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원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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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만 원주민은 대만 섬의 원래 거주민으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하며, 언어적, 유전적으로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마다가스카르 등지의 민족과 관련이 있다. 약 6천 년 전부터 신석기 문화를 이루었으며, 기원전 3,0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필리핀으로 이주하며 오스트로네시아 민족의 확산에 기여했다. 삼국 시대부터 중국과의 교류가 있었으며, 네덜란드, 스페인, 청나라, 일본의 식민 지배를 거치면서 문화적 변화를 겪었다. 20세기 후반부터 민주화 운동과 함께 권리 회복 운동이 시작되었고, 1994년에는 '원주민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현재 16개 민족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정치적 대표성, 경제적 불평등, 토지 문제, 문화 보존 등 다양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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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원주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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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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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약 600,303명 (대만 인구의 3%) (비지위 및 미승인 원주민 제외), 중국 본토 3,479명 (2020년 자료) |
거주 지역 | 대만 및 난위섬 |
언어 | 포르모사어군 (아타얄어, 부눈어, 아미스어, 파이완어 등) 또는 야미어 중국어 방언 (대만 표준 중국어, 대만어, 대만 객가어) 일본어 (이란 크리올 일본어) |
종교 | 대다수 기독교, 소수 애니미즘, 불교 |
관련 집단 | 대만인, 기타 오스트로네시아인 |
민족 | |
국가적으로 인정된 민족 | 아미스족 아타얄족 부눈족 사로아족 카발란족 카나카나부족 파이완족 푸유마족 루카이족 사이시야트족 사키자야족 세디크족 타오족 (야미족) 타오족 초우족 트루쿠족 (타로코족) |
지역적으로 인정된 민족 | 마카타오족 시라야족 타이보안족 |
미승인 민족 | 바부자족 바사이족 호안야족 (아리쿤족/로아족) 케타갈란족 루이랑족 파제흐족/카샤부족 파포라족 카우카우트족 타오카스족 트로비아완족 |
관련 주제 |
2. 역사
대만 원주민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하며,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마다가스카르, 오세아니아 등 다른 오스트로네시아 민족과 언어적, 유전적 연관성을 가진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약 6천 년 전부터 타이완 섬에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기원과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03년(만력 31년)에 저술된 『동번기』에서는 대만 원주민을 "동번"이라고 불렀다. 한족 인구가 증가한 18세기부터 19세기 무렵, 한화가 진행된 원주민은 "평포번", "숙번"으로, 한화가 진행되지 않은 원주민은 "생번", "고산번"으로 불렸다.
1871년(메이지 4년 / 동치 10년), 미야코·야에야마의 공납선이 대만 남동 해안에 표착하여 54명이 대만 원주민에게 살해되었다 (미야코지마 주민 조난 사건). 일본 정부는 청나라에 항의했지만, "대만 원주민은 화외의 백성(국가 통치가 미치지 않는 자)"이라고 답변했기 때문에 대만 출병을 실시했고, 대만 원주민은 일본군에게 공격받아 항복했다.
1895년(메이지 28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으로부터 대만을 할양받아 영유를 시작했다. 일본은 청나라 시대의 분류를 바탕으로 원주민을 "평포족"과 "고산족"으로 분류했다. 1903년(메이지 36년) 인류관 사건에서 일본 제국에 속하는 민족으로서 고산족 여성이 전시되었다. 1907년 북포 사건, 1930년 무사 사건 등 원주민들의 항일 운동이 발생했다. 1935년(쇼와 10년), 치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요청에 의해 고산족은 "타카사고족"으로 개칭되었다. 일본어는 언어가 다른 부족 간의 공통어로 기능했다.
태평양 전쟁 중, 고사고족 젊은이들은 고사고 의용대로서 남태평양 밀림전에 참가하여 큰 공헌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의용대 참가자가 일본 국적을 잃은 것을 이유로 일본 정부는 장애 연금 등을 지급하지 않았다.[114]
일본을 대신하여 대만을 통치한 중화민국 정부는 "타카사고족"을 "고산족", "산지 동포", "산지인"으로 호칭을 변경하고, 한족과의 동화 정책을 추진했다. 1980년대 이후, 원주민들의 요구로 고산족 등의 호칭은 "원주민"으로 개정되었다.
1996년(민국 85년) 원주민족위원회가 설치되었고, 2005년(민국 94년) "원주민족 기본법"이 제정되었으며, 국영 원주민족 텔레비전이 개국했다. 2008년(민국 97년), 대만 정부는 세데크족을 제14번째 대만 원주민족으로 인정했다. 같은 해 원주민 인구는 488,773명으로, 대만 총인구의 2.1%를 차지했다.[115]
2016년, 차이잉원은 과거 불평등한 원주민 취급에 대해 중화민국 총통으로서 처음 사죄했다.[116]
2022년, 시라야족의 완수견이 제기한 소송에 의해 원주민을 정의하는 "원주민 신분법" 일부가 위헌 판결을 받았다.[117]
대만 중화민국 헌법에서는 공식 표기를 "'''원주민'''" 또는 "'''원주민족'''(原住民族중국어, Indigenous Taiwanese / Taiwanese aborigine영어)"으로 정하고 있으며, 그 특별한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대만 표준중국어로 "선주민"이라고 표기하면 "이미 멸망한 민족"이라는 의미가 생기기 때문에 금지되어 있다.[113]
2. 1. 초기 역사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발상지인 대만섬에는 약 6천 년 전부터 신석기 문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만 원주민은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등에 널리 퍼져 있는 오스트로네시아계 민족들과 언어적, 유전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기원전 3,000년에서 1,500년 경, 대만 원주민의 일부가 바다를 통해 루손섬으로 이주하면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확산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필리핀 전역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 도서 지역, 오세아니아, 마다가스카르까지 퍼져 나갔다.[26][27][28][29]삼국 시대 중국의 사료에는 대만 원주민으로 추정되는 집단에 관한 기록이 최초로 등장한다. 서기 230년, 오나라 황제 손권의 명을 받은 위온과 제갈직은 1만 군대를 이끌고 이주(夷洲)라는 섬을 방문했다. 이들은 병사 대부분이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사망하는 등 고생 끝에 수천 명의 원주민을 잡아다 손권에게 바쳤으나, 손권은 병력을 많이 희생한 대가에 비해 수가 너무 적다고 판단하여 위온과 제갈직을 교수형에 처했다.[40] 수나라와 원나라 시대의 기록에는 "유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이 이름은 나중에 대만 북동쪽의 류큐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쓰인다.[41]
2. 2. 외세의 도래와 식민 통치
17세기부터 대만 원주민들은 섬이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식민 정권에 의해 더 넓은 세계 경제에 편입되면서 광범위한 문화적 변화를 겪었다.[38][39] 17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는 한족들이 대만으로 이주하면서 평야 지역을 중심으로 원주민들의 한족화가 진행되었다. 한족들은 평지에 살던 원주민을 '평포번'(平埔蕃), 한족화되지 않은 고산 지역의 원주민을 '생번'(生蕃) 또는 '고산번'(高山蕃)이라 불렀다.[135]일본 통치 시대에 일본인들은 평포번을 '헤이호족'(平埔族), 고산번을 '타카사고족'(高砂族)이라고 부르며, 언어, 문화, 풍속에 따라 부족을 분류했다. 현재 대만 원주민 분류는 이 시기의 연구를 기초로 한다.[135]
원주민들은 식민 권력에 저항하기도 했지만, 경제적 이득이나 사회적 관습과 금기로부터의 자유를 얻기 위해 식민 권력에 동조하기도 했다.[38][39] 특히 평원 원주민들은 외부 문화와의 접촉이 더 많았고, 각 정권의 "문명화 사업"으로 인해 문화 동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19]
일본과 중국 국민당 정부는 사회 진화론과 문화주의에 기반한 근대주의 정책을 통해 교육, 족보 관습 등을 민족 동화 방향으로 이끌었다.[19]
대만 한족 호클로 공동체 내에서도 문화적 차이는 원주민과의 혼합 정도를 나타내는데, 북부 대만의 순수한 호클로 한족은 원주민과의 혼합이 거의 없고, 이는 남부 대만의 호클로 한족으로 제한된다.[19]
네덜란드 통치 시대 (1624년 ~ 1662년)네덜란드는 대만 남부를 중심으로 식민 통치를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원주민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고, 서구식 교육을 도입하려 했다.
