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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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학은 유교의 경서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육경(역, 서, 시, 예, 악, 춘추)과 오경(역, 서, 시, 예, 춘추)을 주요 대상으로 한다. 진나라의 분서 사건으로 인해 금문과 고문으로 나뉘어 경서가 전해졌으며, 한대에는 금문경학, 고문경학 간의 논쟁이 벌어졌다. 중국 경학은 한대, 위진남북조 시대, 수당, 송, 명, 청 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학파와 해석이 등장했고, 한국과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는 조선 시대에 성리학을 중심으로 경학이 발전했으며, 실학의 등장으로 비판적 검토와 새로운 해석이 시도되었다.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 이후 가학으로 전락하는 등 중국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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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학 | |
|---|---|
| 학문 분야 | |
| 분야 | 역사학 |
| 연구 대상 | 경서 |
| 역사적 배경 | |
| 기원 | 유교 |
| 발전 | 한나라 시대 이후 |
| 주요 내용 | |
| 연구 방법 | 경서 해석 및 주석 |
| 주요 분야 | 훈고학 의례학 고증학 |
| 주요 학자 | |
| 인물 | 공영달, 정현, 주희 등 |
| 관련 개념 | |
| 관련 학문 | 성리학, 양명학, 실학 |
| 관련 용어 | 경전, 주석, 의례 |
2. 경학의 대상
경학은 유교 경전인 경서의 권위를 바탕으로, 경서에 나타난 성왕이나 성인의 말을 해석하는 학문이다. 경서 주석이나 종합적인 논의를 가리키지만, 넓게는 경서의 성립, 학설 계승, 고대 세계 해명까지 포함한다.
경학의 연구 대상은 유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경서'이다. 육경은 주역, 상서, 시경, 예, 악경, 춘추 여섯 종류였으나, 악경은 악보였기 때문에 서적으로 전해진 오경(주역, 상서, 시경, 예, 춘추)이 남았다.[1] 주역을 정점으로 하는 경서 배열은 한나라 때 결정되었다.
경서 텍스트는 금문과 고문으로 나뉜다. 금문은 진시황의 분서 이후 한나라 때 통용되던 문자, 고문은 분서를 피해 숨겨졌다가 발견된 진나라 이전 문자로 쓰였다. 고문이 더 정확하다고 여겨졌으나, 위작 논란 등이 있었다. 현재는 대부분 고문 경서가 전해진다.
2. 1. 오경(五經)
유교 경전의 하나로, 주역, 상서, 시경, 예기(의례/주례), 춘추를 말한다.[1] 원래 악경을 포함한 육경이었으나, 악경은 서적이 아닌 악보 형태였기 때문에 후대에 서적으로 전해진 오경이 남았다.[1]- '''주역''': 원래 점서(占筮)였으나, 위나라 왕필이 인간 본성을 설명하는 '의리역' 학문을 제기했다.[1]
- '''상서''': 옛 성왕들의 정치적 선언을 모은 책이다.[1]
- '''시경''': 연애, 비애 등을 노래한 시를 모은 책으로, 한대에는 정치적 의미로 해석되었다.[1]
- '''삼례''': 의례, 주례, 예기를 통칭한다. 의례가 예경으로 여겨지나, 현존 의례는 사례(士禮)만 포함하여 논쟁이 있다.[1] 예기는 예경 주석서였으나 점차 지위가 높아져 정통적 지위를 유지했다.[1] 주례는 주나라 예제를 상세히 설명했으나, 내용에 논란이 많다.[1]
- '''춘추''': 춘추경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에 인용된 '경' 부분을 가리킨다.[1]
2. 2. 기타 경전
유교의 경전은 육경이라 하여 주역, 상서, 시경, 예, 악경, 춘추 여섯 종류가 있었다. 이 중 악경은 악보였기 때문에, 후세에는 오경이라 하여 주역, 상서, 시경, 예, 춘추 다섯 종류가 전해졌다.경서 텍스트에는 여러 이본이 있는데, 진시황의 분서 이후 한나라 때 통용되던 문자로 기록된 금문과, 분서를 피해 숨겨졌다가 발견된, 진나라 이전 문자로 쓰여진 고문으로 나뉜다. 고문이 더 정확하다고 여겨졌으나, 위작 논란 등이 있었다. 현재는 대부분 고문 경서가 전해진다.
