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유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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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유대인은 독일 땅에 정착한 유대인들을 지칭하며, 고대 로마 시대부터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세 시대에는 쾰른, 마인츠 등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번성했지만,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으로 인한 박해를 겪었다. 신성 로마 제국 시대에는 법적 지위가 불안정했고, 15세기에는 박해가 심화되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는 모세스 멘델스존의 영향으로 유대인 해방 운동이 일어났고, 19세기에는 개혁 유대교 운동이 시작되었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반유대주의가 다시 나타났고, 1871년 독일 통일 이후 법적 평등을 얻었지만 사회적 차별은 지속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반유대주의는 더욱 심화되었다. 나치 시대에는 홀로코스트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에는 소수의 유대인만 남았다.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구소련 출신 유대인들의 이민이 증가하며 유대인 공동체가 성장했고, 현재 독일에는 2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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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유대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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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독일어 | Deutsche Juden (도이체 유덴) |
히브리어 | יְהוּדִים גֶּרְמָנִים (예후딤 게르마님) |
이디시어 | דײַטשע ייִדן (다이체 이든) |
위치 | 독일 이스라엘, 미국,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영국 |
사용 언어 |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히브리어 이디시어 기타 |
종교 | 유대교 불가지론 무신론 기타 |
관련 민족 | 아슈케나즈 유대인 세파르디 유대인 미즈라히 유대인 이스라엘인 |
인구 | |
추정 인구 | 116,000 ~ 225,000명 |
역사 | |
기원 | 1700년 전 독일에서 유대인 생활 시작 |
중세 | 마겐차의 마법의 땅: 중세와 현대 마인츠의 유대인 생활과 시대 1346~1353년 흑사병 당시 독일 유대인 박해 |
홀로코스트 | 1939~1945년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독일 유대인 |
현대 | |
유대인 생활 | 베를린에서 정통 유대인 생활이 다시 활발해짐 |
홀로코스트 부인 | 독일에서 홀로코스트 부인은 용납되지 않음 |
네오나치 | 독일에서 네오나치 급증 경고 |
2. 고대와 중세 시대
중세 독일에서는 반유대주의가 만연했다. 특히 1348년부터 1350년까지 흑사병이 유행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폭력은 더욱 심해졌다. 유대인 거주 지역의 약 72%가 폭력적인 공격을 받았다.[113]
흑사병으로 인한 포그롬을 겪은 지역은 1920년대에 반유대주의 폭력에 연루될 확률이 6배나 높았다. DNVP, NSDAP, DVFP와 같은 인종차별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정당들은 1928년 선거에서 1.5배의 득표율을 얻었으며, 이 지역 주민들은 슈트러머와 같은 반유대주의 신문에 더 많은 편지를 쓰고, 나치 치하에서 더 많은 유대인을 추방했는데, 이는 문화적 전승 때문으로 여겨진다.[113]
니코 보이틀렌더와 한스조아힘 보트의 연구에 따르면, 나치 치하에서 성장한 독일인들은 이전 또는 이후 세대보다 반유대주의 성향이 더 강했으며, 나치의 반유대주의 세뇌는 기존의 반유대주의가 만연한 지역에서 더 효과적이었다.[114]
비신과 베르디에는 아이들이 부모를 모방하여 선호도를 얻고, 부모는 이러한 특성이 유용한지 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의 선호도에 따라 아이들을 사회화하려 한다고 주장하며, 문화적 전달과 태도의 지속성에 대한 간단한 모델을 제시했다.[115]
한자 동맹과 같이 무역이 개방된 도시에서는 외부인에 대한 증오가 더 큰 대가를 치르게 했다.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들은 반유대주의적 태도의 지속성이 덜했는데, 이는 무역 개방이 더 큰 경제적 성공과 연관되어 이주율이 높았기 때문일 수 있다.[113]
2. 1. 로마 시대부터 십자군 시대까지
독일 땅에 유대인이 처음 정착한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대 로마인들이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마그나 게르마니아라고 불렀던 지역에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321년 라인강의 쾰른에서 발견된 문서는 이 지역 유대인 공동체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12][13][14][15] 이 문서는 당시 유대인들의 법적 지위가 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과 동일했음을 보여준다. 유대인들은 일부 시민적 자유를 누렸지만, 종교 전파, 비유대인 노예 소유, 공직 수행에는 제한을 받았다.[11]
유대인들은 농업, 무역, 산업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으며, 점차 고리대금업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게르만족의 부르군트 왕국과 프랑크 왕국 초기에는 기독교 교회의 영향력이 크지 않아 유대인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메로빙거 왕조 통치자들은 종교적 광신주의가 없었고, 교회가 유대인의 지위를 제한하려는 시도에 거의 지원을 하지 않았다.
샤를마뉴 (800–814)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제국 통합에 활용했지만, 교회법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그는 유대인들을 외교적 목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는데, 일례로 아바스-카롤링거 동맹의 하룬 알-라시드에게 보내는 사절단에 통역과 안내를 맡는 유대인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고리대금업에 대한 교회의 금지 조치로 인해 유대인들은 독점적인 대출업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는 카롤링거 제국 내에서 유대인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유대인들은 자본 때문에 필요했지만, 동시에 그들의 사업은 평판이 좋지 않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상황은 유대인들의 영향력을 키웠고, 그들은 구 작센과 튀링겐 공작령을 포함한 전국 각지에 정착했다. 쾰른 외에도 마인츠, 보름스, 슈파이어, 레겐스부르크, 아헨 등지에 초기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샤를마뉴의 후계자인 경건왕 루이 시대에도 유대인들의 지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상업 활동에 제한이 없었지만, 비유대인보다 높은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정부는 유대인의 특권을 보호하기 위해 '유덴마이스터(Judenmeister)'라는 특별 관리를 임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기 카롤링거 왕조는 교회의 요구에 점차 굴복했고, 주교들은 시노드에서 교회법 시행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그 결과,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을 불신하게 되었고, 이러한 감정은 군주와 백성 모두에게서 나타났다. 10세기부터 성주간은 반유대주의 활동이 증가하는 시기가 되었지만, 작센 황제들은 유대인들을 특별히 박해하지 않았고, 다른 상인들과 동일한 세금을 징수했다.
