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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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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18세기 설립 시도는 제한적이었으나, 1797년 베네치아 해군을 인수하며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18세기에 정식 설립되었으며, 1382년 트리에스테 병합을 기원으로 한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해군 설립에 관심을 갖고, 오스텐데 회사와 오스트리아 동인도 회사를 통해 해외 무역을 추진했다. 페르디난트 막스 대공 시기 해군 현대화가 이루어졌고, 1848년 혁명과 이탈리아 독립 전쟁을 겪으며 풀라를 기지로 삼았다. 빌헬름 폰 테게토프 제독의 활약으로 리사 해전에서 승리했으며, 극지 탐험에도 참여했다. 1906년 드레드노트급 전함 건조를 시작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두라초 해전, 오트란토 해협 해전에서 활약했으나, 카타로 반란과 셴트 이스트반 격침 등 어려움을 겪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해군을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국가에 넘겨주며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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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문장
공식 명칭 (독일어)Kaiserliche und Königliche Kriegsmarine (제국 및 왕립 해군)
공식 명칭 (헝가리어)Császári és Királyi Haditengerészet (제국 및 왕립 해군)
존속 기간1786년–1867년 (오스트리아 해군)
1867년–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국가오스트리아 제국 (1786년–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867년–1918년)
군종해군
역할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해군 이익, 상선, 해안선 방어
규모 (1914년)병력: 20,000명
드레드노트함: 4척
전드레드노트함: 9척
해안 방어함: 3척
장갑 순양함: 3척
어뢰 순양함: 2척
방호 순양함: 5척
정찰 순양함: 2척
구축함: 18척
어뢰정: 25척 (원양)
해안 어뢰정: 29척
잠수함: 6척
지휘 구조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주둔지전쟁부 해군 부서
별칭"트리에스테 해군" (18세기)
모토Indivisibiliter ac Inseparabiliter (라틴어: 불가분하게, 분리될 수 없게)
군기[[파일:Austria-Hungary-flag-1869-1914-naval-1786-1869-merchant.svg|border|120px]]
군기 설명해군 군기: 1786년–1915년
지휘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786년–1804년)요제프 2세 (1786년–1790년)
레오폴트 2세 (1790년–1792년)
프란츠 2세 (1792년–1804년)
오스트리아 황제 (1804년–1867년)프란츠 1세 (1804년–1835년)
페르디난트 1세 (1835년–1848년)
프란츠 요제프 1세 (1848년–1867년)
오스트리아 황제 및 헝가리 국왕 (1867년–1918년)프란츠 요제프 1세 (1867년–1916년)
카를 1세 (1916년–1918년)
해군 총사령관 (독일어: Oberkommandant der Marine)(1849년 2월 – 1851년 8월)
프란츠 그라프 빔펜 (1851년 8월 – 1854년 9월)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 (1854년 9월 – 1861년)
루트비히 폰 파우츠 (1861년 – 1865년 3월)
빌헬름 폰 테게토프 (1868년 3월 – 1871년 4월)
프리드리히 폰 푀크 (1871년 4월 – 1883년 11월)
막시밀리안 다우블렙스키 폰 슈테르넥 (1883년 11월 – 1897년 12월)
헤르만 폰 슈파운 (1897년 12월 – 1904년 10월)
루돌프 몬테쿠콜리 (1904년 10월 – 1913년 2월)
안톤 하우스 (1913년 2월 – 1917년 2월)
막시밀리안 니예고반 (1917년 4월 – 1918년 2월)
함대 총사령관 (독일어: Flottenkommandant)안톤 하우스 (1914년 7월 – 1917년 2월)
막시밀리안 니예고반 (1917년 2월 – 1918년 2월)
호르티 미클로시 (1918년 2월 – 1918년 11월)
전쟁부 해군 부서장 (독일어: Chef der Marinesektion)루트비히 폰 파우츠 (1865년 3월 – 1868년 4월)
빌헬름 폰 테게토프 (1868년 3월 – 1871년 4월)
프리드리히 폰 푀크 (1872년 10월 – 1883년 11월)
막시밀리안 다우블렙스키 폰 슈테르넥 (1883년 11월 – 1897년 12월)
헤르만 폰 슈파운 (1897년 12월 – 1904년 10월)
루돌프 몬테쿠콜리 (1904년 10월 – 1913년 2월)
안톤 하우스 (1913년 2월 – 1917년 2월)
카를 카일러 폰 칼텐펠스 (1917년 2월 – 1917년 4월)
막시밀리안 니예고반 (1917년 4월 – 1918년 2월)
프란츠 폰 홀루프 (1918년 2월 – 1918년 11월)
전투
오스트리아 해군으로 참전나폴레옹 전쟁
모로코에 대한 오스트리아 원정 (1829년)
1840년 동방 위기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으로 참전크리보시예 봉기 (1869년)
1897-1898년 크레타 반란
의화단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2. 역사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18세기 말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아드리아 해 연안의 이스트리아, 트리에스테, 달마티아 등을 포함하면서 해상 활동 보호를 위해 이들 지역의 해항을 근거지로 해군을 보유하면서 시작되었다.[23]

1864년 제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에서는 북해까지 출동하여 덴마크 해군과 교전했으며,[24] 헬골란트 해전은 목조함끼리의 마지막 대규모 해전이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는 장갑함끼리의 최초의 대규모 해전인 리사 해전에서 이탈리아 해군 주력을 격파했다.

1867년 아우스글라이히로 오스트리아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개편되면서 해군도 이중 제국의 공통 군대로서 위치하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막스는 오스트리아 해군 확장에 착수하여 풀라에 새로운 건조 조선소를 건설하고 트리에스테에 있는 기존 조선소를 확장했다. 1855년까지 풀라에서 스크류 추진 방식의 전열함이 건조되었으며, 트리에스테와 베네치아에서 각각 스크류 프리깃 2척과 스크류 코르벳 2척이 건조되고 있었다. 1856년 영국으로부터 증기 프리깃 를 구매하여 해군 함선 건조에 활용하면서 오스트리아 현대 조선 산업이 시작되었다.

