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스틸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지프 스틸웰은 1883년에 태어나 1946년에 사망한 미국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중국-버마-인도 전구에서 활약했다. 그는 중국어에 능통하여 장제스 총통의 참모장과 중국, 버마, 인도 주둔 미군 사령관, 동남아시아 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했다. 스틸웰은 장제스와의 갈등, 영국군과의 대립, 클레어 셰놀트와의 의견 불일치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특히 장제스와의 불화로 인해 해임되었다. 그는 뛰어난 전술가였지만, 부하들에게 엄격하고 영국을 혐오하는 성향으로 인해 '비네거 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전후에는 육군 지상군 사령관, 제10군 사령관 등을 역임했으며, 위암으로 사망했다.
조지프 스틸웰은 1883년 3월 19일 플로리다주 팔라카에서 태어났다.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중국어를 익혀 중국 전문가의 길을 걸었다. 1920년대 중화민국에서 도로 건설 기술 책임자, 톈진 주둔 미군 보병 연대 복무 등을 통해 현지 경험을 쌓았으며, 이 시기 펑위샹, 조지 마셜 등과 인연을 맺고 북벌, 지난 사건 등 격동의 중국 근대사를 목격했다.
2. 생애
1935년 중화민국 주재 미국 대사관 부속 육군 무관으로 부임하며 장제스의 참모장이 되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 후 1942년 2월, 중국-버마-인도 전구(CBI) 미 육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버마 전선에서 연합군 부사령관으로서 대일 작전을 지휘하고 원조 루트 확보에 힘썼다. 대담한 전략가였으나 엄격하고 신랄한 성격 탓에 '비네거 조(Vinegar Joe)'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영국군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으로 영국 지휘관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스틸웰은 장제스와 중국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군사적 무능, 소극적인 항일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으며, 이는 중국군 지휘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심화되었다. 그는 장제스를 '피넛(쓸모없는 놈)'이라 부르며 경멸했고, 장제스 역시 스틸웰의 독단적인 행동과 오만함에 불만을 품었다. 이러한 극심한 갈등은 결국 1944년 10월 스틸웰의 해임으로 이어졌다. 해임 직전인 1944년 8월 대장으로 진급했다.
중국에서 해임된 후 1945년 1월 육군 지상군 사령관을 거쳐, 같은 해 6월 오키나와 전투 중 전사한 사이먼 B. 버크너 주니어 중장의 후임으로 제10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종전까지 오키나와 주둔 미군을 지휘했다. 종전 후 서부 방위군 사령관, 제6군 사령관 등을 역임했으며, 1946년 10월 12일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프레시디오 군 병원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태평양에 뿌려졌고, 웨스트 포인트 묘지에 위령비가 세워졌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조지프 스틸웰은 1883년 3월 19일 플로리다주 팔라트카에서 태어났다.[1] 그의 부모는 의사 벤자민 스틸웰과 메리 A. 피인이었다. 스틸웰 가문은 1638년 미국에 도착한 영국 식민지 개척자의 8대손으로, 그의 아버지가 태어나기 전까지 뉴욕에 거주했다.[2]
가족 친구이자 그를 진료했던 의사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가족 내에서는 워렌(Warren)으로 불렸다. 그는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뉴욕주 욘커스에서 자랐으며, 종교 교육을 강조하는 환경이었다. 스틸웰은 훗날 딸에게 종교의 실질적인 도움 부족을 언급하며, 종교 대신 상식을 따르라고 조언했다고 전해진다.[3]
스틸웰은 욘커스 고등학교에서 학업적으로 우수했으며, 미식축구 (쿼터백)와 육상 경기 선수로도 활동했다.[3] 그러나 졸업반 무렵 친구들과 어울려 장난(카드 게임, 졸업 무도회 디저트 절도 등)을 치다가 문제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친구들은 퇴학 또는 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미 졸업한 스틸웰은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원래 진학하려던 예일 대학교 대신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게 되었다.[4]
의회 추천 지원 마감일을 놓쳤음에도, 가족의 인맥을 통해 당시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에게 연락이 닿아 입학할 수 있었다.[4] 그는 웨스트포인트에서의 첫 해 신입생 시절 겪었던 신병 괴롭힘을 "지옥" 같았다고 회상했다.[5] 웨스트포인트에서 스틸웰은 프랑스어 등 어학에 재능을 보여 2학년 때는 반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스포츠에서는 농구를 학교에 도입하고 크로스컨트리 달리기 주장을 맡았으며, 대표팀 미식축구 선수로도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훈련 중 웃었다는 이유로 두 차례 벌점을 받기도 했으나, 1904년 124명의 생도 중 32등으로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했다.[6]
그는 이후 사관학교 교관 시절 엄격한 훈육 방식으로 "식초 같은 조"(Vinegar Joeeng)라는 별명을 얻었다.
1910년, 위니프레드 앨리슨 스미스(Winifred Allison Smith, 1889–1972)와 결혼하여[7] 다섯 자녀를 두었다. 자녀 중에는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조지프 워렌 스틸웰 주니어 준장(웨스트포인트 1933년 졸업)도 있다.[8]
2. 2. 초기 군 경력
플로리다주 팔라트카 태생으로, 의사였던 아버지의 권유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학창 시절 운동과 어학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으며, 1904년 6월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필리핀(1904년 10월, 1911년 1월, 1911년 12월~1912년 1월), 과테말라(1907년), 멕시코(1908년) 등지에서 복무했으며, 1910년 10월 결혼했다. 일본(1911년 9월), 상하이(1911년 11월) 등을 방문하기도 했다.
1913년부터 웨스트포인트에서 영어·역사부 교관으로, 1914년부터는 스페인어·근대어부 교관으로 근무했으며, 마드리드에 파견되기도 했다. 이후 사관학교 교관을 거쳐 참모학교를 수료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7년 8월 버지니아주 캠프 리의 제80사단 부속 여단 부관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12월 프랑스에 파견되어 유럽 파견 미국군(AEF) 참모 장교로서 첩보 활동을 수행했다. 제4군단의 정보 장교로서 생미히엘 전투 작전 계획 수립을 도왔으며, 베르됭 전투, 솜므 전투 등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전투에서의 용맹을 인정받아 무공훈장을 받았으며, 프랑스에서의 공로로 육군 공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훈장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미국 대통령은 1918년 7월 9일 의회 법령에 의해 권한을 부여받아 제1차 세계 대전 중 매우 책임감 있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미국 정부에 탁월하고 뛰어난 공로를 세운 육군 중령(보병) 조지프 워렌 스틸웰(ASN: 0-1912)에게 육군 공로 훈장을 수여하는 것을 기뻐한다. 생미히엘 공세 중, 그리고 나중에 보브르 작전 중 제4군단 G-2 참모장 보좌관으로서 스틸웰 중령은 고도의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는 큰 에너지와 열정으로 군단 전선의 적 활동 전개를 추적하여 작전 계획에 크게 도움이 되는 귀중한 정보를 확보했다. 그는 그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함으로써 작전의 성공에 기여했다."[9]
전쟁 후인 1919년 8월, 미국 전쟁성 군사 첩보부(MID)의 중국 파견 어학 장교로 임명되어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1년간 중국어를 배웠다. 1920년부터 1921년까지 산시성에서 도로 건설 기술 책임자로 일했으며, 1922년 9월에는 만주의 봉천, 하얼빈 및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관련 첩보 활동을 수행했다.[125]
1923년에는 조지아주 포트 베닝에서 보병 전문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기지 사령관의 선임 참모 보좌를 맡았다. 1925년에는 캔자스주 포트 리번워스의 지휘참모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1926년 8월 톈진의 보병 제15연대 대대장으로 부임했으며, 1928년 1월에는 같은 연대의 참모부 참모 차장을 역임했다. 이 기간 중인 1927년 9월에는 조선과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1929년 4월 미국으로 귀국하여 같은 해 7월부터 포트 베닝 보병 학교의 전술 부장으로 근무했다. 1933년 5월에는 샌디에이고에서 제9군단 관구 예비역 장교대 훈련을 담당했다.
