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족의 대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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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3세기부터 7세기까지 일어난 게르만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의 대규모 이동을 의미한다. 게르만족은 기원전 1000년 이후 스칸디나비아 남부와 독일 북부에서 엘베강 및 오데르강 사이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로마 제국 시기에는 라인강 서쪽의 켈트족을 밀어내고 남하하여 로마와 충돌했다. 4세기 훈족의 침입으로 시작된 1차 이동기에는 서고트족, 동고트족, 프랑크족 등이 서로마 제국 영토로 이동하여 왕국을 건설했다. 500년에서 700년 사이의 2차 이동기에는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의 이동이 두드러졌고, 불가르족은 발칸반도에 정착했다. 이 과정에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중세 유럽이 형성되었으며, 야만인 정체성에 대한 다양한 논쟁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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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족의 대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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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다른 이름 | 대이동 (Great Barbarian Invasion) |
시기 | 약 375년–568년 또는 그 이후 |
장소 | 유럽 및 지중해 지역 |
사건 | 여러 민족들이 쇠퇴하는 로마를 침입함 |
관련 정보 | |
관련 사건 | 훈족의 침입, 서로마 제국의 멸망, 게르만족의 확산 |
주요 민족 | 고트족, 반달족, 프랑크족, 알라니족, 훈족, 랑고바르드족, 앵글로색슨족 |
결과 | 서로마 제국의 멸망 중세 유럽의 형성 게르만 문화의 확산 |
역사적 맥락 | |
배경 | 로마 제국의 쇠퇴 게르만족의 인구 증가 및 압박 훈족의 서진 |
주요 사건 | 375년: 훈족의 동고트족 침입 410년: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 455년: 반달족의 로마 약탈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 568년: 랑고바르드족의 이탈리아 반도 침입 |
영향 | |
정치적 영향 | 서로마 제국의 멸망 및 새로운 게르만족 왕국들의 등장 중세 유럽의 정치적 분열 |
사회적 영향 | 로마 문화와 게르만 문화의 융합 기독교의 확산 |
문화적 영향 | 게르만족의 언어, 법률, 관습 등이 유럽 문화에 큰 영향 새로운 예술과 건축 양식의 발전 |
논쟁점 | |
원인 | 대이동의 원인에 대한 다양한 학설 존재 (기후 변화, 인구 증가, 훈족의 압박 등) |
범위 | 대이동의 범위와 시기에 대한 다양한 해석 존재 |
긍정적/부정적 평가 | 대이동에 대한 긍정적/부정적 평가가 공존 (문화 교류 촉진 vs. 파괴와 혼란) |
2. 배경
고대 말기부터 중세 초기에 걸쳐 서로마 제국 영역 내로 이동한 게르만족에 대해 설명한다.
로마 제국 영역에 처음 침입한 것은 서고트족이고, 뒤이어 동고트족이 침입했다. 이들은 훈족에게 약탈과 학살을 당해 동로마 제국 영내로 도망쳐 용병으로 일하며 지위를 쌓았다. 이후 부르군트족은 프랑스 북부, 랑고바르드족은 이탈리아, 앵글로-색슨족과 주트족은 브리타니아, 알레마니족(켈트계와 혼혈됨)은 남서독일에 침입했다.
프랑크족은 켈트계, 슬라브계, 라틴계 민족과 게르만 제족이 연합한 그룹으로 서유럽을 담당하게 되었다. 고트족 등 초기 이동한 동쪽 게르만족은 로마인에게 동화되었지만, 프랑크족은 로마화되면서도 독일, 영국 등의 국가 근간을 세웠다.
