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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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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마모토현은 구석기 시대부터 야요이 시대를 거쳐 고대, 중세 시대를 거치며 역사를 이어왔다. 야마토 정권 시대에 히노쿠니(火国)로 불리며 호족들이 세력을 떨쳤고, 율령제 하에서는 히고국(肥後国)으로 불리며 조세 수취와 지방 행정이 이루어졌다. 무사들의 발흥기에는 기쿠치씨와 아소씨가 주요 무사단으로 활동했으며, 가마쿠라 막부와 몽골 침입, 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세력 다툼이 이어졌다. 무로마치 시대와 센고쿠 시대를 거치며 기쿠치씨의 세력이 약화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통일 이후 삿사 나리마사가 히고를 통치했으나,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로 이어지는 통치 체제가 수립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구마모토 번이 성립되어 호소카와씨가 번주를 맡았으며, 아마쿠사 시로의 난과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근대에는 요코이 쇼난과 같은 인물들이 개혁을 추진했고, 세이난 전쟁과 자유민권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제5고등학교(현 구마모토 대학)가 설립되어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2차 세계 대전과 태풍, 수해를 겪었으며, 미나마타병과 환경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현재는 농업과 공업, 관광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한국과의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2. 고대

2. 1. 구석기 시대 ~ 야요이 시대

일본의 구석기시대 유적 중 약 1/3에 해당하는 100곳 이상이 구마모토현에서 발견되었지만, 발굴조사는 몇 군데에서만 이뤄졌다. 대부분은 아소외륜산(阿蘇外輪山) 일대나 구마 지방(球磨地方)에 위치하지만, 미나마타시(水俣市)의 이시토비 분교(石飛分校) 유적과 아마쿠사 시모시마섬(下島)의 우치노하라(内ノ原) 유적 등도 발굴되어 그 분포는 현 전역에 이르고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구마모토시 히라야마정(平山町)의 이시노모토(石の本)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류로, 탄소C14 측정 결과 3만 년 이전의 것으로 추정된다.[1] 출토품의 수는 4000점에 이르며, 안산암 파편으로 만든 소도류와 부분 마제 돌도끼도 발견됐다. 규슈는 비교적 혜택받은 자연환경을 지닌 땅이라는 점에서, 고대 구마모토는 풍부한 수렵채집 사회생활의 무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소산과 칼데라


규슈는 많은 화산 분화로 인한 환경의 격변에 여러번 피해를 입은 땅이기도 했다. 아소산, 아이라산(姶良山), 키카이 칼데라(鬼界-)의 폭발은 여러 화산재 지층을 형성했다. 특히 석기시대 중기에서 볼 수 있는 아이라Tn화산재층(姶良Tn火山灰)의 위아래에 보이는 출토품의 비교나, 이시토비 분교 유적의 같은 층 상부에서 발견된 세석기(細石器)나 토기의 파편 등의 분석을 통해 화산활동이 환경과 사회생활에 끼친 영향이 연구되고 있다.[2] 당시의 화쇄류(火砕流)로 형성된 아소 용암은 나중에 양질의 풍부한 석재가 되어, 히고 석공들에게 활용되었다.[2]

조몬 시대 유적으로 구마모토현 일대에서 발견된 초기 유구는, 손톱무늬 토기(爪形文土器)가 발굴된 히토요시시의 시라토리비라B(白鳥平B) 유적 등 약간의 사례뿐이다. 이는 약 6200년 전(약 7300년 전이라고도 한다)의 기카이 칼데라 폭발(키카이 아카호야 화산재(鬼界アカホヤ火山灰))에 의해 규슈 전토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기 때문인 걸로 생각된다.

조몬 중기의 것으로 구마모토시 남구 조난정(城南町)의 고료 패총(御領貝塚), 아다카쿠로하시 패총(阿高黒橋貝塚)이 있으며, 후기의 것으로는 동일본이나 한반도와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 토기문화가 발전했다. 구마모토 평야에서 발견된 약 13곳의 패총은 그 대부분이 조몬시대 후기에 해당하며, 현재 해발 5미터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우토시(宇土市)의 소바타 패총(曽畑貝塚)에서는 도토리를 저장한 흔적도 보이며, 출토한 소바타식 토기는 동형의 것이 오키나와 제도나 한반도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조난정의 아다카 패총과 구로하시 패총에서 발견된 토굴로 만든 조가비 탈(貝面)이나 아다카식 토기는 사가현 코시다케산(腰岳)의 흑요석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반대로 아마쿠사시의 오야(大矢) 유적에서는 한반도의 형식인 석제 결합식 낚시바늘이 발견되고 있다.

토기와 생활양식은 그 후에도 발전해, 독자적인 흑색 마연토기가 발달했다. 구마모토시의 우에노바루(上の原) 유적에는 수혈(竪穴) 건물의 유구에서 탄화한 쌀과 보리가 발견됐다. 당시 대부분이 바다였던 구마모토 평야가 해퇴(海退) 현상이나 하천 퇴적물에 의해 매립되면서,[3] 채집에만 의존했던 식량 확보에서 원시적인 밭갈기로의 전환이 시작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구마모토시의 가미나베(上南部) 유적에서는 토우나 간석기 돌칼 등의 특수 유물이 다수 출토되고 있다. 현내의 조몬시대 유적은 약 770곳이다.

야요이 시대가 되면 장소를 바꿔 해안선에서 떨어진 대지 위에 환호취락(環濠集落)이 형성됐다. 독항아리(甕), 병(壷), 돌도끼 등 전형적인 야요이 시대 유물이 발견되는 유적은 곧 구마모토 평야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벼농사가 이뤄졌음을 나타낸다. 한편, 연안 지역에서도 동시대의 소규모 패총이 발견되고 있다. 우키시 미스미정(三角町)의 분조(文蔵) 패총에서는 구워진 작은 고둥 껍질이 다수 발견됐다. 이는 모자반(ホンダワラ)을 굽는 제염법의 자취로, <만엽집>(万葉集)에서 노래한 ‘해조 소금구이’(藻塩焼き)가 행해지던 증거로 여겨진다.

아소산 쿠로카와강(黒川) 유역, 구마모토 평야의 시라카와강(白川) 유역, 기쿠치강(菊池川) 유역에서도 제철(製鉄) 유구가 발견됐다. 화살촉과 대패, 농기구인 가래, 괭이날, 철도끼, 또한 조각으로 보이는 삼각형, 봉 모양의 철편 등도 발견됐다. 구마모토시의 후타고쓰카(二子塚) 유적에서는 화로의 흔적을 중심으로 소토(焼土) 블록이나 목탄, 열을 받아 녹이 들러붙은 받침돌 등 제철의 흔적이 출토되고 있다. 청동기로는 구마모토시의 토쿠오(徳王) 유적과 시스이정(泗水町)의 고가바루(古閑原) 유적에서 출토된 구리거울 등이 있다. 야요이 시대 유적은 약 740개로, 일본 국내의 13%를 차지한다.

2. 2. 히노쿠니(火国)의 성립

초기의 야마토 정권은 지방 행정구역으로 (아가타)을 설치했다. <일본서기>, <치쿠고국 풍토기>에는, 나중의 구마모토현 지역에 구마현(球磨県), 아소현(閼宗県), 야쓰시로현(八代県)의 3개의 현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4] 야쓰시로현은 현재의 우토 지방을 포함한 보다 넓은 지역이었다고 생각된다. 미도리가와강(緑川)과 히카와강(氷川) 사이에 있는 우토반도의 기부(基部, 뿌리부분)에는 쓰카하라(塚原) 고분군으로 대표되는 약 120곳의 전방후원분이 발굴됐다.

에타후나야마 고분


우토반도 기부의 유적은 장식 문양이 입혀진 구니고시(国越) 고분이나 히카와강 유역의 구릉부에 형성된 노즈(野津) 고분군 등으로 대표되며, 이 지역은 히노키미(火君, 화군)의 발상지로 여겨진다. 히노키미는 지역을 대표하는 호족으로, <고사기>에서는 카미야이미미노 미코토(神八井耳命)의 후손으로, <일본서기>나 <히젠국 풍토기>에서는 케이코 천황(景行天皇) 일행이 신비로운 불에 이끌려 도착한 땅에서 쓰찌구모(土蜘蛛) 퇴치에 활약한 자의 자손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이 고사에서 ‘히노쿠니’(火国)란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에타후나야마 고분(江田船山-)에서 출토된 대도의 명문(銘文)에서, 히노키미 등 히노쿠니의 호족은 이미 킨키(近畿, 지금의 간사이 지방)의 오토모(大伴), 모노노베(物部)씨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게 밝혀졌다.[4] 호족의 하나인 다케베노키미(建部君)는 야마토 정권으로부터 군사적 부민(部民)으로 이름을 하사받은 일족으로, 현재의 구마모토시 구로카미(黒髪), 고카이(子飼) 본정에 해당하는 지역 즉, 중세까지의 지명인 다케베(武部・竹部・建部) 인근을 본거지로 삼았다고 한다.

기쿠치가와천(菊池川) 유역에서 발굴된 고분군은 조금 시대가 내려간 것으로, 야마가시의 류오산(竜王山) 고분, 다마나시의 야마시타(山下) 고분, 다이메이정(岱明町)의 인즈카(院塚) 고분이 알려져 있다. 이들은 히오키베노키미(日置部君) 일족의 땅으로 여겨진다. 아소 이치노미야정(阿蘇一宮町)에 있는 나카도오리(中通) 고분은 아소노키미(阿蘇君)가 축조했다고 한다. 이들 분묘에서 발굴된 조개팔찌 등은 당시의 호족이 활발한 교역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아소 용결응회암(溶結凝灰岩)으로 만든 배 모양 석관이 세토 내해 연안과 킨키 지방의 고분에도 사용되고 있다.[5] 현 전체에서 확인된 고분은 약 1300 곳으로, 일본 국내의 24%에 해당한다.

이와이의 난 이후, 규슈에 대한 지배체제를 강화한 야마토 조정은, 현지 군사력을 재편성하고, 둔창을 설치하는 등 지배력을 강화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히노쿠니에는 오토모씨(大伴氏)의 부민이 많이 배치됐다. 이들은 <만엽집> 권5, <화명류취초>(和名類聚抄, 和名抄), 토다이사(東大寺) 출토 목간 등의 기술에서 볼 수 있다. <일본서기>에 있는 히노쿠니의 가스가베 둔창(구마모토시 가스가정)은 규슈 중남부의 호족 반란을 엄중히 감독하는 조정의 출장기관이라는 성격이 있었으며, 군사, 경제적 거점으로서도 기능했다. <수서>에는 아소산 분화를 기술한 문장이 있다.[6] 이는 견수사가 활동했던 스이코 천황(推古天皇)기에 전해진 정보로 추정된다.

