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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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 건축가, 환경 운동가로,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며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건축에서 직선을 배제하고 곡선과 자연 친화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건축 치료사'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회화, 우표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또한 환경 보호, 자연주의 사상을 실천하며 사회 운동에도 참여했다.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은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전시되었으며, 그의 건축 철학은 현재까지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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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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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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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프리드리히 슈토바서 |
출생일 | 1928년 12월 15일 |
출생지 | 오스트리아 빈 |
사망일 | 2000년 2월 19일 |
사망 장소 | 퀸 엘리자베스 2호 선상 |
국적 | 오스트리아 뉴질랜드 (만년) |
분야 | 미술 건축 글쓰기 |
사조 | 현대 미술 |
주요 작품 | |
이름 | |
본명 (독일어) | Friedrich Stowasser |
전체 이름 (독일어) | Friedensreich Regentag Dunkelbunt Hundertwasser |
전체 이름 (로마자 표기) | Friedensreich Regentag Dunkelbunt Hundertwasser |
참고 자료 | |
ISBN | 978-3-8228-6598-9 |
2. 생애
1928년 12월 15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기술직 공무원이자 1차 세계대전 장교였던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프리드리히 슈토바서(Friedrich Stowasser)였다.[48] 1929년, 그의 나이 1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48]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면서 할머니와 이모 집으로 강제 이주되었다.[48]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으로 외할머니와 친척 69명이 몰살당했다.[48] 훈데르트바서와 어머니는 게토로 강제 이주되었다.[48]
나치 시대는 훈데르트바서와 그의 어머니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 그들은 유대인이었기에 박해를 피하기 위해 기독교인으로 가장했는데, 훈데르트바서의 아버지가 가톨릭 신자였기에 설득력 있는 속임수였다.[2] 훈데르트바서는 1935년 가톨릭으로 세례를 받았다.[2]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훈데르트바서는 히틀러 유겐트에도 가입했다.[2] 그는 자신을 "반 유대인"으로 밝혔습니다.[3]
1949년 여러 지역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르네 브로를 만나 프랑스로 가서 훈데르트바서로 개명한다.[48] 자연을 사랑했던 프리드리히 슈토바서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곳에 흐르는 백 개의 강"이라는 뜻의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로 스스로 개명했다.[47] 그의 채택한 성은 슬라브어로 "(백) 개"를 뜻하는 "sto"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에 기반합니다. 이름 "프리덴스라이히"는 "평화의 영역" 또는 "평화로운"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그의 이름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는 직역하면 "평화의 영역 백 개의 물"이 됩니다. 그가 자신을 위해 선택한 다른 이름인 "레겐타크"와 "둔켈분트"는 각각 "비 오는 날"과 "어둡고 다채로운"으로 번역됩니다.
1950년대 초 그는 건축 분야에 진출했다. 훈데르트바서는 또한 응용 미술 분야에서 일하며 깃발, 우표, 동전, 포스터를 제작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깃발은 코루 깃발(1983년 디자인)이며, 오스트리아 우체국을 위한 여러 우표도 디자인했다. 그는 또한 카보베르데와 제네바의 유엔 우편국을 위해 세계인권선언 35주년을 기념하는 우표를 디자인했다.
1957년 훈데르트바서는 노르망디 외곽에 농장을 구입했다.[4] 1958년 헤르타 라이트너와 결혼했지만 2년 후 이혼했다. 그는 1962년 일본 화가 이케와다 유코와 다시 결혼했지만 1966년 이혼했다. 이 무렵 그는 예술로 인기를 얻었다.
1964년 훈데르트바서는 인구 밀도가 낮은 오스트리아 저지대 발트피르텔에 있는 옛 제재소 "한제"를 구입했다. 그는 번잡함에서 멀리 떨어진 자연 속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4]
그는 1960년대에 중앙 아프리카 우간다의 토로 왕국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그곳에서 많은 작품을 그렸고 왕국 이름을 따서 작품의 제목을 지었다.[5][6]
1972년 훈데르트바서는 스위스에 "그뤼너 야누라 AG"라는 주식회사를 설립했고, 2008년에는 "나미다 AG"로 이름을 바꿨다. 훈데르트바서는 이 회사를 통해 자신의 지적 재산권을 관리했다.[7][8]
1970년대에 훈데르트바서는 뉴질랜드 북쪽 끝 테 타이 토케라우 지역의 베이 오브 아일랜드에 여러 부동산을 매입했는데, 여기에는 카우리누이 계곡 전체 약 372ha가 포함됩니다. 그는 자연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생활하고 일하는 꿈을 실현했다. 다른 프로젝트들 외에도 그는 그곳에 "병 모양의 집"을 설계했다. 그는 태양 전지판, 물레방아, 생물학적 정수 시설을 사용하여 자급자족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첫 번째 잔디 지붕 실험도 그곳에서 이루어졌다.[4]
1979년 훈데르트바서는 스위스 회사를 통해 유고슬라비아의 알렉산드라로부터 베네치아의 광대한 역사적 정원인 "지아르디노 에덴"('에덴 동산')과 팔라초 "빌라 델레 로제"를 구입했다.[9][10]
1980년 훈데르트바서는 핵확산 반대 운동가 랄프 네이더의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워싱턴 D.C.를 방문했다. 이 결과로 시장 매리언 배리는 11월 18일을 훈데르트바서의 날로 선포했다.[11] 훈데르트바서는 사법 광장에 나무를 심었고, 협동조합 아파트 소유주가 둥근 창을 설치한 것에 대해 소송을 당한 것을 대변했다.[11]
1982년 훈데르트바서의 외동딸인 하이디 트리멜이 태어났다.[12]
1972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48] 많은 예술활동을 하다가 2000년 2월 19일 태평양을 항해하던 엘리자베스 2호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유언에 따라 뉴질랜드의 그의 마당인 <행복한 죽음의 정원>의 튤립나무 아래에 자연과 어우러져 영원히 잠든다.[48]
2. 1. 어린 시절과 교육
훈데르트바서는 어렸을 때부터 색채와 형태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지니며 예술에 두각을 나타냈다.[48] 1936년 8살 때 빈의 몬테소리 학교에서 "색채와 형태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지닌 학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48] 1948년 빈 예술 학교에서 3개월간 수학하고,[48] 1950년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지만 하루 만에 자퇴한다.[48]나치 시대는 훈데르트바서와 그의 어머니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 유대인이었던 그들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기독교인으로 가장했고,[2] 훈데르트바서는 1935년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2]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하기도 했다.[2] 그는 자신을 "반 유대인"으로 밝혔습니다.[3]
제2차 세계 대전 후, 훈데르트바서는 화가를 지망하며 스케치북을 들고 여행을 떠났다. 전쟁이 끝난 후 빈 미술 아카데미에서 3개월 동안 수학했으며,[48] 이때 스토바서 대신 훈데르트바서라는 이름으로 작품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 "프리덴스라이히"는 "평화의 영역" 또는 "평화로운"이라는 의미를 지닌다.[48] 1952년에서 1953년 빈에서 열린 전시회를 통해 처음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작업실을 따로 두지 않고 자신이 머무르는 어느 장소에서든 그림을 그렸으며, 이젤을 사용하지 않고 캔버스나 종이를 펼쳐놓고 작업했다.[49] 하나의 작품에 유화 물감, 수채 물감, 유성펜, 아크릴, 천 조각, 템페라, 오일, 금속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다.[49] 또한 캔버스 대신 포장지, 나무판, 천 조각 등 다양한 곳에 그림을 그렸다.[49]
빈 미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그는 1981년부터 모교 교수를 역임했다.
2. 2. 개명 이유
자연을 사랑했던 프리드리히 슈토바서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곳에 흐르는 백 개의 강"이라는 뜻의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로 스스로 개명했다.[47] 1949년(20세)에 '스토바서(Stowasser)'는 '훈데르트바서(Hundertwasser)'로 바꾸기로 결심했는데, 러시아어와 슬로바키아어로 스토(sto)가 숫자 '100(Hundert)'를 뜻한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47] 그 후 자신의 작품에 Huwa, 100, 세 개의 물결선으로 구성된 새로운 심볼 형태의 서명을 했다. 1961년 일본에 머물며 일본 전통 목판화를 연구하던 훈데르트바서는 자신의 이름을 일본어로도 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이름에 '프리데라이히(Friedereich)'를 추가한다. 평화를 뜻하는 프리데(Friede)와 왕국을 뜻하는 라이히(reich)를 합친 말이다. 1968년 프리데라이히는 '프리덴스라이히(Friedensreich)'로 수정된다.[50] 그의 채택한 성은 슬라브어로 "(백) 개"를 뜻하는 "sto"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에 기반하며,이름 "프리덴스라이히"는 "평화의 영역" 또는 "평화로운"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그의 이름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는 직역하면 "평화의 영역 백 개의 물"이 된다. 그가 자신을 위해 선택한 다른 이름인 "레겐타크"와 "둔켈분트"는 각각 "비 오는 날"과 "어둡고 다채로운"으로 번역된다.2. 3. 결혼과 이혼
훈데르트바서는 1958년 헤르타 라이트너와 첫 결혼을 하지만 2년 후인 1960년에 이혼했다.[4] 1962년에는 일본 화가 이케와다 유코와 재혼했으나, 1966년에 다시 이혼했다.[48] 이 시기에 그는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4]2. 4. 예술 활동
훈데르트바서는 일찍부터 예술적 재능을 보였으며, 빈 미술 아카데미에서 3개월 동안 수학했다.[2] 이때부터 스토바서 대신 훈데르트바서라는 이름으로 작품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행을 떠났고, 항상 가지고 다니던 작은 물감 세트를 사용하여 눈에 띄는 모든 것을 스케치했다. 피렌체에서 만난 프랑스 화가 르네 브로와는 평생 친구가 되었다.[2] 1952년에서 1953년 빈에서 열린 전시회는 훈데르트바서의 첫 번째 상업적 성공이었다.그의 이름 "프리덴스라이히"는 "평화의 영역" 또는 "평화로운"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훈데르트바서"는 "백 개의 물"을 의미한다. 그가 선택한 다른 이름인 "레겐타크"와 "둔켈분트"는 각각 "비 오는 날"과 "어둡고 다채로운"으로 번역된다.