북유럽의 게르만족은 바이킹으로 활동하며 각지에 혈통을 남겼다.[54]
2. 1. 게르만족의 기원
게르만족은 기원전 1000년 이후 스칸디나비아 남부 및 독일 북부 지역을 떠나 엘베강 및 오데르강 사이의 인접한 지역으로 이주했다.[50][51] 기원전 200년경, 게르만족의 첫 이주 물결은 라인강 서쪽의 켈트족들을 밀어내며 남쪽과 서쪽으로 이동하여 독일 남부로 이동했고, 기원전 100년경에는 로마의 갈리아 및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까지 이르렀으나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저지되었다. 타키투스와 카이사르가 묘사한 이들이 바로 서게르만족 집단이었다. 이후 기원전 600년에서 300년 사이, 게르만족은 스칸디나비아에서 발트해 해안가로 동쪽, 남쪽으로 이동하여 카르파티아산맥 인근 비스와강으로 이주했다. 타키투스 시대에는 텐크테리족, 케루스키족, 헤르문두리족, 카티족 등 덜 알려진 부족들이 있었으나, 게르만족 부족끼리의 통혼 및 연맹으로 알레마니족, 프랑크족, 색슨족, 프리슬란트족, 튀링기이족 같은 익숙한 부족들이 생겨났다.[52]2. 2. 슬라브족의 기원
게르마니아 동쪽 절반(현재 폴란드, 체코 등의 지역)과 사르마티아(현재 벨라루스 남부에서 우크라이나)에는 스키타이와 사르마티아의 영향을 받은 슬라브족의 문화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프셰보르스크 문화나 자루빈치 문화 등을 이루며, 주변의 켈트족이나 게르만족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다. 훈족에 밀려 동유럽 전역으로 진출하여 슬라브계가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된다.[54]최근 고대 켈트계 민족 연구의 영향으로 원시 슬라브인에 대한 연구도 깊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반달족인데, 이들은 원래 프셰보르스크 문화에 속하는 부족으로 판명되었다. 어떤 이유(아마도 인근 고트족과의 교류)로 게르만계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반달어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어, 이들의 일상 언어가 정말 게르만계 언어였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어휘상 고트어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슬라브어도 고트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언어이며, 고트어의 영향만으로 반달어가 게르만어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반달족은 남유럽과 북아프리카로 침입했지만, 이때쯤에는 그들이 게르만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지역에는 사르마티아라고 불리는 이란계 민족들도 정착해 있었으며, 고대 말기에는 훈족이나 아바르족 등의 기마 민족이 침입하여 슬라브계와 게르만계 민족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3. 전개
민족 대이동은 크게 두 차례의 물결로 나눌 수 있다. 300년에서 500년 사이에 발생한 1차 이동은 훈족의 침입으로 시작되었으며, 서고트족, 동고트족, 프랑크족 등 다양한 게르만 부족들이 로마 제국 영토로 이동하여 새로운 왕국들을 건설하였다. 이 과정에서 로마 약탈(410년)과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폐위(476년)와 같은 중요한 사건들이 발생했다.[53]
3. 1. 1차 이동기 (300년 ~ 500년)
테르빙기족은 376년에 훈족과 충돌한 후 다뉴브강을 건너 로마 영토로 들어갔다. 이후 마르키아노폴리스에서 지도자 프리티게른이 루피키누스와 회담 중에 살해당하자, 테르빙기족은 반란을 일으켰다.[53] 이 반란으로 서고트족이 형성되었으며, 이들은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410년에 로마를 약탈하고, 이후 갈리아를 거쳐 이베리아에 서고트 왕국을 세웠다.[53]오도아케르가 이끈 헤룰리족, 루기이족, 스키리이족 연합군은 476년에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고 로마 영토에 들어왔다. 이후 테오도리쿠스 대왕이 이끄는 동고트족이 이탈리아에 정착했다.
갈리아에서는 프랑크족(3세기부터 로마와 연합해 온 서부 게르만 부족들의 융합)이 5세기에 걸쳐 점차 로마 영토로 들어왔다. 킬데리쿠스 1세의 세력 규합과 그의 아들 클로비스 1세가 486년 시아그리우스를 상대로 거둔 결정적인 승리를 통해, 프랑크족은 북부 로마령 갈리아의 지배자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알레마니족, 부르군트족, 서고트족의 도전을 막아낸 프랑크 왕국은 훗날 프랑스와 독일의 중심이 되었다.
앵글로색슨인의 브리타니아 정착은 5세기에 로마의 브리타니아 지배가 끝나면서 이루어졌다.[53] 부르군트족은 5세기에 북서부 이탈리아, 스위스, 동부 프랑스에 정착했다.
