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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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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1618년 프로이센 공국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동군 연합으로 시작되었다. 호엔촐레른 가문은 1563년 프로이센 공국의 상속권을 얻었고, 1618년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아 동군 연합을 이루었다. 30년 전쟁으로 황폐화되었지만,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상비군을 창설하고 행정 개혁을 통해 국가를 재건했다. 프리드리히 3세(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는 프로이센을 왕국으로 승격시켰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지리적으로 분산된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영향을 받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위그노를 받아들이는 등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쳤으며, 아프리카와 카리브해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경제적 성장을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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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일반 명칭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상태국가 연합
상태 설명개인 연합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프로이센 공국 간의)
시대독일 민족 신성 로마 제국
시작 년도1618년
종료 년도1701년
시작 날짜8월 27일
종료 날짜1월 18일
시작 사건개인 연합
종료 사건왕국으로 승격
수도베를린쾨니히스베르크
종교인구: 루터교
선제후-공작: 칼뱅주의
정부 형태봉건 군주제
국기 및 문장
브란덴부르크의 문장
브란덴부르크의 문장
프로이센 공국의 문장
프로이센 공국의 문장
정치
통치자 칭호선제후 겸 공작
지도자요한 지기스문트
지도자 통치 기간1618년–1619년
지도자게오르크 빌헬름
지도자 통치 기간1619년–1640년
지도자프리드리히 빌헬름
지도자 통치 기간1640년–1688년
지도자프리드리히 3세 (프리드리히 1세)
지도자 통치 기간1688년–1701년
역사
사건프로이센 독립
사건 날짜1657년 9월 19일
구성 지역
이전 국가프로이센 공국
이전 국가 국기Flag of Ducal Prussia.svg
이전 국가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이전 국가 국기Flag of Brandenburg (1660–1750).svg
이전 국가클레베 공국
이전 국가 국기Die greue van Cleue ende vander Marck.svg
이전 국가민덴 주교후국
이전 국가 국기Wappen Bistum Minden.png
이전 국가포메라니아 공국
이전 국가 국기POL księstwo pomorskie COA.svg
이전 국가마르크 백국
이전 국가 국기Mark wapen.svg
이전 국가라벤스베르크 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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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국가할버슈타트 로마 가톨릭 교구
이전 국가 국기Wappen Bistum Halberstadt.png
이전 국가마그데부르크 대주교국
이전 국가 국기Coat of Arms of the Archbishopric of Magdeburg.svg
이전 국가라우엔부르크 및 뷔토우 지역
이전 국가 국기Banner of Poland-Lithuania.svg
이전 국가스타레 드라우스코 (드라하임)
계승 국가프로이센 왕국
계승 국가 국기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803-1892).svg
현재 국가
현재 국가독일
현재 국가폴란드
언어
사용 언어독일어, 폴란드어

2. 역사

30년 전쟁 (1618년~1648년) 동안 브란덴부르크는 큰 피해를 입었다. 선제후가 전쟁 중 세 번이나 편을 바꾸면서 개신교와 가톨릭 양측 군대에 유린당하고 식량을 빼앗겼다. 인구 절반 이상이 죽거나 도망쳤고, 베를린 등 주요 도시는 폐허가 되어 복구에 수십 년이 걸렸다.[9][10]

베스트팔렌 조약 (1648년)으로 전쟁이 끝나면서 브란덴부르크는 민덴 주교령과 할버슈타트 주교령을 얻었고, 힌터포메라니아(1653년 슈테틴 조약으로 병합)와 마그데부르크 공국(1680년 병합) 상속권을 인정받았다.[15][17] 북방 전쟁 중인 1657년 브롬베르크 조약으로 프로이센을 폴란드에서 독립시키고 라우엔부르크-뷔토와 드라임을 얻었다. 스쿠네 전쟁 강화 조약인 생제르맹 앙 레 조약 (1679년)으로 브란덴부르크령 포메라니아를 오데르강 하류까지 확장했다.[39][41]

17세기 후반,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통치기에 프로이센은 유럽 강대국 성장 기반을 다졌다. 1653년 상비군을 창설, 바르샤바 전투 (1656년), 페어벨린 전투, 쿠르스 호수 도하 추격전에서 승리했다. 브란덴부르크 해군과 해외 식민지인 브란덴부르크령 골드 코스트, 아르겐 섬도 이때 설립되었다. 1685년 포츠담 칙령으로 유럽 각지에서 추방된 개신교 신자(주로 위그노) 이민 유치에도 성공,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중앙 집권화가 추진되어 란트타크 영향력이 줄었다.[11][15][50]