스틸웰은 엄격한 훈육 방식으로 유명했으며, 특히 포트 베닝 시절 야외 훈련 중 병사들의 수행 능력에 대해 가혹한 비판을 자주 하여 "식초 조(Vinegar Joe)"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신랄한 비판에 불만을 품은 부하가 식초 병에서 스틸웰이 솟아오르는 캐리커처를 그린 것에서 유래했다. 스틸웰은 이 캐리커처를 발견하고 게시판에 붙인 뒤 사진으로 찍어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10] 그는 책상 위에 ''Illegitimi non carborundum''이라는 모토를 두었는데, 이는 파편화된 라틴어로 "그 빌어먹을 놈들에게 너를 갈아먹게 내버려 두지 마라"는 의미이다.[11]
연도 | 주요 경력 |
---|---|
1883년 3월 19일 | 플로리다주 팔라카에서 출생 |
1904년 6월 |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졸업 |
1904년 10월 | 필리핀 파견 |
1907년 | 과테말라 파견 |
1908년 | 멕시코 파견 |
1910년 10월 | 결혼 |
1911년 1월 | 필리핀 파견 |
1913년 | 웨스트포인트 영어·역사부 교관 |
1914년 | 웨스트포인트 스페인어·근대어부 교관, 마드리드 파견 |
1917년 8월 | 버지니아주 캠프 리 제80사단 부속 여단 부관 |
1917년 12월 | 프랑스 파견, 유럽 파견 미국군(AEF) 참모 장교 (첩보 활동,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9년 8월 | 중국 파견 어학 장교 임명,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중국어 수강 |
1920년-1921년 | 산시성 도로 건설 기술 책임자 |
1922년 9월 | 일본군 시베리아 출병 관련 첩보 활동 (만주, 블라디보스토크) |
1923년 | 조지아주 포트 베닝 보병 전문 교육 이수, 기지 사령관 선임 참모 보좌 |
1925년 | 캔자스주 포트 리번워스 지휘참모대학 졸업 |
1926년 8월 | 톈진 보병 제15연대 대대장 |
1927년 9월 | 조선·일본 방문 |
1928년 1월 | 톈진 보병 제15연대 참모부 참모 차장 |
1929년 4월 | 미국 귀국 |
1929년 7월 | 조지아주 포트 베닝 보병 학교 전술 부장 |
1933년 5월 | 샌디에이고 제9군단 관구 예비역 장교대 훈련 |
2. 3.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미국 육군 내에서 중국어에 능통한 중국 전문가로 인정받던 스틸웰의 경력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1940년 조지 마셜에 의해 제7보병사단장으로 진급했고, 1941년에는 제3군단장이 되었다. 그는 당시 미국의 야전 지휘관 중 가장 유능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아 나치 독일에 대항하는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그의 중국 전문성을 높이 산 루스벨트 대통령의 결정으로 1942년 2월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의 참모장 겸 중국-버마-인도 전구(CBI)의 미군 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CBI 전구는 지리적으로 광활했으며, 맥아더나 아이젠하워가 지휘한 전역과 비슷한 중요성을 지녔다. 스틸웰은 중화민국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에 머물며 일본군에 맞서는 연합군 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미군 지휘관으로서 영국군, 중국군과의 복잡한 관계, 험난한 지형과 악천후, 부족한 보급 등 여러 악조건 속에서 전선을 이끌어야 했다. 그는 직접 인도 뉴델리를 방문하여 미군, 영국군, 중국군, 프랑스군의 연합 사령부를 조직하고, 중국군 부대를 직접 지휘하며 미얀마(버마) 전선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일부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또한 인도에서 중국으로 이어지는 육상 보급로인 레도 공로 건설을 강력히 추진했다.
하지만 스틸웰의 재임 기간은 연합군 내부의 끊임없는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장제스 총통과 중국군 지휘권을 놓고 심각한 대립을 겪었으며,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비효율성을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또한, '영국인 혐오' 성향으로 인해 영국군 지휘관들과도 잦은 마찰을 빚었으며, 공군력을 중시한 클레어 셰놀트 장군과도 전략적 견해 차이로 갈등했다. 이러한 갈등은 CBI 전구의 효과적인 작전 수행에 큰 걸림돌이 되었고, 특히 장제스와의 관계 악화는 결국 1944년 10월 스틸웰의 해임으로 이어졌다. 해임 직전인 1944년 8월, 그는 대장으로 진급했다.
중국에서 해임된 후, 스틸웰은 1945년 1월 육군 지상군 사령관으로 잠시 보직되었다가, 같은 해 6월 오키나와 전투 막바지에 전사한 사이먼 B. 버크너 주니어 중장의 후임으로 제10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종전까지 오키나와 주둔 미군을 지휘했다. 종전 후에는 서부 방위군 사령관, 제6군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2. 3. 1. 중국-버마-인도 전구 사령관
프랑스어에 유창했던 그는 틈틈이 중국어를 익혀 미국 육군 내에서 중국 전문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1940년 조지 마셜에 의해 제7보병사단장으로 진급했고, 1941년에는 제3군단장이 되었다. 당시 미국 야전 지휘관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아 나치 독일에 대항하는 북아프리카 전선에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중국어에 능통한 중국 전문가라는 점 때문에 장제스 총통의 참모장으로 파견되었다.그는 중화민국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에 머물면서, 일본군에 맞서는 중국-버마-인도 전구(CBI)를 지휘했다. 이는 맥아더나 아이젠하워가 맡았던 전역과 비슷한 비중을 가진 것이었다. 미군 지휘관으로서 그는 영국 및 중국 측과의 마찰, 험난한 지형과 기후 등 여러 악조건 속에서 인도-버마-중국 전선을 이끌었다. 직접 인도 뉴델리를 방문하여 미군, 영국군, 중국군, 프랑스군의 연합 사령부를 세웠고, 중국군 보병사단을 지휘하며 미얀마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스틸웰은 인종차별주의적인 면모를 보이며 중국을 혐오했고, 장제스에게 지속적으로 중국군 전체의 지휘권을 넘기라는 등 무리한 요구를 했다. 장제스가 이를 거부하자, 스틸웰은 미국 본국에 장제스와 중화민국에 대한 부정적인 보고를 하여 미국의 지원이 줄어드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또한, 중국 방면의 일본군을 과소평가하여 중국군의 정예 예비대인 X군을 자신의 담당 전선인 버마로 무단으로 이동시켰다. 이는 이후 일본군의 대륙 타통 작전에서 중화민국군이 크게 패배하는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독단적이고 무능한 모습 때문에 결국 1944년 장제스에 의해 해임되었다.
스틸웰은 1942년 보고서에서 장제스가 무능하며 항일전에 군대를 사용할 의지가 없다고 평가했다. 그는 버마와 인도로 거점을 옮겨 원조 루트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 중국 대륙으로 진격하여 미국 장교단이 지휘하는 수백만 명의 중국 병력으로 일본을 몰아낸다는 구상을 했다. 이를 위해 장제스에게 중국 육군 여러 사단을 자신에게 보내 훈련을 맡기도록 요구했고, 그 결과 미군식 장비와 훈련을 받은 중국군 부대가 편성되었다. 그러나 이 구상은 장제스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충돌하여 둘 사이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스틸웰은 장제스를 '피넛(쓸모없는 녀석)'이라고 부르며 경멸했고, 장제스 역시 스틸웰이 훈련시킨 군대가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을 우려했다. 스틸웰의 지휘 아래 재편된 20만 명의 미군식 중국군은 라맹·텅웨 전투와 미트키나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는 성과를 올렸으나, 정작 장제스의 직속 부대는 일본군의 대륙 타통 작전에 의해 참패를 당했다.
