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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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빅토리아는 1819년 런던에서 태어났으며, 1837년 윌리엄 4세의 서거로 18세의 나이에 영국 여왕으로 즉위했다. 즉위 초기에는 헤이스팅스 사건과 침실 위기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앨버트 공과 결혼하여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이루었다. 빅토리아는 19세기 대영 제국의 번영을 이끌었으며, 입헌 군주제 확립에도 기여했다. 그녀는 1901년 사망할 때까지 63년 7개월 2일 동안 재위하며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군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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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영국)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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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빅토리아 |
전체 이름 |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공주 |
출생일 | 1819년 5월 24일 |
출생지 | 켄싱턴 궁전, 런던, 잉글랜드 |
사망일 | 1901년 1월 22일 |
사망지 | 오스본 하우스, 와이트 섬, 잉글랜드 |
매장일 | 1901년 2월 4일 |
매장지 | 프로그모어 왕실 영묘, 윈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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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 |
작위 | 영국 여왕 |
즉위일 | 1837년 6월 20일 |
대관식 | 1838년 6월 28일 |
선임자 | 윌리엄 4세 |
후임자 | 에드워드 7세 |
작위 | 인도 제국의 여제 |
즉위일 | 1876년 5월 1일 |
대관식 | 제국 더바르, 1877년 1월 1일 |
선임자 | 직책 신설 |
후임자 | 에드워드 7세 |
가문 | |
왕가 | 하노버 왕가 |
아버지 | 켄트 공작 에드워드 |
어머니 |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녀 빅토리아 |
배우자 및 자녀 | |
배우자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자 알버트 (1840년 2월 10일 결혼, 1861년 12월 14일 사별) |
자녀 | 빅토리아 (독일 황후) 에드워드 7세 앨리스 (헤센 대공비) 알프레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헬레나 (영국 공주) 루이즈 (아길 공작부인) 아서 (코넛 공작) 레오폴드 (올버니 공작) 베아트리스 (바텐베르크 공녀) |
종교 | |
종교 | 개신교 |
추가 정보 | 여왕으로서 빅토리아는 잉글랜드 국교회 수장이었으며, 스코틀랜드 교회와도 연관이 있었음 |
2. 생애
1837년, 큰아버지 윌리엄 4세가 서거하자 18세의 나이로 하노버 왕조 6대 여왕으로 즉위하였다.[350] 하노버 왕가는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지 1세 때부터 계속된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 연합 관계는 그녀의 즉위와 함께 끝났고,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의 왕위만 계승하여 64년간 재위하였다.
즉위 후 빅토리아는 버킹엄 궁전으로 거처를 옮기고, 어머니와 존 코로이는 자신의 거처에서 멀리 떨어진 방으로 쫓아냈다. 외숙부인 레오폴트도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는 내각의 경고를 받았다. 빅토리아는 처음 얻은 자유를 마음껏 즐겼다.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은 1838년 6월 28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다. 40만 명이 넘는 방문객들이 축하 행사를 위해 런던에 왔다.[37] 그녀는 버킹검 궁전에 거주한 최초의 군주가 되었고,[38] 랭커스터 공작령과 콘월 공작령의 수입을 상속받았을 뿐만 아니라 연간 38만 5천 파운드의 민정비를 지급받았다. 재정적으로 신중했던 그녀는 아버지의 빚을 모두 갚았다.[39]
1877년 1월 1일부터 1901년 1월 22일까지 영국 국왕 최초로 인도 제국의 황제로 군림하였다. 엘리자베스 2세에 이어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영국 군주이며, 1887년 1월 20일, 재위 50주년을 기념하는 골든 주빌리를 치렀고 1897년 6월 20일에는 재위 60주년을 기념하는 다이아몬드 주빌리가 거행되었다.
빅토리아의 재위 기간은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로 통칭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 제국 최전성기와 일치한다. 9명의 자녀들이 유럽의 여러 왕가 및 귀족 가문들과 혼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유럽의 할머니'라고도 불린다.
2. 1. 즉위 이전
1819년 5월 24일 런던의 켄징턴 궁전에서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와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녀 빅토리아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1] 그가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연인 관계였던 아일랜드 출신의 존 코로이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304][305][306] 당시 아버지의 빈 자리를 외숙부이자 종형부(從兄夫)인 레오폴드가 채워주고 있었다. 빅토리아와 레오폴드의 관계는 레오폴드가 1831년에 벨기에의 왕으로 선출되어 떠날 때까지 지속되었다.[308][309]
빅토리아는 원래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할아버지 조지 3세의 직계 혈통이 끊어지면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조지 3세는 15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조지 4세의 유일한 적통 샬럿 오거스타 공주가 1818년에 죽자, 그의 직계손 중에는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게 되어, 그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던 빅토리아가 추정 상속인이 되었고, 사실상 윌리엄 4세의 사후 즉위가 확실시 되었다. 왕실은 켄트 공작 부인의 연금을 두 배로 높이고 빅토리아의 양육비로 3만 파운드를 지급했다.[1038]
빅토리아가 추정 상속인이 되자, 존 코로이는 빅토리아의 어머니와 합세해서 빅토리아를 친가 쪽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고립시키고,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어 장차 자신이 정치를 좌지우지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부렸다. 빅토리아의 어머니 역시 빅토리아를 차기 왕으로 내세워 독일인이자 과부라는 이유로 위태로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두 사람의 왕위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빅토리아에게는 큰 부담감으로 다가왔고, 그로 인해 빅토리아는 점차 어머니한테서 멀어져 사사건건 충돌하며 갈등을 빚게 되었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도 결코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았다.
