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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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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통일은 중세 시대부터 시작된 독일 민족의 형성과 신성 로마 제국 시대를 거쳐, 19세기 프로이센의 주도로 이뤄진 일련의 과정을 통해 완성되었다. 1815년 빈 체제 이후 독일 민족주의가 발흥하고 경제적 통합이 진행되면서 통일의 조짐이 나타났고, 1848년 혁명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거치며 프로이센의 주도권이 확립되었다. 1871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로 선포되면서 독일 제국이 성립되었으며, 이는 소독일주의를 바탕으로 한 통일이었다. 통일 이후 독일 제국은 연방제 국가로 운영되었고, 비스마르크의 지도 아래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변화를 겪었으나, 융커 세력의 권력 유지, 문화 투쟁, 반유대주의 등 다양한 문제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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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통일
지도 정보
1876년 7월 1일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이 프로이센 왕국에게 합병되었을 당시의 독일 제국의 구성국들을 나타낸 지도.
기본 정보
고유 명칭Deutsche Einigung
고유 명칭 언어de
위치북독일 연방}}
참여 세력
1차 과정프로이센 왕국 (주도국)
작센 왕국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국
올덴부르크 대공국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
안할트 공국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작센알텐부르크 공국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
작센마이닝겐 공국
리페 후국
로이스게라 후국
로이스그라이츠 후국
샤움부르크리페 후국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 후국
슈바르츠부르크존더샤우젠 후국
발데크피르몬트 후국
2차 과정바이에른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바덴 대공국
헤센 대공국
자유 한자 도시 브레멘
자유 한자 도시 함부르크
자유 한자 도시 뤼베크
결과
정치적 결과소독일주의의 채택.
프라하 평화 협정 체결.
독일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거나 독일계 가문이 이끄는 독일의 4개 국가는 신독일에 합류하지 않음.
독일 연방 해체.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
림뷔르흐 공국은 네덜란드 왕국에 통합.
프로이센의 군주가 분데스리지움의 칭호를 획득.
프로이센의 총리가 독일의 총리를 겸임.
영토 변화폴란드인,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 쿠르세니에키인의 강한 독일화로 프로이센의 기원 동프로이센은 독일의 일부로 속함.
폴란드인과 카슈브인의 강한 독일화로 라우엔부르크와 뷔토브 지역과 스타로스트보 드라헤임, dlek.}}은 독일의 일부로 속함.
폴란드인과 카슈브인의 강한 독일화로 프로이센 분할 점령지 폴란드(포젠주와 서프로이센)이 독일의 일부로 속함.
폴란드인, 실레시아인, 체코인, 모라비아인의 강한 독일화로 실레시아와 크워츠코는 독일의 일부로 속함.
소르브인의 강한 독일화로 루사티아는 독일의 일부로 속함.
왈롱인의 강한 독일화로 오이펜-말메디는 독일의 일부로 속함.
덴마크인의 강한 독일화로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와 작센-라우엔부르크는 독일 제국프로이센 왕국에 속함.
법률 및 선포1871년 독일 연방 헌법과 통일의 2번째 단계.
빌헬름 1세 호엔촐레른 독일 황제의 독일 제국의 선포.
독일 제국 헌법 성립.
전쟁 및 조약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종료와 프랑크푸르트 조약의 체결.
프랑스로부터 강한 독일화를 경험한 영토(이후의 알자스-로렌)은 독일 제국에 합병됨.
기타문화투쟁의 시작.

2. 초기 역사

1789년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주도한 신성 로마 제국의 지도.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을 차지한 가장 큰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독일어권 지역(주황색)과 프로이센의 독일어권 지역(파란색)이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작은 국가들이 존재했다.


독일인은 중세 시대에 라인강엘베강 사이의 서독 지역에서 프랑크인, 프리슬란트인, 색슨인, 튀링겐인, 알레만니인, 바이에른인 등 로마화된 게르만족의 후손들 사이에서 형성되었다.[49]

5세기 클로도베쿠스 1세는 갈리아를 로마화하고 프랑크인들을 통합했으며, 라인강 동쪽의 민족들을 정복했다. 서부 프랑크인들의 지배 하에서 프랑크라는 민족적 명칭을 기반으로 독일 지역은 오랜 기간 동안 여러 '부족공국'으로 나뉘어졌다. 이후 몇 세기 동안 프랑크인들의 세력은 상당히 성장하여, 9세기 초 카롤루스 대제는 서유럽 대부분을 통합하고 프랑크 왕국을 확장하여 색슨족과 프리슬란트족을 정복했다.[50]

독일 군주들의 연합 왕국은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동프랑크 왕국이 서부의 프랑크 제국으로부터 분리된 이후, 오토 왕조가 919년 동프랑크 왕국을 통치하면서부터 시작된다. 962년부터 이 연합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핵심을 구성했으며, 1512년 쾰른 제국의회에서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으로 정식 명칭이 정해졌다.

신성 로마 제국 내의 국가들은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존재했으며, 제국관구(''Reichskreise'')를 통해 자원, 경제, 군사적 통합과 협력을 이루었다.