1950년대 초, 훈데르트바서는 건축 분야에 진출했으며, 응용 미술 분야에서도 깃발, 우표, 동전, 포스터 등을 제작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깃발은 코루 깃발(1983년 디자인)이며, 오스트리아 우체국과 카보베르데, 제네바의 유엔 우편국을 위한 우표도 디자인했다.[2]
1957년 노르망디에 농장을 구입했고,[4] 1958년 헤르타 라이트너와 결혼했지만 2년 후 이혼했다. 1962년 일본 화가 이케와다 유코와 재혼했지만 1966년 이혼했다. 1964년에는 오스트리아 저지대 발트피르텔에 있는 옛 제재소를 구입하여 자연 속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4] 1960년대에는 중앙 아프리카 우간다의 토로 왕국에서 시간을 보내며 많은 작품을 그렸고, 왕국 이름을 따서 작품 제목을 지었다.[5][6]
1972년 스위스에 "그뤼너 야누라 AG"(2008년 "나미다 AG"로 변경)를 설립하여 자신의 지적 재산권을 관리했다.[7][8] 1970년대에는 뉴질랜드 베이 오브 아일랜드에 여러 부동산을 매입하여 자연과 밀접하게 연결된 삶을 살았다.[4] 1979년에는 베네치아의 지아르디노 에덴과 팔라초 "빌라 델레 로제"를 구입했다.[9][10]
1980년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핵확산 반대 운동가 랄프 네이더를 지원했고, 매리언 배리 시장은 11월 18일을 훈데르트바서의 날로 선포했다.[11] 1982년 외동딸 하이디 트리멜이 태어났다.[12]
2. 5. 말년과 죽음
훈데르트바서는 1970년대에 뉴질랜드 베이 오브 아일랜드에 여러 부동산을 매입하여 자연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생활하는 꿈을 실현했다.[4] 그는 카우리누이 계곡 전체 약 372ha를 포함한 그곳에 "병 모양의 집"을 설계하고, 태양 전지판, 물레방아, 생물학적 정수 시설을 이용하여 자급자족 생활을 했다.[4] 그의 첫 번째 잔디 지붕 실험도 그곳에서 이루어졌다.[4]1980년, 훈데르트바서는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핵확산 반대 운동가 랄프 네이더를 지원했다.[11] 매리언 배리 시장은 11월 18일을 훈데르트바서의 날로 선포했으며, 그는 사법 광장에 나무를 심고, 둥근 창 설치 문제로 소송당한 협동조합 아파트 소유주를 대변했다.[11] 1982년에는 그의 외동딸 하이디 트리멜이 태어났다.[12]
빈 미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그는 1981년부터 모교 교수를 역임했다. 자연을 사랑했던 그는 건축에서도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며 곡선을 많이 사용한 독자적인 양식을 만들어냈다.
2000년 2월 19일, 훈데르트바서는 태평양의 ''퀸 엘리자베스 2''호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3] 그의 유언에 따라 그는 뉴질랜드 자신의 땅, 튤립 나무 아래 행복한 죽은 자의 정원에 자연과 조화롭게 묻혔다.[13] 일본에서의 작품으로는 TBS의 "21세기 카운트다운 시계", 키즈플라자 오사카의 "어린이 마을", 오사카 광역 환경 시설 조합 마이시마 공장(쓰레기 처리장), 오사카시 마이시마 슬러지 센터(하수 오니 처리 시설) 등이 있다.
3. 사상
훈데르트바서는 인간은 자연에 잠시 들린 손님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주장한 스킨(skin)론과 자연주의 사상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훈데르트바서의 독창적이고 자유분방한 예술적 비전은 회화, 환경 운동, 철학, 그리고 건물 외관, 우표, 깃발, 의류 등의 디자인에 나타났다. 그의 작품에는 밝은 색상, 유기적 형태, 인간과 자연의 조화, 강한 개성이라는 공통된 주제가 사용되었으며, 직선을 거부했다.
그는 독특한 예술가로(sui generis), 그의 건축 작품은 생물 형태와 타일 사용 면에서 안토니 가우디 (1852–1926)와 비교될 수 있다. 그는 또한 비엔나 분리파의 예술과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 (1890–1918)와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에게 영감을 받았다.
그는 나선형에 매료되어 직선을 "신 없는 불경스러운 것"이자 "생각이나 감정 없이 자로 그린 비겁한 것"이라고 불렀다.[14] 그는 자신의 예술 이론을 "초자동성"이라고 부르며, 예술가가 아닌 관람자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었다.[15] 이는 그가 새로운 뉴질랜드 국기를 디자인하면서 잘 드러났는데, 여기에는 새로 펼쳐지는 은빛 고사리 잎의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나선형 모양인 코루가 포함되어 있으며, 마오리족에 따르면 새로운 삶, 성장, 힘, 평화를 상징한다.[16]
인간을 보호하는 층은 총 5개로 나뉘어있다. 첫째는 ''진짜 피부'', 둘째는 ''입고있는 의복'', 셋째는 ''살고있는 집'', 넷째는 ''사회'', 다섯째는 ''지구'' 즉 ''환경''이다. 하지만 인간은 첫 번째 피부만 의식하고 나머진 의식하지 못하고있다. 우리를 보호해주는 제 3의 피부가 집이라고 주장한 그는 건물을 세우며 빼앗은 식물의 공간을 다시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건물주위에 식물을 많이 심었고 이는 후에 옥상정원의 아이디어가 된다.
훈데르트바서는 산업에 의해 파괴되는 자연을 보며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자연을 보호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있었다. 직선을 배척하고 곡선을 옹호하는 그의 미술관을 보아도 그를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신체, 생물, 물질의 유기적순환을 강조하였다. 1993년 그가 발표한 '자연과의 평화조약'을 살펴보면 자연주의 사상에 대한 훈데르트바서의 의지를 알 수 있다.
- 우리는 자연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자연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자연과의 소통'')
- 우리는 열린 하늘 아래 수평한 모든 것(지붕이나 길)은 자연에 속한 것이라는 원리에 따라 인간이 무단으로 점유하고 파괴했던 자연의 영역을 돌려주어야 한다. (''자연의 영역 환원'')
- 자연발생적인 식생에 대환 관용 (''자연에 대한 관용'')
- 인류의 창조와 자연의 창조는 재결합 되어야 한다. 이들의 분리는 자연과 인간에게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자연과의 재결합'')
- 자연의 법칙에 조화되는 삶 (''자연과의 조화'')
- 우리는 단순히 자연의 손님일 뿐이며,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인간은 지구를 파괴해온 가장 위험한 기생자이다. 인간은 자연이 재생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생태적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 (''자연의 재생'')
- 인간사회는 다시 쓰레기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쓰레기를 존중하고 재활용하는 사람만이 죽음을 삶으로 변화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순환을 존중하고 생명이 재생하여 지구에서 계속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순환'').[51]
3. 1. 스킨론
인간을 보호하는 층은 총 5개로 나뉘어있다. 첫째는 ''진짜 피부'', 둘째는 ''입고있는 의복'', 셋째는 ''살고있는 집'', 넷째는 ''사회'', 다섯째는 ''지구'' 즉 ''환경''이다. 하지만 인간은 첫 번째 피부만 의식하고 나머진 의식하지 못하고있다. 우리를 보호해주는 제 3의 피부가 집이라고 주장한 그는 건물을 세우며 빼앗은 식물의 공간을 다시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건물주위에 식물을 많이 심었고 이는 후에 옥상정원의 아이디어가 된다.훈데르트바서는 나선형에 매료되어 직선을 "신 없는 불경스러운 것"이자 "생각이나 감정 없이 자로 그린 비겁한 것"이라고 불렀다.[14] 그는 자신의 예술 이론을 "초자동성"이라고 부르며, 예술가가 아닌 관람자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었다.[15] 이는 그가 새로운 뉴질랜드 국기를 디자인하면서 잘 드러났는데, 여기에는 새로 펼쳐지는 은빛 고사리 잎의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나선형 모양인 코루가 포함되어 있으며, 마오리족에 따르면 새로운 삶, 성장, 힘, 평화를 상징한다.[16]
3. 2. 자연주의 사상
훈데르트바서는 산업에 의해 파괴되는 자연을 보며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자연을 보호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있었다. 직선을 배척하고 곡선을 옹호하는 그의 미술관을 보아도 그를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신체, 생물, 물질의 유기적순환을 강조하였다. 1993년 그가 발표한 '자연과의 평화조약'을 살펴보면 자연주의 사상에 대한 훈데르트바서의 의지를 알 수 있다., 1983년 마오리 문화의 모티프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뉴질랜드 국기 제안]]
그는 독특한 예술가(sui generis)로, 그의 건축 작품은 생물 형태와 타일 사용 면에서 안토니 가우디와 비교될 수 있다. 그는 비엔나 분리파 예술과 에곤 실레, 구스타프 클림트에게 영감을 받았다.
