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나카다 주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나카다 주지는 일본의 기독교 부흥사이자, 일본홀리니스교회(성결교)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1870년에 태어나 1939년에 사망했다. 그는 일본에서 성결 운동을 주도하며, 동양선교회를 설립하고, 이후 동양선교 홀리네스 교회, 일본 홀리네스 교회를 거쳐 기요메 교회를 창설했다. 나카다는 재림 운동과 일본인과 유대인이 같은 조상이라는 일유동조론을 주장하며, 일본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러일 전쟁 당시 종군 목사로 한국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파했고, 그의 성결 운동은 한국 개신교, 특히 성결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선교사 - 김창수 (1962년)
    재일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미국에서 의사 및 선교사로 활동한 김창수는 2024년 절과 신사 기름 테러 혐의로 구속되어 국민의힘 당적을 박탈당했다.
  • 일본의 복음주의자 - 후치다 미쓰오
    후치다 미쓰오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 해군 군인이자 항공모함 아카기의 비행대장으로서, 진주만 공격의 제1차 공격대 총지휘관으로 참여하여 기습 성공 암호를 발신하고 미드웨이 해전에도 참전했으며, 종전 후 기독교 전도사로 활동하며 회고록과 미드웨이 해전 기록을 출판하는 등 그의 행적에 대한 역사적 논쟁이 있다.
  • 일본의 복음주의자 - 니지마 조
    니지마 조는 일본의 교육자로서, 기독교 정신과 서구식 교육 이념을 바탕으로 도지샤 영학교를 설립하여 일본 근대 교육 발전에 기여한 도지샤 대학의 설립자이다.
나카다 주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중년 시절의 나카다
본명나카다 주지 (中田 重治)
출생1870년 10월 29일
출생지일본, 도쿄
사망1939년 9월 24일
사망지일본
묘지다마 묘원
직업홀리니스 운동 전도사
활동 기간미상
배우자미상
친척나카다 히사키치(형)
개인사
출생지무쓰국히로사키번(쓰가루)신테라마치 (현 아오모리현히로사키시기타신테라마치)
사망지도쿄부도쿄시요도바시구가시와기 (현 도쿄도신주쿠구기타신주쿠)
국적히로사키번 → 일본
직업교회 감독, 복음사 (목사), 대중전도자, 순회전도자, 종교가, 설교가, 번역가, 찬미가 작가, 신학교 교사, 신학교교장 (원장), 실업가, 저널리스트, 신학자, 일본-유대 동조론자
출신교도오쿠기주쿠, 도쿄에이와학교 (중퇴), 무디 성서학원
부모나카다 헤이사쿠(아버지), 나카다 치요(어머니)
배우자고다테 가쓰코(선처), 이마이 아야메(후처)
자녀나카다 슈고(차남), 오에 무쓰(장녀), 쓰지 게이(차녀), 아리마 리리(삼녀), 오카모토 도요(사녀)
친척나카다 히사키치(형), 오에 히로토(손자), 쓰지 노부미치(손자), 아리마 시키오(손자)

2. 생애

일본홀리니스교회(성결교)의 창립자 중 한 사람으로써 초대 감독이었으며, 일본 홀리니스 교회를 기존의 5대 교단(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 침례교, 루터교)에 필적하는 거대 교단으로 발전시킨 공로자이다. 1936년 일유동조론에 관한 신학적인 문제로 일본 홀리니스 교단이 분열되자, 잔류한 교역자들과 함께 기요메 교회를 창설하고 종신 감독이 되었다.

나카다 주지(왼쪽), 우치무라 간조(가운데), 기무라 세이마쓰(오른쪽)


우치무라 간조와 함께 예수 재림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성경에 계시된 유대 민족의 회복과 부흥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깨닫고 1930년대부터 유대 민족을 위한 기도와 봉사를 하였다.[47]

메이지, 다이쇼, 쇼와 초기에 걸쳐 기요메파(성결파)의 중심적인 지도자로서 활동하며 마쓰에 밴드와 함께 기요메파의 흐름을 만들었다. 이들은 전후 복음주의 형성의 중심적인 존재가 되었다. 웅변적인 설교와 대규모 전도 활동으로 일본의 무디라고도 불리는 리바이벌리스트이다.

'''생애 요약'''

기간내용
1870-1891어린 시절과 교육
1891-1896감리교 전도사
1896-1898미국 유학
1898-1905일본 귀국과 중앙복음전도관 설립
1905-1917동양선교회 시대
1917-1928동양선교회 홀리네스 교회 시대
1928-1936일본 홀리네스 교회 시대
1936-1939기요메 교회 시대와 말년


2. 1. 어린 시절과 교육 (1870-1891)

나카다 주지는 1870년 10월 27일, 무쓰국 히로사키(현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에서 쓰가루번의 하급 무사 (족경) 가문인 나카다 가문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22] 아버지 헤이사쿠는 나카다가 4살이 되기 전인 1874년 9월 10일에 뇌출혈로 사망했다.[22] 아버지 사망 후, 어머니(치요)는 채소 행상을 하며 세 아들을 키웠다.

1875년 무렵, 장남 히사키치가 히로사키의 감리교회 미션 스쿨인 도오기주쿠에 입학하면서 나카다 가문은 기독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877년에는 어머니가 말썽꾸러기였던 시게하루(나카다 주지)의 품행 교정을 위해, 형 히사키치가 다니는 도오기주쿠와 관련된 감리교회인 히로사키 공회에 데려가기 시작했다.

당시 감리교 지도자였던 혼다 요이치가 도오기주쿠 교장과 히로사키 공회 목사를 겸임하고 있었고, 나카다는 혼다의 교육을 받게 되었다. 혼다는 나카다에게 평생 큰 영향을 준 스승이 된다.[23] 교회에 다니면서 둘째 아들 사다사쿠가 먼저 기독교인이 되었으나 14세에 요절했고, 이를 계기로 어머니가 기독교에 입교한다.

1885년 무렵, 형 히사키치는 이시카와현가나자와시에 있는 보병 제7연대에 입대하여, 미국장로교 토마스 윈 선교사의 교회에 다니며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 해, 형은 가나자와시의 보병 제7연대 병영에서 돌아와 1년 정도 자택에서 나카다와 함께 지내면서, 14~15세의 나카다에게 군대식 스파르타 교육을 했다. 이로 인해 나카다는 더욱 고집불통(말썽꾸러기)이 되었다고 한다.[24]

1886년 무렵, 15세의 나카다는 히사키치의 영향으로 도오기주쿠 보통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라이토쿠 여학교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선원이 되기 위해 하코다테시로 가서 선원 시험을 보았으나 쓰가루 해협을 건너는 중 배멀미로 인해 낙제하여 선원의 꿈을 포기했다.