주요 활동 해역은 아드리아 해였고, 주요 해군 기지와 조선소는 폴라, 트리에스테, 피우메, 카타로에 있었다.[25] 지리적으로는 지중해로의 출구가 오트란토 해협에 의해 막혀 있었고, 이 해협의 제해권 확보가 중요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인접국 이탈리아가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적대국이 되었지만,[25] 아드리아 해에서는 잠수함을 통해 연합국 측 해군의 행동을 억제하여[26][27]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28] 현존 함대주의를 채택하여 전력 유지를 꾀하는 한편, 순양함, 구축함·어뢰정 등에 의한 이탈리아 반도·발칸 반도 서부 각지에 대한 연안 작전도 실시되었다.[27]

연합국 측 해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이오니아 해·지중해 방면으로의 진출을 막기 위해 오트란토 해협을 봉쇄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잠수함은 이 봉쇄선을 넘어 지중해 방면으로도 종종 행동했다.[28] 국내 근거지에는 독일 해군의 U보트 전대도 전개되었다.[28]

폴라 군항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함정.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주로 비행정수상기를 장비한 강력한 해군 항공대가 편성되어 이탈리아에 대해 적극적으로 작전 행동을 전개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191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모두 내륙국이 되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함정과 군인은 분열된 여러 국가 및 전승국에게 분할되어 소멸했다.[28]

2. 1. 기원

18세기 후반까지 오스트리아의 해군 창설 시도는 제한적이었다.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합스부르크 가는 다뉴브 강에서 오스만 제국과 싸우는 동안 무장선을 고용했고,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부터 선박을 보호하는 상선 해군을 사용했지만, 이들은 공통된 지휘 계통이나 목적을 가지지 않았다.[23] 7년 전쟁 이후 지중해에서 사략선(私掠船, 전시에 적의 상선을 나포할 수 있는 허가를 받은 민간 무장선)에게 공격받기 쉬운 오스트리아에서 카우니츠 백작이 소규모 프리깃 함대 창설을 추진했고, 요제프 2세 통치 기간에 빨강-하양-빨강의 가로형 해군기가 도입되었다.

요제프 2세


1797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캄포 포르미오 조약이 체결되면서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양도하였고, 코르푸아드리아해에 있는 몇몇 베네치아 섬들을 포함하여 지중해에서 몇몇 섬들의 소유권을 가질 수 있었다. 베네치아와 베네치아의 해외 영토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두 나라에 의하여 분할되었으며, 오스트리아 황제는 베네치아 시를 따라 이스트리아달마티아를 받았다. 베네치아 해군과 베네치아 해군의 시설물들은 오스트리아의 소유가 되었으며, 오스트리아 해군의 앞날을 밝게 한 토대가 되었다.[23]

2. 2. 나폴레옹 전쟁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아드리아 해 연안의 이스트리아, 트리에스테, 달마티아 등을 포함했고, 이들 지역은 해운·상업 활동 등으로 번영했다. 이러한 제국 내의 해상 활동 보호를 위해 18세기 말경부터 제국은 이들 지역의 해항을 근거지로 하는 해군을 보유했다.[23]

1802년 3월 17일, 테셴 공작 카를 대공은 베네치아에 제국 및 왕립 해군 사관학교 설립을 명령했다. 이 학교는 1848년 트리에스테로 이전하여 제국 및 왕립 해군 아카데미로 개칭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프랑스와 싸웠으나,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패배 후 프레스부르크 조약에 동의해야 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 제국은 약화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다. 쇤브룬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아드리아 해로의 접근을 잃었고, 해군도 파괴되어 군함은 프랑스에 넘겨졌다. 1809년부터 1814년까지 오스트리아는 해안선과 해군이 없었다.

2. 3. 해군 현대화

빈 회의와 1815년 파리 조약으로 오스트리아의 해안선이 회복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얻으면서 5척의 전열함, 2척의 프리깃함, 1척의 코르벳함,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베네치아에 남겨둔 몇 척의 소형 선박을 보유하게 되었다.[23] 1817년 마리아 레오폴디나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녀와 브라질의 페드루 1세 황제의 결혼으로 오스트리아 해군 함선이 처음으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했다.[23]

그리스 독립 전쟁 동안 오스트리아 해군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그리스 반란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선박을 공격하려는 그리스 해적과 교전했다.[23] 1829년, 오스트리아는 모로코의 대서양 연안으로 함대를 파견하여 라라체를 포격했고, 이는 북아프리카 해적이 지중해에서 오스트리아 선박을 약탈하는 것을 종식시켰다.[23]

1830년대에 증기선 도입 등 해군 현대화 시도가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 해군의 첫 번째 증기선인 500톤급 외륜 증기선 '마리아 안나'가 피우메에서 건조되어 1836년에 첫 시험을 거쳤다.[23]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레오폴트 대공은 16세의 나이로 해군에 입대하여 해군 현대화 개혁을 추진했다.[23]

2. 4. 1848년 혁명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의 여파로 유럽 전역에 혁명의 불길이 번졌다.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도 민족주의 정서가 확산되면서 다양한 형태로 혁명이 일어났다.[23] 빈에서의 혁명은 밀라노와 베네치아에서 반(反)합스부르크 봉기를 촉발시켰다. 베네치아 해군 조선소의 오스트리아 사령관은 부하들에게 구타당해 사망했고, 해군 경비대장은 봉기를 진압할 수 없었다. 해군 사령관 안톤 폰 마르티니 부제독은 반란을 종식시키려 했지만, 베네치아인 장교들에게 배신당하여 체포되었다.

베네치아 상실 이후, 오스트리아 해군은 프란츠 귈라이 백작 장군의 임시 지휘 하에 재편성되었다. 귈라이는 풀라를 오스트리아 해군의 새로운 기지로 선택했다. 교황령두 시칠리아 왕국사르데냐 편에 서서 전쟁에 참전하면서 아드리아 해에서 교착 상태가 벌어졌다. 오스트리아는 영국, 러시아, 오스만 제국, 이집트로부터 추가 군함을 구매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1848년 7월 쿠스토차 전투 이후 전쟁의 흐름이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하게 돌아섰고, 1849년 8월 이탈리아 독립 전쟁은 종결되었다. 베네치아는 1849년 8월 27일에 함락되면서 마지막 이탈리아 민족주의자의 저항 거점이 되었다.

