1914)의 업적을 이어받았으며, 그는 차이타냐의 가르침을 특정 종교나 국가를 초월한 인류 전체를 위한 최고 형태의 유신론으로 보았다.
바크티시단타는 만남에서 아바이에게 "당신은 교육받은 젊은이입니다. 차이타냐 마하프라부의 메시지를 영어로 전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바이는 인도에서 차이타냐의 메시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면 먼저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바크티시단타 사라스바티는 이에 효과적으로 반박했다. 아바이는 바크티시단타 사라스바티에게 설득되어 그의 명령에 따라 차이타냐의 메시지를 영어로 전파하기 위해 훗날 뉴욕으로 떠났다. 그는 "나는 즉시 그를 영적 스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아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랬습니다."라고 회상했다.
1928년, 알라하바드에 사냐시](출가한 순회 설교자)]들이 센터를 열면서 아바이는
4. 미국으로의 여정과 국제 크리슈나 의식 협회 (ISKCON) 설립 (1965-1977)
톰킨스 스퀘어 파크에서 하레 크리슈나 키르탄을 개최한 후, ''뉴욕 타임스''가 보도하면서 1960년대 반문화에 심취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추종자를 얻었다. 1966년 7월, 프라부파다는 국제 크리슈나 의식 협회(ISKCON)를 설립했다.
1967년, 샌프란시스코에 두 번째 센터를 설립하고, 히피 문화의 중심지인 헤이트-애슈버리에 사원을 열었다. 그레이트풀 데드 등 유명 록 그룹들과 함께 "만트라 록 댄스" 콘서트를 개최하여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 앨런 긴즈버그는 이 콘서트에 깊이 감명받았다. 같은 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으로 라타 야트라를 개최했고, 이후 이 축제를 전 세계 주요 도시로 확산시켰다.
1968년, 제자들에게 영국 런던에 사원을 열도록 했다. 1969년에는 비틀즈 멤버들과의 만남을 통해 조지 해리슨과 존 레논은 프라부파다와 그의 학생들이 뉴욕에서 발매한 마하-만트라 음반을 입수하여 하레 크리슈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레 크리슈나 만트라 싱글을 제작하여 애플 레코드에서 발매했다.
1973년 해리슨은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약 24.14km 떨어진 피고츠 매너를 기증했다. 하레 크리슈나 신봉자들은 이곳을 시골 사원-아슈람으로 개조하고 바크티베단타 매너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프라부파다는 영국을 여러 번 방문했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웨덴, 스위스, 네덜란드로 여행하며 키르탄을 이끌고, ISKCON 사원에 크리슈나의 형상을 설치했다.
1970년, 케냐를 방문하여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고집했다. 나이로비에서 현지 주민들을 초대하기 위해 문을 열라고 지시했고, 홀은 아프리카인들로 가득 찼다.
1971년 6월 20일부터 25일까지 모스크바를 방문한 것은 소련에서 크리슈나 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1970년, 서구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후, 인도에 주목했다. 그는 약 9071.85kg의 미국인 ''사냐시''와 20명의 다른 헌신자들과 함께 인도에 돌아왔다. 뭄바이, 브린다반, 하이데라바드에 사원을 세우고 서벵골의 마야푸르 (차이타냐 마하프라부의 출생지)에 계획된 국제 본부를 설립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70년대 초, 그의 운동의 미국 본부를 로스앤젤레스에, 세계 본부를 마야푸르에 설립했다.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피지, 중동등을 방문했다.
4. 1. 미국 전파
1965년, A. C. 박티베단타 스와미 프라부파다는 69세의 나이로 인도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선박 회사 주인의 호의로 무료로 미국행 배를 탈 수 있었다.[1] 뉴욕에 도착한 그는 아가르왈 부부의 도움을 받아 펜실베이니아주 버틀러로 가서 YMCA 등에서 강연했다.[2] 한 달 후, 그는 뉴욕 시로 돌아와 로어 이스트 사이드의 26번가에 있는 "Matchless Gifts"라는 작은 가게를 사원으로 개조했다.[3] 그곳에서 ''바가바드 기타''와 바이슈나바교 경전 수업을 진행하고, ''하레 크리슈나 만트라''를 함께 부르는 키르탄을 열었다.
그와 추종자들이 톰킨스 스퀘어 파크에서 하레 크리슈나 키르탄을 개최한 후, ''뉴욕 타임스''가 이를 보도하면서 그는 점차 1960년대 반문화에 심취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추종자를 얻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불법 성관계, 육식, 마약, 도박을 금지하는 네 가지 규제 원칙을 따를 것을 요구했다.
1966년 7월, 프라부파다는 국제 크리슈나 의식 협회(ISKCON)를 설립했다. 그는 크리슈나가 다른 모든 신의 형태와 개념을 포함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이름을 선택했다. 같은 해 12월, 그는 ''크리슈나 의식'' 앨범을 발매하여 "하레 크리슈나 운동" 확산에 기여했다.
1967년, 프라부파다는 샌프란시스코에 두 번째 센터를 설립하고, 히피 문화의 중심지인 헤이트-애슈버리에 사원을 열었다. 이는 그의 운동이 급성장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그레이트풀 데드 등 유명 록 그룹들과 함께 "만트라 록 댄스" 콘서트를 개최하여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 앨런 긴즈버그는 이 콘서트에 깊이 감명받았다.
같은 해, 프라부파다의 추종자들은 인도 푸리의 라타 야트라 축제를 본떠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으로 라타 야트라를 개최했다. 그는 이후 이 축제를 전 세계 주요 도시로 확산시켰다. "하레 크리슈나"라는 찬미는 샌프란시스코 히피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
4. 2. 세계적 확장
1968년, 프라부파다는 세 쌍의 제자 부부에게 영국 런던에 사원을 열도록 요청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제자들은 법의와 사리를 입고 런던 거리에서 규칙적으로 하레 크리슈나를 불렀고, 즉시 주목을 받았다. 곧 신문에는 "크리슈나 찬트, 런던을 놀라게 하다", "행복은 하레 크리슈나"와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1969년 12월, 제자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던 록 밴드 비틀즈 멤버들과 만나면서 또 다른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그 전에도 조지 해리슨과 존 레논은 프라부파다와 그의 학생들이 뉴욕에서 발매한 마하-만트라 음반을 입수하여 하레 크리슈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1969년 8월, 해리슨은 런던 제자들이 부른 하레 크리슈나 만트라 싱글을 제작하여 애플 레코드에서 발매했다. 이 음반을 위해 제자들은 스스로를 "라다 크리슈나 사원"이라고 불렀다. 해리슨은 애플이 소집한 기자 회견에서 하레 크리슈나 만트라는 팝송이 아니라 그것을 듣고 반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영적인 희열을 깨우는 고대의 만트라라고 말했다. 음반은 첫날에 7만 장이 팔렸고, 영국 차트에서 11위까지 올랐다. 프라부파다의 제자들은 BBC의 인기 TV 쇼 ''톱 오브 더 팝스''에서 4번이나 라이브 공연을 했다. 이 음반은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스웨덴,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및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일본)에서도 성공을 거두었고, 이에 따라 이 그룹은 여러 유럽 국가에서 공연하도록 초청받았다. 이듬해인 1970년, 해리슨은 프라부파다의 제자들과 함께 또 다른 히트 싱글 "고빈다"를 제작했으며, 1971년 5월에는 음반 ''라다 크리슈나 사원''을 발매했다. 1970년에 해리슨은 프라부파다의 책 ''크리슈나, 최고인격신''의 첫 번째 권 출판을 후원했다. 이 책은 ''스리마드-바가바탐''의 열 번째 칸토에 수록된 크리슈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73년 해리슨은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약 24.14km 떨어진 피고츠 매너라고 알려진 17acre 규모의 저택을 기증했다. 하레 크리슈나 신봉자들은 이곳을 시골 사원-아슈람으로 개조하고 프라부파다를 기리기 위해 바크티베단타 매너로 이름을 바꾸었다.