3. 근대 초기와 18세기

15세기 이후, 신성 로마 제국선제후들은 대부분 오스트리아 대공국합스부르크가 출신을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은 제국의 중앙 집권을 약화시키고 분열을 고착화시켜, 나폴레옹 전쟁 직전까지 독일어권 지역은 300개 이상의 정치 체제로 구성되었다. 합스부르크 군주국프로이센 왕국, 그리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지역은 신성 로마 제국의 국경 밖에 위치했다. 이러한 파편화는 독일 지역 국가들의 독립성과 자치성을 강화시켰고, 이는 '클라인슈타터라이'(''Kleinstaaterei'')라고 불리며, 19세기 후반까지 독일의 국가 정체성 발전을 저해했다.[51]

4. 구 제국의 해체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1789-1802)에서 프랑스 제1제국신성 로마 제국을 침공하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제국의 연합군을 무너뜨렸다. 1801년 뤼네빌 조약과 1803년의 독일의 재구조화는 여러 교회 공국들을 세속화하고 대부분의 자유제국도시를 폐지했으며 이 영토와 주민들을 왕조 국가에 흡수시켰다. 이 재구조화로 인해 특히 뷔르템베르크바덴의 영토가 크게 넓어졌다.[3] 1806년,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프랑스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를 통해 프로이센과 동맹군을 격파하고 프로이센을 항복시키는 데에 성공시키면서, 나폴레옹은 신성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해체와 명목상의 황제 프란츠 2세의 퇴위를 포함하는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지시했다. 나폴레옹은 신성 로마 제국을 대체하는 프랑스의 종속국 라인 동맹을 설립했는데, 이 동맹은 100명이 넘는 왕자와 백작, 자유제국기사들과 이들의 영토를 동맹의 회원국으로서 흡수했다. 이 과정에서 바이에른, 작센, 하노버와 같은 몇몇 국가들은 왕국으로 승격되었다.[4] 대부분의 독일 국가들이 제국을 공식적으로 탈퇴한 이후, 프란츠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을 공식적으로 해체했다.[5] 그는 스스로 신성 로마 황제 직위를 포기하고 제국 내 모든 국가들에 대한 의무로부터 해방시켰으며, 1804년에 선언하여 만든 '오스트리아의 황제'라는 칭호만을 유지했다.[52]

5. 나폴레옹 치하의 독일 민족주의 발흥

프랑스 제1제국의 지배를 받던 유럽(1804년~1814년)에서 독일 민족주의가 대중적으로 발흥했다. 독일 국가들은 프랑스의 지배 아래 비슷한 경험을 공유했고, 이는 '독일'을 미래의 단일 국가로 정의하려는 다양한 시도로 이어졌다. 독일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국가의 첫 번째이자 원초적이며 진정으로 자연스러운 경계는 의심할 여지 없이 내부 경계입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어떤 인간의 기술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자연 그 자체에 의해 보이지 않는 수많은 유대로 서로 연결됩니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속하며 본질적으로 하나이고 불가분의 전체입니다.[6]

공통 언어가 단일 국가의 기초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지만, 19세기 독일 역사가들은 수백 개의 독일 정치 체제를 통합하기 위해서는 언어적 유사성 이상의 동질감이 필요했다고 지적했다. 프랑스의 유럽 지배를 통해 독일어를 사용하는 중앙 유럽 사람들은 프랑스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땅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으려는 공통된 목적 의식을 갖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폴란드 원정(1806-1807), 이베리아 반도 원정, 1812년 러시아 원정은 많은 독일인들을 환멸에 빠뜨렸고,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은 중앙 유럽 경제를 파멸시켰다. 러시아 침공을 위해 독일 지역에서 징집된 약 125,000명의 병력 손실은 상류층과 하류층 모두에게 나폴레옹의 영향에서 벗어난 중앙 유럽을 상상하게 만들었다.[7] 뤼초 자유군단과 같은 지원병 창설은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러시아 원정의 실패는 독일 군주들에 대한 나폴레옹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1813년 나폴레옹은 독일 국가들에서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통한 해방전쟁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절정에 달했다. 1813년 10월, 50만 명 이상의 병력이 3일 동안 격렬한 전투를 벌인 이 전투는 19세기 최대 규모의 지상전이었으며,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작센, 스웨덴의 대프랑스 동맹이 승리했다. 이로 인해 라인 동맹은 해체되었고, 프랑스의 독일 지배는 종식되었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승리한 동맹군은 나폴레옹을 추격하여 그의 정부와 군대를 해산시키고 엘바섬에 투옥시켰다. 1815년 백일천하 동안, 웰링턴 공작이 지휘하는 영국군과 게프하르트 폰 블뤼허가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을 포함한 제7차 대프랑스 동맹군은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했다. 특히 리니 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해야 했던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이 수행한 중요한 역할은 전투의 흐름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프로이센 기병대는 6월 18일 저녁 패배한 프랑스군을 추격하여 동맹군의 승리를 확정지었다. 독일의 관점에서 볼 때, 워털루 전투에서 블뤼허 군대의 역할과 라이프치히에서의 독일 국가들의 합동 전투는 독일인들의 자부심과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나폴레옹을 물리친 독일 국민들의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비, 높고 네모난 블록, 꼭대기에 있는 군인, 기념비 주위에 있는 군인들의 이미지
1913년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민족 전투 기념비는 나폴레옹을 물리친 독일 국민들의 노력을 기리고 있다.

6. 빈 체제와 독일 이원론의 등장

금색 바탕에 검은색 쌍두독수리 문장
독일 연방의 국장(''Deutscher Bund'').