프로이센 공국이 신성 로마 제국 밖 독립국이었기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프로이센 왕 승격을 목표로 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대북방 전쟁 동맹 교섭으로 합스부르크 가문 신성 로마 황제레오폴트 1세 승인을 얻어 1701년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1세로 즉위했다. 법률상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은 1806년 신성 로마 제국 해체까지 동군 연합이었으나, 1701년 신성 로마 황제의 브란덴부르크 종주권은 유명무실해져, 1701년 이후 브란덴부르크는 사실상 프로이센 왕국 일부였다. 프리드리히 1세 이후 역대 프로이센 왕은 중앙 집권화와 영토 확대를 추진, 17세기 여러 공국 집합 국가를 베를린 왕궁에서 통치되는 프로이센 주라는 중앙 집권 체제로 개혁했다.[50][51][52]

2. 1. 동군연합의 성립 (1618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은 1415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선제후였던 호엔촐레른 가문의 주요 분파의 중심지였다.[1] 1525년, 크라쿠프 조약에 의해 프로이센 공국은 튜턴 기사단 국가의 부분적인 세속화를 통해 만들어졌다.[1] 이 공국은 폴란드 왕국의 봉신이었으며, 호엔촐레른 가문의 방계 출신인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가 통치했다.[2] 1550년, 브란덴부르크 호엔촐레른 가문의 엘리자베스의 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안나 마리아는 알브레히트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고, 그의 후계자인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를 낳았다.[3] 1563년, 폴란드 왕실은 브란덴부르크 호엔촐레른 가문에 상속권을 부여했다.[3]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는 1568년 알브레히트가 사망한 후 프로이센 공작이 되었다.[3] 그의 어머니는 같은 해에 사망했고, 그 후 그는 정신 질환의 징후를 보였다.[3] 공작의 질병으로 인해,[4] 프로이센은 알브레히트의 조카[3] 호엔촐레른-안스바흐-예거스도르프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1577–1603)가 통치했다.[1] 1573년,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는 율리히-클레베-베르크의 마리 엘레오노레와 결혼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여러 딸을 두었다.[4]

1594년,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당시 14세였던 딸 프로이센의 안나 공작부인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프리드리히의 아들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요한 지기스문트와 결혼했다.[5] 이 결혼은 프로이센 공국뿐만 아니라 율리히-클레베-베르크 연합 공국의 상속권을 보장했다.[5] 1603년 게오르크 프리드리히가 사망하자 프로이센 공국의 섭정은 요아힘 프리드리히에게 넘어갔다.[1] 또한 1603년, 호엔촐레른 가문의 구성원들은 영토를 앞으로 내부적으로 분할하지 않기로 하는 게라 조약을 체결했다.[1]

1618년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가 사망하자 요한 지기스문트가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았지만,[6] 공국은 1656/7년까지 폴란드 왕관의 봉토로 유지되었다.[7] 요한 지기스문트는 1616년에 뇌졸중을 앓았고 그 결과 신체적, 정신적으로 심각한 장애를 겪었기 때문에, 그의 아내 안나가 요한 지기스문트가 47세의 나이로 두 번째 뇌졸중으로 사망한 1619년까지 그의 이름으로 프로이센 공국을 통치했다.[6]

2. 2. 게오르크 빌헬름의 치세 (1619년-1640년)

게오르크 빌헬름은 1619년부터 1640년까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이자 프로이센 공작이었다. 그는 작센 선제후국의 상작센 원에서의 지배를 깨뜨리려 했으나 실패했다.[8] 브란덴부르크와 작센의 적대감으로 인해 원의 방어가 효과적이지 못했고, 그 결과 30년 전쟁 동안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에 의해 유린당했다.[8]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


게오르크 빌헬름은 처음에는 중립을 주장했지만, 발렌슈타인의 군대가 주둔하게 되면서 쾨니히스베르크 조약 (1627년)을 통해 가톨릭-제국 진영에 합류하여 주둔군을 받아들여야 했다.[9] 스웨덴 제국이 전쟁에 참전하고 오데르강의 프랑크푸르트 전투에서 브란덴부르크로 진격해오자, 게오르크 빌헬름은 다시 중립을 주장했다.[10] 그러나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상당한 영토를 점령하고 베를린의 성벽 앞에 군대를 집중시켜 게오르크 빌헬름이 스웨덴의 동맹국으로 참여하도록 강요했다.[10]

게오르크 빌헬름은 동맹을 맺지는 않았지만, 스웨덴에 통행권, 두 개의 요새 및 보조금을 제공했다.[10] 그 결과, 로마 가톨릭 군대가 브란덴부르크와 다른 호엔촐레른 영토를 반복적으로 유린했다.

