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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 (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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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선은 촉한의 제2대 황제이다. 223년 유비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제갈량의 섭정을 받으며 통치했다. 제갈량 사후 장완, 비의가 섭정했지만, 강유의 북벌과 황호의 발호로 국력이 쇠퇴하여 263년 위나라에 항복했다. 항복 후 안락공으로 봉해졌으며, "낙불사촉" 일화로 무능한 군주라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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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 (촉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유선
청나라 시대의 유선 그림
이름유선
로마자 표기Yu Seon
유선
공사
시호안락사공 (安樂思公) [서진]
효회황제 (孝懷皇帝) [전조]
묘호없음
생년207년
몰년271년 (64세)
부친유비
모친소열황후
배우자경애황후
장황후
이소의
왕 귀비
자녀황태자 유선
유요
유총
유찬
북지왕 유침
유훈
유천
연호건흥 (223년 ~ 237년)
연희 (238년 ~ 257년)
경요 (258년 ~ 263년)
염흥 (263년)
기타아명은 아두
정치
작위안락공 (安樂公)
재위223년 6월 ~ 263년 12월
즉위 전유비
계승자유선
섭정제갈량
장완
비의
강유
사후 정보
능묘혜릉

2. 생애

유선은 207년 아버지 유비유표에게 의탁하여 형주 신야에 있을 때 측실 감씨에게서 태어났다.[2] 208년 조조가 형주를 공격했을 때 장판 전투에서 조운에게 구출되었다. 손부인이 유선을 데리고 로 돌아가려 했지만, 장비와 조운이 막고 유선을 되찾아왔다. 유비가 익주를 점령하고 한중을 획득하여 한중왕이 되자, 유선은 태자가 되었다.

221년 이릉 전투에서 유비가 손권을 정벌하러 간 사이 유선은 성도 유수를 맡았다. 223년 유비가 사망하자 17세 나이로 황제에 즉위, 제갈량 등에게 정무를 맡겼다.[5]

유선은 제갈량을 아버지처럼 존경하며 모든 국사를 맡겼다. 제갈량은 비의, 동윤, 곽유지, 상총 등 유능한 관리들을 요직에 앉혔다. 제갈량 조언에 따라 유선은 동오와 동맹을 맺어, 조위에 맞섰다.[1] 223년 장비의 딸인 장황후와 결혼했다.[1]

유비 사후, 남쪽 남만 부족들이 촉한 지배에서 벗어났다. 225년 제갈량은 남쪽으로 원정을 떠나 남부 지역을 다시 촉한에 통합했다. 227년부터 제갈량은 위나라에 대항하여 다섯 차례 북벌을 일으켰다. 234년 제갈량이 마지막 원정을 수행하던 중 사망하자, 유선은 장완을 새 섭정으로 임명했다.[1]

234년 제갈량 사후, 장완은 제갈량 내정 정책을 이어받아 촉한을 통치했다. 241년 주요 국경 도시 한중에서 부현(몐양 시, 쓰촨성)으로 대부분 병력을 철수시켰다.[27] 237년 장황후가 사망하자, 유선은 그녀의 여동생을 후궁으로 맞이했고, 238년 장황후로 책봉했다. 243년 장완은 병으로 권한 대부분을 비의, 동윤에게 넘겼다. 244년 위나라 섭정 조상이 한중을 공격했을 때, 비의가 흥세 전투에서 위나라에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27]

장완과 동윤 사후, 유선은 강유를 비의 보좌관으로 임명했지만, 군사 문제에만 주로 관여했고, 비군사 문제는 점차 자율성을 더했다. 253년 비의는 전 위나라 장수 곽순에게 암살당했다. 강유가 사실상 섭정이 되었지만, 변경에서 위나라를 상대로 원정을 수행하면서 내정에 권력 공백이 생겨 황호 영향력이 커졌다.[27]

253년 이후, 강유는 오나라와 위나라에 대한 합동 공격을 감행했지만, 군량 부족으로 철수했다.[34] 255년 적도 전투에서 위나라 군대에 큰 타격을 입혔지만, 256년 등애에게 패했다. 261년 황호 권력이 최고조에 달했다. 262년 황호는 강유를 엄유로 교체하려 했다. 강유는 유선에게 황호 처형을 요청했지만, 유선은 거부했다. 강유는 성도를 떠나 답중에 주둔했다.[34]

263년 위나라 군대가 촉나라에 대규모 공세를 펼치자, 강유는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황호는 점괘로 유선에게 적이 오지 않을 것이라 믿게 하여 방어가 늦어졌고, 음평군 방면에서 우회하여 진군한 위나라 군대가 마막을 항복시켰다. 면죽에서 제갈첨이 전사하자 초주 권유에 따라 항복했다. 유선은 스스로 몸을 묶고 관을 짊어진 모습으로 등애를 찾아갔다[30].