프라부파다의 제자들이 영국에서 시작한 이후, 수년에 걸쳐 프라부파다는 영국을 여러 번 방문했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웨덴, 스위스, 네덜란드로 여행하며 키르탄을 이끌고, ISKCON 사원에 크리슈나의 형상을 설치하고, 그를 만나고 싶어하는 종교 지도자, 지식인, 기타 사람들을 만나 제자들을 지도하고 격려했다.
1970년, 프라부파다는 케냐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가 그곳에 보낸 제자들이 현지 인도인들을 위한 영적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데 정착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라부파다는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고집했다. 나이로비에서 있었던 한 주목할 만한 행사에서, 그는 주로 아프리카인들이 거주하는 시내의 한 인도 라다-크리슈나 사원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었는데, 현지 주민들을 초대하기 위해 문을 열라고 지시했다. 곧 홀은 아프리카인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는 ''키르탄''을 열고 강연을 했다. 프라부파다는 현지 지도자들에게 현지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 크리슈나 의식을 전파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라부파다는 나중에 모리셔스와 남아프리카를 방문했고, 제자들을 나이지리아와 잠비아로 보냈다.
1971년 6월 20일부터 25일까지 프라부파다가 모스크바를 방문한 것은 소련에서 크리슈나 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프라부파다는 모스크바에서 5일 동안 소련 시민 단 두 명을 만났다. 그들은 인도 및 남아시아 연구 교수인 그리고리 코토프스키와 23세의 모스크바 사람인 아나톨리 피냐예프였다. 소련 최초의 하레 크리슈나 신자가 된 피냐예프는 모스크바 주재 인도 외교관의 아들을 통해 프라부파다를 만났다. 프라부파다의 조수는 피냐예프에게 프라부파다의 ''바가바드 기타'' 사본을 주었고, 피냐예프는 이것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소련에서 지하에서 복사하고 배포할 수 있었다. 피냐예프는 가우디야 바이슈나비즘에 큰 관심을 보였고, 프라부파다에게 입문하여 소련에서 크리슈나 의식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피냐예프는 나중에 스몰렌스크 특수 정신 병원에 수감되어 크리슈나 의식을 실천한 혐의로 강제로 약물 치료를 받았다.
1970년, 서구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후, 프라부파다는 인도의 원래 영적 감수성을 되돌리려는 희망을 품고 특히 인도에 주목했다. 그는 약 9071.85kg의 미국인 ''사냐시''와 20명의 다른 헌신자들과 함께 인도에 돌아왔다. 그 후 7년 동안 뭄바이, 브린다반, 하이데라바드에 사원을 세우고 서벵골의 마야푸르 (차이타냐 마하프라부의 출생지)에 계획된 국제 본부를 설립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프라부파다는 인도가 유럽화의 길을 걷고 서방 세계를 모방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서방 물질주의를 거부하고 인도 영적 문화를 받아들인 미국 및 유럽 하레 크리슈나 신자들이 인도 땅에 나타난 것은 "근대화(즉, 서구화)를 추구하는 인도인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그곳에서 진정한 종교 부흥의 씨앗을 뿌렸다".
1970년대 초, 프라부파다는 그의 운동의 미국 본부를 로스앤젤레스에, 세계 본부를 마야푸르에 설립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프라부파다는 멕시코와 베네수엘라를 방문했다. 아시아에서는 홍콩, 일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방문했다. 그는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피지에서도 시간을 보냈다. 중동에서는 이란을 방문했다. 그가 크리슈나 의식을 전파하기 위해 제자들을 보낸 곳 중에는 중국도 있었다.
4. 3. 철학과 가르침
브라흐마-마드바-가우디야 계보에 속하는 프라부파다는 차이타냐 마하프라부와 마드바차르야를 거쳐 창조의 시작까지 이어진다고 가르쳤다.[1] 이 계보(''삼프라다야'')는 ''스리마드-바가바탐'', ''바가바드-기타'', 차이타냐 제자들의 저술을 따른다.[2] 프라부파다의 성경 주석은 박티시단타 사라스바티, 박티비노다 타쿠르, 발라데바 비드야부사나, 비스바나타 차크라바르티, 지바 고스와미, 마드바차르야, 라마누자차르야 등의 전통적인 스승들의 주석을 따른다.[3]
''스리마드 바가바탐''에 따라, 프라부파다는 최고의 진리, 즉 절대 진리는 모든 것의 근원인 무한하고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영적 실체라고 가르쳤다. 그는 절대 진리가 브라만 (모든 곳에 편재하는 인격 없는 하나), 파라마트마 (모든 생명체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신의 측면), 바가반 (지고의 인격신)의 세 단계로 실현된다고 가르쳤다. 절대 진리는 하나이지만, 영적 발전 수준에 따라 이 세 가지 특징으로 점차 실현된다. 초기 단계는 브라만, 더 발전된 단계는 파라마트마, 가장 발전된 단계는 ''바가반''이다.
《스리마드 바가바탐》과 프라부파다의 가르침에서 크리슈나는 바가반의 원래이자 최고의 현현으로 여겨진다. 즉, 산스크리트어로 "스바얌-바가반"(svayam-bhagavan), 최고 인격신 그 자체이다. 크리슈나와 동등하거나 그보다 위대한 존재는 없다. 브라만과 파라마트마는 크리슈나의 부분적 깨달음이다. 비슈누의 여러 형상은 크리슈나와 "다르지 않다". 즉, 동일한 인격신이며,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크리슈나의 형상은 원래의 형태이며 가장 완전하다. 힌두교 판테온에서 비슈누 형상을 제외한 신들은 반신, 즉 최고 인격신의 조력자들이다.
절대 진리가 하나라면, 어떻게 다양성이 존재할 수 있는가? 프라부파다는 절대 진리가 다양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우파니샤드』를 인용한다. 불이 방 전체에 열과 빛을 발산하듯, 절대 진리는 다양성으로 세상을 채운다.
프라부파다는 아친탸 베다-아베다-타트바 교리를 가르쳤다. 이는 모든 것이 절대자, 크리슈나와 하나이면서도 다르다는 것이다. 프라부파다는 불의 따뜻함 속에 앉아 있을 때 불 자체에 타는 것이 아니듯, 열은 불과 동일하지만, 둘은 다르다는 예를 든다. 이 "하나됨과 다름"은 무한한 다양성을 포함하는 절대 진리의 하나됨을 설명한다.