1943년에는 찰스 윈게이트, 윌리엄 슬림 장군과 함께 미얀마 전선을 탈환 작전을 벌여 임팔과 코히마를 수복했다. 프랭크 메릴 장군도 이 작전에 참여하여 일본군 제18사단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으나, 윈게이트 장군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면서 작전은 중단되었다. 같은 해 5월, 제3차 워싱턴 회담에서 중국 기지를 활용한 미 공군의 작전이 논의되자, 스틸웰은 둘리틀 공습 이후 일본이 보복 공격을 감행했던 사례를 들며 일본군이 대규모 지상 및 공중 작전으로 반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또한 미군 장비를 갖춘 중국군 50개 사단과 중국 주둔 공군의 강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22] 8월 퀘벡 회담에서는 B-29 폭격기를 이용한 대일 폭격 계획(세팅 선 계획)이 제안되었으나, 스틸웰은 병참 지원의 어려움을 이유로 반대하며 구이린-창사 지역을 전진 기지로, 캘커타를 주둔 비행장으로 하는 트와일라잇 계획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 제안은 수정되어 청두를 전진 기지로 삼는 마터호른 작전으로 발전했다.[123][124]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 참석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스틸웰은 중국 국민당 정부가 다음 일본군의 공격을 받으면 붕괴할 것이며, 중국 본토에서의 미군 공습 작전은 일본 육군의 맹렬한 반격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루스벨트와 달리 중국 국민당 군대의 부패와 취약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인도에 주둔하는 동안 스틸웰은 영국군에 대한 환멸감을 자주 드러냈으며, 그들의 행동을 소극적이거나 비겁하다고 비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영국군 특수부대인 친디트 부대와의 관계에서 갈등이 두드러졌다. 친디트 부대 사상자의 90%는 스틸웰의 직접 지휘 하에 있던 1944년 5월 17일 이후 캠페인 마지막 단계에서 발생했다.[27] 영국 측은 마이클 캘버트가 지휘하는 제77 여단이 중화기 부족에도 불구하고 6월 6일부터 27일까지 모가웅을 점령했으며, 이 과정에서 여단 병력의 절반인 8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반박했다.[45] 스틸웰이 BBC를 통해 중국군이 모가웅을 점령했다고 발표하면서 영국군의 기여를 언급하지 않자, 캘버트를 비롯한 영국군은 격분했다. 캘버트는 스틸웰 본부에 "중국군이 모가웅을 점령했다고 보고했다. 우리 여단은 현재 분개하고 있다(Umbrageeng)"는 전문을 보냈다. 스틸웰의 정보 장교였던 아들은 'Umbrage'라는 지명을 지도에서 찾을 수 없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45] 이후 스틸웰은 제77 여단이 미치나 포위 작전에 합류하기를 기대했지만, 과도한 요구라고 판단한 캘버트는 무전기를 끄고 철수했다. 군사 재판까지 거론될 정도로 갈등이 심화되었으나, 직접 만난 자리에서 스틸웰은 친디트 부대가 처한 열악한 상황을 이해하고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참모 장교에게 책임을 돌리며 사과했다. 그는 캘버트에게 "당신과 당신의 부하들이 훌륭한 일을 해냈다. 축하한다"고 말하며 실버 스타를 포함한 여러 훈장을 수여했다.[45]
제111 여단 역시 휴식 후 '2171 고지' 점령 명령을 받았으나, 임무 완수 후 병사들은 극도로 지쳐 있었다. 대부분이 말라리아, 이질, 영양실조에 시달렸고, 7월 8일 의무 검진 결과 2200명 중 119명만이 전투 가능 판정을 받았다. 결국 여단은 철수했지만, 일부 건강한 병사들은 "제111 중대"라는 조롱 섞인 이름으로 8월 1일까지 현장에 남겨졌다. 이라와디 강 동쪽에서 활동하던 제111 여단의 다른 부대(모리스 부대)는 수개월간 바모에서 미치나까지 일본군의 보급선을 방해했지만, 미치나 포위 완료에는 실패했다. 스틸웰은 이에 분노했지만, 슬림 장군은 스틸웰 휘하의 중국군 5,500명도 같은 임무에 실패했음을 지적했다. 결국 모리스 부대도 병력이 25명으로 줄어들어 철수했다. 미 육군 장교 찰턴 오그번 주니어와 친디트 여단 지휘관 존 마스터스, 마이클 캘버트 등은 스틸웰이 부하 장교와 병사들을 "비겁하다"고 비난하도록 참모 장교를 특별히 임명했다고 회고했다.[46] 1943년 10월, 인도 GHQ의 합동 계획 참모부가 스틸웰의 중국군 북부 버마 수송 계획을 거부하자, 아치볼드 웨이벌 야전사령관은 스틸웰에게 군사적 이유만으로 계획이 실패할 것이라는 점을 납득했는지 물었다. 스틸웰은 그렇다고 답하면서도, 장제스에게는 "영국인들은 싸우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하겠다고 답했다.[47]
1944년 대륙 타통 작전 중 헝양 회전 당시 스틸웰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두 번이나 자살을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이러한 갈등과 문제들로 인해 1944년 10월, 스틸웰은 중국·버마·인도 전구 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2. 3. 2. 버마에서의 후퇴와 공세
1942년 2월, 중장으로 진급한 스틸웰은 중국-버마-인도 전구(CBI)에 배속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세 가지 주요 역할을 맡았다. 첫째는 중국, 버마, 인도 주둔 미군 사령관, 둘째는 루이 마운트배튼 제독 휘하 버마-인도 전구 부사령관, 셋째는 중화민국 국군 최고 사령관이자 중국 전구 사령관인 장제스 총통의 군사 고문이었다. CBI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나 더글러스 맥아더의 사령부와 비슷한 규모의 지리적 행정 사령부였으나, 공식적인 "작전 전구"는 아니었다. 중국 전구는 장제스의 작전 지휘 아래 있었고, 버마-인도 전구는 영국군(초기에는 인도 육군 본부, 이후 연합군 동남아시아 사령부)의 작전 지휘 아래 있었으며, 최고 사령관은 마운트배튼이었다. 스틸웰은 재임 기간 동안 전구에 미국 전투 부대가 거의 없었고, 주로 중국군을 지휘했다.[14]그러나 스틸웰은 중국을 혐오하는 인종차별주의적 시각을 가졌으며, 장제스에게 지속적으로 중국군 전체 지휘권을 요구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했다. 이를 거부하는 장제스에 대해 본국인 미국에 부정적인 보고를 하여 중화민국으로 가는 미국의 지원을 줄이는 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 또한, 중국 방면의 일본군을 경시하고 중국군의 정예 예비대인 X군을 자신의 전선인 버마로 임의로 이동시켜, 이후 대륙타통작전에서 중화민국군이 패배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결국 1944년 장제스에 의해 해임되었다.
전선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영국군과 중국군은 장비가 부족했고, 일본군의 공세에 수세적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제스는 일본과의 장기전 및 이후 예상되는 공산군과의 내전을 대비해 병력과 연합국의 렌드리스 보급품을 아끼려 했다. 특히 일본의 버마 침공 당시 연합군의 무력한 모습을 본 후 더욱 신중해졌다.[15][16] 이미 5년간 일본과 싸워온 국민 정부 내에서는 연합군이 전쟁에서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다.[17]
연합군 내부의 전략 차이도 문제였다. 1937년부터 일본과 싸워온 장제스는 광대한 영토를 이용한 "종심 방어"를 선호했지만, 스틸웰은 버마를 되찾기 위해 즉각적인 공세를 원했다. 그러나 버마의 일본군은 정글 전투에 능숙했고, 도로에 의존하는 영국군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며 제공권 우위와 지역 주민들의 반식민 감정을 활용했다.[18] 소통 부재와 명령 불복종 사례도 발생했다. 1942년 2월 시타웅 강 철수 중 영국군은 다리를 너무 일찍 폭파하여 2개 여단을 강 건너편에 남겨두는 실수를 저질렀다. 피인마나에서 일본군에게 매복당했을 때는 중국 제5군만 제자리를 지켰고, 영국군은 포위를 우려해 후퇴했으며, 중국군 제200사단은 돌격을 거부했다.[19]
스틸웰은 중국군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으나[20], 이는 장제스의 권력 기반을 이루는 군사 및 정치적 동맹 구조와 충돌했다. 군 개혁은 장제스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는 인물들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21] 장제스는 스틸웰에게 일부 중국 부대에 대한 제한적인 지휘권만 부여했는데, 이는 미국 주도의 새로운 부대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독립적인 세력이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16] 1942년부터 장제스의 참모들은 중국군이 버마 전선에서 싸우는 것에 지속적으로 반대했는데, 이는 영국의 식민 통치를 돕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15][16] 결국 장제스는 클레어 리 셰놀트 소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기존 중국군과 공군력을 중심으로 일본과 싸우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이로 인해 스틸웰과 셰놀트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험프") 인도로부터 들어오는 귀중한 렌드리스 보급품 확보를 놓고 경쟁하게 되었다.[22] 조지 마셜은 스틸웰이 어떤 전구 사령관보다도 "가장 어려운" 임무를 맡았다고 평가했다.[23]

1942년 5월, 버마 전선에서 연합군의 방어가 무너지자 스틸웰은 117명의 참모진과 함께 버마에서 인도 아삼까지 걸어서 후퇴했다. 이는 "스틸웰 보폭"이라 불리는 분당 105보의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24][25] 이 험난한 철수 과정에서 약 10만 명의 중국군 중 2만 5천 명이 정글 환경, 보급 부족, 일본군의 공격으로 사망했다.[26] 인도에 도착한 스틸웰은 낡은 야전모와 계급장 없는 군복 차림으로 군대의 형식적인 면을 무시하는 태도로 유명해졌다. 그는 권총 대신 M1903 스프링필드 소총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 버마에서의 패배에 대해 "우리가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버마에서 쫓겨났고, 그것은 지옥처럼 굴욕적이다. 원인을 찾아 다시 돌아가 되찾아야 한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미국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25] 그러나 영국군을 '"라임이"(Limeys)'라 부르며 비효율성을 비난하는 그의 발언은 영국 지휘관들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27]

일본의 버마 점령으로 중국은 험프를 통한 공중 보급 외에는 모든 보급로가 차단되었다. 초기 연합군 전략은 중국의 항전 의지를 유지하기 위해 물자와 공중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었으나, 버마 함락으로 이는 큰 위기에 처했다. 스틸웰은 1942년 8월, 인도 람가르 칸토멘트에 훈련 센터를 열어 버마에서 철수한 중국군을 재훈련시켰다. 이곳에서 약 32,000명의 중국군이 미군식 훈련과 장비를 받고 제22사단, 제38사단 등으로 재편성되었다.[28] 스틸웰의 주요 목표는 북부 버마를 탈환하여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이어지는 육상 보급로(레도 공로)를 확보하고, 잘 훈련된 중국군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싸우는 것이었다.[16][29] 그러나 험프를 통한 보급량은 셰놀트의 공군 작전 유지와 중국군의 손실 보충에도 벅찼으며, 다른 전선의 긴급 상황으로 인해 CBI로 향할 보급품이 전용되기도 했다.[16][29] 일부 보급품은 암시장을 통해 유용되기도 했다.[30]
1943년, 스틸웰은 찰스 윈게이트, 윌리엄 슬림 장군과 협력하여 미얀마 전선 탈환 작전을 시작했고, 임팔과 코히마를 수복하려 했다. 프랭크 메릴 장군도 합류하여 일본군 제18사단을 공격해 승리하기도 했으나, 윈게이트 장군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면서 작전은 차질을 빚었다.