3. 2. 2차 이동기 (500년 ~ 700년)
500년에서 700년 사이에 슬라브 부족들은 중앙 유럽의 더 많은 지역에 정착하여 남부 및 동유럽으로 더 깊숙이 진출했고, 점차 유럽 동부 절반을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지역으로 만들었다.[12] 이 과정에는 아바르족과 같은 튀르크 부족과 마자르인도 관여했다. 567년, 아바르족과 롬바르드족은 게피드 왕국 대부분을 파괴했다. 롬바르드족은 6세기에 헤룰리족, 수에비족, 게피드족, 튀링기족, 불가르족, 사르마티아족, 작센 동맹과 함께 이탈리아에 정착했다. 이후 바이에른족과 프랑크족이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정복하고 통치했다.


불가르족은 2세기부터 코카서스 산맥 북쪽 폰토스 스텝 지역을 점령했으나, 하자르족에게 밀려 서쪽으로 이동하여 7세기에 비잔틴 제국 영토와 하부 다뉴브 강을 지배했다. 이로 인해 발칸 반도의 인구 구성이 바뀌어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주를 이루게 되었고, 발칸 산맥에는 토착민의 소규모 집단이 살아남았다.[15][16]
크로아티아인들은 현대 크로아티아와 서부 보스니아에 정착했으며, 세르비아인들은 몬테네그로 주변 지역인 라시아(남서부 세르비아)에 정착했다.[17] 7세기 중반까지 세르비아 부족들은 북부 알바니아를 침략했다.[17] 9세기까지 발칸 중부(현대 코소보, 세르비아, 마케도니아에 해당)와 남부 및 중앙 알바니아 지역은 불가르족에 의해 침략되고 정착되었다.[17]
초기 비잔틴-아랍 전쟁 동안 아랍군은 7세기 말과 8세기 초에 소아시아를 통해 동남 유럽을 침략하려 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717-718)에서 비잔틴과 불가르족의 연합군에 의해 패배했다. 하자르-아랍 전쟁 동안 하자르족은 아랍의 유럽 진출을 코카서스 너머로 막았다(7세기와 8세기). 동시에 무어인(아랍인과 베르베르인으로 구성)은 지브롤터를 통해 유럽을 침략하여 히스파니아를 정복했지만(711년), 투르 전투에서 프랑크족에게 저지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이후 천 년 동안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사이의 경계를 확정지었다. 그 다음 세기 동안 이슬람교는 902년까지 시칠리아의 대부분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895년경부터 시작된 카르파티아 분지의 헝가리 정복과 그 이후의 유럽에 대한 헝가리의 침략, 그리고 8세기 말부터 시작된 바이킹 팽창은 이 시기의 마지막 대규모 이동으로 여겨진다. 아일랜드, 로마 서부, 비잔틴에서 온 기독교 선교사들은 점차적으로 비이슬람교도들을 개종시키고 기독교 세계에 통합시켰다.
4. 주요 민족
고대 말기부터 중세 초기에 걸쳐 서로마 제국 영역 내로 이동해 온 주요 게르만 부족으로는 고트족(서고트족, 동고트족), 부르군트족, 랑고바르드족, 앵글로색슨족, 주트족 등이 있다.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은 훈족의 침입으로 동로마 제국 영내로 이동하여 용병으로 활동했다. 부르군트족은 프랑스 북부, 랑고바르드족은 이탈리아, 앵글로색슨족과 주트족은 브리타니아, 알레만족은 남서독일에 각각 정착했다.
프랑크족은 켈트계, 슬라브계, 라틴계 민족과 게르만 제족이 연합한 그룹으로 서유럽을 담당하게 되었다. 초기 이동을 시작한 동쪽의 게르만족은 로마인에게 동화되었지만, 프랑크족은 로마화되면서도 영향력을 유지하며 독일, 영국 등의 국가의 근간을 세웠다.
북유럽 사람들은 바이킹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각지에 혈통을 남겼다.
4. 1. 게르만족
게르만족은 기원전 1000년 이후 스칸디나비아 남부와 독일 북부[9][10]에서 엘베강과 오데르강 사이의 인접 지역으로 이동했다. 첫 번째 이동은 서쪽과 남쪽으로 이동하여 (기원전 200년경에 거주하던 켈트족을 라인강 서쪽으로 밀어냈고), 기원전 100년까지 갈리아와 치살피나 갈리아의 로마 속주에 이르기까지 독일 남부로 진출했는데, 그곳에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저지당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서기 56–117)와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44)가 묘사한 것은 바로 이 서부 집단이었다.