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인구와 오스트리아의 다민족 영토를 보여주는 유럽의 지도
독일 연방의 국경. 프로이센은 푸른색, 오스트리아는 노란색, 그 외의 독일 국가는 회색으로 표시된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빈 회의세력균형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유럽의 정치외교 체제를 확립했다. 이 체제는 유럽을 영향력 있는 국가들의 지배 하로 재조직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독일인과 이탈리아인 등 다양한 민족들의 열망을 억압했다.[56]

일반적으로 확장된 프로이센과 1803년 중재된 영토에서 통합된 다른 38개의 국가들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향력 아래 연합되었다. 빈 회의는 오스트리아가 이끄는 느슨한 독일 연방(1815-1866)을 설립하고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 '연방 의회'를 설립했다. 독일 연방의 국경은 이전의 신성 로마 제국의 국경과 대체로 유사했는데, 이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상당 영토가 연방 외부에 남겨졌음을 뜻했다. 또한 전통적으로 합스부르크가가 차지했던 신성 로마 황제의 지위를 인정하여, 오스트리아 황제가 명목상으로 독일 연방의 의장을 맡았다. '의회'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이 기관은 광범위하고 대중적인 방법으로 선출된 대표 집단이 아니었으며, 당시 독일의 많은 국가들에는 헌법이 없었고, 헌법이 있었더라도 바덴 대공국과 같이 재산에 기반한 선거권을 부여해 소수에게만 참정권을 주었다.

빈 체제의 문제점은 오스트리아의 독일 지배에서 18세기 프로이센의 등장을 고려하지 못하고, 프로이센의 새로운 지위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프로이센군은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심각한 패배를 겪었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으며, 이 결과 프로이센의 정치인들은 프로이센이 독일 정치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했다.[57] 브란덴부르크선제후가 프로이센의 왕이 된 이후, 이들의 영토는 상속과 전쟁을 통해 꾸준히 확장되었으며, 프로이센의 힘은 폴란드 분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프리드리히 2세 치하에서의 7년 전쟁에서 특히 확인할 수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의 남편 요제프 2세가 합스부르크가의 패권을 회복하려고 시도했을 때, 프로이센은 '제후 연합'(''Fürstenbund'')의 창설로 반격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이원론은 옛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세력 균형 전략은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 혹은 일반 대중 사이에서의 '감자 전쟁'으로 대표된다.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도 이러한 경쟁은 19세기 독일 민족주의 운동의 성장과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7. 통일의 조짐

나폴레옹 시대 독일인들의 경험은 자유주의와 동맹을 맺은 독일 민족주의 정서가 급증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독일 국가들 간의 정치, 사회, 문화적 관계를 변화시켰다.[59] 1813년 독일 전역에서 이루어진 국민 주권에 대한 약속들은 정치 과정에 대한 광범위한 시민들의 참여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켰으나,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대부분 지켜지지 않았다.

7. 1. 3월 전기 (Vormärz)

깃발을 들고 언덕 위를 향해 행진하는 학생들의 모습.


경찰국가로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시기였던 빈 회의부터 1848년 혁명 이전까지의 광범위한 검열 기간은 '3월 전기'(''Vormärz'')라는 이름으로 널리 불리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유럽의 자유주의는 추진력을 얻었으며, 주요 의제는 경제, 사회, 정치적 문제를 포함했다. 3월 전기의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민족주의 원칙 하의 통일과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추구하였고, 남성 참정권 확대를 주장했다. 이들의 '급진성'은 남성 참정권에 대한 견해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더 넓은 참정권을 주장할수록 더욱 급진적이었다.

나폴레옹 시대에 독일인들의 경험으로 자극받아 자유주의와 동맹을 맺은 독일 민족주의 정서의 급증은 독일 국가들 간의 정치, 사회, 문화적 관계를 변화시켰다.[59]

테이블 주위에 대부분 입마개를 한 남자들이 앉아 있다. 재갈을 문 사람도, 눈이나 귀를 가린 사람들도 표현되어 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카를스바트 결의를 조롱하는 독일의 그림.


언덕 맨 위에 있는 폐허가 된 성으로 행진하는 사람들.
1832년 민족주의 시위 참가자들이 함바흐 성 유적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1817년 바르트부르크 축제에서 최초의 부르셴샤프트와 같은 학생 단체들이 등장했으며, 흑적금 3색은 이를 상징했다. 1819년 3월 독일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가 급진적 민족주의자 학생에 의해 암살된 후, 1819년 9월 20일 카를스바트 결의가 선포되어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력을 방해했다.[59]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후작은 언론 검열과 민족주의 및 자유주의 운동 제한을 위해 코체부 암살 사건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분노를 활용했다.

1832년 5월 함바흐 축제에는 3만 명 이상의 군중들이 참여했으며, 이 축제는 형제애, 자유, 국가적 단결을 기념하였다. 함바흐의 수사법은 독일 민족주의의 평화로운 성격을 강조했으며, 프랑스식 민족주의 형태인 바리케이드가 아니라 계급 간의 감정적 다리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메테르니히는 코체부 암살 이후처럼 보수적인 사회 정책 추진을 위해 함바흐 축제를 이용했다.

1817년 바르트부르크 축제와 1832년 함바흐 축제 모두 명확한 통일 계획이 부족했으며, 특히 함바흐에서는 연설가들의 입장이 서로 달랐다. 통일이라는 이념만으로 뭉친 이들은 구체적인 계획 없이 국민들이 교육을 받으면 독일이 스스로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을 했다.

7. 1. 1.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의 출현과 보수적 대응



나폴레옹 시대 독일인들의 경험은 자유주의와 연대했던 독일 민족주의 정서가 급증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독일 국가들 간의 정치, 사회, 문화적 관계를 변화시켰다.[59] 1813년 독일 전역에서 이루어진 국민 주권에 대한 약속들은 정치 과정에 대한 광범위한 시민들의 참여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켰으나,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대부분 지켜지지 않았다.

