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중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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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재중한인은 중국에 거주하는 모든 한인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이는 국적에 관계없이 중국 내 한국인, 조선족, 그리고 재중 한국인을 포함한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은 인구 이동이 잦았으며, 초기 한민족은 한족, 만주족, 몽골족에 동화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한인이 중국으로 이주하면서 재중 동포가 급증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 민족으로 인정받았으며, 옌볜 조선족 자치주를 중심으로 한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에는 재중 한국인 수가 증가했으며, 현재 교육, 종교, 대중 매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인들의 문화적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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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외한인 - 한민족
한민족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 거주하며, 남한에서는 '한민족' 또는 '한국인', 북한에서는 '조선민족' 또는 '조선인'으로 불리고, 동북아시아에서 기원하여 삼국시대 이후 다양한 민족의 혼합을 거쳐 형성되었으며, 한국어와 유교, 불교, 샤머니즘 등의 문화를 공유하지만 남북 분단 이후 문화적 변화를 겪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 약 8천만 명의 인구가 분포하며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감소 문제에 직면해 있다. - 재외한인 - 지역별 재외한인 현황 중국
중국 내 한인 현황은 2019년 기준 총 2,461,386명으로, 주선양 총영사관 관할 지역에 가장 많은 한인이 거주하며, 주홍콩 총영사관 관할 지역에는 외국 국적 동포는 없고 재외국민만 18,969명으로 집계되었다.
재중한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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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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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그룹 | 재중 조선·한민족 |
주요 거주 지역 | 지린성 헤이룽장성 랴오닝성 산둥반도 베이징시 및 기타 중국 도시 |
사용 언어 | 한국어 중국어 |
관련 민족 | 한민족 |
인구 | |
전체 인구 | 2,109,727명 (재중 한국인·조선인 합계) |
조선족 인구 | 1,702,479–1,893,763명 (2023년) |
관련 정보 | |
한국어 명칭 | 재중 한국인·한인 |
중국어 간체 명칭 | 在华韩国人·韩裔 |
중국어 간체 명칭 (조선족) | 朝鲜族 |
중국어 병음 | Cháoxiǎnzú |
중국어 뜻 | 조선 민족 |
한국어 명칭 (북한) | 조선족 |
일본어 명칭 | 在中朝鮮・韓民族 |
영어 명칭 | Koreans in China |
2. 용어
대한민국에서는 중국 내 한인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변화해왔다. 2004년부터 정부는 '재외동포'와 '중국국적동포'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9] '재중한인'은 국적과 관계없이 중국 내 모든 한인을 지칭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으로 여겨진다.[9] '조선족'이라는 용어는 주로 중국 국적의 한인을 지칭하며, 중국 정부의 공식 명칭인 차오셴족/朝鲜族중국어과 유사하다.[10]
중국과 한반도의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어떤 형태의 인구 이동이 자주 발생했다. 하지만 중국 내 초기 한민족은 대부분 한족, 만주족, 몽골족에 동화되었다. 재중한인의 유래는 일제강점기 이전 부터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간도지역을 비롯한 중국지역으로 이주를 하면서 재중 동포가 급격하게 늘었다고 알려진다. 1930년 12월 간도지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총 수는 간도 전체인구의 76%에 달했다고 한다. 1949년에 중국 정부가 한국인이 대거 거주하는 옌볜에 조선족의 자치를 허용했고, 이들은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이 부여되었으며, 조선족으로 분류되었다. 조선족은 중국국적을 가진 한민족만을 의미하기 때문에, 중국조선족(中国朝鲜族)이 아닌 조선족(朝鲜族)이 정식 명칭이다.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대한민국과 중국의 교류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재중 한국인이 다시 생겨났다. 재중한인(Koreans in China)중에서, 재중한국인(South Koreans in China)의 경우 1992년 한중수교 이후에 처음 생겼다.