1848년 혁명은 오스트리아 해군 역사에 전환점을 마련했다. 해군 장교단의 대부분은 제국의 독일어 사용 지역 출신이었고, 크로아티아인, 독일인, 헝가리인까지 오스트리아 해군 계급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2. 5. 페르디난트 막스 시대

프란츠 빔프펜 백작 중장이 해군을 지휘한 2년의 임시 기간 후, 1854년 9월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그의 남동생 페르디난트 막스 대공(일반적으로 페르디난트 막스라고 함)을 소장 계급으로 진급시키고 오스트리아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23] 22세의 페르디난트 막스는 오스트리아 해군 역사상 가장 젊은 ''최고 사령관''이 되었으며, 10년 전에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대공이 해군 지휘를 맡았을 때보다 1살 더 어렸다.[23]

나이, 불과 4년 밖에 안 되는 해군 경력, 해상 전투나 지휘 경험 부족에도 불구하고, 페르디난트 막스는 역사상 오스트리아 해군의 가장 효과적이고 성공적인 사령관 중 한 명으로 입증되었다.

페르디난트 막스는 오스트리아 해군이 명목상 해군 업무를 통제했던 오스트리아 육군에 의존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1862년 1월 14일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오스트리아 해군과 오스트리아 상선을 모두 감독하는 해군부를 설립하는 데 동의하고 마티아스 폰 비켄부르크 백작을 그 수장으로 임명했다.[23] 이 새로운 시스템에서 페르디난트 막스는 계속해서 ''최고 사령관''이었지만 더 이상 함대의 정치적 관리를 책임지지 않았다.[23] 해군부 창설에 대한 지원을 얻는 것 외에도 페르디난트 막스는 황제로부터 해군을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관리할 수 있는 큰 자유를 받았으며, 특히 새로운 군함의 건설과 획득과 관련하여 큰 자유를 받았다.[23]

페르디난트 막스는 즉시 오스트리아 해군 확장에 착수했다. 오스트리아 군함을 공급하는 데 외국 조선소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 대한 우려로 인해 그는 형제를 설득하여 풀라에 새로운 건조 조선소 건설과 트리에스테에 있는 기존 조선소 확장을 승인하게 했다.[23] 또한 페르디난트 막스는 아드리아 해에서 나폴레옹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풀라, 트리에스테, 베네치아 항구에 야심찬 건조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1855년까지 풀라에서 스크류 추진 방식의 전열함이 건조되었으며,[23] 스크류 프리깃 2척과 스크류 코르벳 2척이 각각 트리에스테와 베네치아에서 건조되고 있었다.[23] 페르디난트 막스는 1856년 영국으로부터 증기 프리깃 를 구매했다. 그녀의 설계는 해군의 향후 함선 건조에 사용되었으며, 오스트리아의 현대 조선 산업의 시작을 알렸다. 1856년부터 오스트리아 함선의 대다수는 국내 조선소에서 건조되었다.[23]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빠른 패배에 대응하여 페르디난트 막스는 해군 건조 프로그램을 제안했지만,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패배와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중단되었다.[23] 1860년과 1861년 사이에 이탈리아 철갑선 프로그램이 시작되었고, 이는 오스트리아 해군의 대응을 필요로 했다.[23]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는 철갑선 건조 및 획득을 중심으로 해군 군비 경쟁을 벌였다.

2. 6. 노바라 원정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은 대규모 과학 원정(1857–1859)을 시작했는데, 이 기간 동안 프리깃함 노바라는 지구를 세계 일주한 최초의 오스트리아 군함이 되었다. 1864년 4월,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은 해군 총사령관에서 물러나 멕시코의 막시밀리안 1세가 되었다.

2. 7.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1864년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해군북해까지 출동하여 덴마크 해군과 교전했다.[24] 이때 벌어진 헬골란트 해전은 목조함끼리의 마지막 대규모 해전이었다.

2. 8. 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장갑함끼리의 최초의 대규모 해전인 리사 해전에서 이탈리아 해군 주력을 격파했다.[23] 이 해전은 철과 증기를 사용하는 선박이 참여한 최초의 주요 유럽 해전이자, 대형 목조 전함과 고의적인 충돌 공격이 벌어진 마지막 해전 중 하나였다.

2. 9. 평화 시기

1873년, 신형 범선-증기 프리깃함 SMS 라우돈(승무원 480명)이 함대에 추가되었으며, 1880년 그루주 인근에서 열린 국제 해군 사열에 참가했다.[17]

평시 오스트리아 함선은 아시아,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태평양을 방문했다.[2]

1869년, 황제 프란츠 요제프는 스크류 추진 코르벳함 SMS ''비리부스 유니티스''(나중에 건조된 동명의 전함과 혼동하지 말 것)를 타고 수에즈 운하 개통식에 참석했다. 이 함선은 황제의 개인적인 좌우명에서 이름을 따왔다.[5]

2. 10. 극지 탐험

오스트리아-헝가리 선박과 해군 인력은 북극 탐험에 참여했다. 1872년부터 1874년까지 진행된 탐험 중에 프란츠요제프 제도를 발견했다.[23]

카를 바이프레히트 해군 장교와 율리우스 파이어 보병 장교이자 풍경화가가 이끈 맞춤형 스쿠너 ''테게토프''는 1872년 7월 트롬쇠를 출발했다. 8월 말, 노바야 제믈랴 북쪽의 유빙에 갇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극지방으로 표류했다. 탐험가들이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군도를 발견한 것은 이 표류 중에 일어났다.

1874년 5월, 파이어는 얼음에 갇힌 배를 포기하고 썰매와 보트를 이용하여 귀환하기로 결정했다. 1874년 8월 14일, 탐험대는 탁 트인 바다에 도달했고, 9월 3일 마침내 러시아 본토에 발을 디뎠다.

2. 11. 세기 간의 시기

합스부르크 군주국오스트리아 제국은 아드리아 해 연안의 이스트리아, 트리에스테, 달마티아 등을 포함했고, 이들 지역은 해운·상업 활동 등으로 번영했다. 제국은 해상 활동 보호를 위해 18세기 말경부터 이들 지역의 해항을 근거지로 하는 해군을 보유했다.[23]

1864년 제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에서는 북해까지 출동하여 덴마크 해군과 교전했다.[24] 헬고란트 해전은 목조함끼리의 마지막 대규모 해전이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는 장갑함끼리의 최초의 대규모 해전인 리사 해전에서 이탈리아 해군 주력을 격파했다.