빅토리아의 어머니는 하노버에서 루이즈 레젠 선생을 초빙해 빅토리아에게 읽고쓰는 법을 가르쳤다. 빅토리아는 독일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등의 외국어 및 음악과 미술을 배웠으며 체스터 부주교에게서 기독교의 역사도 배웠다.[1038] 영리했던 빅토리아는 배우는 것이 빨랐지만 어머니의 모국어인 독일어가 유창했던 것에 비해 영어는 그만큼 잘하지 못했다.[1038] 빅토리아는 자신의 인형들에 이름을 붙이고 번호를 매겨 위치를 정해두어 하녀들이 임의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1038]
1837년 빅토리아가 18살 생일을 맞은 뒤 26일 만에 셋째 백부인 윌리엄 4세가 서거하고 그의 뒤를 이어서 빅토리아는 즉위하였고, 하노버 왕가가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즉위와 동시에 조지 1세 때부터 계속된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 연합 관계는 끝나게 되고, 그는 영국 왕위만을 계승하였다.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하울리가 빅토리아를 찾아가 차기 왕으로 내정됨을 알렸고, 빅토리아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성서를 펼친 뒤 “주님, 제가 영국의 왕이 되면 당신의 말씀대로 통치하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2. 2. 즉위 이후
1837년, 큰아버지 윌리엄 4세가 서거하자 18세의 나이로 하노버 왕조 6대 여왕으로 즉위하였다.[350] 하노버 왕가는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지 1세 때부터 계속된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 연합 관계는 그녀의 즉위와 함께 끝났고,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의 왕위만 계승하여 64년간 재위하였다.즉위 후 빅토리아는 버킹엄 궁전으로 거처를 옮기고, 어머니와 존 코로이는 자신의 거처에서 멀리 떨어진 방으로 쫓아냈다. 외숙부인 레오폴트도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는 내각의 경고를 받았다. 빅토리아는 처음 얻은 자유를 마음껏 즐겼다.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은 1838년 6월 28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다. 40만 명이 넘는 방문객들이 축하 행사를 위해 런던에 왔다.[37] 그녀는 버킹검 궁전에 거주한 최초의 군주가 되었고,[38] 랭커스터 공작령과 콘월 공작령의 수입을 상속받았을 뿐만 아니라 연간 38만 5천 파운드의 민정비를 지급받았다. 재정적으로 신중했던 그녀는 아버지의 빚을 모두 갚았다.[39]
1877년 1월 1일부터 1901년 1월 22일까지 영국 국왕 최초로 인도 제국의 황제로 군림하였다. 엘리자베스 2세에 이어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영국 군주이며, 1887년 1월 20일, 재위 50주년을 기념하는 골든 주빌리를 치뤘고 1897년 6월 20일에는 재위 60주년을 기념하는 다이아몬드 주빌리가 거행되었다.
빅토리아의 재위 기간은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로 통칭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 제국 최전성기와 일치한다. 9명의 자녀들이 유럽의 여러 왕가 및 귀족 가문들과 혼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유럽의 할머니'라고도 불린다.
2. 2. 1. 즉위 초반의 어려움
영국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끝난 후 불어닥친 경제공황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1832년 선거법 개정으로 중산층에도 선거권이 주어지자, 이에 영향을 받은 노동자들이 헌장을 선포하고 자신들의 권익이 관철되기를 요구하였다. 이를 차티스트 운동(Chartism)이라고 하는데, 노동운동의 방법이 러다이트 운동(생산 도구인 기계를 파괴하여 자본가와 투쟁함으로써 생존권을 존중받고자 한 노동운동) 등의 과격한 방법에서 정치 참여를 통한 영향력 행사라는 온건한 방법으로 바뀌었다는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빅토리아는 그런 민중들의 모습들을 보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그런 까닭에 왕으로서의 집무가 시작되자마자 매일 1시간 이상을 멜버른 수상과 만나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익혀 나갔다.빅토리아 치세의 첫 번째 위기는 1839년에 두 차례 있었다. 둘 다 빅토리아의 정치적 당파심 때문에 생겨난 위기였다.
첫 번째 위기인 ‘헤이스팅스 사건’의 발단은 이러하다. 자유주의적인 휘그당을 열렬히 지원하던 빅토리아는 보수 성격이 강한 토리당과 관련 있는 궁중 시녀 플로라 헤이스팅스에 대하여 늘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빅토리아는 그녀에게 임신했다는 혐의를 씌워 강제로 의사의 진단을 받게 했다. 만약 임신이 확인된다면 그녀를 쫓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진단 결과 왕의 오해였다는 사실로 밝혀졌는데, 문제는 뒷공론이 무성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해 말에 플로라가 뜻밖의 질병으로 죽자, 훨씬 더 험악한 유언비어가 유포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의 왕에 대한 지지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또 한 차례의 위기는 ‘침실 위기’로 불린다. 1833년 윌리엄 윌버포스 등의 국회의원들이 펼친 노예 제도 반대 운동의 결실인[1039] 노예 해방령을 거부한 자메이카는 영국의 자치령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이 플랜테이션 경작지로 각광을 받자 멜버른은 이곳에 자치권을 주려 하였다. 그러나 1839년 5월 그 안건이 5표 차이로 부결되면서 그도 수상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새로이 당선된 수상은 보수당(토리당의 후신) 당수인 로버트 필이었다. 그는 반대 정파인 휘그당원 일색인 왕의 시녀들이 왕의 침실 근처에 있는 한 공평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고 이들을 모두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빅토리아는 멜버른의 격려를 받아 단호히 이 요구를 거부했다. 필은 수상직을 포기했고, 멜버른이 다시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멜버른 자작은 휘그당 소속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귀족주의·보수주의자였다. 한편 기회주의자이기도 했기에 내심 선거권 확대에 반대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레이 백작 내각의 제1차 선거법 개정에 내무장관으로서 협력했다.[374]
그는 전 왕 윌리엄 4세와의 관계는 좋지 않았지만, 슈톡머 남작이 멜버른 자작의 좋은 평판을 빅토리아에게 전했기 때문에 빅토리아로부터 일찍부터 총애를 받게 되었다.[375][376][377]
멜버른 자작은 하루의 대부분을 궁정에서 보내며, 여러 문제에 대해 빅토리아의 상담에 응하고, 반쯤 빅토리아의 개인 비서가 되었다.[378] 그의 세련된 매너와 화술은 빅토리아를 사로잡았다.[379] 두 사람은 매일 6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380] 군신 관계를 넘어 마치 부녀와 같은 관계가 되었다.[375] 여왕의 일기에도 매일처럼 "멜버른 경", "M 경"의 이름이 등장하게 된다.[375][381] 빅토리아가 처음으로 상원에 출석하여 의회 개원 연설을 한 날의 일기에는 "그가 옥좌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라고 적혀 있다.[382]
그러나 휘그당을 탈당했던 스탠리 경(후의 제14대 더비 백작) 등 더비파가 1839년 봄에 보수당에 합류하고, 또한 지금까지 멜버른 자작을 지지해 온 급진파나 오코넬파도 멜버른 자작이 새로운 개혁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강하게 느껴, 멜버른 자작은 의회에서 어려운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383]
1839년 5월 초에 멜버른 자작이 의회에 제출한 영국령 자메이카의 노예 제도 폐지 법안은 하원을 통과했지만, 불과 5표 차이라는 근소한 차이였기 때문에, 멜버른 자작은 자신의 구심력 저하를 깨닫고 5월 7일에 빅토리아에게 사표를 제출했다.[384] 빅토리아의 충격은 컸고, 울부짖었다고 한다.[385][386]
2. 2. 2. 결혼과 가정생활
빅토리아의 대관식 후 혼사 문제가 거론되었고, 빅토리아의 외사촌이자 독일계 왕족인 앨버트 공작이 배우자 1순위로 올랐다. 1839년 10월 15일, 앨버트가 영국을 방문하여 윈저 궁전에 도착한 지 5일 만에 빅토리아는 앨버트의 외모와 인품에 매혹되어 사랑에 빠졌다. 빅토리아와 앨버트는 1840년 2월에 결혼하였다. 앨버트 공작은 빅토리아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되었다. 빅토리아는 훌륭한 정치적 조언자인 남편을 깊이 사랑하고 신뢰하였으며, 1861년 남편의 사망으로 큰 충격을 받아 국무에 손을 떼고 한동안 두문불출하기도 하였다. 앨버트 공 또한 아내를 사랑하여, 아내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심을 받는 국가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빅토리아는 앨버트와의 사이에 4남 5녀를 두었으며, 대부분의 자녀들이 유럽의 주요 왕족과 결혼하여 말년에는 '유럽의 할머니(the grandmother of Europe)'로 불렸다.
