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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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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의 불교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특징을 지녔으며, 수행을 통해 지혜를 얻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초기에는 카스트 제도의 영향을 덜 받았고, 수행법과 학파별 활동이 두드러졌다. 초기 불교는 민속 신앙과 융합되기도 했으며, 이후 대승 불교와 밀교로 발전하면서 다양한 사상을 수용했다. 인도 불교는 12세기 이슬람교의 침략으로 쇠퇴했지만, 일부는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어 티베트 불교 등에 영향을 미쳤다. 현대에는 달라이 라마의 망명 수용, 달리트의 개종 등을 통해 부활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며, 비파사나 명상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인도에는 다양한 불교 유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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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불교
불교 현황
2011년 인도 불교 현황
2011년 인도 불교 현황
분류나바야나 불교 (87%)
전통 불교 (대승불교, 상좌부 불교, 밀교) (13%)

2. 인도 불교의 특징

인도 불교는 승려(승가)와 재가 신자 간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고, 힌두교 세계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3] 통과의례나 장례와 같은 일상 의례는 승려가 아닌 바라문 승려에 의해 행해졌다.[3][4]

인도 불교는 학파별로 활동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남전 불교 등에도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대승 불교권에서는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학파라기보다는 사찰별로 묶음이 강하며, 몇몇 학파가 하나의 사찰에 병존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일본에서는 개인의 사상이나 가르침에 따라 그룹이 형성되고 있다.

한편, 불교 신자들은 장래에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과정으로서, "공덕을 쌓아 선한 후생을 얻는 것"이 요구되었다.[5] 초기 불교에서는 조상 숭배, 샤머니즘과 같은 민속 신앙의 의례나 습관은 용인, 묵인, 기피 또는 금지되었지만,[6] 진언이나 방호주와 같은 의례나, 자타카나 아바다나와 같은 경전에 보이는 것처럼, 이러한 요소 중에는 시대가 내려갈수록 불교 교단 측에도 받아들여진 것도 있었다.

2. 1. 인도 불교의 수행

인도 불교의 수행은 지극히 인식론적인 방법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이는 다른 지역의 불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이다.[1]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가 중요하게 여겨졌다.[2] 이러한 흐름은 용수가 일으킨 중관파와 미륵이 일으키고 무착과 세친이 교학을 대성한 유가행유식학파라는 큰 조류를 형성한다.[2] 이는 티베트에도 전파되어 티베트 불교의 기초 교학을 형성하고 있다.[2]

지혜를 주제로 하는 방법론적 흐름은 부파 불교에서 대승 불교로 이어지는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3] 따라서 상호 교류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서로 보완하면서 교학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3] 인도 불교의 최종 형태는 밀교에 이르는데, 이는 불교가 서방으로 전파될 때, 그 지역의 사상 등의 영향을 받아 모든 사상을 상징화함으로써 체계화된 것으로 생각된다.[3]

2. 2. 인도 불교와 카스트 제도

석가모니카스트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출가자에게는 출신 바르나를 묻지 않았다. 불교도라는 카스트는 형성되지 않았다. 기원전 4세기 말경 마우리아 왕조를 방문한 메가스테네스는 불교를 비롯한 인도 종교의 특징으로 출가자 교단 내부에서의 평등성을 언급했다.[1]

3. 인도 불교의 역사

인도의 불교힌두교와 거의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변질되었고, 12세기 말 이슬람교의 박해로 쇠퇴하였다. 그러나 네팔 부근, 벵골 일부, 티베트와 가까운 지역 등에는 소수의 불교 신자가 남아있었다. 이웃 나라인 스리랑카에 불교가 남아있어 수백 년 후 불교 부활의 계기가 되었다.