30년 전쟁에서 브란덴부르크는 큰 피해를 입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3번이나 진영을 바꾸었기 때문에 브란덴부르크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양쪽 군대에 유린당하여 식량을 빼앗겼고, 국민의 절반 이상이 살해되거나 도망쳐야 했으며, 베를린 등 주요 도시가 폐허가 되어 복구에 수십 년이나 걸렸다.

2. 3.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치세 (1640년-1688년)

30년 전쟁 동안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였던 게오르크 빌헬름의 뒤를 이어 1640년에 즉위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대선제후"('Der Große Kurfürst')라는 칭호를 얻었다.[11] 그는 칼뱅주의 교육, 네덜란드 공화국 장기 체류, 스웨덴의 구스타브 아돌프와의 만남 등을 통해 성격이 형성되었다.[11]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전쟁으로 인한 정치, 경제, 인구 위기 속에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을 물려받았다.[11] 즉위 후 군대를 해산했다가 1643/44년에 다시 군대를 일으켰다.[12] 1641년 스웨덴과의 휴전 및 중립 협정 체결 여부는 논란이 있지만, 그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성장을 이룩한 것은 분명하다.[13]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스웨덴 제국프랑스와 함께 보증국이 되었고, 발트해 지배를 위한 거점 확보를 추진했다.[14] 이는 오데르강 하구 슈체친 통제권을 얻으려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야망을 좌절시켰다.[15]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은 그림니츠 조약 (1529)을 통해 포메라니아 공작령의 포메라니아 가문 단절 시 상속권을 보장받았으나, 보기슬라프 14세는 슈테틴 조약 (1630)으로 스웨덴에 통제권을 넘겼다.[12][16] 베스트팔렌 조약과 슈테틴 조약 (1653)에 따라 포메라니아는 분할되었고, 스웨덴은 서부(스웨덴령 포메라니아)를, 브란덴부르크는 동부(선포메라니아)를 획득했다.[17]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이에 불만을 품고 포메라니아 전체 획득을 외교 목표로 삼았다.[18]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할버슈타트 주교령, 민덴 주교령을 받고 마그데부르크 대주교령 상속권을 얻었다.[15] 데렌부르크 영주국, 레겐슈타인 백국, 클레텐베르크 영주국, 로라 영주국 등 소규모 영토도 획득했다.[17] 이는 합스부르크 가문 견제를 위한 프랑스의 지원 덕분이었으며, 장기적으로 독일 내 왕국 건설의 발판이 되었다.[15]

프로이센 신분회가 1663년 쾨니히스베르크 성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제2차 북방 전쟁은 스웨덴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침공으로 시작되었다.[32]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린스크 조약으로 왕립 프로이센을 보호했으나, 쾨니히스베르크 조약에서 스웨덴과 동맹을 맺고 스웨덴의 칼 10세 구스타브로부터 프로이센 공국과 에름란트를 봉토로 받았다.[33][34][35] 바르샤바 전투 (1656년) 승리로 선제후의 국제적 명성이 높아졌고, 라비아우 조약에서 프로이센 공국과 에름란트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얻었다.[36] 라드노트 조약에서는 대폴란드 할양이 약속되었다.[36]

반스웨덴 연합 우세 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벨라우-브롬베르크 조약에서 폴란드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가 프로이센 주권을 확인하여 입장을 바꾸었다.[5] 호엔촐레른 왕조 단절 시 공국은 폴란드로 반환될 예정이었다.[37] 프로이센 공국 주권은 올리바 평화 조약에서 확인되었다.[5]

1677년 슈체친 포위전


프랑코-네덜란드 전쟁 발발 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네덜란드 동맹국으로 참전했다.[39] 프랑스의 클레페 공작령 점령 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여 철수를 얻어냈다.[39] 신성 로마 제국 참전 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다시 제국군에 합류했다.[39] 프랑스는 스웨덴 제국에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격을 압박했고, 스웨덴의 칼 11세는 우커마르크를 점령하여 스칸 전쟁이 시작되었다.[40]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페르벨린 전투 (1675년)에서 스웨덴군 후방과 마주쳐 승리했다.[41] 이는 상징적 중요성이 큰 승리였다.[42] "대 선제후"는 반격하여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를 통해 퇴각하는 스웨덴군을 추격했다.[43]