당시 독일 유대인들은 세속 학문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히브리어 기도문과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1000년경부터 할라카 연구가 번성하기 시작했다. 라브 게르숌 벤 유다는 메츠와 마인츠에서 가르침을 펼치며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그는 지혜, 겸손, 경건의 모범으로 묘사되었으며, 후대에 "유배의 빛"으로 불리게 되었다.[19] 유대 백과사전 (1901–1906)은 그가 독일 유대인들의 종교 문헌 연구를 자극하여 토라와 탈무드에 대한 헌신을 이끌어냈고, 이는 십자군 시대 유대인 공동체가 보여준 강인한 정신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강조한다.[20]
2. 2. 문화적, 종교적 중심지로서의 번성
슈파이어, 보름스, 마인츠의 유대인 공동체는 중세 시대 유대인 생활의 중심지가 된 도시 연맹을 형성했다. 이들은 히브리어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ShUM 도시라고 불렸다. 슈파이어는 신(''Shpira''), 보름스는 바브(''Varmaisa''), 마인츠는 멤(''Magentza'')이다. ''Takkanot Shum''( תקנות שו"ם|타카노트 슘he "ShUM의 법령")은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들이 수십 년에 걸쳐 제정하고 합의한 일련의 법령이었다.[21]마인츠 시 공식 웹사이트에 따르면, 마인츠의 오랜 역사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시대 중 하나는 900년대 초부터였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는 마인츠와 중서부 유럽 대부분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 그 후 400년 동안 마인츠는 무역이 번성하면서 많은 유대인을 끌어들였다. 가장 위대한 유대인 교사들과 랍비들이 라인강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가르침, 대화, 결정 및 영향력은 마인츠와 라인강을 따라 있는 인근 마을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서유럽 – 아슈케나지 또는 게르만 – 유대교는 바빌로니아 전통에서 벗어나 마인츠를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10세기에 게르솜 벤 유다에 의해 예시바가 설립되었다.[21]
역사가 존 맨은 마인츠를 "유럽 유대인의 수도"라고 묘사하며, 게르솜 벤 유다가 "서유럽에 탈무드의 사본을 처음 가져온 인물"이며 그의 지침이 "유대인들이 유럽의 관습에 적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언급했다.[21] 게르솜의 학교는 유명한 성경 학자 라시를 포함하여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들을 끌어들였다.[22] 14세기 중반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유대인 공동체를 가지고 있었는데, 약 6,000명이었다.[21] 마인츠시 웹사이트는 지역 주교들이 유대인을 보호하여 무역과 번영이 증가했기 때문에 황금기였다고 밝히고 있다.[21]
2. 3. 십자군 전쟁과 박해 (1096-1349)
제1차 십자군은 독일, 특히 라인란트에서 유대인 박해 시대를 열었다.[23] 트리어, 보름스, 마인츠, 쾰른 공동체가 공격을 받았다. 슈파이어 유대인 공동체는 주교에 의해 구원받았지만, 보름스에서는 800명이 살해되었다. 1096년 5월에서 7월 사이에 라인 지방 도시에서만 약 12,000명의 유대인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체 훼손, 의례 살인, 우물 독살, 반역과 같은 혐의로 수백 명이 화형에 처해지고 수천 명이 추방되었다.
유대인들은 몽골의 유럽 침략을 초래했다고 비난받았지만,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받았다. 1298년 린트플라이슈 학살 동안 심한 박해를 받았으며, 1336년 알자스 유대인들은 아르놀트 폰 우이시그하임의 무법자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독일의 흑사병이 1348–49년에 유럽을 휩쓸었을 때, 일부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인들이 우물을 독살했다고 비난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남부와 서부에 비해 박해는 신성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에서 덜 심각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49년 에르푸르트 학살에서 흑사병에 대한 미신 때문에, 전체 유대인 공동체 구성원들이 살해되거나 도시에서 추방되었다. 많은 박해는 왕위 위기와 비텔스바흐 가문 - 룩셈부르크 가문의 이원론에 의해 분명히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최근 독일 연구에서는 “Thronkrisenverfolgungen(왕위 위기 박해)”이라는 용어를 제안했다.[24] 왕실 정책과 유대인에 대한 대중의 양면성은 독일어권 지역에서 동쪽으로 도망치는 박해받는 유대인들이 유럽 전체에서 가장 큰 유대인 공동체의 기반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3. 신성 로마 제국 시대
일반 계몽주의 시대(1600년대에서 1700년대 후반) 동안 많은 유대인 여성들이 비유대인 살롱을 자주 방문하고 해방 운동을 시작했다. 서유럽과 독일 국가에서는 유대교 율법인 ''할라카''(Halakha) 준수가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18세기에 의사이자 ''마아세 투비야(Ma'aseh Toviyyah)''의 저자인 토비아스 b. 모세스 코헨(Tobias b. Moses Cohn)과 같은 일부 전통적인 독일 학자들과 지도자들은 세속 문화를 높이 평가했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독일의 ''Aufklärung''이었는데, 이는 서유럽 최고의 작가, 학자, 지식인들과 경쟁할 수 있는 토착 인물들을 자랑할 수 있었다. 언어와 복장의 외형과는 별개로, 유대인들은 독일 사회의 문화적, 지적 규범을 내면화했다. 독일 또는 베를린 하스칼라로 알려지게 된 이 운동은 독일 사회의 도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740년대 초부터 많은 독일 유대인과 일부 개별 폴란드 및 리투아니아 유대인들은 세속 교육에 대한 열망을 품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의 독일-유대인 계몽주의, 즉 ''하스칼라''(Haskalah)는 유럽 유대인의 정치적, 사회적, 지적 변화를 근대성으로 이끄는 전환점을 표시한다. 유대 사회의 엘리트 구성원 중 일부는 유럽 언어를 알고 있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절대주의 정부는 유대 공동체의 지도력에서 권한을 빼앗았고, 많은 유대인들이 '궁정 유대인'(Court Jew)이 되었다. 이들은 유대인 사업가들과의 연계를 이용하여 군사 계약자, 조폐국 관리자, 신규 산업 창업자 등으로 활동하며 궁정에 귀중한 보석과 의류를 제공하면서 지역 통치자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제공했다. 궁정 유대인들은 통치자들의 보호를 받았고,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언어, 태도, 유럽 문학과 사상에 대한 인식을 나타냈다.