나카다는 훗날 1888년경 18세에 기데온 드레이퍼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회고했다.[25][26] 세례 후, 히로사키 공회 맹인 전도자 후지타 쿄 등과 피차별 부락 등에 전도 활동을 펼쳤고, 히로사키시 고초마치 부근에 강사소를 열었다. 이 무렵 나카다는 전도자가 될 소명을 받았다.

1888년 나카다는 전도자가 되기 위해 히로사키 교회에서 맡아둔 성경을 팔아 여비를 마련하여 상경, 도쿄 에이와 학교(아오야마가쿠인) 신학부 국어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은사인 혼다 요이치도 도쿄 에이와 학교로 초빙되었다.

나카다가 입학했을 당시 신학부장은 R. S. 맥클레이였다. J. 소퍼, G. 드레이퍼, 스펜서 등이 주요 교사였으나, 당시 기독교계 유행이었던 고등 비평적 성경 공부는 복음주의 신앙과 맞지 않아 학업에 열심이지 않았다.

재학 중 나카다는 학문보다는 전도자로서의 수련을 위해 유술에 힘썼다. 시부카와류 지도자에게 지도를 받고 도쿄 요쓰야의 시부카와류 도장에 다니며 초단 면허를 받았다. 훗날 침례교 지도자가 되는 지바 유고로도 함께 유술에 매진한 동료였다.

나카다는 구마가야 메도디스트 교회 목사였던 형 히사요시의 교회를 매주 주말 도보로 방문하여 목회를 도왔다. 기독 청년회(현, YMCA) 활동에도 힘써 1891년경에는 중진이 되어 벳쇼 우메노스케 등과 학생 전도에 힘썼다. 마츠무라 카이세키의 토요 강단을 듣는 등 연설 공부도 했다.

1890년 혼다 요이치가 미국 드루 신학교에서 귀국하여 제2대 원장에 취임한다. 그 무렵, 나카다는 화족 영애와의 연애 소동을 일으켰다. 영애의 집에 후계자가 없어 나카다가 신학교를 그만두고 제국 대학에 진학하여 외교관이 되는 조건으로 사위 제안을 받았으나, 전도자를 포기할 수 없었던 나카다는 야반도주를 시도했다. 그러나 영애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동반 자살까지 생각했으나 동창생에게 저지당하고 결국 파국을 맞았다.[27] 실의에 빠진 나카다는 혼다에게 퇴학을 신청했으나 설득당하여 학교에 남았다.

이후 나카다는 1891년 졸업 시험에서 수강 과목 절반이 낙제점을 받아 퇴학 처분을 받게 된다. 원장 혼다 요이치는 나카다를 구제하려 했으나, 교사회의 의견을 존중하여 퇴학 처분을 내렸다.

2. 2. 감리교 전도사 시절 (1891-1896)



나카다는 도쿄 에이와 갓코를 졸업하지 못했지만, 혼다 요이치의 도움으로 감리교회의 전도사 임시 면허를 받았다.[23] 이후 홋카이도 야쿠모정 (오시마 종합진흥국후타미군 야쿠모정)에 파견되었고, 오타루, 에토로후 섬에서 전도했다. 에토로후 섬에서 안수례를 받아 감리교회 정식 교직이 되었다.

1894년 2월 23일, 히로사키 교회 목사 야마시카 모토지로의 소개로, 히로사키 교회 전도사 고다테 가쓰코와 결혼했다.[28] 결혼 후 첫 아이인 장남 사나이는 생후 1개월 만에 풍토병으로 사망했고, 가쓰코 또한 중증 풍토병에 걸려 에토로후 섬으로 철수했다. 이 일로 나카다는 심각한 신앙적 위기를 겪었다.

히로사키에서 요양 후, 아키타현오다테시 오다테 교회의 4대 목사가 되었다. 마츠무라 히코키치라는 신자와 함께 전도했고, 이 곳에서 차남이 태어나 우고국에서 유래한 우고로 이름지었다.

2. 3. 미국 유학 시절 (1896-1898)

R・A・토레이


1896년(메이지 29년) 12월, 나카다 주지는 은사인 혼다 요이치에게 배웅을 받으며 요코하마 항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1896년 연말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하자 감리교 감독인 메리먼 해리스가 마중을 나왔다. 해리스는 나카다에게 전도를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나카다는 이를 거절하고 시카고로 향했다. 시카고에 도착한 후에는 무디 성경학교의 단기 코스에서 공부했다. 나카다는 무디 성경학교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학교 청소와 음식점 급사 일을 했다.

무디 성경학교에는 당시 무디 성경학교 교장이었던 R・A・토레이가 있었다. 토레이 등은 봉사를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 성령의 세례가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나카다는 영적인 상태가 좋지 않아, 성화를 구하며 단식하거나 철야 기도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광신적"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27]

2. 4. 일본 귀국과 중앙복음전도관 설립 (1898-1905)

1898년 9월, 나카다는 영국에서 바클레이 파웰 벅스턴을 만나고 영국 성결 운동 지도자들과 만난 후 일본으로 돌아왔다.[4] 1899년에는 감리교 순회 전도사로 임명되었지만, 교파를 넘어 설교했다. 그는 시카고에서 텔레그래퍼 선교단을 결성한 카우먼과 킬번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또한 같은 해 일본 성결 저널을 창간했다.

1901년 2월 1일, 찰스 E. 카우먼, 레테 B. 카우먼이 필그림 홀리네스 교회의 선교사로 일본에 부임했다. 같은 해 4월, 나카다와 카우먼 부부는 간다의 진보초에 폐교된 학교 건물을 빌려 '중앙복음전도관'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전도를 시작했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밤 전도회를 개최하고, 매일 오후 성별회를 열어 홀리네스 운동을 지도했다.[32] 중앙전도관 건물을 사용하여 4월 1일에 성서학교(후의 동양선교회 성서학원)를 개교했다.