1867년 아우스글라이히로 오스트리아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개편되면서 해군도 이중 제국의 공통 군대로서 위치하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막스는 오스트리아 해군 확장에 착수하여 풀라에 새로운 건조 조선소를 건설하고 트리에스테에 있는 기존 조선소를 확장했다. 1855년까지 풀라에서 스크류 추진 방식의 전열함이 건조되었으며, 트리에스테와 베네치아에서 각각 스크류 프리깃 2척과 스크류 코르벳 2척이 건조되고 있었다. 1856년 영국으로부터 증기 프리깃 를 구매하여 해군 함선 건조에 활용하면서 오스트리아 현대 조선 산업이 시작되었다. 1856년부터 오스트리아 함선의 대다수는 국내 조선소에서 건조되었다.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하자, 페르디난트 막스는 해군 건조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이 함대는 전 세계에 오스트리아의 국기를 게양하고 상선을 보호하며, 성장하는 사르데냐 왕국의 아드리아 해 야망을 좌절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커야 했다.

주요 활동 해역은 아드리아 해였고, 주요 해군 기지와 조선소는 폴라, 트리에스테, 피우메, 카타로에 있었다.[25] 지중해로의 출구가 오트란토 해협에 의해 막혀 있어 이 해협의 제해권 확보가 중요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인접국 이탈리아가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적대국이 되었지만,[25] 아드리아 해에서는 잠수함을 통해 연합국 측 해군의 행동을 억제하여[26][27]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28] 현존 함대주의를 채택하여 전력 유지를 꾀하는 한편, 순양함, 구축함·어뢰정 등으로 이탈리아 반도·발칸 반도 서부 각지에 대한 연안 작전도 실시되었다.[27]

연합국 측 해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이오니아 해·지중해 진출을 막기 위해 오트란토 해협을 봉쇄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잠수함은 이 봉쇄선을 넘어 지중해로 종종 행동했다.[28] 국내 근거지에는 독일 해군의 U보트 전대도 전개되었다.[28]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비행정수상기를 장비한 강력한 해군 항공대가 편성되어 이탈리아에 대해 적극적으로 작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모두 내륙국이 되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함정과 군인은 분열된 여러 국가 및 전승국에게 분할되어 소멸했다.[28]

2. 11. 1. 크레타 반란

1896년 말 오스만 제국령 크레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1897년 1월 21일 그리스군은 크레타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 그리스와 통합시키기 위해 크레타에 상륙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를 포함한 유럽 열강이 개입하여 크레타를 국제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k.u.k. Kriegsmarine)의 군함은 오스만 해군을 봉쇄하기 위해 크레타 해역을 순찰했다. 크레타는 1913년 그리스에 최종적으로 양도될 때까지 특이한 지위에 머물렀다.[28]

2. 11. 2. 의화단 운동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청나라에서 일어난 의화단 운동 (1899–1901) 기간 동안 8개국 연합의 일원이었다.[28] 1900년 4월,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훈련선 2척과 순양함 , , , 및 해병대 1개 중대를 포트 아서의 러시아 조차지에 주둔시키며 중국 북부 해안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6월에 톈진 철도를 의화단으로부터 방어하고, 퉁저우 근처 하이허 강에서 여러 척의 무장한 정크에 포격을 가했다. 또한 톈진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다구 포대를 점령하고, 영국 해군의 로저 키스 대위에 의해 중국 구축함 4척을 나포하는 데 참여했다. 의화단 운동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k.u.k.) 부대는 사상자가 거의 없었다.

봉기 이후, 순양함 1척이 중국 주둔지에 영구적으로 배치되었고, 해병대 1개 소대가 베이징의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관에 배치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잠수함 사령관으로 복무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유명해진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라프 중위는 의화단 운동 기간 동안 호에서 용감하게 싸운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2. 11. 3. 몬테네그로

제1차 발칸 전쟁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독일 제국, 프랑스 제3 공화국,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 이탈리아 왕국과 함께 몬테네그로 왕국의 항구 도시인 바르(안티바리)를 봉쇄했다.[24]

2. 11. 4. 유럽 해군 군비 경쟁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요인 중 하나는 대영 제국독일 제국 사이의 해군 군비 경쟁이었다. 독일은 해군 기반 시설을 강화하여 새로운 드라이 도크를 건설하고, 더 큰 선박이 항해할 수 있도록 킬 운하를 확장했다. 그러나 유럽의 해군 군비 경쟁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러일 전쟁에서 해군이 패배한 후 러시아 제국도 새로운 현대 해군 건설을 시작했다.[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은 아드리아 해 지배를 놓고 자체적인 경쟁을 벌였다.[4]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함대에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해군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운동을 펼쳐,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k.u.k. Kriegsmarine)의 주요 후원자가 되었다.

2. 11. 5. 드레드노트 시대

1906년 영국은 전함 HMS 드레드노트를 완성했는데, 이는 이전의 모든 전함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진보적이었다.

드레드노트급 SMS ''테게토프'', 제독 폰 테게토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됨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해군 건축가들은 드레드노트급 전함 건조를 명령했고, 1910년 해군 예산은 기존 함대의 대규모 개조와 더 많은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허용하기 위해 증액되었다. 전함 SMS 테게토프와 SMS 비리부스 우니티스는 1911년과 1912년에 각각 트리에스테에서 진수되었다. 이 전함들은 마르코니 무선실과 대공 무기를 갖추고 건조되었으며, 함대에 내장된 어뢰 발사기를 갖춘 세계 최초의 전함이라고 주장되었다.[5]

2. 12. 잠수함 함대

190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사이먼 레이크, 게르마니아조선소, 존 필립 홀랜드가 설계한 잠수함을 각각 2척씩 주문하기로 결정했다.[6] 이 중 게르마니아조선소에서 제작한 두 척의 잠수함은 ''U-3''급으로, 독일 제국 해군의 첫 번째 U-보트 설계를 개선한 것이었다.[7]

로버트 화이트헤드의 화이트헤드 & Co.는 홀랜드와 그의 회사인 일렉트릭 보트로부터 면허를 받아 미국 해군의 C급과 동일한 설계의 ''U-5''급 잠수함을 건조했다.[8][10]

''U-5''급 잠수함은 현대 핵 잠수함과 매우 유사한 물방울 모양의 단일 선체 설계를 가지고 있었다.[11] 잠수함의 길이는 약 32.00m였고, 배수량은 수상 시 240ton, 수중 시 273ton였다.[8] 어뢰 발사관은 중앙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독특한 클로버 모양의 해치를 특징으로 했다.[8] 수상에서는 6기통 가솔린 엔진 2개로 구동되었지만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승무원의 잦은 중독을 유발했다.[6] 수중에서는 전동기 2개로 추진되었다.[8] 이 급에는 U-5, U-6, U-12 세 척의 잠수함이 건조되었다.