- | 사진 | 이름 | 출생 | 사망 | 유럽 왕실과의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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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 | ![]() |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Victoria, Princess Royal | 1840년 11월 21일 | 1901년 8월 5일 | |
장남 | ![]() | 1841년 11월 9일 | 1910년 5월 6일 | ||
![]() | 앨리스 공주 Princess Alice | 1843년 4월 25일 | 1878년 12월 14일 | ||
![]() | 1844년 8월 6일 | 1900년 7월 31일 | |||
![]() | 헬레나 공주 Princess Helena | 1846년 5월 25일 | 1923년 6월 9일 | ||
![]() | 1848년 3월 18일 | 1939년 12월 3일 | |||
![]() | 1850년 5월 1일 | 1942년 1월 16일 | |||
![]() |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Prince Leopold, Duke of Albany | 1853년 4월 7일 | 1884년 3월 28일 | ||
![]() | 베아트리스 공주 Princess Beatrice | 1857년 4월 14일 | 1944년 10월 26일 |
1861년 남편의 죽음으로 한동안 침울했던 빅토리아는 시종 존 브라운(John Brown)과 급속도로 친밀해졌다. 왕이 시종과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돌았고,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존 브라운과 비밀리에 결혼했다는 소문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나, 왕이 임종 전에 관 속에 존 브라운의 머리카락, 반지, 사진 등을 넣어달라고 당부한 것으로 보아 얼마나 친밀한 관계였는지 알 수 있다. 왕은 브라운이 죽은 후 인도인 시종 압둘 카림(Abdul Karim)과 비슷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2. 2. 3. 서거
1901년 1월 22일, 빅토리아 여왕은 82세의 나이로 뇌출혈을 일으켜 오즈번 하우스에서 서거하였다. 2차 보어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였다. 그녀는 하노버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으며, 그녀의 서거와 함께 현재 윈저 왕조의 전신인 삭스-코버그-고타 왕조(작센-코부르크-고타의 영어식 발음)가 시작되었다.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장남인 에드워드 7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961]1901년 1월 16일, 빅토리아 여왕은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962] 시의들은 서거가 임박했다고 판단하여 1월 18일에 빅토리아 여왕의 자녀들을 소집했다. 셋째 아들 코노트 공 아서는 베를린에 있었는데, 빌헬름 2세는 소식을 듣고 "호엔촐레른 왕조 200주년 기념제"를 중단하고 코노트 공작과 함께 영국으로 왔다.[963]
넷째 딸 루이즈에 따르면 1월 21일 빅토리아 여왕은 "아직 죽고 싶지 않아. 내가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964] 1월 22일 정오 무렵, 빅토리아 여왕은 "버티"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965] 같은 날 오후 4시경, 빅토리아 여왕의 호흡이 거칠어지자 시의 리드와 빌헬름 2세가 빅토리아 여왕의 머리를 받쳐주며 서거할 때까지 2시간 반 동안 자세를 유지했다.[966] 랜달 데이비드슨이 기도를 올리고, 자녀들과 손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시 30분경 빅토리아 여왕은 81세의 나이로 서거했다.[967]

빅토리아 여왕의 서거 후, 버티는 추밀원 회의에서 왕명을 '에드워드 7세'로 정한다고 발표했다. "알버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알버트 하면 누구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969]
국장은 빅토리아 여왕의 희망대로 군장으로 거행되었다. 2월 1일, 빅토리아 여왕의 관은 영구선으로 포츠머스로, 특별열차로 빅토리아 역까지 운송되었다. 거기서 에드워드 7세와 빌헬름 2세를 선두로 한 군대의 장례 행렬을 따라 마차로 세인트 제임스 궁전까지 운송되었다.[972]
국장 후, 에드워드 7세의 뜻에 따라 "문시"를 비롯한 인도인 시종들은 모두 인도로 돌아가게 되었고, "문시"에 관한 문서도 소각되었다. 존 브라운의 동상도 숨겨졌다.[973]
빅토리아 여왕이 에드워드 7세에게 물려준 왕위는 정치적 권력은 약화되었지만, 국민들의 인기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597] 세계 각지의 피지배 민중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던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은 오늘날에도 세계 각지의 지명으로 남아 있다. 역사상 그녀만큼 많은 지도에 이름을 새긴 사람은 없다.[974]
3. 정치
빅토리아 여왕은 강하고 소박하며 정직한 성격으로 내각의 보고서를 꼼꼼히 검토하는 성실한 왕이었다.[1040] 그녀는 선거법 개정, 중국과의 전쟁, 크림 전쟁, 남아프리카 전쟁 등 국내외의 중대한 문제들을 교묘하고 과단성 있게 해결하여 제국의 번영을 이끌었고,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았다.[1040]
1887년, 영국 제국은 빅토리아 여왕의 황금혼 기념일을 기념했다. 여왕은 6월 20일 즉위 50주년을 맞아 50명의 국왕과 왕자들을 초대한 연회를 열었고, 다음 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감사 예배에 참석했다.[176] 이 무렵 빅토리아 여왕은 다시 한번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177] 6월 23일, 그녀는 두 명의 인도 무슬림을 웨이터로 고용했는데, 그중 한 명이 압둘 카림이었다. 그는 곧 "문쉬"로 승진하여 여왕에게 우르두어를 가르치고 서기로 일했다.[179][180][181] 그녀의 가족과 측근들은 압둘 카림이 무슬림 애국 연맹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하고 여왕을 힌두교도에 대해 편향되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182] 시종장 프레드릭 폰손비는 문쉬가 그의 혈통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엘긴 경, 인도 총독에게 "문쉬는 존 브라운이 하던 것과 거의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183] 빅토리아 여왕은 그들의 불만을 인종적 편견으로 일축했다.[184] 압둘 카림은 여왕이 사망할 때까지 봉급을 받으며 그녀를 섬겼고, 사망 후 인도로 돌아갔다.[185]
