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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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일 동맹은 1902년 1월 30일에 체결된 영국과 일본 간의 동맹이다. 이 동맹은 러시아의 팽창에 대한 공동의 우려, 특히 만주에서의 러시아 세력 확장에 대한 반대를 배경으로 체결되었다. 1902년, 1905년, 1911년에 걸쳐 세 차례 갱신되었으며, 주요 내용은 한 국가가 두 개 이상의 국가와 전쟁을 할 경우 동맹국이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것이었다. 영일 동맹은 러일 전쟁에서 일본을 지원하는 데 기여했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참전을 이끌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반대와 양국 간의 이해관계 차이로 인해 1923년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2023년에는 일영 원활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양국 간의 군사 협력이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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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 동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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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정보 | |
이름 | 영일 동맹 |
원어 이름 | 영어: Anglo-Japanese Alliance 일본어: 日英同盟 (Nichi-Ei Dōmei) |
유형 | 군사 동맹 |
배경 | 반(反)러시아 제국 |
서명일 | 1902년 1월 30일 |
서명 장소 | 런던, 영국 |
효력 발생일 | 1902년 1월 31일 |
대체 조약 | 사대국 태평양 조약 |
만료일 | 1923년 8월 17일 |
서명국 | |
당사국 | |
언어 | 영어 일본어 |
![]() | |
서명자 | |
영국 | 랜즈다운 경, 영국 |
일본 | 하야시 다다스 백작, 일본 |
내용 | |
주요 내용 | 영국의 중국에서의 특수 권익, 일본의 중국 및 한국에서의 특수 권익을 상호 승인 제3국과 전쟁 시 다른 한쪽은 중립을 지킬 의무 |
2. 역사적 배경
1895년 영국이 일본의 랴오둥 반도 점령에 반대하는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삼국 간섭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영국과 일본 간 동맹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비록 이 사건은 동맹의 불안정한 토대가 되었지만, 영국이 일본의 근대화 노력을 지원하고 의화단 사건 진압에 협력하면서 동맹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6] 양국 신문들은 동맹을 지지했는데, 영국에서는 ''타임스''의 프랜시스 브링클리와 ''텔레그래프''의 에드윈 아놀드가, 일본에서는 정치인 오쿠마 시게노부의 친(親)동맹 분위기가 ''마이니치''와 ''요미우리''의 친(親)동맹 옹호로 이어졌다. 1894년 영일 통상항해 조약 또한 동등한 관계와 동맹의 가능성을 위한 길을 열었다.[7]
결국 동맹을 촉진한 공통된 이익은 만주에서의 러시아 확장에 대한 반대였다.[8] 1890년대 초 영국 외교관 세실 스프링 라이스는 영국과 일본의 공동 대응만이 그 지역에서 러시아의 세력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지적했다.[9] 러시아가 중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협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양국은 각각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영국은 "영광스러운 고립" 정책을 포기하는 것에 신중했고,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를 우려했으며, 일본이 미국을 공격할 경우 조약에 따라 행동하기를 주저했다. 일본 정부 내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포함하여 러시아와의 타협을 바라는 세력도 있었다. 이들은 아시아 내 우호 관계가 일본의 부상에 불편함을 느끼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더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영국은 한국에서 일본의 이익을 보호할 의향이 없었고, 일본은 인도에서 영국을 지원할 의향이 없었다.
하야시 다다스와 랜즈다운 경은 1901년 7월 논의를 시작했고, 한국과 인도에 대한 분쟁으로 11월까지 지연되었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와의 화해를 시도하기 위해 협상 연기를 요청했으나, 대체로 성공하지 못했다. 영국은 일본의 이중성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고, 하야시는 1902년에 서둘러 협상에 재진입했다. "영광스러운 고립"은 영국이 평화 시 군사 동맹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하면서 종식되었다. 이는 동서양 간 최초의 동등한 조건의 동맹이었다.[10]
2. 1. 청나라의 이권 분쟁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배한 이후, 중국 대륙을 둘러싼 정세는 급변했다. 청나라 정부는 일본에 대한 거액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로부터 차관을 빌렸고, 그 대가로 러시아와 프랑스에 청나라 국내의 다양한 권익을 부여해야 했다. 이것을 계기로 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이 급속히 진행되어, 아편전쟁 이후 영국 단독에 의한 청나라의 반식민지 상태가 붕괴되었다.특히, 시베리아 철도의 만주 북부 부설권 획득을 대표하는 러시아의 만주와 화북으로의 진출은 매우 거셌다. 프랑스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현재의 베트남)에서 진출하여 운남성, 광서성, 광동성, 사천성 등 화남을 세력권으로 삼았다. 러시아와 프랑스는 1893년에 러불동맹을 체결했으며, 삼국간섭에서처럼 중국 분할에서도 밀접하게 연계하여 화북을 세력권으로 하는 러시아와 연계하여 영국이 협공당할 위험이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영국 총리 제3대 로버트 가스코인-세실은 청나라의 영토 보전을 호소함으로써, 러시아와 프랑스가 중국 대륙에서 영국의 권익을 침해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더 나아가, 1896년 3월에는 독일 제국과 연계하여, 러시아와 프랑스에 앞서 청나라 정부에 대한 일본 배상금 지불을 위한 새로운 차관을 제공함으로써, 영국과 독일 양국의 청나라 국내에서의 권익을 인정받았다.
또한, 이에 앞서 같은 해 1월 프랑스와 협정을 체결하여, 영국과 프랑스 모두 메콩강 상류에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고, 사천성과 운남성을 문호개방하기로 약정했다. 이를 통해 프랑스의 북진에 대한 일정한 제동을 거는 데 성공했다.
2. 2. 독일과 러시아의 진출 저지
1895년 일청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전한 이후, 청나라 정부는 일본에 거액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로부터 차관을 빌렸고, 그 대가로 러시아와 프랑스에 청나라 국내의 다양한 권익을 부여해야 했다. 이것을 계기로 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이 급속히 진행되었다.특히, 시베리아 철도의 만주 북부 부설권 획득을 대표하는 러시아의 만주와 화북으로의 진출은 매우 거셌다. 프랑스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현재의 베트남)에서 진출하여 운남성, 광서성, 광동성, 사천성 등 화남을 세력권으로 삼았다. 러시아와 프랑스는 1893년에 러불동맹을 체결했으며, 삼국간섭에서처럼 중국 분할에서도 밀접하게 연계하여 화북을 세력권으로 하는 러시아와 영국이 협공당할 위험이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영국 총리 제3대 로버트 가스코인-세실은 청나라의 영토 보전을 호소함으로써, 러시아와 프랑스가 중국 대륙에서 영국의 권익을 침해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더 나아가, 1896년 3월에는 독일 제국과 연계하여, 러시아와 프랑스에 앞서 청나라 정부에 일본 배상금 지불을 위한 새로운 차관을 제공함으로써, 영국과 독일 양국의 청나라 국내에서의 권익을 인정받았다.
또한, 이에 앞서 같은 해 1월 프랑스와 협정을 체결하여, 영국과 프랑스 모두 메콩강 상류에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고, 사천성과 운남성을 문호개방하기로 약정했다. 이를 통해 프랑스의 북진에 대한 일정한 제동을 거는 데 성공했다.
1897년 산둥성에서 독일인 가톨릭 선교사가 살해당한 사건을 구실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이끄는 독일 제국군]]이 청나라에 출병하여 교주만(膠州灣)을 점령하고, 그대로 조차지(租借地)로 획득하였다. 솔즈베리 후작은 독일이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대한 방파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처음에는 환영했지만, 빌헬름 2세가 산둥반도 전체를 독일 세력권으로 주장하기 시작하자 독일에 대한 경계심도 강해졌다.