인도는 불교 발상지이지만, 21세기에는 인도에서 불교 신앙이 거의 사라졌다. 13세기이슬람교 군대가 벵골 지방에 침공하여 불교 사원을 파괴하고 학살하여 멸망했다고도 하지만, 그 후에도 영세한 집단으로 인도 불교는 상당 기간 존속했으며, 무슬림 세력의 침공으로 완전히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카슈미르, 네팔, 동벵골 등에는 불교가 근근이 존속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스리랑카에서 상좌부 불교가 역수입되거나, 티베트 난민 수용으로 티베트 불교가 유입되었다. 또한, 일본산묘법사의 포교, 인도 대학에 대한 강사 파견 등 일본의 지원으로 2001년 국세 조사에서는 인도 불교도가 800만 명 전후로 집계되었다.

인도 불교는 13세기에 쇠퇴하기까지 각국 왕족의 원조로 융성과 쇠퇴를 반복했다.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다.

# 개교에서 교단 분열까지 - 약 100년

# 부파 불교의 성립 - 기원전 3세기경

# 대승 불교 운동의 흥륭 - 기원전 1세기경

# 밀교의 성립 - 7세기경

대승 불교가 성립한 후에도 부파 교단은 존속하며 교리를 발전시켰다. 밀교는 대승 불교에서 싹트기 시작하여 중관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즉, 이들은 서로 겹쳐서 공존했다고 볼 수 있다.

3. 1. 초기 불교 (원시 불교)

석가모니와 그의 직계 제자 시대, 또는 아소카 왕 시대까지를 초기 불교(원시 불교)라고 한다. 석존이 열반한 직후 라자가하(왕사성) 교외에서 500명의 비구가 모여 최초의 결집이 열렸다. 이때 경전이 정리되었으며, 마하카샤파가 좌장을 맡고, 아난다는 경을, 우팔리는 율을 담당했다고 전해진다.

마우리아 왕조 제3대 아소카 왕 시대에 불교가 크게 확산되었다. 아소카 왕은 불교를 널리 알리는 데 힘썼으나, 계율 해석 문제로 교단 내에 대립이 발생했다. 아소카 왕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장로들이 새로운 견해를 부정하면서 결국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되었다.(근본 분열) 불멸 후 약 100년 만의 일로, 이 계율에 대한 이견 때문에 바이샬리에서 700명의 비구를 모아 제2차 결집이 열렸다. 불멸 후 200년에는 아소카 왕 시대에 파탈리푸트라에서 1,000명의 비구를 모아 제3차 결집이 행해졌다.

3. 2. 부파 불교

인도불교는 근본 분열 이후에도 포교 활동이 활발했다. 서쪽의 간다라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더 나아가 중앙아시아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기원전 3세기 중엽, 스리랑카의 데바남피야 띠사 시대에 아소카 대왕의 왕자인 마힌다 비구가 불교를 전파하여 도시에 대정사가 세워졌다. 이후 이곳을 중심으로 상좌부가 번성하여 사회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1]

이후에도 교단의 분열은 계속되었다. 불멸 후 300년 초에 상좌부는 설일체유부와 설산부로 나뉘었고, 설일체유부에서 독자부, 독자부에서 법상부, 현주부, 정량부, 밀림산부가 분파되었다. 불멸 후 300년에는 설일체유부에서 흠광부가, 더 나아가 400년에는 설일체유부에서 경량부가 갈라졌다. 상좌부 계열 11부, 대중부 계열 9부로 나뉘었다고 전해지며, 이러한 분열 속에서 각 부파는 독자적인 성전을 갖게 되었다.[1]

3. 3. 대승 불교 운동의 흥륭

재가 신자들은 불탑(스투파)에 참배하며 불교를 받아들였다. 불탑에는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설명하는 레리프가 새겨져 있었고, 이를 설명하는 승려들이 등장하며 불탑 숭배가 확산되었다.[5]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를 담은 본생담(자타카)이 정리되면서 자비와 이타행이 강조되었다. 연등불, 미륵보살 등 다른 부처에 대한 숭배가 시작되었고, 참회, 권청, 회향 등의 새로운 의례가 등장하였다. 출가하지 않아도 중생을 구원할 수 있다는 대승의 개념이 등장하였다.