1892년 총선 후 글래드스톤이 82세의 나이로 다시 집권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글래드스톤이 급진적인 국회의원 헨리 라부셰르를 내각에 임명하려는 제안에 반대했고, 글래드스톤은 그를 임명하지 않기로 동의했다.[187] 1894년, 글래드스톤이 은퇴하자 빅토리아 여왕은 퇴임하는 총리와 상의하지 않고 로즈베리 경을 총리로 임명했다.[188] 그의 정부는 약했고, 다음 해 솔즈베리 후작이 그를 대신했다. 솔즈베리 경은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 동안 총리직을 유지했다.[189]
1896년 9월 23일, 빅토리아 여왕은 조지 3세를 넘어서 영국 역사상 최장수 군주가 되었다. 여왕은 다이아몬드 혼 기념일과 일치하도록,[190] 특별 기념 행사를 1897년까지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는 식민지 장관 조셉 체임벌린의 제안에 따라 영국 제국의 축제로 만들어졌다.[191] 모든 자치 도미니언의 총리들이 축제를 위해 런던에 초청되었다.[192] 1897년 6월 22일 여왕의 다이아몬드 혼 행렬은 런던을 가로질러 6마일 길이의 경로를 따라 진행되었고, 제국 전역의 군대가 포함되었다. 행렬은 세인트 폴 대성당 밖에서 열린 야외 감사 예배를 위해 잠시 멈췄고, 빅토리아 여왕은 건물로 들어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갈 필요가 없도록 열린 마차에 앉아 있었다. 이 기념 행사는 78세의 여왕에 대한 엄청난 인파와 애정 표현으로 기념되었다.[194]
3. 1. 입헌 군주제의 확립
빅토리아는 강하고 소박하며 정직한 성격으로, 내각의 보고서를 꼼꼼히 검토하는 성실한 왕이었다. 선거법 개정,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국과의 전쟁, 아일랜드 문제, 초등 교육법, 크림 전쟁, 남아프리카 전쟁 등 국내외의 중대한 문제들을 해결하여 제국의 번영을 이끌었고,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았다. 19세기 대영 제국의 번영에 크게 기여했으며, 빅토리아 시대는 영국 역사상 최고의 번영기였다.[1040]1874년 총선에서 디즈레일리가 재집권하여 1874년 공공 예배 규정법을 통과시켜 성공회 예배에서 가톨릭 의식을 제거했는데, 빅토리아 여왕은 이를 강력히 지지했다.[148] 그녀는 영국 성공회의 감독제보다는 장로교 스코틀랜드 교회와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149] 디즈레일리는 또한 1876년 왕실 칭호법을 통과시켜 빅토리아 여왕이 1876년 5월 1일부터 "인도의 황후"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했다.[150]
빅토리아 여왕은 디즈레일리의 팽창주의적 외교 정책을 지지하여 줄루 전쟁과 제2차 영국-아프간 전쟁과 같은 갈등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영국 제국의 확장을 문명화되고 온화한 것으로 보고, 토착민들을 더 공격적인 세력이나 잔인한 통치자들로부터 보호한다고 생각했다.[156]
1886년 총선에서 글래드스톤의 당이 패배하고 솔즈베리의 당이 승리하면서 정부가 다시 바뀌었다.[175]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했을 당시 영국 왕위는 여전히 상당한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360][989] 특히 수상 및 각료의 임명 해임과 외교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990] 앨버트 공은 빅토리아 여왕을 대신하여 왕권을 행사하기도 했다.[991]
앨버트 공 재임 기간 동안 왕권은 확대되었지만, 그의 사망과 함께 왕권은 약화되었고, 빅토리아 시대 말기에는 영국 역사상 유례없이 왕권이 축소되면서 입헌군주제가 확립되었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 자신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는 것에 매우 저항하는 성격이었고,[992] 입헌군주가 될 의사는 전혀 없었으며, 수동적으로 그렇게 된 것에 불과했다.[993]
여왕은 의견을 개진할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었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그 틀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고, 수상과 육군장관을 무시하고 퇴임한 수상이나 군부 등에 적극적으로 정치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994] 또한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법안을 추진하면 퇴위하겠다고 위협했고,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격노하며 반격했다.[995]
앨버트 공 또한 입헌군주라는 틀에 갇히려 하지 않았다. 그의 측근인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폰 슈토크마 남작은 "수상은 일시적인 지도자일 뿐, 군주야말로 영원한 지도자이다"라고 생각했고, 국왕에게는 수상을 해임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다.[1001]
앨버트 공 사후, 빅토리아 여왕의 왕권은 계속해서 쇠퇴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장관들의 뛰어난 능력 덕분이었다. 그들은 "정치의 아마추어"인 그녀가 정치에 간섭하려는 것을 적절하게 거부했던 것이다.[1005]
3. 2. 주요 정치적 사건
빅토리아는 강하고 성실한 성격으로, 내각의 보고서를 꼼꼼히 검토하는 왕이었다.[1040] 선거법 개정, 중국과의 전쟁, 크림 전쟁, 남아프리카 전쟁 등 국내외의 중대한 문제들을 해결하여 제국의 번영을 이끌었다.[1040]1892년 총선 후 82세의 글래드스톤이 다시 집권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글래드스톤의 급진적인 국회의원 헨리 라부셰르의 내각 임명 제안에 반대했고, 글래드스톤은 이를 따랐다.[187] 1894년 글래드스톤의 은퇴 후, 빅토리아 여왕은 로즈베리 경을 총리로 임명했다.[188] 그의 정부는 약했고, 다음 해 솔즈베리 후작이 그를 대신하여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 동안 총리직을 유지했다.[189]
1896년 9월 23일,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 역사상 최장수 군주가 되었다. 여왕은 다이아몬드 혼 기념일과 일치하도록,[190] 특별 기념 행사를 1897년까지 연기했다.[191] 이 행사는 영국 제국의 축제로 만들어졌으며, 모든 자치 도미니언의 총리들이 런던에 초청되었다.[192]
1897년 6월 22일 여왕의 다이아몬드 혼 행렬은 런던을 가로질러 진행되었고, 제국 전역의 군대가 포함되었다. 행렬은 세인트 폴 대성당 밖에서 열린 야외 감사 예배를 위해 잠시 멈췄고, 빅토리아 여왕은 열린 마차에 앉아 있었다. 이 기념 행사는 78세의 여왕에 대한 엄청난 인파와 애정 표현으로 기념되었다.[194]