한진춘추》에는 此間樂不思蜀중국어[9]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된 일화가 있다. 위나라 섭정 사마소는 유선과 추종자들을 연회에 초대했고, 유선은 "여기서 너무 행복해서 촉을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9]

264년 위나라 군대 내분 당시 강유에게서 촉나라 재흥 서신을 받았으나, 반란은 실패했고, 강유 등 옛 신하와 태자 유선을 잃었다. 유선은 낙양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유주 안락현에서 '''안락공'''에 봉해졌다. 271년 65세로 사망, 서진에 의해 사공(思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오호십육국 시대 전조 창업자 유연흉노와 한씨는 조카 관계라 칭하며, 전한·후한, 촉한 후계자라 칭하고 유선을 효회황제로 추존했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207년 ~ 223년)

阿斗|아두중국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유선은 207년(건안 12년), 아버지 유비유표에게 의탁하여 형주의 신야에 있을 때 측실 감씨에게서 태어났다.[2] 이듬해 208년, 조조가 형주를 공격했을 때 장판 전투에서 조운에게 구출되어 목숨을 건졌다. 손부인이 유선을 데리고 로 돌아가려 했지만, 장비와 조운이 이를 막고 유선을 되찾아왔다. 유비가 익주를 점령하고 한중을 공격하여 획득하고 한중왕이 되자, 유선은 태자가 되었다.

221년 (장무 원년), 이릉 전투에서 유비가 손권을 정벌하러 간 사이 유선은 성도의 유수를 맡았다. 유비가 이릉에서 패배한 후, 익주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제갈량 등의 활약으로 진압되었다. 223년(장무 3년), 유비가 사망하자 17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하였고, 제갈량 등에게 정무를 맡겼다.[5]

2. 2. 제갈량 섭정기 (223년 ~ 234년)

유선은 제갈량을 아버지처럼 존경하며 모든 국사를 맡겼다. 제갈량은 비의, 동윤, 곽유지, 상총 등 유능한 관리들을 요직에 앉혔다. 제갈량의 조언에 따라 유선은 동오와 동맹을 맺어, 더 강한 조위에 맞서 두 나라가 함께 살아남을 수 있게 하였다. 제갈량의 섭정 기간 동안, 촉한 정부는 대체로 효율적이고 부패하지 않아, 비교적 작은 나라인 촉나라가 군사 작전을 준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1]

223년, 유선은 장비의 딸인 장황후와 결혼했다.[1]

유비 사후, 남쪽의 남만 부족들이 촉한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225년, 제갈량은 남쪽으로 원정을 떠나 군사적 승리와 설득을 통해 남부 지역을 다시 촉한에 통합했다. 이후 남만인들은 촉한이 위나라에 대항하는 주요 군사 작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

227년부터 제갈량은 위나라에 대항하여 다섯 차례의 북벌을 일으켰다. 대부분 군사적으로 실패했는데, 촉군은 위나라에 큰 피해를 입히기 전에 군수 물자가 바닥났다. 231년의 한 원정에서 제갈량은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군대에 충분한 물자를 공급하지 못한 제갈량의 공동 섭정 이엄은 유선의 조서를 위조하여 제갈량에게 퇴각을 명령했다. 이를 알아챈 제갈량은 이엄을 해임하고 가택 연금할 것을 건의했고, 유선은 이를 받아들였다.[1]

234년, 제갈량이 위나라에 대한 마지막 원정을 수행하던 중, 심각한 병에 걸렸다. 유선은 제갈량의 병을 듣고 비서 이복(李福|이복중국어)을 전선으로 보내 제갈량을 방문하여 중요한 국사에 대한 지시를 받도록 했다. 제갈량은 장완을 자신의 후임으로, 비의를 장완의 후임으로 추천했다. 제갈량은 이복의 다음 질문, 즉 비의의 후임자는 누구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갈량은 곧 사망했다. 유선은 제갈량의 권고를 따라 장완을 새로운 섭정으로 임명했다.[1]

2. 3. 장완, 비의 섭정기 (234년 ~ 253년)

234년 제갈량이 사망한 후, 장완은 제갈량의 내정 정책을 이어받아 촉한을 효율적으로 통치했다. 그는 반대 의견에 대한 관용과 겸손함으로도 알려져 있었다.[27] 그러나 군사적 재능이 부족했던 장완은 제갈량의 위나라에 대한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포기하고, 241년에는 주요 국경 도시인 한중에서 부현(현재의 몐양 시, 쓰촨성)으로 대부분의 병력을 철수시켰다.[27] 그 시점부터 촉한은 방어적인 입장을 취했고, 더 이상 위나라에 큰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 오나라의 역사에 따르면, 촉한의 방어적인 태도는 많은 오나라 관리들에게 촉한이 동맹을 포기하고 위나라와 조약을 체결하려는 신호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오나라 황제 손권은 이를 단순히 동맹 포기가 아닌 약점의 징후로 정확히 판단했다.[27]

237년, 장황후가 사망했다. 그 해, 유선은 그녀의 여동생을 후궁으로 맞이했고, 238년 그녀를 황후로 책봉했다. 그녀의 작위는 언니와 마찬가지로 장황후였다.

243년, 장완은 병이 들어 권한의 대부분을 비의와 비의의 조력자 동윤에게 넘겼다. 244년, 위나라의 섭정 조상이 한중을 공격했을 때, 비의가 군대를 이끌고 조상에 맞서 흥세 전투에서 위나라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27] 그러나 장완은 245년 사망할 때까지 영향력을 유지했다. 장완이 죽은 직후 동윤 또한 사망했는데, 이는 유선이 총애했던 환관 황호가 권력을 확대하는 것을 허용했다. 동윤은 황호의 권력을 억제했었다.[27] 황호는 부패하고 국내 문제에 있어 매우 조종적인 인물로 여겨졌고, 제갈량과 장완의 섭정 기간 동안 달성되었던 정부의 효율성은 저하되기 시작했다.