1902년 10월에는 야마가타현다테오카정 (현재 무라야마시 다테오카)에 최초의 지방 전도관을 설립했다. 나카다는 카우만과 함께 시찰을 갔고, 마을 교외의 산에 올라 축복이 쏟아지도록 기도했다.[33] 1903년 2월에는 모가미군 신조정(현재 신조시)、야치(현재 가호쿠정 야치)에 전도관을 설립했다.[34]

1902년 8월, 어니스트 킬본 부부가 나카다의 사역에 합류하여 자급 전도를 모토로 활동했다. 1903년 5월, 시미즈 슌조가 신조의 복음 전도관으로 전임할 때, 카우만과 함께 신조로 가서 셋집을 찾아다녔다. 불교 승려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큰 셋집을 찾을 수 있었다.[35] 이 교회에서 신조 중학교 학생인 구쓰자와 고지(시미즈 고지)가 회심했다.[36]

이후 나카다와 카우만은 다테오카, 야치(야마가타현 니시무라야마군 가호쿠정), 신조, 카네야마(야마가타현 모가미군 가네야마정)를 거쳐 이틀 뒤 인나이 고개(아키타현 인나이 오가치 고개)를 폭우 속에서 걸어서 넘어 인나이정(현 아키타현유자와시)으로 갔다. 그 후 유자와(현 아키타현 유자와시), 요코테(현 아키타현 요코테시), 구로자와지리, 모리오카를 여행했다.

1903년 8월에는 오미야(사이타마시 오미야구)에서 수양회를 열어 카우만, 킬본 외에 가와베 사다키치, 다케다 코마키치, 아키야마 요시고로, 그리고 나카다의 친형 나카다 히사요시를 초청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나고야, 오미하치만, 교토, 오사카, 오카야마, 마쓰에로 순회 여행을 하고, 12월에는 로렌스 부부와 함께 가고시마현 가노야를 방문했다. 귀로에는 오비(현 미야자키현니치난시), 미야자키시를 지나 해로를 이용해 고베시와 친형 히사요시와 어머니 치요가 있는 나고야에 기항하여 도쿄로 돌아왔다.

1904년 7월경, 나카다는 폐농양을 앓아 가나가와현지가사키와 하야마다카하시 고레키요 별장에서 요양했다. 4월경 회복하여, 요양 체험담을 "쾌복 사례"라는 글로 기관지 "불꽃의 혀"에 발표했다.

같은 해 2월 10일,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오야마 이와오 원수가 파견군 사령관이 되어, 수 개의 군단이 한반도에 출동했다. 조선에 주둔한 구로키 다메모토 장군의 군단을 위해, 기독교 각 교파가 연합하여 전시 전도부를 설치하고 전지를 위문하게 되었다.

기독교청년회동맹 위원장 혼다 요이치는 복음동맹회 회장 오자키 히로미치와 함께, 기독교의 공동 봉사에 대한 격문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종군 포교사 또는 군대 위문사 파견, 군인 출입처 전도, 군인용 소책자 배포 등이었다.

혼다 요이치는 감리교의 일본 연회가 임명한 한국 전도위원회 위원장을 겸하여 한반도로 가게 되었고, 나카다를 동행자로 선택했다. 1904년 5월 14일, 고베항에서 지쿠고가와마루를 타고 출발하여, 5월 16일에 부산에 상륙했다. 목포, 인천을 거쳐 18일에 경성에 도착, 5월 26일에 보병 제24연대 제1대대에서 혼다와 함께 설교했다. 6월 10일에는 설사와 치통을 참아가며 황주에 도착했고, 14일에는 평양에 갔다.

나카다는 혼다와 헤어져 의주로 가서 압록강을 바라보며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다. 7월 3일, 인천에서 경성으로 돌아온 후 경기도, 충청도의 여러 교회를 방문하고, 경성으로 돌아와 19일에 인천에서 승선, 7월 21일에 부산항을 경유하여 28일에 도쿄로 돌아갔다.[37]

1904년에는 동아시아 전체, 대한민국중국을 포함하는 더 넓은 지역에 초점을 맞춰 단체 이름을 동양선교회(東洋宣敎會, Toyo senkyokai)로 변경했다. OMS의 지도력 문제를 놓고 카우먼과 나카다 간에 갈등이 생겨 1911년 분열되었으며, 카우먼은 OMS를 이끌고 나카다는 새로운 일본성교단(日本聖敎團, Nihon seikyodan)의 수장이 되었다. 이후 화해했지만, 그 관계에는 지속적인 손상이 있었다.

1904년~1905년 러일 전쟁 중, 나카다는 구로키 다메모토 장군 휘하에서 군목으로 복무했다.(Stark 481) 나카다는 만주에서 싸우는 일본군을 위해 사역할 수 있도록 일본 정부의 허가를 받았다. 그는 한국을 지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설교했다. 특히 정빈과 김상준이라는 두 명의 한국인이 나카다의 "성화의 영광스러운 경험"에 대한 설교에 깊이 감동받았다. "거룩한 삶을 위한 투쟁에 대해 고민하던 두 한국인은 영적인 지도를 받을 곳이 없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나카다를 알고 도쿄의 OMS 성경 훈련원을 방문한 한국인 의사를 만났다. 그는 그들에게 학교를 방문하라고 권유했다. 그들이 찾고 있던 경험에 대해 더 들을 수 있는 곳이라고 판단한 정빈과 김상준은 1904년 어느 날 예상치 못하게 도쿄에 나타났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카우먼과 킬번은 1907년 한국에서 OMS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7][8]

진보초의 성서학교 남자 기숙사와 아와지초의 여자 기숙사가 좁아지자, 나카다와 카우만은 교외에 넓은 부지를 찾게 되었다. 도요타마군 요도바시정 가시와기에 3천 평의 토지를 찾아 구입, 1904년 8월 25일에는 신축 성서학원 도면이 '불의 혀'에 발표되었고, 10월 31일에는 성서학교를 요도바시정 가시와기로 이전했다. 정식 명칭은 성서학원, 통칭 가시와기 성서학원이라고 불렸다. 1905년 2월 10일부터 11일까지 간다 미토시로초의 기독청년회관(YMCA)에서 '성서적 순복음 선전 대회'가 열렸고, 나카다는 사사오 테츠사부로와 미타니 타네키치 등과 함께 설교했다. 나카다는 '그리스도의 대본영'이라는 제목으로 1시간 반 동안 설교하고 '은혜의 자리'를 열었다.[38]

1904년 9월 4일, 형 히사요시가 병으로 쓰러졌다. 나카다는 히사요시를 찾아갔고, 13일에 장티푸스로 진단받아 고세이칸에 입원했을 때에도 곁을 지켰으나, 히사요시는 입원 직후 사망했다.

1905년 2월 15일, 카우먼 부부가 다시 일본에 방문하자, 3월 하순에 나카다는 카우먼 부부와 함께 나고야와 이즈 지방을 순회 전도했다. 4월 부활절에는 셋째 딸 릴리가 태어났다. 6월에는 피로를 느낀 나카다가 카우먼과 함께 닛코에서 요양했다.