3. 중세

3. 1. 율령제 하의 히고국(肥後国)

율령제에 따라 히고국에도 국부(国府)가 설치됐는데, 그 장소는 문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화명류취초(和名類聚抄)에는 마시키군, 이로하자류초(伊呂波字類抄)에는 아키타군(飽田郡, 현 구마모토시 니혼기)으로 기록되어 있고, 가마쿠라 시대에 지어진 습개초(拾芥抄)에는 마시키, 아키타군 두 곳이 병기되어 있다. 지명으로서의 ‘국부’(코쿠후)로는 다쿠마군(구마모토시 고쿠후)이 있으며, 일본영이기(日本霊異記)의 호키(宝亀, 770~781) 연간 무렵의 전설에는 ‘타쿠마 국분사(国分寺)’라는 기술이 있다. 발굴 결과 구마모토시 고쿠후에서 9세기 중엽의 유구가 발견되었고, 여기에는 홍수에 의한 파괴 흔적이 발견됐다. 이 발견을 통해, 당초 다쿠마에 있었던 국부가 수해를 입어 마시키, 아키타 중 어딘가로 이전된 것으로 여겨지나, 이를 뒷받침하는 유적이나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7]

한편, 관직명 ‘히고노카미’(肥後守)는 회풍조(懐風藻)에 오음시(五音詩) ‘추연’(秋宴, 가을잔치)의 작가인 ‘정오위하 히고노카미 미치노키미 오비토나(道公首名)’에서 볼 수 있다. 미치노키미 오비토나는 663년에 호쿠리쿠(北陸)의 미치노키미 일족에서 태어나, 신라 대사와 치쿠고노카미(筑後守)를 거쳐 겸임 히고노카미에 취임했다. 속일본기에는 오비토나의 계보와 생애 등 뛰어난 업적을 기록한 ‘졸전’(卒伝)이 있는데, 치수관개를 위한 저수지 ‘아지우노이케’(味生池, 현 구마모토 시립 이케노우에 소학교 북측 일대)를 만든 사례 등이 실려있다.[8] 속일본기에서는 보통 ‘졸전’에 승려를 제외한 율령관위제 5위 이하의 사람은 기록하지 않지만, 정5위인 미치노키미 오비토나만은 생전의 전기에 해당하는 ‘졸전’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는 오비토나의 지방행정이 율령 하의 모범이었던 데다가, 속일본기 편찬기의 천황과 혈연관계가 있었다는 점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텐지 천황(天智天皇)과 미치노키미 일족인 고시노미치노키미 이라쓰메(越道君伊勢羅都売)의 사이에서 태어난 시키황자(志貴皇子)가 고닌 천황(光仁天皇)의 아버지인데, 속일본기의 전반부는 고닌 천황 시대에 편찬됐다.

히고의 국사(国司, 지방관)에는 미치노키미 오비토나 외에 기노 나츠이(紀夏井), 후지와라노 야스마사(藤原保昌) 등이 부임했으며, 헤이안 시대의 국사인 기요하라노 모토스케(清原元輔)와 히고의 여류 시인 히가키노오나(檜垣嫗)의 교류에 대한 여러 전설이 남아 있다.[3]

아스카 시대부터 도입된 율령제의 조세제도인 조용(調庸) 중에, 히고에서 올라온 특징적인 품목으로는 겉풀솜(繭綿)과 견직물이 있었다. 화명류취초속일본기에는 이것들을 헌상된 수량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자초(紫草)도 많이 진상됐는데, 이는 헤이죠쿄(平城京) 터나 다자이후에서 출토된 목간의 기록으로 뒷받침된다. 이 밖에도, 조정의 정월 연회 재료를 위한 송어(腹赤魚) 등 해산물을 헌상한 기록 등도 남아 있다. 히고국의 납세능력은 좋은 편이었는데, 코닌식(弘仁式)에 기록된 대여(出挙)한 벼의 숫자를 보면, 규슈 총 459만 다발 중 123만 다발을 히고국이 차지했다. 그 덕에 공영전제(公営田制) 도입에 있어서, 히고국은 엔랴쿠(延暦) 14년(795년)에는 국 등급구분이 ‘상국’에서 ‘대국’으로 승격돼, 그 중심을 담당하는 위치의 나라가 됐다.

이러한 조세 징수 및 군사 등 지방행정을 수행하기 위해 히고국에도 조리제(条里制, 토지 구획법)이 보급되어, 군가(郡家, 또는 군아(郡衙)), 역로, 차로가 정비됐다. 다만 기록에 남아 있는 조리제의 구역은 일부 아소 칼데라 내를 제외하고 기쿠치천 유역과 구마모토 평야에 집중되어 있다. ‘コ’자형으로 배열된 굴립주(掘立柱, 땅속에 박아 세우는 기둥)가 특징적으로 보이는 군아의 유구도 그 중심을 차지하는 형태로 발굴되고 있다. 길은 쓰쿠시국(筑紫国)에서 내려와 구마모토 평야를 남북으로 관통해 역참(馬屋)인 마시키역으로 이어진다. 현재의 구마모토시 북부(옛 지명 ‘코카이정’(子飼町))에는 겉풀솜 수송의 중계점이었던 고카이역(蚕養駅)이 설치됐다.

히고국은 또한, 조정이나 역마, 전마(伝馬)로 사용되는 말을 공급하는 목장의 역할을 했다.[9] 엔기식(延喜式)에는 후타에 목장(二重牧, 아소 외륜산을 끼고 아소정오즈정에 걸쳐있음)과 하라 목장(波良牧, 오구니정(小国町)일대로 추정됨), 그리고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実録)에는 오야케 목장(大宅牧, 우토반도)이 기록돼 있다. 또한 야마가시(山鹿市)의 옛날 이야기 중에 큰 논밭을 자랑하는 요나바루 장자(米原長者)가 역시 대지주인 다노바루 장자(駄の原長者)와 보물 대결을 벌인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에서 금은보화를 쌓아올린 요나바루 장자에 맞서 씩씩한 아들들과 아름다운 딸들을 앞세운 다노바루 장자 쪽으로 민중이 손을 들어줬다고 한다.[10] 이 다노바루 장자는 수백 마리의 우마를 가졌고, 관도(官道)에 역마 공급을 담당한 실력자였다고 추측된다.

진고케이운(神護景雲) 원년(768년), 히고국 아시키타군(葦北郡)에서 흰 거북이를 조정에 헌상했다. 3년 후에도 같은 사례가 있는데, 이 일은 역사에 큰 영향을 줬다. 진고케이운 4년(771년) 8월에 아시키타군과 마시키군의 2곳에서 흰 거북이 헌상됐다. 이 달은 고켄 천황(称徳天皇)이 죽은 달이자, 텐지(天智) 계열의 고닌 천황(光仁天皇)이 즉위한 때이기도 하다. 큰 길조를 나타내는 거북의 출현에 따라 10월에 원호가 ‘호키’(宝亀, 보석 거북이)로 바뀌면서, 권세를 자랑하던 도쿄(道鏡)의 위신은 실추됐다.

771년의 흰 거북 헌상은, 속일본기에 따르면 국사인 히고노카미 오토모노 스쿠네 마스타테(大伴宿禰益立)가 한 일이다. 호키 3년(773년)에 또다시 흰 거북을 헌상한 히고국은, 상서로움을 나타냄으로써 텐무(天武)계에서 텐지계로의 전환을 뒷받침했다. 거기에는 오토모씨의 관여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후지와라 다네쓰구(藤原種継) 암살 계획에 관여했다고 하여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 일족이 처벌받았다. 그 이후 히고 국사의 계열에는 오토모의 이름은 보이지 않게 되었고, 후지와라씨 계열이 그 직을 맡게 됐다.

3. 2. 무사의 발흥과 겐페이 전쟁

헤이안 시대 후기, 히고국을 포함한 일본 각지에서는 사무라이가 발흥하여 세력을 확립해 나갔다. 히고국에서는 기쿠치(菊池), 아소(阿蘇) 두 씨족이 대표적인 무사단으로 꼽혔으며, 미도리카와강 유역의 키하라씨(木原氏), 아마쿠사 제도(諸島部)의 아마쿠사씨, 히토요시와 구마강 유역의 사가라씨(相良氏), 전국시대에 이름을 떨친 구마베씨(隈部氏) 등도 알려져 있다. 이들 무사단은 다자이후(大宰府)에 소속된 관리를 원류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링크=https://en.wikipedia.org/wiki/File:K_taketoki.gif|섬네일|기쿠치씨의 무사]]

기쿠치씨의 시조인 기쿠치 노리타카(菊池則隆)는 도이의 입구(침략)에서 다자이후의 곤노소치(権帥, 장관대리) 후지와라노 다카이에(藤原隆家) 휘하에서 활약한 후지와라계 일족(郎党)인 후지와라노 마사노리(藤原政則)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다만, 노리타카와 그 아들 마사타카(政隆)는 군사(郡司) 가문 계열의 ‘히고국 주민’(肥後国住人)으로도 여겨져, 혈연관계가 아닌 주종관계였다는 설도 있다.

아소씨(본래 성은 우지(宇治))는 아소 국조(国造)의 계열을 칭하며, 아소 신사의 신관을 세습하는 호족이었다.[11] 호엔(保延) 연간(1135~1141년)에는 켄군신사(健軍神社), 코사신사(甲佐神社), 코노우라신사(郡浦神社) 등을 산하에 두고 히고국 중앙부를 세력하에 두었으며, 아소 신사는 히고국의 일궁(一宮)이 되었다. 아소씨는 호엔 3년(1137년) 우지 고레노부(宇治惟宣)가 신관의 장이 무사단의 장을 겸할 때 쓰는 ‘대궁사’(大宮司)를 칭하면서 무사단을 형성했다. 아소씨는 전성기에 아소의 남외륜산, 현재의 야마토정(山都町)에 있었던 ‘하마노야가타’(浜の館)를 거점으로, 이와오성(岩尾城), 아이토지성(愛藤寺城, 별명 야베성(矢部城)) 등 견고한 산성을 축성해 세력을 자랑했다.

헤이안 시대 후기, 지방에서 발흥한 무사 세력은 소규모 분쟁을 일으켰다. 히고국에서는 미나모토노 다메토모(源為朝)가 난동을 부렸다는 기록이 <호겐모노가타리>(保元物語)에 전해지며, 각지에 관련 전승이 남아 있다. 시모마시키군(현 구마모토시 남구) 토미아이정(富合町)의 기하라산(木原山, 간카이산(雁回山))에는 친제이하치로(鎮西八郎, 미나모토노 다메토모)의 활솜씨를 두려워한 기러기들이 산을 피해 날아갔다는 전설이 있다.[12] 그러나 <고야산 문서>에 따르면, 현지에서 반체제 소란을 일으킨 것은 기하라 히로자네(木原広実)였다고도 전해진다.[12]

호겐의 난 이후, 타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가 다자이다이니(大宰大弐)에 취임하면서 히고국을 비롯한 규슈에 헤이케(平家)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헤이케는 왕령장원(王領荘園)의 영가나 아즈카리도코로(預所)직을 차지하고, 지방관인 즈료(受領)로써 관아를 장악했다. 이에 지방 무사단은 헤이케의 군문에 들어가거나 반항하는 양자택일을 강요받았다.

기쿠치씨의 동량인 기쿠치 다카나오(菊池隆直)는 지쇼(治承) 4년(1180년), 아소 고레야스(阿蘇惟安)와 기하라 지로 모리자네(木原次郎盛実) 등 히고의 유력 무장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요와(養和)의 내란’이라고도 불리며, 한때 다자이후까지 쳐들어갔으나, 헤이케 측의 추토로 요와 2년(1182년) 4월에 항복했다. 이후 히고의 무사단은 헤이케 측에 편입됐다.

<아즈마카가미>(吾妻鏡),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 <겐페이 성쇠기>(源平盛衰記), <역대 친제이 요략>(歴代鎮西要略)에서는 이 반란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에 호응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현대 사학계에서는 지방세력의 반란으로 이해한다. 오히려 가마쿠라 막부는 기쿠치 다카나오를 헤이케의 편을 든 ‘나쁜 무리’(張本の輩)라고 판단했다. 다만, 기쿠치씨가 가마쿠라 시대에도 고케닌(御家人) 지위를 유지한 점을 고려하면, ‘친제이 반란’이 겐지의 편을 든 것으로 고려됐을 가능성도 있다.

기쿠치 다카나오는 ‘일국 동량’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으나, ‘요와의 내란’은 결과적으로 중앙 무가권력의 히고 지배를 불러들이는 역할을 했다. 구마 장원은 헤이케 몰관령(平家没官領)으로 간주되어 가마쿠라 막부에 의해 해체되었고, 그 일부인 히토요시 장원은 나중에 사라가씨에게 수여됐다.

구마모토현이나 그 근교에는 야쓰시로시 이즈미정의 고카의 장원(五家荘, 고카노쇼),[15] 미야자키현 시이바촌(椎葉村) 등 헤이케 낙인(落人) 전설이 남아 있다.

