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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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왕가는 조선의 국왕과 대한제국의 황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전주 이씨를 시조로 하며,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선 왕조는 518년 동안 존속하며 정치,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1592년 임진왜란, 1627년과 1636년의 호란 등 외침을 겪었으며, 19세기 말에는 개항과 함께 외세의 압력에 시달렸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국으로 전환했으나,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일본에 강제 병합되면서 멸망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왕공족으로 격하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재산 몰수와 귀국 거부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현재는 이원과 이석을 중심으로 왕위 계승 분쟁이 있으며, 친일 논란과 재산 환수 문제 등 다양한 논란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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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왕가 - 이방자
이방자는 일본 왕족 출신으로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가 되어 이은과 결혼 후 한국으로 귀국하여 장애인 복지 사업에 헌신하였으며 사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 일제강점기 이왕 - 의민태자
의민태자는 고종과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에서 태어난 대한제국 최후의 황태자로, 영친왕 책봉 후 황태자가 되었으나 일본 유학 및 군 복무, 일본 황족과의 정략결혼, 광복 후 국적 미인정으로 일본에서 생활하다 귀국 후 영원에 안장되었으며 사후 의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일제강점기 이왕 - 순종 (대한제국)
순종은 고종의 아들이자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이며 조선의 마지막 임금으로, 1907년 황제에 즉위했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통치력이 약화되었고, 1910년 한일 병합으로 창덕궁 이왕으로 불리다 사망했다.
이왕가 | |
---|---|
지도 | |
기본 정보 | |
국가 | 대한제국 |
존속 기간 | 1897년 10월 12일 ~ 1910년 8월 29일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수도 | 한성부 (지금의 서울특별시) |
언어 | 한국어 |
종교 | 유교 |
통화 | 대한제국 원 |
역사 | |
이전 국가 | 조선 |
건국 | 1897년 10월 12일 |
멸망 | 1910년 8월 29일 |
주요 사건 | 을미사변 아관파천 대한제국 선포 러일 전쟁 한일 병합 조약 |
인구 | |
인구 | 1700만명 (1910년) |
왕실 | |
황제 | 고종 (광무제) |
황후 | 명성황후 (사후 추존), 순헌황후 |
황태자 | 순종 |
황족 | 이왕가 |
후계 국가 | 일제 강점기 |
기타 정보 | |
현재 |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기본 정보 | |
가문 | 이 |
국가 | 대한제국 |
구성원 | 대한제국 황실 |
창시자 | 고종 |
존속 기간 | 1897년 - 1945년 |
해체 | 1945년 |
후계 | 대한민국 |
역사 | |
기원 | 조선 왕조 |
설립 | 1897년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 |
주요 사건 | 한일 병합 조약 (1910년) 일제강점기 (1910년 ~ 1945년) |
해체 |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과 대한민국 수립 |
구성원 | |
황제 | 고종 |
황후 | 명성황후 (사후 추존), 순헌황후 |
황태자 | 순종 |
왕공족 | 의친왕, 영친왕 등 |
현재 | |
이씨 일가 | 이원 이해경 |
2. 역사
2. 1. 조선 왕조