대 썰매 질주 (1678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얼어붙은 쿠로니아 사주를 건너 스웨덴군을 추격; 빌헬름 심머의 프레스코, ca. 1891


폴란드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 공작령 종주권 회복을 계획했다.[44] 프랑스 지원 약속에도 불구, 폴란드-오스만 전쟁 종결 실패, 교황청, 귀족, 마그나트들의 반대로 계획은 좌절되었다.[45][46] 주라브노 조약으로 폴란드-오스만 전쟁 종식 후, 소비에스키는 황제 편에 섰고, 프로이센 원정 계획은 폐기되었다.[47][46]

1678년까지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대부분을 점령했고, 뤼겐은 덴마크-노르웨이가 점령했다.[43] 대 썰매 질주로 프로이센에서 스웨덴군을 몰아냈으나,[48]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네이메헌 조약 후 군대를 동원,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생제르맹 앙 레 조약 (1679년)을 통해 ''전쟁 전 상태''로 복귀했다.[39] 스칸 전쟁은 오데르강 하류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우안 일부 합병 외에 사소한 영토 이득만 가져왔지만, 선제후에게 큰 명성을 안겨주었다.[41]

2. 4. 프리드리히 3세/1세의 치세 (1688년-1713년)

프리드리히 3세는 1657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49]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통치 말기, 생제르맹(1679) 이후 프랑스와 맺었던 우호 관계는 위그노 문제로 인해 악화되었다.[50] 1686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합스부르크 황제에게로 돌아서, 1686년 12월 22일에 동맹을 맺었다.[50] 이 동맹을 위해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슐레지엔에 대한 권리를 합스부르크에게 넘겼고, 그 대가로 노이마르크와 경계를 맞댄 슐레지엔의 슈비부스 백작령을 받았다.[50] 왕세자로서 협상에 참여한 프리드리히 3세는 자신이 권력을 잡으면 동맹을 지속할 것을 합스부르크에게 확신시켰고, 결국 1694년에 슈비부스를 합스부르크에게 반환하는 수정 조항을 비밀리에 체결했다.[50]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합스부르크의 동맹으로 남았으며, 프랑스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여러 번 군대를 파견했다.[50]

1693년 프리드리히 3세는 의 합스부르크 궁정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일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했고,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지만 왕으로의 승격은 그의 주요 목표로 남아 있었다.[50] 예상되는 지위 상승은 단순히 장식적인 목적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50] 프리드리히 3세는 선제후라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가 30년 전쟁 중인 1623년에, 베스트팔렌 조약 (1648)에서 팔라티네이트 선제후가, 그리고 하노버 왕가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1692년에 획득하여 선제후 클럽은 9명의 구성원을 가지게 되었고, 그 중 6명은 세속 군주였으며, 더 많은 변화가 예상되었다.[51][52] 선제후들 중,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2세는 1697년에 폴란드 왕위를 확보했고, 하노버 왕가는 영국 왕위 계승을 확보했다.[52] 프리드리히 3세의 관점에서 지위의 정체는 권력의 상실을 의미했고, 이러한 관점은 레이스베이크 조약 (1697)에서 유럽 왕족들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주장을 무시했을 때 확인되는 듯했다.[52]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 공국을 왕국으로 승격시키기로 결정했다.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황제와 보헤미아 왕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제국 밖에 있었고 호엔촐레른은 그 위에 완전한 주권을 가지고 있었다.[52] 이 계획의 실현 가능성은 그의 일부 고문들에 의해 의심되었고, 어쨌든 왕관은 유럽 귀족, 특히 신성 로마 황제로부터 인정받아야 가치가 있었다.[52] 1699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곧 발발할 예정이었으므로 동맹이 필요했던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와 협상이 재개되었다.[52] 1700년 11월 16일, 황제는 왕관 조약에서 프리드리히의 대관식을 승인했다.[52] 로열 프로이센과 에름란트를 소유하고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와 관련하여,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 '의' 왕이 아닌 프로이센 '안의' 왕으로 불리기로 합의했다.[53] 영국네덜란드 공화국은 황제와 유사한 이유로 대관식 전에 프리드리히의 승격을 받아들였다.[54]

1701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프리드리히 3세(1세)가 프로이센 안의 왕으로 대관식 후 성유를 받는 모습


