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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중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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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탈중국화는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 감소와 관련된 현상으로, 19세기 이후 서구 세력의 등장과 민족주의 사상의 확산으로 시작되었다. 한국, 베트남 등은 청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을 추구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은 대만의 독립 움직임을 탈중국화로 간주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는 유목 민족과의 융합, 선비족 문화의 수용, 당나라 태자의 돌궐 문화 수용 등 다양한 형태의 문화적 교류가 있었으며, 명나라는 원나라의 제도를 따르면서도 몽골족과 다른 민족에게 보편적 지배자를 자처했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건국하면서 한족을 만주 팔기에 편입시키고, 문화, 언어, 생활 방식에 따라 민족 정체성을 구분했다.

현대에 들어서는 홍콩, 대만, 베트남 등에서 탈중국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홍콩은 중국 반환 이후 중국 정부와의 갈등, 광둥어 보존 운동 등을 통해, 대만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재중국화" 정책 이후 대만 정체성 강화와 관련된 다양한 정책 변화를 겪었다. 베트남에서는 공산주의 통일 이후 화족의 이민이 증가했으며, 북한은 한자 사용을 금지하고, 한국은 서울의 중국어 명칭을 변경하는 등 탈중국화의 다양한 사례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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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중국화
개요
명칭탈중국화 (脫中國化)
영어 명칭De-Sinicization
중국어 간체去中国化
중국어 정체去中國化
한어 병음qù Zhōngguó huà
웨이드-자일스ch'ü-Chung-kuo hua
예일heui jūng gwok fa
광동어 병음Heoi3 Zung1 Gwok3 Faa3
민난어 병음Khìr-tiong-kok-hoa / Khì-tiong-kok-hoa / Khù-tiong-kok-hoa
백화자Khìr-tiong-kok-hoa / Khì-tiong-kok-hoa / Khù-tiong-kok-hoa
객가어 병음Hi-chûng-ket-fa
한국어탈중국화 (脫中國化)
일본어脱中国化 (だつちゅうごくか, datsu-chūgokuka)
내용
정의중국 문화, 사상, 제도, 가치관 등 중국적인 요소로부터 벗어나려는 사회적, 문화적 운동
목표국가, 사회, 문화, 정체성 등 다양한 영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줄이거나 제거
자국 문화 및 정체성 강화
관련 개념탈식민주의
자문화 중심주의
민족주의
배경
역사적 요인과거 중국의 속국 또는 조공 관계 경험
중국 문화의 강압적 이식에 대한 반발
정치적 요인중국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 및 간섭에 대한 반발
국가 정체성 확립 및 주권 수호
문화적 요인중국 문화와의 차별성 부각 및 자국 문화의 독자성 강조
획일적인 문화 강요에 대한 거부감
경제적 요인중국 경제의 급성장에 대한 견제 심리
경제적 종속에 대한 우려
특징
다양한 형태언어, 문자, 복식, 풍습 등 문화적 요소의 변화 시도
역사 재해석 및 민족 영웅 재조명
중국 관련 시설물 철거 또는 명칭 변경
중국과의 관계 재정립 요구
정치적 성격반중 감정 표출 및 정치적 시위
독립 및 자치 운동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
사회적 영향사회 분열 및 갈등 심화
혐오 및 차별 문제 발생
문화적 다양성 훼손 우려
사례
베트남한자 폐지 및 쯔꾸옥응으 도입
대한민국국한문혼용체 폐지 및 한글 전용 정책 추진
일본어 투 용어 청산
서울의 옛 이름인 한성 부활 움직임
일본화혼양재 사상 및 일본 문화 부흥 운동
대만대만어 보급 운동
탈중국화 정책 추진
몽골몽골 문자 부활 운동
논쟁
긍정적 시각국가 및 민족 정체성 확립에 기여
문화적 다양성 증진
외부 세력의 간섭으로부터 독립
부정적 시각극단적인 민족주의로 변질될 위험
사회 분열 및 갈등 심화
역사 왜곡 및 문화적 폐쇄성 초래
비판적 시각진정한 의미의 탈식민주의 실현에 미흡
새로운 형태의 지배 질서 형성 가능성
소수 문화 및 약자에 대한 배제 초래
참고
관련 문서반중 감정
문화 제국주의
정체성 정치

2. 역사적 배경

19세기 이후 서구 열강의 침투로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조선(대한제국)과 베트남이 각각 일본프랑스에 의해 청나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서구의 민족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탈중국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1]

이후 명, 청 시대에는 한족들이 다른 민족에 동화되거나, 반대로 다른 민족이 한족에 동화되는 등 다양한 현상이 나타났다.

초기 명나라 황제들은 홍무제부터 정덕제까지 원나라의 관행을 이어받아 세습적인 군사 제도를 유지하고, 궁술과 승마를 즐겼으며, 몽골족을 군대에 복무하게 했다. 정덕제는 무슬림 환관을 통해 페르시아어와 아랍어 비문이 새겨진 도자기를 제작하게 하고, 위구르족과 몽골족 후궁을 두는 등 이민족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청나라 시기에는 일부 한족들이 만주 팔기에 합류하여 "만주화"되기도 했다. 한족 팔기군은 "니칸" 기로 알려졌으며, 여진족 여성들은 가족이 없는 중국인들과 결혼했다.[58] 홍타이지는 한족과 여진족 기를 분리하려 시도했으나, 요동에서는 중국 문화와 여진 문화가 섞였다.

청나라는 문화와 언어를 기준으로 사람들을 만주 기와 중국 기(한군)로 분류했다. 민족 만주 기에는 1618년 이전에 여진족에 동화된 한족이 포함되었고, 중국 기에는 한족 문화와 성을 채택하고 중국어를 구사하는 한화된 여진족의 후손이 포함되었다.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는 민족 정체성을 문화, 언어, 태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았다. 청나라는 생물학적 요인과 조상을 무시하고 문화를 기준으로 만주족과 한족을 구별했다.[66]

만주족은 한족처럼 사는 사람들을 "니칸"으로 묘사했으며, 한족 기병(한군)은 민족 범주가 아니었고 한족 혈통이 아닌 사람들도 포함되었다.[62] 일부 한족 기병과 그 가문은 청나라 귀족이 되었고, 아이신 교로 가문 여성과의 결혼 등을 통해 특권을 누렸다.[64]

건륭제는 한족 기병의 정체성을 재정의하여 그들이 한족 민간인과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고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1] 이는 문화와 정치만을 기준으로 정체성을 분류했던 이전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2. 1. 고대 및 중세

19세기 이후 서구 열강의 침투로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조선(대한제국)과 베트남은 각각 일본프랑스에 의해 청나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서구의 민족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탈중국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2. 1. 1. 중국

중국에서는 중화민국중국 대륙과 연결고리를 끊고 독자적인 타이완 공화국으로 정체성을 확립하려 하는 움직임에 대해 탈중국화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1]

한나라의 장군 이릉흉노에 투항하여 흉노 선우의 딸과 결혼했고 흉노의 풍습에 동화되었다.