1592년부터 1598년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군이 침입하였다(임진왜란). 이 전쟁으로 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국토는 황폐해졌으며, 문화재가 소실되거나 일본으로 약탈당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3] 민중 의병과 이순신이 지휘하는 수군의 활약, 명의 원군 등으로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는 성공하였다.1623년 인조 즉위 후, 1627년과 1636년 두 차례에 걸쳐 청이 침입하였다(정묘호란, 병자호란). 조선은 청에 패배하여 정복당하고, 이전까지 명나라의 책봉을 받아왔으나 이후 청의 책봉을 받게 되었다.[3]
2. 1. 1. 건국과 초기 발전
15세기 용비어천가와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왕가의 선조는 전주에 거주하는 전주이씨라고 한다.[1]조선 초대 국왕 이성계(태조)의 고조부 이안사는 지방관과의 불화로 전주를 떠나 170여 호의 백성을 이끌고 삼척을 거쳐 의주로 피난하여 고려로부터 병마사에 임명되었으나, 몽골군에 투항하였다. 이후 남경의 斡東으로 이주하여 몽골로부터 수천호겸달가치에 임명되었다. 안사의 사후 뒤를 이은 아들 이행리(이성계의 증조부)는 여진족의 공격을 받아 다시 의주로 돌아와 1300년에 원로부터 고려군민달가치에 임명되었다. 그의 아들 이춘(이성계의 조부)대에 함주로 이주하였다. 그의 아들 이자춘(이성계의 부친) 대인 1356년 고려 공민왕의 쌍성 공략 때 고려에 내응하여 원나라에서 고려로 붙었다.[1]
그러나 이성계 조상의 행적은 많은 부분이 가필이나 윤색되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고 한다. 객관적인 증거를 통해 사실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성계의 조부 이춘의 실존과 그의 아버지 이자춘이 쌍성의 천호였다는 것뿐이다.[1]
이왕가가 전주이씨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도 확증이 없다. 알려진 바로는 이왕가는 함경도에서 여진족을 지지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한 지방 호족이었고, 이성계의 아버지 대까지 원나라에 봉사했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왕가가 전주이씨의 후손이라는 것은 허위이며, 실제로는 여진족[1] 또는 몽골 군벌[1]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함경도 호족 출신으로 고려 말기 무장이었던 이성계는 무용이 뛰어났다. 1363년 고려 수도 개경을 점령했던 홍건적(紅巾軍)을 토벌하고, 공민왕(恭愍王)(재위 1351년-1374년)의 반원 친명(明) 정책에 따라 원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몰아냈다. 또한 왜구(倭寇) 토벌에도 큰 공을 세웠다.[2]
공민왕 사후 고려는 다시 친원 정책으로 돌아섰다. 이성계도 요동반도(遼東半島)의 명나라 군대와 싸우는 원정군에 참여했으나, 친명파였던 그는 1388년 압록강(鴨綠江) 하류 위화도(威化島)에서 군대를 돌려(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 개경을 점령하고 우왕(禑王)(재위 1374년-1388년)과 무신 정치가 최영(崔瑩)을 제거하였다.[2] 이후 창왕(昌王)(재위 1388년-1389년)마저 폐하고, 공양왕(恭譲王)(재위 1389년-1392년)를 옹립하여 고려의 정치·군사 실권을 장악하고, 친명 정책으로 전환하였다.[2]
고려 정부의 중추가 된 이성계는 토지 제도 개혁을 통해 구 특권층인 귀족들의 기반을 무너뜨림으로써 신흥 관료층인 개혁파 양반(兩班)의 지지를 굳혔다. 1392년 공양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국왕에 즉위하여, 이듬해 국호를 “조선(朝鮮)”, 한양(후의 한성, 현 서울)을 수도로 정하였다.[2][3]
초기 이씨 왕조의 왕권은 불안정했으나, 제3대 국왕 태종(재위 1400년-1418년) 대에 이르러 귀족 사병 폐지, 주자학을 통한 사상 통제, 관료 제도 정비 등으로 왕권은 대체로 안정을 찾았다. 제4대 국왕 세종(재위 1418년-1450년)부터 제9대 국왕 성종(재위 1469년-1494년)에 이르기까지 국력이 신장하였고, 영토는 압록강·두만강까지 확장되었다.[3]

특히 세종은 역대 국왕 중 가장 훌륭한 군주로 평가받으며,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조선 왕조의 기본적인 통치 규범이 된 『경국대전』을 편찬하였다.[3] 당 제도를 본받아 정치를 학문적으로 보좌하는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는 등 문화 사업에도 적극 임하였고,[3]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하기도 하였다.[4]
