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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인문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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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14~15세기에 걸쳐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학 및 철학을 연구하여 고전 문화를 부흥시키고, 통치 계급에게 고대인들의 도덕적 태도를 불어넣으려는 교육 프로젝트였다. 이들은 고대 필사본 수집, 새로운 수사학 발전, 시민 참여적 관점 제시 등을 통해 중세 스콜라 철학에 대한 반발을 보였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독일 등으로 확산되었으며, 종교 개혁과 반종교 개혁 시기에 영향을 미쳤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대한 역사학적 연구는 크리스텔러와 가린의 상반된 견해, 바론의 시민적 인문주의 개념 등을 통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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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인문주의자
르네상스 인문주의
조르조 바사리가 그린 여섯 명의 토스카나 시인
조르조 바사리가 그린 여섯 명의 토스카나 시인
다른 이름인문학 부흥
영향 받은 사상고대 그리스 철학
로마 철학
고대 그리스 문학
로마 문학
영향을 준 사상과학 혁명
종교 개혁
계몽주의
개요
주요 분야고전 문학 연구
수사학
역사
윤리학
특징인간 중심주의
개인의 가치와 능력 강조
고전 문화 부흥
세속적 가치 추구
관련 개념인문학
르네상스
스콜라주의
기독교 인문주의
역사
기원14세기 이탈리아
발전15~16세기 유럽 전역
주요 인물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조반니 보카치오
레오나르도 브루니
로렌초 발라
피코 델라 미란돌라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토머스 모어
철학적 내용
핵심 가치인간 존엄성
자유 의지
지적 탐구
예술적 창의성
인간관인간은 잠재력을 가진 존재
교육과 경험을 통해 성장 가능
고전적 이상 추구
영향
교육인문 교육 강조
고전 교육 부활
비판적 사고 능력 함양
예술고전 양식 부활
사실주의적 묘사
인간 중심 주제
정치공화주의 이념 확산
시민 의식 강조
공동체 가치 중시
종교종교 개혁에 영향
개인의 신앙 강조
성경 원전 연구

2. 정의

라파엘의 ''아테네 학당''(1509–1511). 고대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이상을 보여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활동은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studia humanitatis|인문학 연구la"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본질적으로 언어 기술에 초점을 맞춘 교육 과정이었다.[4]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학과 철학 연구를 통해 그 문화를 복원하고, 이러한 고전 부흥을 통해 당시 통치 계급에게 고대인들의 도덕적 태도를 심어주려는 것이었다. 제임스 헨킨스는 이를 "덕치 정치"라고 명명했다.[5]

그러나 이 '인문학 연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포함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한 학자는 초기 이탈리아 인문주의가 중세의 문법 및 수사학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기존의 삼학(문법, 수사학, 논리학)에 '인문학 연구'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그 범위와 중요성을 확장했다고 본다. 이 정의에 따르면, '인문학 연구'는 논리학을 제외하는 대신 전통적인 문법과 수사학에 역사, 그리스어, 도덕 철학을 추가했으며, 특히 시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격상시켰다.[6]

하지만 벤자민 G. 콜은 그의 연구에서 '인문학 연구'라는 용어가 시대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지적한다.[7]

  • 14세기 중반, 이 용어가 이탈리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처음 등장했을 때는 키케로가 그의 연설 ''Pro Archia poeta''(기원전 62년)에서 표현한 특정 문화적, 도덕적 태도에 대한 찬사를 의미했다.
  • 1370년대 토스카나의 인문주의자 콜루치오 살루타티는 이 용어를 대중화하며, 수사학과 웅변을 강조하고 도덕적 삶의 지침으로서 문화와 배움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는 처음에는 동시대 인물들에 대한 문학적 찬사로 사용했지만, 점차 '인문학 연구'를 고대 문헌의 편집과 복원, 나아가 성경과 같은 신성한 텍스트를 이해하는 도구로 간주하게 되었다.
  • 콰트로첸토(15세기) 초, 피에르 파올로 베르제리오는 그의 저서 ''De ingenuis moribus''에서 수사학, 역사, 도덕 철학이 도덕적 향상을 위한 중요한 학문 분야임을 강조하면서, '인문학 연구'가 특정 학문 분야들과 연관되기 시작했다.
  • 15세기 중반에는 이 용어가 더욱 공식화되어, 볼로냐와 파도바 대학에서 관련 강좌가 개설되고 라틴 시 등에서 언급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이탈리아 북부로 확산되었다.
  • 문법, 수사학, 역사, 시, 도덕 철학(윤리)을 '인문학 연구'로 명확히 포괄한 최초의 사례는 교황 니콜라오 5세(토마소 파렌투첼리)가 코시모 데 메디치에게 도서관 수집 목록에 대해 조언하면서 언급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de studiis autem humanitatis quantum ad grammaticam, rhetoricam, historicam et poeticam spectat ac moralem|인문학 연구에 관하여, 문법, 수사학, 역사 및 시, 그리고 윤리에 해당하는 한la.[8]