크리슈나의 에너지 중, 이 세상의 요소들은 크리슈나의 "열등한 에너지"에 속한다. 열등하다는 것은 무생물이므로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무생물보다 우월한 것은 크리슈나의 "우월한 에너지"에 속하는 의식 있는 존재 (''지바'')이다.
A. C. 박티베단타 스와미 프라부파다는 생명체가 크리슈나의 "우월한 에너지"에 속하므로, 지식, 행복, 영원성을 포함한 크리슈나의 신성한 자질을 공유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열등한 에너지"와 접촉했기 때문에, 생명체의 신성한 본성이 가려져 무지, 고통, 반복되는 생과 사에 시달린다. 생명체는 각 생에서 생과 사, 질병, 노령에 맞서 고투한다. 자연을 통제하고 즐기려 노력하는 동안, 자연의 복잡성에 얽매여 더욱 고통을 겪는다.
"우월한 에너지"에 속하는 영적 존재로서, 생명체는 물질적인 몸과 다르다. 몸은 남성/여성, 젊음/늙음, 백인/흑인, 미국인/인도인일 수 있지만, 몸 안의 생명체는 "물질적 지칭"을 넘어선다. 프라부파다는 "나는 이 몸이 아니다"라는 격언으로 이를 표현했다.
우리가 몸과 잘못 동일시할 때, 마야(환영)의 영향을 받는다. 이 환영이 사라져야 영혼이 물질적 존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프라부파다는 살아있는 존재가 크리슈나의 작고 영원한 부분임을 깨닫고, 손이 몸을 섬기듯 크리슈나를 섬기는 데 자연스러운 참여가 있음을 인식함으로써 환영과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모든 존재 안에 잠재된 크리슈나와의 영원한 사랑의 관계가 되살아날 때, 즐거운 삶을 재개한다. 모든 물질적 지위에서 벗어난 사람이 크리슈나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것을 ''박티''라고 한다.
프라부파다는 영적 삶의 초기 단계에서도 ''박티''를 실천할 수 있다고 했다. ''박티''는 목적이자 방법이다. 영적 수행으로서 ''박티''는 영혼을 정화하고 신을 직접 보게 하는 강력하고 변혁적인 과정이다.
프라부파다는 최고 존재가 형상, 자질, 활동, 개인적 속성이 없다는 "비인격주의" 사상에 맞서 싸웠다. 샹카라는 브라만을 제외한 영혼, 세상, 신 모두 환영이라고 했다. 프라부파다 이전, 샹카라의 ''아드바이타 베단타''가 서구의 힌두교 이해의 틀을 제공했으며, 미국에 온 "힌두 스와미"들은 샹카라의 일원론적 견해와 "비인격적 실재 또는 브라만으로의 자아 흡수"라는 생각에 동조했다.
그러나 12, 13세기 바이슈나바 철학자들은 샹카라에 반대하며 베단타에 대한 인격적 이해를 제시했다. 이들은 샹카라의 "환영론"(''마야바다''), 즉 개인의 개별성이 환영이라는 견해를 비판했다. 16세기 지바 고스와미 등 가우디야 계열 철학자들은 비인격주의를 "형이상학적 오해"로 여기며 강력히 주장했다. 프라부파다는 비인격주의 견해에 반대하며 절대자의 영원한 개인적 존재, 모든 존재의 영원한 개인적 존재를 주장했다. 불교는 인격 소멸, 공허함, ''열반''을 가르쳐 샹카라와 공통점을 갖는데, 프라부파다는 불교 역시 비판했다.
프라부파다는 사회가 이상적으로 조직되어야 하며, 사람들이 직업(''바르나'')과 삶의 단계(''아슈라마'')에 따라 특정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바르나''는 지적 활동, 행정 및 군사 활동, 농업 및 상업, 일반 노동 및 지원이다. ''아슈라마''는 학생 생활, 결혼 생활, 은퇴 생활, 출가 생활이다. ''바가바드 기타''에 따라, 현대 힌두교 카스트 제도에 반대하며, 개인의 ''바르나''는 출생이 아닌 자질과 일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헌신적인 자격은 항상 물질적 자격을 능가한다. 카스트 제도에 도전하고 위계적 권력 구조를 약화시킨 차이탄야를 따라, 누구든 ''박티-요가'' 수행, 신의 성스러운 이름 반복으로 자기 실현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하레 크리슈나 마하-만트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프라부파다는 자급자족 농업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프라부파다가 가르친 주요 영적 수행은 ''크리슈나 상키르탄'' (''키르탄'' 또는 ''키르타나'')으로, 음악적으로 크리슈나의 이름을 함께 부르는 것이다.
''키르탄''은 "묘사", "찬양"을 의미하며, ''상키르타나''는 함께 수행하는 ''키르탄''이다.
산스크리트 텍스트에 따르면, 차이탄야 마하프라부는 ''칼리 유가''의 영적 깨달음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크리슈나 ''키르탄''이라고 가르쳤다. 침묵 명상, 사변적 연구, 사원 숭배, ''요가''보다 효과적이다. 크리슈나 ''키르탄''은 누구든, 어디서든, 언제든, 규칙 없이 할 수 있다. 크리슈나의 이름은 크리슈나 자신과 동일한 "초월적 소리"이므로, 찬트는 영적으로 고양된다.
프라부파다는 바워리 로프트, 상점 사원, 뉴욕 톰킨스 스퀘어 공원, 샌프란시스코 골든 게이트 공원 등에서 ''키르탄''을 열었다. 제자들은 북아메리카, 유럽, 라틴 아메리카, 호주, 아프리카, 아시아의 거리, 공원, 사원 등에서 ''키르탄''을 열었다. 하레 크리슈나 ''키르탄'' 때문에, 프라부파다의 운동, 추종자들은 "하레 크리슈나"로 불렸다.
''상키르타나''는 하레 크리슈나를 공개적으로 부르는 것, 크리슈나에 관한 책 배포까지 확장될 수 있다. ''키르탄''은 ''카르탈'' (핸드 심벌즈), 므리당가 (드럼)을 동반하며, 프라부파다의 영적 스승은 크리슈나 문학 배포가 "위대한 ''므리당가''"라고 했는데, 크리슈나 의식을 널리 퍼뜨리기 때문이다. 프라부파다는 배포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프라부파다의 전통은 "성자와의 교제는 성스러움을 고취하고, 헌신자와의 교제는 헌신을 고취한다. 진정한 헌신자들과의 교제는 사람의 의식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강조한다. ISKCON 창립 문서에는 "회원들을 서로, 크리슈나에게 더 가까이 데려오는 것"이 목적 중 하나였다.
프라부파다는 영적 입문 전제 조건으로 네 가지 "규제 원칙"을 따를 것을 요구했다. 불법 성관계, 육류, 생선, 계란 섭취 금지, 취하게 하는 것 금지, 도박 금지였다. 새 입문자들은 매일 16 "라운드"의 ''하레 크리슈나 만트라'' 암송을 맹세했다.
