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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민족 정복왕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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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은 에가미 나미오가 제창한 학설로, 야요이 시대의 농경민족과는 다른 부여 계통의 기마민족이 일본 국가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이 학설은 스진 천황을 임나 왕으로, 오진 천황을 야마토 조정의 실질적 창시자로 보며, 고분 시대 후기의 문화 변화, 기키(記紀) 등의 문헌 기록, 고구려어와 고대 일본어의 유사성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의 불충분, 문헌 기록의 해석 문제, 방법론적 비판 등에 직면하여 현재는 주류 학설로 인정받지 못한다. 고분 시대의 문화적 연속성, 중국 사서의 기록, 황실 제사와의 연관성 부족 등이 반론으로 제기되었으며, 학문적 비판과 함께 민족주의적 해석의 위험성도 지적되었다. 현재는 고구려의 남하 정책 등 국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5세기 이후 야마토 조정이 한반도 문물을 수용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은 일본 고대사 연구에 다양한 시각을 제시했지만, 현재는 학문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으며, 민족주의적 해석의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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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민족 정복왕조설

2.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의 주요 내용

에가미 나미오는 고분 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고, 후기 고분 문화가 기마민족 문화와 유사성을 보인다는 점에 주목했다.[7][16] 그는 기마민족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에 침입하여 왜인을 정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했다고 주장했다.[7][16]

전기 고분 문화와 후기 고분 문화는 이질적이며, 후기 문화에서는 고분이 거대해지고 무구나 마구와 같은 부장품에서 기마 민족 문화와의 유사성이 나타난다.[7][16] 이러한 변화는 급격한 단절을 보이며, 동북아시아의 기마 민족이 한반도를 통해 일본 열도로 침입하여 왜인을 정복하고 지배하여 통일 국가를 수립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7][16]

위지왜인전에는 야마타이국에 소와 말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후기 문화에서는 말의 사육, 매장 사례, 형상 하니와의 말 등이 나타난다. 이는 기마 민족이 말을 데리고 대륙에서 건너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기 고분은 목관 또는 석관을 수혈식 석실에 안치하고 동경이나 동검 등 주술적이고 평화적인 부장품을 넣었지만, 후기 고분은 횡혈식 석실이 대세를 이루고 무구와 마구가 주된 부장품이 되는 등 무인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이 강해진다.[6]

에가미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화와 전승에 기마 민족의 요소가 많다고 보았다.[7] 특히 천손강림 설화는 천황가의 조상이 한반도에서 규슈 지방 북부에 도래하여 첫 번째 거점을 두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신무 천황 동정 설화는 그 세력이 북규슈에서 기나이로 진출하여 야마토 정권을 수립한 것을 나타낸다고 해석했다.[7][17]

427년 고구려 장수왕평양성으로 천도하고 한반도에 진출한 것과 같이,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북방 기마 민족이 남하하여 농경 민족을 지배하는 정복 왕조를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진왕도 기마 민족 출신으로 보이며, 이 계통을 잇는 임나왕이 스진 천황이고, 스진은 북규슈에서 "왜한 연합 왕국"의 주인이 되었다.[7][17] 5세기 왜왕이 등 중국 남조에 한반도 남부 지배권과 군사권을 주장한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7]

농경 민족은 보수적이고 정복 활동을 드물게 하지만, 기마 민족은 진취적이고 유연하며 이민족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정복 활동을 활발하게 한다.[7][20][21] 5세기 이후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에 출병하고 대륙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기마 민족이 창시한 국가임을 보여준다.[7][21]

2. 1. 에가미 나미오의 주장

에가미 나미오는 일본 민족의 형성과 일본 국가의 성립을 구별했다. 그는 일본 민족은 야요이 시대(弥生時代)의 농경민족에서 기원했지만, 일본의 통일국가인 야마토 조정은 4세기에서 5세기에 쑹화강(松花江) 유역 평원에 거주하던 부여(扶余) 계통의 기마민족이 한반도 남부를 정복하며 수립되었다고 보았다.[7][16]