혼혈이거나 탈중국화된 한족으로 유라시아 유목민의 문화와 생활 방식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6, 7세기에 존재했으며, 일부는 심지어 수나라당나라의 군대에서 복무하기도 했다.[2]

선비족의 성씨가 한족에게 채택되었으며, 선비족의 문화, 군국주의, 의복도 채택되었다.[3] 북조 시대에 여러 한족이 선비어를 배웠다.[4] 북주에서는 한족 병사와 장교에게 선비족 성씨가 할당되었다.[5][6] 고환과 풍패는 선비 문화를 채택한 한족 통치자였다. 풍패는 선비족 이름인 乞直伐(Qizhifa)를 채택했다.

선비족화는 유씨와 사마씨 한족 가문의 일부에게 일어났다.[10]

선비족의 언어는 관리였던 그의 아버지에 의해 한족에게 가르쳐졌다.[11][12][13]

당나라 태자 이승건은 돌궐의 문화와 언어를 사용하고 말했다.[14][15][16]

거란의 요나라는 거란 황족인 소씨(蕭氏) 가문의 여성들을 한족인 한(韓)씨 가문의 구성원과 결혼시켰는데, 한씨 가문은 거란족에게 납치되기 전 기주에서 기원했으며 요나라의 한족 엘리트가 되어 거란 문화를 받아들였다.[22][23][24]

한족의 경씨 가문은 거란족과 통혼했고, 한(韓)씨 가문은 경연의(耿延義)에게 두 명의 여성들을 아내로 제공했으며, 두 번째 아내는 경지신(耿之信)의 어머니였다.[25] 헌덕황후(仁德皇后)의 여동생이자 소씨 가문의 일원이었던 여성은 한족 장군 경연의의 어머니였다.[26]

한덕양(韓德讓, 야율륭운, 耶律隆運)은 진국태비(陳國太妃)의 아버지였으며, 진국태비는 장군 경연의의 아내였고, 랴오닝성 자오양시(昭陽)에 있는 그의 묘에 함께 묻혔다.[27] 그의 아내는 "한 부인(韓夫人)"으로도 알려졌다.[28] 경씨 가문의 묘는 랴오닝성 차오잉(朝陽) 구잉쯔(固營子)에 위치해 있다.[29][30]

한족 남성들이 거란 의복을 입고 거란 문화를 따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족 여성들은 한 의복을 입고 한 문화를 실천했는데, 이들은 한 문화를 지키는 사람들로 여겨졌다.[31][32][33]

2. 1. 2. 한반도

19세기 이후 서구 세력의 침투로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조선(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청나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이때 함께 들어온 서구의 민족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탈중국화가 급속화됐다.

2. 1. 3. 베트남

19세기 이후 서구 세력의 침투로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베트남프랑스에 의하여 청나라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이때 함께 들어온 서구의 민족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탈중국화가 급속화됐다.

화족남월 시대부터 그 존재가 추적되며 후 레 왕조의 건국 이후 조직화된 상당한 소수 민족을 형성한다.[100]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중국의 베트남 이민은 절정에 달했는데, 이는 중국이 정치적 혼란과 생활 수준의 정체를 겪었고, 1949년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식민 정부가 제공한 사업 인센티브 때문이었다. 화족은 대체로 잘 통합되어 베트남 중상류층의 상당 부분을 형성했으며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01] 화족은 모국어 및/또는 광둥어(동남아시아 화교의 공통어) 외에도 베트남어 구사 능력이 매우 높았으며, 베트남 소수 민족 중 가장 높은 비율을 보였다.[102] 대부분의 화족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중국인보다 베트남인으로 먼저 여겼으며, 특히 남베트남에서는 중국 본토 출신이 아닌 사람들은 "홍콩 중국인" 또는 "마카오 중국인"과 같이 자신의 특정 출신지를 밝히는 경향을 보였다.[103]

사이공 함락과 베트남의 공산주의 통일 이후, 구 남베트남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화족은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중국보다는 미국, 프랑스, 호주 등 다른 국가로 이민을 선택했다. 베트남 북부에서 정부에 의해 박해받는 화교만이 중국, 특히 광시성으로 이주를 선택했다.[104] 베트남 출신 해외 화교는 일반적으로 현지 중국인 및 베트남 커뮤니티와 모두 교류한다. 그러나 광둥어를 사용하지 않거나 중국 본토 출신의 커뮤니티가 존재하면, 프랑스 화교 커뮤니티의 경우처럼 그 커뮤니티는 베트남 커뮤니티와 동일시되는 결과를 낳는다.

2. 2. 근대

19세기 이후 서구 열강의 침투로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선(대한제국)은 일본에 의해, 베트남프랑스에 의해 청나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서구의 민족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탈중국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1]

선비족의 성씨, 문화, 군사 제도, 의복이 한족에게 채택되었으며, 북조 시대에는 여러 한족이 선비어를 배웠다.[2] [3] 북주에서는 한족 병사와 장교에게 선비족 성씨가 할당되기도 했다.[4][5] 고환과 풍패는 선비 문화를 받아들인 한족 통치자였다. 풍패는 乞直伐(Qizhifa)라는 선비족 이름을 사용했다.

당나라 태자 이승건은 돌궐의 문화와 언어를 사용하고 말했지만,[13][14][15] 동성애와 같은 행위로 당 태종의 분노를 샀다.[16][17][18][19]

2. 2. 1. 명나라

초기 명나라 황제들은 홍무제부터 정덕제까지 원나라의 관행을 이어받아 세습적인 군사 제도를 유지했다. 한국과 무슬림 후궁환관을 요구했으며, 궁술과 승마를 즐겼고, 몽골족을 명나라 군대에서 복무하게 했으며, 티베트 불교를 후원했다. 초기 명나라 황제들은 스스로를 중앙아시아 무슬림, 티베트인, 몽골족 등 다양한 민족에게 "보편적 지배자"로 내세우려 했다.[33][34]

기병대를 기반으로 한 군대는 홍무제와 영락제에 의해 원나라 군대를 본떠서 시행되었다.[35] 홍무제의 군대와 관료에는 몽골족이 포함되었다.[36] 몽골족은 명나라 영토 내에 유지되었다.[37] 광서성에서는 몽골 궁수들이 묘족 소수민족과의 전쟁에 참여했다.[38]

