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린 마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로린 마젤은 1930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 지휘자이자 작곡가였다. 5세에 바이올린을 시작하여 신동으로 불렸으며, 8세에 지휘 데뷔, 15세에 바이올린 연주자로 데뷔했다. 그는 1970년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 1980년대 빈 국립 오페라 총감독, 뉴욕 필하모닉 음악 감독 등을 역임하며 세계적인 지휘자로 활동했다. 300개 이상의 음반을 녹음하고, 오페라와 관현악 작품을 작곡했으며, 2014년 폐렴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미국의 지휘자 - 에프렘 짐발리스트
러시아 제국 출신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지휘자, 음악 교육자인 에프렘 짐발리스트는 레오폴트 아우어의 제자로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명성을 얻었고 커티스 음악원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은퇴 후에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 미국의 지휘자 - 레너드 번스타인
레너드 번스타인은 20세기에 지휘, 작곡, 피아노 연주, 교육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클래식, 재즈, 뮤지컬을 융합한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축하고 사회 활동에도 참여했던 인물이다. - 피츠버그 대학교 동문 - 이상주
이상주는 대한민국의 교육학자, 관료, 정치인으로서, 여러 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하고 노태우, 김영삼 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 및 비서실장을, 김대중, 참여정부에서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및 부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 피츠버그 대학교 동문 - 왕가리 마타이
왕가리 마타이는 케냐의 환경 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서, 그린벨트 운동을 통해 사막화 방지에 기여하고 민주화와 여성 권익 신장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아프리카 여성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 미국의 클래식 작곡가 - 에프렘 짐발리스트
러시아 제국 출신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지휘자, 음악 교육자인 에프렘 짐발리스트는 레오폴트 아우어의 제자로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명성을 얻었고 커티스 음악원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은퇴 후에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 미국의 클래식 작곡가 -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후기 낭만파 작곡가이자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으로 피아노 협주곡 2번, 3번 등 걸작을 남겼으며 러시아 혁명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연주와 작곡 활동을 펼쳤다.
| 로린 마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로린 마젤 |
| 본명 | (알 수 없음) |
| 출생일 | 1930년 3월 6일 |
| 출생지 | 뇌이쉬르센, 프랑스 |
| 사망일 | 2014년 7월 13일 |
| 사망지 | 버지니아주, 미국 |
| 직업 | 지휘자,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
| 활동 기간 | 1950년–2014년 |
| 아버지 | 링컨 마젤 |
| 관련 활동 | 클리블랜드 관현악단 지휘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 지휘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지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 |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 음악가 정보 | |
| 배경 | 클래식 |
| 학력 | 피츠버그 대학교 졸업 |
| 악기 | 바이올린, 지휘 |
| 장르 | 클래식 음악 |
| 레이블 | RCA PHILIPS 도이체 그라모폰 SONY |
| 배우자 | 디트린데 투어반 |
| 가족 | 링컨 마젤 (아버지) 마리 버렌코브 바넷 (어머니) 로리안 앤절리 (딸) |
2. 일생
로린 마젤은 1930년 3월 6일 프랑스 파리 근교의 뇌이쉬르센에서 유대계 미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주로 미국 피츠버그의 오클랜드 지역에서 성장했다. 그의 조부 이삭 마젤(1873~1925)은 러시아 제국 우크라이나 폴타바 출신으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였다.[3]
7세 때 첫 지휘 수업을 받고 8세에 데뷔한 신동으로, 11세 때에는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했다. 12세 때에는 미국을 순회하며 주요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15세 때에는 바이올린으로 데뷔하였다.
1946년부터 1950년까지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수학, 철학, 언어학 등을 공부하였고, 재학 중에는 피츠버그 교향악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현악4중주단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1960년, 바이로이트 페스트슈필하우스에서 지휘한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 1965년부터 1971년까지 베를린 도이체 오페라의 수석 지휘자였고, 1964년부터 1975년까지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였다.
