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료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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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료쿠단은 일본의 폭력 조직을 의미하며, 메이지 시대 산업 발달과 함께 등장하여 자경단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이후 암시장이 성행하면서 세력이 커졌고, 노동 쟁의에 개입하기도 했다. 1992년 폭력단 대책법 시행 이후 공개적인 활동이 어려워졌으며, 2023년에는 세력이 전성기 대비 약 9분의 1 수준으로 감소했다. 야쿠자는 피라미드형 조직 구조를 가지며, 자금 획득을 위해 보호비 징수, 불법 약물 거래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최근에는 구성원의 고령화가 심화되었으며, 재일 한국인 등 사회적 소수자의 비율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보료쿠단은 사회 문제와 지하 경제에 깊이 관여하며, 법적 규제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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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폭력단 - 야마구치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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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료쿠단 | |
|---|---|
| 폭력단 정보 | |
| 유형 | 범죄 조직 |
| 폭력적인 묘사 주의 | |
2. 역사
"폭력단"이라는 명칭은 원래 경찰이 명명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매스 미디어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3] 경찰청에 따르면, 폭력단은 종래의 도박꾼과 테키야(노점상)에, 쇼와 20년대(1945~1954년) 전후 일본 사회의 혼란기에 발생한 폭력 집단인 구렌타이가 더해져 발생했다. 이들은 히로뽕 밀매 등의 이해관계 대립으로 이합집산을 반복하다, 쇼와 30년대(1955~1964년)에 "폭력단"으로 통칭되기 시작했다.[4]
폭력단은 "야쿠자"라는 통속적인 명칭으로도 불리는데, 그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폭력단원들은 스스로를 "극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남자의 길을 극한까지 추구한 자" 또는 "도락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놀이꾼"을 의미한다. 전직 경찰관 키타시바 켄은 "옥도獄道|옥도일본어(지옥에 떨어질 게으름뱅이나 방탕아)"가 어원이라는 설을 제시하기도 했다.[5]
폭력단원 등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윤리관으로 "임협도" (테키야에서는 신농도)를 내걸고, 활동에 있어서의 대의명분으로 사용된다.
2. 1.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사회는 급격한 산업 발전을 겪으며 노동력 부족에 직면했다. 탄광, 수운, 항만, 대규모 공사 현장에는 농촌과 어촌 출신의 건장한 남성들이 모여들었고, 이들 중 힘 있는 자가 중심이 되어 "조직"을 형성했다. 노동자들 간의 잦은 다툼과 경찰력 부족으로 인해, 자경단 역할을 하는 폭력단 조직도 나타났다.[6]1931년과 1935년에는 경찰의 대대적인 폭력단 검거가 이루어졌다. 특히 1935년의 검거는 전국적으로 19,200명이 넘는 인원이 체포될 정도로 대규모였다.[7][8]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일본은 패전으로 인해 극심한 물자 부족과 암시장 증가를 겪었다. 특히 테키야(攤販) 계열 단체가 늘어났는데, 이는 패전 후 일본 사회의 치안 악화와 관련이 깊다. 전후 혼란 속에서 "구렌타이"(불량배)와 같은 불량 집단에서 폭력단이 생겨나기도 했다. 경찰은 폭력단 검거에 나섰지만, 1950년에만 경시청 관내에서 약 5,200명을 검거하고도 대부분 석방해야 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9]
노동 조합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기업들은 폭력단을 이용하여 노동 쟁의나 파업을 해결하려 했다. 1960년 미이케 탄광 쟁의에서는 폭력단원이 쟁의에 개입하여 조합원을 자살로 몰고 가는 사건도 발생했다.[10]
고도 경제 성장기에 오키나와, 연예 흥행 등 합법적인 경제 활동에 종사하는 "기업 사제 (프론트 기업)"도 등장했다. 현대 폭력단은 테키야 계통과 도박꾼 계통으로 나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불법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시기 폭력단은 공공연하게 활동하며 경찰과의 뒷거래를 하거나 미디어에 노출되기도 했다.
버블 경제 시기(1986년~1991년)에는 폭력단의 세력이 크게 증가했다. 전국적인 지가 급등을 배경으로 토지 매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범죄 행위로 억 단위의 돈을 버는 젊은 간부도 나타났다.[11][12][13]
1992년 폭력단 대책법 시행 이후, 폭력단은 공개적인 활동이 어려워지고 자금 획득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2000년대 이후 일본 전국 지방 자치 단체에서 폭력단 배제 조례가 제정되면서, 구성원들은 전력, 도시 가스, 수도 사용 계약, 공영 주택 입주, 생활 보호 수급, 은행 계좌 개설, 신용 카드 발급 등에서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 2013년 미즈호 은행 폭력단 융자 사건에서는 폭력단원에게 자동차 구매 자금을 융자해 준 은행 회장과 사장 등이 사임하기도 했다.[14] 이러한 규제는 폭력단 관계자의 기본적 인권 침해 우려가 있을 정도지만, 이탈리아의 마피아 대책 통일법처럼 폭력단의 존재 자체를 불법화하지는 않았다.
폭력단 대책법, 폭력단 배제 조례, 저출산 고령화의 영향으로 1960년대에 최전성기를 맞았던 폭력단은 계속해서 세력이 감소하여, 2023년에는 전성기의 약 9분의 1 수준으로 줄었고, 구성원의 절반 이상이 50대 이상으로 고령화되었다.
야마히라 시게키에 따르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계통을 가진 조직은 지정 폭력단 마츠바회의 2차 단체인 도박꾼계 오쿠보 일가이다.[15]
2. 2. 현대의 야쿠자
1992년 폭력단 대책법 시행으로 야쿠자는 공개적인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14] 2000년대 이후 폭력단 배제 조례가 확산되면서 구성원들은 전력, 도시 가스, 수도 사용 계약, 공영 주택 입주, 은행 계좌 개설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서비스 이용에 제한을 받으며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추세에 놓였다.[14]이러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야쿠자는 지하 경제에서 활동하며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버블 경제 시기에는 토지 매입등을 통해 막대한 자금을 획득하기도 하였다.[11][12][13] 최근에는 특수 사기, 밀어 등 새로운 범죄 수법을 통해 자금을 확보하고 있다.
더불어, 반(半)그레(준폭력단) 집단과의 연계를 통해 세력을 유지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경찰청은 2013년부터 "준폭력단"이라는 규정을 신설하여 이들 집단의 실태를 파악하고 있으며,[140] 일부 준폭력단은 폭력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42] 후쿠오카현 경찰은 2023년 1월, 한구레 집단 대책을 전문으로 하는 단속 본부를 설치하여 불법 약물 밀매나 특수 사기 등에서 야쿠자와 한구레 집단의 연관성을 조사하고 있다.[148]
3. 조직
야쿠자는 두목(조장)을 정점으로 가부장제를 모방한 서열 및 의사 혈연관계를 구축하여 조직의 결속을 다진다.[15] 이러한 관계는 사카즈키(술잔) 의례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조직원은 두목과의 관계에 따라 아우(사제)와 부하로 나뉘며, 사제의 서열이 더 높지만 후계자 계승권은 부하에게 있다.