3. 역사
3. 1. 초기 역사
고구려-당 전쟁 (645년 – 668년)이 끝난 후, 20만 명이 넘는 고구려 포로가 당나라 군대에 의해 장안으로 이주되었다.[11] 신라 시대인 8세기와 9세기에는 산둥 반도 해안과 허난성과 산둥성 경계와 양쯔강 하류 사이의 대운하 상업 도시에 한인 거류지가 존재했다.[12][13][14][15] 이들은 등주, 양주, 회안의 연수(초주)와 같은 도시에 지정된 구역에 배치되었고, 특별 통역사와 관리자가 배치되었지만, 한인 상인들은 대체로 중국 남부를 피했다.[16][17][18]
요나라는 고려-거란 전쟁 이후 도 중 하나인 중경도()에 삼한 현을 설치하여 포로를 정착시켰다.[19] 원나라 시대에는 한인들이 북중국인, 거란인, 여진인과 함께 세 번째 계급인 "한족"에 포함되었다.[20][21] 1233년, 전 고려 지휘관 홍복원과 그의 추종자들은 몽골의 고려 침략 중 몽골에 항복한 후 현재의 랴오닝성 랴오양과 선양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그곳의 한인들을 관리하는 관리직을 제안받았다. 1266년에는 고려 왕족의 일원인 왕준()이 몽골 제국에 인질로 보내졌고, 그를 따라 현재의 선양시에 정착한 2,000 가구의 고려인들이 있었다.
명나라 시대에 요동지()에 따르면, 한인과 여진족이 요동 지역 전체 인구의 30%를 차지했다.[22] 1386년, 명나라는 증가하는 한인 인구를 정착시키기 위해 동녕위()와 광녕위()를 설치했다. 15세기 중반에서 16세기 초반까지 요동 반도는 평화롭고 번영하는 시대를 경험했고, 동녕위()와 같은 지역의 소수 민족에 대해 유리한 정책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건주 여진의 세력이 강해짐에 따라 한인들은 동녕위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여진족(1635년 이후에는 만주족으로 알려짐)이 후금 ()을 세우면서, 여진족과 한인 사이의 군사적 충돌이 증가했다. 여진족에게 포로로 잡힌 한인들의 대부분은 팔기군의 병사로 징집되거나, 부유한 여진족에게 농부나 하인으로 팔렸다. 초기 청나라 시대에 포로로 잡힌 한인들의 대부분은 강제로 만주족 또는 다른 민족으로 개종되었고,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잃었다. 그러나 허베이성 칭룽 만주족 자치현, 랴오닝성의 가이저우 및 번시 만주족 자치현에 있는 약 2,000명의 이들 포로 한인 후손들은 여전히 그들의 한인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3. 2. 청나라 후기
1677년, 만주족은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 이북 지역을 그들의 조상의 발상지 보존 구역으로 지정하고, 한국인을 비롯한 비만주족 민족의 출입을 금지했다. 조선 왕조 역시 청 정부의 강요에 따라 한국인의 출입을 막기 위한 가혹한 처벌을 시행해야 했다. 그 결과, 해당 지역은 인적이 끊긴 황무지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인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인삼을 재배하거나, 사냥을 하거나, 금지된 지역에서 농작물을 재배했다. 1740년, 청 정부는 금지령을 중국 동북 지역 전체로 확대했다.
19세기 후반, 200년 동안 만주족에 의해 폐쇄되었던 중국 동북 지역은 인구가 감소했다. 한편, 러시아 제국은 이 기회를 틈타 이 지역을 침범하려 했다. 1860년, 청 정부는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여 100만 제곱킬로미터가 넘는 영토를 러시아에 할양했다. 이러한 상황에 압박을 받은 청 정부는 1860년에 중국 동북 지역에 대한 금지령을 해제했고, 각각 1875년과 1881년에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에 대한 금지령을 해제했다.
1860년부터 1870년 사이에 여러 전례 없는 자연 재해가 한반도 북부에 발생했다. 한편, 남부의 농민 봉기가 북부로 확산되었다. 그 격동의 시기에 많은 수의 한국인 난민들이 두만과 압록 북쪽으로 이동했다. 1879년에는 통화, 환인, 관전, 신빈 지역에 28개 마을에 8,722가구, 총 37,000명 이상의 한국인이 거주했다.
