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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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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 시대의 불교는 국가 주도로 전래되어 호국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귀족 세력의 무속 신앙을 불교로 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불교는 4세기 중국 남북조 시대에 처음 도입되어 6세기에는 삼국에서 지도적인 사상으로 자리 잡았으며, 고구려 소수림왕, 백제 침류왕, 신라 법흥왕 등이 불교 수용에 기여했다.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에는 화엄종, 법성종, 법상종 등 다양한 종파가 등장했고, 8세기 말부터는 선종이 유입되어 신라에 9산 선문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불교 사상은 정치 이념화되거나 미륵 신앙, 미타 신앙으로 발전하여 민족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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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의 불교
개요
시기삼국 시대
주요 전래 국가중국
주요 특징왕실 중심의 수용, 호국 불교적 성격
주요 영향사상적 통합, 문화 예술 발전
삼국별 불교 수용 과정
고구려시기: 4세기 후반
전래: 소수림왕 2년 (372년), 전진의 사신을 통해 불교 경전과 불상 전래
특징: 왕실 주도의 적극적인 수용, 국가 통치 이념으로 활용
백제시기: 4세기 후반
전래: 침류왕 원년 (384년), 동진의 마라난타를 통해 불교 수용
특징: 초기 왕실 중심 수용, 이후 귀족 사회로 확산
신라시기: 6세기 전반
전래: 눌지 마립간 때 고구려 묵호자를 통해 불교 전래 시도 (실패), 법흥왕 14년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 공인
특징: 늦은 수용, 귀족들의 반발 심함, 왕실의 노력으로 극복
삼국 시대 불교의 특징
왕실 중심 불교 수용왕즉불 사상, 왕권 강화에 기여
호국 불교적 성격국가의 안녕과 번영 기원
사상적 통합사회 통합에 기여
문화 예술 발전불교 미술 발전: 불상, 탑, 사찰 건축 등
불교 음악 발전: 범패 등
삼국 시대 불교의 영향
정치왕권 강화, 국가 통치 이념 확립
사회사회 통합, 윤리 의식 고취
문화불교 미술, 건축, 음악 등 다양한 분야 발전
사상한국 고유 사상과 융합, 한국 불교의 특징 형성

2. 성격

삼국 시대불교는 그 전래와 발전 과정에서부터 국가, 특히 왕권 강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1] 민간 신앙으로서 자생적으로 발전하기보다는 왕실 주도로 수용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호국적(護國的)인 성격이 매우 강하게 나타났다.[1]

불교 전래 초기인 4세기~5세기에는 주로 종교의례를 거행하거나 불경과 논서를 보급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6세기에 들어서면서 불교 사상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6세기 말에는 삼국 전역에서 불교가 기존의 토착 사상인 무속신앙을 점차 흡수하고 대체하면서 사회의 지도적인 사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2]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7세기 후반에는 한국 불교의 여러 종파가 형성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2. 1. 호국불교

삼국 시대의 불교는 불교의 전래와 발전이 민간 신앙 차원이 아니라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호국적(護國的)인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1] 불교가 국가를 통해 전래되고 국가 중심적인 종교로 자리 잡으면서, 개인적인 치병(治病)이나 구복(求福) 신앙뿐만 아니라 국가의 발전과 안녕을 기원하는 호국신앙(護國信仰)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특히 나라를 보호하고 재난을 막는다는 내용을 담은 《인왕경(仁王經)》을 중심으로 백좌강회(百座講會)와 같은 대규모 법회를 열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의식이 성행하였다. 백제신라의 많은 사찰들이 호국적 성격을 지녔는데, 대표적으로 백제의 왕흥사와 신라의 황룡사는 국가적인 호국의식을 전담했던 사찰로서 그 규모가 매우 컸다.

삼국 시대의 불교가 이처럼 호국 불교적 특징을 강하게 지니게 된 배경에는 당시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었던 귀족 세력의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왕실의 의도가 있었다. 귀족 세력은 전통적인 무속신앙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있었는데, 왕실은 이를 대체하기 위해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장려하였다.[3] 이러한 과정에서 삼국 시대의 불교는 토착 무속신앙을 불교적으로 포용하며 변화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3] 신라가 삼국 통일(676)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불교 중심의 사상 통합 노력이 어느 정도 성숙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3]

2. 2. 무속신앙과의 융합

삼국 시대불교는 국가 주도로 전래되어 호국 불교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이는 개인적인 복을 비는 것보다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우선시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나라를 보호한다는 《인왕경》을 중심으로 한 백좌강회 의식이 널리 행해졌으며, 백제의 왕흥사나 신라의 황룡사와 같은 대규모 사찰들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호국의식을 전담하기도 했다.