3. 1. 조직 구조
야쿠자 조직은 일가(一家), 회(会), 조(組), 연합(連合)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며, 복잡한 계층 구조를 이룬다.[15] 야마구치구미와 같은 대규모 조직은 5차 단체까지 존재하기도 한다. 각 계층의 단체에서 해당 조장과 사카즈키(盃)를 나눈 조직원을 직참이라고 한다. 폭력단 조직에서는 부하 상호 간에도 엄격한 상하 관계가 있으며, "분차이(ぶちがい)"라고 하여 폭력단 사회에서 일종의 인물적인 무게 차이, 즉 "관목(かんめ)"의 차이에 따라 상하 관계가 결정되며, 형제 사카즈키(테키야계 폭력단에서는 의형제 사카즈키)라고 불리는 사카즈키 의례에 의해 의형제가 된다.두목이 은퇴 또는 사망한 경우에는, 조직원 중에서 새로운 두목을 결정한다. 개별 조직의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장남에 해당하는 와카가시라가 선택되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두목이 취임하면, 다른 조직원과의 사이에서 사카즈키 고치(술잔 다시 나누기)라고 불리는 의식이 행해지고, 새로운 서열에 기초한 의제 혈연 관계가 재구축된다. 선대 두목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경우에는, 조직원 간의 회의나 투표로 결정된다. 후계자 선정 문제를 둘러싼 내부 대립으로 조직 분열에 이른 예로는, 야마구치구미로부터의 이치와카이의 분열을 들 수 있다.

기업과 같은 급여는 없으며, 조직에 들어가 처음에는 두목의 집 등에 기거하며 잡무를 하는 "방 살이"[16] 시절 두목이나 형님뻘 되는 사람에게 받는 용돈을 제외하면 각 조직원은 자신 스스로 생활 자금을 포함한 돈을 벌어야 한다. 두목과 수하 관계는 도제 제도라는 측면도 있으며, 겉으로는 "먹고 살기 힘든 젊은이에게 사회 생활을 가르친다"는 것으로 되어 있어, 방 살이 시절에 두목이나 형님뻘 되는 사람에게서 "시노기"(자금 획득 수단)라고 불리는 자금 획득 수단을 배운다.
조직은 "자식이 부모를 봉양한다"(친효)는 명분 아래, 조직원이 조직의 문장을 사용하는 것(시노기 시에 조직의 이름을 사용하는 등)의 대가로 조직원으로부터 일정액의 회비를 상납받아 운영 경비로 충당한다. 대규모 조직의 두목이 되면 스스로 불법적인 시노기를 할 필요는 없고, 상납금을 조직의 운영비나 활동 자금으로 충당하는 외에, 상납금으로 호화 저택을 짓고, 애인을 두고, 고급 외제차를 타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 조직원의 상납금과 관련해서는 2015년 야마구치구미 분열 소동이 일어났을 당시, 직참 두목들에게 월 100만 엔 이상의 상납금이 부과되고 있다는 것이 화제가 되었고, 동시대의 문헌에는 간부의 경우 월 40만 ~ 50만 엔, 2차 단체의 젊은 두목급은 월 25만 엔, 평조직원은 1만 엔 정도를 조직에 납부한다고 기록되어 있다.[16] 또한, 의리 걸기 등의 경조사비도 이와 별도로 징수한다. 각 조직마다 기업 사제나 고문처 등을 두고, 거기서 얻은 이익도 상납금으로 상부 조직에 납부하게 되어 있다. 최근에는 고액의 회보나 상부 조직의 관련 기업이 취급하는 각종 비품 구매를 강요받는 일도 있어, 잦은 상납금 강요가 조직 내의 대립과 분열의 요인이 되고 있다.
시노기에서는 보호비 징수 등의 공갈 행위, 뜻에 따르지 않는 자나 건조물 등에 대한 방화나 총격, 매춘 알선, 각성제나 마약 등의 불법 약물 거래, 강도, 절도, 도박 개장, 유괴에 의한 몸값, 암흑 금융, 총회꾼 등의 비합법적인 경제 활동, 어떤 이유로든 공개할 수 없는 교섭이나 개입 등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도나 총기 등을 이용한 단체 간의 항쟁을 벌이는 경우가 있어, 그로 인한 살인 사건도 발생하고 있다. 경찰청에서는 특히 각성제 단속법 위반, 공갈, 도박 및 노미 행위의 4가지 종류의 범죄에 의한 시노기를 "폭력단의 전통적인 자금 획득 활동"으로 규정하고 있지만[17], 폭력단 대책법이나 폭력단 배제 조례 등의 시행 후에는 감소 경향에 있다. 한편, 특수 사기나 거래 단가가 높은 해산물을 노린 밀어 등이 증가 추세에 있다.[18].
법과 조례의 규제로 인해 시노기가 어려워진 데 따른 조직원의 곤궁화와 범죄의 교묘화, 악질화가 문제가 되고 있다. 여러 폭력단 관계자가 다른 조직의 조직원이나 범죄 그룹과 손을 잡고 ATM 부정 인출 사건을 벌인 예가 있다. 그 외에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조직원에 의한 생활 보호비를 둘러싼 사기, 권총을 담보로 한 빚, 결혼식장에서의 매출금 절도, 전기 요금을 줄이기 위한 계량기의 불법 개조 등의 사례도 언급되고 있다.[19].
시노기에서의 실패나 규율 위반에 대한 조직 내 제재는 손가락 자르기부터 제적, 파문, 절연, 소하라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3. 2. 자금 획득 활동
폭력단은 야쿠자들의 길드 또는 상호 부조 단체와 같은 것이다. 기업과 같은 급여는 없으며, 조직원은 스스로 생활 자금을 포함한 돈을 벌어야 한다. 두목과 수하 관계는 도제 제도라는 측면도 있으며, 겉으로는 "먹고 살기 힘든 젊은이에게 사회 생활을 가르친다"는 것으로 되어 있어, "시노기"(자금 획득 수단)라고 불리는 자금 획득 수단을 배운다.조직은 "자식이 부모를 봉양한다"(친효)는 명분 아래, 조직원이 조직의 문장을 사용하는 것의 대가로 조직원으로부터 일정액의 회비를 상납받아 운영 경비로 충당한다. 대규모 조직의 두목은 상납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실태이다. 2015년 야마구치구미 분열 소동 당시, 직참 두목들에게 월 100만엔 이상의 상납금이 부과되고 있다는 것이 화제가 되었다[16]. 또한, 의리 걸기 등의 경조사비도 이와 별도로 징수한다.
시노기에서는 보호비 징수 등의 공갈 행위, 매춘 알선, 각성제나 마약 등의 불법 약물 거래, 도박 개장 등의 비합법적인 경제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경찰청에서는 특히 각성제 단속법 위반, 공갈, 도박 및 노미 행위의 4가지 종류의 범죄에 의한 시노기를 "폭력단의 전통적인 자금 획득 활동"으로 규정하고 있지만[17], 폭력단 대책법이나 폭력단 배제 조례 등의 시행 후에는 감소 경향에 있다. 한편, 특수 사기나 거래 단가가 높은 해산물을 노린 밀어 등이 증가 추세에 있다[18].
법과 조례의 규제로 인해 시노기가 어려워진 데 따른 조직원의 곤궁화와 범죄의 교묘화, 악질화가 문제가 되고 있다. 그 예로, 여러 폭력단 관계자가 다른 조직의 조직원이나 범죄 그룹과 손을 잡고 ATM 부정 인출 사건을 벌인 예가 있다[19].
3. 3. 구성원과 준구성원
경찰청은 폭력단에 직접 소속된 구성원(組員) 외에도, 폭력단과 관계를 맺으며 불법 활동에 가담하는 준(準)구성원을 구분하여 관리하고 있다. 준구성원은 "구성원은 아니지만, 폭력단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조직의 위력을 배경으로 폭력적 불법 행위 등을 저지르는 자, 또는 폭력단에 자금이나 무기를 공급하는 등 그 조직의 유지, 운영에 협력하거나 관여하는 자"를 의미한다.1992년 폭력단 대책법 시행 이후, 구성원 수는 감소하는 추세지만, 준구성원 수는 상대적으로 증가하거나 유지되는 경향을 보였다. 2004년 이후에는 구성원과 준구성원 모두 감소하였으나, 반 그레 그룹으로 이동한 경우도 있어, 특수 사기나 금 밀수 등의 조직 범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한다.