결론적으로, '인문학 연구'라는 용어는 수세기에 걸쳐 다양한 의미를 지녔고, 여러 이탈리아 도시 국가의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다르게 해석되었지만, 공통적으로 도덕적 교화를 이끄는 학문(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7]

단테 알리기에리, 조반니 보카치오,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를 묘사한 앞면 그림. 상단에는 메디치–톨레도 가문의 문장이 있다. 이들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고전 연구에 깊은 영향을 받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새로운 수사학과 학문 체계를 발전시켰다. 일부 학자들은 인문주의가 단순히 학문적 부흥을 넘어, 새로운 도덕 철학과 시민 참여적 관점을 제시하고, 모든 시민의 삶에 지침이 될 가치 체계를 명확히 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후대의 휘그 사학자들에 의해 중세 스콜라 철학의 "좁은 형식주의"에 대한 반발로 해석되기도 했다.[9]

3. 기원



13세기 말과 14세기 초, 일부 유럽 지역에서는 문화적 분위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잊혔던 고대 작가들과 그들이 살았던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겨나면서, 고대 언어, 문학 양식, 그리고 문학적 모델을 다시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는 당시 문화에 대한 반성이자 새로운 문화적 쇄신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으며, 때로는 동시대 문화와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했다. 고대 필사본과 비문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글씨체와 같은 시각적 모델 또한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고대로의 회귀'는 이른바 '전(前)-인문주의'의 핵심 요소였으며, 특히 토스카나, 베네토 지역과 아비뇽의 교황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 시기 주요 인물로는 파두아의 로바토 로바티, 알베르티노 무사토, 아비뇽의 란돌포 콜론나, 비첸차의 페레토 데 페레티, 토스카나와 아비뇽의 프라토의 코네베놀레 등이 있다.[10]

14세기에 이르러 페트라르카, 조반니 보카치오, 콜루치오 살루타티, 포지오 브라치올리니와 같은 초기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필사본을 열정적으로 수집했다. 이들 중 페트라르카는 고대 이교 문명 연구와 고전적 덕목의 가르침이 기독교 신앙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처음으로 주장했기 때문에 '인문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5] 그는 방대한 개인 도서관을 소유했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필사본이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못했다.[11] 초기 인문주의자 중 다수는 가톨릭 교회를 위해 일했으며, 페트라르카처럼 성직자 신분인 경우도 많았다. 다른 이들은 변호사나 이탈리아 도시 국가의 재무관으로 활동하며, 페트라르카의 제자이자 피렌체 재무관이었던 살루타티처럼 책을 복사하는 작업장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인문주의 교육은 빠르게 받아들여졌고, 15세기 중반에는 많은 상류층이 전통적인 스콜라 철학 교육과 더불어 인문주의 교육을 받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가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 중에서도 인문주의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상당한 재력을 바탕으로 중요한 도서관을 구축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바실리오스 베사리온 추기경이 있는데, 그는 그리스 정교회에서 가톨릭 교회로 개종했으며, 교황 후보로 거론될 만큼 당대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이었다. 15세기와 16세기 초에는 인문주의 성향의 교황들도 등장했는데,[12] 피우스 2세는 직접 '소년의 교육'에 관한 논문을 저술할 정도로 학식이 깊은 작가였다.[13] 이러한 학문 분야는 점차 '인문학(Humanities)'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 학문에 영감을 받은 운동이 바로 인문주의이다.

