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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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시아는 기원전 641/640년 유다 왕국의 왕이 되어,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그는 통치 8년과 12년에 종교 개혁을 시작하여 유다와 예루살렘의 우상 숭배를 척결하고 율법서를 발견하여 신명기 개혁으로 불리는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아시리아의 쇠퇴로 유다의 독립을 회복하려 노력했으나, 이집트의 네코 2세의 군대를 막으려다 메기도 전투에서 사망했다. 요시야 사후 유다 왕국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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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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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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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유다 왕 |
재위 기간 | 기원전 640년–609년 |
선임자 | 아몬 |
후임자 | 여호아하스 |
배우자 | 스비다 하무달 |
자녀 | 요하난 여호야김 시드기야 여호아하스 |
왕가 | 다윗 가문 |
아버지 | 아몬 |
어머니 | 여디다 |
출생 추정 시기 | 기원전 648년경 |
출생 추정 장소 | 아마도 예루살렘 |
사망일 | 기원전 609년 타무즈 (7/8월) |
사망 당시 나이 | 38–39세 |
사망 장소 | 예루살렘 |
이름 정보 | |
히브리어 이름 | (요시야후), 문자 그대로 "야에 의해 치유됨" 또는 "야의 지지를 받음"을 의미 |
그리스어 | (이오시아스) |
라틴어 | (이오시아스) |
2. 등극과 종교 개혁
전왕 아몬과 보츠캇 출신 아다야의 딸 여디다의 아들이었던 요시야는 아버지가 살해된 후, 백성들의 추대로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71]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하며 조상 다윗의 길을 걸었다고 평가받는다.
역대하에 따르면, 요시야는 재위 8년째(16세경)에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기 시작"했고,[16] 재위 12년째(20세경)부터는 예루살렘과 유다 전역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비롯한 다른 신들의 제단과 우상을 파괴하며 종교 정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71][16] 그는 산당과 각종 우상(아세라 목상, 조각 신상, 주조 신상)을 제거하고 바알 제단을 허물었으며, 우상들을 가루 내어 제물을 바치던 자들의 무덤 위에 뿌리는 등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정화 작업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넘어 북쪽의 므낫세, 에브라임, 시므온, 납달리 등 옛 북이스라엘 왕국 지역에까지 확대되었다.[71][29]
요시야의 개혁은 재위 18년에 성전 보수 공사 중 대제사장 힐기야가 중요한 율법서를 발견하면서[17][18][19] 더욱 심화되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 율법서 발견은 이후 왕과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갱신하고,[8][33][34] 오랫동안 지켜지지 않았던 유월절을 성대하게 다시 지키는[8] 등 개혁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요시야의 이러한 종교 개혁은 단순히 종교적인 열정뿐만 아니라, 당시 아시리아의 세력이 약화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유다 왕국의 정치적 독립을 공고히 하고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구약성서는 이러한 요시야의 개혁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그를 이상적인 왕 중 한 명으로 묘사한다.
2. 1. 종교 개혁의 배경
전왕 아몬과 보츠캇 출신 아다야의 딸 여디다 사이에서 태어난 요시야는 아버지가 살해된 후, 백성들의 추대로 8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행하며 조상 다윗의 길을 따랐다고 평가받는다.역대하에 따르면, 요시야는 재위 8년째(16세경)에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기 시작"했으며, 재위 12년째(20세경)부터는 예루살렘과 유다 전역에서 바알과 아세라 관련 제단 및 우상들을 파괴하며 정화 작업을 시작하였다.[71][16] 그는 산당, 아세라 목상, 조각 신상, 주조 신상 등을 제거하고 바알 제단을 허물었으며, 그 위 분향 단들도 부수었다. 우상들을 가루 내어 제물을 바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리고, 이방 제사장들의 뼈를 제단 위에서 태우는 방식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화했다. 이러한 정화 작업은 므낫세, 에브라임, 시므온, 납달리 지역까지 확대되었으며, 이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71]

요시야 재위 18년에는 성전 보수 작업이 시작되었다.[17] 요시야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그동안 모인 세금을 사용하여 성전을 수리하도록 명령했다. 성전 창고를 정리하던 중 힐기야는 두루마리 하나를 발견했는데, 이는 열왕기하에서는 "율법책"[18]으로, 역대하에서는 "모세가 전한 야훼의 율법책"[19]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세페르 하토라'(ספר התורה)는 여호수아기에서 모세가 받은 율법을 지칭할 때 사용된 표현과 같다. 많은 학자들은 이 책이 신명기의 사본이거나 신명기의 일부가 된 문서일 것으로 추정한다.[20] (다만, 성전 수리 이야기는 이전 유다 왕 요아스가 시행했던 정책과 유사하다는 점도 지적된다.[21])
힐기야가 가져온 율법책을 읽은 요시야는 예언자 훌다에게 자문을 구했다. 훌다는 율법책의 경고대로 재앙이 닥칠 것이나, 요시야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낮추고 겸비했기 때문에 그의 생전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다.[8]

이후 요시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장로들과 모든 백성을 모아 야훼만을 섬기도록 하고 다른 모든 형태의 숭배를 금지했다. 바알과 "하늘의 군대" 숭배에 사용되던 도구와 상징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거되었고, 남쪽 브엘세바에서 북쪽 벧엘과 사마리아의 도시에 이르기까지 지역 성소(산당)들이 파괴되었다.[8] 이교 제사장들을 처형하고, 벧엘의 죽은 제사장들의 뼈를 무덤에서 꺼내 그들의 제단에서 불태우기도 했다. 요시야는 또한 유월절 축제를 다시 지켰다.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단순히 신앙적인 동기뿐 아니라 정치적인 배경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아시리아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생긴 권력 공백을 틈타 유다 왕국의 독립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고대 오리엔트에서 국가의 독립은 그 나라가 섬기는 신의 독립과 직결되었으며, 반대로 강대국에 예속되는 것은 종주국의 신을 섬겨야 함을 의미했다. 요시야에게 아시리아, 이집트, 바빌로니아 등 주변 강대국의 신을 섬기는 것은 유다 민족의 신앙심과 자존심 모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야훼 유일신 신앙을 강화하고 다른 모든 신앙 형태를 배격하는 것은, 유다 왕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민족적 결속을 다지려는 정치적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2. 2. 종교 개혁의 내용