장완과 동윤이 죽은 후, 유선은 강유를 비의의 보좌관으로 임명했지만, 두 사람 모두 군사 문제에만 주로 관여했으며, 유선은 비군사 문제에 있어서는 점차 자율성을 더하게 되었다. 또한 이때쯤 유선은 지방을 순찰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사치품의 사용을 늘렸는데, 이는 재정에 부담을 주었지만 치명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강유는 제갈량의 정책을 이어받아 위를 적극적으로 공격하려 했으며, 비의는 이에 부분적으로 동의하여 강유가 위의 변경을 공격하는 것을 허용했지만, 결코 많은 수의 군대를 주지는 않았다. 촉이 위와 대규모 군사 대결을 할 입장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27]

253년, 비의는 항복했지만 몰래 위나라에 충성을 유지하던 전 위나라 장수 곽순에게 암살당했다. 비의의 죽음으로 강유가 사실상 섭정이 되었지만, 강유가 계속 변경에서 위나라를 상대로 원정을 수행하면서 내정에는 권력 공백이 생겼다. 그 결과 황호의 영향력이 크게 증가했다.[27]

제갈량 사후, 그의 유지를 받들어 형주 출신으로 북벌 추진파인 장완을 녹상서사·대장군에 임명하고 238년에는 한중에 막부를 열게 했으며, 성도의 정치는 익주 출신으로 북벌 신중파인 비의에게 일임했다. 장완은 한수를 따라 상용으로 침공하는 작전을 세웠지만, 지병이 계속 발생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27]

241년 10월, 장완에게 부정적인 여론을 유선은 비의와 강유를 보내 전달하게 했고, 한중에서 3자는 대체가 될 양주 침공책을 작성, 243년에 상주하여 재가되었다. 같은 해 10월, 강유가 양주 자사에 취임하고 장완은 부에 주둔했다.[27]

244년조상·하후현이 이끄는 위나라 군대가 한중으로 침공했고, 위연이 생전에 진령산맥 중에 구축한 수많은 진지에 의거한 왕평의 독전으로 격퇴에 성공했다. 비의가 위의 퇴로를 끊었기 때문에, 위는 매우 고전하며 철수했고, 수송용 소와 말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강족이 크게 동요했다고 한다.[27]

병이 깊어진 장완은 동윤과 같은 246년에 사망하고, 그 후임으로 취임한 것은 제갈량의 유지를 받든 비의였다. 장완에서 비의에 이르기까지, 본인이 외지에 있어도 국가의 은상·형벌은 모두 양자에게 자문한 후에 실행되었다. 북벌 추진파인 강유가 출병을 신청해도, 관할하는 북벌 신중파인 비의는 대패에 대비해 1만 이하의 병사밖에 주지 않았다. 『위략』에서는 장완의 사후부터 유선이 스스로 정치를 보게 되었다고 하지만, 대사를 남발하는 등 정치는 이완되고 궁중은 사치에 흘렀다. 또한 동윤의 죽음이, 그 전까지 억제되었던 환관황호의 대두를 허용해 버렸다. 유선의 황호에 대한 신용은 높았고, 동생인 유영조차 황호를 위해 궁중에서 멀어지는 상황이었다.[27]

247년에 농서에서 위나라에 대한 강족의 큰 반란이 일어나, 강유는 이를 계기로 농서로 출격했지만, 소수의 병사로는 큰 전과를 얻지 못했다. 한편 위군에 패하여 항복을 신청해 온 치무재나 백호문 등의 반란군을 촉에 맞이하고, 그것을 저지하려 했던 곽회 등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27]

248년에 왕평이 사망하자 비의가 후임으로 한중에 주둔하게 되었다.[27]

249년하후패가 촉한으로 망명해 왔다. 유선은 하후패와 회견하여, "당신의 아버지(하후연)는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나의 아버지가 죽인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자신의 아이를 가리키며 "이 아이는 하후씨의 조카에 해당한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후하게 작위와 은상을 하사했다.[29]

251년 여름에 비의는 성도로 귀환했지만, "도읍에는 재상의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라는 점단으로 겨울에는 북쪽의 한수(가맹관)에 주둔, 2년 후에 그곳에서 정월의 연회에서 위의 항장 곽순에 의해 시해되었다. 앞선 점단은 재상의 죽음을 예언하는 것이었다.[27]

2. 4. 강유의 군사 활동과 황호의 발호 (253년 ~ 263년)

253년, 강유는 오나라의 섭정 제갈각과 함께 위나라에 대한 합동 공격을 감행했지만, 군량 부족으로 철수해야 했다. 이로 인해 사마사는 제갈각에게 집중할 수 있었고, 오나라 군대는 큰 패배를 겪어 제갈각이 암살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는 촉한-오나라 동맹 기간 동안 양국이 위나라에 대한 마지막 합동 공격이었다.[34]

