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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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주만 공격은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 해군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에 주둔한 미국 해군 태평양 함대를 기습 공격한 사건이다. 이 공격은 일본의 대미 전쟁 준비 과정에서 이루어졌으며, 미국은 이 공격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일본은 1941년 11월 26일 항공모함 6척으로 구성된 기동부대를 출항시켜, 12월 7일 1, 2차에 걸쳐 350여 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진주만을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인해 미국은 전함 8척, 순양함 3척, 구축함 3척 등 18척의 함선과 188대의 항공기를 잃었으며 2,403명의 사망자와 1,17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미국의 참전을 이끌어 태평양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일본계 미국인들의 강제 수용 등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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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격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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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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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진주만 공격 |
영어 명칭 | Attack on Pearl Harbor |
일본어 명칭 | 신쥬완코게키 |
날짜 | 1941년 12월 7일 |
장소 | 미국하와이주오아후섬진주만 |
결과 | 일본의 승리,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
관련 전쟁 |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남방 작전 |
교전 세력 | |
전투 참가국 1 | 미국 |
전투 참가국 2 | 일본 제국 |
지휘관 | |
미국 지휘관 | 허스밴드 킴멜 월터 쇼트 |
일본 지휘관 | 야마모토 이소로쿠 나구모 주이치 이와사 나오지† |
병력 규모 | |
미국 병력 | 전함 8척 순양함 8척 구축함 30척 잠수함 4척 기타 함선 73척 항공기 390대 |
일본 병력 | 항공모함 6척 전함 2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9척 유조선 8척 함대 잠수함 23척 특수 잠항정 5척 함재기 414대 (공격에 참여한 기체는 353대) |
사상자 및 피해 | |
미국 사상자 | 전함 4척 침몰 전함 4척 손상 퇴역 전함 1척 침몰 항만 예인선 1척 침몰 경순양함 3척 손상 구축함 3척 손상 기타 함선 3척 손상 항공기 188대 파괴 항공기 159대 손상 해군 2,008명 사망 해병대 109명 사망 육군 208명 사망 민간인 68명 사망 총 2,403명 사망 군인 및 민간인 1,178명 부상 |
일본 사상자 | 특수 잠항정 4척 침몰 특수 잠항정 1척 좌초 항공기 29대 파괴 항공기 74대 손상 129명 사망 1명 포로 |
추가 정보 | |
민간인 피해 | 68명 사망 35명 부상 항공기 3대 격추 |
관련 인물 | 이와사 나오지† |
2. 일본의 준비
일본 제국은 만주를 점령하고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키며 아시아에서 팽창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군사적 팽창에 대응하여 미국과 영국 등 서방 국가들은 일본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강화했다. 특히 무기 제조에 필수적인 고철 수출을 금지하고, 1941년에는 석유 수출 금지 조치와 함께 미국 내 일본 자산을 동결했으며, 일본 선박의 파나마 운하 통과를 거부하며 중국 내 군사 행동을 압박했다.[23][25]
미일 관계는 계속 악화되어 1941년 11월 26일 미국이 제시한 헐 노트는 사실상 일본에게 중국에서의 완전 철수를 요구하는 내용으로, 일본 지도부는 이를 최후통첩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일본은 자체 유전이 거의 없어 대부분의 석유를 미국과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의 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하고 있었기에 미국의 석유 금수 조치는 치명적이었다. 일본 지도부는 세 가지 선택지에 직면했다. 첫째, 미국과 영국의 요구대로 중국에서 철수하는 것. 둘째, 유류 부족으로 군사력이 약화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셋째, 전쟁을 확대하여 동남아시아의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결국 일본 지도부는 마지막 선택지를 택했다.
동남아시아의 자원 지대 확보를 위한 남방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작전 중 미군의 개입을 막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함대 주력을 무력화하여 시간을 벌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고, 이를 위해 하와이 오아후섬에 위치한 진주만의 미 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기존의 점감요격작전 대신, 개전 초기에 항공 전력을 이용한 기습 공격으로 미 함대에 결정타를 가하는 작전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 대담한 작전 계획은 해군 군령부 내에서 상당한 반대에 부딪혔으나, 야마모토 제독의 강력한 의지로 결국 승인되었다. 이후 구체적인 작전 계획이 수립되었고, 진주만의 얕은 수심(약 12m)에서 어뢰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한 기술 개발(안정판 부착 등)과 강도 높은 훈련이 이루어졌다.[39][47][161] 또한 갑표적이라 불리는 특수 잠항정 5척을 이용한 공격 계획도 포함되었다.
일본은 미국과의 외교 교섭이 진행 중이던 1941년 11월 26일,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지휘하는 항공모함 6척을 포함한 기동부대를 에토로후섬 단관만에서 비밀리에 출항시켰다. 이는 미국이 제시한 헐 노트와는 무관하게 이미 오래전부터 전쟁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주일 미국 대사 조지프 그루는 일본의 전쟁 준비 움직임을 파악하고 본국에 보고했으나, 당시 유럽 전선에 집중하고 있던 미국 정부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426]
공격이 임박했다는 여러 징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공격 당일 새벽, 진주만 외곽에서 일본 잠수함이 발견되어 격침되었고[56], 오아후섬 북부의 레이다 기지에서는 대규모 비행 편대가 포착되었으나[427], 이를 본토에서 오기로 예정된 B-17 폭격기 편대로 오인했다. 당시 많은 미국 관리들은 일본의 공격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 대상이 하와이가 아닌 필리핀일 것으로 예상했다.
2. 1. 작전의 입안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미국과의 국력 차이를 고려할 때 장기전은 일본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미국 주재 무관 경험으로 미국의 잠재력을 잘 알았던 그는 전쟁 초기에 미국 태평양 함대의 주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미국의 서태평양 진격을 잠시 저지하고 동남아시아 자원 확보 작전을 원활히 수행하려는 목적이었다.[142]1941년(쇼와 16년) 1월, 야마모토는 제11항공함대 참모장 오니시 다키지로 소장에게 하와이 기습 작전 구상을 비밀리에 의뢰했다.[141] 오니시는 제1항공전대 참모였던 겐다 미노루 중좌에게 구체적인 작전 계획안 작성을 지시했다. 겐다는 2주 만에 항모 부대를 이용한 항공 공격 계획 초안을 마련했으며, 주요 목표를 항공모함으로, 부차 목표를 전함으로 설정했다.[143][144] 오니시는 이 안을 수정하여 전함 공격에 수평폭격을 포함시키고, 함대 집결 및 출발 기지를 에토로후섬 단관만으로 변경했다.[144]
그러나 이 대담한 작전 계획은 군령부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군령부는 작전 성공 가능성이 낮고 지나치게 투기적이며 실패 시 위험 부담이 크다고 판단했다. 특히 도상 연습에서 일본 항공모함 4척 중 3척 침몰, 1척 대파라는 기동부대 전멸에 가까운 피해가 예측되기도 했다.[147] 군령부는 전통적인 점감요격작전을 선호했다.
야마모토는 군령부의 반대에도 하와이 작전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미 태평양 함대에 타격을 주지 않으면 남방 작전을 차분히 진행할 수 없다"며 연합함대 사령장관직 사퇴까지 거론하며 군령부를 압박했다.[148] 결국 에나가 슈신 군령부 총장은 야마모토의 확고한 결의를 받아들여 작전을 승인했다.[159] 히로히토 천황도 여러 차례의 어전 회의를 거쳐 1941년 12월 1일 최종적으로 작전을 재가했다.[42]
작전 계획 수립의 가장 큰 기술적 난관은 진주만의 얕은 수심(약 12m)에서 어뢰 공격을 성공시키는 것이었다. 기존 항공 어뢰는 투하 시 30m 이상 잠수하여 진주만 해저에 박힐 위험이 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91식 어뢰에 나무로 만든 안정판(보조 목재 꼬리 날개)을 부착하여 공중 자세를 안정시키고 급강하를 억제하는 개량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어뢰 잠수 깊이를 10m 이하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39][47] 또한 전함의 두꺼운 장갑을 관통하기 위해 800kg급 철갑탄을 개조한 특수 폭탄도 개발되었다.