1905년 7월 26일, 아사쿠사 고마가타 다리 근처에 고마가타 전도관을 세우고, 7월부터 요시치 유타로가 들어가 전도했다. 9월, 아사쿠사에서 길거리 전도를 하던 중 요시치 등이 폭도에게 습격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 기독교회에서 충고 위원이 나카다를 방문하여 요시치 등의 전도 방식에 대해 충고했다. 나카다는 이에 대해 '다른 방법이 또 뭐가 있냐'고 반론했다.

같은 해 9월, 후카가와에서 목재상 가와바타 상점을 개업했던 가와바타 쿄고로가 친구 타케야 벤조의 권유로 다니게 되었고, 이듬해 4월에 세례를 받았다.[39]

2. 5. 동양선교회 시대 (1905-1917)

1905년 3월, 나카다는 찰스 카우만과 함께 법인 조직 설립을 위한 협의를 시작하여, 11월에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 OMS)를 설립했다.[40] 나카다와 사사오 테츠사부로, 카우만 부부, 킬본 다섯 명이 간부로서 운영했다. 카우만 부부와 킬본이 미국과의 교섭 및 회계를 담당하고, 사사오는 성서학원 원장을 담당했으며, 나카다는 전도 방면을 지도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06년 초, 나카다는 영적으로 매우 불안함을 느꼈다. 그래서 구미(유럽과 미국)의 크리스천들과 교류하며 갈증을 해소하고자 세계 일주 여행을 계획했다. 영국으로 건너가 스코틀랜드의 성결 설교자 오스왈드 챔버스와 친구가 되었다. 나카다는 영국 제도 전역에서 설교했는데, 1904–1905년 웨일스 부흥 운동의 최근 개종자들에게 미국 퀘이커 전도사 찰스 스토커와 함께 성결을 설교했으며, 챔버스와 함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전역에서도 설교했다. 영국에서 거의 1년을 보낸 후, 1906년 11월 6일 챔버스와 함께 ''SS 발틱''호를 타고 미국으로 출발했다. 대서양을 10일 동안 횡단한 후, 나카다와 챔버스는 동부 해안에서 5주 동안 설교한 다음, 오하이오주 신시내티로 이동하여 하나님의 성경 학교에서 크리스마스 성결 컨벤션에서 설교했다. 나카다는 자주 설교하면서 미국 전역을 여행했다. 그는 1907년 6월에 신시내티로 돌아와 또 다른 10일간의 성결 컨벤션에서 설교했다. 1907년 7월 10일 나카다와 챔버스는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SS 시나노 마루''호를 타고 출발하여 1907년 7월 27일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1911년 10월 25일, 나카다는 기관지 『불꽃의 혀』에 동양선교회에서 분리하여, 새롭게 일본성교단을 설립할 것을 선언했다. 이것이 성교단 사건이다. 동양선교회의 운영 주도권을 둘러싼 나카다와 미국인들의 충돌로 결별하게 된 것이다.

사건 경위는 나카다 측과 카우만 측으로 나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중립을 유지했다. 분리를 발표한 후에도 협상은 계속되었다. 양측은 각각 분리 독립하는 것을 이해했지만, 나카다 측은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한 달 만에 화해하고, 전처럼 협력 체제로 돌아갔다. 사사오는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며 양측의 협상을 중재했다. 1911년 12월의 『불꽃의 혀』에서 나카다는 메이지 44년은 큰 시련의 해였다고 회고했다.

1911년 3월 20일, 나카다의 아내 가쓰코가 사망하여 그의 외아들 우고를 남겼다. 5개월 후 나카다는 아야메와 재혼했다.

2. 6. 동양선교회 홀리네스 교회 시대 (1917-1928)

1917년 10월 25일부터 성서 학원에서 동양 선교 대회가 열려, 동양 선교회에서 독립한 새로운 교단을 설립했다. 10월 28일, 나카다는 동양 선교회의 이사였지만, 신 교단의 감독으로 취임하여 감독 안수식을 거행했다.[43] 그는 "작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10월 31일에는 신 교회 임명식을 거행하여, 동양 선교회 호리네스 교회[44]가 설립되었다. 이날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400주년 기념일이었다.[45] 호리네스 교회 설립과 함께, 동양 선교회 총리 찰스 카우만은 나카다에게 대부분의 책임을 양도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 해에 기관지 『불꽃의 혀』를 『성결의 벗』으로 바꾸었다. 이 잡지는 나카다가 주필을 맡았으며, 처음에는 월간이었으나, 후에 주간이 되었다.

1918년 1월 2일부터 5일까지 간다 교회에서 신년 성회가 열렸고, 나카다는 매일 아침 재림 문제에 대해 설교했다. 이것이 재림 운동의 전초전이 되었다.

가시와기의 성서학원 근처에 있던 우치무라 간조의 집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나카다는 성서학원 학생들을 동원하여 소화 활동을 도왔다. 우치무라가 나카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러 오면서 둘은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나카다는 홀리니스의 사중 복음 중 하나로 재림을 표방했고, 우치무라 역시 딸 루츠의 죽음을 통해 재림 신앙을 갖게 되었다. 신학적 차이는 있었지만, 재림을 설파하는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1918년 1월 6일, 간다의 기독교 청년회관(YMCA)에서 열린 제1회 집회를 통해 우치무라 간조, 키무라 세이마츠, 나카다 주지 등이 재림 운동을 시작하여 1년 반 동안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당시 일본 기독교계를 휩쓴 운동이었다.

5월 26일, 요코하마 청년회관에서 열린 봄 예언 대회의 마지막 집회에서 나카다는 '해 뜨는 나라에서 떠오르는 천사'라는 제목으로 재림에서 일본 국민의 사명에 대해 설파했다. 이어서 히라이데 케이이치와 우치무라 간조가 강연했다.

요코하마 강연 후, 나카다는 시모노세키에서 신라환에 탑승하여 28일 부산에 도착, 3일간 전도 집회를 가졌다. 이후 경성으로 이동하여 동양선교회의 성서학원에서 강연했다. 푸순에서 6일간 집회를 가진 후, 다롄으로 가서 재림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일본 기독교회에서 설교했다. 23일에는 하르빈환을 타고 27일에 귀국했다.