255년, 강유는 적도 전투에서 위나라 군대에 큰 타격을 입혀 적도를 거의 함락시킬 뻔했지만, 256년에는 등애에게 패배하여 백성들 사이에서 입지가 약화되었다. 많은 관리들이 강유의 전략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유선은 강유를 막지 않았다. 259년에는 강유의 제안에 따라 주력 부대를 주요 국경 도시에서 철수시켜 위나라의 공격을 유도하고 함정에 빠뜨리는 계획을 승인했지만, 이 전략은 263년 위나라의 공격 때 실패로 끝났다.[34]

261년, 황호의 권력이 최고조에 달했다. 동궐제갈량의 아들 제갈첨만이 황호에게 아첨하지 않고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262년, 황호는 강유를 제거하고 엄유로 교체하려 했다. 강유는 유선에게 황호를 처형할 것을 요청했지만, 유선은 이를 거부했다. 보복을 두려워한 강유는 성도를 떠나 답중에 주둔했다.[34]

261년 오나라 황제 손휴의 명으로 촉한을 방문한 오나라 사신 설의에 따르면, 당시 촉한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군주는 무능하여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그의 신하들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최소한의 일만 한다. 내가 그들의 조정에 들어갔을 때, 적절한 말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고, 그들의 시골을 돌아다녔을 때,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인해 창백해 보였다. 신은 제비와 참새가 대청 위에 둥지를 짓고, 어미와 새끼 모두 만족하며 스스로 안전하다고 믿는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붕 틀이 갑자기 불붙으면 새들은 여전히 행복하게 남아 닥쳐올 재앙을 알지 못합니다. 상황은 이와 유사합니다.중국어

비의가 죽은 후, 강유는 촉한 군대의 지휘권을 맡아 여러 차례 위나라를 공격했지만, 식량 공급 부족으로 대부분 짧은 기간 후에 종료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원정들은 촉한 정부가 제갈량과 강완의 섭정 기간만큼 효율적이지 못했고, 자원 고갈에 대처할 수 없어 오히려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

258년(경요 원년)에 진지가 사망하자, 후임으로 재능 있는 자가 없어 환관 황호가 정치의 실권을 잡게 되었다.

260년(경요 3년)에는, 관우, 장비 등 건국 공신과 하후패에게 시호를 추증했다. 이듬해에는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이 발탁되었으나, 제갈첨, 동궐, 번건은 황호의 권력을 제약하지 못하고 서로를 감싸는 데 급급하여 정치 혼란을 바로잡지 못했다. 황호는 염우와 결탁하여 강유와 염우를 교체하려 획책했다. 262년(경요 5년) 강유는 황호의 전횡을 미워하여 제거하도록 유선에게 상소했지만 거절당하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외지에 주둔하며 성도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제갈첨과 동궐은 강유가 전쟁을 좋아하고 공적이 없으며 국내가 피폐해지고 있다는 이유로 강유를 전선에서 소환하여 익주 자사로 삼고 군사권을 빼앗도록 유선에게 상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63년(염흥 원년) 위나라 군대가 촉나라에 대규모 공세를 펼치자, 강유는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황호는 적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괘를 유선에게 믿게 하여 방어가 늦어졌고, 음평군 방면에서 우회하여 진군한 위나라 군대가 강유의 마막을 항복시켰다. 면죽에서 제갈첨이 전사하자 저항 수단을 잃고 남쪽이나 오나라로 도주하려 했으나, 북벌 반대파이자 익주 출신 초주의 권유에 따라 항복했다. 유선은 항복할 때의 관례에 따라 스스로 몸을 묶고 관을 짊어진 모습으로 위나라 군대의 등애를 찾아갔다고 한다[30].

2. 5. 촉한 멸망과 이후 (263년 ~ 271년)

한진춘추》에는 此間樂不思蜀중국어[9]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위나라 섭정 사마소는 유선과 그의 추종자들을 연회에 초대했고, 연예인들이 촉한의 전통 음악과 춤을 공연하도록 했다. 그 자리에 있던 전 촉한 관리들은 모두 슬퍼했지만 유선은 즐거워하며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사마소가 그에게 옛 나라를 그리워하는지 묻자, 유선은 "여기서 너무 행복해서 촉을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9]

전 촉한 관료 습정은 유선에게 가족 묘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슬퍼하는 것이 적절한 답변이라고 조언했다. 유선은 나중에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이 조언을 따랐지만, 사마소는 그가 조언을 받았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고, 유선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263년(염흥 원년), 위나라 군대가 촉나라에 대규모 공세를 펼치자, 강유는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황호는 점괘를 통해 유선에게 적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게 하여 방어가 늦어졌고, 음평군 방면에서 우회하여 진군한 위나라 군대가 강유의 마막을 항복시켰다. 게다가 면죽에서 제갈첨이 전사하자 저항 수단을 잃고 남쪽이나 오나라로 도주하려 했으나, 결국 북벌 반대파이자 익주벌의 초주의 권유에 따라 항복했다. 유선은 항복할 때의 관례에 따라 스스로 몸을 묶고 관을 짊어진 모습으로 위나라 군대의 등애를 찾아갔다고 한다[30]

이때 다섯째 아들 북지왕 유심이 항거하며 자결했다. 또한, 위나라 장군에게 붙잡힐 뻔한 애첩 이소의가 자결했다고 한다.