작전 실행을 위해 가고시마현 가고시마만(긴코만) 등지에서 진주만 지형을 모방한 강도 높은 실전 훈련이 반복되었다. 특히 얕은 수심에서의 어뢰 투하 훈련과 수평 폭격 훈련에 중점을 두었다.[161] 후치다 미쓰오 중좌가 총공격대 지휘관으로, 무라타 시게하루 소좌가 뇌격대 지휘관으로 선발되었다.[162]
정보 수집도 중요했다. 하와이 일본 총영사관에 영사관원으로 위장 파견된 해군 소위 요시카와 다케오는 미 함대의 정박 위치, 종류, 수량 등 상세 정보를 수집해 암호 전문으로 일본 해군에 보고했다. 이 정보는 공격 계획 수립과 실행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171]
1941년 11월 26일,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지휘하는 항공모함 6척(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 쇼카쿠, 즈이카쿠)을 주축으로 한 기동부대는 에토로후섬 단관만을 비밀리에 출항하여 하와이로 향했다.
2. 2. 군 내부의 반대와 극복
일본 제국 해군의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미국과의 국력 차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대미 개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기존의 점감요격 작전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미국에서의 주재 무관 경험을 바탕으로, 개전 초기에 항공 전력을 이용한 기습 공격으로 미국 태평양 함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혀 단기 결전을 유도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미 1928년부터 하와이 공격의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었다.1941년 초, 야마모토 제독의 주도하에 진주만 공격에 대한 예비 계획이 시작되었다.[34][35] 하지만 이 계획은 해군 군령부 내에서 상당한 반대에 부딪혔다. 진주만 공격의 위험성과 성공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으며, 작전 실패 시의 책임 문제 등으로 인해 군령부는 작전 승인을 주저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해군 군령부와의 여러 차례 논쟁 끝에, 자신의 사령관직 사퇴까지 거론하며 강하게 작전 실행을 주장했고, 결국 일본 해군참모본부로부터 공격 계획 수립 및 훈련에 대한 승인을 얻어냈다.[36]
승인 이후 1941년 초봄부터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을 중심으로 겐다 미노루 중좌, 구로시마 가메토 대좌 등의 참모들이 참여하여 본격적인 작전 계획 수립과 훈련이 진행되었다.[37] 작전 계획은 1940년 영국 해군의 이탈리아 타란토 공습 사례를 면밀히 연구하여 수립되었으며, 얕은 수심의 진주만에서 어뢰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한 기술 개발과 훈련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작전 실행에 대한 최종 결정은 히로히토 천황에게 달려 있었다. 천황은 어전회의를 통해 신중하게 문제를 검토했으며, 초기에는 전쟁 개시에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헐 노트가 일본의 중일 전쟁 성과를 무효화하고 제국 존립을 위협한다는 군부 강경파의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일부 고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41] 1941년 11월 5일 공격 계획을 조건부로 승인했으며, 12월 1일 최종적으로 공격을 재가했다.[40][42]
2. 3. 항공 부대 훈련
네덜란드령 동인도 및 동남아시아를 포괄하는 일본의 "남방자원지역" 진출을 보호하기 위한 진주만 공격 예비 계획은 1941년 초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주도로 시작되었다.[34][35] 그는 해군본부와의 많은 논쟁 끝에, 심지어 사령관직 사퇴 위협까지 한 후에야 일본 해군참모본부로부터 공격을 위한 공식적인 계획 및 훈련 승인을 얻었다.[36]1941년 초봄부터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이 주로 겐다 미노루 중령과 야마모토의 참모차장인 구로시마 카메토 대령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인 계획이 진행되었다.[37] 계획자들은 1940년 이탈리아 함대에 대한 영국의 공습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38] 이 연구는 특히 진주만과 같이 수심이 얕은 항구에서 어뢰 공격을 성공시키는 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 당시 베를린 주재 일본 해군 무관 보좌관이었던 나이토 타케시 중위는 직접 타란토로 가서 공격을 조사했고, 이후 진주만 공격 제1파 공격대장이 되는 후치다 미쓰오 중령과 자신의 관찰에 대해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다.[38]
그 후 몇 달 동안 조종사들이 훈련을 받고 장비가 개조되었으며, 진주만의 미군 배치에 대한 정보가 수집되었다. 특히 진주만의 평균 수심이 약 13m에 불과했기 때문에, 기존 어뢰로는 효과적인 공격이 어려웠다.[39] 어뢰폭격기는 장시간 수평 비행이 필요했고, 발사될 때 기존 어뢰는 선체를 타격하기 전에 약 30m 깊이로 급강하했다. 이에 일본 해군은 타란토 해전에서 영국군이 사용한 아이디어를 빌려, 어뢰가 11m만 잠수하도록 보조 목재 꼬리 날개를 만들고, 수면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부드러운 나무로 된 분리형 '코 노즈콘'을 추가하는 등 91식 항공 어뢰를 개조했다.[39] 또한 어뢰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안티롤 장치와 방향타 확장 장치도 장착되었다.[47] 이러한 개조와 훈련을 통해 얕은 진주만 항내에서도 효과적인 어뢰 공격을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이러한 군사적 준비에도 불구하고 히로히토 천황은 문제를 고려하기 위해 소집된 4차례의 어전회의 중 세 번째 회의가 끝난 11월 5일에야 공격 계획을 승인했다.[40] 처음에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했지만, 결국 일부 고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주만 공격을 승인했다.[41] 헐 노트가 "중일 사변의 성과를 파괴하고, 만주국을 위태롭게 하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약화시킬 것"이라는 일본 지도자들의 다수 의견을 받은 후 12월 1일에 최종 승인이 이루어졌다.[42] 히로히토는 공격 계획 승인 과정에서 군사 문제에 이전보다 더 깊이 관여했으며, 전쟁 계획에 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찾기도 했다.