3. 3. 가마쿠라 막부와 몽골 침입

분지의 칙허에 따라 슈고(守護)와 지두(地頭)가 설치되자, 헤이케 쪽에 속하던 히고국에서는 동국무사의 다수가 총지두(惣地頭)의 직을 차지했다. ‘나쁜 무리’(張本の輩)로 여겨졌던 기쿠치씨는, 고토바 상황(後鳥羽上皇)의 인젠(院宣)으로 시작한 조큐의 난(承久の乱)에서 기쿠치 요시타카(菊池能隆)가 상황측으로 가담한 것도 있어, 그 영지를 몰수당했다. 그러나 많은 히고의 재향무사들은 총지두의 ‘소관’(所堪, 지도통제)에 복종하는 소지두에 편입됐다.[16]

구마모토시 북부에 있던 유명한 장원 ‘카노코기 장원’(鹿子木荘)은 개발 영주가 가진 권한이 막강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중에 개발 영주로 나오는 샤미주묘(沙弥寿妙)가 실제로는 즈료(受領)였음이 판명되어, 개발 영주의 권한인 ‘직권유보, 상분기진’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실제로는 편안태평을 목표로 영지를 기증했던 지방 무사가 기증의 대가로 얻은 대관직을 곧 잃거나, 소송에서 패해 직을 상실하는 사례 등도 있었다.[16]

몽고습래회사》의 한 장면. 오른쪽에 다케자키 스에나가가 전장에서 활약하고 있다.


분에이(文永) 11년(1274년) 10월 19일, 몽골군이 하카타 만에 밀려들면서, 이른바 ‘원구’(元寇, 원나라의 침략)가 시작됐다. 이 전쟁에는 기쿠치, 다쿠마(詫間), 사가라씨 등 히고의 무사들도 다수 출전했다. 회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다자이후와 인근의 미즈성(水城)까지 전선을 진전시킨 몽골군이었으나 일단 자신들의 군선으로 퇴각했다. 그 때 군선에 폭풍우가 휘몰아쳐 많은 배가 난파됐고, 원나라군은 패퇴했다.[16]

재침략을 대비하여 막부는 고케닌(御家人)뿐 아니라 ‘장원 일원지의 주민’에게도 출진을 요구하며 군공에는 은상으로 보답하겠다고 고지했다. 고려 원정 계획은 취소됐지만, 소집된 병력은 경비 임무에 투입됐고 히고의 무사들도 이키노마츠바라(生の松原)에 배치됐다.[16]

코안(弘安) 4년(1281년) 6월 3일 몽골군은 다시 하카타 만을 침략했지만, 경비하던 무사와 석축지에 막혀 퇴각했다. 그들은 중국 강남의 군대와 합류해 7월 27일 다카시마섬(鷹島) 앞바다에 도착했지만, 태풍으로 난파선이 속출했다. 무사단은 잔병을 소탕했고, 히고의 무사들도 분투했다.[16]

이 두번의 전쟁(분에이의 전쟁, 고안의 전쟁)에서 싸운 히고 무사 중 하나인 다케자키 스에나가(竹崎季長)는 나중에 전쟁의 상황 등을 전하는 <몽고습래회사>(蒙古襲来絵詞)를 편찬했다. 기쿠치씨의 방계인 다케자키씨는 우토시 마쓰바세정(松橋町) 다케자키에 살던 구니고케닌(国御家人)이었다. 스에나가는 소송에서 패해 일족으로부터 고립된 상태였으나, 분에이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음에도 은상을 받지 못했다. 그는 가마쿠라까지 가서 겐지(建治) 2년(1276년) 아다치 야스모리(安達泰盛)에게 상소하여 토카이향(東海郷, 지금의 우토시 오가와정)의 지두직을 받았다.[16]

코안의 전쟁에서도 활약한 스에나가는 토카이향 경영에서 수완을 발휘했고, 11월 소동(霜月騒動)으로 죽은 아다치 야스모리를 추모하여 <몽고습래회사>를 작성할 만큼 재력이 있었다.[16]

스에나가처럼 무공을 세웠음에도 포상을 받지 못한 고케닌이 많아 빈궁화가 진행됐다. 호조 도키요리(北条時頼)는 막부권력을 장악하고 호조 일족에 의한 전제정치를 굳혔다. 11월 소동(霜月騒動) 이후 슈고직은 토쿠슈 또는 호조씨 일족이 독점했고, 토쿠슈령이 된 장원도 히고국 전역에 걸쳐 있었다. 영지를 빼앗기거나 안도(소유권 유지)나 자립을 위협받는 등 모순을 내포한 정치는 큰 불평불만을 낳았고, 반체제 세력인 ‘악당’의 발생으로 이어져 간다.[16]

에이쇼(永承) 7년(1052년)은 불교에서 말하는 말법(末法)의 원년으로 여겨지며, 구원을 추구하는 종교운동은 히고에서도 볼 수 있었다. 호넨(法然)이 시작한 정토종은 안테이(安貞) 2년(1228년) 시라카와 천변의 오죠인(往生院)에서 열린 벤나(弁阿)의 별시염불부터 히고에 전파되었다. 히토요시・쿠마지방에도 명찰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는 사가라씨가 이 지역을 지배하고 그 지배가 메이지 시대까지 이어진 게 큰 역할을 했다. 유노마에정(湯前町)에 있는 묘도사(明導寺)와 다라기정의 쇼렌사(青蓮寺)가 대표적이다.[17]

3. 4. 남북조 시대와 정서부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 타도 운동에 호응하여 모리요시 친왕이 내린 호죠 다카토키 토벌 명령은 규슈의 무사들에게도 전달되었다.[18] 겐코 2년・쇼쿄 2년(1333년) 초, 기쿠치 다케토키(菊池武時)는 쇼니 사다쓰네(少弐貞経), 오토모 사다무네(大友貞宗)와 함께 친제이탄다이(鎮西探題) 공격을 밀약했으나, 계획이 누설되어 호죠 히데토키(北条英時)에게 발각되었다. 기쿠치 다케토키는 아소 고레나오(阿蘇惟直) 등과 함께 탄다이를 공격했지만, 쇼니, 오토모 두 씨족의 배신으로 전멸하고, 아들 기쿠치 다케시게(菊池武重)만 히고로 도망쳤다.[18] 1978년 후쿠오카시 지하철 공사 때 발견된 110여 개의 두개골은 하카타 전투에서 참수된 기쿠치 일족의 것으로 추정된다.

호죠 히데토키는 히고국 슈고인 호죠 다카마사(北条高政)에게 기쿠치, 아소씨 토벌을 명했고, 두 씨족은 휴가국 구라오카성(鞍岡城)으로 도망쳤으나 대부분 토벌당했다. 이 사건으로 기쿠치씨는 쇼니, 오토모 두 씨족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닛타 요시사다가 반기를 들고, 쇼니, 오오토모 두 씨족도 도막으로 돌아서면서 가마쿠라 막부는 붕괴되었다. 고다이고 천황의 친정이 시작된 후, 신정부는 히고 무사를 높게 평가하여 기쿠치 다케시게는 히고노카미 관직을 얻었고, 아소씨도 대궁사 임명권을 되찾았다.

그러나 천황 친정의 졸속 개혁과 여러 문제로 친정 권력은 지지를 잃었고, 겐무 2년(1335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가마쿠라에서 반기를 들었다. 기쿠치 다케시게, 다케요시 형제는 닛타 요시타다군에 가담하여 하코네・타케노시타 전투에 참전했으나 패배했다. 기쿠치 다케시게는 후군(殿軍)으로 활약하고, 겐무 3년/엔겐 원년(1336년) 교토 오와타리바시(京都・大渡橋) 전투에서도 다카우지군을 요격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규슈로 도망쳐 쇼니 요리히사 등의 지원을 받았으나, 기쿠치씨와 아소씨는 남조(천황측)와의 의리를 지켰다. 기쿠치 다케토시, 아소 대궁사 고레나오와 고레나리 형제는 다타라하마(多多良浜) 전투에서 패배했다. 겐무 3년 4월 3일,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규슈 북부에 잇시키 노리우지, 남부에 하타케야마 다다아키를 배치하고 수도로 출발, 미나토가와강 전투(湊川の戦い)에서 천황 측을 격파했다.[19]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기쿠치 다케요시는 할복했고, 이후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떠난 후, 히고 무사단은 저항을 강화했다. 기쿠치 다케시게는 겐무 4년(1337년)에 거병하여 아소 고레토키의 사위인 아소 고레즈미, 나와씨(名和氏)와 협력하여 이누즈카하라(犬塚原, 현 미후네정)에서 잇시키 요리유키를 격파했다.

히고 무사는 '남조 일변도'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일족 내 갈등도 심화되었다. 아소씨는 일족이 남북조로 갈라졌으나, 아소 고레토키는 중립을 유지하여 분열을 막았다. 기쿠치씨는 조동종(曹洞宗) 승려 다이치(大智)를 불러 '기쿠치 가헌'을 만들었으나, 기쿠치 다케시게 사후 세력이 쇠퇴했다.

이러한 상황에 정서대장군 카네요시 친왕과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히고국으로 향했다. 카네요시 친왕은 죠와 4년/쇼헤이 3년(1348년) 히고의 우토에 도착하여 기쿠치 다케미쓰를 따라 기쿠치 가문의 와이후 산(隈府山)으로 들어갔다. 아시카가 다다후유는 가와시리 유키토시의 초청을 받고 히고에 들어와 막부의 위세를 빌려 규슈 무사단을 지휘하려 했다.

이리하여 히고는 천황 측(남조 측), 다카우지 측(탄다이 측), 다다후유 측(스케도노 측(佐殿方))의 세 세력이 정립(鼎立)하는 상태에 돌입했다.

칸노 2년(1351년) 코노 모로나오・모로야스 형제가 죽고,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권력을 장악하여 다다후유 측은 기세를 얻었다. 다다후유는 친제이 탄다이에, 가와시리 유키토시는 히고국 슈고에 취임했다. 그러나 쇼헤이 일통(正平一統)과 다다요시의 죽음으로 다다후유는 규슈에서 도망쳤다.

다시 남북조 대치상태로 돌아온 규슈에서 천황 측은 세력을 강화했다. 분나 2년/쇼헤이 8년(1353년) 천황 측은 잇시키 나오우지 군을 격파하고, 2년 뒤 하카타를 공략했다. 잇시키 노리우지・나오우지 부자는 규슈를 탈출했다.

쇼니씨오토모씨 등은 천황 측과 대립하게 되었다. 엔분 3년/쇼헤이 13년(1358년) 오토모 우지토키가 거병하고, 쇼니 요리히사도 호응했다. 이듬해 양군은 치쿠고강 전투(筑後川の戦い)에서 격돌, 천황 측의 야습으로 쇼니군은 패퇴했다.

코안 원년/쇼헤이 16년(1361년), 가네요시 친왕은 다자이후에 입성해 정서부를 설치하고 북부 규슈를 장악했다. 정서부는 쇼니 요리즈미를 필두로 한 12명의 부관들로 구성되었으나, 실제로는 기쿠치 다케미쓰 등 기쿠치 일족이 장악했다. 정서부는 명, 고려와의 국교에서 독립된 군사정권의 양상을 띠었다.

아시카가 막부는 정서부를 인정하지 않고, 오안 3년/겐토쿠 원년(1370년)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 법명은 료슌(了俊))를 규슈 탄다이에 임명했다. 이마가와 사다요는 다자이후를 공격했고, 오안 5년/분츄 원년(1372년) 정서부는 무너졌다. 이후 기쿠치 다케미쓰와 다케마사(菊池武政)가 죽은 뒤, 천황 측은 히고까지 밀려났다.

기쿠치 다케마사가 쌓았다고 전해지는 기쿠치성에 틀어박힌 천황 측은 이마가와 사다요에게 완전히 포위당했다.[20] 사다요는 쇼니 후유스케를 살해했고(미즈시마섬(水島)의 변), 시마즈 우지히사는 반(反) 사다요로 태도를 바꿨다.

천황 측에서도 가네요시 친왕과 기쿠치 다케토모의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다케토모는 요시나리 친왕을 받들고 히젠에 쳐들어갔으나 패퇴했다.