에가미는 동북아시아의 반농(半農) 기마민족 중 일부가 남하하여 고구려가 되었고, 그 일부가 다시 "부여"라는 성을 쓰며 한반도 남부의 진국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또 그 일부는 백제로 현지에 남았지만, 일부는 가라(임나)를 기반으로 4세기 초에 쓰시마(対馬)・이키(壱岐)를 거쳐 규슈 북부(에가미는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의 히나타(日向)를 지쿠시로 비정)를 정복하여, 임나일본부를 왜왕의 직할지로 하는 "왜한(倭韓) 연합왕국"을 형성했다고 보았다.[7][17]

에가미에 따르면, 스진 천황고사기에 "하츠쿠니시라시미마키노스메라미코토", 일본서기에 "미마키이리히코이니에노스메라미코토"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임나(미마나) 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7][17] 이 세력은 5세기 초에 기나이(畿内)의 오사카 평야에 진출하여 야마토 조정을 성립시켰다.[7][8][16][17]

에가미는 5세기의 왜왕이 등 중국 남조의 여러 왕조에 대해 한반도 남부의 지배권과 군사권을 주장한 것은, 그들이 과거 삼한을 지배했던 진왕의 후예이며, 임나가 왜왕이 현실적으로 지배하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7] 또한, 그는 7세기 의 한반도 남부 진출(백강구 전투)로 야마토 정권이 기마민족의 왕조가 아니라 일본 땅에 예로부터 존재해온 전통적 왕조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고사기일본서기를 편찬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18]

에가미는 일반적으로 농경 민족은 보수적이고 정복 활동을 잘 하지 않지만, 기마 민족은 진취적이고 적극적으로 이민족 문화를 수용하며 정복 활동을 활발히 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5세기 이후 야마토 정권이 빈번하게 한반도에 출병하고 대륙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기마 민족이 창시한 국가임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7][20][21]

하지만 에가미 나미오가 주장하는 부여고구려백제 → 진왕으로 이어지는 남진 루트에 대해서는 여러 검토 과제가 남아있다.[15]

2. 2. 문화 습속상의 근거

倭人傳중국어에는 야마타이국(邪馬台国)에 "소나 말이 없다"고 기술되었고, 실제로도 야요이 시대에 일본에 소나 말이 존재했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6] 고분 시대 전기에도 말이나 소는 소수에 불과했을 것으로 보이며, 고분 시대 후기(5세기, 6세기)에 이르러 갑작스럽게 다수의 말 사육이 이루어졌다.[6] 말의 껴묻거리 매장이나 말을 닮은 하니와(埴輪)가 발견되기도 하는 등, 이는 말만 대륙에서 온 게 아니라 기마 문화와 그 생활에 익숙한 민족이 함께 들어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6]

고분 벽화나 하니와에 묘사된 복장, 말갖춤, 무기는 倭人傳중국어에서 묘사된 야마타이의 모습(사람은 전신에 얼굴까지 문신을 하고 위에 구멍을 낸 푸른 베를 쓰듯이 입는)과는 전혀 다르다. 이는 만주 등 대륙 기마민족이 가져온 한반도의 복식(하얀 옷에 허리띠를 두르고 말을 다루는)과 같으며, 만주 기마민족 호족(胡族)의 복식과 완전히 일치한다.

고분 시대 후기(4세기 말부터) 고분은 오진, 닌토쿠 능묘로 대표되는 장대한 것으로 변했다. 석실은 대륙이나 한반도에서 온 것이 틀림없는 횡혈식(横穴式)으로 바뀌었고, 껴묻거리도 무기나 말갖춤 등 실용품으로 변모했으며, 남녀나 말 모양을 한 하니와가 더해지는 등 장묘 문화에서 급격한 변화가 나타났다.[6]

2. 3. 문헌적 근거

에가미 나미오는 일본의 기기(記紀)나 중국의 《당서》(唐書) 등 다양한 문헌을 근거로 기마민족설을 주장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7]