2. 4. 특수 잠항정
일본 해군은 항공 공격과 병행하여 갑표적(甲標的)이라 불리는 A형 특수 잠항정 5척을 이용한 어뢰 공격을 계획했다. 이 잠항정들은 각각 이-16, 이-18, 이-20, 이-22, 이-24 잠수함에 탑재되어 1941년 11월 25일 쿠레 해군항을 출발했다.[52] 12월 6일, 모함 잠수함들은 진주만 입구 약 10nmi 지점에 도착했고,[53] 12월 7일 새벽 1시경 5척의 특수 잠항정을 발진시켰다.[54] 총 10명의 승조원이 이 작전에 투입되었다.그러나 작전은 순조롭지 않았다. 오전 3시 42분, 미 구축함 USS 콘도르가 진주만 입구 부표 근처에서 잠망경을 발견하고 USS 와드에 경고했다.[55][56] 오전 6시 37분, USS 와드는 다른 특수 잠항정을 발견하고 격침시켰는데, 이는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이 발사한 첫 포탄이었다.[56] 이 잠항정의 잔해는 2002년 8월, 진주만 입구에서 6nmi 떨어진 수심 400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57]
오전 8시 43분에는 포드 섬 북쪽에서 또 다른 잠항정이 수상기모함 USS 커티스와 구축함 USS 모나핸을 향해 어뢰를 발사했으나 모두 빗나갔고, 결국 모나핸에 의해 격침되었다.[56]
세 번째 잠항정인 하-19는 항구 입구 밖과 오아후섬 동쪽에서 두 차례 좌초한 끝에 12월 8일 미군에 나포되었다.[58] 승조원이었던 사카마키 가즈오 酒巻和男일본어 소위는 해안으로 헤엄쳐 나왔다가 체포되어 태평양 전쟁 최초의 일본군 포로가 되었다.[59] 작전 중 사망한 9명의 승조원은 일본 정부에 의해 九軍神|구군신일본어으로 미화되었다.[59]
네 번째 잠항정은 수심폭뢰 공격으로 손상된 후 승조원이 어뢰를 발사하지 못한 채 자침시킨 것으로 추정되며, 1960년 항구 밖에서 발견되었다.[60]
다섯 번째 잠항정의 행방은 오랫동안 불분명했으나, 1992년부터 2001년 사이 하와이 해저 연구소의 탐사로 진주만 외곽 해저에서 세 동강 난 잔해가 발견되었다. 탑재했던 어뢰 2발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이 잠항정이 발사했을 가능성이 있는 어뢰로는 오전 8시 21분 구축함 USS 헬름을 향한 공격과 10시 4분 경순양함 USS 세인트루이스를 향한 공격이 거론된다.[62] 다만 세인트루이스가 목격한 것은 USS 보그스가 예인하던 소나 부표였다는 반론도 있다.[63] 일부에서는 공격 당시 촬영된 항공사진과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의회 보고서에서 언급한 '회수된 대형 어뢰'를 근거로, 이 다섯 번째 잠항정이 웨스트버지니아와 오클라호마에 어뢰를 명중시켜 두 전함의 침몰, 특히 장갑대에 큰 피해를 입은 오클라호마의 침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64][65][66][67] 그러나 이 주장 역시 논란이 있다.[68]
일본 해군은 12월 8일 0시 41분, 특수 잠항정으로부터 진주만 내부의 대형 함선 최소 1척에 피해를 입혔다는 무선 보고를 받았다.[61] 하지만 결과적으로 특수 잠항정 작전은 5척 모두 손실되고 승조원 10명 중 9명이 사망, 1명이 포로가 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3. 미국의 상황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941년에 이르러 양국 간의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군사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무기 제조에 필수적인 고철 수출을 금지했으며, 석유 수출 금지, 미국 내 일본 자산 동결, 일본 선박의 파나마 운하 통과 거부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는 일본의 중국 내 군사 활동을 위축시키려는 목적이었다. 1941년 11월 26일, 미국이 제시한 헐 노트는 사실상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으로 받아들여졌고, 외교적 해결 노력은 한계에 다다랐다.
특히 석유 금수 조치는 유전이 거의 없어 대부분의 석유를 미국과 인도네시아 등에서 수입하던 일본에게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일본 지도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 미국과 영국의 요구를 수용하고 중국에서 철수한다.
- 유류 부족으로 군사력이 약화될 때까지 기다린다.
- 전쟁을 확대하여 동남아시아의 자원을 확보한다.
결국 일본 지도부는 세 번째 선택, 즉 전쟁 확대를 결정했다. 진주만 공격의 주요 목표는 미국의 태평양 해군력을 일시적으로 무력화하여, 일본이 동남아시아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미국의 즉각적인 개입을 막는 것이었다.
한편, 진주만 공격 당시 미 해군이 의도적으로 구식 전함들만 배치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이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오해이다. 미국은 1922년 워싱턴 군축 조약 체결 이후 1930년대 후반까지 신형 전함을 거의 건조하지 못했다. 조약은 주요 해군 강국들의 전함 보유 비율을 제한하고 신형함 건조를 엄격히 통제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37년 이후에야 신형 전함 건조를 서둘러 시작했지만, 1941년 12월까지 취역한 최신형 전함은 단 2척에 불과했다. 따라서 진주만에 배치된 애리조나호와 같은 전함들은 당시 미국이 가용할 수 있는 주력함들이었다. 실제로 공격 이후, 미국은 침몰하거나 파손된 구식 전함 대부분(애리조나호와 연습 표적함 유타호 제외)을 인양하고 수리하여 다시 전선에 투입했다. 이는 당시 미국의 해군력 부족 상황을 보여준다.
또한, 미국이 일본의 공격을 유도했다는 설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만약 공격 유도가 목적이었다면,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며 진주만 기습을 허용하기보다는,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중간 해역에서 일본 함대를 요격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진주만이 궤멸 직전까지 갈 정도의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는 점에서 공격 유도설은 신빙성이 낮다. 미국은 일본의 공격 가능성에 대한 여러 징후를 간과했는데, 이는 유럽 전선에 집중하고 일본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426]
3. 1. 군사 기지로서의 진주만
1898년 7월, 미국은 하와이 합병을 실시하고[174] 해군 기지를 순차적으로 정비해 나가면서 태평양 상의 전략적 군사 거점으로서, 또 필리핀으로 향하는 중계 거점으로서 그 중요성이 커져 갔다. 1940년 5월에는 일본의 남방 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서해안 샌디에이고에 주둔하고 있던 태평양 함대의 주력이 하와이 진주만으로 이동 배치되었다.[175]
당시 하와이는 미국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구축한 요새였으며, "태평양의 지브롤터"라고 불리며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다. 군사 평론가 프레처 브래드는 "진주만은 아마도 세계에서 최고의 해군 기지이며, 이처럼 최고의 위치에 있고, 최고로 방어되고, 또 최고로 보급된 기지는 다른 어디에도 없다"고 평가했고,[176] 미 극동 육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소장도 "진주만은 미국이 태평양에 가지고 있던 가장 강력한 군사 기지였다. 기지의 방어 진은 고사포 진지, 미국이 보유한 가장 우수한 항공기, 그리고 고도로 방비된 비행장과 경보 설비를 갖추고, 더욱이 미국 태평양 함대에 의해 보호되어,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불완전한 육해공 임시 부대에 비하면, 말할 나위도 없이 강력한 것이었다"고 분석했다.[177] 미국의 신문이 "일본은 우리를 공격할 수 없다. 그것은 군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하와이의 기지조차 일본 함대의 유효한 공격력의 범위 밖에 있다"고 보도하고, 저널리스트 클라크 비치가 "일본의 진주만에 대한 공격은 가장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공의 가능성은 백만분의 일밖에 없다"고 기고했듯이, 미국의 국민과 군의 많은 사람들은 “금성철벽의 진주만”이라는 명성을 믿고 있었고, 일본군의 공격에 대한 경계는 매우 허술했다.[178]
하지만 하와이에 대한 공중 공격 가능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되어 왔다. 1920년대에는 항공주병론의 열렬한 옹호자 윌리엄 미첼이 하와이 오아후섬의 방공 체제 미비를 지적하는 의견을 발표했다.[179] 또한 1932년에는 아시아 함대 사령관 해리 E. 야넬 대장이 일본이 선전포고 없이 항공모함으로 하와이나 미국 서해안을 공격할 가능성을 지적했다. 그는 2월 7일 일요일, 실제로 취역한 지 얼마 안 된 항공모함 2척(렉싱턴, 사라토가)과 구축함 4척을 동원하여 152기의 공격기가 오아후섬 해안 96km 해상에서 방어 태세가 갖춰지지 않은 진주만을 새벽에 기습하는 모의 훈련을 실시했다. 이 훈련은 이론상 항구 내 모든 함선을 침몰시키고 지상 항공기를 파괴하는 완벽한 성공으로 끝났으며, 이 상황은 호놀룰루의 일본 영사관을 통해 본국에 보고되었다.[180][181][182]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나치 독일의 공세가 계속되던 1940년, 태평양 함대 사령관 제임스 리처드슨 대장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태평양 함대 주력을 진주만에 두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일본군의 기습에 대비해 해상 초계를 강화할 것을 건의했지만, 루즈벨트와의 의견 충돌로 해임되었다. 1941년 2월에는 허스밴드 킴멜 대장이 후임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취임했다.[183]
킴멜 역시 전임자 리처드슨처럼 오아후섬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 되자마자 "개전 선포에 앞서 진주만의 함선에 공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극비 지령을 내려 함대에 경계를 촉구했지만, 결국 잠수함 공격에 대비한 구축함 초계 강화 지시에 그쳤다. 주야간 360도 경계를 실시할 만한 정찰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항공 초계 노력은 사실상 포기한 상태였다.[184] 1941년 8월에는 하와이 육군 항공대 사령관 프레더릭 L. 마틴 소장과 제5 폭격 항공대 사령관 윌리엄 C. 퍼싱 대령 등이 참여한 작전 연구에서 "일본 해군은 6척의 항공모함을 사용하여 북쪽에서 공격해 올 것이다. 오아후섬에 대한 공격은 새벽이 적에게 가장 유리할 것이다"라는, 거의 정확하게 일본군의 작전을 예측한 결과가 나왔다. 이 보고서는 킴멜과 육군성에도 전달되었지만, 항공 초계 강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185]
당시 미국은 대서양 전황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가능성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현실적인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킴멜은 해군 작전부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에게 "대서양의 문제를 가볍게 보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보면 태평양은 여전히 세계 정세의 일부다"라는 불만을 토로했지만, 스타크는 "나 자신은 잽(일본인을 비하하는 속어)이 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186]
이러한 안일함은 하와이 방면 육군 사령관 월터 쇼트 중장의 육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와이에는 2개 사단의 방위 부대가 배치되어 있었지만, 항상 보급과 훈련 문제에 시달렸다. 강력한 전력인 "하늘의 요새" B-17 폭격기는 미국 본토에서 생산되어 오아후섬으로 공수된 후 무장 등 최종 장비가 장착되었지만, 이후 대부분 필리핀으로 보내졌다. 육군 내 누구도 하와이에서 B-17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87] 하와이 육해군 총사령관인 킴멜과 쇼트는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에 함께 골프를 즐기는 등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지만,[188] 육해군 간의 연락이나 협력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쇼트는 해군이 항공 초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육군은 초계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184] 이러한 육해군의 경계 태세 미비, 대서양 중시, 일본군에 대한 과소평가가 미군의 안일함을 초래했다.