- '''주역''': 하나라의 연산, 은나라의 귀장에 대비되는 주나라의 역이라는 해석이 있다. 원래 점서(占筮)였으나, 위 왕필이 인간 본성을 설명하는 '''의리역'''을 제기했다.
- '''상서''': 옛 성왕들의 정치적 선언을 모은 책이다. 동진 시대에 위작되었다고 여겨지는 '''위고문 상서'''와 금문 상서와 일치하는 '''진고문 상서'''가 합쳐져 전해진다.
- '''시경''': 연애, 비애 등을 노래한 시를 모은 책이다. 한나라 때는 정치적 의미로 해석했으나, 송나라 때는 시 본래 의미를 추구했다.
- '''삼례''': 의례, 주례, 예기를 말한다.
- '''의례''': 선비(士)가 행하는 예의 절차를 설명했다. 금문으로만 전해진다.
- '''예기''': 원래 예경의 주석서였으나, 당나라 오경정의, 명나라 오경대전에 선택되어 정통적 지위를 유지했다.
- '''주례''': 전한 말 유흠이 발견한 책으로, 주나라 예제를 상세히 설명한다. 내용에 대한 논란으로 위서(僞書) 주장이 있다.
- '''악경''':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악보, 음악 이론서, 혹은 음악 자체였다는 설이 있다.
- '''춘추''':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에 인용된 '경' 부분을 가리킨다. 노나라 역사를 바탕으로 공자가 수정, 평가했다고 전해진다.
3. 경학의 역사
남북조 시대의 경학은 장안과 낙양에서 발전했던 북조 경학과 학풍이 달랐다. 남조 경학은 양나라에서 성립되어 백제와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어의 한자를 읽는 방법에는 음독 즉 한음과 훈독 즉 오음이 사용되는데, 남조 경학에서는 오음을 사용했다. 이후 견당사로 다녀온 유학생들이 북조 경학의 한음을 들여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경학은 고대 중국 (왕조 시대의 중국)에서 유교 경전인 경서의 권위를 긍정하고, 그 전제 하에 경서에 나타난 성왕 또는 성인의 발언 취지를 해독하려는 학문이다. 경서의 주석, 또는 그와 유사한 종합적인 논구를 가리키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더 넓게 경서의 성립이나 학설의 계승 등에 대해 연구하는 경우, 더 나아가 고전 세계의 해명도 포함된다. 오늘날에는 경학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형태적으로 종래의 경학 연구와 유사한 연구를 하는 경우도 경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경학은 시대에 따라 학술 경향을 달리하며 발전했다.
- '''한대''': 경서의 자구 해설인 훈고학을 주로 하며, 고증을 통해 성왕의 뜻을 밝히고자 했다.
- '''송대''': 성인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에 체득하고, 자신이 성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청대''': 한대의 학문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실구시"를 표방하며, 문헌 분석을 주로 하는 고증학이 발달했다.
3. 1. 중국의 경학
남북조 시대의 경학은 장안과 낙양에서 발전했던 북조 경학과 학풍이 달랐다. 남조 경학은 양나라에서 성립되어 백제와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어의 한자를 읽는 방법에는 음독 즉 한음과 훈독 즉 오음이 사용되는데, 남조 경학에서는 오음을 사용했다. 이후 견당사로 다녀온 유학생들이 북조 경학의 한음을 들여왔을 것으로 추측된다.3. 1. 1. 한대(漢代)
한무제 시대에 오경박사가 세워져 하나의 경서마다 박사가 배치되었다. 박사와 그 제자들이 경서를 전습하는 가운데, 점차 "사설"이 형성되어 경학 내에 학파가 생겨났다. 오경박사에는 원래 일곱 가문이 세워졌지만, 점차 증가하여 후한의 광무제 때에는 14명의 박사가 배치되었다. 『후한서』 유림전의 기술에 따르면, 14가문의 내역은 다음과 같다.| 경서 | 학파 |
|---|---|
| 역경 | 시(施) · 맹(孟) · 양구(梁丘) · 경(京) |
| 상서 | 구양(歐陽) · 대하후(大夏侯) · 소하후(小夏侯) |
| 시경 | 제(齊) · 노(魯) · 한(韓) |
| 예기 | 대대(大戴) · 소대(小戴) |
| 춘추 | 엄(嚴) · 안(顏) |
이상의 박사를 중심으로 진행된 경학은 "금문경학"이라고 불렸으며, 후한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금문경학은 "미언대의(微言大義)"를 밝혀 공자의 사상을 명확히 하고, 유교의 학설을 계승 · 발양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였다. 특히, 『춘추』의 해석서 중 하나인 춘추공양전을 중시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동중서가 있다. 동중서가 공양학에서 재이 · 부서 · 천인감응의 설을 세운 것에서, 금문경학은 점차 참위의 학으로 흘러 신학화되었다.