2. 13. 제1차 세계 대전



1913년 2월 오스트리아-헝가리 함대의 기동


1914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 암살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비리부스 유니티스호에서 그들을 위한 국장을 거행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해군은 몇 차례 작전을 수행했지만, 1915년 이탈리아가 참전하기 전까지는 소규모 충돌 외에는 대부분 주요 해군 기지인 풀라에 머물렀다. 이탈리아의 선전포고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단순한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탈리아 해군프랑스 해군지중해에 묶어두는 효과를 냈다.

1914년 8월, 프랑스군과 몬테네그로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최남단 기지인 코토르에서 혼란을 야기하려 했다. 1914년 9월, 10월, 11월에 걸쳐 해군은 연합군을 폭격하여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고, 1916년 1월 로브첸 전투에서 승리하여 몬테네그로가 조기에 전쟁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기여했다.

폰 트라프가 ''U-5''
의 함교에 서 있다.]]

1915년 5월 23일,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를 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풀라, 세베니코, 카타로 항구를 떠나 베네치아바를레타 사이의 이탈리아 동부 해안을 폭격했다. 주요 목표는 안코나, 리미니, 비에스테, 만프레도니아, 바를레타 등의 도시와 해안을 따라 있는 다리와 철도 노선이었다. 1917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함대는 아직까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지중해에는 3개의 연합군 해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조정 및 공통 교리는 매우 어려웠다. 지중해는 11개 구역으로 나뉘었으며, 영국 해군은 4개, 프랑스 해군은 4개, 이탈리아 해군은 3개를 담당했다. 서로 다른 지휘 체계, 국가적 자부심, 언어 장벽 등은 연합국의 해상력 적용에 일관성을 떨어뜨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유보트 공격이 활발해지는 상황을 초래했다.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승전국에 함대를 넘겨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해군과 상선, 모든 항구, 병기창, 해안 요새를 새로운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및 세르비아인 국가에 넘겼다.[5] 1918년 11월 1일,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두 수병은 원시적인 유인 어뢰를 타고 폴라의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기지에 침투하여 비리부스 유니티스를 격침시키고, 화물선 ''Wien''도 격침시켰다.[12]

2. 13. 1. 두라초 해전

1915년 12월,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순양함 전대는 세르비아 왕국의 세르비아군이 알바니아 공국에서 철수하는 것을 공격하려 했다. 프랑스 잠수함을 격침시키고 두러스를 포격한 후, 전대는 기뢰밭에 들어가 구축함 1척을 침몰시키고 다른 1척을 손상시켰다. 다음 날 이들은 영국 해군, 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왕국순양함구축함으로 구성된 전대와 마주쳤다. 이 전투로 오스트리아-헝가리 구축함 2척이 침몰하고 다른 1척이 경미한 손상을 입었으며, 연합군 순양함과 구축함은 약간의 피해를 입었다.

2. 13. 2. 오트란토 해협 해전

1917년 한 해 동안 아드리아 해는 지중해에서 선박에 대한 U-보트 전쟁의 핵심이었다. 오트란토 해협에서 약 140마일 떨어진 코토르는 지중해 선박에 대한 거의 모든 위협이 발생하는 주요 U-보트 기지였다.

동맹국이 최대 120척의 해군 드프터를 동원하여 잠수함 그물을 배치하고 순찰하며, 수심 폭탄을 장착한 30척의 모터 보트를 갖춘 오트란토 바지는 코토르에서 U-보트의 통과를 막기 위해 설계되었다. 그러나 이는 실패했고, 1916년 발족 이후 이 바지에서는 오스트리아 와 독일 두 척의 U-보트만 나포되었는데, 수백 척의 통과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 바지는 사실상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이 차단군과 전투를 벌이려 하지 않는 한 아드리아 해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전쟁이 지속되면서 특히 석탄의 보급 어려움과 지뢰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이 이탈리아와 세르비아 해안을 포격하는 데 국한되게 만들었다.

1917년 3월 11일, 4월 21일과 25일, 5월 5일에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소규모 공격이 네 번 있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제 더 큰 준비가 이루어져, 두 척의 U-보트가 브린디시 인근에 지뢰를 설치하도록 파견되었고, 세 번째 U-보트는 공격 중에 영국-이탈리아군이 유인될 경우를 대비하여 출구를 순찰했다. 전체 작전은 5월 14/15일 밤에 맞춰졌으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가장 큰 전투인 오트란토 해협 해전을 이끌었다.

가장 먼저 공격을 시작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함은 두 척의 구축함 과 이었다. 구축함 보레아의 호위를 받으며 세 척의 이탈리아 선단이 발로나로 접근하고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 오스트리아군이 덮쳤다. ''보레아''는 침몰했고, 세 척의 상선 중 탄약을 실은 한 척은 피격되어 폭발했고, 두 번째 선박은 불에 탔으며, 세 번째 선박도 피격되었다. 오스트리아 구축함 두 척은 북쪽으로 항해했다.

그동안 미클로시 호르티 대령의 지휘하에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순양함 세 척인 , , 는 실제로 바지 북쪽에서 네 척의 프랑스 구축함의 순찰을 통과했고, 아군으로 간주되어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그들은 바지를 통과한 후 다시 돌아와 공격을 시작했다. 각 오스트리아 순양함은 선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100mm(3.9인치) 포로 바지를 천천히 체계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했으며, 먼저 모든 동맹국에게 배를 버리라고 촉구했다.

이 전투에서 동맹국은 두 척의 구축함, 14척의 드프터와 한 척의 글라이더 항공기를 잃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약간의 피해(''노바라''의 증기 공급관이 포탄에 의해 손상됨)와 소수의 손실을 입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수리와 재보급을 위해 북쪽의 기지로 돌아갔고, 동맹국은 봉쇄를 재건해야 했다.

오트란토 해협 해전 이후


크로아티아 프레블라카의 "오트란토 해전 영웅" 기념비

2. 13. 3. 카타로 반란

1918년 2월, 코토르 만 해군 기지에 주둔한 제5함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28] 최대 40척의 군함에 탑승한 선원들이 더 나은 대우와 전쟁 종식을 요구하며 반란에 가담했다.