1941년 11월 27일 오전 9시, 호놀룰루에서 킴멜과 쇼트를 비롯한 하와이 주둔 미 육해군 참모들은 하와이 제도 서쪽의 웨이크섬과 미드웨이섬 증원 문제를 논의했다. 두 섬에 육군 항공대 전투기를 증원하기로 했으나, 하역 시설 부족으로 항공모함에서 이륙시켜 착륙시키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육군기는 착함이 불가능했기에, 파견된 항공기는 하와이 방어에 다시 사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있었다. 육군 참모 제임스 모리슨 대령이 오아후 방어 임무를 강조하며 반대하자, 킴멜은 "왜 그렇게 걱정하는 거야? 우리가 공격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라고 반문하며, 해군 참모 맥스 모리스에게 일본군의 항공 공격 가능성을 물었다. 모리스는 "그런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176] 회의 후 킴멜과 쇼트는 각각 육군성과 해군성으로부터 일미교섭 결렬과 일본군의 임박한 전쟁 행위 가능성에 대한 경고를 받았지만, 킴멜에게 전달된 경고는 침략 예상 지역으로 필리핀, 태국, 말레이반도, 보르네오섬 등 동남아시아를 지목했기에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초계는 특별히 강화되지 않았다.
미 해군은 7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당시 진주만에는 렉싱턴과 엔터프라이즈 2척뿐이었다. 와스프, 레인저, 요크타운, 호넷은 대서양에 있었고, 사라토가는 샌디에이고의 도크에 있었다.[189] 킴멜은 단 2척의 항공모함만 있음에도 예정대로 웨이크섬과 미드웨이섬 증원을 결정했다. 다음 날인 28일, 웨이크섬에는 윌리엄 할시 주니어 중장이 이끄는 제8임무부대의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와 3척의 중순양함, 구축함대가 파견되었다. 할시는 고속 기동에 방해가 된다며 전함 동행을 거절했고, 일본군 조우 시 교전 허가를 암묵적으로 받았다. 할시는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즉시 격침시키겠습니다"라고 했으나, 육군 전투기 대신 해병대 병사와 전투기를 싣고 출항했다.[190]
12월 2일, 무선 도청 부대인 하이포 기지가 일본군 항공모함의 콜사인이 사라진 것을 탐지하고 정보장교 에드윈 레이턴 소좌가 킴멜에게 보고했지만, 킴멜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녀석들이 다이아몬드 헤드까지 와 있다는 건가?"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171] 더욱이 12월 4일에는 항공모함 렉싱턴마저 육군기를 싣고 중순양함 3척과 구축함의 호위를 받으며 미드웨이로 출항하여, 공격 직전 진주만에는 항공모함이 단 한 척도 없게 되었다.[191]
루즈벨트는 12월 6일 오후 9시 30분경, 퍼플 암호로 해독된 일본의 「대미통첩각서」[404] 13항까지 읽고 "이것은 전쟁이라는 뜻이군(This means war.)"이라고 말했다고 한다.[192] 그러나 이 각서는 선전포고가 아니었으며,[405] 마지막 14항에도, 이전 13개 항에도 일본의 선전포고 내용은 없었다.[404][405] 또한 각서에는 하와이 공격이나 구체적인 계획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다만, 워싱턴 시간 오후 1시에 각서를 전달하고 모든 암호기를 파괴하라는 지시는 공격 시간을 암시했지만, 그 시간이 하와이-알류샨 표준시 오전 7시 30분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사람은 없었다.[193] 이 정보를 입수한 해군 정보부장 시어도어 S. 윌킨슨 대령은 스타크 작전부장에게 즉시 킴멜에게 알려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스타크는 하와이 방어는 육군 책임이라며 육군 참모총장 조지 마셜 대장에게 연락을 요청했다. 마셜 역시 각서가 개전을 의미한다고 판단하고 하와이와 마닐라(필리핀)에 경고를 보내려 했으나, 절차 지연과 하와이 육군 무선기 고장으로 인해 상용 채널을 통해 경고가 쇼트에게 도착한 것은 공격이 끝난 몇 시간 후였고, 그것도 자전거를 탄 소년에 의해 배달되었다.[194]
12월 6일 밤, "일본군 2개 함대를 캄보디아 해상에서 발견했다"는 영국군 정보가 킴멜과 쇼트에게 전달되었다. 킴멜은 참모들과 함선 처리 방안을 논의했지만, 항공모함 부재로 함대를 외양으로 내보내는 것은 위험하고, 주말 출항은 시민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함대를 항내에 머물게 했다. 이는 진주만 공격 예측이 아닌, 워싱턴 경고대로 일본의 공격 목표가 동남아시아일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195] 쇼트에게는 FBI가 도청한 호놀룰루-도쿄 간 신문 특파원의 국제전화 통화 기록 정보가 보고되었다. 통화 내용에는 오아후섬 상공 날씨 등 항공 공격을 암시하는 정보가 있었지만, 쇼트와 참모들은 그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했다.[196]
진주만 공격 전날 밤, 킴멜과 쇼트는 전달되는 중요 정보에 신경 쓰지 않고 파티에 참석해 음주를 즐겼다.[196] 수병들 역시 새로 생긴 "블록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각 함선 대항 "음악 결전" 콘테스트를 즐기고 있었다. 결승에서는 전함 펜실베니아, 테네시, 수송함 알곤, 디트로이트 경순양함의 밴드가 경쟁했고, 펜실베니아 밴드가 우승했다. 이후 수병들은 음주와 함께 "갓 블레스 아메리카"를 합창하며 춤을 추었고, 많은 이들이 남아 "예선 탈락한 애리조나의 밴드가 사실 최고였다"는 등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197] 킴멜은 오후 9시에 귀가하여 10시에 취침했지만,[198] 쇼트는 조금 늦게 귀가하며 차 안에서 아내에게 진주만 야경을 보며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군", "하지만 최고의 공격 목표가 될 것 같아"라고 말했는데, 기이하게도 이 예언은 다음 날 아침 현실이 되었다.[199]
3. 2. 공격 징후와 미국의 안일한 대응
미국은 진주만이 일본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여러 징후와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안일하게 대응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하와이에 대한 공중 공격 가능성은 이미 1920년대부터 제기되었다. 항공주병론의 선구자 윌리엄 미첼은 하와이 오아후섬의 방공 체계 미비를 지적한 바 있다.[179] 1932년에는 미국 아시아 함대 사령관 해리 E. 야넬 제독이 항공모함을 이용한 일본의 기습 공격 가능성을 경고하며, 실제로 진주만 기습 모의 훈련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도 했다. 이 훈련은 오아후섬 해안 96km 해상에서 새벽에 기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론상 항만 내 모든 함선과 지상 항공기를 파괴하는 완벽한 성공으로 평가되었다. 이 훈련 결과는 호놀룰루의 일본 영사관을 통해 일본 본국에도 보고되었다.[180][181][182]
1940년, 태평양 함대 사령관 제임스 리처드슨 제독은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함대를 진주만에 주둔시키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해상 초계를 강화할 것을 건의했으나, 대통령과의 의견 충돌로 해임되었다.[183] 그의 후임으로 1941년 2월 허스밴드 킴멜 제독이 임명되었다.[183] 킴멜 제독 역시 진주만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개전의 선포에 앞서 진주만의 함선에 공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극비 지령을 내리는 등 경계를 촉구했지만, 결국 잠수함 공격에 대비한 구축함의 초계 강화 지시에 그쳤다. 그는 정찰기 부족을 이유로 360도 전방위 항공 초계에 대한 노력을 포기했다.[184]