1943년 8월 동남아시아 사령부가 창설되자 스틸웰은 마운트배튼 제독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미 육군 특수부대인 제5307 혼성부대(후일 머릴의 약탈자)를 포함한 중국군과 연합군을 지휘하며 북부 버마 공세를 준비했다. 1943년 12월 21일, 스틸웰은 일본군이 점령한 미치나 탈환을 목표로 하는 북부 버마 침공 작전의 직접 지휘를 맡았다. 그는 프랭크 메릴 장군과 약탈자 부대에게 영국 친디트 부대처럼 일본군 후방으로 침투하는 장거리 정글 작전을 명령했다. 1944년 2월, 약탈자 부대는 버마로 진군했다.[48]

1944년 4월, 스틸웰은 미치나 점령을 위한 최종 공세를 시작했다. 약탈자 부대는 도시로 향하는 약 104.61km의 험난한 정글 행군을 포함한 측면 기동을 명령받았다. 이미 2월부터 전투에 투입되어 심각한 손실과 질병(특히 아메바성 이질)에 시달리던 약탈자들은[49] 스틸웰의 지휘에 강한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50] 스틸웰은 병사들의 희생에 무관심해 보였고, 훈장 수여 요청을 거부했으며, 휴식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51][56][52]
5월 17일, 남은 1,310명의 약탈자는 중국군 2개 연대와 협력하여 미치나 비행장을 공격해 빠르게 점령했다.[53][54] 그러나 스틸웰 정보 참모들의 예상과 달리 미치나 시내는 상당수의 일본군이 방어하고 있었고[55], 계속 증원되고 있었다.[56] 초기 중국군의 공격은 큰 손실을 내고 격퇴되었다.[56][57] 약탈자 부대만으로는 도시를 점령할 병력이 부족했고, 증원군이 도착할 무렵 일본군 수비대는 약 4,600명으로 늘어났다.[57][53][54]
미치나 공방전 동안 약탈자 부대의 부사령관 찰스 뉴턴 헌터 대령과 군의관들은 부대 전체의 후방 교체를 강력히 건의했다. 당시 병사 대부분은 고열과 이질에 시달려 전투 중 용변을 봐야 할 정도였다.[58][59] 스틸웰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의료진에게 질병으로 후송된 병사들을 약물로 열을 낮춰 다시 전선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60] 스틸웰에 대한 불만은 극에 달해, 한 병사는 "그[스틸웰]를 조준했다. 내가 한 발 쐈다면 아무도 그가 그 개자식을 죽인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58] 스틸웰은 부상이나 질병으로 후송된 모든 약탈자들이 자신의 참모가 지정한 의사에게 특별 검사를 받도록 지시했고, 체온이 39.4°C 미만이면 복귀시켰다.[58] 이 과정에서 많은 병사들이 부적합 판정을 받고 다시 후송되는 혼란이 발생했다. 스틸웰 참모들은 나중에 의료진이 명령을 잘못 해석했다고 책임을 돌렸다.[61]
일본군은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스틸웰이 수천 명의 중국군 증원군을 투입한 끝에 1944년 8월 4일 미치나는 함락되었다. 스틸웰은 목표 달성에 기뻐하며 일기에 "이것은 영국인들을 불태울 것이다!"라고 적었다.[62] 그는 공방전 지연의 책임을 영국군과 구르카 친디트 부대가 자신의 요구에 신속히 응하지 않은 탓으로 돌리기도 했지만[60], 스틸웰 자신도 영국군과의 작전 조율에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스틸웰은 유일한 미군 지상 부대인 약탈자를 철수시키면 특혜 시비가 일고 다른 연합군 부대도 철수시켜야 할 것을 우려하여, 그들을 계속 전투에 투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52] 그는 자신의 도보 철수 경험 때문에 장기간 정글 전투를 치른 병사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했고, 부하 지휘관들이 병사들의 어려움을 과장한다고 여겼다.[63] 미치나 함락 일주일 후, 약탈자 부대는 원래 2,997명 중 전투 가능 인원이 130명으로 줄어든 채 해산되었다. 미치나 공방전과 스틸웰의 지휘에 대한 논란은 육군 감찰 조사와 의회 청문회로 이어졌으나, 스틸웰에 대한 징계 조치는 내려지지 않았다.[65]
2. 3. 3. 장제스와의 갈등
중화민국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에 상주하면서, 일본군에 대항하는 중국-버마-인도 전구(CBI) 사령관을 맡았다. 이는 맥아더나 아이젠하워와 비슷한 비중의 전구를 지휘한 것이었다. 그는 미군 지휘관으로서 영국과 중국 측과의 마찰, 험난한 지형과 기후와 같은 악조건 속에서 인도-버마-중국 전선을 이끌었다. 직접 인도 뉴델리를 방문해 미군, 영국군, 중국군, 프랑스군의 연합 사령부를 세웠고, 중국군 보병사단을 지휘하며 미얀마(버마) 전선에서 일부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그러나 스틸웰은 중국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졌고, 장제스에게 지속적으로 중국군 전체 지휘권을 요구하는 등 무리한 주장을 펼쳤다. 장제스가 이를 거부하자, 스틸웰은 미국 본국에 장제스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보고를 하여 중화민국으로 향하는 미국의 지원을 줄이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중국 방면의 일본군을 과소평가하고 중국군의 정예 예비대인 X군을 자신의 담당 전선인 버마로 임의로 이동시켰다. 이는 이후 일본군의 대륙타통작전에서 중화민국군이 큰 패배를 겪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으며, 군사 고문으로서 그의 역할에 대한 비판을 낳았다. 결국 이러한 갈등과 문제로 인해 1944년 장제스에 의해 해임되었다.

1942년 버마 전선에서 중국군이 패배하자 스틸웰은 부대를 떠나 탈출했다. 장제스는 형식적으로 스틸웰에게 중국군 부대 지휘를 맡겼지만, 실제 중국 장군들은 스틸웰을 '고문' 정도로 여기고 때로는 장제스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기도 했다.[31] 특히 장제스는 스틸웰이 자신의 명령 없이 최정예 부대 중 하나인 제200사단을 위험에 빠뜨리고 사실상 버렸다고 판단하여 크게 분노했고, 이때부터 군 지휘관으로서 스틸웰의 능력과 판단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32]
장제스는 또한 미국이 제공하는 차관(렌드리스) 물자에 대한 스틸웰의 엄격한 통제에도 불만을 가졌다. 버마에서의 연합군 패배 이후 마셜과 루스벨트 대통령이 장제스에게 스틸웰의 지휘 능력에 대한 평가를 요청했을 때, 장제스는 직접적인 비판 대신 스틸웰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믿음"을 표명했다.[33] 하지만 실제로는 참모장 자격으로 스틸웰이 중국 부대에 내린 일부 명령을 무효화하기도 했다.
이에 격분한 스틸웰은 자신의 보고서나 일기에서 장제스를 "땅콩(Peanut)" 또는 "꼬마 멍청이(little dummy)"와 같은 경멸적인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34] "땅콩"이라는 별명은 원래 공식 무선 통신에서 장제스를 지칭하는 암호명이었으나[35], 스틸웰의 참모였던 윌라드 와이먼 대령이 장제스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며 사용한 표현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36] 반대로 장제스 역시 스틸웰의 "무모함, 불복종, 경멸적인 태도, 오만함"에 대해 중국 주재 미국 특사에게 반복적으로 불만을 표출했으며, 특히 중국 동부 전선이 일본군에게 위협받는 상황에서 스틸웰이 버마 전선에서의 공세에만 집착하는 것에 분노했다.[37][38]
스틸웰은 장제스 정권 내부에 만연한 부패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일기를 꾸준히 기록하며 부패 사례와 장제스 정부에 의해 낭비되는 미국의 지원 금액(1944년 기준 약 3.80584억달러)을 상세히 기록했다. 예를 들어, 《케임브리지 중국사》는 당시 국민당 군대에 징집된 병사 중 60~70%가 기초 훈련을 통과하지 못했고, 40%는 탈영했으며, 나머지 20%는 제대로 군 복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굶주림 등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현실을 목격하며 장제스와 그의 장군들이 무능하고 부패했다는 스틸웰의 확신은 더욱 깊어졌고, 그는 중국에 대한 차관 지원을 중단시키려 시도했다.[39] 심지어 스틸웰은 카이로 회담 기간 중 장제스 암살 계획을 세우라는 구두 명령을 받았고, 이를 보좌관인 프랭크 돈 대령과 논의하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당혹스러워했지만 스틸웰은 임무를 돈 대령에게 맡겼다. 계획은 수립되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40]
스틸웰은 장제스와 영국 측에 버마를 탈환하기 위한 즉각적인 군사 행동을 계속 압박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공세 시작 조건으로 과도한 양의 군수 물자 지원을 요구했고, 영국은 처칠의 "유럽 우선" 전략 때문에 버마 전선에 해군 및 지상군을 투입하겠다는 이전의 약속을 이행하기를 꺼렸다.[41]
결국 스틸웰은 장제스가 미국의 군사 원조 물자를 일본과의 전쟁에 사용하지 않고, 전쟁이 끝난 후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군과의 내전에 대비하기 위해 비축하고 있다고 루스벨트에게 공개적으로 불평하기 시작했다.[42] (그러나 실제로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미국 군사 원조의 98%가 험프를 통해 미 제14공군과 중국 주둔 미군에게 직접 전달되었다.)[43]
스틸웰은 영국의 인도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아치볼드 웨이벌 원수와도 끊임없이 충돌했다. 그는 인도에 있는 영국인들이 중국의 항일 전쟁을 돕는 것보다 자신들의 식민지 영토를 보호하는 데 더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미국, 영국, 중국 사령부 간의 계속되는 갈등과 목표 불일치, 그리고 CBI 전구에 대한 일관된 전략 부재로 인해, 1943년 8월 연합군 합동참모본부는 CBI 사령부를 중국 전선과 동남아시아 전선으로 분리하기로 결정했다.