  • 고구려어와 고대 일본어 사이에 유사한 단어가 많다.[7]
  • 기기(記紀)천손강림 설화와 신무동정(神武東征) 신화는 한반도에서의 규슈 정복과 기나이 진출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쿠시후루'의 '후루'는 한자어로 '마을'을 뜻하며, '쿠시후루'는 《일본서기》에 '소호리'로 되어 있는데, 이는 한반도에서 국가의 중심인 왕도를 의미한다. 또한, 고사기의 천손강림한 땅은 '가라쿠니', 즉 한반도 남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천신의 고향으로 해석하면 의미가 통한다. 거북이의 인도로 새로운 땅을 찾아 나라를 세웠다는 신무동정 신화는 고구려 등 한반도의 건국 신화와 일치하는 요소가 있다.[7]
  • 수서》, 《구당서》, 《신당서》 등의 중국 사서 기록을 통해 야마토 조정이 한반도 남부 진 왕조(秦王朝)의 후예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수서》에는 왜국이 진 왕조(秦王朝)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에는 "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으로 원래 작은 나라였던 일본이 왜를 병합하였다"고 하였고, 《신당서》에는 진무(神武) 이전의 일본 통치자가 "축자성(筑紫城)"에 있었고, 후에 야마토 지방을 다스리게 되었다고 하였다.[7]
  • 광개토대왕릉비에 보이는 왜군의 한반도 진출을 기마민족의 활동으로 해석했다.[7]
  • 왜왕 무(武)가 중국 남조의 유송 왕조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사지절도독왜신라백제임나가라진한모한칠국제군사(使持節都督倭・新羅・百済・任那・加羅・秦韓・慕韓七国諸軍事) 안동대장군(安東大将軍)으로 칭했는데, 당시 존재하지 않던 진한모한(마한) 등 과거 삼한의 국명을 더하고, 삼한 중 하나인 변한은 제외한 것은 변한이 왜왕이 실제로 지배하고 있던 임나 그 자체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를 근거로 왜왕은 과거 삼한을 지배했음을 중국 왕조에 주장한 것으로 해석했다.[17][19]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 중국・한국・일본의 사서 어디에도 "대륙에서 대한해협(현해탄)을 건너는 대규모 이동에 의한 정복"과 같은 사건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60]
  • 중국 사서에는 일본 국가를 기원전 1세기부터 7세기에 걸쳐 일관되게 "왜"로 표기하는 등 연속성이 보인다.[60]

3. 학설에 대한 반론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에 대한 주요 반론은 다음과 같다.


  • 고분 시대 전기(3세기~4세기)와 중·후기(5세기 이후) 사이에 문화적 단절이 보이지 않고, 강한 연속성이 확인된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제시되었다.[23][24][27]
  • 중국, 한국, 일본의 사서 어디에도 기마민족의 대규모 이동이나 정복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 지적되었다.[28]
  • 일본 황실의 전통 제의나 전승에서 말 사육의 유래를 찾기 어렵고,[29] 일본 고유의 전방후원분한반도중국 대륙의 고분과 형태가 다르다는 점[32] 등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반론들은 고고학적, 역사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의 핵심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3. 1. 고고학적 반론

고분 시대의 전기(3세기~4세기)와 중·후기(5세기 이후) 사이에 문화의 단절이 보이지 않고, 강한 연속성이 인정된다는 점이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된다.[23][24][27] 5세기 무덤은 많은 해자를 가지고 철제 도구와 무기를 부장했지만, 청동 거울은 더 적게 발견되었고 더 많은 도구가 나타났다. 이는 지배층의 지위 상징의 변화를 보여준다.[3]

많은 일본 고고학자들은 말 관련 유물이 5세기 초의 고분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늦게 나타난다고 지적한다.[3] 역사학자들은 중앙아시아 민족에 대한 지나친 초점과 역사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3] 간토 지방규슈에서 마구와 재갈이 출토되었지만, 이는 전투용이 아닌 일반적인 승마용이거나 소유자의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과시하는 위신재로밖에 생각할 수 없으며, 이것으로 정복이 있었다고 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33]

5세기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갑옷의 대부분은 말 위에서의 착용에 적합하지 않은 보병전용 단갑을 주로 한 조합이며, 초기의 마구는 장식적인 요소가 짙고 실전용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점도 지적된다.[24][27]

일본 고유의 고분 형식인 전방후원분은 3세기 후반에 기나이에서 발생한 것이 분명하며, 한반도중국 대륙에는 이에 상당하는 고분이 존재하지 않고, 4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 최성기를 맞이하여, 6세기에 이르기까지 분형과 분포에 특히 두드러진 단절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의 왕권이 기나이를 발상지로 하는 토착 세력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부장품도 정복을 나타내는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이 강조된다.[32]