그는 나선형에 매료되어 직선을 "신 없는 불경스러운 것"이자 "생각이나 감정 없이 자로 그린 비겁한 것"이라고 불렀다.[14] 그는 자신의 예술 이론을 "초자동성"이라고 부르며, 예술가가 아닌 관람자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었다.[15] 이는 그가 새로운 뉴질랜드 국기를 디자인하면서 잘 드러났는데, 여기에는 새로 펼쳐지는 은빛 고사리 잎의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나선형 모양인 코루가 포함되어 있으며, 마오리족에 따르면 새로운 삶, 성장, 힘, 평화를 상징한다.[16]
- 자연과의 평화조약*
- 우리는 자연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자연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자연과의 소통'')
- 우리는 열린 하늘 아래 수평한 모든 것(지붕이나 길)은 자연에 속한 것이라는 원리에 따라 인간이 무단으로 점유하고 파괴했던 자연의 영역을 돌려주어야 한다. (''자연의 영역 환원'')
- 자연발생적인 식생에 대환 관용 (''자연에 대한 관용'')
- 인류의 창조와 자연의 창조는 재결합 되어야 한다. 이들의 분리는 자연과 인간에게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자연과의 재결합'')
- 자연의 법칙에 조화되는 삶 (''자연과의 조화'')
- 우리는 단순히 자연의 손님일 뿐이며,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인간은 지구를 파괴해온 가장 위험한 기생자이다. 인간은 자연이 재생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생태적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 (''자연의 재생'')
- 인간사회는 다시 쓰레기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쓰레기를 존중하고 재활용하는 사람만이 죽음을 삶으로 변화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순환을 존중하고 생명이 재생하여 지구에서 계속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순환'').[51]
3. 2. 1. 자연과의 평화조약
- 우리는 자연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자연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자연과의 소통'')
- 우리는 열린 하늘 아래 수평한 모든 것(지붕이나 길)은 자연에 속한 것이라는 원리에 따라 인간이 무단으로 점유하고 파괴했던 자연의 영역을 돌려주어야 한다. (''자연의 영역 환원'')
- 자연발생적인 식생에 대환 관용 (''자연에 대한 관용'')
- 인류의 창조와 자연의 창조는 재결합 되어야 한다. 이들의 분리는 자연과 인간에게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자연과의 재결합'')
- 자연의 법칙에 조화되는 삶 (''자연과의 조화'')
- 우리는 단순히 자연의 손님일 뿐이며,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인간은 지구를 파괴해온 가장 위험한 기생자이다. 인간은 자연이 재생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생태적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 (''자연의 재생'')
- 인간사회는 다시 쓰레기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쓰레기를 존중하고 재활용하는 사람만이 죽음을 삶으로 변화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순환을 존중하고 생명이 재생하여 지구에서 계속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순환'').[51]
4. 예술가
훈데르트바서는 화가, 건축가, 환경 운동가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 화가 ==
훈데르트바서는 '색채의 마술사'라 불릴정도로 색 조합능력이 뛰어났다.[52] 그는 전통적인 색 조합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대담한 색을 사용했다. 특유의 색감을 통해 생명의 다양함과 무한함을 표현했다. 강렬하고 빛나는 색을 선호했고 보색을 함께 쓰는 것을 좋아했다.
훈데르트바서 그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나선'의 형태이다. 그에게 나선은 생명과 죽음을 상징한다. 시작과 끝이 정해져있지 않고 돌고있는 나선은 우리의 삶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직선을 ‘혐오’에 가까울 정도로 싫어했다. "직선은 부도덕하며 인간성의 상실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52]
그의 독창적이고 자유분방한 예술적 비전은 회화, 환경 운동, 철학, 그리고 건물 외관, 우표, 깃발, 의류 등의 디자인에 나타났다. 그의 작품에는 밝은 색상, 유기적 형태, 인간과 자연의 조화, 강한 개성이라는 공통된 주제가 사용되었으며, 직선을 거부했다.
그는 독특한 예술가로 남아 있으며(sui generis), 그의 건축 작품은 생물 형태와 타일 사용 면에서 안토니 가우디 (1852–1926)와 비교될 수 있다. 그는 또한 비엔나 분리파의 예술과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 (1890–1918)와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에게 영감을 받았다.
그는 나선형에 매료되어 직선을 "신 없는 불경스러운 것"이자 "생각이나 감정 없이 자로 그린 비겁한 것"이라고 불렀다.[14] 그는 자신의 예술 이론을 "초자동성"이라고 부르며, 예술가가 아닌 관람자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었다.[15] 이는 그가 새로운 뉴질랜드 국기를 디자인하면서 잘 드러났는데, 여기에는 새로 펼쳐지는 은빛 고사리 잎의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나선형 모양인 코루가 포함되어 있으며, 마오리족에 따르면 새로운 삶, 성장, 힘, 평화를 상징한다.[16]
1954년, 훈데르트바서는 트랜스오토마티즘 미술 이론을 개발했다. 1959년에는 함부르크(Hamburg) 팝페 소장품인 카바-페니스, 반개의 섬을 제작했다. 1967년 "토로 왕국" 연작[6]을 발표했고, 다양한 ''후로시키''를 디자인했다.
== 건축가 ==
훈데르트바서가 건축을 시작한 이유는 기능주의와 실용주의에 바탕을 둔 현대건축물이 사람을 병들게 하고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도시의 메마른 건축물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건축치료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진정한 건축물이란 사람들이 그 공간속에 이사온 순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며 입주자와 건축물 사이에 밀접한 상호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건축은 네모다'라는 고정관념을 깼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는 신념을 건축에도 역시 쏟아부었다. 자연에서 만들어진 곡선이 존중되며 부드럽고 유기적인 물의 흐름을 표현했다.[53] 그는 자연주의적 친환경 재료를 이용해서 건축했다. 흙과 벽돌 그리고 화강암, 목탄 등을 주로 사용하였다. 재료 뿐만아니라 색에서도 그의 성향을 알 수 있다. 녹색, 짙은갈색, 검은색을 주로 써서 자연과 어울리도록했다. 그는 대지의 경계를 무시하고 지붕위에 흙을 덮거나 대지 아래에 건축을 했다.[51]
그는 독특한 예술가로 남아 있으며(sui generis), 그의 건축 작품은 생물 형태와 타일 사용 면에서 안토니 가우디 (1852–1926)와 비교될 수 있다. 그는 또한 비엔나 분리파의 예술과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 (1890–1918)와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에게 영감을 받았다.
그는 나선형에 매료되어 직선을 "신 없는 불경스러운 것"이자 "생각이나 감정 없이 자로 그린 비겁한 것"이라고 불렀다.[14] 그는 자신의 예술 이론을 "초자동성"이라고 부르며, 예술가가 아닌 관람자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었다.[15] 이는 그가 새로운 뉴질랜드 국기를 디자인하면서 잘 드러났는데, 여기에는 새로 펼쳐지는 은빛 고사리 잎의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나선형 모양인 코루가 포함되어 있으며, 마오리족에 따르면 새로운 삶, 성장, 힘, 평화를 상징한다.[16]
1950년대 초부터 그는 점점 더 건축에 집중하여 인간과 환경 친화적인 건물을 옹호했다. 이는 선언문, 수필, 시위로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그는 1958년 제카우 수도원에서 열린 예술 및 건축 행사에서 "건축 합리주의에 반대하는 곰팡이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는 직선과 기능주의 건축을 거부했다.[17] 1967년 뮌헨에서는 "세 번째 피부를 위한 권리에 대한 누드 연설"이라는 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 "로스로부터의 해방, 개별 건물 변경을 허용하는 법 또는 건축 거부 선언문"은 1968년 비엔나 콘코르디아 프레스 클럽에서 있었다.
곰팡이 선언문에서 그는 처음으로 "창문 권리"를 주장했다. "임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창문 밖으로 기대어 팔이 닿는 범위 내의 벽돌을 긁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긴 붓을 가지고 팔이 닿는 범위 내의 모든 것을 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길을 가는 모든 사람에게 멀리서도 그곳에 감옥에 갇힌, 노예가 된, 표준화된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14] 1967년과 1968년의 누드 연설에서 운데르트바서는 전통적인 건축의 불모지 같은 격자 시스템과 기계화된 산업 생산의 결과로 인한 인간의 노예화를 비난했다.[18] 그는 합리주의, 직선, 기능주의 건축을 거부했다.[19]
운데르트바서에게 인간의 고통은 오스트리아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현대 건축 선언문 ''장식과 범죄(Ornament and crime)''(1908)의 저자)의 전통을 따라 지어진 합리적이고 불모하며 단조로운 건축의 결과였다. 그는 이러한 유형의 건축을 거부하고 대신 창의적인 건축의 자유와 개별 구조를 만들 권리를 요구했다.[20] 1972년 그는 ''당신의 창문 권리 – 당신의 나무 의무''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도시 환경에 나무를 심는 것은 의무가 되어야 했다. "만약 인간이 자연 속을 걷는다면, 그는 자연의 손님이며 예의 바른 손님처럼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운데르트바서는 그의 생태적 헌신 속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 유형을 전파했다. 그는 자연 서식지 보존을 위해 캠페인을 벌였고 자연 법칙에 따라 생활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수많은 선언문을 쓰고 강연을 하고 원자력에 반대하는 자연 보호를 위한 포스터를 디자인했으며, 바다와 고래를 구하고 열대 우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또한 퇴비 화장실과 인공 습지 원칙의 옹호자였다. 그는 배설물을 역겨운 것이 아니라 자연 순환의 일부로 여겼다. 그의 신념은 그의 선언문 ''신성한 똥''과 퇴비 화장실 건설을 위한 DIY 가이드에 의해 증명된다.[21]
1974년, 피터 만하르트는 그를 위해 움집, 잔디 지붕 집, 녹색 주유소 모델을 만들었다 –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녹색 고속도로라는 그의 아이디어와 함께.[22]
1980년대 초 운데르트바서는 젤브의 로젠탈 공장과 크렘스의 미에르카 곡물 사일로를 개조했다.
그 후의 건축 프로젝트에서 그는 창문 권리와 나무 세입자, 고르지 않은 바닥, 지붕 위의 숲, 자연스러운 식물을 구현했다. 이 시대의 작품으로는 독일의 주택 단지, 오스트리아 베른바흐의 교회, 비엔나의 지역 난방 플랜트, 일본 오사카의 소각장과 오니센터, 엘젠의 기차역, 나파 밸리의 와이너리, 그리고 뉴질랜드 카와카와의 운데르트바서 화장실이 있다.
1993년 운데르트바서는 예술 센터 디자인을 의뢰받았다.[23][24] 그는 디자인을 완성했지만 당시에는 프로젝트가 완료되지 않았다. 프로젝트는 2015년에 최종 승인되었고 운데르트바서 예술 센터가 되어 2022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25][26] 이것은 완성된 마지막 진정한 운데르트바서 건물이 되었다.