이마가와 사다요기쿠치씨와의 싸움을 결착지으려 했다. 에이와 4년/텐쥬 4년(1378년) 다쿠마 벌판의 싸움에서 기쿠치 다케토모는 승리했으나, 에이토쿠 원년/코와 원년(1381년) 기쿠치성 등이 함락되고 다케토모는 남쪽으로 도망쳤다. 메이토쿠 2년/겐츄 8년(1391년) 나와씨의 야쓰시로가 함락되고, 이듬해 다케토모는 항복했다. 이마가와 사다요는 기쿠치씨의 본령을 인정해주고 다케토모를 히고국 슈고대리(守護代)에 임명했으나, 오에이 2년(1395년) 파면되었다.

3. 5. 무로마치 시대와 센고쿠 시대

이마가와 사다요가 떠나고 시부카와 미쓰요리(渋川満頼)가 규슈 탄다이에 취임하자, 기쿠치씨는 다시 반역의 자세를 드러냈다. 하지만, 계속되는 전란 속에 기쿠치씨는 점점 쇠퇴하고, 대신 다쿠마 미쓰치카(詫磨満親)가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다쿠마씨와 남북조시대에 이름을 날렸던 가와시리씨는 오에이 연간에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21]

기쿠치 가네토모(菊池兼朝)는 히고 슈고직을 맡게 됐으나, 아소씨와 사가라씨의 세력권까지 슈고 권력이 미치지는 못했다. 에이쿄(永享) 3년(1431년) 기쿠치 모치토모(菊池持朝) 대에 이르러 기쿠치씨는 친막부적인 태도를 보였고, 지쿠고와 히고의 슈고를 맡게 됐다. 기쿠치성은 구마모토(隈本)를 대신해 슈고 소재지(守護所)인 와이후(隈府)가 됐다. 다음 대인 다메쿠니(為邦)는 조선과의 무역에 나섰으며, 성내에 교쿠쇼사(玉祥寺)와 헤키간사(碧巌寺)를 선립하는 등 그의 부와 덕은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생애 후반에는 치쿠고 슈고직을 오토모씨에게 빼앗겨 조일무역이 불가능해졌고, 사가라씨의 야쓰시로 진출에도 아무런 손을 쓰지 못했다. 이것이 기쿠치씨 쇠퇴의 시작으로 여겨진다.[21]

다음 대인 기쿠치 시게토모(菊池重朝)는 슈고직도 계승해, 공권력을 이용하여 구마모토 성내의 정비를 실시했다. 기쿠치 5산과 성하마을(城下町)의 형성이 이 무렵 이뤄졌다.[22] 또한, 시게토모는 문화인으로서의 업적도 남겼다. 중신인 구마베 다다나오(隈部忠直)와 함께 건립한 공자당에는 초청을 받아 찾아온 게이안 겐쥬(桂庵玄樹)가 노래한 한시가 남아 있다. 또한, 후지사키 하치만궁도 이 시기 축조됐으며, 연가(連歌) 모임도 여러 번 열렸다. 분메이(文明) 13년(1481년) 8월에 흥행한 만구연가(万句連歌)는 나중에 필사된 것이 전해진 덕분에 모임 참가자를 알 수 있는데, 대부분은 히고 북부 사람들이었고, 기쿠치씨 계열의 유력한 분가는 참가하지 않았다. 또한, 참가자의 절반은 기쿠치씨의 직신으로 보이며, 특히 구마베씨가 많이 출석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기쿠치씨 세력의 정무는 구마베씨, 아카호시씨(赤星氏), 죠씨(城氏, 후지와라성)가 가로 가문으로써 집행했으며, 예전에 ‘기쿠치 가헌’에서 정한 합의제는 그림자도 실체도 없어졌다. 시게토모가 죽은 메이오 2년(1493년), 기쿠치의 총령은 적자인 요시카즈(能運)가 이었지만, 그는 최후의 기쿠치 본가 적류가 됐다.[22]

한편, 아소씨는 일족 분열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아소 고레즈미는 한때 북조에 붙은 적남 아소 고레무라(阿蘇惟村)에게 대궁사직을 물려줬다. 하지만 고레무라의 동생 고레타케(惟武)가 이에 불복해 정서부에 소를 올렸고, 이를 인정받아 고레타케가 죠지 6년/쇼헤이 22년(1367년) 대궁사의 보임을 받았다. 이 때부터 아소 일족은 두 계열로 나뉘어 대립하기 시작했다.

아소 고레무라, 고레사토(惟郷), 고레타다(惟忠)는 야베(矢部)에 본거지를 두고 규슈 탄다이와 오토모씨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아소신사령을 지배하에 두고 기쿠치씨의 지원을 받은 고레타케, 고레마사(惟政), 고레카네(惟兼)을 억제할 순 없었다. 오에이 11년(1404년)에는 고레사토가 쳐들어와 동족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 때는 막부가 중재에 들어갔다. 그 후에도 싸움은 계속됐으나, 호토쿠(宝徳) 3년(1451년) 일족 장로들의 결의로 고레카네의 아들 고레토시(惟歳)를 고레타다의 양자로 삼아 양통의 단일화를 꾀했다. 하지만 고레타다가 실권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싸움이 벌어졌다. 분메이 17년(1485년) 고레토시와 그 아들 대궁사 고레이에(惟家)는 사가라씨의 조력을 받았고, 고레타다와 그 아들 고레노리(惟憲)는 슈고 기쿠치 시게토모의 지원을 얻었다. 이들은 마카도바루(幕の平, 현 가미마시키군 야마토정 스기키・야마다)에서 격돌했다. 싸움은 고레타다와 고레노리측의 승리(마카도바루의 전투)로 끝났다.[22]

남북조 시대에 구마지방의 사가라씨는 다라기의 가미사가라씨와 히토요시의 시모사가라씨로 나뉘어 아소씨처럼 대립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 교착상태를 매듭짓고 가문의 통일을 이룬 사람은 분안(文安) 5년(1448년) 가미사가라를 멸망시킨 사가라 나가쓰구(相良長続)였다.[23] 하지만 이 일은 분가에 의한 하극상으로 간주되고 있다. 나가쓰구는 슈고인 기쿠치 다메쿠니(菊池為邦)로부터 아시키타군의 영유권을 획득했고, 간쇼(寛正) 4년(1463년)에는 나와 아키타다(名和顕忠)를 도와준 대가로 다카다향(현재의 야쓰시로시 남부)도 영지로 편입시켰다.[23]

사가라씨의 원조를 받아 야쓰시로성으로 돌아온 나와 아키타다는 다카다향을 아쉬워했다. 분에이 8년(1476년) 사쓰마의 우시쿠소인(牛屎院)으로 사가라씨가 출병하자, 아키타다는 그 틈을 파고들어 다카다향에 쳐들어갔다. 나가쓰구의 적자인 사가라 다메쓰구(相良為続)는 아마쿠사의 영주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이 공격을 막았다. 분에이 14년(1482년) 아키타다가 또다시 쳐들어오자 다시한번 아마쿠사 세력과 힘을 합친 다메쓰구는 이를 물리쳤다. 다메쓰구는 그대로 야쓰시로를 공격해, 2년 후에는 제압에 성공했다. 그는 기세를 몰아서 도요후쿠(豊福, 현 우토시, 구 마쓰바세정)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메이오 8년(1499년)에는 기쿠치 요시카즈(菊池能運)의 조력을 얻은 나와씨에게 패하여, 마쓰바세와 야쓰시로를 포기하고 구마로 돌아왔다.[23]

아마쿠사 지방의 무사단은 거의 모든 섬에 존재해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 전기에 알려진 무사단으로는, 아마쿠사 시모시마섬 서북부의 기쿠치씨 계열로 알려진 지두직의 시키씨(志岐氏), 시모시마섬의 중남부 혼도지마의 오쿠라씨(大蔵氏) 계열로 알려진 아마쿠사씨(天草氏), <몽고습래회사>에 그 활약이 기록된 오야노섬(大矢野島)의 오야노씨가 있었다. 시키씨가 지두직을 얻은 것은 겐큐(元久) 2년(1205년)부터라고 한다.[24] 시키씨는 이 지역에서는 신흥 세력이었기 때문에 호죠씨나 탄다이인 잇시키씨와 관계를 맺는 등 그때그때 권력자와의 연줄을 얻어서 세력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아마쿠사씨는 죠헤이・텐교의 난(承平天慶の乱)에서 활약한 오쿠라노 하루자네(大蔵春実)의 후예로 여겨진다. 죠에이(貞永) 2년(1233년) 하라다 다네나오(原田種直)의 여식 하리마노쓰보네(播磨局)가 혼도지마의 지두직을 계승한 것에서 시작한다.[25] 오쿠라씨 계열로 알려진 오야노씨는 원나라 침략기에서의 기록 이후 그 활동이 불분명하다.

무로마치 시대 중기에는 아마쿠사 지방을 무대로 한 소란이 시작된다. 나와 아키타다를 사이에 두고 전개된 기쿠치씨와 사가라씨의 싸움은 아마쿠사의 여러 무사를 끌어들였다. 기쿠치 측에서 활약했던 아마쿠사 가미시마섬(天草上島)의 스모토씨(栖本氏)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이 무렵에는 아마쿠사씨의 세력이 강해져 시키씨와 고쓰우라씨(上津浦氏)를 압박했다. 이는 슈고인 기쿠치 요시카즈의 중재로 일단 진정됐으나, 전국 시대에 다시 한 번 전란이 일어나게 된다.[24][25]

일본의 전국시대는 메이오의 정변(1493년) 혹은 오닌의 난(1467년)을 기점으로 하지만, 히고국의 전국시대는 기쿠치 요시카즈가 사망한 에이쇼(永正) 원년(1504년)을 시작으로 본다.

현재의 야마토정 스기키 부근에서 벌어진 아소씨의 내부 분쟁인 마카도바루의 전투(馬門原の戦い)에 기쿠치 시게토모가 개입했으나 패배한 이후, 기쿠치씨의 지배영역은 줄어들었고, 지도력도 현저히 저하됐다. 가독을 이은 시게토모의 아들 요시카즈는 직신의 저항에 부딪혀, 분키(文亀) 원년(1501년)에 시마바라(島原)로 망명했다. 그러자 일족은 합의 끝에 우토 다메미쓰(宇土為光)를 슈고로 삼았다.[22]

2년 후, 요시카즈는 아소씨, 사가라씨 등과 제휴하고, 아마쿠사씨 등의 지원을 받아 와이후(隈府) 탈환에 성공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입은 부상이 원인이 돼 이듬해 사망했다. 요시카즈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상속 분쟁이 발발했다. 이후, 아소씨는 야베를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그 융성함이 극에 달했다.[22]

요시카즈의 유언에 따라 기쿠치 시게야스(菊池重安)의 아들 마사타카(政隆)가 당주가 됐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일족은 기쿠치씨 대신에, 세력을 키워온 아소 가문의 대궁사 아소 고레나가(阿蘇惟長, 기쿠치 다케쓰네(菊池武経))를 후계 슈고직에 추대했다.