야요이 시대의 일본에 벼가 전해져 벼농사와 쌀밥이 시작되었지만, 식용 가축은 따르지 않았고, 그 후에도 유축 농업이 보이지 않았다. 식용 가축을 사육함으로써 그 고기나 우유를 이용하거나, 유제품과 마유주를 만드는 등의 식체계도 결여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된다.[34] 근세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는 말이나 양의 수컷을 거세하는 등 가축의 관리·품종 개량을 하는 축산민적인 문화나 습관이 거의 없었고,[34] 자동차 사용 등 기마 민족의 많은 사람들에게 특징적으로 보이는 습관·기술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도 반론의 근거로 제시된다.[34]

3. 2. 역사학적 반론

에가미 나미오의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에 대해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여러 반론이 제기되었다. 연대기와 증거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외래 유물의 존재가 곧 군사적 정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비판이 있었다.[5] 특히 5세기 초의 고분에서 말 관련 유물이 늦게 나타난다는 점을 들어 이 이론에 반대하는 고고학자들도 많다.[3]

역사학자들은 중앙아시아 민족에 대한 지나친 초점과 역사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3] 또한, 급격한 변화보다는 느린 문화적 상호작용이 더 타당하며, 국가는 단 하나의 정복 사건이 아닌 문화적 변화를 통해 형성되었다는 견해도 제시된다.[3] 5세기의 변화가 큐슈와의 갈등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로 인해 한반도와의 새로운 교역이 이루어졌다는 주장도 있다.[3]

침략이나 정복 없이 한반도 해협을 건너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 연결성을 제안하는 역사학자들도 많다. 기원전 300년경 한국에서 일본으로의 이주가 문화적, 기술적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을 들어, 한국과 일본 사이의 분리보다는 문화적 연결을 강조한다.[5]

몇몇 학자들의 구체적인 비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이사하야 나오토는 고분 시대 중기에 일본 열도에 말과 기마 풍습이 전래된 것은 사실이나, 그 배경에 단일 기마민족에 의한 정복 활동은 없었다고 단언한다.[25]
  • 오카다 히데히코는 기마민족설을 "완전한 판타지"이자 "어떠한 사적 근거도 없는 에가미 나미오가 창작한 새로운 신화"라고 비판한다.[43]
  • 스즈키 야스미는 기마민족설이 야마토 왕권의 조선 지배지에 놓인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긍정하고, 야마토 왕권이 왜한 연합 왕국, 즉 일본의 부(府)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어 의문을 제기한다.[52]
  • 사하라 마코토는 에가미의 "기마민족" 개념이 매우 융통무애하여 자의적으로 변경할 수 있다고 비판하며, 기마민족설은 "쇼와의 전설"이라고 언급한다.[55]
  • 오카우치 미마는 에가미가 기마민족의 일본 침입 및 정복, 정복 왕조 수립 과정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61]
  • 타나카 타쿠는 기마민족이 국가를 형성, 경영할 능력이 있는 우수한 민족이고 농경민은 열등하다고 단정하는 에가미의 관점이 특정 인간 집단을 차별하는 사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비판한다.[62]
  • 오노야마 세츠는 기마민족설이 제국주의 전성기 독일의 선사 고고학이나 전전 오스트리아의 문화권 학파 인류학의 발상과 수법을 무비판적으로 채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22]


이러한 비판들은 주로 방법론상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즉, 기기(記紀)의 전승이나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는 점, 고분 문화의 변화를 곧바로 이민족에 의한 정복으로 연결하는 점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7]

한편, 에가미가 주장한 부여고구려백제 → 진왕으로 이어지는 남진 루트에 대해서는 여러 검토 과제가 남아 있다. 부여, 고구려, 백제가 모두 기마민족과 관련이 없거나, 진왕이 일본 열도에 건너는 기반을 형성한 군주로 보기 어렵다는 점 등이 지적된다.[68]

일본 열도에서의 고분 시대 중엽의 변화는 급격한 변화가 아니라 점진적인 것이었다.[15][27] 대규모 전방후원분 역시 한반도 기원이 아니라 나라 분지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69][70][71][72][73]