1941년 1월, 주일 미국 대사 조지프 그루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 계획 정보를 입수하여 본국에 보고했지만, 유럽 문제에 몰두하던 미국 정부는 이를 묵살했다.[426] 같은 해 8월에는 하와이 육군 항공대 사령관 프레더릭 L. 마틴 소장 등이 일본 해군이 6척의 항공모함을 사용하여 북쪽에서 새벽에 공격해 올 것이라는, 실제 공격과 거의 일치하는 예측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이 역시 실질적인 경계 강화로 이어지지 않았다.[185]
당시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선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일본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해군 작전부장 해롤드 스타크 제독은 킴멜 제독에게 보낸 서신에서 "나 자신은 잽(일본인을 비하하는 속어)이 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할 정도였다.[186] 이러한 인식은 하와이 방면 육군 사령관 월터 쇼트 중장에게도 마찬가지였고, 육군과 해군 간의 연락이나 협력은 거의 없었다. 쇼트 중장은 해군이 항공 초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양측 모두 초계 활동이 미흡했다.[184] 심지어 강력한 B-17 폭격기들은 하와이에서 최종 장비 장착 후 대부분 필리핀으로 보내졌는데, 이는 하와이에서의 필요성을 낮게 보았기 때문이다.[187] 하와이는 "태평양의 지브롤터"로 불리며 난공불락의 요새로 여겨졌고, 많은 미국인과 군 관계자들은 일본의 공격 가능성을 매우 낮게 평가했다.[176][178]
공격 당일 새벽, 진주만 외곽에서 일본 잠수함이 발견되고 격침되었으며, 오아후섬 북쪽 레이더 기지에서는 대규모 비행 편대가 포착되었다. 그러나 레이더 정보는 미국 본토에서 오기로 예정된 B-17 폭격기 편대로 오인되었다.[427] 많은 관리들이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사실은 인지했지만, 그 대상이 일본으로부터 약 8046.70km 떨어진 진주만이 아닌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지역일 것이라고 잘못 판단했다. 이러한 전반적인 경계 태세 미비, 유럽 전선 집중, 일본군에 대한 과소평가, 육해군 협조 부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미국은 일본의 기습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4. 공격 경과
일본은 만주를 점령한 뒤 1937년부터 중국과 중일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1941년 들어 미국과의 긴장이 고조되자,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 무기 제조에 필요한 고철 수출을 금지하고, 석유 수출 금지, 미국 내 일본 자산 동결, 일본 선박의 파나마 운하 통과 거부 등의 조치를 통해 일본의 군사 행동을 압박했다. 특히 유전이 없는 일본에게 미국과 인도네시아로부터의 석유 수입 중단은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일본 지도부는 미국의 요구 수용(중국 철수)이나 군사력 약화를 감수하는 대신, 동남아시아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 확대를 선택했다.
진주만 공격의 목표는 미국의 태평양 함대 해군력을 일시적으로 무력화시켜, 일본이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미국의 즉각적인 개입을 막는 것이었다.
1941년 11월 26일, 일본 연합 함대는 진주만을 향해 비밀리에 출항했다. 이는 미국이 제시한 헐 노트와는 무관하게 이미 계획된 행동이었다. 주일 미국 대사 조지프 그루(Joseph Grew)는 일본의 전쟁 준비 움직임과 진주만 공격 가능성을 본국에 보고했으나, 당시 유럽 문제에 집중하던 미국 정부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426]
공격 당일 새벽, 진주만 외곽에서 일본 잠수함이 발견되어 격침되고, 오아후섬 북쪽 해안의 레이다 기지에서 대규모 비행 편대가 포착되는 등 공격 임박 징후가 있었으나, 미군은 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많은 지휘관들은 일본의 공격 대상이 필리핀일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레이다에 포착된 일본 항공기들은 마침 도착 예정이던 B-17 폭격기 편대로 오인되기도 했다.[427] 이는 일본 항공기들이 항공모함 위치 노출을 피하기 위해 북동쪽에서 우회 접근했기 때문이기도 했으며, 이후 군사재판에서도 당시 근무자들의 태만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4. 1. 니타카 산에 올라라 1208 (ニイタカヤマノボレ一二〇八)
1941년 11월 1일, 토죠 히데키 내각은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에서 제국 국책 수행 요령을 결정했고, 이는 11월 5일 어전 회의에서 승인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일본 육군과 해군은 12월 8일을 개전 예정일로 삼아, 진주만 공격을 포함한 대영미란 전쟁 준비를 본격화했다.11월 13일, 이와쿠니 항공기지에서 연합 함대의 마지막 회의가 열렸다.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일미 협상이 타결될 경우 즉시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불복하는 지휘관에게는 엄하게 대응했다.[200] 11월 17일, 야마모토는 아카기를 방문하여 기동 부대 장병들에게 하와이 작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201]
11월 22일,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지휘하는 제1항공함대 기동 부대가 엣토로푸 섬 단칸 만에 집결했다. 여기에는 기함 아카기를 비롯해 가가, 히류, 쇼류, 쇼카쿠, 즈이카쿠 등 주요 항공모함이 포함되었다.[202] 출항 직전, 나구모는 아카기 함상에서 탑승원들에게 미국 태평양 함대 공격 계획을 알렸다.[203] 11월 26일 8시[204], 나구모 기동 부대는 하와이를 향해 단칸 만을 출항했다.[205]


기습 성공을 위해 은밀한 항해가 필수적이었다. 연합 함대 참모 스즈키 리사부로 중좌는 과거 10년간의 태평양 항로 데이터를 분석하여 11월과 12월에는 북위 40도 이북 항로를 이용한 선박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206] 이를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항해가 어려운 북방 항로가 선택되었다.[207]