이처럼 삼국 시대 불교가 호국 불교의 특징을 갖게 된 배경에는 당시 왕실의 정치적 필요가 있었다. 왕실은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었던 귀족 세력의 기반인 무속신앙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3] 이러한 과정에서 삼국 시대불교는 토착 무속신앙을 포용하고 흡수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3] 신라가 삼국 통일(676년)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불교와 토착 신앙의 융합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시점이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도 있다.[3]

3. 역사

한국 불교의 역사는 삼국 시대4세기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면서 시작되었다. 고구려소수림왕 2년(372년)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順道)를 통해, 백제침류왕 원년(384년) 동진(東晋)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였다. 신라는 토착 세력의 반발로 수용이 늦어졌으나, 법흥왕 14년(527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공인되었다.

삼국 시대의 불교는 주로 왕실을 중심으로 수용되어 왕권 강화와 국가 체제 정비에 기여했으며,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호국 불교(護國佛敎)적 성격이 강했다.[1][3] 초기에는 의식과 경전 보급에 중점을 두었으나, 6세기 이후로는 중국이나 인도 유학을 통해 불교 사상 연구가 활발해졌고,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했다.[2] 7세기에는 여러 고승들의 활약으로 다양한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7세기 통일신라 시대에는 불교 사상이 더욱 발전하여 교종을 중심으로 계율종, 열반종, 화엄종, 법성종, 법상종 등 '교종 오교'가 성립되었다. 원효법성종을 열고 불교 대중화에 힘썼으며, 의상당나라 유학 후 화엄종을 신라에 정착시켰다. 진표법상종을 열고 미륵 신앙을 전파했으며, 아미타불을 믿는 정토교도 널리 유행했다. 8세기 말에는 좌선 수행을 중시하는 선종이 전래되어 신라 말 지방 호족의 지지를 받으며 확산되었고, 이는 훗날 '구산선문'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신라 말에 형성된 선종 구산(九山)과 기존의 교종 오교(五敎)가 공존하는 '5교 9산' 체제가 이루어졌다. 이후 문종의 아들인 의천(義天)이 천태종(天台宗)을 열어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시도하면서, 고려 불교는 교종 중심의 5교와 선종 중심의 조계종을 아우르는 '5교 양종'(五敎兩宗) 체제로 재편되었다.

3. 1. 삼국시대 (4~7세기)

한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삼국 시대이다. 4세기중국남북조 시대에 활발했던 불교가 전래되기 시작했다.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 2년(372년)에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順道)가 처음 불상과 불경(佛經)을 들여왔고, 12년 뒤인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에는 동진(東晋)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불교를 전했다. 신라는 토착 세력의 반발로 불교 수용이 늦어졌으나, 법흥왕 14년(527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공인되었다.

삼국 시대의 불교는 왕실을 중심으로 수용되어 왕권 강화와 국가 체제 정비에 기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는 호국 불교(護國佛敎)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다.[1] 이는 당시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었던 귀족 세력의 기반인 무속 신앙을 대체하려는 의도와도 관련이 깊다.[3] 국가를 보호한다는 《인왕경(仁王經)》을 중심으로 백좌강회(百座講會)와 같은 의식이 성행했으며, 백제의 왕흥사나 신라의 황룡사와 같은 대규모 사찰은 이러한 호국 의식을 전담하기도 했다.

불교 전래 초기인 4세기5세기에는 주로 종교 의식을 행하고 불경과 논서를 보급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6세기에 들어서면서 불교 사상에 대한 이론적인 탐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삼국의 승려들은 직접 중국이나 인도로 가서 불법을 배우고 연구했으며, 이를 일본에 전파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6세기 말에는 불교가 토착 무속 신앙을 점차 흡수하고 대체하며 삼국 사회의 지도적인 사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2] 7세기에 이르러서는 여러 고승들의 활약으로 다양한 불교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7세기 후반에는 한국 불교 종파의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다.

3. 1. 1. 주요 인물

삼국 시대에 외래 사상인 불교가 국가의 지도적인 사상으로 자리 잡는 데에는 여러 인물들의 역할이 컸다.

초기 불교 수용과 발전에 기여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각국의 왕들을 들 수 있다. 고구려소수림왕(재위 371-384), 백제침류왕(재위 384-385), 신라법흥왕(재위 514-540)은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불교를 진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신라에서는 토착 세력의 반발이 심했는데, 이차돈(501-527)의 순교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불교가 공인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단순한 신앙을 넘어 불교 사상을 깊이 탐구하고 전파한 고승들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이들은 직접 중국이나 인도로 건너가 불법을 배우고 연구했으며, 국내외에서 불교 이론을 널리 알렸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승랑(6세기 활동), 의연(6세기 후반 활동), 백제의 겸익(526년경 활동), 신라의 혜량(551년경 활동) 등이 있으며, 이들은 한국 불교사에서 위대한 선각자로 평가받는다.