1900년 4월, 빅토리아 여왕은 보어 전쟁에 대한 아일랜드 연대의 기여를 인정하기 위해 1861년 이후 처음으로 아일랜드를 방문했다.[196]

빅토리아 여왕은 잭 더 리퍼의 화이트채플 살인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1887년에 총리 솔즈베리 후작과 내무장관 헨리 매슈스에게 셜록 홈즈와 같은 수사를 요청했다.[1015] 빅토리아 여왕은 매슈스에게 독신 남성을 중심으로 수사하고, 선박 수사와 야경 강화를 요구했다.[1016]
4. 외교
빅토리아 여왕의 64년 재위 기간 동안 대영제국은 전 세계의 비백인 국가 및 민족 집단에 대한 지배를 극한까지 행사하여, 영토를 10배 이상 확장시켜 지구 전체 육지 면적의 4분의 1, 세계 인구의 4분의 1(4억 명)을 지배하는 역사상 최대의 제국이 되었다.[625][626][627][628] 대영제국 유지 및 확장을 위해 빅토리아 여왕과 정부는 세계 각지에서 빈번하게 전쟁을 수행했으며, 재위 기간 동안 영국이 전쟁을 하지 않은 시기는 드물었다(영국군이 전투를 전혀 하지 않은 시기는 단 2년에 불과했다고 한다).[629]
빅토리아 여왕은 비백인 국가에 대한 제국주의를 전적으로 지지했다. 디즈레일리 내각의 식민장관 카너번 백작은 "제국주의에는 황제 전제와 같은 잘못된 제국주의와, 평화를 유지하고 현지 주민들을 계몽하며 기근으로부터 구하고, 세계 각지의 신민들을 충성심으로 묶어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영국의 제국주의가 있다. 영국의 영토 확장은 약자 괴롭히기가 아니라, 영국의 제도와 건전한 영향력을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세계에 널리 퍼뜨리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는데, 빅토리아 여왕은 이러한 견해를 열렬히 지지했다.[630]
영국인, 스코틀랜드인, 아일랜드인, 보어인, 아프리카인, 아랍인, 인도인, 중국인, 버마인, 애보리진, 마오리족, 폴리네시아인, 인디언, 에스키모 등 무수한 인종, 그리고 기독교 삼대 종교와 힌두교를 포함한 다양한 종교를 영토에 거느린 대영제국에는 통일성이 전혀 없었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그들을 "여왕 폐하의 신민"으로 하나로 묶고 통합의 상징적 역할을 했다.[631]
영국 군주가 여성이었던 것은 대영제국의 성공 비결 중 하나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식민지 지배를 위협하는 반란에는 강경했지만, 피지배 민족 사이에서는 "제국의 어머니"로서 "자녀들"에게 자애를 베푸는 이미지가 널리 퍼져 저항심을 완화시켰다.[632][633] 캐나다의 수족과 크리족은 빅토리아 여왕을 "흰 어머니"라고 불렀고,[634] 인도 藩王은 인도 여황제 즉위식에서 "아, 어머니. 런던 궁전에 계신 사랑하는 폐하."라고 불렀다.[635] 1865년 자메이카 흑인 반란군은 "빅토리아 여왕 폐하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폐하의 소유물을 약탈해서는 안 된다"며 죄수복을 남겨두고 갔다.[636] 마하트마 간디 또한 빅토리아 여왕을 존경했다.[637] 빅토리아 여왕은 비백인 국가 왕이나 수장의 자녀들을 후견하고 교육을 제공하며, 자신의 이름을 주는 등(남성일 경우 빅토리아 여왕의 남성형 이름인 빅터(Victor)나 남편의 이름인 알버트(Albert) 등) "여왕은 인종에 관대하다"는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638]
4. 1. 제국주의 정책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제국주의 정책을 가속화하여 영토 확장에 힘썼다. 그 결과, 영국은 여러 대륙에 걸쳐 식민지를 확보하고 식민제국을 수립하여 ''''해가 지지 않는 나라'''''(''The empire on which the sun never sets'')라는 별명을 얻었다. 빅토리아의 통치 기간 동안 영국의 영토는 세계 전체 대륙의 4분의 1, 인구는 4억 명에 달했다.[625][626][627][628]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시기에 영국은 다음과 같은 지역들을 영국의 해외 영토로 병합했고, 빅토리아는 식민제국의 군주로 군림하였다.
빅토리아 시기에 병합된 영국의 해외영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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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 중동 · 아프리카 | 태평양 · 인도양 | 아메리카 |
빅토리아 여왕은 "제국주의에는 황제 전제와 같은 잘못된 제국주의와, 평화를 유지하고 현지 주민들을 계몽하며 기근으로부터 구하고, 세계 각지의 신민들을 충성심으로 묶어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영국의 제국주의가 있다. 영국의 영토 확장은 약자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영국의 제도와 건전한 영향력을 세계에 퍼뜨리는 것이다."라는 카너번 백작의 견해를 지지했다.[630]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보어, 아프리카, 아랍, 인도, 중국, 버마, 애보리진, 마오리족, 폴리네시아, 인디언, 에스키모 등 다양한 인종과 기독교, 힌두교 등 다양한 종교를 가진 대영제국은 통일성이 없었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그들을 "여왕 폐하의 신민"으로 묶는 통합의 상징적 역할을 했다.[631]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 군주가 여성이었던 것은 대영제국의 성공 비결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식민지 지배를 위협하는 반란에는 강경했지만, 피지배 민족 사이에서는 "제국의 어머니"로서 "자녀들"에게 자애를 베푸는 이미지가 널리 퍼져 저항심을 완화시켰다.[632][633]
4. 1. 1. 아편 전쟁과 중국의 반식민지화
18세기에서 19세기 유럽에서는 청나라의 도자기, 차(茶), 비단 등이 큰 인기를 끌었다. 청나라는 이 물건들을 교역하여 유럽으로부터 수많은 은(銀)을 확보하였는데, 당시 청나라는 지정은제를 도입하여 은을 화폐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영국은 청나라와의 교역에서 무역 적자가 발생하자, 동인도 회사를 통해 다량의 아편을 밀무역으로 중국에 지속적으로 유입시켰다. 청나라는 1729년 아편금지령을 실시했으나 이후 100여 년간 아편은 대량으로 끊임없이 유입되어 백성들의 아편 중독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청나라 황제 도광제는 임칙서를 광저우에 특사로 파견하여 아편을 몰수하고 불태웠다. 그러자 영국에서는 청나라와의 개전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1840년 6월, 여당인 휘그당의 파머스턴 내각은 앨리어트를 특사로 하여 군함과 병력을 이끌고 청나라를 침략하여 아편전쟁이 시작되었다. 1842년 난징조약이 체결되어 중국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중국의 반식민지화가 가속화되었고,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었다.