264년(경원 5년), 위나라 군대의 내분 당시 강유로부터 촉나라 재흥의 서신을 받았다고 하나, 결국 반란은 실패했고, 이때 강유 등 옛 신하와 태자 유선을 잃었다. 유선은 살아남은 아들들과 함께 낙양으로 이송되었다. 수행한 가신은 극정 등 극소수였다고 한다.

그 후, 선조 대대로 내려온 땅인 유주의 안락현에서 '''안락공'''에 봉해졌다. 장남 유선은 이미 사망했기에 후계자를 결정해야 했는데, 차남 유요를 제쳐두고 여섯째 아들 유순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옛 신하 문립이 이를 간했다.

271년(태시 7년)에 65세로 사망했다. 서진에 의해 사공(思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안락공의 뒤를 이은 유순은 도의를 잃는 행동을 자주 했으며, 옛 신하 하반, 왕숭, 장인에게 "이전에 돌아가신 문립의 충언을 되돌아보시고, 자신의 행동을 고치십시오"라는 간언을 받았다. 결국 영가의 난에 휘말려 유순을 포함한 일족이 몰살당했다. 이 때문에 유선의 직계 후손은 끊어졌다. 동생 유영의 손자(유선의 종손)인 유현만이 살아남아 성한에 의탁했다고 한다.

오호십육국 시대의 전조의 창업자 유연흉노와 한씨는 조카 관계라고 칭하며, 스스로를 전한·후한 뿐만 아니라 촉한의 후계자라고 칭했다. 그 때문에 유선을 효회황제로 추존했다.

3. 통치 스타일 및 정책

유선은 위정자로서 국가 중대사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정치는 갈씨(제갈량)에게 맡기고 자신은 제사를 지낸다'는 말이나[31] 위나라에 항복한 것 외에는, 오나라와의 동맹 부활, 남만의 반란 진압, 황제를 칭한 오나라와의 관계 회복, 잇따른 북벌, 244년 위나라의 촉 침공 등 촉한의 주요 정치·군사 과제에 대해 유선이 무언가를 판단한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제갈량이 사망하고 상을 치르는 시기에, 신하 이막[31]이 "제갈량은 대군을 이끌고 틈을 보아 배반하려 했던 점이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황실 일가에게 재앙이 사라지고 안태해진 증거입니다. 이는 온 나라가 축하해야 할 일이며, 장례를 치를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자, 격노한 유선은 그를 즉시 처형했다. (화양국지「광한사녀」)

위연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그의 삼족을 처형했고, 유비 이래의 신하인 유염을 유염의 아내에 대한 폭행을 이유로 처형했다. 그러나 요립에 대해서는 제갈량이 요립의 비행을 상주한 것을 받아들여 내린 조칙에서, 요립을 사형시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문산군으로 유배 보냈다.(『제갈량집』)

위연과 다투어 이를 진압한 공적이 크다고 생각한 양의가 대우에 불만을 품고, 같은 한직에 있던 비의에게 "예전에 승상(제갈량)이 죽었을 때, 군을 이끌고 위나라로 갔더라면 이렇게 쇠락하지는 않았을 텐데"라고 말했다. 고관으로의 복직을 꾀하던 비의가 그것을 유선에게 밀고했기 때문에, 유선은 양의를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한가군으로 유배 보냈다. 이를 앙심을 품은 양의는 유배지에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격렬한 내용의 상소를 계속 보냈기 때문에 유선 등은 결국 양의를 구속했다. 붙잡힌 양의는 자살했지만, 그의 처자식은 성도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4. 평가 및 논란

劉禪중국어은 《삼국지연의》에서는 말년에 권신 진지와 환관 황호를 총애하여 나라를 망친 것으로 묘사된다.[34] 그러나 《삼국지》에 따르면, 촉한 멸망의 실제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263년 위가 을 정벌할 때 위나라 황제의 조서에는 촉이 작은 나라임에도 강유가 군대를 혹사하여 백성이 명령을 견디지 못했다고 언급되어 있으며, 유선이 환관에게 미혹되었다는 말은 없다.[34] 이는 위가 촉한을 공격한 이유가 황제 유선이 아니라 강유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250년대 말까지 황호의 발호를 동윤을 비롯한 다른 신하들이 견제했으며, 유선 또한 이들을 신임하였다. 하지만 유선 재위 말년의 정치적 실정은 무시할 수 없다. 강유의 북벌 실패 원인 중 하나는 유선이 황호의 말에 미혹된 점이며, 위와 촉의 국력 차이를 고려하면 실정이 거듭될 경우 촉은 멸망할 수 있었다.

