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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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인은 19세기 이후 러시아를 비롯한 독립국가연합 지역으로 이주한 한민족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1988년 전소련고려인협회 결성 이후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가지지 않은 러시아 친화적 문화를 가진 이들을 일컫는다. 19세기 말부터 극동 러시아와 시베리아로 이주하여 정착했으며,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소련 붕괴 이후 독립국가연합 지역에 주로 거주하며, 러시아, 우크라이나, 중앙아시아 등에 분포한다. 최근에는 대한민국으로의 귀환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독자적인 언어, 문화, 종교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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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민족 이름 | 고려사람 |
다른 이름 | 고려인 코료사람 |
총 인구 | 약 50만 명 |
관련 민족 | 한민족 사할린 한인 |
거주 지역 | |
우즈베키스탄 | 174,200명 |
카자흐스탄 | 118,450명 |
러시아 | 87,819명 |
키르기스스탄 | 17,094명 |
우크라이나 | 12,711명 |
투르크메니스탄 | 2,500명 |
타지키스탄 | 634명 |
벨라루스 | 400명 |
에스토니아 | 208명 |
언어 | |
사용 언어 | 러시아어 고려말 |
종교 | |
주요 종교 | 동방 정교회 불교 개신교 천주교 이슬람교 |
문화 | |
한국어 표기 | 고려사람 고려인 |
한자 표기 | 高麗사람 高麗人 |
로마자 표기 (고려사람) | Goryeosaram |
로마자 표기 (고려인) | Goryeoin |
러시아어 표기 | Корё сарам |
러시아어 로마자 표기 | Koryo saram |
2. 호칭
고려인이라는 명칭은 서울 올림픽 직전인 1988년 6월에 전소련고려인협회가 결성되면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고려인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하지 않은 소련인이었고,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도 러시아 친화적인 특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이나 '한국'이 아닌 '고려'라는 중립적인 표현을 채택했다.[12]
19세기 말, 조선은 정치·경제적 혼란으로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 극동 지역으로 이주했다. 초기에는 청나라 영토였던 연해주로 이주했으나,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가 러시아에 할양되면서 이주 지역은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러시아어권에서는 전통적으로 한민족을 '코레이치(Коре́йцыru)'라고 불렀으며, '카레이스키'는 '한민족의'를 뜻하는 형용사 '코레이스키(Коре́йскийru)'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최근에는 한국어의 '고려사람'에서 유래한 '코료사람(Корё-сара́мru)'이라는 표현도 사용되고 있다.
3. 역사
1869년 고려인은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인구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급증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 완공 전이었기 때문에 극동 러시아 지역에서는 고려인이 러시아인보다 더 많았다. 이에 러시아 지방 관리들은 고려인에게 귀화를 장려했다. 1897년 러시아 제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전역에서 고려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26,005명(남자 16,225명, 여자 9,780명)이었다.[70] 1902년에는 32,000명을 넘어섰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여러 도시에 고려인 마을과 농장이 생겨났다. 1870년 한국인 이주민에 의해 설립된 블라고슬로벤노예(Благословенное) 마을이 대표적이다.[14] 블라디보스토크 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졸로토이 로그(Золотой Рог) 근처의 고려인 마을은 러시아인들이 코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Корейская слабодка, 한국 마을이라는 뜻)라고 불렀고, 한국인들은 개척리(開拓里)라고 불렀다.