나카다가 한반도와 만주를 여행하는 동안, 혼고 교회에서는 주최자 에비나 단조 등에 의해 재림 운동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감리교의 이마이 사부로와 성공회의 스기우라 테이지로 등이 반대론을 펼쳤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7월 26일부터 31일까지 하코네에서 수양회가 개최되었다. 나카다, 우치무라 간조, 아키야마 요시고로, 쿠루마다 아키츠구, 히라이데 케이이치 등이 재림에 대해 강연했다.

이후 나카다는 우고 및 카나이 타메이치로와 함께 마츠시마의 수양회 강사로 나섰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야마무로 군페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고를 데리고 오사카로 가서는 기독교 동지 성교회의, 재림을 위한 성결을 설파하는 단체의 강연을 했다.

1919년에도 재림 운동은 계속되었으나, 6월에 나카다 등이 다른 교회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청년회관으로부터 사용을 거절당했다.

재림 사상이 고조되던 1919년 11월 17일 밤, 아키야마 요시고로, 츠게 후치진, 오하라 쥬조, 스즈키 센노스케 등이 중심이 되어 요도바시 교회에서 철야 기도회를 열었다. 이것이 제1차 다이쇼 중기의 홀리네스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신슈 이다의 교회 집회를 위해 기도했고, 전원이 격렬한 기쁨과 감동에 휩싸였다. 이들은 이다에서 4일간 기도회를 열어 부흥을 일으켰고, 11월 23일 도쿄로 돌아와 요도바시 교회에서 집회를 이어갔다.

간사이 지방에 출장 중이던 나카다 쥬지는 곧 도쿄로 돌아와 집회를 지도했다. 11월 28일에는 성별회가 열렸고, 11월 30일의 예배는 오순절적인 열광적인 광경이 되었다. 이 열광은 이듬해에도 이어져, 1920년 3월 26일부터 30일까지 도쿄 성서 학원에서 아키야마 요시고로, 미마키 세키타로, 나카다 쥬지 등이 발기인이 되어 초교파 전국 부흥 집회가 열렸다.[46]

이 부흥 운동의 결과, 홀리네스 교회는 급격히 성장했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부흥 대회가 열렸고, 부흥의 분위기는 홀리네스 교회의 표준적인 스타일이 되었다.

2. 7. 일본 홀리네스 교회 시대 (1928-1936)

中田重治|나카다 주지일본어는 1928년 일본 홀리네스 교회가 동양선교회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데 기여했다.[47] 1930년에는 도쿄 신학교에서 시작된 부흥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이끌었다.[47]

1933년, 나카다 주지는 일유동조론을 주장하며, 유대 민족의 회복을 위한 기도를 강조했다. 이는 우치무라 간조와 함께 예수 재림 운동을 전개하며 성경에 계시된 유대 민족의 회복과 부흥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936년, 나카다 주지는 자신의 신학적 견해에 반대하는 5명의 교수들과 갈등을 겪었고, 이는 결국 일본 홀리네스 교회의 분열로 이어졌다.[47]

2. 8. 기요메 교회 시대와 말년 (1936-1939)

1936년 10월, 나카다 주지 목사의 일유동조론에 관한 신학적인 문제로 일본홀리니스교회가 분열되었다.[47] 이후 나카다 주지는 잔류한 교역자들과 함께 기요메 교회를 창설하고, 그 교회의 종신 감독이 되었다.[47]

1939년 9월 14일, 나카다 주지의 두 번째 부인 아야메가 자궁암으로 사망했다.[47] 열흘 후인 1939년 9월 24일, 나카다 주지는 68세의 나이로 장 결핵으로 사망했다.[47]

3. 신학 및 사상

나카다 주지는 일본홀리니스교회(성결교)의 초대 감독으로, 일본홀리니스교회를 기존 5대 교단(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 침례교, 루터교)에 필적하는 거대 교단으로 발전시켰다. 1936년 일유동조론에 관한 신학적인 문제로 일본 홀리니스 교단이 분열되자, 잔류한 교역자들과 함께 기요메 교회를 창설하고 종신 감독이 되었다.

메이지, 다이쇼, 쇼와 초기에 걸쳐 기요메파(성결파)의 중심 지도자로 활동하며, 마쓰에 밴드와 함께 기요메파의 흐름을 만들었다. 이들은 전후 복음주의 형성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유창한 설교와 대규모 전도활동으로 일본의 무디라고 불리며 부흥사로 인정받았다.[12]

나카다는 오다테에서 전도하며 육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껴 성령 세례를 구했다. 무디를 사모하여 도미, 1896년 요코하마 항에서 출발하여 연말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했다. 메리먼 해리스의 전도 요청을 거절하고 시카고로 가 무디 성경학교 단기 코스에서 공부했다. 학비 마련을 위해 학교 청소와 음식점 급사 일을 했다.

무디 성경학교 교장이었던 R・A・토레이는 봉사를 위해 성령의 능력, 성령의 세례가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나카다는 성화를 구하며 단식하거나 철야 기도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광신적"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무교회주의 창시자 우치무라 간조와 함께 예수 재림 운동을 전개하고, 1930년대부터 유대민족을 위한 기도와 봉사를 시작하였다.

3. 1. 성결 운동

나카다 주지는 존 웨슬리의 성결 신학에 영향을 받아 성령 세례를 통한 성화를 강조했다.[12] 그는 성결을 개인의 영적 성숙뿐만 아니라, 사회 개혁의 원동력으로 보았다. 초기에는 사회적 약자와 소외 계층을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F. B. 마이어의 설교를 통해 '현세 중에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듣고, '그리스도인의 완전'과 '죄 없는 완전'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또한, 홀리네스 신학자 A.M. 힐스를 만나 저서 『청결과 힘』을 받았다. 이 책은 찰스 호지 등의 설에 반박하면서, 성화의 정의와 성화를 받는 방법을 논한 책이다. 이 책을 읽고 성결의 필요성을 통감했으며, 존 웨슬리의 저서에도 영향을 받았다.

1897년 11월 22일 인도의 타밀족 전도자 V.D. 데이비드의 집회에 참석하여 성화 체험을 하였다. 그 직후, 방으로 돌아와 기도했을 때 완전한 깨끗함의 확신을 받았다.