에이쇼(永正) 3년(1506년), 고레나가의 배후에서 히고 장악을 획책하던 오토모씨가 병력을 끌고 직접 개입했다. 기쿠치성에 입성한 아소 고레나가는 대궁사직을 동생인 고레토요(惟豊)에게 물려주고 기쿠치 다케쓰네로 이름을 고쳐 당주의 자리에 올랐다. 마사타카는 도망친 뒤 다마나, 시마바라에서 저항을 이어갔으나, 3년 후에 포박돼 구메(久米)의 안코쿠사(安国寺, 기쿠치군 시스이정(泗水町))에서 자결했다.[22]

하지만, 기쿠치 다케쓰네는 교만해져서 가신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불과 3년만에 지위를 잃게 된다. 이 배경에는 흑막인 오토모 치카하루(大友親治)의 의향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26] 오토모씨가 기쿠치 가문을 탈취해 히고를 지배하려는 목적으로 다케쓰네를 쓰고 버릴 생각이었다는 설이 있다.[27] 기쿠치 가문의 총령에는 다쿠마씨 출신인 기쿠치 다케카네(菊池武包)가 옹립되었으나 이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26][27]

4. 근세

4. 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통일과 삿사 나리마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통일은 히고(현 구마모토현)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다. 1587년 3월, 히데요시는 대군을 이끌고 규슈에 진입하여 파죽지세로 남하했다.[36] 4월에는 히고 난칸, 구마모토성, 야쓰시로 성, 미나마타 성을 차례로 점령하고, 5월에는 시마즈 요시히사 등을 항복시켰다.[36] 히데요시는 히고 국인 52명에게 본령안도(本領安堵) 서장을 보내고, 삿사 나리마사에게 히고 1국을 주었다.[36]

삿사 나리마사는 오다 노부나가 휘하의 맹장이었으나, 히데요시에게 여러 차례 반기를 들었다가 항복한 인물이었다.[36] 히데요시는 나리마사에게 히고 통치를 맡기면서 봉기 방지, 국인 영지 안도, 3년간 검지 금지 등을 명하는 5개조 정서(定書)를 내렸다.[38] 하지만, '난치의 나라' 히고에서 나리마사는 국인들에게 영지 검지를 요구하며 갈등을 빚었다.[36] 국인들은 히데요시가 보장한 자치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여겨 반발했다.

1587년 8월, 구마베 치카나가를 필두로 히고 국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40] 나리마사는 진압에 나섰으나 고전했고, 다치바나 무네시게 등 주변 다이묘들의 지원을 받아 간신히 진압했다.[40][41] 히데요시는 봉기 진압을 위해 인접 다이묘들에게 출병을 명했고, 구마베 치카나가 등은 처형당했다.[42] 1588년에는 아사노 나가요시 등이 파견되어 잔당 소탕 및 검지를 실시했다.[45] 히데요시는 봉기의 책임을 물어 나리마사를 할복시켰다.

나리마사 사후, 히데요시는 히고를 가토 기요마사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양분하여 통치하게 했다.[43] 기요마사는 구마모토 성을 거점으로 북부를, 유키나가는 우토 성을 거점으로 남부를 다스렸다. 한편, 사가라 씨는 히데요시에게 협력하여 본령을 안도받았으나, 봉기 진압 과정에서 시마즈 군의 발을 묶는 실수를 범해 위기를 맞기도 했다.[43]

1589년, 고니시 유키나가의 우토 성 개축 자본 공출 명령에 반발하여 아마쿠사 5인중이 봉기를 일으켰다.[44] 유키나가는 기요마사 등의 지원을 받아 진압했고, 봉기군은 대부분 전사했다.[44]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직후, 시마즈 가신 우메키타 구니카네 등이 우메키타 봉기를 일으켰으나, 현지 유력자들의 비협조와 히데요시의 신속한 대응으로 진압되었다.[45] 히데요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다이묘 세력 강화와 잠재적 반란 분자 억제라는 성과를 얻었다.[45]

4. 2. 에도 시대의 구마모토 번

가토 기요마사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측(동군)에 가담하여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를 몰수하고 히고구마모토번을 성립시켰다.[46] 구마모토번의 석고는 54만 석이었다. 기요마사는 구마모토성(熊本城)을 대규모로 근대식으로 개축하고, 한자를 ‘隈本’에서 ‘熊本’로 고쳤다.[47] 기요마사는 치수사업과 남만 무역에 힘썼으나, 1611년에 사망했다.[48] 가토 다다히로가 어리다는 이유로 에도 막부는 구마모토번을 견제했고, 가신단 내 분쟁인 ‘우시카타와 우마카타의 소동’이 일어났다. 1632년 다다히로는 개역 처분되고, 호소카와씨가 구마모토 번주가 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 중 아마쿠사가라쓰번의 월경지가 되었다. 사제 추방령 이후에도 기독교가 보호받아 아마쿠사 제도는 키리시탄의 본거지가 되었다.[49] 예수회이솝 우화헤이케모노가타리등의 출판활동을 하였다. 데라자와 히로타카1604년부터 기독교를 탄압하고,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여 시마바라의 난의 원인을 제공했다.[50] 아마쿠사 시로를 중심으로 봉기한 농민군은 하라성(原城)에서 농성했으나 진압되었다.[51] 이후 아마쿠사는 천령(天領, 막부 직할령)이 되었다.[52]

히토요시번의 사가라 요리후사는 인도 요리모리의 전횡을 막지 못하고 사망했고, 1640년 요리모리는 쓰가루에 유배되었다.[53] 히토요시 번은 병농분리가 이뤄지지 않았고, 향시(郷侍)들이 거주했다.

호소카와 다다토시가 구마모토 번주가 된 후, 1641년 다다토시가 사망하고, 1645년에는 다다오키가 사망하는등 여러명의 순사자가 나왔다. 모리 오가이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아베 일족>을 저술했다.[54] 1666년 호소카와 츠나토시는 동생을 분가시켜 히고신덴 번(타카세 번)을 창설했다.

구마모토 번은 1635년 테나가(手永)라는 지방 행정구역을 설치하고, 총쇼야(惣庄屋)를 두었다. 스이젠지조주엔호소카와 다다토시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중세 아소는 사이간덴사(西巌殿寺)를 중심으로 야마부시(山伏)가 수행하던 땅이었으나, 전국시대에 소실되었다.[55] 에도 시대에는 오미네 수행(大峰修行)과 온천지로 발전했다. 야마가 온천은 헤이안 시대부터 알려졌으며, 에도 시대에는 역참 마을(宿場町)이자 온천 마을로 발달했다. 우토성은 폐성되었으나, 호소카와 유키타카가 진옥(陣屋)을 설치하고 고센 수도(轟泉水道)를 건설했다. 야쓰시로성은 일국일성령의 예외였으며, 호소카와씨는 마쓰이 가문을 성주대리(城代)로 세웠다. 야쓰시로야키(코다야키)는 분청사기의 흐름을 잇는 상감도기를 제작했다. 온주귤(코다 밀감)은 1574년부터 재배되었다는 설이 있다.[56]

히토요시의 성하마을은 아오이아소 신사의 문전마을(門前町)이 중심이었으나, 히토요시성 건설 이후 동쪽으로 확장되었다. 히토요시 번에는 ‘소성물’(小成物)이라는 특징적인 납세제도가 있었다. 아마쿠사의 대관 스즈키 시게나리는 석고를 반감시키려 노력했고, 1659년 재검지가 실시되어 석고가 반감되었다. 1664년 아마쿠사는 토다 타다마사의 영지가 되었으나, 타다마사는 아마쿠사를 천령으로 건의했다.[57] 아마쿠사에서는 고구마가 중요한 농산물이었으며,[58] 정어리도 지역 경제를 지탱했다.[59]

가토 기요마사시라카와 강 유역의 세타우와 용수로와 바바구스 용수로,[60] 미도리카와 강의 우노세 보,[61] 구마강 하류의 요하이 보[62]등 치수사업을 적극적으로 진행하여 1608년 히고의 석고는 75만 석까지 올랐다.[63] 에도시대 후기에는 츠우준교가 건설되었다. 히토요시 분지에는 햐쿠타로미조(百太郎溝)가 건설되었다.[64]

히고1634년 칸에이 대기근, 교호 대기근, 텐메이 대기근 등 기근의 영향을 받았다. 1791년 시마바라의 마유야마 산 붕괴로 인한 츠나미로 큰 피해를 입었다. 구마모토 번에서는 봉기(一揆)가 적었으나, 실제로는 100건이 넘는 봉기가 발생했다.[65] 1747년 아시키타 군에서 최대 규모의 봉기가 일어났다.[66] 히토요시 번에서는 1841년 ‘표고버섯산 소동’이 일어났다. 천령 아마쿠사에서는 은주(銀主)와 농민 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1843년1845년 대봉기가 발생했다.

1747년 호소카와 무네타카가 살해당하고, 호소카와 시게카타가 번주가 되어 호레키 개혁을 단행했다. 형법총서를 편찬하고, 번교시습관을 창립했다.[68] 의학교인 사이슌 관도 설립했다.[69] 조선인삼의 재배도 연구했다.[70]

1805년 아마쿠사에서 다수의 은신 키리시탄이 발각되었으나(아마쿠사 쿠즈레), 관대한 조치가 내려졌다.[71] 우에다 요시우즈는 아마쿠사석을 숫돌로 판매하는 길을 열었다.[72] 아마쿠사는 유배지이기도 했다.

4. 3.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과 기독교

고니시 유키나가의 옛 영지 중 아마쿠사데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의 히젠 가라쓰번 월경지가 되었다. 한때 구마모토번령이었으나, 가토 기요마사는 키리시탄이 뿌리내린 이곳을 싫어해 교환을 신청, 1603년(게이초 8년)에 인정받았다는 설이 있다.[49]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1601년(게이초 6년) 구마모토 번령에 아마쿠사가 없고 쓰루사키가 있다는 점, 히젠 가라쓰번의 아마쿠사 지배 증거가 발견되어 이 설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1587년(덴쇼 15년) 사제 추방령 이후에도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 아마쿠사 영주들은 기독교를 보호하여, 아마쿠사 제도는 키리시탄의 본거지가 되었다. 오토모 씨가 쇠퇴하며 붕고에 있던 노비샤드(수련원)와 코레지오(대신학교)가 아마쿠사로 옮겨와, 가와치우라(河内浦)에 노비샤드와 아마쿠사 코레지오가 세워졌다. 예수회 사제와 수도사들이 체재하며 포교하는 한편, 활판인쇄기를 도입해 <이솝 우화>와 <헤이케모노가타리>, 사전 등의 출판활동도 이뤄졌다. 1592년(분로쿠 원년) 아마쿠사 4개소에 레지덴시아(사제관)가, 1599년(게이초 4년) 나가사키에서 옮겨온 세미나리요(소 신학교)가 시키(志岐)에, 이듬해 천주당이 7개소에 건설됐다. 아마쿠사 제도 주민 과반수는 기독교에 귀의했다.

데라자와 히로타카는 한때 세례를 받고 예수회에 협력적이었으나, 1604년(게이초 9년) 태도를 바꿔 탄압하는 입장이 됐다. 이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1613년(게이초 18년) 막부의 선교사 추방령 이후, 데라자와 씨는 선교사를 외국으로 추방하고 레지덴시아를 철거했다. 키리시탄 지도자들은 개종할 때까지 고문당했고, 일반 신자들도 관리들로부터 개종을 강요받았다.

데라자와 씨는 아마쿠사에 강압적인 지배 방침을 내렸다. 히젠 가라쓰번에 의한 검지 결과 아마쿠사의 석고는 쌀 수확량 3만7천석(기타 상품작물, 어업, 염업 등 5천석을 포함, 총 4만 2천석)으로 책정됐다.[50] 이는 아마쿠사의 실력과 관계없는 과대평가로, 데라자와 씨가 자신의 번을 더 크게 보이게 하려는 허세가 배경에 있었다고 한다.[49] 그러나 영민에게는 석고에 상당하는 조세가 부과됐고, 시마바라 영민들도 착취에 시달렸다.

시마바라의 난1637년(간에이 14년) 10월, 시마바라 지방관 관사 습격으로 시작한다. 거의 같은 시기 오야노에서도 농민들이 봉기했다. 이들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구신 마스다 요시쓰구(益田好次)의 아들 아마쿠사 시로를 ‘마마코스 상인(마르코스 페레이라 신부를 가리킴)이 예언한 천동(天童)’이라 받들고 봉기했다.

가라쓰번은 1500명의 군사를 보냈으나 봉기군은 이를 격파하고 혼도에 진출했다. 이어서 아마쿠사 지배 본거지 도미오카성(富岡城)을 에워쌌다. 그러나 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구마모토 번에서 토벌군이 온다는 소식이 돌자 시마바라로 돌아갔다. 이들은 하라성(原城)터에서 농성했으나 규슈 각 번 군대의 총공격에 노출돼, 단 한 명의 내통자를 제외한 전부가 토벌되어 죽었다.[51] 아마쿠사 시로를 죽인 자는 구마모토번의 진사사에몬(陳佐左衛門)이었다.