반란은 코토르를 넘어 확산되지 못했고, 사흘 안에 충성스러운 해군 함대가 도착했다. 이 함대는 해안 포병과 함께 반란군의 일부 함선에 여러 발의 포탄을 발사한 후 해병 보병을 투입하여 짧고 성공적인 교전을 벌였다. 약 800명의 선원이 투옥되었고, 수십 명이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봉기의 지도자였던 보헤미아 왕국 출신 프란츠 라슈를 포함한 4명의 수병이 처형되었다. 당시 해군 함선에 요구되는 거대한 승무원 규모를 고려할 때, 이 반란은 소수에 국한되었음을 알 수 있다.[28]

2. 13. 4. 제1차 세계 대전 후반

1918년, 승전국에 함대를 넘겨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황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과 상선, 모든 항구, 병기창, 해안 요새를 새로운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및 세르비아인 국가에 넘겼다.[5] SCS 국가는 1918년 10월 29일에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지만, 다른 국가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했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미국, 러시아 정부에 SCS 국가는 그들과 전쟁 상태가 아니며, 의회가 오스트리아-헝가리 함대를 인수했다는 외교 서한이 보내졌지만, 아무런 답변도 없었고, 사실상 전쟁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오스트리아는 10월 29일에 휴전을 요청했고, 며칠 간의 협상과 서명 후 11월 4일에 휴전이 발효되었다.

1918년 11월 1일, 이탈리아 ''레지아 마리나''의 두 수병, 라파엘레 파올루치와 라파엘레 로세티는 원시적인 유인 어뢰(별명: ''Mignatta'' 또는 "거머리")를 타고 폴라의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기지로 침투했다. 그들은 접착 지뢰를 사용하여 정박해 있던 ''Viribus Unitis''를 격침시켜 많은 인명 피해를 발생시켰고, 화물선 ''Wien''도 격침시켰다.[12] 프랑스 해군은 새로운 전함 Prinz Eugen을 징발하여 프랑스로 가져갔고, 나중에 대서양에서 표적 연습에 사용하다 파괴했다.[5]

3. 조직

합스부르크 군주국에서 이어지는 오스트리아 제국은 아드리아 해 연안의 이스트리아, 트리에스테, 달마티아 등을 영토로 포함했으며, 이들 지역은 해운 및 상업 활동으로 번영했다. 18세기 말부터 제국은 이들 지역의 해상 활동을 보호하기 위해 해군을 보유했다.[23]

1867년 아우스글라이히를 통해 오스트리아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개편되면서 해군 역시 이중 제국의 공통 군대로 자리 잡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주요 활동 해역은 아드리아 해였으며, 주요 해군 기지와 조선소는 폴라, 트리에스테, 피우메, 카타로에 위치했다.[25] 지리적 특성상 지중해로 나가는 출구가 오트란토 해협에 의해 막혀 있었기 때문에, 이 해협의 제해권 확보가 중요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잠수함을 활용하여 연합국 해군의 활동을 억제하며 비교적 자유로운 작전 수행이 가능했다.[26][27] 현존 함대주의 전략을 채택하여 주력함의 전력을 유지하는 한편, 순양함, 구축함, 어뢰정 등을 이용한 연안 작전도 병행했다.[27]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이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모두 내륙국이 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함정과 인력은 여러 국가 및 전승국에 분할되어 사라졌다.[28]

3. 1. 항구 및 위치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모항은 풀라(현재 크로아티아)에 위치한 '제해군 아스널'(해군 기지)이었다.[17] 베네치아에서 오스트리아 해군이 초기에 주둔했던 역할을 이어받았다. 부속 기지로는 번화한 항구트리에스테코토르(현재 몬테네그로)의 자연 항구가 있었다. 트리에스테와 풀라 모두 주요 조선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17] 풀라의 해군 시설에는 지중해에서 가장 큰 부유식 드라이 도크 중 하나가 있었다. 풀라 시는 또한 해군의 중앙 교회 "스텔라 마리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천문대, 그리고 제국의 해군 군사 묘지가 위치한 곳이었다.[18] 1990년, 묘지는 유고슬라비아 공산 정권에 의해 수십 년 동안 방치된 후 복원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사관학교는 리에카(현재 크로아티아)에 위치해 있었다.

3. 2. 구조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제국 및 왕립 해군 부(''K. u. k. Marinesektion'')의 통제를 받았다. 이곳은 제국 공동 전쟁부(''Reichskriegsministerium'') 산하의 별도 부서였다.[19] 해군 부장 및 해군 사령관 아래 다음과 같은 조직들이 있었다.[19]