1701년 1월 17일, 프리드리히는 왕실 문장인 프로이센 흑수리와 좌우명인 "각자에게"를 헌정했다.[55] 1월 18일, 그는 쾨니히스베르크 성에서 바로크 양식의 의식으로 자신과 부인 조피 샤를로테에게 왕관을 씌웠다.[55]

1월 28일, 아우구스트 2세는 프리드리히를 축하했지만, 폴란드 왕으로서가 아니라 작센 선제후로서였다.[53] 2월에, 덴마크-노르웨이대북방 전쟁에서 동맹을 희망하며 프리드리히의 승격을 받아들였고, 러시아 차르국 역시 1701년에 승인했다.[54] 신성 로마 제국의 대부분의 군주들도 따랐다.[56] 스웨덴의 칼 12세는 1703년에 프리드리히를 프로이센 왕으로 받아들였다.[54] 1713년, 프랑스스페인도 프리드리히의 왕실 지위를 인정했다.[56]

대관식은 도이치 기사단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1525년 프로이센 공국의 세속화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 대한 주장을 옹호했다.[54] 대영주는 황제의 궁정에서 항의했고, 교황은 모든 가톨릭 섭정들에게 프리드리히의 왕실 지위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회람을 보냈다.[53] 1787년까지 교황 문서들은 프로이센 왕들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으로 계속 칭했다.[53]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은 프리드리히의 왕실 지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로열 프로이센의 폴란드 지역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여겼으며, 1764년에야 프로이센 왕위를 받아들였다.[57][58]

브란덴부르크는 여전히 법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으므로,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 간의 개인적 연합은 1806년 제국 해체까지 기술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러나, 황제의 권력은 이 시점에는 단지 명목상이었고, 브란덴부르크는 곧 프로이센 왕국의 '사실상' 지방으로 간주되었다. 프리드리히는 제국의 일부였던 자신의 영토 내에서는 여전히 선제후였지만, 형식적인 방식으로만 황제의 지배권을 인정했다.

3. 지리 및 지형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핵심 지역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이었다. 1415년 호엔촐레른가가 변경백국을 취득할 당시 알트마르크, 노이마르크, 우커마르크, 프리그니츠, 미텔마르크 등 5개 지역으로 구성되었다.[92] 1614년 크산텐 조약을 통해 마르크 공국, 클레베 공국, 라펜스베르크 후국이 브란덴부르크에 편입되었고,[93] 1618년에는 프로이센 공국이 브란덴부르크와 동군연합을 이루게 되었다.[94]

1598년 니콜라우스 로이팅거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숲이 우거진 평지, 대부분은 늪지대'라고 묘사했다.[92] 17세기 중반 이전 브란덴부르크는 내륙국가여서 바다에 면한 항구가 없었고, 엘베강오데르강이 각각 북해발트해로 흘러갔지만, 둘을 잇는 수로가 없어 베를린이나 포츠담 같은 핵심 도시는 강을 이용하기 어려웠다.[92] 브란덴부르크는 와인, 맥주, 염료, 무명, 모직, 비단 등 독일 제조업 주요 산지에서 벗어났고, 16세기 핵심 광물 자원이었던 은, 구리, 철, 아연, 주석의 보급도 원활하지 못했다.[95] 농업의 경우 불모지와 습지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지만,[96] 알트마르크와 우커마르크, 그리고 베를린 서부의 하펠란트 등 충분한 경작지를 가진 지역도 있었다.[92]

프로이센 공국은 북쪽으로는 리투아니아 대공국, 남쪽으로는 폴란드 왕관령과 접했다. 수도는 쾨니히스베르크였는데, 16세기 후반 리가그단스크와 더불어 발트해에서 연간 출입 선박이 100척 이상이었던 항구였고,[98] 밀, 목재, 삼, 모직 교역을 비롯하여[99] 피치, 타르, 잿가루 등을 수출해 번영을 누렸다.[100] 쾨니히스베르크 외에도 메멜[102], 라비아우, 마리엔베르더 등이 주요 도시였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영토는 핵심 지역인 브란덴부르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율리히-클레베 상속을 통해 물려받은 영지들은 라인강 지역에 인접한 신성 로마 제국의 변방이었고, 국경을 접한 네덜란드 공화국 및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긴밀히 연결되었다.[92] 반면 프로이센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 외부 지역이었으며, 베를린과 쾨니히스베르크는 약 700km 떨어져 있었다.[92] 하지만 두 지역 모두 국제적으로 긴장감이 높은 지역과 인접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92]