십자군의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과 1453년 비잔틴 제국 멸망 이후, 비잔틴 그리스 학자들이 이탈리아 등지로 이주해왔다. 이들은 페트라르카와 같은 라틴어 문헌 학자들이 수도원 도서관에서 찾아낸 고대 그리스 문학과 과학을 부활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14] 비잔틴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저작에 대해 훨씬 더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15][16] 이 시기 중요한 비잔틴 학자로는 게미스투스 플레토, 트레비존드의 조르조스, 테오도로스 가자, 요안니스 아르기로풀로스 등이 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꽃을 피웠다. 주요 중심지는 다음과 같다.



1500년 이후,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이탈리아 인문주의는 알프스 이북으로 확산되었다. 프랑스, 독일, 저지대 국가, 폴란드-리투아니아, 헝가리, 영국 등지로 퍼져나갔으며, 이는 종교 개혁의 흐름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저명한 인문주의자 기욤 뷔데 (1467–1540)가 이탈리아 인문주의의 어원학적 연구 방법을 고대 화폐 연구와 법률사에 적용하여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에 대한 상세한 주석을 남겼다. 뷔데는 초기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과 달리 공화주의자가 아닌 절대 군주제 지지자였으며, 시민 생활에 참여하고 프랑수아 1세의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콜레주 드 프랑스의 전신인 왕립 교수단(Collège de France|콜레주 드 프랑스프랑스어) 설립을 도왔다. 한편, 프랑수아 1세의 누이인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는 시인이자 소설가, 종교 신비주의자[17]로서 클레망 마로, 피에르 드 롱사르, 프랑수아 라블레 등 자국어 문학가들을 후원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4. 르네상스의 이교주의와 기독교

많은 인문주의자들이 교회의 성직자였으며, 대표적인 예로 교황 비오 2세, 식스토 4세, 레오 10세 등이 있다.[18][19] 또한 고위 성직자들이 인문주의자들을 후원하는 경우도 많았다.[20]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많은 인문주의자들의 노력은 종교 개혁 이전과 이후 모두 성경과 초기 기독교 텍스트의 이해와 번역을 개선하는 데 집중되었다. 특히 이탈리아 외부의 북유럽 인물들, 예를 들어 에라스뮈스,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 윌리엄 그로신, 그리고 망명한 스웨덴 가톨릭 대주교 올라우스 마그누스 등의 영향이 컸다. 이들의 활동은 고대 문헌 연구와 기독교 신앙을 조화시키려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특징적인 시도로 볼 수 있다.

4. 1. 설명

'''케임브리지 철학 사전'''은 고대 저작의 합리주의가 르네상스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21] 이 사전은 당시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정신을 짓누르고 존경과 충성을 요구하는 초자연적인 힘의 무게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모든 독특한 능력, 재능, 걱정, 문제, 가능성을 가진 인류가 관심의 중심이었다. 중세 사상가들은 무릎을 꿇고 철학을 했다고 하지만, 새로운 연구에 힘입어 감히 일어서서 완전한 키로 성장했다."[21]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예로, 1417년 포조 브라촐리니가 수 세기 동안 잊혔던 루크레티우스의 저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필사본을 발견한 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에피쿠로스주의 철학을 담고 있었지만, 당시 르네상스 학자들은 주로 루크레티우스의 문법과 구문 분석에만 집중했다.

에피쿠로스주의 사상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1564년 프랑스 해설가 데니 람뱅(1519–1572)은 이 작품의 서문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에피쿠로스적 사상을 "공상적이고, 터무니없으며, 기독교에 반하는 것"으로 비판했다. 람뱅의 이러한 해석은 19세기까지 표준적인 관점으로 받아들여졌다.[22] 쾌락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는 에피쿠로스의 교리는 당시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그의 철학의 인기를 보장했다"는 평가도 있다.[23] 한편, 로렌초 발라와 같은 일부 인문주의자는 자신의 저서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에피쿠로스주의를 변호하기도 했다.

4. 2. 에피쿠로스주의

샤를 트리크하우스는 발라의 "에피쿠로스 철학" 저술이 스토아 철학을 반박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발라가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 모두 기독교보다 열등하다고 보았다고 해석했다.[24] 발라의 에피쿠로스 철학에 대한 옹호 혹은 각색은 이후 "인문주의의 왕자"로 불리는 에라스뮈스의 ''에피쿠로스 철학자''라는 저작으로 이어졌다.

에라스뮈스는 이 저작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며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에피쿠로스주의자라고 설명했다.