  • 해군 부사령관
  • 해군 참모
  • 행정실
  • 작전실
  • I. 작업반
  • 1\. 부서 - 수병, 부사관 및 하급 장교 인력 관리
  • 2\. 부서 - 병력 충원, 경력 개발 및 군인 및 가족의 사회적 문제
  • 3\. 부서 - 군수
  • II. 작업반
  • 4\. 부서 - 기술 연구 개발 부서
  • 5\. 부서 - 해군 요새 및 해안 시설
  • 6\. 부서 - 지출, 감사, 상업 협상 및 계약
  • 7\. 부서 - 법무 부서
  • 8\. 부서 - 재무 감사
  • 9\. 부서 - 의료 부서
  • 해군 감찰, 빈, 의장 - 소장
  • 중앙 해군 기록 보관소, 빈
  • 항만 사령부, 폴라 (트리에스테 해병 파견대를 제외한 모든 곳은 폴라에 위치), 항만 제독 겸 전쟁 항만 사령관 - 중장
  • 항만 제독 부관 - 소장
  • 군사 부서
  • 동원 부서
  • 전보국
  • 의무 부서
  • 경제 및 행정 부서
  • 법률 고문 및 군 검사
  • 해군 급여 서비스
  • 해병 군단 - 육상 근무 해병에 해당하는 육군 연대
  • I. 해병 보급소 - 육군 대대 해당
  • II. 해병 보급소 - 육군 대대 해당
  • III. 해병 보급소 - 육군 대대 해당
  • 트리에스테 해병 파견대, 트리에스테 - 육군 대대 해당
  • 해군 기계 학교
  • 해군 소년 학교
  • 해군 소녀 학교
  • 수로국
  • 천문대
  • 지구물리학 부서
  • 정밀 기기 보급소
  • 해군 지도 보급소
  • 해군 병원
  • 해군 식량 보급 서비스
  • 해군 의류 서비스
  • 해군 감옥
  • 해군 무기고 사령부, 폴라, 무기고 사령관 - 중장
  • 무기고 부사령관 - 소장
  • 행정 이사
  • 장비 관리국
  • 항만 보급소
  • 어뢰정 관리국
  • 장비 관리국
  • 무기고 위원회
  • 조선 관리국
  • 기계 건설 관리국
  • 포병 관리국
  • 화학 연구소
  • 해군 탄약 시설
  • 주요 탄약 보관소
  • 기본 및 전문 교육 학교
  • 해군 요새 및 해안 시설 서비스, 폴라, 국장 - 소장
  • 해군 기술 위원회, 폴라, 의장 - 중장
  • 부의장 - 소장
  • 해군 정보국, 폴라
  • 해군 기술 통제 위원회, 폴라
  • 해군 상위 기관 (군종감실)
  • 해군 사관학교, 사령관 - 소장
  • 해상 수송 조정 사무소, 트리에스테
  • 트리에스테 해구 사령부, 사령관 - 소장
  • 기술 부서
  • 재무 부서
  • 세베니코 해구 사령부, 사령관 - 소장
  • 군사 부서
  • 법무 부서
  • 의료 부서
  • 경제 및 행정 부서
  • 카스텔누오보 방어 지구 사령부
  • 전함 \[인원] 보충 사령부 - 트리에스테, 세베니코 및 피우메
  • 부속 위치 사령부 - 세베니코 및 스팔라토
  • 부다페스트 해군 파견대
  • 베이징 해군 파견대
  • 톈진 해군 파견대

4. 해군 항공대

그라도, 이탈리아에서 인양된 k.u.k 수륙 비행기


1916년 8월, 황립 해군 항공대(k.u.k. Seeflugwesen)가 창설되었고, 1917년에 k.u.k. Seefliegerkorps로 개명되었다. 최초의 조종사들은 테레지안 군사 아카데미가 위치한 오스트리아 저지의 비너 노이슈타트 비행장에서 조종사 훈련을 받은 해군 장교들이었다. 이후 k.u.k. Seefliegerkorps는 알바니아와 남부 달마티아베라트, 카바야, 티라나, 스쿠타리, 이갈로와 몬테네그로포드고리차 비행장에서도 활동했다.

k.u.k. Seeflugwesen은 주로 개조된 독일 항공기를 사용했지만, 자체적으로 여러 변형을 생산하기도 했다. 이 부대의 주목할만한 항공기는 다음과 같다.

  • 포커 A.III
  • 포커 E.III
  • 한자-브란덴부르크 B.I
  • 한자-브란덴부르크 D.I
  • 아비아틱 D.I
  • 알바트로스 W.4
  • 푀닉스 D.I
  • 포커 D.VII
  • 로너 L

5. 해군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

오스트리아(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존속 기간 대부분 동안 제국에서 재정 또는 정치적 우선순위가 높지 않았다. 해군은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널리 퍼진 지지나 대중적 열광을 누리지 못했다. 해군 지출은 육군이 주로 통제하는 오스트리아 전쟁부의 감독을 받았으며, 리사 해전 직전의 기간이 유일한 예외였다.[23]

해군은 황실 가족의 일원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세 번의 짧은 기간 동안만 상당한 대중의 관심과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1821–1847),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1832–1867), 프란츠 페르디난트 (1863–1914) 대공은 각자 함대에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해군 고위직을 맡았고 해군 문제에 대한 열정적인 운동가였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대공은 일찍 사망했고,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황제가 되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떠났으며,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암살당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오래가지 못했다.

해군의 문제는 민족 집단 10개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인구의 5% 이상을 차지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장교들은 제국에서 사용되는 언어 중 최소 4개 이상을 구사해야 했다. 독일인체코인은 일반적으로 신호 및 기관실 업무를 맡았고, 헝가리인은 포수가 되었으며, 크로아티아인과 이탈리아인은 선원 또는 보일러공이 되었다. 이러한 다민족, 다언어 구성은 의사 소통 문제를 야기했다.

해군에게 또 다른 문제는 제국의 전함 설계가 일반적으로 다른 유럽 열강보다 톤수가 작다는 것이었다.

6. 유명 인사


  • 빌헬름 폰 테게토프: 19세기 오스트리아의 해군 중장으로, 리사 해전에서의 활약으로 유명하다. 오스트리아의 가장 유명한 해군 장교였으며, 후에 해군 총사령관을 지냈다.[23]
  • 미클로시 호르티: 최종 계급은 중장이며, 1920년부터 1944년까지 헝가리의 섭정(사실상 국가원수)을 지냈다.[24]
  • 막시밀리아노 1세: 멕시코 황제로, 1864년부터 1867년까지 재위했으며, 베니토 후아레스에 의해 처형되었다.[25]
  •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라프: 해군 소령으로, 뮤지컬이자 영화인 사운드 오브 뮤직의 등장인물로 유명하다.[26]
  •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제독이자 해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 부제독이자 해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 루트비히 폰 파우츠: 부제독이자 해군 총사령관 겸 해군 장관을 역임했다.
  • 프리드리히 폰 푁: 부제독이자 테게토프의 후임으로 해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 막시밀리안 폰 슈테르네크: 제독으로 리사 해전에 참전했으며, 폴라시의 은인이자 해군 총사령관이었다.
  • 카를 바이프레흐트: 북극 탐험가로, 1872년부터 1874년까지 진행된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 베른하르트 폰 횔러스토르프-우르베어: 부제독으로, 1857년부터 1859년까지 진행된 노바라 원정의 지도자였으며, 후에 제국 통상부 장관을 지냈다.
  • 고트프리트 폰 반필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최고의 해군 비행사였다. 후에 트리에스테의 사업가가 되었다.
  • 호르티 미클로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부제독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함대의 마지막 사령관이었다. 후에 1944년까지 헝가리 섭정이었다.
  •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라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 잠수함 장교였다. 후에 사업가가 되었으며,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에 등장하는 폰 트라프 가족의 수장이었다.
  • 루트비히 폰 횔넬: 오스트리아 해군 장교이자 아프리카 탐험가였다.
  • 율리우스 폰 바그너-야우레크: 의사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예비 장교였으며, 후에 1927년 노벨 생리 의학상을 수상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장교 제복 모자, 비엔나 군사사 박물관