동녕 왕국 시대 (1662년 ~ 1683년)정성공은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동녕 왕국을 세웠다. 정성공은 원주민들에게 사면을 제안했고, 싱칸 원주민들은 정성공에게 투항하여 중국인을 위해 일했다.[46] 정성공의 아들 정경은 원주민들에게 교사를 파견하여 물품을 제공하고 농업 기술을 가르쳤으며, 중국어, 문자, 유교 경전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다.[47] 정씨는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토지를 개간했고, 이는 원주민 부족의 희생으로 이어져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청나라 통치 시대 (1683년 ~ 1895년)청나라는 대만을 점차적으로 청에 편입시켰다.[48] 청군은 대만의 인구 밀도가 높은 서부 평야 지역을 통치했고, 이 시기에 대만 한족의 수가 증가하고, 사회 불안이 지속되었으며, 서부 평원 원주민이 거의 완전히 한족의 관습에 동화되었다.[48]
청나라는 원주민을 동화된 원주민(''숙번(熟番)'')과 비동화된 원주민(''생번(生番)'')으로 분류했다.[48] ''숙번''은 세금을 납부하고, 부역을 수행하며, 어느 정도 한족 문화를 수용한 원주민이었다. 청나라는 원주민 영토에서 분리하는 정책을 시행했지만, 정착민의 침입은 계속되었고, 정착민은 원주민과 결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48]
19세기 초, 청나라의 격리 정책이 유지되었지만, 원주민 영토에 대한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지방 관료들은 원주민 영토의 식민화를 옹호했다.
일본 통치 시대 (1895년 ~ 1945년)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만을 할양받아 영유를 시작했다. 일본은 원주민을 평포족과 고산족으로 분류했다. 원주민들은 항일 운동의 게릴라가 되기도 했고, 북포 사건, 무사 사건 등이 발생했다. 일본어는 언어가 다른 부족 간의 공통어로 기능했다.
태평양 전쟁 중, 고사고족의 젊은이는 고사고 의용대로서 남태평양의 밀림전에 참가하여 큰 공헌을 했다.
일본은 대만 원주민의 머리 사냥 풍습인 "출초"를 범죄 행위로 엄격하게 금지했다. 그러나 원주민 봉기 진압 시, 봉기를 일으킨 원주민에 대한 출초를 용인하는 대가로 다른 원주민에게 협력을 요구하기도 했다.
중화민국 통치 시대 (1945년 ~ 현재)중화민국 정부는 "고사고족"을 "고산족", "산지 동포", "산지인"으로 호칭을 변경하고, 한족과의 동화 정책을 추진했다. 원주민들의 요구로 1980년대 이후, "원주민"으로 개정되었다.
1996년에는 원주민족위원회가 설치되었고, 2005년에는 "원주민족 기본법"이 제정되었다. 2016년, 차이잉원은 과거의 불평등한 원주민 취급에 대해 중화민국 총통으로서 처음 사죄했다.[116]
2. 3. 중화민국 시대와 민주화 운동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대만은 중화민국의 통치하에 놓였다. 그러나 중화민국 정부는 대만 원주민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고 동화 정책을 지속했다.[135] 고유 작명법이 있었으나, 중화민국 정부에 의해 중국식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중화민국 정부는 고산족을 '산지족'(山地族) 또는 '산포'(山胞)로 불렀다.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함께 대만 원주민의 권리 회복 운동이 시작되었다. 1984년 12월, 진보적인 대만 기독교 장로회 (PCT)의 지원을 받은 원주민 정치 활동가 그룹이 대만 원주민 연합(ATA, ''yuan chuan hui'')을 결성하여 대만 원주민 운동이 시작되었다. 1988년, ATA는 토지 반환 운동의 일환으로 국제 연합 원주민 실무 그룹에 대표를 처음 파견했다.
1994년, 중화민국은 원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이들의 정식 명칭을 산지족에서 '원주민족'으로 개칭하였다. 1996년 행정원 원주민위원회가 설치되었고, 2005년에는 원주민족 기본법이 제정되어 원주민의 자치권, 문화권, 교육권 등이 보장되었다. 1998년부터 대만 학교의 공식 교육 과정은 원주민에 대한 더 빈번하고 긍정적인 언급을 포함하도록 변경되었다. 중앙 정부는 공식 문서에 원주민 이름의 로마자 표기를 허용하는 조치를 취해, 한자 이름을 강요하던 정책을 상쇄했다.
2016년, 차이잉원은 과거의 불평등한 원주민 취급에 대해 중화민국 총통으로서 처음 사죄했다.[116]
2017년 2월, 케타갈란 대로 원주민 시위가 전통적인 영토로서의 토지에 대한 더 많은 공식적인 인정을 요구하며 시작되었다.
2022년, 시라야족의 완수견이 제기한 소송에 의해 원주민을 정의하는 "원주민 신분법"의 일부가 위헌 판결을 받았다.[117]
2. 4. 더불어민주당 집권과 원주민 정책
차이잉원 총통은 2016년 중화민국 총통으로서 처음으로 과거 정부의 불평등한 원주민 정책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116] 원주민 역사 정의 및 전환 정의 위원회를 설치하여 과거사 진상 규명과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더불어민주당은 원주민 자치권 확대, 경제적 자립 지원, 문화 및 언어 보존, 교육 기회 확대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3. 민족
현재 중화민국 정부가 공인한 대만 원주민은 16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크게 고산족과 평포족으로 나뉜다. 대만 원주민의 언어는 모두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하지만, 부족마다 언어, 사회 조직, 문화가 각각 다르다.