:만약 쾌적하게 사는 사람들이 에피쿠로스 철학자라면, 의롭고 경건한 사람들보다 더 진정한 에피쿠로스 철학자는 없습니다. 만약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이름이라면, 존경받는 창시자이자 기독교 철학의 수장인 그리스도보다 에피쿠로스 철학자라는 이름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어로 ''에피쿠로스''는 "조력자"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로 인해 자연법이 거의 지워졌을 때, 모세의 율법이 목록을 유발하기보다 치료했을 때, 사탄이 세상에서 이의 없이 지배했을 때, 멸망해가는 인류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슬프고 우울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우리에게 암울한 삶의 방식을 따르라고 어리석게 말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반대로, 그분은 모든 삶 중에서 가장 즐겁고 진정한 쾌락으로 가득 찬 삶을 보여줍니다.[25]

이러한 에라스뮈스의 주장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에피쿠로스의 철학과 같은 이교도 고전 작품을 자신들의 기독교 해석과 조화시키려 했던 방식을 잘 보여준다.

4. 3. 신플라톤주의

르네상스 시대의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초기 교부들인 락탄티우스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제안에 따라 플라톤주의기독교를 조화시키려고 시도했다. 대표적인 예로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들 수 있는데, 그가 라틴어로 번역한 플라톤의 저작들은 19세기까지 사용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아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 및 철학들을 통합하려는 종교 통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 중 마법에 대한 견해가 문제가 되어 교회 당국으로부터 거부당했고, 결국 그의 시도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26]

5. 전개와 수용

르네상스 역사가인 존 헤일 경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현대적 의미의 인문주의를 너무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그는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인도주의'나 현대적 의미의 합리적이고 비종교적인 삶의 접근 방식으로서의 '인문주의'의 암시와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인문주의라는 단어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만약 그것이 고대 신성한 지혜의 근원을 부지런히 발굴하는 것을 통해 주로 모순되게 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보충하려 했던 기독교와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진다면 말이다"라고 지적했다.[27] 즉,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기독교와 대립하기보다는 이를 보완하려는 성격이 강한 운동이었다.

5. 1. 개인의 자유

19세기 스위스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의 시기가 개인의 해방에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보았다. 그는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 동방의 다양한 관습과 접촉하면서 점차 취향과 복장에 대한 개인적인 표현을 허용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단테의 저작물, 특히 페트라르카니콜로 마키아벨리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의 가르침은 지적 자유와 개인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몽테뉴의 에세에서는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삶의 관점이 문학과 철학 역사상 가장 설득력 있게 표현되었다고 평가받는다.

한편, 일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신플라톤주의와 헤르메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졌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조르다노 브루노,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토마소 캄파넬라,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와 같은 인물들은 이러한 사상을 탐구하며 때로는 새로운 종교적 관점에 가까워지기도 했다. 이 중 헤르메스주의는 이후 서양 밀교, 신지학, 뉴에이지 사상 등으로 이어지며 서양 사상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나, 신플라톤주의는 주로 지적인 흐름으로 남았다.

역사가 프랜시스 예이츠는 이른바 "예이츠 명제"를 통해 르네상스 시대의 밀교적 사상이 쇠퇴하기 전에 과학적 방법의 발전에 기여한 유용한 개념들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여전히 학계에서 논쟁의 대상이다.

5. 2. 16세기 이후

16세기 중반 이후에도 인문주의자들은 교회를 위해 학문을 계속 사용했지만, 종교 개혁 이후 격렬해진 종교적 대립 분위기는 가톨릭 신학에 대한 도전을 억누르려는 반종교 개혁을 불러왔다.[30] 개신교 교파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다. 에라스무스와 같이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했던 가톨릭 신자조차 제도화된 교회에 대한 비판 때문에 이단으로 몰릴 위험에 처했다.[31]

많은 인문주의자들이 종교 개혁 운동에 참여하여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필리프 멜란히톤, 울리히 츠빙글리, 마르틴 루터, 헨리 8세, 존 칼빈, 윌리엄 틴들 등이 있다.

트리엔트 공의회 (1545–1563)를 통해 본격화된 반종교 개혁은 입장을 더욱 경직시켰고, 스콜라 철학에 기반한 엄격한 가톨릭 정통성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예수회가 발전시킨 교육 시스템은 인문주의적인 교육 방식을 따랐다는 특징이 있다.