결론적으로,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은 여러 학문 분야에서 다양한 비판을 받고 있으며, 특히 방법론상의 문제점이 크다고 지적된다. 하지만, 그 시야의 넓이와 학제적인 성격은 앞으로도 계승하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7]

4. 학설에 대한 비판

에가미 나미오의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은 발표 직후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일본 고고학계는 에가미의 설을 지지하는 학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비판적이었다.[7][8][10][15]

초기 기마민족설은 4세기 초에 스진 천황이 한반도에서 규슈를 거쳐 기나이로 진출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는데, 고바야시 유키오는 1951년 논문에서 4세기에는 일본 열도 내에서 승마 풍습이 확인되지 않으며, 5세기 초가 상한선이라고 지적하여 에가미의 주장을 반박했다.[7][22] 또한 고바야시 유키오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전기 고분 문화와 중기 고분 문화 사이에 급격한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정복설을 비판했다.[7][22][23][24] 이토 노부오는 5세기 이후에도 전방후원분 조영이 계속 성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적 단절이 없음을 지적했다.[22][24]

그 외에도 에가미 설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일본 고분에서 출토되는 초기 마구는 실전용이 아닌 장식적인 성격이 강하고, 5세기 고분에서 출토되는 갑옷도 대부분 보병용이라는 점,[22] 기마민족 정복이 사실이라면 대륙의 새로운 언어가 유입되었어야 하는데 그 흔적이 없다는 점,[22] 전통적인 일본 문화에 기마민족에게서 흔히 보이는 가축의 고기나 젖 이용, 거세, 동물 희생, 수레 사용 등의 습관이 없다는 점 등이 지적되었다.[8][22]

역사학계에서도 에가미 설에 대한 반응은 대부분 부정적이었다.[7] 다만, 1952년 미즈노 유가 발표한 왕조 교체설은 에가미의 기마민족설과 유사한 부분이 있어, 이노우에 미쓰사다는 미즈노의 설을 "네오 기마민족설"이라고 부르며 비판적으로 계승하기도 했다.[7][8]

에가미는 이러한 비판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학설을 수정, 보완하여 1964년과 1967년에 관련 논문과 저서를 발표했다.[7] 그는 기마민족이 농경민족보다 진취적이고 유연하며 적응성이 뛰어나 일본 원주민의 환영을 받으며 평화적으로 진출했고, 피정복민의 언어와 묘제 등을 채용했다고 주장했다.[22] 또한 정복자의 수는 매우 적었고, 기병뿐 아니라 보병도 동행했으며, 거세를 하지 않는 기마민족도 있었다고 덧붙였다.[22]

그러나 에가미의 이러한 해명은 논점을 흐리고 반증 불가능한 가설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야스모토 미텐은 에가미의 설을 "호리병 메기 구조를 가진 설"이라고 평가하며, 불리한 증거가 제시될 때마다 빠져나갈 구멍이 마련되어 있다고 지적했다.[22][57]

4. 1. 학문적 비판

사와라 마코토는 에가미 나미오의 기마민족설을 "쇼와의 전설"이라고 부르며 비판했다.[8][22] 다나베 쇼조는 이 설이 시대적 요청으로 태어난 산물이며, 학설로서 정면으로 거론할 단계가 아니라고 평가했다. 오쓰카 하쓰시게는 많은 고고학자들이 이 가설에 부정적이었지만, 아시아 대륙에서의 민족 흥망론에 대한 낭만적 인식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오카우지 미쓰자네는 에가미가 기마민족의 일본 침입과 정복 왕조 수립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다나카 미나쿠는 기마민족을 우수한 민족, 농경민을 열등한 민족으로 단정 짓는 위험성을 지적했다. 모리 마사오는 이 설에 대해 많은 일본 역사학자들이 비판적이지만, 이노우에 미쓰사다처럼 높이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고 언급했다.[7][8] 도코로 이사오는 스케일이 큰 가설에 불과하며, 불명확한 점이 많아 정설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스즈키 야스미는 기마민족설이 야마토 왕권의 한반도 식민지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긍정하는 등 학문적 진보와 거리가 멀다고 비판했다.

기마민족설에 대한 주요 반론은 다음과 같다.