난 이후, 시마바라의 마쓰쿠라 씨는 개역됐고, 아마쿠사는 데라자와 씨에서 야마자키 이에하루(山崎家治)의 영지로 바뀌었다. 이때, 나리와 번에 의한 조사에서 쌀 석고 3만8732석 중 6732석이 없어지고 3302석이 파괴됐다고 한다.[52] 야마자키 이에하루는 도미오카성 수축 등에 나섰으나, 1641년(간에이 18년) 사누키 마루가메번(丸亀藩)으로 전봉되었다. 이후 아마쿠사는 천령(天領, 막부 직할령)이 되어, 지방관인 대관에는 스즈키 시게나리(鈴木重成)가 임명되었다.

1805년(분카 2년), 아마쿠사에서 다수의 은신 키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이 발각되는 사건(아마쿠사 쿠즈레)이 일어났다. 이마토미 촌(今富村, 현재의 가와우라정(河浦町))에서 소가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축일에 소를 신에게 바치는 키리시탄의 행위로 간주되어 극비리에 조사가 이뤄졌다. 조사 결과 4개 마을에 총 5200명의 신자가 있음이 판명됐다. 막부는 이들의 처우에 대해 드물게 관대한 조치를 내렸다. 이미 조사 단계에서 개종을 설득했고, 그리스도상 파괴와 후미에(그림밟기) 또는 개종을 맹세하는 문서 제출 등이 이뤄졌다. 그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선조 전래의 풍습을 맹목적으로 이어가고 있었다’라고 할 뿐 단 한 명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 결정의 배후에는 우에다 토모사부로(上田友三郎)의 형인 우에다 요시우즈(上田宜珍)의 영향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쿠사 행정을 위탁받았던 시마바라번의 마쓰다이라 가문은 천령에서 바테렌(伴天連, 신부) 소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해 이전부터 요시우즈 등 쇼야 층과 접촉하고 있었다. ‘아마쿠사 쿠즈레’ 사건 때 신자들을 설득하는 일에 있어 유시우즈가 분주한 덕분에 일은 원만하게 마무리됐다.[71] 우에다 요시우즈는 아마쿠사 민중의 빈궁 해소에도 마음을 써서, 품질 높은 현지산 아마쿠사석(天草石)에 관심을 갖고 도기 제조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늘어나는 물류비로 인해 도기 제조는 좌절됐지만, 아마쿠사석을 그대로 숫돌로 판매하는 길을 열었다. 또한 우에다 요시우즈는 아마쿠사의 역사를 전하는 <아마쿠사 도경>(天草嶋鏡)을 저술하고, 지도 편찬을 위해 방문한 이노 다다타카로부터 측량술을 배우는 등의 이력을 남겼다.[72]

에도 시대 내내 아마쿠사는 유배지이기도 했다. 에도나 교토, 오사카 등에서 섬 귀양(遠島) 처분을 받은 죄인들이 각 마을에 배정됐다. 이들은 마을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아마쿠사 주민들과 촌 관리들은 몇 번이고 유배지에서 면제해달라는 요청을 막부에 제출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한편, 1832년(덴포 3년) 참언으로 죄를 받은 지온인(知恩院) 주지 죠슌상인(定舜上人, 또는 잔무도인(残夢道人))은 아마쿠사에서 학문을 전수하는 등 그 높은 덕망으로 존경을 모았다. 죠슌상인은 메이지 정부의 특사를 받았으나, 아마쿠사에 머물다가 1875년(메이지 8년)에 생애를 마감했다.

메이지 정부는 당초 기독교 신앙 금지를 해제하지 않았다. 하지만 1868년(게이오 원년)~1873년(메이지 6년) 탄압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자 정부는 기독교 포교를 허락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지방까지 빠르게 알려지지는 않았고, 아마쿠사 사람들은 나가사키 ‘카미노시마’의 어민으로부터 이 소식을 들었다. 1876년(메이지 9년) 오에(아마쿠사 정) 주민 15명, 이듬해 오에와 사키쓰(崎津)(가와우라정) 주민 14명이 구마모토현령에게 기독교 귀의를 신고했으나 현은 이를 수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장례식을 기독교식으로 했다는 이유로 사키츠 주민이 처벌받는 등 지방 정부의 몰이해도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아마쿠사에 선교사가 찾아오면 기독교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졌다. 1892년(메이지 25년) 아마쿠사에 부임한 프랑스인 신부 루이 가르니에(Louis Garnier)는 50년에 걸쳐 아마쿠사에서의 포교활동을 이어갔으며, 오에 천주당과 고아원 건설 등에 진력했다. 그는 프랑스어로 ‘파테루 씨’(기행문 <다섯 켤레의 신발>에서는 ‘바아테루 씨’)라고 친근하게 불렸다. 1941년(쇼와 16년) 아마쿠사에서 생을 마감했다.[105]

5. 근대

5. 1. 막부 말기와 유신

분카 6년(1809년)에 태어난 요코이 쇼난미토학의 영향을 받아 훈고학적 주자학을 가르치는 시습관을 부정하고, 이황학파인 오오쓰카 타이야의 영향으로 도리의 실천을 중시하는 사상을 익혔다. 가로인 나가오카 코레카타 등이 이에 찬동하여 '실학당'을 결성하고 번정에 의견을 냈으나, '학교당'과의 대립을 겪었다.[73] 요코이 쇼난은 후쿠이번에서 활동했으며, 구마모토 번에서는 국학을 표방한 '근황당'도 생겨났다. 하야시 오엔은 사숙 '겐도칸'을 세우고 국학을 가르쳤다.[74]

히토요시번에서는 야마가류 병법이 주류였으나, 서양식 병제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으로 대립이 격화되었다. '소의해 소동' 이후 서양식 병제로 전환되었고, 사쓰마번의 영향으로 타도 막부 성향이 강해졌다.

겐지 원년(1864년) 구마모토 번은 조슈번 정벌에 참여했으나, 게이오 원년(1865년) 재차 정벌에는 비판적이었다. 아카사카, 토리고에 전투에서 초슈군을 물리쳤지만,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부고로 막부군은 패주했다. 코쿠라 번은 구마모토 번의 보호를 받으며 반년간 체재했다.[75]

막말기 개혁의 움직임은 히고에서 구체화되지 못했다. 중앙의 정보에는 동떨어져 있지 않았지만,[76][77] 번론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78] 대정봉환 이후에도 논의만 계속되었고, 게이오 4년(1868년)에야 토호쿠 전쟁에 참전하여 유신 세력에 순종했다.[79] 메이지 신정부는 구마모토 번의 인재를 등용했고, 형법 분야에서 활약이 두드러졌다.

토쿠토미 로카의 작품에서 "히고의 유신은 메이지 3년에 찾아왔다"라고 언급될 정도로, 민중에게 실질적인 변화는 늦게 찾아왔다. 메이지 2년(1869년) 판적봉환 이후에도 소극적인 개혁이 이어지자 신정부의 불신을 샀다.[80]

호소카와 모리히사는 형 호소카와 요시쿠니에게 개혁을 설파했고, 실학당도 개혁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메이지 3년 모리히사가 번주가 되어 개혁에 착수, 잡세 폐지 등을 통해 서민층의 지지를 받았다. 구마모토 양학교와 후루시로 의학교가 설립되어[81] 근대 교육이 시작되었고, 구마모토 양학교는 구마모토 밴드 결성의 모체가 되었다.[82]

실학당 정권은 관료 공선제 등을 실행하지 못했고, 근황당 관련 사건으로 정부에 찍히게 되었다. 호소카와 모리히사는 사의를 표명했고, 폐번치현 이후 실학당은 현정에서 배제되었다. 오이타 현 히타 군에서 발생한 대봉기는 구마모토 번의 감세 정책을 요구하는 것이었고,[83] 이는 신정부에 달갑지 않은 사태였다.

구마모토의 유신은 민중에게 큰 환영을 받았으며, '지사탑'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구마모토 양학교의 남녀공학제는 논란을 일으켰지만, 여성 사회 활동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구마모토 양학교는 폐쇄되었지만,[84] 후루시로 의학교는 구마모토대학 의학부로 이어졌다.[85][86]

5. 2. 세이난 전쟁과 자유민권운동

1873년 신정부 내에서 정한론 논쟁이 벌어지고 있을때, 미야자키 하치로(宮崎八郎)는 상경 중에 <정한지의>를 상주했고, 대만 출병 시에 의용병을 모으는 등의 행동을 취했지만, 곧 반권력 사상을 강화했다.[87] 나카에 조민(中江兆民)의 <민약론>(民約論)에 크게 영향을 받아 자유민권운동에 투신했고, 1875년에 구마모토 현 최초의 중학교가 된 우에키 학교(제5번 변칙중학교)를 설립했다.[88] 이곳에서 루소, 기조, 몽테스키외 등의 사상을 가르쳤으며, 현 내외에 조직가를 파견하는 거점이 되기도 했다. 또한, 하치로의 동생 미야자키 토텐(宮崎滔天)도 민권운동에 참여했다. 토텐은 이후 아시아 혁명에 관여하여 망명 중인 쑨원(孫文)을 지원했다.[89]

우에키 학교 설립과 같은 해에 토쿄에서 열린 지방관 회의에서 ‘지방민회의 건’이 의제가 됐고, 구마모토에서도 민권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1876년 구마모토 현은 ‘임시민회규칙’을 제정했는데, 이는 남성 호주 전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매우 진보적인 제도였다. 같은 해 10월에 우에키 학교는 폐쇄됐지만, 이 학교에 거점을 뒀던 민권운동가들은 결사를 세워 운동을 이어갔다.

하야시 오엔(林桜園)에서 출발한 근황당의 일파 중에 ‘신푸렌’(경신당)이 있었다. 그들은 미야자키 하치로처럼 민권운동으로 전환하는 데에서도 배제됐고, 1876년에 폐도령이 포고되자 울분이 폭발한 그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10월 24일, 신푸렌은 구마모토 성 부지 내에 있던 구마모토 친다이를 공격해 불을 놓았다. 그들은 진압되어 많은 이들이 자결하거나 처벌됐다. 하지만 이 신푸렌의 난은 사가의 난과 함께 사족 반란을 촉발시켰다.

1877년 2월 15일, 사이고 다카모리가 봉기하자 구마모토의 불평 사족들은 사이고 군에 가담했다. 이케베 키치쥬로(池辺吉十郎)는 구마모토대(熊本隊)를 결성했고, 우에키 학교 계열의 민권파도 협동대(協同隊)로 가세했다.

정부와 구마모토 친다이는 사이고의 반역을 받아칠 준비를 했다. 참모장인 타니 타테키(谷干城)는 구마모토 성에서 농성하는 작전을 채택했다. 2월 19일에는 사격 범위를 확보하기 위해 시가지를 불태웠지만, 같은 날 구마모토 성 내에서 화재가 발생해 천수각 등이 소실되고 말았다.[90]

가와시리(川尻)에 집결한 사쓰마 군은 구마모토성 강습을 결정했다. 2월 21일 사쓰마 군의 일부가 구마모토 성 동쪽에서 수비병과 전투를 벌여 공방전이 시작됐다. 다음날인 22일, 사쓰마 군은 구마모토 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구마모토 성의 약점으로 꼽히는 후면이 격전지가 되어, 다니야마(段山)과 홋케 언덕(法華坂)을 습격하는 사쓰마군과 관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3월에 들어서도 구마모토 성 후면에서는 격전이 계속됐다. 4월에 들어서서 타니 타테키는 군량 감소를 걱정하여 우에키 방향으로 출격을 고민했지만, 참모 반대로 취소되고 대신 정부측 후방 습격군(충배군)과 연락을 시도했다. 4월 8일, 포위 돌파대가 사쓰마의 포위망을 돌파해, 우토에서 정부군과 합류하는 데에 성공했다. 정부군은 4월 14일 가와시리까지 진군했고, 야마카와 히로시(山川浩)는 독단으로 부대를 움직여 농성군과 연결에 성공했다. 2개월에 걸친 구마모토 성 공방전은 사망자 773명을 남기고 마무리됐다.[91][92][93]

타바루자카 공원 위령비에 관군과 사병들의 묘비가 나란히 있다.