초기 대승경전으로 반야경, 유마경, 법화경, 무량수경 등이 편찬되었다. 용수의 이론을 체계화하여 중관파의 기초를 만들었다.[5]

중기 대승경전으로 승만경, 열반경, 해심밀경, 대승 아비달마경 등이 편찬되었다. 무착과 세친 형제는 유가행유식학파를 발전시켰다.[5]

후기 대승경전으로 능가경, 대승 밀엄경 등이 편찬되었으며, 현교 경전에서도 밀교의 맹아가 나타났다.[5]

3. 4. 밀교의 성립

인도 불교는 주변 종교의 영향을 받아 밀교화되었다. 브라만교와 비(非) 아리아 문명을 계승하여 힌두교와 같은 기반 위에 대승 불교의 일환으로 성립했다. 특히 주술·의례를 강조함으로써 당시 라이벌이었던 힌두교에 대항할 수 있는 대승 불교로 발전해 갔다. 이러한 밀교화는 주변의 토착 문화나 종교를 스스로의 것으로 받아들여 각지의 민족 종교와 일체화하면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대승 불교의 새로운 영역을 넓히는 면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7세기가 되면 『대일경』과 『금강정경』이 성립되었다.[3]

밀교화 과정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대두에 대항하기 위해, 불교 보호와 원수 항복을 기원하는 분노상(憤怒相)의 호법존(護法尊)이 잇따라 탄생했다. 힌두교 샥타파(Śākta)의 탄트라와 샥티(性力) 신앙의 영향도 받았다.[3]

힌두교를 본떠 만트라(진언, 다라니)를 외우거나, 다수의 신기한 불존(佛尊)이 예배 대상이 되거나, 비로자나불이나 금강살타, 법신 보현이 불법의 중심이 되거나, 탄트라의 영향으로 성적인 수행도 도입되었다. 후기 인도 불교와 힌두교와의 차별화가 모호해짐에 따라, 후기 인도 불교의 힌두교에 대한 열세는 확정되었다.[3]

4. 인도 불교와 사회의 교류

인도에서 불교는 사회와 깊은 관계를 맺으며 발전하고 쇠퇴했다.

기원전 2000년경 아리아인이 인도로 들어오면서 베다의 종교인 브라만교가 성립되었다. 기원전 1000년경에는 제례를 주관하는 브라만의 권력이 강해지자, 이에 대한 비판으로 우파니샤드 철학이 나타났다. 이는 베다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었지만, 더 나아가 베다 자체에서 벗어나려는 사문(슈라마나)들을 등장시켰다. 석가모니도 그중 한 명이었다. 사문들은 명상 등을 통해 해탈을 추구했으며, 이는 베다나 우파니샤드로부터도 해탈하려는 것이었다.[4]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은 불교를 보호하고 지원하여 인도 전역에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아소카 대왕은 인도를 통일한 후 자신이 저지른 살육을 후회하고 불교로 개종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로마 제국과의 교역으로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업에 성공한 부유층이 불교에 귀의하고 지원한 것도 불교 융성의 사회적 요인이었다.

이후 쿠샨 왕조, 사타바하나 왕조, 굽타 왕조, 바르다나 왕조, 팔라 왕조 등 북인도의 여러 왕조들이 불교를 보호했고, 간다라 미술굽타 미술로 불리는 불교 미술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굽타 왕조의 쿠마라굽타 1세는 날란다 승원을 웅장하게 개선하고 복원하여 수천 명의 학승을 모아 불교 교학뿐만 아니라 의학, 천문학, 수학 등을 연구하게 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 대학교 중 하나인 날란다 승원에서는 학문 연구가 진행되었고, 그 성과는 베트남, 중국, 한국, 일본, 티베트에 전해졌다.