1898년에 들어서자 러시아가 요동반도 여순을 점령하고, 더 나아가 대련에도 군함을 파견하여 무력 침공으로 청나라 정부를 위압하여 여순과 대련을 러시아 조차지로 삼았다. 이에 대항하여 솔즈베리 후작은 종전의 “청나라 영토 보전”이라는 명분을 뒤집고, 청나라 정부에 포함외교를 실시하여, “러시아가 여순 점령을 중지할 때까지”라는 기한부로 산둥 반도의 위하위를 영국 조차지로 삼았다. 동시에 독일이 러시아와 프랑스와 함께 이 조차에 반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산둥 반도를 독일의 세력권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영국 제국주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양자강 유역에 독일 제국주의가 진출하는 것을 용인하는 것이었고, 영국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식민지 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은 이 해에 영국이 “영광스러운 고립” 정책을 계속하는 한, 청나라의 운명은 영국의 이익과 희망에 반하는 형태로 결정될 것이라고 연설하고, 크림 전쟁 때처럼, 어느 강국과 군사적으로 동맹하는 것이 앞으로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호소했다.[52]
1899년 무렵에는 러시아 제국주의의 만주와 화북 전역의 지배 체제가 더욱 견고해졌고, 러시아가 이 지역에 관세를 부과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더 나아가 1900년에 일어난 의화단 운동을 틈타 러시아는 만주를 군사 점령하였다. 러시아는 만주에서의 철군을 약속했지만, 쉽게 실행하지 않았고, 오히려 남쪽의 한반도(대한제국)에도 손을 뻗기 시작했다. 이에 영국과 일본은 경계를 강화하고, 양국 사이에 반러시아라는 공통의 유대가 생겼다.
2. 3. 동맹 체결

1895년 영국이 일본의 랴오둥 반도 점령에 반대하는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삼국 간섭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을 때부터 영국과 일본 간 동맹 가능성이 논의되었다. 이 사건은 동맹의 불안정한 토대가 되었지만, 영국이 일본의 근대화 노력을 지원하고 의화단 운동 진압을 위해 협력하면서 동맹의 가능성은 더욱 강화되었다.[6] 양국 신문들은 동맹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냈다. 영국에서는 ''타임스''의 프랜시스 브링클리와 ''텔레그래프''의 에드윈 아놀드가 그러한 지지의 중심이었고, 일본에서는 정치인 오쿠마 시게노부의 친(親)동맹 분위기가 ''마이니치''와 ''요미우리'' 신문의 친(親)동맹 옹호로 이어졌다. 1894년 영일 통상항해 조약 또한 동등한 관계와 동맹의 가능성을 위한 길을 열었다.[7]
결국 동맹을 촉진한 공통된 이익은 만주 침략과 같이 의화단 운동 이후에도 계속된 러시아의 확장에 대한 반대였다.[8] 1890년대 초 영국 외교관 세실 스프링 라이스가 영국과 일본의 공동 대응만이 그 지역에서 러시아의 세력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지적했을 때부터 이러한 인식은 분명해졌다.[9] 러시아가 중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각각의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영국은 "영광스러운 고립" 정책을 포기하는 것에 대해 신중했고,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를 우려했으며, 일본이 미국을 공격할 경우 조약에 따라 행동하기를 주저했다. 일본 정부 내에는 4선의 일본 총리를 역임한 이토 히로부미를 포함하여 러시아와의 타협을 여전히 바라는 세력이 있었다. 아시아 내 우호 관계가 일본의 부상에 불편함을 느끼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더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게다가 영국은 한국에서 일본의 이익을 보호할 의향이 없었고, 일본은 인도에서 영국을 지원할 의향이 없었다.

하야시와 랜즈다운 경은 1901년 7월 논의를 시작했고, 한국과 인도에 대한 분쟁으로 11월까지 지연되었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와의 화해를 시도하기 위해 협상 연기를 요청했다. 그는 대체로 성공하지 못했고, 영국은 일본의 이중성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으므로 하야시는 1902년에 서둘러 협상에 재진입했다. "영광스러운 고립"은 영국이 평화 시 군사 동맹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하면서 종식되었다. 이는 동서양 간 최초의 동등한 조건의 동맹이었다.[10]
1902년 5월, 일본군 참모본부의 고위 정보 장교이자 1900년 의화단 운동 진압을 위해 중국에 파병된 일본군의 초대 사령관이었던 후쿠시마 야스마사 중장이 군사 정보 협력에 대한 비공식 논의를 마무리하기 위해 런던으로 파견되었다. 영국 측 협상은 기동 및 군사 정보국 국장인 윌리엄 니콜슨 경이 이끌었으며, 7월 양국 간에 다양한 정보 협력 협정이 체결되었다. 후쿠시마는 8월 9일 에드워드 7세의 즉위식에서 메이지 천황을 대표하였고, 세부 사항을 조율하기 위해 1902년 9월까지 머물렀다. 협정의 존재 및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13]
당시 일본 정계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러시아와의 타협 방안을 모색했으나,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다로, 사이고 쥬도, 마쓰가타 마사요시, 가토 다카아키 등은 러시아와의 대립은 조만간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영국과의 동맹론을 주장했다.
결국, 일로협상[53]은 실패로 돌아갔고,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에 의해 일영동맹 체결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토 또한 더 이상 일영동맹에 반대하지 않았고, 1902년 1월 30일 런던 외무성에서 일영동맹이 체결되었다. 조인 당시 일본 측 대표는 하야시 다다스 특명전권공사였고, 영국 측 대표는 솔즈베리 후작 내각의 외무대신 제5대 랜즈다운 후작(헨리 찰스 키스 페티-피츠모리스)였다.
제1차 일영동맹의 내용은, 체결국이 다른 나라(1개국)의 침략적 행위에 대응하여 교전하게 된 경우, 동맹국은 중립을 지키는 것으로 다른 나라의 추가적인 참전을 방지하고, 2개국 이상과의 교전이 된 경우에는 동맹국이 체결국을 돕고 참전할 것을 의무로 규정한 것이다. 또한 비밀 협상에서는 일본이 단독으로 대러 전쟁에 임할 방침을 전달했고, 영국은 우호적인 중립을 약속했다. 조약 체결 2년 후인 1904년에는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영국은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가장하면서도, 첩보 활동과 러시아 해군에 대한 사보타주, 전비 조달[54] 등으로 일본을 크게 도왔다.
3. 조약 내용
1902년 체결된 영일 동맹은 6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일본은 중국과 조선에서, 영국은 중국에서의 이익을 서로 인정한다.
- 한쪽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할 경우, 동맹국은 중립을 지킨다.
- 한쪽이 2개국 이상과 전쟁을 할 경우, 동맹국은 협력하여 전투에 참여한다. (방수 동맹)
이 조약은 5년 기한으로 체결되었으며, 양국의 제국주의 정책을 상호 지원하고 보완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러일 전쟁 발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삼국간섭 당시 프랑스, 러시아, 독일이 청나라 편을 들어 일본에 무력 시위를 했던 것과 비교하면 큰 변화였다.
1902년 5월, 의화단 운동 진압을 위해 중국에 파병된 일본군 초대 사령관이었던 후쿠시마 야스마사 중장이 군사 정보 협력을 위한 비공식 논의를 위해 런던을 방문했다. 양국은 7월에 다양한 정보 협력 협정을 체결했고, 후쿠시마 중장은 에드워드 7세 즉위식에서 메이지 천황을 대표하여 참석한 후 9월까지 런던에 머물며 세부 사항을 조율했다.