'''슈리마드-바가바탐'''은 "크리슈나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 "크리슈나파 학파의 탁월한 경전"이었다. "베다 나무의 익은 열매"로 묘사된다. 프라부파다는 모든 센터에서 매일 '''바가바탐''' 수업을 시작했고, 가는 곳마다 '''바가바탐'''에 대해 설법했다.
바히슈나바 가르침에 따라, 프라부파다는 크리슈나를 무르티 형태로 숭배하는 것을 도입했다. 무르티는 경전에 제시된 크리슈나 묘사에 맞춰 금속, 돌, 나무로 조각된 형상이다. 케네스 발페이는 다음과 같이 썼다.
프라부파다는 크리슈나가 신격으로서 직접 현존하기 때문에, 신격 숭배는 크리슈나와 사랑의 교류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가르쳤다. 프라부파다는 전 세계 ISKCON 사원에 신격들을 설치했다.
헌신으로 크리슈나 신격에게 준비, 바쳐진 음식은 ''크리슈나-프라사담''("크리슈나의 자비")으로 성화된다. 프라부파다는 ''프라사담''만을 먹는 것이 존재를 정화하고 ''바크티''에서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가르쳤다. 선교 활동 초창기부터 방문객들에게 ''프라사담''을 나눠 주었으며, 운동의 주요 홍보 수단으로 만들었다. ISKCON 센터에서는 매주 대중을 위한 ''프라사담'' 잔치가 항상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 “하레 크리슈나 운동은 하레 크리슈나 만트라 암송, 프라사담 배포 원칙에 기초한다."
루파 고스와미 등은 크리슈나의 지상 "유희" 장소, 아그라와 뉴델리 사이 성스러운 도시 브린다반에서 사는 것의 가치를 가르쳤다. 프라부파다는 제자들을 브린다반으로 순례하게 했고, 크리슈나-발라람 사원을 세웠다. "[W]어디에 머물든, 크리슈나 의식 안에서 초월적 일에 몰두하면, 그곳은 영원한 브린다반이다. 브린다반을 만드는 것은 의식이다."
『바가바드 기타』를 중심으로 한 가우디야 바이슈나바의 사제 계승에 의한 제자 육성, 신의 지식을 주는 것이다. 크리슈나가 최고 인격주 신임을 인정하고, 구루(교사)를 통해 박티(애정 봉사)를 바치며, "크리슈나 의식"이 될 것을 설한다. 크리슈나 의식이란, 신과 자신의 관계를 알고,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아는 것이다. 신이 태양이라면, 인간, 다른 생물들은 햇빛에 비유된다. 신, 생물의 영혼도 질은 같지만, 크기가 다르다. 감각적, 물질적 만족은 즐거움, 괴로움만 반복될 뿐, 인간으로서 향상은 없다. 도덕 향상, 종교 의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정한 행복은 크리슈나를 사랑하는 것뿐이다. 크리슈나를 사랑하려면, 하레 크리슈나 마하만트라를 외우고, 4가지 계율(자발적 고행, 규정 원칙)을 지속해야 하며, 그것이 의식 향상으로 이어진다.
devotees는 채식주의(베지테리언)가 아니라, 크리슈난이라고 말한다. 아힘사 정신에서 동물을 죽이는 것에 부정적이지만, 크리슈나가 먹는 것을 엎드려 먹는다. 신은 인간이 동물을 먹도록 창조하지 않았다. 채소에도 생명이 있다는 반론에, 인간은 최소한 먹는 것이 필요하며, 바가바드 기타에 쓰여 있듯, 신이 허락하는 음식을 요리해 바친 후 식사한다고 답한다.
『바가바드 기타』를 오천 년 전에 쓰여진 것으로 하고, 베다, 브라흐마 삼히타, 나라다 박티 수트라 등 경전을 역사적 사실로 한다. 기독교, 이슬람교 등 타 종교 가치도 인정한다. 다만, 종교는 신의 법이며, 신에 대한 사랑을 바치는 정의에서 벗어나면 인정하지 않는다.
무신론자인 과학자에게는 용서가 없다. 프라부파다는 진화론을 부정하고, 찰스 다윈을 성전 슈리마드바가바탐에서 어리석은 자라고 썼다.
5. 주요 저작
박티시단타 사라스바티는 저술과 출판을 특별히 장려했는데, 한 모임에서 프라부파다에게 "만약 돈이 생기면, 책을 인쇄하세요."라고 말했다.[3] 그래서 프라부파다는 아무리 바쁘거나 때로는 몸이 좋지 않더라도 책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는 거의 잠을 자지 않고, 매일 밤 오전 1시에 깨어나 『스리마드 바가바탐』과 다른 텍스트들을 번역하고 주석을 달았다. 낮에는 제자들을 지도하고 자신의 국제 협회와 사원의 일들을 돌보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든 이른 아침에 글을 썼는데, "그의 나이와 불안정한 건강에도 불구하고, 그는 휴식을 위해 글 쓰는 시간을 희생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까지 그는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탐』의 두 칸토, 그 열 번째 칸토의 요약 연구, 그리고 광대한 차이타냐 차리타므리타에서 추출한 요약본을 번역했다. 1970년부터 그의 문학적 산출량은 확장되는 하레 크리슈나 운동의 요구 때문에 약간 둔화되었다. 학자들은 그의 과제가 단순히 텍스트를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전통을 번역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종교 역사학자 토마스 홉킨스는 1975년 필라델피아에서 프라부파다와 나눈 대화에서 "『기타』는 크리슈나 헌신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을 제공하고, 『스리마드 바가바탐』은 대학원 과정과 같으며, 『차이타냐 차리타므리타』는 가장 진보된 헌신자들을 위한 대학원 교육과 같다"고 말했다.
홉킨스는 프라부파다가 『바가바탐』과 『차이타냐 차리타므리타』와 같은 작품들을 영어로 소개함으로써 이전에 접근할 수 없었던 중요한 텍스트들을 서구 세계에 접근 가능하게 했다고 말한다. 홉킨스는 "『바가바타 푸라나』와 『차이타냐 차리타므리타』의 몇 안 되는 영어 번역본은 거의 적절하지 않았고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말한다. 홉킨스는 프라부파다가 "이러한 텍스트들과 다른 텍스트들을 이전에는 결코 없었던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게 했고", "전통 자체를 서구에 접근 가능하게 했다"고 말한다.