4. 정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정치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과 프로이센 공국이 각각 신성 로마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봉신이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선출권을 가진 7대 선제후국 중 하나였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높은 지위를 가졌다. 1356년 금인칙서에 따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은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제국의회에서 시종관으로 참여했다.[103] 프로이센 공국은 1525년 크라쿠프 조약에 따라 폴란드 왕국의 봉신이었지만, 1660년 올리바 조약으로 독립했다. 폴란드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프로이센 공국은 황금의 자유를 통해 폴란드 국왕 선출권을 가졌고, 종교의 자유도 보장받았다.[104]

1660년대부터 브란덴부르크의 행정은 지방 엘리트 집단으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했다. 당시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동군연합이었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을 하나의 정치적 연합체로 만들고자 했다.[105] 1650년대부터 선제후는 토지 관리 방식을 변경했고, 1660년대에는 토지관리국을 두어 새로운 관리 체계를 만들었다.[106] 또한 소비세를 도입하고 중앙정부의 지시를 받는 세무위원회에서 세금 징수를 감독했다.[107] 이러한 중앙정부의 변화에 따라, 신분제의회 의원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지방 정부의 잘못을 바로잡고 균형을 맞추는 것이라고 생각했다.[108] 그러나 1680년대 이후 신분제의회 총회는 점차 줄어들었고, 알트마르크와 미텔마르크에서는 1683년 이후 귀족 총회가 열리지 않았다.

5. 군사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전쟁 경험을 통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상비군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12][28] 전통적으로 예비군을 모집하고 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영지의 특권이었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영지와는 독립적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상비군을 구상했다.[12] 1653년 7월 26일 ''란트타크''(Landtag, 지방 의회) 칙령을 통해 영지들의 동의와 필요한 재정적 기여를 얻는 데 성공했다.[28] 그 대가로 면세, 영지에서 관할권과 경찰권 행사 (''Patrimonialgerichtsbarkeit'', 영주 재판권), 농노제 (''Leibeigenschaft'', ''Bauernlegen'', 농민 예속) 유지 등 기사들의 몇 가지 특권을 확인했다.[29]

처음에 영지들의 기여는 6년으로 제한되었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그 이후에도 영지들이 계속 지불하도록 강요했고 기여금을 징수하기 위한 전담 부서를 만들었다.[29] 기여금은 1662년 영지들에 의해 확인되었지만, 1666년 칙령에 의해 부동산세에서 소비세로 변경되었다.[29] 1657년부터는 도시들이 군인 대신 군대에 금전적 지불을 해야 했고, 1665년부터는 영지들이 추가 지불을 통해 군인 제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29] 초기 군대 규모는 8,000명이었지만[30] 1688년까지 25,000명에서 30,000명으로 증가했다.[12][30] 그 무렵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영지와 독립적으로 군대에 자금을 지원하는 두 번째 목표 또한 달성했다.[12] 1688년까지 군사 비용은 에 달했으며, 이는 국가 예산의 절반에 해당했다.[12]

스칸 전쟁 중 1675년 페르벨린 전투에서 승리하고 스웨덴령 포메른을 침공한 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해군 창설을 결심했다. 그는 네덜란드 상인이자 선주인 벤자민 라울레와 면담했고, 라울레는 이듬해 브란덴부르크로 이주하여 해군과 식민지 사업을 맡게 되었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해군은 처음에는 라울레로부터 임대받은 배 10척으로 창설되었지만, 슈테틴 포위전, 슈트랄준트 포위전, 뤼겐 섬 침공 등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라울레는 동프로이센필라우 (현 러시아 영토 발티스크)에 조선소를 설립하고 항구를 증축했다.

1679년 생제르맹앙레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된 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해군은 발트해에서 스웨덴 선박을 나포하는 데 집중했다. 1680년에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선박 6척이 오스텐데 부근에서 스페인 선박 "카를로스 2세"를 나포하여 스페인이 약속한 원조금을 지불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카를로스 2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으로 개명되어 대서양 함대의 기함이 되었으나, 은을 적재한 스페인 선박을 나포하는 임무는 실패했다. 이후 해군 규모가 확대되면서 배를 임대하는 대신 구입 또는 건조하게 되었고, 1684년 10월 1일에는 그때까지 임대하고 있던 배를 에 구입했다. 같은 해 동프리슬란트의 엠덴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해군의 기지가 되었으며, 필라우의 조선소 일부, 제독 저택, 종업원용 목조 교회가 엠덴으로 이동했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해군[70]
함종함선 수
1675년1680년1684년1689년1696년1700년
프리깃615161264
플루트103420
스노우015410
갤리엇054210
요트144555
기타112143
1669년 시점의 유럽 함선 수: 25,000[71]
1669년 시점의 네덜란드 함선 수: 16,000[71]