6. 역사학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후대의 역사학자들에게 풍부한 연구 주제이자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인문주의의 본질, 정치적 함의, 사회적 역할 등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제시되었다.

주요 논쟁 중 하나는 한스 바론이 제시한 '시민적 인문주의' 개념이다. 바론은 피렌체와 같은 이탈리아 도시 공화국들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공화주의적 가치와 결합된 특수한 형태의 인문주의가 발전했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주장은 이후 많은 비판과 재해석을 낳았다.

또한, 에우제니오 가린과 파울 오스카 크리스텔러와 같은 저명한 학자들 사이에서도 인문주의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 차이가 존재했다. 크리스텔러는 인문주의를 고전 문헌 연구와 수사학 능력 함양에 중점을 둔 학문 운동으로 본 반면, 가린은 인문주의가 스콜라 철학에서 벗어나 인간의 자유와 가능성을 탐구하는 더 넓은 철학적 의미를 지닌다고 강조했다.

이 외에도 러시아의 역사학자 이오시프 그리고레비치는 후기 인문주의에서 나타나는 사회 비판적 요소와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방식에 대한 반발을 중요한 특징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역사학적 접근과 해석들은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지닌 복합적인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6. 1. 바론 테제

한스 바론(1900–1988)은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용어인 "시민적 인문주의"를 만든 인물이다. 그는 1920년대에 이 용어를 처음 만들었는데, 주로 레오나르도 브루니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했다. 바론의 "테제"는 공화주의에 헌신하는 인문주의의 중심 흐름이 특히 피렌체베네치아에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독일 출신 역사가인 바론은 그의 대표 저서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기: 고전주의와 폭정 시대의 시민적 인문주의와 공화주의적 자유』에서, 시민적 인문주의가 1390년대 피렌체와 비스콘티 가문이 이끌던 밀라노 사이의 치열한 투쟁 이후인 1402년경에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페트라르카의 인문주의를 수사적이고 피상적인 활동으로 평가절하하며, 이 새로운 흐름이 공화국 국가와 그 자유를 "시민적 인문주의" 프로젝트의 중심에 두기 위해 봉건적이고 소위 "초월적인"(즉, 신성한) 중세의 이데올로기를 버렸다고 해석했다.[32] 출판 당시부터 논란이 많았던 "바론 테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많은 비판에 직면했다.

1960년대 역사학자 필립 제임스 존스와 페터 헤르데[33]는 바론이 "공화주의" 인문주의자들을 칭찬한 것이 순진하다고 보았다. 그들은 당시 공화국들이 바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덜 자유를 추구했으며, 실제로는 군주제만큼이나 비민주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제임스 헨킨스는 과두정에 고용된 인문주의자와 군주에게 고용된 인문주의자 사이에 정치적 가치의 차이가 특별히 크지 않았으며, 바론이 제시한 시민적 이상들은 다양한 형태의 정부를 섬기는 인문주의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며 "정치 개혁 프로그램은 페트라르카가 창시한 인문주의 운동의 핵심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론이 생각하는 공화국의 의미에서 '공화주의' 프로젝트가 아니며, 특정 정권 유형과 관련된 이데올로기적 산물도 아니다."[5]라고 주장한다.

6. 2. 가린과 크리스텔러

르네상스 시대의 저명한 학자들이었던 에우제니오 가린과 파울 오스카 크리스텔러는 학문적 경력 동안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다. 그러나 두 역사가의 관계가 원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본질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크리스텔러는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고전 부흥의 프로젝트로 보았다. 그는 고전 연구가 크게 증가했지만, 인문주의자들의 핵심은 '전문 수사학자'였으며 고전 학습은 이에 '부수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했다.[34] 그는 인문주의자들이 남긴 글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수사학적 이상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보았다.[34] 마찬가지로, 그는 철학에 대한 인문주의의 영향이나 특정 인물의 철학적 성과 역시 그들의 인문주의 활동에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했으며, 문법, 수사학, 시, 역사, 윤리를 인문주의자의 주요 관심사로 여겼다.