1937년에서 1939년 사이, 스탈린은 일본군의 스파이 행동을 우려하여 고려인 지도자 500명을 체포하고 그 중 40~50명을 숙청 처형하였고, 연해주에 살던 172,000명의 고려인들을 카자흐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우즈베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12] 당시 극동지역 위원장 리우시코프는 1937년 8월 하바롭스크에 머물면서 스탈린의 지령을 받아 강제이주정책을 추진했는데, 접경에 살고 있는 한인들은 간첩의 소지가 있으니 일본인과 접할 수 없게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며 강제이주 정책을 건의했다고 한다. 이주 도중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글라스노스트 이전까지는 이주에 대해 발언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12]
이주민들은 협력하여 관개 시설을 설치하였고, 벼농사를 시작하여 3년 만에 삶의 방식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수십 년간 한국어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 세대는 한국어를 거의 잘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에도 대부분의 고려인은 독립국가연합 지역에 그대로 남아 살아가고 있다. 2002년 연구에 따르면, 약 47만 명의 고려인이 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고 있으며, 우즈베키스탄(198,000명), 러시아(125,000명), 카자흐스탄(105,000명), 우크라이나(12,000명) 등에 주로 거주한다.[69]
사할린에는 일제 강점기에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일본령 남사할린으로 이주한 사람들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서 노동자로 건너간 사람들로 구성된 사할린 거주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다.[54]
소련 붕괴 이후, 일부 고려인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국적을 얻지 못해 무국적자가 되는 문제가 발생했다.[74][75][76]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부터 무국적 고려인 지원 사업을 시작하여 현지 국적 취득을 위한 외교 활동과 법률 지원을 하고 있으나, 각국의 법률 및 문화적 장벽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62][63][78][79]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고려인을 포함한 한국계 외국인의 귀국을 지원하고 있으며, 일부 고려인들은 대한민국으로 귀환하고 있다. 2005년 기준으로 최대 1만 명의 우즈베키스탄 국민(대부분 고려인)이 한국에서 일했으며, 한국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의 송금액은 연간 1억달러를 초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25]
3. 1. 극동 러시아와 시베리아 이주
19세기 말, 조선은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 극동 지역으로 이주했다. 초기에는 청나라 영토였던 연해주로 이주했으나,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가 러시아에 할양되면서 이주 지역은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1869년 고려인은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인구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급증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 완공 전이었기 때문에 극동 러시아 지역에서는 고려인이 러시아인보다 더 많았다. 이에 러시아 지방 관리들은 고려인에게 귀화를 장려했다. 1897년 러시아 제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전역에서 고려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26,005명(남자 16,225명, 여자 9,780명)이었다.[70] 1902년에는 32,000명을 넘어섰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여러 도시에 고려인 마을과 농장이 생겨났다. 1870년 한국인 이주민에 의해 설립된 블라고슬로벤노예(Благословенное) 마을이 대표적이다.[14] 블라디보스토크 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졸로토이 로그(Золотой Рог) 근처의 고려인 마을은 러시아인들이 코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Корейская слабодка, 한국 마을이라는 뜻)라고 불렀고, 한국인들은 개척리(開拓里)라고 불렀다.
3. 2. 강제 이주
1937년에서 1939년 사이, 스탈린은 일본군의 스파이 행동을 우려하여 고려인 지도자 500명을 체포하고 그 중 40~50명을 숙청 처형하였고, 연해주에 살던 172,000명의 고려인들을 카자흐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우즈베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12] 당시 극동지역 위원장 리우시코프는 1937년 8월 하바롭스크에 머물면서 스탈린의 지령을 받아 강제이주정책을 추진했는데, 접경에 살고 있는 한인들은 간첩의 소지가 있으니 일본인과 접할 수 없게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며 강제이주 정책을 건의했다고 한다. 이주 도중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글라스노스트 이전까지는 이주에 대해 발언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12]
이주민들은 협력하여 관개 시설을 설치하였고,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수십 년간 한국어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 세대는 한국어를 거의 잘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1937년, 인민내무부(NKVD)의 보고에 따르면 일본이 소수 민족인 한국인 스파이를 이용하여 러시아 극동 지역에 침투할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가 접수되었다. 이에 요셉 스탈린과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8월 21일, “극동 크라이 국경 지역의 한국인 인구 추방에 관한” 결의안 1428-326 ss에 서명하였다. 니콜라이 예조프의 보고에 따르면 10월 25일까지 36,442가구, 총 171,781명의 한국인이 강제 추방되었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한국인들은 열악한 환경에 직면했다. 정부가 약속한 금전적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부분의 강제 이주자들은 쌀농사와 어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기에 건조한 기후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인구 통계에 근거한 추산에 따르면 이러한 이유로 1937년과 1938년에 4만 명의 강제 이주 한국인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제 이주자들은 협력하여 관개 시설을 건설하고 쌀농사를 시작하여 3년 만에 원래의 생활 수준을 회복했다.
이 시기의 사건들은 강제 이주된 한국인들 사이에 응집력 있는 정체성 형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소련 한국인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에서는 1939년부터 한국어가 교수 언어에서 제2외국어로 전환되었고, 1945년부터는 한국어 교육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게다가 한국어로 발행되는 유일한 간행물은 ''레닌 키치''(현재 ''고려 일보'')였다. 그 결과 후대들은 한국어 사용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글라스노스트 시대까지 강제 이주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12]
3. 3. 소련 붕괴 이후
소련 붕괴 이후에도 거의 대부분의 고려인은 독립국가연합 지역에 그대로 남아 살아가고 있다. 2002년 연구에 따르면, 약 47만 명의 고려인이 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고 있으며, 우즈베키스탄(198,000명), 러시아(125,000명), 카자흐스탄(105,000명), 우크라이나(12,000명) 등에 주로 거주한다.[69] 2023년 6월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독립국가연합에는 약 47만 명의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다.