262년 10월, 북벌에서 패한 강유는 검각이 아닌 답중에 주둔했고[34], 위나라 황제는 이를 기회로 263년 5월 촉 정벌에 나섰다.[34] 유선은 11월에 항복했다.[34][35] 결국 촉한의 멸망은 위나라와의 국력 차이, 황호의 발호와 유선의 잘못된 인사, 강유의 전략적 실패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이다.[35]

진수는 유선이 현명한 승상에게 정치를 맡겼을 때는 도리를 따르는 군주였지만, 환관에 미혹됐을 때는 어리석은 군주였다고 평했다.[35]진서(晉書)》에서는 “제나라 환공에 다음가는 현명한 군주”라는 문장이 있으며, 왕은(王隱)도 《촉기(蜀記)》에서 “유선은 총명하고 사리에 밝은 왕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지》 <위서> 육개전에 의하면, 육개는 촉한의 멸망 원인을 군주의 사치와 백성들의 힘을 긴급하지 않은 곳에 고갈시킨 점을 들었다. 사마사(司馬師)는 '촉한이 의지하는 사람은 강유뿐이니 강유를 묶어둔다면 유선의 아둔함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유선은 연의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아둔하기만 한 군주는 아니었다. 4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황위를 지킨 것은 그가 유능한 황제였기 때문이 아니라, 제갈량 사후에도 동윤, 장완, 비의 등이 유선을 보좌했기 때문이다. 동윤 사후 황호가 권력을 잡으면서 촉한은 멸망의 길을 걸었으며, 강유가 황호를 처형하자고 했을 때에도 유선은 그를 총애하였다.

비의 사후, 강유는 여러 차례 위나라를 공격했지만, 식량 공급 부족 문제와 촉한 정부의 비효율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253년, 강유는 오나라와 함께 위나라를 공격했지만, 식량 부족으로 철수해야 했고, 이는 오나라의 패배와 제갈각의 암살로 이어졌다. 255년 적도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256년 등애에게 패배하면서 강유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261년, 황호의 권력이 최고조에 달했고, 동궐제갈첨만이 황호에게 아첨하지 않고 자리를 유지했다. 262년, 황호는 강유를 제거하려 했고, 강유는 유선에게 황호를 처형할 것을 조언했지만 거부당했다.

261년 오나라 사신 설의에 따르면, 당시 촉한의 상황은 군주가 무능하고 신하들은 최소한의 일만 하며,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는 상황이었다.

제갈량의 동상. 그는 유선에 대한 당대의 칭찬 대부분에 책임이 있다.


유선은 당대 사람들 사이에서 매우 부정적인 평판을 받았다. 그는 무능한 군주로 여겨졌고, 국가를 돌보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더 관심이 있었으며, 부패한 관료들을 권력의 자리에 임명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동맹국 동오의 관리였던 설서와 노개는 그를 평범한 군주라고 묘사했고, 설서는 261년에 사신으로 촉에 갔을 때 관리들 사이에서 부패를, 백성들 사이에서 기근을 보았다고 덧붙였다.[11]

이특은 검각관(劍閣關)을 지나면서, 이처럼 인상적인 장벽을 가지고 있는데도 유선과 같은 하찮은 자만이 다른 사람에게 굴복할 수 있었다고 외쳤다.[13]

사마소는 유선의 태도를 쾌락 추구자로 여겼고, 제갈량과 같은 유능한 사람조차 그를 영원히 도울 수 없었으며, 하물며 강유는 더더욱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가충은 사마소에게 이것이 그들이 촉한을 정복할 수 있게 한 행동이라고 대답했다.[14] 유선은 황제였을 때 여러 번 후궁을 늘리려 했지만, 동윤이 이를 막았다. 유선은 그에게 대항하는 것을 너무 두려워했고, 이 때문에 그를 싫어했다.[15] 동윤이 죽은 후, 진지의 아첨과 황호의 영향으로 유선의 동윤에 대한 증오는 날마다 커져갔다.[16] 258년 진지가 죽은 후, 황호가 국가의 정치를 장악했고, 촉나라 사람들 중 동윤을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17]

촉나라의 전직 관리였던 이밀은 유선이 제갈량을 고용하여 권력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 점을 칭찬하는 한편, 황호를 고용하여 조정의 부패를 허용한 점을 비판하는 등 엇갈린 평가를 내렸다.[18] 손성은 유선을 평범하고 무지한 통치자로 평가했으며, 위의 촉 정복 때 263년에 침략자들에게 저항하기보다는 너무 빨리 항복했다고 비난했다.[19] 배송지는 그를 ( 비의와 함께) 국가의 존속에 아무런 무게도 두지 않은 평범한 인물로 평가했다.[20]

상거화양국지에서 제갈량을 크게 칭찬했지만, 그의 군주인 유선은 나라를 통일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한탄했다.[21] 그는 ''화양국지'' 7권에서 왕충이 그의 이전 국가 촉한에 대한 찬사를 보내는 것으로 유선의 전기를 마무리하며, 왕충은 유선이 세상에 대한 야망이 없는 평범한 군주였으며, 그의 국가가 쇠퇴하는 데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언급했다.[22]

진수는 ''삼국지''에서 유선의 전기를 썼는데, 그는 유선이 제갈량을 임명한 것에 대해서는 칭찬했지만, 황호를 고용한 것에 대해서는 무지하다고 비난했다. 그는 실체가 없는 것은 주변을 반영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이 표현은 유선에게 완벽하게 들어맞는다.[23]

현대 역사가들은 유선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에 이의를 제기하며 그를 훨씬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역사 수정주의적 관점을 취해왔다.