1881년, 청 정부는 농토 개간을 위해 특별 기구를 설치하고, 두만강 북쪽 700km x 45km 지역을 한국인 농민을 위한 특별 농업 지역으로 할당했다. 20세기 초, 청 정부는 한국 이주민에 대한 관리를 강화했다. 한국 이주민은 변발과 같은 만주 정부가 요구하는 복장을 따르고 청 정부에 세금을 납부하면 토지 소유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이주민은 공식 복장이 동화 정책의 차별적인 정책이라고 생각했다. 1910년까지 중국 내 한국인 이주민 수는 약 26만 명에 달했고, 그중 약 10만 명이 현재의 옌볜 조선족 자치주에 거주했다.
현대 시대 중국 동북 지방의 논 개발은 한국 이주민들의 벼 재배와 관련이 있었다. 한국 이주민들은 1848년경부터 훈강 유역에서 벼를 재배하려 시도했다. 단둥 지역에서 한국 농부들의 실험은 1861년에 성공했다. 1875년에는 한국 농부들이 랴오닝 성 환런 지역의 습지에서도 벼 재배에 성공했다. 옌볜 지역에서의 벼 재배는 1877년에 시작되었다. 논의 증가는 한국 농부들에 의한 중국 동북 지방의 관개 사업의 추가적인 발전을 가져왔으며, 그들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수많은 물길을 건설했다. 1906년 6월, 14명의 한국 농부들이 옌볜에 최초의 관개 시스템을 건설했다. 건설된 수로의 총 길이는 1.3킬로미터를 초과하여 33헥타르의 논에 물을 댔다.
1914년 3월 3일, 새로 설립된 중화민국은 중국 동북 지방의 토지 개발을 장려하기 위한 법령을 발표했다. 같은 해, 펑톈 성의 수자원국은 훈강의 물을 사용하여 펑톈 인근의 논을 개발하기 위해 한국 이주민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1916년, 지린 성 지방 정부는 한국 이주 농부의 논 경작 명세 문서를 중앙 농상부에 제출했다. 농상부의 승인을 받은 후, 지린 성은 쌀 생산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한족 농부들은 벼 재배 방법을 배우기 위해 한국 이주민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1917년, 무리(무릉)의 한국 농부들은 무상 기간이 짧은 지역에서 벼를 재배하는 방법을 해결했다. 그 후 벼농사는 무단강, 무리강 및 마이강 유역의 더 북쪽 지역으로 빠르게 확장되었다.
1921년부터 1928년까지 중국 동북 지방의 논 총 면적은 48,000헥타르에서 125,000헥타르로 증가했으며, 이 벼농장의 80% 이상이 한국 농부에 의해 개발되거나 경작되었다. 1933년, 한국 농부들은 아이후이와 쉰커 지역에서 아무르강을 따라 벼 재배에 성공하여 북위 50도선 이북에서 벼를 재배하는 세계 기록을 깼다. 1934년, 한국인 인구는 중국 동북 지방 전체 인구의 3.3%에 불과했지만, 그곳에서 생산되는 쌀의 90.1%를 생산했다.
3. 3. 일제강점기
1910년 일제강점기 이후 수천 명의 한인이 일제의 지배를 피해 중국 동북부 및 중국의 다른 지역으로 탈출했다. 많은 한국 독립 운동가와 단체들이 중국 동북부에 기지나 군사 훈련 학교를 세우고 조직적으로 한국인들을 그곳으로 이동시켰다. 1919년, 3·1 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 이후 중국으로의 한국인 이주는 절정에 달했다. 1920년, 중국 동북부의 전체 한인 수는 457,400명을 넘어섰다.