정덕제는 페르시아어와 아랍어 비문이 새겨진 흰색과 파란색 도자기를 제작하도록 무슬림 환관들을 사용했다.[39][40] 무슬림 환관들은 1496년에 우지에 사원 수리에 돈을 기부했다. 중앙 아시아 여성들은 무슬림 경비병과 하미 출신 사이이드 후세인에 의해 정덕제에게 제공되었다.[41] 경비병은 위융이었고 여성들은 위구르족이었다.[42][43] 정덕제는 다얀 칸 휘하의 몽골족을 물리쳤다. 선덕제가 한국 여성을 선호한 것처럼 정덕제는 중앙 아시아 여성을 선호했다.[46] 1517년 몽골족은 정덕제에게 패했다. 군사 애호가인 정덕제 황제는 몽골 의상을 입었다. 청나라의 건륭제와 마찬가지로 정덕제는 위구르족 후궁을 두었다.[47] 외국 출신 위구르족과 몽골족 여성들이 정덕제 황제에게 선호되었다.[48] 정덕제는 타타르족(몽골족)과 중앙 아시아 여성과 잠자리를 같이하고, 몽골 의상을 입었으며, 몽골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페르시아어, 불교, 몽골 이름을 채택했다.[49] 그는 아마도 페르시아어와 티베트어도 공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50]

과거 시험에는 궁술이 포함되었다. 변경 근처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은 말 위에서 궁술을 연습했다. 왕거의 궁술에 대한 저술은 명나라와 원나라 시대에 널리 따랐으며 명나라는 새로운 궁술 기법을 개발했다.[51] 금릉도용은 명나라 시대 난징의 궁술을 보여주었다.[52] 수도를 지키는 근위병의 엄선된 병사들을 위해 수도에서 궁술 대회가 열렸다.[53]

기마술과 궁술은 영락제의 선호 활동이었다.[54] 궁술과 기마술은 정덕제의 빈번한 오락이었다.[55] 그는 환관들과 함께 궁술과 승마를 연습했다.[56] 티베트 불교 승려, 무슬림 여성, 음악가들이 그의 경비병 치앤 닝에 의해 정덕제에게 제공되었고, 치앤 닝은 그에게 양손잡이 궁수이자 군인인 강빈을 소개했다.[57]

2. 2. 2. 청나라

19세기 이후 서구 세력의 침투로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조선(대한제국)과 베트남이 각각 일본프랑스에 의하여 청나라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이때 함께 들어온 서구의 민족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탈중국화가 급속화됐다.[1]

명나라 시기 일부 한족들은 만주 팔기에 합류하여 "만주화"되었다. 만주족청나라를 건국했다.

한족 팔기군은 수많은 중국 전쟁 포로와 항복병으로 구성되어 "니칸" 기로 알려졌다. 여진족 여성들은 자기 가족이 없는 이 중국인들과 결혼했다.[58] 팔기에 합류하는 한족의 수가 너무 많아 곧 여진족보다 많아졌다.[58] 홍타이지는 한족과 여진족 기를 분리하려 시도했다. 요동에서는 중국 문화가 여진 문화와 섞였다. 많은 기병들은 자신들의 기원이 없었기에 가계를 위조했고, 그 후 중국 기에 속할지 여진 기에 속할지 결정했다.[58] 팔기는 옛 흑색 한족 기와 여진 기에서 만들어졌다. 그 이후로 한족 기와 여진 기는 동등하게 되었다. 몽골 팔기도 이때 만들어졌으며, 중국이나 몽골 기로 분류되지 않은 모든 사람은 홍타이지가 만든 민족 집단인 만주족이 되었다.[59]

만주 기병과 한족 기병은 혈통, 조상, 가계에 따라 분류되지 않고 언어, 문화, 행동, 정체성, 생활 방식에 따라 분류되었다. 많은 중국 기병(한군, 즉 한족 기병)은 중국어를 구사하고 명나라를 섬기던 한화된 여진족의 후손이었으며, 일부 민족 만주족 기병(바치 만주)은 1618년 이전에 여진족에게 귀순하여 여진족의 언어와 문화에 동화되어 지린에서 그들과 함께 살았던 민족 한족 출신이었다.

청나라는 중국 기병(한군, 즉 한족 기병)과 기병이 아닌 일반 한족 민간인(한민, 한족, 민인)을 별도로 간주했다. 사람들은 혈통, 인종, 혈통에 기반하지 않고 문화와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만주 기와 중국 기(한군, 즉 한족 기병)로 분류되었다. 민족 만주 기에는 1618년 이전에 변경을 넘어 누르간(지린)으로 이주하여 여진족에 동화되고 여진 문화를 실천하며 여진어를 사용하는 명나라를 탈출한 한족이 포함되었으며, 중국 기(한군, 즉 한족 기병)에는 요동으로 이주하여 한족 문화와 성을 채택하고 명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며 중국어를 구사하는 한화된 여진족의 후손이 포함되었다. 누르하치는 1618년에 요동을 정복하고 앞서 언급한 중국 기를 만들었다.

1618년 이전에 일부 한족은 변경을 넘어 여진족 영토로 이동하여 누르간의 여진족에게 적극적으로 귀순했으며, 학자들은 이들을 "변경인"이라고 불렀다. 이 한족들은 여진족의 정체성을 채택한 후 나중에 만주 기의 일부가 되었다. 반면에 요동의 일부 한족은 청나라의 정복 후에야 귀순했으며, 학자들은 이들을 "변경인"이라고 불렀다. 이는 요동이 명나라 영토의 변경이었고 이들은 국경을 넘으려고 적극적으로 시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복 후 청나라는 그들을 중국 기(한군, 즉 한족 기병)에 배치했다.