  • 고분 시대 전기(3~4세기)와 중·후기(5세기 이후) 사이에 문화의 단절이 보이지 않고 강한 연속성이 인정된다.[23][24][27]
  • "대륙에서 쓰시마 해협을 건너 대이동에 의한 정복"이라는 큰 사건에도 불구하고, 중국·조선·일본의 사서 어디에도 그 기재가 없다.[28]
  • 기마 민족이라는 황실의 전통 제사나 전승에 말과 가축에서 유래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29]
  • 일본에서의 승마 풍습의 시작은 5세기 초가 상한이며, 이후 말의 사육, 마구의 국산화가 진행되어 기마 풍습이 일반화된 것은 5세기 말 이후로 보인다.[23]
  • 5세기 고분에서 출토되는 갑옷의 대부분은 말 위에서의 착용에 적합하지 않은 보병전용 단갑이며, 초기의 마구는 장식적인 요소가 강해 실전용이라고 보기 어렵다.[24][27]
  • 고고학적 성과에서는 전방후원분, 전방후방분, 원분, 방분이 평화적 질서 속에 공존하면서 전방후원분이 탁월한 모습을 보인다.[30]
  • 일본 고유의 고분 형식인 전방후원분은 3세기 후반에 기나이에서 발생했으며, 한반도나 중국 대륙에는 이와 유사한 고분이 존재하지 않는다.[32]
  • 야요이 시대 일본에 벼농사가 시작되었지만, 식용 가축은 따르지 않았고, 그 후에도 유축 농업이 보이지 않았다.[34]
  • 근세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는 말이나 양의 수컷을 거세하는 등 가축 관리·품종 개량을 위한 축산 문화나 습관이 거의 없었다.[34]
  • 북아메리카의 선주민이 스페인인이 가져온 말을 수용하자 곧 강력한 기마 민족이 된 사례도 있다.[36]
  • 왜왕 무의 상표문에는 일본 열도 외부에서의 정복을 전혀 주장하지 않는다.
  • 유전자 조사에서 일본인 고유 유전자는 D2 계통이며, 도래인에게서 보이는 O2 계통 유전자는 강남 계통으로, 어느 쪽도 기마 민족 계통이라고 할 수 없다.
  • 일본어의 기본 어휘 중에는 만주 지역이나 한국어의 어휘는 거의 없다.
  • 에가미는 스진 천황이 임나왕이며 일본 건국의 왕이라고 주장하지만, 스진 천황에게는 임나(가라)·북큐슈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37]


고바야시 유키오는 4세기 단계에서는 일본 열도 내에서 승마 풍습이 인정되지 않고, 기껏해야 5세기 초가 상한이라는 점을 지적했다.[7][22] 전기 고분 문화와 중기 고분 문화 사이의 변화가 정복을 상정할 만큼 급격한 것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었다.[7][22][23][24] 이토 노부오는 5세기 이후에도 전방후원분 조영이 더욱 성행하여 단절이 없음을 지적했다.[22][24]

에가미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기마민족은 농경민족과 달리 진취적이고 유연하며 적응성이 높아 일본 원주민의 "환영"을 받아 "평화적"으로 진주했고, 피정복자인 왜인의 언어나 묘제 등도 채용했다고 주장했다.[22] 또한 정복자 수는 극소수였고, 기병뿐 아니라 보병도 따랐으며, 기마민족 중에는 거세를 하지 않는 부족도 있어 일본에 그러한 습관이 없다는 점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22] 이러한 에가미의 주장은 야스모토 미텐에게 "호리병 메기 구조를 가진 설"이라고 평가받았다.[22][57]

1952년 미즈노 유는 '삼왕조 교체설'을 통해 스진 천황을 시조로 하는 스진 왕조, 닌토쿠 천황을 시조로 하는 닌토쿠 왕조, 게이타이 천황을 시조로 하는 신왕조의 세 왕조가 혈연 관계없이 교체되었다고 주장했다.[8][63] 이노우에 미쓰사다는 미즈노의 설을 "네오 기마민족설"이라고 명명했지만, 미즈노는 닌토쿠 왕조를 규슈에서 야마토로 이동한 '정복 왕조'로 규정하면서도 기마 민족·기마 문화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65]