1999년 운데르트바서는 Die Grüne Zitadelle von Magdeburg(독일어)라는 마지막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몇 년 후 동독 마을인 마그데부르크에 건물이 세워져 2005년 10월 3일에 개장했다.[27]
;건물
- 운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haus), 비엔나, 오스트리아
- 지역 난방 플랜트, 슈피텔라우, 비엔나, 오스트리아
- 운데르트바서 하우스 발트슈피랄레(Hundertwasserhaus Waldspirale), 다름슈타트, 독일
- 쿤스트하우스 비엔나(KunstHausWien), 비엔나, 오스트리아
- ''헤더른하임 유치원(Kindergarten Heddernheim)'', 프랑크푸르트
- 고속도로 레스토랑, 바트 피스하우-브룬, 오스트리아
- 온천 마을, 바트 블루마우, 오스트리아
- ''운데르트바서 교회(Hundertwasserkirche)'', 베른바흐, 오스트리아
- 마르크할레, 알텐라인, 스위스
- 레겐투름 아래 주거(Wohnen unterm Regenturm), 플로힝엔, 독일
- 돈키호테 와이너리(Quixote Winery), 나파 밸리, 미국, 1988–1998[28] (미국 유일의 건물)
- 마이시마 소각장, 오사카, 일본, 1997–2000
- 운데르트바서 화장실(Hundertwasser toilet), 카와카와, 뉴질랜드, 1999[29]
- 운데르트바서 "환경 기차역", 엘젠, 독일, 1999–2001
- ''마그데부르크 녹색 시타델(Die Grüne Zitadelle von Magdeburg)'', 마그데부르크, 독일, 2003–2005
- ''로날드 맥도날드 키더 발레이(Ronald McDonald Kinder Vallei)'', 발켄뷔르흐 아안 더 헐, 네덜란드
- 쿠흘바우어 타워(Kuchlbauer Tower), 아벤스베르크, 독일, 2008–2010
- 운데르트바서 예술 센터(Hundertwasser Art Centre), 왕가레이, 뉴질랜드, 2022
운데르트바서의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이 뉴질랜드 왕가레이의 운데르트바서 예술 센터에 설립되었고, 그의 1993년 건물 계획을 실현하게 될 것이다.[30]
== 환경적 건축표현 요소와 성향 ==
형태 | 요소 | 성향 |
---|---|---|
친환경 재료 | 흙, 벽돌, 화강암, 목탄, 회벽칠 | 친환경적 |
생태주의 색상 | 블랙, 그린, 브라운 | 생태적 |
직선이 없는 곡선 | 파사드, 풀밭지붕, 양파돔 | 유기적 |
경계의 해체 | 나무세입자, 두더지집, 풀밭지붕, 테라스하우스 | 친환경적 |
창문의 권리 | 손아래페인팅, 창문의 형태 | 유기적 |
녹색의 나선 | 산책로, 자유로운 접근 | 친환경적 |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는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며, 독특한 건축 디자인을 선보였다. 그의 디자인은 불규칙한 형태를 사용하고 자연의 특징을 건축물에 통합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직선과 기능주의 건축을 거부하고, 인간과 환경 친화적인 건물을 옹호했다.[17] 1958년에는 "건축 합리주의에 반대하는 곰팡이 선언문"을 낭독하기도 했다.[17]
훈데르트바서는 "창문 권리"를 주장하며, 임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창문 밖으로 팔이 닿는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벽을 꾸밀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그는 전통적인 건축의 불모지 같은 격자 시스템과 기계화된 산업 생산의 결과로 인한 인간의 노예화를 비난했다.[18]
그는 아돌프 로스(Adolf Loos)의 합리적이고 단조로운 건축을 비판하며, 창의적인 건축의 자유와 개별 구조를 만들 권리를 요구했다.[20] 또한, 도시 환경에 나무를 심는 것을 의무로 여겼으며, 퇴비 화장실과 인공 습지 원칙을 옹호하는 등 생태적인 건축을 추구했다.[21]
== 훈데르트바서 건축물에서의 자연주의 특성 ==
- 산타바바라 성당
: (건축개념) 자연요소와 형태를 통한 모든 종교의 화해와 문화에 대한 존경과 자비 상징.
: (환경적특성) 작업공간을 건축물에 한하지 않고 주변환경까지 작업의 범위로 두어 환경 조화를 고려하며 지속성을 유지, 양파모양 황금돔을 올려 종탑을 개조하고 도기타일로 요철을 주었으며 창문은 나선형 유리장식.[51]
- 쿤스트하우스 빈
: (건축개념) 토네트 가구공장을 미술관으로 리모델링, 카페, 레스토랑, 미술관, 숍 위치.
: (환경적특성) 각기 다른 색상과 크기의 창문을 통하여 창문의 권리를 말하고 있고 곡선의 스카이라인과 마감재의 혼용으로 자유의지를 표현했으며 재활용품을 활용하여 기둥 제작.[51]
-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 (건축개념) 빈 시의 의뢰로 지어진 공공주택.
: (환경적특성) 여러 가지 유기적 형태로 이루어진 창문들과 공간이 통합된 나무들, 도시계획에서 물결모양이나 선이나 색채의 혼합, 돔과 바로크식 열주 등을 테마로 하여 설계.[51]
== 환경운동가 ==
훈데르트바서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주장하며 예술 밖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친 환경 운동가였다. 그는 자연 보호, 산림 운동, 반핵 운동 등을 실천했다.[33] 워싱턴 환경교육센터에 '당신은 자연에 잠시 들린 손님이다. 예의를 갖추어라.'는 문구를 넣은 포스터를 제작하고, 그린피스에 '고래와 바다를 구하자'는 문구를 넣은 작품을 기증했다. 식물을 이용한 정수 시스템 개발, 부식토 변기를 만들어 환경보호상을 수상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자연주의 철학을 실천했다.[33]
1959년에는 칼 라즐로(Carl Laszlo)의 잡지 ''판데르마(Panderma)''에서 티베트의 종교 지도자를 위해 캠페인을 벌이며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탈출을 도왔다.[33] 이후 환경 운동가로서 지역 특색 보존을 주장하며 유럽 연합에 대한 저항 운동을 펼쳤다.[33]
그는 입헌 군주제를 지지하기도 했다. 1983년 뉴질랜드 카우리누이에서 그는 오스트리아가 아름다움, 문화, 내적·외적 평화, 신앙과 같은 가치를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 국민에게 봉사하는 황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오토 폰 합스부르크를 지지하며 입헌 군주제의 복귀를 주장했다.[34]
4. 1. 화가
훈데르트바서는 '색채의 마술사'라 불릴정도로 색 조합능력이 뛰어났다.[52] 그는 전통적인 색 조합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대담한 색을 사용했다. 특유의 색감을 통해 생명의 다양함과 무한함을 표현했다. 강렬하고 빛나는 색을 선호했고 보색을 함께 쓰는 것을 좋아했다.훈데르트바서 그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나선'의 형태이다. 그에게 나선은 생명과 죽음을 상징한다. 시작과 끝이 정해져있지 않고 돌고있는 나선은 우리의 삶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직선을 ‘혐오’에 가까울 정도로 싫어했다. "직선은 부도덕하며 인간성의 상실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52]
, 1983년 마오리 문화의 모티프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뉴질랜드 국기 제안]]
그의 독창적이고 자유분방한 예술적 비전은 회화, 환경 운동, 철학, 그리고 건물 외관, 우표, 깃발, 의류 등의 디자인에 나타났다. 그의 작품에는 밝은 색상, 유기적 형태, 인간과 자연의 조화, 강한 개성이라는 공통된 주제가 사용되었으며, 직선을 거부했다.
그는 독특한 예술가로 남아 있으며(sui generis), 그의 건축 작품은 생물 형태와 타일 사용 면에서 안토니 가우디 (1852–1926)와 비교될 수 있다. 그는 또한 비엔나 분리파의 예술과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 (1890–1918)와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에게 영감을 받았다.
그는 나선형에 매료되어 직선을 "신 없는 불경스러운 것"이자 "생각이나 감정 없이 자로 그린 비겁한 것"이라고 불렀다.[14] 그는 자신의 예술 이론을 "초자동성"이라고 부르며, 예술가가 아닌 관람자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었다.[15] 이는 그가 새로운 뉴질랜드 국기를 디자인하면서 잘 드러났는데, 여기에는 새로 펼쳐지는 은빛 고사리 잎의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나선형 모양인 코루가 포함되어 있으며, 마오리족에 따르면 새로운 삶, 성장, 힘, 평화를 상징한다.[16]
1954년, 훈데르트바서는 트랜스오토마티즘 미술 이론을 개발했다. 1959년에는 함부르크(Hamburg) 팝페 소장품인 카바-페니스, 반개의 섬을 제작했다. 1967년 "토로 왕국" 연작[6]을 발표했고, 다양한 ''후로시키''를 디자인했다.
4. 2. 건축가
훈데르트바서가 건축을 시작한 이유는 기능주의와 실용주의에 바탕을 둔 현대건축물이 사람을 병들게 하고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도시의 메마른 건축물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건축치료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진정한 건축물이란 사람들이 그 공간속에 이사온 순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며 입주자와 건축물 사이에 밀접한 상호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건축은 네모다'라는 고정관념을 깼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는 신념을 건축에도 역시 쏟아부었다. 자연에서 만들어진 곡선이 존중되며 부드럽고 유기적인 물의 흐름을 표현했다.[53] 그는 자연주의적 친환경 재료를 이용해서 건축했다. 흙과 벽돌 그리고 화강암, 목탄 등을 주로 사용하였다. 재료 뿐만아니라 색에서도 그의 성향을 알 수 있다. 녹색, 짙은갈색, 검은색을 주로 써서 자연과 어울리도록했다. 그는 대지의 경계를 무시하고 지붕위에 흙을 덮거나 대지 아래에 건축을 했다.[51], 1983년 마오리 문화의 모티프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뉴질랜드 국기 제안]]
그는 독특한 예술가로 남아 있으며(sui generis), 그의 건축 작품은 생물 형태와 타일 사용 면에서 안토니 가우디 (1852–1926)와 비교될 수 있다. 그는 또한 비엔나 분리파의 예술과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 (1890–1918)와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에게 영감을 받았다.