3. 1. 1902년 조약의 내용
6개 조로 구성된 영일 동맹 협약에는 일본은 중국과 조선에서의 이익을, 영국은 중국에서의 이익을 서로 인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한, 한쪽이 다른 나라와 교전할 때에는 동맹국은 엄정중립을 지키며, 한쪽이 2개국 이상과 교전할 때에는 동맹국이 협동 전투에 임한다는 방수 동맹 조항도 포함되었다.[11]이 조약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이익을 인정했지만, 일본이 단 한 명의 적과만 갈등을 빚는 경우 영국이 지원할 의무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일본도 영국이 두 명 이상의 적과 싸우지 않는 한 영국의 이익을 방어할 의무가 없었다.
이 조약은 신중하고 명확한 언어로 작성되었지만, 양측은 서로 다르게 해석했다. 영국은 이를 러시아에 대한 가벼운 경고로 여겼지만, 일본은 이 조약으로 용기를 얻었다. 이후 온건파조차도 조선 문제에 대한 타협을 거부했으며, 극단주의자들은 제국 확장의 기회로 여겼다. 많은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러시아와의 대결을 원했고, 2개국 이상의 개입에 대한 조항(제3조)은 1895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 간섭을 떠올리게 하여, 유럽 연합에 대항하는 일본의 외교적, 군사적 입지를 강화했다.[12]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항 | 내용 |
---|---|
제1조 | 영국과 일본 양국은 중국과 한국의 독립을 상호 인정하며, 양국에 대한 공격적인 성향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영국의 이익은 주로 중국과 관련이 있고, 일본은 중국 외에도 한국에서 정치적, 상업적, 산업적으로 특별한 이익을 가지고 있다. 양국 중 한 나라가 다른 강대국의 공격이나 중국 또는 한국에서의 혼란으로 인해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해야 할 경우,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
제2조 | 어느 한 당사국이 제1조에 따라 전쟁에 휘말리게 될 경우 중립을 지킨다. |
제3조 | 어느 한 당사국이 두 개 이상의 강대국과 전쟁에 휘말리게 될 경우 서로 지원한다. |
제4조 | 양국은 이 동맹에 불리한 다른 강대국과 별도의 협정을 체결하지 않는다. |
제5조 | 양국은 이 조약의 영향을 받는 이익이 위험에 처할 경우 서로 솔직하고 충분히 의사소통한다. |
제6조 | 조약은 5년간 유효하며, 4년 말에 통지가 없을 경우 자동 연장된다.[11] |
3. 2. 1905년, 1911년 조약 갱신
1905년 8월 12일 양국은 협약을 개정하였는데,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권을 확인하고, 동맹 적용 범위를 인도까지 확대하였다. 또한, 동맹국이 한쪽의 다른 1국과 전쟁을 하는 경우도 동맹국이 참전하기로 하였다(공수 동맹).[14] 제2차 한일협약이 같은 해 11월 17일에 체결된 것은 2차 조약 조인 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동맹은 10년 동안 유효하였으나, 1911년 7월 13일 다시 개정되어 10년 더 연장되었으며, 미국은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18] 일본은 이미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보장받고 있었다.1905년 동맹 갱신은 부분적으로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얻은 성과에 따른 일본-영국 협정의 재확인이었다.[8] 또한 영국이 남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의도를 의심하여 인도 방위를 위해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고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15][16] 1905년 7월 재협상을 통해 일본은 인도에서의 영국의 이익을 지지하고 영국은 한국으로의 일본의 진출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 해 11월까지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고, 1906년 2월 이토 히로부미는 서울에 주재총독으로 파견되었다. 1911년 갱신 당시 일본 외교관 고무라 주타로는 일본의 관세 자주권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7]
제1차 영일 동맹은 1902년(메이지 35년) 1월 30일부터 5년간 유효하도록 체결되었으나, 러일 전쟁이 발발하여 전황이 일본군의 우세로 기울자, 영국에서는 동맹 확장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타났다. 랜즈다운 영국 외무장관은 1905년(메이지 38년) 3월 하순, 주영국 일본국 대사관 초대 대사이자 특명전권대사인 하야시 곤스케를 통해 동맹 연장에 대한 사전 협의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일본 측에 전달했다.
영국 측은 동맹의 적용 범위를 인도(영국령 인도 제국)까지 확대하기를 희망했지만, 새로운 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일본은 난색을 표했다.[56] 제2차 영일 동맹에서는 동아시아에 인도를 추가하여 적용 범위를 확대했다. 또한 대한제국에 대해서는 국제 정세를 고려하여 제1차 동맹보다 더욱 강력한 보호국화(제3조)로 양국이 타협했고, 제1차 영일 동맹에서 "방어"를 중심으로 한 내용이 제2차 동맹에서는 "공수"로 변경되었다.
포츠머스 조약 사전 협상으로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이 미국에 체류 중이었기에, 주영국 일본국 대사관의 하야시 특명전권대사가 조약 체결에 참석하여 8월 12일 런던에서 제2차 영일 동맹이 체결되었다. 제2차 영일 동맹에서는 영국의 인도에서의 특권과 청나라에 대한 양국을 포함한 열강의 상업적 기회균등을 인정하고, '''체결국 중 한 나라 이상이 다른 나라와 교전할 경우, 동맹국은 이를 돕기 위해 참전해야 한다'''는 의무를 명시한 공수 동맹으로 강화되었다.[56] 이는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국화를 영국이 승인하는 조건으로 타협이 이루어진 결과였다. 또한 동맹의 유효 기간이 10년으로 연장되었다.
1911년(메이지 44년)에는 새로운 제3차 영일 동맹이 체결되었다. 이 개정 조약에서는 한 締約國(체약국)이 제3국과 포괄적 중재 재판 조약을 체결한 경우, 그 締約國은 전술한 제3국과 교전할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것을 규정하였다.[58] 이로써 미국을 이 동맹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그러나 이 조항은 "자동 참전 규정"과의 모순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효력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전 조약에서 한국(대한제국)에 관한 조항과 인도 국경 방위에 관한 조항이 삭제되었다.[59]
4. 동맹의 효과 및 영향
1902년 1월 30일 체결된 제1차 영일 동맹은 러일 전쟁 발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조약은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경우 영국이 중립을 지키고, 다른 나라(특히 프랑스)가 러시아를 지원할 경우 영국이 일본을 돕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당시, 영국은 공식적으로 참전하지 않았지만, 영일 동맹의 존재는 러시아의 동맹국이었던 프랑스가 러시아를 지원하는 것을 막는 효과를 가져왔다. 프랑스가 러시아를 지원할 경우 영국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21]
1905년 체결된 제2차 영일 동맹은 동맹의 적용 범위를 인도까지 확대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국화를 명시하는 등, 일본의 이익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일 동맹을 근거로 연합국 진영에 참전하였다.[13] 일본은 전쟁 중 적도 북쪽 태평양 지역의 독일령을 점령할 수 있었다. 1914년 칭다오의 독일 기지를 공격하여 독일군의 항복을 받아냈으며(칭다오 공방전 참조), 1917년에는 일본 군함이 지중해로 파견되어 몰타 근처에서 U-보트 공격으로부터 연합군 수송선을 보호하는 데 지원했다.[24][25]
영일 동맹은 영국과 일본 간의 긍정적인 무역과 문화 교류의 기반이 되었다.[30][27] 일본 기관들은 수많은 영어 자료와 출판물을 발표했다.[26] 당시 제임스 맥닐 위슬러, 오브리 비어즐리, 찰스 레니 매킨토시와 같은 영국 예술가들은 일본의 기모노, 일본도, 일본 공예, 일본 건축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4. 1. 동맹 형성과 경쟁 구도
1902년 2월 12일, 영일 동맹의 첫 번째 버전이 발표되었다.[20] 러시아는 이에 대응하여 프랑스 및 독일과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독일은 이를 거절했다. 프랑스 또한 동아시아 문제에 더 깊이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같은 해 3월 16일, 프랑스와 러시아는 공동 선언을 발표하여, 양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중국과 그 주변 지역에 개입할 권리를 유보했다. 영국과 후대 역사가들은 이 선언을 프랑스가 러시아에 대한 군사적 의무를 재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약한" 신호로 해석했다.[12] 중국과 미국은 이 동맹에 강력하게 반대했다.1897년(메이지 30년), 독일 제국은 산둥성에서 독일인 선교사가 살해된 사건을 빌미로 청나라에 출병하여 교주만을 점령하고 조차지로 만들었다. 솔즈베리 후작은 처음에는 독일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줄 것이라 기대하며 이를 환영했지만, 빌헬름 2세가 산둥반도 전체를 독일 세력권으로 주장하면서 독일에 대한 경계심이 커졌다.