아이작 유첼은 새로운 세대의 유대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독일 ''하스칼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하-메/아세프''(Ha-Me/assef)의 창립 편집자 중 한 명이다. 유첼은 프로이센의 중심지인 베를린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생활하면서 유럽 언어와 문화를 접했고,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계몽주의의 교육적 관심을 증진하는 데 힘썼다. 또 다른 계몽주의 사상가인 모세 멘델스존은 정통 유대교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세속 문화를 처음으로 소개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이성을 중시했고, 모든 사람이 논리적으로 종교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유대교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율법의 신성한 계시라고 주장했다.
멘델스존의 유대교에 대한 헌신은 계몽주의 철학을 따르는 사람들조차 긴장을 유발했다. 그의 합리주의적 사상보다 유대교에 대한 그의 고수에 덜 반대하는 충실한 기독교인들은 이 ''베를린 유대인''(Juif de Berlin)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서유럽 대부분에서 ''하스칼라''는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동화되면서 끝났다. 많은 유대인들이 유대교 율법을 지키는 것을 중단했고, 독일에서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유럽 유대인의 미래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으며, 결국 미국 이민과 시온주의로 이어졌다. 러시아에서는 반유대주의가 ''하스칼라''를 종식시켰다. 일부 유대인들은 이러한 반유대주의에 대해 해방 운동을 펼치거나, 혁명 운동에 참여하고 동화되거나, 시온주의 힙바트 시온 운동(Hovevei Zion)의 형태로 유대 민족주의로 전환함으로써 대응했다.[27]
3. 1. 법적, 시민적 지위의 변화
신성 로마 제국 시대에 유대인들은 법적, 시민적 지위에서 변화를 겪었다. 신성 로마 황제는 제국 내 모든 유대인에 대한 소유권과 보호권을 주장하며 이들을 어느 정도 보호했지만, 이는 세금 징수를 위한 목적이 더 컸다. 황제들은 유대인에게 다양한 종류의 세금을 부과했는데, 루이 4세는 1342년 "황금 희생 펜스"를 제정하여 모든 유대인이 재산에 따라 매년 세금을 납부하도록 했다.룩셈부르크 왕가의 황제들은 유대인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벌금을 부과하는 특권을 제국 내 제후와 자유 도시들에게 판매하여 유대인에 대한 권한을 강화했다. 카를 4세는 1356년 금인칙서를 통해 이 특권을 7명의 선제후에게 부여했다.
이후 독일 유대인들은 황제의 권한에서 소규모 군주와 도시의 권한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보호를 약속받고 추방되었던 지역으로 돌아오라는 초대를 받았지만, 재산을 모으면 다시 약탈당하고 쫓겨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벤체슬라우스 황제는 유대인의 부채를 무효화하는 대가로 도시, 영지, 제후들과 조약을 맺어 유대인들의 재산을 빼앗았다. 이러한 포고령은 14세기 말 수천 가구의 유대인 가정을 빈곤하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4. 근대
19세기 초, 나폴레옹 1세 몰락 이후 독일에서 민족주의가 강화되면서 유대인 억압이 다시 심해졌다. 1819년에는 Hep-Hep 폭동이라 불리는 반유대주의 폭동이 독일 전역에서 발생하여 유대인 재산이 크게 파괴되었다.[30] 많은 독일 국가에서 유대인의 시민권이 박탈되었고, 프랑크푸르트 자유시에서는 결혼이 제한되고 재산이 몰수되기도 했다.[30] 라인란트 지역에서는 유대인들이 나폴레옹에게 부여받았던 권리를 잃고 특정 직업 종사가 금지되었다.[30]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들은 과도한 세금과 차별을 겪었고, 많은 직업에서 금지되어 행상이나 가축 거래와 같은 직업에 의존해야 했다.[30] 결혼을 원하는 유대인 남성은 비싼 등록 증명서를 구매해야 했고, 그마저도 장남에게만 허용되어 대부분 유대인 남성은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없었다.[30] 이러한 상황 때문에 많은 독일 유대인들이 이민을 시작했으며, 미국이 주요 목적지였다.[30]
1848년 독일 혁명은 유대인 자유를 향한 움직임이었고, 1871년 독일 통일과 함께 유대인 해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반유대주의는 계속되었고, 빌헬름 마르는 반유대주의 동맹을 설립하여 '반유대주의'라는 용어를 정치에 도입했다.[31] 1870년대 금융 위기와 1880년대 ''오스트유덴''의 도착으로 반유대주의가 심화되었으며, 1890년대에는 반유대인 법을 위협하는 의회적 존재감이 나타났다. ''völkisch 운동''은 유대인을 독일 사회에 동화될 수 없는 셈족으로 간주했고, 1900년까지 반유대주의 감정이 격렬해졌다.[31]
1848년 이후 유대인들은 법적 평등을 누렸지만, 군대, 외교부, 사법부 등 고위직 임명 기회는 매우 적었다.[32]
4. 1. 모세스 멘델스존과 계몽주의
모세스 멘델스존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유대인의 사회 통합과 문화적 개방을 주장한 인물이다. 멘델스존은 토라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유대인들이 독일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25] 이는 유대인들이 독일어로 말하고 글을 쓸 수 있게 하여 독일 문화와 세속 과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 중요한 작업이었다.멘델스존은 신을 완벽한 존재로 생각했고, 이성과 계시가 모순될 수 없다고 믿었다.[25] 그는 종교적 위협으로서 파문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유대교가 교리를 통해 정신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이성을 통해 종교적, 철학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지만, 유대교를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법적, 의례적, 도덕적 율법의 계시된 법전이라고 주장했다.[25]