1910년부터 1934년까지 토지대장 토지 조사와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쌀 생산 증진 계획으로 인해 수천 명의 불우한 한국 농민들이 토지 소유권을 잃거나 파산하게 되었다. 이러한 잉여 농촌 인구를 흡수할 만한 충분한 규모의 도시 산업이 없었기 때문에, 일제는 이러한 한국 농민들을 중국 동북부로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동시에, 새로 수립된 중화민국은 중국 동북부의 토지 개발을 장려하고 있었다. 이는 일본의 인구 이주 정책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1914년 3월 3일 중국 정부가 전국 황무지 개발령을 발표한 후, 봉천성 수리국은 훈강의 물을 이용하여 봉천 근처의 논을 개발하기 위해 한국 이주민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한국 농민들이 중국 동북부에서 쌀 재배에 성공하고 일본 내 쌀 가격이 매년 치솟자, 일제는 매년 중국 동북부의 논을 늘리고 한국 이주민을 고용하여 쌀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중국 동북부의 봉천 군벌은 일본과 복잡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때로는 일본과 협력했고 때로는 대립하기도 했다. 봉천 군벌은 한국 이주민에 대한 통제권을 얻기 위해 한국 이주민을 설득하거나 강제로 중국 국적 시민이 되도록 시도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이주민은 이러한 정책을 중국 당국의 한족 동화 시도로 간주했다. 1930년 9월, 한국 이주민들이 중국 정부에 대한 신뢰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길림성 주석 장쭤샹은 대신 한국 이주민의 귀화를 장려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또한, 일제가 한국 이주민을 중국 동북부 침투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중국 정부는 한국 이주민 학교를 자체 국가 교육 시스템에 포함시키고 한국 학교에 대한 투자를 매년 늘려 한국 이주민에 대한 일제의 영향력을 차단하려고 했다. 1921년, 길림성은 1920년 10월 간도 참변()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지역 한국 학교에 대한 연간 투자를 4배로 늘렸다. 일제는 종종 한국 이주민 보호를 핑계로 중국 동북부에서의 세력 확장을 시도했기 때문에, 1920년대 중반 이후, 특히 다나카 기요우치 기념과 만보산 사건이 드러난 이후, 중국 정부와 중국인의 한국 이주민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다. 한국 이주민은 과거에는 중국 내 독립 운동가로 간주되었지만, 이제는 일반적으로 일본 침략의 선봉으로 여겨졌다. 지역 중국인과 한국 이주민 간의 관계는 긴장되었다. 1925년 6월 11일 중국 정부가 일본 정부와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이 중국 동북부의 한국 독립 운동가를 제거하는 것을 돕기로 한 후, 봉천 군벌은 이 조약을 이용하여 한국 이주민을 추방하고 박해하기 시작했으며, 귀화하지 않은 한국 이주민이 경작한 농지를 회수하거나 더 많은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귀화한 한국 이주민은 계속해서 농지를 소유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 동북부의 한국 이주민들은 귀화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적극적으로 지역 자치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많은 반일 한국 단체들은 한국 이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지역 중국 정부와 협상하여 양보나 묵인을 얻어냈다. 1928년, 장쉐량은 황고둔 사건 이후 중국 동북부에서 북양 정부의 깃발을 중화민국의 깃발로 교체했다. 많은 한국 독립 단체들은 이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중국 동북부의 한국 이주민에게 중국 시민권을 신청하도록 장려했다. 1928년 9월 10일, 중국 동북부의 한국 이주민들은 한국 자치 단체인 "한교동향회"()를 설립했다. 4월, 한교동향회 대표 최동우는 난징으로 가서 국민 정부와 한국 이주민의 귀화 및 자치에 관한 다양한 문제에 대해 협상을 벌였다. 이러한 협상은 한국 이주민의 귀화 과정을 돕는 데 기여했지만, 한국 자치 설립에는 실패했다.
1931년, 일본은 만주 사변을 일으키고 만주 침략을 감행하여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세웠다. 1936년 9월 14일, 일본은 특수 기구()를 설립하고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한국 농민을 중국 동북부로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당시, 216만 명 이상의 한국 이주민이 중국 동북부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 중 약 70만 명이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한국으로 돌아갔다. 1947년, 한국 이주민 수는 140만 명으로 감소했으며, 그들 중 대부분은 공산당 통제 지역에 거주했고, 10만 명 미만이 국민당 통제 지역에 거주했다.[23]
3. 3. 1. 항일 투쟁
1919년 3월 13일, 3·1 운동 직후, 옌볜의 약 30만 명의 조선족들이 룽징에서 일본에 항의하고 3·1 운동을 지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에 총알이 발사되어 19명이 사망하고 48명이 부상당했으며, 94명이 체포되었다. 3월 13일부터 5월 1일까지 동북 지방 15개 현에서 총 73차례의 반일 조선족 집회가 일어났고, 10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했다.