1898년(메이지 31년), 러시아가 요동반도의 뤼순을 점령하고 다롄에 군함을 파견하여 무력으로 청나라 정부를 압박, 뤼순과 다롄을 러시아 조차지로 만들었다. 이에 솔즈베리 후작은 "청나라 영토 보전" 명분을 뒤집고 포함외교를 통해 산둥반도의 웨이하이를 영국 조차지로 만들었다. 동시에 독일이 러시아, 프랑스와 함께 이 조차에 반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산둥반도를 독일 세력권으로 인정해야 했는데, 이는 양쯔강 유역에 독일이 진출하는 것을 허용하는, 영국에게 큰 타격이었다. 조지프 체임벌린 식민지 장관은 영국이 "영광스러운 고립" 정책을 유지한다면 청나라의 운명이 영국의 이익에 반하게 결정될 것이라며, 크림 전쟁처럼 강대국과의 군사 동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52]
1899년(메이지 32년) 무렵, 러시아는 만주와 화북 전역 지배 체제를 더욱 강화했고, 이 지역에 관세를 부과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1900년(메이지 33년) 의화단 운동을 틈타 러시아는 만주를 군사 점령했다. 러시아는 만주 철군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조선반도(대한제국)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이에 영국과 일본은 경계를 강화하며 반러시아 공통 유대를 형성했다.
당시 일본 정계에서는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러시아와의 타협을 모색했으나,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다로, 사이고 주도, 마쓰카타 마사요시, 가토 다카아키 등은 러시아와의 대립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영국과의 동맹을 주장했다.
결국 러일 협상[53]은 실패했고,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에 의해 영일 동맹 체결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또한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고, 1902년 1월 30일 런던 외무성에서 영일 동맹이 체결되었다. 일본 측 대표는 하야시 다다스 특명전권공사, 영국 측 대표는 제5대 랜즈다운 후작 외무대신이었다.
제1차 영일 동맹은 체결국이 다른 나라(1개국)의 침략적 행위(대상 지역은 중국·조선)에 맞서 싸우게 될 경우, 동맹국은 중립을 지켜 다른 나라의 추가 참전을 막고, '''2개국 이상과 교전하게 될 경우 동맹국이 참전하여 돕는 것을 의무'''로 규정했다. 비밀 협상에서는 일본이 단독으로 대러 전쟁에 임할 방침을 전달했고, 영국은 우호적 중립을 약속했다. 조약 체결 2년 후인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영국은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첩보 활동, 러시아 해군에 대한 사보타주, 전비 조달[54] 등을 통해 일본을 크게 지원했다. 영일 동맹을 계기로 일본은 금 준비의 대부분을 런던에 두고, 그 절반 이상을 영국 국채에 투자하거나 런던 예금 은행에 예치했다.[55]
제1차 영일 동맹은 1902년 1월 30일부터 5년간 유효하도록 체결되었다. 그러나 조약 체결 2년 후 러일 전쟁이 발발하여 전황이 일본군의 우세로 기울자, 영국에서는 동맹 확장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랜즈다운 영국 외무장관은 1905년(메이지 38년) 3월 하순, 하야시 곤스케를 통해 동맹 연장에 대한 사전 협의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일본 측에 전달했다. 일본 측은 협의를 진행하여 같은 해 5월 24일 내각에서 승인한 새로운 협상안을 영국에 제시하고 양국의 사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영국은 동맹의 적용 범위를 인도(영국령 인도 제국)까지 확대하길 원했지만, 새로운 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일본은 난색을 표했다.[56] 양국 간 추가 협의 결과, 제1차 동맹에서는 적용 범위가 동아시아(청나라와 조선)로 한정되었으나, 제2차 영일 동맹에서는 동아시아에 인도를 추가하여 적용 범위를 확대했다. 대한제국에 대해서는 국제 정세를 고려하여 제1차 동맹보다 더욱 강력한 보호국화(제3조)로 양국이 타협했고, 제1차 영일 동맹에서 "방어"를 중심으로 한 내용이 제2차 동맹에서는 "공수"로 변경되었다.
포츠머스 조약 사전 협상으로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과 랜즈다운 외무장관이 미국에 체류 중이었기에, 하야시 곤스케가 조약 체결에 참석하여 8월 12일 런던에서 제2차 영일 동맹이 체결되었다. 제2차 영일 동맹에서는 영국의 인도에서의 특권과 청나라에 대한 양국을 포함한 열강의 상업적 기회균등을 인정하고, '''체결국 중 한 나라 이상이 다른 나라와 교전할 경우, 동맹국은 이를 돕기 위해 참전해야 한다'''는 의무를 명시한 공수 동맹으로 강화되었다.[56]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국화를 영국이 승인하는 조건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또한 동맹의 유효 기간이 10년으로 연장되었다. 이 조약은 포츠머스 조약 체결 후인 같은 해 9월 27일에 양국에서 공표되었다.