7세기에 들어서면서 불교 연구는 더욱 심화되어 다양한 학파가 형성되고 발전했다.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승려들은 다음과 같다.

학파주요 인물활동 시기 및 주요 업적
불교사 연구의연6세기 후반 활동
삼론학승랑, 실법사, 인법사, 혜관(625-682 활동), 혜자(622년 사망), 관륵(602년경 활동)6세기 ~ 7세기, 삼론학 연구 및 전파
성실학도장7세기 활동
섭론학원광542년 ~ 640년
천태학파야
열반학보덕(650년경 활동), 원광7세기 중반 (보덕), 542년 ~ 640년 (원광)
계율종겸익(526년경 활동), 자장(590-658)6세기 초 (겸익), 590년 ~ 658년 (자장), 계율 연구 및 전파
화엄학현황(6세기 활동), 연기(544년경 활동)6세기 (현황), 6세기 중반 (연기)
밀교명랑(668년경 활동), 밀본(7세기 활동)7세기 후반 (명랑), 7세기 (밀본), 밀교 전수



이러한 고승들의 노력 덕분에 삼국 시대 불교는 이론적으로 크게 발전했으며, 7세기 후반에는 한국 불교의 여러 종파가 그 윤곽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들이 꽃피운 불교 사상은 널리 민중에게 퍼져나가 정치 이념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미륵신앙이나 미타신앙과 같이 어려운 시대를 구원하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민족 신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3. 2. 통일신라시대 (7~9세기)

7세기 통일신라 시대에 이르러 불교 사상은 더욱 깊이 발전하였고, 다양한 종파들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는 교종을 중심으로 계율종, 열반종, 화엄종, 법성종, 법상종 등 다섯 개의 주요 종파, 이른바 '교종 오교'가 성립되었다.

대표적인 승려로는 원효의상을 들 수 있다. 원효는 독자적인 불교 사상을 펼쳐 법성종을 열었으며, 특히 화엄 사상을 바탕으로 여러 불교 종파들을 하나로 아우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어려운 불교 교리를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설명하여 불교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의상당나라로 유학하여 화엄종을 깊이 공부하고 돌아와 부석사를 창건하였다. 그는 부석사를 중심으로 제자들을 양성하며 신라 사회에 화엄종을 널리 퍼뜨렸다.

한편, 진표법상종을 새롭게 열고, 미래에 나타나 중생을 구원한다는 미륵 신앙을 적극적으로 전파하며 민간 신앙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아미타불을 믿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정토교(미타신앙) 역시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져, 신라 사회의 중요한 신앙 형태로 자리 잡았다.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는 새로운 불교 흐름인 선종이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 선종은 경전 공부나 교리보다는 좌선 수행을 통한 깨달음을 중요시했는데, 이러한 가르침은 신라 말 혼란한 사회 상황 속에서 지방 호족 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 결과, 전국 각지에 선종 사찰들이 세워지면서 훗날 '구산선문'이라 불리는 아홉 개의 주요 선종 문파가 형성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3. 3. 고려시대 (10~14세기)

신라 말에 성립된 선종 구산(九山)은 고려 초기에 기존의 교종 종파인 오교(五敎)와 함께 '5교 9산' 체제를 이루었다. 이후 문종의 아들인 의천(義天)은 천태종(天台宗)을 새롭게 열어 교종선종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이를 통해 고려 불교계는 기존의 5교 9산 체제에서 교종 중심의 5교와 선종 중심의 조계종을 아우르는 '5교 양종'(五敎兩宗) 체제로 재편되었다.

4. 사상

삼국 시대, 특히 통일신라 시기에는 다양한 불교 사상이 발전하였다. 경전 연구를 중시하는 교종(敎宗)의 여러 분파가 성립되었고, 8세기 말부터는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종(禪宗)이 새롭게 유입되어 확산되었다. 또한 아미타불 신앙을 중심으로 한 정토교(淨土敎) 역시 민간에 널리 퍼졌다. 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 걸쳐 형성된 교종오교(五敎)와 선종 구산(九山禪門)은 당시 불교계의 주요 흐름을 보여주는 '''5교9산'''(五敎九山)이라는 개념으로 통칭되기도 한다.