초상이름재임 시작퇴임재임 기간참고
해군 최고 사령관de
부제독
다흘레루프
1849년 2월1851년 8월
부제독
프란츠 그라프 폰 빔프펜
1851년 8월1854년 9월
부제독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
1854년 9월1860년
부제독
루트비히 폰 포츠
1860년1865년 3월
해군 사령관de
부제독
빌헬름 폰 테게트호프
1868년 3월1871년 4월
부제독
프리드리히 폰 푀크
1871년 4월1883년 11월
제독
막시밀리안 다블렙스키 폰 슈테르넥
1883년 11월1897년 12월 5일 †
제독
헤르만 폰 슈파운
1897년 12월1904년 10월
제독
루돌프 몬테쿠콜리
1904년 10월1913년 2월
대제독
안톤 하우스
1913년 2월1917년 2월 8일 †
제독
막시밀리안 네고반
1917년 4월1918년 2월


7. 계급

제공된 원본 소스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계급"에 대한 정보가 없으므로, 해당 섹션은 작성할 수 없다. 이전 답변과 동일하다.

8. 고위 지도부

한스 델레럽1849년 2월1851년 8월부제독
프란츠 그라프 폰 빔프펜1851년 8월1854년 9월부제독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1854년 9월1860년부제독
루트비히 폰 포츠1860년1865년 3월해군 사령관de부제독
빌헬름 폰 테게트호프1868년 3월1871년 4월부제독
프리드리히 폰 푀크1871년 4월1883년 11월제독
막시밀리안 다블렙스키 폰 슈테르넥1883년 11월1897년 12월 5일 †제독
헤르만 폰 슈파운1897년 12월1904년 10월제독
루돌프 몬테쿠콜리1904년 10월1913년 2월대제독
안톤 하우스1913년 2월1917년 2월 8일 †제독
막시밀리안 네고반1917년 4월1918년 2월



Flottenkommandantde (함대 사령관)
초상이름재임 기간비고
안톤 하우스
제독/대제독
1914년 7월 – 1917년 2월
막시밀리안 네고반
제독
1917년 2월 – 1918년 2월
호르티 미클로시
소장/부제독
1918년 2월 – 1918년 11월



Kriegsministerium의 Chef der Marinesektionde (해군성 장관)
초상이름재임 기간비고
루트비히 폰 파우츠
해군 중장
1865년 3월 ~ 1868년 4월
빌헬름 폰 테게토프
해군 중장
1868년 3월 ~ 1871년 4월
프리드리히 폰 푁
제독
1872년 10월 ~ 1883년 11월
막시밀리안 다우블렙스키 폰 슈테르네크
제독
1883년 11월 ~ 1897년 12월
헤르만 폰 슈파운
제독
1897년 12월 ~ 1904년 10월
루돌프 몬테쿠콜리
제독
1904년 10월 ~ 1913년 2월
안톤 하우스
제독/대제독
1913년 2월 ~ 1917년 2월
카를 카일러 폰 칼텐펠스
해군 중장
1917년 2월 ~ 1917년 4월
막시밀리안 네고반
제독
1917년 4월 ~ 1918년 2월
프란츠 폰 홀루브
해군 중장
1918년 2월 ~ 1918년 11월



9. 해군기

황제 요제프 2세가 1786년 3월 20일 해군기를 승인하기 전까지 오스트리아 해군은 노란색과 검은색의 제국기를 사용했다. 공식적으로 ''Marineflagge''(해군기)로 채택된 이 기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색상을 기반으로 했다. 이 기는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 이후에도 공식 기로 사용되었으며, 오스트리아 해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으로 개편된 후에도 유지되었다.[22]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황제 프란츠 요제프는 헝가리 문장을 포함하는 새로운 디자인을 승인했다. 1915년에 공식적으로 제정된 이 기는 실제로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전함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전의 기를 계속 게양했다. 따라서 1915년 이후의 해군기 형태를 게양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선박의 사진은 비교적 희귀하다.

1786-191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기

참조

[1] 서적 Imperial Adventurer - Emperor Maximilian of Mexico 1971
[2] 간행물 In Searching for Nickel Ore for the Austro-hungarian Navy on the Expedition of the Ship Albatros to Salomon Islands in 1896 https://kronika.zzds[...]
[3] 서적 The Russian fleet, 1914-1917 Ian Allan 1972
[4] 서적 Austro-Hungarian Naval Policy 1904-1914 Frank Cass 1996
[5] 서적 Die 'Tegetthoff' Klasse 1979-01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서적 Submarines: an illustrated history of their impact ABC-CLIO
[11] 문서
[12] 웹사이트 Assault on the Viribus Unitis http://www.worldwar1[...] Old News 1998-01
[13] 서적 Ratna mornarica austro-ugarske monarhije 2004
[14] 문서 Gunboats of World War I
[15] 문서 Austro-Hungarian warships of World War I
[16] 문서 Third Axis, Fourth Ally: Romanian Armed Forces in the European War, 1941-1945
[17] 서적 The Habsburg Empire, 1840–1916 1972
[18] 웹사이트 Naval cemetery - a walk through the history of Pula http://www.pulainfo.[...] 2009-01-02
[19] 서적 Seidels kleines Armeeschema. Dislokation und Einteilung des k.u.k Heeres, der k.u.k. Kriegsmarine, der k.k. Landwehr und der k.u. Landwehr., Nr. 76 Seidel & Sohn, on behalf of the War Ministry
[20] 서적 Military And Naval Recognition Book: A Handbook On The Organization, Uniforms And Insignia Of Rank Of The World's Armed Forces https://archive.org/[...] D. Van Nostrand Company 1918
[21] 서적 Army and Navy Uniforms and Insignia Frederick A. Stokes Company 1918
[22] 서적 Unsere Kriegs-Marine 1899
[23] 서적 ハプスブルク帝国史
[24] 서적 ハプスブルク帝国史
[25] 서적 世界戦艦物語
[26] 문서 第一次大戦におけるオーストリア潜水艦 第1回
[27] 문서 第一次大戦におけるオーストリア潜水艦 第2回
[28] 문서 第一次大戦におけるオーストリア潜水艦 第3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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