1972년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이 되었으며, 이후 빈 국립 오페라(1982~1984),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1988~1996),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1993~2002)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다. 1977년부터 1991년까지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다.
2000년 뉴욕 필하모닉의 객원 지휘로 복귀한 후, 2002년부터 2009년까지 음악 감독을 역임했다. 2008년 2월 26일에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북한 평양을 방문하여 공연을 펼쳤다. 이 공연에서는 양국 국가와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신세계에서"》, 조지 거슈윈의 《파리의 미국인》, 최성환의 《아리랑》이[48] 연주되었다.
2004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이 되었고, 2006년부터 2011년까지 발렌시아 공동체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다. 2010년 뮌헨 필하모닉의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으나, 2014년 건강 악화로 사임했다.
2014년 7월 13일, 미국 버지니아주 캐슬턴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8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47]
2. 1. 유년 시절과 교육
프랑스 뇌이쉬르센의 유대계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하였다. 조부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연주자였다.[3] 아버지 린컨 마젤(1903~2009)은[5] 가수이자 성악 및 피아노 교사, 배우였으며, 어머니 메리언 "메리" 슐먼 마젤(1894~1992)은[6] 피츠버그 청소년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설립했다.[7]마젤은 신동이었고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었다.[8] 블라디미르 바칼레이니코프에게 7세에 지휘 수업을 처음 받았고, 8세 때인 1938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이다호 대학교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으로 데뷔했다.[9] 11세 때에는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11] 12세 때에는 미국을 순회하며 주요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15세 때에는 바이올린으로 데뷔하였다.
어릴 적에는 피츠버그 대학교의 패니 에델 팔크 실험학교에[12] 다녔고, 피보디 고등학교와 피츠버그 대학교에 다녔다.[13][14][15] 1946년~1950년에는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수학, 철학, 언어학 등을 수학하였고, 재학 중에 피츠버그 교향악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현악4중주단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1945년에는 피에르 몽튜에게서 잠시 수업을 받았다.[16]
2. 2. 초기 경력
Lorin Maazel영어은 1952년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이탈리아로 건너가 바로크 음악을 연구했다. 이듬해 카타니아에서 유럽 데뷔를 했고, 1960년에는 바이로이트 음악 축제에 역사상 최연소이자 최초의 미국인으로 데뷔하여 페르디난트 라이트너를 대신해 『로엔그린』을 지휘했다.[17] 1963년에는 잘츠부르크 음악 축제에 데뷔하여 체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의 콘서트에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3번을 바이올린 연주와 함께 지휘하여 화제를 모았다.[17]1950년대 초, 마젤은 거슈윈 콘서트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순회 공연을 했다. 25명의 단원으로 구성된 이 오케스트라는 아이라 거슈윈과의 협력으로 대중에게 거슈윈의 음악을 종합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솔리스트 명단에는 헤수스 마리아 산로마, 캐롤린 롱, 테오도르 업만이 포함되었다.[17]
2. 3.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재임
1965년 베를린 도이체 오페라와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의 음악감독(두 직책 모두 요절한 페렌츠 프리차이의 후임)에 취임하였다.[19] 1972년에는 조지 셀 사후 공석이 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에 취임했다.[19]셀의 날카롭고 실내악적인 스타일 이후, 많은 비평가들은 마젤의 감정적인 해석에 대해 우려했다. 하지만 마젤이 클리블랜드에 임명된 직후, 그의 지위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인 유진 오르만디의 지지[20]와 데카 레코드와의 녹음 계약 약속[20]으로 인해 강화되었다. 또한 마젤은 도시의 어린이들을 위한 오케스트라의 교육 프로그램을 활성화하기로 했다. 그는 합창단이 지역 학생들로 구성되는 연례 콘서트를 퍼블릭 홀에서 개최할 것을 구상했다. 이 프로젝트는 1973년 5월 19일, 조지 거슈윈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 아론 코플랜드의 ''링컨 초상'' 그리고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9번 교향곡 중 “환희의 송가”의 영어 버전을 포함한 프로그램으로 시작되었다.[21] 5,000명이 넘는 관객이 참석한 이 콘서트는 클리블랜드에서 마젤의 첫 시즌의 정점을 장식했다.