대만에서는 원주민족위원회(原住民族委員會)에서 공인한 부족에게 원주민 집단으로서의 공식 지위와 특정한 법적 혜택 및 권리를 부여하고 있다. 2014년 기준 16개의 민족 집단이 공인되어 있으며, 카바란족과 사키자야족은 평야 원주민 집단 중 유일하게 포함되어 있다.
일본 통치 시대에는 일본인 학자들이 언어, 문화, 풍속에 따라 부족을 분류했으며, 현재의 대만 원주민 분류는 이 시기의 연구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는 원주민 스스로의 구분과 항상 일치하지는 않았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정부와 대중 담론에서 확고한 범주가 되어 사실상의 구분이 되었다. 이는 오늘날 타이완의 중화민국 내에서 정치적 담론을 형성하고, 원주민에 대한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청 제국 통치 시기에는 한족 문화에 대한 동화 정도에 따라 원주민을 '생번'(生番)과 '숙번'(熟番)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생번'은 청나라 통치에 복종하지 않은 사람들을, '숙번'은 머리세를 지불하며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을 의미했다. 이러한 구분은 한족 문화 규범을 채택하면 누구든지 문명화될 수 있다는 당시의 지배적인 생각을 반영했다.
일본 통치 시대에는 '평포'(平埔)와 '가오산'(高山)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으며, 이는 '문명화된'과 '비문명화된'이라는 칭호와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었다. 중국 국민당 통치 초기에는 '산지 동포'(山地同胞)와 '평지 동포'(平地同胞)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으나, 이후 일본식 용어 사용을 채택했다.
최근 인류학 분야의 변화와 정부 목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용되는 '평포'와 '가오산'이라는 명칭은 청나라가 한족 문화에 대한 원주민의 동화를 반영하기 위해 사용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인정된 원주민은 모두 '가오산'으로 간주되지만, 이 구분은 엄격하게 지리적 위치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중화민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16개의 주요 그룹을 '부족'으로 나열하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16개 그룹이 근대 이전 시대부터 존재했던 사회적 실체, 정치적 집단 또는 자칭 동맹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합의가 있다.
3. 1. 고산족


고산족(高山族)은 한족들이 대만 원주민을 지칭하던 용어 중 하나로, 주로 산지에 거주하며 각 민족마다 고유한 언어, 문화, 사회 조직을 유지하고 있는 원주민들을 말한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고산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허난성, 푸젠성 등 중국 중남부에 거주하는 고산족의 인구는 3,479명(2020년 기준)이다.[135]
17세기 ~ 19세기 사이에 한족들이 대만으로 이주하면서 평야 지역을 시작으로 원주민들의 한족화가 진행되었다. 한족들은 평지에 살던 원주민을 '평포번'(平埔蕃), 한족화되지 않은 고산 지역의 원주민을 '생번'(生蕃) 또는 '고산번'(高山蕃)이라 부르며 구별했다. 일본의 식민 통치 때 일본인들은 평포번을 '헤이호족'(平埔族), 고산번을 '타카사고족'(高砂族)이라고 불렀다.
중화민국 정부는 고산족을 '산지족'(山地族) 또는 '산포'(山胞)로 부르다가 1994년에 원주민들의 민족명 개정 요구에 따라 이들의 정식 명칭을 산지족에서 '원주민족'으로 개칭하였다.
현재 원주민족위원회(原住民族委員會)에서 공인한 부족은 16개이며, 주요 부족은 다음과 같다.
- 아미족 (Amis, 阿美族, 아메이족)
- 아타얄족 (Atayal, 泰雅族, 타이야족)
- 부눈족 (Bunun, 布農族, 부눙족)
- 카나카나부족 (Kanakanavu, 卡那卡那富族, 카나카나푸족)
- 카바란족 (Kavalan, 噶瑪蘭族, 가마란족)
- 파이완족 (Paiwan, 排灣族, 파이완족)
- 푸유마족 (Puyuma, 卑南族, 베이난족)
- 루카이족 (Rukai, 魯凱族, 루카이족)
- 사아로아족 (Saaora, 拉阿魯哇族, 라아루와족)
- 사이시얏족 (Saisiyat, 賽夏族, 싸이샤족)
- 사키자야족 (Sakizaya, 撒奇萊雅族, 싸치라이야족)
- 세디크족 (Seediq, 賽德克族, 싸이더커족)
- 타로코족 (Taroko, 太魯閣族, 타이루거족)
- 사오족 (Thao, 邵族, 사오족)
- 초우족 (Tsou, 鄒族, 쩌우족)
- 야미족 (Yami, 達悟族, 다우족)
1930년대 무사 사건 이후 일본은 원주민 정책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그들을 '타카사고족'(高砂族)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그룹에는 아타얄, 부눈, 쩌우, 사이시얏, 파이완, 푸유마, 아미이 포함되었고, 이후 타오(야미)와 루카이가 추가되어 총 9개의 인정된 민족이 되었다.
아타얄 | 사이시얏 | 부눈 | 쩌우 | 루카이 | 파이완 | 푸유마 | 아미 | 야미 | 합계 |
---|---|---|---|---|---|---|---|---|---|
27,871 | 770 | 16,007 | 2,325 | 13,242 | 21,067 | 6,407 | 32,783 | 1,487 | 121,950 |
3. 2. 평포족
대만 원주민에는 가오산족 이외에 평포족이 있다. 그러나 평포족은 일찍이 한화(漢化)되어 한족과의 통혼으로 한족계 본성인과 섞여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중화민국 정부는 평포족을 원주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7]평포족은 주로 대만 섬의 평지에 살면서 한족과 함께 거주한 결과 한족과의 동화가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대만에 사는 한족의 다수는 평포족의 피를 이어받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여러 요인들이 평원 원주민의 동화를 장려했다.[22] 한족 성씨를 갖는 것은 원주민들에게 유교적 가치를 심어주는 데 필요한 단계였다.[23] 유교적 가치는 완전한 인격체로 인정받고 유교적인 청나라 국가 내에서 활동하는 데 필요했다. 한족 사회에서 성씨는 황제(Huang Di)와 한족 신화의 삼황오제에 대한 부계 조상 연결의 가장 두드러진 정당화 표지로 여겨졌다. 따라서 한족 성씨를 소유하는 것은 이전의 비한족 정체성이나 혼혈 배경에도 불구하고 원주민에게 광범위한 경제적, 사회적 혜택을 부여할 수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평원 원주민들이 팬(Fan, 번, "야만인")으로 지정된 신분을 수정하여 한족 성씨 판(潘)을 채택했다.