아편전쟁을 이끈 파머스턴이 수상이 되면서 빅토리아 시대의 대아시아 정책에 있어서 중국과 인도는 영국의 영토 확장 정책에 가장 중요한 거점 국가가 되었다. 크림전쟁으로 동맹 관계에 있던 프랑스와 연합하여 1856년 제2차 아편전쟁을 개시하였다. 청나라와 영국, 프랑스 간의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조약 불이행을 이유로 영프 연합군은 1860년 8월 북경을 점령하였다. 이로 인해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어 중국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태평천국의 난을 비롯한 내우외환에 시달렸으며, 영국은 청과의 조약 체결 이행과 이권 확보를 위해 청나라 정부를 지지하여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은 200만 냥을 획득하였다. 동시에 통치권을 상실한 청나라 남부 연안의 전역을 방위하는 목적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4. 1. 2. 인도 제국의 성립
1858년 인도 제국(Indian Empire)을 세워 인도를 영국의 직접 통치를 받는 식민제국에 편입시켰다. 1877년 1월 1일부터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 국왕 뿐만 아니라 인도의 황제를 겸하였다.18세기에 들어서면서 인도의 무굴 제국은 전성기를 지나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심각한 재정난으로 과세를 징수하였고, 제국 내에 여러 종교와 민족들을 통합하지 못한 채 이들의 분열이 지속되었다. 무굴 제국에 반대하는 인도 각 지역을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지원하면서 대리전의 양상을 띠다가, 영국은 프랑스를 몰아내고 서서히 인도의 일부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정부는 동인도 회사를 통해 자국의 면직물에 대한 관세는 낮추고 인도산 면직물의 관세를 높이거나, 인도인들을 착취하였기 때문에 인도내에 반영감정이 고조되었다. 이 결과 1857년 세포이의 항쟁이 발생하였고, 영국은 이를 진압함과 동시에 무굴 제국의 바하두르 샤 2세를 퇴위시키고 제국을 멸망시켰다.[264]
4. 1. 3. 3C 정책과 아프리카 분할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19세기 후반부터 3C 정책을 추진하여 이집트의 카이로(`C`airo),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C`apetown), 인도의 캘커타(`C`alcutta)를 거점으로 하는 식민정책을 취하였다. 세 도시의 머리글자가 모두 C로 시작하여 '''3C 정책'''(3C Policy)이라고 한다. 이집트에서의 지배권을 강화한 영국은 카이로에서 케이프타운까지 아프리카 대륙을 종단하여 지역 지배를 강화하려 하였으나, 서아프리카를 영토화하여 식민 지배를 강화하던 프랑스의 횡단 정책과 충돌하여 1898년 파쇼다 사건이 발생하였다.또한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로 남진을 꾀하는 러시아의 남진 정책과도 충돌하여 여러 차례 협상이 이루어졌고, 독일의 대외정책인 3B 정책과도 충돌하였으나 협상이 결렬되었다. 이러한 지속적인 영토 확장 갈등의 결과 제1차 세계 대전이 야기되었다.
4. 2. 한국과의 관계 (추가)
빅토리아 여왕 재위 기간 동안 영국과 조선 간의 직접적인 수교 관계는 없었다. 그러나 영국은 19세기 후반 아시아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조선에 대한 관심도 높였다.5. 유산
빅토리아의 재위 기간은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로 불리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 제국의 최전성기였다. 9명의 자녀들이 유럽의 여러 왕가 및 귀족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어 '유럽의 할머니'라고도 불린다.
빅토리아는 입헌 군주로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따랐지만, 당시 영국 사회에 널리 퍼진 여왕의 화목한 가정 이미지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도덕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그녀는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군주 중 하나였으며, 그녀의 이름은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짐바브웨와 잠비아 사이의 빅토리아 폭포 등 영국과 과거 식민지였던 나라들의 지명과 건축물에 남아 있다. 오늘날 남아있는 유럽 군주들의 대부분은 여왕의 자손들이다.
그녀의 전기 작가 중 한 명인 자일스 세인트 오번에 따르면, 빅토리아는 성인기에 하루 평균 2,500단어를 썼다.[214] 1832년 7월부터 사망 직전까지 122권에 달하는 상세한 일기를 남겼다.[215] 빅토리아 사후, 막내딸 비아트리스 공주가 일기를 편집했으며, 그 과정에서 원본을 소각했다.[216] 이러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일기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217] 빅토리아의 방대한 서신의 일부는 책으로 출판되었다.[218]
말년에 빅토리아는 비만하고 촌스러웠지만, 위엄 있는 이미지를 투영했다.[219] 과부 생활 초기에는 인기가 없었지만, 1880년대와 1890년대에는 자애로운 어머니상으로 제국을 상징하며 대중의 호감을 얻었다.[220] 그녀의 일기와 편지가 공개된 후에야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의 규모가 대중에게 알려졌다.[207][221] 엘리자베스 롱퍼드와 세실 우드햄-스미스가 각각 1964년과 1972년에 쓴 전기는 여전히 널리 칭찬받고 있다.[223]
빅토리아 여왕 재위 기간 동안 영국에서는 현대 입헌군주제가 점진적으로 확립되었다. 투표 제도 개혁은 하원의 권력을 강화시켰다.[225] 1867년, 월터 베이지핫은 군주는 "상의할 권리, 격려할 권리, 경고할 권리"만 유지한다고 썼다.[226] 빅토리아의 군주제가 정치적이기보다는 상징적이 되면서, 도덕성과 가족 가치를 강조하여 이전 하노버 왕가와는 다른 "가족 군주제"라는 개념이 확립되었다.[227]
빅토리아와 알버트는 측근인 폰 슈톡마어 남작의 충고에 따라, 스스로를 엄격하게 규율했다. 영국에서는 국왕이 도덕적으로 고결할 때에만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1024][1025]
빅토리아와 알버트는 생애 동안 사이좋은 부부로 지내며 많은 자녀를 두었다. 빅토리아 자신이 이러한 "행복한 왕실 가족"의 구도를 그리도록 지시했다.[1026] 이러한 가족적인 모습은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부상한 중산층의 도덕과 가치관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왕실은 중산층의 찬사 대상이 되었다.[1027][1028][1029]
알버트와 사이에 4남 5녀 9명의 자녀를 두었다. 딸들은 독일 제국을 중심으로 한 여러 나라의 왕족과 귀족들과 결혼했으며, 41명의 손주와 37명의 증손주가 태어났다.[456] 말년에는 "유럽의 할머니"라고 불리게 되었다.