600년에서 300년 사이에 스칸디나비아에서 두 번째 게르만족의 이동이 동쪽과 남쪽으로 일어나 발트해 반대편 해안으로 이동하여 카르파티아 산맥 근처의 비스툴라강을 따라 이동했다. 타키투스 시대에는 텐크테리족, 케루스키족, 헤르문두리족 및 카티족과 같은 덜 알려진 부족이 있었지만, 연합과 혼인이 이루어지면서 알레만니족, 프랑크족, 색슨족, 프리지족 및 튀링기족으로 알려진 친숙한 집단이 형성되었다.
서고트족, 동고트족, 프랑크족, 앵글로색슨족, 부르군트족, 랑고바르드족 등은 고대 말기부터 중세 초기에 걸쳐 서로마 제국의 영역 내에 거주하게 된 게르만계 민족들이다. 이들은 훈족의 침입으로 인해 로마 제국 영내로 이동해 왔으며, 일부는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여 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1. 1. 서고트족
테르빙기족은 376년 훈족과 충돌한 후 다뉴브강을 건너 로마 영토로 들어갔다. 이후 마르키아노폴리스에서 이들의 지도자 프리티게른이 루피키누스와 회담 중에 살해당하자,[53] 테르빙기족은 반란을 일으켰다. 테르빙기족에서 생겼거나 주로 고트족 집단들의 결합으로 인해 생긴 집단인 서고트족은 갈리아에 정착하기 앞서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410년에 로마를 약탈했고,[53] 50년 뒤 이베리아에 250년 간 지속된 서고트 왕국을 세웠다.원래 서고트족은 드네프르강 양안에 거주했으나, 아틸라의 압박으로 발칸 반도 북부로 이주하여 동로마 제국의 용병으로 거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5세기 초, 동로마 제국에서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던 서고트족 지도자 알라리크 1세는 급료 지급 문제로 제국과 대립하여 동로마 제국에서 이반, 서로마 제국 황제 호노리우스의 폭정에 시달리던 비 이탈리아계 주민들의 요청을 받아 이탈리아 반도로 침입을 시작했다. 당시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는 로마 약탈 소식을 접했음에도 라벤나에 틀어박혀 있었다. 418년 로마 제국과의 계약에 의해 서로마 제국으로의 정착이 인정되어, 툴루즈를 중심으로 서고트 왕국이 발생했다. 5세기 중반 서로마 제국의 실권을 서고트족 지도자가 쥐고, 로마 제국의 이름 아래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에서의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갈리아는 프랑크족과의 항쟁으로 6세기 초 왕국 영역에서 벗어나, 왕국의 중심은 이베리아 반도로 옮겨졌다. 그 후에도 이베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지배가 이어졌지만, 711년 우마이야 왕조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이베리아 반도는 그 후 레콘키스타의 무대가 된다.
4. 1. 2. 동고트족
동고트족은 아틸라의 압박에서 벗어나 발칸 반도 북부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용병으로서 동로마 제국 내에 거주하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에서 군사령관과 집정관을 역임한 동고트 왕 테오도리크는 동로마 황제 제논의 명령으로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제논과 대립하던 이탈리아 영주 오도아케르를 토벌했다.[53] 그 공적으로 테오도리크는 493년에 로마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로부터 이탈리아 왕위를 인정받아 이탈리아에 동고트 왕국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후 동고트 왕국은 동로마 제국과 대립하여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파견한 군단에 의해 멸망했다.4. 1. 3. 프랑크족
갈리아에서는 프랑크족(3세기부터 로마와 연합해 온 서부 게르만 부족들의 융합)이 5세기 동안 점차적으로 로마 영토로 들어왔다. 킬데리쿠스 1세와 그의 아들 클로비스 1세가 486년 시아그리우스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권력을 공고히 한 후 북부 로마 갈리아의 지배자로 자리 잡았다.[53] 알레마니족, 부르군트족, 서고트족의 도전을 물리치면서, 프랑크 왕국은 나중에 프랑스와 독일이 될 핵심 국가가 되었다.프랑크족의 이름은 3세기 중반에 처음으로 사료에 등장한다.[37] 그 용맹함이 인정받아 처음에는 서로마 제국의 용병으로 활약했지만, 4세기에는 메로바우데스영어나 플라비우스 바우토와 같이 서로마 제국에서 집정관에 취임하는 자도 나타났으며,[38] 차츰 동서 양 제국의 정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5세기에는 갈리아에서 부르군트 왕국,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키며 세력을 확장했다. 508년에는 프랑크 왕 클로비스 1세가 로마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명예 집정관으로 임명되었고, 800년에는 프랑크 왕 카롤루스 대제가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황제로서의 제관을 수여받았다.