명나라에서 탈출하여 1618년 이전에 누르간의 여진족에 합류한 한족 귀순자들은 만주 기에 배치되어 만주족으로 간주되었지만, 1618년부터 1643년까지 명나라로부터 요동을 정복한 후 팔기에 편입된 요동의 명나라 주민들은 별도의 중국 기(중국어: ''한군'', 만주어: ''니칸 초하'' 또는 ''우젠 초하'')에 배치되었으며, 요동 출신 중국 기병(''한군'', 즉 한족 기병) 중 다수는 여진족의 조상을 가지고 있었고 청나라에 의해 만주족으로 분류되지 않았다.[60] 누르하치의 건주 여진 칸국은 지리, 문화, 언어, 직업 및 생활 방식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여진족 또는 니칸으로 분류했다. 여진족은 여진족의 생활 방식을 따르고 여진어를 사용하며 원래 영토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다. 누르하치는 그 반대의 사람들을 니칸(한족)으로 간주했다. 이 니칸 중 일부는 한국 또는 여진족의 조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중국어를 구사하고 새로 정복한 영토의 마을과 도시에서 거주했다.[60]

양측 사람들 모두 명나라 요동과 여진족이 지배하는 누르간 사이의 문화적, 영토적 분할선을 자주 넘나들었다. 한족 군인과 농민은 누르간으로 이동했고 여진족 용병과 상인은 요동으로 이동했으며, 일부 가계는 양측에 흩어져 있었으며, 여진족은 그들이 한족처럼 행동하는지 여진족처럼 행동하는지에 따라 사람들을 니칸으로 보았다. 요동의 숭산에 있는 한화된 여진족 통 가문과 같은 같은 가문 출신 사람들은 명나라와 청나라 모두를 섬겼다. 통부연과 같은 일부는 변함없는 명나라 충신으로 남아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청나라가 요동을 정복한 후 충실히 청나라를 섬겼다. 청나라는 통씨를 한 정람기에 등록했다. 결국 강희제는 통국강과 그의 가까운 친척 몇 명과 같은 통씨 가문의 일부 구성원을 만주 정황기로 이전했는데, 이는 통씨가 이전을 요청했기 때문이다.[61][62][63][64]

통국강은 만주 기로 이전하려는 신청서에서 통씨가 여진족 출신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국은 통국강의 직계 가족과 회사를 만주로 이전하고 다른 통씨 회사는 중국에 남겨두었다. 이는 황제의 모든 가까운 친척을 다른 민족 출신이라도 만주 기로 이전하는 청나라의 정책이었다. 이는 통씨가 여진족 출신임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강희제가 통씨의 신청을 받아들인 가장 그럴듯한 이유였다.[65] 통치 초기에 청나라는 사람들의 민족성을 결정하기 위해 그 당시 정치적으로 편리한 것을 유연하게 처리했다. 통씨가 한 기에서 만주 기로 이전된 것과 한족의 동화가 그 예였다.[65]

지리적, 정치적, 문화적 분할은 명나라 요동과 여진족이 지배하는 누르간 사이에 있었으며, 푸순을 통해 요동과 교역하고 교류했다.[60]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는 모두 민족 정체성을 조상(가계)이 아닌 문화, 언어 및 태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았다. 사람들은 정체성을 변경하고 한 민족 기에서 다른 민족 기로 이전될 수 있었다. 청나라는 몽골족을 몽골어, 유목 생활, 말 관련 활동과 연관시켰고, 만주족을 만주어와 무엇보다도 기의 일부로, 그리고 한족을 요동 거주, 중국어, 농업 및 상업과 연관시켰다.[59] 만주족과 한족의 정체성을 결정할 때 청나라는 생물학적 결정 요인과 조상을 무시했다. 실제로 문화는 만주족과 한족을 구별하는 주요 요인이었으며, 때때로 청나라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하거나 변경했다.[66] 서로 다른 만주, 몽골 및 한족 기의 창설의 동기는 사람들의 분류가 아니었다. 서로 다른 기의 구성원 자격은 주로 그들이 만주어, 몽골어 또는 중국어를 사용하는지에 달려 있었다.[67] 중국 기병(한군, 즉 한족 기병) 스스로가 "한군"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 수 있다는 의견이 있는데, 청나라는 만주족 또는 한족 기병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정의를 변경했기 때문이다.[67]

만주 관리 단방은 한족 조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명나라 말기에 절강에서 청나라로 귀순하여 본래의 절강 성에서 남만주로 이주했으며, 만주족처럼 들리도록 성을 도에서 토호로 변경하여 만주 정백기에 등록했다.[68][69] 만주족은 동화된 이방인들을 기꺼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여진족에게 귀순하거나 그들에게 포로로 잡힌 한족은 만주 사회에 잘 통합되었다.[70] 요동에서 온 이 한족 변경인들은 만주 관습을 받아들였고 만주 이름으로 이름을 바꾸어[70] 중국인보다는 만주족으로 정체성을 인식하고 언어, 행동 및 외모에서 만주족과 유사하게 되었다.[70] 역사가들이 한족 변경인이었던 만주족을 구별하기는 어려운데, 그들은 더 이상 중국 이름을 사용하지 않거나 스스로를 한족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레데릭 웨이크먼은 만주 다하이의 조상이 한족 변경인이라는 증거라고 말했다.[70] 누르하치의 정적인 투룬-호톤의 수장인 니칸 와이란도 웨이크먼에 의해 한족 변경인으로 여겨졌는데, 그의 이름은 문자 그대로 "중국 관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60]

한족을 뜻하는 만주어 "니칸"은 실제 민족 기원이 아닌 한족처럼 사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한족 기병(한군)은 민족 범주가 아니었으며 한족 기에는 한족 혈통이 아닌 사람들이 포함되었다.[62] 1619년 누르하치가 요동을 침략했을 때 여진족은 요동의 한족(니칸)의 충성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해졌고, 그들을 여진족과 동등하게 대하고 여진족의 재산, 곡물, 부, 소유물 및 가옥을 압수하여 한족에게 제공하고, 귀족 계급을 확대하여 한족 가문을 포함시켜 한족이 누르하치 측으로 귀순하도록 했다.[60]

일부 한족 기병과 그들의 가문은 청나라 귀족의 성공적인 구성원이 되었고 그들의 후손은 이어진 귀족 작위를 받았는데, 푸순을 여진족에게 항복하고 귀순한 3등 자작으로 누르하치가 봉하고 한 정람기에 등록된 이영방의 작위와 그의 후손들은 건륭 통치의 마지막 해까지 귀족으로 남아 있었고 더욱 높은 작위를 받았다.[62] 만주족은 1644년 이전의 한족 귀순자에게 광범위한 작위와 명예 및 아이신 교로 여성과의 결혼을 부여했는데, 누르하치의 손녀와 이영방의 결혼과 그의 아들들이 중국 정람기에 등록된 것(한군, 즉 한 기), 그리고 명나라 귀순자 손사개(손사커)의 아들에게 주어진 작위가 중국 정백기에 주어진 것(한군, 즉 한 기)과 강희의 딸 중 한 명과 그의 아들의 결혼 등이 있었다.[64]