2. 1. 2. 통치 체제와 문화
태종(재위 1400년-1418년) 대에 이르러 귀족의 사병을 폐지하고, 주자학을 통한 사상 통제, 관료 제도를 정비하는 등 왕권이 대체로 안정되었다. 다만 조선 왕조의 왕권에는 절대적인 권력이 없었고, 정치는 기본적으로 고급 관료들의 합의제에 의존했다.[3] 세종(재위 1418년-1450년)부터 성종(재위 1469년-1494년)에 이르기까지 국력이 신장하였고, 영토는 압록강·두만강까지 확장되었다.[3]특히 세종은 역대 국왕 중 가장 훌륭한 군주로 평가받으며,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조선 왕조의 기본적인 통치 규범이 된 『경국대전』을 편찬하였다. 당나라 제도를 본받아 정치를 학문적으로 보좌하는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는 등 문화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임하였고,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하기도 하였다.[4]
영조(재위 1724년-1776년)와 정조(재위 1776년-1800년) 시대에는 왕권이 신장하고 정치적 안정기가 도래함에 따라, 각종 제도의 개혁과 서적 간행 등이 활발해졌다. 따라서 두 왕은 문치 정치를 펼친 문예 부흥의 군주로 명군으로 여겨지며, 이 시대를 “영정 시대”라고도 부른다.[5] 한편 18세기에는 청나라를 통해 서양의 학문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나, 이씨 왕조는 기독교를 사학으로 간주하여 금교령을 내리고 탄압하였다.[3]
2. 1. 3.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주어진 섹션 제목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지만, 제공된 원본 소스에는 해당 내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섹션에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2. 1. 4. 후기 변화와 쇠퇴
대한민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후, 이은·방자 부부는 한국으로 귀국을 희망했으나, 이승만 정권은 구 왕족이자 친일파로 여겨진 이은 일가를 냉대하며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무국적자가 되었고, 이 왕조 시대부터 소유해 온 재산 또한 모두 몰수당했다.[10]부부가 한국에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 정권이 수립된 1963년의 일이며, 그때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1970년에 이은이 사망한 후에도 방자는 한국에 남아 명휘원과 자혜원 등 장애인 시설을 설립하는 등 한국의 사회복지에 기여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10]
이은·방자 부부의 차남 이구는 전후 왕세자의 칭호를 잃은 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 유학하여 건축학을 배우고, 1958년 유럽계 미국인 여성 줄리아 멀록과 결혼하여 미국에 귀화했다. 1963년 한국에 귀국하여 실업가가 되었으나, 경영하던 신한항공이 1979년에 도산하고, 1982년에는 줄리아 부인과도 이혼했다. 이혼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2005년 7월 16일 심장마비로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구 이왕저)에서 사망했다.
이구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이강 공(고종의 다섯째 아들)의 아홉째 아들 이갑의 장남 이원이 양자가 되어 현재까지 당주가 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개의 이씨 후손 단체들이 각각 이강의 손자인 이원과 이강의 열 번째 아들로 가수로 알려진 이석을 당주로 인정하고 있어, 분쟁 중에 있다.
이건은 이강 공의 장남으로 이강으로부터 공의 칭호를 계승하였으나, 전후 다시 일본에 귀화하여 도야마 겐이치가 되었기 때문에 계승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 정자도 도야마 요시코가 되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1951년에 이혼했다. 덕혜도 신경쇠약이 더욱 심해져 1946년 도립마쓰자와병원에 입원하고, 1955년 정신적 피로 등으로 소무지와 이혼하고, 1962년 한국에 귀국하여 1989년 방자가 살던 창덕궁 낙선재에서 사망했다.