이에 반해, 전한 말 무렵부터 "고문학"이 융성했다. 고문학이 의거한 경서는 전한 중기 이후 민간에서 발견된 고서이며, 이들이 선진 시대의 옛 글자로 쓰여 있었기 때문에 고문학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고문에는 노공왕이 공자의 옛집에서 발견한 것 등이 있으며, 이러한 고문의 연구를 심화시킨 학파를 고문학이라고 부른다.
고문학은 신나라 왕망이 정권을 잡았을 때, 유흠이 고문학을 추진하여 박사로 세워졌다. 후한에 들어서자, 고문학은 박사로 세워지지 않았고, 그 연구는 민간에서 진행되었지만, 그 영향력은 점차 커져, 최종적으로는 금문학을 압도하게 된다. 금문학은 사설의 속박을 받아 학설에 경직화 경향이 나타났지만, 고문학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고 간명하게 학문이 진행되었으며, 참위를 받아들이는 일도 적었다. 고문학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가규, 허신, 마융, 복건, 노식 등이 있다.
고문학과 금문학의 차이는 문자나 편장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해석 방법, 연구 방법에도 있었다. 금문학에서는 공자를 소왕으로 여겨졌고, 경서는 모두 공자의 제작이며, 공자의 정치 사상이 담겨 있다고 여겨졌다. 반면, 고문학에서는 공자는 예로부터 성왕에 얽힌 문헌을 정리·보존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금문학은 공자의 미언대의를 천명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고, 고문학은 경서 본문의 이해와 전장 제도의 해명에 힘을 쏟았다.
고문학과 금문학은 반드시 대립했던 것은 아니며, 서로 학설을 받아들이거나, 양자를 조정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후한 초에는 백호관 회의가 개최되어 학자들을 모아 논의를 하게 하여, 경의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이 성과는 반고에 의해 정리되어, 『백호통의』로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후한 말에는 금문·고문에 모두 통달한 학자인 정현에 의해, 양자를 받아들인 경서의 주석이 완성되어, 양자의 다툼은 일단 종언을 맞이했다.
또한, 후한에 들어서자, 경서에 대해 주석을 덧붙이는 형식이 경학에서 성행하게 되었고, 이는 한대 이후에도 비슷한 경향이 계속된다. 여기에서, 경학은 "주석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대의 주요한 성과로, 하휴의 『춘추공양해고』와, 정현의 삼례주(『주례』주, 『의례』주, 『예기』주) 등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3. 1. 2. 위진남북조 시대
위·진 시대에 들어서자, 정현의 주석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나타나 왕숙 등이 새로운 주석을 만들었다. 왕숙이 사마염의 외조부였던 관계도 있어 왕학도 관학에 포함되면서 왕학과 정학의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는 학설상의 다툼인 동시에, 정치상의 다툼이기도 했다.왕필과 하안에 의해서도 새로운 주석이 만들어졌다. 왕필은 『주역』에 주석을 달았는데, 이는 한대의 "상수역"을 폐하고 "의리역"이라는 사변적인 역학을 개척한 것이다. 하안은 『논어집해』를 만들어 한대 이래의 여러 학자들의 설을 정리했다. 그들의 학술적 성과에는 현학의 영향이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남북조 시대에 들어서자, 의소라는 형식이 발전하는 가운데, 경학도 남학과 북학으로 분열되었다. 『북사』 유림전의 기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경향으로 나뉜다.
남조경학은 장안과 낙양에서 발전했던 북조경학과 학풍이 다른데, 남조경학은 양나라에서 성립되어 백제와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어의 한자를 읽는 방법은 음독 즉 한음과 훈독 즉 오음이 사용되는데, 남조경학에서는 오음을 사용했다. 이후 견당사로 다녀온 유학생들이 북조경학의 한음을 들여 왔을 것으로 추측한다.