청나라 초기에 청나라 황제는 한족 민간인과 모든 기병 간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원래 가장 날카로운 구분을 그렸으며, 중국 기병(한군, 즉 한족 기병)과 만주 기병 간의 차이가 아니었다. 만주족은 니칸을 한족으로 보기보다는 여진족, 몽골족 및 한국인과 같은 중국적 생활 방식을 가진 요동의 명나라 신민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다. 한족 기병으로 분류되려면 원래 명나라 신민이고 민족 중국인이 아니기만 하면 되었으므로 여진족 출신 사람들이 몽골 기와 중국 기에 들어가게 되었다.[64] 누르하치는 문화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분류했고 한족 변경인들이 동화 후에 만주족으로 정체성을 인식하도록 허용했으며, 강희제가 한족과 몽골족 가문을 원래의 몽골 기와 중국 기(한군, 즉 한 기)에서 만주 기로 이전했을 때 민족성이 유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64]

푸순을 여진족에게 항복하고 귀순한 것에 대한 이영방의 보상에는 계급 승진, 누르하치의 손녀와의 결혼, 누르하치와 함께 싸우고 중국 변경인으로서 금나라 귀족에 편입된 것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만주 정체성에 동화된 한족 변경인과 포로로 잡힌 한족 노예를 누르하치가 처리한 방식과는 달랐다.[70] 중국 변경인들은 한 기에 편입되었다.[69] 누르하치는 푸순을 항복하면 이영방에게 승진과 특별 대우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하며 저항을 계속하면 그와 푸순 주민들에게 닥칠 암울한 운명을 상기시켰다.[71] 이영방의 1,000명의 병사에게 그의 항복 후 자유 보유자 지위가 주어졌고, 나중의 중국 기병(한군, 즉 한족 기병) 포청현과 시정주 또한 1622년 광녕에서 항복한 후 청나라에서 봉사를 하여 좋은 운을 경험했다.[65]

누르하치는 다양한 언어 간의 통역을 위해 반문맹 한족(니칸) 출신 통역자를 많이 사용했고, 그들을 매우 신뢰했으며, 강구리와 방기나와 같은 일부와 가깝고 우호적인 개인적 관계를 발전시켰다. 1580년대에 여진족이 요동에서 수만 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납치한 한족 공정륙(공정류)은 원래 소흥 절강 출신이었으며, 누르하치의 측근이 되어 그의 아들들을 가르치고, 만주 이름 오노이를 채택했으며, 누르하치로부터 아내, 노예 및 집을 선물 받았다.[60]

만주 지도자 누르하치는 명나라로부터 요동을 정복하는 데 착수하여, 한족에게 파멸을 위협하고 동시에 중요한 지위와 보상을 약속함으로써 그가 귀순하도록 유도했다.[72] 1623년에 여진족이 중국인을 노동력으로 짜내고 중국 가구에 여진족을 주둔시켰기 때문에 요동 중국인들의 여진족에 대한 대규모 반란이 발생했다. 중국 반군들은 보복으로 여진족을 파괴하는 행위를 저질렀다.[72] 홍타이지는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많은 중국인을 정부에 포함시키고 중국식 통치 방식을 모방하기 시작했다.[72] 영원 전투와 같은 원충환 장군의 포병으로 만주족에게 패배를 가한 후,[73] 만주족은 군대에 대포를 사용할 줄 아는 한족 포로들을 흡수하여 병력을 보충하기로 결정했다.[73]

만주족은 또한 황족 아이신 교로 가문의 여성과 결혼시킴으로써 한족 장군들을 유인하여 귀순하고 팔기에 합류하도록 했다.[74] 한족 장군 이영방은 만주족에게 아이신 교로 여성과 결혼하고 팔기에서 직책을 받는 대가로 매수되어 귀순했다. 더 많은 한족들이 그들의 지위를 버리고 만주족에 합류했다.[75] 1632년 예친왕 요토가 아이디어를 낸 후 한족과 만주 여성의 대규모 결혼이 1,000명에 달했다. 그들은 장군 또는 관료였다.[74] 만주 지도자는 "중국 장군과 만주 여성이 함께 살고 함께 식사했기 때문에 이 항복한 장군들이 그들의 조국을 잊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74] 황족 출신 여성들은 삼번의 아들과 같은 다른 한족 관리들과도 결혼했는데, 그들은 중국을 정복한 후 청나라에 귀순했다.[74] 만주족은 또한 한족으로 구성된 포병 부대를 만들어 명나라 군대에 사용했다.[75] 한족은 또한 만주족에게 "장관"이라고 칭하는 특권을 부여하고 같은 직책의 만주족은 "노예"로 간주하는 등의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만주족이 귀순하고 문관으로 고용되도록 유인했다.[76]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된 한족은 세 가지 다른 시대에 만주족의 통치를 받았다. 1618년 이전에 누르하치와 함께 한 한족 "변경인"은 여진족 문화를 실천하고 만주 기 내의 만주 회사(니루)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조상과 혈통에 의해서만 한족이었다. 1618년부터 1622년까지 요동과 요서에서 포로로 잡힌 한족은 만주 기 또는 한족 기의 노예가 되었고, 마지막으로 홍타이지 치세 동안 명나라를 버리고 만주족에 합류한 한족은 처음에는 만주 기에 부속된 모든 한족 회사(니루)에 배치되었고, 1642년에 만주 기가 모든 한족 회사를 배출했을 때 여진 문화에 거의 동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별도의 중국 기(한군, 즉 한 기)에 배치되었다.[77]

1622년 광녕에서, 여진족 출신이지만 중국 문화를 실천한 명나라 군인 시정주가 포청현과 함께 누르하치의 후금에 항복했고, 포청현이 별도의 중국 기(한군, 즉 한 기)를 만들자고 제안한 후, 결국 중국 기(한군, 즉 한 기)에 배치되었다. 팔기에 있는 모든 한족이 중국 기(한군, 즉 한 기)의 일부도 아니었고, 중국 기(한군, 즉 한 기)가 한족으로만 구성된 것도 아니었으며, 한 기의 구성원 자격은 자동으로 그들이 실제 한족임을 의미하지 않았다.[77]

누르하치 아래 여진족은 사람들을 전 명나라 신민인지, 한족처럼 행동했는지, 중국식 생활 방식을 가졌는지, 중국어를 사용했는지, 한족처럼 옷을 입었는지, 한족 이름을 가졌는지에 따라 한족(니칸)으로 분류했으며, 명나라에 이주한 모든 여진족은 중국 성씨를 채택했다.[77] 중국 기병(한군, 즉 한족 기병)은 순치 아래에서 많은 강력한 지위와 명성을 얻었으며, 이 중국 기병(한군, 즉 한족 기병)은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에 합류한 요동의 한족 귀순자의 3대 또는 2대 후손이었다.[70] 그들은 "만주 귀족과 거의 구별할 수 없었다." 한 기병 경중명은 경남왕의 작위를 받았고 그의 아들 경징모는 그의 두 아들 경징충과 경조충이 순치 아래에서 조정 시종이 되고 아이신 교로 여성과 결혼하도록 했는데, 하오게(홍타이지의 아들)의 딸은 경징충과 결혼했고 아바타이의 손녀는 경조충과 결혼했다.[70]