경찰청 발표에 따르면, 2023년 말 기준 전국 폭력단 세력은 20,400명으로 19년 연속 감소했다. 이 중 구성원은 약 10,400명, 준구성원은 10,000명이다.
또한, 경찰청은 한구레 집단을 상정한 "준폭력단"이라는 규정을 2013년 신설하여 관리하고 있다.[140] 이는 롯폰기 클럽 습격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졌으며,[141] 폭력단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경우도 있다.[142]
3. 4. 구성원의 연령 및 출신
야쿠자 구성원은 고령화 현상이 심화되어, 2023년 기준으로 전체 구성원의 절반 이상이 50대 이상이다.[15] 이는 폭력단 대책법과 폭력단 배제 조례 시행, 그리고 일본 사회의 저출산 고령화 추세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폭력단원의 출신 배경은 다양하지만, 피차별 부락 출신이나 재일 한국인 등 사회적 소수자의 비율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는 이들이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소외되면서 폭력단에 유입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4. 한국과의 관계
야쿠자와 한국의 관계는 복잡하고 민감하며, 재일 한국인 사회와 야쿠자의 연관성은 역사적으로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 데이비드 카플란과 알렉 듀브로의 공저 『야쿠자 닛폰적 범죄 지하국과 우익』에는 "비공식적이지만, 경찰은 일본 최대 광역 폭력단인 야마구치구미 구성원 2만 5천 명 중 약 70%가 부락 출신이며, 약 10%가 한국인 등 외국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기술이 있다.[29] (번역본에서는 삭제됨)
- 전 공안 조사관 스게누마 미츠히로는 2006년 10월 19일 도쿄 외국 특파원 협회 강연에서, 야마구치구미의 2인자 다카야마 기요시에게 들었다며, 폭력단 출자 내역은 부락 60%, 재일 한국・조선인 30%, 일반 일본인 등 10%라는 견해를 보였다.[31]
- 야마구치구미 고문 변호사 야마노우치 사치오는 『문예춘추』 1984년 11월호 기고문에서 "야쿠자에는 재일 조선인과 동화 지구 출신자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약 65만 명(당시)이라고 하는 재일 조선인 중 약 50%가 효고・오사카・교토에 집중되어 있는 것과 야마구치구미의 발전은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야마구치구미는 부락 차별과 재일 조선인 차별 문제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33]
- 6대 야마구치구미 조장 쓰카사 시노부는 2011년 산케이 신문 인터뷰에서 "야마구치구미에는 가정 환경이 좋지 않고, 소위 낙오자가 많으며, 재일 한국・조선인과 피차별 부락 출신자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38]
- 전 요미우리 신문 기자 제이크 에델스타인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오늘날 야쿠자의 약 3분의 1은 한국계"라고 기술하고 있다.[39]
- 변호사 엔도 마코토는 1992년 2월 『아침까지 생방송!』에서 일본 전국 폭력단원 접촉 후 결론으로, "3분의 1은 동화 지구 출신, 나머지 3분의 1은 재일 한국인・조선인, 나머지 3분의 1은 사회적 낙오자"라고 말했다.
- 미조구치 아쓰시는 『주간 포스트』 2017년 7/21・28 합병호 기사에서 "폭력단 업계에 재일이 많은 것은 사실"이라며 "재일 한국・조선인과 피차별 부락 출신자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측면을 소개하고 있다.[40]
- 2023년 정부 통계에 따르면, 그 해 형무소 수감자 중 폭력단 가입자의 국적별 비율은 일본 국적 641명(약 98.0%), 대한민국・조선 국적 9명(약 1.4%)이다.[37]
일제 강점기와 그 이후, 여러 사회적, 경제적, 역사적 요인으로 인해 일부 재일 한국인들이 야쿠자에 가담하게 되었다.
4. 1. 재일 한국인과 야쿠자
일제 강점기 차별과 억압 속에서 많은 재일 한국인들이 생계를 위해 야쿠자에 가담하게 되었다.[40] 태평양 전쟁 이후,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재일 한국인 야쿠자들은 암시장을 장악하며 세력을 키웠다.[41] 동성회의 마치이 히사유키, 야나가와구미의 야나가와 지로 등은 재일 한국인 출신 야쿠자로서, 한국 정치권과도 깊은 관계를 맺었다.[41]1994년 한국의 주간지 《시사저널》의 취재에 따르면, 이나가와회 상담역인 한국 태생의 재일 1세 야쿠자는 6만 명의 야쿠자 중 약 10%인 6천 명이 재일이며, 중간 간부급에 많다고 말했다.[41] 야마구치구미 오사카 본부 고문인 재일 야쿠자는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미군에 점령된 일본은 경찰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일본에 남은 재일들이 일본의 주요 암시장을 독점하여 번영했다고 말했다.[41] 도쿄 긴자는 동성회가, 오사카 미나미는 명우회가 장악했지만, 오사카는 야나가와 지로가 이끄는 야나가와구미가 선두에 선 야마구치구미의 공격을 받아 붕괴되었다.[41] 5대 야마구치구미 직계 간부 120명 중 20명을 야나가와구미 출신의 재일이 차지했다.[41]
재일 야쿠자는 한일 양국 정부의 극우 관계자와 긴밀히 접촉하여 보디가드 제공, 이권 사업 참여 등을 하였고,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행동 부대로서 조선총련에 대한 파괴 공작도 했다.[41] 한국 정부와 긴밀해진 계기는 1965년 한일 회담으로, 한국 측 정계 인사의 경호를 동성회와 야나가와구미가 중심이 되어 한국계 야쿠자가 수백 명 규모로 맡았으며, 그 대가로 한국에서 정계 관계자와의 친분을 과시하면 일본 경찰에 수배될 때 한국으로 도피할 조건도 주어졌다.[41] 일본의 정재계 실력자와 교우 관계를 맺고 있던 재일 야쿠자 간부에 한국 정보 기관은 정보원으로 의존했고, 축구, 탁구 등의 국제 경기가 일본에서 열릴 때 한국 대표는 재일 야쿠자에게 재정적으로 지원을 받았다.[41]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한국 정부로부터 한국 내 풍속점, 도박장, 호텔업 진출이 인정되었다.[41]
2011년 한국의 월간지 《월간조선》은 재일 한국인 야쿠자인 극동회 회장 마쓰야마 신이치를 취재했다.[42] 그는 자신의 성장 배경과 한일 양국의 정치인, 재일 한국인의 유명인과의 친교,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의 관련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020년 현재, 지정 폭력단으로 지정된 24개 단체 중 재일 한국인・조선인이 대표를 맡은 적이 있는 단체는 과거를 포함하여 10개 단체이다.