1944년 1월, 동남아시아 전선 사령관이 된 마운트배튼이 벵골만과 수마트라에서의 상륙 작전을 선호하며 기존 계획 변경을 시도하자 스틸웰은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그는 일기에 "영국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적으며, 마운트배튼의 계획이 "멋진 도표, 거짓된 수치, 더러운 의도"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그는 보트너 준장을 워싱턴으로 보내 합동참모본부와 루스벨트에게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도록 했다.[44]
이치고 작전(Operation Ichi-Go)으로 알려진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에 대한 연합군의 대응 노력은 체너울트 장군과 스틸웰 간의 의견 불일치로 인해 부분적으로 차질을 빚었다.[73] 스틸웰은 또한 일본군에게 포위된 도시 구이린의 방어 문제를 놓고 장제스와 다시 충돌했다.[74] 장제스는 구이린을 끝까지 사수하기를 원했지만, 스틸웰은 전략적으로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50] 스틸웰은 일기에 "그들이 해야 할 일은 G-mo[장제스]와 Ho[허잉친 장군] 그리고 나머지 무리를 총살하는 것이다."라고 적을 정도로 격앙된 감정을 드러냈다.[74] 그는 미군에게 구이린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했고, 결국 장제스도 마지못해 구이린 포기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75] 구이린을 둘러싼 갈등은 곧이어 더 큰 충돌로 이어졌다. 일본군의 진격에 위협받던 윈난성의 수도 쿤밍을 방어하기 위해 장제스가 버마 전선에 투입된 Y군을 즉시 소환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75] 스틸웰은 장제스와의 만남 후 일기에 그를 "머리로 히코리 너트를 사용하는 미친 놈... 평소의 엉터리 이유와 어리석은 전술 및 전략 개념. 그는 불가능하다!"라고 격하게 비난했다.[75]
장제스와의 갈등이 극에 달하자 스틸웰은 직접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루스벨트는 장제스에게 다음과 같은 강력한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최근 몇 달 동안 중국과 당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재앙에 저항하기 위해 과감한 조치를 취하라고 거듭 촉구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아직 스틸웰 장군을 중국의 모든 병력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중요한 지역의 손실에 직면해 있습니다...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75] 루스벨트는 장제스에게 "즉시" 스틸웰에게 "모든 병력에 대한 무제한 지휘권"을 부여하지 않으면 모든 미국의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최후통첩으로 메시지를 마무리했다.[76][77]
체너울트는 나중에 스틸웰이 장제스로 하여금 군 지휘권을 자신에게 넘기도록 압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구이린 철수 명령을 내려 위기 상황을 조장했다고 주장했다.[78] 스틸웰의 일기에도 위기가 "배를 완전히 망가뜨리지 않고 땅콩(장제스)을 제거하기에 충분하다면 가치가 있을 것"이며, 국민당 시스템 전체가 "산산조각" 나고 장제스는 물러나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체너울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듯 보인다.[78]
스틸웰은 루스벨트의 특별 특사였던 패트릭 J. 헐리가 메시지 전달을 늦추고 장제스에게 좀 더 외교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장제스에게 루스벨트의 편지를 전달했다.[80] 그는 이 순간을 일기에 "나는 이 한 묶음의 파프리카를 땅콩에게 건네주고 한숨을 쉬며 뒤로 물러났다. 작살은 그 작은 녀석의 명치에 정확히 박혔고 그를 관통했다. 깨끗한 타격이었지만, 초록색으로 변하고 말을 잃는 것 외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했다.[78] 스틸웰은 또한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나는 복수를 오랫동안 기다렸고, / 마침내 기회를 잡았다네. / 땅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 바지를 걷어찼지. (...) 나의 모든 지루한 전투에서, / 나의 모든 슬픔의 시간에서, / 마침내 내가 승리했고 / 땅콩을 쓰러뜨렸다네. (...) 아! 축복받은 기쁨! / 나는 땅콩의 얼굴을 망가뜨렸다네."[79]
장제스는 루스벨트의 최후통첩을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완전한 예속을 요구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그는 스틸웰을 즉시 교체해야 하며, 그의 후임으로는 다른 유능한 미군 장군을 환영할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답했다.[82][83] 장제스는 루스벨트의 편지를 "내 생애 가장 큰 굴욕"이라고 불렀으며, "미국이
2. 3. 4. 영국군과의 관계
중국-버마-인도 전구(CBI)에서 미군을 지휘하면서 스틸웰은 영국군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그는 '영국인 혐오' 성향이 강해 영국군과 자주 대립했다. 그는 미군, 영국군, 중국군, 프랑스군의 연합 사령부를 인도 뉴델리에 세우고 작전을 지휘했지만, 영국 측과의 갈등은 지속되었다.스틸웰은 장제스와 영국에게 버마를 재탈환하기 위한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압박했다. 그러나 영국은 처칠의 '유럽 우선' 전략을 이유로 해군 및 지상군 지원에 대한 이전의 약속을 이행하기를 거부했다.[41] 스틸웰은 이러한 영국의 태도에 불만을 품었으며, 특히 인도 주둔 영국군이 중국의 항일 전쟁 지원보다는 자신들의 식민지 영토 보호에 더 관심이 있다고 여겼다. 그는 당시 인도 주둔 영국군 총사령관이었던 아치볼드 웨이벌 원수와 끊임없이 충돌했다.
1943년 10월, 웨이벌 원수가 특정 작전 계획이 군사적으로 실행 불가능하다는 데 동의하는지 물었을 때, 스틸웰은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나 장제스에게는 어떻게 보고할 것이냐는 웨이벌의 질문에 스틸웰은 "영국인들은 싸우지 않을 겁니다"라고 답할 것이라고 말했다.[47] 이는 영국군에 대한 그의 깊은 불신과 편견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1944년 1월에는 동남아시아 연합군 사령관 루이스 마운트배튼 제독이 벵골만과 수마트라에서의 상륙 공격을 선호하며 기존 계획 변경을 시도하자, 스틸웰은 이에 강하게 반박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영국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적으며, 마운트배튼의 계획을 "멋진 차트, 허위 수치, 더러운 의도"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44]
작전 수행 과정에서도 영국군과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인도에 머무는 동안 스틸웰은 영국군의 작전 수행 방식에 점점 더 환멸을 느꼈고, 그들의 행동을 소극적이거나 비겁하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특히 버마 전역에서 활동한 영국 특수부대 친디트와의 관계에서 마찰이 심했다. 친디트 부대 사상자의 90%는 스틸웰의 직접 지휘 하에 있던 1944년 5월 17일 이후 캠페인 마지막 단계에서 발생했다.[27]
모가웅 전투 당시, 마이클 캘버트 소장이 이끄는 영국 제77 인도 보병 여단은 중화기 부족에도 불구하고 격전을 벌여 큰 피해(참여 병력 800명 중 50% 사상)를 입으며 모가웅을 점령했다.[45] 그러나 스틸웰은 BBC 방송을 통해 중국군이 모가웅을 점령했다고 발표하면서 영국군의 기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캘버트 소장을 비롯한 영국군을 격분시켰고, 캘버트는 스틸웰 본부에 항의 전문을 보내기도 했다.[45]
이후 스틸웰은 제77 여단이 미치나 포위 작전에 합류하기를 기대했지만, 캘버트는 부대원들이 극도로 지쳐 전투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명령을 거부하고 부대를 철수시켰다. 이로 인해 군사 재판이 열릴 가능성까지 제기되었으나, 스틸웰이 캘버트와 직접 만난 후 친디트 부대가 처한 혹독한 상황을 이해하고 자신의 참모 장교에게 책임을 물으며 사과했다. 그는 캘버트와 부대원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당신과 당신의 부하들이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축하합니다"라고 말하고, 실버 스타를 포함한 여러 훈장을 수여하며 갈등을 봉합했다.[45]
제111 인도 보병 여단 역시 장기간의 작전으로 말라리아, 이질, 영양실조 등에 시달리며 극심한 손실을 입었다. 의무 검사 결과, 여단 병력 2,200명 중 단 119명만이 전투에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아 결국 철수했다. 미 육군 장교 찰턴 오그번 주니어와 친디트 여단 지휘관이었던 존 마스터스, 마이클 캘버트 등은 스틸웰이 자신의 참모 장교를 시켜 영국군 부대를 방문하게 하여 장병들을 '비겁하다'고 비난하도록 지시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46]
이처럼 미국, 영국, 중국 사령부 간의 끊임없는 불화와 상충하는 목표, 일관된 전략 부재는 중국-버마-인도 전구(CBI) 운영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결국 1943년 8월, 연합 참모부는 비효율적인 지휘 구조를 개편하여 CBI 사령부를 중국 전선과 동남아시아 사령부(SEAC)로 분리하기에 이르렀다.