4. 2. 방법론적 비판

오노야마 세츠는 기마민족설이 제국주의 시대 독일의 선사 고고학이나 전전 오스트리아의 문화권 학파 인류학의 방법론을 무비판적으로 채용했다고 지적했다.[5] 문화 변화를 즉시 민족 이동이나 정복과 결부시키고, 지역 문화의 내재적 발전 가능성을 경시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5] 기마민족은 진취적, 농경민은 보수적이라는 유형화된 인식의 문제점이 지적되었다.[5]

고바야시 유키오는 4세기 단계에서는 일본 열도 내에서 승마 풍습이 인정되지 않고, 그 풍습은 기껏해야 5세기 초가 상한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초기 기마민족설을 비판했다.[7][22] 전기 고분 문화와 중기 고분 문화 사이의 변화가 정복을 상정하게 하는 급격한 것이 아니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7][22][23][24] 이토 노부오는 5세기 이후에도 전방후원분 조영이 더욱 성행하여 아무런 단절이 없음을 지적했다.[22][24]

일본 고분에서 출토된 초기 마구는 장식적인 요소를 가진 위신재이며 실전용이라고 할 수 없고, 5세기 고분에서 출토되는 갑옷의 대부분은 말 위에서의 착용에 적합하지 않은 보병 전용이라는 지적도 있었다.[22] 언어 문제에서는 기마민족의 정복이 사실이라면 대륙의 새로운 언어가 다수 도입되었을 텐데, 그 흔적이 없다는 의문이 제기되었다.[22] 사하라 마코토는 전통적인 일본 문화에 가축의 고기나 이용, 거세, 동물 희생, 수레 사용 등 기마민족에 특징적인 습관이나 기술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했다.[8][22]

에가미 나미오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기마민족은 농경민족과 달리 진취적인 기질에 풍부하고 유연하며 적응성이 높아 일본 열도에 살던 원주민의 "환영"을 받아 "평화적"으로 진주했고, 반면 정복지에서 피정복자인 왜인의 언어나 묘제 등도 채용했다고 반박했다.[22] 또한, 정복자의 절대 수는 극소수이고 기병뿐 아니라 보병도 따랐으며, 기마민족 중에는 거세를 하지 않는 부족도 있으므로 일본에 그러한 습관이 남지 않은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22] 이러한 주장은 야스모토 미텐에게 "호리병 메기 구조를 가진 설"이라고 평가받았으며, "반증 불가능한 가설"로서 "과학" 범주에서 제외되는 계기가 되고 있다.[22][57]

5. 현재의 기마민족설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은 고분 시대 중엽의 변혁을 대륙에서 건너온 기마민족의 정복으로 설명하려 했으나, 여러 반론과 비판에 직면하여 현재는 주류 학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15]

일본 열도에서 고분 시대 중엽의 여러 변화는 급격한 것이 아니라 매우 점진적이었다.[15][27] 미즈노 유는 1952년 삼왕조교체설을 통해 온건한 기마민족설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에가미 나미오의 학설과는 차이가 있다. 우에다 마사아키오진, 닌토쿠 양 천황의 시대를 신왕조로 보는 견해는 어떤 의미에서는 에가미의 설을 승인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427년 고구려장수왕국내성(현재의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서 평양성(현재 북한의 수도)으로 수도를 옮기고 한반도에 진출했다.[75] 기마민족 정복 왕조설을 부정하는 시각에서는, 5세기 이후 야마토 조정이 대륙의 새로운 문물과 문화를 수용한 것은 고구려의 남하 정책 등 국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한반도에 출병하고 한반도 남부의 자원을 확보하려는 의식적이고 선택적인 변화였다고 본다.[75]

오바야시 다료 등은 일본 신화와 전설을 베트남, 한반도, 미얀마, 스리랑카 등의 신화와 비교하여 그 독립성을 지적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왕가의 시조가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4월 병진일에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는 등, 베트남이나 한반도에서는 중국과의 관련성을 통해 역사의 유구함을 강조했지만, 일본은 고천원에 왕권의 기초를 두는 등 대륙과의 관련성을 찾지 않았다.[77] 한편, 최근 유전자 연구에서는 유라시아 스텝알타이 제어 기마 민족에게서 고빈도로 보이는 Y염색체 해플로 그룹 C-M86이 동일본에서는 0%이지만, 규슈도쿠시마에서 각각 3.8%, 1.4% 확인되어,[78]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기마 민족" 계통의 소규모 유입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2002년 요미우리 신문은 기마민족설이 "쇼와의 전설"이 되었지만, 에가미 나미오의 학자로서의 진가는 일본 고고학에 해외 조사로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 있다고 보도했다.[79]