21세기 현재 주요 거주지는 러시아를 비롯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과 우크라이나 등이다. 약 50만 명의 고려인이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거주하며, 러시아 남부 볼고그라드 근교와 캅카스, 우크라이나 남부에도 고려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
사할린에는 일제 강점기에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일본령 남사할린으로 이주한 사람들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서 노동자로 건너간 사람들로 구성된 사할린 거주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다.[54]
소련 붕괴 이후, 일부 고려인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국적을 얻지 못해 무국적자가 되는 문제가 발생했다.[74][75][76] 독립국가연합에는 약 5만 명의 무국적 고려인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부터 무국적 고려인 지원 사업을 시작하여 현지 국적 취득을 위한 외교 활동과 법률 지원을 하고 있으나, 각국의 법률 및 문화적 장벽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62][63][78][79]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고려인을 포함한 한국계 외국인의 귀국을 지원하고 있으며, 일부 고려인들은 대한민국으로 귀환하고 있다. 2005년 기준으로 최대 1만 명의 우즈베키스탄 국민(대부분 고려인)이 한국에서 일했으며, 한국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의 송금액은 연간 1억달러를 초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25]
3. 3. 1. 러시아
2002년 러시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약 15만 명의 고려인이 러시아에 거주하며, 이 중 1/4 정도는 시베리아와 극동 러시아에 거주한다.[17] 이 지역의 고려인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1937년 강제 이주 조치의 역사적 배경을 가진 약 3만 3천 명의 독립국가연합(CIS) 국민(대부분 이주민) 외에도 4천 명에서 1만 2천 명에 달하는 북한 노동자들이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18] 소규모의 한국인과 중국 내 한국계 주민들도 이 지역에 정착하여 사업 투자 및 국경 간 무역에 참여하고 있다.[18]
사할린은 한때 일본 열도 본토로 취급받는 제5의 섬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소련이 되찾은 땅이다. 이곳의 조선인들은 일본 땅으로 일하러 갔다가 전쟁이 끝나고 땅 주인이 소련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버려진 것이다. 사할린 한인들은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본 제국 전시 체제 당시 강제 징용 당해 탄광으로 끌려가 강제 노역당한 사람들이었다. 그 때문에 중앙아시아의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의 정체성은 다르다. 사할린의 한인은 재일 한국인과 유사하나 그들과도 냉전 시대의 분단 때문에 독자적인 정체성으로 남았다.
2002년 인구 조사[17] | 2010년 인구 조사[18] | |
---|---|---|
러시아 | 148,556 | 153,156 |
연방관구별 인구 수 | ||
중부 연방관구 | 16,720 | 21,779 |
북서부 연방관구 | 6,903 | 7,000 |
남부 연방관구 | 39,031 | 40,191 |
볼가 연방관구 | 9,088 | 12,215 |
우랄 연방관구 | 4,071 | 3,805 |
시베리아 연방관구 | 10,797 | 11,193 |
극동 연방관구 | 61,946 | 56,973 |
3. 3. 2. 우크라이나
2001년 우크라이나 인구 조사에서 12,711명이 스스로 고려인으로 밝혔으며, 이는 1989년의 8,669명보다 증가한 수치이다. 고려인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곳은 하르키우, 키이우, 오데사, 미콜라이우, 체르카시, 리비우, 루한스크, 도네츠크, 드니프로, 자포리자, 크림반도 등이다.[19]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려인 공동체는 하르키우에 있으며, 약 150가구의 고려인 가정이 거주하고 있다. 1996년에는 하르키우 고려인 공동체의 주도로 최초의 한국어 학교가 설립되었다.2014년 3월 18일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강제 병합 및 편입됨에 따라, 이 지역에 살던 약 3,000명의 고려인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3. 3. 중앙아시아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은 대부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거주한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문화는 이전의 수도였던 알마티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이곳에서는 고려일보와 고려극장이 운영된다. 카자흐스탄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고려인 수는 1939년 96,500명, 1959년 74,000명, 1970년 81,600명, 1989년 100,700명, 1999년 99,700명이었다.