한족 기병(한군, 즉 한족 기병)에 대한 인종과 민족성에 대한 오해는 그들이 실제로 "문화 집단"이라는 사실을 놓쳤는데, 사람이 실제 한족이 아니어도 중국 기병(한군, 즉 한족 기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78] 건륭은 한족 기병의 정체성을 재정의하여 그들이 한족 민간인과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고 간주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누르하치와 홍타이지가 문화와 정치만을 기준으로 정체성을 분류하고 조상을 기준으로 분류하지 않았던 이전의 반대 이념과 입장을 대체했지만, 중국 기병(한군, 즉 한족 기병) 정체성에 대한 건륭의 견해는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이전의 청나라 입장을 삭제했다.[61]

건륭은 또한 그의 할아버지 강희와는 완전히 다른 한족 기병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공포했는데, 충성심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간주되는 추상적인 이론을 내세우며, 건륭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귀순한 한족 기병을 반역자로 간주하고 청나라에 귀순한 저명한 중국 기병(한군, 즉 한족 기병)에 대한 불리한 전기를 편집하는 한편, 동시에 청나라에 맞서 싸우다 순교한 명나라 충신들을 찬양하는 전기를 "왕조를 위해 순교하고 순결을 위해 희생한 자들의 기록"이라고 편집했다.[60] 건륭이 명단에 포함시키고 제외한 일부 사항은 정치적 성격을 띠었는데, 건륭이 그의 후손 이시요를 싫어하여 이영방을 포함시키고 아들 마웅진의 이미지를 우려하여 마명배를 제외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60]

1618년부터 1629년까지 팔기에 합류한 동요동의 한족은 "태니칸"으로 알려졌고, 푸순에서 청나라에 귀순한 한족은 부산니칸으로 알려졌으며 태니칸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태니칸은 1629-1643년 사이에 팔기에 합류한 서요동, 산시, 산둥 및 직례 출신의 후기 한족과 구별되었으며 "부시 바잇탕가"로 알려졌다.[60] 두 집단 모두 1644년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중국을 지배하기 전에 중국 기의 일부였으며, 1644년 이후 청나라가 중국을 통치했을 때 중국 기에 편입된 한족과 모두 구별되었다. 1644년 이전의 중국 기병은 "늙은이" 구인으로 알려졌다.[60] 건륭 황제는 1740년에 모든 푸순 니칸, 특히 선택된 태니칸, 한국인 및 몽골인의 만주 기로의 대규모 이전을 시행했다.[60]

북경의 만주 기병은 정복 몇십 년 만에 빈곤에 시달려 빈민가에서 살았고 빚에 시달렸으며, 그들의 비참한 모습은 1655년에 나타났다. 그들은 법을 위반하여 재산을 한족에게 팔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79]

원래 청나라 초기에 청나라 황제는 일부 한족을 후궁으로 삼았고, 1648년 순치의 법령은 한족 남성이 관료나 평민의 등록된 딸이거나 미등록 평민의 경우 기 부대장의 허가를 받아 팔기에서 만주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허용했는데, 그 후 왕조에서 이러한 정책이 폐지되었고 청나라는 팔기 소녀를 황실 후궁으로 징병하는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여 한족 평민의 딸을 제외했다.[80]

중국 기병(한군, 즉 한족 기병)은 한족 민간 여성과 빈번하게 결혼했고 이는 청나라 황제에 의해 허용되었지만 청나라 황제는 팔기의 소녀들이 한족 민간의 의상과 보석을 따라 궁정 봉사를 위해 징집되었을 때 이러한 혼인으로 인해 괴로워했다.[80] 청나라는 황실 궁정에서 하녀와 배필로 봉사하는 중국 기병(한군, 즉 한족 기병)의 일반적인 딸들을 제거하고 차단하는 정책을 수립했는데, 이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그렇게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을 징병에서 면제했지만, 청나라 법정이 중국 기(한군, 즉 한 기)의 소녀들이 만주족 관습과 반대되는 넓은 소매, 전족, 외짝 귀걸이와 같은 한족 민간의 관습을 따르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렇게 한 것일 수 있는데, 만주 및 몽골 기병의 딸은 징병을 받아 황실 궁정에서 하녀 또는 잠재적인 배우자로 봉사하도록 선택되어야 했다.[80] 한족 기병의 딸들은 궁정 봉사에 자원할 필요가 없었다.[78] 중국 기(한군, 즉 한 기)의 딸은 황제에게 후궁으로 선택되는 것을 허용되지 않았다.[78]

만주 기병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성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을 지칭하는 반면, 한족 기병은 일반적인 중국 스타일로 성과 이름을 사용했다.[81][82]

많은 한족 기병이 만주 이름을 채택했는데, 이는 엘리트와 연관되려는 동기였을 수 있다. 만주어를 아는 한족 기병 최지로는 이름을 만주어 아르사이로 바꿨는데, 황제는 그에게 그의 이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물었다.[65] 중국 기병은 또한 숫자를 개인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만주 개인 명명 관행을 채택했다.[65]

중국 기병(한군, 즉 한족 기병)은 성씨를 "기야"를 끝에 추가하여 만주화했다.[83] 그러나 조이선, 조이훈 및 조설근과 같은 일부 한족 기병은 만주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83] 다른 많은 한족 기병은 만주화된 이름을 사용했는데, 만주 이름 데밍을 가진 한 기병은 장덕의라는 별도의 중국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83]

만주 기 부대 내에는 다양한 한족과 몽골인들이 흩어져 있었고, 만주 기에는 몽골, 한국, 러시아 및 티베트 회사가 있었다. 만주 기는 누르하치와 홍타이지가 만주 기를 만든 건주와 같은 주요 여진 부족으로 구성된 고위 "구 만주족"(포 만주, 페 만주)과 1644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침략한 후 순치와 강희에 의해 만주 기에 편입된 다우르(다워얼), 오로첸(엘룬춘), 솔룬(수오룬), 헤저, 키아카르(쿠율라) 및 시베(시보)와 같은 다른 퉁구스 및 몽골 부족으로 구성된 하위 "신 만주족"(중국어 음역: 이차 만주. 의차 만주 Yiche Manzhou; 중국어 번역: 신 만주; 만주어: Ice Manju)으로 두 개의 주요 부서로 나뉘어 아мур강 유역에서 러시아 제국에 맞서 청나라를 위해 싸우도록 했다.[84]