한 달 후, 오케스트라는 3년 만에 처음으로 녹음을 완료했다. 데카를 위해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또한 1973-74 시즌 동안 호주와 뉴질랜드를 처음으로 방문하며 국제 순회 공연을 재개했다.[22] 빡빡한 일정으로 인해 지휘는 마젤, 스타니스와프 스크로바체프스키, 그리고 전 음악 감독인 에리히 라인스도르프가 분담했다. 클리블랜드의 세버런스 홀과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1막 오페라 ''엘렉트라''의 공연도 포함된 이 시즌은 일본 전역에서 12회의 콘서트로 마무리되었다.[23]
1974년-75년에 마젤은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남미와 중미를 순회했다.[24] 그는 또한 거슈윈의 ''포기와 베스''의 녹음을 지휘했는데, 이것은 오케스트라의 첫 번째 오페라 녹음이자 미국에서 데카의 첫 번째 오페라 녹음이었다.[25] 3년 후인 1978년 12월 10일, 그는 오케스트라의 60주년 기념 콘서트를 지휘했는데, 여기에는 빅터 허버트의 ''아메리칸 판타지''가 포함되었으며, 이 곡은 1918년 12월 11일 오케스트라의 데뷔 콘서트에서도 연주되었다.[26]
그러나 그 다음 가을, 마젤이 빈 국립 오페라의 감독직 최고 후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임명은 몇 년 후였지만, 마젤이 유럽으로 떠나기 전인 1981-82 시즌까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도록 준비가 되었다.[27] 클리블랜드에서 마젤의 임기 말년에, 음악 예술 협회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콘서트를 시작했는데, 이것은 연례 행사가 되었다.[28] 그리고 오케스트라는 1931년 개관 당시와 같은 프로그램으로 세버런스 홀 50주년 기념 행사를 주최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C단조 파사칼리아'', 찰스 마틴 뢰플러의 ''인보케이션'', 요하네스 브람스의 1번 교향곡, 그리고 베토벤의 ''미사 솔렘니스'' 중 일부였다.[29]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마젤의 마지막 시즌 동안, 그는 시즌 정기 공연 중 7회만 지휘했다. 1982년 5월 15일 세버런스 홀에서의 그의 마지막 공연에는 주세페 베르디의 ''레퀴엠''이 포함되었는데, 그는 다음 주에 이 작품을 링컨 센터, 카네기 홀, 그리고 예일 대학교의 울지 홀로 순회 공연했다.[30] 베르디의 레퀴엠은 1972년 그의 임기 시작 당시 뉴욕에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마젤의 데뷔 작품이었다.[30]
2. 4. 이후 경력
1977년, 로린 마젤은 파리의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여 1991년까지 재직했다.[31] 1982년부터 1984년까지는 빈 국립 오페라 총감독 겸 수석 지휘자로 활동했다. 1980년에는 빌리 보스코프스키의 뒤를 이어 빈 신년 음악회 지휘를 맡아 1986년까지 매년 이끌었으며, 이후 1994년, 1996년, 1999년, 2005년에도 빈 신년 음악회를 지휘했다.[43]
1984년부터 1988년까지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 자문을 맡았고, 1988년부터 1996년까지는 음악 감독을 역임했다. 1989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후임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수석 지휘자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선임되자 마젤은 베를린 필과의 관계를 단절했다.[31]
1993년부터 2002년까지 뮌헨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수석 지휘자를 역임했다. 2000년에는 20년 만에 뉴욕 필하모닉 객원 지휘로 돌아왔고,[32] 긍정적인 반응에 힘입어 2002년부터 쿠르트 마주어의 뒤를 이어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34][35] 2008년 2월 26일, 뉴욕 필하모닉의 역사적인 평양 공연을 지휘했으며, 북한과 미국의 국가,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신세계 교향곡), 조지 거슈윈의 ''파리의 미국인'', 한국 민요 "아리랑"을 연주했다. 2008/09 시즌을 끝으로 뉴욕 필하모닉을 떠났다.