그는 나선형에 매료되어 직선을 "신 없는 불경스러운 것"이자 "생각이나 감정 없이 자로 그린 비겁한 것"이라고 불렀다.[14] 그는 자신의 예술 이론을 "초자동성"이라고 부르며, 예술가가 아닌 관람자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었다.[15] 이는 그가 새로운 뉴질랜드 국기를 디자인하면서 잘 드러났는데, 여기에는 새로 펼쳐지는 은빛 고사리 잎의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나선형 모양인 코루가 포함되어 있으며, 마오리족에 따르면 새로운 삶, 성장, 힘, 평화를 상징한다.[16]
1950년대 초부터 그는 점점 더 건축에 집중하여 인간과 환경 친화적인 건물을 옹호했다. 이는 선언문, 수필, 시위로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그는 1958년 제카우 수도원에서 열린 예술 및 건축 행사에서 "건축 합리주의에 반대하는 곰팡이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는 직선과 기능주의 건축을 거부했다.[17] 1967년 뮌헨에서는 "세 번째 피부를 위한 권리에 대한 누드 연설"이라는 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 "로스로부터의 해방, 개별 건물 변경을 허용하는 법 또는 건축 거부 선언문"은 1968년 비엔나 콘코르디아 프레스 클럽에서 있었다.
곰팡이 선언문에서 그는 처음으로 "창문 권리"를 주장했다. "임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창문 밖으로 기대어 팔이 닿는 범위 내의 벽돌을 긁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긴 붓을 가지고 팔이 닿는 범위 내의 모든 것을 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길을 가는 모든 사람에게 멀리서도 그곳에 감옥에 갇힌, 노예가 된, 표준화된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14] 1967년과 1968년의 누드 연설에서 운데르트바서는 전통적인 건축의 불모지 같은 격자 시스템과 기계화된 산업 생산의 결과로 인한 인간의 노예화를 비난했다.[18] 그는 합리주의, 직선, 기능주의 건축을 거부했다.[19]
운데르트바서에게 인간의 고통은 오스트리아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현대 건축 선언문 ''장식과 범죄(Ornament and crime)''(1908)의 저자)의 전통을 따라 지어진 합리적이고 불모하며 단조로운 건축의 결과였다. 그는 이러한 유형의 건축을 거부하고 대신 창의적인 건축의 자유와 개별 구조를 만들 권리를 요구했다.[20] 1972년 그는 ''당신의 창문 권리 – 당신의 나무 의무''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도시 환경에 나무를 심는 것은 의무가 되어야 했다. "만약 인간이 자연 속을 걷는다면, 그는 자연의 손님이며 예의 바른 손님처럼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운데르트바서는 그의 생태적 헌신 속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 유형을 전파했다. 그는 자연 서식지 보존을 위해 캠페인을 벌였고 자연 법칙에 따라 생활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수많은 선언문을 쓰고 강연을 하고 원자력에 반대하는 자연 보호를 위한 포스터를 디자인했으며, 바다와 고래를 구하고 열대 우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또한 퇴비 화장실과 인공 습지 원칙의 옹호자였다. 그는 배설물을 역겨운 것이 아니라 자연 순환의 일부로 여겼다. 그의 신념은 그의 선언문 ''신성한 똥''과 퇴비 화장실 건설을 위한 DIY 가이드에 의해 증명된다.[21]
1974년, 피터 만하르트는 그를 위해 움집, 잔디 지붕 집, 녹색 주유소 모델을 만들었다 –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녹색 고속도로라는 그의 아이디어와 함께.[22]
1980년대 초 운데르트바서는 젤브의 로젠탈 공장과 크렘스의 미에르카 곡물 사일로를 개조했다.
그 후의 건축 프로젝트에서 그는 창문 권리와 나무 세입자, 고르지 않은 바닥, 지붕 위의 숲, 자연스러운 식물을 구현했다. 이 시대의 작품으로는 독일의 주택 단지, 오스트리아 베른바흐의 교회, 비엔나의 지역 난방 플랜트, 일본 오사카의 소각장과 오니센터, 엘젠의 기차역, 나파 밸리의 와이너리, 그리고 뉴질랜드 카와카와의 운데르트바서 화장실이 있다.
1993년 운데르트바서는 예술 센터 디자인을 의뢰받았다.[23][24] 그는 디자인을 완성했지만 당시에는 프로젝트가 완료되지 않았다. 프로젝트는 2015년에 최종 승인되었고 운데르트바서 예술 센터가 되어 2022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25][26] 이것은 완성된 마지막 진정한 운데르트바서 건물이 되었다.
1999년 운데르트바서는 Die Grüne Zitadelle von Magdeburg(독일어)라는 마지막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몇 년 후 동독 마을인 마그데부르크에 건물이 세워져 2005년 10월 3일에 개장했다.[27]
;건물
- 운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haus), 비엔나, 오스트리아
- 지역 난방 플랜트, 슈피텔라우, 비엔나, 오스트리아
- 운데르트바서 하우스 발트슈피랄레(Hundertwasserhaus Waldspirale), 다름슈타트, 독일
- 쿤스트하우스 비엔나(KunstHausWien), 비엔나, 오스트리아
- ''헤더른하임 유치원(Kindergarten Heddernheim)'', 프랑크푸르트
- 고속도로 레스토랑, 바트 피스하우-브룬, 오스트리아
- 온천 마을, 바트 블루마우, 오스트리아
- ''운데르트바서 교회(Hundertwasserkirche)'', 베른바흐, 오스트리아
- 마르크할레, 알텐라인, 스위스
- 레겐투름 아래 주거(Wohnen unterm Regenturm), 플로힝엔, 독일
- 돈키호테 와이너리(Quixote Winery), 나파 밸리, 미국, 1988–1998[28] (미국 유일의 건물)
- 마이시마 소각장, 오사카, 일본, 1997–2000
- 운데르트바서 화장실(Hundertwasser toilet), 카와카와, 뉴질랜드, 1999[29]
- 운데르트바서 "환경 기차역", 엘젠, 독일, 1999–2001
- ''마그데부르크 녹색 시타델(Die Grüne Zitadelle von Magdeburg)'', 마그데부르크, 독일, 2003–2005
- ''로날드 맥도날드 키더 발레이(Ronald McDonald Kinder Vallei)'', 발켄뷔르흐 아안 더 헐, 네덜란드
- 쿠흘바우어 타워(Kuchlbauer Tower), 아벤스베르크, 독일, 2008–2010
- 운데르트바서 예술 센터(Hundertwasser Art Centre), 왕가레이, 뉴질랜드, 2022
운데르트바서의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이 뉴질랜드 왕가레이의 운데르트바서 예술 센터에 설립되었고, 그의 1993년 건물 계획을 실현하게 될 것이다.[30]
== 환경적 건축표현 요소와 성향 ==
형태 | 요소 | 성향 |
---|---|---|
친환경 재료 | 흙, 벽돌, 화강암, 목탄, 회벽칠 | 친환경적 |
생태주의 색상 | 블랙, 그린, 브라운 | 생태적 |
직선이 없는 곡선 | 파사드, 풀밭지붕, 양파돔 | 유기적 |
경계의 해체 | 나무세입자, 두더지집, 풀밭지붕, 테라스하우스 | 친환경적 |
창문의 권리 | 손아래페인팅, 창문의 형태 | 유기적 |
녹색의 나선 | 산책로, 자유로운 접근 | 친환경적 |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는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며, 독특한 건축 디자인을 선보였다. 그의 디자인은 불규칙한 형태를 사용하고 자연의 특징을 건축물에 통합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직선과 기능주의 건축을 거부하고, 인간과 환경 친화적인 건물을 옹호했다.[17] 1958년에는 "건축 합리주의에 반대하는 곰팡이 선언문"을 낭독하기도 했다.[17]
훈데르트바서는 "창문 권리"를 주장하며, 임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창문 밖으로 팔이 닿는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벽을 꾸밀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그는 전통적인 건축의 불모지 같은 격자 시스템과 기계화된 산업 생산의 결과로 인한 인간의 노예화를 비난했다.[18]
그는 아돌프 로스(Adolf Loos)의 합리적이고 단조로운 건축을 비판하며, 창의적인 건축의 자유와 개별 구조를 만들 권리를 요구했다.[20] 또한, 도시 환경에 나무를 심는 것을 의무로 여겼으며, 퇴비 화장실과 인공 습지 원칙을 옹호하는 등 생태적인 건축을 추구했다.[21]
== 훈데르트바서 건축물에서의 자연주의 특성 ==
- 산타바바라 성당
: (건축개념) 자연요소와 형태를 통한 모든 종교의 화해와 문화에 대한 존경과 자비 상징.
: (환경적특성) 작업공간을 건축물에 한하지 않고 주변환경까지 작업의 범위로 두어 환경 조화를 고려하며 지속성을 유지, 양파모양 황금돔을 올려 종탑을 개조하고 도기타일로 요철을 주었으며 창문은 나선형 유리장식.[51]
- 쿤스트하우스 빈
: (건축개념) 토네트 가구공장을 미술관으로 리모델링, 카페, 레스토랑, 미술관, 숍 위치.
: (환경적특성) 각기 다른 색상과 크기의 창문을 통하여 창문의 권리를 말하고 있고 곡선의 스카이라인과 마감재의 혼용으로 자유의지를 표현했으며 재활용품을 활용하여 기둥 제작.[51]
-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 (건축개념) 빈 시의 의뢰로 지어진 공공주택.