4. 1. 4. 앵글로색슨족
브리튼의 앵글로-색슨족 정착은 5세기에 시작되었으며, 이때 로마령 브리튼에 대한 로마의 지배가 끝났다.[53]4. 1. 5. 부르군트족
부르군트족은 5세기에 이탈리아 북서부, 스위스, 프랑스 동부에 정착했다.[53] 이들은 이후 프랑크 왕국에 멸망당했다.4. 1. 6. 랑고바르드족
6세기에 랑고바르드족은 이탈리아에 정착했고, 프랑크 왕국에 멸망당했다.4. 2. 슬라브족
서기 500년에서 700년 사이에 슬라브 부족들은 중앙 유럽의 더 많은 지역에 정착하여 남부 및 동부 유럽으로 더 깊숙이 진출하였고, 점차 유럽 동부 절반을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지역으로 만들었다.[12] 아바르족과 같은 튀르크 부족과 나중에는 우랄어를 사용하는 마자르족이 이 두 번째 이동에 관여하게 되었다. 서기 567년에 아바르족과 롬바르드족은 게피드 왕국의 대부분을 파괴했다. 게르만 민족인 롬바르드족은 6세기에 헤룰리족, 수에비족, 게피드족, 튀링기아족, 불가르족, 사르마티아 및 작센 동맹과 함께 이탈리아에 정착했다. 이후 바이에른족과 프랑크족이 이들을 따라와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통치했다.
원래 중앙 아시아 출신으로 추정되는 유목 집단인 불가르족은 2세기부터 코카서스 산맥 북쪽의 폰토스 스텝을 점령했다. 나중에 하자르족에 의해 밀려난 그들 중 다수가 서쪽으로 이주하여 7세기에 비잔틴 영토와 하부 다뉴브 강을 지배했다. 그 시점부터 발칸 반도의 인구 통계적 모습이 영구적으로 바뀌어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주를 이루게 되었고, 발칸 산맥에는 토착민의 소규모 집단이 살아남았다.[15][16]
크로아티아인들은 현대 크로아티아와 서부 보스니아에 정착했으며, 몬테네그로 주변 지역인 라시아(남서부 세르비아)에 정착한 세르비아인들을 데리고 왔다.[17] 7세기 중반까지 세르비아 부족들은 북부 알바니아를 침략했다.[17] 9세기까지 발칸 중부 (현대 코소보, 세르비아, 마케도니아에 해당)와 남부 및 중앙 알바니아 지역은 불가르족에 의해 침략되고 정착되었다.[17]
초기 비잔틴-아랍 전쟁 동안 아랍군은 7세기 말과 8세기 초에 소아시아를 통해 동남 유럽을 침략하려 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717-718)에서 비잔틴과 불가르족의 연합군에 의해 패배했다. 하자르-아랍 전쟁 동안 하자르족은 아랍의 유럽 진출을 코카서스를 넘어 막았다(7세기와 8세기). 동시에 소위 무어인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으로 구성)은 지브롤터를 통해 유럽을 침략하여 (711년에 서고트 왕국으로부터 히스파니아를 정복) 갈리아에서 프랑크족에게 투르 전투에서 저지되었다. 이러한 캠페인은 다음 천년 동안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사이의 광범위한 경계를 설정했다. 그 다음 세기 동안 이슬람교는 902년까지 시칠리아의 대부분을 기독교인으로부터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4. 3. 훈족
훈족의 서진은 게르만족 대이동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아틸라 대왕 시기 전성기를 맞았으나, 이후 급격히 쇠퇴했다.4. 4. 아바르족