2. 3. 5. 클레어 셰놀트와의 갈등
전쟁 중 중국-버마-인도 전구에서 발생한 주요 갈등 중 하나는 조지프 스틸웰 장군과 "플라잉 타이거즈"의 지휘관이자 이후 공군 사령관이 된 클레어 셰놀트 장군 사이의 전략적 견해 차이였다. 셰놀트는 중화민국 공군 고문으로서, 1943년 중국 내 전방 공군 기지를 활용한 제한적 공중 공세를 제안했다. 반면 스틸웰은 이러한 구상이 실현 불가능하며, 대규모 지상군으로 방어되는 견고한 공군 기지가 마련되기 전까지는 어떠한 공중 작전도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공군 자원을 인도에 있는 자신의 부대로 돌려 북부 버마를 조기에 점령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29]장제스는 셰놀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영국 사령관들 역시 1943년 당시 가용 자원만으로는 버마에서 연합군 공세를 조율하여 시작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셰놀트의 입장을 지지했다.[29] 1943년 여름, 스틸웰의 사령부는 장제스가 셰놀트의 공중 작전 지원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북부 버마 공세를 위한 중국군 재편 계획에 집중했다. 스틸웰은 일본군에 대한 지상 공세를 통해 북부 버마를 관통하는 보급로를 확보한 뒤, 이를 통해 30개 중국 사단을 현대적인 장비로 무장시키고 훈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일부 중국군은 인도에 배치되어 새로운 사단으로 창설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중국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험프 공수 능력의 한계 때문에 이론에 머물렀다. 제한된 공수 능력은 스틸웰의 지상군 무장 대신 셰놀트의 공중 작전 유지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16]
1944년, 일본군은 중국을 전쟁에서 이탈시키기 위해 대규모 반격 작전인 이치고 작전을 개시했다. 약 50만 명의 병력과 800대의 전차, 그리고 대규모 보급 부대가 투입된 이 작전으로 셰놀트가 구상했던 전방 공군 기지들은 빠르게 점령당했고, 이는 결국 스틸웰의 주장이 옳았음을 뒷받침했다. 이 시기, 험프를 통한 연합군의 항공 보급은 꾸준히 개선되고 있었다. 중국군의 손실을 보충하면서, 셰놀트는 이제 북부 버마에서의 지상 공세를 통해 중국으로 가는 지상 보급로를 다시 열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반면, 증강된 군사 장비와 추가 병력, 그리고 인도 방어에 대한 우려로 인해 영국 당국은 이제 스틸웰의 편을 들게 되었다.[66]
웨이 리황 장군이 이끄는 국민당 중국군의 남부 공세와 협력하여, 스틸웰 휘하의 연합군은 오랫동안 계획했던 북부 버마 침공을 시작했다. 격렬한 전투 끝에 1945년 1월, 양측 군대는 마침내 연결되었다. 스틸웰의 전략은 일관되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지상 보급로를 열어 연합군이 일본에 맞설 새로운 중국 육군 사단을 무장시키고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도로망은 나중에 레도 로드로 명명되었으며, 버마 로드의 북쪽 끝과 연결되어 중국으로 가는 주요 보급로가 될 예정이었다. 스틸웰 참모진은 이 도로를 통해 매달 6.5만ton의 물품을 수송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16]

스틸웰은 이 추정치를 바탕으로 레도 로드가 험프 공수량을 훨씬 능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29] 그러나 셰놀트는 험난한 정글을 통과하는 광범위한 도로망 건설의 어려움을 지적하며, 당시 배치된 현대식 화물 수송기로 공수할 수 있는 물동량에 결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67] 레도 로드 건설은 더디게 진행되었고, 1945년 1월 연합군이 연결된 이후에야 완공될 수 있었다.
결국, 중국 내 30개 사단과 인도 주둔 부대를 활용한 추가 사단 창설 및 현대화라는 스틸웰의 계획은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셰놀트의 예측대로, 레도 로드를 통해 운송된 물품량은 험프를 통해 매달 중국으로 공수되는 보급품 수준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68] 1945년 7월, 험프 공수는 7.1만ton의 물품을 수송한 반면, 레도 로드를 통한 수송량은 6천ton에 불과했으며, 항공 수송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67][69]
레도 로드를 통해 대량의 물품이 운송될 시점에는 이미 다른 전역에서의 작전이 대일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고 있었다.[16] 하지만 스틸웰의 북부 버마 진격은 중요하게 기여했다. 이 작전 덕분에 공수 사령부는 일본 전투기의 위협 없이 더 남쪽의 안전한 항로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미국 비행기가 더 빠르고 안전하게 중국으로 물품을 수송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더 이상 위험한 험프 상공을 비행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보급품 수송량은 1944년 6월 1.8만ton에서 1944년 11월 3.9만ton으로 크게 증가했다.[70] 1945년 8월 1일에는 1분 12초 간격으로 비행기가 험프를 넘나들 정도였다.[71]
스틸웰의 이러한 노력을 인정하여, 장제스는 훗날 레도 로드를 '스틸웰 로드'로 명명했다.[72]
2. 3. 6. 해임
이치고 작전(Operation Ichi-Go)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클레어 리 체너울트와 스틸웰 간의 의견 충돌이 발생하여 작전 수행에 차질이 빚어졌다.[73] 또한 스틸웰은 일본군에게 포위된 도시 구이린의 처리 문제를 놓고 장제스와 격렬하게 대립했다.[74] 장제스는 구이린 사수를 주장했지만, 스틸웰은 구이린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50]스틸웰은 자신의 일기에 장제스와 그의 측근들을 비난하는 내용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그들이 해야 할 일은 G-mo[장제스]와 Ho[허잉친 장군] 그리고 나머지 무리를 총살하는 것이다."라고 적었다.[74] 결국 스틸웰은 미군에게 구이린 철수를 명령했고, 장제스는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였다.[75] 구이린 문제는 더 큰 갈등의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일본군의 진격으로 위협받던 윈난 성의 수도 쿤밍 방어를 위해 장제스가 버마에 파견된 중국군 Y군을 소환하려 하자 스틸웰은 또다시 반대하며 충돌했다.[75] 스틸웰은 장제스와의 만남 후 일기에 그를 "머리로 히코리 너트를 사용하는 미친 놈... 평소의 엉터리 이유와 어리석은 전술 및 전략 개념. 그는 불가능하다!"라고 폄하했다.[75]
장제스와의 갈등이 깊어지자 스틸웰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했다. 루스벨트는 장제스에게 다음과 같은 강압적인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최근 몇 달 동안 중국과 당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재앙에 저항하기 위해 과감한 조치를 취하라고 거듭 촉구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아직 스틸웰 장군을 중국의 모든 병력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중요한 지역의 손실에 직면해 있습니다...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75] 루스벨트는 장제스가 "즉시" 스틸웰에게 "모든 병력에 대한 무제한 지휘권"을 부여하지 않으면 모든 미국의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최후통첩으로 메시지를 마무리했다.[76][77]
체너울트는 훗날 스틸웰이 장제스에게 군 지휘권을 넘겨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위기를 조장하려 중-미 연합군에게 구이린 철수를 명령했다고 주장했다.[78] 스틸웰의 일기 역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위기가 "배를 완전히 망가뜨리지 않고 땅콩(장제스)을 제거하기에 충분하다면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적었으며, 나아가 국민당 체제 전체가 "산산조각" 나야 하고 장제스는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78]
스틸웰은 장제스를 모욕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쓰기도 했다.[79]
> 나는 복수를 오랫동안 기다렸고,
> 마침내 기회를 잡았다네.
> 땅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 바지를 걷어찼지.
>
> 늙은 작살은 준비되었고
> 조준과 타이밍은 정확했지,
> 손잡이까지 박아 넣었네,
> 그리고 그를 꿰뚫었지.
>
> 그 작은 놈은 떨었고,
> 말을 잃었지.
> 그의 얼굴은 초록색으로 변했고 떨렸지
> 그는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애썼지.
>
> 나의 모든 지루한 전투에서,
> 나의 모든 슬픔의 시간에서,
> 마침내 내가 승리했고
> 땅콩을 쓰러뜨렸다네.
>
> 나는 아직 고통을 겪어야 하고,
> 피곤한 경주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네,
> 하지만 아! 축복받은 기쁨!
> 나는 땅콩의 얼굴을 망가뜨렸다네.