아몬 왕과 여디다의 아들인 요시야는 아버지가 살해된 후, 백성들에 의해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하며 조상 다윗의 길을 따랐다고 평가받는다.[71]역대기에 따르면, 요시야는 왕위에 오른 지 8년째 되던 해(16세경)에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고, 12년째 되던 해(20세경)부터는 예루살렘과 유다 전역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비롯한 우상 숭배의 흔적을 제거하는 종교 개혁을 시작했다.[16][66] 그는 산당과 각종 우상(아세라 목상, 조각 신상, 주조 신상)을 파괴하고 그 가루를 우상 숭배자들의 무덤에 뿌렸으며, 이교 사제들의 뼈를 제단 위에서 불태우는 등 강력한 정화 작업을 벌였다. 이러한 개혁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넘어 북쪽의 므낫세, 에브라임, 시므온, 납달리 지역에까지 미쳤다.[71][8][29]
열왕기는 요시야 재위 18년에 시작된 예루살렘 성전 보수 작업부터 개혁을 비중 있게 다루기 시작하는데,[72][17] 이 과정에서 대제사장 힐키야가 모세의 율법서를 발견하게 된다. 이 발견은 요시야 개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왕과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지키기로 다시 언약을 맺고 개혁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8][33][34] 이 언약 갱신 이후 요시야는 더욱 철저하게 우상 숭배를 제거했으며, 오랫동안 지켜지지 않았던 유월절을 전례 없이 성대하게 다시 지키도록 했다.[8]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단순히 종교적인 열정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당시 쇠퇴하던 아시리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유다 왕국의 정치적 독립을 공고히 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외래 신앙을 배격하고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국가를 통합하는 것은 유다의 자주성을 선언하는 중요한 행위였던 것이다. 이러한 개혁은 구약성서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받으며, 요시야를 이상적인 왕 중 한 명으로 묘사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요시야 개혁 기록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일부 학자들은 성경 기록 전체의 역사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23][24][25] 많은 학자들은 요시야 통치 하에 실제로 종교 개혁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하는 편이다.[26][27][28][63] 율법서 발견 이야기나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이 후대의 신명기 역사 편찬 과정에서 요시야 시대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37][38]
2. 2. 1. 율법서의 발견
역대기에서는 요시아가 왕위에 오른 지 8년째부터 야훼 신앙을 추구하고 12년째부터 우상 파괴 등 종교 개혁을 시작했다고 상세히 기록하는 반면,[16] 열왕기하는 요시아 재위 18년에 시작된 예루살렘 성전 보수 작업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72][17]요시야는 대제사장 힐키야에게 성전에 모인 자금을 사용하여 성전을 보수하도록 명령했다.[17] 요시야는 아찰야의 아들 사판 서기관, 마아세야 성주, 요아하스의 아들 요아 기록관을 보내 성전 보수를 감독하게 했다. 이 자금은 므낫세, 에브라임, 나머지 북이스라엘 지역, 그리고 유다와 베냐민, 예루살렘 주민들과 레위인들에게서 거둔 것이었다. 이 돈은 성전 보수 공사를 책임진 일꾼들에게 지급되어 성전을 수리하고 보강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목수와 석수에게 지급되어, 이전 유다 왕들에 의해 훼손된 건물을 복구하기 위한 돌과 목재를 구입하는 데 쓰였다. 작업을 감독하기 위해 므라리 자손인 야핫과 오바드야, 크핫 자손인 즈카르야와 므술람 등 레위인들이 임명되었다. 악기 연주에 능한 레위인들은 짐꾼을 감독하고 다른 작업자들을 지휘했으며, 일부 레위인들은 서기관, 행정관, 문지기 역할도 맡았다.

성전 창고에서 돈을 꺼내던 중, 대제사장 힐키야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야훼의 율법서를 발견했다.[19][30][31][32] 열왕기하에서는 이를 "율법책"[18]이라 칭하며, 역대기하에서는 "모세가 전한 야훼의 율법책"[19]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열왕기하 22장 8절에 나오는 히브리어 문구 '세페르 하토라(ספר התורהhe)'는 여호수아기 1장 8절과 8장 34절에서 여호수아가 모세로부터 받은 율법을 묘사할 때 사용된 표현과 동일하다.[73][20] 이 책이 구체적으로 토라 전체를 의미하는지는 본문에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신명기의 초기 사본이거나, 후대에 신명기의 일부가 된 문서일 것으로 추정한다.[20]
힐키야는 발견한 율법서를 사반 서기관에게 전했고, 사반은 이를 요시야 왕에게 가져가 읽어주었다. 율법의 내용을 들은 요시야는 큰 충격을 받고 옷을 찢으며(열왕기하 22:11),[33] 힐키야, 사반의 아들 아히캄, 미가야의 아들 악볼(역대기에서는 마가의 아들 압돈[74]), 사반 서기관, 그리고 왕의 시종 아사야에게 야훼의 뜻을 물으라고 명령했다. 왕의 신하들은 여예언자 훌다에게 찾아갔다. 훌다는 하스라의 손자이자 톡핫의 아들인 예복 관리자 살룸의 아내였다.[74]
훌다는 율법의 경고대로 유다 백성이 언약을 어겼기 때문에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요시야 왕에 대해서는, 그가 율법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찢으며 겸손하게 회개했기 때문에, 그 재앙이 그의 생전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는 네 마음이 부드러워졌고, 네가 이 곳과 그 주민들을 향한 나의 말을 듣고 야훼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며... 네 옷을 찢고 내 앞에서 울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네 말을 들었다."(열왕기하 22:19)[8]