4. 2. 한국 사회에 대한 영향
야쿠자는 한국의 조직폭력배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조직폭력배들은 일본 야쿠자의 의식, 조직 문화 등을 모방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야쿠자의 불법 활동은 한국 사회에도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히고 있다. 보이스피싱, 마약 밀매 등 국경을 넘는 범죄는 한일 양국의 협력을 통해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한국 내 범죄 조직 중 재일 한국인이나 한국계 일본인이 연루된 경우, 이들이 야쿠자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3][4]5. 야쿠자에 대한 규제 및 사회 문제
1992년 폭력단 대책법 시행으로 폭력단은 공개적인 활동이 어려워지고 자금 획득 방식 변경을 강요받았으며, 조직 간판을 걸고 사무실을 여는 것이 어려워졌다. 2000년대 들어 폭력단 배제 조례 제정이 진행되면서 구성원 일상생활 규제가 강화되어, 전력, 도시 가스, 수도 사용 계약, 공영 주택 입주, 생활 보호 및 아동 부양 수당 수급, 은행 계좌 개설, 신용 카드 제작, 융자 계약 등이 거부되었다. 2013년 미즈호 은행 폭력단 융자 사건에서는 자동차를 구입한 폭력단원에게 융자를 해준 미즈호 은행 회장과 사장 등이 사임했다.[14] 이처럼 법과 조례로 폭력단 관계자의 기본적 인권 침해가 우려될 정도의 규제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탈리아 마피아 대책 통일법처럼 폭력단 존재 자체를 비합법화하지는 않았다.
폭력단 대책법과 폭력단 배제 조례 시행, 일본 사회 저출산 고령화로 1960년대 최성기를 맞이한 폭력단은 세력이 계속 감소하여, 2023년 시점 구성원 및 준구성원 수가 전성기의 약 1/9 수준으로 줄었고, 그 절반이 50대 이상으로 고령화되었다.
야마히라 시게키에 따르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계통을 가진 조직은 지정 폭력단 마쓰바회 2차 단체인 도박꾼계 오쿠보 일가이다.[15]
2000년대 각 도도부현, 시정촌에서 폭력단 배제 조례가 시행되면서, 각종 사업자는 계약 상대방이 폭력단 관계자인지 구두 또는 서면으로 확인해야 했다.[43] 폭력단 관계자임을 밝히면 약관에 따라 계약이 거부되거나 협박죄로 체포될 수 있고, 아니라고 거짓말하면 계약 해제나 사기죄로 체포될 수 있다. 폭력단 배제 조례 제정 이후, 폭력단 탈퇴 후 5년 미경과자, 폭력단 관계자, 밀접 교제자와 그 가족은 행정 서비스(공영 주택 입주, 생활 보호, 아동 양육 수당 수급)는 물론, 라이프라인인 도시 가스[44], 슈퍼 포인트 카드[45], 신용카드 가입[46], 은행 계좌 개설(기존 계좌 유지[47]), 부동산 구매·임대 계약[48], 자동차 구매 계약[49], 호텔 숙박[50], 휴대 전화 구매[51], 골프장 이용[52] 등이 불가능해져 일상생활에 큰 제약이 가해졌다. 미조구치 아츠시는 "한심한 것은 야쿠자 측이다. 법적으로 문제 소지가 있는 폭력단 배제 조례에 반론할 이론 무장을 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비꼬았다.[53]
구성원이 폭력단을 그만두더라도 폭력 배제 조례 규제가 5년간 지속되어 전 구성원은 취업이 어려운 상황이 많아, 그만두고 싶어도 못 그만두는 구성원도 존재한다. 이탈 의향 조직원 지원 움직임, 지원 제도 마련 움직임도 있지만, 일반인들은 곤궁한 전 조직원을 "자업자득"으로 보는 시각이 많고, 지원 제도가 폭력단에 이용될 우려도 있어 진전되지 않고 있다. 경찰 등 지원으로 이탈한 전 구성원은 2006년~2015년 사이 약 6,120명이다. 반면, 지원을 받아 취업한 것은 147명(약 2%)뿐이다. "생활 보호를 받고 싶다" 등 일할 의욕이 없는 사람도 많고, 옛 동료와 관계가 끊이지 않거나, 무직 상태로 돈에 곤궁하여 다시 돌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54]
폭력단 이탈자 갱생 촉진을 위해 폭력단 추방 운동 추진 도민 센터가 이탈자 취업 증명서를 발행하여 금융 기관에 계좌 개설을 촉구하지만, 위장 이탈 우려, 계좌 범죄·부정 사용 우려로 금융 기관은 소극적이다.[55] 2023년, 폭력단 이탈 5년 후에도 계좌 개설을 거부당한 전 조직원 남성이 미즈호 은행을 상대로 10만엔 손해 배상을 청구하여 미토 간이 재판소에 제소했다(이후 미토 지방 재판소 이송). 원고 측 변호사는 계좌 개설 거부가 사회 복귀를 방해하는 부당한 차별이라고 주장한다.[56]
경찰은 "과거와 달리, 최근 폭력단은 악랄한 범죄를 조직적으로 감행하는 범죄 조직"으로 간주하고 괴멸을 목표로 한다.[57] 또한, "인의를 숭상하는 자는 논외"[57]라며 폭력단 소재 오락 작품 제작에 제동을 걸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1973년 영화 『야마구치구미 3대』 제작 후 가택 수색, 프로듀서 체포(22건 혐의) 등이 있다.
최근, 2009년 후쿠오카현 경찰 명의 "폭력단 관계 서류, 잡지 판매 협력 요청(요청)" 문서가 후쿠오카현 내 편의점에 송부되었다. 일본 잡지 협회, 출판사는 우려를 표명했고, 미야자키 마나부는 "표현의 자유 규제 우려, '요청'이라도 제작자 위축, 자율 규제 강화 가능성"을 제기하며 손해 배상을 청구했지만 패소했다.[58]
키타노 타케시는 작품에 폭력단이 등장하는 것에 대해 "폭력단 찬미 표현은 없으며, 권총 사용자는 행복해질 수 없는 시나리오"라고 말했다.[59]
경찰청은 "한구레 집단"으로 불리는 전 폭주족 그룹 등에 대해, "준폭력단" 규정을 신설, 2013년부터 실태 규명 노력을 시작했다.[140] "기존 폭력단처럼 조장 중심 상하 관계가 뚜렷하지 않지만, 소속 멤버나 폭주족 OB 등이 번화가 등에서 집단으로 상습적 폭력적 불법 행위 저지르는, 폭력단 준하는 집단인 준폭력단"이 정의이며, 2012년 도쿄 "롯폰기 클럽 습격 사건" 계기로 신설되었다.[141]
경찰청에 따르면, 이 준폭력단으로 규정되는 그룹의 일부는 폭력단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142] 2018년에 오사카부 경이 적발한 한구레 "아비스 그룹"은 경영하는 걸즈 바의 매출 일부를 지정 폭력단・임협 야마구치구미 계열 조직에 건네고 있었다.[143]
2018년 말 현재, 공표된 "간토 연합 OB", "도라곤", "우치고시 스펙터 OB", "오타 연합 OB"를 포함한 수도권 8단체와 2017년에 오사카부 경이 지정한 2단체를 합쳐 총 10단체가 준폭력단으로 간주되고 있다.[144][145][146]
경시청은 2022년 12월, 청내 정보를 부문 횡단적으로 수집하여 분석하고, 한구레 집단의 적발로 연결하는 특명반을 발족시켰다.[147]
후쿠오카현 경은, 한구레 집단 대책을 전문으로 하는 전국 최초의 단속 본부를 2023년 1월에 설치했다. 단속 본부는, 폭력단이나 지능범 수사 등에 종사해 온 약 230명 체제로 발족하여, 복수의 특별 수사반이 한구레 집단의 실태 파악 및 수사를 실시한다. 폭력단이 조장을 중심으로 하는 피라미드형 조직인 데 반해, 한구레 집단은 지휘 명령 계통이 명확하지 않고 이합집산을 반복함으로써 폭력단보다 실태 파악이 어렵기 때문에, 단속 본부는 이러한 한구레 집단에 관한 정보를 수집・분석하여 실태를 해명하고, 적발로 연결한다. 간토나 간사이의 한구레 집단은 폭력단과 손을 잡지 않고 활동하는 경우가 많은 데 반해, 후쿠오카에서는 폭력단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불법 약물의 밀매나 특수 사기 등에서 한구레 집단을 하위 조직으로 거느리고 있는 실태가 보인다고 여겨진다[148]
- 민사 개입 폭력
- 기업 대상 폭력
- 행정 대상 폭력
- 항쟁 사건 - 청부 살인
- 소년 범죄 - 폭력단원과 관계를 맺은 소년이 이용당하여 폭행이나 사기 등의 범죄에 손을 댄 사례가 있다.
