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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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치왕은 1895년 개화파 출신 윤웅렬의 차남으로 태어나,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의학 학위를 취득하고 세브란스 병원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대한산부인과학회 회장 등을 역임한 의학자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해방 이후에는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군진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대한의사협회 회장, 재향군인회 부회장 등을 지내며 사회 활동에도 헌신했으며, 1982년에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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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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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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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이름 | 윤치왕 |
한자 이름 | 尹致旺 |
로마자 표기 | Yun Chiwang |
호 | 남포(南圃), 성운(聖雲) |
일본식 이름 | 이토 지오(伊東致旺) |
출생과 사망 | |
출생일 | 1895년 2월 17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중부 견평방 전의감동계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82번지) |
사망일 | 1982년 12월 21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수정아파트 B동 901호 (감기로 인한 급성 폐렴과 만성 장염의 합병증) |
학력 | |
학력 | 일본 교토 제국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
경력 | |
직업 | 산부인과 의사, 외과 의사, 산부인과 의학자, 대학 교수, 기업가, 군인, 사회기관단체인 |
교수 |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대우교수 |
병원장 | 세브란스병원 제2대 원장 |
학회장 | 제1대·2대 대한산부인과학회 회장 |
기타 | 대한민국 보건사회부 의과학보건심의행정관 |
군 복무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49년 4월 17일 ~ 1960년 3월 8일 |
최종 계급 |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 소장 |
주요 지휘 | 육군군의학교 교장, 육군본부 군의무감, 육군 병원기지사령관, 육군 경남지구 위수사령관, 육군 제2관구사령관 |
참전 | 한국 전쟁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이모임(李慕姙) |
자녀 | 딸 윤선희(尹善姬), 아들 윤정선, 아들 윤경선, 아들 윤도선(尹燾善), 아들 윤훈선(尹薰善), 아들 윤연선(尹然善) |
아버지 | 윤웅렬 |
어머니 | 김정순 (생모), 전의 이씨 부인 (적모), 전주 이씨 부인 (계적모), 다옥 (서모) |
친척 | 할아버지 윤취동, 숙부 윤영렬, 사촌 형 윤치오, 사촌 형 윤치소, 사촌 형 윤치병, 5촌 조카 윤보선, 5촌 조카 윤일선, 5촌 조카 윤원선, 사돈 손원일, 사돈 손정도, 이복 조카 윤영선 |
형제 | 동복 아우 윤치창, 이복 형 윤치호, 이복 누나 윤경희 |
종교 |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회) |
수상 | |
훈장 및 표창 | 미국 군진의학회 명예회원 기장, 금성화랑무공훈장, 국방부 장관 공로표창장, 적십자 기장, 무성을지무공훈장, 육군참모총장 공로표창(2회), 미국 공로훈장 |
2. 생애
1895년 한성부에서 태어난 윤치왕은 윤웅렬의 아들이었으며, 어머니 김정순은 아버지의 첩이었다. 이복 형제로는 30살 연상인 윤치호가 있었다. 1911년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했으나, 1912년에 중퇴하고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4년에는 김규식의 권유로 영국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유학하였다.[2]
1927년부터 1944년까지 세브란스 의전 교수로 재직했고,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제2대 세브란스 병원 원장을 역임했다.[2] 1938년 흥업구락부 가입을 시도했으나, 이승만과의 개인적인 친분에도 불구하고 탈락하였다.[41] 1940년대에는 창씨개명을 하였고, 수산업과 광업에도 손을 댔으나 사기로 파산하였다.
1947년 대한산부인과학회의 전신인 조선산부인과학회 창립총회를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주관하고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2] 이듬해 제2대 회장으로 재선출되어 1949년까지 재임했다. 해방 이후, 194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겸 서울대 의대 제2부속병원장이 되었다가 1948년 사퇴하였다. 1947년 중앙의사회 창립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산부인과학, 마취학 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48년 육군 중령으로 임관하여 군의관으로 복무했고, 육군본부 군의무감으로 재직 중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4] 한국 전쟁 기간 중 의학생을 군의관으로 받아들여 의료지원을 했고, 마취학 보급에도 기여했다. 이후 육군군의학교 교장, 육군병원기지사령관, 육군 경남지구 위수사령관, 육군 제2관구사령관[5] 등을 역임했다. 1959년 소장으로 예편했고,[6] 1960년 정년 퇴역 후 산부인과 의사와 사회기관단체에서 활동했다.