1919년 11월 말, 복음 전파와 기도의 결과로 요도바시 성결교회에서 부흥이 시작되었다. 이는 도쿄의 다른 교회로 확산되었다. 나카다에 따르면, 비기독교인의 개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 교인들의 질적인 성장
  • 헌금 증가
  • 부흥회에 참여한 다른 교파(대부분 목사)의 사람들과의 영적인 연합
  • 전도의 정신 고취

3. 2. 재림 운동

1918년 1월 6일, 나카다 주지는 우치무라 간조와 함께 '''재림 운동'''을 시작했다.[9] 일본 전역에서 집회가 열렸으며 최대 2,000명까지 참석했다. 우치무라와 나카다는 재림을 설교하는 데 대한 열정을 공유하며 잠시 연합했지만, 둘 사이에는 상당한 신학적 차이가 있었다. 신정통주의의 영향을 받은 우치무라는 문자적인 천년왕국에 대한 생각과 그리스도의 재림 날짜를 계산하는 것을 거부했다. 나카다는 일본인과 유대인이 공통 조상에서 유래했으며 유대인의 구원이 일본인의 구원으로 이어진다는 신념을 가졌고, 이로 인해 우치무라는 1920년에 재림 운동에서 떠났다.[9] 나카다 주지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며, 재림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재림 신앙을 통해 일본 사회의 부흥을 이끌고자 했다.

3. 3. 일유동조론 (일본-유대 공통 조상론)

나카다 주지는 일본홀리니스교회(성결교) 창립자 중 한 명으로, 일유동조론을 주장했다. 일유동조론은 일본인과 유대인이 같은 조상을 가졌다는 이론이다.[15][16] 그는 이스라엘 회복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이 있다고 믿었으며, 유대인을 위한 기도와 봉사를 강조했다.[14]

1931년 일본 북부 해안 마쓰시마에서 열린 야외 집회에서 처음으로 이스라엘 회복에 대해 설교하면서, 일본 신자들에게 이스라엘 회복과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것을 간청했다.[14]

나카다는 1933년 저서 『성서 속의 일본』에서 "이스라엘 혈통이 일본인의 혈관에 섞여 흐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으며, 이 점에 대해 우리는 역사적 증거가 부족하지 않다"라고 언급했다.(44) 그는 일본인이 셈족, 함족, 야벳족의 혼합물이며, 유대인은 의 후손, 히타이트의 후손, 아이누야벳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인이 전 세계를 향한 특별한 사명을 띠고 선택된 민족임에 틀림없다"고 강조했다.(44-45)

나카다는 윌리엄 유진 블랙스톤과 니콜라스 맥클라우드의 저술에 영향을 받았다.[13][15][16] 특히 맥클라우드는 일본 민족이 잃어버린 열 지파에서 기원했다는 증거들을 설명하면서, 성경과 성스러운 역사를 자신의 해석에 따라 고대 일본 역사를 재구성하고 설명하기 위해 정교한 방식으로 노력했다.[15][16]

1932년 11월, 요도바시 교회에서 "성경으로 본 일본"이라는 성서 해석 연속 강연을 열었다.[50] 그 강연에서 나카다는 교직은 개인 전도나 교회 형성을 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유대 민족 회복을 위한 기도가 우선 사항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나카다의 일유동조론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나카다는 일본 군국주의 지지자가 되었으며, 일본 군대가 하나님의 목적에 봉사하고 있다고 믿었다.(Goodman 53) 그는 "유대인을 일본인의 정치적, 군사적, 영적 구원을 보장할 신비로운 구세주로 여겼다."(Goodman 39)

나카다의 강조점이 개인의 영혼 구원으로부터 집단적, 국가 구원으로 이동하면서, 그의 추종자들 중 일부가 소외되었다."(굿맨 57) 그의 새로운 비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지도자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1936년 10월에 교회는 나카다가 이끄는 기요메 키요키와 반대파가 이끄는 니혼 세이쿄카이로 분열되었다.(굿맨 57)

4. 한국과의 관계

1904년 러일 전쟁 당시 나카다 주지는 종군 목사로 한국을 방문하여, 5월부터 7월까지 부산, 목포, 인천, 경성, 황주, 평양, 의주 등지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37] 압록강에서는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기도 했다.[37] 이후 경기도, 충청도의 여러 교회를 방문하고 경성으로 돌아와 귀국했다.[37]

나카다 주지의 성결 운동은 한국 개신교, 특히 성결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일유동조론은 한국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5. 평가

나카다 주지는 일본홀리니스교회(성결교)의 창립자 중 한 명이자 초대 감독으로, 일본 홀리니스 교회를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 침례교, 루터교 등 기존 5대 교단에 필적하는 거대 교단으로 발전시킨 공로가 있다. 유창한 설교와 대규모 전도 활동으로 일본의 드와이트 무디라고 불리며 부흥사로 인정받았다.[9]

그러나 1936년 10월, 나카다 주지 목사의 일유동조론에 관한 신학적 문제로 일본 홀리니스 교단은 분열되었다.[9] 나카다는 자신의 신념을 가르치기를 거부한 훈련소 교사 5명을 해고했고, 이들은 그를 파시즘 혐의로 고발했다. 그 결과, 교회는 나카다가 이끄는 기요메 키요키와 반대파가 이끄는 니혼 세이쿄카이(둘 다 영어로 성결교회로 번역됨)로 분열되었다.

나카다는 1930년대부터 유대 민족을 위한 기도와 봉사를 시작했는데, 그의 추종자들 중 일부는 "나카다가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일본 민족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성결교회 신자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했으며, 많은 이들이 공립학교가 주관하는 신사 방문에 자녀를 참여시키지 않았다. 이로 인해 총 131명의 성결교 목사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었고, 교단은 이들이 어려움을 겪는 동안 이들을 외면했다.