1966-67년에 프라부파다는 ''바가바드 기타''에 대한 번역과 해설을 작성하여 ''바가바드 기타 있는 그대로''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책은 1968년 맥밀란 컴퍼니에서 축약본으로 처음 출판되었고, 1972년에 완전판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각 구절에 대해 먼저 산스크리트어 데바나가리 문자를 제시한 다음, 로마자 음역과 단어별 해설을 제시한 후, 자신의 번역과 "해설"을 제시했다. 종교학자 리처드 H. 데이비스는 이것이 "인도의 헌신적인 전통에서 유래한 진정한 해석을 제공하는 최초의 영어판 ''기타'' 번역본"이라고 언급했다. 이는 "모든 영어 ''기타'' 번역본 중 가장 널리 배포된 책"이다. 2015년에 데이비스는 "바크티베단타 북 트러스트는 프라부파다의 번역본이 영어 원본과 56개 언어로의 2차 번역본을 포함하여 2천 3백만 부 판매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고 썼다. 데이비스는 프라부파다에게 있어서 "''바가바드 기타''에 대한 본질적인 사실은 그 화자이다. ''기타''에는 크리슈나의 말씀이 담겨 있으며, 크리슈나는 '최고 인격신'"이라고 말한다. 프라부파다는 다른 번역자들이 크리슈나의 메시지가 아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기 위해 번역본을 사용하기 때문에 권위가 부족하다고 보았다. 반대로 프라부파다는 크리슈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시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여겼으며, 따라서 그는 ''바가바드 기타''를 "있는 그대로" 제시한다고 주장했다.
신성한 역사이자, 신학 논문이며, 철학적인 텍스트인 ''Srimad-Bhagavatam''은 "문학적 우수성, 광대한 자료를 정리하는 방식, 그리고 후대 작가들에게 미친 영향력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종교학자 에드윈 브라이언트는 ''Bhagavatam''의 시를 칭찬하며 "텍스트 학자들은 'Bhagavata'를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문학 작품들과 동등하게 평가할 수 있다고 말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한다.
출가(sannyasa)한 후, 프라부파다는 이 위대한 작품을 원본 산스크리트어 텍스트, 단어별 의미, 번역, 그리고 심층적인 해설과 함께 영어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Srimad-Bhagavata'' ''푸라나'', ''Bhagavata'' ''푸라나'', 또는 간단히 ''Bhagavata''라고도 알려진 ''Srimad-Bhagavatam''은 14,000행 이상의 구절로 구성된 12권의 책("칸토"는 프라부파다가 사용한 단어였다)으로 이루어져 있다. “''Srimad''”는 “아름다운” 또는 “영광스러운”을 의미한다.
프라부파다는 1959년 출가(sannyasa)를 받아들인 후 ''Bhagavatam''의 번역과 해설 작업을 시작했으며, 1965년까지 첫 번째 칸토를 완성하고 출판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Srimad-Bhagavatam''을 영어로 번역하는 데 매달렸다. 칸토는 그가 완성하는 대로 하나씩 출판되었다. 그는 아홉 개의 칸토와 열 번째 칸토의 열세 개의 장을 완성했다. 나머지 ''Bhagavatam''은 그의 제자들이 완성했다.
나이가 많고 방대한 분량의 ''바가바탐''을 고려하여, 프라부파다는 자신이 이 책을 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1968년에 그는 이 작품의 정수인 ''바가바탐''의 제10칸토를 요약하여 ''크리슈나, 최고 인격신''(Krsna, the Supreme Personality of Godhead)으로 발표했다. 이 요약 연구는 "제10칸토에 기술된 크리슈나 이야기를 프라부파다 자신이 설명한 것"이다. 이 책은 "크리슈나 신앙의 중심 이미지와 이야기를 제공하는 ''바가바타 푸라나''의 크리슈나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브라이언트는 "''바가바타''의 제10권은 수 세기 동안 예술가, 극작가, 음악가, 시인, 가수, 작가, 무용가, 조각가, 건축가 및 사찰 후원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 이야기들은 인도 아대륙 전역의 모든 힌두교 가정에 잘 알려져 있으며 일년 내내 지역 축제에서 기념된다."라고 말했다. 프라부파다 자신도 제자들 중 예술가들에게 많은 풀 컬러 삽화를 곁들여 이 책을 만들도록 영감을 주었다. 이러한 삽화는 그의 거의 모든 책의 특징이 되었다.
관련 작품으로는 1961년 프라부파다가 서방으로 가기 전 브린다반에서 쓴 ''바가바트의 빛''(Light of the Bhagavat)이 있는데,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제10칸토의 한 장(20장)을 다룬 것이다. 프라부파다는 그 장의 시에 대한 48개의 해설을 썼다. 따라서 이 책은 48개의 그림으로 삽화되어 있다.
1969년 프라부파다는 완전한 구절별 형식으로 번역 및 해설한 그의 저서인 ''이쇼파니샤드(Īśa Upaniṣad)''를 출판했는데, 이는 ''Īśāvāsya Upaniṣad''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1960년에 그는 그의 잡지 ''백 투 갓헤드''에 부분적으로 연재했었다. 단 18개의 ''만트라''로 구성된 ''이쇼파니샤드''는 주요 ''우파니샤드'' 중 하나로 여겨진다. 모든 현지 ''우파니샤드'' 모음에서 ''이쇼파니샤드''가 맨 먼저 나온다. 그 첫 번째 구절은 "베다 신학의 요약본으로 매우 존경받는" 우주의 신 중심적 관점을 제시한다. 유명한 전통적 해설가인 샹카라는 "무지에서 비롯된 고통과 환상에서 벗어나 최고의 행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이 ''우파니샤드''를 읽을 자격이 있다"고 썼다.
1968년에 시작된 ''The Nectar of Devotion''은 루파 고스와미의 "헌신의 원리에 대한 유명한 해설"인 ''Bhakti-rasamrita-sindhu''를 요약 연구한 것이다. 학자이자 수행자인 슈리바차 고스와미는 ''Bhakti-rasamrita-sindhu''를 "헌신적 실천의 교과서, 헌신 철학에 대한 해설, 그리고 헌신적 심리학 연구"로 묘사했다. ''The Nectar of Devotion''은 "가우디야 바이슈나비즘의 가장 중요한 헌신에 관한 신학 논문에 대한 접근성을 제공했다".
''Caitanya-caritamrta''는 가우디야 바이슈나바 전통을 창시한 차이타냐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17세기의 기록이다. 벵골어로 쓰여진 이 작품은 15,000 구절이 넘으며, "스리 차이타냐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작품"으로 여겨지며, "희귀한 가치"를 지니고, "벵골 문학 전체에서 비견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 종교학자 휴 어번은 이 작품을 "모든 인도 토착 문학의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라고 부른다.
프라부파다는 1974년, 2년 안에 번역을 완료했으며, 이는 17권으로 출판되었으며, 구절별 텍스트, 음역, 단어 의미, 번역 및 주석이 포함되었다. 그는 그의 선배들인 바크티비노다 타쿠르와 바크티시단타 사라스바티의 벵골어 주석을 바탕으로 주석을 작성했다.
스리라 프라부파다의 번역 이전에는 영어로 된 이 작품을 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프라부파다의 판이 나온 후, 학자 J. 브루스 롱은 "A.C. 박티베단타, 국제 크리슈나 의식 협회의 설립자-아차르야에 의해 번역된 크리슈나다사 카비라자 고스와미의 ''스리 차이타냐-차리타므리타''의 영어 번역본 출현은 인도학 학자들과 인도 영성에 대한 지식을 풍부하게 하려는 일반인 모두에게 축하할 일입니다"라고 썼다.