6세기 후반, 아바르족은 판노니아 평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이들은 게피드 왕국을 멸망시키고, 롬바르드족을 이탈리아로 이동시키는 등 주변 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튀르크계 유목민으로 추정되는 아바르족은 슬라브족을 지배했으며, 슬라브족의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12]4. 5. 기타 민족
사르마티아인은 이란계 민족으로, 유목민족의 패자였던 스키타이인을 멸망시키고 세력을 넓혔다. 민족 이동 시대에 훈족과 함께 서진하여 동고트족을 격파하고 동유럽에 침입했다. 이후 스키타이인의 계통을 이었다고 여겨지는 슬라브족에게 흡수되었지만, 폴란드 근처에서는 슬라브 문화뿐만 아니라 사르마티아 문화도 잔존하여 강한 영향을 남겼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귀족들은 사르마티아인의 후예임을 강조하기도 했는데(사르마티즘), 이는 다양한 민족, 문화, 종교적 배경을 가진 폴란드 귀족(슈라흐타) 사회의 연대감을 나타내는 하나의 방식이었다.최근 연구에 따르면 중세 유럽 기사도 문학의 대표작인 아서 왕 전설은 색슨족에 대항한 켈트족의 전승을 기반으로 하며, 더 나아가 그 기반은 사르마티아인의 전승이라는 가설이 제기되었다. 이는 로마 제정 말기에 사르마티아인 용병단이 대량으로 브리튼 섬으로 이주했고, 아서 왕 전설과 사르마티아 신화가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사르마티아 본체가 멸망한 후에도 알란족 등의 분파 세력이 활동을 계속하였다.
5. 영향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고대 말기부터 중세 초기에 걸쳐 서로마 제국 영역 내로 게르만계 민족들이 이동한 사건을 말한다. (고트족, 부르군트족, 랑고바르드족, 앵글로색슨족, 주트족 참고)
서고트족이 로마 제국 영역에 처음 침입했고, 뒤이어 동고트족이 침입했다. 이들은 훈족에게 쫓겨 동로마 제국 영내로 들어와 용병으로 일하며 지위를 쌓았다. 이후 부르군트족은 프랑스 북부, 랑고바르드족은 이탈리아, 앵글로색슨족과 주트족은 브리타니아, 알레만족은 남서독일에 각각 침입했다.
프랑크족은 켈트계, 슬라브계, 라틴계 민족과 게르만족이 연합한 그룹으로 서유럽을 담당하게 되었다. 초기에 이동한 고트족 등은 로마인에게 동화되었지만, 프랑크족은 로마화되면서도 영향력을 유지하며 독일, 영국 등의 국가의 근간을 세웠다.
5. 1. 서로마 제국의 멸망
민족 대이동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게르만족은 훈족에게 밀려 로마 제국 영내로 이동해 왔으며, 이들 중 서고트족은 410년 로마를 약탈하기도 하였다. 이후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는 동로마 제국 황제 제논의 명령으로 이탈리아를 침공, 오도아케르를 제거하고 동고트 왕국을 세웠다.5. 2. 중세 유럽의 형성
고대 말기부터 중세 초기에 걸쳐 게르만족이 서로마 제국 영역 안으로 이동하면서 중세 유럽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서고트족이 로마 제국 영역에 처음 침입했고, 뒤이어 동고트족이 침입했다. 이들은 훈족에게 쫓겨 동로마 제국 영내로 들어와 용병으로 일하며 지위를 쌓았다. 부르군트족은 프랑스 북부에, 랑고바르드족은 이탈리아에, 앵글로색슨족과 주트족은 브리타니아에, 알레만족은 남서독일에 침입했다.프랑크족은 켈트계, 슬라브계, 라틴계 민족과 게르만족이 연합한 그룹으로 서유럽을 담당하게 되었다. 초기에 이동한 고트족 등은 로마인에게 동화되었지만, 프랑크족은 로마화되면서도 영향력을 유지하며 독일, 영국 등의 국가의 근간을 세웠다.