1960년대 이후 대한재향군인회 부회장, 대한의학협회 회장, 대한결핵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82년 장염 합병증으로 사망하였으며, 향년 87세였다.
2. 1. 초기 활동
1895년 한성부에서 출생한 윤치왕은 윤웅렬의 아들이었으며, 어머니 김정순은 아버지의 첩이었다. 이복 형제로는 30살 연상인 윤치호가 있었다. 윤치왕은 1911년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했으나, 1912년에 중퇴하고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4년에는 김규식의 권유로 영국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유학하였다.[2]2. 1. 1. 출생과 가계
윤치왕은 1895년 2월 16일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堅志洞, 전동) 68번지에서 개화파 출신 무장 해평 윤씨 윤웅렬과 소실인 김정순(金貞淳)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했다. 그가 태어난 견지동은 조선시대 삼의사 중 하나였던 전의감이 있었기에 흔히 전동이라 불리었다.[14]1894년 2월 생이라는 견해도 있다. 자는 성운이고 호는 남포이다. 그는 30세 연상인 이복형 윤치호와 이복 누나 윤경희가 있었고, 아버지의 본부인 전주이씨 소생의 이복 누나도 1명 있었다. 그가 태어난 지 1년 뒤 이복형 윤치호의 아들이자 이복조카인 윤영선이 태어났다.
윤치왕과 그의 동생 윤치창의 어머니 김정순(金貞淳)은 아버지 윤웅렬의 소실로, 그 존재는 알려지지 않았다. 한동안 윤치호, 윤보선 등의 관련 자료에 윤치왕의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알려졌으나, 소년시절부터 교류했으며, 외과의사이자 여성 의사들을 양성한 정구충(鄭求忠)이 1985년 펴낸 저서 한국 의학의 개척자들 윤치왕 편에서 아버지 윤웅렬과 어머니 김정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언급하면서 알려졌다.
그의 집안은 조선 선조(宣祖) 때의 형제 정승 윤두수·윤근수 형제의 후손으로 윤두수의 둘째 아들이며 예조판서를 지낸 윤흔(尹昕)의 후손이었다.[15] 윤두수의 장남 윤방의 11대손인 순종비 순명효황후의 친정인 윤덕영·윤택영 일가와는 먼 일족이었다. 그의 집안은 18세기 중엽까지 명문 양반가문이었다가 그 뒤 고조부 윤발이 관직에 오르지 못하여 향반(鄕班)으로 몰락하였고 경기도 수원에 살았다.
고조부의 넷째 아들이던 증조부 윤득실은 생전 관직이 통덕랑에 이르렀지만 일찍 요절하였다. 윤득실의 대에 충청도 천안으로 이사하였다. 증조부의 셋째 아들인 할아버지 윤취동은 분가하여 천안에서 충청남도 아산에 자리잡았는데, 취동이 지중추부사에 올랐고, 취동의 아들인 아버지 윤웅렬, 삼촌 윤영렬이 무관으로 정2품 반열까지 오르면서 가세를 일으켰다. 그가 태어날 무렵 이복형인 윤치호는 개화파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 시대의 영의정 윤두수의 자손이다. 증조부는 윤득실, 할아버지는 윤취동[7], 아버지는 전 대한제국 군무대신·법무대신 윤웅렬, 숙부는 윤영렬, 형은 전 귀족원 조선·대만 칙선 의원·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윤치호, 동생은 전 주 영국 공사 윤치창이다. 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 윤치오, 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윤치소, 전 일본군 기병 중좌 윤치성, 윤치병, 윤치명, 전 내무부 장관 윤치영은 사촌이다. 아들은 윤연선, 사위는 전 내무부 장관 장석윤[7], 조카는 전 농림부 장관 윤영선이다. 전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 전 만주국 간도성 차장 윤명선, 전 대통령 윤보선, 그리고 윤원선, 윤택선[8]은 사촌 조카이다[9][10].