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은 농촌 지역에 넓게 흩어져 살고 있다. 이들은 러시아어를 사용했지만 우즈베크어를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언어적 어려움을 겪었다. 우즈베키스탄 독립 후, 많은 사람들이 국가 언어를 구사하지 못해 일자리를 잃었고, 일부는 러시아 극동으로 이주했지만, 그곳에서도 힘든 삶을 살았다. 2017년 현재 우즈베키스탄에는 18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약 6만 명이 수도 타슈켄트에 집중되어 있다.[61] 강제 이주 80주년인 2017년, 타슈켄트에 있는 서울공원에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이 행사에는 서울시 시장도 참석했다.[61]
타지키스탄에도 소규모 한국인 공동체가 있다. 이들의 대규모 정착은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이전까지 이동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완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주를 위한 긍정적 요인으로는 풍부한 천연자원과 비교적 온화한 기후가 있었다. 고려인 인구는 1959년 2,400명, 1979년 11,000명, 1989년 13,000명으로 증가했으며, 대부분은 수도 두샨베에 거주했고, 쿠르간튜베와 후잔트에 소규모로 거주했다. 다른 중앙아시아 지역의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민족 집단 구성원들에 비해 소득이 더 높았다. 그러나 1992년 5월 타지키스탄 내전의 발발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를 떠났고, 1996년까지 인구는 절반 이상 감소하여 6,300명이 되었다.[23] 내전 종식 후에도 폭력은 계속되었고, 2000년에는 두샨베의 한국 기독교 교회에서 히즈브 웃 타흐리르 구성원들이 폭탄을 터뜨려 9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을 입었다. 현재 타지키스탄에 남아 있는 고려인들은 대부분 농업과 소매업에 종사한다.[23]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 인구는 지난 세 차례의 인구조사에서 대략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1989년 18,355명, 1999년 19,784명, 2009년 17,299명이었다.[21]
3. 3. 4. 무국적 고려인
소련 붕괴 이후 일부 고려인들은 무국적자가 되었다. 소련을 구성했던 국가들이 러시아 국적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국의 국적을 다시 신청해야 했지만, 이를 몰랐거나, 서류를 분실했거나, 주민등록을 하지 못했거나,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등의 이유로 국적을 얻지 못했다.[74][75][76] 이들은 빈곤한 가정 환경 탓에 교육 등 사회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얻지 못했고, 이러한 불이익은 그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77] 독립국가연합(CIS)에는 현재 고려인 전체의 10%에 해당하는 약 5만 명의 무국적 고려인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한국 정부는 2007년부터 무국적 고려인 지원 사업을 시작하여 현지 국적 취득을 위한 외교 활동과 법률 지원을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민국이 "한국 대사관이 우크라이나 국적이 없는 고려인의 신분을 증명하면 국적 회복 절차를 도울 수 있다"는 의향을 밝혔지만, 각국의 법률 및 문화적 장벽에 막혀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62][63][78][79]
3. 3. 5. 대한민국으로의 회귀
현대에 들어 대한민국 정부는 고려인을 포함한 한국계 외국인의 귀국을 지원하고 있다. 이에 따라 약 1만 명의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들이 대한민국으로 귀화하는 등 한국으로의 회귀가 이루어지고 있다.국내에는 다음과 같은 고려인 거주 지역이 형성되어 있다.
지역 | 설명 |
---|---|
안산시 땟골마을 | 약 7000명의 고려인이 거주하는 국내 최대 고려인 거주지 (안산시 단원구 선부2동 위치) |
광주광역시 고려인마을 | 약 3000명의 고려인이 거주 중 (광주광역시 광산구 산정공원로 50번길 29 위치). 9월 6일부터 고려인들의 사연을 들려주는 고려FM이라는 라디오 방송을 송출 |
인천광역시 함박마을 |
2005년 기준으로 최대 1만 명의 우즈베키스탄 국민이 한국에서 일했는데, 그 대부분이 고려인이었다. 한국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의 송금액은 연간 1억달러를 초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25]
고려인들은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사회적 고립이나 고용 차별[31]을 경험했다고 보고하고 있다.[32][33]
4. 문화
고려인은 외형적으로는 한국인과 유사하지만, 사고방식은 러시아인에 가깝고 한국어보다는 러시아어를 주로 사용한다. 마르코프차(당근 김치) 등 독자적인 음식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개신교를 믿는 경우가 많으며, 무교인도 상당수 존재한다.