4. 2. 러일 전쟁에 미친 영향
1902년 1월 30일 체결된 제1차 영일 동맹은 러일 전쟁 발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조약은 일본이 단독으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경우 영국이 중립을 지키고, 다른 나라(특히 프랑스)가 러시아를 지원할 경우 영국이 일본을 돕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1902년 5월, 일본군 참모본부의 고위 정보 장교 후쿠시마 야스마사(福島 安正) 중장이 런던을 방문하여 군사 정보 협력에 대한 비공식 논의를 마무리했다. 양국은 7월에 다양한 정보 협력 협정을 체결했으며, 후쿠시마 중장은 1902년 9월까지 런던에 머물며 세부 사항을 조율했다. 비록 협정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는 러일 전쟁 기간 동안 양국 간 정보 공유의 기반이 되었다.[13]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당시, 영국은 공식적으로 참전하지 않았지만, 영일 동맹의 존재는 당시 러시아의 동맹국이었던 프랑스가 러시아를 지원하는 것을 막는 효과를 가져왔다. 프랑스가 러시아를 지원할 경우 영국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21] 이러한 상황은 일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으며, 많은 러시아인들은 패배의 책임을 영국에 돌리기도 했다.[21]
전쟁 기간 동안 영국은 일본에 첩보,[22] 함선 설계,[21] 재정,[23] 외교적 지원[21]을 제공했다. 영국령 인도 육군의 말레이시아와 중국 주둔 부대는 러시아 관련 무선 및 전신 통신을 가로채 해독하여 일본과 공유했고, 일본 역시 러시아에 대한 정보를 영국과 공유했다.[22]
1905년 체결된 제2차 영일 동맹은 동맹의 적용 범위를 인도까지 확대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국화를 명시하는 등, 일본의 이익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4. 3.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일 동맹을 근거로 연합국 진영에 참전하였다.[13] 이 조약의 상호 방위 조항에 따라, 일본은 전쟁 중 적도 북쪽 태평양 지역의 독일령을 점령할 수 있었다. 1914년 칭다오의 독일 기지를 공격하여 독일군의 항복을 받아냈으며(칭다오 공방전 참조), 1917년에는 일본 군함이 지중해로 파견되어 몰타 근처에서 U-보트 공격으로부터 연합군 수송선을 보호하는 데 지원했다.[24][25]4. 3. 1. 태평양 파병

영일 동맹의 상호 방위 조항에 따라 일본은 영국 편에 서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전쟁 중 적도 북쪽 태평양 지역의 독일령을 점령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은 1914년 칭다오의 독일 기지를 공격하여 독일군의 항복을 받아냈다(칭다오 공방전 참조). 영국 군함에 승선했던 일본 장교들은 1916년 주트랜드 해전에서 사상자를 냈다.[24] 1917년에는 일본 군함이 지중해로 파견되어 몰타 근처에서 U-보트 공격으로부터 연합군 수송선을 보호하는 데 지원했다. 몰타의 칼카라 해군 묘지에는 전쟁 중 사망한 72명의 일본 수병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25] 여기에는 1917년 침몰된 일본 구축함 ''사카키''의 승조원들도 포함된다.
4. 3. 2. 지중해 파병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해군은 영일 동맹에 따라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지중해에 제2특무함대를 파병하여 활약했다. 영국을 포함한 연합국이 유럽 전선에서 열세에 놓이자, 일본에 육군의 유럽 파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원거리에서의 병참 확보가 어렵다는 이유로 육군 파병을 거절했다.[71]
하지만,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U보트 및 무장 상선의 해상 교통 방해 작전이 강화되고, 1917년 1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개시하면서 연합국 측 함선의 피해가 커지자, 영국은 일본에 지중해로 구축함대 파병을 요청했다.
일본 해군은 지중해 파병을 적극 추진했고, 일본 정부는 점령한 교주만 조차지와 남양 제도의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 1917년 2월 7일부터 순차적으로 제2특무함대를 지중해로 파병했다.
제2특무함대는 몰타 섬을 기지로 지중해에서 연합국 측 함선의 호위 임무를 수행하며 큰 활약을 했다. 대전 종결까지 영국 군함 21척을 포함하여 총 788척의 선박과 약 70만 명의 병력을 호위했다. 또한, 침몰 위기에 처한 선박의 승무원 7,075명을 구조했다. 일본 해군이 호위한 “대규모 수송 작전” 덕분에, 연합국은 아프리카에 있던 병력을 알렉산드리아(이집트)에서 마르세이유(프랑스)로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특히 1917년 5월 3일, 구축함 마쓰와 사카키는 독일 U보트의 공격을 받은 영국 수송선 트란실바니아호의 구조 활동에 나서, 3,266명 중 약 1,800명의 영국 육군 병사와 간호사를 구조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영국 함선이 2차 공격으로 침몰하여 6,000명의 사망자를 냈기 때문에, U보트에 의해 피해를 입은 선박을 구조하지 않는다는 방침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해군의 구조 활동은 목숨을 건 것이었고, 이후 일본 해군에 대한 호위 요청이 쇄도했다. 영국 국왕 조지 5세는 두 구축함의 장교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1917년 6월 11일, 구축함 사카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U보트의 공격을 받아 함장 이하 59명이 사망했다.[72]
제2특무함대는 구축함 사카키의 59명을 포함하여 총 78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들의 위령비는 사카키 침몰 1년 후 몰타의 당시 영국 해군 묘지에 건립되었다. 위령비는 영국 해군 묘지의 가장 좋은 위치에 제공되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 해군의 활약에 영국 해군이 얼마나 감사했는지를 보여준다.
몰타의 위령비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몰타 포위 작전에서 폭격을 받아 파손되었다가 1974년에 복원되었다.
4. 3. 3. 일본 적십자사 구호반 파견
1914년 9월, 일본 내각은 일본적십자사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에 구호반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적십자사는 이에 따라 인원을 선발했는데, 영국에는 간호부장 2명과 간호사 20명, 프랑스에는 간호부장 2명과 간호사 21명, 러시아에는 간호부장 1명과 간호사 12명을 배치했다. 러시아 파견반은 같은 해 10월 23일 도쿄를 출발했고, 영국 및 프랑스 파견반은 같은 해 12월 19일 요코하마항을 출발했다. 참고로, 이에 앞서 청도 공격 당시 일본적십자사는 처음으로 간호사 조직으로 구성된 구호반을 해외 전쟁터에 파견했다.[73]
4. 4. 문화 교류
영일 동맹은 영국과 일본 간의 긍정적인 무역과 문화 교류의 기반이 되었다.[30][27] 일본 기관들은 수많은 영어 자료와 출판물을 발표했다.[26] 급속한 산업화와 일본군의 발전은 영국 조선소와 무기 제조업체에 상당한 새로운 수출 기회를 제공했다. 영국에서 교육받은 일본인들은 안과학 발전과 같은 새로운 기술을 일본에 가져올 수도 있었다. 당시 제임스 맥닐 위슬러, 오브리 비어즐리, 찰스 레니 매킨토시와 같은 영국 예술가들은 일본의 기모노, 일본도, 일본 공예, 일본 건축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1902년에 ''진정한 영국''(真の英國)을 집필한 요시모토 다다스(吉本忠, 1878년생, 1973년 사망)는 일본 최초의 고등 교육을 받은 시각장애인으로, 영국의 사회복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일본에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쿠마가이 테쓰타로(熊谷哲太郎, 1883년생, 1979년 사망) 목사는 이 책이 시각장애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칭찬했다.[27]
1910년 런던의 화이트 시티에서 열린 영일 만국 박람회에는 800만 명의 방문객이 다녀갔다. 이 박람회는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이해와 영국과 일본 사이의 '국민 동맹'이라는 개념을 홍보하고자 했다. 일본 미술, 음악가, 스모 시범이 선보였고, 당시 에드워드 시대의 기대에 영향을 받아 아이누, 타이완, 일본 '마을' 전시회가 열렸다. 주최측은 영국과 일본을 동서양의 대칭적인 "섬 제국"으로 보는 문화적·역사적 유사성을 보여주었다. 일본 정부가 주최한 이 박람회는 당시 최대 규모의 박람회 중 하나였다.[26]
5. 동맹의 한계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이 제안한 인종평등 조항과 1915년 일본이 중화민국에 제시한 21개조 요구는 영일 동맹의 한계를 드러내는 주요 사건이었다.[28][29] 이 두 사건은 영국과 일본 간의 불신을 야기했고, 동맹 관계에 균열을 가져왔다.