한편, 2월 22일 우에키(植木)에서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가 이끄는 정부군과 접촉한 사쓰마군 소대는 관군을 패주시키고 연대기를 빼앗았다. 2월 26일 반격을 개시한 관군 보병 제 14연대는 타바루 언덕(田原坂, 타바루자카)까지 적을 밀어냈지만, 군량 부족을 이유로 퇴각했다.

2월 22일 심야, 사이고 다카모리 등 사쓰마 군 수뇌부는 장기 포위 전략으로 전환하고 군대를 나눠 북쪽으로 병력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정부군은 3월 3일 진군을 개시했다. 3월 4일, 타바루 언덕에 총공격을 가한 정부군은 천연의 요충지에 의지한 사쓰마 군의 일제 사격을 받아 진격이 어려웠다. 키치지 고개(吉次峠)는 더욱 처참했다. 밭에는 사체가 쌓였고, 도랑에는 피가 고였다.[94]

경시 발도대의 활약으로 전세를 유리하게 이끈 정부군은, 3월 20일에 총공격을 벌였다. 스나이더 총이 위력을 발휘한 관군에 비해, 사쓰마 군이 주로 사용하던 엔필드 총은 비에 약했다.[95] 결국 사쓰마군은 타바루 언덕을 돌파당해 후퇴했다. 3월 21일 야마가에 보낸 제4대대도 패하고 결국 후퇴한 사쓰마 군은 우에키의 키토메(木留)에서 관군을 맞아 싸웠다. 4월 15일, 구마모토 성과 후방 습격군(충배군)이 서로 연락하게 됐다는 소식을 알게 된 사쓰마 군은 철수를 시작했다.

사이고 타카모리가 마지막까지 저항한 거점 에이코쿠 사


사쓰마군은 키야마(木山)로 거점을 옮겨 관군과 대치했으나, 4월 21일 히토요시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5월 30일 정부군은 히토요시에 총공격을 개시했다. 6월 1일 새벽, 시가지에 들어간 관군이 쏜 로켓에 밤중에 마을이 불타버리고,[97] 사쓰마 군은 쿠마 강 남쪽으로 후퇴했다. 이후, 사이고와 사쓰마 군은 정부군의 추격을 받으며 미야자키의 노베오카(延岡) 등을 돌아다니며 싸워나갔다. 그러나 9월 24일 가고시마의 시로야마 산(城山)에서 궤멸했다.

이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일반인 사상자 수는 300명을 넘었고, 가옥 1만 채 이상이 피해를 입었다. 미야자키 하치로는 전사하면서 협동대로 참전했던 히고 근황당의 계통도 일단 끊어졌다.

5. 3. 군사 도시와 근대화

메이지 초기에 현의 명칭은 '구마모토현'으로 통일되었으나,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 당시에는 옛 번에 대응하는 3개의 현이 설치되었고, 이후 명칭 변경과 합병이 반복되었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구마모토 번은 구마모토 현(제1차), 사가라 번은 히토요시 현이 되었다. 히고 남부 현청이 야쓰시로에 설치되면서 히토요시 현은 야쓰시로 현으로 개명되었고, 아마쿠사 지방이 편입되었다. 구마모토 현은 현청 소재지에 따라 1872년(메이지 5년) 시라카와 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873년(메이지 9년) 두 현은 합병하여 시라카와 현이 되었고, 현청은 구마모토성으로 이전되었다. 1876년(메이지 9년) 구마모토 현(제2차)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른다.

File:Modern Japan prefectures map in 1872.jpg

1871년 제정된 호적법에 따라 임신호적(壬申戸籍)이 편제되었고, 호장(戸長)과 구장(区長)이 설치되었다. 구마모토 현에서는 이들이 관선으로 임명되어 민중과의 신뢰 관계가 약했다. 1873년 이후 민비(民費) 증가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은 아소 지방 등에서 지조 개정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민권운동이 관여하여 구장・호장 민선화 요구가 높아졌다.

1878년(메이지 11년) 애국사(愛国社)가 재건되자, 구마모토에서는 서남전쟁 이후 징역형을 마친 이들을 흡수하며 '상애사'(相愛社)가 설립되었다. 상애사는 이듬해 국회기성동맹의 일원으로 개편되었지만, 창설 당시의 '상애사 취지서'에 근거한 행동을 취했다. 상애사에서도 사의헌법(私議憲法)을 작성했으나, 1881년(메이지 14년)에야 발표되었다.

서남전쟁에서 구마모토 대(熊本隊)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던 삿사 도모후사(佐々友房)는 1879년(메이지 12년) 도신 학사(同心学舎, 현재 구마모토 현립 세이세이코 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여기에 구 학교당 등 보수 세력이 모여들었다. 삿사는 이노우에 고와시(井上毅) 등의 조언을 받아 시메이카이(紫溟会)를 설립하고 민권운동 참여를 도모했다. 그러나 1881년 시메이카이 설립 당시 민권파 중 실학당만 참가했고, 이마저도 2개월 후에 탈퇴했다.

메이지 14년의 정변 이후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등이 자유당을 설립하자, 구마모토에서도 민권 계열 결사의 조직화가 진행되어 1882년(메이지 15년) 규슈 개진당이 결성되었다. 이는 규슈연합동지회 등을 거쳐 1890년(메이지 23년) 입헌자유당으로 계승된다. 이 세력은 1888년(메이지 21년) 구마모토 국권당(熊本国権党)으로 개편된 보수세력 시메이카이(紫溟会)와 현정을 양분했다. 이러한 대립은 '히고의 탁상공론'(肥後の議論倒れ)이라 불리는 구마모토인의 기질을 조장하는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

구마모토 대학 캠퍼스 내에 위치한 제5고등학교 본관(현 5고기념관)]]

1886년(메이지 19년) 중학교령에 따라 구마모토에 제5고등중학교(현 구마모토 대학) 설치가 결정되었다. 이듬해 구 구마모토 양학교와 후루시로 의학교의 교사(校舎)를 사용하여 개교했고, 1890년(메이지 23년) 쿠로카미 촌의 신 캠퍼스로 이전했다. 1894년(메이지 27년)부터 고등학교령에 따라 '제5고등학교'가 되었다. 제5고등학교는 래프카디오 헌과 나쓰메 소세키가 교편을 잡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1884년(메이지 17년) 미스미정(三角町)에서는 국가 주도의 국제무역항 정비가 시작되어 3년 후 미스미항(三角港)으로 개항했다. 1886년(메이지 19년)에는 기타큐슈의 모지~미스미 구간 철도 부설이 허가되었다. 1891년(메이지 24년) 7월 1일, 구마모토역까지 이어지는 철도가 개설되었다. 이케다 역(현 가미쿠마모토역)과 구마모토 역은 시가지보다 서쪽에 설치되었는데, 이는 용지 매입 문제에 따른 것이었다.

철도는 순차적으로 연장되어 1908년(메이지 41년) 히토요시역까지 부설되었다. 이는 히토요시 번주 가문의 가로 출신 시부야 레이(渋谷礼) 등의 유지들에 의한 유치 운동의 결과였다. 하세바 스미타카(長谷場純孝)가 추진한 해안선 루트는 군부의 의견 등으로 채용되지 않았다. 구마강변의 철도 노선은 지역 주민의 발이 되었고, 이듬해 가고시마현까지 노선이 개통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초기 기독교 신앙 금지를 해제하지 않았다. 1868년(케이오 원년)~1873년(메이지 6년)의 탄압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비난을 받자, 정부는 기독교 포교를 허락했다. 1876년(메이지 9년) 오에(大江) 주민 15명, 이듬해 오에와 사키쓰(崎津) 주민 14명이 구마모토 현령에게 기독교 귀의를 신고했으나 현은 수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장례식을 기독교식으로 했다는 이유로 사키쓰 주민이 처벌받는 등 지방 정부의 몰이해도 있었다.

그러나 아마쿠사에 선교사가 오면서 기독교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1892년(메이지 25년) 아마쿠사에 부임한 프랑스인 신부 루이 가르니에(Louis Garnier)는 50년에 걸쳐 포교 활동을 했으며, 오에 천주당과 고아원 건설 등에 진력했다. 그는 '파테루 씨'(<다섯 켤레의 신발>에서는 '바아테루 씨')라고 불렸다. 1941년(쇼와 16년) 아마쿠사에서 생을 마감했다.

세이난 전쟁을 치른 구마모토 친다이는 1888년(메이지 21년)에 제6사단으로 개편되었다. 구마모토시가 위수 지역이 되었고, 구마모토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보병 연대와 기병 대대, 포병 연대가 배치되었다. 청일 전쟁 및 1902년(메이지 35년) 군사 훈련 등을 거치면서 구마모토 시는 군사 도시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러일 전쟁에서 구마모토는 포로 수용 장소 중 하나가 되어 오에토로쿠(大江渡鹿)의 연병장 등에 약 5000명을 수용했다. 그 중에는 작가 알렉세이 노비코프프리보이(Alexey Novikov-Priboy)와 혁명 운동가 니콜라이 수질로프스키(Nokolai Sudzilovsky) 등이 있었다. 수질로프스키는 아마쿠사 출신 오하라 나츠노(大原ナツノ)와의 사이에서 2남 하리(安光)를 낳았다. 이후 15년 전쟁에서도 구마모토는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다.

구마모토 시는 전시 체제를 지탱하면서 성장했지만, 야마자키 연병장(山崎練兵場)이 교통을 분단시켜 시 발전의 저해 요인이 되고 있었다. 1881년(메이지 14년)부터 주목받기 시작하여, 육군성은 공병대와 후지사키다이(藤崎台) 병영 등을 이전했지만, 연병장은 그대로 놔뒀다.

1891년(메이지 24년) <구마모토 신문>은 연병장 이전 문제가 방치되는 모습을 "구마모토 시내 3가지 어리석음 중 제일"이라고 비판했다. 1897년(메이지 30년) 구마모토 시회는 육군 대신에게 이전 요청을 제출했다. 육군 측도 시설 확장이 한계에 달해, 여러 차례 교섭 끝에 이전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듬해부터 연병장을 오에 촌으로 이전하는 공사가 시작되었고, 비용은 구마모토 시가 부담했다.

시가지에 광대한 용지를 얻은 구마모토 시는 도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연병장 터에는 도로가 정비되었고, '렌페이 정'(練兵町)과 '가라시마 정'(辛島町) 등이 설치되었다. 이 일대는 '신시가이'(新市街)라 불리며 번화가로 발전했다.

시내 공공교통 기관으로 1907년(메이지 40년) 구마모토 경편 철도(熊本軽便鉄道)가 개업했다. 이는 구마모토 전기 철도를 거쳐 구마모토 시전(熊本市電)으로 바뀌었다. 1911년(메이지 40년) 현재의 사쿠라마치 버스 터미널 자리에 담배 전매국(煙草専売局)이 건설되었다. 1924년(다이쇼 13년) 하케노미야(八景水谷)와 다쓰다산(立田山)을 수원으로 하는 상수도망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토지 정비, 시영 전차 부설, 상수도 정비는 근대 구마모토 시의 3대 사업으로 꼽히며, 도시 발전의 기반 조성이 완성되었다.