중앙 아시아로 이주한 후, 고려인들은 관개 시설을 만들고 지역 일대의 쌀 재배 농가가 되었다. 주변의 유목민과는 거의 교류하지 않았으며,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고려인들은 곧 한국의 전통 의상을 입지 않게 되었지만, 중앙 아시아인들의 옷보다는 서구의 복식을 채택하였다.
고려인 공동체의 의례 생활은 여러 측면에서 변화했다. 결혼은 러시아식으로 바뀌었다. 한국 전통 장례식에서는 관을 창문이나 문턱 하나를 통해 집 밖으로 낸다. 그러나 집 밖으로 나가는 길에 문턱이 하나 이상 있는 경우(예: 현대식 다층 건물) 각 문턱에 세 개의 홈을 판다.[34][35] 죽은 사람의 이름은 전통적으로 한자로 썼지만, 한자를 쓸 줄 아는 고려인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일반적으로 한글로만 쓴다. 반면에 첫돌과 환갑 의례는 전통적인 형태로 보존되어 왔다.
고려인 요리는 북한 함경도 지방의 요리와 가장 가깝고, 고기 수프와 짠 반찬이 주를 이룬다. 조리법은 비슷하지만 현지 재료에 맞춰 변형되어 새로운 요리가 만들어졌다. 잘 알려진 예로는 당근을 사용하는 김치의 변형 요리인 ''마르코프차''가 있다. 그 밖의 요리로는 ''편채'', ''국수'', ''펀초자'',[39][40] ''팀페니'', ''헤'', ''차르타기'', ''카디 체'' (가지채|labels=no한국어), ''고사리 체'', ''치르김 체'', ''시랸크 탰무리'',[41] ''카듀리'' 등이 있다.
전쟁 후에 태어난 고려인들은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다민족 국가에서 성장한 영향으로 다른 민족과의 교류를 활발히 하였다.
고려인에게는 오가이(Огай), 노가이(Ногай), 유가이(Югай), 허가이(Хегай) 등 “가이”(гай)가 붙는 성이 많이 보인다. 오(吳), 노(盧), 유(柳), 허(許) 등과 같은 조선의 성이 변형된 것이다.[68]
4. 1. 사용 언어
1세대는 육진 방언을 기초로 러시아어의 영향을 받은 고려말(중앙아시아 한국어)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거주 지역의 언어 역시 구사할 줄 안다. 2세대 이후는 일반적으로 한국어는 겨우 알아듣거나 아예 하지 못하고 러시아어 등 거주 지역의 언어만 이해한다. 현대에는 거의 대부분 러시아어나 우크라이나어를 비롯하여 여러 중앙아시아 언어를 구사하며, 일반적으로 능숙한 한국어는 구사하지 못한다. 러시아 동남부 지역 프리모르스키 크라이 지역은 중국과 인접하여, 외국어로 중국어 사용이 약간 가능한 인구가 있다.[1]1970년 | 1979년 | 1989년 | |
---|---|---|---|
총 인구 | 357,507 | 388,926 | 438,650 |
고려어 (모국어) | 245,076 | 215,504 | 216,811 |
러시아어 (모국어) | 111,949 | 172,710 | 219,953 |
러시아어 (제2언어) | 179,776 | 185,357 | 189,929 |
기타 제2언어 | 6,034 | 8,938 | 16,217 |
1952년 이후 강제 이주와 지속적인 도시화로 인해 고려인 사회에서 고려어 사용 능력은 계속 감소하였다. 이는 둥간인과 같이 농촌 지역에 거주하는 다른 소수 민족들이 그들의 민족 언어에 대한 높은 수준의 숙달을 유지해 온 것과 대조적이다. 자료가 있는 가장 최근 연도인 1989년에는 고려인 인구 중 모국어가 러시아어인 사람의 수가 모국어가 고려어인 사람의 수를 앞질렀다.[2]
스탈린 시대, 고려인들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었고, 학교 수업 또한 모두 러시아어로 진행되었다. 스탈린 사후 이러한 제약은 해제되었지만, 소련 사회에 동화된 고려인들은 진학 및 사회적 성공에 유리한 러시아어를 모어로 사용하였다. 자녀를 둔 고려인 부모 중에는 조선어를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고 조선어 수업 폐지를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국제주의를 표방하는 소련 당국은 이러한 일부 고려인 부모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조선어 신문 『레닌의 기치』(1938년 - 1989년 발행)가 발행되었고, 조선어로 공연하는 조선극장이 중앙아시아 각지를 순회 공연했다. 따라서 스탈린 시대를 제외하면 소련에서 조선어가 탄압받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다만, 사회적 압력이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1]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의 도래와 함께 단기간의 조선 민족 부흥 운동이 시작되었다. 소련 각 공화국에는 조선 민족 협회가 설립되었고, 조선어를 배우는 고려인 청년이 일시적으로 증가했다. 고려인 지식인층에서는 연해주 귀환 운동도 일어났지만, 실제로 연해주로 재이주한 사람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조선어는 러시아어의 영향을 매우 강하게 받은 "고려말(고려어)"이라 불리는 것이며, 본국의 조선어와의 차이는 특히 일상 회화에서 매우 크다. 한국이나 북한, 중화인민공화국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사용되는 중국 조선어는 서로 의사소통에 거의 문제가 없지만, 고려말이나 재일조선어의 경우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어려움을 수반한다.[1]