> — 1944년 조지프 스틸웰의 시[79]
루스벨트의 특별 특사 패트릭 J. 헐리는 메시지 전달을 늦추고 장제스가 수용할 만한 방식으로 합의를 시도하려 했으나, 스틸웰은 이를 무시하고 즉시 장제스에게 편지를 전달했다.[80] 스틸웰은 이 순간을 일기에 "나는 이 한 묶음의 파프리카를 땅콩에게 건네주고 한숨을 쉬며 뒤로 물러났다. 작살은 그 작은 녀석의 명치에 정확히 박혔고 그를 관통했다. 깨끗한 타격이었지만, 초록색으로 변하고 말을 잃는 것 외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했다.[78] 영국의 언론인 조너선 펜비는 루스벨트의 편지가 실질적인 미국의 개입 의지가 없다면 단순한 허세에 불과했다고 평가했다.[81]
장제스는 스틸웰의 행동과 루스벨트의 편지를 중국에 대한 내정 간섭이자 예속 시도로 간주하고 격분했다. 그는 스틸웰을 즉시 교체할 것을 요구하며, 다른 유능한 미국 장군을 환영하겠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82][83] 장제스는 루스벨트의 편지를 "내 생애 가장 큰 굴욕"이라고 칭하며 미국의 내정 간섭 의도를 비판했다.[84] 그는 헐리에게 중국 국민들이 "스틸웰이 그들에게 쏟아 붓는 모욕에 지쳤다"고 토로했다.[85] 장제스는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연설에서 루스벨트의 편지를 제국주의적 행태로 규정하고, 이를 수용하는 것은 일본의 괴뢰 정권 수장 왕징웨이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 내용은 언론에 유출되었다.[85]
1944년 10월 12일, 헐리는 워싱턴에 스틸웰이 "훌륭한 사람이지만 장제스와 이해하거나 협력할 수 없다"고 보고하며, 그가 계속 지휘를 맡으면 중국 전체가 일본에 넘어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85] 헐리는 이 보고 내용을 스틸웰에게 미리 보여주었고, 스틸웰은 헐리에게 "무딘 칼로 내 목을 베고 있다"고 비난했다.[85]
결국 1944년 10월 19일, 같은 해 8월 1일 4성 장군으로 진급했던 스틸웰은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었다. 버마 전선에서의 미군 사상자 문제와 영국 및 중국 지휘관들과의 끊임없는 마찰로 인해 그의 귀국은 조용히 이루어졌다. 공항에는 두 명의 육군 장군만이 마중 나왔고, 그들은 스틸웰에게 중국에서의 상황에 대해 언론에 발언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스틸웰의 후임으로는 앨버트 C. 웨데마이어 장군이 임명되었다. 웨데마이어는 1944년 10월 27일 중국 전선 사령관으로 부임하라는 조지 마셜의 전보를 받았다. 그는 당시 중국 전선 근무가 군인과 외교관 모두에게 무덤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임명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고 회고했다.[86]
웨데마이어가 스틸웰의 본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스틸웰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하고 아무런 인수인계 자료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났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통상적으로 이임하는 지휘관은 후임자에게 부대 상황, 참모진 평가, 당면 과제, 작전 계획 등에 대해 상세히 브리핑하는 것이 관례였다.[87] 웨데마이어는 사무실을 뒤졌지만 스틸웰의 계획이나 작전에 관한 어떤 기록도 찾을 수 없었다.[87] 스틸웰의 참모들 역시 스틸웰이 모든 정보를 혼자 관리했기 때문에("엉덩이 주머니"에 넣어 다녔다고 표현) 아는 바가 거의 없다고 답했다.[88]
언론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스틸웰은 자신의 해임이나 장제스로부터 받은 대우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평하지 않았다.
2. 4. 전후 활동 및 사망
1944년 장제스와의 불화로 중국 버마 인도 전구 사령관에서 해임되어 앨버트 웨더마이어 장군으로 교체되었다.3개월간의 휴가를 마친 뒤, 1945년 1월 24일 스틸웰은 육군 지상군 사령관 직책을 맡아 펜타곤에서 미국 내 육군 지상 부대의 동원 및 훈련을 총괄 감독했다.
1945년 6월 23일, 오키나와 전투 중 전사한 사이먼 B. 버크너 주니어 중장의 후임으로 제10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당시 제10군은 일본 본토 상륙 작전인 올림픽 작전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일본의 항복 이후 1945년 10월 15일에 해산되었다.
1945년 11월, 스틸웰은 육군의 현대화를 모색하기 위한 "전쟁부 장비 위원회"(War Department Equipment Board)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위원회를 통해 새로운 무기와 장비에 대한 장기간의 실전 시험 수행 및 교리 수립을 위한 합동 병력 창설, 그리고 특수 대전차전 부대의 폐지를 권고했다. 특히 탄도 미사일을 포함한 모든 공중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육군 방어 체계의 대대적인 개선을 주장했으며, 구체적으로 "레이더 탐지 기지에서 얻은 전자적으로 계산된 데이터에 따라 배치되는 탄도탄 요격 미사일"의 필요성을 역설했다.[89]
1946년 3월 1일, 스틸웰은 샌프란시스코의 프레시디오에 본부를 둔 제6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90] 제6군은 미국 서부 지역의 육군 부대를 관할하는 행정 사령부로 재편된 상태였다. 같은 해 5월, 그는 전 부관이었던 프랭크 메릴과 함께 미국 해병대 소대를 지휘하여 알카트라즈 전투 당시 발생한 교도소 폭동을 진압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91]
스틸웰은 1946년 10월 12일, 샌프란시스코 프레시디오의 군 병원에서 위암 수술을 받은 후 사망했다. 그는 사망 당시 현역 복무 중이었으며, 육군의 강제 퇴역 연령인 64세까지 불과 5개월을 남겨두고 있었다.[92]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태평양에 뿌려졌으며, 웨스트포인트 묘지에 위령탑이 세워졌다.
주요 군사 훈장으로는 수훈십자장, 참나무 잎 1개가 추가된 수훈 근무 훈장, 지휘관급 공로 훈장, 동성훈장, 그리고 사망 직전에 수여된 전투보병휘장 등이 있다.
3. 평가 및 유산
스틸웰은 스코틀랜드 의례 프리메이슨에 입문했다.[100][101][102]
터크먼은 저서 ''중국의 스틸웰과 미국의 경험, 1911-45''에서 스틸웰이 중국 전구(China Burma India Theater)에서 동맹국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해 정치적 편의를 위해 희생되었다고 평가했다. 데이비드 헬버스탬은 그의 마지막 저서 ''가장 추운 겨울: 미국과 한국 전쟁''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장제스가 일본과 단독 강화 조약을 맺어 일본군 전력이 다른 전선으로 이동하는 것을 우려하여 장제스를 달래려 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스틸웰, 체너울트, 장제스 사이의 중국 전구 지휘권을 둘러싼 갈등은 당시 미국의 정치적 분열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다른 해석에 따르면, 스틸웰은 모든 중국군에 대한 완전한 지휘권을 요구하며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인민해방군과 접촉했다. 그는 자신의 상관인 장제스를 건너뛰고 마오쩌둥으로부터 미군 사령관의 지휘를 따르겠다는 동의를 얻어냈다. 스틸웰은 장제스와의 권력 다툼에서 대립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는 결국 장제스가 스틸웰의 소환을 요구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103] 고시원 원장을 지낸 관중에 따르면, 스틸웰은 생전에 주더 장군 등 중국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싸울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104]
스틸웰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발전한 새로운 전쟁 양상, 특히 전략적 공군력의 중요성이나 정글에서의 게릴라전 방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비판을 받는다.[105] 그는 공군력의 효과를 과대평가한다고 여겼던 클레어 리 체너울트 장군과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1944년 중국 동부에서 벌어진 일본군의 공세로 제14공군의 주요 기지들(헝양, 구이린 등)이 함락되면서 공군력만으로는 지상군을 막기 어렵다는 것이 증명되기도 했다.
또한 스틸웰은 친디트를 이끈 오드 윙게이트나 메릴의 약탈자를 지휘한 찰스 N. 헌터 대령 등 다른 지휘관들과도 충돌했다. 그는 끊임없는 정글전이 고도로 훈련된 병사들에게 가하는 극심한 부담이나, 경무장한 정글 게릴라 부대가 포병 지원을 받는 정규군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스틸웰은 친디트와 약탈자 부대를 혹사시켰다는 비판을 받으며, 해당 부대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불만을 샀다.[106]
반면, 스틸웰은 미국 육군의 전통적인 지상전 방식에서는 뛰어난 전술가였으며, 험준한 지형에서의 작전에 필수적인 군수 지원의 중요성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해는 그가 레도 로드 건설 프로젝트에 헌신하게 된 배경이 되었고, 이 공로로 무공 십자 훈장과 미국 육군 공로 훈장 등을 받았다.[107] 또한 그가 차이나 핸드로 불리던 존 스튜어트 서비스나 존 페이튼 데이비스 주니어와 같이 중국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가진 인물들을 신뢰했다는 점도 긍정적인 평가를 뒷받침한다.[107]
만약 스틸웰이 지속적으로 요청했던 만큼의 미군 정규 보병 사단을 지원받았다면, 중국과 버마에서의 전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평가도 있다.[107] 그의 동료였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조지 마셜 장군은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으며, 오키나와 전투 중 시몬 볼리바 부크너 주니어 장군이 전사하자 그를 후임 제10미국 육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 막바지에 미국은 전 세계적인 전선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스틸웰에게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해 배정된 수송기는 동부 중국의 제14공군 지원에도 사용되었고, 이는 마켓 가든 작전과 같이 공중 보급에 의존하는 서부 전선 작전에 항공기 부족을 야기하기도 했다. 물론 아른험 전투 당시의 악천후가 작전 실패에 더 큰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108]
장제스는 결국 스틸웰을 해임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이로 인해 국민당 정권이 입은 이미지 손상은 심각했다. 스틸웰이 떠나기 직전, ''뉴욕 타임스''의 종군 기자였던 브룩스 앳킨슨은 충칭에서 그를 인터뷰한 뒤 다음과 같이 보도하며 장제스 정권을 강하게 비판했다.