많은 경우, 이주한 한족의 대규모 집단은 공동 성씨 아래 뭉쳐 형제단을 형성했다. 형제단은 방어의 한 형태로 사용되었으며, 각 혈맹 형제는 어려움에 처한 형제를 돕도록 혈맹으로 묶여 있었다. 형제단은 그들의 이름을 족보에 연결하여 혈연 관계보다는 이름을 기반으로 계보를 만들고, 중국에서 흔히 발견되는 친족 조직을 대신했다.
이러한 세력 중 어느 세력이 다른 세력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한 가지 설명을 다른 설명보다 선호하는 것은 때때로 주어진 정치적 관점에 근거한다. 이러한 역학 관계의 누적된 효과는 20세기 초에 평원 원주민들이 거의 완전히 더 큰 한족 집단에 동화되었고, 각 포르모사어에서 중국어로 거의 완전한 언어 변화를 겪었다는 것이다.
1990년대까지 원주민의 전통적인 성씨 사용에 대한 법적 장벽이 지속되었고, 문화적 장벽도 여전히 남아 있다. 원주민들은 1946년부터 시작된 원주민 이름 사용 금지가 마침내 해제된 1995년까지 공식 신분증에 자신들의 전통적인 원주민 이름을 사용할 수 없었다.[24]
2005년 이후, 타이난시, 2013년 화롄 현 푸리 진, 2016년 핑둥 현을 포함한 일부 지방 정부가 타이완 평원 원주민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시라야 | 타이반 | 마카타오 | 미지정 | 합계 | |
---|---|---|---|---|---|
타이난 | 11,830 | – | – | – | 11,830 |
가오슝 | 107 | 129 | – | 237 | 473 |
핑둥 | – | – | 1,803 | 205 | 2,008 |
푸리, 화롄 | – | – | – | 100 | 100 |
합계 | 11,937 | 129 | 1,803 | 542 | 14,411 |
평포족 중 본래의 언어와 습속을 보존·계승하고 있으며, "원주민"으로 공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사오족과 카바란족이다.
- 케타갈란족
- 쿠론족 (케타갈란의 일파)
- 바사이족 (케타갈란의 일파)
- 타오카스족
- 파제흐족
- 파포라족
- 바부자족
- 호안야족
- (호안야의 일파)
- (호안야의 일파)
그 외에는 케타갈란족, 타오카스족, 파제흐족, 시라야족, 마카타오족의 후예 일부가 독자적인 민족 의식과 습속을 기억하고 있다 (단, 언어를 보존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외에는 현재 민족으로서는 거의 소멸되었다.
4. 문화
대만 원주민은 각 민족마다 고유한 전통, 의례, 예술, 생활 양식을 유지하며 다양한 문화적 특징을 보인다.
2005년, 행정원의 지원을 받아 원주민 커뮤니티의 관심사를 다루는 전일제 원주민 라디오 방송국 "호-히-얀"이 개국했다.[104] 이는 아메이, 푸르-두르, 사밍아드(푸유마), 디팡, A-린(아미), 다이 아이링(파이완), 랜디 웬(아타얄)과 같은 원주민 예술가들이 국제적인 팝스타가 되면서 나타난 "원주민 팝의 새로운 물결" 이후의 일이었다.[104] 록 음악가 장첸위에는 아미 출신이다. 음악은 원주민들에게 자긍심과 문화적 소유 의식을 심어주었다.[104]
엔이그마가 노래 "Return to Innocence"에 아미족의 창가를 사용하면서 소유권 문제가 불거졌는데, 이 곡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의 공식 주제가로 선정되었다. 디팡과 그의 아내 이가이를 포함한 아미족 부부는 엔이그마의 음반 회사를 상대로 소송에서 승소했고, 음반 회사는 전통 노래의 마스터 녹음을 보관하고 있던 프랑스 박물관에 로열티를 지불했지만, 엔이그마 프로젝트를 알지 못했던 원작자들은 보상을 받지 못했다.[104]
풀리마 아트 페스티벌(藝術節, Pulima Arts Festival)은 2012년부터 격년으로 개최되는 행사로, 대만의 원주민 예술과 문화를 선보이며 대만에서 가장 큰 원주민 현대 미술 행사이다. ''Pulima''는 "창의적이거나 고도로 숙련된 사람"을 의미하는 파이완어 단어이다. 에든버러 아트 페스티벌과 프랑스의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영감을 받아 풀리마는 원주민 문화 재단의 지원을 받는다. 대만 및 해외의 댄서와 음악가들이 이 페스티벌에 참여하며, 격년으로 11월과 2월 사이에 개최되고, 풀리마 아트 상이라는 상을 수여한다.[107] 2018년 페스티벌은 타이베이 현대 미술관에서 "MICAWOR – Turning Over"라는 주제로 열렸으며, 26개 단체의 대만 및 해외 예술가들의 재능을 선보였고, 일련의 국제 포럼, 예술가 강연, 워크숍 및 기타 많은 행사를 포함했다. 멜버른의 이람보이 페스티벌과 협력하여 "페스티벌 속의 페스티벌" 프로그램을 진행했다.[108]
현재 대만 원주민 인구의 약 70%가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많은 평원 부족들은 기독교 단체를 중심으로 구성원들을 동원했으며, 특히 타이완 장로교회와 가톨릭교가 두드러진다.
네덜란드와 청나라 시대에 기독교 선교사들과 접촉하기 전, 대만 원주민들은 사회가 의미와 질서를 찾도록 돕는 다양한 영혼, 신, 신성한 상징, 그리고 신화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몇몇 집단이 초자연적인 특정 새와 새의 행동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시라야는 새 이미지를 그들의 물질 문화에 통합했다. 다른 보고서에는 사회적 신념에서 동물의 두개골과 사람의 머리를 사용한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 파이완족과 다른 남부 집단은 타이완 백보사 뱀을 숭배하고 그 등에서 다이아몬드 패턴을 많은 디자인에 사용한다.
정씨와 청나라 시대에 한족 이민자들은 유교화된 도교와 불교의 믿음을 대만 원주민에게 가져왔다. 많은 평원 원주민들은 한족 종교 관습을 채택했지만, 많은 원주민 관습이 현지 대만 한족의 믿음으로 변화했다는 증거가 있다. 대만의 일부 지역에서는 시라야의 다산의 영인 Ali-zu (A-li-tsu)가 한족 판테온에 동화되었다.