2. 1. 2. 유년기와 소년기
윤치왕은 소년기에 한학을 배웠다. 그러나 12살이 되던 1906년 아버지 윤웅렬의 뜻에 의해 아버지의 친구 이희덕의 딸 이모임과 결혼하였다. 1906년 3월 21일 아버지 윤웅렬은 아들 윤치왕의 조기 결혼을 결정했다. 이때 아버지 윤웅렬은 동생 윤치창을 이듬해 결혼시키려 했으나, 이복 형 윤치호가 아직 7살의 어린 아이라고 완강히 반대하여 무산되었다.[14]1912년 9월에 장녀 윤선희가 태어났고[14], 그 뒤에 아들 윤정선, 윤경선이 태어났으나 요절하였다. 1932년 도선, 1934년 훈선, 1936년 연선이 차례로 태어났다.[16]
윤치왕은 어려서 사택에 있는 서당에서 공부를 하다가 1906년 10월 이복형 윤치호 등이 미국 남감리회의 도움으로 개성에 한영서원을 설립하자, 한영서원(송도고등학교의 전신)으로 옮겨 공부를 하게 되었다.[17] 초창기의 한영서원은 소학교와 중학교 수준이었지만 영어반이 있었다.
한영서원에서 3년 동안 수학하고 경성 기독교청년회관의 중학교 일본어 과정에 입학하여 1910년 6월 경성 기독교청년회관 일어후과(日語後科)를 졸업하였다. 1911년 3월 관립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하였다.
2. 1. 3. 영국 유학
1911년 부친상을 당한 후, 1914년 김규식의 권유로 영국 유학을 떠났다.[2] 1925년 30세에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의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에서 귀국하기 전인 1929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1925년 10월 글래스고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의학사(Medicinae Baccalaureus, ChirurgiaeBaccalaureus) 학위를 받았고, 동시에 영국 의사 면허증을 받았다. 졸업 직후 윤치왕은 영국 왕립아동병원에 입사해 정형외과 외과의사(House Surgeon)로 1년간 근무했다.[25]
1927년 5월 이복 형 윤치호로부터 빨리 귀국하여 민족을 위해 봉사하라는 긴 편지와 함께 여비를 받았다.[31] 영국 왕립아동병원 정형외과 인턴 외과의사로는 생활비가 부족했고, 그는 이복 형 윤치호에게 생활비를 부탁했다. 인턴을 하면서 송금 요청이 잦아진 것도 윤치호가 귀국을 독촉하게 된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5]
1927년 5월 21일 영국 글래스고 항에서 출항하는 캐나디안 퍼시픽 운수(Canadian Pacific Company)의 기선 몬트카암이라는 배를 타고 5월 27일 캐나다 몬트리올에 도착하였다. 그는 미국의 실태를 보기 위하여 대서양을 건너서 아메리카로 간 뒤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서 올 계획을 세웠다. 5월 27일부터 15일간 캐나다 온타리오의 해밀튼, 나이아가라를 경유하여 기차로 뉴욕, 워싱턴 D.C., 볼티모어를 거쳐 시카고에 도착하였다. 6월 1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하와이 호노룰루, 일본 도쿄를 거쳐 시모노세끼 항에서 8월 21일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하였다.[32]
2. 2. 일제강점기 활동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윤치호 등 민족 지도자들이 총독부 당국에 투옥되었다. 형의 투옥에 충격받은 윤치왕은 일본인을 한국에서 몰아내려면 무력이 필요하다고 판단, 중국 사관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했다.[16] 1912년 봄 수원농림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갈 준비를 했다.[20] 1913년 9월 아버지 윤웅렬의 대상을 치른 후, 당시 쌀 한 가마에 3~4원 하던 때에 거금 2000KRW을 가지고 신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갔다. 김규식의 도움으로 미국인이 운영하는 장로교회 연합신학교 기숙사에 머물게 되었다.[20]위안스카이의 고문 모리슨 박사에게서 중국어를 배우면 중국 사관학교에 입학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고,[16] 중국어 과외 선생에게 하루 5시간씩 중국어를 배웠다. 6개월 만에 쉬운 중국어 회화가 가능하게 되었고,[21] 기독교 신자가 되어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찾아갔다.