- 지하 경제
- * 암표상
- * 승부 조작 - 스모 야구 도박 문제 - 스모 승부 조작 문제
- * 총회꾼
- * 토지 강탈 - 내쫓는 업자
- * 인신매매 - 매춘
- * 암흑 금융
- * 기업 심부름꾼
- * 알선책
5. 1. 법적 규제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산업 발전에 따라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인력이 필요해졌다. 탄광, 수운, 항만, 대규모 공사 현장에는 농촌이나 어촌에서 건장한 남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들 중 체력과 기력이 있는 남자가 형님 역할을 하며 중심이 되어 "조직"을 만들어갔다. 노동자들 간의 다툼이 잦았고 경찰력이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소위 자경단적인 역할을 가진 폭력단 조직도 결성되었다.이러한 세력을 방치할 수 없어 1931년(쇼와 6년) 다카하시 모리오 경시총감, 1935년(쇼와 10년) 오구리 가즈오 경시총감의 지휘 하에 도쿄부 내 폭력단, 정치 결사 구성원 등을 일제 검거했다.[6] 1935년 검거는 도쿄 외 부현에서도 경찰과 내무성 경보국이 협력한 대규모 검거였으며,[7] 같은 해 8월 말까지 전국 검거자 수는 19,200명을 넘어섰다.[8]
태평양 전쟁 종결 직후, 일본이 연합국에 패배하여 초토화되면서 물자가 부족해지고 암시장이 증가했다. 노점을 본업으로 하는 테키야계 단체가 늘어난 원인은 패전으로 인한 일본 사회의 치안 악화였다. 전후 혼란 속에서 형성된 "구렌타이"(불량배) 등 불량 집단에서 폭력단이 탄생하기도 했다. 경찰도 급성장하는 폭력단 검거에 나섰다. 경시청 관내만 해도 1950년(쇼와 25년) 4월 약 5,000명, 같은 해 7월 약 200명을 대량 검거(폭력단 사냥)했지만, 많은 수를 석방할 수밖에 없었고[9]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었다.
노동 조합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기업 측이 폭력단을 이용하여 노동 쟁의, 파업을 해결하려는 경우도 있었다. 1960년(쇼와 35년) 미이케 탄광 쟁의에서는 조합원이 쟁의에 개입한 폭력단원에게 자살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10]
일본의 급속한 경제 부흥에 따라 오키나와, 연예 흥행 등 합법적인 경제 활동에만 종사하는 "기업 사제(프론트 기업)"도 생겨났다. 현대 폭력단은 테키야 계통 단체(테키야계 폭력단), 도박꾼 계통 단체(도박꾼계 폭력단)가 모두 있지만, 명확한 구별은 겉치레에 불과하며 다양한 불법 활동을 한다. 이 당시 폭력단은 공공연하게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경찰과의 뒷거래(소위 "교제")를 하거나, 미디어에 노출되기도 했다.
버블 경제 영향으로 폭력단 세력이 증대했던 시기(1986년~1991년)에 폭력단은 전국 지가 급등을 배경으로 토지 매입을 했다. 범죄 행위로 억 단위 돈을 손에 넣는 폭력단 젊은 간부도 나타났다.[11][12][13]
1992년 폭력단 대책법 시행으로 폭력단은 공공연한 장소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지고 자금 획득 활동 변경을 강요받았으며, 조직 간판을 걸고 사무소를 여는 것이 어려워졌다. 2000년대 들어 일본 전국 지방 자치 단체에서 폭력단 배제 조례 제정이 진행되면서 구성원 일상생활 규제도 진행되어, 구성원으로 판명된 인물은 전력, 도시 가스, 수도 사용 계약, 공영 주택 입주 및 동거, 생활 보호 및 아동 부양 수당 수급, 은행 계좌 개설, 신용 카드 제작, 융자 계약 등을 거부당하게 되었다. 2013년 미즈호 은행 폭력단 융자 사건에서는 자동차를 구입한 폭력단원에게 융자를 해준 미즈호 은행 회장과 사장 등이 사임했다.[14] 이처럼 각 법과 조례로 폭력단 관계자의 기본적 인권 침해가 우려될 정도의 규제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탈리아 마피아 대책 통일법과 같은 폭력단 존재 자체를 비합법화하지는 않았다.
2000년대 각 도도부현, 시정촌에서 폭력단 배제 조례가 시행되면서, 각종 사업자는 계약 상대방이 폭력단 관계자인지 구두 또는 서면으로 확인해야 했다.[43] 폭력단 관계자임을 자칭하면 약관을 근거로 계약이 거부되거나 협박죄로 체포될 수 있고, 아니라고 거짓말하면 계약이 해제되거나 사기죄로 체포될 수 있다. 폭력단 배제 조례 제정 이후, 폭력단 탈퇴 후 5년 미경과자, 폭력단 관계자, 밀접 교제자와 그 가족은 각종 행정 서비스(공영 주택 입주/동거, 생활 보호, 아동 양육 수당 수급)를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라이프라인인 도시 가스[44], 슈퍼 포인트 카드[45], 신용카드 가입[46], 은행 계좌 개설(기존 계좌 유지[47]), 부동산 구매·임대 계약[48], 자동차 구매 계약[49], 호텔 숙박[50], 휴대 전화 구매[51], 골프장 플레이[52] 등이 불가능해지는 등 일상생활에 큰 제약이 가해졌다. 미조구치 아츠시는 "한심한 것은 야쿠자 측이다. 법적으로 문제 소지가 있는 폭력단 배제 조례에 반론할 이론 무장을 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비꼬았다.[53]
구성원이 폭력단을 그만두더라도 폭력 배제 조례 규제가 5년간 지속되어 전 구성원은 취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그만두고 싶어도 못 그만두는 구성원도 존재한다. 이탈 희망 조직원 지원 움직임이나 지원 제도 마련 움직임도 있지만, 일반인들은 곤궁한 전 조직원을 "자업자득"으로 보는 시각이 많고, 지원 제도가 폭력단에 이용될 우려도 있어 진전되지 않고 있다. 경찰 등 지원으로 이탈한 전 구성원은 2006년~2015년 사이 약 6,120명이다. 반면, 지원을 받아 취업한 것은 147명(약 2%)에 그친다. "생활 보호를 받고 싶다" 등 일할 의욕이 없는 사람도 많고, 옛 동료와 관계가 끊이지 않거나, 무직인 채로 돈에 곤궁하여 다시 돌아가는 예도 적지 않다.[54]
폭력단 이탈자 갱생 촉진 목적으로, 폭력단 추방 운동 추진 도민 센터가 이탈자 취업 증명서를 발행하여 금융 기관에 계좌 개설을 촉구하지만, 위장 이탈 우려와 계좌가 범죄나 부정 사용될 우려로 금융 기관은 소극적이다.[55] 2023년, 폭력단 이탈 5년 후에도 계좌 개설을 거부당한 전 조직원 남성이 미즈호 은행을 상대로 10만엔 손해 배상을 청구하여 미토 간이 재판소에 제소했다(이후 미토 지방 재판소 이송). 원고 변호사는 계좌 개설 거부가 사회 복귀를 방해하는 부당한 차별이라고 주장한다.[56]
경찰은 "과거와 달리, 최근 폭력단은 악랄한 범죄를 조직적으로 감행하는 범죄 조직"으로 간주하고 괴멸을 목표로 한다.[57] 또한, "인의를 숭상하는 자는 논외"[57]라며 폭력단 관련 오락 작품 제작에 제동을 걸고 있다. 대표적 예로, 1973년 공개된 영화 『야마구치구미 3대』 제작 후 가택 수색을 하고 프로듀서를 22건 혐의로 체포했다.