2004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필하모닉 음악 감독이 되었다. 2006년 9월부터 2011년 3월까지는 발렌시아 레이나 소피아 예술궁전 상주 오케스트라인 발렌시아 공동체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을 맡았다. 2010년 3월, 2012/13 시즌부터 뮌헨 필하모닉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으나,[36] 2014년 건강 악화로 사임했다.[37]
마젤은 ''돈 조반니''(1979), ''카르멘''(1984), ''오텔로''(1986) 등 세 편의 오페라 영화 음악을 지휘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 ''1984''를 작곡하기도 했다.[38] 2005년에는 오스트리아 우표에 빈 신년 음악회를 지휘하는 모습으로 등장했다.[40]
2. 5. 뉴욕 필하모닉 음악 감독 시절과 그 이후
1984년 빈 국립 오페라극장 지휘자직에서 물러난 후, 마젤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감독 자리를 놓치는 큰 좌절을 겪었다. 마젤은 베를린 필과 30년 이상 관계를 맺어왔고, 차기 음악감독으로 유력시되었지만,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선임되었다. 이에 크게 실망한 마젤은 1999년까지 베를린 필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43]이후 마젤은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역임하며, 1994년부터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에 복귀했다. 또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음반을 발매하고 작곡 활동을 시작하는 등 활동 영역을 넓혔다. 환경 문제에 대한 제언, UN 기구를 위한 자선 콘서트 등 자선 활동도 활발히 펼쳐, "국제연합 친선대사" 칭호를 받았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으로부터 각국의 최고 훈장을 받기도 했다.
2002년, 마젤은 단원들의 만장일치로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에 취임하여 2008/09 시즌까지 재임했다. 2004년에는 알투로 토스카니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에 취임했고, 2006년에는 스페인 발렌시아의 소피아 여왕 예술관 음악감독을 겸임했다. 2005년에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을 바탕으로 한 자작 오페라 "1984년"을 런던 로열 오페라에서 초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2008년 2월 26일, 마젤은 북한 동평양대극장에서 뉴욕 필하모닉의 평양 공연을 지휘하여 화제가 되었다. 이는 미국 오케스트라 최초의 북한 공연이었다.
2012년, 마젤은 크리스티안 틸레만의 후임으로 뮌헨 필하모닉의 수석 지휘자에 취임했다. 2015년까지 3년 계약이었으나, 2014년 건강상의 이유로 임기 1년을 남기고 사임했다.
2014년 7월 13일, 마젤은 버지니아주 캐슬턴 자택에서 폐렴과 그 합병증으로 사망했다.[44]
2. 6. 작품 활동
- 리하르트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관현악 편곡 작품 '무언(無言)의 반지'
- 조지 오웰의 소설에 기반한 오페라 《1984》
- 모나코 환상곡 Op.8 (1993년)
-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위촉으로 작곡된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음악 Op.10
- 제임스 골웨이에게 헌정된 플루트와 관현악을 위한 음악 Op.11
-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음악 Op.12
-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 위촉 작품인 교향적 단편 ‘페어웰’ Op.14
- 베이퍼스 앤드 케이퍼스/아일랜드의 아홉 편의 시
- 진주, 소녀 (A Pearl, A Girl)
- 2막 오페라 『1984년』
- 『니벨룽의 반지』의 관현악 편곡 작품 '말 없는 반지'
2. 7. 죽음
2014년 7월 13일, 미국 버지니아주 캐슬턴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8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47]3. 내한 공연
(마지막 내한 공연)