이후 요시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장로들과 모든 백성을 모아 율법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주고, 야훼만을 섬기고 그의 계명을 지키겠다는 언약을 갱신했다.[33][34]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알과 "하늘의 군대"(천체 숭배) 숭배에 사용되던 모든 기구와 상징물들을 제거하고 파괴했다. 또한 남쪽 브엘세바에서 북쪽 벧엘과 사마리아의 성읍들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산당들을 파괴했다.[8] 요시야는 이교 제사장들을 처형했으며, 심지어 벧엘에 묻혀 있던 죽은 제사장들의 뼈를 꺼내 그들의 제단 위에서 불태웠다. 이는 약 300년 전, 이름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 북이스라엘 왕국의 여로보암 왕에게 "다윗의 집에서 요시야라는 이름의 아들이 태어나 벧엘의 제단을 더럽힐 것"이라고 예언한 내용(열왕기상 13:1–3)의 성취로 여겨진다. 요시야는 벧엘에서 이 예언을 했던 '하나님의 사람'과 그를 장사지낸 벧엘 예언자의 무덤은 보존하도록 명령했다(열왕기하 23:15–19).[8] 더불어 요시야는 오랫동안 지켜지지 않았던 유월절 축제를 성대하게 다시 거행하도록 했다.[8]
요시야의 이러한 개혁은 열왕기하 22–23장과 역대기 하 34–35장에 묘사되어 있으며, 고대 이스라엘의 혼합주의적 종교 관행과 당시 유행하던 천체 숭배를 근절하고,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야훼 신앙을 확립하려는 목표를 가졌다.[22] 일부 학자들은 이 개혁 기록 전체의 역사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23][24][25] 다수의 학자들은 요시야 통치 하에 실제로 종교 개혁이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한다.[26][27][28][63]
율법서 발견 이야기는 신명기 역사서로 알려진 여호수아기부터 열왕기하까지 이어지는 역사 서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많은 학자들은 이 역사서 자체가 요시야 시대에 그의 개혁을 정당화하고 지지하기 위해 편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37][38] 일부에서는 발견된 율법서가 실제로는 당시의 정통 야훼 신앙을 따르던 제사장들이 작성하여 모세의 저작으로 위장한 뒤, 극적인 발견을 연출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는 개혁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임박한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위협 앞에서 국가적 결속을 다지기 위한 방편이었을 수 있다.[36] 최근의 일부 유럽 신학자들은 토라와 신명기 역사서의 상당 부분이 더 후대인 페르시아 시대에 완성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39] 대부분의 학자들은 신명기 역사서가 왕들의 연대기 등 더 오래된 자료들을 활용하여 요시야 시대에 기반을 형성했다고 본다.[40]
요시야의 개혁은 단순히 종교적인 열정뿐만 아니라, 당시 아시리아의 쇠퇴로 인한 권력 공백기에 유다 왕국의 정치적 독립을 강화하려는 세속적인 동기와도 연관이 있다. 고대 근동에서 국가의 독립은 종종 민족 신의 독립과 동일시되었으므로, 외세의 신들을 배격하고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유다의 자주성을 선언하고 국가적 결속을 다지는 중요한 행위였다.
2. 2. 2. 언약
역대기 하에 따르면 요시야는 재위 8년에 다윗의 하느님을 찾기 시작했고, 재위 12년부터는 예루살렘과 유다 전역에서 바알 제단과 우상을 파괴하는 종교 개혁을 추진했다.[16] 열왕기 하는 재위 18년에 이루어진 예루살렘 성전 복구 작업부터 기록을 시작하는데, 두 기록 모두 이 시점을 재위 18년으로 언급한다.[17][72]
요시야는 성전 정화 후 대제사장 힐키야에게 수년간 모인 세금을 사용하여 성전을 보수하도록 명령했다.[17] 그는 아찰야의 아들 사판 서기관, 마아세야 성주, 요아하스의 아들 요아 기록관을 보내 성전 보수를 감독하게 하였다. 므낫세와 에브라임, 나머지 이스라엘 지역, 온 유다와 베냐민, 예루살렘 주민들과 레위인에게서 모은 돈이 힐기야 대제사장에게 전달되었다. 이 돈은 성전 보수 공사 책임자들과 목수, 석수에게 지급되어 유다의 이전 왕들이 훼손한 건물을 수리하고 재료를 구입하는 데 사용되었다. 므라리 자손 야핫과 오바드야, 크핫 자손 즈카르야와 므술람 등 레위인들이 공사를 지휘했으며, 다른 레위인들은 짐꾼 감독, 작업 지휘, 서기관, 행정관, 문지기 등의 역할을 맡았다.
성전 보물 창고를 정리하던 중, 힐기야 대제사장은 "율법책"(ספר התורה|세페르 하토라he)[18]을 발견했다. 역대기 하에서는 이를 "모세가 주신 여호와의 율법책"[19]이라고 더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열왕기하 22장 8절의 '세페르 하토라'라는 표현은 여호수아 1장 8절과 8장 34절에서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받은 율법을 묘사할 때 사용된 것과 같다.[73] 이 책이 구체적으로 토라 전체를 의미하는지는 명시되지 않았으나,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신명기의 초기 사본이거나 신명기의 일부가 된 문서일 것으로 추정한다.[20][35]
힐기야는 발견한 율법서를 사판 서기관에게 주었고, 사반은 이를 요시야 왕에게 가져가 읽어주었다. 율법서의 내용을 들은 요시야는 크게 놀라 옷을 찢으며 회개했고, 힐기야, 사반의 아들 아히캄, 미가의 아들 압돈(또는 악볼), 사반 서기관, 시종 아사야 등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도록 명령했다.[74] 이들은 여예언자 훌다에게 가서 자문을 구했다. 훌다는 유다가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요시야가 마음을 낮추고 회개했으므로 그의 생전에는 재앙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8][74]
훌다의 예언을 들은 요시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원로와 백성들(제사장, 레위인, 고위층부터 낮은 자까지)을 성전으로 소집했다. 그는 모든 사람 앞에서 발견된 율법서의 내용을 읽어주었다. 그리고 왕과 모든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율법서에 기록된 계명과 법령, 규례를 지키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기로 언약을 맺었다. 예루살렘과 베냐민 주민들도 이 언약에 참여했다. 이 언약을 통해 예루살렘 주민들은 하나님의 계약을 따르게 되었고, 요시야는 유다 전역에서 모든 우상 숭배의 흔적을 제거하고 백성들이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도록 했다.[33][34] 그는 바알과 "하늘의 군대" 숭배에 사용된 기물들을 성전에서 없애고, 남쪽 브엘세바에서 북쪽 벧엘과 사마리아의 도시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역 성소, 즉 산당을 파괴했다.[8] 이교 제사장들을 처형하고, 벧엘에 있던 죽은 제사장들의 뼈를 무덤에서 꺼내 그들의 제단 위에서 불사르기까지 했다. 요시야는 또한 오랫동안 지켜지지 않았던 유월절을 다시 성대하게 지켰다.[8]
요시야의 이러한 개혁은 열왕기 하 22–23장과 역대기 하 34–35장에 묘사되어 있다. 이 개혁은 고대 이스라엘의 혼합주의적 종교 관행과 천체 숭배를 종식시키고,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예배를 확립하며 벧엘의 경쟁 성소를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22] 일부 학자들은 이 기록의 역사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23][24][25] 많은 학자들은 요시야 시대에 종교 개혁이 실제로 있었다고 본다.[26][27][28][63]