3. 현대의 탈중국화

19세기 이후 서구 열강의 침투로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조선(대한제국)과 베트남은 각각 일본프랑스에 의해 청나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서구의 민족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탈중국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1]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이 중국 대륙과의 연결 고리를 끊고 독자적인 타이완 공화국으로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탈중국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후, 각 국가별로 현대의 탈중국화가 진행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홍콩''': 영국홍콩 반환 이후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홍콩인들의 정체성이 강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 '''대만''': 중화민국 성립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재중국화 시도와 민주진보당 정부의 탈중국화 시도가 번갈아 나타났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 '''베트남''':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시기부터 화족을 중심으로 탈중국화 경향이 나타났으며, 베트남 통일 이후에도 이러한 경향이 지속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 '''북한''': 김일성한자 사용을 금지하며 탈식민주의와 한국 민족주의를 강조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 '''대한민국''': 한글을 공식 표기 문자로 지정하고, 서울특별시의 중국어 명칭을 변경하는 등 탈중국화 사례가 나타났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 '''키르기스스탄둥간족''': 회족 반란 이후 후이족 인구가 산시성간쑤성의 문학적 전통과 지역 문화로부터 소외되면서 탈중국화의 덜 의식적인 과정을 보여주었다.[1]

3. 1. 홍콩

1997년 영국홍콩 반환을 통해 홍콩을 중국에 넘긴 이후, 특히 2000년대 중반부터 홍콩 현지인과 중국 정부 및 본토 출신 인구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이는 중국 본토 시민의 홍콩 여행 제한이 완화된 것이 주된 원인 중 하나이다.[85][86]

홍콩인의 정체성은 식민지 시대부터 존재해 왔지만, 지난 10년 동안 더욱 강해지고 뚜렷해졌다. 홍콩 거주자의 53%가 자신을 중국인이 아닌 순수한 홍콩 거주자로 인식하고 있으며(18~29세 거주자 중 75% 이상), 78%의 홍콩 거주자는 자신을 "홍콩 시민"이자 "중국 시민"으로 인식하고 있다. 홍콩인 중 5분의 1 미만이 자신을 오로지 "중국인"으로만 인식한다.[85][86]

150년 이상 영국령 홍콩이었던 홍콩 문화는 서구 문화와 중국 문화 요소가 혼합되어 독특하다. 이러한 문화적 차이는 홍콩을 중국 본토와 구별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에 의해 강조되고 수용되었다.[87] 홍콩 광둥어는 광둥성 본토에서 사용되는 다른 광둥 방언과 다른데, 이는 홍콩 영어의 영향과 홍콩의 언어 혼용에 기인한다.

언어 차이 또한 홍콩 정체성을 중국 본토 정체성과 분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표준 중국어가 중국 본토의 공식 중국어 방언인 반면, 지역 전통 광둥어는 오랫동안 홍콩에서 사용되어 왔다. 1997년 이후 이 지역에 표준 중국어 사용자가 증가하고, 홍콩 거주자에게 표준 중국어를 구사하라는 중국 본토의 기대는 시민들이 표준 중국어의 침해에 맞서 광둥어를 언어 보존하기 위한 갈등과 방어적 조치를 야기했다.[88] 이러한 행동에는 표준 중국어를 공산주의 언어로 낙인찍는 반면, 광둥어영어는 민주주의 언어로 인식하는 것이 포함되며, 이는 홍콩과 중국 간의 정치적 차이를 반영한다. 이러한 언어 정치적 관점은 역사적으로 광둥어를 사용하는 해외 화교 공동체로도 확산되었다.[89]

홍콩의 민주주의 발전의 부족은 중국 정체성에 대한 감각을 더욱 약화시켰다.[90] 일국양제 정책에 따라 홍콩은 1997년 이후 최소 50년 동안 자유로운 생활 방식을 유지할 권리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민주주의 제도와 홍콩의 검열을 억제하려는 베이징 정부의 시도가 증가하고, 결국 보통 선거가 지연되면서 현지인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시위와 불안이 야기되었다. 이는 2014년 홍콩 시위로 절정에 달했는데, 당시 중국 공산당은 홍콩인들이 베이징이 먼저 후보를 승인하는 조건으로 이 지역의 행정 수반을 투표하도록 허용했다. 이러한 정치적 위기는 지역 홍콩 정체성을 강화했으며, 그 결과 홍콩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3. 2. 대만

1945년 중화민국일본으로부터 대만을 반환받은 후,[91] 중국 국민당 정부는 섬 주민들의 "재중국화"를 추진하며[92][93] 중국 서예, 전통 중국 회화, 민속 예술, 중국 경극을 지원했다.

대만 국립정치대학교의 대만 정체성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탈중국화는 1992년에서 2005년 사이에 가장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 "중국인" 정체성은 26.2%에서 7.3%로 감소했고, "대만인" 정체성은 17.3%에서 46.5%로 증가했으며, 대만인과 중국인을 모두 포함하는 정체성은 45.4%에서 42.0%로 감소했다.[94] 장제스장징궈의 권위주의적 행정부는 중화민국의 국민대회가 대만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에서 선출되었다는 이유로 범중국 지도자로서의 정당성을 주장했다(1947년). 그러나 리덩후이 행정부(1988–2000)는 1991년에 이 대회를 폐지하고, 대만만의 선거인단으로 구성된 의회 기구를 형성함으로써 정치 체제를 탈중국화하기 시작했다.[94]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의 탈중국화는 기관 이름에서 "중국"이라는 단어를 "대만"으로 대체하여 "대만 법률 협회", "대만 정치학 협회", "대만 사회학 협회", "대만 역사 협회"를 창설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 일부 대만 역사학자들은 일본의 식민 통치의 폐해를 축소하고, 이를 "점령"이 아닌 "통치"라고 언급했으며, 대만 역사 협회는 대만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가 아닌 일본의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했다.[94]

2001년, 대만화의 지지자들은 2001년의 탈중국화를 역사적으로 중국 및 중국 문화와 동일시해 온 정치 지도부에 반대하여, 지역 대만 중심의 정체성을 강조하려는 운동의 일부로 특징짓기 시작했다.[95]

탈중국화는 친대만 독립 민주진보당이 행정원을 장악하면서 천수이볜 행정부(2000–2008) 하에서 가속화되었다. 천수이볜의 교육부 장관인 두정성은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재작성하여 "대중국 의식의 잔재"(大中國意識的沈痾|대중국 의식의 침아중국어)를 폐지하도록 지시했다. 이 교과서의 탈중국화는 대만 역사와 중국 역사를 별도의 권으로 분리하고, "중국 대륙"이라는 용어 사용을 금지하며, 청나라 시대의 중국인 대만 이주를 "식민화"로 묘사하는 내용을 포함했다.