북유럽 사람들은 바이킹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하여 각지에 혈통을 남겼다.[37][38]
6. 논쟁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대한 연구는 야만인의 정체성과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표현되었는지에 대한 학자들 사이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고트족 전문 역사가 헤르비히 볼프람[59]은 게르만족의 이동 Völkerwanderungde을 민족 이동기 ''migratio gentium''와 동일시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심지어 초기 중세에서도 생물학적 공동체로서 씨족의 중요성이 변화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프랑스 혁명 동안 만들어진 민족 개념과는 다른 별개의 전문 용어를 만들어낼 방법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19세기에는 "원초주의"적[60] 패러다임이 만연했다.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같은 학자들은 부족을 일관성을 지닌 생물학적 (인종적) 집단으로 보았고, 별개의 인종 집단을 나타내는 데 부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61] 그는 또한 독일어로 민족, 사람을 뜻하는 ''Volk''가 미술, 문학, 언어에서 핵심적 정체성 및 정신적 존재를 지닌 유기적인 것이라 믿었다. 특히 언어는 민족성에 대한 가장 중요한 표현이라고 여겨졌다. 이들은 같은 (유사한) 언어를 공유하는 집단은 공통의 정체성 및 조상을 두었다고 주장했다.[63] 이러한 생각은 공동의 고향땅에서 기원을 했고 공통의 언어를 구사한 단일의 게르만족 및 켈트족, 슬라브족이 있었다는 낭만주의적 사상이었으며,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 같은 18-19세기의 정치 운동의 개념적 틀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줬다.[62]
1960년대부터 고고학 및 역사학적 증거들의 재해석은 새로운 모델들을 주장하도록 촉진시켰다. 이들은 공유된 정체성이 없는 것이 Germani라고 인지되었다고 주장했으며,[64][65][66] 유사한 이론이 켈트 및 슬라브 집단들에게서도 주장되었다.[67] 현대학자들은 특정 민족이라고 인지하는 독특성이 생물학적 및 인종적 구분보다는 공동의 정치적 및 경제적 관심을 기반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소련의 학자 율리안 브롬레이는 부족 단위 형성 과정을 종족의 탄생이라 명명하였다.[70] 오스트리아 학파 (Reinhard Wenskus가 주도)가 이 이론을 보급하였고, 헤르비히 볼프람, 월터 폴, 패트릭 기어리 같은 중세 연구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64]
프랑스와 이탈리아 학자들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문명 파괴와 유럽을 1천 년 뒤로 퇴보시킨 "암흑 시대"의 시작이라는 재앙적 사건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74] 반면, 독일과 영국의 역사가들은 로마와 야만인들의 접촉을 "지치고, 무기력하고 부패한 지중해 문명"이 "조금 더 정력적이고, 호전적인, 북방의 문명"으로 대체되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74]
가이 할살은 야만인의 이동이 로마 제국 멸망의 원인이 아닌, 결과라고 보았다.[74]
6. 1. 야만 정체성
야만에 대한 정체성 및 그것이 게르만족의 대이동기에 어떻게 만들어지고 표현되었는가에 대한 연구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고트족 전문 역사가 헤르비히 볼프람[59]은 게르만족의 이동 Völkerwanderungde을 민족 이동기 ''migratio gentium''와 동일시하는 논쟁에서, 미카엘 슈미트 (Michael Schmidt)가 그의 저서 1758년 독일인의 역사에 그 동일시하는 공식을 도입한 것을 알게 되었다. 볼프람은 심지어 초기 중세에서도 생물학적 공동체로서 씨족의 중요성이 변화했다는 걸 알게되었으며, "그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프랑스 혁명 동안에 만들어진 민족의 개념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별개 전문용어를 만들어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19세기에는 "원초주의"적[60] 패러다임이 만연했다. 독일의 언어학자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같은 학자들은 부족을 일관성을 지닌 생물학적 (인종적) 집단으로 보았고, 별개의 인종 집단을 나타내는 데에 부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61] 그는 또한 독일어로 민족, 사람을 뜻하는 ''Volk''가 미술, 문학, 언어에서 핵심적 정체성 및 정신적 존재를 지닌 유기적인 것이라 믿었다. 이러한 특징들은 외부의 영향이나 특히 정복으로도 영향을 받지 않는 본질적인 것이라 보았다.[62] 특히나 언어는 민족성에 대한 가장 중요한 표현이라고 여겨졌다. 이들은 같은 (유사한) 언어를 공유하는 집단은 공통의 정체성 및 조상을 두었다고 주장했다.[63] 이러한 생각은 공동의 고향땅에서 기원을 했고 공통의 언어를 구사한 단일의 게르만족 및 켈트족, 슬라브족이 있었다라고 하는 낭만주의적 사상이었으며,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 같은 18-19세기의 정치 운동의 개념적 틀을 제공하는 데에 도움을 줬다.[62]