6. 참고 문헌


  • 나카다 주지, 日本人とユダヤ人|니혼진토 유다야진일본어 [일본인과 유대인]. 오카모토 후미코 편집. 동양선교회 호리네스교회 출판부, 1935 (https://dl.ndl.go.jp/pid/1439820 스캔).
  • 나카다 주지. ''알 수 없는 국가''. B. 키다 번역. 도쿄: 동양선교회, 일본 호리네스 교회, 출판부, 1933.
  • 나카다 주지. ''성서 속의 일본''. 동양선교회, 일본 호리네스 교회, 출판부, 1933.
  • 나카다 주지 역. 全き愛|마다키 아이일본어 [Perfect Love] J.A. 우드 저. 동양선교회 호리네스교회 출판부, 1931.
  • 베이즈, 다니엘 H. "나카다 주지" in ''기독교 선교의 인물 사전'', 486. 제럴드 H. 앤더슨 편집. 그랜드 래피즈, MI: 에어드만스, 1999.
  • 번디, 데이비드. "OMS 인터내셔널", 711. in ''세계 선교의 복음주의 사전''. A. 스콧 모로 편집. 그랜드 래피즈, MI: 베이커 아카데믹, 2000.
  • 조정남. "OMS-성결교회의 신학적 뿌리와 강조점." [http://www.godislove.net/wwwb/data/wesleytheology17/Theolgical_Roots_of_OMS(ft).doc 온라인], 한국 성결교회에 초점.
  • 최미생. "새 창조의 비전으로서의 성경적 성결과 종말론: 김상준과 나카다 주지의 이야기에서". ''성결신학저널'' 1 [2004]: 322–44. https://web.archive.org/web/20081121124652/http://www.oxford-institute.org/meetings/2002/workinggroups2002.html 옥스퍼드-연구소.org
  • 코우만, 레티 B. ''찰스 E. 코우만: 선교사, 전사''. 동양선교회, 1928.
  • 커닝햄, 플로이드 T. "나사렛 성결교회의 선교 정책과 국가 지도력: 일본, 1905-1965." ''웨슬리 신학 저널'' 28. https://web.archive.org/web/20080509183411/http://wesley.nnu.edu/wesleyan_theology/theojrnl/26-30/28-5.htm 온라인
  • 디커, 허먼. ''극동의 방랑자와 정착민: 중국과 일본에서의 유대인 생활 1세기''. 트웨인 출판사, 1962.
  • 두웰, 웨슬리 L. ''성결한 삶의 영웅들''. 그랜드 래피즈, MI: 존더반, 2002.
  • 에드워즈, 프레드 E. ''신앙 선교의 역할: 브라질 사례 연구''. 사우스 파사데나, CA: 윌리엄 캐리 도서관, 1971.
  • 엥겔, 타마르. "고베의 유대인". (1995년 여름) [http://www-cs-students.stanford.edu/~tamar/Kobe/Kobe.html]
  • 에르니, 에드워드와 에스더 에르니. ''하나님 외에는 보장 없음: OMS 인터내셔널 설립자들의 이야기''. 그린우드, IN: 동양선교회, 1969.
  • 굿먼, 데이비드 G.과 미야자와 마사노리. ''일본인의 정신 속의 유대인: 문화적 고정관념의 역사와 용도''. 뉴욕: 프리 프레스, 1995.
  • 헤버트, 데이비드 G. (2008). 마오리 브라스 밴드 전통에서의 음악 문화 전이와 정체성.
  • 가토 츠네아키(加藤常昭). 中田重治|나카다 주지일본어. 日本キリスト教団出版局|니혼 키리스토쿄단 슛판쿄쿠일본어, 도쿄 : 일본기독교단출판국, 2003.
  • 킬번, 에드윈 W. ''세기 너머의 다리. 제1권: 일본, 한국, 중국''. 그린우드, IN: OMS, 2001.
  • 김성호. ''대한예수교 성결교회 역사''. 대한예수교 성결교회 역사 편찬 위원회 편집. 허춘회, 허혜경 번역 (서울: 생명의 샘, 1998).
  • 고가 스미오. ''세기적 유산: 북미 일본 기독교 선교의 역사 1877-1977; 제1권''. 노바트, 1977.
  • 코슈먼, J. 빅터. "일본인의 정신 속의 유대인: 문화적 고정관념의 역사와 용도"에 대한 서평.
  • 크라르, 루이스. 일본의 기괴한 유대인 현상: 일본 예외주의에 대한 새로운 시각." 포춘 (1995년 3월 20일). https://money.cnn.com/magazines/fortune/fortune_archive/1995/03/20/224105/index.htm
  • 이건삼. ''신도 민족주의에 대한 기독교의 대결: 일본에서 기독교와 신도의 갈등에 대한 역사적, 비판적 연구''.
  • 맥캐슬랜드, 데이비드. ''오스왈드 챔버스: 하나님께 버려지다: 나의 가장 큰 것을 저술한 작가의 삶''.
  • 맥가브란, 도널드, 편집. ''교회 성장 게시판: 두 번째 통합 권, 1969년 9월부터 1975년 7월까지''.
  • 마르시엘, 도리스와 헤이워드 지역 역사 협회. ''샌로렌조: 미국의 이미지''. 아르카디아 출판, 206.
  • 머윈, 존 제닝스. "일본의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1901-1983". 미발표 박사 논문. 풀러 신학교, 1983.
  • 머윈, 존 제닝스. ''일본의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1901-1983''. 앤아버, MI : 유니버시티 마이크로필름 인터내셔널, 1990.
  • 미나가와, 존 H. "일본 선교학 서문(7): 일본에 온 기독교 [제5의 물결] 유러-아메리카 기독교의 도래(1) 1859 ~ 1945의 지속." https://web.archive.org/web/20110722120711/http://www.christ-ch.or.jp/5_torinashi/back_number/2003/2003.10.eng.pdf
  • 미즈키, 존. ''브라질의 일본 교회 성장''. 사우스 파사데나, CA: 윌리엄 캐리 도서관, 1978.
  • 멀린스, 마크 R. ''일본에서 만들어진 기독교: 토착 운동 연구''.
  • 멀린스, 마크 R. "전시 일본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주의: 기독교 종말론의 전복성에 대한 에세이." ''일본 종교 연구 저널'' 21:2/3 (1994):261-280. https://web.archive.org/web/20030323072822/http://www.nanzan-u.ac.jp/SHUBUNKEN/publications/jjrs/pdf/422.pdf 온라인
  • 올리버, 레빌로 P. https://web.archive.org/web/20080602044706/http://karws.gso.uri.edu/jfk/the_critics/oliver/The_yellow_peril.html "황색 위험." 1983.
  • 랜들, 이안 M. "기도의 오순절 연맹: 초교파 영국 웨슬리-성결 운동." 웨슬리 신학 저널 33:1. https://web.archive.org/web/20060910115632/http://wesley.nnu.edu/wesleyan_theology/theojrnl/31-35/33-1-10.htm
  • 셔릴, 마이클 J. "나카다 주지(1870-1939)." in ''교회사 뉴 웨스트민스터 사전'', 로버트 베네데토 편집.
  • 스토커, 찰스 H. ''성령과 함께 세계를 두 바퀴 돌다: 또는 선교 현장의 인상과 확신''.
  • 스타크, 길버트 리틀. ''길버트 리틀 스타크의 편지, 1907년 7월 23일-1908년 3월 12일''. http://dlxs.library.cornell.edu/cgi/t/text/text-idx?c=sea;cc=sea;view=toc;subview=short;idno=sea024 온라인판
  • 토마스, 폴 웨스트팔. 순례의 날들: 순례 성결 교회의 역사.
  • 우드, 로버트 D. ''이 필멸의 손으로: 동양선교회의 이야기: 처음 50년.'' 1983.
  • 야마모리 데쓰나오. ''일본의 교회 성장: 8개 교파의 발전에 대한 연구''.
  • 요네다 이사무(米田勇). 中田重治伝: 伝記中田重治|나카다 주지 덴: 덴키 나카다 주지일본어''. [나카다 주지의 전기] 도쿄: 나카다 주지 덴 켄코 카이, 1959.
  • 요네다 유타카와 다카야마 케이키. 昭和の修教弾圧|쇼와노 슈쿄 단아쓰일본어.