> 스틸웰 장군 해임 결정은 일본군을 몰아내는 것보다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 더 관심이 있는, 쇠퇴하고 반민주적인 정권의 정치적 승리이다. 중국공산당은... 현재 북중국에서 일본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좋은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 총통(장제스)은 이 군대를 자신의 지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며... 전쟁 기간 동안 그들과 최소한의 휴전조차 맺으려는 진정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어떤 외교적 천재라도 총통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자신의 군대를 위험에 빠뜨리기를 꺼리는 기본적인 태도를 바꾸지는 못했을 것이다.[109]
옌안에서 마오쩌둥을 만났던 앳킨슨은 공산군을 민주주의 세력으로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당시 많은 미국 언론인들은 국민당을 반동적이고 부패한 집단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고, 앳킨슨의 기사는 이러한 인식을 더욱 확산시켰다.[110] 미국 내에서 국민당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커진 것은 이후 트루먼 대통령이 중국 내전이 한창일 때 장제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는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역사학자 앤드루 로버츠는 스틸웰의 강한 영국 혐오증(Anglophobia)이 아시아 전선에서 미국과 영국군 간의 원활한 협력을 방해했다고 지적하며, 스틸웰이 영국의 전쟁 노력을 조롱하는 발언을 자주 했다고 언급했다.[111] 또 다른 영국 역사학자 라나 미터는 스틸웰이 장제스의 참모장이라는 자신의 지위가 조지 마셜이 미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가졌던 것과 같은 수준의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중국군의 총사령관은 스틸웰이 아닌 장제스였으며, 장제스는 중국군을 무모한 전투에 투입하거나 자신의 직접적인 통제 범위 밖인 인도 기지로 이동시키려는 스틸웰의 계획을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미터는 1937년부터 1941년까지 막대한 손실을 입었던 중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자원을 아끼려 한 장제스의 판단이 옳았다고 보았다. 또한 미터는 스틸웰이 렌드리스 장비를 인도 주둔 중국군에게 돌리지 않았다면 체너울트가 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라는 체너울트의 견해에 동조했다. 미터는 스틸웰이 중국어 구사 능력 때문에 중국 전구에 배치되었지만, 그의 군사적 재능은 원래 계획대로 북아프리카에서 더 잘 발휘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112]
조지프 스틸웰 장군 저택은 1933년에서 1934년 사이에 캘리포니아주 카멜바이더시 남쪽 카멜 포인트의 26218 Inspiration Avenue에 지어졌다. 스페인 절충주의 양식의 이 대규모 2층 저택은 현재 개인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집 왼편에 기념 명판이 설치되어 있다.[113]
수년에 걸쳐 스틸웰의 이름을 딴 여러 시설이 있으며, 여기에는 플로리다주 잭슨빌의 조지프 스틸웰 중학교가 포함된다. 스틸웰이 1940년에 구상했던 병사 클럽은 육군에 그런 것이 없었을 때였는데, 1943년에 몬터레이만을 내려다보는 절벽 위에 있는 포트 오드에서 완공되었다. 수년 후, 그 건물은 그의 명예를 기려 스틸웰 홀(Stilwell Hall)로 개명되었지만 수십 년 동안 절벽이 침식되었기 때문에 2003년에 철거되었다. 장제스 정부가 일본군에 의해 난징에서 쫓겨난 후 양쯔강을 따라 있는 도시인 충칭에 있는 스틸웰의 전 거주지는 그의 명예를 기려 조지프 W. 스틸웰 장군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3. 1. 정치적, 개인적 견해
바바라 W. 터크먼에 따르면 스틸웰은 평생 공화당원이었다. 터크먼은 "그는 가족의 공화주의를 유지했고, 자연스럽게 루스벨트 혐오의 짜릿한 활동에 동참했다"고 기록했다. 스틸웰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난 후에는 "집에서 스틸웰은 루스벨트 혐오자들의 감정을 공유하고 어조를 채택한 전통적인 공화당원이었는데, 그는 이 분야의 극단주의자인 그의 형 존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다.[93] 다른 기록에서는 익명의 가까운 친구의 말을 인용해 "스틸웰은 본능적으로 진보적이고 동정심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생각과 정치에서 보수적이었다"고 덧붙였다.터크먼은 스틸웰이 편지와 일기에서 오늘날 모욕적으로 여겨지는 여러 단어를 사용했음을 지적하며, "그는 [그들을] 쉽게 사용했고, 겉보기에는 비하적인 내용 없이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사용한 용어에는 영국인에 대한 '라임(limeys)', 프랑스인에 대한 '개구리(frogs)', 독일인에 대한 '훈족(huns)'과 '스퀘어헤드(squareheads)', 이탈리아인에 대한 '웁스(wops)', 중국인에 대한 '칭크(chinks)' 또는 '치노(chinos)', 필리핀인에 대한 '구그스(googs)', 흑인에 대한 '니거(niggers)' 또는 '쿤스(coons)' 등이 포함되었다.[94] 전쟁이 끝난 후, 터크먼은 스틸웰이 "요코하마의 파괴되고 불탄 지역을 둘러보고, 한때 오만했던 일본인들이 이제 폐자재와 양철로 만든 판자촌에 살면서 흙바닥에서 양파를 심기 위해 긁고 있는 모습을 보는 데서 가혹한 즐거움을 느꼈다"고 전했다.[95]
1945년 9월 1일 요코하마에서 작성된 그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일부 기록되어 있다. "오만하고, 흉하고, 달덩이 같은 얼굴에, 토끼 이빨에, 휜 다리를 가진 젠장할 놈들을 쳐다보며, 이것이 그들을 어디에 위치시키는지 깨닫는 것은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 새로 제대된 많은 군인들이 주변에 있다. 대부분의 경찰이 경례를 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무관심하다. 우리는 파괴를 즐겼고, 기분 좋게 오전 3시에 들어왔다."[96]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소련군을 칭찬하며 "러시아 군대는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으로 보였고, 붉은 군대가 썩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를 재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97]
한편, 스틸웰의 일기 내용은 전후 인종차별 사건으로 어려움을 겪던 일본계 미국인 군인들을 옹호하는 모습과 모순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발언 덕분에 전쟁부로부터 일본계 미국인 군인 지원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스틸웰은 인종차별 반대 집회에 참석했으며, 1944년 이탈리아에서 전사한 제442연대 전투단 소속 참모 상사 카즈오 마스다의 가족에게 수훈십자장을 직접 수여했다.[98] 캘리포니아주 산타 아나에서 열린 행사에는 로널드 레이건과 로버트 영도 참석했는데, 이 자리에서 스틸웰은 니세이 병사들을 높이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결국 진정한 미국인은 누구인가? 진정한 미국인은 미국의 이상이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험으로 판단해 볼 때, 마스다 상사는 오늘날 우리 중 누구보다 더 훌륭한 미국인이었다."[99]
3. 2. 대중문화
조지프 스틸웰은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다루어졌다.- 1945년작 영화 버마의 표적에서는 어빌 앨더슨이 연기했다.
- 새뮤얼 풀러 감독의 1962년작 영화 메릴의 약탈자에서는 존 호이트가 연기했다.
-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1979년작 영화 1941에서는 로버트 스택이 연기했다. 이 영화에서 스틸웰은 할리우드 등을 담당하는 방공부대 사령관으로 등장한다. 영화관에서 1941년 개봉작인 덤보를 보고 눈물을 흘린 후 어떤 결정을 내리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일본 개봉 당시 팜플렛에 따르면, 영화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스틸웰의 회고록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 2011년작 드라마 중국 원정군 (TV 드라마)에서는 둥야춘이 연기했다.
2000년 8월 24일, 미국 우편 공사는 스틸웰을 기리는 최초의 10센트 뛰어난 미국인 시리즈 우표를 발행했다.
캘리포니아 사관후보생단의 고학년부 최우수 생도에게 수여되는 상은 '조지프 W. 스틸웰 장군상'이다.
미국 내 여러 지역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4. 훈장
전투보병배지 | ||
---|---|---|
수훈 십자 훈장[120] | 육군 수훈장 청동 참나무 잎 훈장 포함[120] | 공로 훈장[120] |
청동 성훈장 | 필리핀 전역 훈장 | 멕시코 국경 봉사 훈장 |
제1차 세계 대전 승전 훈장 | 미국 방위군 훈장 | 미국 전역 훈장 |
아시아-태평양 전역 훈장 청동 전역별장 3개 포함 |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훈장 | 점령군 훈장 "ASIA" 잠금 장치 포함 (사후 수여) |
레지옹 도뇌르 기사 훈장 (프랑스) | 연대 훈장, 1918년 (파나마) | 청천백일훈장 (중화민국) (그에게 두 번이나 수여되었으나, 그는 두 번 모두 거절했다(
참조
[1]
서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