몇 년 전인 1968년에 프라부파다는 ''차이타냐 경의 가르침''을 출판했다. 이 책은 ''Caitanya-caritamrita''의 선택된 부분의 요약을 제공한다. 학자이자 제자인 타말 크리슈나 고스와미는 프라부파다가 완전한 번역 및 주석을 완료하기 전에 요약본 형태로 ''바가바드 기타 있는 그대로''를 처음 출판하고 ''바가바탐''과 ''차이타냐-차리타므리타''에서 요약 연구를 출판한 것은 "이러한 작품을 필수적인 성서로 전달하는 데 프라부파다가 느꼈던 긴급성과 프라부파다가 대표하는 전통 내에서 이 세 가지 기본적인 텍스트 각각이 지닌 중요성을 모두 표현한다"고 적고 있다.
프라부파다는 또한 루파 고스와미의 11절로 된 ''우파데샤므리타''(Upadeshamrita)에 대한 절별 주석 번역본을 썼는데, 이는 루파 고스와미의 가장 짧은 저술 중 하나이며, 헌신적인 봉사를 수행하는 방법에 대한 간결한 지침을 제공한다.
1972년 프라부파다는 자신의 저작물을 국제적으로 출판하고 배포하는 박티베단타 도서 신탁(BBT)을 설립했다. 주요 저작물 외에도 BBT는 그의 강연에서 파생된 다양한 페이퍼백을 출판한다. BBT는 또한 프라부파다가 창간한 잡지인 ''백 투 갓헤드''(Back to Godhead)를 여러 언어로 출판한다. 1973년부터 1977년까지 프라부파다의 추종자들은 미국과 전 세계의 쇼핑몰, 공항 및 기타 공공 장소에서 매년 수백만 권의 책과 다른 크리슈나 의식 문헌을 배포했다. 2023년 현재 그의 책들은 87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2022년, BBT는 2백만 부 이상의 문헌을 인쇄했다.
'''주요 저작 목록'''
제목 | 출판 연도 | 비고 |
---|---|---|
바가바드 기타 - 있는 그대로의 가르침 | 1968년 (축약본), 1972년 (완전판) | |
슈리마드 바가바탐 (바가바타 푸라나) | 1965년 (1권), 이후 순차 출판 | 제자들이 완성 |
슈리 이쇼파니샤드 | 1969년 | |
슈리 차이타냐 차리타므리타 | 1974년 | |
지침의 꿀 | ||
주 차이타냐의 가르침 | 1968년 | |
크리슈나, 최고 인격신 | 1968년 | |
헌신의 넥타 | ||
다른 행성으로의 쉬운 여행 | 1990년 | |
요가의 완성 | ||
탄생과 죽음 너머 | ||
크리슈나로 가는 길 | ||
라자 비디야: 지식의 왕 | ||
크리슈나 의식으로의 승화 | ||
크리슈나 의식: 비할 데 없는 선물 | ||
크리슈나 의식: 최상의 요가 체계 | ||
완벽한 질문, 완벽한 답변 | ||
데바후티의 아들, 로드 카필라의 가르침 | ||
자기 실현의 과학 | ||
무쿤다말라 스토트라: 쿨라세카라 왕의 기도 | 제자들에 의해 완성 | |
나라다 박티 수트라 | 제자들에 의해 완성 | |
바가바타의 빛 | ||
신의 메시지 | ||
지혜를 통한 포기 | ||
환상과 의심을 넘어 | ||
쿤티 여왕의 가르침 | ||
문명과 초월 | ||
다르마, 초월의 길 | ||
크리슈나, 쾌락의 저장소 | ||
완벽으로 가는 길 | ||
깨달음을 향한 탐구 |
'''번역 출판물'''
- 바가바드 기타 (있는 그대로의 시) (일본어 번역판, 프라부파다 해설 포함, 각국어판도 제작, 출판)
- 주 바가반 크리슈나 제1~4권
- 슈리마드 바가바탐 제1권
- 프라부파다
- 헌신 봉사의 기쁨
- 요가의 완성
- 자기 탐구
- 슈리 이샤 우파니샤드
- 크리슈나로 가는 길 그림으로 보는 베다의 가르침
- 커밍백 윤회의 과학
모두 박티베단타 문고사에서 출판되었다.
6. 비판적 평가 및 논란
A. C. 박티베단타 스와미 프라부파다는 서구에서 설교 활동을 하면서 현대 사회의 다양한 이상을 비판하거나 특정 집단에 대해 불쾌감을 주는 발언을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1]
프라부파다는 민주주의를 "당나귀의 정부", "헛소리", "웃음거리"라고 칭하는 동시에 군주제 형태의 정부를 칭찬하고 독재를 옹호했다.[1] 그는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힌두 신화의 위대한 악마인 히란야카시푸와 캄사에 비유하면서 그들의 행동을 "매우 위대하다"고 불렀다.[1] 다른 경우에 그는 "히틀러에 대해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발언"을 했으며, 히틀러가 유대인을 죽인 이유는 그들이 "독일에 대항하는 자금을 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1]
그는 또한 일부 여성 혐오적인 견해를 표명하여 "여성은 자유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으며 의존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하고,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다지 지능적이지 않다"고 말하며 "일반적으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1] "전통적인 힌두교적 관점에서", 프라부파다는 아리아 혈통 신화를 옹호하고 어두운 피부를 가진 사람들을 ''수드라'' [하위 카스트 계급]에 비유하여 더 밝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보다 열등하다는 뉘앙스를 풍겼다.[1] 1977년 제자들과의 녹음된 방 대화에서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교양 없고 술꾼"이라고 칭하며, 자유와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은 후 사회에 문제를 일으켰다고 주장했다.[1]
특히 그의 ''바가바드 기타''(Bhagavad-Gītā) 판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2] 종교학자 에릭 J. 샤프는 프라부파다가 ''바가바드 기타''를 편협하고 근본주의적으로 해석한다고 생각한다.[2] 산스크리트 학자 A.L. 허먼도 이에 동의한다.[2] 또 다른 학자 K. P. 신하는 프라부파다가 절대적 일원론 철학인 아드바이타 베단타에 대해 "잘못된 해석과 불친절한 발언"을 한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2]
ISKCON 내 아동 학대 문제도 있었다. 프라부파다는 제자들에게 ''구루쿨라''라고 불리는 기숙학교에서 아이들을 교육하도록 지시했는데, 이곳에서 아이들은 영적 스승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다.[3] 그러나 종교 사회학자 E. 버크 로치포드가 보고한 바와 같이, 이러한 학교는 관리 부실로 인해 고아원과 같아졌다.[3] 프라부파다의 사망 이후, 이러한 학교에서 감독 부족으로 인해 신체적 학대와 성적 학대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3]
7. 영향력 및 유산
A. C. Bhaktivedanta Swami Prabhupada영어는 1970년대 인도 본래의 영적 감수성을 되살리고, 유럽화와 서구 모방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서양 제자들과 함께 인도에 돌아와 뭄바이, 브린다반, 하이데라바드에 사원을 세우고, 서벵골 마야푸르(차이타냐 마하프라부의 출생지)에 국제 본부를 설립했다.