3. 1. 3. 수당 시대
당대의 경학은 고문학, 금문학, 정학, 왕학, 남학, 북학 등으로 다양하게 분열되어 많은 학설이 있었다. 이를 집대성하고 공정된 경의를 통일적으로 제시하고자 당 태종 때 공영달 등이 오경정의를 편찬하였다. 이 편찬은 과거 교과서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정부가 왕조로서 정통성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도 있었다.이 시기 경학은 조선과 일본에도 전래되어 법률 정비와 군주 권력 과시에 이용되었다.
3. 1. 4. 송대(宋代)
송나라에 들어서면서 비교적 자유로운 심성과 비판적 지성을 바탕으로 한 "송학"이 성행했다. 남송의 주자는 송학을 집대성하여 주자학을 융성하게 하였다. 주자학은 왕조 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 실천을 그 담당자인 사대부의 의식에까지 내면화한 것으로, 그 철학으로서 이기설이 제창되었다.[1] 주자학에서는 『논어』, 『맹자』, 나아가 『예기』의 한 편이었던 『대학』과 『중용』을 중시하여 "사서"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경서를 "사서오경"이라고 총칭하는 이름이 생겨났다.3. 1. 5. 명대(明代)
명나라 시대에는 주자학이 과거 시험을 위한 교양으로 자리 잡으면서 점차 형식만 남게 된 것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왕양명은 기존의 경전을 통해 성인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참된 앎은 인간의 마음속에 본래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것이 양명학이다. 양명학은 경전을 상대화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이후 반유교적인 경향을 낳기도 했다. 이로 인해 경전 연구로서의 경학은 쇠퇴했다.또한, 명나라의 유학자인 주순수는 『춘추』를 핵심으로 하는 존왕양이 사상을 주장하여, 일본에서 수호학에 영향을 주었다.
3. 1. 6. 청대(淸代)
청나라 시대에는 양명학에 대한 반발과 문자의 옥의 영향으로 정치적인 색채를 띤 학문이 기피되었다. 이로 인해 문헌의 실증적 연구와 고증에 중점을 둔 경학, 즉 고증학이 발달했다. 고증학은 방대한 고전을 문자학, 음운학, 훈고학 등 언어학적 방법을 통해 분석하여 경서 본래의 의미를 밝히고자 했다.3. 2. 한국의 경학
한국에서 경학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유교 경전 연구를 중심으로 발전해왔다.고구려는 태학을 설치하고 오경박사를 두어 유교 경전을 교육했으며, 백제 역시 오경박사를 두어 일본에 유교 경전을 전파했다. 신라는 임신서기석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젊은이들이 유교 경전을 공부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국자감을 통해 유교 경전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경학 연구가 더욱 심화되었다. 안향은 주자의 저서를 들여와 성리학 연구의 기초를 닦았고, 이제현은 만권당에서 원나라 학자들과 교류하며 성리학을 발전시켰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이 국가 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경학 연구가 절정에 달했다.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한 경전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이황과 이이 등 뛰어난 학자들이 등장하여 조선 성리학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경전 주석과 해석을 통해 자신만의 학문 체계를 구축하고, 제자들을 양성하여 학파를 형성했다.
조선 후기에는 실학 사상의 영향으로 경학 연구에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정약용은 경전의 자구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경전을 연구하여 독자적인 학문 체계를 구축했다.
이처럼 한국의 경학은 시대별로 다양한 특징을 보이며 발전해왔으며, 한국의 사상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3. 일본의 경학
일본에서 경학은 유교 경전을 해석하고 연구하는 학문을 의미하며, 경업(経業)·명경(明経)이라고도 불렸다. 일본에서는 학령에 정해진 중국의 주석서 등을 참고하여 훈고(訓詁)를 주로 하였으며, 여러 판본을 대조하여 텍스트로 삼을 문장을 확정하고, 여러 주석을 참고하여 훈점을 찍는 것이 이루어졌다. 중국만큼 성행하지는 않았지만, 문장 중의 훈고나 해석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 후기에는 경학이 박사가의 가학으로서 그 학설을 굳게 지키게 되었고, 약간의 훈점 차이를 놓고 박사들끼리 대립하는 데 그치는 등 학문으로서의 실체는 차츰 형해화되어 갔다.참조
[1]
서적
中国思想辞典
研文出版
[2]
서적
経学
角川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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