율법서 발견과 언약 갱신은 요시야 통치의 전환점이 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발견된 율법서가 실제로는 당시 야훼 신앙을 강화하려던 제사장들이 신명기를 기반으로 작성하여 모세의 저작으로 위장한 뒤, 극적인 발견을 연출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온 새로운 말씀"이라는 권위를 부여하여 개혁의 동력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36] 또한, 많은 학자들은 여호수아기부터 열왕기하까지 이어지는 핵심 역사 서술, 즉 신명기 역사(DtrH)가 요시야 시대에 그의 개혁을 정당화하고 지원하기 위해 편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37][38] 물론, 이 문서들이 실제로는 더 후대인 페르시아 시대에 완성되었다는 주장도 있다.[39]
요시야의 언약 갱신과 종교 개혁은 단순히 종교적인 행위를 넘어, 당시 약화된 아시리아의 영향력 속에서 유다 왕국의 정치적 독립과 민족적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국가를 통합하고, 외래 종교의 영향을 배제함으로써 유다 왕국의 자주성을 공고히 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2. 2. 3. 유월절
요시아는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을 기리는 유월절 축제를 성대하게 열었다. 그는 유월절 양을 잡도록 지시하고, 사제들에게 임금을 맡기며 성전에서 맡은 일을 잘 수행하도록 격려했다. 또한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인들에게 유월절 준비에 대해 상세히 일러두었다.요시야 자신은 백성들이 유월절 제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어린양과 새끼 염소 3만 마리와 황소 3,000마리를 기부했다. 다른 지도자들도 기부에 동참했다. 대신들은 백성, 사제, 레위인을 위해 기부했고, 성전 책임자인 힐기야, 즈카르야, 여히엘은 사제들이 사용할 파스카 제물로 어린양과 새끼 염소 2,600마리와 황소 300마리를 내놓았다. 레위인의 지도자인 코난야와 그의 동생 스마야, 느탄엘, 그리고 하사브야, 여이엘, 요자밧 역시 레위인들이 사용할 파스카 제물로 어린양과 새끼 염소 500마리와 황소 500마리를 기부했다.
기부자 | 어린양/새끼 염소 | 황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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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아 임금 | 30,000 마리 | 3,000 마리 |
성전 책임자 (힐기야, 즈카르야, 여히엘) | 2,600 마리 | 300 마리 |
레위인 지도자 (코난야, 스마야, 느탄엘, 하사브야, 여이엘, 요자밧) | 500 마리 | 500 마리 |
기원전 609년, 이집트의 파라오 네카우 2세가 신아시리아 제국을 지원하기 위해 북쪽으로 군대를 이동시키던 중, 유다 왕국의 왕 요시야는 메기도에서 이집트군의 진로를 막아섰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유다 군대는 패배하였고 요시야는 결국 전사하였다.[77][54] 바빌로니아 연대기의 기록을 통해 요시야는 기원전 609년 여름(담무스월) 이전에 사망했음을 알 수 있다.[77]
예배 준비가 완료되자, 임금의 명령에 따라 사제들은 정해진 자리에 서고 레위인들은 조를 편성하여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파스카 양을 잡자 사제들은 그 피를 받아 제단에 뿌렸고, 레위인들은 잡은 양의 가죽을 벗겼다. 이후 레위인들은 번제물을 따로 떼어 백성의 가문별로 나누어 주어,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께 바치게 했다. 황소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법규에 따라 유월절 양은 불에 구워졌고, 나머지 거룩한 제물들은 냄비, 솥, 단지에 넣고 삶아져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신속하게 나누어 주었다. 모든 백성에게 분배가 끝난 후에야 레위인들은 자신들과 사제들의 몫을 준비했다.
아론의 자손인 사제들은 번제물과 굳기름을 밤까지 바쳐야 했기 때문에, 레위인들이 자신들의 몫과 아론 자손 사제들의 몫까지 준비했다. 아삽 자손의 성가대는 다윗과 아삽, 헤만, 그리고 임금의 환시가였던 여두둔의 명령에 따라 지정된 위치에 섰다. 문지기들도 각자 맡은 문을 지켰으며, 레위인들이 그들의 몫까지 준비해 주었으므로 자리를 비울 필요가 없었다.
이처럼 요시야 임금의 주도로 하느님을 향한 예배가 모든 규정에 맞게 준비되었고, 유월절을 지키며 제단 위에 번제물을 바칠 수 있었다. 성경은 요시야 시대에 치러진 유월절이 이전의 어느 왕 시대보다도 가장 성대하게 지켜졌다고 기록하고 있다.[8] 요시야의 이러한 유월절 재개는 그의 종교 개혁의 중요한 일부였다.
3. 아시리아로부터의 독립
요시야가 기원전 641년 또는 640년경 유다 왕국의 왕위에 올랐을 때, 국제 정세는 매우 불안정했다. 당시 아시리아 제국은 쇠퇴하며 무너지고 있었고,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아직 그 공백을 완전히 메우지 못한 상태였다. 서쪽의 고대 이집트 역시 아시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 국력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이러한 권력 공백 속에서 예루살렘은 한동안 외세의 간섭 없이 독자적인 통치를 할 수 있었다.
기원전 609년 봄, 이집트의 파라오 네코 2세는 유프라테스 강까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메디아인과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공격으로 붕괴되어 가던 신아시리아 제국을 지원하려 했다.[52] 그는 용병으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해안로 비아 마리스를 따라 시리아로 진격했다. 그리고 해안을 따라 지중해 함대의 지원을 받으며, 네코는 필리스티아와 샤론 평원의 낮은 지역을 통과했다. 그러나 그는 거대한 이스르엘 계곡 남쪽을 가로막는 언덕 능선 위에서 요시야가 이끄는 유다 군대에 의해 길이 막혔다. 요시야가 이집트 원정을 막으려 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파라오 프삼티크 1세가 불과 1년 전(기원전 610년) 사망한 것으로 인해 아시리아인과 이집트인이 약해졌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프삼티크는 아시리아 왕 에사르하돈과 아슈르바니팔에 의해 임명되고 승인되었었다.[52] 역대기에 따르면, 네코는 유다인과 싸울 의도가 없었으며, 자신을 공격하려는 요시야의 결정에 당황하여 "유다 왕아, 우리가 서로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 나는 오늘 당신을 치러 오지 않았다."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53]
요시야는 므기또에서 진격을 막으려 했고, 그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요시야가 사망했다.[54] 네코는 아시리아의 아슈르-우발리트 2세와 연합하여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하란을 포위했다. 연합군은 도시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고, 네코는 시리아 북부로 후퇴했다.