4. 1. 전통 생활 방식
대만 원주민들은 전통적으로 농경, 수렵, 어로 등에 종사하며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생활 방식을 유지해 왔다. 이들은 모계 사회, 연령 집단, 조상 숭배, 정령 신앙 등 독특한 사회 제도와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다.[38][39]평원 원주민들은 주로 대나무로 방어벽을 두른 마을에서 생활했다. 대만 남부의 마을은 다른 지역보다 인구가 많았으며, 일부 마을은 1,500명 이상을 수용하고 주변에 작은 위성 마을을 두었다.[40] 시라야 마을은 짚과 대나무로 지은 가옥으로 구성되었으며, 말뚝 위에 2m 높이로 지어졌다. 각 가구는 가축을 위한 헛간을 가지고 있었고, 마을에는 고산족의 머리 사냥대를 감시하기 위한 망루가 설치되었다. 재산 개념은 공동체적인 경우가 많았으며, 각 마을 주변에는 동심원 형태의 고리가 있었다. 가장 안쪽 고리는 정원과 과수원, 두 번째 고리는 식물과 천연 섬유 재배, 세 번째 고리는 사냥 및 사슴 사육에 사용되었다. 평원 원주민들은 점박이 사슴 무리, 사슴, 고라니를 사냥하고 수수 농사를 지었으며, 설탕과 쌀도 재배했지만 주로 술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41]
많은 평원 원주민들은 모계 사회였다. 남자는 여자가 원하는 만큼 남자를 거부할 수 있는 구애 기간을 거친 후 여자의 가족과 결혼했다. 연령별 공동체에서 부부는 남자가 30대 중반이 되어 군 복무나 머리 사냥을 할 필요가 없을 때 결혼했다. 시라야족의 모계 사회에서는 신부의 아버지가 쇠퇴기에 접어들어 새로운 가구 남성에게 도전을 제기하지 않을 때까지 부부가 30대 중반까지 결혼을 미루는 것이 필요했다. 17세기에 네덜란드 개혁 교회가 들어오면서 결혼과 출산에 대한 금기가 폐지되었다. 시라야 사회의 많은 젊은 구성원들이 더 큰 마을 권력을 얻기 위해 네덜란드 결혼 관습을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있다.[42] 대만의 거의 모든 원주민들은 전통적으로 노동의 성 분업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은 바느질, 요리, 농사를 담당했고, 남성은 사냥, 군사 활동 준비, 머리 사냥 습격에서 적의 머리를 확보하는 일을 담당했다. 여성은 여사제 또는 신에게 인도하는 무당의 직책을 맡는 경우도 많았다.
수세기 동안 대만의 원주민들은 여러 식민 세력과의 경제적 경쟁과 군사적 갈등을 겪었다. 언어 전환과 문화 동화를 장려하기 위한 중앙 집중식 정부 정책과 무역, 상호 결혼 및 기타 문화 간 과정을 통한 식민 세력과의 지속적인 접촉은 다양한 정도의 언어 소멸과 문화 정체성의 상실을 초래했다. 예를 들어, 약 26개의 대만 원주민 언어(타이완 원주민어) 중 적어도 10개는 사멸 언어이고 5개는 소멸 위기 언어이며, 여러 개는 어느 정도 위기 언어이다.
4. 2. 현대 사회와 문화 보존
20세기에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와 중화민국의 통치 아래 근대화 과정에서 대만 원주민들의 생활 양식은 크게 변화했다. 당국의 성급한 근대화 정책은 원주민의 권리를 침해했으며, 대만 사회 내 차별도 지속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원주민 청년들을 중심으로 "원주민 권리 회복 운동"이 시작되었고, 중화민국 당국도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원주민의 권리 향상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원주민 집단은 민속과 언어를 보존하고 전통적인 토지로 돌아가거나 그곳에 남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생태 관광, 조각, 보석, 음악 제작 및 판매가 경제적 기회의 유망한 분야가 되었다. 타이완 원주민 문화 공원과 같은 관광 기반의 상업적 개발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지만, 원주민은 관리직을 맡는 경우가 드물다. 일부 국립공원은 지역 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주민 토지에 건설되어 환경 식민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강제 이주를 초래하기도 했다.[104]
많은 지역 사회는 온천 사업과 호텔에 참여하여 노래와 춤을 제공하고자 했다. 특히 우라이 아타얄족이 이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해 왔다. 타이완 원주민 유산을 중점으로 하는 박물관과 문화 센터에 상당한 정부 자금이 할당되었다. 비평가들은 이러한 사업을 착취적이고 원주민 문화의 "피상적인 묘사"라고 부르며, 열악한 교육이라는 실제 문제에서 주의를 돌린다고 지적한다.[104]
관광의 본질은 서로 다른 목적지의 본질과 사람들이 그곳에서 살고, 일하고, 삶을 즐기는 방식을 보고, 이해하고, 경험하려는 다양한 개인과 집단에게 여행 및 방문 경험을 개발하고 제공하는 것이다. 원주민 문화는 관광 상품의 매력도를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이자 새로운 유형의 경제적 원천이다. 지속 가능한 관광 기업의 아이디어를 현실로 전환하기 위해, 원주민 공동체에 민족/생태 관광 기업을 설립하기 위한 계획 과정은 전략적이어야 한다.
2005년, 행정원의 도움을 받아 원주민 커뮤니티의 관심사를 다루는 전일제 원주민 라디오 방송국 "호-히-얀"이 개국했다.[104] 아메이, 푸르-두르, 사밍아드(푸유마), 디팡, A-린(아미), 다이 아이링(파이완), 랜디 웬(아타얄)과 같은 원주민 예술가들이 국제적인 팝스타가 되면서 "원주민 팝의 새로운 물결"이 나타났다.[104] 록 음악가 장첸위에는 아미 출신이다. 음악은 원주민들에게 자긍심과 문화적 소유 의식을 심어주었다.[104]
엔이그마가 노래 "Return to Innocence"에 아미족의 창가를 사용하면서 소유권 문제가 잘 드러났는데, 이 곡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의 공식 주제가로 선정되었다. 아미족 부부는 엔이그마의 음반 회사를 상대로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원작자들은 보상을 받지 못했다.[104]
풀리마 아트 페스티벌(藝術節, Pulima Arts Festival)은 2012년부터 격년으로 개최되는 행사로, 대만의 원주민 예술과 문화를 선보이며 대만에서 가장 큰 원주민 현대 미술 행사이다. ''Pulima''는 "창의적이거나 고도로 숙련된 사람"을 의미하는 파이완어 단어이다. 에든버러 아트 페스티벌과 프랑스의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영감을 받아 풀리마는 원주민 문화 재단의 지원을 받는다. 대만 및 해외의 댄서와 음악가들이 이 페스티벌에 참여하며, 격년으로 11월과 2월 사이에 개최되고, 풀리마 아트 상이라는 상을 수여한다.[107]
2018년 페스티벌은 타이베이 현대 미술관에서 "MICAWOR – Turning Over"라는 주제로 열렸으며, 26개 단체의 대만 및 해외 예술가들의 재능을 선보였고, 일련의 국제 포럼, 예술가 강연, 워크숍 및 기타 많은 행사를 포함했다. 멜버른의 이람보이 페스티벌과 협력하여 "페스티벌 속의 페스티벌" 프로그램을 진행했다.[108]
4. 3. 문신과 출초
대만 원주민에게 문신은 통과의례 중 하나였다. 남녀 모두 얼굴이나 몸에 문신을 새겨 성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일본 통치 시대에 문신이 금지되면서 1940년대에 쇠퇴했다.[128] 일본 통치 시대에 대만 특별 지원병 제도가 도입되면서 문신이 채용에 방해가 된다는 소문이 퍼진 것도 문신 전통이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대만 원주민(타오족 전체와 아미족 일부 제외)에게는 과거 적대 부족이나 다른 민족을 죽이고 머리를 베는 풍습이 있었다. 이를 대만의 한족이나 일본인은 "출초(しゅっそう)"라고 불렀다. 풀숲에 숨어 뒤에서 습격하여 머리를 자르는 행위였다. 이 행위에는 종교적인 의미도 있었다.