7. 같이 보기

참조

[1] 웹사이트 October 29: Juji Nakada got the Oriental Mission Society going https://archive.toda[...] 2005-12-01
[2] 웹사이트 Timeline | OMS International https://web.archive.[...] 2008-07-14
[3] 웹사이트 Home https://web.archive.[...] 2018-01-17
[4]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s://web.archive.[...] 2008-07-14
[5] 웹사이트 MinistryWatch - Summary Report https://web.archive.[...] 2008-07-14
[6] 웹사이트 October 29: Juji Nakada got the Oriental Mission Society going https://archive.toda[...] 2008-07-14
[7] 웹사이트 History of OMS in South Korea | OMS International https://web.archive.[...] 2008-07-15
[8] 웹사이트 OMS United Kingdom | History https://web.archive.[...] 2008-07-14
[9] 웹사이트 Lee 130, 159 https://web.archive.[...] 2008-07-14
[10] 웹사이트 Church History - SADAICHI KUZUHARA AND HIS HOLINESS EXPERIENCE http://kuzuharalibra[...]
[11] 웹사이트 SAN LORENZO JAPANESE CHRISTIAN CHURCH -- HISTORY https://web.archive.[...] 2008-07-24
[12] 간행물 Review of Jews in the Japanese Mind: The History and Uses of a Cultural Stereotype 1997-01-17
[13] 문서 http://www.tents-of-[...]
[14] 문서 http://www.tents-of-[...]
[15] 웹사이트 The Myth of the Ten Lost Tribes https://www.bh.org.i[...] The Museum of the Jewish People at Beit Hatfutsot
[16] 웹사이트 Marty Shoub - 70 Years Of Prayer https://web.archive.[...] 2008-07-24
[17] 웹사이트 Ratana, Tahupotiki Wiremu http://www.teara.gov[...]
[18] 웹사이트 T.W.Ratana and Bishop Juji Nakada 1927-1928 http://www.theratana[...]
[19] 웹사이트 Story: Te Haahi Rātana – the Rātana Church http://www.teara.gov[...]
[20] 문서 「しげはる」としている文献もあるが、英語文献および自筆サインはJuji Nakadaと書いてある。米田勇著『中田重治傳』裏表紙の写真を参照。
[21] 문서 山口幸子『ホーリネスの流れ』183-184ページ
[22] 문서 中田の本家は、[[高山右近]]の頃に奥州に流刑にされた[[切支丹]]の末裔であると言われる。重治の曽祖父は[[弘前藩]]の[[納戸係]]をしていたが、部下の不祥事の責任をとって足軽になり、祖父の[[中田蔵吉|蔵吉]]の時代には[[米屋]]になった。そして、[[中田兵作|兵作]]の時代に足軽に戻ることが出来た。『中田重治伝』
[23] 문서 米田勇『中田重治伝』206ページ、本多庸一の死去に際して、「六、七歳の頃より親しく教育せられし」と雑誌に述べている。
[24] 문서 米田勇『中田重治伝』17ページ、久吉は重治をものさしでなぐり、ものさしを壊すほどであった。または、重治に手紙を持たせて、墓場を往復させたりした。後に、重治がこの方式で次男の羽後を鍛錬しようとしたら逆効果を招いたと羽後が後に語っている。
[25] 문서 『日本の説教4(中田重治)』188ページ
[26] 문서 米田勇によると、中田重治が[[弘前教会]]で洗礼を受けたのは、(16歳-17歳)[[1886年]]-[[1887年]]頃と推定されている。「中田重治伝」24-25ページ、当時は、本多庸一と珍田捨巳が主に洗礼式を執り行っていた。宣教師のギデオン・ドレーパーが洗礼式を行ったのは、1887年6月2日の一回限りである。その日に中田重治も洗礼を受けたと推定される。しかし、弘前教会五十年略史には、その日の受洗者名の中には、婦人五名の名前の他三名となっており、中田重治は含まれていない。米田勇によると中田が洗礼を受けた時期を特定することは不可能である。
[27] 문서 『日本の説教4(中田重治)』150ページ
[28] 문서 『中田重治伝』によると、「かつ子は、激しい性格の中田によく仕え、温順な中にも芯の強い、女性であった。」と評されている。
[29] 문서 「中田重治伝」59ページ
[30] 문서 「中田重治伝」91ページ、笹森は[[山田寅之助]]と共にメソジスト派でウェスレーの基督者完全論を唱えた聖化の恩寵を重んじた人物であった。
[31] 문서 1884年に創立されたが、第二次世界大戦中に疎開により活動が中断され、1941年に日本基督教団銀座教会と合同した。『日本キリスト教歴史大事典』442頁
[32] 문서 新キリスト教辞典、いのちのことば社、1991,955ページ「中田重治」[[千代崎秀雄]]
[33] 문서 『中田重治伝』118ページ、中田とカウマンは山形県が福音にもっとも縁遠いと考えたので、最初の地方伝道館に楯岡を選んだといわれる。
[34] 문서 『日本における福音派の歴史』中村敏著、いのちのことば社、2000,78ページ、さらに、栃木県[[宇都宮市]]、[[横浜市]]、[[伊豆]]などに地方の福音伝道館を設立した
[35] 문서 『中田重治伝』119ページ
[36] 서적 日本キリスト教歴史大事典
[37] 서적 中田重治伝
[38] 서적 中田重治伝
[39] 서적 日本キリスト教歴史大事典
[40] 서적 中田重治伝
[41] 서적 中田重治伝
[42] 서적 中田重治伝
[43] 서적 中田重治伝
[44] 서적 中田重治め伝
[45] 서적 中田重治伝
[46] 문서
[47] 문서
[48] 서적 中田重治伝
[49] 문서
[50] 서적 中田重治伝
[51] 서적 日本における福音派の歴史
[52] 서적 中田重治(日本の説教4)
[53] 서적 中田重治傳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