1920년 6월, 홍범도가 이끄는 한국 독립군은 왕칭 현에서 일본 제국 육군과 첫 무력 충돌을 벌여 100명 이상의 일본군을 사살했다. 이는 몇 달 후 옌볜에서 일어난 "간도 학살"로 이어졌다. 일본군은 1만 5천 명의 조선족을 살해하고 3,500채 이상의 집, 95개의 학교, 19개의 교회, 약 2만 5천 킬로그램의 곡물을 파괴했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김좌진, 이범석, 홍범도가 이끄는 연합 대한 독립군은 허룽에서 일본 제국 육군과 청산리 전투를 벌였다. 현지 조선족 주민들은 대한 독립군에게 중요한 지원을 제공했다.
1930년대에 많은 중국 내 조선족들이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항일 부대에 합류했다. 1932년 6월, 조선족 지도자 리훙광은 동북 지방에서 최초의 항일 의용군(반석유격대/磐石游击队zh-Hant) 중 하나를 설립했다. 리훙광은 이후 동북 항일 연군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동북 항일 연군의 11개 군 중 제1, 2, 3, 7군에서 조선족이 전체 인원의 절반을 차지했다. 일본과의 14년간의 전투 동안 동북 항일 연군은 183,700명의 일본군을 사살했다.
3. 4. 국공내전 재개 (1946-1949)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중화민국은 초기에는 한국인 재산을 압류하거나 송환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한국인 농민이 중국 동북 지역 쌀 생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개입 이후 이러한 정책을 철회했다.
반면, 중국 공산당은 난창 봉기와 광저우 봉기 등에서 오랜 우호 관계를 맺어온 한인들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 1928년 7월, 중국 공산당은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 내 한국인을 중국의 소수 민족 중 하나로 공식적으로 포함시켰다. 만주 사변 이후, 공산당과 중국 내 한국인 사이의 협력은 강화되었고, 공산당 내 한국인의 사회적 지위는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 1946년 3월, 중국 동북 지역에서 시작된 토지 개혁 운동을 통해, 한인 농민들은 다른 중국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농지를 분배받았다.
국공 내전 동안, 많은 한인들이 중국 인민해방군에 입대하여 창춘 포위전, 쓰핑 전투, 랴오선 전역 등 주요 전투에 참여했다.
3. 5. 1949년 이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중국 내 한인은 중화 민족의 공식 구성원이 되었다. 중국 내 한인의 총 인구는 110만 명이었으며, 그중 47.6%가 연변에 거주했다. 1949년 9월, 주덕해는 연변의 중국 공산당 서기이자 지역 전문가로서 10개의 소수 민족 중 한 명으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CPPCC) 제1차 전체 회의에 참석하여 중국 내 한인의 대표로서 CPPCC 설립에 참여했다. 그는 또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기념식에도 참석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중국 내 젊은 한인들은 중국 공산당의 부름에 따라 적극적으로 중국인민지원군에 입대했다.[24] 이중 언어 구사 능력이 있는 이들 군인들은 인력 제공 외에도 다른 중국 군인들에게 한국 현지인과의 의사 소통을 돕는 귀중한 도움을 제공했다. 자오난치, 리융타이는 전쟁에 참여한 가장 주목할 만한 두 명의 한인 인물이다. 용정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옌지 제트" 기증 캠페인을 조직했다. 연변 한인들의 기증은 약 6.5대의 제트 전투기 가치에 달했으며, 이는 미국의 북한 폭격으로 인한 막대한 피해로 약 150만 명의 한인이 사망한 이후 이루어졌다.