영국과 일본은 경제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 영국은 당시 가장 부유한 산업 강국이었고 일본은 신흥 산업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었지만, 양국 간 경제적 유대는 제한적이었다.[30] 영국 은행들은 일본의 재산권법과 불안정한 재정 상황을 이유로 일본을 위험한 투자 대상으로 여겼고, 높은 금리로 대출을 제공했다. 이는 일본에게 불만스러운 일이었다.[30]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훗날 총리가 되었을 때, 영국의 대출 조건이 일본을 "문명국"에서 "미개발국"으로 퇴보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청일전쟁 때는 외국 자본을 쉽게 확보했지만, 러일전쟁 때는 그렇지 못했다고 지적했다.[30] 내선 로스차일드는 초기에는 일본 경제에 회의적이었으나, 나중에는 오사카를 "일본의 맨체스터"라고 칭하며 일본을 "미래의 국가"로 평가하기도 했다.[30]
헨리 다이어는 1906년 이후 일본 채권이 영국 투자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고 기록했다. 메이지 천황에게 욱일장을 받은 다이어는 일본의 산업화와 공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일본 경제에 대한 영국의 회의론을 비판했다.[30] 반면, 이와사키 야노스케와 같은 일본 기업가들은 외국 투자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본 정부는 일부 통제된 기업을 통해 외국 자본을 유치했고, 이는 일부 영국 기업가들에게 과도한 규제로 여겨졌다.[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에 자본을 대출했고,[23]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에 대규모 대출을 제공했다.
5. 1. 인종 평등 조항 문제
20세기 초 영국과 일본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우호적이었지만, 여러 문제로 인해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 대표단이 제안한 인종평등 조항 문제였다. 국제 연맹 규약에 포함될 예정이었던 이 조항은 제국 통합 유지를 위한 원칙으로 모든 피지배민의 평등을 주장하는 영국의 입장과 일치했지만, 영국의 자치령, 특히 오스트레일리아의 이해관계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결국 영국 대표단은 제국의 반대에 따라 조항을 지지하지 않았다.[28]5. 2. 21개조 요구
1915년 일본이 중화민국에 제시한 21개조 요구는 중국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급격히 증대시키고 중국을 일본의 사실상 보호령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29] 이에 절박해진 중국 정부는 영국과 미국에 호소했고, 일본은 요구를 수정해야 했다. 결국 일본은 중국에서 거의 영향력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을 포함한 서구 국가들 사이에서 명성을 잃었다. 영국은 일본에 대한 불신을 품게 되었고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으로 여기지 않았다.[29]6. 조약의 종말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영일 동맹은 이미 장애물로 여겨졌다.[32] 1920년 7월 8일, 양국 정부는 동맹 조약이 "국제 연맹 규약의 문구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며, 양국 정부는 이 규약을 진심으로 존중하고자 한다"는 내용의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32]
1921년 제국 회의는 영일 동맹 종식의 신호탄이었다. 이 회의에서 영국과 영연방 지도자들은 통일된 국제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모였으며,[33] 회의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영일 동맹의 갱신이었다. 캐나다 총리 아서 미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일본과의 동맹을 즉각 갱신하는 것을 지지했다. 당시 지배적인 기대는 태평양 강국과의 동맹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해당 지역에서 영국의 제국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34] 호주는 일본 제국 해군의 공격을 우려하여 해군 자원 증강을 계속 유지하기를 원했고, 미국과의 동맹이 거의 보호를 제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35]
미언은 일본과 미국 사이에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하여 영국 제국이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조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대표들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 최선이라고 동의했지만, 미언만이 조약의 완전 폐기를 요구했다.[36] 미국 정부는 영일 동맹의 갱신이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이 주도하는 시장을 만들고 중국을 미국의 무역으로부터 차단할까 봐 우려했다.[37] 이러한 우려는 미국과 캐나다의 뉴스 매체에서 조약에 반미 조항이 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더욱 커졌고, 대중에게 조약 폐기를 지지하도록 조언했다.[38]
언론과 미언이 중국에 있는 제국 자산을 일본이 공격할 것이라는 캐나다의 우려를 설득력 있게 주장함으로써 제국 회의는 동맹을 보류하기로 했다.[39] 회의는 국제 연맹에 동맹을 탈퇴하는 것을 고려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고, 국제 연맹은 원래 규정대로 동맹은 계속되며 탈퇴하는 측은 상대방에게 12개월 전에 의사를 통보해야 한다고 명시했다.[40]
영국 제국은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위해 일본과의 동맹을 희생하기로 결정했지만, 일본과 독일 또는 러시아 간의 예상되는 동맹이 성립되는 것을 막고 싶어했다.[41] 제국 대표들은 미국을 설득하여 여러 국가를 워싱턴에 초청하여 태평양 및 극동 정책, 특히 군축에 관한 회담에 참여하도록 했다.[42] 일본은 영국이 더 이상 일본에게 최선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느끼며 영국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가지고 워싱턴 군축 회의에 참가했다.[43]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도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회의에 참가했다.[44] 워싱턴 회의에서 4개국 조약과 9개국 조약이 체결되면서, 영일 동맹은 사실상 무효화되었고,[45] 1923년 8월 17일 조약 비준으로 공식 종료되었다.[46]
1902년과 1911년 영일 동맹 조약 제4조에 따라 동맹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47] 일부 학자들은 영국 제국과 일본 간의 불신과 영일 동맹이 종료된 방식이 일본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의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한다.[48]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1921년 이전에 일본과 영국의 제국 이익이 이미 상당히 상충되었다는 근거를 들어 이러한 주장에 반박하고 있다. 따라서 동맹의 종식은 양국 간의 관계 악화라는 이미 존재하던 정치적 현실을 보여주는 증상일 뿐, 그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49] 예를 들어 영국은 중국에서 일본의 야망이 커지고, 일본의 인도 혁명가 지원과 말레이시아와 인도에 있는 일본 선전가의 존재로 입증된 범아시아주의의 대두로 인해 아시아 식민지와 이익에 대한 잠재적인 일본의 위협에 대해 점점 더 의심하게 되었다.[49][50]
졸탄 부자스(Zoltan Buzas)에 따르면, 인종적으로 형성된 위협 인식이 영국과 미국으로 하여금 동맹 종식을 추진하도록 만들었다.[5]
6. 1. 워싱턴 회의와 4개국 조약
1921년 워싱턴 회의에서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4개국이 체결한 조약이 성립되면서 영일 동맹은 폐기 수순을 밟게 되었고, 1923년 8월 17일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46]1919년에서 1920년까지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 영일 동맹은 이미 장애물로 여겨졌다.[32] 1920년 7월 8일, 양국 정부는 동맹 조약이 "국제 연맹 규약의 문구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며, 양국 정부는 이 규약을 진심으로 존중하고자 한다"는 내용의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32]
1921년 제국 회의에서 영국과 영연방 지도자들은 통일된 국제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모였는데,[33] 이 회의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영일 동맹의 갱신이었다. 캐나다 총리 아서 미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일본과의 동맹을 즉각 갱신하는 것을 지지했다. 당시 지배적인 기대는 태평양 강국과의 동맹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해당 지역에서 영국의 제국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34] 호주는 일본 제국 해군의 공격을 우려하여 해군 자원 증강을 계속 유지하기를 원했고, 미국과의 동맹이 거의 보호를 제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35]
미언은 일본과 미국 사이에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하여 영국 제국이 두 국가 간의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조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대표들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미국 정부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해결책을 찾는 것이 최선이라고 동의했지만, 미언만이 조약의 완전 폐기를 요구했다.[36] 미국 정부는 영일 동맹의 갱신이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이 주도하는 시장을 만들고 중국을 미국의 무역으로부터 차단할까 봐 우려했다.[37] 이러한 우려는 미국과 캐나다의 뉴스 매체에서 조약에 반미 조항이 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더욱 커졌고, 대중에게 조약 폐기를 지지하도록 조언했다.[38]