1970년대 초, 프라부파다는 그의 운동의 미국 본부를 로스앤젤레스에, 세계 본부를 마야푸르에 설립했다. 그는 멕시코, 베네수엘라, 홍콩, 일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피지, 이란 등 여러 국가를 방문하며 크리슈나 의식을 전파했다.
프라부파다는 학생들을 직접 지도하고, 편지와 비서를 통해 그들의 삶에 "강력한 아버지 같은 존재"를 보장했다. 그는 6,000통이 넘는 편지를 썼으며, 매일의 좌절, 당혹감, 다툼, 실패와 관련된 서신을 처리하며 자신의 운동을 계속 발전시켰다. 그는 한 시간 동안의 이른 아침 산책을 통해 제자들에게 질문과 개인적인 지도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다. 매일 ''스리마드-바가바탐''에 대해 강연하고, 제자들과 만나거나 고위 인사 및 지도자들과 만났다.
프라부파다는 10년 동안 14번이나 세계를 일주하며 100개 이상의 사원과 수십 개의 농촌 공동체와 식당, 그리고 ISKCON의 아이들을 위한 ''구루쿨라''(기숙 학교)를 열었다. 그는 거의 5,000명의 제자를 입문시켰다.
1977년 11월 14일, 81세의 나이로 오랜 투병 끝에 인도 브린다반에 세운 사원인 크리슈나 발라람 만디르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매장지는 신도들이 세운 ''사마디''(기념 사당) 아래 사원 안뜰에 위치해 있다.
1970년, 프라부파다는 ISKCON의 전 세계 활동을 감독하기 위해 통치 위원회(GBC)를 설립했다. 1977년, 사망하기 4개월 전, 그는 병중에 있는 동안 자신의 대리로서 영적인 입문을 수행하도록 11명의 선임 제자를 임명했다.
프라부파다의 죽음은 ISKCON에서 권위의 위기를 초래했지만, 2023년까지 프라부파다로부터 승계된 거의 100명의 제자 및 증손 제자들이 그의 가우디야 바이쉬나바 계통의 지류에서 입문 구루로 활동하고 있었다.
박티 요가와 가우디야 바이슈나바교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전 세계적으로 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프라부파다의 지속적인 기여이다. 그의 저술과 운동을 통해 많은 서구인들이 처음으로 ''박티''를 알게 되었다. 그는 특히 ''바가바드 기타'', ''스리마드 바가바탐'', ''차이타냐 차리타므리타''와 같은 중요한 영적 텍스트를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전 세계의 독자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주석은 이러한 저술의 전통적인 지혜를 현대적인 맥락으로 가져왔다. 가우디야 바이슈나바교 내에서 프라부파다의 설교 성과는 차이타냐 마하프라부의 가르침을 세상에 소개하려는 사명의 완수로 여겨진다.
프라부파다는 아드바이타 베단타를 거부하고 절대자는 궁극적으로 신의 인격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사르델라는 프라부파다가 12년 동안 "수천 명의 헌신적인 회원으로 구성된 ISKCON을 구축하고, 세계 주요 도시 대부분에 차이타냐 바이슈나바 사원을 설립했으며, 수많은 차이타냐 바이슈나바 텍스트(28개 언어)를 출판하여 수천만 부가 전 세계에 배포되었다"고 썼다. 프라부파다는 또한 ''하레 크리슈나 만트라''를 전 세계에 퍼뜨렸다.
2013년, 로크포드는 "ISKCON이 상당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거의 50년 동안 존속해 왔다는 사실은 신봉자들의 회복력과 ISKCON에 대한 프라부파다의 가르침과 비전의 힘을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인도에서 프라부파다의 운동은 힌두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인정을 받는 존경받는 기관이 되었다. ISKCON은 뭄바이, 뉴델리, 방갈로르, 첸나이, 콜카타와 같은 도시에서 활동하는 대규모 사원 단지를 가지고 있다. 마야푸르에 있는 ISKCON의 센터는 매년 수백만 명의 동인도 순례지가 되었다. 수천 명의 중산층 힌두교도들이 인도와 다른 지역에서 ISKCON에 가입했다. 그리고 인도와 힌두 디아스포라의 힌두교도들이 ISKCON에 막대한 지원을 제공했다.
그러나 프라부파다의 유산은 또한 다양한 측면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이 운동의 조직 구조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그가 사망한 후 지도력의 지속성에 대한 논란이 발생했으며, 일부 ISKCON 회원, 특히 한때 존경받던 전 지도자들에 의해 악행과 심지어 범죄 행위가 저질러졌다. 이 운동이 현대적 가치, 특히 성 역할 및 사회적 규범에 적응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ISKCON은 인도 이외의 회중에서 많은 수의 인도 가족의 지원과 참여로 혜택을 받았지만, ISKCON의 "힌두화"는 많은 곳에서 다른 청중의 참여를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라부파다의 영향력은 그의 저술과 ISKCON의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 지속된다. 상당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그가 시작한 운동은 계속 성장하고 있다.
킴 노트는 학자들이 프라부파다를 카리스마적인 영적 지도자로 묘사하고 그의 "인간성"과 "독특함"을 강조한다고 기록한다. 프라부파다가 그렇게 짧은 기간 안에, 그리고 그렇게 고령에 선교에 성공한 것을 학자들은 "놀라운", "탁월한", "특별한" 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칭찬한다고 쓴다. 같은 맥락에서, 힌두교와 인도 역사의 학자인 클라우스 클로스터마이어는 프라부파다를 "아마도 해외에서 힌두교를 가장 성공적으로 전파한 사람"이라고 언급한다.
하비 콕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혀 다른 문화에 종교적 전통 전체를 성공적으로 심은 사람은 많지 않다. 이것은 종교사에서 드문 업적이다. 그의 경우, 그렇게 고령에 이를 해냈다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은퇴했을 때, 그는 미국에 와서 이 운동을 시작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단계를 시작했다. 그는 소수의 제자들과 함께 단순하게 시작했다. 결국 그는 이 운동을 북미 대륙, 유럽이 지배하는 세계의 다른 지역과 그 너머에 깊이 뿌리내렸다. 비록 그를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현재 서방 세계에는 그가 가르친 신에 대한 헌신의 형태를 소개하는 활기차고, 훈련되고, 잘 조직된 듯한 운동이 있다. 이는 단순히 철학적 운동이나 요가 또는 명상 운동이 아닌, 진정한 종교 운동이다. 이는 놀라운 업적이다. 그래서 제가 [그를] "백만 명 중 한 명"이라고 말할 때, 어떤 면에서는 과소평가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는 1억 명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프라부파다의 비(非)인도인들에게 전 세계적으로 인도 영성을 전파한 성공은 인도 정치 지도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인도 총리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데베 고다, 나렌드라 모디, 그리고 인도 대통령 샹카르 데얄 샤르마, 프라납 무케르지, 프라티바 파틸은 프라부파다와 그의 업적, 사명을 칭찬했다.
1998년, 뉴델리의 ISKCON 사원 개관식에서 바지파이 총리는 프라부파다의 운동이 ''바가바드 기타''를 "수백만 부 인쇄하여 수많은 인도 언어로" 전 세계 "구석구석"에 배포한 점을 높이 평가하며, 프라부파다의 서방으로의 여정과 그의 운동의 급격한 세계적 확산을 "세기의 가장 위대한 영적 사건 중 하나"라고 칭했다.