1960년대부터 고고학 및 역사학적 증거들의 재해석은 Goffart와 Todd 등의 학자들이 야만인의 정체성 구축을 설명하는 새로운 모델들을 주장하도록 촉진시켰다. 이들은 공유된 정체성이 없는 것이 Germani라고 인지되었다고 주장했으며,[64][65][66] 유사한 이론이 켈트 및 슬라브 집단들에게서도 주장되었다.[67]
이 이론은 원초주의자들의 사고의 방식이 많은 부족들을 게르만 (Germanoi), 켈트 (Keltoi) 또는 슬라브 (Sclavenoi) 같은 꼬리표로 분류한 그리스-로마 사료에 대해 일견으로 판단한 해석으로 인해 조장되었으며, 따라서 뚜렷한 민족이라는 원초주의자들의 인식으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현대학자들은 특정 민족이라고 인지하는 독특성이 생물학적 및 인종적 구분보다는 공동의 정치적 및 경제적 관심을 기반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대규모의 언어 변화가 역사에서 흔하게 발생했기에, 집단의 정체성을 구축하고 유지하는 데에 있어 언어의 역할은 미약할 수도 있다.[68] 현대학자들은 고대 후기의 야만인 정치 조직체는 변화하지 않는 혈육 관계라기보다는 사회적 구조물이라며, 기존의 사상이 "상상화된 공동체"라고 주장했다.[69] 부족 단위 형성 과정을 소련의 학자 율리안 브롬레이가 종족의 탄생이라 명명하였다.[70] 오스트리아 학파 (Reinhard Wenskus가 주도)가 이 이론을 보급하였고, 헤르비히 볼프람, 월터 폴, 패트릭 기어리 같은 중세 연구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64] 오스트리아 학파는 부족 단위 정치 조직의 형성을 위한 자극이 Traditionskern ("전통의 핵심")이라고 알려진, 군사 또는 귀족 계층들인 소수의 핵심 인물들에 의해 영속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핵심 집단은 더 큰 집단을 위한 기준을 형성했고, 혈육 및 원초적 공통성 같은 융합적인 은유를 동원하여 지지자들을 모으고 자신들이 오래되고 신성한 혈통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고 한다.[71]
>''게르만족의 대이동'' Völkerwanderungde에 대한 흔하고 흔적들로 채워진 지도는 이 사건의 과정 같은 걸 묘사한 것이겠지만 이건 사람들을 오해하게 했다. 수세기 간 밝혀지지 않은, 지위의 변화들은 확실한 불연속성의 시기와 함께 필연적으로 불규칙적이었다. 수십년 그리고 아마 수세기 동안에, 전통의 전승자들은 제자리를 맴돌았고, 전통 그 자체도 동면해버렸다. 망각이 전통의 업무를 잊어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72]
6. 2. 관점
프랑스와 이탈리아 학자들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문명 파괴와 유럽을 1천 년 뒤로 퇴보시킨 "암흑 시대"의 시작이라는 재앙적 사건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74] 반면, 독일과 영국의 역사가들은 로마와 야만인들의 접촉을 "지치고, 무기력하고 부패한 지중해 문명"이 "조금 더 정력적이고, 호전적인, 북방의 문명"으로 대체되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74]독일과 슬라브권 학자들은 "침입"이라는 표현보다는 "이주" (Völkerwanderung|푈커반더룽de, Stěhování národů|스테호바니 나로두cs, folkvandring|폴크반드링sv, népvándorlás|네프반도를라스hu)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역동적이고 "배회하는 인도유럽어인"이라는 이념을 열망한다.[75]
학자 가이 할살은 야만인의 이동이 로마 제국 멸망의 원인이 아닌, 결과라고 보았다.[74] 고고학적 발견물들은 게르만족과 슬라브족 부족들이 아마도 "몇 가지 다른 원인들로 이미 다 허물어져 가는 제국의 정치 체제로 이끌려 간" 정착한 농민들이라는 것을 확인해주었다.[76]
7. 현대적 비유
연말연시나 일본의 골든 위크, 오봉 휴가, 한반도나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대만) 등의 태음력(구력)의 설날(구정) 등에서의 귀성 등으로, "민족 대이동"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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