반면에 가린은 철학 자체가 끊임없이 진화하며, 각 시대의 철학은 당대 사상가들의 실천과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이 스콜라 철학의 틀에서 벗어나 새롭게 얻은 자유가 이러한 더 넓은 철학적 의미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35]

두 사람이 이러한 견해 차이를 보이던 시기에는, 인문주의에 대한 더 넓은 문화적 논의가 장-폴 사르트르와 마르틴 하이데거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1946년 사르트르는 ''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프랑스어''를 발표하며, '실존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 사상을 제시했다. 이는 인간이 먼저 존재하고 세상과 마주한 뒤 스스로를 정의하고 목적을 부여한다는 의미이다.[36] 하이데거는 사르트르의 글에 대한 답변에서 "인간이 인간답고 비인간적이지 않도록, 즉 그들의 본질 밖에 있도록 성찰하고 배려하는 것"이 휴머니즘이라고 정의했다.[37] 그는 휴머니즘 개념이 형이상학에 지배당하면서 쇠퇴했고 철학적 가치를 잃었다고 주장하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명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38]

이러한 논의는 르네상스 연구 영역 밖에서 이루어졌지만 (인문주의 용어의 변천에 대해서는 인문주의 문서 참조), 크리스텔러와 가린의 의견 불일치와 무관하지 않았다. 한때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크리스텔러는[39]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철학으로 평가절하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 가린의 저서 ''Der italienische Humanismusde''는 하이데거가 사르트르에 대한 답변을 발표할 즈음 출판되었는데, 루비니(Rubini)는 이를 "역사적 인문주의와 철학적 신-인문주의 사이의 선제적 대결을 연출하려는 시도"로 해석한다.[40] 가린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자신의 근본적인 자유를 갑자기 깨닫게 된 사람들에게 실존주의자들이 귀속시킨 특징적인 불안"과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보며, 철학과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더욱 밀접하게 연결했다.[35]

제임스 헨킨스는 크리스텔러와 가린의 논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크리스텔러는 전문 철학자를 매우 형식적이고 방법론에 집중하는 존재로 보았다.[35] 그에 비해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고전에서 영감을 받은 ''파이데이아''(paideia) 또는 ''인스티튜티오''(institutio)를 통해 철학 분야를 개선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전문 수사학자였으며 철학 실천이 그들의 주된 목표나 기능은 아니라고 보았다.[34] 반면 가린은 인문주의-철학자들이 '유기적 지식인'이 되기를 기대했다. 이는 경직된 학파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들 이전의 중세 전통과 단절된 삶과 교육에 대한 공유된 관점을 가지는 것을 의미했다.[35]

6. 3. I.R. 그리고레비치

러시아의 역사학자이자 스탈린주의 암살자로 알려진 이오시프 그리고레비치는 후기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특징으로 "추상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고 방식에 대한 반항과 전쟁, 빈곤, 사회 부조리에 대한 관심"이라는 두 가지를 들었다.[41]

7. 인문주의자

르네상스 시대의 주요 인문주의자 목록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목록 문서를 참고하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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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논문 The Changing Concept of the "Studia Humanitatis" in the Early Renaissance 1992
[8] 간행물 "La patria, la famiglia e la giovinezza di papa Niccolò V" 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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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논문 Petrarch and Innovation: A Note on a Manuscript https://www.jstor.or[...] 198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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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웹사이트 Byzantines in Renaissance Italy http://www.the-orb.n[...] 201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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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문서 She was the author of ''Miroir de l'ame pecheresse'' (''The Mirror of a Sinful Soul''), published after her death, among other devotional poetry. See also "Marguerite de Navarre: Religious Reformist" in Jonathan A. Reid, [http://www.brill.nl/print.aspx?partid=210&pid=18212 ''King's sister--queen of dissent: Marguerite of Navarre (1492–1549) and her evangelical network''] {{dead link|date=June 2018|bot=medic}}{{cbignore|bot=medic}} (''Studies in medieval and Reformation traditions, 1573–4188''; v. 139). Leiden; Boston: Brill, 2009. (2 v.: (xxii, 795 p.) {{ISBN|978-90-04-17760-4}} (v. 1), 9789004177611 (v.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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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문서 See note two, above.
[20] 문서 Davies, 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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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문서 See Jill Kraye's essay, "Philologists and Philosophers"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Renaissance Humanism'' [1996], p.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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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간행물 The Last Italian Philosopher: Eugenio Garin (with an Appendix of Documents).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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