1914년 김규식의 권유로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유학했다.[2] 이후 귀국하여 1927년부터 1944년까지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했으며, 1938년에는 제2대 병원장을 역임했다.
2. 2. 1. 귀국과 의사 활동
1925년 10월 윤치왕은 글래스고 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하고 의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동시에 영국 의사 면허증을 받았다. 졸업 직후 영국 왕립아동병원에 입사해 정형외과 외과의사로 1년간 근무했다.[25]1927년 5월 이복 형 윤치호로부터 빨리 귀국하여 민족을 위해 봉사하라는 긴 편지와 함께 여비를 받았다. 영국 왕립아동병원 정형외과 인턴 외과의사로는 수입이 부족했고, 이복 형 윤치호에게 생활비를 부탁했다. 인턴을 하면서 송금 요청이 잦아진 것이 윤치호가 귀국을 독촉하게 된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5]
1927년 5월 21일 영국 글래스고 항에서 출항하는 배를 타고 5월 27일 캐나다 몬트리올에 도착하였다. 그는 미국의 실태를 보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올 계획을 세웠다. 5월 27일부터 15일간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해밀튼, 나이아가라를 경유하여 기차로 뉴욕, 워싱턴 D.C., 볼티모어를 거쳐 시카고에 도착하였다. 6월 1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하와이 호노룰루, 일본 도쿄를 거쳐 시모노세키 항에서 8월 21일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하였다.[32]
이후 경성부 소공동 116번지에 살다가,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수동 128번지로 이사하여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무렵까지 거주하였다. 1937년 11월 26일 함경남도 북청군 신포읍 토성리 69에 해산물 가공 판매가 목적인 남포수산이라는 주식회사를 차렸다. 사장에는 자신이 취임하고, 동생 윤치창과 부인을 이사로, 유억겸을 감사로 초빙하였다. 그러나 해산물 공장 사업은 소득이 없었고 이후 윤치왕은 부동산 투자와 광산업에도 손을 댔다가 사기꾼에 의해 재산을 모두 탕진해 버렸다. 이 일로 그는 큰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 세브란스병원장직 제의가 들어온다.
1938년~1940년 제9대 세브란스 병원장을 지냈다.[40] 1938년 흥업구락부에 가입하려 하였으나 탈락하였다.[41] 탈락자 중 윤치왕은 이승만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다.[41] 흥업구락부에 가입하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조선총독부가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기독교 인사들을 탄압할 때 위기를 모면한다.
2. 2. 2. 구세단 병원장 재직
1938년~1940년 제9대 세브란스 병원장을 지냈다.[40] 사업 실패 등 여러 가지로 지쳐 있던 윤치왕은 1944년 세브란스 병원 교수직을 사임하였다. 심신을 회복하기 위해 단양, 안동, 영동 등 당시 조용하고 깨끗한 신흥 도시를 찾아 여행하던 중 영동에 일본인 사카모도가 운영하는 구세단병원을 방문하였다. 이 병원은 원래 1942년 구세군 담당 사관 전용섭의 노력으로 건립된 종합병원으로 65개의 침대가 있었는데, 내과의사 한 사람만 있고 시설이 미비해 적자운영을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윤치왕은 구세단장의 위임을 받아 이익금을 배분하기로 하고 영동구세단병원(永同救世團病院) 병원장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의 실력과 명성, 수완으로 얼마되지 않아 입원실은 환자로 꽉 차게 되었고, 매일 7~80명의 외래 환자들로 병원이 넘쳐났다.