최근, 2009년 후쿠오카현 경찰 명의로 "폭력단 관계 서류, 잡지 판매 협력 요청(요청)" 문서가 후쿠오카현 내 편의점에 송부되었다. 일본 잡지 협회나 출판사가 우려를 표명했고, 미야자키 마나부는 "표현의 자유를 규제할 우려가 있고, '요청'이라 해도 제작자를 위축시켜 자율 규제를 강화할 수 있다"며 손해 배상을 청구했지만 패소했다.[58]
키타노 타케시는 자신의 작품에 폭력단이 등장하는 것에 대해 "폭력단을 찬미한 적 없고, 권총을 사용한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는 시나리오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59]
2012년(헤이세이 24년) 지정 폭력단 중 "특히 흉악하다고 간주되는 조직"으로서 "총격, 화염병 투척 등 위험 행위를 반복할 우려가 있는 조직"을 "'''특정 위험 지정 폭력단'''", "항쟁으로 주민 생명, 신체에 위험이 미칠 우려가 있는 조직"을 "'''특정 항쟁 지정 폭력단'''"으로 지정 가능한 폭대법 개정안이 7월 성립, 10월 시행되었다. 지정으로 전국 경찰이 양 폭력단을 집중 단속할 수 있고, 경계 구역 내 조 사무실 출입 금지, 구성원 5명 이상 집합 시 체포가 가능해진다.[62] 특정 위험 지정 폭력단이 폭력적 불법 행위를 하면 중지 명령 없이 체포할 수 있다.[98] 특히 위험도가 높은 규슈 지방 폭력단 봉쇄를 노린 "개정 폭대법"[99]으로, 2012년 12월 27일 구도카이가 특정 위험 지정 폭력단, 도진회와 규슈세이도회(현·나미카와회)가 특정 항쟁 지정 폭력단으로 지정되었다.[100] 도진회와 나미카와목회(구·규슈세이도회)의 특정 항쟁 지정 폭력단 지정은 2014년 6월 27일 해제되었다.[101] 2020년 1월, 6대 야마구치구미와 고베 야마구치구미가 특정 항쟁 지정 폭력단으로 지정되었다. 2022년 12월, 6대 야마구치구미와 이케다구미가 특정 항쟁 지정 폭력단으로 지정되었다.[102]
- 폭력단원에 의한 부당한 행위의 방지 등에 관한 법률(폭력단 대책법)
- *칭찬 등 금지 명령
- 조직적인 범죄의 처벌 및 범죄수익 규제 등에 관한 법률(조직적 범죄 처벌법)
- 폭력단 배제 조례(폭배 조례)
5. 2. 사회 문제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산업 발전에 따라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인력이 필요해졌다. 탄광, 수운, 항만, 대규모 공사 현장에는 농촌이나 어촌에서 건장한 남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들 중 체력과 기력이 있는 남자가 형님 역할을 하며 중심이 되어 "조직"을 만들어갔다. 노동자들 간의 다툼이 잦고 경찰력이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경단 역할을 하는 폭력단 조직도 결성되었다.[6]1931년 다카하시 모리오 경시총감, 1935년 오구리 가즈오 경시총감의 지휘 하에 도쿄부 내 폭력단, 정치 결사 구성원 등을 일제 검거했다.[6] 1935년 검거는 도쿄 외 지역에서도 내무성 경보국이 협력한 대규모 검거였으며, 같은 해 8월 말까지 전국 검거자 수는 19,200명을 넘어섰다.[7][8]
태평양 전쟁 종결 직후, 일본은 연합국에 패배하여 초토화되었고 물자 부족과 암시장이 증가했다. 노점을 본업으로 하는 테키야계 단체가 늘어난 원인은 패전으로 인한 일본 사회의 극심한 치안 악화였다. 전후 혼란 속에서 "구렌타이"(불량배) 등 불량 집단으로부터 폭력단이 탄생하기도 했다. 경찰은 급성장하는 폭력단을 검거하기 위해 경시청 관내에서만 1950년 4월에 약 5,000명, 7월에 약 200명을 대량 검거(폭력단 사냥)했지만, 대부분 석방할 수밖에 없어[9]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노동 조합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기업 측이 폭력단을 이용하여 노동 쟁의, 파업을 해결하려는 경우도 있었다. 1960년 미이케 탄광 쟁의에서는 조합원이 쟁의에 개입한 폭력단원에게 자살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10]
일본의 급속한 경제 부흥에 따라 오키나와, 연예 흥행 등 합법적인 경제 활동에만 종사하는 "기업 사제 (프론트 기업)"도 생겨났다. 현대 폭력단은 테키야 계통(테키야계 폭력단), 도박꾼 계통(도박꾼계 폭력단)으로 나뉘지만, 명확한 구별은 겉치레일 뿐이며 다양한 불법 활동을 하고 있다. 이 당시 폭력단은 공공연하게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경찰과의 뒷거래(교제)를 하거나, 미디어에 노출되기도 했다.
버블 경제 시기(1986년~1991년) 폭력단 세력이 증대했는데, 전국 지가 급등을 배경으로 토지 매입을 하는 등 범죄 행위로 억 단위 돈을 손에 넣는 폭력단 젊은 간부가 나타나기도 했다.[11][12][13]
1992년 폭력단 대책법 시행으로 폭력단은 공개적인 활동이 어려워지고 자금 획득 방식 변경을 강요받았으며, 조직 간판을 걸고 사무실을 여는 것이 어려워졌다. 2000년대 들어 폭력단 배제 조례 제정이 진행되면서 구성원 일상생활 규제가 강화되어, 전력, 도시 가스, 수도 사용 계약, 공영 주택 입주, 생활 보호 및 아동 부양 수당 수급, 은행 계좌 개설, 신용 카드 제작, 융자 계약 등이 거부되었다. 2013년 미즈호 은행 폭력단 융자 사건에서는 자동차를 구입한 폭력단원에게 융자를 해준 미즈호 은행 회장과 사장 등이 사임했다.[14] 이처럼 법과 조례로 폭력단 관계자 기본적 인권 침해가 우려될 정도의 규제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탈리아 마피아 대책 통일법처럼 폭력단 존재 자체를 비합법화하지는 않았다.
폭력단 대책법과 폭력단 배제 조례 시행, 일본 사회 저출산 고령화로 1960년대 최성기를 맞이한 폭력단은 세력이 계속 감소하여, 2023년 시점 구성원 및 준구성원 수가 전성기의 약 1/9 수준으로 줄었고, 그 절반이 50대 이상으로 고령화되었다.