보수적인 대응에도 불구하고, 독일어권 국가들에서는 통합 사상이 국민 주권의 개념과 결합되었다. 부르셴샤프트 학생 조직과 1817년 10월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열린 대중 시위는 중앙유럽의 독일어권 시민들 사이에 통일감을 키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58]

1819년 3월 독일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가 급진적 민족주의자 학생에 의해 암살된 이후, 1819년 9월 20일 카를스바트 결의가 선포되어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력을 방해했다.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후작은 언론을 더욱 검열하고 떠오르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운동을 제한하기 위해 코체부 암살 사건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분노를 활용했다.

1832년 5월 함바흐 축제에는 3만 명 이상의 군중들이 참여했으며, 이 축제는 형제애, 자유, 국가적 단결을 기념하였다. 함바흐의 수사법은 전반적으로 독일 민족주의의 평화로운 성격을 강조했으며, 요점은 프랑스적인 민족주의 형태인 바리케이드가 아니라 계급 간의 감정적 다리를 건설하는 것에 있었다. 메테르니히는 1819년 코체부 암살 이후와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사회 정책들을 추진하기 위해 함바흐 축제를 이용했다.

7. 1. 2. 경제와 관세 동맹

관세동맹(Zollverein)은 독일 국가들 간의 경제적 통합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818년 프로이센의 재무장관 한스 폰 뷜로 백작이 처음 구상한 프로이센의 관세동맹은 프로이센 본토와 호엔촐레른 영토를 경제적으로 통합했다. 이후 30년에 걸쳐 다른 독일 국가들도 이 관세동맹에 합류했다.[60] 관세동맹은 독일 국가들 간의 보호무역주의 장벽을 낮추는 데 기여했으며, 특히 원자재와 제조품의 운송 비용을 줄여 원자재 구입, 운송 및 판매 비용을 효과적으로 낮추었다. 이것은 신흥 산업 중심지인 자르강루르강 유역의 라인란트 지역에서 중요했다.[60]

내륙 지역의 독일 국가들은 해안 지역의 국가들보다 빨리 관세동맹에 가입했는데, 이는 프로이센 주도의 관세동맹의 국제 시장에 대한 외부 관세로 인해 바다로의 관세 면제 접근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1836년까지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프로이센 남부의 모든 독일 국가들은 관세동맹에 가입했다.[61]

해안가에 접한 독일 국가들은 이미 국제 시장에 대한 관세 면제 접근권을 갖고 있었고, 관세동맹에 속할 경우 무역에 있어 수입관세 부담을 원하지 않았다. 북부의 하노버는 1834년의 브라운슈바이크, 1836년 올덴부르크와 함께 '조세동맹'(Steuerverein)을 결성하여 프로이센의 관세동맹에 비해 낮은 외부 관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후 1842년 브라운슈바이크, 1854년 하노버와 올덴부르크마저 프로이센의 관세동맹에 가입했으며,[62]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에는 슐레스비히, 홀슈타인과 라우엔부르크까지 관세동맹에 참여했다. 국제 무역에 의존하고 있던 메클렌부르크는 1867년, 도시국가였던 함부르크와 브레멘은 1888년에 합류했다.[61]

수레에 짐을 싣고, 천막으로 덮은 수레가 국경 표지판 두 개 사이에 갇혀 있으며, 운전사가 통행료를 지불하는 그림. 자막에는
1834년경 많은 독일 여러 주에 만연했던 통행료 장벽에 대한 풍자적인 논평을 담은 그림. 일부 주는 너무 작아서 운송업자들은 하루에 두세 번씩 화물을 싣고 내렸다.

7. 1. 3. 지리, 애국심, 그리고 언어

여행이 더 쉽고, 빠르고, 저렴해지면서 독일인들은 언어 외에도 다른 공통점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1835년 하인리히 폰 가게른은 도로를 "국가의 정맥과 동맥"이라고 묘사하며, 자유, 독립, 번영을 촉진할 것이라고 예측했다.[60] 도로와 해상 운송의 개선도 중요했지만, 철도 도입은 독일 통일에 더욱 큰 영향을 미쳤다.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철도와 관세동맹을 '샴쌍둥이'라고 부르며 서로의 중요성을 강조했고,[61] 시인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은 관세동맹의 역할을 찬양하는 시에서 정치나 외교보다 독일의 통일에 더 많이 기여한 철도에 대해 언급하였다.[62]

7. 2. 1848-1849년 독일 혁명과 폴란드 봉기

1848년부터 1849년까지 독일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단일 헌법 아래 독일을 통일하고자 했다. 혁명가들은 여러 주 정부, 특히 라인란트에 압력을 가해 헌법 초안을 작성할 의회를 만들도록 했다. 좌익 혁명가들은 프로이센 왕의 주도 아래 통일된 독일을 원했고, 중도 우파 혁명가들은 느슨한 형태의 독일 통합을 추구했다.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 영토의 폴란드인들은 자신들만의 해방 계획을 세웠다.[66]

이 시기 독일인들은 여행이 쉬워지면서 언어 외에도 다른 요소에서 통합을 찾기 시작했다. 그림 형제는 여러 지역의 민담과 우화를 모아 그림 동화를 출간하며 이야기의 유사성을 강조했고, 카를 베데커는 중앙유럽 여러 지역의 가이드북을 작성하여 여행 정보를 제공했다.[63][64]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독일의 국가를 통해 독일의 언어적, 지리적 통일성을 강조했다.[65] 막스 슈네켄부르거의 라인 강의 파수꾼과 같은 애국적인 노래들은 '독일성'이 지리적 특성에도 있음을 강조했다.[66]