관계 | 이름 | 출생일 | 사망일 | 비고 | |
---|---|---|---|---|---|
첫째 공주 (첫째/장녀) | -- | 빅토리아 (애칭: 빅키) | 1840년11월 21일 | 1901년8월 5일 (만 60세 사망) |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3세 황후 자녀: 4남 4녀(8명) |
첫째 왕자 (둘째/장남) | -- | 에드워드 7세 (애칭: 버티) | 1841년11월 9일 | 1910년5월 6일 (만 68세 사망) |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 초대 국왕 ''에드워드 7세'' 자녀: 3남 3녀(6명) |
둘째 공주 (셋째/차녀) | -- | 앨리스 (애칭: 앨리) | 1843년4월 25일 | 1878년12월 14일 (만 35세 사망) |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 대공비 자녀: 2남 5녀(7명) |
둘째 왕자 (넷째/차남) | -- | 알프레드 (애칭: 애피) | 1844년8월 6일 | 1900년7월 30일 (만 55세 사망)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딘버러 공작 자녀: 1남 4녀(5명) |
셋째 공주 (다섯째/삼녀) | -- | 헬레나 (애칭: 렌첸) | 1846년5월 25일 | 1923년6월 9일 (만 77세 사망) |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크리스티안 부인 자녀: 4남 2녀(6명) |
넷째 공주 (여섯째/사녀) | -- | 루이즈(애칭: 로시) | 1848년3월 18일 | 1939년12월 3일 (만 91세 사망) | 아가일 공작 존 더글러스 서덜랜드 캠벨 부인 자녀: 없음 |
셋째 왕자 (일곱째/삼남) | -- | 아서 | 1850년5월 1일 | 1942년1월 16일 (만 91세 사망) | 코노트 공작 자녀: 1남 2녀(3명) |
넷째 왕자 (여덟째/사남) | -- | 레오폴드(애칭: 레오) | 1853년4월 7일 | 1884년3월 28일 (만 30세 사망) | 올버니 공작 자녀: 1남 1녀(2명) |
다섯째 공주 (아홉째/오녀) | -- | 비아트리스 (애칭: 베이비) | 1857년4월 14일 | 1944년10월 26일 (만 87세 사망) | 바텐베르크 공작 하인리히 모리츠 부인 자녀: 3남 1녀(4명) |
빅토리아 여왕의 남계 후손들 중 많은 수가 혈우병을 앓았다. 빅토리아 여왕이 혈우병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돌연변이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1032]
빅토리아 여왕의 넷째 아들인 레오폴드(올버니 공)는 혈우병으로 고통받았다. 둘째 딸인 앨리스와 다섯째 딸인 비아트리스도 혈우병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고, 앨리스를 통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 비아트리스를 통해 스페인 부르봉 왕조에 혈우병이 전파되었다.[1033]
그녀는 넓은 의미로 빅토리아 시대의 레이디, 빅토리아 스타일의 레이디를 통틀어 의미하기도 한다.
6. 평가
빅토리아 여왕은 강하고 정직한 성격으로, 내각의 보고서를 꼼꼼히 검토하는 성실한 왕이었다. 아편 전쟁, 크림 전쟁, 보어 전쟁 등 국내외의 중대한 문제들을 해결하여 제국의 번영을 이끌었고,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았다.[1040] 19세기 대영 제국의 번영에 큰 공을 세웠으며, 재위 기간 동안 영국은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입헌군주제의 원칙에 따라 현실 정치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지만, 당시 영국 사회에 널리 퍼진 여왕의 화목한 가정 이미지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도덕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C.S.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보수적인 성 문화를 빅토리아 시대의 성 문화에 비유하기도 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군주 중 하나였으며, 그녀의 이름은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빅토리아 폭포 등 영국과 과거 식민지였던 나라들의 지명과 건축물에 남아 있다. 또한 오늘날 유럽 군주들의 대부분은 여왕의 자손들이다.
흔히 '빅토리아 여왕'은 왕 자신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로는 빅토리아 시대의 레이디, 빅토리아 스타일의 레이디를 통틀어 의미하기도 한다.
전기 작가 자일스 세인트 오번에 따르면, 빅토리아는 성인기에 하루 평균 2,500단어를 썼다.[214] 1832년부터 사망 직전까지 쓴 일기는 122권에 달한다.[215] 사후 막내딸 비아트리스 공주가 일기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원본을 소각했지만,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216][217] 빅토리아의 방대한 서신 일부는 책으로 출판되었다.[218]
말년에 빅토리아는 비만하고 촌스러웠으며 키가 약 약 1.52m 정도였지만, 위엄 있는 이미지를 보였다.[219] 과부 생활 초기에는 인기가 없었지만, 1880년대와 1890년대에는 자애로운 어머니상으로 제국을 상징하며 대중의 호감을 얻었다.[220] 일기와 편지가 공개된 후에야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이 대중에게 알려졌다.[207][221] 1921년 리턴 스트래치의 ''빅토리아 여왕''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된다.[222] 엘리자베스 롱퍼드와 세실 우드햄-스미스가 쓴 전기는 여전히 칭찬받고 있다.[223] 그들은 빅토리아가 감정적이고 완고하며 정직하고 직설적이었다고 결론짓는다.[224]
빅토리아 여왕 재위 기간 동안 현대 입헌군주제가 점진적으로 확립되었다. 투표 제도 개혁은 영국 하원의 권력을 강화시켰다.[225] 1867년 월터 베이지핫은 군주는 "상의할 권리, 격려할 권리, 경고할 권리"만 유지한다고 썼다.[226] 빅토리아의 군주제가 정치적이기보다는 상징적이 되면서, 도덕성과 가족 가치를 강조하여 군주제를 강화했다.[227]
빅토리아 여왕은 국왕으로서 영국 왕실 문장을 사용했다. 하노버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문장에는 이전 국왕들이 사용했던 하노버의 상징이 포함되지 않았다. 그녀의 문장은 이후 모든 영국 국왕들에 의해 사용되었다.[266]
빅토리아 여왕의 키는 145cm가 되지 않았지만, 체중은 1880년대에 76kg이나 되었다.[975] 멜번 자작은 "하노버 가문은 원래부터 살이 찌기 쉬운 체질입니다"라고 위로했다.[976]
빅토리아는 더위를 많이 타서, 궁전에서는 여왕이 들를 방의 창문을 미리 열어두는 것이 관례였다.[975]
빅토리아는 직설적이고 고집 세며,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었다.[977][978] 알버트 공은 빅토리아가 쉽게 화를 내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979] 빅토리아 자신도 "의견을 들으면 감정이 격해지는 성격"임을 인정했다.[980]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빅토리아 여왕과 잘 지내는 요령으로 "결코 거절하지 않고, 결코 반대하지 않고, 가끔씩 잊는 것"이라고 말했다.[981][982]
알버트는 빅토리아의 교양 부족을 우려했다. 빅토리아는 과학, 기술 분야 지식이 부족했고, 예술, 음악 분야도 알버트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알버트는 이를 가정교사였던 레이첸의 교육 탓으로 여겨 1842년 그녀를 궁정에서 쫓아냈다.[983] 레이첸은 빅토리아의 부모 결혼 때부터 시녀로 섬겼고, 빅토리아가 5세 때 가정교사가 되었으며, 여왕 즉위 시 여남작 작위를 받았다. 빅토리아는 레이첸을 매우 친애했으며, 독일로 귀국한 후에도 매주 편지를 주고받았다.