5. 1. 기마민족설의 수용과 영향

기마민족설은 일본 고대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테즈카 오사무의 만화 『불새 여명편・야마토 편』 등 대중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41]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황국사관이 부정되면서, 건국 신화의 배경에 숨겨진 사실을 찾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일본 황실의 조상이 대륙에서 왔다는 에가미 나미오의 학설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42]

오카다 히데히로는 기마민족 정복 왕조설이 널리 퍼진 이유로, 한국 전쟁 직전의 시대적 상황과 일본인의 정체성 문제, 메이지 시대 이래 신화 해석의 연장선, 서유럽 역사와의 비교를 통한 일본사의 설명 등을 들었다.[43]

한편, 한국과 북한에서는 기마민족설이 자민족 중심주의 역사관과 일치하여 매우 호의적으로 수용되었다.[42] 일본의 고대 문화가 한반도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은 민족주의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다.[42] 북한에서는 1995년에 에가미 나미오의 원저를 바탕으로 한 "기마 민족 국가"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김일성 훈장을 수여하고 학습 자료로 활용하기도 했다.[44] 2009년에는 오자와 이치로가 서울의 국민대학교 강연에서 기마민족 정복설을 역사적 사실로 소개해 국내에서 큰 관심을 받았다.[45]

1980년대 이후 한국 남부의 가야 지역에서 기마 민족적 요소를 가진 유물이 발견되면서 기마민족설은 다시 주목받았다.[7][42] 에가미 나미오는 1992년 저서에서 이나리야마 고분 출토 철검 명문의 계보 기재 방식, 부산광역시동래구복천동 고분군, 경상북도고령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등의 발굴 성과를 근거로 자신의 학설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했다.[46][47]

그러나 일본 내에서는 에가미 나미오의 학설에 대한 비판이 많았고, 학계의 주류 학설로 자리 잡지 못했다.[7][8][10][15]

5. 2. 현대적 의의와 한계

기마민족설은 일본 고대사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여러 학문 분야를 아우르는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에가미 나미오의 학설은 패전 후 침체된 일본인들에게 활력을 주었으며, 일본 고고학에 해외 조사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25][79]

그러나 기마민족설은 문헌 자료와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고, 방법론적으로도 문제점을 드러내 학설로서의 한계를 보였다. 특히, 민족주의적 해석의 위험성과 역사 왜곡의 가능성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몇몇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비판을 제기했다.

  • 오카다 히데히코: "완전한 판타지이며, 어떠한 사적 근거도 없다"고 비판했다.[43]
  • 스즈키 야스미: 야마토 왕권의 조선 지배를 긍정하는 등 학문의 발전과 무관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52]
  • 사하라 마코토: 기마민족의 개념이 자의적이며, 기마민족설은 "쇼와의 전설"이라고 평가했다.[55]
  • 오카우치 미마: 에가미가 기마민족의 일본 침입 및 정복 왕조 수립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61]
  • 타나카 타쿠: 기마민족 우월, 농경민 열등과 같은 차별적 사상으로 이어진다고 비판했다.[62]
  • 오노야마 세츠: 제국주의 시대의 방법론을 무비판적으로 채용했다고 지적했다.[22]


이 외에도 많은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 기마민족설의 연대기, 증거, 해석 등에 문제를 제기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3][5][50][51][25][55][58][59][60]

그러나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마민족설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25]

6. 결론 및 한국의 관점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은 일본 학계에서 제기된 가설로, 현재는 학계에서 주류 이론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가설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한국 고대사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주었다.

이 가설은 한국의 고대 국가 형성에 북방 기마민족의 역할이 컸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는 한국 고대사가 독자적으로 발전했다는 기존의 인식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며, 한국사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일부에서는 이 가설을 통해 한국사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강조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 가설이 한국 고대사를 왜곡하고 식민사관의 잔재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러한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한국 고대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공존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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