좁은 대만섬 내에서 문화와 언어가 전혀 다른 십여 개의 원주민 집단이 서로 교류 없이 모자이크처럼 병존했고, 다른 부족에 대한 경계심이 강했기 때문이다. 한족이 대만으로 본격적으로 이주하는 것이 늦어진 이유로 이 출초 풍습을 빼놓을 수 없다는 설도 있다. 머리 사냥은 "부족을 외적으로부터 지키는 힘을 가진 1인분 성인 남자"로서의 통과 의례(성인식)로 여겨지거나, 사냥한 머리의 수는 동족 사회 집단 내에서 과시되었다. 성인식을 마치기 전에는 처자식이나 부족을 지킬 힘이 없다고 여겨져 1인분 성인 남성으로서 결혼이나 의식 등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러한 풍습은 말레이계, 남아메리카 원주민 일부 등에게도 나타난다. 일본 무사가 적의 머리를 베는 문화와도 공통점이 있다.
오가타 타로(大形太郎)의 『고사고족(高砂族)』(1942년)에 따르면, 머리 사냥은 타이야르족에게서 가장 많이 나타났고, 부눈족·파이완족에게도 많았다. 초우족·아미족·사이샤트족은 가장 먼저 이 관습을 그만두었고, 야미족은 예로부터 이 풍습을 가진 흔적이 없다고 전해졌다. 어느 부족이든, 일본 통치 시대 말기에는 동포에 대한 머리 사냥 관습은 거의 사라졌다.
출초는 사료에서 보이듯, 활이나 총 등으로 대상을 뒤에서 습격한 후 칼로 머리를 잘랐으며, 대상과 용감하게 싸워 머리를 베는 경우는 드물었다. 획득한 머리는 마을의 한 곳에 모아 머리 선반 등에 장식했다. 출초는 조상으로부터 전해지는 신성한 행위로, 조상의 유훈을 지키는 행위로 여겨져, "무용을 과시"하거나 "불길함을 물리치"거나 혹은 "억울함을 씻기" 위해 행해졌다. 따라서 참수 대상은 반드시 원수가 아니었으며, 참수의 대부분은 동족 간에 이루어졌고, 피해자가 한족이나 일본인인 경우가 오히려 적었다고 한다. 일본 통치 시대 초기, 오키나와에서 온 행상 여성들이 산에서 출초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청일 전쟁 후 을미 전쟁에서 일본이 청의 잔당이나 원주민 등 일본의 영유에 불만을 품은 대만의 현지 세력을 소탕·평정하고 영유를 확정하면서, 대만총독부의 이번 정책에 따라 머리 사냥 풍습은 범죄 행위로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러나 원주민 봉기 진압 시, 봉기를 일으킨 원주민에 대한 출초를 용인(묵인)하는 대가로 다른 원주민에게 협력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무사 사건 이후 세데크족 진압 시, 무사 사건에서 일본인 살해에 관여한 자의 머리에 고액의 현상금을 걸고 출초를 부추겼다.
1910년(메이지 43년) 5개년 계획 이번 사업 시행 후 1915년(다이쇼 4년) 이후 출초는 크게 줄었다. 이는 번지 평정에 따른 경찰 주재소 설치나 총기 압수 때문이지만, 공학교나 교육소에 의한 교화가 진행되면서 "일본인", "문명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원주민들이 출초라는 풍습을 포기했다는 설도 있다.
대만총독부 사료 등을 토대로 한 설에 따르면, 1896년(메이지 29년)부터 1930년(쇼와 5년)까지 출초 희생자는 약 7,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 희생자는 원주민끼리의 것(약 1,000명 정도)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통치 시대 말기가 되면서 출초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출초 풍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중화민국 시대가 되고 나서이다.
출초를 둘러싼 아리산 원주민에 관한 오봉 설화는 청나라 시대 말기에 만들어져 일본 통치 시대에 널리 알려져 유명해졌지만, 1980년대 이후 원주민 권리 운동 과정에서 차별성이 비판받아 현재는 화제가 되지 않고 있다.
오오가타 타로의 『고사이고(高砂族)』(1942년)에 따르면, 출초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행해졌다.
- 장년의 반에 참가하려 할 때
- 다툼의 시비를 결정하려 할 때
- 악역의 유행을 막으려 할 때
- 혐의를 풀거나, 또는 억울함을 풀려 할 때
- 취부의 경쟁(결혼할 여성을 얻는 것)에서 이기려 할 때
- 자신의 무용을 자랑하려 할 때
- 흉조가 있을 경우, 불길함을 미리 막으려 할 때
- 자신의 원한을 풀려 할 때
- 사후에 낙토에 들어갈 자격을 얻으려 할 때
또한, 대일본제국 시대의 조사와 현지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부족 내에서는 "부족 규율 위반에 따른 제재", 그 외 대부분의 경우 대상자는 "적대자", "아무런 원한이 없는 관련 없는 제3자"였으며, "이종족"의 머리를 사냥함으로써 부족 내 문제가 되지 않도록 했던 것으로 보인다.
5. 언어
오스트로네시아어족(말레이폴리네시아어족)에 속하는 여러 언어를 사용한다. 이 때문에 대만 원주민은 원래 인도네시아・필리핀 방면에서 건너온 민족이라는 설도 있지만, 대만 원주민 제어가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조형을 보존하고 있고, 고고학적으로도 신석기 문화는 대만에서 필리핀, 인도네시아 방면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에,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은 대만에서 남하하여 태평양 각지로 확산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오니시 코지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언어는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우랄어와의 유사[124]나 북미 원주민의 제어, 남미 원주민[125]의 언어와의 유사성도 인정되며, 대만에서 확산되었다는 설에는 의문이 남는다. 이러한 언어는 1만 5천 년 이상 전에 대만 이외의 어딘가에서 확산되었다고 생각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대일본제국 시대에는 "고사고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통치하는 방침"이 채택되어, 메이지 시대 통치 개시 직후부터 이미 행해지던 다양한 원주민에 대한 인터뷰 조사 등이 더욱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타이베이 제국대학 언어학 연구실에서 편찬한 『원어에 의한 대만 고사사족 전설집』(1935년)에는 고사사족(대만 원주민)의 원어를 가능한 한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 독자적인 발음 기호를 사용하여 번사의 사람들에게 들은 일화나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책 전체는 783페이지 이상이며, 부족 집락의 위치가 기록된 지도와 간이 단어집도 첨부되어 있다.