야마히라 시게키에 따르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계통을 가진 조직은 지정 폭력단 마쓰바회 2차 단체인 도박꾼계 오쿠보 일가이다.[15]
2000년대 각 도도부현, 시정촌에서 폭력단 배제 조례가 시행되면서, 각종 사업자는 계약 상대방이 폭력단 관계자인지 구두 또는 서면으로 확인해야 했다.[43] 폭력단 관계자임을 밝히면 약관에 따라 계약이 거부되거나 협박죄로 체포될 수 있고, 아니라고 거짓말하면 계약 해제나 사기죄로 체포될 수 있다. 폭력단 배제 조례 제정 이후, 폭력단 탈퇴 후 5년 미경과자, 폭력단 관계자, 밀접 교제자와 그 가족은 행정 서비스(공영 주택 입주, 생활 보호, 아동 양육 수당 수급)는 물론, 라이프라인인 도시 가스[44], 슈퍼 포인트 카드[45], 신용카드 가입[46], 은행 계좌 개설(기존 계좌 유지[47]), 부동산 구매·임대 계약[48], 자동차 구매 계약[49], 호텔 숙박[50], 휴대 전화 구매[51], 골프장 이용[52] 등이 불가능해져 일상생활에 큰 제약이 가해졌다. 미조구치 아츠시는 "한심한 것은 야쿠자 측이다. 법적으로 문제 소지가 있는 폭력단 배제 조례에 반론할 이론 무장을 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비꼬았다.[53]
구성원이 폭력단을 그만두더라도 폭력 배제 조례 규제가 5년간 지속되어 전 구성원은 취업이 어려운 상황이 많아, 그만두고 싶어도 못 그만두는 구성원도 존재한다. 이탈 의향 조직원 지원 움직임, 지원 제도 마련 움직임도 있지만, 일반인들은 곤궁한 전 조직원을 "자업자득"으로 보는 시각이 많고, 지원 제도가 폭력단에 이용될 우려도 있어 진전되지 않고 있다. 경찰 등 지원으로 이탈한 전 구성원은 2006년~2015년 사이 약 6,120명이다. 반면, 지원을 받아 취업한 것은 147명(약 2%)뿐이다. "생활 보호를 받고 싶다" 등 일할 의욕이 없는 사람도 많고, 옛 동료와 관계가 끊이지 않거나, 무직 상태로 돈에 곤궁하여 다시 돌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54]
폭력단 이탈자 갱생 촉진을 위해 폭력단 추방 운동 추진 도민 센터가 이탈자 취업 증명서를 발행하여 금융 기관에 계좌 개설을 촉구하지만, 위장 이탈 우려, 계좌 범죄·부정 사용 우려로 금융 기관은 소극적이다.[55] 2023년, 폭력단 이탈 5년 후에도 계좌 개설을 거부당한 전 조직원 남성이 미즈호 은행을 상대로 10만 엔 손해 배상을 청구하여 미토 간이 재판소에 제소했다(이후 미토 지방 재판소 이송). 원고 측 변호사는 계좌 개설 거부가 사회 복귀를 방해하는 부당한 차별이라고 주장한다.[56]
경찰은 "과거와 달리, 최근 폭력단은 악랄한 범죄를 조직적으로 감행하는 범죄 조직"으로 간주하고 괴멸을 목표로 한다.[57] 또한, "인의를 숭상하는 자는 논외"[57]라며 폭력단 소재 오락 작품 제작에 제동을 걸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1973년 영화 『야마구치구미 3대』 제작 후 가택 수색, 프로듀서 체포(22건 혐의) 등이 있다.
최근, 2009년 후쿠오카현 경찰 명의 "폭력단 관계 서류, 잡지 판매 협력 요청(요청)" 문서가 후쿠오카현 내 편의점에 송부되었다. 일본 잡지 협회, 출판사는 우려를 표명했고, 미야자키 마나부는 "표현의 자유 규제 우려, '요청'이라도 제작자 위축, 자율 규제 강화 가능성"을 제기하며 손해 배상을 청구했지만 패소했다.[58]
키타노 타케시는 작품에 폭력단이 등장하는 것에 대해 "폭력단 찬미 표현은 없으며, 권총 사용자는 행복해질 수 없는 시나리오"라고 말했다.[59]
도도부현공안위원회는 폭력단원 등에 의한 부당한 행위의 방지 등에 관한 법률 (폭력단 대책법) 제3조 규정 3가지 요건("조직 위력으로 자금 획득", "일정 비율 구성원에게 폭력단 특유 전과 존재", "계층적 조직 구성")을 모두 충족하는 폭력단을, 단체 관계자 청문 후 "폭력단원이 집단적/상습적으로 폭력적 불법 행위 등을 조장할 우려가 큰 폭력단"으로 지정, 대상 단체는 "'''지정 폭력단'''"이 된다. 지정 시 관보 공시, 3년 효력이 발생한다.[62]
지정 폭력단 구성원은 다른 폭력단보다 강력한 규제를 받는다. 폭대법 제9조는 지정 폭력단원 위력 과시 27개 "폭력적 요구 행위"에 대해 중지/재발 방지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주민 생활 피해 우려 시 조직 사무소 사용 제한 명령도 가능하다. 지정 폭력단원 외 인물이 지정 폭력단 위력을 과시하며 동일 행위 시 "준폭력적 요구 행위"로 간주, 동일 규제를 받는다. 단, 비지정 폭력단원이 비지정 폭력단 위력 과시하며 동일 행위 시 폭대법 규제 대상이 아니다.[60][61] 항쟁에 시민 연루 시, 지정 폭력단 수장 사용자 책임(민법 715조)으로 피해자 배상 책임을 지게 할 수 있다.[62]
2023년 말 기준 지정 단체는 25개이다.[63] 도도부현별 최다는 후쿠오카현(구도회, 도진회, 다이슈회, 후쿠하쿠회, 나미카와회) 5개 단체,[64][65] 2위 도쿄도 4개 단체(스미요시회, 이나가와회, 극동회, 마쓰바회), 3위 효고현 3개 단체(야마구치구미, 고베 야마구치구미, 닌쿄 야마구치구미〈현: 키즈나회〉), 4위 오사카부(사카우메구미, 아즈마구미), 히로시마현(교세이회, 쿄도회), 오카야마현(아사노구미, 이케다구미) 각 2개 단체이다.