2. 2. 대한제국
고종 (李㷩, 덕수궁 '''이태왕''', 1910년 8월 29일 ~ 1919년 1월 21일)순종 (李坧, 창덕궁 '''이왕''', 1910년 8월 29일 ~ 1926년 4월 25일)
순정효황후 (尹-, '''이왕비''', 1910년 8월 29일 ~ 1926년 4월 25일, '''이왕대비''', 1926년 4월 25일 ~ 1947년 5월 3일[12])
황태자 이은 (李垠, '''이왕세자''', 1910년 8월 29일 ~ 1926년 4월 25일, '''이왕''', 1926년 4월 25일 ~ 1947년 5월 3일[12])
이방자 (方子, '''이왕세자비''', 1920년 4월 28일 ~ 1926년 4월 25일, '''이왕비''', 1926년 4월 25일 ~ 1947년 5월 3일[12])
이진 (李晉, '''이왕세손''', 1921년 8월 18일 ~ 1922년 5월 11일)
이구 (李玖, '''이왕세자''', 1931년 12월 29일 ~ 1947년 5월 3일[12])
덕혜옹주 (德惠, 1912년 5월 25일 ~ 1931년 5월 8일[13])
대 | 초상 | 묘호 | 이름 생몰년 | 재위기간 | 혈족관계 | 비고 |
---|---|---|---|---|---|---|
26 | -- | 고종 (고종) | 이형(李杰) 1852년 9월 8일 – 1919년 2월 21일 | 1897년 10월 12일 - 1907년 7월 20일 | 제26대 조선 국왕 | |
27 | ![]() | 순종 (순종) | 이척(李坧) 1874년 3월 25일 – 1926년 4월 24일 | 1907년 7월 20일 - 1910년 8월 29일 | 전대의 장남 | |
2. 3. 일제강점기: 왕공족
1910년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제3조는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 및 그 후비와 후예로 하여금 각기 그 지위에 응하여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고, 또 그것을 유지하는 데 충분한 연봉을 공급해야 할 것을 약속한다"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한국 황제, 황태자, 전 황제를 '왕족', 황제 친족을 '공족'으로 하는 왕족·공족이 설립되었다.[12] 왕족의 가장은 '왕', 왕의 장자는 '왕세자' 칭호를 사용했고, 공족의 가장은 '공' 칭호를 사용했다.초대 한국 황제 고종은 이태왕, 2대 한국 황제 순종은 이왕, 황태자 이은은 왕세자가 되었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이강과 고종의 형 이희는 공이 되었다.
고종(이태왕), 순종(이왕) 생존 당시에는 황족과 왕족·공족 관계에 대한 명문 규정이 없어 모호했다. 이들은 조선인에 대한 회유책으로 황족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순종 사후 1926년 제정된 왕공가궤범에서는 왕족·공족이 일본 황족 다음이라고 규정하여, 황족이 아님을 강조했다. 궁내성은 왕족·공족을 황족에 준하는 존재로 보려 했으나, 추밀원은 왕족·공족이 본래 황족이 아니므로 부당하다고 주장하여 대립했고, 결국 추밀원 의견이 통과되었다.
1926년 왕족·공족이 황족보다 격이 낮다는 것이 명문화된 것은 조선인(특히 독립운동가) 사이에서 구 조선 왕실에 대한 관심이 약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헌장에는 1919년 "구 황실을 우대한다"는 조항이 있었지만 1925년 삭제되었다. 고종은 이미 사망했고, 순종도 얼마 남지 않았으며, 이은도 한국 황제가 될 수 없었던 인물이므로 조선인에게 친숙하지 않아 관심이 약해졌다.
왕족·공족 남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에 따라 군에 입대하게 되어 있었다. 서훈으로 비교하면 왕은 황족의 친왕, 공은 황족의 왕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이왕가의 본저택은 경성부(현 서울특별시) 창덕궁이었지만, 도쿄 고지마치구 기오이초 1번지에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이 된 저택이 있었다. 이건 공가와 이규 공가는 시부야구 토키와마쓰초 101번지 위에 도쿄 저택이 있었다.
왕족·공족 가정을 관할하는 기관으로 이왕직이 설치되었다. 궁내대신 관리에 속하는 외국이지만, 경성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가 감독했다. 이왕직은 구 대한제국 궁내부를 계승했기에, 다이쇼 시대까지 조선인이 대대로 장관을 역임했다.
1947년 5월 3일 시행된 일본국 헌법 제14조에서 "화족 그 외의 귀족의 제도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규정됨에 따라, 왕족·공족은 화족 및 조선귀족과 함께 그 신분을 잃었다.