그 외, 『고사사족 관습법 어휘』 등 몇몇 언어 연구서가 남아 있다.
부족 간에는 언어가 다르지만, 최근에는 초등 교육 보급으로 중화민국의 공용어인 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 또한 일본 통치 시대에는 기본적으로 일본어 교육도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른 부족 간의 공통어로서 일본어가 사용되었다.
6. 유전자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대만 원주민에게는 Y 염색체 하플로그룹O1a 계통이 66.3%[126]-89.6%[127]의 높은 빈도로 관찰된다. 이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기원과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유전자 연구 결과와 일치한다.
7. 현대 사회의 과제
대만 원주민은 대만 표준중국어로 "원주민"(原住民) 또는 "원주민족"(原住民族)으로 공식 표기되며, 중화민국 헌법에서 특별한 권리를 인정받고 있다. "선주민"(先住民)이라는 표현은 "이미 멸망한 민족"이라는 뜻이 있어 쓰이지 않는다.[113]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하는 여러 언어를 사용하며, 요즘에는 초등 교육 보급으로 국어를 쓰는 사람이 많다. 일본 통치 시대에는 일본어 교육도 이루어져 다른 부족끼리 의사소통을 할 때 일본어를 쓰기도 했다.
문화와 전통을 지키는 인정 원주민과 평포족처럼 이미 동화가 진행된 원주민 간의 문제는 원주민 사회를 둘로 나누는 과제이다. 평포족 소송으로 동화된 원주민 인정이 진행될 것으로 보이지만, 전통적인 원주민 지도자들은 이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129]
대만 원주민과 호로인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깊은 갈등이 있었으며, 호로인은 원주민을 차별하는 뜻으로 "번(番)"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130] 2016년 차이잉원 총통이 원주민에게 사과했지만,[131] 몇몇 원주민 운동가들은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132]
7. 1.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 문제
20세기 말 대만이 경험한 경제 호황의 혜택을 많은 원주민 공동체가 균등하게 누리지 못했다. 원주민들은 거주지에서 만족스러운 교육 자원을 갖추지 못해 시장 경쟁력을 갖춘 기술을 습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마을과 도시 학교 간의 경제적 격차는 원주민에게 많은 사회적 장벽을 초래하여 많은 이들이 직업 훈련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115] 도시 학교로 전학한 학생들은 고립, 문화 충격, 동료들의 차별을 포함한 역경에 직면했다. 가난과 경제적 소외가 문화에 미치는 영향으로 원주민들 사이에서 알코올 중독과 매춘이 증가했다.[115]경제 호황은 많은 수의 원주민을 마을에서 벗어나 도시 노동력의 비숙련 또는 저숙련 부문으로 유입시켰다. 저임금의 제조업 및 건설 일자리가 일반적으로 제공되었다. 원주민들은 노동력의 일부로서 집단적 요구를 보호하려는 유사한 정치적 동기를 가졌기 때문에 다른 공동체와 빠르게 유대감을 형성했다. 원주민은 섬에서 가장 숙련된 철강 노동자이자 건설 팀이 되었으며, 종종 가장 어려운 프로젝트에 참여하도록 선정되었다.[115] 그 결과 원주민 구성원의 전통적인 토지에서의 대량 이탈과, 일하는 동안 언어나 관습을 배울 수 없었던 마을의 젊은이들의 문화적 소외가 발생했다. 종종 도시의 젊은 원주민들은 건설업과 관련된 갱단에 가담한다.[115] 최근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출신 노동자의 고용을 규제하는 법률은 도시 원주민들 사이에서 제노포비아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정치적 대표성과 보호를 추구하는 범원주민 의식의 형성을 장려했다.[115]
다음은 2005년부터 2009년까지 대만 원주민의 실업률을 나타낸 표이다.
날짜 | 총 인구 | 15세 이상 | 총 노동력 | 취업자 | 실업자 | 노동 참여율 (%) | 실업률 (%) |
2005년 12월 | 464,961 | 337,351 | 216,756 | 207,493 | 9,263 | 64.25 | 4.27 |
2006년 12월 | 474,919 | 346,366 | 223,288 | 213,548 | 9,740 | 64.47 | 4.36 |
2007년 12월 | 484,174 | 355,613 | 222,929 | 212,627 | 10,302 | 62.69 | 4.62 |
2008년 12월 | 494,107 | 363,103 | 223,464 | 205,765 | 17,699 | 61.54 | 7.92 |
2009년 12월 | 504,531 | 372,777 | 219,465 | 203,412 | 16,053 | 58.87 | 7.31 |
7. 2. 토지 문제와 환경 문제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와 중화민국의 통치 아래 근대화 과정에서 대만 원주민들은 토지를 빼앗기고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101] 1874년 일본은 무단 사건(타이완 일본 침략 (1874년))을 일으켜 타이완 남부 원주민 영토를 침략하고 6개월 동안 점령했다. 청나라는 일본군의 철수를 대가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청나라의 황제 특사 선보진은 원주민을 복속시키고 중국인 정착민을 이주시킬 것을 권고했다. 그 결과, 원주민에 대한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1875년에는 타이완 출입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1877년에는 원주민 복속과 산지 개방에 관한 21가지 지침이 발표되었고, 정착민 모집 기관이 해안 본토와 홍콩에 설립되었다.
청불 전쟁 이후 류밍촨의 통치하에 원주민 영토 정착 노력이 재개되었으나, 높은 비용과 낮은 이익으로 인해 1891년 식민화 노력은 중단되었다. 1884년부터 1891년까지 류밍촨은 17,5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원주민에 대한 40회 이상의 군사 작전을 수행했지만, 많은 사상자를 내고 실패했다.
청나라 말기까지 서부 평원은 약 250만 명의 중국인 정착민이 거주하는 경작지로 개발되었지만, 산악 지역은 여전히 원주민의 통제하에 있었다. 청나라 통치 기간 동안 원주민의 토지 손실은 일본 식민지 시대에 비해 비교적 느린 속도로 발생했다. 일본 통치 기간 동안, 타이완 원주민은 토지에 대한 법적 소유권을 잃고 조상 땅의 8분의 1 크기의 작은 보호 구역에 갇혔다.
20세기 말 경제 호황의 혜택을 많은 원주민 공동체가 균등하게 누리지 못했다. 경제적 격차는 원주민에게 많은 사회적 장벽을 초래했고, 가난과 경제적 소외는 원주민들 사이에서 알코올 중독과 매춘 증가를 야기했다.