7. 2. 1.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1848-1849년 독일 혁명은 단일 헌법 아래 독일 통일을 추구했다. 혁명가들은 여러 주 정부, 특히 라인란트에 헌법 초안을 작성할 의회를 구성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좌익 혁명가들은 프로이센이 독일 국가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지리적으로 컸기 때문에 프로이센 왕의 주도 아래 통일된 독일을 확립하려는 헌법 제정을 희망했다. 반면, 중도 우파 혁명가들은 각자의 국가들에서 확장된 참정권을 요구하며 느슨한 형태의 독일 통합을 추구했다.[67]

혁명가들의 압력으로 인해 독일에서는 다양한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납부한 세금에 따라 투표권의 가중치를 부여하여 일부 계급에게 더 큰 힘을 주는 프로이센 3부 선거제와 같이 투표 참여 자격을 제한하는 경우도 있었다.

1849년 3월 27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파울교회 헌법을 통과시키고 다음 달에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카이저(''Kaiser'')라는 황제 칭호를 제안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공개적으로는 다른 독일 국가들의 동의 없이는 칭호를 받을 수 없다고 밝혔고, 개인적으로는 다른 제후들의 반대와 오스트리아나 러시아의 개입을 두려워했다. 또한 그는 대중에 의해 선출된 의회로부터 칭호를 받는 것을 근본적으로 싫어하여, "찰흙"으로 만든 왕관을 거부했다.[68]

깃발이 꽂혀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와 건물로 행진하는 제복을 입은 남자들을 그린 그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헌법 초안을 작성하고 소독일주의 해결책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지만, 자유주의자들은 통일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독일 제후들 간의 협력과 개혁에 합의함으로써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7. 2. 2. 1848-1849년의 독일 제국에 대한 분석

1848-1849년 독일 혁명은 단일 헌법 아래 독일 통일을 이루고자 했다. 혁명가들은 여러 주 정부, 특히 라인란트에 헌법 초안을 작성할 의회를 구성하도록 압력을 가했다.[67] 좌익 혁명가들은 새 헌법이 남성 보통선거, 상설 의회, 그리고 프로이센 왕의 주도 아래 통일된 독일을 확립하기를 바랐다. 프로이센이 독일 국가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지리적으로도 컸기 때문이다. 반면, 중도 우파 혁명가들은 각자의 국가에서 참정권 확대를 요구하며 느슨한 형태의 독일 통합을 추구했다.[20]

혁명가들의 압력으로 인해 독일에서는 다양한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프로이센 3부 선거제(''Preußisches Dreiklassenwahlrecht'')처럼 납부한 세금에 따라 투표권에 가중치를 두어 일부 계급(주로 부유하고 많은 토지를 보유한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력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67]

1849년 3월 27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파울교회 헌법(''Paulskirchenverfassung'')을 통과시키고, 다음 달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카이저(''Kaiser'')라는 황제 칭호를 제안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공개적으로는 다른 독일 국가들의 동의 없이는 칭호를 받을 수 없다고 밝혔지만, 개인적으로는 다른 제후들의 반대와 오스트리아러시아의 개입을 두려워했다. 또한 그는 대중에 의해 선출된 의회로부터 칭호를 받는 것을 근본적으로 싫어하여, "찰흙"으로 만든 왕관을 거부했다.[68]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헌법 초안을 작성하고 소독일주의 해결책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지만, 자유주의자들이 원했던 통일 달성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독일 제후들 간의 협력과 개혁에 합의함으로써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67]

7. 3. 영향권 문제: 에어푸르트 연합과 올뮈츠 협약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해산 이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에어푸르트 연합 설립을 지지했지만, 오스트리아러시아의 외교적 압력으로 인해 포기했다. 1850년 올뮈츠 협약을 통해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가 이끄는 독일 연방에 동의했다.[22] 이 사건들은 독일 국가 간의 영향권 문제를 날카롭게 드러냈으며, 통일이 언제 어떤 힘에 의해 일어나는지에 관한 문제였다. 독일 통일은 빈 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는 외교적 문제를 발생시켰고, 소독일주의와 대독일주의 간의 논쟁으로 이어졌다.[23][24][25][26]

7. 4. 독일의 통일에 대한 대외적 기대

유럽의 민족주의자들은 독일 통일 운동에 큰 기대감을 가졌다. 이들은 독일 통일을 인류 진보와 유럽 연합 창설의 필수 조건으로 여겼다.[27]