멘델스존은 유대인이 시민 사회에서 살아야 하지만, 종교법을 준수할 권리가 부여되는 방식으로만 살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관용과 인간성을 옹호하면서 유대인과 기독교인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고, 하스칼라(유대 계몽주의)의 상징이 되었다.[25] 그의 사상은 유대교 내 개혁 운동과 하스칼라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2. 독일 유대인 공동체의 재조직
아브라함 가이거와 사무엘 홀드하임은 현대 유대교 보수 운동의 창시자였으며, 자유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반면 삼손 라파엘 히르쉬는 전통 관습을 옹호하며 현대 사조를 거부했다. 제카리아스 프랑켈은 독일 공동체와 협력하여 온건한 개혁 운동을 이끌었다. 예배 의식이 재정비되고, 기도문에 추가된 중세 시대 요소들이 줄었으며, 회중 찬송이 도입되었다. 또한 과학적으로 훈련받은 랍비가 정기적으로 설교를 맡았다. 국가에서는 유대인 자녀들의 세속 교육에 종교적 틀을 더하려는 요구에 따라 종교 학교를 시행했다. M. 삭스와 M. 조엘 같은 독일 설교자들 덕분에 설교 웅변이 발전했으며, 루이 레반도프스키의 노력으로 시나고그 음악도 발전했다. 유대 문학이 육성되고 교사, 랍비, 회중 지도자들을 위한 협회가 창설된 것도 유대 공동체 변화의 일환이었다.유대-독일 공동체 재조직의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은 유대 여성의 참여와 이들이 가족을 새로운 생활 방식에 적응시키려 한 경향이었다. 유대 여성들은 현대화를 추구하면서도 일부 전통을 유지하려 했다는 점에서 모순적인 면모를 보였다. 독일 유대인 어머니들은 자녀 양육 방식을 바꾸면서 유대인 자녀들이 성장하는 환경과 소통하는 방식을 변화시켰고, 이는 당시 긴밀했던 유대 공동체의 역학 관계를 바꾸었다. 이들은 가족을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 이주시키기도 했다.[28] 유대인 아이들은 동네 산책, 스포츠 행사 등 독일 또래들과 비슷한 활동을 하도록 훈련받았다. 어머니들은 독일 문화에 동화되기 위해 패션, 최신 트렌드, 개신교 부르주아 독일인들의 트렌드를 다루는 신문과 잡지를 읽었다. 독일계 유대인 어머니들은 자녀들에게 독일인들에게 인기 있는 활동이었던 음악 수업을 받게 했다. 또한 자녀들에게 예절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비유대인 독일인들이 유대인들을 무례하고 시간과 장소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28] 유대인 어머니들은 이러한 고정관념에 맞서기 위해 자녀들이 개신교 아이들보다 더 나은 예절을 갖도록 노력했다. 더불어 자녀들이 사회에서 존경받고 성공적인 경력을 갖도록 적절한 교육을 강조했다. 유대인 어머니들은 가족의 동화를 위해 노력하면서도 샤밧과 공휴일을 가족 재회의 날로 여기며 유대교 전통의 가족적 측면을 유지하려 했다.[28]
4. 3. 개혁 운동의 탄생
데이비드 필립슨이 강조했듯이, 유대교 개혁 운동은 19세기 초 독일에서 시작되었다.[29]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정치적 중앙 집권화가 강화되면서 전통적인 유대교 생활을 유지하던 사회 구조가 약화되었다.[29] 계몽주의 사상은 많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변화는 압도적이었다.[29]많은 유대인들은 유대교 전통과 그들이 현재 살아가고 있는 방식 사이에 긴장감을 느꼈고, 이는 전통의 감소로 이어졌다.[29] 고립된 종교 사회가 해체되면서, 유대교를 의도적으로 깨지 않으면서 경계적인 준수에서 벗어나는 것은 쉬웠다.[29] 일부 유대인들은 종교적 유산과 새로운 사회 환경을 조화시키려 노력했고, 새로운 필요를 충족시키고 영적 욕구를 표현하기 위해 전통적인 유대교를 개혁했다.[29]
일련의 종교적 신념과 관행을 가진 운동이 형성되었으며, 이는 기대되고 전통으로 여겨졌다.[29] 개혁 유대교는 유대인의 해방에 대한 최초의 현대적 응답이었지만, 모든 국가에서 개혁 유대교가 달랐기 때문에 회중과 개인 모두에게 자율성을 강조했다.[29]
일부 개혁은 관행에 있었다.[29] 할례가 폐지되었고, 랍비들은 개신교 목사들처럼 조끼를 입었으며, 파이프 오르간과 같은 기악 반주가 사용되었다.[29] 또한 전통적인 히브리어 기도서는 독일어 텍스트로 대체되었고, 개혁 회당은 이전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여겨졌던 템플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29] 유사한 신념을 가진 개혁 공동체와 유대교는 사회의 나머지 부분과 같은 속도로 변화했다.[29] 유대인들은 세대를 거쳐 유대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종교적 신념과 관행을 적응해 왔다.[29]
4. 4. 1815-1918: 반유대주의의 재등장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한 1815년 이후, 독일에서는 민족주의가 강화되면서 유대인에 대한 억압이 다시 심해졌다. 1819년 8월부터 10월까지는 Hep-Hep 폭동이라 불리는 반유대주의 폭동이 독일 전역에서 발생하여 유대인 재산이 크게 파괴되었다.[30]이 시기 많은 독일 국가들은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프랑크푸르트 자유시에서는 매년 12쌍의 유대인 부부만 결혼이 허용되었고, 1811년 유대인 공동체가 해방을 위해 지불했던 400,000 플로린이 몰수되기도 했다. 라인란트 지역이 프로이센의 통치로 돌아간 후, 유대인들은 나폴레옹에게 부여받았던 권리를 잃었고,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전에 공직에 있었던 소수의 유대인들도 해고되었다.[30]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들은 과도한 세금을 내야 했고, 비유대인 장인들로부터 차별을 받았다. 많은 유대인들은 일하고, 정착하고, 결혼할 권리가 제한되었다. 특별한 보호 증명서 없이는 많은 직업에서 금지되었고, 생존을 위해 행상이나 가축 거래와 같이 존경받지 못하는 직업에 의존해야 했다. 결혼을 원하는 유대인 남성은 "존경할 만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Matrikel''이라는 등록 증명서를 구매해야 했는데, 그 비용은 최대 1,000플로린에 달했고, 일반적으로 장남에게만 허용되었다.[30] 그 결과, 대부분의 유대인 남성은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많은 독일 유대인들이 이민을 시작했으며, 독일-유대인 신문은 이민을 장려했다.[30] 처음에는 주로 작은 마을과 촌락에서 온 젊고 미혼의 남성이었으며, 소수의 미혼 여성도 이민을 갔다. 가족 구성원은 혼자 이민을 간 다음, 충분한 돈을 벌면 가족을 불렀다. 이민이 늘면서 일부 독일 유대인 공동체는 구성원의 최대 70%를 잃기도 했다. 프랑코니아의 하겐바흐, 오팅겐, 반바흐 마을의 모든 젊은 유대인 남성이 이민을 갔거나 이민을 가려고 한다는 보도도 있었다.[30] 미국은 이민 가는 독일 유대인들의 주요 목적지였다.