언론과 미언이 중국에 있는 제국 자산을 일본이 공격할 것이라는 캐나다의 우려를 설득력 있게 주장함으로써 제국 회의는 동맹을 보류하기로 했다.[39] 회의는 국제 연맹에 동맹을 탈퇴하는 것을 고려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고, 국제 연맹은 원래 규정대로 동맹은 계속되며 탈퇴하는 측은 상대방에게 12개월 전에 의사를 통보해야 한다고 명시했다.[40]
영국 제국은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위해 일본과의 동맹을 희생하기로 결정했지만, 일본과 독일 또는 러시아 간의 예상되는 동맹이 성립되는 것을 막고 싶어했다.[41] 제국 대표들은 미국을 설득하여 여러 국가를 워싱턴에 초청하여 태평양 및 극동 정책, 특히 군축에 관한 회담에 참여하도록 했다.[42] 일본은 영국이 더 이상 일본에게 최선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느끼며 영국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가지고 워싱턴 군축 회의에 참가했다.[43]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도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회의에 참가했다.[44] 미국, 일본, 프랑스, 영국의 태평양 강국들은 4개국 조약에 서명했고, 중국 등 여러 국가를 추가하여 9개국 조약을 체결했다. 4개국 조약은 태평양 지역의 국제 관계에 대한 기대치에 대한 최소한의 틀을 제공했고, 무장 동맹에 대한 어떠한 약속도 없는 느슨한 동맹을 구성했다.[45] 워싱턴 회의의 4개국 조약으로 1921년 12월 영일 동맹은 사실상 무효화되었지만,[46] 모든 당사국이 1923년 8월 17일에 조약을 비준할 때까지 공식적으로 종료되지는 않았다.[46]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과 영국을 포함한 “5대국(미·영·불·이·일)[60]”의 이해관계 충돌이 표면화되었고, 특히 국제 연맹 규약 작성 과정에서 일본의 인종차별 철폐 제안이 부결된 것은 악영향을 남겼다.[61] 1921년에는 “국제 연맹 규약 위반”, “영국과 일본 양국 내에서의 일영 동맹 갱신 반대 여론”, “미국이 일본과의 이해관계 충돌을 이유로 일영 동맹 폐기를 바라는 속셈”, “일본 정부의 대미 협조 노선”을 배경으로 1922년 워싱턴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일본, 영국, 미국, 프랑스 4개국 조약 체결” 및 “일영 동맹 갱신을 하지 않는 것”이 결정되었고, 1923년을 기하여 일영 동맹은 앞서 언급된 4개국 조약으로 이행(확대·희석화)되었다.[62]
“확대”라고는 하지만, 이는 미국과 프랑스라는 새로운 조약 가맹국이 된 국가들의 동의를 얻지 못할 경우 당연히 기능 불능이 되므로, 실질적으로는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영국의 외무상 아서 발푸어는 “20년 동안 유지되어 두 차례의 대전을 견뎌낸 일영 동맹을 (실질적으로) 파기하는 것은, 그것이 불필요한 것이 되었더라도 참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을 유지하면 미국으로부터 오해를 받고, 이것을 파기하면 일본으로부터 오해를 받는다. 이러한 진퇴양난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태평양과 관련된 모든 강대국을 포함한 협정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심정을 토로했다. 훗날 헨리 키신저는 4개국 조약을 “준수하지 않아도 어떠한 결과도 가져오지 않는 조약”이라고 평가했다.[63]
6. 2. 동맹 종식의 원인과 결과
1920년 7월 8일, 양국 정부는 동맹 조약이 "국제 연맹 규약의 문구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며, 양국 정부는 이 규약을 진심으로 존중하고자 한다"는 내용의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32]동맹의 종식은 1921년 제국 회의에서 신호가 왔다. 이 회의에서 영국과 영연방 지도자들은 통일된 국제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모였다.[33] 회의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영일 동맹의 갱신이었다. 캐나다 총리 아서 미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일본과의 동맹을 즉각 갱신하는 것을 지지했다. 당시 지배적인 기대는 태평양 강국과의 동맹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해당 지역에서 영국의 제국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34] 호주는 일본 제국 해군의 공격을 우려했고, 미국과의 동맹이 보호를 제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하여 해군 자원 증강을 계속 유지하기를 원했다.[35]
미언은 일본과 미국 사이에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하여 영국 제국이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조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대표들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 최선이라고 동의했지만, 미언만이 조약의 완전 폐기를 요구했다.[36] 미국 정부는 영일 동맹의 갱신이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이 주도하는 시장을 만들고 중국을 미국의 무역으로부터 차단할까 봐 우려했다.[37] 이러한 우려는 미국과 캐나다의 뉴스 매체에서 조약에 반미 조항이 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더욱 커졌고, 대중에게 조약 폐기를 지지하도록 조언했다.[38]
언론과 미언이 중국에 있는 제국 자산을 일본이 공격할 것이라는 캐나다의 우려를 설득력 있게 주장함으로써 제국 회의는 동맹을 보류하기로 했다.[39] 회의는 국제 연맹에 동맹을 탈퇴하는 것을 고려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고, 국제 연맹은 원래 규정대로 동맹은 계속되며 탈퇴하는 측은 상대방에게 12개월 전에 의사를 통보해야 한다고 명시했다.[40]
영국 제국은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위해 일본과의 동맹을 희생하기로 결정했지만, 일본과 독일 또는 러시아 간의 예상되는 동맹이 성립되는 것을 막고 싶어했다.[41] 제국 대표들은 미국을 설득하여 여러 국가를 워싱턴에 초청하여 태평양 및 극동 정책, 특히 군축에 관한 회담에 참여하도록 했다.[42] 일본은 영국이 더 이상 일본에게 최선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느끼며 영국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가지고 워싱턴 군축 회의에 참가했다.[43]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도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회의에 참가했다.[44] 미국, 일본, 프랑스, 영국의 태평양 강국들은 4개국 조약에 서명했고, 중국 등 여러 국가를 추가하여 9개국 조약을 체결했다. 4개국 조약은 태평양 지역의 국제 관계에 대한 기대치에 대한 최소한의 틀을 제공했고, 무장 동맹에 대한 어떠한 약속도 없는 느슨한 동맹을 구성했다.[45] 워싱턴 회의의 4개국 조약으로 1921년 12월 영일 동맹은 사실상 무효화되었지만, 모든 당사국이 1923년 8월 17일에 조약을 비준할 때까지 공식적으로 종료되지는 않았다.[46]
1902년과 1911년 영일 동맹 조약 제4조에 따라 동맹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47] 영국 제국과 일본 간의 불신과 영일 동맹이 종료된 방식은 일본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의 주요 원인으로 일부 학자들에게 제시되었다.[48]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1921년 이전에 일본과 영국의 제국 이익이 이미 상당히 상충되었다는 근거를 들어 이러한 주장에 반박하고 있다. 따라서 동맹의 종식은 양국 간의 관계 악화라는 이미 존재하던 정치적 현실을 보여주는 증상일 뿐, 그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49] 예를 들어 영국은 중국에서 일본의 야망이 커지고, 일본의 인도 혁명가 지원과 말레이시아와 인도에 있는 일본 선전가의 존재로 입증된 범아시아주의의 대두로 인해 아시아 식민지와 이익에 대한 잠재적인 일본의 위협에 대해 점점 더 의심하게 되었다.[49][50]
졸탄 부자스(Zoltan Buzas)에 따르면, 인종적으로 형성된 위협 인식이 영국과 미국으로 하여금 동맹 종식을 추진하도록 만들었다.[5]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과 영국을 포함한 “5대국(미·영·불·이·일)[60]”의 이해관계 충돌이 표면화되었고, 특히 국제 연맹 규약 작성 과정에서 일본의 인종차별 철폐 제안이 부결된 것은 악영향을 남겼다.[61] 1921년에는 “국제 연맹 규약 위반”, “영국과 일본 양국 내에서의 일영 동맹 갱신 반대 여론”, “미국이 일본과의 이해관계 충돌을 이유로 일영 동맹 폐기를 바라는 속셈”, “일본 정부의 대미 협조 노선”을 배경으로 1922년 워싱턴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일본, 영국, 미국, 프랑스 4개국 조약 체결” 및 “일영 동맹 갱신을 하지 않는 것”이 결정되었고, 1923년을 기하여 일영 동맹은 앞서 언급된 4개국 조약으로 이행(확대·희석화)되었다.[62]
“확대”라고는 하지만, 이는 미국과 프랑스라는 새로운 조약 가맹국이 된 국가들의 동의를 얻지 못할 경우 당연히 기능 불능이 되므로, 실질적으로는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영국의 외무상 아서 발푸어(Arthur Balfour)는 “20년 동안 유지되어 두 차례의 대전을 견뎌낸 일영 동맹을 (실질적으로) 파기하는 것은, 그것이 불필요한 것이 되었더라도 참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을 유지하면 미국으로부터 오해를 받고, 이것을 파기하면 일본으로부터 오해를 받는다. 이러한 진퇴양난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태평양과 관련된 모든 강대국을 포함한 협정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심정을 토로했다. 훗날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는 4개국 조약을 “준수하지 않아도 어떠한 결과도 가져오지 않는 조약”이라고 평가했다.[63]
7. 신(新) 영일 동맹
2023년 1월 12일, 일본과 영국은 일영 원활화 협정을 체결하여 양국 군대의 상호 방문 시 절차를 간소화하고 협력 작전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 총리 관저는 이 협정을 "1902년 영일 동맹 체결 이후 가장 중요한 일본-영국 간 방위 협정"이라고 발표했으며[65], 사실상 영일 동맹의 부활이라고도 불린다.