12월 1일, 어전 회의에서 개전이 공식 결정되었다.[423] 그리고 12월 2일 17시 30분[204], 대본영은 기동 부대에 '''“신고산 등레 一二〇八|히토후타마루하치일본어”''' (ニイタカヤマノボレ一二〇八, 니타카야마노보레 히토후타마루하치)라는 암호 전문을 발신했다.[208] '신고산(니이타카야마)'은 당시 일본령 타이완에 있던 산 이름(현재의 옥산)으로, 당시 일본 제국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3,952m)였다. '一二〇八(히토후타마루하치)'는 12월 8일을 의미했다. 즉, 이 암호는 “X 데이(공격 개시일)를 12월 8일(일본 시간)로 정한다”는 뜻이었다.[209] 이 암호는 "암호서 D"에 따라 5자리 숫자로 변환되어 발신되었다.[210][211] 한편, 육군에서는 코타바루 상륙 작전을 위해 '''“일출은 야마가타, 토스”'''라는 전보를 보냈는데, '일출'은 X 데이, '야마가타'는 8일을 의미했다. 만약 전쟁을 회피하고 공격을 중지해야 할 경우, 육군은 '''“츠쿠바야마하레”''', 해군은 '''“토네가와쿠다레”'''라는 암호를 사용하기로 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사료는 부족하다.[213]
기동 부대는 키타 나가오 총영사를 통해 호놀룰루 주재 일본 영사관 소속 첩보원 기카와 타케오로부터 진주만의 동향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받았다.[189] 이 정보에 따르면, 11월 28일에는 엔터프라이즈가,[189] 12월 5일에는 렉싱턴이 진주만을 출항하여[189] 공격 예정일에는 진주만에 미국 항공모함이 한 척도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나구모 중장은 항공모함의 부재를 확인하고, 가능한 한 빨리 진주만을 공격한 뒤 철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214]
4. 2. 토라・토라・토라 (トラ・トラ・トラ)
1941년 12월 8일 오전 1시 30분(일본 시간), 하와이 근해에 접근한 일본 해군 기동 부대에서 제1파 공중 공격대가 발진했다. 공격대는 함상전투기 43기, 함상폭격기 51기, 함상공격기 89기로 총 183기로 구성되었다.[215] 공격대의 총지휘관은 후치다 미쓰오 중좌였다.미국 측은 공격이 임박했다는 여러 징후를 포착했으나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공격 개시 몇 시간 전 진주만 외곽에서 일본 잠수함이 발견되어 구축함 워드호에 의해 격침되었고(워드 호 사건), 오아후 북쪽 해안의 레이다 기지에서는 대규모 비행 편대가 포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들은 암호 해독 지연이나 잦은 오인 보고 전례 때문에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고, 레이다에 포착된 일본 항공기들은 마침 도착 예정이었던 B-17 폭격기 편대로 오인되기도 했다.[427] 당시 일본 함재기는 항공모함의 위치 노출을 피하기 위해 크게 우회하여 진주만의 북동쪽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오인의 여지가 있었다.
공격 당시 진주만의 일요일 아침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공격에 참가했던 후치다 미쓰오는 당시 일본군 항공기 라디오에서 하와이 방송국의 음악이 흘러나왔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덕분에 공격 목표물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는 일본군의 기습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상황이었다.
오전 7시 55분경(하와이 시간), 기뢰부설함 오글랄라 함상에 있던 태평양 기지 부대 사령관 윌리엄 R. 펄롱 William R. Furlongeng 소장은 항공기가 히캄 비행장 격납고를 폭격하는 것을 목격했다. 처음에는 아군기의 사고로 생각했으나, 이내 항공기 날개의 일장기를 보고 일본군의 공격임을 깨닫고 "일본군이다! 배치에 붙어라!"라고 외치며 "항내 모든 함정은 출격하라"는 경보를 발령했다.[225]
곧이어 히캄 비행장에서도 폭발과 연기가 피어올랐다.[221] 어뢰 부대를 이끌던 무라타 시게하루 소좌는 비행장의 폭연으로 목표 식별이 어려워질 것을 우려하여 예정된 경로 대신 지름길을 택해 오전 7시 57분(하와이 시간)에 전함들을 향한 어뢰 공격을 개시했다.[221] 후치다 역시 비행장 공격의 폭연이 심해지기 전에 수평 폭격을 시작하기로 결정하고, 오전 8시경 수평폭격대에 "전군 돌격"을 의미하는 신호(츠 연타)를 보냈다.[221] 오전 8시 정각에는 전투기 부대의 지상 기총소사가 시작되었고, 8시 5분에는 수평폭격대의 전함 폭격이 개시되었다.
미국 군함들은 마침 오전 8시 정각에 함미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의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네바다에서는 군악대가 국가(The Star-Spangled Banner)를 연주하기 시작했을 때, 어뢰를 투하한 일본 97식 함상공격기가 저공으로 함선 위를 날아갔지만, 군악대원들은 대열을 이탈하지 않고 연주를 마쳤다고 전해진다.[227]
갑작스러운 공격에 미군 수병들은 혼란 속에서 전투 준비에 나섰다. 많은 함선의 포와 갑판이 천막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를 제거하기 위해 로프 매듭을 푸는 데 시간이 걸렸다. 새크라멘토 함에서는 답답함을 느낀 한 수병이 조리실에서 고기 써는 칼을 가져와 로프를 잘라내기도 했다. 또한, 탄약고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어 즉시 열 수 없었으나, 구축함 헬름의 함장은 "열쇠 따위는 부숴버려라!"고 명령하며 임기응변으로 대처했다. 반면, 포드섬의 육상 기지에서는 탄약을 가지러 온 병사에게 병참 장교가 정식 청구서가 없다며 돌려보내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탄약을 구하지 못한 병사는 렌치를 저공비행하는 일본군 항공기를 향해 휘두르며 분노를 표출했다.[229] 이러한 혼란은 일본군의 기습 공격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4. 3. 진주만 공습, 훈련이 아니다 (Air Raid on Pearl Harbor. This is not a drill.)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진주만은 평소와 다름없는 일과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몇 시간 전부터 진주만 외곽에서는 일본 제국 해군의 잠수함 한 척이 발견되어 미국 해군 구축함 워드 호에 의해 격침되었고(워드 호 사건), 오아후섬 북쪽 해안의 레이다 기지에서는 거대한 비행 편대가 포착되었다.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정보는 이전부터 있었지만, 대부분의 미국 지휘관들은 공격 대상이 필리핀일 것이라 예상했고, 주일 미국 대사 조지프 그루가 본국에 보낸 일본의 진주만 공격 계획 정보는 유럽 전선 문제에 집중하던 미국 정부에 의해 묵살되었다.[426]하와이 시간 오전 7시 55분[94], 진주만 북쪽 약 321.87km 해상에 있던 일본 항공모함 기동부대에서 발진한 제1파 공격대가 포드섬과 휠러 비행장을 폭격하면서 기습 공격이 시작되었다. 공격 당시 일본군 항공기의 라디오에서는 하와이 방송국의 음악이 흘러나왔고, 날씨는 맑아 공격 목표물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고 공격을 지휘한 후치다 미쓰오는 회고했다. 레이다에 포착된 일본군 항공기들은 당일 아침 도착 예정이던 B-17 폭격기 편대로 오인되었다.[427] 일본군 항공기들이 항공모함 위치 노출을 피하기 위해 크게 우회하여 진주만의 북동쪽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오인할 여지가 있었으며, 이후 군사재판에서도 당시 근무자들의 태만 혐의를 적용하지 않았다.
공격을 목격한 호놀룰루 해군 항공기지 작전 사관 로건 램지 중령은 즉시 "진주만 공습, 훈련이 아니다(Air Raid on Pearl Harbor. This is not a drill.)"라는 긴급 전문을 타전하여 공격 사실을 알렸다.