경찰청은 2012년부터 폭력단 의사에 반하는 사업자 등 습격 사건을 "사업자 습격 등 사건"으로 칭하고, 2007년 이후 발생 건수를 공표한다. 헤이세이 25년판 경찰 백서에 따르면, 2008~2012년 발생 사업자 습격 등 사건 전국 최다는 후쿠오카현 57건, 2위 사가현 7건, 3위 도쿄도, 오카야마현 각 5건이다. 후쿠오카현 57건 중 30건은 구도회에 의한 것, 27건은 도진회, 다이슈회에 의한 것으로 보이지만, 2014년 9월 후쿠오카현 경찰 정상 작전으로 구도회 습격 사건은 거의 억제, 전국 사업자 습격 등 사건도 격감하여 2020년 1건에 그쳤다.[66]
2023년 말 기준 전체 폭력단 구성원 수(10,400명) 중 지정 폭력단 구성원 수(9,900명) 비율은 95.2%이다.[22]
| 문장 | 단체명 | 본부 소재지 | 대표자명 | 구성원 (약・명) | 최초 지정 년월일 | 지정 년월일 |
|---|---|---|---|---|---|---|
| 6대 야마구치구미 | 효고현고베시나다구시노하라혼초 4초메 3-1 | 시노다 겐이치(시노다 노부루) | 3,500 | 1992년 6월 23일[67] | 2022년 6월 23일[68] | |
| 이나가와회 | 도쿄도미나토구롯폰기 7초메 8-4 | 신 병규(기요타 지로) | 1,700 | 1992년 6월 23일[67] | 2022년 6월 23일[69] | |
| 스미요시회 | 도쿄도신주쿠구신주쿠 7초메 26-7 | 오가와 오사무 (오가와 슈지) | 2,200 | 1992년 6월 23일[67] | 2022년 6월 23일[70] | |
| 5대구도회 | 후쿠오카현기타큐슈시고쿠라키타구 우사마치 1초메 8-8 | 노무라 사토루 | 200 | 1992년 6월 26일[67] | 2022년 6월 26일[71] | |
| 교쿠류회 | 오키나와현나카가미군기타나카구스쿠손 아자 시마부쿠로 1362 | 나가야마 가츠히로 | 210 | 1992년 6월 26일[67] | 2022년 6월 26일[72] | |
| 7대아이즈코테츠회 | 교토부교토시사쿄구 이치조지쓰카모토초 21-4 | 김 원(가네코 도시노리) | 40 | 1992년 7월 27일[67] | 2022년 7월 27일[73] | |
| 6대교세이회 | 히로시마현히로시마시미나미구 미나미오카와초 18-10 | 아라세 스스무 | 120 | 1992년 7월 27일[67] | 2022년 7월 27일[74] | |
| 7대고다 잇카 | 야마구치현시모노세키시다케자키초 3초메 13-6 | 김 교환(스에히로 마코토) | 30 | 1992년 7월 27일[67] | 2022년 7월 27일[75] | |
| 4대고자쿠라 잇카 | 가고시마현가고시마시고토쓰마치 9-24 | 히라오카 요시에 | 40 | 1992년 7월 27일[67] | 2022년 7월 27일[76] | |
| 5대아사노구미 | 오카야마현가사오카시 가사오카 615-11 | 나카오카 유타카 | 50 | 1992년 12월 14일[67] | 2022년 12월 14일[77] | |
| 도진회 | 후쿠오카현구루메시 교마치 247-6 | 고바야시 테쓰지 | 320 | 1992년 12월 14일[67] | 2022년 12월 14일[78] | |
| 2대신와회 | 가가와현다카마쓰시 시오우에초 2초메 14-4 | 기라 히로후미 | 40 | 1992년 12월 16일[67] | 2022년 12월 16일[79] | |
| 소아이회 | 지바현이치하라시 우루이도 1343-8 | 시이즈카 노부루 | 90 | 1992년 12월 24일[67] | 2022년 12월 24일[80] | |
| 3대쿄도회 (3대 쿄도회) | 히로시마현오노미치시 야마나미초 3025-1 | 이케자와 노조무 | 60 | 1993년 3월 4일[67] | 2023년 3월 4일[81] | |
| 다이슈회 | 후쿠오카현다카와시 오아자 유게다 1314-1 | 히다카 히로시 | 70 | 1993년 3월 4일[67] | 2023년 3월 4일[82] | |
| 10대사카우메구미 | 오사카부오사카시니시나리구 다이시 1초메 3-17 | 이 정수(기노시타 마사히데) | 10 | 1993년 5월 26일[67] | 2023년 5월 26일[83] | |
| 극동회 | 도쿄도신주쿠구가부키초 2초메 18-12 | 다카하시 히토시 | 310 | 1993년 7월 21일[67] | 2023년 7월 21일[84] | |
| 2대아즈마구미 | 오사카부오사카시니시나리구 산노 1초메 11-8 | 타키모토 히로시 | 60 | 1993년 8월 4일[67] | 2023년 8월 4일[85] | |
| 마쓰바회 | 도쿄도다이토구니시아사쿠사 2초메 9-8 | 이토 요시카츠 (이토 요시마사) | 300 | 1994년 2월 10일[67] | 2024년 2월 10일[86] | |
| 4대후쿠하쿠회 | 후쿠오카현후쿠오카시하카타구 치요 5초메 18-15 | 김 국태(김성 국태) | 70 | 2000년 2월 10일[67] | 2024년 2월 10일[87] | |
| 나미카와회 | 후쿠오카현오무타시 야에마치 38-1 | 박 정호(나미카와 마사히로) | 150 | 2008년 2월 28일[67] | 2023년 2월 28일[88] | |
| 고베 야마구치구미 | 효고현 가코군이나미초 나카무라 아자 이케노아토 1379-1 | 이노우에 구니오 | 140 | 2016년 4월 15일[89][90] | 2022년 4월 15일[91] | |
| 키즈나회 (구칭・닌쿄 야마구치구미) | 오사카부 오사카시주오구 시마노우치 1초메 14-14 | 김 정기(오다 반세이) | 60 | 2018년 3월 22일[92] | 2024년 3월 22일[93] | |
| 간토 세키네구미 | 이바라키현쓰치우라시 사쿠라마치 4초메 10-13 | 오츠카 이쓰오(오츠카 나리아키) | 90 | 2018년 4월 25일[94] | 2024년 4월 25일[95] | |
| 이케다구미 | 오카야마현오카야마시기타구 다마치 2초메 12-2 | 김 효지(이케다 다카시) | 60 | 2021년 11월 11일 | 2021년 11월 11일[96] |
- 최초 지정 년월일> 가나다순. 조명, 구성원 수, 대표자명은 『레이와 5년 조직 범죄의 정세』에 기재된 『그림 1-25 지정 폭력단 목록 (25 단체)』[97]에 따른다. 대표자명의 () 내는 통칭, 인원은 준 구성원을 제외한 구성원만.
2012년 지정 폭력단 중 "특히 흉악하다고 간주되는 조직"으로서, "총격, 화염병 투척 등 위험 행위를 반복할 우려가 있는 조직"을 "'''특정 위험 지정 폭력단'''", "항쟁으로 주민 생명, 신체 위험 초래 우려 조직"을 "'''특정 항쟁 지정 폭력단'''"으로 지정 가능한 폭대법 개정안이 7월 성립, 10월 시행되었다. 지정으로 전국 경찰은 양 폭력단 집중 단속, 경계 구역 내 조 사무실 출입 금지, 구성원 5명 이상 집합 시 체포가 가능해진다.[62] 특정 위험 지정 폭력단 폭력적 불법 행위 시 중지 명령 없이 체포 가능하다.[98] 특히 위험도 높은 규슈 지방 폭력단 봉쇄 목적 "개정 폭대법"[99]으로, 2012년 12월 27일 후쿠오카현 본거지 3단체, 구도카이는 특정 위험 지정 폭력단, 도진회, 규슈세이도회(현 나미카와회)는 특정 항쟁 지정 폭력단으로 지정되었다.[100] 도진회, 나미카와목회(구 규슈세이도회) 특정 항쟁 지정 폭력단 지정은 2014년 6월 27일 해제되었다.[101] 2020년 1월, 6대 야마구치구미, 고베 야마구치구미는 특정 항쟁 지정 폭력단으로 지정되었다. 2022년 12월, 6대 야마구치구미, 이케다구미는 특정 항쟁 지정 폭력단으로 지정되었다.[102]
경찰청은 "한구레 집단"으로 불리는 전 폭주족 그룹 등에 대해, "준폭력단" 규정을 신설, 2013년부터 실태 규명 노력을 시작했다.[140] "기존 폭력단처럼 조장 중심 상하 관계가 뚜렷하지 않지만, 소속 멤버나 폭주족 OB 등이 번화가 등에서 집단으로 상습적 폭력적 불법 행위 저지르는, 폭력단 준하는 집단인 준폭력단"이 정의이며, 2012년 도쿄 "롯폰기 클럽 습격 사건" 계기로 신설되었다.
6. 관련 통계
(약・명)
(3대 쿄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