4. 1. 교종 (敎宗)

국가 중심의 불교는 종파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삼국시대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종파는 '''계율종'''(戒律宗)이었다. 백제겸익(謙益)과 신라자장(慈藏)이 대표적인 계율종 승려였으며, 특히 자장신라의 대국통(大國統)으로서 신라 불교 전체를 관리 감독했다. 고구려 말기에는 보덕(普德)을 중심으로 '''열반종'''(涅槃宗)이 세워졌다. 이 종파는 도교(道敎)의 불로장생 사상을 비판하며 모든 중생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요 교종 종파들이 새롭게 등장하거나 발전했다.

종파주요 인물중심 사상 및 특징관련 사찰 및 기타
화엄종(華嚴宗)의상(義湘) (625~702)화엄 사상을 중심으로 함.의상은 중국 화엄종의 대가 지엄(智儼)에게 배운 후 귀국하여 영주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고 화엄종의 중심 사찰로 삼았다.
법성종(法性宗)원효(元曉) (617~686)특정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화엄종 등 여러 사상을 아우르며 모든 것을 화합(和)으로 통일시키려 함.원효는 당나라 유학 경험 없이도 높은 평가를 받은 학승으로, 분황사(芬皇寺)에서 종파를 열었다. 그의 시호인 화정(和靜)에서 이름을 따 해동종(海東宗)이라고도 불렸다.
법상종(法相宗)진표(眞表) (경덕왕 재위기: 742~765 활동)유가론(瑜伽論)과 유식론(唯識論)을 중심으로 연구했으며, 미륵신앙과 점찰법(占察法)을 강조함.진표금산사(金山寺)에서 종파를 열었으며, 미륵설계와 점찰법을 통해 민간에 널리 퍼져 큰 교세를 형성했다.


4. 2. 선종 (禪宗)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부터 선종(禪宗)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른 불교 종파들이 주요 경전(所依經典)을 바탕으로 그 특징을 나타내는 것과 달리,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 즉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말을 통해 가르침을 전하기보다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견성성불(見性成佛), 자신의 본성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종파이다. 이러한 선종은 달마(達磨)에 의해 중국에 전해졌고, 6대 조사(六祖)인 혜능(慧能) 대에 이르러 크게 번성하였다.

신라에는 선덕여왕(재위 632년~647년) 시기에 처음 선종이 전래되었으며, 헌덕왕(재위 809년~826년) 때 도의(道義) 선사에 의해 크게 확산되어 신라 말기에는 '''선종 9산'''(九山禪門)이라 불리는 아홉 개의 주요 선문(禪門)이 형성되었다. 선종 9산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성립되었으며, 각 산문의 중심 사찰과 개창자는 다음과 같다.

산문(山門)중심 사찰위치개창자 및 주요 인물형성 시기
가지산문(迦智山門)보림사(寶林寺)전라남도 장흥군체징(體澄, 804~890)신라 말 (9산 중 최초)
실상산문(實相山門)실상사(實相寺)전라북도 남원시 (지리산)홍척(洪陟, fl. 830)신라 말
동리산문(桐裡山門)태안사(泰安寺)전라남도 곡성군혜철(惠哲, 785~861)신라 말
성주산문(聖住山門)성주사(聖住寺)충청남도 보령시무염(無染, 800~888)신라 말
사굴산문(闍崛山門)
(도굴산문)
굴산사(崛山寺)*강원도 강릉시범일(梵日, 810~889)신라 말
사자산문(獅子山門)흥령사(興寧寺)*강원도 영월군도윤(道允, 798~868), 절중(折中)신라 말
희양산문(曦陽山門)봉암사(鳳岩寺)경상북도 문경시도헌(道憲, 824~882)신라 말
봉림산문(鳳林山門)봉림사(鳳林寺)*경상남도 창원시현욱(玄昱, 787~868), 심희(審希, fl. 9세기)신라 말
수미산문(須彌山門)광조사(廣照寺)*황해남도 해주시이엄(利嚴, 869~936)고려 초 (9산 중 최후)

* 현재는 터만 남아 있거나 폐사된 사찰.

4. 3. 정토교 (淨土敎)

교종의 여러 분파가 주로 귀족 사회에서 환영받았던 것과 달리, 신라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미타불을 믿는 미타신앙(彌陀信仰), 즉 '''정토교'''(淨土敎)였다. 정토교 신앙은 원효가 지은 무애가(無碍歌)와 무애춤을 통해 널리 퍼지기 시작했으며, 이는 신라 민중 신앙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조

[1] 서적 한국 고대 불교 사상사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9
[2] 서적 한국 고대 불교 사상사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9
[3] 서적 한국 고대 불교 사상사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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