에어푸르트 연합 제안과 올뮈츠 조약은 겉보기에는 사소한 사건이었지만, 독일 주들의 영향력 문제를 명확하게 드러냈다. 문제는 통일이 ''만약'' 일어날 것인가가 아니라 ''언제'' 일어날 것인가였으며, ''언제''는 힘에 달려 있었다. 전 프랑크푸르트 의회 의원 중 한 명인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통일은 기본적인 외교적 문제를 제기했다. 독일(또는 이탈리아) 통일의 가능성은 1815년 빈 회의에서 만들어진 중첩된 영향권 시스템을 뒤엎을 것이었다. 이 협약의 주요 설계자들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라는 4개의 "열강"에 의해 균형을 이루고 보장되는 유럽을 구상하고 조직했으며, 각 강대국은 지리적 영향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영향권 시스템은 독일과 이탈리아 주들의 분열에 의존했지, 통합에 의존하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의 기치 아래 통일된 독일 국가는 중요한 질문을 제기했다. 독일 국민이 누구이며 독일 국가의 국경이 어디까지 확장될 것인지에 대한 쉽게 적용할 수 있는 정의가 없었다. 또한 어떻게 정의되든 "독일"을 가장 잘 이끌고 방어할 사람에 대한 불확실성도 있었다. 여러 집단이 이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소독일''("소독일") 해결책에서는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가문의 지도하에 독일 주들이 통일될 것이고, ''대독일''("대독일") 해결책에서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도하에 독일 주들이 통일될 것이었다. 프로이센 왕국의 1701년 건국 이후 독일 주들의 정치와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외교를 지배해 온 독일 이중성 논쟁의 최신 국면인 이 논쟁은 앞으로 20년 동안 절정에 달할 것이다.[28]

8. 프로이센의 증가하는 힘: 현실정치 (Realpolitik)

정수리 부분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피켈하우베를 들고 군복을 입은 채로 서 있는 세 남자의 모습
오토 폰 비스마르크(왼쪽), 군대를 재편성하고 훈련 방법을 변화시킨 알브레히트 폰 론(가운데), 군대 운용 방식과 전술을 개편시킨 헬무트 폰 몰트케(오른쪽) 등을 통해 프로이센은 1860년대 이후 유럽 문제에 관여하는 강대국 중 하나로 성장했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1857년 뇌졸중으로 인해 더 이상 통치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그의 형 빌헬름이 프로이센 왕국의 섭정이 되었다. 한편, 헬무트 폰 몰트케는 1857년 프로이센의 장군참모가 되었고, 알브레히트 폰 론은 프로이센 전쟁부 장관이 되었다. 이러한 프로이센군 내에서의 권력 변화는 미래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74] 군대 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알브레히트 폰 론과 국왕이 된 빌헬름 1세는 육군을 재편하기 시작했고, 헬무트 폰 몰트케는 작전 지휘를 간소화하여 전략적 방어를 재설계했다. 프로이센의 군제 개혁은 주로 군비 지출에 관하여 1860년부터 헌법적인 문제를 발생시켰는데, 그 이유는 국왕 빌헬름 1세와 의회 모두 군비 지출을 통제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의 총리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임명했고, 비스마르크는 국왕에게 유리하도록 위기를 해결했다.[75]

1844-1845년의 크림 전쟁1859년 이탈리아 전쟁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간의 균형관계를 붕괴시켰다. 이러한 붕괴로 인한 혼란 속에서 몰트케의 작전 지휘 개편, 폰 론과 빌헬름의 군대 재편과 더불어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으로 인한 프로이센의 위신 증가는 유럽의 세력 균형을 재편시켰다. 이러한 군사적 개편과 프로이센의 군사력 사용 가능성에 기반한 외교 정책, 현실주의로 완화된 내부 보수주의 세력의 결합으로 인한 현실정치는 프로이센을 독일 내 주요 강국으로 확립시켰다.[76]

비스마르크는 총리가 된 직후인 1862년 9월 30일 후에 '철혈 연설'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될 연설을 프로이센 의회 예산위원회에서 하였는데, 연설에서 그는 현실정치의 본질을 "작금의 거대한 문제 앞에 이루어져야 할 결단은, 1848년과 1849년에 이미 범하였던 거대한 실수인 연설과 다수결이 아닌, 철과 피로써 이루어져야 할 것이외다."라는 문구를 통해 표현했다.[78] 비스마르크가 '철과 피'를 강조한 것은 종종 철과 피를 향한 독일인들의 욕망을 나타낸다고 잘못 사용되기도 했다. 우선 그의 "거대한 문제 앞에서 이루어져야 할 결단은 [...] 연설과 다수결이 아닌"이라는 말은 정치적 과정에 대한 거부로 해석될 때가 있으나, 비스마르크는 정치적 과정에 대한 거부를 옹호한 적이 없다. 또한, '피와 철'에 대한 그의 강조는 프로이센군이 그 어떠한 군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는 철과 같은 군사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과 필요한 경우 이러한 군사 무기들을 사용할 의지가 독일의 여러 국가들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79]

1862년 비스마르크가 연설을 한 이후, 범독일주의의 평화주의에 따라 1848년 자유민주주의의 성격을 가진 독일 국민국가 개념은 이보다 보수적인 비스마르크의 현실정치를 수용하기 위해 바뀌었다. 그는 통일된 독일을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가와 연관시켰는데, 이를 일부 역사가들은 호엔촐레른가가 1871년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고 믿는다.[80]

9.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

북쪽에서 남쪽으로: 보라색과 테라코타색의 덴마크령 유틀란트 반도, 빨간색과 갈색의 슐레스비히 공국, 연한 노란색의 홀슈타인 공국.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는 이 지역들의 지위에 관한 것이었다.