1952년 3월 3일, 연변은 공식적으로 조선족 자치구로 지정되었으며 주덕해가 초대 주석으로 임명되었다. 1954년 7월 20일, 연변에서 제1차 인민 대표 대회가 개최되었다. 1955년 4월,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 따라 "연변 조선족 자치구"는 "옌볜 조선족 자치주"로 이름이 변경되었으며, 주덕해는 초대 주석으로 임명되었다.[68] 1958년 5월 29일,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은 창바이 현을 "창바이 조선족 자치현"으로 지정하는 결정을 승인했다.[36]
문화 대혁명 동안 주덕해를 포함한 많은 한인 간부들이 자본주의 길을 걷는 사람 또는 지역 민족주의자, 반혁명가로 기소되었다. 옌볜 대학의 많은 교수진들도 기소되었다. 옌볜 대학의 교직원 수는 1966년의 23.7%로 감소했다. 한국어는 사구(四舊)의 일부로 낙인 찍혔고, 한국어로 된 텍스트는 불태워졌으며, 이중 언어 교육은 억압되었다.[25] 줄리아 러벨에 따르면, "[문화 대혁명의] 격렬한 전투에서 살해된 한인들의 시신으로 뒤덮이고 위협적인 낙서가 칠해진 화물 열차가 중국에서 북한으로 이동하는 연변 변방 마을에서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너희의 운명도 될 것이다, 너희 조그마한 수정주의자들아!'"[26] 문화 대혁명이 끝난 후 상황은 점차 정상으로 회복되었다.[27]
1985년 4월 24일,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제8차 인민 대표 회의에서 "조선족 자치주 자치 조례"가 통과되었고, 이는 나중에 지린성 인민 대표 회의의 제6차 회의에서 법률로 승인되었다. 옌볜 자치 조례는 7개 장과 75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조례는 법의 형태로 옌볜 자치주에 거주하는 조선족 및 기타 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및 사회적 권리와 정책을 규정했다. 이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자치 조례이다. 이 조례는 자치주 인민 대표 회의 상무 위원회의 주석은 조선족이어야 하며, 조선족이 자치주 인민 정부 내 부시장, 비서장, 국장 등 절반 이상의 직위를 차지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28] 다른 조례는 정부 업무를 수행할 때 한국어와 중국어를 모두 사용하도록 요구하며, 한국어를 주요 언어로 사용하고, 지역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한국어 사용을 장려하도록 규정하고 있다.[28]
1994년 9월, 옌볜 조선족 자치주는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에 의해 "모범 자치주"로 선정되었다. 옌볜은 이 칭호를 받은 중국 최초의 자치주였으며, 이 칭호를 5회 연속으로 받았다. 2012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우등 논문에 따르면, 조선족은 모범 소수 민족으로 여겨지며 중국 정부 및 한족 다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29]
4. 문화
4. 1. 교육
중국 내 한인들은 교육에 대한 전통이 깊으며, 교육 수준은 중국 전체 평균보다 높고, 중국 내 소수 민족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이다.[30][31] 중국 정부는 한인들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다. 옌볜에서는 유치원부터 고등 교육까지 한국어로 교육이 가능하다. 옌지시에 있는 옌볜 대학교는 학사부터 박사 학위까지 제공하는 종합 대학교이며, 211 공정 국가 중점 대학교이자 쌍일류 대학교 계획의 일원이다.[32]
베이징 한국국제학교, 광저우 한국학교, 선전 한국국제학교, 소주한국학교/소주한국학교한국어, 옌볜 한국국제학교, 대련한국국제학교/대련한국국제학교한국어, 선양한국국제학교/선양한국국제학교한국어, 칭다오청운한국학교/칭다오청운한국학교한국어, 웨이하이한국학교/웨이하이한국학교한국어, 옌타이 한국학교, 상하이 한국학교, 천진한국국제학교/천진한국국제학교한국어 등 중국 본토에는 여러 한국 국제학교가 있다. 홍콩에도 홍콩 한국국제학교가 있다. 선전 한국 상공 회의소는 한국 주말 학교를 운영하며, 2007년에는 약 600명의 학생이 있었다. 이 학교는 해외 중국인 타운 (OCT) 초등학교의 임대 공간을 사용한다.[33] 베이징, 상하이, 톈진, 옌볜, 롄다, 칭다오, 다롄, 우시, 선양, 홍콩에는 총 10개의 학교가 있으며 한국에서 파견된 교원과 현지에서 채용된 교사, 강사 등에 의해 운영된다.