1920년, 순종의 왕세자였던 이은과 일본 유학 중이던 이은과 학습원 재학 중이던 일본 황족 이본궁 수정왕의 딸 방자 여왕이 결혼하였다. 이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위한 정략 결혼으로 여겨지지만, 부부 사이는 좋았고, 이은의 여동생 이덕혜와 함께 테니스를 치는 등 사이좋게 지냈다.
2. 4.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후, 이은·방자 부부는 한국으로 귀국을 희망했으나, 이승만 정권은 구 왕족이자 친일파로 여겨진 이은 일가를 냉대하며[10]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무국적자가 되었고, 이 왕조 시대부터 소유해 온 재산 또한 모두 몰수당했다.부부가 한국에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 정권이 수립된 1963년의 일이며, 그때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1970년에 이은이 사망한 후에도 방자는 한국에 남아 명휘원과 자혜원 등 장애인 시설을 설립하는 등 한국의 사회복지에 기여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10]
이은·방자 부부의 차남 이구는 전후 왕세자의 칭호를 잃은 후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 유학하여 건축학을 배우고, 1958년 유럽계 미국인 여성 줄리아 멀록과 결혼하여 미국에 귀화했다. 1963년 한국에 귀국하여 실업가가 되었으나, 경영하던 신한항공이 1979년에 도산하고, 1982년에는 줄리아 멀록과도 이혼했다. 이혼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2005년 7월 16일 심장마비로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구 이왕저)에서 사망했다.
이구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이강 (고종의 다섯째 아들)의 아홉째 아들 이갑의 장남 이원이 양자가 되어 현재까지 당주가 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개의 이씨 후손 단체들이 각각 이강의 손자인 이원과 이강의 열 번째 아들로 가수로 알려진 이석을 당주로 인정하고 있어, 분쟁 중에 있다.
참고로 이강의 장남이자 이강으로부터 공의 칭호를 계승한 이건은 전후 다시 일본에 귀화하여 도야마 겐이치가 되었기 때문에 계승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 정자도 도야마 요시코가 되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1951년에 이혼했다. 이덕혜도 신경쇠약이 더욱 심해져 1946년 도립마쓰자와 병원에 입원하고, 1955년 정신적 피로 등으로 소무지와 이혼하고, 1962년 한국에 귀국하여 1989년 방자가 살던 창덕궁 낙선재에서 사망했다.
3. 주요 인물
- 고종 (李㷩, 덕수궁 '''이태왕''', 1910년 8월 29일 ~ 1919년 1월 21일)
- 순종 (李坧, 창덕궁 '''이왕''', 1910년 8월 29일 ~ 1926년 4월 25일)
- 순정효황후 (尹-, '''이왕비''', 1910년 8월 29일 ~ 1926년 4월 25일, '''이왕대비''', 1926년 4월 25일 ~ 1947년 5월 3일[12])
- 황태자 이은 (李垠, '''이왕세자''', 1910년 8월 29일 ~ 1926년 4월 25일, '''이왕''', 1926년 4월 25일 ~ 1947년 5월 3일[12])
- 이방자 (方子, '''이왕세자비''', 1920년 4월 28일 ~ 1926년 4월 25일, '''이왕비''', 1926년 4월 25일 ~ 1947년 5월 3일[12])
- 이진 (李晉, '''이왕세손''', 1921년 8월 18일 ~ 1922년 5월 11일)
- 이구 (李玖, '''이왕세자''', 1931년 12월 29일 ~ 1947년 5월 3일[12])
- 덕혜옹주 (德惠, 1912년 5월 25일 ~ 1931년 5월 8일[13])
3. 1. 조선 및 대한제국
고종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출병한 일본과 청나라 간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청나라가 패배하면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한 틈을 타 1897년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여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였다.[3] 그러나 청나라를 대신하여 일본과 러시아가 경쟁적으로 조선에 지배력을 행사하려 하였으나,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러시아는 세력을 잃었고, 을사늑약에 의해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다.[3]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 사회에 호소하고자 헤이그 밀사 사건을 일으켰으나, 일본의 분노를 사 강제로 퇴위당하고 순종이 황제로 옹립되었다.[6] 정미7조약으로 사법권·경찰권도 일본에 빼앗긴 후, 1910년 대한제국 병합 조약이 체결되어 한국은 공식적으로 일본에 병합되었다.[3]이로써 이씨 왕조는 조선 국왕·대한제국 황제로서 518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7]

다음은 조선 및 대한제국의 군주 목록이다.