2. 3. 해방 이후
일제강점기에 영국과 일본에서 유학 후 의사로 활동하다가 해방 뒤에는 서울대학교 의대 교수 겸 서울대학교 병원 제2병원 원장, 한국중앙의사회와 대한산부인과학회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육군 중령으로 임관하여 군의관으로 복무했고, 육군본부 군의무감으로 재직 중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한국 전쟁 기간 중 의학생을 군의관으로 받아들여 의료지원을 했고, 마취학 보급에도 기여했다.이후 육군군의학교 교장, 육군병원기지사령관 등으로 군의관 양성에 치중하였고 육군 경남지구 위수사령관, 육군 제2관구사령관 등을 지냈다. 1960년 3월 8일 예비역 육군 소장으로 정년 퇴역 후 산부인과 의사와 사회기관단체에서 활동했다.
2. 3. 1. 의학자 활동
1927년부터 1944년까지 세브란스 의전 교수로 재직했고,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제2대 세브란스 병원 원장을 역임했다.[2] 1947년 5월 10일에는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조선산부인과학회(대한산부인과학회의 전신) 창립총회를 주관하고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2] 이듬해 제2대 대한산부인과학회 회장으로 재선출되어 1949년까지 재임했다.해방 이후, 1946년 10월 22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겸 서울대 의대 제2부속병원장이 되었다. 1948년 4월 30일 서울대 의대 제2부속병원장직을 사퇴하였다.
1947년 3월에는 의료계의 통합을 위해 발족한 중앙의사회 창립준비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산부인과학, 마취학 교수로 출강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2. 3. 2. 군의관 복무와 한국전쟁
1948년 육군 중령으로 임관하여 군의관으로 복무했고, 육군본부 군의무감으로 재직 중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4] 한국 전쟁 기간 중 의학생을 군의관으로 받아들여 의료지원을 했고, 마취학 보급에도 기여했다. 이후 육군군의학교 교장, 육군병원기지사령관 등으로 군의관 양성에 치중하였고 육군 경남지구 위수사령관, 육군 제2관구사령관[5] 등을 지냈다. 1959년 3월 소장으로 예편했고,[6] 1960년 3월 8일 정년 퇴역 후 산부인과 의사와 사회기관단체에서 활동했다.1949년 8월 18일 육군 본부 의무감으로 임명되었고(1953년 9월 5일까지 재직), 1953년 5월 16일 소장으로 임명되었다.[4] 1956년 11월부터 제2군관구 사령관을 역임했다.[5]
2. 3. 3. 군의관 양성과 휴전
1953년 9월 5일 경상남도 마산의 육군 군의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어 군의관 배출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54년 3월 15일 부산에 새롭게 창설되는 병원기지사령부의 사령관으로 발령받았다. 기지사령부의 임무는 부산의 제5육군병원과 31정양병원, 그리고 울산의 제21육군병원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료기관을 감독하는데 의사는 단 한 사람뿐이었고, 장비와 인원도 뜻대로 충원되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지만, 윤치왕은 기지사령관으로서 사적인 정형외과병원의 창설을 방지했으며 의지제작창을 뜯어가는 것을 막았다.[50]이 무렵 육군중앙병리연구소 시설을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이관시키는 것을 지원, 1956년 11월 1일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개원에 큰 도움을 주었다. 육군병원기지사령부의 사령관으로 근무하던 중인 1954년 6월 5일 윤치왕은 경남지구 위수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발령하였으나, 1955년 1월 1일까지는 경남 위수사령관으로 있으면서도 병원기지사령부 사령관 임무를 같이 보았다.[50]

1955년 4월 4일 205병기대대부에 파견되었다가 되돌아온 뒤, 그해 6월 20일에 육군교육총본부(육군교육사령부의 전신)로 파견되었다.[50] 1956년 11월 16일 육군 제2군관구 사령관으로 발령되었다.[50] 그러나 그를 사령관에 임명한 것에 대해 국회 등에서 반발이 일어나 윤치왕은 임명 6개월 만인 1957년 5월 20일 제2군관구 사령관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1957년 12월 10일 육군본부로 보직 발령을 받았다.[51]
10년 동안의 군대 생활 중 윤치왕은 을지무공훈장 2회, 화랑무공훈장 1회, 방위포장, 미국 공로훈장, 데마크 적십자사 기장 등을 받았다.[52] 1953년 9월 육군 군의학교 교장, 1954년 3월 병원기지사령부 사령관, 1954년 6월 경남지구위수사령관, 1956년 11월 육군 제2군관구 사령관을 역임하고 1960년 3월 8일 소장으로 정년 퇴역하였다. 그의 퇴역은 대한민국 창군 이래 최초의 정년 퇴역이기도 했다.