요시야 왕 치세 때, 그동안 아시리아에 종속되어 있던 유다 왕국은 아시리아의 쇠퇴로 인해 일시적으로 독립을 회복했다. 독립을 회복한 요시야 왕은 유다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후술할 종교적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정책을 펼쳤다.
4. 외교 관계
요시야가 기원전 641년 또는 640년경 유다의 왕위에 올랐을 때, 국제 정세는 매우 불안정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아시리아 제국은 쇠퇴하고 있었고,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아직 그 빈자리를 완전히 메우지 못한 상태였다. 서쪽의 고대 이집트 역시 아시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 국력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이러한 권력 공백 상황 덕분에 예루살렘은 한동안 외세의 간섭 없이 독자적인 통치를 할 수 있었다.
기원전 609년 봄, 이집트의 파라오 네코 2세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향해 진군했다. 그의 목표는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공격으로 무너져가던 신아시리아 제국을 지원하는 것이었다.[52] 네코 2세는 용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해안 도로인 비아 마리스를 따라 시리아로 향했다. 그는 지중해 함대의 지원을 받으며 필리스티아와 샤론 평원을 통과했다. 그러나 이스르엘 계곡 남쪽의 언덕 지대에 이르렀을 때, 요시야가 이끄는 유다 군대에게 가로막혔다. 요시야가 왜 이집트군의 북진을 막으려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바로 전 해인 기원전 610년에 파라오 프삼티크 1세가 사망한 것을 계기로 아시리아와 이집트의 힘이 약해졌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프삼티크 1세는 과거 아시리아의 왕 에사르하돈과 아슈르바니팔에 의해 임명되고 지지를 받았던 인물이었다.[52] 역대기에 따르면, 네코 2세는 유다와 싸울 생각이 없었으며, 요시야의 갑작스러운 저항에 당황하여 "유다 왕이여, 우리가 서로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러시오? 나는 오늘 당신을 치러 온 것이 아니오."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53]
요시야는 므기또에서 이집트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으나, 이곳에서 벌어진 치열한 므기또 전투에서 전사했다.[54] 이후 네코 2세는 아시리아의 아슈르-우발리트 2세와 합류하여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하란을 포위 공격했다. 하지만 연합군은 하란 점령에 실패했고, 네코 2세는 시리아 북부 지역으로 후퇴해야 했다.
5. 메기도 전투와 죽음
요시야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구약성경 내에서도 열왕기하[78]와 역대하[79]의 기록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등 여러 의문을 남겼다. 역대하에서는 요시야가 네카우 2세의 신적인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했다고 설명하지만,[80] 일부 학자들은 이 기록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며[81][57]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심지어 메기도에서 전투 자체가 없었거나, 요시야가 네카우 2세에게 소환되어 처형당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83][59] 요시야의 죽음을 둘러싼 구체적인 배경과 다양한 평가는 아래 하위 문단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5. 1. 메기도 전투의 배경
요시아가 유다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 기원전 641년 또는 640년경, 국제 정세는 매우 불안정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신아시리아 제국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고,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있었으나 아직 아시리아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서쪽의 고대 이집트는 아시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 국력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힘의 공백 상태 덕분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 왕국은 당분간 외세의 큰 간섭 없이 독자적인 통치를 할 수 있었다.[52]
기원전 609년 봄, 이집트의 파라오 네카우 2세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 방면으로 원정을 시작했다. 이는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의 공격으로 멸망 위기에 처한 신아시리아 제국을 지원하기 위한 군사 행동이었다.[52] 네카우 2세는 주로 용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해안 도로인 비아 마리스를 따라 시리아로 진격했다. 그는 지중해 함대의 지원을 받으며 필리스티아와 샤론 평원의 저지대를 통과했다.[52]
그러나 네카우 2세의 군대가 이스르엘 골짜기 남쪽의 언덕 능선을 넘어 북상하려 할 때, 메기도에서 요시아 왕이 이끄는 유다 군대가 이집트군의 앞을 가로막았다.[77][52] 요시아가 왜 강력한 이집트군의 진군을 막으려 했는지 그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네카우 2세의 아버지이자 아시리아에 의해 파라오로 임명되었던 프삼티크 1세가 불과 1년 전인 기원전 610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요시아가 이를 계기로 아시리아와 이집트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52]
역대하의 기록에 따르면, 네카우 2세는 유다 왕국과 싸울 의도가 없었으며, 오히려 길을 막는 요시아의 결정에 당황하여 다음과 같은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53]
:유다 왕이여, 당신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소? 나는 오늘 당신을 치러 온 것이 아니고 나와 싸움이 벌어진 왕실을 치러 가는 것이오. '어서 가라.'는 신의 명령을 받고 가는 길이오. 나와 함께 하시는 신의 손에 멸망하지 않으려거든 길을 막지 마시오.[80]
하지만 요시아는 이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고[82] 메기도에서 이집트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고, 이는 결국 므기또 전투의 발발로 이어졌다.[54]
5. 2. 요시야의 죽음에 대한 평가
기원전 609년 봄 또는 초여름, 이집트의 파라오 네카우 2세는 쇠퇴하던 신아시리아 제국을 신흥 강국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돕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향했다. 네카우 2세는 비아 마리스 해안 도로를 따라 시리아로 군대를 이동시키며 블레셋과 샤론 평야를 지나, 이스르엘 골짜기 남쪽의 언덕 능선을 넘으려 했다. 이때 유다 왕국의 요시야 왕이 이끄는 군대가 메기도에서 이집트군의 진군을 막아섰다. 그러나 이 전투(메기도 전투)에서 유다 군대는 패배했고, 요시야는 전사했다. 이후 이집트군은 아시리아군과 합류하여 하란에서 바빌로니아군과 싸웠다. 바빌로니아 연대기는 이 전투가 기원전 609년 담무스월(대략 6-7월)부터 엘룰월(대략 8-9월)까지 이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어, 요시야는 담무스월 이전에 사망했음을 알 수 있다.[77]