바르다나 왕조 시대에는 현장이 날란다 승원에 유학하여 계현에게 유식을 배우고, 각지의 불교 유적지를 순례했다. 팔라 왕조의 다르마팔라 왕은 비크라마실라 대학을 창설했다. 티베트 자료에 따르면 5개의 대정사가 있었다고 한다. 비크라마실라 대학 출신의 승려 아티샤는 사캬파의 콩촉 기엘포, 카규파의 마르파와 함께 란 다르마 왕 이후 쇠퇴했던 티베트 불교 중흥에 기여했다.

후기 인도 불교는 베단타 학파, 미맘사 학파, 요가 학파 등 육파 철학의 현인을 배출한 힌두교의 융성과 탄트라의 유행의 영향을 받아 힌두교화되었다. 남인도에서는 사타바하나 왕조의 보호 아래 용수가 대승 불교 운동을 체계화했다고 전해지며, 실론, 카슈미르, 간다라, 중국 등에서 온 승려들을 위해 원을 세웠다. 팔라바 왕조의 달마는 중국에 선종을 전파했다.

1193년, 골 왕조의 쿠트부딘 아이바크 휘하 장군 무함마드 바흐티야르 할지가 이끄는 투르크 무슬림의 침략으로 날란다 승원과 비크라마실라 대학 등 불교 사찰이 파괴되었다.

침략자들이 약탈하고 불을 질러 파괴된 날란다 승원. 9층짜리 도서관이 3개월 동안 불탔다고 전해진다.
13세기 이후, 노예 왕조와 델리 술탄 왕조 등 이슬람 왕조의 성립으로 인도의 불교는 결정적으로 몰락했다.

인도 불교의 쇠퇴 후에도 미얀마에 가까운 벵골 지방에서는 상좌부 불교 집단이 소수 존속하고 있지만(예: 차크마족), 탄트라 불교와 후기 밀교는 네팔티베트로 전파되어 인도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4. 1. 베다와의 관계

기원전 2000년경, 아리아인이 인도로 들어오면서 베다의 종교 (브라만교)가 성립되었다. 기원전 1500년경에는 펀자브 지방으로 진출하여 국가의 기초를 다졌다. 기원전 1000년경, 제례를 주관하는 브라만 (사제)의 힘이 너무나 강력해지자, 제례 지상주의를 비판하며 우파니샤드 철학이 일어났다. 이는 브라만이 우위에 있던 정치적·제도적 힘을 재검토하고 본래의 베다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더 나아가 베다 자체에서 벗어나려는 사문(슈라마나, 출가 수행자)들을 등장시켰다(육사외도). 석가모니도 그중 한 명이었다. 당시 사문들은 명상 등의 수행을 통해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해탈을 추구했으며, 이는 베다나 우파니샤드로부터도 해탈하려는 것이었다.[4]

4. 2. 불교의 융성과 쇠퇴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은 불교를 보호하고 지원하여 불교가 인도 전역으로 확산되는데 기여했다. 아소카 대왕은 처음에는 불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인도를 통일한 후 자신이 저지른 살육을 후회하고 불교로 개종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로마 제국과의 교역으로 인도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업에 성공한 부유층이 불교에 귀의하고 지원한 것도 인도 불교 융성의 사회적 요인 중 하나였다.

이후 쿠샨 왕조, 사타바하나 왕조, 굽타 왕조, 바르다나 왕조, 팔라 왕조 등 북인도의 역대 왕조들은 불교를 보호했고, 간다라 미술굽타 미술로 불리는 불교 미술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굽타 왕조의 쿠마라굽타 1세는 날란다 승원을 웅장하게 개선하고 복원하여 수천 명의 학승을 모아 불교 교학뿐만 아니라 의학, 천문학, 수학 등을 연구하게 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 대학교 중 하나인 날란다 승원에서는 학문 연구가 진행되었고, 그 성과는 베트남, 중국, 한국, 일본, 티베트에 전해졌다.

바르다나 왕조 시대에는 현장이 날란다 승원에 유학하여 계현에게 유식을 배우고, 각지의 불교 유적지를 순례했다.