6. 외교

게오르크 빌헬름은 30년 전쟁에서 중립을 표명했지만,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이끄는 황제군의 위협에 굴복하여 1627년 쾨니히스베르크 조약으로 가톨릭 측에 가담했다.[9] 1630년 스웨덴 제국이 참전하자, 게오르크 빌헬름은 다시 중립을 표명했지만,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게 굴복하여 스웨덴 측으로 참전했다.[10] 그러나 이는 가톨릭 연맹을 적으로 돌리는 것을 의미했고, 브란덴부르크는 다시 가톨릭 측 군대에 유린당했다.

164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즉위 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포메른의 슈체친 영유는 실패했지만, 민덴과 할버슈타트의 2개 주교령을 병합했다.[15][19][20][21]

1655년 북방 전쟁이 발발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린스크 조약에 근거하여 왕령 프로이센을 지켰지만, 스웨덴군에 대항할 수 없어 쾨니히스베르크 조약으로 스웨덴과 동맹을 체결했다.[35] 그러나 전황이 반 스웨덴 측에 유리하게 되자, 벨라우 조약과 브롬베르크 조약으로 프로이센 공국의 완전 독립을 승인받고 반 스웨덴 측으로 돌아섰다.[5] 북방 전쟁은 1660년 올리바 평화 조약으로 종결되었고, 프로이센 공국의 독립이 재확인되었다.[5]

1672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에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네덜란드 공화국과 동맹을 맺었지만, 프랑스에게 클레페 공작령을 점령당했다.[39] 1673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랑스와 원조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군을 철수시켰다.[39] 신성 로마 제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자,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다시 제국 측에 붙었다.[39] 프랑스는 동맹국 스웨덴 제국에 압력을 가하여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을 공격하게 했고, 1674년 스칸 전쟁이 발발했다.[40]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페르벨린 전투 (1675년)에서 승리하고 반격을 시작하여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를 통해 스웨덴군을 추격했다.[41][42][43]

폴란드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는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종주권 회복을 위해 1675년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했다.[44] 그러나 폴란드 국내의 반대로 계획은 좌절되었고, 얀 3세는 황제 측에 붙었다.[45][46][47]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대부분을 평정하고, 대 썰매 질주로 스웨덴군을 프로이센에서 몰아냈다.[43][48] 그러나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네이메헌 조약으로 전쟁을 종결시키고 스웨덴을 지원하여,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생제르맹 앙 레이 조약 (1679년)으로 전쟁 전의 원상 회복에 동의해야 했다.[39]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는 위그노 문제로 프랑스와 관계가 악화되자, 1686년 합스부르크 황제와 동맹을 체결했다.[50] 프리드리히는 에서 왕으로의 승격을 주장했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앞두고 동맹국이 필요했던 황제는 1700년 왕관 조약으로 대관식에 동의했다.[52] 폴란드-리투아니아와 관련하여,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 '의' 왕이 아닌 프로이센 '안의' 왕으로 불리기로 합의했다.[53] 영국네덜란드 공화국도 같은 이유로 승격에 동의했다.[54]

1701년 1월 18일, 쾨니히스베르크 성에서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 안의 왕으로 즉위했다.[55] 덴마크-노르웨이러시아 차르국도 동맹을 희망하며 승인했고,[54] 신성 로마 제국의 대부분 군주들도 따랐다.[56] 1703년 스웨덴의 칼 12세가, 1713년 프랑스스페인도 왕실 지위를 인정했다.[54][56] 도이치 기사단과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반대했지만, 1764년에야 프로이센 왕위를 받아들였다.[54][57][58]

7. 경제

30년 전쟁으로 브란덴부르크는 큰 피해를 입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전쟁 중 세 번이나 진영을 바꾸면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양측 군대에 의해 유린당하고 식량을 빼앗겼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살해되거나 도피했으며, 베를린 등 주요 도시는 폐허가 되어 복구에 수십 년이 걸렸다.[15][19]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브란덴부르크는 민덴 주교령과 할버슈타트 주교령을 획득했고, 힌터포메라니아와 마그데부르크 공국의 상속권을 인정받았다.[20][21]