중국 각지에는 한국인이 설립을 지원하는 학교가 있으며, 일부는 친(親) 한국계 중국 국적 동포가 건립하여 조선족 중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수요가 적어 조선어 학교라는 명칭 대신 "한국어 학교" 또는 "한글 학교"로 운영된다.[91]
4. 2. 종교
중국 내 한민족의 주요 종교로는 불교[4]와 기독교가 있으며, 한국어로 예배가 진행된다.[34]4. 3. 대중 매체
옌볜에서는 한국어 교육이 정부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한국어 정기간행물 및 텔레비전 방송, 이중 언어 표지판 등이 지원된다.[35] 많은 조선족들이 표준 만다린 중국어와 한국어를 구사하며, 함경도에 조상을 둔 조선족들은 함경 방언을 사용한다.[4][36] 대한민국 문화의 영향으로 서울 방언 사용과 한류 패션 스타일이 확산되고 있다.[68] 공식 석상에서 한복 착용이 대표적으로 나타나며, 이는 2022년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37]5. 북한이탈주민
중국에는 수만 명으로 추정되는 많은 수의 북한 난민이 있다.[38][39] 대한민국으로 가는 교통편을 구할 수 없는 일부 북한 난민들은 대신 조선족과 결혼하여 중국에 정착하여 지역 사회에 동화되지만, 당국에 발각될 경우 여전히 추방될 수 있다. 중국 정부는 1만 명의 난민이 있다고 추산했지만, 유엔은 3만 명에서 5만 명 사이의 난민이 있으며 그중 75%가 여성이라고 주장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강제 결혼 및 인신매매를 경험하지만, 두 학자는 많은 사례가 강제보다는 자발적이라고 주장했다.[40][41][42] 난민의 대부분은 함경북도 출신이다. 빅터 차는 난민의 86%가 중국에 머물기보다는 대한민국으로의 통행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한겨레''에 의해 반박된다.[43][44] 2015년 UC 산타크루즈 논문에 따르면 많은 북한 난민들은 그들의 공산주의 기원을 비판하지 않고 도움을 준 현지인들을 만났다.[45]
북한 정부가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한 북한 사람들은 중국 여행을 위한 여권과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다.[46]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귀화를 신청하고 있으며, 이는 중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북한 국적 상실 증명서를 요구하지만, 북한 당국은 최근 이를 발급하는 데 더욱 소극적이다.[47] 김일성 종합대학 및 평양외국어대학과 같은 주요 북한 대학들은 매년 수십 명의 교환 학생을 베이징 대학 및 기타 최고 순위의 중국 대학에 파견한다.[48]
2012년 6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베이징과 평양이 북한인들에게 연간 최대 4만 개의 산업 연수 비자를 발급하여 중국에서 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협정을 체결했다고 보도했다. 첫 번째 배치 근로자는 그해 초 옌볜 조선족 자치주 투먼에 도착했다.[49] 보도에 따르면 12개국에 130개의 북한 국영 식당이 있으며, 대부분이 중국에 있다.[50] 베이징에 2개,[51] 상하이에 3개,[52] 단둥에 다른 식당들이 있다.[53]
6. 재중 한국인
1992년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간의 외교 관계 정상화 이후,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중국 본토에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베이징, 상하이, 다롄, 칭다오에 대규모 대한민국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다.[54] 이들은 주로 단기 국제 파견 근무를 하는 대한민국 기업의 직원, 중국인 직원을 관리하는 중국에서 사업을 운영하는 대한민국 기업의 고용인, 또는 1997년 금융 위기 당시 실업자가 된 후 중국으로 이주하여 작은 식당이나 상점을 연 사람들이다.[56]
서울에 비해 낮은 생활비, 특히 영어와 중국어를 가르치는 국제학교의 저렴한 학비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중국 본토로의 단기 이주를 유도하는 또 다른 요인이지만, 일반적으로 이 기간 이후 이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갔다.[54] 대한민국 정부는 옌볜, 베이징, 상하이, 톈진, 옌타이, 칭다오, 다롄에 있는 7개의 한국 국제학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이 학교들은 모두 1997년에서 2003년 사이에 설립되었다.[55]