빅토리아 여왕에게는 독일의 피가 더 많이 흐르고 있었다. 계산상 빅토리아 여왕에게 흐르는 스튜어트 왕가의 피는 256분의 1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거의 독일인의 피였다.[984]
빅토리아 여왕은 평소 친독파였다.[985] 남편 알버트도 마찬가지여서, 왕실 부부는 독일어를 일상 대화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986] 알버트는 독일 민족 국가들을 통합하여 유럽의 세력으로 만들고자 했다.[987]
빅토리아 여왕 즉위 당시 영국 왕위는 여전히 상당한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360][989] 수상 및 각료 임명 해임과 외교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990] 알버트 공이 빅토리아 여왕을 대신하여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991]
알버트 공 재임 기간 동안 왕권은 확대되었지만, 그의 사망과 함께 왕권은 약화되었고, 빅토리아 시대 말기에는 영국 역사상 유례없이 왕권이 축소되면서 입헌군주제가 확립되었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 자신은 입헌군주가 될 의사가 전혀 없었으며, 수동적으로 그렇게 된 것에 불과했다.[992][993]
여왕은 의견을 개진할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었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그 틀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했다.[994]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법안을 추진하면 퇴위하겠다고 위협했고,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에게는 격노하며 반격했다.[995] 정부나 의회의 결정을 막을 수 없더라도, 정책 추진을 지연시켰다.[996] 정계 인사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적극적으로 개입했다.[997]
특히 팔머스턴 자작에게 "여왕에게 아무런 상의도 없이 행동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경고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998] 또한 존 러셀 수상에게 외무장관이 독단적으로 정책을 변경하거나 수정해서는 안 되며, 그러한 행위는 왕관에 대한 불충실이라고 통지했다.[999][1000]
알버트 공 또한 입헌군주라는 틀에 갇히려 하지 않았다. 그의 측근인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폰 슈토크마 남작은 군주가 영원한 지도자라고 생각했다. 알버트 공은 왕에게 수상을 해임할 권리가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있다 하더라도 해임을 실행하면 궁극적으로 왕권이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전해진다.[1001]
빅토리아 여왕은 군주로서의 능력이 부족했지만, 알버트 공은 그러한 능력이 있었다. 알버트 공은 서거 직전 단계에서 이미 정부와 의회 모두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가 더 오래 생존했다면 영국은 입헌군주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1002]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알버트 공이 더 오래 살았다면 절대군주제를 선물해 주었을 것이라고 말했다.[1003][1004]
알버트 공 사후, 빅토리아 여왕의 왕권은 계속해서 쇠퇴했다. 그것은 장관들의 뛰어난 능력 덕분이었다. 그들은 "정치의 아마추어"인 그녀가 정치에 간섭하려는 것을 적절하게 거부했던 것이다.[1005] 말년의 그녀는 전보를 보낼 권리조차 빼앗길 뻔했다.
빅토리아 여왕 즉위 무렵 영국의 유대인은 약 3만 명이었고, 그중 절반이 런던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기독교적 가치관과 금융업자 이미지 때문에 멸시를 받았고, 여전히 정치적으로 차별적인 대우를 받고 있었다.[1007]
빅토리아 여왕은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으며, 유대인에 대한 작위·기사 작위 수여는 빅토리아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즉위 직후인 1837년 유대인 몬테피오레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한 것이 그 시작이다.[1008][1009] 영국 역사상 최초의 유대인 기사 작위 수여에 대해 빅토리아 여왕은 매우 기뻤다고 일기에 적고 있다.[1007][1010]
그녀가 특히 아끼던 유대인은 수상 벤자민 디즈레일리이다. 디즈레일리는 출세를 위해 소년 시절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유대인을 유대교 신자라기보다는 민족으로 간주하고 자신은 유대인 민족이며 유대인 민족의 우수성을 공언했다.[1011] 반면 윌리엄 글래드스톤은 기독교적 입장에서 디즈레일리 비판을 되풀이했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이러한 글래드스톤의 기독교적 사상을 싫어했다.[1012]
1869년 글래드스톤이 라이오넬 드 로스차일드에게 작위를 수여해야 한다고 제안했을 때, 빅토리아 여왕은 유대인 귀족은 인정할 수 없으며, 귀족은 전통적으로 지주여야 한다며 준남작까지라면 허용한다고 했다.[1013]
하지만 1885년 빅토리아 여왕은 나다니엘 로스차일드에게 남작 작위를 수여했다. 이 무렵 로스차일드 가문은 많은 백성을 거느리는 영주 이미지도 갖추게 되었기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의 반발도 약해진 것으로 보인다.[1014]
빅토리아와 알버트는 측근인 폰 슈톡마어 남작의 충고에 따라, 스스로를 엄격하게 규율했다. 영국에서는 국왕이 도덕적으로 고결할 때에만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1024][1025]
빅토리아와 알버트는 생애 동안 사이좋은 부부로 지내며 많은 자녀를 두었다. 빅토리아 자신이 이러한 "행복한 왕실 가족"의 구도를 그리도록 지시했다.[1026]
이러한 가족적인 모습은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부상한 중산층의 도덕과 가치관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왕실은 중산층의 찬사의 대상이 되어갔다.[1027][1028][1029] 빅토리아 시대의 중산층에서는 여성이 일하는 것은 하층민으로 전락하는 증거로 여겨져 기피되었고, 결혼하여 가정에 전념하는 것이 여성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여겨졌던 것이다.[1030]
알버트를 잃은 후 빅토리아의 긴 상복 역시 당시 미망인의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으며, 상복 때문에 왕실에 친근감을 느끼는 국민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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