프라부파다의 125주년 생일을 기념하여 125 인도 루피 기념 주화를 발행하면서, 모디 총리는 또한 프라부파다가 "인도의 가장 귀중한 보물을 세계에 선사"하려는 그의 노력에 대해 칭찬하며, 인도의 사상과 철학을 전 세계에 전파한 프라부파다의 업적을 "기적에 다름없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프라부파다가 서방으로의 여정을 시작한 지 50주년이 되자, 미국 하원 의원 툴시 가바드는 "모든 인류에게 주 차이탄야와 성스러운 이름을 전파하기 위해 그토록 용감하고 대담한 시도를 하도록 스릴라 프라부파다를 이끌었던 연민"을 칭찬했다.
''가우디야-바이슈나바'' 의식에 따라, A. C. 박티베단타 스와미 프라부파다가 크리슈나-발라라마 사원에서 사망한 후, 그의 제자들은 사원 부지에 그의 시신을 안치하고 그의 매장지 위에 대리석으로 된 ''사마디'' 또는 사당을 세웠다. 마야푸르에서 그들은 훨씬 더 큰 ''푸쉬파-사마디''를 지었는데, 이는 프라부파다의 장례식에서 나온 꽃으로 봉헌된 사당이다. 매일 ''푸자''(전통적인 숭배)가 두 곳 모두 프라부파다의 실물보다 큰 조각상에 바쳐진다.
또 다른 사당은 뉴 브린다반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에 프라부파다를 위해 헌정되었으며, 그의 가끔의 방문을 위해 지어진 거주지가 정교한 골드의 프라부파다 궁전으로 발전했다. 1979년, 프라부파다의 사망 2년 후 일반에 공개된 이 기념관은 현재 순례자와 관광객을 위한 숭배 장소이자 명소이며, 미국의 국립 사적지에 등재되어 있다. 프라부파다가 브린다반, 뭄바이, 로스앤젤레스, 런던, 멜버른 및 전 세계 여러 곳에 머물렀던 다른 방들은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프라부파다의 출생지인 콜카타의 톨리군지 지역은 2001년 프라부파다 탄생 125주년을 기념하여 서벵골 주지사 마마타 바네르지에 의해 기념관으로 개관되었다. 콜카타의 울타당가 지역에 있는, 프라부파다가 그의 스승인 박티시단타 사라스바티를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진 건물인 박티비노드 아산도 유산으로 복원되었다.
2015년 8월 13일, 프라부파다가 콜카타에서 미국으로 떠난 지 50주년이 되는 날, 우크라이나 조각가 볼로디미르 즈라벨이 제작한 2미터 높이의 청동 기념비가 서벵골 주지사 케샤리 나트 트리파티와 푸두체리 부지사 키란 베디에 의해 콜카타에서 공개되었다. 이 기념비는 두 부분으로 제작되었으며, 하나는 프라부파다가 미국으로 떠나는 모습을 묘사하고, 다른 하나는 그가 도착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기념비가 공개된 후, "출발" 부분은 콜카타의 ISKCON 사원에, "도착" 부분은 보스턴의 ISKCON 사원 앞에 설치되었다.
2024년 11월, 스코틀랜드 교회 대학교는 A. C. 박티베단타 스와미 프라부파다를 기리는 "아바야 차란 세미나 홀"을 개관했다. 이 홀은 박티베단타 연구 센터의 지원으로 건설되었다.[1][2]
2008년에 케톨라는 프라부파다에 관한 역사적, 전기적, 자서전적 저작이 30편 이상이라고 썼다. 그 이후로 그 수는 증가했다.
삿스바루파 다사 고스와미의 공식 6권짜리 전기 《스리라 프라부파다-릴람르타》에 최근 조슈아 그린의 더 짧은 전기 《낯선 땅의 스와미》가 추가되었다. 두 저자 모두 프라부파다의 제자이다. 특정 시기나 장소에 초점을 맞춘 회고록 중에서 케톨라는 하야그리바 다사의 《하레 크리슈나 폭발》을 포함하여 여러 편을 언급한다.
케톨라는 또한 프라부파다의 직접적인 조력자들이 쓴 두 권의 일기, 타말 크리슈나 고스와미의 《TKG의 일기》와 하리 사우리 다사의 여러 권으로 된 《초월 일기》를 언급한다.
1996년, 가우라브 세스는 55분짜리 전기 영화 《준비된 삶: 프라부파다》를 제작했다. 2017년에는 프라부파다의 제자인 존 그리서가 비판적이지 않은 91분짜리 영화 《하레 크리슈나! 만트라, 운동, 그리고 모든 것을 시작한 스와미》를 제작했다.
또한 제자들은 스리라 프라부파다에 대한 기억을 모은 두 개의 비디오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하나는 《스리라 프라부파다를 기억하며》이고, 다른 하나는 《스리라 프라부파다를 따르며》이다.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박티베단타 아카이브는 스리라 프라부파다의 원고와 편지, 스리라 프라부파다의 사진, 그리고 오디오 녹음 자료를 보관하는 곳이다.
1996년, 인도 정부는 프라부파다를 기리는 기념 우표를 발행했으며, 2021년에는 125루피 기념 주화를 발행했다.[3]
2001년, 뉴욕 시는 프라부파다와 그의 초기 추종자들이 1966년에 처음으로 '하레 크리슈나 만트라'를 외우기 시작한 느릅나무인 "하레 크리슈나 나무"를 기념하기 위해 톰킨스 스퀘어 공원에 현판을 설치했다.
다양한 ISKCON 관련 학교 및 기타 기관들이 스릴라 프라부파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여기에는 콜카타에 있는 박티베단타 연구 센터가 포함되며, 이곳에는 박티시단타 사라스바티의 모든 저작물과 가우디야 마트 창립 20년 동안의 출판물이 소장되어 있다.
2023년, 스코틀랜드 교회 칼리지(Scottish Church College)와 박티베단타 연구 센터는 프라부파다가 칼리지에서 보낸 학생 시절을 기념하기 위해 "A. C. 박티베단타 스와미 프라부파다 기념상"을 공동으로 제정하여 뛰어난 학업 성취를 보인 최우수 학생과 탁월한 지역 사회 봉사를 한 교직원을 표창할 예정이다.
1978년, 브린다반으로 들어가는 주요 진입 도로가 프라부파다(Prabhupada)의 이름을 따서 박티베단타 스와미 마르그(Bhaktivedanta Swami Marg)로 명명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স্কটিশ চার্চে প্রভুপাদের নামে সেমিনার কক্ষ, সহায়তায় ভক্তিবেদান্ত রিসার্চ সেন্টার
https://www.sangbadp[...]
2024-11-06
[2]
웹사이트
অভয়চরণ নামাঙ্কিত সেমিনার হলের দ্বারোদ্ঘাটন হয়েছে
https://bengali.hind[...]
2024-11-06
[3]
뉴스
Times of India
202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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