많은 하와이 시민들과 심지어 일부 군인들조차 처음에는 포성과 폭발음을 태평양 함대의 실탄 훈련으로 여겼다. 저공비행하는 일본 항공기와 떨어지는 고사포 파편을 보고서야 실제 공격임을 인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호놀룰루 라디오 방송국 KGMB는 오전 8시 4분경부터 정상 방송을 중단하고 군인 소집령과 구조 인력 호출 안내를 반복했으며, 8시 40분에는 아나운서 웨블리 에드워즈가 "섬이 적군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알렸다. 그러나 여전히 훈련이나 과거 라디오 드라마 소동 같은 상황으로 의심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에드워즈는 9시에 다시 "이것은 연습이 아닙니다. 일본군이 섬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real McCoy)입니다"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호소해야 했다.[268]
갑작스러운 공격에 미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하와이에 있던 402대의 미국 항공기 중 대부분이 지상에서 파괴되거나 손상되었고[12], 이륙하여 반격에 나선 항공기는 소수에 불과했다. 8명의 미국 육군 항공대 조종사가 공중으로 올라가 최소 6명이 일본 항공기 격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엔터프라이즈 함에서 온 항공기 4대를 포함한 일부 미국 항공기는 아군의 오인 사격으로 격추되기도 했다. 공격 당시 진주만 상공을 비행 중이던 민간 항공기 9대 중 3대도 격추되었다.[100]
4. 4. 미국의 피해 상황
공격 개시 후 약 90분 만에 일본군의 공습은 끝났다. 이 공격으로 미국은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입었다. 총 2,403명의 미국인이 사망하고 1,178명이 부상했다.[94][95] 사망자 중에는 미국 해군 2,008명(부상 710명), 미국 육군 218명(부상 364명), 미국 해병대 109명(부상 69명)이 포함되었다. 민간인 피해도 발생하여 68명이 사망하고 35명이 부상했다.[94][95] 공격 당시 미국은 일본 제국과 전쟁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공격으로 사망하거나 부상한 모든 미국인들은 법적으로 비전투원이었다.사망자 중 거의 절반에 달하는 1,177명은 애리조나함 한 척에서 발생했다. 애리조나함은 개조된 약 40.64cm 포탄에 맞아 전방 화약고가 폭발하면서 침몰했으며, 이 배의 잔해는 현재 애리조나 기념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함선 피해도 심각했다. 총 18척의 함선이 침몰하거나 손상을 입었다.[96] 이 중에는 전함 9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3척 등이 포함되었다.
'''침몰 또는 좌초된 함선'''
함명 | 종류 | 번호 | 기준 배수량 (톤) | 비고 |
---|---|---|---|---|
오클라호마 | 전함 | BB-37 | 27500ton | 어뢰 5발 피격, 전복. 인양 후 해체 중 침몰 (사망 429명) |
애리조나 | 전함 | BB-39 | 32100ton | 폭탄 4발 피격, 폭발. 인양 포기, 기념관 건립 (사망 1,177명) |
캘리포니아 | 전함 | BB-44 | 37000ton | 폭탄 2발, 어뢰 2발 피격, 침몰. 수리 후 복귀 (사망 104명)[102] |
웨스트버지니아 | 전함 | BB-48 | 32600ton | 폭탄 2발, 어뢰 7발 피격, 침몰. 수리 후 복귀 (사망 106명) |
유타 | 표적함 (전함 개조) | AG-16 | 21825ton | 어뢰 2발 피격, 전복. 인양 포기 |
오글라라 | 기뢰 부설함 | CM-4 | 3746ton | 인접한 헬레나함 피격 충격으로 좌초. 수리 후 복귀 |
'''손상된 함선'''
함명 | 종류 | 번호 | 기준 배수량 (톤) | 비고 |
---|---|---|---|---|
네바다 | 전함 | BB-36 | 27500ton | 폭탄 6발, 어뢰 1발 피격, 해변 좌초. 수리 후 복귀 (사망 60명) |
펜실베이니아 | 전함 | BB-38 | 31400ton | 건식 독에서 폭탄 1발 및 파편 피격. 수리 후 복귀 (사망 9명) |
테네시 | 전함 | BB-43 | 37000ton | 폭탄 2발 피격. 수리 후 복귀 (사망 5명) |
메릴랜드 | 전함 | BB-46 | 32600ton | 폭탄 2발 피격. 수리 후 복귀 (사망 4명) |
롤리 | 경순양함 | CL-7 | 7450ton | 어뢰 1발 피격. 수리 후 복귀 |
호놀룰루 | 경순양함 | CL-48 | 10000ton | 손상 입었으나 계속 작전 수행. 수리 후 복귀 |
헬레나 | 경순양함 | CL-50 | 10000ton | 어뢰 1발 피격. 수리 후 복귀 |
캐신 | 구축함 | DD-372 | 1500ton | 건식 독에서 폭탄 피격 및 화재로 파괴. 수리 후 복귀 |
쇼 | 구축함 | DD-373 | 1500ton | 폭탄 2발 피격, 전방 화약고 폭발. 수리 후 복귀[99] |
다운스 | 구축함 | DD-375 | 1500ton | 건식 독에서 폭탄 피격 및 화재로 파괴. 수리 후 복귀 |
커티스 | 수상기 모함 | AV-4 | 8625ton | 손상. 수리 후 복귀 |
베스탈 | 공작함 | AR-4 | 8100ton | 심각한 손상, 해변 좌초. 수리 후 복귀 |
항공기 피해도 상당했다. 하와이에 배치되어 있던 미국 항공기 402대 중 188대가 파괴되었고 159대가 손상되었다. 이 중 대부분인 155대는 지상에서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12] 공격 당시 이륙하여 일본군 항공기와 교전한 미 육군 항공대 조종사는 8명뿐이었다.
4. 5. 제2파 공격
일본 시간 12월 8일 오전 2시 45분[215],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이끄는 일본 제국 해군 기동 부대는 제2파 공격대를 발진시켰다. 제2파 공격대는 함상전투기(함전) 36기, 함상폭격기(함폭) 80기, 함상공격기(함공) 54기 등 총 170기로 구성되었다.[215] 제2파는 오전 8시 54분경(하와이 시간) 진주만 상공에 도달하여 공격을 시작했으며,[94] 주요 목표는 미국 육군 항공대의 비행장과 남아있는 미국 해군 함선들이었다. 구체적으로 함공 54기는 항공 기지를, 함폭 80기는 항공모함 및 순양함을, 함전 36기는 제공권 장악 및 지상 항공기 파괴를 목표로 했다.[215]그러나 제2파 공격은 제1파 공격 때보다 훨씬 강력해진 미군의 대공 방어에 직면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제1파 공격 때보다 더 큰 손실을 입었으며, 일본의 손실의 3분의 2가 2차 공격 중에 발생했다.[293]
제2파 공격대는 일본 시간 오전 7시 전후에 기동부대로 귀환하기 시작했다.[301] 마지막 귀환기는 피탄으로 엔진 문제가 발생한 히류 소속 함재기로, 오전 8시 14분경에 돌아왔다.[302]

제2파 공격 이후, 일본군 지휘부 내에서는 추가 공격 여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제3전대 사령관 미카와 군이치 중장 등 일부 지휘관들은 남은 미군 시설(특히 유류 저장고와 함선 수리 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제3파 공격을 건의했다.[293] 그러나 기동부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참모장 쿠사카 류노스케의 조언을 받아들여 추가 공격 없이 철수하기로 결정했다.[294][295]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은 “제2격 준비 완료”라고 나구모에게 신호를 보냈다.[296] 야마구치는 탑승원과 참모로부터 재공격을 의견 제시해야 한다는 요청을 받았지만, “나구모 씨는 하지 않을 거야”라고 의견 제시를 하지 않았다.[297]
나구모 제독이 3차 공격을 포기한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강화된 미군의 대공 방어로 인한 추가 피해 우려[293]
- 미국 항공모함의 위치 불명 및 미군 반격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293]
- 3차 공격 준비 및 실행에 필요한 시간, 특히 야간 착륙의 위험성[293] (당시 일본 해군은 야간 항모 작전 능력이 부족했다)
- 기동부대의 연료 부족 문제[293]
- 2차례의 공격으로 작전의 주요 목표(미국 태평양 함대 무력화)를 달성했다는 판단[293]
결과적으로 유류 저장고, 정비 시설, 드라이독 등 중요한 기반 시설이 파괴되지 않아 미국은 예상보다 빠르게 함대를 재건하고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훗날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3차 공격을 감행하지 않은 나구모의 결정을 큰 실수였다고 평가했다.[293]
5. 미국의 대응과 참전
1941년 12월 7일의 진주만 공격은 미국에 큰 충격을 안겼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날을 "치욕 속에 살아갈 날짜"로 선포했으며, 다음 날인 12월 8일 미국 의회는 즉각적으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결의했다. 이는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공식화하는 결정이었다.