4. 2. 이름
고려인은 러시아식 이름 체계를 따르지만, 한국 성씨를 유지한다. 또한, 한국식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많은 한국 성씨는 키릴 문자로 표기될 때 미국에서 사용되는 로마자 표기 및 발음과 약간 다르게 표기되고 발음된다. 일부 성씨에는 '가이(gai)'라는 어미가 추가되기도 하는데, 그 기원은 불분명하다.[42]한국어 성씨 | 로마자 표기 | 키릴 문자 표기 | 영어식 대체 표기 |
---|---|---|---|
안 | An | Ан | Ahn |
배 | Bya | Бя, Пягай | Pae |
백 | P∙ek | Пэк, Пяк | Baik, Paek |
박 | Pak | Пак | Park |
반 | Pan | Пан | Pahn |
방 | Bang | Пан | Pang, Phang |
부 | Bu | Пу, Пугай | Booh, Pooh |
변 | Byeon | Пён | Pyoun |
차 | Cha | Ча, Чагай | Char, Tchah |
채 | Tsay | Цай | Chai |
천 | Cheon | Чен | Choun |
최 | Tsoy | Цой, Цхай, Цхой | Choi, Chey, Choy |
엄 | Em | Эм | Oum |
강 | Kan | Кан | Kang |
김 | Kim | Ким | Kim |
고 | Ko | Ко, Когай | Koh |
구 | Gu | Ку | Koo |
곽 | Kvak | Квак | Kwak |
권 | Kvan | Кван, Квон | Kwon |
한 | Khan | Хан | Hahn |
허 | Khe | Хе, Хегай | Huh, Hur |
홍 | Khon | Хон | Houng |
황 | Khvan | Хван | Hwang |
현 | Khyon | Хён | Hyoun |
이 | I | И, Ли, Лигай, Ни, Нигай | Lee, Rhee, Yi |
임 | Im | Им, Лим | Rhim, Yim |
인 | In | Ин | Yin |
장 | Tyan | Тян, Чан | Chang, Jang |
전 | Ten | Тен | Chun, Jun |
정 | Ten | Тен, Чжен | Chung, Tseung |
지 | Ti | Ти, Тигай | Chi, Jee |
진 | Chen | Чен | Chin |
조 | Dyo | Дё, Тё | Cho |
주 | Ju | Дю, Дюгай, Дзю, Тюгай, Цзю | Chu |
마 | Ma | Ма, Магай | Mar, Mha |
맹 | Maeng | Мян | Maeing |
민 | Min | Мин | Mhin |
문 | Mun | Мун | Moon |
명 | Myeong | Мён | Myoung |
나, 라 | Na, Ra | На, Ра | La, Rha |
남 | Nam | Нам | Nahm |
노, 로 | No, Ro | Но, Ногай, Ро | Nho, Noh, Rho |
오 | O | О, Огай | Au, Oe, Oh |
유 | Yu | Ю, Югай | Yoo, You |
류 | Yu | Ю, Югай, Люгай | Ryoo, Ryou |
서 | She | Ше, Шегай | So, Sur |
석 | Shek | Шек | Suk |
설 | Seol | Шер | Sol, Sull |
성 | Sen | Сен | Song |
심 | Sim | Сим, Шим | Seem, Sheem |
신 | Sin | Син, Шин | Seen, Sheen |
손 | Son | Сон | Sohn |
송 | Son | Сон | Sung |
태 | Tkhay | Тхай, Тхя | Tai, Tay |
우 | U | У, Угай | Ou, Woo |
왕 | Van | Ван | (없음) |
원 | Von | Вон | Woon |
양, 량 | Yang, Ryang | Лян, Рян, Ян | Lyang, Ryang, Yaung |
여, 려 | Yeo, Ryeo | Ё, Ёгай | Yea, Yo, Yu |
염 | Yom | Ём, Лём | Yeoum |
연 | Yon | Ён | Yeoun |
윤 | Yun | Юн | Yoon |
결혼 후에는 남편의 성을 따르는 러시아 관습을 따른다. 한국에서는 여성이 결혼 후에도 본래 성을 유지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러시아 제국의 법률은 모든 사람에게 성, 이름, 부계명(중간 이름)을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규정했기 때문에, 고려인 여성들도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르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형성된 부계명을 받았다.