이중톈은 한나라의 무제와 같은 유능한 황제에게도 악한 신하가 있었으며, 유선은 예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유선의 측근에는 악한 신하뿐만 아니라 강완, 비의, 동윤과 같은 유능하고 재능있는 관리들이 많았다. 둘째, 유선이 별다른 싸움 없이 항복한 것은 비난받을 만하지만, 촉한의 멸망은 실제로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셋째, 조운의 경우, 조운의 생전 관직은 관우, 장비, 마초, 황충보다 낮았다. 따라서 유선이 이 네 명에게 사후에 후작 작위를 수여하고 조운에게는 제때 수여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사마소 앞에서 유선의 행동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그는 바보 같고 비열한 척하여 사마소가 자신을 무시하고 그의 가족을 살리도록 했고, 유선은 성공했다. 의심 많은 사마소를 속일 수 있었다는 것은 유선이 실제로는 바보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24]

또한, 유선 재위 기간 동안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주목할 만한 징후들이 있었다. 그는 제갈량 사후에 재치있게 국정의 직접적인 통제권을 되찾았고, 강완과 비의를 임명하여 두 사람이 서로 견제하도록 했다. 238년, 조위가 공손연과 전쟁을 벌였고 촉한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북쪽으로 팽창할 좋은 기회라고 믿었다. 그러나 유선은 비의에게 조위가 준비되지 않았을 때에만 동오와 협력하여 공격하도록 신중하게 지시했다. 여러 역사 평론가들은 유선의 신중함을 유비와 제갈량의 비용이 많이 들고 효과 없는 원정들과 비교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마지막으로, 262-263년 유선의 항복은 두 국가 간의 인구와 군사력의 엄청난 차이, 그리고 항복을 거부한 적대 국가의 시민들을 학살하려는 승자의 경향 때문에, 역사 기록과 동시대의 평론가 모두에게 불가피한 선택으로 동정적으로 여겨져 왔다. 특히 유선의 항복은 동오와 동맹하여 권력을 되찾으려다 결국 그의 일족이 몰락하고 랴오둥에서 그의 인구 기반이 피로 물든 학살을 초래한 지역 군벌 공손연의 항복과 비교된다. 반면에, 유선의 항복은 강유의 음모로 인한 일주일간의 혼란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인구가 피해를 입지 않은 채 위나라로의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이끌었다.[24]

후주전의 본문에서 유선 자신은 위정자로서 국가의 중대한 정치 사건에 대해 능동적인 행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정치는 갈씨에게 맡기고 자신은 제사를 지낸다'는 선언(『위략』)이나 위나라에 대한 항복 외에는 오나라와의 동맹 부활, 남만의 반란 진압, 황제를 칭한 오나라와의 관계 회복, 잇따른 북벌, 244년 위나라의 촉 침공 등, 촉한이 안고 있던 중요한 정치 과제, 군사 과제에 대해 유선이 무언가를 판단한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제갈량이 사망하고 상을 치르는 시기에, 신하 이막[31]이 "제갈량은 대군을 이끌고 틈을 보아 배반하려 했던 점이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황실 일가에게 재앙이 사라지고 안태해진 증거입니다. 이는 온 나라가 축하해야 할 일이며, 장례를 치를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격노한 유선은 그를 즉시 처형했다(『화양국지』「광한사녀」).

동시에 위연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그의 삼족을 처형했고, 또한 유비 이래의 신하인 유염을 유염의 아내에 대한 폭행을 이유로 처형했다. 그러나 요립에 대해서는 제갈량이 요립의 비행을 상주한 것을 받아들여 내린 조칙에서, 요립을 사형시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문산군으로 유배 보냈다(『제갈량집』).

위연과 다투어 이를 진압한 공적이 크다고 생각한 양의가 대우에 불만을 품고, 같은 한직에 있던 비의에게 "예전에 승상(제갈량)이 죽었을 때, 군을 이끌고 위나라로 갔더라면 이렇게 쇠락하지는 않았을 텐데"라고 말했다. 고관으로의 복직을 꾀하던 비의가 그것을 유선에게 밀고했기 때문에, 유선은 양의를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한가군으로 유배 보냈다. 이를 앙심을 품은 양의는, 유배지에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격렬한 내용의 상소를 계속 보냈기 때문에 유선 등은 결국 양의를 구속했다. 붙잡힌 양의는 자살했지만, 그의 처자식은 성도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오나라의 설후는 촉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손휴가 촉나라의 통치에 대해 묻자 "주군은 어리석고 자신의 과오를 알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진수는, "현명한 재상에게 맡기는 동안에는 이치에 맞는 군주가 되었지만, 환관에게 미혹되어 혼암한 이후가 되었다. '''흰 실은 염색하는 대로 여러 색깔로 변한다'''" (주변의 인물이 유능하면 선하고, 악하면 안 되는 인간이라는 취지로, 이는 제 환공과 같다) "제갈량이 보좌한 12년 동안에는 개원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출병하면서도 함부로 은사를 행하지 않았다. 좀처럼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제갈량이 죽은 후, 그러한 방식도 무너져 갔다. 우열은 역력하다"고 평했다.

화양국지』도 "중흥의 그릇이 아니다"라고 낮게 평가했다.

진서』 「이밀전」에서 촉나라의 옛 신하인 이밀은, 명신을 믿고 성공하고 간신을 믿고 실패한 것을 예로 들어, 유선을 "제의 제 환공 다음"이라고 말했다.