2006년 기준으로 중국 내 대한민국 국민 수는 30만에서 40만 명으로 추산되었으며, 2006년의 증가율로 볼 때 2008년까지 인구가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었다.[54] 2007년까지 베이징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은 그들의 인구가 70만 명에 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경제 침체와 한국 원화 가치 하락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으로 돌아갔다.[57] 2008년과 2009년 사이 대한민국 정부 자료에 따르면 중국 내 한인 수가 43만 3천 명 감소했다.[58] 중화인민공화국 제6차 인구 조사에 따르면 중국 본토에 120,750명의 대한민국 국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는 단일 외국인 그룹 중 가장 큰 규모이다.[59]
7. 지역별 분포
2008년 기준으로 산둥성에는 14만 8천 명 이상의 재중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다.[60] 선전에는 2007년 기준으로 약 2만 명의 한국계 주민이 거주하며, 난산구와 푸톈구에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다.[33] 같은 해, 한국상공회의소 회장 강희방은 약 1만 명이 화교성 (OCT)에 거주한다고 밝혔다. 사구와 선전대학 주변 지역, 둥하이 가든 주택 단지에도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다.[33] 둥하이 가든은 교통 연결성 때문에, 그리고 1998년경 3-A 등급의 유일한 주거 건물이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61]
1980년대 개혁개방 시대에 한국인들이 선전 지역으로 오기 시작했으며, 대한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하면서 더욱 증가했다.[61] 2007년 선전에는 약 500개의 한국 기업이 중국-한국 무역에 관여하고 있었고, 선전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 기업이 500개 더 있었다. 2007년 강 회장은 선전에 거주하는 한국인 대부분이 5년 이상 거주했다고 말했다.[33]
2007년 기준으로, 중국 현지인을 위한 학교에 다니는 한국인 아이들도 있었다.[33] 2014년 기준 선전 공립학교의 외국인 학생을 위한 공간이 제한적이어서, 일부 한국인 거주자는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내야 했다.[61]
8. 저명한 인물
8. 1. 역사적 인물
김교각은 신라 출신으로, 구화산의 지장보살로 추앙받았다. 고선지는 고구려계 당나라 장군이다. 이정기, 이사고, 이사도는 당나라의 장군으로 활약했다. 기황후는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의 황후가 되었다. 이여송과 이여백은 명나라의 장군으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원했다.8. 2. 현대 조선족
최건은 중국 록 음악의 선구자로, '중국 록의 아버지'로 불린다. 김용국은 솔로 가수이자 전 JBJ 멤버로 활동했다. 황인준( 황인준/仁俊중국어)은 NCT DREAM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정려성은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를 작곡했다.8. 3. 기타 국적자 및 후손
권기옥은 평양 출신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중 한 명이자 중국에서 활동한 비행사이다.[64] 박철수는 조선대풍국제투자그룹 대표이다.[65][66] 하위 리우(Howie Liu)는 에어테이블(Airtable)의 최고 경영자이다.[67]9. 관련 단체
중국한국상회는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을 지원하는 경제 단체이다.[89] 1993년 12월에 중국 내 공식 인증된 21개 외국 상회 중 7번째로 중국 정부의 승인을 받았으며, 중국 내 유일의 한국계 법적 경제 단체이다.[89] 베이징에 거점을 둔 기업 회원과 중국 전역 44개 지역 상회에 소속된 총 약 6,000명의 회원이 있으며, 중국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의 수는 2017년 상반기 기준 26,602개사로 추정된다.[89]
베이징 총 한국 유학생회 연합(1992년 12월 설립)을 시작으로 상하이, 다롄, 선양, 하얼빈, 연변 등지에 유학생회가 구성되어 약 7만 540명의 유학생들이 상호 교류를 하고 있다.[89]
북한인과 조선족이 참여하는 "재중조선인총연합회"는 중국판 조선총련(在日本朝鮮人総聯合会)이지만, 조선총련에 비해 영향력이 매우 적고 자금도 거의 없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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