한국의 돌림자 문화는 러시아에 없기 때문에 고려인들은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종교에 따라 성인의 이름에서 따오거나 한국 이름에 사용되는 한자 중에서 임의로 선택하여 이름을 짓는다.
5. 인물
- 알렉산드르 민 - 소련의 군인,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 고려인 최초로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
- 빅토르 초이 - 고려인과 러시아인 혼혈 출신으로, 소련의 유명한 가수이자 록 음악가였다.
- 김병화 - 소비에트 연방의 농장 지도자로, 사회주의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 최재형 -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고려인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지원하였다.
- 데니스 텐 - 카자흐스탄의 남자 싱글 피겨스케이팅 선수.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 박 비비안나 - 러시아의 무용수. 박헌영의 딸이다.
- 넬리 킴 - 고려인 2세와 볼가 타타르 혼혈 출신의 소련 체조선수.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과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금메달 5개를 획득했다.
- 김경천 -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자 군인.
- 올렉산드르 신 - 우크라이나 자포리자의 시장을 역임했다.
- 비탈리 킴 -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주 주지사.[80]
- 미하일 안 - 소련의 전 축구 국가대표 선수.
- 채예진(YEVGENIYA TSKHAY) - 카자흐스탄 출신의 고려인 4세 기자, 사업가, 활동가. (사)고려인 글로벌 네트워크 이사장.
- 박 루슬란 -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한국 유학파 고려인 4세 영화감독.
- 게나디 골로프킨 - 카자흐스탄 출신 복싱 WBA 미들급 세계 챔피언. 한국인 외할아버지와 러시아인 외할머니 사이에서 어머니가 태어났고, 러시아인 아버지와 한국계 카자흐스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복싱 전적은 37승 0패 33KO이다.
- 블라디미르 킴 - 카자흐스탄의 기업가.
- 니콜라이 킴 - 소련 군인.
- 표트르 초이 - 소련 군인. 허고의의 장인.
- Anatoli Kim영어 - 작가.
- Yuliy Kim영어 - 싱어송라이터.
- German Kim영어 - 소련 과학 아카데미 회원.
- 보리스 유가이 - 키르기스 공화국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군인.
- 허고의 - 북한의 소련파 실력자.
- 남일 - 조선인민군 고관, 북한 외무상 역임.
- 김병하 - 집단농장 경영자.
- Valery Kan영어 - 정치인.
- Anita Tsoy영어 - 가수.
- Nikolai Shin영어 - 화가.
- 콘스탄틴 추 - 프로 복서.
- 홍범도 - 조선의 독립운동가.
- Alexandra Kim영어 - 혁명가.
6. 방송
- 2015년 2월 14일부터 2월 16일까지 MBC에서 방송된 카레이스키 150년 만의 귀향에서는 고려인 후손들이 2014년(150주년)에 남북 화합과 통일을 염원하며 유라시아 자동차 횡단을 하는 장면을 다루었다.[1]
- 2016년 8월 15일부터 8월 16일까지 EBS 광복절 특집 다큐멘터리 '청춘, 사라진 100년 그들의 목소리'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어 음성실험을 당하고 사라진 고려인 포로 6명의 이야기를 다루었다.[2]
- 2016년 9월 8일 KBS1TV 추석기획 한국인의 밥상에서는 국시, 가지고추된장찜, 감자만두 등 한국인의 정신을 이어나가면서도 다양한 문화를 조화롭게 받아들인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의 밥상을 소개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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