1848년 독일 혁명은 유대인들의 자유를 향한 움직임이었다. 1871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재상에 의한 독일 통일과 함께 유대인 해방이 이루어졌지만, 동화된 유대인들 사이에서 커져가는 절망감은 반유대주의가 정치에 침투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1879년 함부르크의 팸플릿 작가 빌헬름 마르는 반유대주의 동맹을 설립하여 '반유대주의'라는 용어를 정치적 어휘에 도입했다.[31] 1870년대에는 금융 위기와 스캔들로, 1880년대에는 러시아 영토에서 도망쳐 온 대량의 ''오스트유덴''의 도착으로 반유대주의가 심화되었으며, 1890년대에는 반유대인 법을 위협하는 의회적 존재감이 나타났다.
''völkisch 운동''의 반유대주의자들은 유대인을 독일 사회에 제대로 동화될 수 없는 셈족으로 간주했다. 1900년까지 völkisch 운동의 반유대주의 감정이 너무 격렬하여 '반유대주의'는 반유대주의 감정을 가진 사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항의와 청원에도 불구하고 völkisch 운동은 정부가 유대인 해방을 철회하도록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1912년 독일 제국 의회 선거에서 völkisch 운동에 동조하는 정당들은 일시적인 패배를 겪었다.
1848년 이후 유대인들은 법적 평등을 누렸다. 바덴 대공국과 뷔르템베르크 왕국은 1861~64년에 유대인에게 법 앞에서의 완전한 평등을 부여하는 법률을 통과시켰고, 새로 형성된 독일 제국은 1871년에 동일한 조치를 취했다.[32] 그러나 군대, 외교부, 사법부 또는 고위 관료에 대한 고위직 임명의 기회는 매우 적었다.[32]
5.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1919-1933)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1919-1933)에 독일 유대인들은 정치, 외교, 재정,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43][44] 후고 프로이는 제국 멸망 이후 첫 정권에서 내무부 장관을 맡아 바이마르 헌법 초안을 작성했고,[45] 발터 라테나우는 외무부 장관으로서 라팔로 조약 협상에 참여했으나, 두 달 뒤 암살당했다.[46]
1914년, 유대인들은 프로이센에서 가장 부유한 800명 중 23.7%를 차지하는 등 부유층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47] 그러나 유대인 기업들은 이전 시대만큼 경제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유대인 중산층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1930년에는 독일 유대인 공동체의 4분의 1이 공동체 복지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47] 또한 독일 유대인 공동체는 80%가 도시에 거주하는 등 도시화된 모습을 보였다.[48]
이 시기 유대계 지식인과 전문가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문화의 여러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공황 이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반유대주의를 선동하며 세력을 확장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다시 강화되었다.[49]
5. 1. 반유대주의
중세 독일에서는 반유대주의가 만연했다. 특히 1348년부터 1350년까지 흑사병이 유행하는 동안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폭력이 증가했다.[113]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이 내부의 적에게 배신당했다는 거짓 혐의에 기반한 산발적인 반유대주의가 나타났다.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에는 자유군단(Freikorps)과 같은 준군사조직에 의한 유대인 폭력이 발생했다. 유대인이 세상을 장악하려 한다는 주장을 담은 위조 문서인 ''시온 의정서''(1920)가 널리 유포되기도 했다. 1920년대 후반에는 경제적 번영으로 반유대주의가 다소 완화되었으나, 1929년 대공황 이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반유대주의를 선동하며 세력을 확장하면서 다시 급증했다.[49]

5. 2. 지식인

유대계 지식인과 창의적인 전문가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문화의 여러 분야에서 선구적인 인물이었다. 1918년 독일 대학교 학부는 유대인 학자들에게 보편적으로 개방되었다. 대학교 학부의 주요 유대인 지식인으로는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 에리히 프롬, 테오도어 아도르노, 막스 호르크하이머, 허버트 마르쿠제,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와 에드문트 후설, 공산주의 정치 이론가 아르투어 로젠베르크, 성학자이자 선구적인 LGBT 옹호자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등이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 시대에 17명의 독일 시민이 노벨상을 받았는데, 이 중 5명은 유대인 과학자였다.[52][53] 1925년에는 독일-유대계 문학 잡지인 ''데어 모르겐''이 창간되어 프란츠 카프카와 레오 히르쉬와 같은 저명한 유대인 작가들의 에세이와 이야기를 게재했으며, 1938년 나치 정부에 의해 폐간될 때까지 발행되었다.
6. 나치 시대 (1933-1945)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은 유대인들을 사회에서 격리하고 추방하며, 궁극적으로는 절멸시키려는 정책을 펼쳤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다른 어떤 민족, 종교, 정치적 소수 집단보다 높은 비율의 독일 유대인들이 참전했으며, 약 12,000명이 전투에서 사망했다.[35][36] 많은 독일 유대인들은 애국심에서 전쟁을 지지했고, 독일의 행동을 방어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심지어 좌익 자유주의 유대인들조차 독일이 특히 러시아와 같은 다른 국가들의 행동에 대응하고 있다고 믿었다.
전쟁 참여는 러시아, 프랑스, 영국에서 다른 유대인들과 싸워야 하는 불쾌한 전망을 가져왔지만, 대다수의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연합국의 유대인 공동체와의 유대 관계를 끊는 것이 전쟁을 위한 정신적 동원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독일 유대인들은 독일의 힘을 증대시키고 동유럽 유대인들을 차르 통치로부터 구출하려는 열망에서 독일 식민 야망을 아프리카와 동유럽에서 지지했다.