진주만 공격 소식은 미국 전역에 퍼져나갔고, 국민들은 일본의 기습 공격에 분노하며 애국심을 불태웠다. 많은 미국인이 일본 본토 침공 가능성에 대비하며 전쟁 준비에 나섰고, 군대에 자원하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한편, 미국 내 한인 사회는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고조된 미국의 반일 감정을 환영하며, 이를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한 기회로 삼고자 했다. 한인들은 미 정부에 한인으로 구성된 미 육군 부대 창설과 훈련을 요청했다. 이에 캘리포니아주 방위군의 휴스 대령이 협조 의사를 밝혔고, 18세부터 64세까지의 한인 50명이 지원했다. 이후 중국인과 필리핀인들도 합류하여 동양인으로 구성된 대대가 조직되었다. 이 부대는 '맹호군'으로 명명되었고, 김용성이 대대장을 맡았다. 맹호군은 1942년 4월 26일 정식으로 인가받고 대대기를 수여받았다.
진주만 공격은 일본이 미국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하기 전에 이루어졌다. 작전을 계획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공격 30분 전에 평화 협상 종료를 통보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428], 실제로는 공격이 시작된 지 한참 후에야 선전포고문이 전달되었다. 12월 7일, 약 5,000자에 달하는 선전포고 암호문이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에 도착했지만, 해독과 타자 작업에 시간이 오래 걸려 코델 헐 미 국무장관에게 전달된 시각은 하와이 시간으로 오전 8시 50분, 이미 공격이 시작된 지 1시간이 지난 후였다.[429] 암호 해독 지연과 더불어, 기밀 유지를 위해 외국인 직원을 배제하고 고위 관료가 직접 타자를 치면서 시간이 더욱 지체되었다. 게다가 선전포고의 핵심 내용은 문서 마지막 부분에 있어, 대사관 직원들조차 해독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전쟁 개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의 공식적인 대국민 담화문인 '미국 및 영국에 대한 선전의 조서(米国及英国ニ對スル宣戦ノ詔書)'는 공격 다음 날인 12월 8일에 발표되었고, 미국 정부에는 그 이후에 전달되었다.[430]
오랫동안 학자들은 이러한 선전포고 지연이 단순한 실수나 우연의 결과라고 여겨왔다.[431] 그러나 1999년, 이구치 다케오 교수는 일본 정부 내에서 미국과의 협상 중단 및 전쟁 개시 통보 방식에 대한 논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을 발견했다. 12월 7일 자 전쟁 기록에는 "우리의 기만적인 외교는 성공을 향해서 꾸준히 나아가고 있다."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는 일본 군부가 의도적으로 선전포고나 사전 통지 없이 기습 공격을 감행하려 했다는 증거로 해석될 수 있다.[432][433] 설령 선전포고문이 제때 전달되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이 외교 관계 단절이나 전쟁 개시를 명확히 알리기에는 매우 모호했다는 지적도 있다.[434] 선전포고문의 마지막 두 단락은 다음과 같다.[435]
:이리하여 일본 정부가 미국 정부와의 협력을 통해 일본-미국 관계를 조정하고 태평양의 평화를 보존하고 증진하려는 간절한 희망이 마침내 사라졌다.
:
:...일본 정부는 미국 정부의 태도로 볼 때 추가 협상을 통해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고려할 수 밖에 없음을 미국 정부에 통보해야 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5. 1. 루스벨트의 "치욕의 날" 연설
1941년 12월 7일 워싱턴 D.C. 시간으로 오후 1시 40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해군 장관 프랭크 녹스로부터 진주만이 일본군에게 공습당했다는 첫 보고를 받았다. 보좌관 해리 호프킨스는 정보의 신빙성을 의심했지만, 루스벨트는 "아마 사실일 거야", "이것은 바로 일본인들이 할 만한 예상치 못한 일이야"라고 말했다.[307] 루스벨트는 즉시 백악관에 외교 정책 고문과 군 수뇌부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했으나, 초기에는 정확한 피해 상황이나 일본군의 다음 행동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주변 사람들은 루스벨트가 오랫동안 지속된 긴장 상태에서 벗어나 오히려 안도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회고했다.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는 "프랭클린은 걱정했지만, 오랫동안 그렇게 보였던 것보다 차분해 보였다. 마침내 주사위가 던져졌다는 것을 알고 안심했던 것 같다."라고 느꼈다.[308]
밤 9시경 다시 열린 회의에서 함대의 구체적인 피해 상황 보고가 속속 들어왔다. 우드로 윌슨 행정부 시절 해군 차관보를 지내며 해군에 깊은 애정을 가졌던 루스벨트는 함선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정박된 상태에서 공격받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고뇌했다. 그는 녹스 장관에게 함선들이 왜 그렇게 배치되었는지 물었지만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했고,[309] 회의에 참석한 의회 지도자들의 분노 섞인 질문에도 "모르겠어요, 나도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310]
회의에서는 다음 날 의회에서 할 연설문 초안이 논의되었고, 루스벨트가 직접 작성한 원고가 채택되었다. 루스벨트는 회의가 끝난 후 자정까지 원고를 다듬었다.
12월 8일 오후 12시 29분, 루스벨트는 미국 의회 양원 합동회의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12월 7일을 "어제, 1941년 12월 7일 — 치욕 속에 살아갈 날짜 — 미합중국은 일본 제국 해군과 공군에 의해 고의적인 기습 공격을 받았습니다."라고 선언하며, 이 연설은 훗날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my speech)로 알려지게 되었다. 루스벨트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직접 작성한 이 연설은 라디오를 통해 약 6천만 명의 미국인이 청취하며 역사상 가장 많이 들린 연설 중 하나가 되었다.[311]
연설은 국민과 의회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루스벨트의 측근이었던 극작가 로버트 셔우드는 "루스벨트가 전 미국 국민을 이렇게 완벽하게 대표했던 적은 두 번 다시 없었다."라고 회상했다.[312] 연설 직후, 미국 상원은 만장일치로, 미국 하원은 단 1표의 반대표(평화주의자 저넷 랜킨)를 제외하고 압도적인 찬성으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승인했다. 이로써 미국은 공식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이후 루스벨트는 '화로가담' 라디오 연설을 통해 국민들에게 다시 한번 연설했다.
>적이 완벽한 타이밍을 맞춰 훌륭한 수완으로 기만의 뛰어난 업적을 달성한 것을 인정해도 좋을 것입니다. 전적으로 비열한 행위였지만, 나치 식으로 행해지는 현대전이 불쾌한 것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실제로 이렇게 휘말렸고, 우리는 가진 모든 것을 다해 싸울 것입니다.
루스벨트는 일본군의 기습 성공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비열한 행위'로 규정하고 국민들의 단결과 항전 의지를 촉구했다. 이 담화는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 사회에 퍼졌던 공포와 불안감을 가라앉히고 루스벨트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를 재확인하는 데 기여했다.[313]
5. 2.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 내에 거주하던 일본계 미국인에 대한 큰 반감이 형성되었다. 이에 미국 정부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강제 수용소를 설치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계 미국인들을 이곳에 강제로 수용하였다. 이는 일본계 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유를 박탈한 조치로 평가받는다.6. 진주만 공격 이후의 상황
1946년 12월 해체를 위해 본토로 이동 중 1947년 5월 17일 태풍으로 침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