: (환경적특성) 여러 가지 유기적 형태로 이루어진 창문들과 공간이 통합된 나무들, 도시계획에서 물결모양이나 선이나 색채의 혼합, 돔과 바로크식 열주 등을 테마로 하여 설계.[51]
4. 2. 1. 환경적 건축표현 요소와 성향
형태 | 요소 | 성향 |
---|---|---|
친환경 재료 | 흙, 벽돌, 화강암, 목탄, 회벽칠 | 친환경적 |
생태주의 색상 | 블랙, 그린, 브라운 | 생태적 |
직선이 없는 곡선 | 파사드, 풀밭지붕, 양파돔 | 유기적 |
경계의 해체 | 나무세입자, 두더지집, 풀밭지붕, 테라스하우스 | 친환경적 |
창문의 권리 | 손아래페인팅, 창문의 형태 | 유기적 |
녹색의 나선 | 산책로, 자유로운 접근 | 친환경적 |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는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며, 독특한 건축 디자인을 선보였다. 그의 디자인은 불규칙한 형태를 사용하고 자연의 특징을 건축물에 통합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직선과 기능주의 건축을 거부하고, 인간과 환경 친화적인 건물을 옹호했다.[17] 1958년에는 "건축 합리주의에 반대하는 곰팡이 선언문"을 낭독하기도 했다.[17]
훈데르트바서는 "창문 권리"를 주장하며, 임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창문 밖으로 팔이 닿는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벽을 꾸밀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그는 전통적인 건축의 불모지 같은 격자 시스템과 기계화된 산업 생산의 결과로 인한 인간의 노예화를 비난했다.[18]
그는 아돌프 로스(Adolf Loos)의 합리적이고 단조로운 건축을 비판하며, 창의적인 건축의 자유와 개별 구조를 만들 권리를 요구했다.[20] 또한, 도시 환경에 나무를 심는 것을 의무로 여겼으며, 퇴비 화장실과 인공 습지 원칙을 옹호하는 등 생태적인 건축을 추구했다.[21]
4. 2. 2. 훈데르트바서 건축물에서의 자연주의 특성
- 산타바바라 성당
: (건축개념) 자연요소와 형태를 통한 모든 종교의 화해와 문화에 대한 존경과 자비 상징.
: (환경적특성) 작업공간을 건축물에 한하지 않고 주변환경까지 작업의 범위로 두어 환경 조화를 고려하며 지속성을 유지, 양파모양 황금돔을 올려 종탑을 개조하고 도기타일로 요철을 주었으며 창문은 나선형 유리장식.[51]
- 쿤스트하우스 빈
: (건축개념) 토네트 가구공장을 미술관으로 리모델링, 카페, 레스토랑, 미술관, 숍 위치.
: (환경적특성) 각기 다른 색상과 크기의 창문을 통하여 창문의 권리를 말하고 있고 곡선의 스카이라인과 마감재의 혼용으로 자유의지를 표현했으며 재활용품을 활용하여 기둥 제작.[51]
-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 (건축개념) 빈 시의 의뢰로 지어진 공공주택.
: (환경적특성) 여러 가지 유기적 형태로 이루어진 창문들과 공간이 통합된 나무들, 도시계획에서 물결모양이나 선이나 색채의 혼합, 돔과 바로크식 열주 등을 테마로 하여 설계.[51]
4. 3. 환경운동가
훈데르트바서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주장하며 예술 밖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친 환경 운동가였다. 그는 자연 보호, 산림 운동, 반핵 운동 등을 실천했다.[33] 워싱턴 환경교육센터에 '당신은 자연에 잠시 들린 손님이다. 예의를 갖추어라.'는 문구를 넣은 포스터를 제작하고, 그린피스에 '고래와 바다를 구하자'는 문구를 넣은 작품을 기증했다. 식물을 이용한 정수 시스템 개발, 부식토 변기를 만들어 환경보호상을 수상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자연주의 철학을 실천했다.[33]1959년에는 칼 라즐로(Carl Laszlo)의 잡지 ''판데르마(Panderma)''에서 티베트의 종교 지도자를 위해 캠페인을 벌이며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탈출을 도왔다.[33] 이후 환경 운동가로서 지역 특색 보존을 주장하며 유럽 연합에 대한 저항 운동을 펼쳤다.[33]
그는 입헌 군주제를 지지하기도 했다. 1983년 뉴질랜드 카우리누이에서 그는 오스트리아가 아름다움, 문화, 내적·외적 평화, 신앙과 같은 가치를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 국민에게 봉사하는 황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오토 폰 합스부르크를 지지하며 입헌 군주제의 복귀를 주장했다.[34]
5. 작품
훈데르트바서는 "직선은 신의 부재"라고 평가하며 극도로 혐오했고, 여러 가지 선들 중에서도 특히 나선을 좋아했다.[6] 그는 복사 기술이 미개했던 당시 판화 기법을 많이 사용했으며, 일본 갤러리와의 전속 계약, 4년간의 일본인과의 결혼 생활을 통해 동양 미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작품에서는 동양 예술의 전통적인 도장인 낙관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환경운동가로서 다양한 환경 포스터를 제작했다.[45][46]
- 1948년 - 어머니의 초상
- 1951년 - 녹색 지붕과 정원이 있는 집들
- 1952년 - 피를 흘리는 건물
- 1953년 - 원 안으로 흐르는 피, 나는 자전거를 가지고 있다
- 1954년 - 훈데르트바서가 트랜스오토마티즘 미술 이론을 개발하다.
- 1959년 - 카바-페니스, 반개의 섬, 함부르크(Hamburg) 팝페 소장품
- 1967년 - "토로 왕국" 연작
- 1968년 - 나는 아직 모른다
- 1982년 - 로젠탈 도자기 공장(젤프)(Rosenthal porcelain factory (Selb))
- 1982년 - 레벤 거리의 세 번째 피부
- 1983년 - 밀루카 곡물 창고(크렘스)(Mürkau grain warehouse (Krems))
- 1986년 -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오스트리아, 빈)
- 1987년 - 은빛 소용돌이
- 1988년 - 성 바바라 교회(오스트리아, 베른바흐)(St. Barbara's Church (Bernbach, Austria))
- 1988년 - 통합학교(오스트리아, 프랑크푸르트)(Integrative School (Frankfurt, Austria))
- 1990년 - 고속도로 휴게소(오스트리아, 바트 피샤우)(Motorway Restaurant (Bad Fischau, Austria))
- 1991년 - 빈 미술관 개축(오스트리아, 빈)
- 1992년 - 슈피테라우 소각장(오스트리아, 빈)
- 1994년 - 프로힝겐 공동주택(독일, 프로힝겐)(Prohingen Housing Complex (Prohingen, Germany))
- 1997년 - 블라우 온천 마을(오스트리아, 블라우)(Blau Thermal Baths (Bad Blumau, Austria))
- 2000년 - 발트슈피랄레 공동주택(독일, 다름슈타트)(Waldspirale Housing Complex (Darmstadt, Germany))
- 다양한 ''후로시키'' 디자인
훈데르트바서는 우표를 모든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작품이자 문화의 척도이며, 국가 간의 다리라고 생각했다.[31][32] 그는 다양한 우정국을 위해 26개의 우표를 디자인했으며, 이 중 17개는 사후에도 발행되었다. 또한, 그의 작품을 각색하여 발행된 우표도 있다.
그의 우표 디자인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현대 미술 (1975), 유럽 평의회 정상회담 (1993), 훈데르트바서 80회 생일 (2008)
- 세네갈: 우표 예술 (1979)
- 카보베르데: 선박 (1982, 1985)
- 유엔우정국 (비엔나, 제네바, 뉴욕): 세계인권선언 35주년 (1983)
- 리히텐슈타인: 리히텐슈타인에 대한 헌사 (1993)
실현되지 않은 우표 디자인 2개는 대체 디자인으로 발행되지 않았고, 모로코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우정국을 위한 7개의 디자인은 우표로 발행되지 않았다.
그의 작품 각색을 바탕으로 발행된 우표는 다음과 같다.
- 프랑스: 유로화 유럽을 위한 2개의 배지 (1994)
- 유엔우정국 (비엔나, 제네바, 뉴욕): 사회정상회담 (1995)
- 룩셈부르크: 유럽 문화 수도 (1995)
- 리히텐슈타인: 하노버 엑스포 2000 (2000)
오스트리아 우체국은 1987년 유럽판 (현대 건축, 훈데르트바서 하우스)[45], 2000년 그의 사망 기념 (블루 블루스) , 2004년 국립 도나우아우엔 (자연은 우리의 자유)에서 더 많은 훈데르트바서의 모티브를 사용했다. 1967년 살롱 드 마요(하바나) 미술 전시회의 일환으로 쿠바 우표에 처음으로 훈데르트바서의 모티브가 사용되었다.
유럽 평의회의 서비스 마크와 쿠바 우표를 제외한 모든 우표는 볼프강 자이델이 제작하였고, 오스트리아 국립 인쇄소에서 복잡한 혼합 인쇄 과정 (조각 인쇄, 로토그라비어 인쇄 및 금속 스탬핑)으로 제작되었다.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는 대담한 색채의 그림으로 처음 명성을 얻었지만, 그의 독특한 건축 디자인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디자인은 불규칙한 형태를 사용하고 자연의 특징을 건축물에 통합한다. 비엔나의 ''훈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haus)'' 아파트 단지는 물결치는 바닥("고르지 않은 바닥은 발에 대한 선율이다"), 흙과 잔디로 덮인 지붕, 그리고 방 안에서 자라 창문 밖으로 가지가 뻗어 나오는 큰 나무들을 특징으로 한다. 그는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디자인에 대한 대가를 받지 않았는데, "추한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막는 것"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초부터 그는 점점 더 건축에 집중하여 인간과 환경 친화적인 건물을 옹호했다. 이는 선언문, 수필, 시위로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그는 1958년 제카우 수도원에서 열린 예술 및 건축 행사에서 "건축 합리주의에 반대하는 곰팡이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는 직선과 기능주의 건축을 거부했다.[17] 1967년 뮌헨에서는 "세 번째 피부를 위한 권리에 대한 누드 연설"이라는 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 "로스로부터의 해방, 개별 건물 변경을 허용하는 법 또는 건축 거부 선언문"은 1968년 비엔나 콘코르디아 프레스 클럽에서 있었다.