구약성경에는 요시야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기록이 있다. 열왕기하 23장 29절은 네카우 2세가 메기도에서 요시야를 만나 그를 죽였다고 간략하게만 언급한다.[78] 반면, 역대하 35장 20-27절은 더 상세한 설명을 제공하는데, 요시야가 이집트 궁수들에게 치명상을 입고 예루살렘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죽었다고 기록한다.[79] 특히 역대하는 요시야의 죽음이 네카우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전한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역대기에 기록된 네카우의 말은 다음과 같다: "유다 왕이여, 당신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소? 나는 오늘 당신을 치러 온 것이 아니고 나와 싸움이 벌어진 왕실을 치러 가는 것이오. '어서 가라.'는 신의 명령을 받고 가는 길이오. 나와 함께 하시는 신의 손에 멸망하지 않으려거든 길을 막지 마시오."[80][55] (공동번역 개정판, 역대기하 35장 21절) 역대하 35장 25절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요시야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를 지었다고 덧붙인다.[56]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역대하의 기록에 대해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한다.[81][57] 이 기록이 열왕기상에 나오는 다른 왕, 즉 아합의 죽음 묘사(경고 무시하고 전투에 나섬, 전투 전 변장, 화살에 맞아 죽음 등)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이들은 역대하의 기록이 요시야와 같은 의로운 왕의 비극적인 죽음을 특정한 죄와 연결시키려는 역대기 저자의 종교적인 의도에 따라 각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82][58]
더 나아가, 에릭 클라인과 같은 학자는 메기도에서 전투 자체가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노먼 핑켈슈타인이나 나답 나아만 등 일부 학자들은 열왕기의 기록을 다르게 해석하여, 요시야가 네카우 2세와 전투를 벌인 것이 아니라, 네카우에게 신하로서 소환되어 조사를 받던 중 이집트에 바쳐야 할 공물의 양이 정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처형(참수)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83][59]
유대교 랍비 문헌에서는 요시야의 경건함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의 아버지 아몬 왕의 극악무도함과 대조하여 설명한다. "아몬이 유다의 모든 악한 왕들 중에서 가장 죄가 많았다는 사실(역대하 33:23)은 탈무드(산헤드린 103b)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산헤드린 104a) 아하즈는 희생 제사를 중단했고, 므나쎄는 제단을 무너뜨렸으며, 아몬은 그것을 황폐한 장소로 만들었다 [거미줄로 덮었다]. 아하스는 율법의 두루마리를 봉인했고(이사야 8:16), 므나쎄는 거룩한 이름을 잘라냈으며, 아몬은 두루마리를 완전히 불태웠다 [세데르 올람, R. XXIV 비교. 이것은 율법의 책을 발견한 이야기에서 파생되었다, 열왕기하 22:8]; 아합은 근친상간을 허용했고, 므나쎄는 스스로 저질렀으며, 아몬은 네로가 그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에게 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요시야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아몬의 이름은 오지 않을 왕들의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51][60][84][85][86][87][88][89][90] 또한 요시야의 죽음은 그의 진실한 종교 개혁에도 불구하고,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이스라엘 땅에는 칼이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는 300개의 화살에 맞았고, "주님은 의로우시다. 내가 그의 계명을 거역했다."라고 인정하는 것 외에는 불평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60] 현자들은 또한 잠언 24장 30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게으른 자의 밭을 지나갔는데, 이것은 아하스이다. 그리고 분별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갔는데, 이것은 므나쎄이다. 그리고 보라, 그것은 가시덤불로 덮여 있었는데, 이것은 아몬이다. 그리고 그 표면은 쐐기풀로 덮여 있었는데, 이것은 여호야김이다. 그리고 그 돌담이 무너졌는데, 이것은 성전이 파괴된 스데디야를 언급한다."
후대의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 제10권 5장 1절에서 요시야가 왜 네카우 2세의 군대를 막아섰는지에 대해 명확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운명의 여신[68]이 그를 멸망시킬 구실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라고 모호하게 설명하고 있다.[67][69]
6. 요시야 사후의 유다 왕국
하란에서의 전투 이후, 이집트 파라오 네카우 2세는 상당한 병력을 남겨두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네카우 2세는 요시아의 아들 여호아하즈가 왕위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91] 그는 즉위한 지 불과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여호아하즈를 폐위시키고, 그의 형인 여호야김을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 네카우 2세는 유다 왕국에 은 100달란트(약 3.4ton)와 금 1달란트(약 34kg)를 조공으로 요구했으며, 폐위된 여호아하즈는 포로로 이집트로 끌고 갔다.[91]
메기도에서 요시아가 전사한 것은 유다 왕국의 역사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뒤를 이은 왕들은 짧은 기간 동안 재위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가 다시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유다 왕국의 독립적인 지위는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이는 다윗 왕조 통치의 실질적인 종말로 평가받기도 한다.[70] 요시아의 죽음으로 그가 추진했던 종교 개혁 역시 대부분 동력을 잃고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70] 온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은 요시아의 죽음을 슬퍼했으며, 예언자 예레미야는 그를 위한 애가를 지었다고 전해진다.[92][93]
이후 유다 왕국은 국제 정세의 격랑에 더욱 휘말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집트의 종속국이었으나, 갈기미스 전투에서 이집트를 격파한 신바빌로니아가 새로운 패권 국가로 부상하면서 신바빌로니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70] 그러나 여호야김은 신바빌로니아에 반기를 들었고, 이는 예루살렘이 포위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여호야김은 포위 중에 사망했다.[70]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이자 요시아의 손자인 여호야긴이 왕위에 올랐으나, 그의 통치는 3개월 10일에 불과했다. 예루살렘은 결국 함락되었고, 여호야긴은 백성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1차 바빌론 유수를 겪게 되었다.[70] 바빌로니아는 여호야긴의 숙부이자 요시아의 다른 아들인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시드기야 역시 바빌로니아에 반역을 일으켰고, 이는 두 번째 예루살렘 포위와 완전한 파괴로 이어졌다. 시드기야 또한 바빌론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2차 바빌론 유수).[70]
결과적으로 요시아의 세 아들(여호아하즈, 여호야김, 시드기야)과 한 손자(여호야긴)가 차례로 왕위에 올랐지만, 이집트와 신바빌로니아라는 오리엔트 강대국들의 압력 속에서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국운을 그르쳤다. 두 차례의 바빌론 유수를 거치며 유다 왕국은 요시아가 죽은 지 약 22년 만인 기원전 587년 또는 586년에 완전히 멸망했다.[70]
7. 가족
성경 기록에 따르면 요시야는 아몬 왕과 보스갓 출신 아다야의 딸인 예디다의 아들이다.[8] 그의 할아버지 므낫세는 야훼 숭배에서 벗어난 책임을 지는 왕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우상 숭배를 위해 성전을 개조하기도 했다. 반면 요시야의 증조부인 히스기야 왕은 성경 저자들이 "다윗이 행한 것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고 높이 평가한 유명한 개혁가였다.[9]
요시야에게는 최소 두 명의 아내, 하무달과 스비다가 있었다. 그는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의 정보는 다음과 같다.