발터 라테나우와 막스 바르부르크와 같은 저명한 유대인 산업가와 은행가들은 독일 전쟁 경제를 감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16년 10월, 독일 군 최고 사령부는 ''Judenzählung''(유대인 인구 조사)을 실시했지만, 독일 유대인들의 애국심 부족에 대한 비난을 확인하려던 이 조사는 혐의를 부인했고, 결과는 공개되지 않았다.[41]
전쟁 말기 독일에서 파업이 발생했을 때, 일부 유대인들은 지지했지만, 대다수는 파업자들에게 거의 동정을 느끼지 않았고, 한 유대인 신문은 파업자들을 "최전선 군대의 등을 찌른" 혐의로 비난했다. 많은 독일인들처럼, 독일 유대인들은 베르사유 조약을 슬퍼했다.[39]
증가하는 반유대주의는 1930년대에 독일에서 유대인의 대량 이민 물결을 촉발했다. 위임통치 팔레스타인은 인기 있는 목적지였으며, 하아바라 협정을 통해 1933년부터 1939년 사이에 60,000명의 독일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민을 갔다.[61] 제5차 알리야 기간 동안 총 250,000명의 유대인 이민자들이 팔레스타인에 도착했는데, 그 중 55,000명 이상이 독일, 오스트리아 또는 보헤미아 출신이었다. 미국 또한 주요 이민 목적지였지만, 1924년 이민법으로 인해 이민자 수는 제한되었다. 1933년에서 1940년 사이 90,000명의 독일 유대인에게만 미국 비자가 발급되었다. 약 100,000명의 독일 유대인은 서유럽 국가, 특히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로 이주했다.[62][63]
6. 1. 유대인 박해의 법제화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유대인 박해는 본격화되었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독일 사회에서 배제하기 위한 다양한 법률을 제정했다.
1933년 4월, 공무원 복원법이 통과되어 유대인 공무원들은 강제로 퇴직당했다.[56] 이 법은 유대인들이 "아리아인" 독일인을 위해 예약된 특권적이고 상위 레벨 직책에서 간접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제지되거나 금지되었음을 의미했다. 그 이후로 유대인들은 비유대인보다 더 힘든 직책에서 일하도록 강요받아 더 힘든 직책으로 밀려났다.

1935년에는 뉘른베르크법이 제정되어 유대인과 비유대인 간의 결혼과 성관계가 금지되었고, 유대인은 독일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뉘른베르크 법의 초안은 종종 한스 글로브케에게 기인한다.

1938년에는 유대인 사업체에 대한 정부 계약이 금지되었고, 유대인 의사들은 유대인 환자만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58] 또한 유대인들은 이름에 '이스라엘' 또는 '사라'를 추가해야 했고, 여권에는 'J'자가 찍혔다. 1939년에는 거의 모든 유대인 회사가 파산하거나 나치 정부에 매각되었다.

6. 2. 크리스탈나흐트 (수정의 밤)
1938년 11월 7일, 폴란드계 유대인 허셸 그린스판이 파리의 나치 독일 대사관에서 독일 관리 두 명을 공격하여 총격을 가했다. 그린스판은 나치에 의한 부모의 처우에 분노했다. 11월 9일, 그린스판에게 총격을 당한 독일 부관 에른스트 폼 라트가 사망했다. 요제프 괴벨스는 유대인에 대한 시위를 독일 전역에서 조직하고 수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59]1938년 11월 10일,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주 경찰과 ''돌격대''(SA)에게 유대인의 재산을 파괴하고 가능한 한 많은 유대인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는데, 이는 크리스탈나흐트 (수정의 밤)로 알려지게 되었다.[59] 유대인 상점과 사무실의 가게 전면이 부서지고 파손되었으며, 많은 유대교 회당이 화재로 파괴되었다. 약 91명의 유대인이 사망하고 다른 30,000명이 체포되었으며, 대부분은 건강한 남성이었고, 모두 새로 형성된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 후 3개월 동안 그들 중 약 2,000~2,500명이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고, 나머지는 독일을 떠나라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많은 독일인들은 피해의 전체 범위가 발견되었을 때 이 조치에 역겨움을 느꼈으므로 히틀러는 유대인에게 책임을 지도록 명령했다. 나치는 "유대인 자본세" (Judenvermögensabgabe|유대인 자본세de)를 발표했는데, 이는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50억 달러)에 달하는 세금이었다. 5,000 마르크를 초과하는 자산을 소유한 유대인은 해당 자산의 20%를 넘겨야 했다.[60] 유대인은 또한 자신의 비용으로 모든 피해를 복구해야 했다.
6. 3. 홀로코스트

1933년 1월 독일에 살고 있는 유대인 522,000명 중 약 304,000명이 나치 치하 초기 6년 동안 이민을 갔고, 제2차 세계 대전 전야에는 약 214,000명이 남았다.[112] 이들 중 160,000명에서 180,000명이 홀로코스트의 결과로 사망했다.[112] 독일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숨어 살면서 생존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112] 흔히 "교반기와 다이버"로 불리는 유대인들은 물속에 잠긴 듯한 삶을 살며 나치 경찰을 끊임없이 피하고 전략적으로 검문소를 피하면서 식량과 상대적으로 안전한 은신처, 허위 신분증을 찾기 위해 투쟁했다.[112]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집에 숨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지원을 제공했지만, 이것이 양측 모두에게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 증명되자, 유대인들은 거리를 포함한 더 노출된 장소에서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112] 일부 유대인들은 필요한 자원의 위험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허위 서류를 얻을 수 있었다.[112] 신뢰할 수 있는 가짜 신분증은 출처에 따라 에서 사이의 비용이 들었다.[112] 베를린의 일부 유대인들은 암시장이 음식, 담배, 의류에 이어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었기 때문에 위조지폐를 얻기 위해 암시장을 찾았다.[112] 어떤 형태의 신분증은 곧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고, 유대인들은 자원이 고갈되어 체포되기 쉬웠다.[112] 체포를 피하는 것은 1943년 나치 경찰이 인원과 검문소를 늘려 모든 잠적한 유대인의 65%가 구금되고 추방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특히 어려웠다.[112] 1943년 5월 19일, 약 20,000명의 유대인들만이 남아 있었고 독일은 유대인 청정(judenrein)으로 선언되었다.
7. 1945년 이후
1945년 4월 말 붉은 군대가 베를린을 점령했을 때, 베를린에는 8,000명의 유대인만이 남아 있었고, 그들 모두는 숨어있거나 비 유대인과 결혼한 상태였다.[116][117] 망명 중 전쟁에서 살아남은 대부분의 독일 유대인들은 해외에 남기로 결정했지만, 소수의 유대인들은 독일로 돌아갔다. 약 15,000명의 독일 유대인들이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거나 숨어서 생존했다. 이들은 약 200,000명의 동유럽 출신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합류했다. 이들은 동유럽에 남겨진 집이 없거나 독일 땅에서 해방된 후 연합군이 점령한 서부 독일로 왔다. 상당수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를 원했고, 연합군과 UNRRA가 관리하는 난민 캠프에서 생활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자 대부분의 유럽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로 떠났다. 독일 유대인과 유대계 동유럽인 사이의 오랜 반목에도 불구하고, 두 집단은 새로운 유대인 공동체의 기반을 형성하기 위해 연합했다. 1950년에 이들은 단일 대표 조직인 독일 유대인 중앙 평의회를 설립했다.