과거 유선의 상이 성도의 무후사에 존재했지만, 혐오스러운 정도가 심하여 그 상은 여러 번 파괴되었다(몇 번 재건되었다)고 한다. 탁현(현재의 허베이성바오딩시줘저우시)의 삼의궁에는 "소삼의전"이라는 곳이 있어, 거기에 관흥·장포와 함께 제사 지내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약소한 촉한을 계승하여 40년간 존속시킨 것, 이를 지탱한 공신도 여러 번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것, 국력을 쇠퇴시켜 자국을 멸망시킨 것, 각각 그 요인이 된 신하를 중용했던 것은 사실이다.

5.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증조부유웅
조부유홍
부친유비
모친소열황후
부인경애황후
부인장황후
장인장비
처외숙하후패
처외숙하후위
처외숙하후혜
처외숙하후화
처외조부하후연
의형유봉유비의 양자
이복 동생유영
이복 동생유리
조카유윤
조카유집
제수마씨
종손유현
종손유승
장남유선
차남유요
삼남유종
사남유찬
오남유심
육남유순
칠남유거
사위관통
사위비공비의의 아들
사위제갈첨
사위등량
사돈관우
사돈비의
사돈비의
사돈제갈량
사돈등지
비씨
정실경애황후장비의 장녀
계실장황후장비의 차녀
측실왕귀인경애황후의 시녀
측실李昭儀 (劉禅)|이소의중국어
외손자제갈상
외손자제갈경


6. 기타

촉한 멸망 후,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한진춘추』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연회에서 촉나라 음악이 연주될 때 옛 신하들은 눈물을 흘렸지만, 유선은 웃고 있었다. 사마소는 이를 보고 사람이 어찌 이리 무정할 수 있냐며 제갈량이 제대로 보좌하지 못했고, 강유에게는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가충에게 말했다. 가충은 그렇지 않았다면 촉나라를 병합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사마소가 촉나라가 그립냐고 묻자 유선은 이곳이 즐거워 촉은 생각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에 곁에 있던 극정이 '선조의 묘소가 롱서에 있으니 서쪽을 생각하며 슬퍼하지 않는 날이 없다'고 답하라 조언했고, 유선은 그대로 답했다. 사마소가 극정이 말한 것과 똑같다고 하자 유선은 놀라며 그렇다고 답하고 크게 웃었다. 이 일화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인물"을 뜻하는 "'''부부기적아두'''(扶不起的阿斗, 돕기에 힘든 아두)"라는 속담이 생겨났다.

극정은 유선이 위나라에 항복할 때 항복 문서를 작성하고 낙양으로 갈 때 처자를 버리고 유선을 따랐던 인물이다. 유선은 극정의 도움으로 위나라에서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었기에 "극정을 평가하는 것이 늦었다"라고 후회했다고 한다.

한편,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젊어서부터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나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던 장익은 만년에 중병으로 걷기조차 어려웠지만 종군하게 된다. 그는 마지막 출진에 앞서 유선에게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목숨을 바칠 각오를 전했고, 유선은 그의 말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32]

6. 1. 대중문화 속 유선

나관중의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유선은 일반적으로 무능한 군주로 묘사되며, 특히 총애했던 환관 황호의 말에 쉽게 흔들리는 인물로 그려진다.[32]

제갈량의 모반을 의심하여 북벌 전선에서 소환하거나, 위나라와 내통한 황호의 말에 따라 강유를 전선에서 불러들이고, 황호를 비호하는 등 암군으로서의 인상이 더욱 강하다. 제갈량이 소환되었을 때, 유선의 술에 빠져 살찐 몸을 보고 장완비의에게 유선의 교육을 엄하게 하도록 명령한다. 사마소는 "저런 사내라니. 이런 자가 군주이니, 공명이 살아있었더라도 촉의 운명은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한탄하는 묘사가 추가되어 있다.[32]

유선은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시리즈인 ''진・삼국무쌍''의 플레이어블 캐릭터이며, 진・삼국무쌍 7에서 처음 등장했고, 코에이가 제작한 ''무쌍OROCHI 3''에도 등장한다.

참조

[1] 서적 Power of Freedom: Hu Shih's Political Writings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22
[2] 간행물 429
[3] 간행물 Han–Jin Chunqiu 429
[4] 간행물 Weilüe 429
[5] 간행물 429
[6] 간행물 Han–Jin Chunqiu 429
[7] 논문 Rotten Pedant! The Literary and Historical Afterlife of Qiao Zhou http://www2.ihp.sini[...] Academica Sinica 2008
[8] 간행물 429
[9] 간행물 429
[10] 간행물 Shu shi pu 429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17] 문서
[18] 문서
[19] 문서
[20] 문서
[21] 문서
[22] 문서
[23] 문서
[24] 서적 Analysis of the Three Kingdoms Publisher of People's Public Security
[25] 간행물 Han–Jin Chunqiu 429
[26] 문서
[27] 문서
[28] 문서
[29] 문서
[30] 문서
[31] 문서
[32] 문서
[33] 문서
[34] 문서
[35] 문서
[36] 문서 권세 있는 신하
[37] 문서 공손연
[38] 문서 장완
[39] 문서 군대가 쳐들어가거나 파견되어 가서 주둔하다.
[40] 문서 갑작스러운 재앙이나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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