비스마르크 주도 하의 독일 통일의 첫 번째 주요 사건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서 벌어졌다. 1863년 11월 15일,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티안 9세는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라우엔부르크의 공작이 되었으며, 이 공국들과 덴마크는 인적 동군 연합을 이루었다. 1863년 11월 18일, 크리스티안 9세는 덴마크 11월 헌법에 서명하였는데, 이는 슐레스비히 공국에 새로운 법이 적용됨을 의미했다. 독일 연방은 이 행위를 덴마크 왕국이 이 세 공국과 독립된 정체임을 확인한 1852년 런던 협약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독일 연방은 홀슈타인과 라우엔부르크의 독일인들이 거주한다는 것으로 연방의 구성국들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홀슈타인과 라우엔부르크는 대부분 독일계였고 일상생활에서 독일어를 사용했지만, 슐레스비히는 상당한 덴마크 인구와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11월 헌법을 폐지하려는 외교적 시도가 무산된 이후, 1864년 2월 1일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군이 아이더 강을 건너면서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이 시작되었다.[80]

처음에 덴마크인들은 '다네비르케'(''Dannevirke'')라는 고대에 흙으로 건설된 요새를 사용하며 방어하려고 시도했지만, 이 요새는 방어에 소용없었다. 덴마크군은 근대화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최초의 볼트 액션 총인 침착총은 이 전쟁과 2년 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군을 지원했다. 이 소총은 프로이센 병사가 엎드린 자세로 다섯 발을 발사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덴마크군은 단 1발만을 발사할 수 있었고 나머지 시간 동안은 서서 장전해야만 했다. 결국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승리했으며, 두 나라는 1864년 10월 30일에 체결된 빈 조약에서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에 대한 통제권을 각각 나누어 가졌다.[78]

10.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1866년)

비스마르크는 새로이 건설된 이탈리아와 협력하여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하도록 유도하는 외교적 환경을 조성했다. 전쟁의 극적인 서막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벌어졌는데,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두 강국은 의회에서 모든 독일 국가를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1866년 4월, 피렌체 주재 프로이센 대표는 이탈리아 정부와 비밀 협정을 체결하여, 각 국가가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쟁에서 서로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34] 다음 날, 프랑크푸르트 의회의 프로이센 대표는 국가 헌법, 직접 선출된 국가 의회, 그리고 보통 선거권을 요구하는 계획을 제시했다. 독일 자유주의자들은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 ''란트타크''(주 의회)에서 대표들을 회유하고 함부로 다루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 계획에 회의적이었다.[34] 그들은 이 제안을 진보적인 개혁 의제라기보다는 프로이센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책략으로 보았다.[34]

1866년 4월, 티롤과 베네치아 국경 근처에서 이탈리아 군대의 이동 소식이 비엔나에 전해지면서 독일 연방 헌법에 대한 논쟁은 무의미해졌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남부 지역에 부분적 동원령을 내렸고, 이에 이탈리아는 전면 동원령을 내렸다. 이탈리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무장 충돌로 치달았다. 5월 1일, 빌헬름 1세는 헬무트 폰 몰트케에게 프로이센 군대의 지휘권을 맡겼고, 다음 날 전면 동원을 시작했다.[35]

독일 의회에서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대공국, 헤세 대공국, 작센-바이마르, 작센-마이닝겐, 작센-코부르크, 나사우 등으로 구성된 중소 국가 연합인 ''Mittelstaaten''은 연방 내에서 완전한 해산을 지지했다. 이들 정부는 비스마르크의 유혹적인 약속과 위협을 거부했다. 프로이센 전쟁 내각은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국만이 프로이센을 지지하며, 프로이센의 유일한 외국 동맹국은 이탈리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프로이센의 강경책에 대한 반대는 다른 사회 및 정치 집단에서도 나타났다. 독일 각국에서 통일된 국가를 지지하는 도시 의회, 자유주의 의원, 그리고 통일로부터 큰 이익을 얻을 상공회의소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어떤 전쟁에도 반대했다. 여론 또한 프로이센의 지배에 반대했다. 특히 쾰른루르 계곡과 같은 국제적인 지역에서 라인강을 따라 위치한 가톨릭 인구는 오스트리아를 계속 지지했다. 늦봄까지 대부분의 중요한 국가들은 베를린의 무력에 의한 독일 국가 재편 노력에 반대했다. 프로이센 내각은 독일 통일을 권력의 문제로 보았다. 한편 프랑크푸르트 의회의 자유주의자들은 독일 통일을 여러 당사자 간의 권력 분배로 이어지는 협상 과정으로 보았다.

11. 이탈리아의 통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

프라하 평화 협정은 오스트리아에게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지만, 새롭게 통일된 국민국가 이탈리아와의 관계는 재조정이 필요했다.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군사적으로 더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베네치아 지역을 잃게 되었다. 합스부르크가는 베네치아를 프랑스에 양도했고, 프랑스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탈리아에게 지배권을 넘겼다.[84]

독일 국가들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지배가 끝나자 오스트리아의 관심은 발칸 반도로 옮겨졌다.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게 패배한 것은 오스트리아 내부에서 내부 분열, 지방 자치와 자유주의에 대한 재평가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85] 1867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자신이 지배하는 헝가리 영토에 오스트리아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대타협을 체결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라는 이중군주국을 형성했다.