이름 (다른 이름) | 순서 | 어머니 | 출생 | 주요 행적 및 비고 |
---|---|---|---|---|
요하난 | 장남 | 불명 | - | 일찍 사망한 것으로 추정됨. |
엘리아김 (여호야김) | 차남 | 스비다 (룸마 출신 브다야의 딸) | 기원전 634년경 | 이집트 파라오 네코 2세에 의해 이름이 여호야김으로 변경됨.[11] 유다 왕국의 제18대 왕. 처음에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복종했으나 반역하여 바빌론의 예루살렘 포위를 초래했고, 포위 중에 사망함. |
살룸 (여호아하스) | 삼남 | 하무달 (립나 출신 예레미야의 딸) | 기원전 633/632년 | 유다 왕국의 제17대 왕. 네코 2세에 의해 이집트로 끌려가 그곳에서 사망함.[12] 시드기야와는 동복 형제. |
맛다니야 (시드기야) | 사남 | 하무달 (립나 출신 예레미야의 딸) | 기원전 618년경 | 본명은 맛다니야. 유다 왕국의 제20대 왕이자 마지막 왕.[15] 이복 형 여호야김처럼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복종하다 반역하여 결국 예루살렘이 함락됨. 바빌론으로 끌려가 눈 앞에서 자식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본 후 두 눈이 뽑혀 맹인이 되었고, 죽을 때까지 쇠사슬에 묶여 지냄. 여호아하스와는 동복 형제. |
요시야의 알려진 손자는 다음과 같다.
이름 | 아버지 | 주요 행적 및 비고 |
---|---|---|
여호야긴 (여고냐) | 여호야김 | 유다 왕국의 제19대 왕. 재위 기간은 3개월 10일에 불과했으며, 제1차 바빌론 유수 때 바빌론으로 끌려감.[14] 잠시 유폐되었으나,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뒤를 이은 아멜 마르두크 왕 때 석방되어 높은 지위를 받고 생활비를 지급받음. 이후 행적은 불명이나, 여러 아들을 두었고 그 후손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진다고 여겨짐. 삼촌 시드기야와는 대조적인 삶을 살았음. |
시드기야의 자녀들 | 시드기야 | 인원, 성별, 이름 불명. 바빌론으로 끌려간 아버지 시드기야의 눈 앞에서 살해됨. |
요시야 사후 왕위는 셋째 아들 살룸(여호아하스)에게 이어졌고,[12] 그 뒤를 이어 둘째 아들 엘리아김(여호야김)이 왕위에 올랐다.[13] 여호야김 다음에는 그의 아들 여호야긴(여고냐)이 잠시 왕위를 계승했고,[14] 마지막으로 요시야의 넷째 아들 맛다니야(시드기야)가 왕위에 올랐다.[15] 시드기야는 유다 왕국이 바빌론에 정복되고 백성들이 유배되기 전 마지막 유다 왕이었다.
8. 요시야에 대한 평가
요시야 왕은 구약성서에서 다윗 왕에 버금가는 매우 이상적인 군주로 높이 평가받는다.[16] 특히 그의 통치 기간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종교 개혁은 유다 왕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여겨지며, 후대의 평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국가를 재정비하고, 다른 신들의 숭배를 금지하며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예배를 확립하고자 했다.[17][8]
이러한 개혁은 순수한 종교적 열정뿐만 아니라, 당시 약화된 아시리아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유다 왕국의 정치적 독립과 민족적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목적과도 연결된다는 해석이 있다. 즉, 야훼 신앙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것이 곧 유다 민족의 독립성을 선언하는 행위였다는 것이다.
성경 기록 외에도 랍비 문헌에서는 요시야와 동시대 인물인 예언자 훌다, 예레미야 등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평가를 덧붙여 그의 시대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도록 돕는다.[41][45] 그러나 일부 현대 학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요시야 개혁의 규모나 성격, 심지어 역사성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여[23][24][25], 그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다양한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은 그의 개혁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유다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한다.[26][27][28][63]
8. 1. 긍정적 평가
성경은 요시야를 의로운 왕으로 평가하며, "그의 아버지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였다"(열왕기하 22:2; 역대하 34:2)고 기록한다. 그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족보에 언급된 왕 중 한 명이다(마태오 복음서 1:10–11).역대기에 따르면 요시야는 8세에 왕위에 올랐다. 통치 8년째 되던 해(16세경)에 "그의 아버지 다윗의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고, 통치 12년째(20세경)에는 예루살렘과 유다 전역에서 바알 제단과 아세라 목상 등 규범적 야훼 신앙 외의 종교적 상징물들을 우상으로 간주하고 파괴하는 종교 개혁을 시작했다.[16] 역대기는 이 정화 작업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는 반면, 열왕기 하는 통치 18년째(26세경)에 시작된 예루살렘 성전 복구 작업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17]
요시야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그동안 모인 세금을 사용하여 성전을 수리하도록 명령했다. 힐기야는 성전 보물 창고를 정리하던 중 두루마리를 발견했는데, 이는 열왕기 하 22장 8절에서는 "율법책"[18]으로, 역대기 하 34장 14절에서는 "모세가 전한 야훼의 율법책"[19]으로 묘사된다. 열왕기하 22장 8절의 "세페르 토라"(ספר התורה)라는 표현은 여호수아기 1장 8절과 8장 34절에서 여호수아가 모세로부터 받은 성경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것과 동일하다. 이 책이 구체적으로 토라 전체를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하며,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신명기의 사본이거나 신명기의 일부가 된 문서일 것으로 추정한다.[20] 다만, 성전 수리 이야기는 유다의 이전 왕 요아스(기원전 836년~796년경 통치)가 열왕기하 12장에서 명령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도 지적된다.[21]
힐기야가 두루마리를 가져오자 요시야는 예언자 훌다에게 자문을 구했다. 훌다는 율법책의 경고대로 그 지침을 따르지 않아 예언된 재앙이 닥칠 것이나, 요시야의 겸손함 때문에 그의 시대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는 네 마음이 부드러워 여호와 앞에서 스스로 겸손해졌기 때문이다"라고 그녀는 말했다.[8] 이에 요시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장로들과 모든 백성을 모아 야훼만을 섬기고 다른 모든 형태의 신앙을 금지할 것을 촉구했다. 바알과 "하늘의 군대"(천체 숭배) 숭배에 사용되던 기구와 상징물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거되었다. 남쪽 브엘세바에서 북쪽 벧엘과 사마리아의 성읍들에 이르기까지 지역 성소, 즉 산당들이 파괴되었다.[8] 요시야는 이교 제사장들을 처형했으며, 심지어 벧엘에 묻혀 있던 죽은 제사장들의 뼈를 파내어 그들의 제단 위에서 불태웠다. 또한 유월절 축제를 성대하게 다시 지켰다.