6. 현대

1927년(쇼와 2년) 9월 13일, 구마모토현 일대에 태풍이 접근하여 폭풍해일과 강풍에 의한 피해가 발생했다. 해일은 만조 시간대에 호타쿠군(코지마초, 가와구치무라, 가이로구치무라, 오키신무라, 하타구치무라가 두드러짐),[107] 타마나군, 우토군의 간척지 방조제를 파괴했고, 신전(新田) 지대 등 해안 근처 주민들은 대피할 겨를도 없이 집째로 짓눌려 파도에 휩쓸렸다.[108] 결과적으로 사망자·실종자 423명, 중상자 23명이 발생했다.[109] 또한, 폭풍은 구마모토시 내를 강타해 현립 양잠시험장, 현립 맹아학교, 아이즈 초등학교, 니혼기 병원 등 건물 백여 채가 붕괴되었다. 전기와 가스 등 라이프라인도 끊겼다. 오슈 가도에서는 가토 기요마사와 연관된 삼나무 가로수의 대부분이 날아갔으며, 수륙 양쪽의 벼 침수 면적은 7,000정에 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구마모토 현이 처음으로 직접 공습을 받은 때는 1944년(쇼와 19년) 11월 21일이었다. 그 날 구마모토 시에 80대의 B-29 폭격기가 날아들었다. 이듬해 7월 1일 심야에는 154대의 B29가 날아와 폭격을 가해 구마모토 시가지의 3분의 1이 불에 타 폐허가 된 구마모토 대공습이 있었다. 주택 1만호가 피해를 입었고, 정확한 집계는 아니지만 3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전쟁 후, 삼림의 난벌(乱伐)과 하천 정비 지연으로 인한 수해가 일본 각지를 매년 습격했는데 구마모토 현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9년(쇼와 24년)엔 쥬디스(Judith) 태풍과 델라(Della) 태풍, 이듬해인 1950년(쇼와 25년)에는 키지아(Kezia) 태풍이 찾아와 구마강이 범람해 히토요시시야쓰시로시가 피해를 입었다. 또한 1953년 6월의 ‘쇼와28년 서일본 수해’에서는 지쿠고강을 비롯해 북부 규슈의 모든 하천이 사상 최악의 홍수를 일으켰다. 구마모토 현에서는 기쿠치강과 시라카와 강 등 현내 북부의 하천으로 인한 홍수 피해가 심각했다. 구마모토 시의 시라카와 강에는 아소산 폭발로 발생한 요나(ヨナ, 화산재를 뜻하는 규슈 지역의 방언)가 섞여 진흙이 혼입됐는데, 이 때문에 복구에 시간이 걸렸다. 한편, 구마모토에서는 이 수해를 통칭 6.26 수해라고 부른다.

하천을 관리하는 건설성(현재의 국토교통성)은 이러한 수해를 막기 위해 댐을 통한 치수를 계획했다. 구마강에 이치후사(市房) 댐을 1959년(쇼와 34년)에 완성한 것을 시작으로 미도리카와강에 미도리카와 댐, 기쿠치강에는 지류인 하자마 강(迫間川)에 류몬(竜門) 댐을 건설했다. 현재는 시라카와 강에 타테노(立野) 댐을 건설 중이다. 또한 하천법이 1964년(쇼와 39년)에 개정됨에 따라, 현내 하천 중에 기쿠치강, 시라카와 강, 미도리카와강, 구마강 4곳은 국가가 관리하는 1급 하천으로 지정됐다.

가와베카와 댐의 모습


이러한 치수사업 중에서 특히 댐 사업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 영원히 호수 밑으로 가라앉는다는 점에서 현지의 반발이 컸는데, 특히 구마모토 현에서 이런 반발이 강했다. 그 중 하나가 1959년부터 지쿠고강(筑後川) 상류에 건설이 계획됐던 마쓰바라(松原) 댐과 시모우케(下筌) 댐에 대한 현지의 아소 군 오구니정(阿蘇郡小国町) 주민들의 댐 반대 투쟁, 즉 벌집성(蜂の巣城) 분쟁이다.

사업자인 건설성의 강압적인 태도에 반발한 오구니 정의 주민 무로하라 토모유키(室原知幸)는 시모우케 댐 건설 예정지에 요새를 짓고, 수몰 예정지 주민들과 함께 건설성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 분쟁은 1960년(쇼와 35년)에 ‘대집행(代執行) 수중 난투사건’으로 발전해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1970년(쇼와 45년) 무로하라가 죽으면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 사건은 향후 국가에 의한 하천행정의 방식을 크게 전환시켰다. 1973년(쇼와 48년)에는 수원지역대책 특별조치법이 제정돼 수몰 주민의 생활재건 등이 법률로 의무화됐고, “주민의 허가가 없으면 댐 사업을 시작할 수 없다”는 불문율을 형성했다.

그리고 현재, 구마모토 현 최대의 공공사업으로 전국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구마군 사가라촌과 이쓰키촌에 건설이 계획돼 있는 가와베가와(川辺川) 댐이다. 1966년(쇼와 41년)에 계획이 발표된 가와베가와 댐은 완공된다면 구마모토 현 최대의 댐이 된다. 그러나 이쓰키 촌, 사가라 촌의 반대운동과 1990년대 이후 공공사업 재검토의 흐름에 따라 계획이 발표된 지 50년 이상이 지난 현재도 공사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 2001년(헤이세이 13년)에는 당시 구마모토 현지사였던 시오타니 요시코(潮谷義子)에 의해 ‘카베와카와 댐 주민토론집회’가 개최되어 댐 건설의 시비를 둘러싼 활발한 논의가 이뤄진 바가 있다. 이 와중에 사업비 증가를 견디지 못한 가베와 강, 구마강 유역의 농민들이 ‘카베와 강 용수 소송’을 제기해 사업계획의 취소를 요구했다. 2003년(헤이세이 15년) 후쿠오카 고등재판소는 이 요구를 받아들였고, 2007년(헤이세이 19년)에는 가와베가와 댐에 관개 사업자로 참여 예정이었던 농림수산성이 댐 사업에서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동시에 수력발전 사업에 참가 예정이던 전원개발도 사업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가와베가와 댐의 사업 의의 자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가와베 강 유역의 지자체인 이쓰키촌과 야쓰시로시, 구마촌 등은 댐 사업의 조기 추진을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히토요시시와 사가라촌, 그리고 구마모토 현은 반대 및 계획 백지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후 댐 계획의 존속 여부는 사업자인 국토교통성의 대응에 달려 있다.

한편, 시오타니 현지사 재임기간 중 구마강에 건설했던 현영 수력발전용 댐인 아라세(荒瀬) 댐의 철거가 결정됐다. 시설의 노후화로 인해 유지비 조달이 곤란하다는 이유였으며, 2010년(헤이세이 22년)에 수리권(水利権)이 만료됨과 동시에 댐은 철거될 예정이었다. 이러한 댐 철거는 일본 최초의 사례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2008년(헤이세이 20년) 6월 4일, 시오타니 지사의 뒤를 이은 가바시마 이쿠오(蒲島郁夫) 지사는 “철거에 따른 비용이 증가하여, 비용대비 효과에 의문이 있다”며 철거를 동결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결정에 대해, 다년간 댐 방류에 의한 진동과 침수, 우물 마름 등의 피해를 입어온 댐의 유역 주민들로부터 성난 목소리가 나오자, 국토교통상은 수리권 갱신을 인정하지 않았다. 지사는 동결방침을 철회했으며, 2012년부터 댐 철거공사가 시작됐다.

6. 1. 미나마타병과 환경 문제

1908년(메이지 41년) 11월 미나마타시(水俣市)에서 가동을 시작한 일본 질소비료 주식회사(닛치쓰, 현재의 칫소)는 가바이드를 시작으로 비료인 석회질수와 유황암모늄으로 사업을 확대했다.[131] 1926년(쇼와 원년)에는 닛치쓰 관계자가 정장 및 정의회 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정(町政)에 관여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1923년(타이쇼 13년)의 수해 발생에 따른 도시재해 대책에서 주도권을 발휘하고, 1918년(타이쇼 7년)부터 이어진 배수 관련 어업조합과의 보상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131] 어업보상의 경우, 배출수에 대한 민원을 영구히 취하하는 조건으로 위로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마무리되었고, 닛치쓰는 배수를 계속했다.[131]

1930년(쇼와 5년)경부터 닛치쓰 미나마타 공장은 아세트알데히드를 원료로 하는 아세트산, 아세트산에틸 등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황화제이수은 촉매를 사용했는데, 이 과정에서 독성이 강한 메틸 수은이 생성되었다.[131] 닛치쓰는 이를 처리하지 않은 채 폐수를 미나마타 만으로 계속 방출했고, 그 결과 1941년(쇼와 16년)에 처음으로 미나마타병 환자가 발생했다.[131] 전후 복구 후에도 폐수 방출은 계속되었으며, 1932년(쇼와 7년)부터 1968년(쇼와 43년) 사이에 방출된 수은의 양은 200톤에 달한다.[131]

미나마타의 ‘기이한 병’(奇病)이 공식적으로 발견된 것은 1956년(쇼와 31년)이고, 원인이 메틸수은이라는 사실이 인정된 것은 1959년(쇼와 34년)이었다.[131] 1963년(쇼와 38년)에 수은이 미나마타 공장의 배수에 기인한다는 지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를 인정한 것은 5년 후였다.[131] 1969년(쇼와 44년)부터 시작된 환자들의 소송은 1996년(헤이세이 8년)에 화해로 결심을 보았고, 간사이 소송도 2004년(헤이세이 16년)에 결심 공판이 끝나고 국가와 현의 패소가 확정됐다.[131] 일본사상사연구가인 빅터 코슈만(Victor Koschmann)은 미나마타병 환자를 'patient'(환자)가 아니라 'sufferer'(수난자)라는 단어로 표현했는데, 이는 미나마타병이 의학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기업과 행정윤리 및 사회 구조의 문제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131]

6. 2. 산업과 관광

구마모토현은 고대부터 농산물이 풍부한 지역으로 유명했으며, 근현대에도 농업은 중요한 산업으로 남아있다.[110] 메이지 시대에는 정부 주도로 농업 시험장이 설립되어 양잠업, 등심초, 채소, 차 등의 재배 기술 발전을 이끌었다.[111]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구마모토현은 농업 종사자 수와 농축산 생산액이 전국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112] 데코퐁, 토마토, 수박, 멜론 등이 주요 특산물이다.[113][114][115] 그러나 최근에는 일손 부족, 자연재해, 수입 농산물과의 경쟁 심화 등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대책이 추진되고 있다.[116]

구마모토현의 산업 구조는 1차 산업 비중이 전국 평균보다 높은 반면, 2차 산업 비중은 낮다.[117] 최초의 근대 공업은 1875년 설립된 미도리카와 제사 공장으로, 사족수산 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118] 초기에는 소규모였으나 점차 성장했지만, 1881년 '요코하마 생사 하예소 사건'의 영향으로 폐업했다.[119][120] 이후 구마모토 제사, 구마모토 방적 등이 설립되어 일본 제사·방적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120][121]

1964년 신산업도시 건설 촉진법 시행 이후 구마모토현에도 공업화가 가속화되었고,[122] 특히 규슈 지역에 반도체 기업들이 진출하면서 구마모토현에도 관련 공장들이 건설되었다.[123] 규슈는 '실리콘 아일랜드'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생산 기능에 편중되어 '두뇌 없는 거점'이라는 비판도 있었다.[124] 오일 쇼크 이후 구마모토현은 '테크노폴리스 구상'을 발표하고, 1984년 '구마모토 테크노폴리스' 건설에 착수했다.[122] 자동차나 중화학 공업에서는 뒤처졌지만, 반도체 산업 유치에 주력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경쟁 심화와 경기 침체로 제조업 출하액이 감소하기도 했다. 구마모토현은 기업 유치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최근 기업들은 풍부한 수자원, 규슈의 중심, 아시아와의 접근성 등 지리적 조건을 구마모토현 진출 이유로 꼽고 있다.[125]

구마모토현은 풍부한 자연, 역사적 건축물, 온천 등 관광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쿠로카와 온천과 같은 성공 사례를 제외하면 관광지로서의 매력이 부족하여 관광객 수와 소비액은 정체 상태이다.[126] 2011년 개통한 규슈 신칸센을 통해 관광객 증가가 기대되지만,[127] 공동화에 대한 우려도 있다.[128][129] 구마모토현은 관광 산업 발전을 위해 차별화된 전략, 서비스 개선, 홍보 활동 강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130][12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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