12.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1871년)

프랑스인들은 프로이센의 승리에 분개하며 '사도바의 복수'(''Revanche pour Sadová'')를 요구했다.[86] 1865년 9월 비아리츠에서 나폴레옹 3세비스마르크의 회담에서 프랑스가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는 대가로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일부를 합병할 수 있다는 암시가 있었으나, 이는 실현되지 않아 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에게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혁명이 발생해 이사벨 2세가 폐위되었고,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가레오폴트에게 왕위가 제안되었다. 비스마르크는 레오폴트에게 왕위를 받아들일 것을 권유했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가가 왕위를 이어받으면 프랑스 남쪽과 동쪽 모두 독일계 왕이 지배하게 되는 상황은 프랑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라몽 공작 아제노르는 호엔촐레른가의 수장 빌헬름 1세에게 최후 통첩을 보냈고, 레오폴트 후작은 왕위를 거부하면서 위기를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베를린 주재 프랑스 대사는 바트엠스에서 휴가 중인 빌헬름 1세에게 호엔촐레른가의 인물이 에스파냐 왕위에 오르는 것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할 것을 요구했다. 빌헬름 1세는 이를 거부하고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를 보냈고, 비스마르크는 이 사실을 왜곡하여 언론에 발표했다. (엠스 전보 사건) 프랑스의 《하바스》(''Havas'')가 이것을 번역하면서 프랑스인들의 분노를 일으켜, 프랑스 대중들은 전쟁을 요구했다.[39]

피곤하고 아픈 노인이 프랑스 군복을 입고 피켈하우베를 쓴 고위 관료 옆에 앉아 있다.
1870년 9월 2일, 스당에서 '나폴레옹의 항복한 검'을 들고 있는 비스마르크의 옆에 앉아 있는 나폴레옹 3세(왼쪽). 프랑스군의 패배로 인해 나폴레옹 정권은 무너졌으며 프랑스 제3공화국이 세워졌다.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가 복수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고, 이전 반프로이센 동맹국들이 동맹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북독일 연방 조약으로 인해 독일의 대부분의 국가가 군사적으로 통합된 이후 프랑스에 맞서 싸우게 되므로 이러한 나폴레옹의 생각은 실현되지 못했다. 독일 국가들의 지원을 받는 프로이센을 상대로 프랑스는 동맹국 없이 전쟁을 벌였다.[39]

폰 룬의 군대 재편성과 몰트케의 전술 개편이 합쳐져 프랑스와의 전쟁에 큰 효과를 거두었다. 프로이센의 동원 속도는 프랑스 정부를 놀라게 했고, 효율적인 철도망을 이용하여 프로이센군은 전투 지역으로 빠르게 이동한 반면, 프랑스군은 상당한 거리를 행진해야만 했다. 슈피히렌, 뵈르트, 마르스라투르, 그라블로트 등에서의 여러 번의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메스파리로 진격했다. 1870년 9월 1일 스당에서 프로이센군은 나폴레옹 3세과 그 군대를 포로로 잡았다.[39]

13. 독일 제국의 선포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굴욕적인 생포와 프랑스군의 패배는 프랑스 정부를 혼란에 빠뜨렸다. 나폴레옹 3세의 반대파들은 그의 정부를 전복하고 제3공화국을 선포했다. 독일 최고 사령부는 프랑스의 평화 제의를 기대했지만, 새로운 제3공화국은 항복을 거부했다. 프로이센군은 파리를 포위하고 1871년 1월 중순까지 포위 상태를 유지했으며, 도시는 비효과적으로 포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월에 독일군은 도시에 하루에 300~400개의 수류탄과 12,000개의 포탄을 발사했다.

잘 차려입고 체격이 좋은 왕자와 공작들이 단상 위의 왕을 환호하는 그림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독일 제국 선포. 비스마르크는 흰색 옷을 입고 있다. 바덴 대공은 빌헬름 옆에 서서 환호를 이끈다. 후에 프리드리히 3세가 되는 왕세자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의 오른쪽에 서 있다. 안톤 폰 베르너 그림


1871년 1월 18일, 독일 왕족과 고위 군 지휘관들은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빌헬름 1세를 '독일 황제'로 선포했다.[40] 이후 프랑크푸르트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독일 지역이었던 대부분의 지역(알자스와 로렌의 독일어 사용 지역)을 포기했다. 또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807년 프로이센에 부과한 배상금과 정확히 같은 액수(인구를 기준으로 계산)의 배상금을 지불했다. 그리고 파리와 프랑스 북부 대부분 지역에 대한 독일 행정을 수락했으며, "독일군은 배상금 지불과 함께 단계적으로 철수할 것"이다.[41]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승리는 통일 과정의 정점이 되었다. 빌헬름 1세가 카이저(Kaiser)로 선포되면서 프로이센은 새로운 제국의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남부 주들은 1871년 베르사유 조약(1871년 베르사유 조약)(1871년 2월 26일 서명, 이후 1871년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 조약에서 비준됨)에 따라 공식적으로 통일된 독일에 편입되었고, 이 조약은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

14. 통일 이후 독일 제국의 정치, 사회, 문화

독일 제국은 26개의 정치체로 이루어진 연방 국가였다. 이 국가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소독일주의 해결책을 실현한 것이었다.[89] 독일 제국 헌법은 민주적인 특징을 일부 포함하고 있었지만, 프로이센은 연방 상원(Bundesrat)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존더베크(Sonderweg) 주장은 독일의 20세기가 어려웠던 이유가 새로운 제국의 취약한 정치적, 법적, 경제적 기반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주장에 따르면, 프로이센의 지주 세력인 융커는 통일 독일에서 상당한 정치적 권력을 유지했으며, 이는 1848년과 1871년에 중산층이나 농민, 도시 노동자가 결합한 혁명적 돌파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융커의 지배력에 대한 주장에 반박하고, 한자 도시의 상인 계급과 산업 지도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89] 융커들이 실제로 군부를 계속 통제했지만, 존더베크 이론가들이 주장했던 것만큼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문제들을 모두 지배하지는 못했다. 동부의 융커 세력은 서부의 관료, 교사, 교수, 의사, 변호사, 과학자 등으로 구성된 전문적인 계층과 균형을 이루었다.[90]

빌헬름 시대의 여러 집단들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들은 모두 이 시기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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