영국 왕립 방위 안보 연구소(RUSI)의 아키모토 치아키 일본 특별 대표는 이러한 배경에 대해 러시아와 중국의 패권주의적 움직임과 미국의 영향력 감소를 언급하며, "미국만으로는 중·러 양국에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 보완 역할을 하는 것이 일본-영국이다. 미국을 포함한 삼국 동맹이 추진되고 있다"고 설명한다.[67]
그러나 아키모토 치아키는 항공자위대 전투기의 영국 파병 등, 양국 관계가 더 깊어질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함께 전쟁을 하는 공수 동맹이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구속하지 않는 느슨한 협력이다"라고 하며, 중국을 과도하게 자극하지 않으려는 영국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67]
7. 1. 영일 원활화 협정
2023년(레이와 5년) 1월 12일, 일본과 영국은 일영 원활화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양국 부대가 공동 훈련 등으로 상대국을 방문했을 때의 법적 지위 등을 규정한다. 협정 내용은 출입국 시 비자 신청 요건 면제, 파견국의 운전면허증 유효화, 활동 시 무기탄약 소지 허가 등을 포함한다.[64]이 협정으로 각국 군대(자위대·영국군)는 상대국 방문 시 복잡한 출입국 절차를 간소화하여 협력 작전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영국 총리 관저는 이 협정을 “'''1902년 영일 동맹 체결 이후 가장 중요한 일본-영국 간 방위 협정'''”이라고 발표했다.[65] 사실상 영일 동맹 부활이라고도 불린다. 협정의 목적은 영국군의 일본 영토 주둔을 인정하여 인도·태평양에서의 일본-영국 양군의 대규모 전개를 목표로 한다.[66]
영국 왕립 방위 안보 연구소(RUSI)의 아키모토 치아키 일본 특별 대표는 이러한 배경에 대해 러시아와 중국의 패권주의적 움직임과 미국의 존재감 저하를 언급하며, “미국만으로는 중·러 양국에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 보완 역할을 하는 것이 일본-영국이다. 미국을 포함한 삼국 동맹이 추진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영국은 반환 후 홍콩에서의 민주화 운동 탄압 등으로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다”고 지적했다. “브렉시트(EU 탈퇴)로 유럽에서 해방되어, 인도·태평양에 대한 개입을 강화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앞으로 항공자위대전투기의 영국 파병 등, 관계가 깊어질 것으로 예측하면서도, 단순한 “영일 동맹의 부활”이라는 견해에는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함께 전쟁을 하는 공수 동맹이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구속하지 않는 느슨한 협력이다”라고 하며, 중국을 과도하게 자극하지 않는 영국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67]
8. 관련 연표
- 1854년 (안세이 원년) - 일영화친조약이 체결됨.
- 1858년 (안세이 5년) - 일영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
- 1899년 (메이지 32년) - 1894년 (메이지 27년)에 조인된 일영통상항해조약이 시행됨.
- 1895년 (메이지 28년) - 일청강화조약 이후, 독일 제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의 삼국간섭이 있었고, 이 무렵 영일동맹의 기운이 생겼다고 함.[68]
- 1901년 (메이지 34년) - 10월 16일부터 협상을 시작함. 체결까지 이토 히로부미가 러일협상을 실시했으나 실패함.
- '''1902년 (메이지 35년) 1월 30일 - 영일동맹 체결.'''
- 1904년 (메이지 37년) - 러일 전쟁 발발.
- 1905년 (메이지 38년) - 러일전쟁 종전. 7월 29일, 가쓰라-태프트 협정 체결. '''8월 12일, 영일동맹(1차 개정판)을 런던에서 조인.''' 9월 5일, 러일강화조약 체결 (러시아 제국의 패배, 일본의 승리).
- 1907년 (메이지 40년) - 영국, 러시아 제국, 프랑스의 삼국협상이 성립. 7월 30일, 제1차 러일협약 조인.
- 1909년 (메이지 42년) - 9월 4일, 만주 및 간도에 관한 일청협약을 조인함.
- 1910년 (메이지 43년) - 7월 4일, 제2차 러일협약 조인. 한국 병합 (대한제국).
- 1911년 (메이지 44년) - 신해혁명. 2월 21일에 일미신통상항해조약을 조인하여 일본의 관세자주권 회복. '''7월 13일, 영일동맹(2차 개정판)을 런던에서 조인.'''
- 1912년 (메이지 45년) - 중화민국이 성립함. 7월 8일, 제3차 러일협약 조인.
- 1914년 (다이쇼 3년) - 8월 23일, 일본이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함 (제1차 세계 대전기의 일본).
- 1915년 (다이쇼 4년) - 대화21개조 요구.
- 1916년 (다이쇼 5년) - 7월 3일, 제4차 러일협약 조인.
- 1917년 (다이쇼 6년) - 러시아 혁명.
- 1918년 (다이쇼 7년) - 시베리아 출병. 11월, 독일 혁명.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으로 일본과 영국은 승전국이 됨.
- 1919년 (다이쇼 8년) - 파리 강화 회의.
- 1921년 (다이쇼 10년) - 일본과 영국, 미국, 프랑스와의 사국조약에 의해 영일동맹 폐지를 결정.
- '''1923년 (다이쇼 12년) 8월 17일 - 영일동맹 실효.'''
- '''2023년 (레이와 5년) 1월 12일 - 일영 원활화 협정 체결.'''
- 2023년 (레이와 5년) 5월 18일, 공동 문서 「히로시마 어코드[69]」 발표. 「준동맹국」의 색채를 강화[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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