곰팡이 선언문에서 그는 처음으로 "창문 권리"를 주장했다. "임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창문 밖으로 기대어 팔이 닿는 범위 내의 벽돌을 긁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긴 붓을 가지고 팔이 닿는 범위 내의 모든 것을 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길을 가는 모든 사람에게 멀리서도 그곳에 감옥에 갇힌, 노예가 된, 표준화된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14] 1967년과 1968년의 누드 연설에서 훈데르트바서는 전통적인 건축의 불모지 같은 격자 시스템과 기계화된 산업 생산의 결과로 인한 인간의 노예화를 비난했다.[18] 그는 합리주의, 직선, 기능주의 건축을 거부했다.[19]
훈데르트바서에게 인간의 고통은 오스트리아 건축가 아돌프 로스(현대 건축 선언문 ''장식과 범죄(Ornament and crime)''(1908)의 저자)의 전통을 따라 지어진 합리적이고 불모하며 단조로운 건축의 결과였다. 그는 이러한 유형의 건축을 거부하고 대신 창의적인 건축의 자유와 개별 구조를 만들 권리를 요구했다.[20] 1972년 그는 ''당신의 창문 권리 – 당신의 나무 의무''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도시 환경에 나무를 심는 것은 의무가 되어야 했다. "만약 인간이 자연 속을 걷는다면, 그는 자연의 손님이며 예의 바른 손님처럼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훈데르트바서는 그의 생태적 헌신 속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 유형을 전파했다. 그는 자연 서식지 보존을 위해 캠페인을 벌였고 자연 법칙에 따라 생활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수많은 선언문을 쓰고 강연을 하고 원자력에 반대하는 자연 보호를 위한 포스터를 디자인했으며, 바다와 고래를 구하고 열대 우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또한 퇴비 화장실과 인공 습지 원칙의 옹호자였다. 그는 배설물을 역겨운 것이 아니라 자연 순환의 일부로 여겼다. 그의 신념은 그의 선언문 ''신성한 똥''과 퇴비 화장실 건설을 위한 DIY 가이드에 의해 증명된다.[21]
1970년대에 훈데르트바서는 그의 첫 번째 건축 모델을 만들었다. 1972년 유로비전 TV쇼 "Wünsch Dir was"(소원을 빌어)를 위한 모델은 숲이 우거진 지붕, 나무 세입자, 창문 권리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모델과 유사한 모델에서 그는 나선형 주택, 눈꺼풀 주택, 테라스 주택, 고층 초원 주택과 같은 새로운 건축 형태를 개발했다.
1974년, 피터 만하르트는 그를 위해 움집, 잔디 지붕 집, 녹색 주유소 모델을 만들었다 –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녹색 고속도로라는 그의 아이디어와 함께.[22]
1980년대 초 훈데르트바서는 젤브의 로젠탈 공장과 크렘스의 미에르카 곡물 사일로를 개조했다.
그 후의 건축 프로젝트에서 그는 창문 권리와 나무 세입자, 고르지 않은 바닥, 지붕 위의 숲, 자연스러운 식물을 구현했다. 이 시대의 작품으로는 독일의 주택 단지, 오스트리아 베른바흐의 교회, 비엔나의 지역 난방 플랜트, 일본 오사카의 소각장과 오니센터, 엘젠의 기차역, 나파 밸리의 와이너리, 그리고 뉴질랜드 카와카와의 훈데르트바서 화장실이 있다.
1993년 훈데르트바서는 예술 센터 디자인을 의뢰받았다.[23][24] 그는 디자인을 완성했지만 당시에는 프로젝트가 완료되지 않았다. 프로젝트는 2015년에 최종 승인되었고 훈데르트바서 예술 센터가 되어 2022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25][26] 이것은 완성된 마지막 진정한 훈데르트바서 건물이 되었다.
1999년 훈데르트바서는 Die Grüne Zitadelle von Magdeburg(독일어)라는 마지막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몇 년 후 동독 마을인 마그데부르크에 건물이 세워져 2005년 10월 3일에 개장했다.[27]
; 대표적인 건축물
-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비엔나, 오스트리아
- 지역 난방 플랜트, 슈피텔라우, 비엔나, 오스트리아
-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발트슈피랄레, 다름슈타트, 독일
- 쿤스트하우스 빈, 비엔나, 오스트리아
- ''헤더른하임 유치원'', 프랑크푸르트
- 고속도로 레스토랑, 바트 피스하우-브룬, 오스트리아
- 온천 마을, 바트 블루마우, 오스트리아
- ''훈데르트바서 교회'', 베른바흐, 오스트리아
- 마르크할레, 알텐라인, 스위스
- 레겐투름 아래 주거, 플로힝엔, 독일
- 돈키호테 와이너리, 나파 밸리, 미국, 1988–1998[28] (미국 유일의 건물)
- 마이시마 소각장, 오사카, 일본, 1997–2000
- 훈데르트바서 화장실, 카와카와, 뉴질랜드, 1999[29]
- 훈데르트바서 "환경 기차역", 엘젠, 독일, 1999–2001
- ''마그데부르크 녹색 시타델'', 마그데부르크, 독일, 2003–2005
- ''로날드 맥도날드 키더 발레이'', 발켄뷔르흐 아안 더 헐, 네덜란드
- 쿠흘바우어 타워, 아벤스베르크, 독일, 2008–2010
- 훈데르트바서 예술 센터, 왕가레이, 뉴질랜드, 2022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성 바르바라 교회
슈피텔라우 소각장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이 뉴질랜드 왕가레이의 훈데르트바서 예술 센터에 설립되었고, 그의 1993년 건물 계획을 실현하게 될 것이다.[30]
5. 1. 미술작품
훈데르트바서는 "직선은 신의 부재"라고 평가하며 극도로 혐오했고, 여러 가지 선들 중에서도 특히 나선을 좋아했다.[6] 그는 복사 기술이 미개했던 당시 판화 기법을 많이 사용했으며, 일본 갤러리와의 전속 계약, 4년간의 일본인과의 결혼 생활을 통해 동양 미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작품에서는 동양 예술의 전통적인 도장인 낙관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환경운동가로서 다양한 환경 포스터를 제작했다.[45][46]- 1948년 - 어머니의 초상
- 1951년 - 녹색 지붕과 정원이 있는 집들
- 1952년 - 피를 흘리는 건물
- 1953년 - 원 안으로 흐르는 피, 나는 자전거를 가지고 있다
- 1954년 - 훈데르트바서가 트랜스오토마티즘 미술 이론을 개발하다.
- 1959년 - 카바-페니스, 반개의 섬, 함부르크(Hamburg) 팝페 소장품
- 1967년 - "토로 왕국" 연작
- 1968년 - 나는 아직 모른다
- 1982년 - 로젠탈 도자기 공장(젤프)(Rosenthal porcelain factory (Selb))
- 1982년 - 레벤 거리의 세 번째 피부
- 1983년 - 밀루카 곡물 창고(크렘스)(Mürkau grain warehouse (Krems))
- 1986년 -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오스트리아, 빈)
- 1987년 - 은빛 소용돌이
- 1988년 - 성 바바라 교회(오스트리아, 베른바흐)(St. Barbara's Church (Bernbach, Austria))
- 1988년 - 통합학교(오스트리아, 프랑크푸르트)(Integrative School (Frankfurt, Austria))
- 1990년 - 고속도로 휴게소(오스트리아, 바트 피샤우)(Motorway Restaurant (Bad Fischau, Austria))
- 1991년 - 빈 미술관 개축(오스트리아, 빈)
- 1992년 - 슈피테라우 소각장(오스트리아, 빈)
- 1994년 - 프로힝겐 공동주택(독일, 프로힝겐)(Prohingen Housing Complex (Prohingen, Germany))
- 1997년 - 블라우 온천 마을(오스트리아, 블라우)(Blau Thermal Baths (Bad Blumau, Austria))
- 2000년 - 발트슈피랄레 공동주택(독일, 다름슈타트)(Waldspirale Housing Complex (Darmstadt, Germany))
- 다양한 ''후로시키'' 디자인
5. 2. 우표
훈데르트바서는 우표를 모든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작품이자 문화의 척도이며, 국가 간의 다리라고 생각했다.[31][32] 그는 다양한 우정국을 위해 26개의 우표를 디자인했으며, 이 중 17개는 사후에도 발행되었다. 또한, 그의 작품을 각색하여 발행된 우표도 있다.그의 우표 디자인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현대 미술 (1975), 유럽 평의회 정상회담 (1993), 훈데르트바서 80회 생일 (2008)
- 세네갈: 우표 예술 (1979)
- 카보베르데: 선박 (1982, 1985)
- 유엔우정국 (비엔나, 제네바, 뉴욕): 세계인권선언 35주년 (1983)
- 리히텐슈타인: 리히텐슈타인에 대한 헌사 (1993)
실현되지 않은 우표 디자인 2개는 대체 디자인으로 발행되지 않았고, 모로코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우정국을 위한 7개의 디자인은 우표로 발행되지 않았다.
그의 작품 각색을 바탕으로 발행된 우표는 다음과 같다.
- 프랑스: 유로화 유럽을 위한 2개의 배지 (1994)
- 유엔우정국 (비엔나, 제네바, 뉴욕): 사회정상회담 (1995)
- 룩셈부르크: 유럽 문화 수도 (1995)
- 리히텐슈타인: 하노버 엑스포 2000 (2000)
오스트리아 우체국은 1987년 유럽판 (현대 건축, 훈데르트바서 하우스)[45], 2000년 그의 사망 기념 (블루 블루스) , 2004년 국립 도나우아우엔 (자연은 우리의 자유)에서 더 많은 훈데르트바서의 모티브를 사용했다. 1967년 살롱 드 마요(하바나) 미술 전시회의 일환으로 쿠바 우표에 처음으로 훈데르트바서의 모티브가 사용되었다.
유럽 평의회의 서비스 마크와 쿠바 우표를 제외한 모든 우표는 볼프강 자이델이 제작하였고, 오스트리아 국립 인쇄소에서 복잡한 혼합 인쇄 과정 (조각 인쇄, 로토그라비어 인쇄 및 금속 스탬핑)으로 제작되었다.
5. 3. 건축물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는 대담한 색채의 그림으로 처음 명성을 얻었지만, 그의 독특한 건축 디자인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디자인은 불규칙한 형태를 사용하고 자연의 특징을 건축물에 통합한다. 비엔나의 ''훈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haus)'' 아파트 단지는 물결치는 바닥("고르지 않은 바닥은 발에 대한 선율이다"), 흙과 잔디로 덮인 지붕, 그리고 방 안에서 자라 창문 밖으로 가지가 뻗어 나오는 큰 나무들을 특징으로 한다. 그는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디자인에 대한 대가를 받지 않았는데, "추한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막는 것"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1950년대 초부터 그는 점점 더 건축에 집중하여 인간과 환경 친화적인 건물을 옹호했다. 이는 선언문, 수필, 시위로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그는 1958년 제카우 수도원에서 열린 예술 및 건축 행사에서 "건축 합리주의에 반대하는 곰팡이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는 직선과 기능주의 건축을 거부했다.[17] 1967년 뮌헨에서는 "세 번째 피부를 위한 권리에 대한 누드 연설"이라는 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 "로스로부터의 해방, 개별 건물 변경을 허용하는 법 또는 건축 거부 선언문"은 1968년 비엔나 콘코르디아 프레스 클럽에서 있었다.