전쟁 후 재건 노력이 이루어졌지만, 일부 지역은 18세기 중반까지 전쟁 전 인구 밀도를 회복하지 못했다.[19] "대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국가 재건을 위해 해외 무역 진출을 시도했다. 그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인도 회사 설립을 시도하고, 네덜란드 제독 아르눌트 하이스엘스 판 리어를 고문으로 기용했다.[67][68]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제후들에게 참가를 호소했지만, 황제는 다른 유럽 열강의 이익을 해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거절했다.[69] 165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덴마크의 단스보르 요새와 트랑케바르를 매입하려 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1653년 조약이 무효화되었다.[67]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상비군 유지를 위해 영지들의 동의를 얻어 재산세를 징수했지만, 1666년 칙령을 통해 이를 소비세로 변경했다.[29] 1657년부터 도시들은 군인 대신 군대에 금전적 지불을 했고, 1665년부터는 영지들이 추가 지불을 통해 군인 제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29] 초기 군대 규모는 8,000명이었지만, 1688년에는 25,000명에서 30,000명으로 증가했다.[12][30] 1688년까지 군사 비용은 1.5조에 달했으며, 이는 국가 예산의 절반에 해당했다.[12]

8. 종교와 이민

포츠담 칙령


1613년,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는 루터교에서 칼뱅주의로 개종했지만, 'cuius regio, eius religio'(그 지역의 통치자가 종교를 결정한다) 규칙에 따라 영지들의 개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60] 1615년 2월 5일, 그는 루터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부여했고, 선제후의 궁정은 대부분 칼뱅주의를 유지했다.[60]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전쟁으로 황폐해진 경제를 재건하면서 종교적 망명을 제공하여 유럽 전역에서 정착민들을 유치했는데, 특히 15,000명 이상의 위그노들을 끌어들인 포츠담 칙령이 두드러졌다.[65]

9. 식민지

"대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30년 전쟁 이후 해외 무역을 통해 국가 재건 자금을 확보하고자 했다.[67] 그는 네덜란드의 해군과 식민지 건설 경험을 참고하여, 1679년 아프리카 기니에 식민지 건설 계획을 승인했다.[70]

1680년, 두 척의 배가 기니로 출발하여 1681년에 도착, 현지 추장들과 무역 협정을 맺었다. 이 조약에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요새를 건설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식민 시대의 시작으로 간주된다.[73][74]

리베 피터스즈 베르쉬위에르의 1684년 작품, ''브란덴부르크 해군, 공해에서''.


1682년 브란덴부르크 아프리카 회사가 설립되어 식민지 원정을 지원했다.[75] 같은 해, 그로스프리드리히스부르크 요새가 건설되었고,[77] 1684년에는 도로테엔샨체 요새가 추가로 건설되었다.[78][79] 1685년에는 타카라라이 (현재 타코라디)에 요새를 건설하는 조약이 체결되었고,[79] 타크라마 근처에 로게 또는 조피-루이세-샨체 요새가 건설되었다.[79] 이 식민지는 약 50km의 해안선을 포함했으며, 브란덴부르크령 황금 해안으로 불렸다.[80]

아르갱 요새(1721)


서아프리카 해안(현재 모리타니의 아르갱 군도)에도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1685년, 원정대가 파견되어 아르갱 요새를 재건하고 원주민과 관계를 맺었다.[81][82] 1687년 프랑스의 공격을 격퇴하여 원주민과의 관계가 개선되었다.[83] 아르갱은 일시적으로 세계 최대의 노예 무역 항구 중 하나로 발전했다.[84]

아프리카 식민지를 통해 삼각 무역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카리브해에는 무역 기지가 없었다. 1685년 덴마크와 협정을 맺어 세인트토머스의 일부를 30년간 임차하여 기지로 사용했다.[86] 1686년 그로스프리드리히스부르크에서 온 노예들이 세인트토머스에 도착했다.[86]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샬럿 아말리에 근처 '브란덴부르게리'와 다른 영토를 할당받았다.[86] 1695년 프랑스군이 브란덴부르크 식민지를 약탈했다.[88] 1731년 브란덴부르크 아프리카 회사는 파산했고, 1735년 세인트토머스 섬을 포기했다.[89]

크랩섬, 피터섬, 토바고, 토르톨라섬, 신트 유스타티우스 등 다른 카리브해 섬들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90][91]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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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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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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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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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서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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