순서 | 초상화 | 묘호 | 이름 생몰년 | 재위기간 | 혈족관계 | 비고 |
---|---|---|---|---|---|---|
1 | 태조 | 이성계(李成桂) → 이단(李旦) | 1392년8월 5일 - 1398년10월 14일 | |||
2 | 정종 | 이방과(李芳果) → 이경(李曔) | 1398년10월 14일 - 1400년11월 28일 | 전대 국왕의 차남 | ||
3 | 태종 | 이방원(李芳遠) | 1400년11월 29일 - 1418년9월 9일 | 전대 국왕의 동생 (태조의 다섯째 아들) | ||
4 | 세종 | 이도(李祹) | 1418년9월 19일 - 1450년4월 8일 | 전대 국왕의 셋째 아들 | ||
5 | 문종 | 이향(李珦) | 1450년4월 4일 - 1452년6월 1일 | 전대 국왕의 장남 | ||
6 | -- | 단종 | 이홍위(李弘暐) | 1452년5월 14일 - 1455년6월 11일 | 전대 국왕의 장남 | |
7 | 세조 | 이유(李瑈) | 1455년7월 25일 - 1468년9월 7일 | 전대 국왕의 숙부 (세종의 둘째 아들) | ||
8 | 예종 | 이황(李晄) | 1468년9월 7일 - 1469년12월 31일 | 전대 국왕의 차남 | ||
9 | 성종 | 이혈(李娎) | 1469년12월 31일 - 1495년1월 20일 | 전대 국왕의 조카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차남) | ||
10 | 연산군 (폐위되어 묘호 없음) | 이융(李㦕) | 1495년1월 20일 - 1506년9월 18일 | 전대 국왕의 장남 | ||
11 | 중종 | 이역(李懌) | 1506년9월 18일 - 1544년11월 28일 | 전대 국왕의 동생 (성종의 둘째 아들) | ||
12 | 인종 | 이호(李峼) | 1544년11월 28일 - 1545년8월 8일 | 전대 국왕의 장남 | ||
13 | 명종 | 이환(李峘) | 1545년8월 8일 - 1567년8월 3일 | 전대 국왕의 동생 (중종의 둘째 아들) | ||
14 | 선조 | 이균(李鈞) → 이연(李昖) | 1567년8월 7일 - 1608년3월 17일 | 전대 국왕의 조카 (중종의 셋째 아들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 ||
15 | 광해군 (폐위되어 묘호 없음) | 이혼(李琿) | 1608년3월 17일 - 1623년4월 12일 | 전대 국왕의 차남 | ||
16 | 인조 | 이종(李倧) | 1623년4월 12일 - 1649년6월 17일 | 전대 국왕의 조카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의 장남) | ||
17 | 효종 | 이호(李淏) | 1649년6월 17일 - 1659년6월 23일 | 전대 국왕의 차남 | ||
18 | 현종 | 이연(李棩) | 1659년6월 23일 - 1674년9월 17일 | 전대 국왕의 장남 | ||
19 | 숙종 | 이순(李焞) | 1674년9월 22일 - 1720년7월 13일 | 전대 국왕의 장남 | ||
20 | 경종 | 이윤(李昀) | 1720년7월 21일 - 1724년10월 11일 | 전대 국왕의 장남 | ||
21 | 영조 | 이금(李昑) | 1724년10월 16일 - 1776년4월 22일 | 전대 국왕의 동생 (숙종의 둘째 아들) | ||
22 | 정조 | 이산(李祘) | 1776년4월 17일 - 1800년8월 18일 | 전대 국왕의 손자 (영조의 둘째 아들 장헌세자의 둘째 아들) | ||
23 | 순조 | 이공(李玜) | 1800년8월 18일 - 1834년12월 13일 | 전대 국왕의 둘째 아들 | ||
24 | 헌종 | 이환(李烉) | 1834년12월 13일 - 1849년7월 25일 | 전대 국왕의 손자 (순조의 장남 효명세자의 장남) | ||
25 | -- | 철종 | 이변(李昪) | 1849년7월 28일 - 1864년1월 16일 | 전대 국왕의 방계 (영조의 둘째 아들 장헌세자의 증손) | |
26 | 고종 | 이명복(李命福) →이재황(李載晃) →이형(李㷩) | 1863년12월 13일 - 1897년10월 12일 | 전대 국왕의 방계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7세손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 초대 대한제국 황제 | |
대 | 초상 | 묘호 | 이름 생몰년 | 재위기간 | 혈족관계 | 비고 |
---|---|---|---|---|---|---|