팔라 왕조의 다르마팔라 왕은 비크라마실라 대학을 창설했다. 티베트 자료에 따르면 5개의 대정사가 있었다고 한다. 비크라마실라 대학 출신의 승려 아티샤는 사캬파의 콩촉 기엘포, 카규파의 마르파와 함께 란 다르마 왕 이후 쇠퇴했던 티베트 불교 중흥에 기여했다.

후기 인도 불교는 베단타 학파, 미맘사 학파, 요가 학파 등 육파 철학의 현인을 배출한 힌두교의 융성과 탄트라의 유행의 영향을 받아 힌두교화되었다.

남인도에서는 사타바하나 왕조의 보호 아래 용수가 대승 불교 운동을 체계화했다고 전해지며, 실론, 카슈미르, 간다라, 중국 등에서 온 승려들을 위해 원을 세웠다. 이 지역(고도 하이데라바드 동쪽 70km)은 후에 나가르주나콘다 (언덕)라고 불린다.

팔라바 왕조달마는 중국에 선종을 전파했다.

1193년, 골 왕조의 쿠트부딘 아이바크 휘하 장군 무함마드 바흐티야르 할지가 이끄는 투르크 무슬림의 침략으로 날란다 승원과 비크라마실라 대학 등 불교 사찰이 파괴되었다. 13세기 이후, 노예 왕조와 델리 술탄 왕조 등 이슬람 왕조의 성립으로 인도의 불교는 결정적으로 몰락했다.

인도 불교의 쇠퇴 후에도 미얀마에 가까운 벵골 지방에서는 상좌부 불교 집단이 소수 존속하고 있지만(예: 차크마족), 탄트라 불교와 후기 밀교는 네팔티베트로 전파되어 인도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5. 현대 인도의 불교

19세기 말, 스리랑카의 승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마하보디 협회를 설립하고 불교 포교를 시작했다.[6] 벵골 지역에서도 불교 단체가 조직되었다. 달리트(불가촉천민)들은 아이요티 타스를 시작으로 카스트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로 개종하는 운동을 벌였다.[6] 1956년,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는 수십만 명의 달리트들과 함께 불교로 개종했다.[6] 마하라슈트라 주에는 달리트 출신 불교 신도가 많이 있다.[6]

다르마팔라(1864-1933)


럭나우의 암베드카르 기념 공원.


1959년, 달라이 라마 14세가 인도 다람살라로 망명하여 티베트 망명 정부를 세우고 불교 교육기관을 설립했다.[6] 인도 정부는 중인도 국경 분쟁 이후에도 달라이 라마 14세를 보호했다. 다람살라는 "리틀 라사"라고도 불리며, 티베트 불교 문화의 거점이 되었다.

인도는 달라이 라마 14세의 망명을 받아들였다.


인도 정부의 종교 통계에 따르면 인도 내 불교도의 비율은 2001년 기준 약 0.8% (약 800만 명)이다.[6] 사티아 나라얀 고엔카는 비파사나 명상을 전 세계에 보급했다.[7] 뭄바이에는 8000명 이상이 한 번에 명상할 수 있는 거대한 비파사나 사원이 세워졌다.

뭄바이에 세워진 거대한 비파사나 사원.

6. 인도 국내의 불교 유적

산치의 불교 유적


라지기르 왕사성 영취산


사헤트마헤트 기원정사


앙굴리말라의 불탑 유적/사위성


바이샬리 아난다의 불탑 유적


쿠시나가라 열반당


비크라마실라 승원의 유적


엘로라 석굴군의 불교 석굴

참조

[1] 웹사이트 Dalits who converted to Buddhism better off in literacy and well-being: Survey https://www.financia[...] 2017-07-02
[2] 웹사이트 Dalits Are Still Converting to Buddhism, but at a Dwindling Rate https://www.thequint[...] 2017-06-17
[3] 서적 大般涅槃経
[4] 문서 비마르코 안베드카르와 신불교운동
[5] 서적 相応部
[6] 웹사이트 인도 정부 통계 https://web.archive.[...]
[7] 웹사이트 http://zeenews.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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