동시에 천수이볜은 2002년에 양안론 개념을 도입하여 중국과 대만이 별도의 국가라고 주장하는 한편, 중화민국 여권에 "대만에서 발행"이라는 문구를 추가하도록 지시했다.[94] 같은 해, 두정성의 부서는 중국 본토에서 개발되어 싱가포르말레이시아와 같은 다른 국가에서도 사용되는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한어 병음 시스템을 채택하는 대신, 대만 학자가 설계한 통용 병음을 만다린 중국어의 자체 로마자 표기 시스템으로 선택했다. 2003년, 정부는 만다린어를 정부의 유일한 언어로 사용하는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정책을 폐지했는데, 이는 실제적으로 섬에서 두 번째로 큰 언어인 대만어 호키엔어국어의 많은 기능을 수행하도록 장려했다.[94] 2004년부터 "중화민국" 지도에는 더 이상 중국 본토가 포함되지 않는다.

2005년부터 천수이볜의 행정원은 또한 공공 및 민간 조직에서 "중국" 또는 "중국어"라는 단어를 제거하려는 대만 명칭 정정 운동을 시작했다. 여기에는 "해외 화교 사무 위원회"( "해외 동포 사무 위원회"로 변경)와 같은 국가 기관의 명칭 변경, 중화항공과 같은 민간 조직의 명칭 변경 설득, 거의 100개의 행정 법률에서 중국 본토에 대한 언급 삭제 등이 포함되었다. 2006년, 천수이볜은 국가통일위원회와 국가통일 지침을 폐지했다.[94] 2007년 2월, 천수이볜 정부는 중화우정 (차이나 포스트)의 이름을 대만 포스트로, 중국석유공사를 "CPC Corporation, Taiwan"으로, 중국선박공사를 "CSBC Corporation, Taiwan"으로 변경했다.[96]

이 명칭 변경 문제는 2008년 3월 대만에서 치러진 중화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쟁점이 되었다. 전 타이베이 시장인 마잉주가 총통으로 선출되자, 그는 천수이볜의 탈중국화 정책 중 일부를 되돌리려 했다.[97] 2008년 8월 1일, 우정국은 명칭 변경을 되돌리고 "중화우정"이라는 이름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98] 2009년 1월 1일 현재, 통용 병음은 정부에 의해 한어 병음으로 폐지되었다. 2009년 9월 28일, 마잉주는 1665년에 건립된 대만 공자묘에서 공자의 2559번째 생일을 기념했다. 2011년 1월 1일, 마잉주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대만 건설, 중화 유산 활성화"라는 제목을 붙였으며, 이는 "중국 문화와 인자함, 정의, 효도, 스승 존경, 친절, 검소함"을 강조했다.[97]

2024년 대만 총선을 앞두고, 중국 국영 언론은 민주진보당(DPP)이 교육 부문에서 탈중국화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비난했다.[99]

3. 3. 베트남

19세기 이후 서구 세력의 침투로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상이 흔들리며 조선(대한제국)과 베트남이 각각 일본프랑스에 의하여 청나라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이때 함께 들어온 서구의 민족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탈중국화가 급속화됐다.

화족은 베트남 내 화교를 의미하며, 남월 시대부터 그 존재가 확인되며 후 레 왕조 건국 이후 조직화된 상당한 소수 민족을 형성한다.[100]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중국의 정치적 혼란과 생활 수준 정체, 1949년 공산주의 정권 수립,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식민 정부가 제공한 사업 인센티브 등으로 인해 중국에서 베트남으로의 이민이 절정에 달했다.[101] 화족은 대체로 베트남 사회에 잘 통합되어 중상류층의 상당 부분을 형성하며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01] 이들은 모국어 및/또는 광둥어(동남아시아 화교의 공통어) 외에도 베트남어 구사 능력이 매우 높았으며, 베트남 소수 민족 중 가장 높은 비율을 보였다.[102] 대부분의 화족은 자신을 중국인보다 베트남인으로 먼저 여겼으며, 특히 남베트남에서는 중국 본토 출신이 아닌 사람들은 "홍콩 중국인" 또는 "마카오 중국인"과 같이 자신의 특정 출신지를 밝히는 경향을 보였다.[103]

사이공 함락과 베트남의 공산주의 통일 이후, 구 남베트남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화족은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중국보다는 미국, 프랑스, 호주 등 다른 국가로 이민을 선택했다. 베트남 북부에서 정부에 의해 박해받는 화교만이 중국, 특히 광시성으로 이주를 선택했다.[104] 베트남 출신 해외 화교는 일반적으로 현지 중국인 및 베트남 커뮤니티와 모두 교류한다. 그러나 광둥어를 사용하지 않거나 중국 본토 출신의 커뮤니티가 존재하면, 프랑스 화교 커뮤니티의 경우처럼 그 커뮤니티는 베트남 커뮤니티와 동일시되는 결과를 낳는다.

3. 4. 북한

1949년 김일성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한자 사용을 금지했다. 김일성은 한자 폐지를 탈식민주의와 한국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여겼다.[1]

3. 5. 대한민국

한글은 1948년부터 한국어의 공식 표기 문자로 지정되어 한자를 대체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고등학교 선택 과목으로 한자를 배우도록 하고 있다. 이명박서울특별시장은 2005년 서울의 공식 중국어 명칭을 ''Hancheng'' (한성, 漢城)에서 Seoul (서울)로 변경했는데, 이는 탈중국화의 한 사례로 볼 수 있다.[105] 이전 명칭인 한성은 표준 중국어로 Hànchéng, 한국어로 Hanseong으로 발음되며, 서울의 옛 이름이다. 한성은 한강에서 유래되었으며, 문자 그대로는 "한(넓은) 강 위의 성벽 도시"를 의미하지만, ''한족'' 도시로 오해될 수 있었다. 새로운 이름 Shou'er (首爾)는 그러한 함축적 의미를 전혀 담고 있지 않으며, 한국 지명 중에서 유일하게 한자어 이름이 없는 ''서울''과 소리와 의미가 유사하다.

3. 6. 기타 국가

키르기스스탄둥간족은 회족 반란 이후 1세기 남짓한 기간 동안 후이족 인구가 산시성간쑤성의 문학적 전통과 지역 문화로부터 소외되면서 탈중국화의 덜 의식적인 과정을 보여주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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