2. 3. 4. 퇴역 이후
1960년 3월 8일 예비역 육군 소장으로 정년 퇴역하였다. 이는 대한민국 창군 이래 최초의 정년 퇴역이었다. 그해 11월 모친상을 당하였다.[52]이후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에 한양산부인과병원(漢陽婦人科病院)을 개원, 개업의로 활동했다. 뒤에 인천 부평으로 이동, 윤치왕산부인과를 개원하고 개원의로 활동했다.
1960년 자유장교단을 조직하고 단장을 지냈다.[53] 2월 27일 이종훈(李宗勳, 예비역 육군 중령), 이황재(李皇載, 방위군 중령), 이주성(李柱成, 방위군 소령), 최광선(崔光善, 헌병 상사 출신) 등과 제대장병들의 권익 향상을 위한 조직 결성을 논의했다. 3월 5일 '대한제대장병친목회(大韓除隊將兵親睦會)'를 결성하고 회칙을 마련했다.[54] 3월 15일 3·15 부정선거로 인한 학생 데모 발생 후, 자유장교단장 윤치왕은 김호규(金好圭, 예비역 육군 소령), 최병환(崔秉煥, 예비역 육군 소령) 등과 조직 강화에 합의했다.[54]
1960년 5월 1일 대한제대장병친목회, 대한재향군인회 결성준비위원회, 자유장교단 등이 통합하여 재향군인회가 창설되자 창설 멤버로 참여하였다. 대한재향군인회 초대 회장으로 윤치왕이 추대될 예정이었으나, 투표 결과 이기건(李奇建) 예비역 육군 준장이 선출되었다.[54] 윤치왕은 이에 개의치 않고 재향군인회 활동에 참여했다.
이후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부회장, 대한의학협회 회장, 대한결핵협회장, 대한의학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60년 7월 한영협회(韓英協會) 회장에 선출되어 1964년 4월까지 재직했다.
1960년 10월 8일 제12대 대한의사협회 회장에 취임했으나, 35일 만에 관훈동 의협회관 화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55] 1961년 1월 한국이민협회 부회장(~1962년 5월)을 역임하고, 1961년 8월 21일부터 1962년 2월 10일까지 보건사회부 의과학보건심의행정관을 지냈다. 1962년 9월 대한결핵협회 회장에 선출되어 1963년 4월까지 재직했다. 1962년 7월 서울특별시 의사협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63년 8월 12일 경기도 인천시 북구 부평동에 윤치왕 산부인과의원을 개업했다.[56]
만년에는 인천시 부평의 윤 산부인과를 큰 아들 도선에게 맡기고, 원로 의사 모임에 적극 참여했다. 1972년 10월 17일 인수회 회원이 되었다. 골프를 즐겼으며, 서울 YMCA 청년회의 원로 모임인 계묘구락부(癸卯俱樂部)에도 가입했다. 인수회, 계묘구락부, 성우회, 재향군인회 등 বিভিন্ন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했다.
1982년 말 장염 증세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수정아파트에 거주하던 큰아들 윤도선의 집에서 요양 중, 12월 장염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향년 87세. 장지는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석곡리 선영 근처이다.