7. 1. 독일 통일 이전 (1945-1990)
1945년 4월 말, 붉은 군대가 베를린을 점령했을 때, 베를린에는 8,000명의 유대인만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모두 숨어 있거나 비유대인과 결혼한 사람들이었다.[116][117] 전쟁에서 살아남은 대부분의 독일 유대인들은 망명 생활을 계속했지만, 소수의 유대인들은 독일로 돌아갔다. 또한, 약 15,000명의 독일 유대인들이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거나 숨어서 생존했다. 이들은 약 200,000명의 동유럽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합류했는데, 이들은 동유럽에 남겨진 집이 없거나 독일 땅에서 해방된 후 연합군이 점령한 서부 독일로 왔다.이들 중 상당수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를 원했고, 연합군과 UNRRA가 관리하는 난민 캠프에서 살았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자 대부분의 유럽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로 떠났다. 독일 유대인과 유대계 동유럽인 사이의 오랜 반목에도 불구하고, 두 집단은 새로운 유대인 공동체의 기반을 형성하기 위해 연합했다. 1950년에 이들은 단일 대표 조직인 독일 유대인 중앙 평의회를 설립했다.
7. 1. 1. 서독의 유대인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서독의 유대인 공동체는 사회적 보수주의와 전반적으로 사적인 성격을 띠었다. 서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뮌헨에는 유대인 초등학교가 있었지만, 공동체의 평균 연령은 매우 높았다. 청년 중 독일에 남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남은 사람들 중 다수는 비유대인과 결혼했다. 공동체와 지도부에 대한 많은 비판가들은 공동체의 경직성을 비난했다. 1980년대에는 하이델베르크에 유대교 연구 대학이 설립되었지만, 학생들 중 유대인의 수는 불균형적으로 적었다. 1990년까지 공동체는 3만 명에서 4만 명 사이였다. 독일 유대인 공동체는 1933년 이전의 공동체와 같은 영향력을 갖지 못했지만, 일부 유대인들은 독일 공공 생활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예를 들어 함부르크 시장 헤르베르트 바이히만,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법무부 장관 및 연방 헌법 재판소 부수석 판사 루돌프 카츠, 헤센 검찰총장 프리츠 바우어, 전 헤센 경제부 장관 하인츠-헤르베르트 카리, 서베를린 정치인 자네트 울프, 텔레비전 인물 후고 에곤 발더, 한스 로젠탈, 일랴 리히터, 잉게 마이젤, 미셸 프리드만,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 하인츠 갈린스키, 이그나츠 부비스, 파울 슈피겔, 샬로테 크노블로흐(참조: 독일 유대인 중앙 협의회), 영화 음악 작곡가 한스 짐머, 그리고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학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등이 있다.7. 1. 2. 동독의 유대인
동독 공산주의 시대의 유대인 공동체는 활동적인 구성원이 수백 명에 불과할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동독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1933년 이전의 고향이 거기에 있었거나, 나치 정권 장악 이전에 정치적으로 좌파였고, 1945년 이후 반파시스트 사회주의 독일을 건설하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정치적으로 관여했던 유대인들 대부분은 종교적이지 않거나 공식적인 유대인 공동체에서 활동적이지 않았다. 여기에는 작가 안나 제거스, 슈테판 헤임, 슈테판 헤름린, 유레크 베커, 슈타지의 콜로넬 제너럴 마르쿠스 볼프, 가수 린 잘다티,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 정치인 그레고어 기지 등이 있었다.[116][117]195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국가보안부(슈타지)는 동독에 남아있던 소규모 유대인 공동체를 박해했다. 이는 종교 단체에 대한 일반적인 대우와 일치했는데, 이들의 신념 체계가 사회주의 가치에 반한다고 여겨지고 서방과의 접촉을 가졌기 때문에 자주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유대인 인구의 경우, 이러한 박해는 소련의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감과도 관련이 있었다. 소련은 이스라엘을 제국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국가로 여겼으며, 이러한 적대감은 언론에도 반영되었다.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들은 언론이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로 대중의 반유대주의를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역사가 마이크 데니스에 따르면, '홀로코스트로 이미 궤멸된 동독 유대인들은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의 반유대주의적 캠페인으로 인해 충격을 받았다.' 박해 방법은 1940년대와 50년대의 스탈린 시대에 나타난 더 잔혹한 탄압 방식에서 70년대와 80년대에 광범위하게 활용된 더 미묘한 분해 방법까지 다양했다. 1980년대에는 그러한 박해가 일반적으로 완화되었고, 이전의 반유대주의는 "유대 문화의 부활"을 시도하면서 현저하게 변화했다. 경제적, 정치적 실용주의가 이러한 변화를 이끌었다. 사회주의 지도부는 동독을 반파시스트 국가로 홍보하고, 국내외적으로 정당성을 개선하며, 점점 더 불안정한 경제 상황으로 인해, 특히 더 유리한 무역 조건을 확보하고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열심이었다. 많은 동독 유대인들은 1970년대에 이스라엘로 이주했다.[116][117]
7. 2. 통일 독일 (1990년 이후)
냉전의 종식은 독일 유대인 공동체의 성장에 기여했다. 1990년 헬무트 콜 총리가 하인츠 갈린스키와의 회담을 통해 구소련 출신 유대인들의 독일 이민을 허용하면서, 대규모 유대인 이민이 이루어졌다.[74] 현재 독일에는 2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 숫자는 할당 난민법에 따라 이민 온 비유대인 배우자 또는 자녀도 포함한다.[75] 이 중 약 10만 명은 유대교 종교 공동체에 공식적으로 등록되어 있다.[75] 베를린 유대인 공동체의 규모는 12만 명으로, 독일 전체 유대인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된다.[76]오늘날 독일 유대인의 80~90%는 구소련 출신의 러시아어 사용 이민자이다.[77][78] Olim L'Berlin이라는 소셜 스노클론의 영향으로, 많은 이스라엘인들이 편안한 분위기와 낮은 생활비 때문에 베를린으로 이주하고 있다.[79] 이들 중 일부는 독일 거주 후 이스라엘로 돌아가기도 한다.[80] 이란, 터키, 모로코, 아프가니스탄 등 무슬림 다수 국가 출신의 유대인 가족도 소수 존재한다.