곰팡이 선언문에서 그는 처음으로 "창문 권리"를 주장했다. "임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창문 밖으로 기대어 팔이 닿는 범위 내의 벽돌을 긁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긴 붓을 가지고 팔이 닿는 범위 내의 모든 것을 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길을 가는 모든 사람에게 멀리서도 그곳에 감옥에 갇힌, 노예가 된, 표준화된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14] 1967년과 1968년의 누드 연설에서 훈데르트바서는 전통적인 건축의 불모지 같은 격자 시스템과 기계화된 산업 생산의 결과로 인한 인간의 노예화를 비난했다.[18] 그는 합리주의, 직선, 기능주의 건축을 거부했다.[19]
훈데르트바서에게 인간의 고통은 오스트리아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현대 건축 선언문 ''장식과 범죄(Ornament and crime)''(1908)의 저자)의 전통을 따라 지어진 합리적이고 불모하며 단조로운 건축의 결과였다. 그는 이러한 유형의 건축을 거부하고 대신 창의적인 건축의 자유와 개별 구조를 만들 권리를 요구했다.[20] 1972년 그는 ''당신의 창문 권리 – 당신의 나무 의무''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도시 환경에 나무를 심는 것은 의무가 되어야 했다. "만약 인간이 자연 속을 걷는다면, 그는 자연의 손님이며 예의 바른 손님처럼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훈데르트바서는 그의 생태적 헌신 속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 유형을 전파했다. 그는 자연 서식지 보존을 위해 캠페인을 벌였고 자연 법칙에 따라 생활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수많은 선언문을 쓰고 강연을 하고 원자력에 반대하는 자연 보호를 위한 포스터를 디자인했으며, 바다와 고래를 구하고 열대 우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또한 퇴비 화장실과 인공 습지 원칙의 옹호자였다. 그는 배설물을 역겨운 것이 아니라 자연 순환의 일부로 여겼다. 그의 신념은 그의 선언문 ''신성한 똥''과 퇴비 화장실 건설을 위한 DIY 가이드에 의해 증명된다.[21]
1970년대에 훈데르트바서는 그의 첫 번째 건축 모델을 만들었다. 1972년 유로비전 TV쇼 "Wünsch Dir was"(소원을 빌어)를 위한 모델은 숲이 우거진 지붕, 나무 세입자, 창문 권리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모델과 유사한 모델에서 그는 나선형 주택, 눈꺼풀 주택, 테라스 주택, 고층 초원 주택과 같은 새로운 건축 형태를 개발했다.
1974년, 피터 만하르트는 그를 위해 움집, 잔디 지붕 집, 녹색 주유소 모델을 만들었다 –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녹색 고속도로라는 그의 아이디어와 함께.[22]
1980년대 초 훈데르트바서는 젤브의 로젠탈 공장과 크렘스의 미에르카 곡물 사일로를 개조했다.
그 후의 건축 프로젝트에서 그는 창문 권리와 나무 세입자, 고르지 않은 바닥, 지붕 위의 숲, 자연스러운 식물을 구현했다. 이 시대의 작품으로는 독일의 주택 단지, 오스트리아 베른바흐의 교회, 비엔나의 지역 난방 플랜트, 일본 오사카의 소각장과 오니센터, 엘젠의 기차역, 나파 밸리의 와이너리, 그리고 뉴질랜드 카와카와의 훈데르트바서 화장실이 있다.
1993년 훈데르트바서는 예술 센터 디자인을 의뢰받았다.[23][24] 그는 디자인을 완성했지만 당시에는 프로젝트가 완료되지 않았다. 프로젝트는 2015년에 최종 승인되었고 훈데르트바서 예술 센터가 되어 2022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25][26] 이것은 완성된 마지막 진정한 훈데르트바서 건물이 되었다.
1999년 훈데르트바서는 Die Grüne Zitadelle von Magdeburg(독일어)라는 마지막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몇 년 후 동독 마을인 마그데부르크에 건물이 세워져 2005년 10월 3일에 개장했다.[27]
; 대표적인 건축물
- 훈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haus), 비엔나, 오스트리아
- 지역 난방 플랜트, 슈피텔라우, 비엔나, 오스트리아
-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발트슈피랄레(Hundertwasserhaus Waldspirale), 다름슈타트, 독일
- 쿤스트하우스 비엔나(KunstHausWien), 비엔나, 오스트리아
- ''헤더른하임 유치원(Kindergarten Heddernheim)'', 프랑크푸르트
- 고속도로 레스토랑, 바트 피스하우-브룬, 오스트리아
- 온천 마을, 바트 블루마우, 오스트리아
- ''훈데르트바서 교회(Hundertwasserkirche)'', 베른바흐, 오스트리아
- 마르크할레, 알텐라인, 스위스
- 레겐투름 아래 주거(Wohnen unterm Regenturm), 플로힝엔, 독일
- 돈키호테 와이너리(Quixote Winery), 나파 밸리, 미국, 1988–1998[28] (미국 유일의 건물)
- 마이시마 소각장, 오사카, 일본, 1997–2000
- 훈데르트바서 화장실(Hundertwasser toilet), 카와카와, 뉴질랜드, 1999[29]
- 훈데르트바서 "환경 기차역", 엘젠, 독일, 1999–2001
- ''마그데부르크 녹색 시타델(Die Grüne Zitadelle von Magdeburg)'', 마그데부르크, 독일, 2003–2005
- ''로날드 맥도날드 키더 발레이(Ronald McDonald Kinder Vallei)'', 발켄뷔르흐 아안 더 헐, 네덜란드
- 쿠흘바우어 타워(Kuchlbauer Tower), 아벤스베르크, 독일, 2008–2010
- 훈데르트바서 예술 센터(Hundertwasser Art Centre), 왕가레이, 뉴질랜드, 2022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성 바르바라 교회
슈피텔라우 소각장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이 뉴질랜드 왕가레이의 훈데르트바서 예술 센터에 설립되었고, 그의 1993년 건물 계획을 실현하게 될 것이다.[30]
5. 3. 1. 대표적인 건축물
- 운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haus), 비엔나, 오스트리아
- 지역 난방 플랜트, 슈피텔라우, 비엔나, 오스트리아
- 운데르트바서 하우스 발트슈피랄레(Hundertwasserhaus Waldspirale), 다름슈타트, 독일
- 쿤스트하우스 비엔나(KunstHausWien), 비엔나, 오스트리아
- ''헤더른하임 유치원(Kindergarten Heddernheim)'', 프랑크푸르트
- 고속도로 레스토랑, 바트 피스하우-브룬, 오스트리아
- 온천 마을, 바트 블루마우, 오스트리아
- ''운데르트바서 교회(Hundertwasserkirche)'', 베른바흐, 오스트리아
- 마르크할레, 알텐라인, 스위스
- 레겐투름 아래 주거(Wohnen unterm Regenturm), 플로힝엔, 독일
- 돈키호테 와이너리(Quixote Winery), 나파 밸리, 미국, 1988–1998[28] (미국 유일의 건물)
- 마이시마 소각장, 오사카, 일본, 1997–2000
- 운데르트바서 화장실(Hundertwasser toilet), 카와카와, 뉴질랜드, 1999[29]
- 운데르트바서 "환경 기차역", 엘젠, 독일, 1999–2001
- ''마그데부르크 녹색 시타델(Die Grüne Zitadelle von Magdeburg)'', 마그데부르크, 독일, 2003–2005
- ''로날드 맥도날드 키더 발레이(Ronald McDonald Kinder Vallei)'', 발켄뷔르흐 아안 더 헐, 네덜란드
- 쿠흘바우어 타워(Kuchlbauer Tower), 아벤스베르크, 독일, 2008–2010
- 운데르트바서 예술 센터(Hundertwasser Art Centre), 왕가레이, 뉴질랜드, 2022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성 바르바라 교회
슈피텔라우 소각장
6. 수상 경력
훈데르트바서는 1959년 제5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산브라상'을 수상했다.[54] 1961년에는 제6회 국제 미술 전에서 '마이니치상'을 수상했다.[54] 1974년에는 뉴질랜드에서 '환경보호상'을 받았다.[54] 1980년에는 시각 예술 부문에서 오스트리아 국가 대상을 받았다. 1981년에는 오스트리아 '자연보호상'을 수상했다.[54] 1982년에는 올해의 수상 작가로 선정되었다. 1987년에는 예술문학훈장 오피시에를 받았다. 1984년 이탈리아에서 '최고의우표상'과 '금메달'을 수상하였다. 1988년에는 비엔나시에서 '금메달'을, 스티리아주에서 '금메달'을 각각 받았다. 1997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그랑프리수상'을 수상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 훈장 대십자훈장을 받았다.[37]
7. 한국과의 관계
7. 1. 한국 전시회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은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전시되었다. 2009년 4월 10일부터 6월 13일까지 갤러리 디(DIE GALLERY)에서 《훈데르트바서 작품전》이 개최되었다. 2010년 12월 5일부터 2011년 2월 15일까지는 예술의 전당 디자인 미술관에서 《훈데르트바서 한국 특별전》이 열렸다. 2016년 12월 14일부터 2017년 3월 12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훈데르트바서 한국 특별전, 더 그린시티》가 개최되었다. 2018년 12월 26일부터 2019년 2월 24일까지는 돈의문 박물관마을에서 《훈데르트바서 서울 특별전》이 진행되었다. 2022년 3월 14일부터는 훈데르트바서파크에서 《훈데르트바서 상설전시》가 열리고 있다.7. 2. 훈데르트바서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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