3. 학력
4. 상훈
수여 일자 | 훈장 및 표창 | 수여 기관 | 비고 |
---|---|---|---|
1949년 12월 15일 | 명예회원 기장 | 미국 군진의학회 | |
1950년 12월 30일 | 금성화랑무공훈장 | 대한민국 | |
1952년 5월 29일 | 공로표창장 | 국방부장관 | |
1952년 7월 | 덴마크 적십자 기장 | 덴마크 적십자 | |
1952년 12월 10일 | 무성을지무공훈장 | 대한민국 | |
1953년 9월 11일 | 공로표창장 | 육군총참모장 | |
1955년 6월 27일 | 미국 공로훈장(Legion of Merit) | 미국 | |
을지무공훈장 | 대한민국 | ||
1959년 4월 8일 | 공로표창장 | 육군참모총장 | |
방위 포장 | 대한민국 | ||
1982년 3월 25일 | 덴마크 적십자 기장 | 덴마크 적십자 |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윤웅렬(尹雄烈) | 대한제국의 군인, 정치인 |
어머니 | 김정순(金貞淳) | |
이복 형 | 윤치호(尹致昊) | 조선, 대한제국의 정치인, 독립운동가 |
동생 | 윤치창(尹致昌) | 대한민국의 공무원, 주 영국 공사 역임 |
제수 | 손진실(孫眞實) | 독립운동가 손정도의 딸 |
부인 | 이모임(李慕姙) | 중추원 의관 이희덕(李熙悳)의 딸 |
딸 | 윤선희(尹善姬) | |
사위 | 장석윤(張錫潤) | 제7대 내무부 장관 |
아들 | 윤정선(尹靖善) | 요절 |
아들 | 윤경선(尹景善) | 요절 |
아들 | 윤도선(尹燾善) | |
아들 | 윤훈선(尹薰善) | |
아들 | 윤연선(尹然善) | |
5촌 조카 | 윤보선(尹潽善) |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
할아버지 | 윤취동(尹取東, 1798년 ~ 1863년) | |
숙부 | 윤영렬(尹英烈, 1854년 음력 4월 15일 - 1939년 양력 11월 4일) |
6. 평가 및 비판
윤치왕한국어은 근대 의학계에 기여한 공로가 있지만, 그의 행적에는 몇 가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
6. 1. 긍정적 평가
한국 현대의학의 선구자로서 산부인과학의 개척자이며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서울의대 등에서 한국 의료 교육의 교육자이자 행정가로 활동하였다. 또한 군진 의학의 개척자로서 군 의무부대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마취과, 신경외과 등 한국 의학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14]근대 의학계에 있어서 독특한 존재라는 평가를 받는다. '윤치왕에게서 보이는 영국 유학을 통한 서양의학 학습, 사립과 관립 기관을 넘나드는 활동 경력, 군의관이라는 행정 경험 등은 서양 의학 수용 초기 세대들이 일반적으로 가지지 못한 독특한 모습이었다.'는 평가도 있다.[14]
7. 기타
1940년대에 창씨개명하였고, 한때 수산업과 광업에도 손을 댔다가 사기꾼들의 계략에 파산하기도 했다.[63]
어릴 적부터 외국에서 생활했던 윤치왕은 중국어, 일본어,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28]
그의 아들 윤도선은 서울 재동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동생 윤치창의 아들 윤종선, 이복 형 윤치호의 딸 윤문희의 둘째 아들이 소학교 동창이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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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아버지 윤웅렬의 본부인
[12]
문서
아버지 윤웅렬의 재취 부인
[13]
문서
1895년 2월 10일생 설, 1895년 2월 17일생 설(해평윤씨대동보 권삼, 1983, 611쪽)등이 언급되고 있다. 제적등본과 육군본부의 「장교자력표」에는 1895년 2월 16일생으로 되어 있다. 정구충은 그의 생일이 2월 10일이라 한다.
[14]
논문
윤치왕의 생애와 의료 활동
대한의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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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문서
윤흔(尹昕)-윤취지(尹就之)-윤채(尹埰)-윤세겸(尹世謙)-윤발(尹潑)-윤득실(尹得實)-윤취동(尹取東)-윤웅렬
[16]
논문
윤치왕의 생애와 의료 활동
대한의사학회
2008-12
[17]
문서
한영서원은 송도중학교, 송도고등학교의 전신이었고, 초대 원장 겸 이사장은 그의 이복 형 윤치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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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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