독일은 프랑스(60만 명)와 영국(30만 명) 다음으로 서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유대인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81] 최근 몇 년 동안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증가하는 유대인 인구를 기록하고 있다. 아슈케나지 유산을 되찾으려는 이민자들의 유입은 독일에서 유대인 생활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1996년 베를린에 하바드-루바비치 센터가 문을 열었고, 2003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에서 처음으로 10명의 랍비가 안수되었다.[82] 2002년에는 개혁파 랍비 신학교인 아브라함 가이거 칼리지가 포츠담에 설립되었으며, 2006년에는 1942년 이후 독일에서 처음으로 3명의 개혁파 랍비가 안수되었다.[83]
이디시어와 독일어의 유사성 덕분에 유대학은 인기 학문으로 자리 잡았고, 많은 독일 대학교에 유대학 관련 학과 및 연구소가 있다. 독일 전역에서 유대교 종교 공동체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이전에는 공동체가 없거나 쇠퇴했던 많은 도시에도 유대교 기관이 생겨났다. 여러 도시에 유대교 데이 스쿨, 코셔 시설, 회당 등이 있다. 함부르크 사원 논쟁에서 시작된 미국식 개혁 유대교가 독일 진보 유대교 연합을 중심으로 다시 부상하고 있지만, 독일 유대인 중앙 협의회와 대부분의 지역 유대인 공동체는 공식적으로 정통파를 고수한다.

2003년 1월 27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당시 총리는 중앙 협의회와 연방 차원의 협정을 체결하여, 유대교는 로마 가톨릭 교회 및 독일 개신교 교회와 동등한 높은 법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독일에서는 홀로코스트를 부정하거나 600만 명의 유대인이 홀로코스트에서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형사 범죄이며(§ 130 StGB), 최대 5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 2007년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내무부 장관은 "어떠한 형태의 극단주의, 외국인 혐오, 반유대주의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헌법 수호 연방청의 보고에 따르면, 독일 내 극우 극단주의자 수는 감소 추세에 있다.[84][85] 독일은 극우 극단주의에 맞서기 위한 프로그램에 수백만 유로를 지원하고 있다.[88] 그러나 시몬 스타인 이스라엘 대사는 2006년 10월 독일 유대인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있으며, 대부분의 회당이나 유대인 공동체 센터가 삼엄한 경비 속에 있다고 경고했다.[88] 반면, 요세프 하블린 프랑크푸르트 하바드 루바비치 랍비는 2007년 9월 독일 대중이 극우 단체를 지지하지 않으며, 자신은 독일인들의 지지를 경험했고 유대인과 랍비로서 프랑크푸르트에서 환영받는다고 말했다.[89]
2006년 11월 9일(크리스탈나흐트 68주년), 새로 건설된 오엘 야콥 회당이 뮌헨에서 봉헌되었다.[90][91] 뮌헨이 과거 나치 독일의 이념적 중심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베를린의 유대인 생활은 활발하며, 유대인 공동체가 성장하고 있고, 중심 유대교, 독일에서 가장 큰[92] 회당을 포함한 여러 회당이 개조 및 개방되었다. 베를린의 연례 유대 문화 주간과 베를린 유대 문화 축제는 콘서트, 전시회, 공개 강독, 토론 등을 통해 유대 문화를 알리고 있다.[93][94] 이츠하크 에렌베르크 베를린 정통 유대인 공동체 랍비는 "정통 유대인 생활이 다시 베를린에서 살아있다"며, "독일은 유대인 공동체가 성장하고 있는 유일한 유럽 국가"라고 말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반유대주의 사건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2012년 8월에는 베를린에서 랍비가 아랍계 청소년들에게 공격받는 사건이 발생했고,[95][96][97] 같은 해 11월에는 신나치주의자들이 그라이프스발트의 홀로코스트 기념비를 훼손하는 사건이 있었다.[98] 2013년 6월에는 오펜바흐에서 랍비가 청소년들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99] 같은 해 잘츠베델에서는 방화범들이 가옥 외벽에 갈고리 십자와 "히틀러 지금"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100]
21세기 초부터 독일은 학업 및 취업 기회를 찾는 젊고 교육받은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이주가 증가했으며, 베를린이 가장 선호되는 목적지였다.
7. 3. 21세기 독일의 반유대주의
독일 정부는 홀로코스트 부정을 형사 범죄로 규정하고 (§ 130 StGB), 최대 5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2007년, 독일 내무부 장관 볼프강 쇼이블레는 "어떠한 형태의 극단주의, 외국인 혐오 또는 반유대주의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며, 독일의 공식 정책을 분명하게 밝혔다.독일은 극우 극단주의에 맞서기 위해 "전국적인 프로그램, 여행 컨설턴트 팀 및 피해자 그룹"에 수백만 유로를 지원하고 있다.[88] 헌법 수호 연방청의 보고에 따르면, 독일 내 극우 극단주의자 수는 2001년 49,700명에서 2006년 38,600명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84][85]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2006년 10월 이스라엘 대사 시몬 스타인은 독일 내 유대인들이 점점 더 불안감을 느끼고 있으며, 대부분의 회당이나 유대인 공동체 센터가 삼엄한 보안 속에 있다고 경고했다.[88] 그러나 2007년 9월 프랑크푸르트의 하바드 루바비치 랍비 요세프 하블린은 독일 대중이 극우 단체를 지지하지 않으며, 자신은 독일에서 환영받는 느낌을 받는다고 언급했다.[89]
최근 몇 년 동안에도 반유대주의 사건이 발생했다.
- 2012년 8월 29일, 베를린에서 랍비 다니엘 알터가 아랍계 청소년들에게 공격을 받아 입원 치료를 받았다.[95][96][97]
- 2012년 11월 9일, 크리스탈나흐트 74주년 기념일에 그라이프스발트에서 홀로코스트 기념비가 훼손되고, 유대인 어린이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조롱당했다.[98]
- 2013년 6월 2일, 오펜바흐 암 마인에서 한 랍비가 청소년들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99]
- 2013년, 잘츠베델에서 방화범들이 가옥 외벽에 갈고리 십자와 "히틀러 지금"이라는 낙서를 남겼다.[100]
21세기 초부터 독일은 학업 및 취업 기회를 찾는 젊은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이민이 증가했으며, 특히 베를린이 인기 있는 목적지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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