경제 호황은 많은 수의 원주민을 도시 노동력의 비숙련 또는 저숙련 부문으로 유입시켰다. 원주민들은 집단적 요구를 보호하려는 유사한 정치적 동기를 가졌기 때문에 다른 공동체와 빠르게 유대감을 형성했다. 원주민은 섬에서 가장 숙련된 철강 노동자이자 건설 팀이 되었지만, 그 결과 원주민 구성원의 전통적인 토지에서의 대량 이탈과, 일하는 동안 언어나 관습을 배울 수 없었던 마을의 젊은이들의 문화적 소외가 발생했다.
날짜 | 총 인구 | 15세 이상 | 총 노동력 | 취업자 | 실업자 | 노동 참여율 (%) | 실업률 (%) |
2005년 12월 | 464,961 | 337,351 | 216,756 | 207,493 | 9,263 | 64.25 | 4.27 |
2006년 12월 | 474,919 | 346,366 | 223,288 | 213,548 | 9,740 | 64.47 | 4.36 |
2007년 12월 | 484,174 | 355,613 | 222,929 | 212,627 | 10,302 | 62.69 | 4.62 |
2008년 12월 | 494,107 | 363,103 | 223,464 | 205,765 | 17,699 | 61.54 | 7.92 |
2009년 12월 | 504,531 | 372,777 | 219,465 | 203,412 | 16,053 | 58.87 | 7.31 |
대만 원주민 공동체는 생태적 인식과 보존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많은 환경 문제가 원주민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아타얄족 구성원의 노력은 "천연 자원 관리, 특히 그 안에서 원주민의 참여에 대한 논쟁에 초점을 맞추었다".
난위안의 핵 폐기물 저장 시설 문제도 주목할 만하다. 1970년대에 이 섬은 저준위 및 중준위 핵 폐기물을 보관할 수 있는 장소로 지정되었다. 1982년에 시설이 완공되었을 때, 실제로 "대만의 3개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온 97,000 배럴의 저방사능 핵 폐기물"을 보관하는 시설이었다.[101] 타오족은 그 이후 반핵 운동의 선두에 서서, 그들이 사망과 질병을 초래했다고 주장하는 폐기물을 제거하기 위해 여러 차례의 엑소시즘과 시위를 벌였다.[102]
7. 3. 정치적 대표성과 자치권
대만 원주민은 입법원에 의석을 할당받고 있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원주민 권리 회복 운동이 시작되어, 중화민국 정부는 원주민의 권리 향상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71] 중화민국 헌법은 정부가 원주민 문화와 언어를 보호하고 정치 참여를 장려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1996년에는 행정원 원주민위원회가 부처급으로 승격되었다. 중앙 정부는 원주민 이름의 로마자 표기를 허용하고, 혼혈 원주민/한족 자녀가 자신의 공식 지정을 선택할 수 있도록 신분증 정책을 완화했다.
민주진보당(DPP)은 원주민 문화 장려에 주력하는 범록 연합과는 달리, 대만 원주민들은 국민당에 투표하는 경향이 있다.[72] 이는 경제적 이유와 선거구 내 민족 간 권력 투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일부 원주민들은 대만 민족주의 담론이 다수 호클로어 사용자를 선호한다고 보기도 한다.
입법원 의석 수는 2008년에 113석으로 줄었고, 이 중 대만 원주민은 평원과 고산족 각각 3명씩 총 6명의 의원으로 대표된다.[71] 원주민들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원주민화" 운동을 남용한 정치인들을 비판하기도 한다.[73]
2016년, 차이잉원 총통은 과거의 불평등한 원주민 취급에 대해 처음으로 사과했다.[116] 그러나 원주민 시위대는 차이잉원의 사과가 진정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며, 천수이볜의 신 파트너십 준국가 관계를 회복하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85]
원주민 자치권 확대와 자결권 보장을 위한 요구는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으며, 원주민 공동체의 정치 지도자들은 더 큰 정치적 공간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7. 4. 호로인과의 갈등
역사적으로 대만 원주민과 한족, 특히 호로인(민남인) 사이에는 갈등과 차별이 존재해 왔다.[130] 호로인은 원주민을 차별하는 의미로 "번(番)"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130]1871년 미야코·야에야마의 공납선이 대만 남동 해안에 표착하여 54명이 대만 원주민에게 살해된 미야코지마 주민 조난 사건이 발생했다. 1874년에는 무단 사건(타이완 일본 침략 (1874년))으로 알려진 사건에서 일본군이 타이완 남부의 원주민 영토를 침략하여 6개월 동안 점령하기도 했다.
청불 전쟁이 종결된 후 류밍촨의 통치하에 원주민 영토에 정착하려는 노력이 재개되었으나, 이주한 정착민들은 원주민과 혹독한 기후에 시달렸다. 류밍촨은 식민 활동으로 인한 높은 비용과 낮은 이익으로 비판을 받았고, 결국 1891년에 사임하면서 식민화 노력은 중단되었다.
1930년에는 무사 사건과 같은 항일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고사고 의용대가 남태평양의 밀림전에 참가하여 큰 공헌을 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 국적을 잃으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장애 연금 등을 지급받지 못했다.[114]
1980년대 후반부터 고산족 청년들을 중심으로 "원주민 권리 회복 운동"이 시작되었고, 중화민국 당국도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고산족의 권리 향상을 도모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1996년에는 원주민족위원회가 설치되기도 했다.
2016년에는 차이잉원 총통이 과거의 불평등한 원주민 취급에 대해 중화민국 총통으로서 처음 사죄했다.[116] 이 사죄는 대만의 역사의 다양성을 강조하고 이해와 화해를 촉진한다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131] 일부 원주민 활동가로부터는 비판도 나왔다.[132] 원주민의 비판에 대해, 특히 호로인이 많은 민진당 지지자들은 원주민이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의견이 편향되어 있다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133]
최근에는 대만 독립 논쟁과 관련하여 원주민의 정체성과 입장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갈등이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마리 린(Marie Lin)의 연구에 따르면 대만 한족의 85%가 원주민 유래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데, 이 연구 결과는 대만인이 유전적으로 중국인과 다르다는 주장을 대만 독립파가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호로인 출신인 셰창팅 전 행정원장은 "내 할머니는 원주민이다. 나는 원주민이고, 당신은 원주민이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모두 원주민이다."라고 발언하기도 했지만, 일부 평포족 후손으로부터는 반발이 일어났다.[134]
7. 5. 원주민 정체성과 인정 문제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인정 원주민과 원주민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동화가 진행된 평포족 간에는 갈등이 존재한다. 이는 원주민을 양분하는 문제로 이어진다.평포족의 소송으로 동화가 진행된 원주민 인정이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위헌 판결을 받은 평포족의 소송에 대해 혼혈, 도시 지역의 원주민은 환영했지만, 전통적인 지역에 거주하며 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는 원주민 지도자들은 원주민 정책을 왜곡하고 기존 원주민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목소리를 냈다.[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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