26 | -- | 고종 (고종) | 이형(李㷩) | 1897년10월 12일 - 1907년7월 20일 | 제26대 조선 국왕 | |
27 | 순종 (순종) | 이척(李坧) | 1907년7월 20일 - 1910년8월 29일 | 전대의 장남 | ||
3. 2. 일제강점기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대한제국 황실은 왕실로 격하되어 이왕가로 불리게 되었다.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 순종은 창덕궁 이왕으로 불렸다. 순종의 왕세자였던 이은은 일본 황족 이방자와 정략결혼을 하였으나,[10] 부부 사이는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3년에 이은과 이방자가 함께 테니스를 즐기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다.덕혜옹주는 소 무지 백작과 결혼하였으나, 결혼 전 이미 조기 치매 진단을 받는 등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3. 3.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후, 이은·방자 부부는 한국으로 귀국을 희망했으나, 이승만 정권은 구 왕족이자 친일파로 여겨진 이은 일가를 냉대하며[10]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무국적자가 되었고, 이 왕조 시대부터 소유해 온 재산 또한 모두 몰수당했다.부부가 한국에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 정권이 수립된 1963년의 일이며, 그때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1970년에 이은이 사망한 후에도 방자는 한국에 남아 명휘원과 자혜원 등 장애인 시설을 설립하는 등 한국의 사회복지에 기여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10]
이은·방자 부부의 차남 이구는 전후 왕세자의 칭호를 잃은 후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 유학하여 건축학을 배우고, 1958년 유럽계 미국인 여성 줄리아 멀록과 결혼하여 미국에 귀화했다. 1963년 한국에 귀국하여 실업가가 되었으나, 경영하던 신한항공이 1979년에 도산하고, 1982년에는 줄리아 부인과도 이혼했다. 이혼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2005년 7월 16일 심장마비로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구 이왕저)에서 사망했다.
이구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이강 공(고종의 다섯째 아들)의 아홉째 아들 이갑의 장남 이원이 양자가 되어 현재까지 당주가 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개의 이씨 후손 단체들이 각각 이강의 손자인 이원과 이강의 열 번째 아들로 가수로 알려진 이석을 당주로 인정하고 있어, 분쟁 중에 있다.
참고로 이강 공의 장남으로 이강으로부터 공의 칭호를 계승한 이건은 전후 다시 일본에 귀화하여 도야마 겐이치가 되었기 때문에 계승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 정자도 도야마 요시코가 되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1951년에 이혼했다. 이덕혜도 신경쇠약이 더욱 심해져 1946년 도립마쓰자와병원에 입원하고, 1955년 정신적 피로 등으로 소무지와 이혼하고, 1962년 한국에 귀국하여 1989년 방자가 살던 창덕궁 낙선재에서 사망했다.
4.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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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현대 한국 사회에서의 이왕가
생몰년
(1897년10월 20일–1970년5월 1일)
- 1970년5월 1일

(1931년12월 29일–2005년7월 16일)
- 2005년7월 16일

(1962년9월 23일–)
-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