열왕기상 13장 1-3절에 따르면, 약 300년 전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때로는 선지자 이드도로 추정됨)이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여로보암 왕에게 "다윗의 집에서 요시야라는 이름의 아들이 태어나 벧엘의 제단을 파괴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요시야는 벧엘의 제단을 파괴하면서 이 예언을 성취했다. 이때 유일하게 보존된 것은 벧엘에서 발견된, 이름 없는 예언자의 무덤이었는데, 그는 여로보암이 세운 제단이 언젠가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인물이다(열왕기상 13장 참조). 요시야는 이 예언들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람"과 벧엘 예언자의 무덤을 그대로 두라고 명령했다(열왕기하 23:15–19).
요시야의 개혁은 열왕기하 22–23장과 역대하 34–35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 개혁은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 관행, 특히 8세기에 유행했던 천체 숭배를 종식시키고, 예루살렘에서의 예배를 중앙 집중화하며, 벧엘의 경쟁 성소를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22] 일부 학자들은 이 기록 전체의 역사성에 의문을 제기하지만,[23][24][25] 다른 많은 학자들은 요시야 통치하 종교 개혁의 역사적 실재성을 인정한다.[26][27][28][63]
역대하의 기록에 따르면, 요시야의 개혁은 유다 왕국의 경계를 넘어 므낫세, 에브라임, 시므온, 심지어 납달리 지역의 성읍들에까지 이르러 이교 제단과 우상을 파괴했으며, 언약궤를 성전으로 다시 옮겨왔다고 한다(역대하 34:6–7).[29]
랍비 문헌에서는 요시야에 대한 추가적인 해석을 제공한다. 훌다가 요시야 왕의 사자들에게 "나를 보낸 사람에게 전하여라..."(열왕기하 22:15)라고 격식 없이 말한 것은 그녀가 요시야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요시야가 예레미야 대신 훌다에게 자문을 구한 이유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동정심이 많아 훌다가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 더 간절히 기도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본다.[41] 훌다는 예레미야의 친척으로, 둘 다 여호수아와 결혼한 라합의 후손이라고 전해진다.[42] 예레미야가 남자들에게 경고하고 회개를 설교하는 동안, 훌다는 여자들에게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고 한다.[43] 훌다는 예언자일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쳤으며,[44] 특히 구전 율법을 가르쳤다는 해석도 있다. 두 번째 성전 시대의 "훌다의 문"이 예언자 훌다와 관련 있는지는 논란이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 문을 훌다의 학교와 연관 짓기도 한다.
예레미야의 예언 활동은 요시야 통치 시대에 시작되었으며, 그는 친척인 예언자 훌다와 스승인 스바냐와 동시대 인물이었다.[45] 세 예언자는 역할을 분담하여, 훌다는 여성들에게, 예레미야는 거리의 남성들에게, 스바냐는 회당에서 설교했다고 전해진다.[46] 요시야가 참된 예배를 회복했을 때, 예레미야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으로 흩어졌던 열 지파에게 가서 그들을 경건한 왕 요시야의 통치 아래 이스라엘로 돌아오도록 도왔다고 한다.[47] 비록 요시야가 예레미야의 조언을 듣지 않고 이집트와의 전쟁에 나섰지만, 예레미야는 이를 경건한 왕의 실수로 여겼으며,[48] 훗날 왕의 죽음을 애도하며 예레미야 애가 4장을 요시야에 대한 애가로 시작했다고 해석된다.[49]
또한, 요시야 왕은 임박한 국가적 재앙을 예견하고 솔로몬 왕이 지은 성전 내의 비밀 장소에 언약궤와 그 내용물(아론의 지팡이, 만나 항아리, 기름 부음용 기름)을 숨겼다는 전승도 있다.[50] (바빌론 탈무드, ''Kereithot'' 5b 등 참조) 이들의 행방은 메시아 시대에 예언자 엘리야가 나타나 드러낼 때까지 알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51]
요시야는 8세에 즉위했지만, 16세경부터 야훼 신앙에 깊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20세경부터는 규범적 야훼 신앙 외의 종교적 상징들을 우상으로 간주하고 제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66] 그는 유대교 개혁을 통해 국가 재건을 목표로 삼았으며, 다른 신들을 섬기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고 그 상징물들을 파괴함으로써 야훼 신앙 중심의 유다 왕국 노선을 재확립했다. 이는 신명기 개혁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개혁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구약성서에서는 매우 뛰어난 왕으로 평가받는다. 제사장 힐키야가 이 개혁을 도왔다.
성서 기록에 따르면, 요시야는 규범적 야훼 신앙에 대한 강한 신념과 자부심을 가지고 이를 실제 정책에 반영했다. 이러한 개혁에는 종교적 동기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동기도 작용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 국가의 독립은 믿는 신의 독립과 직결되었으며, 반대로 국가의 예속은 종주국의 신을 섬기거나 자국의 신앙이 금지되는 것을 의미했다. (유다 왕국의 경우, 바빌로니아나 이집트, 그리스의 신들을 강요받는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반대로 유다 왕국이나 이스라엘 왕국도 모압과 같은 속국에 야훼 신앙을 강요하기도 했다.) 요시야는 아시리아 제국의 쇠퇴로 생긴 권력 공백을 틈타 유다 왕국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했다. 아시리아, 이집트, 페니키아 도시 국가들, 바빌로니아 등 주변 강대국들과 대등한 독립 국가로서 유다 민족이 타국의 신을 섬기는 것은 종교적 신념뿐 아니라 민족적 자존심으로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민족 신인 야훼에 대한 확고한 충성과 결속을 다지는 것은 유다의 독립을 지키려는 의지를 대내외에 보여주는 중요한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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